소설리스트

2화 (3/18)

2

유온은 의아할 뿐이었다. 그가 무엇에 대해 사과하는 건지. 아, 혹시 오늘 있었던 일일까. 그거라면 윤서경이 미안해할 필요가 없었다. 저는 그런 일로 윤서경에게 사과를 받을 만큼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유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과 안 하셔도 괜찮아요. 저는…….”

그러자 윤서경은 침울한 얼굴을 들었다. 그는 느리게 손을 뻗어 유온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들었다. 손이 마른 팔을 가늠하듯 쓸어 올리며 감쌌다. 마치 귀중한 것이라도 다루는 듯한 움직임에 유온은 당황했다.

다른 손이 얼굴을 향해 뻗어 왔다. 뺨에 손끝이 닿은 순간 저절로 눈이 가늘어졌다. 조금 전까지 제 안에 있었고, 노팅해서 넘칠 정도로 정액을 쏟아낸 상대의 손길이 황홀했다. 섹스하던 도중에 그랬던 것처럼 유온은 뺨을 그의 손에 기댔다.

윤서경이 짧은 숨을 내쉬었다. 조금씩 둘 사이의 공기에 열이 깃들었다. 이대로 있으면 다시 그와 몸을 나누게 될 것 같았다. 아직도 온몸이 아픈데도 거부감은 없었다. 느꼈던 열락은 달콤했다. 괴로움도 충분히 감수할 수 있을 만큼.

그러나 그 분위기는 금방 깨어졌다. 창밖에서 울린 긴 클랙슨 소리 때문이었다. 워낙 고층이라 지상의 소음도 잘 올라오지 않는데, 눈길에 차가 미끄러지기라도 한 건지 유독 요란해서 이곳까지 닿았다.

윤서경이 손을 거두고 손길을 대신하듯 물었다.

“아픈 곳은 없습니까?”

사실 아래도 배도 팔다리도, 머리만 빼면 온몸이 다 욱신거렸다. 하지만 유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윤서경은 곧 돌아갈 테니 그때 뭐든 약을 먹으면 될 것 같았다.

“조금 더 자는 게…….”

윤서경이 말한 순간 유온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의 얼굴에 의아함이 번졌다. 그가 이상하게 생각하리라는 걸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몸은 깨끗했지만 아직 안쪽에 정액이 남아 있었는지, 미지근한 액체가 허벅지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당황한 유온은 두리번거리다가 무작정 거실 욕실로 들어갔다. 거실 욕실은 문이 곧바로 보이는 게 아니라 벽 안쪽에 숨겨져 있었다. 그걸 끌어당겨 닫을 생각도 못 한 채 한 걸음 들어갔다가 멈춰 섰다. 울컥거리며 계속 다리가 젖어 들었다.

생각보다 몸속에 스며든 양이 얼마 되지 않는 건지, 아니면 들어가고도 이렇게 남을 만큼 많이 쏟아진 건지. 그러다 곧 정액이 흐르는 것 이상의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 맞아……, 안에…….’

노팅을 했다. 유온의 당혹감이 순간에 불안함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아직 결혼식도 하지 않았고, 윤서경이 아이를 좋아할 것 같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말할 것도 없었다. 유온은 윤서경이 있다는 것도 잠시 잊고 걸음을 돌려 탈의실로 갔다. 약 선반을 뒤지는 손길이 조급했다.

초조한 마음에 약통이 툭툭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원하던 약을 찾아낸 유온은 그것을 손바닥에 쏟았다. 다급하게 세면대로 가서 생수 병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뻗어 온 손이 병을 쥔 유온의 손을 그대로 감쌌다.

등을 윤서경의 가슴이 덮었다. 다른 손을 세면대 가장자리에 얹어 유온을 품속에 가두듯 한 채로 그가 물었다.

“무슨 약입니까?”

“아……, 피, 피임약이요, 사후피임약…….” 

고개를 들자 거울에 자신과 윤서경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윤서경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유온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그걸 왜 먹어요. 그리고, 왜 가지고 있습니까?”

“그야, 임신하면 안 되니까……. 약은 선생님, 주치의 선생님이 주셨어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먹으라고.”

“무슨 일?”

유온은 거울 속 윤서경을 보지 않고 시선을 떨어뜨렸다. 물 한 방을 묻지 않은 세면대가 보였다. 주치의가 이 약을 줄 때도 ‘무슨 일이 있으면’이라고밖에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먹을 일이 없었고 앞으로도 어지간하면 먹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적어도 이 약은 안 먹는 게 낫겠습니다.”

윤서경의 손이 유온의 손을 가만히 펼치며 약을 빼앗아 갔다. 그는 한 손으로 능숙하게 약 뚜껑을 열고는 내용물을 쏟았다. 유온의 눈앞에서 흰 알약이 와르르 쏟아져 일부는 세면대며 바닥으로 떨어지고, 일부는 윤서경의 손바닥에 남았다. 윤서경은 손에 남은 알약을 그대로 세게 움켜쥐었다.

손으로 쥐었을 뿐인데 약은 너무 쉽게 뭉개지듯 부서졌다. 가루가 된 약도 세면대로 마저 떨어지고, 윤서경은 물을 틀었다. 뜨거운 물이 흘러나오면서 유온이 이곳에 오고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세면대가 물에 젖었다.

흐르는 물에 약이 모양을 잃으며 녹아내린다. 알약 표면의 기호도, 모양도, 전부 흐물흐물하게 무너져 물살을 따라서 배수구로 완전히 사라졌다. 유온은 멍하니 그것을 보고 있었다.

유온에게 물이 튀지 않도록 세면대에서 조금 떨어뜨려 놨던 윤서경은 물을 잠그고 유온을 대리석 상판 위에 앉혔다.

차가운 상판이 하체에 닿자 몸이 움찔했다. 축축하게 젖은 옷이 아래에 스쳐 묘한 기분도 들었다. 윤서경이 고개를 숙여 유온의 다리를 보았다. 발목에서 한 뼘 정도 올라오는 길이의 바지 아래로 가늘게 흐른 정액이 반쯤 말라붙어 있었다.

윤서경은 유온을 안아 들고 욕조로 향했다. 물을 튼 뒤 욕조 가장자리에 앉은 그는 유온의 몸의 방향을 바꾸어 안고 헐렁한 바지를 내렸다. 여기서 다시 하려는 줄 알고 일순 몸을 굳히자, 윤서경은 유온의 등을 감싸 끌어안고 뺨에 입 맞췄다.

느리게 내려간 손이 아직 열을 품은 채 부은 아래를 더듬었다. 근처를 조금씩 만지자 그곳은 금세 다시 젖어 들기 시작했다. 윤서경은 연한 살을 누르고 안으로 들어왔다.

다른 것은 하지 않았다. 내벽을 조심스레 긁으며 안에 아직 고인 정액을 긁어낼 뿐이었다. 벌어진 틈에서 덩어리진 정액이 떨어져 유온의 다리와 윤서경의 옷을 적셨다. 고급스러운 정장 하의가 지저분해지는 걸 보며 유온이 버둥거렸지만, 윤서경은 그를 꽉 끌어안을 뿐이었다.

“저기, 서경 씨……, 저…….”

유온은 안절부절못했다. 세면대에서 다 녹아 버린 약이 신경 쓰였다. 그게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덜컥 임신했다고 하면 주변의 그 누구도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윤서경은 왜 이렇게 반응할까, 그것도 신경 쓰였다. 아직 러트가 끝나지 않아서일지도 몰랐다.

이성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묘했다. 지나칠 정도로 다정하다. 그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상대가 자신이라는 게 문제였다. 유온은 입을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워진 윤서경의 옷을 계속 신경 썼다. 정액과 제 안에서 흘러나온 애액이 뒤엉켜 어두운 색 정장이 희멀겋게 얼룩져 있었다.

아직 약효가 듣는 시간은 여유가 있었다. 자신이 그 시간 안에 피임약을 구하러 여기서 나갈 수 없을 뿐. 그렇다면…… 유온은 약 중에서 피임약과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가늠해 보았다. 몇 가지 종류를 섞여 먹으면 될 것 같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물이 가득 찼다. 욕실의 조명 때문에 어두운 유리벽에 물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이제 안에 남은 정액은 없었다. 하지만 윤서경의 손은 느른하게 안을 만지고 있었다. 다른 손이 윗옷의 단추를 하나씩 풀고 옷을 유온의 몸에서 끌어내렸다. 유온은 머뭇거리다가 그를 마주 끌어안고, 어설프게 허벅지를 움직였다. 윤서경이 멈칫했다.

멈칫했을 뿐이었다. 윤서경은 거기서 유온의 아래를 벌리며 성기를 밀어 넣는 대신, 입을 맞췄다. 연인 사이에 하는 것처럼 열렬한 키스가 이어졌다.

가까이 포개어진 입술에서 젖은 소리가 울렸다. 유온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자신이 어설퍼서 윤서경이 식어 버린 것 같았다. 그 부끄러움을 키스의 열기로 감출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괜한 짓을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입맞춤만으로도 몸은 달아올랐다. 아래가 젖는 감각이 전에 없이 선명했다. 더운 숨을 내뱉으며 유온은 윤서경이 그가 원하는 행동을 하기만 기다렸다. 먼저 움직일 용기 같은 건 없었다.

“……으, 음…….”

목에서 짧게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윤서경이 또 멈칫하더니 입술을 떼고 유온을 안아 들었다. 발끝부터 따뜻한 물이 닿았다. 어느새 유온은 크고 둥그런 욕조 안에 앉아 있었다.

“서경 씨…….”

“네.”

“아, 대, 대답해 달라는 게 아니라.”

“대답을 해야죠.”

“…….”

차분한 목소리는 맞는 말을 했으나 유온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멍해진 사이 윤서경은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며 일어났다. 눈으로 따라가자 그는 나가다 말고 돌아서서 잠시 유온을 보더니, 욕실에서 탈의실로 가는 문을 슥 당겨 닫았다.

분리된 공간에 혼자 남겨진 유온은 닫힌 문을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적당히 따뜻한 물은 결리고 아프던 몸을 조금씩 이완시켰다.

유온이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물이 출렁거렸다. 조금씩 흔들리는 물결 속에서 유온은 발끝을 가만히 모은 채 바라보았다. 팔다리에 윤서경의 손에 잡혔던 멍과 입술이 닿았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앞으로……, 열 시간 정도는 괜찮을까. 적어도 그 안에 윤서경은 하고 싶은 걸 마치고 나가거나 잠들거나 할 터였다. 자신만 깨어 있으면 된다.

유온은 벌써부터 신경을 곤두세웠다. 아까는 정신을 놓고 있어서 까무룩 잠들었지만 잠들지 말아야 할 때 버티는 건 익숙했다. 아프거나 힘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섹스를 또, 한다면 힘들겠지만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얌전히 있어야 했다. 유온은 다리를 끌어안은 채 물그림자만 바라보았다. 유리벽 너머의 야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얼마 후 욕실 문이 열리고 윤서경이 보였다. 그는 정장보단 조금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은 뒤였다.

“…….”

욕실의 미닫이문을 잡고 선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유온을 바라보다가, 유온이 더는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이리저리 피하며 허둥거리기 시작했을 때 그 자리를 떠났다. 완전히 방으로 들어가거나 한 건 아니었다. 그는 거실 소파에 앉았다. 유온의 모습이 보이진 않지만, 유온이 욕조에서 나오면 바로 알 수 있는 위치였다.

윤서경이 거기서 움직이지 않으리라는 걸 안 유온은 조심조심 욕조에서 일어났다.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었으나 신경이 쓰여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벽에 걸린 가운을 끌어당겨 걸치고 찰박거리며 욕조 아래의 푹신한 타월 매트를 밟고 서자 윤서경이 일어나 다가왔다. 손에 갈아입을 옷을 들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해 주지 않아도 되는데, 조금 당황해서 옷을 든 손을 흘끗 보았다.

“조금 더 있지 그래요.”

유온은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섹스를 한 직후라서인지, 그가 오늘따라 이상하게 보여서인지 유독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유온은 자신을 보고 있는 눈동자가 물결처럼 일렁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유온의 거절에 윤서경은 더 말하지 않고 옷을 건넸다. 유온은 받으면 안 되는 대단한 물건이라도 받는 것처럼 두 손을 내밀어 받고, 구석으로 꾸물꾸물 기어들어 가서 입었다. 말없이 그를 지켜보던 윤서경은 유온이 어색하게 든 가운을 가져가 욕조에 대강 걸쳐 두고 유온의 손을 잡은 채 욕실에서 빠져나왔다.

러트가 온 알파는 원래 이런 건가? 유온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윤서경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 그의 침실로 들어갔다. 침실에 왔으니 또 섹스를 하는 걸까 생각했는데 윤서경은 유온을 제 옆에 눕히고는 그대로 끌어안았다. 자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윤서경의 팔을 벤 채론 자는 건 고사하고 움직이는 일조차 할 수 없었다. 숨 쉬는 것마저 어렵다. 차라리 추운 한밤중에 맨발로 서서 버티는 게 나았다. 이대로라면 잠들지 않는 건 쉬울 테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피곤했는지 윤서경의 숨소리는 금방 고르게 가라앉았다. 힘이 들어간 몸으로 조금만 더 버티자고 생각하며 숫자를 셌다.

그리고 잠은 안 들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한 게 무색하게도, 100을 세기도 전에 깜빡 잠들었다.

퍼뜩 깨어난 유온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언제 잠든 걸까. 창밖이 어두운 걸 보면 그나마 오래 잠들진 않은 듯했다. 여전히 코앞에 있는 윤서경의 가슴은 느리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유온은 눈길이라도 걷는 것처럼 살금살금 움직여 윤서경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침실도 거실도 맨발로 걷는 게 춥지 않을 만큼 난방이 돌아가고 있었다. 이 정도면 윤서경이 덥지 않을까. 일단 약을 먹은 후에 온도를 낮춰야겠다고 생각했다.

유온은 약 선반 앞에 서서 약을 골랐다. 페로몬 조절이며 히트 사이클에 관련된 약을 이것저것 같이 먹으면 확실히 피임에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일반 피임약보다 몸에 안 좋을 뿐이다. 약통 몇 개를 앞으로 끌어내고 하나씩, 한 번에 몇 알을 복용해야 하는지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커다란 몸이 뒤에서부터 유온을 덮었다. 굵은 팔이 배 위에 감기고, 다른 손은 유온의 손을 감싸 손에 쥐고 있던 약병을 떨어뜨렸다. 발등 옆으로 툭 떨어진 플라스틱 병이 굴러갔다.

“먹지 말라니까…….”

알파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딱딱하게 굳은 유온은 대답은커녕 작게 움직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그가 하지 말라고 한 것을 지키지 않고 멋대로 행동했다. 이유건이었다면 유온을 질질 끌고 가 세면대에 물을 받고 거기에 얼굴을 처박았을 것이다. 윤서경은 그런 난폭한 짓을 한 적이 아직 없지만 습관적으로 몸이 떨렸다.

“노팅한 게 신경 쓰이는 거라면 내일 병원에 가죠. 약보다 그쪽이 훨씬 몸에 부담이 덜 갈 겁니다. 시간도 여유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이 약은…….”

윤서경의 손이 유온의 손을 놓고 더 앞으로 뻗어 가까이에 있는 약을 죄다 쓸어냈다. 그 손에 밀쳐진 약병은 힘없이 떠밀려서 선반 아래로 와르르 떨어졌다. 약은 뚜껑이 열려 내용물이 쏟아지거나 멀리 세면대 아래나 욕조까지도 굴러갔다.

“뭐가 들어 있는지도 모르고.”

“…….”

나지막한 말에 유온은 아직도 선반에 잔뜩 남아 있는 약통을 보았다. 양만 많지 의사에게 처방을 받은 평범한 시판 약이었다. 형질과 관련된 약만 아직 국내에 유통이 안 되는 외국 제품이 몇 개 있을 뿐이었다.

윤서경의 눈이 선반 위와 바닥을 가볍게 훑더니, 뒤에서 유온을 안은 채 뺨에 입을 맞췄다. 연달아 입을 맞추면서 유온을 약 선반에서 떼어내듯 뒷걸음질해 멀어졌다. 그가 조용히 속삭였다.

“당신이 싫다고 하는 건 아무것도 안 할 겁니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자죠.”

유온은 한층 더 안절부절못했다. 윤서경의 태도는 아무래도 지나치게 다정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아니,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몫이 아닌 걸 받고 있다는 생각에 불편해서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윤서경은 어쩔 줄 모르는 유온을 집어 들듯 안아서 침실로 돌아갔다.

* * *

눈이 부셔서 깨어나자 아침이었다. 커다란 창에는 반투명한 커튼만 쳐진 채였다. 유온은 아직 잠이 덜 깬 얼굴로 커다란 창문을 보았다. 침대도 방 자체도 유온이 원래 아는 곳보다 넓었다. 천천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눈이 커졌다. 윤서경의 침실이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유온은 침대 한가운데서 가장자리로 몸을 끌어당기다시피 해 내려왔다. 거실로 나갈 작정이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몸에 힘이 쭉 빠지더니 그대로 주저앉아야 했다.

“……?”

앉으며 무심코 사이드테이블에 짚은 팔도, 두 다리도 힘들거나 긴장했을 때처럼 떨렸다. 그리고 배 속과 아래가 아팠다. 이유를 생각할 것도 없이 유온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몸은 더 씻을 게 없을 정도로 깨끗했다. 침대도 마찬가지였다. 어젯밤 윤서경은 유온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와 똑같이 끌어안은 채로 누웠다. 대신 이번엔 먼저 잠들지 않았다. 유온이 잠들 때까지 유온의 몸에 체향을 쏟아내기만 했다. 전신을 나른하게 만들던 그것은 충동에 흔들리는 알파의 난폭한 기운이 아니었다. 윤서경의 러트는 이르게 끝난 듯했다.

방 안은 따뜻했지만 언제까지고 바닥에 앉아 있을 순 없었다. 유온은 하다못해 침대로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사이드테이블에 짚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다 자연히 간 시선이 메모지에 붙잡혔다.

[출근합니다.]

유온의 입이 벌어졌다. 단정하고 말끔한 글씨체는 윤서경의 것이었다. 이곳에는 청소 때문에 들어오는 직원들 말고는 유온과 윤서경밖에 없었다. 직원에게…… 남긴 걸까?

설마 나한테…….

유온은 메모를 한참 쳐다보다가 건드리지는 못하고 꾸물대며 침대 위로 다시 올라갔다. 아직 자신의 체온이 남은 이불 속은 따뜻했다. 베개에 머리를 푹 묻은 채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찬찬히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머릿속에 마지막으로 남는 건 의아함과 혼란이었다.

이리저리 돌아누우며 한숨만 푹푹 쉬던 유온은 침대 언저리에서 깜빡거리는 불빛에 그리로 눈을 돌렸다. 검은색 전화기가 소리도 없이 점멸하고 있었다. 다시 침대 가장자리로 다가가서 수화기를 들자 목소리가 익숙한 호텔 직원이었다. 그는 상냥하게 아침 인사를 하며 지금 식사를 가지고 가도 될지 물었다.

“음, 지금은…….”

조금만 더 누워 있고 싶었다. 그러나 윤서경이 지시한 일일 거라는 생각과 이 사람에게 두 번 연락하는 수고를 안겨야 한다는 부담감이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유온이 조용해지자 직원은 다시 물었다.

―그럼 거실 식탁에 올려두어도 될까요? 금방 식지 않으니 천천히 드시면 됩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반가운 제안이었다. 얼른 답한 뒤 유온은 마음을 놓고 다시 제가 누워 있었던 자리로 돌아가려다 우선 커튼을 열었다. 유온이 눕는 사이 커튼이 낮은 기계음을 내며 열렸다.

창밖으로 건물 옥상에 눈이 쌓여 남아 있는 게 보였다. 펑펑 쏟아지던 함박눈은 새벽에야 그친 모양이었다. 눈이 희게 얼어 버린 걸 보니 지금도 밖은 추운 듯했다. 이곳은 미끄러운 땅에서 한참 멀고, 추위로부터도 안전했다. 멍하니 창밖을 보던 유온은 다시 어제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정말 이상한 일투성이였다. 윤서경이 지금 여기에 없는 게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러트와, 어딜 다녀왔는지 찬 바람을 몰고 돌아온 윤서경의 묘한 태도, 그 후의 일. 머리가 복잡했다. 하지만 윤서경이 제게 주던 다정한 눈길, 손, 포옹은 몇 번이고 가만히 되새기고 싶을 만큼 좋았다.

그는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변덕이었을까……? 어제 낮에, 그제는 무슨 일이 있었더라.

“…….”

유온은 두 눈을 둥글게 떴다. 어제 낮에는 가족들을 만났다. 윤서경과의 결혼을 두고 심한 꾸중을 들었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 유온을 보며 온가족이 싸늘한 얼굴을 했다. 평소였다면 그 일은 며칠간 유온을 괴롭히고, 불안에 시달려 숨을 못 쉬게 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을 조금 전까지 잊고 있었다. 그 상황을 다시 떠올려도 그저 ‘있었던 일’로만 여겨졌다.

부모님과 형들을 생각해도 가슴이 무거워지지 않기는 처음이었다. 한동안 혼나지 않고 평화가 이어질 때도, 가족은 그저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 유온을 긴장하게 만드는 대상이었다.

윤서경과 파혼하라고 명령하던 이유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때 유온에게 허락된 유일한 반응은 고분고분 머리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이유건의 말에 버릇없이 반항해 본 적은 몇 번 없었다. 그나마 괜찮았던 결과는 창고에 끌려들어가 오래도록 혼나는 거였다. 그리고 최악의 결과는…….

‘내일까지 내다 버려.’

고양이를 키울 때였다. 겨우 허락을 받고 데리고 들어와 제 방 밖으로는 나가지도 못하게 하며 키웠다. 용돈을 쪼개서 사료도 사고 간식도 샀다. 방에서 냄새가 날까 봐 고양이가 싫어하는 걸 알면서 목욕도 자주 시켰다.

이유건은 한동안 참아 주었다. 유온이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몇 달 정도 키웠을 때, 방에 들어온 이유건에게 고양이가 털을 바짝 세우며 날카로운 소리를 질렀다. 이유건은 곧바로 고양이를 버리라고 했다.

그때 안 버리면 안 되는지, 계속 키우면 안 될지, 다신 이런 일 없게 하겠다며 애원했다. 이유건은 불쾌한 얼굴로 나가 버렸다. 내일까지 내다 버리라는 말에도 고양이를 놓지 못해서 계속 끌어안고 있었다.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는 유온에게서 고양이를 낚아챘다.

‘이유온, 잘 봐. 너 때문에 이게 어떻게 되는지.’

그때 이유건이 시키는 대로 했다면, 적어도 고양이가 죽진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그때와 상황이 비슷했다. 유온은 형과 가족들의 꾸중을 감수하면서까지 윤서경과 함께 있고 싶었다. 고양이처럼 윤서경도 해코지를 당하게 될까.

윤서경은 이유건보다 까마득히 높은 지위에 있었고, 고양이만큼 무력하게 당하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유온의 안에서 이유건은 말 그대로 절대자였다.

‘서경 씨한테 또 폐를 끼치면 어쩌지…….’

최소한 귀찮고 성가시게 구는 정도는 충분히 할 테다.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불을 코끝까지 끌어당겨 덮으며 유온은 생각의 바다를 가라앉을 듯 불안하게 부유했다.

그러다 어젯밤 자신에게 사과하던 윤서경의 모습에 닿았다. 순간 이유건에 대한 생각이 녹아 버리고, 그 자리를 온통 윤서경이 채웠다. 이유건과 가족은 유온이 인식도 못하는 사이 사고의 뒷면으로 떠밀려갔다.

윤서경은 왜 사과를 했을까? 그 이상한 분위기는 대체 뭐였을까. 러트에 관계를 한 것 때문에?

윤서경은 역시 정중한 사람이었다. 그 자리에서 곧바로 말했어야 했다.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는 모호한 말이 아니라, 자신에겐 사과 같은 게 필요하지 않다고. 후회가 되었다. 자신은 윤서경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을 들을 주제가 못 된다. 게다가 이성을 반쯤 잃은 윤서경을 침대로 끌어들인 건 자신이다.

‘혹시 오늘 저녁에 돌아올까. 오면 사과해야 해.’

얼마쯤 더 누워 있던 유온은 힘겹게 일어났다. 후들후들 떨리던 다리가 이제 움직일 수는 있는 정도가 되었다. 온 사방에 가득한 윤서경의 체향을 느끼며 거실로 나왔다. 식탁 위에 상이 차려져 있었다. 도자기 웜 플레이트에 담긴 죽이었다.

아직도 갓 만든 것처럼 따뜻한 음식을 먹은 뒤 거실 욕실에서 몸을 씻었다. 식사와 뜨거운 물 때문인지 몸 상태가 좀 더 나아졌다. 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며 나오는데 탈의실이 뭔가 허전했다.

“어…….”

고개를 돌리자 선반에 가득 쌓여 있던 약통이 전부 사라져 있었다. 분명 어젯밤에도 보았다. 갑자기 사라져 버린 약에 유온은 텅 빈 선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뒤늦게 둘러보니 어제 바닥이며 세면대에 떨어졌던 약도 작은 조각 하나 보이지 않았다.

만약 집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으면 겁에 질려 당장 이유건에게 달려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 비어 있는 선반을 보자 신기하게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어떤, 몸을 누르고 있던 안 좋은 것이 깨끗하게 사라진 기분이다.

약의 행방을 생각하며 물기를 닦은 발에 푹신한 슬리퍼를 신고 다시 거실로 나왔을 때였다. 찰칵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식사를 치우거나 뭘 가져다 두러 온 호텔 직원인가 했는데, 뜻밖에도 윤서경이 들어왔다.

그는 간밤처럼 피폐한 얼굴을 하고 있진 않았다. 거실에 유온이 서 있는 걸 보고 멈칫 반응하더니 가까이 다가왔을 뿐이다. 러트가 완전히 끝난 건 분명했다. 가까이 온 그를 보며 우물쭈물한 유온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저기, 서경 씨, 죄송해요.”

“…….”

윤서경이 말없이 눈썹을 치켜떴다.

“어제는 제가…….”

“잊어버린 것 같은데.”

“네……?”

“죄송하다는 말 한 번 할 때마다 직원과 5분 동안 대화하기로 했습니다. 마침 저것도 치워야 하니, 부를까요.”

……잊고 있었다. 5분이나 남과 대화하라니 막막했다. 유온의 얼굴이 희어지자 윤서경이 말했다.

“하지만 왜 사과한 건지는 묻겠습니다. 당신 생각 흐름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건지 알아야겠어요.”

“음, 그게, 그냥. 러트인데 제가 붙잡았고, 또 사과까지 하시게 했고…….”

윤서경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제가 뭔가 잘못 말했다는 생각에 유온은 곧바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무엇에 사과하는 건지 사실은 스스로도 잘 몰랐다. 습관적으로 할 뿐. 유온의 사고는 이 정도가 한계였다. 어색하거나 이상한 일이 있으면 우선 사과한다. 사과하면 덜 혼나고 덜 맞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죄송하다는 말 안 해도 됩니다. 뭐든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해요.”

“…….”

사실, 원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트러블이 생기면 사과하는 게 심적으로 훨씬 편했다.

윤서경은 시계를 한 번 확인하더니 말했다.

“옷 갈아입어요. 병원에 갈 겁니다.”

“병원이요?”

묻고 나서 유온은 어젯밤 피임약으로 윤서경과 몇 마디가 오갔었다는 걸 떠올렸다. 윤서경이 아직 시간 여유가 있다고 말했으니 괜찮을 것이다. 유온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추울 것 같아서 두툼한 점퍼를 걸치고 나오자 윤서경은 그런 유온을 부담스러울 정도로 빤히 쳐다보았다.

“이, 이상한가요……? 지금 갈아입을…….”

“안 이상합니다. 하나도.”

윤서경은 푹신해진 유온의 팔을 잡고 가볍게 끌며 방을 빠져나갔다.

* * *

윤서경이 처음부터 유온에게 무관심했던 건 아니었다. 결혼을 하고 얼마간 그는 충분히 배우자로서 책임을 다했다. 그러나 아무리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라도 수없이 병원에 불려 나오고, 그때마다 아무 일 아니었다는 말을 듣는다면 지긋지긋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씩 들이닥친 형은 유온의 상태를 살피고는, 유온이 아프지 않다고 하는데도 병원에 끌고 가곤 했다. 윤서경에게 연락하려 하는 것을 제가 직접 하겠다며 몰래 엉뚱한 번호로 전화를 걸고, 연락이 안 된다고 얼버무린 것도 몇 번이었다.

병실 밖에서 한참 이유건과 이야기를 하고 들어온 윤서경의 표정이 지금도 선명했다. 그는 아픈 곳도 없이 침대에 누운 자신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 이 상황이 그때와 겹쳐질 수밖에 없었다. 윤서경과 함께 병원에 있으니까. 다만 기억과 다른 건 유온이 진료실에 있고, 윤서경은 자의로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병원에서는 우선 임신 여부를 확인했다. 간단한 검사로 곧바로 결과가 나왔다. 임신이면 곧바로 시술을 하려 했지만,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년의 의사는 어두운 얼굴을 했다.

“몸 상태가 꽤 안 좋으시군요. 아마 당분간은 노팅해도 임신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

유온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두드러지는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몸이 전반적으로 많이 약해졌고, 스트레스가 심한 상황에 오래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임신할 여력이 없는 거죠. 이 정도면 히트 사이클도 거의 오지 않을 것 같은데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히트 사이클은 드문드문 오다가 요샌 그냥 거르는 달이 더 많아졌다. 사실 히트 사이클이 오지 않기를 유온 자신도 늘 간절히 바랐다. 그럴 때 특별히 같이 있을 사람이 없는데다, 유온은 집에서 열에 들뜬 시기를 보내는 게 불편했다. 이유건이 집에 있기 때문이었다. 형이라 해도 그는 한창 젊은 나이의 알파였다.

“복용하는 약이 꽤 많다고 들었습니다. 목록을 좀 살펴보았는데, 성분이나 효과가 중복되는 약물이 꽤 많더군요. 몇 가지 처방을 드릴 건데, 복약 지도를 참고해서 불필요한 약 복용은 자제하셔야 합니다.”

“저, 그럼……, 몸이 아프면요……?”

그러자 의사는 유온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유온이 익숙한 주치의와는 퍽 인상이 달랐다. 그는 매번 유온을 차갑게 쳐다보거나 혼내기만 했다.

“아플 때 먹으라고 약이 있는 거긴 하죠. 하지만 지나치면 오히려 건강을 해쳐요. 대신 설명에 따라서 한두 알만 먹어 보세요. 충분히 효과가 있을 겁니다.”

의사가 컴퓨터에 무언가를 입력했다. 한두 알로 정말 들을까? 가끔 찾아오는 몸 이곳저곳의 통증은 정말 끔찍할 정도였다. 약이 적어 안 듣기라도 하면 그걸 고스란히 견뎌야 했다.

“약효가 돌 때까지 가만히 누워서 기다려 보세요. 여러 알 먹었을 때와 작용 시간이나 효과는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배우자 되실 분의 체향을 많이 맡으면 심신 양쪽으로 도움이 될 거예요.”

“네…….”

힘없이 대답하자 의사는 격려라도 하듯이 한 번 더 웃음을 지었다.

“그럼 이제 보호자님과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대기실에서 잠시만 기다리시겠어요?”

유온은 고개를 끄덕인 뒤 대기실로 나갔다. 윤서경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커다란 몸을 본 유온은 눈을 깜빡였다. 보호자.

자신의 보호자이고, 배우자인 윤서경.

그는 유온이 나오는 걸 보더니 대기실의 의자를 가리키고 안으로 들어갔다. 푹신한 의자에 앉은 채 유온은 진료실 문을 바라보았다.

의사는 윤서경의 집안사람을 전담하는 의료진 중 한 명이라 했다. 부경 병원에 와서 전용 출입구로 들어와, 대기실도 호텔처럼 화려한 진료실에 왔다. 유온도 상당한 부잣집에서 자랐는데 윤서경은 정말 사는 세계가 달랐다.

얌전히 앉아서 윤서경을 기다리기를 한참, 진료실 문이 열렸다. 의사가 대기실까지 나와 두 사람을 배웅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약물 복용량은 꼭 지켜 주시고요.”

윤서경이 유온 대신 짧게 대답하고 유온의 등을 가볍게 감쌌다. 곧바로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걸음에 유온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 약을 아직…….”

“방으로 가지고 올 겁니다.”

그렇게 말한 윤서경이 조수석 문을 열었다. 유온은 우물쭈물하면서도 얼른 조수석에 올라탔다. 병원에 오는 길에도 윤서경이 직접 운전을 했다. 이렇게 문을 열어 주기도 했다. 윤서경의 이런 모습이 모든 기억을 통틀어서 처음이었기에 유온은 제대로 반응할 수 없었다.

윤서경은 바쁜 사람이었다. 번거로운 걸 싫어하기도 했다. 지금 제게 이렇게 신경을 써 주는 것이 너무 고마웠다. 하지만 그만큼, 신경을 많이 써 주는 만큼 더 빨리 질리고 귀찮아질 것이다.

고민하는 유온을 태운 채 차는 복잡한 도로를 달렸다. 차에 탄 후로 윤서경은 말이 없었다. 운전석은 물론 룸미러도 볼 수 없어서 제 손만 쳐다보던 유온이 창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추운 날씨인데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의아해서 쳐다보니 전자 기기를 파는 매장이었다. 뭘 사려고 이 날씨에 바깥에서 저렇게 기다릴까 생각을 하다가, 오늘 꽤 유명한 게임 소프트가 발매되는 날이었다는 걸 떠올렸다.

사실은 유온이 좋아하는 게임 시리즈였다. 예전에는 이유건이 한정판 게임기와 소프트를 둘 다 구해서 유온에게 안겨 주었다. 구하기 힘든 물건 같아서 혼자서 휴대폰으로 조금 검색해 보다가 포기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형이 가져다주어 무척 기뻤던 기억이 났다.

줄을 선 사람들은 눈도 덜 녹은 추위 속에 있는데도 즐거워 보였다. 물끄러미 그들을 보고 있는데 신호가 바뀌고 차가 출발했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전자 기기 매장과 줄 선 사람들이 뒤로 멀어졌다.

어느새 차창에 손까지 대며 구경하고 있었다. 유온은 손가락 끝이 유리에 닿아 생긴 작은 자국을 슥슥 문질러서 지웠다. 물기가 조금 묻은 손을 옷으로 닦으며 고개를 든 순간 무심코 룸미러로 시선이 갔고, 그 안에서 윤서경과 눈이 마주쳤다.

유온은 놀라서 헛숨까지 삼켰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당황하는 유온을 보며 윤서경은 말없이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놀라서 쿵쿵 뛰는 가슴을 누른 유온은 이게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입 안으로 몇 번 말을 중얼거리며 연습한 유온이 입을 열었다.

“저기, 서경 씨.”

“네.”

“저, 저한테, 너무……, 신경 써 주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무슨 말입니까?”

차가 느리게 커브를 돌았다. 멀리 호텔 건물이 보이고 있었다.

“바쁘시잖아요, 귀찮으실 거고, 저는……. 저는, 그러니까…….”

뒤로 갈수록 목소리는 작아졌다. 말하다 보니 윤서경이 제게 큰 정성이라도 들여 준다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폐를 끼치고 있는 건 맞지만, 이렇게 요청하는 것 역시 주제넘은 일인 걸 입을 연 후에야 깨달았다.

얼굴이 점점 발개졌다. 어느새 차가 멈췄고 주위는 어두웠다. 주차장에 도착한 뒤였다. 윤서경은 핸들에 손을 얹은 채 유온을 쳐다보았다.

“이유온 씨.”

“네…….”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

똑같이 되돌아온 말에 유온은 눈을 깜빡였다. 그게 자신이 윤서경에게 말한 것과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을 땐 다시 시선을 손 근처로 떨어뜨려야 했다. 역시 윤서경은 좋은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을 냉랭하게 만들고야 만 자신은 대체……. 익숙한 자기혐오가 한층 크게 올라왔다.

“여긴 추우니 일단 올라갑시다.”

유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밀어 열었다. 차 안에선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넓게 트이고 외부의 공기가 곧바로 들어오는 지하 주차장은 정말 추웠다. 운전석에서 나와 어느 틈엔지 바로 뒤에 선 윤서경에게 재촉이라도 받는 것처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머릿속이 계속 복잡했다. 이유온은 무서웠다. 윤서경에게 무엇이든 받으면 받을수록 기쁜 마음이 들지만 순수하게 그 기쁨을 계속 안고 있을 수가 없었다. 언젠가 이유연이 제게 말한 적이 있었다.

‘넌 참 불쌍해.’

웃음기가 없는 목소리였다. 얼마나 자신이 답답하고 모자라면 그가 불쌍하다는 말까지 하는지, 그날은 그 말을 계속 상기하고 생각하느라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어느새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윤서경은 방까지 따라 들어왔다. 옷을 걸어두고 손을 씻으러 욕실에 들어간 유온은 문득 거울 속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요 며칠 잘 먹고 푹 쉬어서 안색이 나아졌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못했다. 여전히 음울하고 가칠한 얼굴이다.

자신이 불쌍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눈앞의 거울 속에 이유연이 말하던 그 ‘불쌍함’이 있는 것 같았다. 유온은 수도꼭지를 열고 쏟아지는 미지근한 물에 천천히 손을 씻었다.

고개만 들면 거울 속의 자신이 보일 터였다.

온몸이 으스스해졌다. 머리가 무거워지는 기분이다. 유온은 이게 어떤 전조인지 잘 알았다. 숨을 크게 쉬고 눈을 깜빡여 보았지만, 폐부로 한껏 들어온 공기가 오히려 찬 바람처럼 몸속을 에이는 것 같았다.

가슴이 짓눌리는 듯한 괴로움은 점점 심해지고 심장이 피부를 뚫고 나올 듯 거세게 뛰었다. 눈앞에서 흐르는 물줄기도 제 손도 거울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야가 극단적으로 좁아졌다.

이것만은 약 없이 견딜 수 없었다. 아픈 건 참을 수 있지만 이건 아니었다. 이대로 당장 쓰러져 죽게 되리라는 상상이 뇌리를 막막하게 지배했다. 게다가 유온은 한 번 죽음을 경험했다. 그 순간과 지금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릎에 희미한 아픔이 느껴졌다. 바닥에 주저앉아 버린 듯했다. 죽음의 공포는 모든 걸 마비시켰다. 뺨이 굳어 간헐적으로 경련했다.

윤서경과 의사가 약을 먹지 말라고 했지만 너무 괴로웠다. 방으로 가지고 온다던 약이 지금쯤 도착했을까. 하지만 지금 당장 손에 약이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약을 먹어도 듣기까지 또 시간이 걸릴 텐데. 헐떡이며 욕실 바닥을 기던 유온의 몸을 누군가가 들어 끌어안았다.

향수병을 엎은 것처럼 강렬하게 체향이 퍼졌다. 유온에게 익숙한, 유온이 좋아하는 향이었다. 자신을 끌어안은 건 윤서경이었다.

믿기 어려운 사실에 눈이 둥글어졌다. 하지만 이어서 윤서경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저으려 했으나 몸은 그 정도의 말조차 듣지 않았고, 윤서경은 유온을 품속에 완전히 가두어 안은 채 체향을 쏟아냈다.

놀랍게도 점점 몸이 편해졌다. 약 몇 알을 한꺼번에 먹어도 이렇게 빨리 안정되는 일은 없었다. 두려움도 추위도 사라지고 머릿속이 맑게 돌아왔다. 무서운 꿈속에 있다가 밝은 햇살에 깨어난 것만 같았다.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몸을 뒤틀었지만 머리와 등을 감싼 손은, 단단한 두 팔은 힘을 풀지 않았다. 미약하게 버둥대던 유온은 강인한 품 안에서 차츰 저항을 포기했다. 쫓기는 것처럼 빠르게 뛰던 맥박이 조금씩 가라앉아갔다. 식은땀이 얇게 밴 차디찬 몸을 윤서경은 온몸으로 감쌌다.

몸이 밀착하고 있었기에 윤서경의 느릿한 심장 박동이 피부를 통해 전해졌다. 자신의 심박은 느려지고, 그의 심박은 조금 빨라졌다. 결과적으로 두 박동은 비슷한 속도가 되었다.

발작이 잠잠해진 후에도 윤서경은 한참 동안 유온을 안고 있었다. 따뜻한 물속에 잠긴 것처럼 모든 게 편안해졌다.

알파의 체향이라는 게 이렇게까지 심신을 나른하게 만드는 것인 줄은 몰랐다.

윤서경은 유온의 몸이 완전히 축 늘어진 걸 확인하고 안아 들어서 거실로 나갔다. 외투만 벗기고 소파에 유온을 눕히듯 앉힌 그가 시계를 확인하곤 말했다.

“나가 봐야 합니다. 자정 전에는 돌아올게요.”

“……여기로요?”

“싫습니까?”

싫다고 하면 정말 안 들어올 것 같았다. 유온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시계를 확인한 윤서경이 눈을 조금 가늘게 뜨더니 침실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들어갈 때와 다른 시계를 찬 채였다.

“직원이 곧 약을 가지고 올 겁니다. 쉬고 있어요.”

“네…….”

유온이 할 수 있는 대답은 그것밖에 없었다. 윤서경은 정말 급한 일이 있는지 빠른 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일어나서 배웅하려 했지만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윤서경이 어깨를 가볍게 눌렀다. 돌아선 윤서경을 향해 급하게 일어났을 때 그는 이미 현관문을 열고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빨리 걷지……. 신기한 기분이었다. 그가 나가고 다시 소파에 털썩 앉아서 멍하니 있었다. 직원이 초인종을 누른 건 20여 분 정도 지나서였다.

인터폰을 확인하자 익숙한 호텔 직원의 얼굴이 보였다. 손에 호텔 로고가 있는 쇼핑백을 든 채였다. 문을 열자, 직원은 정중한 인사와 함께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인사와 함께 손잡이를 잡았는데 팔이 아래로 쑥 내려갔다. 예상했던 것과 너무 다른 무게 때문이었다. 웃기는 모습이었겠지만 호텔 직원은 오히려 같이 놀라더니 쇼핑백 아래쪽을 다시 받쳐서 들고 말했다.

“다른 물건이 같이 들어 있어서요. 미리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유온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이럴 정도로 무거운 건 절대 아니었다. 생각도 못한 무게감 때문에 당황했을 뿐이다. 괜히 신경을 쓰게 한 것 같아 쇼핑백을 끌어당겨서 한 손에 들었다. 직원은 한 번 더 유온을 확인하고는 가 보겠다는 인사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문을 닫고 돌아선 뒤 유온은 쇼핑백을 빤히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약이기에 이렇게 무거울까. 의아한 나머지 소파까지 가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안을 뒤적거렸다.

갈색의 지퍼 백에 들어 있는 건 유온의 이름과 처방 날짜가 적힌 약통 몇 개였다. 그 아래에 상자가 하나 더 보였다. 약 봉투를 손에 들고 상자 패키지를 확인한 유온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까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려고 하던 그 게임기와 소프트였다.

‘이걸 어떻게…….’

산더미처럼 안겨 준(그리고 아직 제대로 끝낸 게 없는) 취미 생활 용품 중 하나일까. 아니면 병원에서 오는 길에 줄 선 사람들을 쳐다본 걸 보고 자신이 갖고 싶어 한다 생각한 걸까. 어느 쪽이든 유온은 오랜만에 물건을 보며 설렜다.

쇼핑백을 한쪽 팔에 건 채로 이번엔 약을 확인했다. 작은 통에 소분되어 담긴 약은 다섯 종류였고, 복약 지도서는 길었다. 대강 어디가 아플 때 먹는 것이라는 식으로만 약을 분류해 온 유온에게는 거의 약에 대해 설명한 사전 수준으로 보였다.

약을 어디에 둬야 할지 고민하다가 일단 그대로 쇼핑백에 넣어 두었다. 원래 먹던 약들이 있던 자리에 이걸 놓기가 싫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다. 굳이 말하자면, 뭔가가 섞여 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테이블 한쪽에 약이 든 쇼핑백을 두고 게임기 패키지를 뜯었다. 알록달록한 게임기 본체며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소프트가 익숙했다. 이유건이 사 준 후로 죽기 전까지 생각날 때면 하던 게임이니까. 그러고 보니 그때 마지막으로 게임을 한 게 언제였더라……, 본가에 가지고 갔다가 깜빡 두고 왔고, 그 후로 찾지 못했던 것 같다.

밖에 오래 있다가 들어와서인지 게임기 본체가 차가웠다. 액정에 부옇게 김이 서려 있는데도 곧바로 전원을 켰다. 배터리가 어느 정도는 있는 상태였는지 바로 부팅이 되었다.

이런저런 세팅을 하고 소프트를 집어넣자 귀엽게 생긴 동물 캐릭터가 팔짝거리며 나타났다. 캐릭터의 이름을 짓고, 앞으로 캐릭터가 살게 될 집의 이름도 지었다. 몇 년 동안 모은 아이템 같은 건 하나도 없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으나 큰 불만은 없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건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

그 후로 한참 동안 유온은 게임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외투는 윤서경이 거실 옷장에 우선 걸어 두었지만 외출복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였다. 이름만 짓고 옷 갈아입어야지, 집만 짓고 해야지, 나무만 심고, 여기 물만 주고……. 게임을 처음 시작할 때 나오는 퀘스트는 끝도 없이 많았고 하나씩 하다 보니 시간이 순식간에 갔다.

그러다 현관문 잠금이 풀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깜짝 놀라 일어나서 제 방으로 뛰어갔다. 근래 들어 이유온이 가장 빠르게 움직인 순간이었다.

아슬아슬하게 방문을 닫는 것과 현관문이 완전히 열리는 게 겹쳤다. 유온은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거울을 보며 흐트러진 머리를 손으로 대강 빗은 뒤 거실로 나왔다.

윤서경이 소파 근처에 서서 테이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온 거실에 게임의 아기자기한 기본 배경음이 들렸다.

가장 작은 볼륨으로 해 두었는데 거실이 너무 조용하다 보니 이런 일이 일어났다. 유온은 얼굴이 발개져서 테이블로 걸어가 게임기를 집어 들었다. 윤서경의 시선이 게임기에서 유온에게로 이동했다.

“……다, 다녀오셨어요.”

할 말을 찾다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윤서경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잘못 말했나 싶어서 덧붙일 말을 또다시 찾았다. 그러나 유온이 제 언어의 한계를 실감하며 자책하기 전에 윤서경은 대답했다.

“네.”

윤서경의 말은 항상 짧아도 의미가 분명했다. 유온처럼 얼버무리는 소리가 아니다. 게임기 테두리를 만지작거리던 유온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서경 씨, 이거…….”

“아까 가게를 쳐다보는 것 같아서 사 오게 했습니다. 마음에 안 듭니까?”

“아니요, 아뇨. 너무 좋아요. 그래도 구…….”

구하기 어려우셨을 텐데, 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윤서경에게 이 세상에서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 뭐가 있겠는가. 유온은 그런 말 대신 짧고, 자신도 의미를 확실히 전달할 수 있는 말을 했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했는데 윤서경이 조용했다. 게다가 시선이 느껴졌다. 눈을 들어서 확인한 유온은 그대로 뻣뻣해졌다. 아주 희미했지만, 윤서경이 입매를 부드럽게 하며 웃고 있었다.

유온은 그 웃는 얼굴에 단숨에 마음을 빼앗겼다. 가만히 보면 웃음인지 아닌지 구분도 안 될 만큼 옅은 미소였지만 유온에게는 충분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똑같이 웃음이 나왔다. 웃음을 짓자, 윤서경은 잠시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유온이 당황할 만큼 오래. 제 웃음이 역시 이상했던 건가 싶어 입술을 우물대는데 윤서경이 물었다.

“지금까지 받은 것 중에 저게 가장 마음에 듭니까?”

유온은 말뜻을 가만히 곱씹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시계랑, 반지요.”

반지요, 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제 귀에도 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그러나 기어들어 가는 말이 끝난 순간 윤서경은 유온의 뺨을 감싸고 입 맞췄다. 갑작스러웠지만 유온은 키스를 거절하지 않았다. 고개를 기울인 윤서경은 유온의 숨이 가빠질 때까지 오랫동안 키스했다.

“반지는 내가 당신한테 준 게 맞습니다. 하지만 시계는.”

“…….”

“당신이 나한테 주는 겁니다.”

“하지만…….”

자신은 그런 비싼 시계를 살 능력이 없었다. 형이 골라 준 게 아니니 부모님이나 형이 값을 대신 내줄 리도 없다. 유온의 그런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윤서경이 짧게 입 맞추곤 다시 말했다.

“골라 준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

온 피부에 모래가 쏟아지는 것만 같다. 당연히 가슴에도 쏟아지고 모래바람까지 일고 있다. 상대방이 잘해 주면 잘해 줄수록 기쁘면서도 무섭다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음울한 사고방식이었다.

기대는 머릿속의 낡은 화로에 불을 붙이고 현실은 그 위에 물을 끼얹는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물에 젖은 화로엔 점점 불씨가 피어오르기 어렵게 된다. 유온의 화로는 너무 많이 젖었고 군데군데 썩기까지 했다.

이전에도 윤서경은 예물로 나눈 시계를, 유온이 골라 준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을까. 반지를 자신이 유온에게 주는 것이라고 여겼을까.

아닐 것이다. 혹은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진저리가 났겠지. 이렇게 다정하고 좋은 사람을 그렇게 만들다니 자신도 참 다른 의미로 대단했다.

머리를 쓸어내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윤서경이 유온의 머리를 쓸어 정리하고 있었다. 머리가 엉망이었나 싶어 얼른 두 손으로 제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갑자기 일이 좀 생겨서 미리 말하러 왔습니다. 자정을 넘기거나 오늘은 못 들어올 것 같아서요.”

“네……? 아, 그, 그렇게까지 해 주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전 먼저 자도 되고, 아니면……. 문자만 보내 주셔도 되는데.”

“내가 그러고 싶어서요.”

“…….”

“내 행동을 사사건건 알리고 싶습니다. 당신한테. 그리고 원한다면, 당신도 알려 주면 좋겠습니다.”

유온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그는 이유온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귀찮은지 아직 모르는 게 분명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제가 어떤 인간인지 설명해야 하는 걸 알지만 조금이라도 더 윤서경이 이렇게 대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만 엉켰다.

“이유온 씨.”

“……네.”

“걱정하지 말아요.”

윤서경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유온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그에게 기대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는 이제 다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유온은 조심스럽게 그에게서 떨어졌다.

“조심히…….”

시선이 따가울 정도였다. 유온은 조심히 가시라는 말을 삼키고 다른 말을 꺼냈다.

“……다녀오세요.”

윤서경은 유온의 뺨에 다시 키스하고 나갔다. 현관문이 닫힌 후 문 근처를 서성거리던 유온은 소파로 돌아왔다. 음악은 시간이 오래 지나면서 멈췄지만, 키우는 캐릭터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이웃집 오리 캐릭터와 피크닉을 다녀오라는 퀘스트가 깜빡거렸다. 유온은 현실과 상관없는 평온한 일상 게임으로 복잡한 생각을 잊으려 했다. 그러다 시계를 보려고 테이블 위에 있던 휴대폰을 들었다. 켜진 화면에 새로운 메일 알림이 있었다.

게임기를 메일 계정에 연동시키며 받은 안내 알림이라 생각하고 별 뜻 없이 눌렀다. 그러나 메일함을 연 유온은 게임기를 테이블에 떨어뜨렸다. 메일의 발신인은 이유건이었다.

조금 전까진 그래도 풀어져 있던 유온의 얼굴이 불쌍할 정도로 얼어붙었다.

역시 자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리 없었다. 행복은 별처럼 멀었다. 바라볼 때는 아름답지만 손에 쥘 수 없는 것이었다. 고작 메일이 하나 온 것만으로 유온의 사고는 늘 그랬듯 극단으로 치달았다.

머리는 열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만 멋대로 손이 움직였다. 메일 본문의 내용은 짧았다.

[형이 그동안 너한테 많이 잘못한 것 같다.

화내지 않을 테니까 전화 한 번만 줘. 걱정된다.]

“…….”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느껴지는 다정한 말투였다. 심하게 혼이 나고 풀이 죽어 있을 때 머리를 쓸어 주거나, 선물을 사 주거나 끌어안아 줄 때와 같았다. 유온의 머릿속에서 공포는 잠시 모습을 감추고 대신 죄책감이 그 자리를 채웠다. 유온은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제가 쓰던 침실로 달려갔다.

휴대폰을 넣어 둔 서랍을 열 생각이었다. 형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서. 그러나 서랍 손잡이를 쥔 순간 유온은 멈칫했다. 윤서경의 체향이 이곳에도 떠돌고 있었다.

코끝을 맴도는 향에 손이 멈춘 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향이 자물쇠가 되어 서랍을 잠가 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손으로 당겨도 열리지 않고, 열어도 안이 텅 비어 있을 것 같다.

불안으로 날카로워졌던 눈동자가 윤서경을 떠올리면서 점점 가라앉았다. 두려움도 죄책감도 그를 생각하는 마음 뒤로 가려진다. 정신이 그의 등 뒤로 도망치는 것처럼. 언제 그가 돌아서서 차가운 말을 내뱉을지 모르는데, 당장 단단한 벽이 눈에 보이니 거기에 몸을 감추고 싶은 것이다.

결국 유온은 서랍을 열지 않았다. 새 휴대폰도 액정이 보이지 않도록 뒤집어서 손이 닿지 않을 곳에 놓았다. 게임기를 들어서 평온하고 사소한 일을 몇 가지 했다. 물고기를 잡고 나무 열매를 따고, 한참 하다가 그것도 내려놓은 뒤 무릎을 끌어안고 앉았다.

거실은 넓은 공간 특유의 고요한 울림 때문인지 평온했다. 따스한 공기 속에서 얼핏 잠이 들었는지, 정신이 멍해져 있었는지 고개를 들자 시간이 조금 흐른 것 같았다. 같은 자세로 오래 있던 온몸이 뻐근해 다리를 내렸다.

여전히 게임 화면 속에선 예쁜 옷을 입은 캐릭터가 즐거운 듯 고개를 갸웃대며 다음 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터리 부족 표시가 상단에 떠 있기에 전원을 연결하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온은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2시를 넘겼다. 불편한 자세로 오래도 잤다고 생각하며 윤서경을 맞았다. 이런 시간인데도 늘 그렇듯 그는 완벽한 차림이었다. 제 주름이 간 옷과 헝클어진 머리를 알아챈 유온은 얼른 손으로 머리를 만졌다.

윤서경의 시선이 테이블 위로 향했다.

“……설마 지금까지 게임했습니까?”

“아, 아니요.”

유온은 고개를 마구 저었다. 윤서경이 나가고 벌써 몇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 그 동안 내내 게임이나 하고 있었다고 생각되다니 싫었다.

“잠깐 잠들었어요……. 정말이에요.”

윤서경이 믿지 못할 것 같아서 황급히 다음 말을 덧붙였다. 그러자 윤서경은 유온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상대가 눈앞에서 손을 들면 반사적으로 몸이 움츠러든다. 그런 유온의 머리를 윤서경은 천천히 쓰다듬었다.

“별일 없었습니까?”

“…….”

고개를 끄덕이려던 유온은 이유건의 메일을 떠올렸다. 입이 달싹였다. 말을 할까, 하지 말까, 해도 될까. 안 될까. 윤서경은 옷을 갈아입으러 가려는 기색도 없이 유온을 보고 있었다.

“저, 형…….”

“형?”

“형한테, 연락이 와서…….”

목소리가 떨렸다. 이 한 마디를 하려고 평생 치 용기를 다 짜낸 것 같았다. 윤서경의 얼굴을 쳐다보진 못했다. 대답이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터무니없이 느리게 흐를 것 같았으나, 다행히 윤서경은 곧바로 답했다.

“어디로 왔습니까. 전에 쓰던 휴대폰?”

“아, 아니요, 메일이요.”

“봐도 될까요.”

괜히 말한 걸까. 유온은 휴대폰을 집어서 메일함을 열어 윤서경에게 내밀었다. 메일을 빠르게 읽은 그가 유온을 보았다.

“이것 말고 더 있습니까?”

“그……, 전에도 있어요.”

윤서경은 휴대폰을 몇 번 조작하더니 이유건이 처음 보낸 메일을 확인했다. 유온은 그 긴 본문을 읽느라 한참이 걸렸는데 그는 흘끗 훑어본 것만으로 내용을 다 파악한 듯했다.

그의 분위기가 어두워졌다. 괜히 보여 준 걸까. 특히 전에 보낸 메일, 거기엔 윤서경을 나쁘게 말하는 내용으로 가득했는데. 유온은 발끝을 꾸물거리며 후회했다.

“이유온 씨.”

“……네.”

윤서경이 손가락을 몇 번 움직이더니 유온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무심코 화면을 확인하자 이유건의 메일이 없어져 있었다.

“앞으로는 이런 연락 받을 일 없을 겁니다. 혹시 다른 주소로 또 오거나, 가족 중에 다른 사람이 메일을 보내거나 하면 나한테 먼저 보여 줘요. 당신이 읽을 필요 없는 내용이에요.”

메일을 지우고 휴지통까지 비웠는지, 메일함에는 얼마 안 되는 스팸메일과 피 검사 결과 통지밖에 없었다. 이유건의 메일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혹시 새로 쓰는 번호, 다른 사람에게 알려 준 적 있습니까? 그랬다면 미안하지만 새 번호로 다시 바꾸도록 하고, 아는 사람과 연락은 당분간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아……, 네, 저, 전 아는 사람 없어서 괜찮아요.”

윤서경의 눈썹이 약간 꿈틀했다. 말해 놓고 유온은 또 후회했다. 아는 사람도, 친구도, 연락을 주고받을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말하니 윤서경이 저를 모자란 사람으로 볼 것 같았다.

“이만 자요. 늦었습니다.”

그가 시선을 게임기 쪽에 한 번 두었다가 말했다. 게임 그렇게 많이 하지 않았는데. 앞으로는 윤서경이 안 보는 곳에서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윤서경의 말대로 바로 자려고 했으나, 오래 웅크리고 있어서인지 몸이 뻐근했다.

“저는 씻고 잘게요…….”

어차피 다른 침실에서 잘 거고 문을 닫으면 욕실 소리는 그의 방에 들리지도 않을 텐데 유온은 솔직하게 말했다. 윤서경은 습관처럼 시계를 들어 한 번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침실로 들어간 후 유온은 휴대폰과 게임기, 충전기를 주섬주섬 챙겨 자신의 방으로 왔다. 난방이 돌아가고 있는데도 조금 썰렁했다. 침대 맡에 충전기를 꽂고 잠옷을 챙기고 욕실로 와서 물을 틀었다.

온도를 이리저리 맞추며 또다시 상념에 푹 가라앉으려 했을 때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침실 안까지 들어올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윤서경이다. 유온은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리자 윤서경은 그런 유온을 빤히 보았다.

표정이 이상했다. 뭐에 놀라거나 당황한 사람 같다. 심지어 걱정이나……, 걱정을 넘어 불안까지 띤 것처럼 보였다. 그는 샤워 부스 구석에 서서 손으로 물 온도를 재는 유온을 한참 보다가 물었다.

“거기서 뭐 합니까?”

“……따뜻한 물 틀려고…….”

“…….”

이번엔 현실적으로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은 윤서경이 욕실 입구의 버튼을 몇 번 눌렀다. 금세 물이 유온이 원하던 온도로 바뀌었다. 매일 지나치면서도 그냥 냉난방 온도만 조절하는 장치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미안합니다. 잘 자요.”

윤서경은 그대로 나가 버렸다. 유온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갑자기 무슨 일일까, 용건이 있었는데 잊어버리기라도 했나. 그러다 제 몸을 내려다보고 흠칫 놀랐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물에 가려지긴 해도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였다.

유온은 제 어깨를 만지작거리며 물줄기 아래로 들어갔다. 역시 러트라도 오지 않으면 이런 몸엔 관심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비쩍 마르기만 했지 매력이라곤 하나도 없으니까.

거품을 내고 몸을 씻어내는 손길이 느릿느릿했다.

* * *

“피아노요?”

다음 날, 윤서경은 일찍 나가지 않고 유온과 아침을 같이 했다. 자신이 너무 느리게 먹으면 윤서경이 나가기 불편해질 거라는 생각에 서두르고 있는데, 갑작스런 그의 물음에 손이 멈췄다.

피아노 치는 걸 좋아하느냐는 물음이었다.

호불호를 따지자면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남에게 들려줄 정도는 아니었다. 이전 신혼집에도 피아노가 있긴 했으나 윤서경이 말없이 치워 버렸다. 한두 번 쳐 본 게 전부긴 하지만 시끄럽다는 뜻이었을 것이기에 아무 말 없이 있었다. 그 후로는 한 번도 쳐 본 적이 없다.

“좋아해요?”

“그게, 싫진 않은데…….”

“저 근처에 피아노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그럽니다. 싫으면 안 들일 거고요.”

유온은 고개를 휙휙 저었다.

“아니에요. 서경 씨 원하는 대로 하세요. 전, 음, 좋아요.”

다행히 윤서경이 자신을 생각해 피아노를 두려 한 건 아닌 듯했다. 이 시점에서 그가 자신이 피아노를 친다는 걸 아는지도 불투명하다. 윤서경은 알겠다고 말하곤 식사를 다시 시작했다. 유온도 깨작거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열심히 밥을 먹었다.

윤서경이 나간 후 두어 시간도 안 되어 정말 피아노가 거실로 들어왔다. 거실 한쪽에 장식물이 놓여 있던 공간이 비워지고 그 자리를 피아노가 차지했다. 검은색 그랜드 피아노는 흑백 대리석으로 깔끔하게 꾸민 거실에 원래 있던 물건처럼 잘 어울렸다. 유온은 그 근처를 서성거렸다. 매끈한 표면에 제 모습이 비치면 물러나고, 다시 기웃거리길 반복했다.

그러다 아직 윤서경이 돌아오려면 먼 시간인 걸 확인한 뒤 슬금슬금 피아노 앞에 앉았다. 건반에 손을 얹어 보니 의자의 높이는 조절할 필요도 없이 딱 맞는 것 같았다. 손가락을 흰 건반에 올리고 몇 번 누르자 소리가 울렸다.

오랜만에 듣는 피아노 소리였다. 유온은 건반을 누르며 기억나는 멜로디 몇 개를 연주했다. 제가 듣기에도 어설픈 연주였지만 치는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클래식, 가요, 게임 배경 음악, 생각나는 대로 아는 소절만 연주했다.

그러다 한 곡 전체가 떠오르는 노래가 있어서 쳐 보았다. 악보를 본 게 아니어서 틀린 음도 많았겠지만, 어차피 혼자서 치고 혼자서 듣는 건데, 혼자…….

“…….”

고개를 든 유온은 피아노 옆쪽에 선 윤서경과 눈이 마주쳤다.

대체 언제 들어온 건지, 소리도 듣지 못했다. 책장에 기대 비스듬히 서서 유온을 보고 있던 윤서경이 물었다.

“그건 무슨 노랩니까?” 

“아, 그냥 생각나는 대로……. 아마 가요일 거예요…….”

왜 항상 윤서경은 자신이 뭔가에 집중해 있을 때 불쑥 들어오는 걸까. 또 이상한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에 얼굴이 발개졌다.

“피아노를 잘 치네요.”

“제가요……?”

“네.”

“아니에요, 형이 훨씬 잘 쳐요.”

“이유건 부사장이요?”

“아뇨, 유연이 형이요…….”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누군가 듣는 자리에서 피아노를 칠 일이 생기면 대부분 가족 중 한 사람이 곁에 있었다. 유온이 칭찬을 받으면 곧바로 이유연 쪽이 훨씬 잘 친다는 말이 따라붙었다. 유온을 칭찬했던 사람들은, 그보다 더 실력이 좋은 이유연에게로 관심을 옮겼다.

칭찬이 고팠던 시절에는 이유연의 솜씨가 부러웠으나 점점 재능의 차이는 어쩔 수 없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어 갔다. 현실을 잘 파악하는 게 스스로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윤서경이 피아노를 돌아 유온의 뒤쪽으로 왔다.

“아무거나 연주해 봐요.”

그 말에 유온의 손이 건반을 누르지도 못한 채 한참 더듬거렸다. 아무거나 연주하라는 말에 떠오르는 곡이 하나도 없었다. 가족과 손님들 앞에서 치기 위해 죽도록 연습한 곡도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고민한 끝에 유온은 그나마 긴 구절이 기억나는 클래식을 한 곡 쳤다.

하필 윤서경이 선 자리는 레슨할 때 선생님이 서던 자리였다. 조금이라도 틀리면 무섭게 혼났던 일이 생각났고, 오랜만에 피아노를 쳐서 긴장했고, 윤서경이 보고 있다는 사실에 손이 떨리기까지 했다. 결국 유온은 간단한 곡 하나를 몇 번이나 틀려 가며 쳤다.

마지막 건반을 누른 뒤 풀이 죽어 있는데 윤서경이 말했다.

“잘 치네요. 당신 연주가 이유연보다 훨씬 좋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유온은 윤서경 쪽으로 돌아앉아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예의를 차린 칭찬에는 예의 바르게 대답해야 했다. 작은형은 원래 이곳저곳에서 피아노를 쳐 달라는 청을 받으니 윤서경이 어딘가에서 그의 연주를 들은 듯했다. 애초에 이유연이 피아노를 배운 것부터 윤서경의 눈에 들기 위한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더욱 친절한 칭찬이었다. 이유연의 연주를 듣고도 그렇게 말해 주는 것 아닌가. 부끄러움에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던 유온은 뒤늦게 제가 오늘 막 설치한 피아노를 멋대로 만졌다는 걸 깨달았다.

“아, 멋대로 만져서, 죄송해요. 오랜만에 보니까 신기해서…….”

그러자 윤서경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죄송해할 필요 없습니다. 당신 거니까요.”

“……제 거요?”

“네. 당신 피아노. 치고 싶을 때 치고, 치기 싫으면 장식품으로 그냥 두면 됩니다. 조율이나 악보가 필요하면 버틀러나 데스크 직원한테 말해요.”

“네……, 그게……,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눈을 굴리던 유온은 타이밍을 놓치기 전에 얼른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전엔 피아노를 치지 말라고 가지고 갔던 윤서경이, 이번에는 먼저 내주었다. 갑자기 피아노가 매우 귀한 물건으로 보였다. 안 그래도 귀하게 보였지만 그 이상으로.

그때 유온은 윤서경에게 왜 피아노를 치운 건지 묻지 못했다. 또한 지금은 왜 피아노를 제게 주는 건지 묻지 못한다. 의미가 다른 질문이지만 사실 본질은 같았다.

“이유온 씨.”

갑작스러운 부름에 유온이 놀라서 눈을 들었다. 또 어느새 코끝이 땅에 닿을 듯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제 발끝에서 윤서경의 얼굴로 향했다. 그는 평소와 같이 차분한 얼굴이었다.

“또 필요하거나 가지고 싶은 것 있습니까?”

어려운 질문이었다. 유온은 얼른 머리를 저었다.

“아무것도?”

“네, 지금도 좋아요……. 충분히 많아요. 감사합니다.”

“고맙다는 말도 한 번이면 됩니다. 당신은 뭐든 원하는 걸 말해요. 그럼 내가 들어줄 테니까.”

“…….”

지금 고맙다고 말하는 건 윤서경이 말하는 한 번에 들어가는 걸까, 아닐까…….

“저녁 먹죠.”

고민하는 사이 유온은 저녁까지 윤서경과 같이 먹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식탁에 올라오는 메뉴는 작은 곁들임 하나까지 유온의 입맛에 맞는 것들로만 구성되었다.

처음 여기에 왔을 때부터 좋아하는 음식이 많이 나오긴 했지만, 요즘은 신기할 정도였다. 아니면 집을 나와 있는 것만으로 좋아서 모든 게 맛있게 느껴지는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유온이 좋아하는 음식은 전부 속이 더부룩하지 않고 매끄러운 종류였다. 윤서경이 먹기엔 심심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데 그는 뭔가 추가로 요리를 가지고 오게 하거나, 싱겁다는 말도 없이 그릇을 비웠다.

식사를 마친 후엔 더욱 이상했다. 갑자기 거실 욕실을 사용하라고 해서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씻고 있는데, 불쑥 안으로 들어와 유온을 깜짝 놀라게 하더니 또 바람처럼 나가 버렸다. 한참 후 샤워 부스에서 나와서 보자 커다란 욕조에 거품이 가득 차 있었다.

몽글몽글 움직이는 거품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자 윤서경이 다가왔다. 유온은 수건으로 어설프게 몸을 가린 채 여기서 나가야 할지, 가만히 있어야 할지 고민했다. 직접 받았으니 목욕을 하려는 건가 했으나 그는 재킷만 벗은 차림이었다.

옷만 그대로이면 모를까 시계까지 차고 있어서 지금 씻으려는 것으론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나가면 벗을 생각인가 싶어서 두 걸음 정도 움직였지만, 윤서경이 묘하게 문가를 막듯이 서 있었다.

“저기, 서경 씨……. 저 나갈게요.”

“목욕해요. 좋아하지 않습니까.”

“그게, 그렇긴 한데 서경 씨 쓰려고 받아 놓으신 거…….”

“아닙니다. 들어가요.”

그 말에 고개를 돌리니 여전히 거품이 풍성했고, 좋은 냄새가 났고, 창밖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유온은 망설이다가 욕조로 향했다. 발끝을 살짝 담자 거품 아래 물의 온도는 적당히 편안할 만큼만 뜨거웠다.

유온은 큰 수건을 든 채 욕조 안으로 들어와, 거품에 완전히 몸이 가려진 후에야 내려놓았다. 고개를 들었더니 유리창을 통해 윤서경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유온이 물속에 완전히 들어간 걸 확인하고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시계에서 떨어진 시선이 유온을 향했다.

“책 줄까요?”

“아니요……. 젖을 텐데…….”

“젖어도 됩니다.”

“괘, 괜찮아요. 밖에 구경할게요.”

“그래요.”

그대로 나가는가 싶던 윤서경은 뭔가를 가지고 들어왔다. 모래시계였다.

“이, 이런 건 어디서.”

“거실에 있던 물건입니다. 본 적 없어요?”

유온이 고개를 저었다. 스위트룸의 거실에는 선반 하나하나 빈 곳 없이 값비싼 장식품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첫날 한번 훑어본 이후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없어서 뭐가 있는지 세세히 알지 못한다.

윤서경은 그건 중요하지 않다는 듯 모래시계를 유온의 눈에 잘 보이는 위치에 두고 빙글 뒤집었다. 백금을 갈아 놓은 것처럼 반짝이는 모래가 좁은 틈으로 가늘게 쏟아졌다.

“다 떨어질 때까진 있어요.”

그리고 이번엔 정말로 나갔다. 귀를 기울이자 그가 거실을 가로질러 침실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문은 여전히 살짝 열린 채였다. 윤서경의 체향과 입욕제의 향이 자연스럽게 섞이고, 뜨거운 물까지 더해져 몸이 나른하게 늘어졌다. 젖은 머리카락의 감촉마저 기분 좋았다.

평소였다면 언제 나가야 할지 초조하게 주위를 살피느라 바빴을 텐데, ‘모래시계가 다 떨어질 때까지’라고 시간이 정해지자 신기하게 여유가 생겼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거품에 잠겨 바깥을 바라보는 건 편안했다. 주위가 고요해서 거품이 톡톡 터지는 소리와 모래시계의 모래가 떨어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모래가 다 떨어질 때까지 유온은 창밖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강을 가로지른 다리 위로 차량이 끝없이 오가는 모습은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거품은 여전히 풍성했고 물의 온도도 똑같이 뜨거웠다. 머뭇거리던 유온은 손을 뻗어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15분이 처음부터 다시 흘러내렸다.

그대로 또 오래도록 바깥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쯤 있자 조금씩 어지러워지는 것 같아서 꾸물대며 욕조의 마개를 열고 나와, 몸에 묻은 거품을 씻어냈다. 온몸이 부들부들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욕조 근처를 정리하고 가운을 걸친 유온은 조심스레 거실로 나왔다. 윤서경의 침실 문이 조금 열려 있었고, 불은 켜진 채였다. 슬리퍼를 어디에 두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별수 없이 물기가 없도록 닦은 뒤 맨발로 냉장고로 향했다.

유리잔을 꺼내서 손에 든 뒤 물을 꺼내 일어났을 때였다.

“이유온 씨.”

“……!”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놀란 유온은 짧은 비명까지 지르며 움찔했다. 그 바람에 손에서 잔이 미끄러져 그대로 대리석 바닥 위로 곤두박질쳤다. 얇은 유리잔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져 버렸다.

잔이 깨지는 순간 눈을 질끈 감았던 유온이 허둥지둥 몸을 숙였다. 이미 깨진 잔이라 어찌 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손이 움직여 큰 파편을 집으려 했다. 그러나 유리 조각에 손이 닿기 직전에 몸이 위로 들렸다.

“아…….”

유온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윤서경이 자신을 안아 들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즉시 유온은 사과했다.

“죄송해요, 컵……, 제, 제가 치울게요.”

“다칩니다.”

윤서경은 유온을 든 채 걸음을 옮겼다. 저도 모르게 몸을 버둥거렸으나 발끝도 바닥에 닿지 않도록 들린 상태에선 아무 소용 없을 걸 알고 얌전해졌다.

유온을 안은 채 전화기까지 간 윤서경이 직원을 불렀다. 전화를 끊은 후에는 그의 침실로 들어갔고 침대에 눕혀 주더니, 가장자리에 앉아 유온의 발과 종아리를 살폈다. 그러곤 유리 파편에 긁힌 자국이 하나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일어났다.

희멀건 다리를 내려다보는 유온의 안색은 창백했다. 고작 유리잔 하나인데도 윤서경이 가진 무언가를 깨뜨렸다는 생각에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그런 와중에, 침대 곁을 떠났던 윤서경이 다시 왔다. 수건과 드라이어를 들고서.

일단 젖은 머리를 말리라는 뜻인 것 같았다. 드라이어로 손을 뻗으려 했지만 작은 기계는 유온의 손을 피해 높이 움직였다. 얼떨결에 시선도 그를 따라갔다. 윤서경은 드라이어를 머리 위로 든 채 말없이 코드를 연결하더니 스위치를 올렸다.

“…….”

위이잉, 낮은 기계음과 함께 더운 바람이 나와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유온이 멍해졌다. 머리가 말라 가기 시작했을 때 정신을 차린 유온은 몸을 돌리려 했다.

“제, 제가 할게요. 제가 말릴게요.”

“가만히 있어요.”

“그게, 하지만, 아니.”

더듬더듬 말하며 의미 없이 피하려 하는 사이에도 윤서경은 계속 드라이어를 내려놓지 않았다. 결국 머리가 다 마를 때까지 유온은 그에게 붙잡혀 있었다.

드라이어가 꺼진 다음에야 유온은 윤서경을 보는 방향으로 돌아앉았다.

“죄송해요, 컵…….”

“밖에 아직 직원이 있는데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유온이 입을 다물었다. 죄송하다는 말을 할 때마다 호텔 직원과 5분씩 대화를 하기로 했다. 아직까지 지켜진 적은 없지만.

머리카락에는 아직 따뜻한 바람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괜히 제 머리를 만지작거린 유온은 드라이어를 정리하러 사라진 윤서경의 자리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가 왜 자신에게 이렇게 잘해 주는지 모르니 가슴이 답답할 뿐이었다.

“……놀라진 않았습니까?”

침대 곁으로 돌아온 윤서경이 물었다. 놀라기야 했다. 심장이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싶었을 정도로. 하지만 고개를 가로젓자, 윤서경은 작은 한숨을 내쉬곤 물었다.

“당신이 쓰던 예전 휴대폰이요. 내가 가지고 가도 될지 물으려고 했습니다.”

“휴대폰이요……? 아, 네. 괜찮아요. 지금 가지고 올게요…….”

“아니요. 그 차림으로 어딜 갑니까.”

그 차림? 제 몸을 내려다본 유온의 얼굴이 오늘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도록 빨개졌다. 헐렁한 샤워 가운 한 장만 입은 채였는데, 속옷도 없고 가슴팍과 허벅지가 다 드러나 있었다. 유온은 얼른 옷을 여미며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가렸다.

이렇게 다 벗다시피 한 꼴에도 윤서경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이불 속으로 숨는 유온을 한번 보곤 휴대폰이 어디에 있는지 물은 뒤 방에서 나갔을 뿐이다. 그리고 얼마 후 방전된 지 오래인 유온의 예전 휴대폰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휴대폰을 충전기에 올려둔 뒤 유온이 어깨까지 끌어 올리고 있는 이불을 가볍게 들었다. 반사적으로 잡으려 팔을 뻗었으나 손이 닿지 않았다.

윤서경의 손이 가슴을 툭 눌렀다. 닿은 것도 겨우 알 정도의 힘이었는데 유온의 몸은 흐느적거리며 뒤로 풀썩 쓰러졌다. 푹신한 베개에 뒤통수가 닿았다. 윤서경은 그 위로 이불을 떨어뜨렸다.

“먼저 자요.”

“제가 여기서 자면 서경 씨는…….”

그러자 윤서경은 아무렇지도 않게 유온의 옆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일을 하려는지 그는 책상 쪽으로 향했다가, 다시 와서 휴대폰을 챙겨 가지고 갔다.

그러고 보니 편안한 차림이고 머리카락도 자연스럽게 내려와 있었다. 유온은 저 모습을 좋아했다. 그가 ‘집’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리고 그 집에 자신도 함께 있다는 사실에.

잠이 안 올 것 같았지만 순식간에 눈이 가물가물 감겼다.

* * *

‘나가세요. 아니, 내가 나가죠.’

윤서경은 찬바람이 떨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표정은 냉랭했고 역겨움마저 담겨 있었다. 유온은 그의 눈에 담긴 경멸과 온몸으로 쏟아내는 혐오감을 고스란히 맞았다.

‘저, 제가, 뭘 잘못한……, 죄송해요, 저는.’

‘입 다물고 있어 주면 좋겠습니다. 내가 나갈 때까지.’

그렇게 말한 윤서경은 외투만 걸치고 정말로 유온의 곁을 지나쳐 나가 버렸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유온은 그에게서 분노로 점철된, 감정 때문에 주체되지 않은 희미한 체향만을 맡았을 뿐이다. 오랜만에 맡는 향이 그런 것이었다.

덩그러니 방문 앞에 남겨진 유온은 바닥을 쳐다보다가 눈을 깜빡였다. 고여 있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 원래 유온은 잘 울지 않았다. 특히 누군가가 곁에 있을 땐 어떻게든 참았다. 울음은 상대방을 더 화나게 할 뿐이었기에.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혼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더욱 그랬다. 코끝이 새빨개지고 서러운 흐느낌이 올라왔다. 힘겹게 소리를 죽였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조차 마음 놓고 엉엉 울진 못했다.

유온은 본가에서 막 돌아왔다. 이유건이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겨우 그의 곁에서 벗어나 집에 들어온 건데, 윤서경의 반응은 무서울 정도로 싸늘했다.

제 잘못이 무엇인지 짐작이 안 가서 더욱 앞이 캄캄했다. 잘못을 알면 그걸 빌기라도 하겠건만, 무작정 죄송하다고 말해 봐야 윤서경의 화가 풀릴 것 같지 않았다.

흐느낌은 조금 잦아들었지만 눈물은 계속 흘렀다. 멍하니 뜨인 눈이 쉼 없이 젖었다. 눈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어 닦아 내기 위해 손을 들었던 유온이 작게 신음했다. 긴 소매에 가려진 손목이 퉁퉁 부어 있었다.

본가에 끌려갈 용건이야 한 가지였다. 또 혼날 짓을 한 것이다. 이유건이 너무 많은 이유를 들었기에 무엇 하나 명확히 기억나는 잘못이 없었다. 대부분 윤서경과의 관계에서 유온이 제대로 처신을 못 하고 있다는 문제였다.

유연이였다면 절대 너처럼은 안 했어. 제발 유연이의 반의반이라도 닮아 봐. 그런 말들이 떠올랐다. 옷 밖에 보이는 부분에 맞은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하는 손찌검은, 마음대로 손을 휘두를 수 없다는 짜증 때문인지 한층 유난했다. 너무 맞아서 멍해지다 못해 잠깐씩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그러다 풀려나 집에 돌아오는 길에 유온은 계속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언제 다친 건지도 모르겠지만 아직 화난 기색의 이유건에게 말할 수가 없어서 집까지 그냥 왔다. 이 정도로 다치는 일은 좀처럼 없는데, 이유건이 얼마나 화가 났던 건지 알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손목은 점점 부었고 아픔도 참기 어려운 정도가 되었다. 어떻게든 버티려 하다 망설이면서 윤서경의 방문을 두드렸다. 혹시 병원에 데려다줄 수 있는지 묻기 위해서였다. 바빠 보인다면 다녀오겠다 말만 하고 택시라도 타고 가려 했다. 근처에 병원이 어디에 있는지도 이미 찾아 두었다.

그렇지만 윤서경의 반응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고, 윤서경이 무서웠고, 손목이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났다.

아픈데도 이제 병원에 갈 마음은 들지 않았다. 유온은 조용히 제 방으로 돌아가서 약을 찾아 먹었다. 진통제 여러 알을 먹고 가만히 기다리자 아픔은 견딜 만한 것이 되었다. 몸이 아픈 건 누그러들었지만 윤서경의 표정은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다음 날 유온만 있는 집에 이유건이 찾아왔다.

‘옷 입어, 병원 가게.’

‘아…….’

유온은 저도 모르게 손목을 만졌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이유건의 얼굴도 같이 굳어지더니, 불쑥 손을 뻗어 다친 팔을 들어 올렸다. 억센 손이 부어 있는 손목을 쥐었다.

‘악……!’

저도 모르게 큰 비명을 질렀다. 이유건은 그 손목을 보더니 물었다.

‘윤 대표가 이거 보고도 아무 말도 안 해?’

그는 화가 난 기색이었다. 유온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서경 씨는 못 봤어요. 어제는, 급한 일이 있어서 나갔고…….’

‘나와.’

옷을 챙긴 유온은 이유건을 따라 병원으로 향했다. 엑스레이를 찍어 보니 손목뼈에 금이 가 있어서 깁스를 하고 와야 했다. 이걸 윤서경에게 어떻게 숨길지, 넘어졌다고 하면 믿을지 생각했으나 쓸모없는 고민이었다. 윤서경은 유온의 팔이 다 낫고도 거의 일주일을 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잠에서 깨어나 흐린 시야에 손목이 보였다. 유온은 손가락을 꾸물거려 보았다. 손목은 부어 있지도 아프지도 않았고, 자유롭게 움직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무심코 메모 패드를 보았지만 새 메모는 없었다. 실망인지 무엇인지 모를 기분으로 침대에서 빠져나오려는데 휴대폰이 깜빡이는 게 보였다.

윤서경에게서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급하게 내용을 확인했다.

[출근합니다. 3시쯤 예복을 보려 하는데 괜찮습니까?]

유온은 시간을 확인했다. 문자는 이른 아침에 온 것이었고 아직 오전 10시였다. 결혼식에 입을 예복……. 유온의 눈이 잠깐이나마 반짝였다. 혼자 고개만 끄덕이다가 정신을 차리고 답장을 보냈다.

[네, 좋아요.]

두 손으로 휴대폰을 잡고 가만히 보고 있는데 곧바로 답이 왔다.

[3시에 직원들이 방으로 올라갈 겁니다. 나는 30분에 도착할 테니 편한 곳에서 기다려요.]

좀 늦게 일어날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10시에서 3시까지가 이렇게 길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책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게임을 하다가도 자꾸 시계만 확인했다. 피아노도 치고 그림도 그리고 혼자서 부산스러운 낮을 보내다가 간신히 초인종 소리가 기다리던 시간을 알렸다. 유온은 후다닥 나가서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 밖에서 들어오는 물건을 보며 그 기세에 떠밀렸다. 한 명씩 밝게 인사를 하며 들어온 직원들이 넓은 거실에 물건을 늘어놓았다. 조명, 두꺼운 커튼이 달린 이동식 탈의실, 행거, 소품이 담긴 걸로 보이는 상자……. 드레스 샵을 그냥 통째로 이동해 놓은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웨딩플래너 김현주입니다.”

호텔 직원들과 비슷하게 머리카락을 깔끔히 넘긴 여자가 다가왔다. 거실을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약간 기가 눌린 유온이 꾸벅 인사했다. 문자로만 한 번 말을 나눴던 웨딩플래너였다.

“예물 같은 건 대표님이 두 분이서 결정하겠다고 하셔서요. 인사가 늦었네요. 예복부터 신혼여행까지는 제가 부족하지만 의견을 드리게 될 것 같아요.”

“앗, 네……. 잘 부탁드려요.”

“제가 드릴 말씀이죠!”

밝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유온은 이런 사람 곁에 있으면 한층 조용해졌다. 제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분위기를 이끄니 어설픈 목소리로 끼어들 필요가 없어서였다.

종류별로 구분한 옷에 색색으로 맞춘 꽃다발이며 코르사주, 신발이 가지런히 놓였다. 세팅에 30분 정도 걸린다기에 방에 들어가 있을 생각이었는데 막상 보니 홀린 듯 구경하게 되었다.

정확히 30분에 현관이 열렸다. 윤서경은 들어와서 곧바로 유온에게 다가왔다.

“앉죠.”

“아.”

유온은 그제야 제가 사람들을 감시라도 하는 양 멀뚱멀뚱 서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윤서경을 따라 소파로 가자 김현주도 함께 왔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챙겨두었던 큰 책자 여러 개를 하나씩 테이블에 펼쳐 놓았다. 전에 한 번 보고 왔던 예식장 사진이었다.

“개인적으로 식장에 따라서 추천 드리는 예복은 이런 분위기입니다.”

김현주가 예복 사진을 책자 위에 몇 장씩 올려 두었다. 두 벌이 세트로 된 것도 있었고, 한 장씩 따로인 것도 있었다. 유온의 시선이 디자인을 통일한 예복으로 내려갔다. 모양이 완전히 똑같진 않지만 커플용이라는 건 분명하게 보였다.

“유온 님은 특별히 선호하시는 디자인이 있으신가요?”

김현주의 말에 유온은 고개를 들었다. 선호하는 디자인은 따로 없지만…….

“……흰색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그렇다면 흰색은 전부 제외할까요? 우선 다른 색상을 중심으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윤서경이 물었다.

“흰색 싫어합니까.”

“아, 그런 건 아니고, 그냥요.”

흰색이 싫은 건 아니었다. 단지 이전 결혼식에서 자신이 입었던 예복이 흰색이었을 뿐이다. 그때와 겹쳐지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당연히 그런 사실은 모를 윤서경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가 손목시계를 한 번 보았을 때, 직원이 준비가 끝났다고 말했다.

“우선 이쪽 세 벌을 추려 봤습니다.”

나란히 걸린 세 벌의 예복은 옷걸이조차 비싼 물건이었다. 사이즈는 전부 유온의 것이었다. 윤서경이 유온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때요?”

“전 다……, 아니, 저거요.”

다 좋아요, 라고 말하려다 멈추고 오른쪽에 있는 옷을 가리켰다. 세 벌 중에서 가장 수수하고 색이 어두운 것이었다. 물론 결혼 예복인 만큼 다른 것에 비하여 비교적 그렇다는 의미였다. 유온은 이유건이 고른 새하얗고 화려한 예복이 제게 얼마나 안 어울렸는지 아직도 기억했다.

“그럼 착용하시는 것 도와드리겠습니다.”

남자 직원 둘이 커튼을 둥글게 둘러 만든 탈의실을 손바닥으로 가리켰다. 안으로 들어가자 정말 평범한 드레스 샵과 다르지 않았다. 혼자서 정리할 수 없는 부분을 직원들이 도와주어 옷 한 벌을 입고 나자 커튼이 열렸다.

주위는 익숙한 호텔 룸의 거실이었지만 자신은 예복을 입은 채 서 있었고, 윤서경은 그 모습이 잘 보이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결혼을 앞둔 커플이라면 대부분 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유온에게는 처음이었다. 이전에는 윤서경이 바쁘다는 이유로 이유건과 이유연이 대신 왔었다.

자신을 본 윤서경의 눈매가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잘 어울리지만, 좀 더 화려해도 좋겠습니다.”

“맞아요. 그 정도는 평소에도 입고 다니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

아니, 그건 조금……. 고개를 갸웃했지만 하라는 대로 좀 더 화려한 옷을 입었다. 두 번 정도 그렇게 옷을 갈아입었고, 나올 때마다 윤서경은 끄덕였으나 재차 주문했다. 더 화려하게.

결국 네 번째로 유온이 입은 건 흰색은 아니지만 밝은 톤에 온갖 장식이 달리고 반짝거리는 옷이었다. 코르사주까지 장식하자 이전 결혼식과 비슷할 정도로 화려했다. 당연히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윤서경과 김현주는 마음에 든다는 얼굴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던 윤서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정리된 코르사주를 슥 둘러보다가 그 안에서 또 가장 화려한 걸 찾은 뒤 유온에게 다가왔다. 체향과 향수 냄새가 함께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진 뒤, 그는 유온의 가슴에 있던 코르사주를 빼내고 자신이 가져온 걸 대신 꽂았다.

윤서경의 손끝이 가슴을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새로 꽂은 코르사주에서는 싱그러운 풀냄새가 났다. 윤서경이 가만히 유온을 바라보았다.

“이게 더 잘 어울립니다.”

“…….”

굳이 여기서 저한테 그런 건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해 분위기를 깰 성격이 못 되었다. 대신 유온은 다른 걸 물었다.

“서, 서경 씨 옷은요?”

“당신 옷에 맞춰서 만들 겁니다.”

이 옷과 맞춘 예복 차림의 윤서경은 분명 근사할 테지만 여전히 그 옆의 자신이 걱정이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무엇을 입든 옷이 아니라 자신이 문제였다. 그러니 그가 말이나마 마음에 든다고 하는 옷을 입는 게 나았다. 유온은 손을 올려 가슴의 코르사주를 살짝 만지작거리다,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윤서경이 자신을 또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눈매가 가늘었다.

“……갈아입고 나와요.”

어쩐지 분위기가 이상했다. 주위 다른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미묘한 느낌이었다. 탈의실로 들어가 원래 입고 있던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주변은 벌써 정리를 마무리하는 중이었고 윤서경만 소파에 앉아서 손에 든 코르사주를 보고 있었다.

곧 정리를 마친 직원들이 깍듯이 인사한 뒤 방에서 나갔다. 그렇게 거실이 가득 찼었는데 누가 들어왔던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윤서경이 눈을 들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가 소리 내 부른 것도 아닌데 다리가 그가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동시에 윤서경도 일어났다.

그는 손짓이라도 하듯 자연스레 팔을 뻗더니 그 팔로 유온을 안아 올렸다. 조금 전 느낀 그 분위기는 한층 강해져 있었다. 꼭, 눈에 보이지 않는 아지랑이 같은 게 그의 몸 주변에 남실거리는 듯한. 입을 꽉 다문 채 굳은 얼굴 표정은 무섭기까지 한데 그의 체향이 그가 화가 난 게 아님을 말해 주고 있다.

눈을 두 번 깜빡이기도 전에 침실에 도착했고 윤서경은 유온을 안은 채 한 팔로 문을 열었다. 서두르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는 성큼성큼 침실을 가로질러 침대로 가선 몸을 굽혀 유온을 그 위에 내려놓았다. 푹신한 침구가 풀썩, 몸의 모양을 따라서 푹 꺼졌다.

윤서경은 곧바로 두 다리를 침대에 얹으며 올라왔다. 알파의 페로몬이 훅 밀려들더니 유온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커다란 손이 침구를 짚는 소리와 함께 윤서경이 유온의 입술에 키스했다.

오래 목이 타거나 굶주렸던 사람처럼 다급한 키스였다. 윤서경은 입을 벌려 유온의 입술을 깨물고 핥고, 머금었다. 침구가 바스락거리며 두 사람의 체중을 따라 이리저리 구겨지고 흐트러졌다.

얼굴이 반쯤 묻힐 정도로 꺼진 깃털 침구 위에서 유온은 조금 당황한 채로 윤서경의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윤서경에게서 쏟아지는 페로몬은 직접적이고 정제되지 않아 거칠었다. 그것이 온몸을 뒤덮었다. 제게서도 언젠가부터 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사탕이라도 되는 양 빨아 당기는 것에 여린 살이 금세 부었다. 부풀고 따뜻해진 입술을 윤서경은 더욱 달다는 듯이 제 입에 삼키고 입 안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머리카락을 헤치고 쓸어내리는 손길이 다정했고 옷 위로 허리와 가슴을 두서없이 만지는 손은 조급했다.

과격하기까지 한 키스에 유온의 머리는 점점 어지러워졌다. 숨결이 샐 틈도 없이 틀어막힌 상태에서 코로 숨을 충분히 들이마시는 건 유온에겐 익숙지 않고 어려운 일이었다. 간신히 할딱할딱 호흡하곤 있지만 점점 머리로 스며드는 산소가 희박해졌다.

머릿속이 희어지는 걸 느끼며 유온은 힘겹게 두 손을 들어 윤서경의 등을 끌어안고, 너른 등을 덮은 셔츠를 더듬더듬 움켜쥐었다.

“…….”

그 행동에서 유온의 호소를 알아차린 건지 윤서경이 얼굴을 뗐다. 열기와 욕구에 푹 젖어 깊게 침잠한 눈이 유온을 정면으로 내려다보았다. 시선으로 제자리에 못이 박힐 수 있다면 지금 유온은 옴짝달싹 못 하게 되었을 것이다. 유온은 심하게 헐떡이지 않도록 숨을 가늘게 고르며, 숨소리를 죽였다.

그 모습을 집요하게까지 느껴지는 눈길로 응시하던 윤서경이 몸을 일으켰다. 격랑 같던 페로몬이 의식적으로 거두어졌다. 분명 급하게 흥분했고 아직 가라앉지 않았는데, 윤서경은 미련이 없는 것처럼 유온의 위에서 물러났다.

“……갑자기 미안합니다.”

유온은 당황으로 눈을 깜빡였다. 이대로 그가 제 옷을 벗길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그게 싫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물러나다니. 얼떨떨한 듯, 불안한 듯,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벗고 있는 자신을 보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처럼 가 버렸을 때와 똑같았다.

“서경 씨.”

“처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 먼저 자고 있어요.”

그렇게 말한 윤서경은 침대 위에 엎드리면서 조금 구겨진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돌아섰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던 유온은 혼자 남은 침실에서 가만히 제 입술을 만졌다. 말캉하고 따뜻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그가 남기고 간 잔향이 주위를 떠돌았고, 입술엔 미열이 아른거렸다. 잠시 더 입술을 만지작거리다가 창밖을 보았다. 겨울의 짧은 해는 거의 떨어져 창밖에 검푸른 잔광만을 남기고 있었다. 이미 야경의 불빛도 전부 점등되어 어렴풋한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이제 곧 완전히 어두워질 것이다.

유온은 침대 아래쪽 어중간한 위치에 내버려지듯 누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침구를 잡아당겨 침대에 제대로 덮어 둔 뒤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왔다.

방에 들어오자 윤서경의 침실에 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향이 옅었다. 벌써 그의 침실이 그리웠다. 하지만 입맞춤하다가 그대로 가 버린 윤서경이 마음에 걸렸다.

이미 러트에 한 차례 잠자리를 가졌다. 결혼식을 올리기 전이라고 조심스러워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 그렇게 흥분했던 상태에서 나갈 이유가 있다면 윤서경이 원치 않기 때문이라는 것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고개가 툭 떨어졌다. 이곳에 온 이후로 항상 불안했다. 윤서경이 제게 주는 친절이 어리둥절한 한편으로 기뻤으나, 기쁨이 커질수록 그게 떠나간 순간에 올 슬픔이 두려웠다. 윤서경이 해주는 모든 행동이 유온에겐 벅차오르는 행운이었지만 동시에 언제 꺼질지 모를 거품덩어리였다.

바쁘다는 말은 사실인지, 이 관계는 언제까지인지, 결혼생활은 어떻게 될지,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다. 시계는 느리게 흘렀고 초조하고 불안한 심정만 가득했다. 심지어 윤서경이 돌아오기 전에 어디론가 도망쳐버리고 싶다는 충동까지 들었다.

늘 식사가 올라오는 시간에 식탁이 채워졌지만 앞에 앉은 순간 모든 음식 냄새가 역하게 속을 뒤집었다. 해산물이 섞인 토마토소스부터 샐러드의 드레싱과 풀냄새, 올리브유와 진한 식초, 빵, 후식으로 같이 온 과일까지. 스트레스가 심해질 때면 늘 있는 일이었다.

유온은 메스꺼움을 참으며 음식의 뚜껑을 모두 닫고 라임이 들어간 물 한 잔만 남긴 뒤 커다란 쟁반을 들어 현관 밖으로 내놓았다. 여전히 음식 냄새가 떠돌며 후각을 괴롭혔다.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물 한 잔을 겨우 비우곤 제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 * *

윤서경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감으면 달려오는 불안감 때문에 서성이다 간신히 잠든 새벽이었다. 잠든 지 고작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 뿐이다.

거실에 윤서경이 있는 듯했다. 문이 다 닫혀 있고 그는 잔뜩 톤을 낮추어 말하고 있는데도 소리가 다 들려왔다. 유온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윤서경은 소파 앞에서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유온이 나온 걸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유온은 아직 몽롱한 상태였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문을 열고 나온 건 몸에 밴 습관 탓이었다. 의식도 거의 가라앉아 있었고, 윤서경의 목소리에 반응해 밖으로 나온 것에 가까웠다.

그런 유온에게 윤서경의 듣기 좋은 목소리 위로 다른 남자의 음성이 겹쳐지는 게 들렸다. 전화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그 애는 내 동생이고 부모님도 멀쩡히 살아 계세요. 가족이 있는데 다른 사람의 보호를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 말에 유온의 몸이 굳었다. 여전히 정신은 반쯤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상태로도 충격적인 일이 있으면 몸은 반응한다. 전화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의 주인은 이유건이었다.

―결혼할 사이라도, 아니, 이젠 그것마저 아니죠. 다시 경고하는데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짓은 감금입니다.

“글쎄요. 난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군요.”

―나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후회하게 될 거라고.

“당신이 날 후회하게 만드는 게 가능하긴 합니까.”

―그건 두고 보죠.

물속에 던져진 듯 주위가 먹먹하게 일그러졌다가 곧 제 모습을 찾았다. 낡은 소파와 쿠션, 잡동사니, 먼지, 유온은 본가의 창고에 있었다. 눈앞에는 이유건이 있다.

뒤돌아서 서 있던 그가 손에 쥔 휴대폰을 내리며 천천히 다가왔다. 유온은 어느새 아무런 소리도 없이 뺨만을 적시며 울고 있었다. 이유건이 싸늘한 얼굴로 유온을 보았다.

죽기 얼마 전처럼 후각이 오락가락하는지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고, 눈앞은 흐릿했다. 귀도 먹먹하여 고요와 물소리 같은 게 번갈아 청각을 물들였다. 몸이 이곳저곳 아팠다. 벌써 한참 얻어맞은 듯했다.

가까이 다가온 이유건이 손을 들었다. 유온의 몸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벌벌 떠는 모습에 때릴 생각을 거두었는지, 손이 느리게 내려간다. 그게 기회라도 된 것처럼 유온은 중얼거렸다.

“저……, 집에 가고 싶어요…….”

“뭐?”

“집, 집에 가고 싶어요. 보내, 주시면, 안 될까요, 다신…….”

“…….”

“다시는 안 그럴게요. 자, 잘못했어요, 형.”

이유온, 하고 이름을 부르려던 목소리가 왜인지 중간에 끊겼다. 놀라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런 말도 없이 서 있을 뿐이다. 유온은 형이 왜 그러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디로 돌아가겠다는, 그 비슷한 말이 띄엄띄엄 들렸다. 유온은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윤서경이 제게 어떤 태도를 취하든 그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창고는 두려웠고 제 방은 삭막했다.

이렇게 본가로 불려올 때마다 이유건은 말했다. 윤 대표가 언제까지 너를 데리고 있을 것 같으냐고. 누구보다 유온이 잘 알고 있었다. 윤서경이 자신을 참아 주고 있다는 걸. 불쾌하고 당장 내쫓고 싶음에도 아직 얼마간은 참아 줄지 모른다는 것도.

“서경 씨가, 나가라고 할 때까지만이라도, 형…….”

이제는 숫제 애원하는 것에 가까운 모양이었다. 형에게 보이면 더욱 혼이 날 뿐인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이유건에게 빌었다. 집에 보내 달라고. 그런 말을 할 때면 이유건은 항상 웃으며 대답했다. 네 집은 여기야, 유온아.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아니라고 고개를 젓고 싶었다. 하지만 무서워서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절박함이 무서움을 눌렀다. 아니에요, 형, 제 집은, 제가 있고 싶은 곳은…….

……윤서경이 있는 곳.

이유건이 다가왔다. 유온은 눈물 때문에 엉망인 얼굴을 가만히 들었다. 이유건이 뺨을 때릴 수 있도록 고분고분 그 앞에다 대는 것이었다. 머리채를 붙들려 얻어맞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 이유건이 유온의 몸을 끌어당겼다. 동시에 체향이 부드럽게 쏟아졌다. 코끝을 스친 향에 유온이 젖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온몸이 한 품에 안겨 있었다. 기도를 쾅쾅 울려 댈 정도로 거칠던 심장 박동이 맞닿은 몸의 느린 박자에 맞추어 조금씩 기세를 죽였다. 소름이 돋고 뻣뻣해진 피부 위를 페로몬이 촘촘한 습기처럼 감싸며 덮었다. 안온함이라는 낯선 감각이 유온을 끌어안았다. 커다란 손이 유온의 등과 머리를 감싸고 천천히 쓸었다.

“나예요.”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나예요, 그 짧은 한 마디가 유온을 지옥에서 현실로 데리고 나왔다. 눈앞에 있는 게 이유건이 아니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움직여 유온의 눈물을 닦았다. 깨끗해진 시야에 자리한 것은 윤서경이었다.

“……서경 씨.”

“네.”

대답까지 확인했으나 유온의 눈은 한참 그를 바라보다가 바닥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윤서경은 억지로 유온이 고개를 들게 하는 대신 다시 품에 안고 일어서 침실로 향했다. 유온을 침대에 눕힌 뒤 윤서경은 몸을 숙여 유온에게 한 번 입을 맞추고 욕실로 향했다.

이유건을 본 일이 꿈인 듯 멀었다. 꿈에 가깝긴 했다. 환각이라고 해야 할까. 불안정한 정신이 불러낸 허상이었다. 그를 이렇게 빨리 깨닫고 현실로 나와 있는 건 윤서경이 곁에 있던 덕분이었다.

욕실에서 들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유온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물소리가 끊어진 후에는 옷을 입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드라이어 소리가 들렸다. 얼마 후 윤서경이 편안한 차림을 한 채 침실로 나왔다.

그때까지도 유온은 돌아눕지도 않은 채 멍하니 한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침대로 다가온 윤서경이 이불을 들추며 안으로 들어와 유온을 품에 끌어안았다. 심장이 두근두근 울렸다. 이번엔 불안한 박동이 아니라 뺨이 뜨거워지는 걸 동반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윤서경을 홀로 보고 좋아할 때 느끼던 것과 같은.

“이유온 씨.”

“……네.”

“연극이나 영화 좋아합니까.”

“네?”

뜬금없는 질문에 유온이 고개를 들었다. 좋은지 싫은지 물으면, 싫어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이 너무 많고 간격이 좁기 때문에 앉아 있으면 가슴이 답답해져서 잘 가지 않는다. 고민한 유온은 답을 내놓았다.

“사람이 없는 시간이라면…….”

이른 새벽이나 아주 늦은 밤에 가면 영화관은 괜찮았다. 자리도 넓고 새벽이나 심야 회차로 가면 거의 아무도 없는 곳에서 볼 수 있었다. 따지자면 영화보다 연극을 좋아하지만, 이건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사람을 피할 길이 없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전시회는요.”

“그, 그것도요.”

이것도 마찬가지였다. 유명한 작가의 전시회는 사람이 바글거린다. 예전에 혼자 무하의 전시회에 갔다가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튀어나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간다고 하면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전시회나, 상설 전시를 하는 소규모 개인 갤러리에 가는 게 전부였다.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윤서경이 말했다.

“내일은 외출할까요.”

“……네.”

“그럼 어서 자요.”

신기하게도 어서 자라는 말을 듣자마자 눈이 살살 감겼다. 윤서경은 유온을 품에 안은 채 몸을 조금 움직여 사이드테이블에 놓아두었던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다시 침대 가운데쯤으로 돌아와 누웠다. 등을 토닥이는 손이 느리고 부드러웠다. 유온은 따뜻한 물속에 가라앉듯 평온하게 잠이 들었다.

* * *

다음 날 윤서경이 유온을 불러낸 것은 꽤나 애매한 시각이었다. 오후 4시. 윤서경은 연극을 보자고 말했다. 이한영이 데리러 왔고, 호텔에서 20분 정도 차로 이동했다.

연극을 보기엔 애매한 시간이 아닌가 생각하는 동시에 조금 걱정이 되었다. 윤서경의 체향이 바로 곁에서 느껴지니 조금은 괜찮겠지만 수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 한두 시간은 꼼짝도 못 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두어 시간 정도니까 참으려면 참을 수 있겠지.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유온은 열심히 각오했다.

극장에 도착하자 이한영이 내려 문을 열어주었다. 그가 뭐라 잡담하는 것을 들으며 로비로 들어갔다. 유온은 눈앞에 보인 로비의 모습을 보고 조금 놀랐다. 중간 규모쯤 될 극장의 로비는 유니폼 차림의 직원을 제외하면 윤서경 혼자뿐이었다.

이한영은 로비 문을 열어 주고 윤서경에게 짧게 인사한 뒤 사라졌다. 유온은 썰렁한 로비를 한번 돌아보았다. 벽에 가득 지금 상연하는 연극의 포스터와 홍보물이 붙어 있었고, 아직 공연장의 문은 닫힌 채였다. 직원들은 관객이 많을 때와 똑같이 제자리에서 대기 중이었다.

“왔습니까.”

“네, 그런데……, 사람이 없네요.”

“네.”

그 짧은 대답이 다였다. 왜 로비에 사람이 하나도 없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그는 그저 평소와 똑같은 얼굴로 시계를 한번 보았다. 그때 직원이 입장하실 시간이라며 정면의 문을 열었다.

유온은 혹시 다른 사람들은 먼저 들어가 있는 건가 생각하며 윤서경의 뒤를 따라갔다. 그러나 객석 역시 아무도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예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몇몇,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문가에 서서 윤서경을 기다리다가 인사를 나누고 구석 자리로 흩어졌다. 윤서경은 유온을 무대가 잘 보이는 중앙 자리로 이끌었다.

나무로 된 집 모양의 무대 장치와 조명은 여느 연극 무대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천을 씌운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자 곧 직원이 와서 공연의 팸플릿을 건넸다. 유온은 어색한 기분으로 팸플릿을 뒤적거렸다.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요즘 공연하는 것 중에 가장 평이 좋다고 해서 골랐습니다.”

윤서경이 유온의 혼란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왜 극장에 아무도 없는지는 여전히 말해 주지 않았다. 가장 평이 좋은 연극이라고 하니 자리가 안 팔린 건 아닐 것이다. 어중간한 요일, 어중간한 시간. 원래 없던 공연을 끼워 넣기라도 한 걸까.

고민하던 사이 공연 시작을 알리는 안내 멘트가 나왔다. 관객은 아무도 없었지만 관객들에게 주의 사항을 안내하는 평범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곧 객석의 불이 꺼졌다.

팸플릿 내용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과 달리 공연은 시작하자마자 유온을 끌어들였다. 주위에 사람이 없어 신경을 빼앗기지 않았던 것도 있어서, 유온은 연극에 완전히 몰입했다. 끝나는 순간까지 한 번도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연극이 끝나고 배우들이 나와서 인사를 할 땐 열심히 박수를 쳤다. 이내 주위가 밝아졌다.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던 유온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윤서경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재미있었습니까?”

“네……. 정말요.”

언뜻 윤서경의 눈매가 휘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이만 일어나자며 유온을 데리고 객석 계단을 올랐다. 윤서경이 나오는 걸 본 관계자들이 몰려들었다.

“대표님, 어떠셨습니까. 마음에 드셨을지…….”

“괜찮았습니다. 나중에 이야기하지요.”

가볍게 그들의 말을 끊은 윤서경이 유온의 어깨를 감싸며 밖으로 나왔다. 차에 타기 전 그는 유온을 한 번 살폈다.

“힘들어요?”

“아, 아니요.”

“갤러리에도 갈까 하는데, 언제가 좋겠습니까.”

“네? 아, 전 언제든 괜찮아요…….”

“화요일엔 낮에도 갈 수 있고, 다른 요일엔 아무래도 저녁 늦게 가야 합니다. 미리 티켓을 예약해 둔 관람객이 있어서요.”

“…….”

휴관일이나 폐관 후에 보러 간다는 뜻이었던 듯했다. 그럼 오늘 연극도 역시 원래는 공연하지 않는 회차거나, 객석을 통째로 빌리거나 한 모양이다. 새삼 윤서경의 재력에 놀랐고 그 재력을 자신에게 쏟아준다는 게 신기했다.

“식사는?”

유온이 고개를 들었다.

“밖에서 해도 괜찮겠습니까?”

이번엔 끄덕였다. 다행히 메뉴까지 뭘 먹고 싶은지 물어보진 않았다. 의견을 묻는 건 유온에겐 매우 어려운 질문 중 하나였다.

운전석의 이한영이 알아서 차를 몰았고, 도착한 건 삼청동 구석에 숨듯이 자리한 한옥이었다. 윤서경이 안으로 들어서자 미리 연락을 받고 있었는지 직원이 곧바로 별실로 안내했다.

방에는 창호 사이로 유리창을 내서 그곳을 통해 작은 정원이 보였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정원에는 소나무와 연못이 있었다. 연못 위로 낮은 바위를 타고 물이 떨어졌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음악 대신 평온하게 방 안에 흘렀다.

직원이 들어와 두 사람의 옷을 받아서 옷걸이에 건 뒤 상을 차렸다. 각자의 앞에 작은 냄비가 하나씩 놓인 전골 요리였다. 재료를 넣은 뒤 불을 켜자 금세 온기가 올라왔다. 재료는 직원이 때를 맞춰 들어와서 냄비에 모양을 갖추어 넣어 주었다.

채소가 숨이 죽어 갈 때쯤 직원이 고기 그릇을 가까이 당겨 준 뒤 나갔다. 전골에 들어간 재료는 굉장히 많았다. 채소만 해도 몇 종류에 버섯과 두부까지. 젓가락을 든 채 뭘 집어야 하나 들여다보고 있는데 윤서경이 말했다.

“싫어하는 재료는 골라내도 됩니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유온은 채소를 접시로 옮기면서 자꾸 따라오려고 하는 표고버섯을 냄비 가장자리로 슬쩍 밀었다. 다행히 윤서경은 그 모습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후식과 차까지 먹고 호텔에 돌아오자 9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다소 노곤해진 유온은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윤서경에게 한 번 잡혔다.

“옷 갈아입고 잠시 나와요.”

“네…….”

고개를 끄덕인 뒤 유온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가볍게 몸을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거실에 나오자 윤서경도 외출복을 벗은 뒤였다. 소파에 앉은 그의 앞에 홍보물이 잔뜩 쌓여 있었다.

전시회와 관련된 것도 있었지만 몇 개는 가죽이나 벨벳으로 싼 얇은 책자였다. 방문 앞에 어정쩡하게 선 유온을 윤서경이 손짓해 불렀다. 가까이 다가가서 미적미적 서 있기만 하자, 윤서경은 커다란 몸을 일으키더니 유온을 제 옆에 아예 앉혔다.

“이건 나중에 훑어보도록 하고.”

윤서경이 반들반들한 종이더미를 모아 한쪽에 놓으며 말하곤, 책자를 하나 집었다. 언뜻 보자 치워 놓은 건 연극이나 뮤지컬의 리플릿이었다.

유온의 시선이 책 표지로 향했다. 유명 호텔의 로고가 찍혀 있었다. 지난번에 보러 갔던 결혼식장이 있는 호텔이었다.

“그쪽 플로리스트들이 시안을 몇 개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결혼식장에 장식할 꽃을 같이 보자고 하는 걸까. 순식간에 유온의 얼굴이 발개졌다. 흘끔 윤서경을 보았다. 그는 책을 펼쳐 유온에게 건네주었다.

“천천히 봐요. 난 먼저 봤습니다.”

네, 하고 대답한 뒤 책자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옆의 윤서경이 계속 신경 쓰일 줄 알았으나 결혼식장에서 보낸 꽃 장식의 시안은 절로 시선을 붙들 만큼 아름다웠다. 햇살 아래 야외 결혼식장을 이런 꽃들로 채운다면 그 예식은 분명 누구도 잊지 못할 만큼 화려하고 찬란한 순간이 될 것이다.

유온이 막 세 번째 책자를 손에 들었을 때였다. 윤서경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무심코 유온도 그를 보았다. 메시지 내용을 확인한 윤서경은 표정을 바꾸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급한 일이 생겨서 잠깐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금방 오겠지만 혹시 내가 늦어지면 먼저 쉬어요.”

“아, 네, 다녀오세요…….”

윤서경은 유온의 뺨을 감싸 짧게 입을 맞추곤 방을 나섰다. 그의 온기와 체향으로 가득하던 공간이 금세 썰렁해졌다. 아쉬운 얼굴로 서성거리던 유온은 다시 소파에 앉아 책자를 펼쳤다.

식장마다 분위기는 달랐지만 하나같이 예쁜 꽃들이었다. 이런 꽃 장식은 꽃말을 고려하기도 한다던데. 그 사실에 생각이 미친 유온은 휴대폰을 집어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다. 꽃 이름은 쓰여 있으니, 검색해 보면…….

“…….”

그리고 곧바로 자신이 무엇을 하려 했는지 잊었다.

실시간 검색어에 윤서경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급하게 나간 건 이것 때문일까. 공연히 손이 떨렸다. 검색어는 계속해서 바뀌었다. 윤서경, 부경, 그리고……, 윤서경 결혼, 윤서경 결혼 상대……, 화명, ……이유온, 이유건.

좋은 일은 아닌 게 분명했다. 유온은 검색어 창을 키워서 계속 바뀌는 단어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주 잠깐씩 불온한 단어가 스치고 지나갔다. 스캔들, 범죄, 감금, 경찰 조사 같은.

당황스럽다 못해 비현실적이었다. 유온은 멍하니 스크롤을 내리다가 기사 몇 개를 열어 보았다. 대부분의 이상한 검색어와 기사는 부경 측에서 지우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름도 처음 들어 보는 이상한 신문의 기사가 조회 수 때문에 포털 메인에 노출되고 있었다.

윤서경이 혼담을 거절당한 후 그 상대를 강제로 감금해 두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내용이었다.

알파와 오메가는 서로에게 거절당하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여 다양한 형태로 불만을 드러냈다. 그 불만은 몸집이 커지면 자신을 해치기도, 남을 해치기도 했다. 권력이 있는 경우에는 비도덕적인 수단을 동원해서 강제로 결혼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게 윤서경은 아니었다.

왜 윤서경이라는 이름 옆에 이런 단어가 붙어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이런 말을 들어도 되는 사람이 아니다. 함께 따라붙는 이유온, 이유건이라는 세 글자가 범죄를 뜻하는 단어와 똑같이 혐오스럽게 보였다.

또 이렇게, 이런 식으로 그를…….

‘인터뷰.’

윤서경이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발치로 휴대폰이 날아왔다. 맞지는 않았지만 휴대폰은 액정이 깨지며 옆으로 굴러갔다. 그가 물건을 직접 집어 던지는 일은 처음이었다. 유온의 맨발이 불안하게 꼼질거렸다.

‘했습니까?’

그가 뭘 보고 그러는 건지 잘 알고 있다. 이유건과 친분이 있는 신문사에서 단독 보도를 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어떤 오메가의 결혼 생활에 관한 것이었다. 익명이었으나 기사를 읽으면 누구나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유온은 윤서경의 추궁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이 기자의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비록 곁에 이유건이 있었고, 머리가 멍해지는 약을 먹었고, 기자가 원하는 답을 내놓을 때까지 다그침을 받긴 했어도.

‘얼마를 받았습니까. 얼마가 되었든, 나한테 달라고 말하지 못할 정도였어요?’

‘……천만 원이요…….’

윤서경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천만 원은 윤서경에게 푼돈이었다. 이유건은 일부러 적은 금액을 말하고 윤서경에게 가서 그대로 말하라고 했다. 고작 그 정도 돈에 제 체면이 구겨졌다는 걸 윤서경이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럼 돈 때문은 아니었겠지.’

‘…….’

‘당신 형이 하라고 시켰습니까.’

그의 말에 유온은 움찔했다. 그 말대로였다. 형이 하라고 시켰다. 몽롱한 정신으로, 다른 알파까지 앉아서 보는 앞에서 형에게 혼이 났다. 기자는 내내 끈적끈적한 눈길로 유온을 훑고 있었다. 약 기운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순간은 끔찍했다.

그걸 윤서경이 알아주길 바랐다. 형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걸, 나는 당신을 위해서 고통을 감수하고 형에게 거역하기에는 너무 약해 빠지고 멍청하니, 그걸 너그러이 봐주길 바란다는 걸.

하지만 다음 말은 유온을 얼어붙게 했다.

‘당신이 그렇게 좋아하는 형 덕분에 내가 천하의 쓰레기라는 소리를 들으니, 어때요. 기분이 좋습니까?’

침묵이 내려앉았다. 유온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어깨가 바들바들 떨렸다.

‘이유온 씨, 제발……. 내가 당신한테 청혼했던 걸 더 이상 후회하게 만들지 말아요.’

윤서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입을 벌린 채 기다리던 수렁이 단숨에 유온을 집어삼켰다.

그때와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신 때문에 윤서경의 명예가 먹칠되었다. 그때는 기사가 곧 내려가고 헛소문, 없었던 일로 처리가 되긴 했으나 한동안 불필요하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야 했다. 체면도 땅에 떨어졌다. 지금도 그때와 똑같다. 온몸이 따끔거리고 아파 오는 것 같았다. 가슴에 서늘하고 무거운 덩어리가 들어찼다. 납을 삼킨 기분이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후회할 거라고 하던 전화 너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 목소리는 곧바로 이 일과 연결되었다. 이건 큰형이 벌인 일이다. 제 손으로 일을 수습하기 위해선 큰형의 도움이 필요했다.

형의 화를 풀어야 했다. 그러려면……, 집에 돌아가야 한다.

유온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급한 움직임에 다리를 테이블에 부딪쳤지만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거나 잡히는 옷을 끌어내는 손이 주체가 안 될 만큼 떨렸다. 옷장 안으로 옷이 우르르 떨어졌다.

실내복 위에 손에 잡힌 얇은 외투 하나를 걸친 뒤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심지어 맨발이었다. 등 뒤에서 무거운 문이 완전히 닫히기도 전에 엘리베이터 홀에 있었다. 유온은 급하게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유온이 버튼을 누르기 전 엘리베이터는 이미 올라오는 중이었다. 어지러운 유온의 시야에는 그것이 채 들어오지 않았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안으로 무너지듯 들어가려던 유온의 몸이 무언가에 가로막혔다.

“……그 꼴로 어딜 갑니까.”

윤서경이었다. 멍하니 그를 올려다본 유온이 말했다.

“지, 집에, 요.”

“집에? 왜요.”

“…….”

윤서경이 뉴스를 알고 있을까. 알기에 나갔던 거겠지. 유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발치로 던져진 휴대폰, 자신을 보던 윤서경의 화가 난 눈빛이 떠올랐다.

“죄송해요, 서경 씨.”

“…….”

“죄송해요, 제가, 제가……, 아니, 일단, 저 집에 갈게요…….”

“가서 뭘 하려고요.”

“형한테 잘못했다고 말하고…….”

목소리가 벌벌 떨렸다. 유온의 머릿속을 채운 건 죽어 가던 고양이였다. 자신 때문에 죽은 아이. 자신이 키우겠다고 고집만 부리지 않았다면 죽지 않았을, 그 회색 고양이.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죄송하다는 말만 끝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윤서경은 이제 후회할 것이다. 자신에게 청혼한 걸, 이렇게 결혼 준비를 해 온 걸, 이곳에 두고 돌봐준 걸, 전부 후회하며, 이번에야말로 차가운 얼굴을 하겠지. 그러면, 그때는…….

“아…….”

헐떡이며 경련하는 어깨를 두 손이 붙잡았다. 추궁하고 뒤흔들려는 손이 아니었다. 극히 부드럽고, 다정하게까지 느껴졌다. 유온의 눈에 그제야 초점이 잡혔다.

“이유온 씨.”

“…….”

“당신은 그들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유온의 입술이 달싹였다. 하지만 사과하는 것 말고는 해결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 길게 떨리는 몸을 윤서경이 안아 들었다. 맨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 따스한 온기가 몸을 감쌌다. 윤서경은 유온을 데리고 와 소파에 앉히고, 발을 손으로 털어 주었다.

“이유온 씨.”

“…….”

“별것 아닌 일입니다. 당신이 이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유온이 천천히 눈을 들었다. 윤서경의 얼굴을 보는 건 무서웠다. 그러나 말하는 목소리가 너무 부드러워서, 그의 표정을 보아도 될 것 같았다. 눈이 마주쳤다. 검은 눈동자가 물끄러미 자신을 보고 있었다.

“당신 가족들……. 그래요. 마침 기회가 됐으니 말하죠.”

“…….”

“나는 지금부터 당신이 여태까지 누리지 못한 모든 걸 그들에게서 하나하나 다 빼앗아 줄 겁니다.”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윤서경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제 당신은 누구도 무서워할 필요 없습니다.”

천천히, 윤서경이 팔을 뻗었다. 그의 손이 뺨에 닿았다.

“나를 포함해서요.”

이제야 알았지만 윤서경은 유온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였다. 어떤 잘못이라도 고백하는 것처럼. 아직도 떨리는 무릎 위로 윤서경의 다른 손이 올라왔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이 기억하는 것과 다르게.”

그의 두 눈이 진심을 담아 유온을 바라보았다.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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