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어나라고 했어, 이유온.”
뺨에 아픔이 느껴졌다. 유온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생각했다.
‘……?’
분명 죽은 것 같았는데, 이상한 장면 연결이었다. 멍하니 있느라 제대로 서는 동작이 굼떴다. 그러자 상대는 가차 없이 유온의 머리채를 잡아 쥐고 뺨을 또 후려쳤다. 다시 비틀거렸지만 이번엔 재빨리 일어났다. 눈앞에는 차가운 인상의 남자가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슈트는 비싼 물건이고 머리 모양도 점잖았다. 유온과 전혀 닮지 않았지만 그의 큰형, 이유건이었다. 유온은 겁먹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생각하기도 전에 눈앞에 이유건이 있다는 게 그냥 무서울 뿐이었다. 그는 엄격한 사람이었다. 유온이 잘못한 게 있으면 자주 체벌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면 모른다는 이유로 더 맞아야 했다. 지금 유온은 당연히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몰랐다.
혹시 죽을병에 걸린 게 내 잘못인 걸까. 그럴지도 몰랐다……. 아니, 꿈이었나? 그러면 어디서부터 꿈이지. 이렇게까지 생생한 꿈이 있다니. 죽어 가는 과정에서 느낀 격통과 추락의 감각이 선명하다. 죽어 본 적 없는 사람의 상상이 만들어 낸 것치고는 자세하고 아귀가 잘 맞았다. 아직도 가슴이 울리고 걷어차인 듯 아픈 것 같은데.
하지만 그렇게 숨이 끊어진 순간부터 지금까지 꿈에서 깨어나는 듯한 과정 없이 그냥 죽 이어졌다. 죽고 눈을 감았다가 뺨을 맞으며 다시 뜬 느낌이었다.
죽은 것만은 확실한데. 아니면 죽기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는 꿈인 건가.
“잘못했어요, 형.”
유온은 우선 사과했다. 이유건의 얼굴이 비웃듯 비틀렸다.
“뭘 잘못했는지는 알고?”
“…….”
이유건의 커다란 손을 향한 유온의 눈에 더더욱 두려움이 담겼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유건은 그 이상 유온을 때릴 마음이 없었는지 말했다.
“너 서 회장 아들 만나서 무슨 소리 했어?”
“네, 네?”
서 회장? 유온이 아는 서 회장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서원희 회장, 윤서경의 어머니. 즉 이유건이 말하는 서 회장의 아들은 윤서경이었다.
“그게…….”
유온은 혼란스러웠다. 이 말은 처음 듣는 게 아니었다. 이건 윤서경과 처음으로 가까이서 마주 앉았던 후 그가…… 집안에 혼담을 넣었을 때였다. 같은 상황을 다시 겪다니, 역시 꿈인 듯했다. 아니면 죽어서 보는 환상이거나.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더라. 어쩌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게 전부였다. 자신이 윤서경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아직도 기억했다. 기억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아무 말도 못 했으니까.
혼자서 흘끔거린 것 외에 윤서경을 제대로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너무 긴장이 돼서 입도 뻥끗할 수 없었고 그대로 자리는 끝이 났는데, 그 결과는 뜻밖이었다.
“뭐라고 말하면서 홀렸기에 그 집에서 혼담이 들어와.”
“아, 호, 혼담이요.”
윤서경의 집에서 정식으로 혼담이 들어온 것이다. 그의 집안, 부경그룹은 굴지의 대기업으로 한국 20대 기업 끄트머리에 겨우 들어 있는 유온의 집안 화명그룹과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그쪽에서 먼저 혼담을 제안하다니, 화명그룹으로선 두 팔을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문제는 그 혼담의 당사자였다. 사실 유온의 부모님도 부경에 혼담을 넣을 기회만 보고 있었다. 유온이 아니라, 유온의 작은형 이유연을.
유온은 집안에서 주목도 애정도 받지 못하는 아이였다. 어릴 적부터 성격은 유별나게 소심했고 남들보다 모자랐다. 집안의 오점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어울리지 않았다. 어른들은 유온을 달래기도 하고 다그치기도 했지만 결국 끝까지 그 답답함이 고쳐지지 않았다.
부경그룹의 자제와 결혼한다면 그 집안과 친정을 적당히 조율하며 이익을 올릴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리고 남들 눈에 좋게 비칠 화사한 외모와 밝은 성격을 가져야 했고. 그에 그린 듯 부합하는 건 이유연이었다.
물론 이유연도 부경의 안주인이 될 기회를 잡고 싶어 했다. 남편이 될 사람이 그 윤서경 대표라는 이유도 컸다. 윤서경은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해도 홀로 특별한 사람이었으니까. 주위를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가진 알파에, 얼굴은 잡지에 실릴 만큼 잘생겼고, 어릴 때부터 이미 사업 수완이 뛰어나 지금은 부경의 핵심 중 하나인 호텔 체인을 맡아 경영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모든 걸 다 가진 사람이었다.
이유연은 그와 결혼하기 위해서 어릴 때부터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가 좋아하는 악기를 공부했고 꽃을 좋아한다는 그를 위해 플로리스트 자격증도 땄다. 그런데, 윤서경이 작은 파티에서 우연히 유온을 가까이서 만나 보곤 무슨 생각인지 집안을 통해 유온에게 청혼한 것이다.
당연히 집안은 발칵 뒤집어졌다. 유온 역시 오래전부터 정해진 판매처……, 혼처가 있었다. 유온보다 나이가 좀 많았고 안 좋은 소문도 있었지만, 집안의 사업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었다.
물밑에서는 거의 진행이 끝난 혼담이었다. 이미 결혼을 조건으로 도움을 받은 것도 많아 절대로 무를 수는 없는 상황. 하지만 그렇다고 부경에서 먼저 건넨 혼담을 거절하겠는가? 이유연이 윤서경과 결혼할 거라고 장담도 못 하는데.
결국 부모님의 결정은 이유연을 원래 유온의 결혼 상대에게 보내고 유온과 윤서경을 결혼시키는 것이었다. 이유연은 절대 그런 사람이랑 결혼할 수 없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다가 쓰러지기까지 했다.
어쨌든, 그건 이 순간으로부터 조금 나중의 일이고…….
“전 아, 아무 말도 안 했어요, 형.”
사실이었다. 뺨이 새빨갛게 부어오른 채 겁먹어 저를 쳐다보는 꼴에 이유건이 짜증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래. 네가 윤서경 앞에서 말 한 마디 제대로 했을 리가 없지. 말더듬이에 사람이랑 눈도 못 마주치는 덜떨어진 게.”
“…….”
이유건의 시선이 유온을 훑었다. 그리고 깨끗한 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쓰레기를 보듯 인상을 찡그렸다. 전부 사실이었기에 유온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제 발끝만 쳐다보았다. 잘못했다는 말을 하려 했으나 그 짧은 말도 정말 처참하게 더듬을 것 같아서 입술만 달싹였다. 그걸 본 이유건이 짜증스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팔이 높게 들렸다. 유온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모자란 습성.”
철썩.
“언제쯤 되어야 고칠래?”
또다시, 철썩. 몇 번째인지 모르게 뺨을 맞고 유온은 비틀거리다가 결국 넘어졌다. 밭은 숨이 튀어나왔다. 울먹이듯 헐떡거리는 유온을 한심하게 쳐다본 이유건이 몸을 돌려 나갔다.
문이 닫힌 후, 멍하니 있던 유온은 아픈 걸 참으며 더듬더듬 침대맡을 뒤졌다. 이날 아마도 자다 깨어나서 곧바로 형이 방에 들어왔으니 휴대폰은 이 근처에 있을 거였다.
역시 곧 좀처럼 사용할 일 없는 휴대폰이 베개 밑에서 나왔다. 이때를 기준으로도 꽤 오래된 모델이다. 화면을 켜자 날짜가 표시되었다.
“…….”
4년 전이었다.
햇수로 4년 전, 유온의 기억에서는 약 3년 반 전. 이날로부터 반 년 후에 유온은 윤서경과 결혼한다. 입 안에서 느껴지는 피 맛과 뺨의 아픔을 느끼며 유온은 날짜 표시를 멍하니 보았다. 잠들었을 때처럼 죽은 뒤에도 꿈을 꾸는 걸까. 기억을 이런 방식으로 되짚어 보게 되는 건지도 몰랐다.
기왕 돌아갈 거 좀 더 행복하던 순간으로 돌아가 주지……. 아. 퍼뜩 떠올렸다. 그러려면 우선 행복한 순간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삶에서 가장 얼떨떨하면서도 기뻤던 건 윤서경과의 결혼이 결정되고 결혼식이 있기까지였다. 그 시간 동안, 유온은 몰래 짝사랑하던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꿈처럼 행복했다.
나이 많은 사업가와의 결혼을 피했다는 것도, 집을 나와 부모님과 형들, 특히 큰형에게서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는 사실도 좋았다. 그 모든 게 다 윤서경이 청혼해 준 덕분이었다. 윤서경은 곰팡이 핀 지하 같은 유온의 인생에 비친 유일한 빛이었다.
그러니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로 돌아온다면 이 순간이 맞았다. 결혼식과 신혼여행 전, 결혼을 준비하던 기간.
설마 결혼 생활도 그대로 겪게 될까? 유온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조용히 문을 열고 1층으로 내려갔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도둑처럼 주방으로 들어가 얼음을 챙기면서도 조심스러웠다. 가족 중 누군가가 물이라도 마시러 나오면 꼼짝없이 마주쳐야 할 테니까.
기억으로는 아무도 안 마주쳤던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이 겁이 났다. 얼음을 비닐봉투에 담은 유온은 다시 발끝을 들고 살금살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무사히 방에 도착한 뒤 문을 닫고 침대에 누웠다. 아직 형에게 맞은 두려움이 가라앉지 않아서 문을 잠그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누가 방에 오기라도 한다면 크게 혼이 날 것이었다. 유온은 수건으로 감싼 얼음주머니를 부푼 뺨에 살짝 가져다 댔다. 펄펄 오르던 열이 얼음의 냉기에 조금씩 식었다.
형과 대화할 때 너무 긴장하고 있었는지 몸이 피곤했다. 그러나 뺨이 아파서인지 잠은 오지 않았다. 이상하다. 옛날엔 방에 돌아와 누워서 곧바로 잠들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얼음이 녹는 바람에 침대가 다 젖지 않았었나……. 다른 기억과 섞인 건가.
멍하니 얼음을 대고 있는데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광고겠지, 싶어 느릿하게 화면을 확인한 유온은 얼음주머니가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몸을 홱 일으켰다.
[잠깐 볼 수 있을까요.]
윤서경에게서 온 문자였다.
* * *
유온은 서둘러 준비를 하고 뛰쳐나오듯 집을 나섰다. 부은 뺨을 가릴 길이 없어서 모자에 머플러까지 둘러맸다. 겨울이라 다행이었다. 그래도 멍이 가려지지 않았으나 넘어져서 그랬다고 말하면 그런가 보다, 할 정도는 되었다. 윤서경이 과연 멍에 대해 물을지 모르겠지만.
윤서경이 말한 약속 장소는 집에서 가까운 호텔 라운지였다. 택시에서 내려 화려한 로비를 지나 라운지로 들어가자, 창가에 그림처럼 근사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유온은 왠지 머뭇거리다가 그리로 가까이 다가갔다.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낮은 목소리에 가슴이 두근댔다. 이때 윤서경이 자신을 불러낸 적은 없었는데. 청혼 후 처음 만난 건 상견례 자리에서였다.
“부모님에게 말을 듣기 전에 전해야 할 것 같아서요. 이유온 씨 집에 혼담을 넣었습니다. 갑작스럽지만 아마 당신 부모님은 수락할 겁니다.”
유온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시선을 내리깐 채 고개만 끄덕였다. 부모님에게서 아직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한 건 사실이다. 혼담을 먼저 들은 이유건이 집에 와서 유온을 다그쳤을 뿐이다.
“저……. 그런데, 왜 저랑 결혼을 하려고 하시는 거예요?”
이 말을 꺼내기 위해선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윤서경 같은 사람이 정한 일의 이유를 자신이 어떻게 묻는단 말인가. 하지만 기억과 달리 오늘 이 시간에 그를 만났고, 직접 결혼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겨우 물을 수 있었다. 자신 같은 사람에게 청혼한 이유가 무엇인지.
윤서경이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
“그게 나한테 도움이 되니까요. 당신도 그렇지 않습니까?”
도움……. 유온의 눈동자가 아주 짧은 순간 굳었다가 풀어졌다.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의 결혼이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유온은 따뜻하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머플러를 더 올려 감췄다. 눈까지 가려질 정도였지만 불편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 꿈의 목적은 생전에 유온이 겪지 못했던 좋은 일들을 겪게 해 주려는 것 아닐까? 원래 있었던 일과 달리 오늘 이렇게 윤서경을 만났다. 이것부터가 유온에겐 굉장히 좋은 일이었다. 그럼, 어쩌면 이 꿈에서 깨어나기 전까지 몇 번 정도는 더 이런…….
유온은 정신 차리라고 말하듯 제 손등을 살짝 꼬집었다. 머리가 멋대로 상황을 좋게 해석하려고 한다. 이런 생각은 얼른 꾹꾹 눌러 없애 버려야 했다.
“이 말을 하려고 부른 겁니다. 정문으로 차를 보내죠. 타고 들어가세요.”
윤서경의 눈길이 뺨에 일순 머문 것 같았으나 곧 떠났다. 실제 본 건지 안 본 건지 알 수 없었다. 유온은 괜히 머플러를 한 번 더 끌어 올리고 꾸벅 인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어지면서 그가 손목시계를 확인하는 모습을 흘끗 보았다가 들킬세라 다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가 준비해 준 차는 자신이 타는 게 미안해질 정도로 고급스러웠다. 넓은 뒷좌석 구석에 앉아 최대한 아무 소리도 내지 않도록 웅크리고 앉은 채 집에 도착했다. 그렇게 불편하게 가는데도 금방 집에 도착하고 말았다.
대문가에 서서 보자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환한 창문을 본 유온이 움찔했다. 발끝이 문턱을 넘지 못한 채 움찔거렸다.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던 운전기사가 의아해했다. 유온이 집에 들어가는 것까지 배웅할 생각인지 그는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이상하게 여기는 듯한 눈길에 유온은 어쩔 수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을 닫자 그제야 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유온의 시선이 다시 환한 창문을 보며 흔들렸다.
저 안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 안다. 부모님과 두 형이 유온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무슨 일이 이어질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
덜컥 겁이 났다. 원래 기억대로라면, 가족들이 다 모인 뒤 이유건이 자던 유온을 깨워 바로 끌고 내려왔다. 심지어 외출한다는 말도 없이 나왔으니 모두 유온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뒤늦게 휴대폰을 확인하자 이유건에게서 걸려 온 부재중 통화가 하나 있었다.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자신 하나 때문에 가족들을 기다리게 하다니…… 얼마나 화가 났을까.
유온은 두려운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이 평소보다 유달리 무겁고 차가웠다. 쇠 손잡이의 냉기에 온몸이 차가워지는 듯했다. 간신히 현관으로 들어서서 중문을 열자 역시 거실에 모여 앉아 있던 가족들의 시선이 유온에게 쏠렸다.
“……다녀왔습니다.”
“와서 앉아라.”
모자와 머플러, 겉옷을 벗고 소파에 앉자 가사 도우미가 유온 몫의 차를 가지고 왔다. 당연히 그 차의 김이 다 가시고 차가워질 때까지 유온은 차에 손도 댈 수 없었다. 가족들은 유온의 뺨을 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도 없이 어디 갔었어?”
큰형이 물었다. 유온은 한층 겁에 질려 온몸이 뻣뻣해지는 걸 느끼면서,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대답했다.
“유, 윤 대표님이 잠시만 나와 보라고 해서…….”
“허락도 없이?”
“죄, 죄송해요.”
“……그래.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유온은 창백해진 채 입을 다물었다. 창고로 끌려가겠구나, 라는 두려움에 바르르 떨리는 손끝을 애써 움켜쥐었다. 다음으로 입을 연 건 어머니였다.
“지난번 파티에서 윤서경 대표랑 무슨 일 있었니?”
“아, 아니요, 아무 일도……. 자, 자리가 우연히 가까워졌어요. 저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잘 모르겠어요. 죄송해요…….”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어머니 옆에서 작은형은 눈을 치켜뜨고 있었고, 아버지는 무언가 생각하는 기색에, 큰형은 싸늘했다. 모두가 유온이 부정이라도 저질렀다는 얼굴과 태도였다. 어머니의 말을 시작으로 추궁이 이어졌으나 정말로 그날도, 그 전에 몇 번 윤서경을 마주쳤을 때도 별다른 일은 없었다.
묵묵히 그 추궁을 견딘 유온은 이만 네 방으로 가도 좋다는 이유건의 허락에 가족들에게 인사한 뒤 방으로 올라왔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유온이 방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이유연이 쪼르르 따라 들어왔다.
“야, 너 똑바로 말해.”
“뭘요…….”
“너 윤서경한테 무슨 짓 했어? 뭘 했는데 그 인간이 홀려서 당장 결혼하겠다고 해? 네 뭘 보고?”
거실에서 하고 또 했던 이야기였다. 숨겨야 할 사실조차 없어서 유온의 대답은 계속 똑같았고 대화는 제자리를 맴돌았다. 굳이 따라 올라와 물어도 할 말이 없다. 유온은 그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정말 아무것도 안 했어요, 형.”
가늘어진 이유연의 시선이 흘끗 유온의 뺨을 향했다. 불쌍할 정도로 부어오른 뺨을 본 그가 짜증스럽게 혀를 차더니, 더 말하기도 싫다는 듯 나가 버렸다. 쾅 닫히는 문을 보던 유온이 고개를 돌렸다. 급하게 나가느라 내팽개친 얼음주머니가 다 녹아서 주위로 온통 물이 번져 있었다.
이건 기억 속에 있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지금은 밖에 나갔다가 돌아왔고, 이전엔 잠들었었다. 하지만 얼음이 녹아 침대를 적셨다는 결과는 같다. 그게 지금부터의 미래 또한 똑같이 흘러가리라는 예고로 보여서 유온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 * *
그 후 상견례가 곧바로 잡혔다. 윤서경의 부모님이 모두 시간을 낼 수 있는 날짜로 잡다 보니 혼담을 넣고 고작 며칠 후였다. 그렇게 마련된 자리에서 유온은 누구의 눈치를 먼저 봐야 할지 몰라 가만히 눈만 내리깔았다.
화려한 호텔 레스토랑의 개인실에 유온과 윤서경, 그리고 양가의 가족들이 앉아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유온의 두 형까지 함께였다.
원래는 윤서경의 형과 누나가 외국 출장이 길어져 오지 못하니 본인과 부모들만 자리를 가지기로 했었다. 하루하루가 같은가 하면 달라지는 전개에 유온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제 옆에 앉은 가족이 늘어난 만큼 신경 쓸 사람도 늘었다. 부모님은 물론이고 두 형에게서 흘러나오는 분위기가 무서웠다. 또 눈앞의 윤서경과 그 부모님은 불편했다. 세 사람 다 부경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무게감을 갖추었고, 앞에 있는 게 누구든 압도할 듯한 분위기였다.
상견례라는 자리의 긴장감 이상으로 유온은 이 자리의 모든 사람에게 기가 눌려 물조차 마시지 못했다.
“아드님을 정말 고이 기르셨더군요. 다소곳한 게 얼마나 귀엽고 보기에 예쁜지 모르겠습니다.”
윤서경의 어머니, 서 회장이 그렇게 말했다. 유온의 음울하고 소심한 성격을 둘러말하는 듯했다. 부모님이 티 나지 않게 흘끗 유온을 보았다. 유온만 알 수 있는 질책의 시선이었다. 집안의 물건이 책잡힌 것, 그것도 평소 그렇게 고치라고 말하던 부분을 지적받은 것에 화가 난 것 같았다. 하지만 부모님은 겉으론 표 내지 않고 웃었다. 유온도 겁먹은 속을 티내지 않기 위해 애써 웃으려 노력했다. 어색하게 끌어 올린 뺨이 뻣뻣하게 떨렸다.
“어릴 적부터 워낙 순한 애였답니다. 아이가 너무 예뻐서 오냐오냐 기르다 보니 마음이 조금 약한 편인데, 윤 대표와 다감하게 지내면 좋겠어요.”
어머니의 대답이 이어졌다. 서 회장은 첫 한 마디 이후로는 그럭저럭 유했고 불편한 자리 위로 의례적이고 예의를 차린 말이 차분하게 오고 갔다. 결혼의 당사자인 유온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윤서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자코 와인을 마시는 윤서경의 모습이 숙인 고개 너머로 얼핏 보였다.
유온은 용기를 내 시선을 들었다. 들키지 않을 만큼 아주 조금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우아하게 식사를 하고 있는 다른 가족들과 달리, 윤서경은 와인으로 가끔 입술만 축일 뿐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유온 역시 식사에 손댈 마음이 없었다. 먹었다간 거하게 체해서 집에 가자마자 다 토해 내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런 유온을 이유건이 보고 말았다.
“유온이, 음식이 입에 안 맞니?”
마침 물을 마시려 했던 유온은 물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잔에 들어 있던 라임 조각이 물과 함께 흔들렸다.
“아, 아니에요, 형. 먹고 있어요.”
유온이 허둥지둥 식기를 들자 이유건은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유온을 보다가, 윤서경의 부모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유온이가 입이 좀 짧아서 뭐든 많이 먹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렇게 말랐지요. 결혼식 전에 살이 조금 붙어야 예복도 잘 어울릴 텐데 걱정이군요.”
“어머. 서경이가 유온 군을 잘 챙겨야겠어요. 알겠지?”
윤서경의 어머니가 아들을 보며 말했다. 그의 시선이 슥, 유온에게로 향했다. 유온은 얼른 눈앞의 커다란 접시 가운데에 작게 담겨 나온 관자 요리를 잘라 입에 넣었다.
입 안에서 사르르 풀어지는 관자는 도무지 무슨 맛인지 느낄 수 없었다. 물건을 입에 넣고 삼키듯 억지로 집어넣었다. 차례로 나오는 음식이 어느 정도 비면 주방장이 직접 나와 서빙을 했다.
대부분의 설명은 생략했지만 어디서 귀하게 구해 온 재료를 어떤 정성으로 요리했는지, 한두 마디 짤막하게 말하긴 했다. 어색하게 굳어 음식을 억지로 먹는 것에만 집중한 유온의 귀에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는 알레르기가 있을 텐데요.”
그런데 주방장의 설명 사이로 윤서경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유온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주위의 분위기가 묘했다.
“아, 그, 그러십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착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곧바로 다른 음식을 준비하겠습니다.”
주방장은 유온의 접시를 보고 있었다. 한 줌 정도 되는 샐러드에 올라간 무화과가 보였다. 무화과에 알레르기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최근에 생긴 거고 아마 가족들도 모를 텐데. 그 증거로 유온의 가족들은 당황한 표정이었고 윤서경의 부모님은 의아해했다. 독립한 것도 아니고 한집에 사는 아들에게 알레르기가 있는 것도 모르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어머니가 웃음을 짓더니 유온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 아이가 이런다니까요. 혹시나 가족들 걱정할까 봐 어디가 아파도 말을 안 하고요. 윤 대표, 우리 유온이 잘 챙겨 줄 수 있죠?”
“알레르기와 어디가 아픈 건 다르지 않습니까?”
“…….”
“숨길 이유가 없고 숨겨도 부모님이 아셔야 하는 문제가 아닐까 싶은데요. 몸에 치명적인 일을 왜 굳이 숨기겠습니까. 제 상식으로는 도움이 안 되거나 말하는 것도 불편해서 그랬던 걸로 보입니다.”
테이블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유온은 한층 더 당황했다. 갑자기 윤서경이 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주방장이 재빨리 유온의 접시를 치우고 순식간에 새로운 샐러드를 만들어 와서 내려놓았지만 이미 식사를 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유온은 안절부절못했다. 자신이 알레르기를 말하지 않은 것 때문에 이런 상황이 되고 말았다. 사실 윤서경이 말한 이유 때문에 굳이 알리지 않은 건 맞지만, 그게 이런 결과로 나타날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다행히 사업가들인 양가의 가족은 곧 어색함을 환기했고 다시 원만한 말들이 오고 갔다. 유온은 꾸역꾸역 다른 사람들의 속도에 맞추어 식사했다. 지푸라기나 고무를 씹어 삼키는 느낌이었다. 벌써 속이 불편했다. 그런 와중에 윤서경의 시선까지 느껴져 더더욱.
거북한 상견례가 끝나고 난 뒤 윤서경의 가족과 서로 다른 통로로 빠져나왔다. 가족만 있는 자리가 되자 곧바로 형이 유온을 불러 세웠다.
“유온이와 이야기 좀 하고 가겠습니다. 먼저 들어가세요.”
“그래, 그러렴.”
선선한 부모님의 반응에 유온은 얼어붙었다. 작은형도 흘끗 둘을 보았을 뿐 별말 없이 떠나갔다. 유온은 발끝에 힘을 주었다. 이유건의 눈길은 벌써 차갑고 무서웠다.
“이유온.”
“네, 형…….”
“못 먹는 음식 있었어?”
우물쭈물하던 유온이 겨우, 네, 하고 대답했다.
“왜 말 안 했어?”
“그게, 갑자기 생긴 거고……, 걱정하실 것 같아서요. 어차피 자주 먹는 음식도 아니니까…….”
“네가 말을 안 한 거면, 그런 자리에서 부모님 체면 상하실 일 없게 처신했어야지. 음식이 마음에 안 드니 바꿔 달라고 하든 옆에 치워 놓고 먹든.”
“죄송해요.”
고개를 푹 숙였다. 예전에 상견례 자리에서 뭘 먹었는지 뚜렷하게 떠오르진 않지만 적어도 자신이 알레르기가 있는 음식이 없었던 건 확실했다. 식사가 끝나고 아프거나 약을 찾았던 기억이 없는 걸 보면.
잔뜩 얼어붙었으나 다행히도 이유건은 손까지 들 마음은 없는 듯했다. 유온은 얌전히 선 채 형의 꾸중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윤 대표가 그런 말을 하는데 네가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부모님이 뭐가 돼.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서 그렇게 사리 판단이 안 돼? 네 말대로 최근에 생겨서 부모님이 몰랐다고 했으면 될 일이야. 아니면 알레르기가 아니라 그냥 싫어하는 음식이라고 하거나. 형 말이 틀려?”
“아니요, 형……. 잘못했어요.”
“그 자리에서 그렇게 입 다물고 있으면 윤 대표 말이 맞다고 하는 거랑 뭐가 달라.”
“네……. 죄송해요.”
이유건이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 돌아가면 방에서 반성해. 형이 말하기 전까지 밖에 나가지 말고. 그리고 부모님이랑 유연이한테도 사과하자. 알겠지?”
“네.”
고분고분 고개를 숙였을 때였다. 조금 전 식사를 한 룸의 문이 벌컥 열렸다. 두 사람 다 멈칫하며 그쪽을 보았다. 이곳과 윤서경의 가족이 나간 쪽은 프라이빗한 통로여서 직원이 다니지 않는다. 식사가 끝난 지 얼마 안 됐을 땐 더욱 그럴 것이다. 유온의 가족은 이미 밖으로 나갔다.
대체 누구인가 하는 의문은 금방 밝혀졌다. 문을 열고 나온 건 윤서경이었다.
“……윤 대표, 아직 안 들어갔군요.”
이유건이 사업적인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네. 유온 씨를 찾으러 갔더니 이쪽에서 형님분과 이야기 중이라고 하기에 왔습니다.”
“유온이를요?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그러자 윤서경은 성큼성큼 다가왔다. 유온은 움찔했다. 윤서경에게서 스멀스멀 알파의 페로몬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알파인 이유건이 단박에 불쾌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커다랗고 따뜻한 뭔가가 어깨에 닿는가 싶더니 몸이 끌려갔다.
“제 약혼자를 찾는 데 이유가 필요합니까?”
분명 이유건과 마주 보고 있었는데, 어느 틈엔지 윤서경의 곁에 서 있었다. 유온은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빡였다. 묘하게 숨 쉬기가 편해진 느낌이 들었다.
이유건은 윤서경의 행동이 불쾌했는지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말했다.
“아무리 약혼자라도 가족이랑 같이 있는 중에 이러시는 건 경우가 아닌 것 같군요.”
“할 말이 있어서요. 유온 씨는 제가 바래다드릴 테니, 형님은 먼저 들어가시죠.”
태연한 태도에 이유건의 언짢은 시선은 유온을 향했다. 하지만 유온은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하는 것밖에 못했고, 유온을 제 옆에 바짝 붙여 둔 윤서경은 완강했다. 결국 물러난 건 이유건이었다.
“너무 늦지 않게 들여보내 주면 좋겠군요. 유온이, 집에 돌아오면 형이랑 이야기 좀 하자.”
“…….”
유온의 몸이 움찔 떨렸다. 이유건이 돌아서서 복도를 빠져나가 사라질 때까지 긴장한 어깨에서 힘이 풀리지 않았다. 그런 유온을 깨운 건 윤서경의 목소리였다.
“나와요.”
이미 윤서경은 돌아서고 있었다. 유온은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깨끗하게 치워진 레스토랑 개인실을 지나쳐 윤서경은 무슨 일인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스위트룸으로 올라가는 전용 엘리베이터였다.
왜 객실이지. 유온은 당혹스러웠다. 안내 음성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호텔의 최상층에 멈췄다. 윤서경이 내렸고, 한발 늦게 유온도 발등이 묻힐 만큼 푹신한 카펫이 깔린 엘리베이터 홀로 나왔다.
객실 문을 여는 윤서경의 뒤에서 유온은 우물쭈물 서 있기만 했다. 문이 열리자 은은하게 좋은 향기가 흘러나왔다. 번듯한 집에서 자란 유온의 눈에도 국내에서 가장 좋은 호텔의 스위트룸은 휘황찬란했다.
“앉아요.”
윤서경이 소파를 가리켰다. 손님용 소파에 많은 자리를 차지하지 않고 오도카니 앉자, 윤서경도 맞은편에 앉았다. 얼마 후 초인종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마실 것을 가지고 온 호텔 직원이었다. 대답이 없어도 들어오라고 윤서경이 미리 말해 둔 듯했다.
직원은 조용히 차를 내려놓고 사라졌다. 아무런 말도 않는 윤서경 앞에서 유온은 제 앞에 놓인 차만 쳐다보았다. 그때 손목시계를 확인한 윤서경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집에 중요한 물건 있습니까?”
“……네?”
“가지고 나와야 하는 물건 있는지 물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중요한 물건……. 딱히 없었다. 고개를 가로젓자 윤서경이 말했다.
“그럼 여기서 지내요. 돌아갈 필요 없습니다.”
“어……, 아, 네?”
순간 유온은 윤서경의 말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해서 더듬거렸다. 윤서경이 답답한 건지 미간을 찌푸렸다. 그에 더욱 당황하고 난감해져서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만 깜빡거리고 말았다. 안 돼, 이런 모습이 제일 사람을 짜증 나게 만든다고 다들 그랬는데.
“뺨.”
윤서경의 말에 유온은 저도 모르게 황급히 손으로 한쪽 뺨을 감쌌다. 이미 부기도 다 가라앉았고 맞은 흔적은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맞은 그날 윤서경에게 보이지 않았던가. 아무런 말이 없어서 눈치채지 못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와 결혼할 사람이 괜히 말 나올 모습으로 다니는 거 불편합니다. 결혼식 전까지 가족이랑 만나지 말고 여기서 지내면 좋겠군요. 그렇게 해 주겠습니까?”
“아…….”
그렇게 해 주겠습니까, 라고 말했지만 사실상 명령이었다. 집에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면 유온으로선 싫을 게 없었다. 당장 오늘 형이 제 방으로 오라고 한 것부터 걱정되어 배 속에 있는 걸 죄다 토해 버릴 것 같았는데, 윤서경이 가지 못하게 한다는 건 무엇보다 좋은 핑계였다.
게다가 결혼식 전까지라니. 결혼식을 하면 그때부터는 윤서경과 신혼집에서 살게 될 터였다. 그러면……, 그럼 이제 가족과 한집에 있을 일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일이 가능할까? 그것도 이렇게 갑자기. 무거운 마음으로 나왔던 자리에서 생각도 못한 행운을 만난 기분이었다. 멍하니 있는 유온을 바라보던 윤서경이 말했다.
“받아들인 걸로 알겠습니다. 마스터 베드룸은 내가 가끔 와서 사용하니, 그곳 외에 원하는 침실을 사용하면 됩니다. 난 거의 여기에 안 오니까 편하게 있어도 좋습니다.”
“아, 네.”
“난 이만 나가 봐야 하니 쉬어요.”
침실 하나를 내주고 쉬라고 말하는 것치고 쌀쌀맞은 목소리였다. 그는 처음과 똑같이 찬바람이 부는 태도로 일어나 미련 없이 방을 나가 버렸다. 무거운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유온은 그제야 윤서경이 슈트 재킷조차 벗지 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직원이 준비한 그의 몫의 커피는 한 모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 공간을 허락받았다. 집에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큰형을 만나지 않아도 되었다. 안도와 고마움에 몸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유온은 천천히 일어나 거실을 조금씩 둘러보았다. 이 호텔은 부경의 소유였다. 윤서경이 일 때문에 가끔 와서 사용하는지 거실에도 드문드문 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유온은 책장 앞에 서서 가만히 책들을 들여다보았다. 얼핏 보아도 희귀한 서적이었다. 단순히 인테리어로 놓아둔 게 아니라 윤서경이 실제 읽는 책인 듯했다. 조심스레 책 한 권을 꺼내서 장정을 본 유온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고급스러운 장정의 책을 한 장씩 넘겨 보았을 때 위화감은 더 커졌다. 이런 책을 유온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유온의 집안은 부유했으나 유온은 개인적인 사치품을 거의 가져 보지 못했다. 의류나 가지고 다니는 물건은 부모님이 챙겨 주는 비싸고 질이 좋은 것들이었지만, 그 외에 본인이 원하고 가지고 싶은 건 선물로 받지 않는 이상 손에 쥘 일이 없었다. 자신이 받는 용돈으론 그렇게 좋은 물건은 꿈도 못 꾸었다.
그런 유온이 언제 이렇게 비싼 책을 보았겠는가. 게다가 내용 또한 생소했다. 한 장, 두 장, 책을 넘기면 넘길수록 위화감은 심해졌다. 이게 자신의 기억을 기반으로 보는 환상이라면, 처음 보는 것을 어떻게 이렇게 자세히 알 수 있지?
책을 덮어 제자리에 돌려놓은 유온은 몇 권을 더 펼쳐 보았다. 책장에는 평범한 책도 있었다. 얼핏 제목은 들었지만 내용을 읽은 적 없는 것도. 책장을 파라락 넘기자 책의 내용이 시작부터 결말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누군가에게 내용을 들은 적도, 어딘가에서 스치듯 본 적도 없는데.
책장을 전부 뒤진 뒤 마스터 베드룸을 제외한 스위트룸의 구석구석, 냉장고와 와인 냉장고, 벽 안쪽에 가려 둔 TV, 화재 대피 요령 따위가 쓰인 종이, 호텔 총지배인의 메시지 카드를 모조리 살폈다. 전부 처음 보는 내용으로, 총지배인이 남긴 카드는 낯선 필체의 손 글씨였다. 또 이 스위트룸의 구조 역시…….
넓은 스위트룸을 한참 헤집고 돌아다닌 유온은 높은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를 올려다보았다. 매끄러운 표면에 자신의 모습이 여러 겹으로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건 어쩌면 꿈이나, 기억을 다시 보는 게 아닌 걸지도 모른다고.
* * *
“음…….”
얼핏 잠에서 깬 유온은 자리에서 뒤척거리다 머리맡에 둔 물을 찾았다. 잠이 덜 깬 손으로 더듬거리다 보니 스탠드 아래 놓아두었던 물병을 쳐 버렸나 보다. 병은 그대로 떨어져 바닥을 굴러갔다. 물병이 굴러가는 소리에 눈이 뜨였다. 구르는 소리가 어딘가 생소하다는 걸 깨달아서였다.
스탠드가 있는 위치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스탠드도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스위치를 찾으며 허우적대던 손이 스탠드의 몸체를 가볍게 터치하자 주위가 어렴풋이 밝아졌다.
유온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푹신하고 바스락거리는 침구가 어깨에서 툭 떨어졌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 유온은 이곳이 자신의 방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태어나서 스물 몇 년 동안 산 집도, 삼 년 동안 산 집도 아니었다. 디자인과 색조가 통일된 화려한 가구, 스탠드 아래의 조명 조절 버튼. 호텔이었다.
반투명한 커튼만 쳐 둔 창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몇 시인지 모르겠지만 창을 빙 두르듯 보이는 한강 위에 아직도 차량의 불빛이 수없이 오갔고, 높은 건물들도 곳곳이 밝았다.
‘몇 시지…….’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스탠드 뒤에 전자시계가 보였다. 오후 11시 40분이었다. 넓은 침대에서 꾸물꾸물 내려온 유온은 자신이 떨어뜨린 물병을 줍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물병은 호텔 침실의 매끄러운 바닥을 굴러 꽤 멀리까지 가 있었다. 거의 문 근처에 다가가서야 물병을 집은 유온은 멈칫했다.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나지막하게 뭔가를 지시하는 윤서경의 목소리였다.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유온은 물병을 손에 든 채 자기도 모르게 문고리를 돌렸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해서 반 뼘 정도만 문을 열고 바깥을 보았다. 유온이 들어온 방은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작은 방이었다. 보통은 비서나 수행원이 기거하는 장소다. 그래도 충분히 호화로웠지만.
그 방을 선택한 덕분인지 문을 열자마자 현관 근처에 서 있는 윤서경의 뒷모습이 보였다. 전화를 막 끊은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재킷을 손에 들고 있었기에 셔츠에 베스트 차림이었다.
윤서경이 자리에 선 채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현관 근처에 있는 장식장의 대리석 벽에 그의 모습이 조금 비쳤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인데도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은 머리와 단정한 이목구비가 흐릿하나마 보였다.
결혼 생활을 할 때와 똑같이 유온은 윤서경을 훔쳐보았다. 그때 윤서경이 휴대폰 화면에서 시선을 뗐다. 깜짝 놀란 유온은 서둘러 문을 닫아 버리고 콩닥거리는 가슴을 누른 채 문 앞에 주저앉았다. 집에서 몇 번이나 이런 식으로 윤서경을 보다가 들켜 그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또 그러긴 싫었다.
다행히 현관문을 열고 닫는 기척이 들렸다. 윤서경은 유온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고 나간 듯했다. 왜 왔을까. 두고 간 물건이라도 있었을까? 잘 안 오는 곳이라고 했는데.
아냐……. 뭘 찾으러 왔겠지. 아까 뭔가 떨어뜨리고 갔을 거야.
유온은 빈자리처럼 깨끗하던 윤서경이 앉았던 자리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합당하며 상식적인 생각을 채워 넣었다. 이렇게 툭하면 터무니없는 공상을 하는 게 나쁜 버릇이라고 항상 큰형도 꾸중한다.
왜인지 힘이 빠져 머리를 문에 툭 기댔을 때였다. 문 밖에서 낮고 일정한 신호음 같은 게 들렸다. 갑작스레 울렸지만 작은 것에도 깜짝깜짝 놀라는 유온이 들어도 놀라지 않을 만큼 조용한 소리였다.
고개를 갸웃한 유온이 문을 열었다. 소리는 좀 더 명확해졌다. 거실을 두리번거리다 가려진 TV 앞에 놓인 전화기에 불빛이 깜빡거리는 걸 발견했다. 객실로 전화가 온 듯했다.
전화벨 소리는 방 안에서 다른 일을 하거나 자고 있으면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몇 번 울리던 전화기가 조용해졌다가 한 번 더 울리기 시작했다. 윤서경이거나, 호텔 측에서 뭔가 용건이 있어 연락한 건지도 몰랐다. 유온은 후다닥 다가가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아, 이유온 님. 늦은 시간에 정말 죄송합니다. 대표님께서 자정쯤 한 번 더 연락을 하라고 하셔서요.
“대표님……, 서경 씨요?”
전화 너머에선 자로 잰 듯 반듯하고 친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표님이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묻자 상대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너무 오래 주무시는 것 같으면 잠깐 깨워서 식사를 올려 드리라고 전달하셨습니다. 가볍게 드실 걸 준비해 드려도 괜찮으실까요?
유온의 눈이 다시 시계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상견례를 하고 호텔에 들어온 게 오후 3시쯤이었다. 오후와 저녁 시간을 전부 잠으로 보낸 것이다. 낮잠을 이렇게 오래 자 보기는 처음이다. 여전히 병이 몸에 남아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한 마음이 더럭 올라왔다. 유온이 답이 없자 상대가 한 번 더 유온을 불렀다.
“아. 네, 감사합니다.”
―식사는 식탁에 둘까요, 아니면 침실로 올려 드릴까요?
“저는……. 방에 있을게요. 식탁에 두고 나가 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전화가 끊어진 뒤 유온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 듣기에도 너무 작고 맥없는 목소리였다. 다시 전화가 안 오길 빌며 타박타박 자신이 고른 작은 침실로 들어왔다.
방에는 작은 욕조가 붙은 욕실도 딸려 있었다. 샤워 부스와 세면대에 포장을 뜯지 않은 어메니티가 있는 걸 확인한 유온은 한강이 고스란히 보이는 욕실 창의 블라인드를 모두 내린 뒤 옷을 벗었다.
세면대 유리에 마른 몸이 비쳤다. 팔다리가 지나치게 가늘고 몸에도 살집이 거의 없었다. 가족들은 모두, 같은 오메가인 작은형도 보기 좋게 늘씬한 편인데 자신만 이렇게 볼품없는 몸이었다. 이러니 가족들이 부끄럽게 여기는 게 당연했다. 거울에서 도망치듯 샤워 부스로 들어갔다.
처음에 레버 조절을 잘못해 찬물을 된통 맞은 유온은 구석으로 피해 우물쭈물하며 물 온도를 높였다. 따뜻한 수증기가 올라오기 시작한 뒤에야 물줄기 아래로 돌아갔다. 결 좋은 머리카락을 적시며 온수가 몸으로 흘렀다.
쏟아지는 물 아래서 유온은 생각했다.
‘음, 그러니까 나는…….’
정신병에 걸린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시간이 되돌아갔다.
어느 쪽이 상식적일까? 당연히 전자였다. 나약한 정신이 또 새로운 병에 걸려서 있었던 일을 또 겪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사실은 처음 보는 내용의 책이고 뭐고 전부 다 착각이다. 뇌의 달콤한 거짓말이다. 그게 당연하고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지금 몸에 쏟아지는 이 따뜻한 물의 느낌까지 너무 생생한데. 부드러운 스펀지에 거품을 잔뜩 내서 몸을 문지르며 유온은 계속 생각했다. 꿈일까, 현실일까, 꿈일까.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욕실에서 나온 유온은 자신이 벗어 놓은 옷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상견례 자리에서 입고 있던 정장이었다. 웃옷은 벗었다고 해도 이 불편한 걸 입고 어떻게 하루 종일 잤을까 의아할 정도였다.
옷이 이것밖에 없는데 그냥 다시 입어야 하나. 우선 샤워 가운을 걸치고 방으로 나오자 문 밖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차림으로 나가 볼 수도 없어서 그냥 가만히 기다렸다. 트롤리를 끌고 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닫히고, 인기척이 사라졌다.
유온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거실엔 아무도 없었고, 직원이 식사를 차려 두고 나간 듯했다. 거실로 나와 식탁으로 가려던 유온의 시선이 소파 테이블에 멈췄다. 그 위에 쇼핑백 몇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까까진 없었는데, 식사를 차리러 온 직원이 두고 간 것 같았다. 익숙한 의류 브랜드의 쇼핑백이었다. 가까이 다가간 유온은 머뭇거렸다. 윤서경의 물건이면 괜히 손을 댔다가 그를 불쾌하게 할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상황을 따지면 유온에게 주는 것이었다. 잘 들어오지 않는 곳이라고 했는데 굳이 여기에 새로 산 물건을 두고 가는 것도 이상하다.
결국 유온은 쇼핑백 안에 들어 있는 옷 하나를 꺼내서 라벨을 살짝 확인했다. 자신의 사이즈가 맞았다. 가벼운 외출복이 두 벌, 외투가 한 벌, 편하게 입는 옷이 세 벌이었다. 아니, 쇼핑백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그 옆에 편한 옷 한 벌이 더 놓여 있었다. 호텔에서 세탁을 해 왔는지 호텔 로고가 박힌 봉투에 담겨서.
유온은 세탁된 옷을 가지고 침실로 들어가서 가운을 벗은 뒤 갈아입었다. 몸에 헐렁하게 맞는 사이즈였다. 편안한 차림이 되어 식탁으로 가자 은색 덮개가 덮인 쟁반이 있었다.
덮개를 열자 고소한 냄새가 훅 풍겼다. 죽과 몇 가지 반찬, 차. 그러나 음식보다 먼저 메시지 카드가 눈에 띄었다. 유온은 손 글씨로 쓰인 메시지를 확인했다.
[옷은 혹 마음에 안 드신다면 식탁 위에 두시거나, 현관 앞에 두시면 교환해 오도록 하겠습니다.]
호텔 직원, 아마도 아까 전화를 한 사람이 쓴 듯했다. 식사는 윤서경이 준비하라고 한 것이니 옷도 아마 그럴 것이다. 유온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꿈일 수도 있고, 현실일 수도 있고.
‘하지만, 지금은 현실이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꿈이든 뭐든 유온은 지금 윤서경이 자신을 집에서 끌어내 이곳에 놓아두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했다. 꿈일지도 모르지만 그건 깨어나는 그때에 알게 되어도 늦지 않았다. 그래서 이 순간을 현실이라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 * *
호텔에서의 생활은 지나칠 정도로 편안했다.
유온이 해야 할 일은 하루 세 번 식사를 하고, 달콤한 디저트를 먹고, 책장에 있는 책을 읽거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정도였다.
휴대폰으로 누군가와 연락하는 일은 없었다. 자신이 원래 쓰던 게 아니라 윤서경이 새로 준비해 준 것이기 때문이다. 이전 휴대폰은 전원이 꺼진 채 서랍 안에 들어 있었다.
이곳에 온 첫날 휴대폰은 방전되었다. 침실에 비치된 충전기가 있었지만 연결하는 게 무서웠다. 전원이 켜진 순간 가족들의 전화가 득달같이 밀려들 테니까.
회피임을 알지만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다. 차례로 오는 전화를 받으면 분명 유온은 죄책감과 무서움에 못 이겨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 것이다.
신기하게도, 그런 유온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윤서경은 다음 날 아침 식사와 함께 새 휴대폰을 보냈다. 옷까진 그렇구나, 했지만 휴대폰은 아무래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어 빈 그릇을 치워 달라고 전화하면서 물어보았다. 그러자…….
‘혹시 필요하시면 사용하라고 대표님께서 전달하셨습니다.’
그런 대답이 돌아왔다.
유온은 그래서 서랍에 넣어 둔 휴대폰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작은 공간에 가족에 대한 두려움을 가두듯이. 새 휴대폰에는 번호 몇 개가 이미 입력되어 있었다.
윤서경, 김현주 팀장, 이정윤 실장, 성한영 실장.
윤서경 말고는 모두 모르는 이름이었다. 혹시 번호가 잘못 입력된 건가? 난감해하고 있을 때 번호의 주인들이 먼저 연락을 했다.
[안녕하세요, 이유온 님. 경호실장 성한영입니다. 외출하실 때 동반하게 될 듯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비서실 이정윤입니다. 필요한 사항이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웨딩플래너 김현주입니다! 멋진 예식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유온 님^^]
다른 두 사람은, 자신에게 과연 필요한가 싶었다. 경호원에 비서라니 하는 것도 없는 백수에게 너무 과분했다. 하지만 웨딩플래너. 유온은 멍한 얼굴로 그 다섯 글자를 읽고 또 읽었다.
‘웨딩플래너…….’
그것도 윤서경이 직접 붙여 준 웨딩플래너.
그 사람과 다시 결혼을 한다. 게다가 그 사람이 자신과 결혼하기 위해 나름대로 준비를 해 준다.
울 것 같았다. 이런 일이라면 백 번도 더 반복할 수 있다. 좋아하는 책을 다시 읽는 것처럼, 맛있는 음식을 또 먹는 것처럼, 멋진 풍경을 거듭해 보는 것처럼.
스위트룸에 틀어박혀 지내는 며칠 동안 휴대폰이 울리는 일은 없었지만 유온은 내내 몸에 휴대폰을 지니고 다녔다. 휴대폰으로 하는 것이라곤 가끔 켜는 게임 정도가 전부였으면서. 심지어 샤워를 할 때도 샤워 부스 유리벽에서 바로 보이는 세면대 위에 두고 흘끔거렸다.
생각이 날 때마다 문자함을 열어서 웨딩플래너의 문자를 반복해 읽었다. 지금도 한참 책을 읽다 말고 갑자기 휴대폰을 들어 짧은 문장을 눈에 담다가, 휴대폰을 품에 안은 채 소파에 풀썩 드러누웠다.
‘결혼……. 이번에도 똑같은 결혼식이 될까…….’
윤서경이 자신에게 반지를 끼워 주겠지.
그리고…… 입을 맞추겠지.
유온은 결혼식을 떠올렸다. 하얀 꽃이 가득하고 곳곳에 촛불을 켠, 무대처럼 긴 길을 같이 걸어오는 장면을. 오래도록 꿈꾸듯 생각하다가 눈을 반짝 떴다. 과연 정말로 결혼식까지 올릴 수 있을까?
결혼하고 나면 어떻게 생활하게 될까.
“…….”
결혼 후를 상상하자 지금까지 느낀 행복이 차갑게 녹아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유온이 아는 결혼 생활은 기대했던 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다정하게 아침 식사를 같이한 적도, 밤에 한 침실을 사용한 적도 없었다.
혹시 집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윤서경의 차가운 얼굴을 보아야 했기에 숨을 죽인 채 조용하고 어두운 곳에 숨고, 그가 집에 있으면 방 밖으로 좀처럼 나오지도 않았다.
지금까지가 달랐으니까 결혼 생활도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없이 쌓인 실패의 기억은 성공에 대한 상상을 쉽게 꺾었다. 혼자서 기뻐하다가 혼자서 우울해진 유온은 가만히 휴대폰을 들었다. 웨딩플래너가 보낸 문자를 다시 열어 보려 했을 때였다.
위잉. 휴대폰이 진동하고 새로운 메시지가 표시되었다.
“어…….”
얼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녁에 예정 있습니까.]
윤서경이었다. 며칠 만에, 자기가 사 준……, 아마도 비서가 샀겠지만, 어쨌든, 이 휴대폰으로는 처음으로. 유온은 처음에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서 여러 번 되풀이해 읽었다.
저녁에 예정이라니. 당연히 없었다. 고작해야 지금 읽고 있던 책을 끝까지 읽은 뒤 창가에 앉아서 야경을 바라보는 정도였다. 그건 지난 며칠 동안 몇 번이나 한 일이다. 윤서경의 부름에 비하면 그런 건,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훨씬 중요한 일이어도, 별것 아니었다.
[아니요,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좋아요.]
그렇게 썼다가 엄지손가락으로 백스페이스를 여러 번 눌러서 다 지워 버렸다.
[괜찮아요. 아무것도 없어요.]
또다시 백스페이스를 눌러서 지웠다.
“…….”
유온은 초조해졌다. 메시지를 받고 나서 시간이 자꾸만 흘러가고 있었다. 곧바로 답장을 했어야 했는데 3분, 4분, 야속하게 간격이 벌어졌다. 마음이 급해진 유온은 빠르게 글자를 입력했다.
[아니요]
아, 너무 성의 없게 보냈다. 안 돼.
[괜찮아요.]
이것도 성의 없어……. 하지만 이미 보내 버렸다. 무슨 말을 덧붙여야 할까 고민하고 고민하는 사이에 휴대폰이 또 울렸다.
“아……!”
채 말도 못 한 사이 윤서경의 답장이 도착하고 말았다.
[그럼 방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6시쯤 갈 겁니다.]
재차 유온의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 볼일이 있으신가요? 제가 할 일이 있나요? 온갖 문장이 머리를 빠르게 맴돌았지만 다 건방져 보이거나 주제넘게 보였다. 유온은 결국 울 것 같은 심정으로 딱 한 마디만 보낼 수 있었다. ‘네.’
그리고 답장은 더 오지 않았다. 가슴 위에 휴대폰을 올리고 두 손으로 덮은 채 유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왜 이럴까……. 왜 이렇게 모자란 걸까.
그 후로는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런 설정도 없고 게임 몇 가지 말곤 깔린 어플도 거의 없는 휴대폰 기본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소파에 털썩 누웠다. 그대로 가만히 누워서 눈만 깜빡거리다 보니 늦은 오후가 되었다.
4시 30분쯤 되었을 때 유온은 불현듯 대리석 장식장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어렴풋한 형상인데도 알 수 있었다. 오늘따라 더 뭔가 지저분해 보이고, 못나 보였다. 벌떡 일어나 거울을 보자 역시 초라하다.
하다못해 깨끗하게 있자는 생각으로 아침에 한 번 샤워를 했으면서도 종종걸음해서 욕실로 들어갔다. 피부가 발갛게 달아오를 때까지 씻고 나온 후에는 신중하게 머리를 말리고 빗질했다.
그런 다음엔 옷을 고민했다. 편한 옷을 입어야 하나? 아니면 외출복을 입어야 하나?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외출복 중에서 편해 보이는 아이보리색 니트와 검은색 진을 골라 입었다.
그게 5시 50분쯤이었다. 유온은 침실에 앉았다가, 거실에 앉았다가, 식탁 근처를 돌아다니다가 현관 앞을 서성이며 가만히 있지 못했다. 10분이 10년 같았다.
‘6시쯤이라고 했으니까……. 더 늦게 올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여유를 가지려 했지만 여유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스위트룸에서 제가 발을 들였던 곳은 전부 정신 사납게 돌아다니던 유온이 장식장 앞에 선 채 영문 서적의 금박으로 된 로고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을 때, 현관문이 철컥 열렸다. 유온은 헛숨을 들이켤 정도로 놀랐다.
정확히 6시였다. 탁탁 뛰다시피 현관으로 간 유온은 입을 벌리려다 말고 또 눈을 굴렸다.
‘다녀오셨어요?’
너무 친한 척 구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처음 보는 사이도 아닌데…….
‘옷이랑 식사 감사합니다.’
새삼스러웠다.
우물쭈물하는 사이 윤서경은 스스로 닫히는 현관문을 내버려 두고 안으로 들어왔다. 머리를 말끔하게 넘기고 재킷 안에 베스트를 갖추어 입은, 너른 어깨의 알파는 역시 우아할 정도로 근사한 사람이었다. 무심코 결혼식에서 그의 곁에 섰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 유온은 움츠러들었다.
윤서경의 시선이 흘끗 유온의 몸을 스쳤다. 옷차림이 이상한가? 공연히 니트 자락을 잡아당겨 보았지만, 윤서경은 다른 말 없이 거실로 향했다.
“음, 그런데……, 무슨 일, 이세요?”
주춤대며 윤서경을 따라온 유온이 겨우 물었다. 윤서경이 커다란 몸을 슥 돌렸다.
“퍼스널 쇼퍼가 곧 올라올 겁니다.”
“어……, 제, 제가 필요한가요?”
“필요합니다.”
윤서경이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다.
“유온 씨가 낄 반지니까요.”
* * *
유온의 첫 번째 결혼반지는 작은 서랍 안에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윤서경의 첫 번째 결혼반지는 언제나 그의 드레스 룸 수납장 위에 놓여 있었다.
엄연히 결혼한 사람의 왼손이 비어 있으면 이상한 시선을 받을 것이기에 윤서경은 화려한 결혼반지 대신 반지와 함께 나온 웨딩 밴드를 하고 다녔다.
유온은 내심 서운했다. 그래도 결혼반지는 제가 팸플릿이나마 한 번 본 물건이지만, 웨딩 밴드는 반지를 산 브랜드에서 그에 맞추어 내준, 두 사람의 의사는 전혀 들어가지 않은 것이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고 다음 날 윤서경은 곧바로 출근했다. 그가 아침에 집을 나선 후 유온은 공연히 집 안을 돌아다녔다. 그와 함께 살게 될 집인데 아직 몇몇 방은 열어 보지도 못했다.
처음부터 두 사람은 각방이었다. 안방은 있었지만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첫날 윤서경은 그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혼자 손끝을 꾸물거리며 밤새 우두커니 앉아 있었고, 다음 날부터는 유온도 다른 방을 사용했다.
알파든 오메가든 성적인 모든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시기가 있었다. 발정기의 반작용인 것처럼. 유온은 윤서경이 마침 그런 시기일 거라 생각했다.
이유온답지 않게 꽤 태평한 생각이었다.
혼자 있는 집을 이곳저곳 서성이다 윤서경의 침실 앞에 섰다. 문 앞에서 고민했지만 들어가 보고 싶다는 충동을 누르지 못했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데도 눈치를 보며 몰래 방문을 열었다. 집 안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는 그의 페로몬은 침실에만 희미하게 떠돌고 있었다.
가만히 침실을 보다가 나쁜 짓을 한 것 같은 생각에 후다닥 문을 닫고 나와 그가 쓰는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드레스 룸에서도 그의 체향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향이 희미한 듯했다. 고개를 갸웃하며 나오려다가 결혼반지를 발견했다.
유온은 그가 반지를 실수로 잊고 나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날 저녁에 함께 식사하게 되었을 때 조용히 이야기를 꺼냈다.
‘저, 서경 씨. 오늘, 혹시……, 반지 잊고 나가셨어요?’
‘…….’
수저를 들고 있던 윤서경의 시선이 유온을 향하더니,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내 방에 들어갔습니까?’
‘…….’
순간 당황한 유온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다가 변명했다.
‘처, 청소하러요.’
‘왜 당신이 청소를 합니까. 일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데.’
‘제가 하고 싶어서…….’
‘괜한 짓 하지 마세요.’
단 몇 마디에 기가 죽은 유온은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깨작거렸다. 청소 때문이라는 거짓말을 윤서경이 믿을지 겁이 났다. 아마도 눈치챘지만 모르는 척하는 것 같았다.
겨우 식사를 마친 뒤 윤서경은 유온을 지나쳐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후로 결혼반지 이야기는 한 번도 하지 못했고, 유온은 괜한 짓을 하지 않았다. 윤서경의 손에는 모양이 없는 웨딩 밴드가 자리 잡았다.
처음엔 반지가 부담스러운가, 하고 애써 생각했다. 그러나 윤서경의 반지는 불편할 정도로 화려하진 않았다. 물론 가격을 생각하면 부담스럽지만 재벌가에서 나고 나란 윤서경이 웨딩 밴드를 대신 하고 다녀야 할 정도로 엄청난 물건도 아니었다. 윤서경의 평소 스타일에도 장식이 없는 밴드보단 결혼반지 쪽이 잘 어울렸다.
하지만 유온은 끝까지 윤서경에게 왜 결혼반지를 두고 다니는지 묻지 못했다. 때문에 지금 제 앞에 놓인 반짝이는 보석들을 보는 기분이 더욱 이상했다.
“이쪽은 파베 세팅 다이아몬드입니다. 라인이 굉장히 가늘게 나온 편이라 잘 어울리실 거예요.”
다이아몬드에, 또 다이아몬드에, 온통 반짝거렸다. 유온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눈이 다 부신 느낌이다. 다이아를 이렇게 가까이서 여러 개 보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처음에 반지를 볼 때도 큰형이 던져 준 팸플릿 안에서 골랐다. 윤서경이 추린 것이라고 했다. 차라리 그때처럼 팸플릿을 주지…….
하지만 신기하게도 눈앞에 놓인 각종 브랜드의 화려한 반지 중에 처음 받은 팸플릿의 물건은 없었다. 그때도 유온이 고르기 전에 윤서경이 먼저 몇 가지 선택한 것이고, 지금도 그가 지시한 브랜드의 물건을 가지고 온 걸 텐데.
‘아……. 그때도 서경 씨가 직접 고른 게 아니었구나.’
유온은 가만히 생각하고 손을 꾹 쥐었다. 그땐 벨벳으로 감싼 책자 모양으로 만든 팸플릿의 반지들이 다 윤서경의 눈을 한 번 거친 것인 줄 알았는데. 두 번째라고 해서 취향이 완전히 뒤바뀌는 건 아닐 테니 아마도 그때는 비서가 골랐거나, 유온 쪽에 일임하여 큰형이 골랐거나, 그랬던 모양이다.
“이건 어때요.”
갑자기 체온과 아스라한 체향이 가까워졌다. 유온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가, 하마터면 윤서경의 이마에 얼굴을 부딪칠 뻔했다.
“아…….”
윤서경이 바로 곁에서 반지를 가까이 끌어당기고 있었다. 안개처럼 코끝으로 흘러드는 향에 유온은 한순간 호흡을 참았다. 계속 맡으면 저도 모르게 윤서경의 가슴팍에 손을 얹으며 매달리게 될 것 같았다.
언뜻 향수로 착각할 것 같은 서늘하고 기분 좋은 냄새. 유온에게는 낯설고도 익숙한 냄새. 눈을 여러 번 깜빡인 유온은 슬그머니 윤서경에게서 떨어져 앉으며 대답했다.
“전 좋아요. 뭐든 괜찮아요.”
그 말에 윤서경의 시선이 비스듬해졌다. 움찔한 유온이 얼른 대답했다.
“그, 그게 아니라, 대충 말씀드리는 게 아니라……, 전 정말 서경 씨가 고른 거라면 뭐든 좋아요. 정말이에요.”
이건 사실이었다. 유온은 서경이 고른 물건이라면 이런 비싼 물건이 아니라 중학생, 고등학생들이 가는 장난감 같은 브랜드의 몇만 원짜리 반지라도 괜찮았다. 윤서경은 잠시 유온을 보더니 퍼스널 쇼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디자인으로, 대신 세팅을 새로 하죠. 이쪽 둘레가 좀 더 화려하면 좋겠습니다.”
“…….”
……하지만 안 그래도 화려한 반지에 다이아 세팅이 한 바퀴나 추가되는 결과를 원한 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온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반지의 가격은 이미 아득해졌고 눈앞에 늘어놓아졌던 선택받지 못한 물건들은 번듯한 상자로 다시 돌아갔다.
“그럼…….”
거기서 끝날 줄 알았으나, 탁자 위에는 새로운 상자가 놓였다. 뚜껑을 열자 줄지어 장식된 시계가 빛을 냈다. 유온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결혼반지도 아득한 가격이었는데 지금 보는 시계는 더욱 비쌌다. 아니, 조금 전에 세팅을 새로 해 달라고 주문한 반지보단 가격대가 낮을지도 모르나, 아직 유온은 ‘다이아 한 줄 추가’라는 사태에도 채 맞서지 못했다.
너 같은 사람에게 가당키나 한 물건이냐며 누군가가 빼앗아 가면 어쩌지. 그런 좀 터무니없는 고민부터 현실적으로는 결혼식인데 온몸에서 반지밖에 보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무튼 자신은 비싼 물건에 어울리지 않으니까.
지금까지도 얼마나 많은 물건이 자신에게 와서 돼지 목의 진주가 되었던가? 윤서경이 기껏 돈과 시간을 들여 골라 준 물건인데 그게 고작 자신의 손에 끼워져야 한다니……. 아까운 일이다. 돼지 목의 진주, 개발의 편자, 진주 중에서도 아주 비싼 진주고 편자 중에서도 다이아를 둘러 만든 편자였다.
거의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었지만 유온은 애써 그를 감추며 눈앞에 놓인 값비싼 시계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것뿐 아니라 윤서경의 것도 고르는 자리였다. 전문가가 엄선해 온 시계를 죽 훑어본 유온의 시선이 오팔색 판의 시계에 가서 멈췄다.
아주 잠깐이었다. 눈앞에 앉은 퍼스널 쇼퍼도 모를 정도로 잠깐. 그 시계가 예쁘고, 윤서경에게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바로 자신이 고른(골랐다고 생각하는) 반지도 윤서경에게 버려졌다는 걸 떠올렸다. 유온은 아무것도 못 본 척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시계도, 음, 전 다 예뻐요. 아, 그런데 충분히 화려하니까 추가 세팅은…….”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작아졌다. 다 예쁜 건 사실이었고 그 말을 하다가 다이아 추가가 퍼뜩 떠올라 안 하면 좋겠다고 다급하게 덧붙였다. 그게 윤서경에게 들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시계로 손을 뻗었다. 윤서경과 퍼스널 쇼퍼의 시선이 윤서경의 손으로 향한 틈에 유온은 다시 자신이 보았던 시계를 흘끔거렸다. 커다란 손에서 이어지는, 힘줄이 두드러진 손목에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눈이 조금 커졌다.
“이걸로.”
그렇게 말하며 윤서경이 집은 건 유온이 몰래 보던, 판이 오팔색인 은시계였다. 시계를 들어 본 윤서경은 유온의 팔로 손을 뻗었다. 유온이 채 놀라기도 전에 소매가 동그란 손목뼈 위쪽까지만 걷어지고, 그 위에 시계가 올라왔다.
“유온 씨는 내 것보다 판이 작은 게 더 어울리겠습니다. 어때요.”
“아…… 예? 아, 조, 좋아요. 좋아요, 다 좋아요.”
심장이 쿵쿵 뛰었다. 시계고 반지고 이제 생각나지 않았다. 윤서경의 한쪽 손이 제 손바닥을 잡고, 다른 한쪽 손이 그 위에 시계를 채워 보고 있었다.
윤서경에겐 딱 맞아떨어지는 크기의 판이 유온의 손목에선 어색할 정도로 컸다. 판에 손목이 거의 다 가려지는 정도였다.
거의 몽롱해지다시피 한 유온의 손을 놓고 윤서경이 판 사이즈며 줄의 길이며, 남은 이야기를 마쳤다.
“그럼 마지막으로…….”
퍼스널 쇼퍼의 말에 유온은 머리가 띵해지는 것 같았다. 아직도 뭐가 남았나? 결혼 예물은 반지, 시계, 그거면 끝 아닌가. 그 외에 다른 예물은 생략하기로 한 것 같은데.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퍼스널 쇼퍼가 꺼낸 건 화려하게 진열된 물건들이 아닌 작은 상자였다.
상자를 열자 가죽을 가늘게 꼬아 만들고 매듭에 백금 장식을 단 팔찌가 들어 있었다.
“이건 내가 개인적으로……,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군요. 예물과 상관없이 주는 선물입니다.”
“네?”
유온은 순간 자신이 뭘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깜빡였다.
“사이즈는 조절이 가능하니 맞으실 겁니다.”
퍼스널 쇼퍼가 그렇게 말하며 물건을 유온에게 잘 보이도록 내밀었다.
“제, 제가……, 저한테요? 왜…….”
당황한 나머지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원래 평소에도 말을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목소리까지 쉬어 버린 느낌이었다. 더듬더듬 묻자 윤서경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약혼자니까요.”
“…….”
그렇게 말하면 반박할 말이 없었다. 퍼스널 쇼퍼가 친절하게 한번 착용해 보시라 권하는 바람에 유온은 떠밀리듯 팔찌를 손목에 감았다. 단순한 디자인의 팔찌는 지금까지 본 반지나 시계보단 그나마 어울리는 편이었다. 하지만 어울리고 말고를 떠나 이건 윤서경이 자신에게 준 팔찌다. 팔찌를 바라보는 유온의 눈이 조금 빛났다.
마지막 물건을 꺼냈던 퍼스널 쇼퍼는 곧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유온도 우물쭈물 일어나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조용해진 방 안에서 윤서경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유온이 움찔했다.
“마음에 듭니까?”
“네. 정말 마음에 들어요…….”
이런 걸 줄 줄은 몰랐어요, 정말 고마워요, 비싼 물건 아닌가요, 안 주셔도 괜찮은데, 수많은 감사의 말이 입술 근처에 머물다가 목소리가 되지 못하고 사라졌다. 이런 말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에겐 그런 사람이 어울릴 텐데.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제대로 할 줄 모르고, 정말, 윤서경에게 너무, 너무 미안했다.
“마음에 들면 됐습니다.”
윤서경은 그렇게 말한 뒤 유온에게서 슥 멀어졌다. 무거운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집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시계를 확인하자 아직 8시도 되지 않았다. 깨끗하고 어질러진 것 하나 없지만 유온이 체감하기로는 폭풍이 지나간 것 같다. 혼자 남은 방 안에서 유온은, 누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몰래 팔찌를 어루만졌다.
* * *
추운 바람이 들이닥치듯 불었다. 마른 나뭇가지에 겨우 매달려 있던 지난 계절의 흔적이 맥없이 떨어졌다. 유온은 맨발을 한 채 정원의 차디찬 돌바닥을 밟고 서 있었다.
맞은편에는 윤서경이 있다.
‘대답해요, 이유온 씨.’
아…….
현실이야.
아니, 아니었다. 이건 현실이 아니라 지나간 과거였다. 혹은 유온이 미리 알고 있는 미래였다. 유온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앞에 있는 윤서경의 얼굴이 한겨울의 정원보다 더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맞아, 대답. 대답하라고 했지. 고개를 저은 건 그의 말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 상황이 왜 일어난 건지 기억나지 않았다. 왜 자신이 맨발로 밖에 나와서 서 있는 건지. 윤서경은 왜 저렇게 화가 났는지.
‘……묻잖아요.’
‘그게, 서경 씨, 저는…….’
현실이든, 과거든 미래든, 지금 윤서경과 마주 서 있는 건 자신이었다. 입을 열자 하려고 한 말이 흘러나왔다. 대단한 말은 아니었다.
‘저, 저는, 전…….’
이런 멍청한 더듬거림이 전부였다. 더욱 인상을 차게 한 윤서경이 성큼 다가와 손을 뻗었다. 당연히 그가 뺨을 후려칠 거라 생각하고 움츠렸다. 하지만 그의 손은 유온의 팔을 움켜쥐고 끌어당기고, 그다음엔 등을 떠밀어 집 안으로 들여보냈을 뿐이다.
아, 정원에서 다투면 다른 집에서 보일 수도 있으니까.
집으로 들어가며 유온은 그렇게 생각했다. 따뜻한 거실 바닥을 밟은 발에 물감처럼 온기가 번졌다. 그렇다고 당장 정원의 냉기가 가시는 건 아니었다. 따듯한 곳에 들어오자 알 수 있었다. 유온은 이가 부딪칠 정도로 덜덜 떨고 있었다. 추워서인지, 윤서경의 손에 맞는 게 두려워서인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말하라고.’
점점 더 화가 실린 목소리가 유온을 압박했다. 유온은 잔뜩 겁에 질려선 주춤주춤 물러났다. 새파랗게 질리고 마른 풀이 붙은 제 발이 눈에 들어왔다. 시체 같은 발을 본 순간 왜 자신이 맨발로 정원에 있었는지 떠올랐다.
별것 아니었다. 그냥 머리가 복잡해서 차가운 공기를 쐬고 싶었을 뿐이다. 맨발인 건 그저 슬리퍼를 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게 윤서경에겐 일종의 시위 따위로 보인 듯했다. 유온은 따뜻한 공기 속으로 들어와서도 여전히 얼음장 같은 두 손끝을 꾸물꾸물 맞잡은 채 웅얼거렸다.
‘그냥, 생각할 게 조금 있어서요. 조, 좀 멍하니 있었어요…….’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이 날씨에 맨발로 밖에 나간다는 겁니까?’
그의 말에 유온은 혹시, 그가 자신을 걱정이라도 한 건지 희미하게 기대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윤서경은 당장 손을 들고 싶은 걸 참는 듯한 얼굴로 내뱉었다.
‘이 집은 당신 집이기도 합니다.’
‘…….’
‘그러니 이 집에서 당신이 뭘 하건 내가 간섭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 짓이 내 눈에 띄지 않으면 좋겠군요.’
‘죄……, 죄송해요.’
윤서경은 유온의 사과가 채 끝나기도 전에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한참 동안 혼자 멍하니 거실에 서 있던 유온은 문득 집 안이 더울 정도로 따뜻하다는 걸 알았다.
공간마다 온도가 다르긴 하지만 거실이 유온이 느끼기에도 훈훈할 정도면 윤서경에겐 방도 조금 더울 것이다. 유온은 얼어붙은 발로 걸어가 보일러의 온도 조절 버튼을 톡톡 눌렀다. 어쩐지 덥다 했더니 희망 온도가 28도까지 올라가 있었다.
가사 도우미가 설정한 건지 아무리 한겨울이라도 너무 높았다. 유온은 온도를 23도로 내린 뒤, 따뜻한 공기가 감도는데도 어딘가 썰렁한 거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 *
발끝이 다리를 스친 순간 유온은 깜짝 놀라며 깨어났다. 얼음 덩어리가 피부에 닿은 느낌이었다. 이불을 끌어안은 채 어두운 허공을 잠시 바라보던 유온은 이내 부스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이 꽁꽁 언 듯 차가웠다.
이따금 체온 조절이 되지 않는 건 유온의 체질이었다. 가끔 이럴 때면 손발과 귀는 특히나 죽은 사람처럼 차가워졌다. 유온은 손을 뻗어 스탠드를 켜고, 바깥의 기척을 확인하다가 여기가 호텔이라는 걸 떠올렸다. 베드룸마다 난방 장치가 따로 돌아갈 것이다. 바닥 난방이 깔린 한 채 집보단 훨씬 걱정이 덜했다.
애초에 윤서경은 이곳에 없을 거고.
‘아무도 없으니까, 괜찮겠지…….’
이불 속에서 꿈틀거리며 빠져나간 유온은 곧바로 욕실로 향했다. 슬리퍼를 신지 않았는데도 차가워야 할 바닥이 그리 차지 않을 만큼 온몸이 싸늘했다. 한겨울 호텔 방 한가운데서 얼어 죽는다니, 어이없고 바보 같은 일이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유온은 욕조 마개를 닫고 뜨거운 물을 틀었다.
수증기가 올라오는 온수가 큰 소리를 내며 쏟아졌다. 물이 욕조 바닥을 때리기 시작했을 때 유온은 저도 모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무심코 물을 틀긴 했으나 이렇게 크게 소리가 날 줄은 몰랐다.
집에서 한 번, 밤에 욕조에 물을 받을 때 실수로 이렇게 큰 소리를 냈다. 그것 때문에 깬 건지 방해를 받은 건지 곧바로 욕실로 들어온 큰형에게 그대로 얻어맞았다. 그 후로 주위에 사람이 있는 것 같으면 유온은 좀처럼 욕조 근처에 다가가지 않았다. 이렇게 체온이 떨어져 추우면 약을 먹은 뒤 조용히 샤워를 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놀란 토끼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다행히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기색은 없었다. 유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욕조 가장자리에 가만히 두 손을 얹었다. 차오르는 물의 온기로 손끝이 조금은 녹았다.
그나저나 안 좋은 꿈을 꿨다. 사실 꿈이었는지, 현실로 잠시 돌아갔다가 온 건지 알 수 없다. 아……. 참. 현실에선 이미 죽었지.
허무하다면 허무한 마지막이었다. 그래도 아직 몇 달은 더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죽는 게 무서웠던 적은 없으니 그 남은 시간 동안 주변을 말끔하게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온이 기억하는 끝은 윤서경의 귀찮고 짜증스러운 눈빛이었다.
설마 발작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눈이 감기는 순간 제일 먼저 느낀 건 당황이었다.
손에 튄 뜨거운 물방울에 유온은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물이 가득 차 있었다. 레버를 잠근 다음 옷을 가지런히 욕실 입구에 벗어 두곤 욕조로 들어갔다. 그제야 창문 블라인드를 안 쳤다는 걸 깨달았지만, 욕조는 위에서 내려다봐야만 겨우 보일 구조인데 근방에 이보다 높은 건물은 없었다.
지상은 물론이고 다른 건물에서 올려다보기에도 여긴 까마득했다. 이따금 다른 건물 사무실에 불이 켜져 있는 게 보였으나, 눈에 힘을 주고 보아도 사람의 형상은 겨우 사람인 것만 알 수 있을 만큼 작았다.
사실 이곳에 전망용 창을 내놓은 것 자체가 밖에선 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하마터면 후다닥 빠져나가 몸을 옹송그린 채 블라인드 버튼을 누를 뻔한 유온은 그렇게 판단을 내린 후에야 축 늘어졌다.
몸은 더디게 더워졌다. 물이 분명 뜨거운데 어떻게 이렇게 온기가 돌지 않는 건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한참 죽은 듯 있던 유온은 배가 따뜻해지는 느낌에 천천히 눈을 떴다. 또렷해진 시야에 룸 메이드가 단정하게 걸어 두고 간 도톰한 가운이 보였다. 그 아래는 벽에 매립된 형태의 TV, 그 아래로 넓게 낸 욕조 가장자리 선반.
‘……저건 뭐지?’
선반에 가지런히 놓인 어메니티 옆에 작은 남색 주머니가 있었다. 유온은 몸을 일으켜 선반으로 다가갔다. 커다란 포푸리처럼 생긴 주머니는 꽃과 호텔 로고 라벨이 달린 하얀 리본으로 묶여 있었다.
좋은 냄새가 났다. 리본을 풀자 안에서 나온 건 홍차 티백을 몇 배로 키워 놓은 것 같은 모슬린 백이었다. 찻잎과 아기 손톱보다 작은 진주알 같은 게 가득 들어 있었다.
‘아. 욕조에 넣는 건가?’
모양도 놓인 위치도 그것밖에 없었다. 호텔 룸 욕실에서 본 것이라고 해야 목욕 소금 정도였는데, 이건 어머니나 작은형이나 쓰지 않을까 싶은 고급스러운 물건이었다. 연한 풀잎과 꽃냄새가 났다.
유온은 부드러운 주머니를 두 손에 조심스럽게 쥐고 물에 넣었다. 뜨거운 물에 닿자 반투명한 주머니 안에서 건조된 잎이 사르르 피어나고 작은 알갱이는 설탕처럼 녹았다.
싱그럽고 부드러운 향기가 훅 피어올라 사방으로 퍼졌다. 유온은 모처럼 녹을 듯 기분이 좋아져서 욕조에 머리를 기대며 다시 누웠다. 향이 조금, 윤서경의 체향과 비슷한 것 같다.
주제넘게도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물은 따뜻하고 공기는 향긋했고, 연한 재질의 모슬린과 풀어진 잎이 다리며 허벅지를 스치는 감촉도 더없이 좋았다.
‘기분 좋아…….’
누군가는 고작 이런 것, 이라고 하며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유온에게는 꿀이 흘러내리는 듯한 행복이었다. 유온은 피부가 말랑말랑해질 때까지 물속에 들어가 하염없이 흘러가는 한밤의 불빛을 바라보다가 애써 일어섰다. 가운을 입고, 젖은 발의 물기를 꼼꼼하게 닦아 낸 뒤 슬리퍼를 꺼내 신었다.
사람이 간사한지 체온이 오르도록 더운 물에 들어가 있다가 나오자 차가운 물 생각이 났다. 유온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따뜻한데도 어딘가 모르게 썰렁한, 아무도 없는 거실이 묘하게 윤서경과 살던 집을 떠올리게 했다.
고개를 가로저은 유온이 냉장고 문을 막 열어 물병을 집었을 때였다. 거실의 전화벨이 나지막하게 울렸다.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10시였다. 생각보다 오래 자지 않았다.
저녁은 제대로 먹었으니 식사와 관련한 연락은 아닐 것이다. 혹시 윤서경이 전하라고 한 말이라도 있는 걸까. 유온은 물병을 꼭 쥔 채 전화기로 서둘러 다가갔다.
“네, 여보세요.”
―이유온 님? 늦은 밤에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유건 님, 큰형님께서 로비에 와 계셔서요.
유온은 들고 있던 물병을 떨어뜨렸다. 유리병이 대리석 바닥을 굴러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방으로 바로 안내해 드려도 괜찮을까요?
형이, 형이 왜 여기에 왔지? 어떻게……. 창백하게 질린 채 사고가 굳어 버린 유온의 귀로 저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유온 님?
깨지진 않고 바닥을 굴러간 물병에 바깥 풍경이 이지러져서 작게 비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여기는 꿈속의 나라 같은 게 아니라 서울 한복판이었다. 이유건이 원하면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유온의 귀에 짧은 소란과 함께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유온 님. 착오가 조금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쪽은 요 며칠 사이 익숙해진 목소리였다. 유온에게 전화를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 너머로 소란이 일었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
그 고함에 유온은 전화기까지 떨어뜨릴 뻔했다. 높아진 언성의 주인은 정말로 형이었다. 유온이 어떻게 반응을 하기도 전, 소란을 뒤로한 채 호텔 직원은 침착하게 인사를 남기곤 전화를 끊었다.
유온은 신호음만 남았다가 이내 그것도 사라져 버린 수화기를 움켜쥐고 멍하니 서 있었다. 난방 장치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머리 위로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아까 침실 난방을 한다는 게 또 그것 하나 구분 못 하고 전체 난방을 해 버린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점점 추워졌다. 유온은 힘없이 소파로 가서 털썩 앉아 두 다리를 끌어 올렸다. 무릎을 모아 껴안고 고개를 푹 숙이자 시야가 까맣게 좁아졌다.
온몸의 체온과 감각이 벼랑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이상했다. 약을 먹고 싶었다. 이럴 때 먹을 수 있는 약이 몇 종류나 있는데. 집에서 가지고 나올 물건이 있는지 윤서경이 물었을 때 약을 말했어야 했다. 그때는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생각도 하지 못했고, 지난 며칠 동안은 신기하게도 약이 필요하지 않았다.
불안할 때, 기분이 심하게 가라앉을 때, 있는 약을 한꺼번에 모조리 삼키고 싶을 때나 어두운 창밖에서 시선을 뗄 수 없을 때, 그리고 오늘처럼 갑자기 심하게 추웠다가 열이 오르기를 반복할 때, 또 배가 아프고 머리가 아프고 피부가 따끔거릴 때. 어디가 안 좋든 곧바로 먹을 수 있는 약이 집에 쌓여 있었다. 전부 유온의 주치의가 처방해 준 약들이었다.
그렇게 여러 약을 많으면 하루에도 몇 번씩 먹어야 했는데 호텔에 들어오고 며칠, 약이 필요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심지어 식욕도 수면욕도 있었고, 그 수면욕이 지나친 것도 아니었다. 유온의 상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꼭 멀쩡한 사람처럼.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원래 상태로 돌아간 것 같았다. 모자라고 허약한 이유온.
전화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말하며 끊어졌지만 친형이 로비까지 왔으니 그냥 들여보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유건은 집에서 유온의 물건을 가지고 왔을 수도 있다. 그걸 직접 전해 줘야겠다고 하면 더더욱 들여보내 주겠지.
‘무서워……, 무서워.’
기껏 향기가 좋고 따뜻한 물에 몸을 덥힌 보람이 없었다. 온기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난방 장치에서 나오는 바람도 이제 겨울바람으로 느껴졌다. 안락한 방에서 내몰려 추운 벌판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이유온은 세상에서 아버지가 제일 무섭고, 그다음으로 큰형이 무서웠다. 이 순간에는 큰형이 더 무섭다. 서랍에 휴대폰을 넣어둔 것처럼 회피하고 미뤄 둔 두려움이 어쩌면 저 현관문 앞까지 와 있었다. 집에 오면 이야기 좀 하자던 큰형의 목소리가 귀에서 웅웅 울렸다.
몸을 더더욱 웅크렸을 때 현관문의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유온은 심하게 놀라 헛숨을 쉬며 미끄러지듯 소파에서 떨어졌다. 저벅저벅, 두꺼운 현관문과 바닥의 카펫 때문에 들리지 않던 구둣발 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울렸다.
“…….”
맑아진 시야에 윤서경이 보였다. 그는 짙은 남색 정장에 검은 코트를 걸친 채 서 있었다.
늦은 밤인데도 역시 흐트러짐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호텔 스위트룸의 실내 인테리어가 그를 위한 배경으로 보였다. 유온은 그를 올려다보다가 가느다란 숨을 내쉬었다. 숨결에 희미하게 신음이 섞였다.
이유건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줄 알았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건 무서운 이유건이 아니라, 다른 의미로 무섭긴 하지만 지금은 반갑기까지 한 윤서경이었다.
형이 들이닥쳐 다짜고짜 뺨을 때릴 일은 없겠다는 생각에서인지 미친 듯이 요동치던 가슴이 조금 가라앉았다.
“왜 그러고 있습니까.”
“네……, 네?”
순간 윤서경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 제 꼴을 깨달았다. 소파에 팔만 꿰여 매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손으로 간신히 소파의 패브릭을 움켜쥔 채 축 늘어진 모습이었다.
유온은 황급히 몸을 움직였다. 똑바로 서려고 했지만 아직도 다리가 풀려서 휘청거릴 뿐이었다. 보다 못했는지 윤서경이 성큼 다가와 유온을 일으켜선 소파에 앉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윤서경의 체향이 스미듯 다가왔다. 아까 그 물속에 들어가 있을 때보다 더 빠르게 머리가 말랑해지는 것 같았다. 몸의 떨림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유온은 멍한 눈길로 윤서경을 올려다보았다. 그에게 아직 바깥의 찬 기운이 남아 있었음에도 이상하게 이 방 안보다 그의 온도가 더 높은 것처럼 보였다.
“아, 저기……, 호, 혹시 로비에서 저희 큰형이랑, 마주치진 않으셨어요?”
분명 프런트에서 전화가 왔다. 이유건의 목소리도 들었다. 혹시 윤서경은 다른 길로 와서 그와 마주치지 않은 걸까? 그럼 윤서경이 있을 때 이유건이 다녀갈지도 몰랐다. 그러면, 적어도 맞지는 않겠지. 그에게서 듣기 힘든 말이 나오면 몰래 시선을 돌려 윤서경을 쳐다보며 감정을 누그러뜨릴 수도 있을 테고. ……윤서경이 형제끼리 이야기하라며 자리를 피해 주지 않는다면.
하지만 그렇게 둘만 있게 된다고 해도 최소한 이유건이 손찌검은 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유온은 지금, 배우자가 될 사람과 호텔에 있으니까. 이유건이 둘 사이에 접촉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면 옷에 가려지는 곳이든 어디에든 설마 흔적을 남길까.
희망적인 생각에 부풀고 있는데 윤서경이 말했다.
“이유건 씨는 돌아갔습니다. 앞으로 결혼식 전까지 약속 없이는 찾아오지 않도록 전해 뒀고요.”
“네……?”
순간 유온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인가 했다.
“돌아, 갔어요? 정말요……?”
“만나고 싶었습니까? 이유건 씨가 좀 흥분한 상태 같아서 대면하지 않는 편이 좋았을 텐데요.”
“아, 아뇨, 아니요, 저, 저는 싫어요.”
언제 제 의견을 이렇게 강하게 내뱉어 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유온은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됐습니다. 원한다고 했어도 말렸을 거고요. 형제라도 지금 당신 상태에 다른 알파를 만나는 건 좋지 않을 겁니다.”
“제 상태……?”
“이게 정말 다 당신 약입니까.”
제 상태, 라는 물음에 답하지 않고 윤서경이 쇼핑백을 하나 내밀었다. 검은색에 밑바닥이 넓은 쇼핑백에서 잘그락 소리가 났다. 고개를 숙여 안을 들여다보자 집에서 먹던 약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아……, 네, 맞아요. 형이 가져다줬나 봐요…….”
“이걸 다. 어떤 때 먹는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 그냥 용도는 다 달라요. 아무 때나 몸이 안 좋으면 먹는 건데.”
“몸이 어떻게 안 좋을 때요.”
“두통이나, 배가 아프거나, 음, 제가 체온이 갑자기 떨어질 때도 있어서. 염증도 잘 생기고요……, 그렇게, 여기저기.”
정신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신체적인 것만 따져도 자신은 충분히 덜떨어진 사람이었다. 머리까지 불안정하다는 걸 알면 윤서경이 얼마나 질릴까.
그의 눈에 자신 같은 사람이 어떻게 비칠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더럭 겁이 났다. 유온도 사람이기에 짝사랑하는 사람이자 약혼자가 된 사람에게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었다.
“전부 처방약인 것 같더군요.”
“마, 맞아요. 어릴 때부터 봐 주신 선생님이 계셔서 필요할 때마다 처방 받은 거예요. 조금 아픈 걸로 매번 병원에 갈 수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형이 이걸 주러 왔었나 봐요…….”
일부러 약을 챙겨 가져다주려 했던 모양이다. 큰형은 유온에게 엄격하고 혼낼 때 손을 올리는 일이 잦지만, 훈육 방식이 거칠 뿐이지 자신을 생각해 주는 사람이었다.
집안에서 유온을 가장 자주 혼내는 게 그였지만 가장 잘 챙겨 주는 것도 그였다. 이따금 아버지에게 혼이 날 때도 그가 화가 난 아버지를 말려 주곤 했다. 그런 형을 문전박대하다시피 하고, 만나기 싫다고 웅크리며 회피한 게 죄송하게 느껴졌다.
윤서경이 돌아가면 전화해서 사과해야 할 것 같았다. 마음이 콕콕 쑤시는 것처럼 불편했다. 꺼 둔 휴대폰의 전원을 켜야만 한다.
손끝을 만지작거리다가 유온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쇼핑백 가득 들어 있는 약통을 보고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유온은 약을 먹는 게 거의 습관이었기에 어딘가 조금만 불편해도 바로 약을 찾았고, 선반에 가득 놓인 약을 보면 당장 아픈 곳이 없어도 뭐라도 먹어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결국 어디가 안 좋은 것 같다, 하고 생각하며 약통 몇 개를 열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분명 불안할 때 먹을 약을 간절하게 찾았는데 약통을 보고도 손이 나가지 않았다. 윤서경이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갑자기 진정이 되었던 것 같다.
고개를 든 유온이 윤서경에게 들키지 않도록 그를 훔쳐보다가 얼른 눈을 돌렸다. 윤서경은 자신이 그를 이렇게 도둑처럼 흘끔거리는 걸 싫어하는데 눈앞에 있으면 자꾸만 보게 된다.
다시 옅게 체향이 느껴졌다. 평소엔 가까이, 평소라고 할 만큼 자주는 아니었지만, 아주 몸이 가까워지면 얼핏 나는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후각으로도 선명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윤서경에게서 체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혹시 누군가를 만나고 오기라도 한 걸까, 체향을 흘려보낼 만한 사람을. 그럼 자신과 형이 그의 기분이나 시간을 망친 건 아닐까? 기껏 들었던 고개가 무거운 기분에 도로 축 처졌다.
‘사과를 해야……. 아니야, 왜 사과하는 거냐고 하면 뭐라고 대답하지.’
뱅글뱅글 도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유온은 아직도 윤서경이 들고 있는 쇼핑백을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윤서경은 쇼핑백을 건네주지 않고 유온의 손을 쳐다볼 뿐이었다.
당황한 유온이 한 걸음 더 다가가서 꾸물꾸물 쇼핑백 손잡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윤서경은, 쇼핑백을 든 손을 뒤로 빼 유온에게서 멀리 떨어뜨렸다.
“…….”
이제 당황을 넘어 황망했다. 빠르게 눈을 깜빡거린 유온이 결국 웅얼거렸다.
“저 주시면, 제가 방에 정리해 둘게요. 그, 눈에 안 띄게 잘 놓아둘게요.”
“내 눈에 띄건 띄지 않건 약이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왜 그러세요……. 하는, 이유온치고 원망스러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언제부터 이렇게 약을 먹었습니까?”
“어릴 때부터요. 제, 제가 원래 허약한 편이어서. 형질도 약하다 보니까 문제가, 조금 마, 많아요.”
“…….”
“처음부터 그렇게 많았던 건 아닌데, 자, 자꾸만 아픈 곳이 늘어나서요. ……죄송해요.”
“죄송해?”
죄송하다는 말에 윤서경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아, 그, 그게…….”
왜 화를 내는 거지. 죄송하다는 말에 자신이 모르는 다른 뜻이라도 있나? 유온은 겁을 먹은 나머지 거의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유건이나 아버지를 상대할 때와는 조금 다르지만, 친해질 거라 생각했던 상대가 유온을 갑자기 경멸이나 조롱의 시선으로 볼 때의 기분을 수십 배로 불려 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어쩔 줄 모르는 유온을 말없이 바라보던 윤서경이 입을 열었다.
“내일 잠시 외출합시다. 병원에 갈 거니 자정부터 아무것도 먹지 말아요. 일찍 자는 게 좋겠군요.”
“병원이요?”
윤서경은 유온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손목시계를 한번 확인하고는, 시선을 내려 바닥에 굴러다니는 물병을 보더니 주워 들었다.
“물도 안 됩니다.”
“그게……, 벼, 병원은 왜요? 저는 주치의 선생님이 따로 있는데, 사실 지금 학회 때문에 출장 중이세요. 다음 주면 돌아온다고 하니까 그때 가, 볼게요…….”
“당신 주치의에게 가는 거 아닙니다. 부경 병원으로 갈 겁니다.”
“네? 아, 왜, 왜요?”
“병원에 가는데 이유가 왜 필요합니까. 이 약은 거실 탈의실에 두십시오. 빈 선반은 거기밖에 없으니까. 당신이 필요한 대로 정리해 두고.”
점점 더 모르겠다. 혼란스러운 유온을 두고, 윤서경은 아직 일이 안 끝났다며 바람처럼 나가 버렸다. 바닥에 굴러다니던 물병을 그대로 든 채로.
몸의 떨림은 완전히 가라앉았고 오르기 시작하던 미열도 언제 그랬냐는 듯 내렸다. 거실엔 윤서경의 체향이 은은하게 떠돌았다. 유온은 약이 가득 든 쇼핑백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왜인지 이제 필요 없는 물건처럼 느껴졌다.
* * *
굵은 바늘이 혈관을 파고들고, 주사기 배럴에 검붉은 액체가 차올랐다. 촘촘한 눈금을 따라 채워지는 피를 유온은 가만히 보고 있었다.
병원에는 가지 않았다. 대신 아침부터 윤서경과 함께 올라온 몇 사람이 마스터 베드룸 바로 옆의 방에 유온을 눕혀 두고 주사기며 간단한 검사 도구 따위를 꺼내며 조용히 움직였다.
체온을 재고 눈이며 입을 살펴보고, 피를 뽑고, 촉진하는 정도의 간단한 검사였다. 의사 같은데 이렇게 나와서 검사를 하고 가도 되는 걸까. 걱정도 되고 의아하기도 했지만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여서 유온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도착한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그들은 결과가 나오면 메일로 보내 드리겠다는 말만 남긴 뒤 돌아갔다.
방에는 윤서경과 유온 둘만 남았다. 윤서경은 정장을 갖추어 입은 게 일하다 온 기색이었다. 체향에 섞여 흐리게 향수 냄새가 났다. 시계를 한 번 확인한 그가 말했다.
“일단 정밀 검사 전에 피 검사부터 한 겁니다. 간 수치를 제일 먼저 봐야 할 것 같아서요.”
“네.”
간 수치? 약 때문일까. 유온은 얌전히 대답했다. 어릴 때부터 줄곧 이렇게 먹었고 주치의도 일정한 주기로 이런저런 검사를 하고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주절주절 말할 기운은 없었다. 윤서경이 말을 이었다.
“어제는 새로 들어온 직원이 실수를 했다더군요. 앞으로 같은 일은 없을 겁니다.”
“어제요……? 아…….”
이유건이 찾아온 일을 말하는 듯했다. 그런데 실수는 뭐고 같은 일이 없을 거라는 건 뭘까. 유온이 천천히 고개를 갸웃하자 윤서경이 덧붙였다.
“내 허락 없이는 아무도 올려 보내지 말라고 지시했는데, 교육이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당신 가족은 앞으로 여기에 찾아올 일 없습니다. 와도 만나지 못할 거고요.”
“그, 그런 게 가능한가요.”
“안 될 것도 없죠.”
유온은 얼떨떨했다. 제가 원치 않으면 가족을 만나지 않아도 된다, 그건 이곳에 온 첫날 집에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고 들은 것과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정말로 그런 일이 가능할까, 하는 불안.
하지만 윤서경은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부경그룹의 일원이었다. 부모님의 사업을 위협하는 건 쉬운 일일 것이다. 그 칼날이 자신과 가족을 만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휘둘러지는 건 이상한 일이었지만.
“난 이만 나가 봐야 합니다. 그리고.”
“네…….”
“탈의실에 가서 당신이 먹는 약 개수라도 세어 보세요.”
그 말만 남기고 또다시 윤서경은 사라졌다. 유온이 침대에서 내려와 배웅을 하러 가기도 전에. 썰렁해진 침실에서 채혈하고 알코올 솜 테이프를 붙여 둔 자신의 팔을 한 번, 누가 왔다 갔냐는 듯 깨끗하기만 한 방을 한 번 둘러본 유온은 굴러떨어지듯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약 개수를 세어 보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우선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거실에서 욕실로 이어지는 탈의실에 들어간 유온은 자신이 용도에 따라 정리해 둔 약을 하나씩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일곱, 열……, 열둘……, 열일곱……. 스물둘…….
“…….”
조금…… 많은 것 같긴 했다.
하지만 두통에 먹는 약만 해도 열이 함께 있는 두통, 편두통, 머리가 조여드는 듯한 두통, 쿵쿵 울릴 때의 두통, 그런 식으로 세세하게 나뉘어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형질과 관련한 약도 몇 개나 되었다. 역시 윤서경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인 모양이다. 하지만 이걸 매일 다 먹는 것도 아닌데.
유독 통통한 약통 하나를 손끝으로 기울였다가 놓아 제자리에 돌려놓은 뒤 유온은 반만 닫힌 문 너머 욕실을 한 번 시선으로 둘러보았다. 자신이 머무는 침실 욕실의 두 배, 아니, 세 배는 되어 보였다.
커다란 스파 욕조 삼면을 두른 넓은 창으로 바깥 풍경이 시원하게 보였다. 샤워 부스 넓이만 해도 웬만한 가정집 욕실 정도는 될 정도로 넉넉하고, 탈의실 옆쪽 세면대에선 강아지 한 마리쯤 여유롭게 목욕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자신은 사용할 일이 없을 욕실이다. 문으로 나뉜 탈의실 선반 하나를 차지한 걸로 충분했다.
머리가 멍한 듯 아픈 듯했다. 유온은 두통약 하나를 꺼내서 거실로 나왔다. 예전에 병원에 간 것도 두통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주치의가 아닌 다른 의사를 찾아간 것이었다.
평소처럼 희미하게, 심해도 하루, 이틀이면 나아지던 두통과 달리 몸이 아픈 것에 익숙한 유온조차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지독했다. 주치의를 먼저 찾아갔었지만 그는 MRI까지 모두 찍은 후에 고개를 갸웃하더니 유온을 돌려보냈다. 우선 부친과 큰형님의 이야기를 들어 봐야겠다고 하면서.
평소의 유온이었다면 거기서 고개를 끄덕이고 아버지나 이유건에게서 연락이 오길 기다렸을 텐데, 아무래도 이상한 느낌이 들어 가족들 몰래 다른 병원에 찾아갔다. 그곳에서는 곧바로 결과를 들을 수 있었다. 긴 설명을 들었으나 요약하자면 ‘당신은 앞으로 길어야 몇 달밖에 살 수 없습니다.’였다.
언제 발병한 건지는 모른다. 확실한 건 윤서경과의 결혼 이후였다. 그 병은 슬퍼서 생기는 거라고 한다. 이유온의 인생에서 가장 슬픈 시기는 그때였다.
떠오르는 우울한 기억을 애써 흐트러뜨리다 보니 떠올랐다. 그때도 윤서경은 유온이 가족과 만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막는 게 아니라, 가족 누구든 만나고 왔다는 걸 알면 노골적으로 싸늘한 얼굴을 했다.
그가 싫어하는 것 같아서 감추면 역효과가 일었다. 그는 유온이 언제 어디서 가족을 만나든 다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족이 자신을 불러내거나 집으로 찾아오면 도저히 안 만나겠다고 거절할 수도 없었다.
한 번은 이유건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작은 프리저브드 플라워 화병을 사 간 적이 있다. 또 형을 만나고 왔다고 윤서경이 불쾌해할까, 선물이라도 사 가 보자고 생각한 것이다. 윤서경의 서재에 어울릴, 우아하면서 눈에 너무 띄지 않고 차분한 물건을 고르느라 두 시간 가까이 소비했다.
윤서경은 유온이 그의 공간에 들어오는 걸 극도로 싫어했기에 가사 도우미를 통해서 서재 책꽂이에 두고 나와 달라고 부탁했다. 마음에 들까, 안 들어도 그냥 놓아두어 줬으면 좋겠다. 그렇게만 빌고 있는데 윤서경이 집에 돌아와 서재에 들어가선 곧바로 유온을 불렀다.
유온은 아주 조금은 기대하며 그의 서재로 향했다. 하지만 윤서경은 호의적이라고 할 수 없는 냉랭한 눈을 한 채 서 있었다.
‘이유온 씨.’
‘네…….’
‘당신이 두고 간 겁니까?’
‘네, 마, 맞아요. 저어, 제가 방에 들어오진 않았어요. 도우미 아주머니한테 부탁해서 놓아둔 거예요. 걱정하지, 아, 아니, 화내지 마세요. 아니…….’
스멀스멀 느껴지는 윤서경의 불쾌감이 고스란히 느껴져 우물쭈물 말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화내지 말라는 말도 이상했다. 무슨 말을 할지 헤매고 있는데 윤서경이 그대로 손을 기울였다. 손에 있던 유리 화병이 무력하게 바닥으로 낙하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
사방으로 튀는 유리 파편에 흠칫 놀라 뒷걸음질하면서 유온은 깨진 유리 사이에 죽은 듯이 놓인 꽃을 보았다. 오랫동안 시들지 않는다고 하던 꽃인데, 유리 조각에 꽃잎이 찢겨서 버릴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여러 번 말했습니다.’
‘……죄송해요. 저는 그냥…….’
‘나가세요.’
‘하, 하지만 유리 조각…….’
윤서경은 나가라고 다시 말하는 대신 귀찮고 짜증스러운 걸 보는 눈길로 유온을 보았다. 깊게 가라앉은 눈은 아무런 대화도 원하지 않고 있었다.
유온은 주춤거리며 서재를 나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발끝이 따끔거려 보니 눈에 보일 듯 말 듯 작은 유리 파편이 박혀 있었다.
그 후로, 윤서경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대신 쉽게 버릴 수 있거나, 그냥 두면 시들고 상하는 종류로만 준비했다. 선택지는 좁았고 주로 고르는 건 생화였다. 물론 윤서경은 생화도 흘끗 보고 지나칠 뿐이었다.
지칠 법도 한데 열심히 꽃 따위를 준비한 건 딱 한 번, 윤서경이 거실에 꽂아 둔 꽃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원래 외출할 예정이었지만 몸이 너무 안 좋아 침실에서 조용히 잠을 잤던 날이었다. 아마 윤서경은 유온이 집에 없는 줄 알았을 것이다.
괜히 거실을 돌아다닐 일이 없게 침실에 항상 물을 넉넉히 가져다 두는데, 자면서 자꾸 목이 말라 물병을 비우는 바람에 그날따라 물이 떨어졌다.
조용히 나가서 가지고 올 생각으로 유령처럼 스르르 나갔더니 윤서경이 있었다. 유온은 놀라서 벽에 붙다시피 하며 그의 눈에 띄지 않도록 숨었다.
바깥의 추위와 건조함이 잊히도록 화사한 노란색으로 꽂은 화병을 윤서경은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각도 때문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너무 오래 보고 있어서, 이대로 화병을 깨뜨릴까 말까 고민하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유온이 느끼기에 윤서경이 그 순간 그렇게 난폭한 생각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느끼고 싶은 대로 느끼는 게 아닐까 싶으면서도.
그 후로 더 열심히 집 안 곳곳에 꽃을 장식했다. 윤서경의 서재와 침실엔 접근하지 않았지만. 꽃, 그러고 보니 죽기 전에 꽃을 주문해 두고 정신이 없어서 잊어버렸다. 지금 시점에선 아직 구하지 못하는 꽃일 것이다.
몇 년 후에 다시 살 수 있을까? 그때는…… 윤서경에게 그 꽃을 줄 수 있을까? 유온은 물병을 든 채 동그란 알약을 바라보다가, 물병만 뚜껑을 열고 약은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두 모금 정도 물을 마신 뒤 두 손으로 물병을 잡고 멀뚱히 앉아 있던 유온은 흐르는 시간을 자각하고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있지 말고 책이라도 읽을까. 어차피 눈에 들어오지 않을 걸 알지만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온은 저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가 시계를 보고 깨달았다. 의사가 다녀가느라 아침 먹을 시간을 훌쩍 넘겼다. 식사를 가지고 온 듯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인터폰을 확인하니 익숙한 얼굴의 호텔 직원이 맞았다.
후다닥 다가가서 문을 열자 직원이 친절한 얼굴을 한 채 은색 트롤리를 밀고 들어왔다.
위에는 평소와 같이 꽃과 맛있게 드시라는 호텔의 메시지 카드, 물과 음료, 음식이 놓여 있었다. 아침은 한식인지 뚜껑을 덮은 도자기 식기였다.
“어제 저녁엔 금식을 하셨다고 하셔서 조식은 죽으로 준비했습니다. 혹시 허전하시면 전용 회선으로 바로 연락 주십시오.”
“아, 네. 감사합니다.”
유온은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 새하얀 깨죽 위에 검은 깨가 동그랗게 장식되어 있었다.
항상 룸서비스 메시지 카드에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기재해 달라고 쓰여 있고, 샐러드에 들어갈 채소 하나까지 세세하게 고를 수 있는 메뉴판도 있지만 유온은 뭐가 먹고 싶다는 의사를 한 번도 표현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호텔에서 골라 올라오는 메뉴를 보면 자신이 싫어하는 음식이 나온 적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좋아하는 음식이 자주 나온다. 그 정도로 사소한 행운도 유온에게는 드문 일이라서 기뻤다.
식사를 치우고, 유온이 침실에 있을 때 거실과 다른 침실을, 그게 끝난 뒤 유온이 거실로 나와 있으면 유온의 침실을 정리하는 순서의 룸 메이킹이 끝났을 때였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점심을 가지고 올 것이다. 하루가 화살처럼 빨랐다.
어제부터 붙잡고 있는 어려운 책을 펼치며 소파에 앉은 유온은 또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일어났다. 시계를 확인했으나 이번엔 식사 때가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전화기를 돌아보았다. 청소할 때 말고는 내내 거실에 있었는데 누가 찾아왔다는 연락은 없었다.
긴장한 채 인터폰을 확인하자 조금 전에 청소를 마치고 간 메이드와 호텔 지배인 중 한 명이었다.
“네……. 무슨 일이세요?”
―정말 죄송합니다, 이유온 님. 저희 직원이 청소 후 룸에 물건을 두고 나와서요.
“아, 네. 잠시만요.”
지배인이 뭔가 더 말하려는 것 같았으나 유온은 곧바로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온 지배인과 메이드는 유온이 미안해질 정도로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괘, 괜찮아요. 들어오세요. 편하게 가지고 나가시면 돼요.”
유온의 대답에 지배인과 메이드는 한층 더 쩔쩔맸다.
“대표님께 청소 시간 외에는 절대 베드룸에 들어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정말 외람되지만, 혹시…….”
그제야 두 사람의 뜻을 알아들은 유온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원래 거절의 말을 잘 못하는 유온이었으나 이건 선뜻 그렇게 하겠다고 할 수가 없었다.
“내일 청소하면서 찾아가시면, 안 될까요? 어, 어차피 서경 씨도 거의 안 오는 편인데.”
“죄송합니다. 오후에 꼭 필요한 물건이어서요.”
다시 고개를 땅에 닿을 듯 숙이는 두 사람을 보며 유온은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다. 안절부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유온이 겨우 입을 열었다.
“하, 하지만 서경 씨가……, 제가 방에 들어가는 걸 싫어할 거예요. 아, 그게, 아직 결혼 전이기도 하고요. 불편하지 않을까 해서. 없으면 안 되는 물건인가요……?”
지배인과 메이드는 거의 울상이 되었다. 그대로 고개를 숙이더니 이번엔 아예 들지 않았다. 유온도 울고 싶어졌다. 이 둘을 내쫓을 수도 없고, 윤서경의 방에 들어가는 것도 무서웠다.
그러나 이유온은 도저히 눈앞에서 자신보다 나이도 많은 두 사람이 고개 숙이고 있는 상황을 견뎌 낼 성격이 못 되었다. 유온은 어쩔 줄 모르며 두 사람을 일으키고는 마스터 베드룸 쪽으로 향했다.
문고리를 잡으려는 손이 계속 움찔거렸다. 윤서경은 유온이 자신의 공간에 들어오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이 스위트룸에 데리고 왔을 때만 해도 말했다. 마스터 베드룸엔 얼씬거리지 말라고.
하지만 윤서경은 당장 여기에 오지 않을 거고 유온에게 부탁을 하는 사람들은 바로 등 뒤에 있었다. 유온은 숨을 크게 들이쉰 뒤 마스터 베드룸 문을 열었다.
조금 전 청소를 마친 침실은 당연히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했다. 넓이가 어지간한 호텔 룸의 서너 배는 되었고, 곧바로 보이는 욕실도 거실에 딸린 것과 비슷한 넓이로 보였다. 파우더 룸 안쪽으로 마사지용 공간도 있는 듯했다.
저도 모르게 안을 두리번거리던 유온은 퍼뜩 정신을 차리곤 메이드가 떨어뜨렸다던 물건을 찾았다. 빌트인 냉장고 옆, 커피머신과 차의 티 캐디가 놓인 선반 위에 인조 가죽으로 감싼 작은 상자가 하나 있었다.
완벽하게 정돈된 방 안에서 그것만 이질적이고, 가까이 가서 보자 네임택이 붙어 있었다. 메이드가 두고 간 물건이 이것인 듯했다. 상자를 집어 든 유온은 무심코 시선을 빙글 돌렸다. 반투명한 커튼을 쳐 둔 실내에 흐릿하게 윤서경의 향이 떠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윤서경이 이곳에 들어왔던 게 벌써 며칠은 되었을 텐데, 아무래도 잠을 자는 공간이어서인지 아직 잔향이 남아 있는 듯했다.
이곳에 더 있고 싶다. 방을 구석구석 돌아다니고, 침대에 눕고 싶다. 그런 욕구가 확 피어올랐다. 코에 느껴질 정도로 남은 윤서경의 향이 좋아서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있어선 안 되는 곳이었다. 유온은 혼자 고개를 가로젓고는 미련이 더 생기기 전에 서둘러 방에서 빠져나와 문을 닫았다.
상자를 건네자 초조하게 서 있던 두 사람이 얼굴을 환하게 밝히곤 재차 부담스러운 감사를 표하고 돌아갔다. 조용해진 룸에 덩그러니 서 있던 유온은 문이 닫힌 마스터 베드룸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제 방으로 돌아왔다.
왜인지 힘이 빠져서 침대에 털썩 누웠다. 코끝을 울려 보았지만 당연히 윤서경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침실에 그 정도로 잔향이 돌고 있으니 다른 곳에도 코에 느껴지지 않을 만큼은 남았을 것이다. 유온은 제 향은 옅은데 타인의 향엔 민감한 편이었다. 특히 윤서경의 향에.
시간이 돌아온 것이라면 이 시점에선 이렇게까지 예민하지 않을 텐데, 윤서경을 느끼는 일에 있어선 죽기 직전 그대로인 듯했다. 예민한 감각에 가끔 훅 끼쳐 오는 타인의 체향은 멀미처럼 속을 뒤집히게 했으나 같이 살고 있기 때문인지 윤서경이 흘리는 향은 아주 가끔밖에 맡을 수 없어도 좋았다.
향……. 유온은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어젯밤 유온이 사용한 입욕제 꾸러미가 다시 놓여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리본을 풀어 보자 향이 어제와 비슷했다. 묘하게 윤서경의 향을 연상시키는 냄새. 원래 알파와 오메가의 향이란 세상에 존재하는 향의 조합이니 어떤 성분인가가 비슷한 건지도 모르겠다.
유온은 입욕제를 소중히 가지고 와서 베개 옆에 두고 누웠다. 옅은 향기가 공기를 부드럽게 채웠다. 그대로 유온은 눈을 느리게 깜빡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 * *
잠깐 눈을 붙인다고 생각했던 게, 깨어나니 사방이 캄캄했다. 잠이 확 깬 유온이 벌떡 일어났다. 점심은 고사하고 저녁 시간까지 훌쩍 넘긴 듯했다. 전화가 오고 있거나 곧 오겠다 싶어 비척비척 문을 열었다.
거실의 눈부신 불빛에 눈을 찌푸렸다가 뜬 유온은 그대로 굳었다. 마스터 베드룸의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
멍하니 그곳을 보고 있는데 문이 소리도 없이 크게 열렸다. 안에서 걸어 나온 건 역시 윤서경이었다. 기척을 느꼈는지 그가 고개를 들더니, 유온을 향해 물었다.
“이유온 씨, 내 방에 들어갔었습니까?”
유온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유온은 한 발 뒷걸음질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죄, 죄송해요……. 죄송해요, 서경 씨. 그게, 호텔 직원이, 방에 물건을 두고 나왔다고 해서…….”
두서없이 말이 쏟아져 나왔다. 윤서경의 얼굴을 볼 용기조차 없었다. 그의 손에서 바닥으로 떨어져 부서진 유리 화병이 자꾸만 떠올랐다. 제 몸이 그 유리 화병이 된 기분이었다. 딱딱한 바닥에서 부서져 지저분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깨진 유리가 된 것만 같다.
“직원이 방에 물건을 두고 나가요?”
목소리만 들어도 윤서경의 얼굴이 찌푸려진 걸 알 수 있었다. 유온은 그런 상태에서 윤서경이 내는 목소리를 수도 없이 들었으니까. 이제는 몸까지 바들바들 떨렸다. 멍청하고 답답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게 뻔해서 얼른 고개를 더 숙였다.
자신이 이러고 있으면 항상 큰형은 꼴 보기 싫다고 혼을 냈다. 윤서경도 대놓고 화낸 적은 없지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싫고 좋은 건 다 비슷할 테니까.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차라리 윤서경이 당장 차가운 소리를 해줬으면 했다. 아무런 말이 없으니 사형 선고라도 기다리는 심정이었다.
윤서경이 한 발 다가왔다. 체향이 훌쩍 가까워졌다. 평소보다 좀 더 향을 많이 풀어놓고 있는 듯했다. 짜증 때문에 감정이 짙어진 건지도 몰랐다.
“호텔 직원이 올라와서 당신한테 저 침실에 있는 물건을 가지고 나와 달라고 심부름을 시켰다는 겁니까.”
“그, 그게, 심부름……, 까진 아니고, 서, 서경 씨가 청소 시간, 말곤 방에 들어오는 걸……. 싫어, 싫어하신다고.”
겨우겨우 나오는 말은 극도의 긴장 때문에 지리멸렬하고 어눌했다. 말을 하면서 창피할 정도였다. 그들에게 차마 당신들이 들어가는 것보다, 내가 들어가는 걸 훨씬 불쾌해할 거라고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이 그런 식으로 말하면 그의 체면과 입장이 뭐가 되겠는가.
“이유온 씨.”
“네, 네.”
낮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유온은 간신히 대답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당신은 지금 이 호텔에서 가장 중요한 VVIP이자 내 약혼자 신분으로 투숙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나한테 전화를 걸어서 양해를 구하지, 감히 당신에게 저 방에 들어가서 물건을 가지고 나와 달라고 시키지 않습니다. 특히 내 호텔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고요. 직원 교육 그런 식으로 시킨 적 없습니다.”
유온은 더욱 위축되었다. 내 약혼자, 라는 말에 설렘을 느끼기도 전에 제가 한 말이 어설픈 거짓말로만 보였으리란 사실에 더럭 심장이 내려앉았다.
윤서경은 유온이 거짓말하는 걸 싫어했다. 유온은 그에게 거짓말한 적이 거의 없지만, 그의 안에서 이유온은 입만 열면 그를 속이는 약아 빠진 거짓말쟁이였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말 한 마디가 목에 걸린 듯 나오지 않았다.
윤서경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심경이 그대로 담긴 듯한 한숨이 유온의 어깨를 꽉 눌렀다. 마른 어깨가 축 처졌다. 유온은 손톱 근처를 불안하게 만지작거렸다. 거스러미를 뜯는 건 겨우 고친 습관인데 이럴 때마다 자꾸 예전 버릇이 나오려고 했다.
“그 직원을 잠시 봐야겠군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지배인이라는 사람이랑, 룸 메이드…….”
이 대답은 전혀 도움이 안 되리라는 걸 알지만 어떻게 생겼고 키가 어떻고 구구절절 말하는 건 힘들었다. 윤서경은 그에 별 대답 없이 유온을 슥 스쳐 지나갔다.
짙은 체향이 몸을 감싸듯 흐르다가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와 함께 조금 잦아들었다. 언제부턴가 호흡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유온이 간신히 긴 숨을 내쉬었다.
날카롭게 곤두섰던 신경이 윤서경의 체향에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겁먹게 하는 것도, 진정시키는 것도 그였다. 유온은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소파에도 앉지 않고 제자리에서 손만 꾸물거렸다.
‘왜 그랬을까.’
역시 방에 들어가지 말았어야 했을까. 잠깐 들어갔다가 나온 것이니 제가 체향을 남기고 나왔더라도 하룻밤이면 공기에 희석되어 사라질 줄 알았다. 설마 오늘 바로 올 거라고 생각도 못한 게 잘못이었다.
죄송하다고 좀 더 사과했어야 했는데.
유온은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서 어쩔 줄 모르고 눈시울만 붉혔다. 윤서경은 곧바로 유온을 쫓아낼지도 모른다. 지금은 약혼일 뿐, 결혼 서약으로 묶인 것도 아니니까.
여기서 나가게 되면 집 말고는 갈 곳이 없다……. 파혼이라는 말이 머릿속을 무겁게 채웠다.
‘화내시겠지.’
지금까지 유온은 정말 많은 잘못을 했고 부모님과 형들을 수없이 실망시켰지만, 이번엔 그 어떤 것보다 큰 죄였다. 원래 작은형의 혼처였던 곳을 이유도 없이 차지했으면서 심지어 파혼당한다. 부모님도, 형들도 얼마나 실망하고 화를 낼지 까마득했다.
‘……얼마나 맞을까…….’
유온이 가장 심하게 맞는 건 아버지와 형의 체면에 먹칠을 했을 때였다. 그럴 때면 거의 며칠을 집에 갇혀서 내내 맞았다. 이번엔, 그때와 비교도 할 수 없도록 가족의 체면을 구겼다.
이번에야말로 맞다가 죽는 게 아닐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체벌을 당하는 것보다, 앞으로 내내 윤서경을 볼 수 없고, 혼자서 그를 생각만 해야 하리라는 사실이 더 유온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멍하니 서 있었을까. 현관문이 열렸다. 유온은 어깨를 떨 정도로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뜬금없게도 맛있는 냄새가 났다. 정중한 목소리가 뭐라 인사하고, 트롤리 소리가 멀어지는 게 들렸다.
윤서경이 큰 쟁반을 한 손에 든 채 식탁으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점심도 저녁도 걸렀다고 들었습니다. 와서 식사해요.”
“…….”
룸서비스로 올라온 음식을 쟁반만 받아 들어온 모양이었다. 윤서경이 쟁반을 든 모습은 굉장히 안 어울렸지만, 그게 자신에게 어울리건 말건 윤서경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방금 전까지 유온을 몰아세우던 두려움이 그의 모습에 일순 잊혔다. 당황한 유온을 윤서경이 재차 불렀다. 주뼛주뼛 다가가자 식탁에는 국물이 뽀얀 닭곰탕과 반찬이 차려져 있었다.
“식사해요.”
“네…….”
머뭇머뭇 수저를 들면서도 유온은 흘끔 윤서경의 눈치를 봤다. 화가 난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같이 식사를 한다면 모를까, 가만히 서 있는 윤서경을 앞에 두고 먹으면 첫 한 숟가락에 바로 체할 게 분명하다.
다행히 윤서경은 유온이 국물을 한 스푼 떠서 먹는 걸 보곤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 직전에 혼자 벌벌 떨며 겁에 질려 있었던 터라 전혀 먹을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유온의 입맛에 딱 맞도록 간이 된 탕은 입에 넣는 대로 곧바로 넘어갔다.
무슨 일인지 윤서경은 별로 화가 난 것 같지 않았다. 기분 탓일까? 적어도 당장 파혼하자고 하거나 유온을 무섭게 추궁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한 그릇을 거의 다 비운 뒤 양치를 하고 나온 유온은 또다시 그 자리에 멈췄다.
윤서경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재킷만 벗은 셔츠에 베스트 차림으로. 방에 있을 때 분명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윤서경이 나간 줄 알았는데……. 그는 고급 슈트에 감싸인 긴 다리를 꼰 채 유온은 숫자와 문자의 상관관계조차 알 수 없을 어려운 서류를 넘기는 중이었다.
유온은 저도 모르게 물러서며 손바닥으로 방문을 짚었다. 윤서경이 고개를 들었지만, 곧바로 그걸 피해 시선을 피하는 바람에 그가 저를 보며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필요한 것 있습니까.”
“…….”
유온은 그 목소리에 순간 집중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크게 화난 기색도 없다. 그래도 무서운 건 마찬가지였다. 유온은 방금 먹은 걸 토할 것 같은 느낌으로 겨우 대답했다.
“책…….”
거실에서 책을 읽으러 나온 것이었다. 윤서경이 저기에 있으니 이제 어렵겠지만.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녜요, 밥 잘 먹었습니다.”
그 다음에 무슨 말을 하지. 쉬세요? 일 열심히 하세요? 고민하던 끝에 유온은 어느 쪽도 아닌 말을 중얼거렸다.
“저는 이만 들어가 볼게요.”
“이유온 씨.”
“……네?”
물고기처럼 팔딱 뛰어오르며 대답하자, 윤서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 읽어요. 여기서.”
“……방에서 읽어도 되는데요…….”
잠깐 가지고 가게만 해 주면 되는데. 파랗게 질린 채 대답했으나 윤서경은 두 번 말하지 않겠다는 듯 자신이 쓰는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문은 완전히 닫히지 않고 손톱만큼 열려 있었다.
왜 거실에서 읽으라는 걸까. 방에서 괜한 짓이라도 할까 봐 그러나……. 할 수 있는 것도 없는데. 그래도 유온은 순순히 그 말에 따르기로 했다.
며칠 동안 여기서 책을 꺼내면서 생각한 건데, 거실 책장은 꽤 충실했다. 실제 읽긴 해도 수집품에 가까운 고서가 대부분인 줄 알았더니 책장이 워낙 커서 바로 눈에 띄지 않았을 뿐 권수가 상당했다. 유온이 이곳에 온 이후로 몇 권이 더 채워진 탓도 있었다.
평소라면 책장 앞에서 뭘 읽을지 한참 골랐을 텐데 오늘은 개중 제일 얇은 책을 곧바로 꺼냈다. 윤서경이 여기서 책을 읽고 들어가라고 했으니 그 말대로 하긴 해야 했다. 하지만 책에 집중이 될 것 같지도 않고, 윤서경이 가까이 있는 게 좋으면서도 빨리 방에 들어가고 싶었다.
자신은 자신의 방에, 윤서경도 그가 쓰는 침실에 있다는 정도로 충분했다. 거실과 방은 너무 가깝다. 게다가 문이 조금 열려 있기까지 해서 이 조용한 곳에선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 조금 크게 나도 다 들릴 것 같다. 소파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어색하게 소파에 앉아 조용히 책을 펼쳤다. 아무렇게나 앉았던 자세가 불편했지만 소파에 스치는 소리가 날까 움직일 수도 없었다. 책은 서문부터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글씨가 아니라 그림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윤서경이 지켜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일단 책 한 권은 끝까지 보고 들어가야 할 듯한 기분에 억지로 눈에 담았다. 본문에 들어가서도 글자가 눈앞에서 도망치듯 안 읽히는 건 마찬가지였다.
한참을 씨름하던 유온은 윤서경의 방 쪽으로 끌리듯 시선을 돌렸다. 윤서경이 옷을 갈아입었는지 씻었는지, 편안하게 쉬는 상태가 된 듯 체향이 물씬 풍겼다. 좁은 문틈으로도 충분히 느껴질 정도였다.
그 체향에 유온의 눈이 속눈썹에 눈동자가 가려질 만큼 가늘어졌다.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내도록 느낀 불안감이 흐려질 정도로 나른한 기분이었다.
얼마 후 자연스럽게 책으로 주의를 돌린 유온은 이번엔 얇은 책 한 권을 순식간에 읽었다. 다 읽고 보니 곧바로 이어지는 시리즈가 있고, 서장 격인 책이라 얇은 것이었다. 다음 권은 두꺼웠으나 내용이 궁금해 홀린 듯 집어 와선 그것도 끝까지 다 본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세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유온은 조금 놀라서 손에 들린 책을 보았다. 추리 소설이라 몰입하긴 했지만, 이렇게 책 한 권을 다 읽을 때까지 고개도 한 번 안 들어 보긴 처음이었다. 책 읽는 걸 좋아하긴 해도 집중력이 부족해서 항상 중간중간 다른 짓을 하곤 하는데.
어깨가 뻐근해서 고개를 양쪽으로 갸웃거리며 스트레칭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거실엔 기분 좋은 향이 떠돌았다.
차를 끓일 수 있도록 작게 마련된 주방으로 향하려던 유온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윤서경의 침실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거실과 주방 사이를 잠시 서성인 유온이 용기를 내서 침실 앞으로 다가갔다.
“…….”
침실 앞에서 용기를 내는 건 거실에서 이곳으로 걸어오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그냥 제가 차를 마실 거니까, 윤서경에게도 한 번 물어보자는 생각이었다.
평소라면 그런 생각은 전혀 안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 물건, 내가 입에 대는 것에 당신 손이 안 닿으면 좋겠습니다.’
윤서경이 그렇게 경고한 적이 있으므로.
역시 괜한 생각을 했다. 윤서경이 자신이 문 앞에서 어슬렁대는 걸 눈치챌세라 얼른 돌아서려 했을 때, 안에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침실 안쪽은 책상과 침대 옆에만 스탠드를 켜 두어 어둑했다. 벽면을 가득 차지하고 크게 난 창에서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펼쳐진 야경이 보였다. 윤서경은 한 손으로 문손잡이를 잡은 채 유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까 옷을 갈아입거나 한 줄 알았는데 들어올 때 입고 있던 그대로에 베스트만 벗은 차림이었다. 멀리 책상이 있는 부근만 밝았기에 윤서경의 얼굴엔 그림자가 졌다.
역시 이 커다란 몸을 눈앞에 두면 주눅이 들었다. 용건을 물으러 나온 거겠지. 누구에게 부딪치고 욕먹을 게 무서워진 사람처럼 후다닥 내뺄 수도 없었다.
“저기……, 차, 차를 마시려고 하는데, 서경 씨도…….”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 유온은 그렇게 물었다. 기억과 똑같은 대답이 나올 수도 있다고 각오도 했다. 말꼬리는 흐려지고 기어 들어갈 듯한 목소리였지만 어쨌든 묻기는 물었다.
그 짧은 순간 동안 긴장이 터질 듯 부풀었다. 유온이 침묵에 달달 떨기 전에 윤서경이 입을 열었다.
“그래요.”
“아, 저, 정말요?”
“…….”
허락하는 대답이 순간 너무 기뻐서 똑바로 윤서경을 쳐다보자, 그의 눈매가 희미하게 까딱였다. 그게 무슨 의미일까 생각하며 유온은 얼른 몸을 돌렸다.
후다닥 간이 주방으로 달려가서 포트에 생수를 콸콸 붓고 전원을 켰다. 물이 치익 끓는 소리를 들으며 눈앞의 티 캐디 사이를 손으로 방황한 유온은, 한가운데에 있는 것의 뚜껑을 집었다. 자신이 이 중에서 제일 맛있다고 생각한 차이긴 한데 윤서경의 입에 맞을까?
이 방엔 항상 윤서경이 오는 것 같으니까 그의 취향이 아닌 건 놓여 있지 않겠지.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며 유온은 다 끓어 꺼진 포트를 집었다. 길쭉한 주둥이에서 뜨거운 물이 쏟아져 찻잎을 적셨다.
뚜껑을 닫으려 집다가 손이 미끄러져 몇 번이나 놓쳤다. 검은 칠 위에 금색으로 그려 넣은 문양은 양감이 느껴지는 게 꼭 진짜 금을 발라 놓은 것 같았다. 생긴 게 고급스러운 만큼 비싼 물건일 텐데, 조심해서 다뤄야 했다.
티 캐디와 모양을 맞춘 작은 하늘색 시계의 바늘이 째깍째깍 움직였다. 바늘을 유심히 바라보던 유온은 시간에 맞추어 찻주전자에서 찻잎을 꺼내고, 쟁반에 주전자와 잔을 얹었다. 윤서경은 차에 아무것도 넣지 않는다. 유온도 마찬가지였다.
유온은 쟁반에 놓인 찻주전자와 잔 받침, 찻잔을 이리저리 살폈다. 옆에서도 보고 위에서도 보았다. 놓인 모양이 비뚤어지거나 이상하지 않은지 여러 번 검토한 후에야 쟁반을 들고 윤서경의 방으로 향했다.
“…….”
침실 앞에 오니 문을 열 손이 없었다. 눈을 굴리던 유온은 또 윤서경이 자신을 눈치채고 나오기 전에 어깨로 슬쩍 문을 밀어 열며 안으로 들어갔다.
책상 앞에서 서류를 보고 있던 윤서경이 시선을 들었다. 어둠 속에서 스탠드 불빛만으로 밝혀진 곳에 앉아 일을 하는 모습이 세련되고 멋있었다.
유온은 두근거림을 누르며 책상으로 다가갔다. 빈자리에 쟁반을 내려놓자, 윤서경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찻주전자와 빈 잔 하나를 보다가 유온에게 눈길을 돌렸다.
올려다보는 시선을 받은 유온은 눈을 피하듯 깜빡거리며 뒤로 한 발 물러섰다. 혹시 싫어하는 차였을까. 아니면 밤이라서 홍차는 싫었나? 눈치가 없었다……. 분명히 허브차도 있었는데.
하지만 윤서경은 타박하는 대신 차분하게 물었다.
“차 좋아합니까.”
“네……? 아.”
생각 못 한 질문에 눈을 둥글게 떴던 유온이 얼른 끄덕였다.
“뭘 같이 먹는 게 제일 좋습니까.”
“우, 우유.”
엉겁결에 대답한 후 유온의 얼굴이 발개졌다. 우유요, 라고 끝까지 말을 하지도 못하고 입을 중간에 다물어 버렸다. 사실, 사실 그렇긴 한데 굳이 자신 때문에 작게라도 냉장고 한 공간을 차지할 필요는 없었다.
차를 그냥 마시지 않으면 준비해 주는 쪽이 무엇 하나라도 더 손을 써야 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딸려 나오지 않으면 요구하지 않았다. 원래 차는 그렇게 마시는 거라고 생각하면 아쉬울 것도 없었다.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는데 왜 윤서경의 물음 한 마디에 입이 멋대로 움직였는지 모르겠다.
“알겠습니다. 내일부터 준비해 두도록 하죠.”
“네? 아니, 괜찮…….”
“이제 가서 자요.”
“……네.”
유온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돌아섰다. 막 방을 나오려 하는데 아주 작게 한숨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흠칫 놀라 돌아보았지만 윤서경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잘못 들었나?’
정말 한숨을 쉰 거면 어쩌지 조마조마하면서도 워낙 윤서경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라 마음이 좀 놓였다.
문을 닫으며 다시 방 안을 본 유온은 고개를 갸웃했다. 알아채지 못했는데 방 안쪽, 창가 티 테이블에 스탠드가 켜져 있었다. 아무래도 윤서경은 잠깐 쉬고 저기에 가서 차를 마시려 한 듯했다. 방해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유온은 얼른 물러났다.
하지만 문을 닫기 전에 살짝, 원래 열려 있던 틈보다 조금 크게 열어 두었다. 이유온에겐 꽤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가선 자신의 방도 문을 한 뼘 정도 열어 두었다. 윤서경이 자신의 방 문을 완전히 닫지 않는다면 이대로 향이 흘러들어올 것 같았다.
침대에 앉자 자신은 차를 마시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 * *
다음 날, 간이 주방에서 냉장고를 연 유온은 희미한 시름에 잠겼다. 룸 메이드가 청소를 마치고 간 후, 냉장고에는 못 보던 것이 생겼다.
우선은 도자기 트레이 위에 놓인 밀크 저그 세 개. 그 옆에는 레몬과 오렌지 슬라이스가 각각 뚜껑 달린 유리그릇에 담겨 있었다. 차 종류는 여섯 가지로 늘어났고 여러 가지 모양의 반투명한 설탕에 꿀과 시럽까지 있다.
“…….”
같은 모양의 티 캐디 세 개만 놓여 말끔하던 공간이 카페라도 된 것처럼 번잡했다. 유온은 두 손으로 머리를 끌어안았다. 우유가 좋다는 그 한 마디가 불러온 결과에 마음이 무거웠다.
“하아…….”
자신 때문에 일부러 준비해 둔 건데 모르는 척할 수도 없다. 유온은 몸을 일으켜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케이스마다 호텔 직원이 어떻게 마시면 좋은 차인지 설명을 덧붙여 두었다. 레몬 슬라이스, 오렌지 슬라이스, 밀크 티 중에 무엇과 어울리는지. 유온의 손은 자연스레 밀크 티로 향했다.
뚜껑을 열자 캐러멜 향 비슷한 것이 퍼졌다. 종이에 쓰인 대로 차를 우리고 우유를 따르자 부연 액체가 구름처럼 퍼지며 찻물 색을 부드럽게 물들였다.
찻주전자와 세트로 놓인 고급스런 찻잔 대신, 조금 덜 부담스러운 머그컵에 밀크 티를 타서 거실로 온 유온은 소파에 두 발을 모아 얹으며 앉았다. 슬리퍼에서 빠져나온 발끝이 차가웠다.
일부러 이런 걸 준비해 주다니……. 사실 놀랄 일은 아니다. 원래 윤서경은 정중한 사람이었다. 유온과 결혼이 결정된 후로, 유온의 실체를 알면서 점점 질려 갔을 뿐이다.
윤서경의 두 번째 청혼. 물론 두 번 다 유온에게 직접 한 청혼은 아니지만, 다시 겪는 그 이후의 생활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모든 게 다 달랐다.
이렇게 변해 버린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역시 그가 그날 제 뺨의 상처를 알아차려서? 어쨌든 혼담이 들어가고 부모님이 받아들일 게 확실한 이상 이유온은 그의 약혼자였다. 그의 말대로, 결혼할 사람이 뺨을 맞은 흔적 따위로 괜한 구설에 오르는 게 불편했을 터다.
그걸 가족과 분리시키는 것으로 해결해 주고, 이곳에 들였다는 이유로 불편한 게 없도록 최대한 성의를 다해 준다. 성실하고 친절했다. 유온은 머그컵을 두 손으로 감싸서 쥐었다. 손바닥은 따뜻하고 입 안에 달콤한 맛이 감돌았다.
기분이 좋고 편안한데도 한숨이 나왔다.
이런 건 너무 과분하다.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좋은 것엔 금방 익숙해지고 만다. 유온도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좋은 것에 익숙해지면 그게 지나간 후엔 몇 배로 초라하고 비참해진다.
마음에 든다고 해서 안 어울리는 옷을 입어선 안 되는 법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머그컵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반쯤 남은 베이지색 밀크 티가 찰랑거렸다. 그래도…….
‘이것까진 마시고…….’
달고 맛있으니까. 이것까지 중간에 포기하기는 아쉽다.
그러나 진짜 난관은 그날 저녁에 찾아왔다. 윤서경에게서 문자가 왔다. 6시쯤 할 일이 있느냐고. 없다고 대답하자, 정확히 6시에 그가 문을 열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유온은 방으로 소리도 없이 들어오는 행거 몇 대를 망연히 쳐다보았다. 유온이 자주 입는 몇몇 브랜드의 옷이었다. 익숙하긴 한데 가짓수가 문제였다. 거실을 꽉 채운 행거는 각각 매장 하나를 압축시켜서 가지고 온 것처럼 보였다.
“저기, 서경 씨…….”
“네.”
“……예복인가요?”
“누가 스웨터를 예복으로 입습니까.”
혹여나 가능성이 있는 걸 물었으나 그런 대답이 돌아왔다. 행거에 있는 건 대부분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이었다. 스웨터에 티셔츠에 트랙팬츠까지 있었다. 누가 봐도 결혼식에 입을 예복은 아니다.
“며칠 동안 같은 옷만 입지 않았습니까.”
“다, 다른 옷 입었는데.”
이건 조금 억울했다. 유온은, 옷이 몇 벌 없다보니 같은 옷을 입긴 했지만 적어도 윤서경이 볼 때는 매번 다른 옷이었다.
“골라요.”
윤서경이 흘끗 유온의 윗옷을 보았다.
“최대한 많이.”
그의 말에 유온은 재빨리 제 옷을 내려다보았다. 앞단을 당겨서 살피고 소매를 이리저리 보아도 보풀 하나 없이 깨끗했다. 혹시 뭘 먹나 흘린 건 아닌지 구석구석 살폈으나 문제는 없다. 그러면…… 혹시 입고 있던 옷이 못 봐 줄 정도로 안 어울리나. 역시 그 이유밖에 없다. 어깨가 축 처졌다.
퍼스널 쇼퍼가 세 명이나 따라 올라왔지만 그들이 뭘 가져다 대도 유온은 미적지근하게 끄덕거리기만 했다.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은 옷이 불쌍해질 정도로 뭘 입어도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모기 같은 목소리로 좋아요, 뭐든 좋아요만 반복하는 유온을 대신해 옷을 고른 건 윤서경이었다. 순식간에 옷이 잔뜩 쌓였다. 윤서경은 나중엔 퍼스널 쇼퍼의 추천도 없이 먼저 고른 것과 비슷한 라인, 비슷한 톤, 한 벌로 나온 다른 아이템, 이런 식으로 주문했다.
행거가 기차처럼 줄지어 나가고 구입한 옷은 세탁을 위해 호텔 직원들이 올라와 가지고 갔다. 소란이 지나간 거실에서 유온은 멍하니 있었다. 우르르 들어왔던 사람들이 행거와 함께 유온의 영혼도 흡수해서 나가 버린 것 같았다.
오늘도 머리카락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완벽하게 차려입은 모습의 윤서경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이어서 휴대폰을 보았다. 그대로 나갈 줄 알았는데, 그는 냉장고 쪽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여는 그의 모습에 유온은 움찔했다. 우유와 레몬을 보는 건가 싶었다. 그렇게 정성껏 준비한 재료 중에서 유온이 쓴 건 우유 하나뿐이었다. 유온은 얼른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오, 오늘은 차를 별로 안 마셔서. 내일은 많이 먹을게요.”
“…….”
윤서경의 미간이 약간 찌푸려지는 모습에 더더욱 당황했던 유온은 그가 든 물병을 뒤늦게 발견했다.
“사용 안 한 건 룸 메이킹할 때 알아서 가지고 갈 겁니다. 새로 채워 줄 거고. 다 사용해도 되고, 아예 손 안 대도 상관없어요.”
“네…….”
방금 바보 같았겠지……. 유온은 한층 침울해졌다. 고개를 숙였더니 입고 있던 니트가 눈에 들어왔다.
“아. 이, 이건 되도록 안 입고 있을게요.”
윤서경의 눈썹이 꿈틀했다.
“……왜요?”
“어…….”
“아닙니다. 대답하지 말아요. 피곤할 텐데, 난 이만 나가 봐야 하니 들어가서 쉬세요.”
윤서경은 그대로 꺼낸 물도 마시지 않고 나갔다. 혼자 남은 유온은 눈을 축 늘어뜨리며 옅은 하늘색 스웨터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그가 어이없게 생각하는 것 같았는데 짚이는 게 너무 많아서 무엇에 대한 건지 오히려 알 수 없다. 유온은 힘없이 윤서경이 꺼낸 물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가지런히 놓인 우유와 레몬이 더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 * *
“모르겠는데.”
“……네?”
“당분간 나한테 네? 하지 마.”
불쾌감이 담긴 윤서경의 목소리에 그의 비서, 이한영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는 지금 막 오늘 오후 일정을 보고했다. 상사에게 ‘모르겠다’는 말을 들을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어진 말은 더 아리송했다.
“이한영 씨.”
이한영은 긴장했다. 윤서경이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는 건 별로 좋지 않은 조짐이었다.
“네, 대표님.”
“잘해 줄수록 싫어하는 건 무슨 경우지?”
“네……에? 아, 아니. 실언입니다. 으흠. 글쎄요. 상대에게 무척 심하게 반감을 가지고 있다면 그러지 않겠습니까.”
“…….”
윤서경이 말없이 이한영을 노려보았다. 대체 왜 저럴까. 이한영은 억울함을 감추느라 헛기침만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 * *
‘이유온 씨는 취미가 뭡니까.’
‘피아노 치는 거요.’
유온은 대답을 입력해 둔 로봇처럼 대답했다. 맞은편에서 식기를 들고 있던 윤서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두 사람 사이엔 침묵만 남았다.
현지에서 유명한 레스토랑의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 자리. 주위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말소리는 온통 즐겁고 유쾌해 보였다. 무거운 쟁반을 한 손에 하나씩 들고 돌아다니는 직원도 전혀 힘든 기색이 없다.
그 밝은 분위기 속에서 유온과 윤서경 주위만 성당처럼 엄숙했다. 유온은 윤서경에게서 말이 더 나오지 않을까 기다리다가 다시 포크를 움직였다.
시푸드가 수북이 쌓여 있었지만 유온 쪽에 있는 건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바다거북 등껍질처럼 쌓인 시푸드의 산에서 기껏해야 가장자리의 새우 몇 개, 흰 살 생선 한두 조각 먹은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갑자기 취미를 묻는 윤서경의 말에 손이 멈췄다.
피아노라고 대답한 건 반은 사실이고 반은 거짓이었다. 유온은 피아노를 배웠다. 그러나 개인 레슨을 해 주던 선생님에게나, 가족에게나 좋은 반응은 얻지 못했다.
그래도 한두 번쯤 잘했다는 말을 듣기는 했다. 유연 형의 절반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아무리 오래해도 형을 따라가진 못하겠다는 말이 덧붙긴 했어도.
다른 사람의 실소밖에 사지 못하는 피아노였으나 유온이 다룰 수 있는 악기였다. 결혼이 결정된 후부터 가족들은 윤서경에게 피아노가 취미라 말하라고 거듭 일렀다. 어차피 유온은 취미라고 할 게 없었기에 고개만 끄덕거렸다.
유온이 쓸 피아노도 부모님이 미리 준비해 주셨다. 취미가 피아노이니 집에 피아노를 놓아도 될지 물은 후에 들이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신혼여행을 온 이날 이때까지 한 번도 윤서경에게 제 취미가 무엇인지 말할 기회가 없었다.
신혼집으로 배송만 기다리는 피아노를 창고에 두고 부모님은 며칠에 한 번씩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이유건은 유온을 앞에 두고 원하는 게 있으면 상대가 억지로라도 말을 하게 하라고 다그쳤고, 이유연은 ‘여태껏 취미 한 번 안 물어보셨니?’ 하며 내심 즐거운 기색이었다.
그러다 보니 윤서경의 질문에 이렇게 반갑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피아노요?’
‘네, 레슨도 받았고, 치는 것도 조, 좋아해요.’
‘그렇군요. 몰랐습니다.’
윤서경은 조금 뜻밖이라는 기색이었다. 느릿느릿 삼킨 새우가 도로 올라올 것 같아서 유온은 커다란 유리잔에 담긴 라임 워터를 끌어당겼다.
안 그래도 시푸드의 소스가 입에 맞지 않아서 끙끙거리고 있었는데, 취미 화제에 더욱 입맛이 사라졌다. 치는 걸 싫어하지 않지만 취미까진 아니었다. 취미도 없는 주제에 윤서경에게 거짓말을 했단 생각에 불편했다.
차가운 물만 홀짝거리고 있자니 윤서경이 지나가던 서버를 불러 세웠다. 그가 유창한 현지 말로 뭔가 주문하자 서버는 친절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사라졌다가, 재스민 라이스로 만든 볶음밥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볶음밥은 무난한 맛이었다. 한국에서 먹어 본 적 없는 맛의 시푸드 양념보다는 훨씬 입에 맞았다. 윤서경도 잘 먹는 것 같았지만 은근히 물렸던 모양이라고 유온은 혼자 동질감을 느꼈다.
밥을 우물거리며 유온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가족 여행을 여러 번 갔기에 여행이 영 낯설진 않았지만, 이런 로컬 레스토랑에 와 보긴 처음이다. 영어도 반은 통하고 반은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호텔로 들어가기 전, 시가지에서 먼저 식사를 하고 가자는 말에 들른 곳이었다. 공항에서 이곳까지는 굉장히 낡고 오래된 건물만 줄줄이 있는 옛날 길을 지나기도 했다. 익히 들은 이 휴양지의 분위기와는 다소 달랐지만 구경할 것이 많아서 오는 내내 차창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식당에는 관광객보다 현지인이 더 많았다. 그렇다고 관광객을 흘끔흘끔 쳐다보며 재미있어할 정도로 드물지도 않았다. 애초에 관광 산업으로 유명한 도시이니 로컬 레스토랑이라 해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유온도 나름대로 관광지며 식당 같은 걸 검색은 해 보았지만 결국 말은 못 꺼냈다. 공연히 제가 어딘가 가자고 말했다가 그곳이 따분하거나 맛이 없으면 어쩌나 싶어서였다. 게다가 여태 여행을 갔어도 거대한 리조트 안에서 며칠 동안 모든 걸 해결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더더욱 어디에 가 보자고 말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시푸드 대신 볶음밥으로 배가 찼다. 유온은 눈앞에 쌓인 음식을 까마득한 기분으로 쳐다보았다. 바닷가재의 큼직한 몸통이 위압적이기까지 했다. 그래도 시킨 음식이니까 다 먹어야겠지……. 내키지 않게 포크를 들었다. 가방에 소화제와 위장약도 들어 있으니까 식사 후에 먹으면 된다.
유온은 포크와 스푼으로 홍합 하나를 들고 와 살을 발랐다. 그리고 물을 마셨다. 다음엔 새우, 물 한 모금, 그 다음엔 생선살, 음료수, 또 홍합, 음료수, 꾸물꾸물 먹다가 쉬면서 물. 입술에 묻은 양념을 작은 한숨과 함께 혀로 핥는데 윤서경이 시계를 보았다.
‘식사 끝났으면 갈까요.’
‘네!’
아주 드물게 유온이 눈까지 빛내며 대답했다. 대답하는 속도도 전에 없이 빨랐다. 윤서경은 바로 일어났다. 어느 틈에 한 건지 계산도 마친 뒤였다.
‘시간이 좀 있습니다. 잠깐 걷겠습니까?’
윤서경의 말에 유온은 옆을 돌아보았다. 테라스에서 바로 해변으로 내려갈 수 있는 구조였다. 유온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계단을 내려오자 바다가 더 잘 보였다. 산호섬의 얕고 투명한 바닷물이 흰 모래 위로 수없이 밀려왔다가 물러났다. 젖은 모래 위로 파도의 잔거품이 남았다.
‘와…….’
하늘을 본 유온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화사한 분홍빛 노을이 하늘을 온통 덮고 있었다. 모래 위는 평지보다 걷기 힘들었다. 하지만 힘든 줄도 모르고 한참 걸었다. 오래도록 하늘을 물들이는 노을도, 이국적인 야자수의 그늘과 가로등처럼 걸린 조명도 예뻤다.
걷다가 문득 느꼈다. 윤서경이 처음 테라스에서 내려올 때보다 조금 가까웠다. 걸으면서 저도 모르게 다가간 듯했다. 그래도 별 말이 없는 윤서경 덕분에 유온은 되도 않는 욕심을 냈다. 손을 들면 닿을 정도의 거리로 그에게 더 가까이 갔다.
그래도 신혼여행 온 건데, 싫어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손 정도는 잡아도 되지 않을까……. 머뭇거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윤서경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찬물을 끼얹은 듯한 변화였다. 유온은 놀라서 윤서경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식사할 때와 달리 무서울 만큼 차갑게 굳은 얼굴로 유온을 보더니, 돌아서서 해변을 빠져나갔다.
‘서, 서경 씨.’
서둘러 그를 따라가자 해변 바깥쪽 길로 따라오고 있었는지, 곧바로 차가 와서 멈춰 섰다.
‘먼저 타고 가세요.’
왜 그러느냐고 묻기도 전에 윤서경은 차 문을 연 채 싸늘한 눈으로 유온을 보았다. 결국 먼저 가라는 말에 뭐라 한 마디 하지도 못하고 유온은 얌전히 차에 올라탔다. 윤서경이 밖에서 문을 닫았다.
그가 아직 노려보고 있을까 무서워서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유온은 차 바닥에 흩어진 해변의 모래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되새겼다. 식당에서 보기 싫게 깨작거려서? 아니면 해변을 걸을 때 너무 바보처럼 정신이 팔려 있었나?
문제가 너무 많아서 어느 게 문제였는지 모르겠다. 유온은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푹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신혼여행 기간 내내 유온과 윤서경은 다른 방을 사용했다. 창밖으로 온통 보이는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바늘방석에 앉은 듯한 며칠이었다.
신혼여행을 끝내고 새집에 들어가자 넓은 거실 한쪽에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유온의 부모님이 진작 주문해 두었지만 유온이 취미를 말하지 못한 탓으로 창고에서 먼지만 뒤집어쓰던 피아노였다.
윤서경이 그 피아노를 치우게 한 건 그로부터 반년이 지났을 때였다.
신혼여행 때 일을 떠올린 건 오늘 낮에 갑자기 찾아온 손님 때문이었다. 프런트에서 전화가 와 손님이 오셨다고 말했을 때는 또 가슴이 철렁했다. 유온에게 손님이라고 찾아올 사람은 가족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마음을 놓았다. 손님은 양손에 호텔 로고가 박힌 쇼핑백을 든 윤서경의 비서였다.
“안녕하세요! 이한영이라고 합니다. 일어나 계시다고 해서 왔는데, 혹시 제가 너무 일찍 왔나요? 오늘은 마침 오후에 개인적인 용무가 있어서요, 다음엔 이렇게 이른 시간에 찾아뵙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아……, 그…….”
안녕하세요, 그러시군요. 그 비슷한 말을 하려고 했지만 늘 그렇듯 제대로 되진 않았다. 일방적으로 구면인지라 섣불리 입을 열었다가 말실수할 것 같았다. 유온은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가장 쉬운 대답을 했다.
“네……, 괜찮아요.”
벌써 시간이 오전 10시였다. 아무리 요 며칠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있다지만, 이 시간이 너무 일러서 싫다고 하자니 게으르게 보일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이 사람은 왜 왔을까?
그런데 다음이라니, 설마 다음에 또 오나?
유온이 주뼛거리고 있자, 이한영은 들고 온 쇼핑백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며칠째 외출을 못 해서 무료하실 것 같아서요, 취미 삼아 할 만한 것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마음에 드는 게 있으시면 더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
“그럼 가 보겠습니다.”
이한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가 남긴 흐릿한 찬 바람이 가라앉을 때까지 멍하니 있던 유온은 테이블 위로 시선을 돌렸다. 쇼핑백엔 뭐가 잔뜩 들어 있었다.
컬러링북.
비즈.
입체 퍼즐.
소이 캔들 만들기 세트.
마크라메.
니들 펠트.
명화 따라 그리기.
뜨개질…….
“…….”
유온은 황망한 얼굴로 쇼핑백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디 감금된 사람에게 심심하지 말라고 가져다주는 물품 같았다. 밖으로 나가 보려 한 적은 없지만, 이 물건을 보니 당분간 외출을 원해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하지만 유온도 밖에 나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소파에 앉아서 한참 쇼핑백을 뒤적거린 유온은 입체 퍼즐을 꺼냈다. 그것과 캔들 만들기가 그나마 쉬워 보였는데, 캔들은 왁스를 녹이는 게 번거로울 것 같았다.
부품이 많아서 소파에 앉은 채 하는 건 어려워 보인다. 아래로 내려가 테이블 앞에 바짝 달라붙어 앉아서 세트의 래핑을 뜯었다.
‘갑자기 이런 걸 왜…….’
심심하지 않았고, 심심하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부품의 포장을 하나하나 뜯은 유온은 가만히 설명서를 들여다보았다.
설명서에 따라서 부품을 뜯어 하나로 합칠 뿐인 과정은 생각보다 금세 유온의 정신을 빨아들였다. 독일 고성의 첨탑을 조심조심 세우던 유온은 코를 스친 향에 정신이 들었다.
고개를 들자, 윤서경이 팔짱을 낀 채 유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놀라서 허둥거리던 유온은 거의 다 만들어 가던 고성의 첨탑을 꽉 쥐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대로 모양이 잘 잡혔던 예리한 모양의 첨탑이 톡 부러졌다. 멍청한 소리를 냈다가 고개를 들었다.
주위가 어두웠다. 꽤 오래 이걸 붙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마지막 장식만 올리면 끝이었는데 첨탑 지붕 하나가 부서지고 말았다.
하지만 완성품이 망가졌다는 생각보단 윤서경이 언제부터 서 있었을까, 여기에 혼이 팔려서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유온은 손으로 얼굴을 만지려다 멈췄다. 색이 칠해진 부품을 한참 만지작거린 손이 잔뜩 건조하고 지저분해진 채였다.
“손 씻어요.”
“앗, 네.”
유온은 손에 쥐고 있던 부품 조각을 조심조심 내려놓고 욕실로 달려갔다. 손을 깨끗이 닦고 거울을 보자 머리는 헝클어지고 뺨이 붉은 얼굴이 있었다.
“…….”
물을 가장 차가운 쪽으로 조절한 뒤 한참 손을 적시고, 물기를 닦아 낸 손등으로 양 뺨을 눌렀다. 차가운 물을 오래 맞은 손이 욱신거렸다. 거실로 다시 나가자 윤서경은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씻고 나왔어요…….”
“마저 만들 겁니까?”
시선을 든 윤서경의 말에 유온은 흠칫 놀라서 뒷걸음질했다.
“아, 아니요. 치울게요. 죄송해요.”
“…….”
후다닥 다가가서 어질러진 테이블을 치우려 하는데, 윤서경이 다시 유온을 불렀다. 자신이 없을 때 치우라는 걸까. 주춤대고 있자 윤서경은 짧게 한숨을 쉬곤 말했다.
“저녁에 할 일 있습니까.”
“아니요, 없는데요…….”
“그럼 옷 입어요. 나갑시다. 호텔 안이지만.”
호텔 안……? 시간을 보면 저녁을 먹으러 가는 건지도 몰랐다. 유온은 묻는 대신 고개만 끄덕이고 방으로 들어와서 다급하게 옷을 골랐다. 조바심이 나니 옷 모양도 잘 안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어찌어찌 5분 안에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제 차림이 이상할까 걱정했으나 윤서경은 아무런 말도 안 하고 돌아섰다. 또 발이 묶이기라도 한 듯 서성거린 유온이었지만, 먼저 나간 윤서경이 현관문을 잡고 있는 걸 보고 얼른 따라갔다.
유온이 빠져나오자 윤서경은 곧바로 엘리베이터 홀로 향했다. 전용 엘리베이터는 기다릴 필요도 없이 곧바로 문이 열렸다. 윤서경은 전망대가 있는 층의 버튼을 눌렀다. 한쪽이 유리벽으로 트인 전망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긴 했어도, 전망대는 스위트룸에서 한 층 아래였다. 층고가 높아서 3, 4층을 내려가는 것이긴 했으나 좁은 공간에서 윤서경과 단둘이 있는 어색함을 느낄 새도 없이 금방이었다.
그나저나 웬 전망대일까. 한창 붐빌 시간일 텐데. 사람이 많은 곳은 쥐약이었다. 자신의 모습이 그 많은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너무 신경이 쓰여서였다.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엘리베이터 홀에서 바로 연결되는 전망대 입구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호텔 유니폼을 입은 직원 여럿이 나와 윤서경과 유온을 정중하게 맞을 뿐이었다.
어릴 적부터 유온도 어디에 갈 때 줄을 서거나 기다려 본 적이 없다. 항상 직원이 나와 인사하며 우선해서 안내해 주는 게 익숙했다. 숨 쉬듯 당연한데도 유온은 그게 마냥 편하지 않았다. 제게 어울리지 않는 것들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전망대 안쪽으로 들어가자 역시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있는 사람도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다. 둥글게 난 전망대의 벽 가까운 곳에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주위에 조명도 장식해 둔 게 꼭 레스토랑 같았다. 전망대 한가운데에 이런 게 있을 리 없으니 일부러 세팅을 해 둔 듯했다.
윤서경을 따라서 테이블로 다가가자 직원이 와 의자를 빼 주었다. 식기와 그릇, 물잔 같은 것도 평범한 디너 테이블이었다. 아주 호화로운 테이블 하나짜리 레스토랑 같았다.
여기가 서울 시내에서 두 번째로 높은 전망대라는 걸 생각하면 호화로운 수준을 넘어섰다. 야경을 감상하기 위해서인지 전망대는 식사가 어렵지 않을 정도로만 밝았다. 고개를 끝에서 끝까지 돌려도 전부 지상이 보여서 하늘에 발판을 두고 떠올라 있는 기분이었다.
“저, 서경 씨, 왜 전망대에 사람이…….”
“휴무일입니다.”
“…….”
아닐 텐데……. 유온이 알기로 이 호텔 전망대의 휴무는 매주 화요일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화요일이 아니다. 더 물어볼까 했지만 자신이 꼭 알아야 하는 일이 아니었다. 유온은 말없이 물컵을 들었다. 반달 모양으로 자른 라임이 들어 있었다.
곧 직원이 식사를 가지고 왔다. 거창한 코스 요리일 줄 알았는데, 다행히도 접시에 음식을 조금씩 담은 단출한 저녁 식사였다. 유온은 이쪽이 훨씬 좋았다.
조용한 식사였다. 적당한 음량으로 틀어 둔 음악과 직원들이 움직이는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 안에서 윤서경이 말을 걸면 거는 대로, 조용하면 조용한 대로 불편했다. 빨리 식사를 끝내자는 생각에 유온은 평소보다 서둘러 음식을 입에 넣었다.
유온이 식사를 끝낸 것과 비슷한 타이밍에 윤서경도 식기를 내려놓았다. 바로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음식을 담았던 접시를 모두 가지고 가고, 디저트와 차를 내왔다.
배가 부르다고 생각했는데 작은 타르트 위의 딸기가 빨갛게 반짝거려서 맛있어 보였다. 유온이 막 포크를 그 위로 가져가려 했을 때였다.
“이유온 씨.”
“……네?”
하마터면 포크를 떨어뜨릴 뻔했다. 허둥거린 유온은 얼른 포크를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다행히 다른 문제는 없지만, 백혈구 수치가 낮은 편이라 추적 검사를 하자고 하더군요. 결과지는 거실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으니 보도록 하세요.”
“네…….”
유온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손은 이미 테이블 아래로 내리고 있었다. 말을 마친 건지 윤서경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시선은 유온의 접시에 향한 채였다.
“……먹어요.”
“앗, 네, 지금 먹을게요…….”
허둥거리며 다시 포크를 들고 먹으려 하다가 포크를 또 떨어뜨릴 뻔했다. 겨우 고쳐 쥐니 이번엔 윤서경이 제지했다.
“아니. 됐습니다.”
기분 탓인지 말에 한숨이 섞인 것 같았다. 우물쭈물하고 있자 그는 직원을 손짓해 불러서 뭔가 지시했다. 얼마 후 테이블에는 작은 상자 하나가 놓였다. 타르트를 포장해 온 듯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윤서경이 상자를 손에 들었다. 유온도 얼른 일어나서, 벌써 저만큼 걸어간 윤서경을 따라갔다.
엘리베이터에 오를 때까지 윤서경에게 붙어 쫓아가는 것만으로 바빴다. 문이 닫힌 후에야 유온은 그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저어, 제, 제가 들게요.”
그러자 윤서경은 평소와 똑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유온을 빤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안 무겁습니다.”
“아.”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무겁고 안 무겁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고 객실 문 앞으로 가는 짧은 시간 동안 계속 윤서경의 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유온은 체하기 직전이었다.
문을 연 윤서경은 식탁에 케이크 상자를 내려놓고, 테이블 쪽을 짧게 눈짓한 뒤 다시 나갔다. 문이 닫히고 실내에는 윤서경의 체향과, 상자에 담겨 있는데도 가려지지 않는 딸기 냄새만 남았다.
유온은 배 위에 손을 짚었다. 먹은 음식이 그대로 돌이 되어 버린 것처럼 배가 무거웠다. 딱딱해진 명치 근처를 손바닥으로 쓸며 탈의실로 들어갔다. 체했을 때 먹는 약 두 가지를 골라내 나와서 물과 함께 삼킨 뒤, 겉옷도 벗지 않고 소파에 누웠다.
체기 때문에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윤서경이 곧바로 나가서 다행이었다. 기껏 좋은 곳에서 먹여 준 걸 이런 결과로 보여 줄 뻔했으니까.
혼자가 된 뒤 이렇게 누워서 생각하자 아까운 기분이 들었다. 기껏 둘이 같이 간 전망대였다. 게다가 직원들이 있긴 했지만 단둘인 것에 가까웠다. 그런데 너무 긴장해서 화려한 야경에도 맛있는 음식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좀 더 제대로 보아 둘걸……. 야경도, 윤서경의 얼굴도.
휴무인 전망대에 테이블을 가져다 두고 식사한 건 윤서경의 다정한 배려일 것이다. 나름대로 약혼자라고,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한다고, 혼자 있는 게 심심해 보인다고, 그래서.
멀쩡한 사람이었다면 특별하게 독점한 야경에 감탄하고 그 자리를 만들어 준 윤서경에게 상냥한 말씨로 고맙다고 말했겠지.
‘나도 그럴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사실 윤서경에게 어울리는 건 그의 호의에 그만큼 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예를 들면 작은형, 이유연 같은 사람. 아무래도 자신은 영 어울리지 않는다.
죽었다 깨어났는데도 별로 변한 게 없었다.
약 기운이 도는지 금방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 평소보다 컨디션이 금방 나아진 것 같았다. 몸을 일으킨 유온은 테이블 한쪽에 놓여 있던 서류 봉투를 집었다. 윤서경이 말한 피 검사 결과지인 듯했다.
“……으음…….”
서류를 꺼낸 유온은 눈을 가늘게 뜨며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번 살폈다. 하지만 이렇게 봐서는 뭐가 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AST, ALT, Hct……, 이런 건 다 무슨 뜻일까. 그 외에도 온통 어렵게 나열된 단어와 숫자들이 가득했다.
피검사 같은 걸 해도 항상 주치의나 형에게 말로만 설명을 들었지, 이렇게 종이로 보는 건 처음이다.
암호 같은 글자 사이로 한 줄에 형광펜이 칠해져 있었다. 거긴 한글로 설명이 덧붙여져서 알아들었다. 백혈구 수치였고, 평균치보다 절반 가까이 낮았다.
유온은 서류를 든 채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병으로 죽긴 했지만 아마도 그건 간 수치니 백혈구니 하는 것과 별 관련이 없을 거였다. 유온이 생각하기에 그 병은, 좀 추상적이다.
서류를 가져다 둔 사람이 한 건지 첨탑 하나가 망가진 입체 퍼즐과 부품은 테이블 한쪽에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유온은 서류를 옆에 끼고 간이 주방에서 차 한 잔을 끓여, 케이크 상자와 함께 방으로 가지고 왔다.
조금 전까지 속이 그렇게 안 좋았는데 벌써 케이크를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서류를 침실 책상에 내려놓은 유온은 창가로 가서 앉았다. 전망대에서 보지 못한 야경을 여기서라도 보려는 듯이.
물결처럼 쉼 없이 흐르는 불빛은 예뻤지만 전망대에서처럼 환한 밤하늘로, 반짝이는 밤바다로 보이진 않았다.
창가에 앉아서 타르트를 한 입 깨물자 온통 달콤한 맛이 퍼졌다. 그 자리에서 먹지 못한 걸 굳이 포장까지 해 준 윤서경이 새삼 고마웠다. 근사한 야경을 한 조각 가지고 돌아온 기분이었다.
절반 남은 타르트를 내려놓고 침대 옆으로 왔다. 머리맡 스탠드 아래에 며칠 동안 울린 적 없는 전화기와 메모지가 있었다. 유온은 낮은 사이드테이블 앞에 웅크리고 앉아서 비치된 연필로 쪽지를 적었다.
[오늘 감사했어요.]
“…….”
그리고 뭐라고 쓴담. 야경이 정말 예뻤어요, 맛있는 음식이었어요, 케이크……, 아니, 피 검사……? 그것도 아니고……, 고민하던 유온은 겨우 다음 말을 적었다.
[서경 씨는 정말 좋은 분이에요.]
겨우 다 쓰고 생각해 보니 윤서경이 이 쪽지를 읽는 건 오늘 중이 아닐 것 같다. 그냥 오늘이라고 써 두고 아무 때나 주자니, 윤서경은 유온이 고마워할 일을 너무 자주 해 준다. 무슨 일에 대해 인사하는 건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쪽지를 노려보던 유온은 연필 뒤에 붙은 지우개를 만져 보았다. 다행히 연필 자국을 이리저리 번지게만 만드는 가짜 지우개가 아닌 듯했다. 그것으로 윗줄을 공들여 지운 뒤 새로운 글귀를 썼다.
[항상 감사합니다.]
겨우 완성했다. 거실에 놓는 건 좀 그렇고, 윤서경의 침실에 두고 나올 수도 없기에 일단은 그 자리에 그대로 두었다. 창가로 돌아가던 유온의 시선이 잠시 침대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만약에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자신은 병에 걸리지 않고 계속 살아 있을 수 있을까?
“…….”
아마 아니겠지……. 시작이 조금 다르더라도, 이유온이 이유온인 이상 변하는 건 없다. 윤서경은 어차피 유온을 싫어하게 될 거고 결말은 죽음이다. 오히려 그가 지금 잘해 주는 만큼 더 무서웠다. 끝을 아니까. 어두운 엔딩으로 가는 길에 행복이 잠시 지나가는 건 비참할 뿐이다.
유온은 남은 케이크 조각을 입에 넣고 차를 마셨다. 벌써 다 식어 있었다. 자리를 정리하고 씻은 뒤 입욕제를 가지고 나왔다. 입욕제는 처음 한 번은 사용했지만 그 후로는 항상 베개맡에 두고 잤다. 그러면 바로 곁에서 윤서경의 향이 나는 것 같았다.
체했는데 케이크까지 먹은 것 때문에 밤에 배가 아파 깰 줄 알았지만, 눈을 뜨자 아침이었다. 드물게 푹 잠든 밤이었다. 부스스 일어난 유온은 사이드테이블을 잠시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메모지가 좀 비뚤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방에 들어와 메모지를 만질 사람은 없으니 기분 탓이겠지.
오늘따라 아침에 윤서경의 향이 많이 나는 기분이었다. 잠결에 입욕제 주머니를 코에 문지르기라도 한 모양이다. 콧등을 만지작거린 유온은 똑같이 하루를 시작했다.
그리고 자기 전 입욕제를 가지러 욕실에 들어갔을 때 고개를 갸우뚱해야 했다. 무슨 일인지 선반에는 입욕제가 두 개 놓여 있었다.
* * *
아침으로 나온 오믈렛을 먹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윤서경이 보낸 메시지였다. 내용은 늘 그렇듯 간결했다.
[좀 더 자세한 결과지를 메일로 보냈습니다. 시간 날 때 확인해요.]
시간이 날 때 확인하라고 했지만 유온은 얼른 포크를 내려 두고 메일에 접속했다. 유온이 메일을 쓸 일은 거의 없다. 메일함을 열자 역시나 전부 스팸메일이었다.
제일 상단에 낯선 이름에 첨부파일이 들어 있는 메일이 하나 있었다. 혈액 검사 관련 결과 고지 및 안내사항. 유온은 의자에서 아예 조금 돌아앉아서 내용을 확인했다.
어제 본 결과지와 대강 비슷하지만 한글로 적혀 있었고, 수치마다 설명이 따라붙었다. 빈혈과 백혈구 수치를 빼면 전부 ‘정상 소견’ 또는 ‘다소 높거나(혹은 낮거나) 정상 범주’였다.
이 결과만 보면 자신은 생각보다 건강한 모양이었다. 안도의 한숨 비슷한 걸 내쉬다가 메일함으로 돌아간 순간, 유온은 입을 다물었다.
왜 못 본 건가 싶을 만큼 익숙한 이름이 결과 통보 메일 바로 아래에 있었다.
큰형에게서 온 메일이었다.
“…….”
뒷골이 서늘해졌다. 확인하고 싶지 않지만 확인해야 했다. 유온의 손이 휴대폰 화면 위를 불안하게 움찔거리다가 결국 꾹 눌렀다. 메일 내용이 표시되었다.
[유온아, 형이야.
잘 지내고 있니? 아픈 곳은 없고?
어떻게든 말을 전할 길이 없을까 하다가 네 메일 주소가 떠올라서 보내 둔다. 읽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갑자기 연락도 안 되게 되어 형도, 부모님과 유연이도 걱정하고 있다. 워낙 너는 몸이 약하고 겁도 많은데 혹여나 여러모로 부담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가 되는구나.
네가 워낙 착한 아이이다 보니 더욱 그래.
휴대폰으로 전혀 연락이 되지 않던데, 혹시 윤 대표가 못 하게 하는 거라면, 그건 정말 큰 잘못이야. 네가 충분히 싫다고 말해도 되는 일이고.
아닐 거라 믿지만 네가 원해서 윤 대표와 함께 있는 거라면 형은 너한테 꼭 말하고 싶어. 윤 대표에겐 윤 대표의 방식이 있겠지만, 적어도 유온이 너는 그게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유온아. 우리는 네 가족이고 세상에서 가장 너를 아끼는 사람들이야. 너한테 무슨 일이 있어도 지지하고 지켜 주는 게 가족이야.
아무리 결혼할 사이라 해도 서로 도리를 지켜야 해. 사회의 규율이라는 게 있고, 특히 상류층에 있는 가족의 체면을 생각한다면 네가 먼저 나서서 윤 대표를 설득해야 할 일이지.
그런데 이렇게 며칠을 연락조차 되지 않아서 솔직히 말해 형은 네게 서운하고, 실망스럽기도 하다. 형이 너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걸 알 텐데, 걱정하는 형의 마음을 네가 조금이라도 헤아려 주면 좋겠구나.
네가 말하기 어렵다면 형이 윤 대표와 상의하마.
결혼하면 집을 떠나게 될 텐데, 그때까지 짧은 시간이나마 부모님과 유연이도, 형도 너와 함께 지내고 싶은 마음이다. 사려 깊은 너이니 우리 마음을 알아줄 거라 믿는다.
윤 대표는 형이 네가 있는 방으로 올라가는 것도 막고 있어. 형은 물론이고 부모님까지. 유온아, 다시 말하지만 이건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아주 옳지 못한 일이야. 범죄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메일이 수신 확인되면 그날부터 형이 매일 오전 11시에서 12시까지 맞은편 C호텔 라운지에서 기다릴게. 네가 올 때까지 매일 올 테니, 너는 언제든 기회가 되면 빠져나오렴. 만나기만 한다면 형이 지켜 줄 테니까.
맞은편 호텔까지도 나오지 못하게 한다면 그때는 정말 강경한 방법을 생각하마. 너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렴.
착하고 귀여운 유온아, 형은 네가 정말 보고 싶어.
라운지에서 만나자. 형이 계속 기다릴게.
밥 잘 먹고, 아프지 말고.
―너를 사랑하는 형이]
“…….”
내용을 모두 읽고 나자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형과 가족들은 이렇게 자신을 생각하고 걱정하는데, 자신은 그저 혼나는 게 무섭다는 이유로 휴대폰까지 꺼 두고 숨어 있었다. 게다가 가족을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기뻐하기까지 했다.
죄책감에 섞여 희미하게 소름이 돋았지만, 유온은 형에게 철저히 배운 반성을 하느라 제 몸을 내달리는 한기도 깨닫지 못했다.
이와 비슷한 일은 벌써 여러 번 있었다. 윤서경을 만나기 전에도 만난 후에도. 유온은 항상 똑같은 잘못을 저질러서 이유건에게 혼이 났다.
‘지금 윤 대표가 유온이랑 무슨 대화를 합니까. 유온이는 우느라 정신이 없는데. ……귀한 자식을 데리고 갔으면, 그에 맞는 대우를 해 줘야죠. ……유온이는 며칠 집에서 쉬게 하겠습니다. 마음이 풀리면 집으로 데려다줄 테니 그렇게 알아요.’
―……네. 유온 씨에게 편하게 쉬다 오라고 전해 주십시오.
고요한 방 안에 전화 너머로 들리는 윤서경의 목소리가 울렸다. 유온은 숨을 가쁘게 할딱거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뺨이 붓고 입가는 다 터졌고, 옷에 가려진 몸에는 멍이 가득했다.
‘이유온.’
‘……네, 형…….’
방이 아니라 현관 곁에 붙은 창고였다. 이유건이 유온을 크게 혼낼 때 데리고 들어오는 장소이기도 했다. 유온에게 이곳은 공포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다.
‘아까 했던 말, 그대로 다시 해 봐.’
‘자, 잘못했어요, 형.’
이유건이 몸을 굽히나 싶더니 머리가 홱 들려 올라갔다. 머리채를 움켜쥔 손에 두피가 바짝 당겨 아파왔다.
‘형이 지금 잘못했다고 말하라고 했어?’
유온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똑바로 말해.’
‘서경 씨, 한테……, 약, 안 주면 안 되는지, 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손바닥이 날아왔다. 머리채를 잡힌 채 뺨을 맞은 유온은 맥없이 휘청거리다가 다시 억지로 이유건을 보았다.
‘형이 윤 대표한테 이상한 거라도 먹여?’
‘그게, 그게 아니라, 서경 씨가 싫어하는 것 같아요…….’
이유건이 실소했다. 재차 손에 힘을 준 그가 유온의 머리카락을 잡고 질질 끌고 갔다. 몇 걸음 끌려간 유온은 그대로 뒤통수를 눌려 소파 쿠션에 얼굴을 박았다. 먼지가 일어나고 숨을 쉴 수 없게 되었다.
창고에 있는 쓰지 않는 물건들도 대체로 이렇게 이유건이 유온을 혼낼 때 쓰는 것들이었다. 숨을 쉬지 못한 유온이 버둥거리는 걸 보고 있던 이유건이 겨우 손을 치웠다. 헐떡이며 간신히 숨을 쉰 것도 잠시, 얼굴로 차가운 물이 쏟아졌다.
줄줄 흐르는 물을 감히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유온은 울먹이며 이유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커다란 유리컵을 손에 든 채 유온을 보다가, 컵을 내려놓고 젖은 뺨을 올려붙였다.
‘윤서경이 좋아하고, 싫어하고, 그게 형 말보다 중요해?’
‘잘못, 잘못했어요.’
그러자 이유건은 빤히 유온을 바라보다가 또 피식 웃었다.
‘다신 안 그러겠다는 말은 안 해?’
‘…….’
그 말은 할 수 없었다. 유온은 며칠 전 이유건의 지시를 어겼다. 이유건은 영양제라고 말하며 윤서경에게 약을 한 통 먹이라고 했다.
외국 영양제 브랜드의 로고가 쓰여 있긴 했지만 어딘가 묘했다. 원래 이 브랜드는 뚜껑 안쪽 실링에도 로고가 있는데, 자신이 받은 건 아무 표시도 없는 그냥 종이였다.
왜인지 차마 묻지는 못했으나 윤서경에게 주지 않았다. 하지만 안 들킬 수 없는 일이다. 사소한 영양제 하나라도 선물을 받은 이상 윤서경은 가족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 했다. 공적인 인사에 가까웠기에 말없이 넘어갈 일은 없었다.
그런데 윤서경이 조용하자 이유건은 곧 이상함을 알아챘고, 집에 찾아와 유온을 다그쳤다. 당연히 유온은 그에게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윤서경이 퇴근하기 전, 유온은 그대로 이유건의 손에 본가로 끌려왔다.
집으로 돌아간 건 거의 두 주가 지나서였다. 이유건은 유온을 때리는 것에 능숙했다. 맞는 동안 시끄럽게 굴면 벌은 더 크게 돌아왔다. 그걸 알면서도 비명을 지르거나 울지 않고는 못 견딜 만큼 아픈데, 뼈가 부러지도록 다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이유건은 매일 유온의 방까지 올라와서 상처와 멍에 약을 발라 주었다. 열흘을 좀 넘겼을 때 유온이 입은 옷을 들춰 본 이유건이 물었다.
‘윤 대표랑 섹스 안 하지.’
‘…….’
노골적인 질문에 심하게 당황했지만 아무런 관계도 없는 건 사실이었다. 유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건은 유온의 배에 아직 남은 멍을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혹시 하겠다고 하면 피해. 멍 없어질 때까지.’
‘네…….’
약통을 옆에 내려놓은 이유건은 유온의 뺨을 부드럽게 만졌다.
‘착하다, 유온이.’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형.’
덜 나은 멍을 달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윤서경은 흘끗 유온을 보고 왔습니까, 하고 말할 뿐이었다.
유온은 메일 화면을 하염없이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이유건은 윤서경과 관련된 일이면 유독 더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하기야, 윤서경 같은 사람 곁에 유온이 있으니 걱정이 될 법도 했다. 윤서경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유온만 벌을 받고 끝나는 게 아니라 집안 망신이고 가족에게 피해가 갈 것이었다.
아, 형한테 답을 해야 하는데. 유온은 메일이 발송된 날짜를 확인했다. 이틀이나 지나 있었다. 수신 확인이 안 된 걸 그쪽에서 알 수 있다고 해도……. 유온은 조급한 마음으로 답장하기 창을 열었다.
저 괜찮아요, 형. 오늘 나갈게요.
그렇게 썼지만 그 이상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초조한 기분으로 전송 버튼을 눌렀을 것이다. 그러나 손끝이 그 작은 버튼으로 좀처럼 가지 않았다. 작은 타르트의 맛, 거실에서 읽은 책, 반지와 시계, 방 안을 떠도는 윤서경의 향이 이상할 정도로 생각났다.
하지만 결국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유온을 지배하는 건 이유건이었다. 유온은 짧은 문장이 쓰인 메일을 전송하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음대로 되진 않았다. 전송 버튼을 누르기 전에, 유온이 느끼기엔 폭죽이 터지듯 커다란 음량으로 초인종이 울렸다.
유온은 놀라서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초인종 소리가 오늘따라 유독 큰 것 같았다. 갑자기 소리가 커졌을 리 없으니 분명 기분 탓이었다. 한 번 울린 초인종은 간격을 한참 둔 후에 다시 울렸다. 부랴부랴 일어난 유온이 인터폰을 들었다. 이한영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문을 열며 유온은 이한영의 시선을 피했다. 형에게 메일을 보내려고 한 게 괜히 찔리는 기분이었다. 형이 보낸 메일 내용이 내용이어서 그런 듯했다. 윤서경을 무척 나쁘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사실 감금이라고까지 할 건 아니지만 윤서경이 자신이 호텔 밖으로 나가는 걸 별로 원치 않는 것 같기도 했고. 이번엔 어떨지 몰라도 옛날 결혼 생활 때 그가 자신이 가족을 만난다고 하면 표정부터 굳어지던 게 떠올랐다.
“안녕하세요, 유온 씨! 이런, 아직 식사 중이셨네요.”
“아니에요. 다 먹었어요.”
오믈렛이 절반 이상 남아 있었지만 더는 식욕이 없었다. 다행히 이한영은 더 먹으라느니 하는 말은 않았다.
“갑작스럽지만, 대표님이 지금 시간이 좀 나셔서요. 혹시 괜찮으시면 식장을 보러 가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식장이요?”
“네, 예식장이요.”
식장이라는 단어에서 결혼식장은 생각도 못했던 유온의 눈이 둥글게 뜨였다.
“예식장도 제가 직접 보나요……?”
“당연하죠. 유온 씨랑 대표님 결혼식이잖아요. 두 분이 같이 봐야죠.”
유온은 괜히 제 뺨을 만졌다. 식장도 원래는 따로 보러 다니거나 하지 않았다. 부경이 국내에서 1, 2위를 다투는 호텔을 소유하고 있는데 다른 식장을 고려할 이유가 없었다. 결혼식은 지금 있는 이 호텔의 가장 큰 홀에서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하게 올렸다.
“후보에 야외 식장도 있어서 대표님은 낮에 가 보는 편이 좋겠다고 하셨는데, 괜찮으십니까?”
“네……. 저는…….”
형이 11시부터 맞은편 호텔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예식장을 보러 가면 형에게 갈 수 없었다. 가지 않아도…… 된다. 유온은 홀린 듯 이한영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세수만 겨우 한 상태였다. 어제 자기 전에 샤워하긴 했지만 식장을 보러 가는 거면 옷도 제대로 입어야 하는데. 이한영을 기다리게 하는 게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더니 그가 안으로 슥 들어왔다.
“전 대표님 방에서 찾아야 할 서류가 있습니다. 좀 걸릴 것 같아요.”
“네! 편하게 찾으세요. 저는 옷 갈아입고 나올게요…….”
잘됐다는 마음으로 유온은 재빨리 방에 들어왔다. 샤워를 다시 하고 싶었지만 겨우 서류를 찾는 건데 그 정도까지 시간이 걸릴 것 같진 않았다. 세수만 한 번 더 하고 서둘러 옷을 골라서 갈아입고, 머리도 열심히 빗었다. 특징이라곤 없는 까만 생머리는 어떻게 빗어도 바뀌는 게 없었다.
최대한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나오자 식탁은 깔끔하게 치워진 뒤였고, 아까 바닥에 떨어뜨린 휴대폰이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누가 올려놓은 건지 몰라도 휴대폰 화면의 내용을 본 게 아닐까.
누가 들어온 기척은 느끼지 못했다. 준비에 정신이 팔려 깨닫지 못한 것일 수도 있으나, 정말 아무도 안 들어온 거라면……. 혹시 이한영이 식탁을 치우면서 본 게 아닐까. 불안하게 꾸물대고 있는데 윤서경의 침실 문이 열렸다.
“아, 끝나셨나요? 저도 마침 다 찾았는데요.”
“네…….”
그래도 눈치는 잘 보는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한영이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기색은 없어 보였다. 유온은 친절하게 자신을 현관 쪽으로 안내하는 그를 따라갔다.
이한영은 로비가 아닌 지하 주차장으로 바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 홀에서 연결되는 주차장 문 바로 앞에 검은색 세단이 주차되어 있었다.
유온은 세단 앞에서 조수석에 타야 할지 뒷좌석에 타야 할지 짧게 고민하다가 앞쪽 문을 열었다. 이한영은 윤서경의 부하 직원이지 제 부하 직원이 아니었다.
“호텔 식장은 마지막에 볼 예정이고요, 오늘 오후부터 날이 흐려진다고 해서 우선 야외 식장으로 가겠습니다. 대표님도 그쪽으로 바로 온다고 하셨습니다.”
“네…….”
어색한 자리에 있으면 늘 그렇듯 유온은 ‘네…….’밖에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40분 정도 걸립니다.”
“네.”
꽤 오래 걸린다. 괜히 조수석에 탔나 싶었다. 어색한 시간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이한영은 말이 없어도 분위기를 편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조금은 마음을 놓으며 앞 유리 너머를 보고 있는데 이한영이 입을 열었다.
“대표님이 자주 못 들러서 서운하진 않으세요?”
“아, 아니요…….”
“아시겠지만 일이 많습니다. 그나마 요즘은 좀 나은 건데, 한창 때 비서실 사람들 별명이 지박령이었어요.”
“왜요……?”
“회사에 붙어서 안 떠나서요.”
“…….”
윤서경이 바쁘니 비서들도 바빠서 자리를 못 떠났다는 뜻인가. 유온은 농담의 뜻을 곰곰 생각해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대표님한테 참다못해 제가 말을 했죠. 요즘에 비서들 다 하도 집에 안 가서 별명이 지박령이다, 다른 직원들이 비서실에 부적이라도 써야 한다고 한다, 좀 쉬게 해 달라. 그랬더니 대표님이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유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적값 비용 처리하라고요.”
“…….”
“너무하지 않습니까?”
미묘한 표정으로 잠시 멍하니 있던 유온은 이내 저도 모르게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윤서경도 그런 농담을 한다니 의외였고 재미있었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다가 룸미러를 통해서 이한영과 눈이 마주쳤다. 유온은 얼른 웃음을 지웠다.
“죄, 죄송해요.”
“아니요, 왜요? 저야말로 쳐다봐서 죄송합니다. 웃으시니까 더 어려 보이셔서.”
“어…….”
“대표님이 정말 좋은 분과 결혼하시네요.”
“…….”
예의 차리는 말임을 알지만 말없이 있을 때의 몇 배로 어색해졌다. 유온은 칭찬에 면역이 없었다. 지나치며 한두 마디 듣는 말도 서먹한데, 좁은 차 안에서 둘이 있는 중에 듣는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한영은 그 후로 말을 시키지 않았고 태평해 보였다. 유온은 혼자서 어색함과 싸웠다. 얼마 후, 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호텔 야외 예식장으로 정문에 차를 대자 곧바로 직원들이 마중을 나왔다.
“윤 대표님은 안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한영과 함께 직원의 뒤를 따라 들어가자,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과 이야기중인 윤서경이 보였다. 맞춤 정장을 입은 커다란 뒷모습에 유온은 눈을 깜빡였다. 저 사람과 함께 결혼식장을 보러 왔다는 사실만으로 가슴이 뛰는 것 같았다.
“대표님.”
부르는 목소리에 윤서경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인사하듯 가볍게 이한영에게 눈짓한 뒤 유온 쪽으로 손을 뻗었다.
“이쪽으로 와요.”
그 순간에는 가슴이 뛰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유온은 새빨개졌을 얼굴을 고개를 숙여서 감추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윤서경에게 가까이 오자 그제야 식장의 모습이 눈에 제대로 들어왔다. 탁 트인 공간 뒤쪽으로는 호텔 스위트룸으로 쓰이는 고풍스런 건물이 있고, 건물을 벽 삼아서 야외 결혼식장이 꾸며져 있었다.
매니저가 대기실이며 로비, 식사에 대해서 부지런히 설명했지만 유온의 귀에는 잘 들리지 않았다. 식장을 한 번, 윤서경을 한 번 쳐다보며 정신이 팔려 있다가 매니저가 자신에게 시선을 돌렸을 때에야 겨우 그를 마주 보았다.
“이유온 님께서는 혹시 특별히 바라는 사항이 있으신가요?”
아직 이곳으로 결정된 건 아니겠지만 매니저는 뭐든 맞추겠다는 태도로 물었다. 부경 집안의 결혼식이니 계약을 성사시키고 싶은 게 당연했다.
“아, 저는…….”
특별히 바라는 건 없어서 생각을 해야 했다. 잠시 고민하다가 할 말이 생각났다.
“꽃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꽃을 좋아하는 건 유온이 아니라 윤서경이다. 하지만 윤서경이 원하는 게 유온이 원하는 것이었다. 유온의 말에 직원이 웃으며 제안했다.
“그러시다면 양쪽에 아치를 놓거나, 하객석까지 지지대를 넓게 놔서 라일락 종류를 늘어뜨리는 건 어떨까요? 향도 아주 풍부할 겁니다. 아니면 통로 양쪽에서 꽃이 넘치는 모양으로 장식하는 것도 아름다울 거고요.”
윤서경이 어떠냐고 묻듯이 시선을 주었다. 유온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서면으로 받죠.”
“네! 그럼 추천드릴 꽃을 중심으로 작성해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시큰둥한 윤서경과 우유부단한 이유온 때문에 맥이 빠질 법한데도 매니저는 끝까지 웃으며 두 사람을 배웅했다. 이한영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다음 식장으로 가는 동안 윤서경은 일을 했고, 유온은 멍하니 앉아 있었다.
휴대폰은 꺼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수신 확인이 되었으니 형이 뭔가 메일을 더 보냈을지도 몰랐다. 그 생각을 하니 순간 마음이 무거워지려 했으나, 바로 곁에서 느껴지는 알파의 체향에 씻기듯 사라졌다.
두 번째 식장도 야외, 이번엔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참 올라와야 하는 공중 정원이었다.
외국 대저택 같은 분위기의 새하얀 외벽에 비친 햇살을 본 유온은 생각했다. 본식을 올리는 게 딱 오후 12시 무렵이다. 날씨가 똑같이 좋다면, 지금 보는 풍경을 봄으로 바꿔 놓은 게 결혼식 날의 풍경일 것이다.
유온은 매니저와 이야기하며 세 걸음 정도 멀어진 윤서경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는 햇살과 잘 어울렸다. 기억 속 결혼식의 그 흰 예복을 입고 이곳에 선다면 마치 그림처럼 보이겠지. 곁에 오점처럼 선 자신을 빼면. 꼭 다 만들어 놓고 망친 그 고성 같았다.
“……유온 씨.”
“…….”
“이유온 씨.”
낮은 목소리에 유온이 멈칫해서 윤서경을 보았다. 매니저와 함께 쳐다보고 있는 게 한참 전부터 자신을 부른 듯했다.
“아, 네……. 죄송해요, 못 들었어요.”
“피곤합니까?”
“아니요, 안 피곤해요. 괜찮아요.”
“야외는 이 두 군데밖에 없으니 이만 돌아가죠. 급한 회의가 잡혔습니다.”
이것도 정말인지, 자신을 배려한 건지 모르겠지만 유온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윤서경은 유온을 방까지 데려다준 뒤 돌아갔다.
문이 닫힌 후 유온은 팔을 들어서 냄새를 맡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가까이 있어서인지 온몸에 윤서경의 체향이 가득했다. 유온은 그대로 겉옷도 벗지 않은 채 거실 소파에 앉아서, 그 향에 자신의 체향을 조심스레 섞으며 몸을 웅크렸다.
* * *
사무실로 돌아온 윤서경은 얇은 코트를 대충 벗어 옷걸이에 걸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이유건은?”
“아직 C호텔 라운지에 있는 것 같습니다.”
“한가한 모양이야.”
순하다 못해 하루 종일 고개 한번 제대로 못 들고 사는 이유온과 달리 이유건은 누군가를 윽박지르거나 깔보는 게 습관이 된 사람이었다. 그 동생 이유연으로 말하자면 매사 자신감이 넘치고 상쾌한 성격이었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화명의 회장 이중권은 큰 기업체를 거느린 중년 남자의 보편적인 상 그 자체였고, 이따금 얼굴을 비추는 그 아내 성민희는 우아하나 눈매가 차가웠다.
이유온은 정말로 그 집에 어울리지 않았다. 이유온 같은 성격이 그들 가족 사이에 있으면,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과 앞으로 살 시간이 어떨지 불을 보듯 뻔했다.
호텔 직원의 심부름을 해 주질 않나, 어쩐 일로 차를 마시자고 하나 했더니 비서라도 된 것처럼 윤서경이 마실 차 한 잔만 달랑 내오질 않나.
어떤 인생을 살면 저렇게 사람과 눈 맞추는 것도 힘들어하게 되는지, 윤서경은 궁금했다. 처음 이유온을 본 순간부터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
눈을 가늘게 뜬 채 무언가 생각하던 윤서경은 코트를 다시 집어 들었다.
“대표님?”
“C호텔로 가지.”
갑작스런 말이었지만 이한영은 부언하지 않고 곧바로 차를 준비시켰다. 혹시 도착하기 전에 돌아가려 하면 막으라고 그 근처의 경호원들에게 지시해 두었으나, 지시가 무색하게 이유건은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윤서경은 라운지 안에 드문드문 있는 사람들이 저를 흘끔대는 걸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업무를 보고 있었는지 손에 서류를 든 이유건이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가 눈을 크게 떴다. 윤서경은 앉으라는 말도 나오기 전에 이유건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렇게 얼굴을 보는군요, 윤 대표.”
“반갑습니다. 내 호텔에 왔던 날 후로 처음이죠?”
윤서경의 목소리에는 반가움은 고사하고 결혼할 사람의 본가 식구를 대하는 일말의 예의조차 없었다. 철저하게 아랫사람에게 하는 태도였다. 이유건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윤 대표. 어디서 기분 상하는 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인데, 지금 화를 낼 사람은 윤 대표가 아니고 납니다.”
“그래요?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던 모양입니다.”
서로 감정이 좋지 않은 두 알파는 언짢은 분위기의 페로몬을 그대로 내뿜었다. 짐승 두 마리가 서로를 쳐다보듯 아슬아슬한 공기가 주위를 떠돌았다.
“유온이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취약한 아이입니다. 윤 대표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쯤 하고 돌려보내 줬으면 합니다.”
“아, 취약. 확실히 그런 모양이더군요. 약이 그렇게 많은 걸 보면.”
“……필요해서 가지고 있는 겁니다. 유온이의 주치의가 직접 처방한 거고요. 집안일이니 너무 간섭하지 않으면 좋겠는데요.”
윤서경이 피식 웃었다.
“사람을 약물 중독으로 만드는 게 집안일이라니, 화명은 재미있는 가풍을 가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 내 집안사람이 될 거고 난 내 약혼자이자 결혼할 사람이 그 많은 약을 달고 사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말조심하세요, 윤 대표.”
치밀어 오르는 화에 이유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그때까지 들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고 말했다.
“집안사람 운운하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당신이 유온이에게 하는 짓은 납치고 감금입니다. 아무리 결혼할 사이라고 해도 지금은 두 사람이 남남이고, 결혼한 뒤에 해도 범죄예요. 당장 돌려보내지 않으면 법적인 조치를 취할 겁니다.”
법적인 조치라……. 윤서경은 차가운 시선으로 이유건을 보았다.
집안을 통해 혼담을 넣었다고 말하려 이유온을 만난 첫날, 그는 부어오른 뺨을 머플러와 모자로 가리고 있었다. 따뜻한 실내에서 더위에 얼굴이 발개진 채로도 그걸 벗지 않는 모습이 이상하게 보이리라는 건 생각도 못한 듯했다.
심지어 그렇게 열심히 가렸어도 뺨이 심하게 부은 게 훤히 드러났다. 윤서경은 당황했다. 손을 뻗어 코까지 덮은 머플러를 내리며 이건 뭐냐고 묻고 싶었다.
어디서 얻어맞고 온 건가 했는데 답은 꽤 쉽게 찾았다.
이유온과 친근하게 대화한 적은 없지만 몇 차례 자선 파티니 후원회 모임이니 하는 곳에서 그를 보았다. 청혼하기 바로 전에 그를 본 건 부경이 후원하는 음악 학교의 정기 발표회에서였다. 그는 형인 이유건과 함께 와 있었다.
식사 시간에 앞에 차려지는 음식을 느릿느릿 조용하게 먹던 그는 무화과가 나오자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망설였다. 그리 길지 않은 망설임이었다.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입에 넣는 모습에 무화과를 별로 안 좋아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보는데 얼마 안 지나 그가 손등을 쥔 채 몰래 그 위를 긁었다.
손톱 아래에서 긁힌 피부는 순식간에 새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얌전히 앉아 있던 그에게 점점 불편한 기색이 더해지더니, 결국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어디론가 향했다.
직원에게 다가간 이유온은 목소리를 죽여 물었다.
‘저, 혹시……. 알레르기 약 있을까요?’
그는 직원을 따라 의무실로 갔고, 얼마 후에 걸음을 서두르며 돌아왔다. 자리에 앉는 이유온을 향해 이유건이 인상을 찌푸린 채 어딜 다녀오는 거냐고 말했다. 이유온은 얼굴이 파래져선 죄송하다고 사과할 뿐이었다.
이때부터 이상하게 여기다, 상견례 자리에서 만났을 때 확신했다. 그날 이유온의 뺨을 때린 건 이유건이었다. 게다가 이유온은 그런 일에 익숙하다.
그래서 무작정 이유온을 데리고 나와 호텔에 두었다. 자신과 함께 나가는 이유온의 등 뒤로 이유건이 한 마디를 던졌다. 그 말에 새파래지는 그의 얼굴을 보며 돌려보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이유건이 말한 대로 감금이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이유온을 가족에게 보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막연히 들었다.
이유건이 호텔에 찾아와 거의 난동에 가깝게 소란을 피웠을 때 그 생각은 더 굳어졌다. 윤서경이 나타나자 정신이 들었는지 짐짓 점잖은 척 이유온의 약을 가져다주러 왔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가 가지고 온 약의 양을 보고 어지간한 윤서경도 놀랐다. 고맙다고 말하며 받아 드는 이유온의 모습은 더더욱 놀라웠다. 이유온이 그런 성격이 된 것에 이 남자는 상당 부분 일조했을 터다.
“감금이라니,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습니다. 유온 씨는 결혼 준비를 하면서 내 호텔에 머물고 있을 뿐입니다.”
“유온이의 의사를 무시하고요?”
“글쎄요. 유온 씨는 싫다고 말하지 않던데요.”
“원래 그런 말을 잘 못 하는 애입니다. 직접 만나야겠으니, 유온이를 여기로 보내 주시죠.”
윤서경이 전혀 호의적이지 않은 웃음을 지었다.
“좋습니다. 단, 내가 동석해야 합니다.”
“윤 대표.”
“어차피 결혼식에서 만나게 될 텐데 왜 그렇게 조급해하시는지 모르겠군요.”
“그 애는 내 동생이라고!”
이유건의 목소리가 대번에 커졌다. 라운지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놀라 그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몸을 거의 일으키다시피 한 이유건은 시선을 깨닫곤 이를 악물며 자리에 앉았다.
윤서경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이한영에게 눈짓했다. 부경의 삼남이 결혼 상대의 형과 얼굴을 붉히며 싸우더라는 이야기가 밖으로 퍼져서야 곤란했다.
“윤 대표의 약혼자이기 이전에 우리 집안사람이고, 내 동생입니다.”
“소유권이라도 주장하는 말로 들립니다.”
“왜곡하지 말아요. 난 유온이를 걱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유온 씨는 아주 잘 있습니다. 만약에 유온 씨가 원한다면 차 마실 자리라도 마련하도록 하죠. 그러니 무작정 이 근처를 맴도는 건 자제해 주시겠습니까.”
오늘 갑자기 이유건이 맞은편 호텔 라운지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들었다. 혹시 몰라서 호텔 근처에 배치한 경호원의 보고였다. 공교롭게도 이 근처에서 약속이 있는 것으론 보이지 않았다.
그는 혼자 라운지에 앉아 있었다. 무슨 꿍꿍이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지만, 이유온을 찾아온 건 분명했다.
그가 있는 호텔도 아니고 맞은편 라운지에 있는 걸 보면 어떻게 연락을 한 건지도 몰랐다. 그래서 과한 짓이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이유온을 곧바로 호텔에서 먼 곳으로 데리고 나왔다.
중간에 심하게 피곤해 보이기에 다시 방에 데려다 둔 후 확인하니 이유건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다. 벌써 몇 시간째. 해서, 직접 만나러 온 것이다.
“그렇게 할 정도로 유온이를 걱정하는 거란 생각은 안 드십니까?”
윤서경은 말없이 웃었다. 무표정보다 차갑게 보이는 웃음이었다. 이유건의 태도는 전혀, 조금도, 걱정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웃음으로 대신한 대답이 더욱 신경을 거슬렀는지 이유건이 이를 악물었다.
“……좋습니다. 자리를 마련해요. 유온이는 절대 싫다고 안 할 겁니다.”
“그럴까요.”
“내 동생이니 내가 제일 잘 압니다. 만약 유온이가 거절한다면 결혼식까지 아무 말 없이 기다리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윤서경은 가볍게 턱짓했다.
“이만 돌아가 주시죠. 부경과 가족이 될 분이 서울 한복판에서 수상하게 어슬렁거린다는 말을 듣는 건 원치 않으니까요.”
“…….”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화가 난 이유건이었으나 여기서 어찌 할 방법은 없었다. 그는 거칠게 제 짐을 챙겨 라운지를 빠져나갔다. 이미 이한영이 라운지의 다른 사람들도 모두 내보낸 뒤였다. 홀로 남은 라운지에서 윤서경은 미간을 희미하게 찌푸리곤 페로몬을 거두어들였다. 순간 절제도 모르고 쏟아냈던 체향은 상대 알파의 향을 짓누르고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 씨근대듯 일렁거렸다.
이유온을 주눅 든 성격으로 만들고, 손찌검도 서슴지 않는 형.
분명 화가 날 일이긴 했다. 그러나 왜 이렇게까지……, 기회가 된다면 죽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드는 건지는 모를 일이었다.
* * *
이유온이 윤서경을 처음 만난 것은 어느 선박 회사의 진수식에서였다. 아버지가 유온을 혼자 보낸 만큼, 그렇게 의미 있는 행사는 아니었다.
윤서경의 방문은 예상치 못한 이벤트였다. 그는 유온은 TV에서밖에 본 적 없는 유력 정치인과 동반해서 진수식에 깜짝 방문했다.
구석에 조용히 서 있던 유온은 지루한 얼굴로 대충 셔터를 누르던 기자들이 안색을 바꾸고 뛰어가는 모습에 그가 왔다는 걸 알았다. 윤서경이래. 윤서경이 여길 왜 와? 사람들이 저마다 수군거렸다.
조용하던 행사의 분위기가 단숨에 끓어올랐다. 유온은 오가는 들뜬 말소리들을 피해 더욱 눈에 안 띄는 곳으로 숨었다. 흥분한 누군가가 말이라도 걸까 봐 걱정이었다.
원래는 기자가 한둘씩 빠지기 시작하면 돌아와도 좋다고 아버지가 말했다. 하지만 윤서경의 등장으로 기자의 수는 두 배, 세 배로 쑥쑥 불어났다. 유온은 이 갑작스러운 귀빈의 등장이 별로 반갑지 않았다.
한순간 출입구 쪽으로 사람이 몰려 텅 빈 것 같아졌던 홀은 곧 엄청나게 붐비기 시작했다.
윤서경은 그야말로 유명인이었다. 부경그룹 회장의 셋째 아들로 유력한 후계자 후보였고, 얼굴은 여느 배우보다 근사했다. 유온도 TV에서 그를 볼 때마다 세상엔 저런 사람도 존재하는구나, 신기하게 생각했었다. 자신과는 태생부터 다른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부모님이 작은형 이유연의 혼처로 가장 바라는 상대이기도 했다. 이유연 역시 윤서경과 결혼하고 싶어 했다. 그 같은 알파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을 오메가가 있을까 싶었지만 유온은 TV 속 윤서경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까마득한 재벌의 중심인물이자 작은형의 결혼 상대. 유온에게는 너무 먼 세계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날, 유온과 윤서경의 세계가 맞닿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눈에 띄지 않는 벽 쪽에 서 있을 생각이었는데, 인파를 휘감은 윤서경이 유온이 있는 방향으로 왔다. 사람이 더 몰리기 전에 도망치려 했으나 이미 눈앞이 복잡했다.
기자들 틈을 헤치고 빠져나가려 했을 때였다. 카메라를 머리 위로 든 채 정신없이 윤서경을 찍던 기자 한 사람이 불쑥 가까이 다가왔다.
유온은 저도 모르게 손등을 코끝에 댔다. 기자는 알파였고, 갑작스러운 기삿거리에 흥분했는지 텁텁한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체향이라는 게 다 그렇듯이 평소엔 잠잠하다가 어느 순간 확 느껴지곤 했다. 유온은 타인의 그런 향에 민감한 편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덮쳐 온 향을 맡으면 순식간에 머리가 아파지거나 속이 뒤집힐 정도로.
안 그래도 어색한 자리에서 긴장한 채 있느라 컨디션이 좋지 않았기에 고역이었다. 순식간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메스꺼움까지 느끼며 나갈 길을 찾았다. 급히 움직이려 하니 더욱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람이 너무 많고 그 기자를 시작으로 하여 이젠 온갖 체향이 뒤섞여 느껴졌다.
여기서 쓰러지면 얼마나 혼날까. 기자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유온은 잘 알고 있었다. 유온이 쓰러진다면 우선 사진부터 찍을 것이다. 아버지도 형도 그런 멍청한 꼴을 용서할 리 없었다.
울 것 같은 걸 겨우 버티며 서 있는데, 등 뒤로 커다란 손바닥이 와서 닿았다. 동시에 주위를 불쾌하게 채우던 향을 밀어내며 은은한 체향이 번졌다.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나가고 싶으면 이쪽으로 가면 됩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머리 바로 위에서 들렸다. 향수 냄새가 조금 섞인 체향이 온몸을 감쌌다. 윤서경이 제 등에 손을 얹은 채 사람들을 등지고 서 있었다. 타인의 체향을 좋다고 생각해 본 건 처음이었다.
윤서경이 몸을 돌리던 짧은 한순간. 유온은 빠르게 주위를 살피고, 자신이 잠깐의 사각지대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머뭇거리면 이 모습이 기자들의 눈에 띄고 만다.
바로 곁에 유온이 선 자리에선 발견하지 못했던 통로가 있었다. 곧바로 그리로 걸음을 옮긴 유온은 자신보다 한참 시선이 높이 있는 윤서경을 향해 작게 인사하곤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왔다.
번잡한 행사장을 나온 유온은 미지근한 바닷바람 속에서 한숨을 쉬었다. 그늘진 벽에 기대서자 등부터 서늘한 감각이 퍼졌다.
‘…….’
손이 닿았다…….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이 맞긴 하구나. 유온은 천천히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몇 시간 동안 행사장에서 느끼던 불편함이 씻은 듯 사라지고, 낯설고 달콤한 감각만 남았다. 머리는 멍하고 몸은 둥둥 떠 있는 것 같았다.
잠깐이었지만 코앞에서 윤서경을 보았다. 그렇게 가까이서 보자 잘생겼다는 말을 넘어 비현실적인 사람이었다. TV에서는 차갑고 무서운 인상이었는데, 그렇게까지 냉랭하게 보이지도 않았다. 한순간 흠뻑 뒤집어쓴 체향 때문에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등에 잠시 닿았던 손은 친절하고 정중하고, 사심이 없었다. 눈을 깜빡이는 시간 동안 유온은 수없이 많은 생각을 했다. 그 손이 자신의 등을 제대로 감싸 안으면 얼마나 따뜻할까, 라는 헛된 생각이었다.
인사하며 잠시 눈이 마주쳤다. 그때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유온은 그대로 소금기 어린 바람이 부는 항구의 구석에서 윤서경의 잔향이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유온은 작은 부품을 자리에 맞춰 넣으려다 멈칫했다. 절반쯤 만든 대성당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그때 유온이 탁한 바닷물 냄새 때문에 점점 흐려지는 윤서경의 체향을 좇으며 한 생각은, ‘조금만 더 이 향을 맡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의 체향이 느껴지는 공간에 있었다. 그가 이따금 찾아오고, 결혼 예물을 함께 골랐고, 결혼식장을 보고 왔다.
어떻게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윤서경과 결혼을 준비하는 건 두 번째였다. 하지만 첫 번째로 준비할 땐 이런 일이 없었다. 윤서경이 한 차례 의견을 주고 유온이 그중에서 형과 상의해 선택하는 식이었다. 그나마도 최종 결정은 형이 했다.
유온은 도톰한 부품을 다시 쥐고 조심조심 제자리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복잡한 생각이 스며들기라도 한 것처럼 돌 벽이 잘못 끼워져 모양이 이상해지고 말았다. 다시 빼내려고 하면 부러질 것 같고, 이대로 두자니 벽이 찌그러져 아무리 보아도 잘못 만든 티가 났다.
“…….”
설명서대로 맞춰 넣을 뿐인 퍼즐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한다. 유온의 시선이 책꽂이로 향했다. 가장 아래 칸에 아크릴 케이스 하나가 어색하게 들어가 있었다. 청소하는 직원이 케이스를 가지고 와서 첨탑이 부러진 고성을 넣어 둔 것이었다.
‘이건 어디에 놓아둘까요?’
친절하게 묻는 말에 유온은 우물쭈물 대답을 하지 못했다. 벌써 케이스에 넣어온 걸, 망쳐서 버리려고 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아, 혹시 아직 만들던 중이셨나요? 대표님이 완성한 것 같다고 말씀하셔서……. 그렇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아, 다 만든 거 맞아요. 저한테 주시면, 제가 적당한 곳에 둘게요.’
그제야 윤서경이 부품을 보며 마저 만들 거냐고 물었던 게 떠올랐다. 아니라는 말을 그는 완성이라는 뜻으로 알아들은 듯했다.
일부러 케이스를 가지고 온 게 윤서경의 지시든 직원의 친절이든 묘하게 칭찬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또 이렇게 앉아서 새로운 도안을 따라 만들고 있다.
또 망쳤고.
가만히 어설픈 성당을 내려다보던 유온은 손에 힘을 주어 그것을 툭툭 부수고, 부품 틀과 함께 테이블 위에 잘 정리해서 쌓아 놓았다. 더는 안 할 거라고 말하는 것처럼.
혼자서 너무 들떴다. 7살 아이가 만든 것보다 어설픈 모형인데도 케이스에까지 담아 준 게 기뻐서, 꼭 칭찬을 반복해 조르는 듯한 일을 하고 있었다. 자신은 이런 게 문제였다. 한 번 칭찬을 해 주면 기어올라 한도 끝도 없이 바란다. 이것 때문에 형에게 혼난 게 몇 번인데 고칠 줄을 몰랐다.
좋은 건 너무 빨리 익숙해진다. 익숙해진 후에 손을 떠나가면 상실감은 말할 수 없이 크고 아쉽고 오래도록 미련이 남았다. 마치 윤서경을 처음 본 순간 느낀 설렘에 아직까지도 빠진 채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몇 년의 결혼 생활 동안 그 감정은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다만 윤서경의 마음이, 처음엔 그나마 친절하던 태도가 처음 만난 날 그의 체향처럼 점점 유온을 떠나갔을 뿐이다. 자신은 그날 맡은 항구 구석의 비린내였다. 서늘하고 기분 좋은 향을 밀어내고야 마는 악취.
유온은 두 손으로 뺨을 괸 채 고개를 숙이고 작게 중얼거렸다.
“서경 씨.”
입 밖에 내는 것만으로 가슴이 간질간질해지는 이름을.
“네.”
“……!”
머리 위에서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유온은 놀라서 거의 나동그라지다시피 했다. 테이블 위의 물건이 죄다 바닥으로 떨어져 이리저리 굴러갔다.
물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휘청거리다 테이블에 머리를 부딪칠 뻔했으나, 그 직전에 몸이 위로 휙 끌어 올려졌다. 눈을 깜빡이자 소파 위에 앉아 있었다.
잠깐 사이 꿈이라도 꿨나, 하기엔 방금 자신이 소란을 피운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부품과 모형 조각이 테이블 위는 물론이고 바닥에까지 쏟아져 굴러다녔다. 당황한 유온이 다시 테이블로 다가갔다.
“지, 지금 치울게요. 죄송해요.”
“됐습니다. 일어나요.”
“죄송해요…….”
“이유온 씨.”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유온은 어디로든 몸을 웅크려 도망치고 싶어졌다. 윤서경이 자신을 저렇게 낮은 목소리로 부를 때, 한 번도 좋았던 기억이 없다.
코끝이 시큰하고 눈은 빨갛게 뜨거워졌다. 유온은 눈을 크게 떴다가 깜빡이며 눈물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눈물을 참는 건 자신이 있었다.
“전부터 궁금했습니다.”
“네…….”
“대체 뭐가 그렇게 죄송합니까?”
윤서경의 질문은 이상했다. 죄송하다는 말과 감사하다는 말은 아무리 해도 부족한 거라고 항상 배웠다. 잘못을 하면 죄송하다고 하고, 상대가 무언가 해 주면 감사하다고 말한다.
가뜩이나 유온은 다른 사람 앞에서 말을 우물거리고 제대로 못하는지라 인사나마 똑바로 잘 하게 되었을 때 형에게 드문 칭찬을 받았을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이 잘못을 한 상황이었다. 당연히 사과가 필요했다.
말끔하던 방을 지저분하게 했고 또 칭찬을 바라듯이 모자란 솜씨로 모형이나 만들고 있고. 큰형이나 작은형이 보았다면 무슨 말을 들었을지 몰랐다.
“제가 잘못했으니까 사과를 해야…….”
“뭘.”
순간 체향이 훅 가까워졌다. 윤서경의 몸이 손을 대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유온은 놀라서 몸을 잔뜩 움츠렸다. 갑작스런 접근은 대체로 매가 따라왔다. 숨을 삼킨 유온이 날아들 충격을 각오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당신이 뭘 잘못했어요.”
“이, 이거요. 이제 안 할게요. 어질러서 죄송해요.”
“……하라고 가져다준 겁니다. 멋대로 케이스에 넣어서 화가 났습니까?”
기다려도 그가 뺨을 때리거나 머리채를 휘어잡지 않자 유온은 조금씩 고개를 들었다. 화가 나다니, 당치 않았다. 유온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곤 말했다.
“아니에요. 아, 저기 둔 건 어디에 둬도 이상한 것 같아서……. 죄송…….”
죄송하다고 말하려다 윤서경이 더 화를 낼 것 같아 급히 입을 다물었다. 부피까지 큰 쓰레기를 부숴서 버리면 될 걸 저렇게 장식까지 해 준 건 그의 호의일 텐데, 그런 호의에 이런 반응밖에 할 줄 모르니 그도 답답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 때릴 것 같진 않았다. 유온은 그 사실 하나에는 마음을 놓았으나 여전히 이 분위기가 거북해서 어쩔 줄 몰랐다. 입술만 달싹이고 있는데 다행히도 윤서경이 먼저 등을 돌렸다.
추궁 아닌 추궁에서 벗어난 건 좋은데, 이대로 윤서경이 나가 버리는 것도 불안했다. 하지만 윤서경은 거실을 가로질러 나가는 대신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창가 티 테이블로 향했다.
“와서 앉아요.”
“네…….”
얼른 그리로 다가와 앉았다. 윤서경은 휴대폰을 잠시 만지더니 그것을 내려놓고, 고개를 비스듬히 한 채 유온을 보았다. 시선이 불편했다. 윤서경을 똑같이 마주 볼 수도 없었다. 유온은 시선을 돌려 밤의 어둠에 까맣게 가라앉은 유리창을 통해 윤서경을 훔쳐보았다.
얼마 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직원이 안으로 들어왔다. 손에 든 쟁반에 차와 삼단 트레이, 포션 잼과 버터 같은 게 있었다.
이곳에서 먹는 음식이 다 그랬지만 삼단 트레이의 접시에 놓인 샌드위치와 푸딩, 케이크는 보석으로 만들어 놓은 것처럼 예쁘고 반짝거렸다. 작은 장식 하나하나에서 겨울 느낌이 물씬 들었다.
“양은 일부러 적게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저녁을 먹었다고 해서.”
유온은 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은 테이블에 티 세트를 세팅해 둔 뒤 돌아갔다. 윤서경은 트레이에서 가장 아래에 있는 접시를 직접 꺼내 유온 앞에 놓았다.
각각 재료가 다른 샌드위치는 손가락 한두 마디 크기 정도로 작고 한 입에 넣을 수 있을 만큼 얇았다. 다른 디저트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작은데 예쁘게, 재료를 많이 써서 만들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윤서경은 차까지 직접 따라 주었다. 황송하기까지 했다. 꾸벅꾸벅 감사하다고 인사한 뒤 유온은 샌드위치 하나를 입에 넣었다. 부드럽게 녹는 연어와 빵을 금방 삼킨 뒤, 그제야 윤서경을 보았다.
그는 언제나 짓는 무표정한 얼굴로 유온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유온 씨.”
“네…….”
“앞으로 죄송하다는 말은 안 했으면 합니다.”
“…….”
아무리 윤서경이 하는 말이라도 이건 조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사람은 죄송하다는 말을 하지 않고 살 수 없다.
“나한테도, 다른 사람한테도. 호텔 직원에게도 하지 말아요. 여기서 당신은 무슨 짓을 하든, 누구한테도 죄송하다면서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되는 귀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그건 이상한 것 같아요. 저는 실수도 너무 많이 하고, 폐도 많이 끼치고, 그리고 사, 사과는 사람이 꼭 해야 하는…….”
“앞으로 죄송하다고 한 번 말할 때마다 호텔 직원이랑 5분 동안 대화하세요.”
“…….”
유온은 정말로, 아주 오랜만에 억울하다는 기분을 느꼈다. 유온의 도덕적 기준에서 사과하지 않는 사람은 아주 안 좋은 부류였다. 하지만 직원과 5분 동안 대화하라니 유온에게는 고문이었다.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유온을 알면서도 윤서경은 그 문제를 훌쩍 넘어가 버렸다.
“궁금한 거 있습니까?”
“……궁금한 거요?”
화제가 너무 다른 곳으로 튀었다. 유온은 이게 방금까지 하던 말의 연장인지 아닌지 고민했다.
“나한테 궁금한 것 말입니다. 아니면 주위 상황에 대한 것도 좋고.”
“…….”
궁금한 것이라……. 당장 떠오르는 게 없었다. 묻고 싶은 게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많아서 무엇을 물어야 할지 모르겠는 상태였다.
유온이 침묵하는 동안 윤서경은 차를 마시며 기다렸다. 두어 모금 마신 후에도 유온의 입이 열리지 않자 그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내가 묻죠.”
유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먹는 음식은 입에 맞습니까?”
“네? 네……, 맛있어요. 이것도 맛있고요.”
“침실은 편합니까?”
샌드위치 접시를 만지작거리며 유온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지내는 건 괜찮아요?”
“네……. 좋아요. 정말요.”
“나랑 결혼하는 건?”
그건 말할 것도 없었다. 유온은 간절하기까지 한 눈으로 윤서경을 보며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순하게 처진 눈이 젖은 듯 반짝거렸다. 기쁨에 저도 모르게 체향을 흘릴 뻔해서 간신히 붙잡았다.
“좋아요. 저, 전 정말 좋아요. 저는…….”
“그래요.”
“전, 아.”
유온은 제 목소리가 순간 무척 높아졌다는 걸 알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시끄럽게 해서 죄송…….”
“5분.”
“…….”
또다시 조금 억울해졌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대체로 체했을 텐데, 신기하게도 두 번째 샌드위치로 손이 갔다. 달걀 샌드위치를 완전히 삼킨 후 차를 마셨다. 차는 약간 특이한 맛이었다.
가지런히 놓여 있던 샌드위치 세 개가 사라지자 윤서경은 두 번째 접시를 내려놓았다. 케이크 종류로, 역시 한 입에 넣을 수 있는 작은 것들이었다.
“맛은 어때요.”
“마, 맛있어요.”
호박 타르트를 막 입에 넣었던 유온은 그걸 급하게 삼키고 대답했다.
“모레부터 라운지에서 판매될 티 세트입니다. 정식으로는 이유온 씨가 가장 먼저 먹는 거고. 차도 시즌에 맞춰 블렌딩한 겁니다.”
“네…….”
“케이크 좋아합니까?”
“네.”
“그럼 우리 호텔에서 앞으로 판매될 디저트는 전부 당신이 제일 처음 먹어 보게 될 겁니다.”
“왜, 요……?”
윤서경은 당연한 일을 말하듯 담담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내 배우자인데, 케이크를 좋아하니까요.”
“…….”
목 안쪽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유온은 조용히 찻잔을 들어서 연달아 몇 모금 마셨다. 아직 조금 뜨거웠지만 그걸 느끼지도 못할 정도였다. 간질거림은 가슴 속에서 따뜻한 찻물에 녹듯이 퍼졌다. 폭신한 솜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유온의 머릿속에 조금 전 윤서경이 궁금한 걸 물었을 때 하지 못한 물음이 떠올랐다.
제가 싫지 않으세요?
저와 결혼하는 게 싫지 않으세요?
정말로, 저와 같이 살아 주실 건가요?
……언제까지?
“천천히 먹어요. 배부르면 억지로 다 먹지 않아도 됩니다. 남긴 건 내일 다시 가지고 오게 할 테니까. 더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고.”
평소와 똑같이 서늘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유온의 귀에는 다정하게 들렸다. 주제 파악도 못 하는 멍청이……. 녹아 버릴 걸 알면서 눈송이가 너무 예뻐 손바닥을 펼치는 것과 똑같았다. 하늘하늘 예쁘게 내리던 눈은 손에 떨어지자마자 차가움만 남기고 작은 물기가 되어 사라진다.
“감사합니다…….”
중얼거리며 윤서경을 보았다. 설마 감사하다는 말도 못하게 하는 건가 싶어 슬쩍 눈치를 봤지만, 그렇게까진 하지 않는 듯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네.”
“같이 당신 가족을 좀 만나야 할 것 같습니다.”
“…….”
갑자기 입 안의 달콤함이 삭 물러가는 것 같았다. 형의 메일이 떠올랐다. 유온은 윤서경이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한다는 걸 이유로 11시에서 12시를 방에서 서성거리며 흘려보냈다.
형을 기다리게 하고 있을 테니 당장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형에게 잘못했다고 사과해야 했다. 죄책감을 해소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역시 만나는 게 무서운 건 사실이었다. 그런 두려움에, 윤서경이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한다는 건 좋은 핑계였다.
신기한 것은 핑계 뒤에 숨은 자신의 마음이었다. 형은 다정할 땐 다정하지만 혼낼 일이 있으면 엄격한 사람이다. 이대로 영영 만나지 않을 수도 없는데, 회피한다 해도 언젠가는 형의 손에 창고로 끌려 들어갈 터였다. 그런 걸 생각하면 불안에 몸이 떨려야 할 텐데, 묘하게도 형이 기다리는 그 시간이 되면 약간 초조해지는 것에 그쳤다. 심지어는 잊고 있을 때마저 있었다. 조금 전처럼.
“어차피 결혼식 전에 한 번은 만나야 했습니다. 내가 당신을 막무가내로 데리고 와 여기에 가둬 두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요.”
“가, 가둬 두셨다는 생각 안 해요.”
진심이었는데, 윤서경은 유온을 흘끗 보더니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싫습니까?”
“네……?”
“싫으면 싫다고 말해요.”
유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서워도 가족이다. 유온을 걱정하고 있었다. 오히려 이 기회에 윤서경이 있는 자리에서 형과 이야기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형에게 얻어맞을 걱정 없이 자초지종을 설명할 수 있을 테니까.
윤서경의 뒤에 숨지 않으면 가족에게 사과하러 가기도 어려운 자신의 한심함에 한숨이 나왔지만, 역시 좋은 기회다.
“싫지 않아요.”
그 대답에 윤서경이 눈을 가늘게 떴다.
* * *
신년이었다. 명절에 유온의 가족들은 여행을 갈 예정이었기에, 그에 앞서 집으로 인사를 드리러 갔다. 결혼한 후 처음으로 맞는 새해는 그다지 들뜨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도 마찬가지였다. 윤서경은 아예 집에 돌아오지도 않았다.
유온의 집으로 가는 동안 차 안에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윤서경은 묵묵히 일을 했고, 조금 떨어져 앉은 유온은 창밖을 보는 척 멍하니 있었다. 윤서경의 차가 작았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을 수 있었을 테니.
집에서 본가로 오는 길은 늘 그렇듯 야속할 정도로 가까웠다. 두 사람이 집에 들어서자 가족들은 현관까지 나와서 반갑게 맞아 주었다.
‘유온아!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
이유연이 그렇게 말하며 유온을 끌어안았다. 그는 쾌활한 성격답게 상큼하고 기분 좋은 냄새를 가지고 있었다. 같이 살 때도 가끔 느끼던 그 향을 다시 맡자 약간의 부러움과 반가움, 또 약간의 두려움이 일렁거렸다.
‘어서 와라. 식사 전이지?’
아버지도 평소보다 부드러운 표정으로 둘을 맞았다. 현관에서부터 음식 냄새가 나더니, 주방에 가자 정말 식탁에 자리가 없을 정도로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어머니가 오늘 아침부터 준비하셨어.’
‘얘는, 그런 말은 왜 하니. 두 사람 부담스럽게.’
어머니는 가사 도우미 두 사람과 함께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하하, 무슨 소리인가. 바쁜 사람이 어디 그렇게 자주 다닐 시간이 있겠어. 자, 빨리 앉게. 유온이 너도 앉아라.’
‘여기 앉아, 유온아.’
이유연이 자기 옆자리를 두드렸다. 윤서경이 상석에 앉은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고 유온이 그 옆, 이유연은 유온의 옆이었다. 맞은편에 어머니와 이유건이 순서대로 앉았기에 유온은 그와 마주 보게 되었다.
고개를 들었다가 이유건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다정한 웃음을 지었다. 음식이 대부분 기름져서 안 그래도 거북했는데, 이유연이 옆에서 자꾸만 유온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음식을 집어 접시에 놓아주었다.
‘유연이가 저렇게 잘 챙겨 준다니까. 유온이 만난 게 그렇게 좋니?’
새우튀김 두 개를 겨우 먹었는데 이유연이 두 개를 더 집어 유온의 접시에 놓았다. 그러며 어머니의 말에 생글생글 웃었다.
‘당연하지. 유온아, 엄마 음식 먹고 싶었지? 많이 먹어.’
‘네……. 감사합니다. 형도 드세요.’
‘응. 너 먹는 거 보고 먹을게.’
이유연이 웃는 모습에 유온은 억지로 새우튀김을 입에 넣었다. 튀김옷의 기름과 함께 느끼한 맛이 입 안에 퍼졌다. 다 씹고도 목으로 넘어가지 않아서 물을 마셔야 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잘해 주는지, 이유연은 이번엔 두툼하게 부친 녹두전을 접시에 놓았다.
‘혀, 형, 저…….’
‘응. 왜?’
‘저 점심을 조금 늦게 먹었어요.’
‘정말? 말을 하지. 미안. 체하겠다, 먹지 마.’
접시를 얼른 거둬 가고 가사 도우미에게 새 접시를 달라고 하는 이유연의 모습에 안도했다. 하지만 이미 속이 메슥거리기 시작했고, 고개를 들었다가 짧게 이유건과 눈이 마주치자 더더욱 소화를 시킬 수 없어졌다. 이유건의 눈빛에 책망이 조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칙칙하진 않지만 화기애애하지도 않은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치고 거실로 나왔다. 과일과 차를 앞에 두고 오가는 이야기에 유온은 전혀 집중할 수 없었다.
‘이유온. 유온아?’
‘아……. 네, 형.’
‘잠깐 방에 올라가자.’
이유건이 유온을 불렀다. 유온은 무심코 윤서경을 보았고, 그는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유온을 한 번 보았다가 시선을 돌렸다. 유온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이미 계단 가까이 간 이유건을 따라갔다.
방의 문을 닫은 순간 유온은 멈칫했다. 이유건이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간 속이 크게 울렁거렸다. 유온은 재빨리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이유건에게 말했다.
‘형, 잠시만……, 저 토할 것 같아요…….’
이유건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유온을 욕실로 데리고 들어가 토하는 내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 기진맥진했지만 먹은 걸 토해 내자 몸 상태가 조금 나아졌다. 입 안과 얼굴, 손까지 깨끗하게 씻은 후 몸을 일으켰다.
그동안 욕실 문에 기대서 서 있던 이유건은 유온이 가까이 다가오자 손을 뻗었다. 유온의 몸이 잔뜩 굳었다. 이유건의 우악스러운 손이 유온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앞으로 잡아끌었다. 벌벌 떨리는 몸이 무력하게 끌려갔다.
머리채를 잡힌 채 침대까지 끌려온 유온은 그대로 베개에 얼굴이 처박혔다. 푹신한 베개가 푹 꺼질 정도로 깊게 얼굴을 눌리자 숨이 막혀 왔다. 유온은 반사적으로 버둥거렸다. 유온을 죽도록 괴롭게 하면서도 흔적은 전혀 남지 않는 체벌 방식이었다.
얼굴을 짓눌렀다가 떼고, 또 짓누르길 몇 번 반복하던 이유건이 말했다.
‘유온아, 형이 다른 사람 앞에서 어떻게 하라고 했지?’
‘흑……, 똑바로, 답답하게 굴지 말라고……, 멍청한 짓 하지 말라고…….’
‘그래. 잘 아네. 그런데 왜 그걸 못해서 유연이를 민망하게 만들어? 점심을 늦게 먹었으면 식사 전에 그렇게 말했어야지. 너 챙겨 준 유연이, 음식 만드신 어머니랑 아주머니들 생각을 왜 못 해.’
‘……잘못했어요…….’
형의 말이 맞았다. 속이 안 좋아서 못 먹을 것 같으면 처음부터 말하고 알아서 챙겨 먹었어야 했다. 그 말을 못 하는 버릇을 못 고쳐서 이렇게 항상 혼이 나는 것이다.
‘꼭 혼나야 말을 듣지, 유온이는.’
‘잘못했어요……. 안 그럴게요, 다음부터 잘할게요.’
‘며칠 내로 집에 와.’
‘…….’
‘윤 대표랑 있는 거 피곤해 보이더라. 와서 한동안 쉬다 가.’
한순간 대답을 머뭇거렸다. 이유건은 그 망설임을 용납하지 않고 유온의 머리를 다시 베개에 짓눌렀다. 호흡을 되찾았을 때 유온은 눈물 때문에 엉망이 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건은 유온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겨 정돈해 준 뒤 물과 약을 가지고 왔다. 이유건이 입에 넣어 주는 대로 약을 먹고 물을 삼켰다. 그는 손수건을 물에 적셔 와 유온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눈이 조금 발간 것 말고는 방에 올라올 때와 똑같은 상태가 되었다.
‘향 내보내 봐.’
‘…….’
유온은 조금씩 체향을 흘렸다. 평소 밖에서는 절대 향을 내지 않도록 조심했다. 윤서경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남에게 내보일 만한 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향을 맡은 이유건이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큰일이네. 이제 결혼도 했으니까 계속 이런 상태면 안 될 텐데.’
‘…….’
유온은 고개를 푹 숙였다.
‘형이 괜찮은 향수 구해 놓을 테니까, 앞으로 윤 대표랑 있을 때 써. 알겠지?’
‘네.’
이유건은 유온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함께 거실로 내려왔다. 그런데 거실 분위기가 올라가기 전과는 조금 달랐다. 무슨 대화를 하고 있었는지, 도저히 신년에 가족끼리 모인 자리 같지 않았다. 게다가 두 사람이 내려오자 시선이 쏠렸다. 윤서경 또한 차가운 얼굴로 유온을 보고 있었다.
‘……너무 늦게까지 있었군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우리야말로 늦은 시간까지 잡아 둬서 미안하네. 조심해서 돌아가게. 유온아, 집에 도착하면 연락하고.’
아버지의 말에 유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대답했다. 집으로 돌아갈 때의 분위기는 올 때 이상으로 무거웠다. 분명 윤서경의 기분이 무척 상한 것 같은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집에 들어가면 혹시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니면 자신이 뭔가 잘못했는지 물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윤서경은 유온을 집에 내려 주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대로 차를 탄 채 어디론가 나가 버렸다.
첫 신년을 그렇게 보내고 이후로 윤서경과 함께 가족을 만난 일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1년에 한두 번, 명절이나 가족의 생일도 대체로 걸렀기에 당연했다.
이번엔 상견례 이후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윤서경이 왜 갑자기 가족과의 만남을 제안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결혼식 전에 한번 봤어야 했다고 하는데, 아닌 것 같았다. 유온을 처음 방에 데리고 오던 날의 그는 평생 가족을 만나지 못하게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 역시 이상하긴 하지만…….
“그쪽은 먼저 도착해 있다고 하는군요.”
“아, 네.”
유온은 퍼뜩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약속 장소는 윤서경이 경영하는 체인 호텔 중 한 곳의 한식당이었다. 같은 체인이라서 직원이 돌아가며 근무하는지 주차장에서부터 익숙한 얼굴이 더러 보였다.
한식당 입구로 들어가자 직원들이 안쪽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평일에도 예약이 어렵다는 곳이지만 텅 빈 채였다. 직원이 안쪽 개인실의 문을 열어 주었다. 유온의 가족들은 이미 와서 앉아 있었다.
당연히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윤서경이 혼담을 넣었을 때 이상으로 불편하고 딱딱한 분위기가 유온을 휘감았다. 유온은 익숙하고 반갑지 않은 가족들의 태도에 겁먹은 채로 애써 웃음을 지으며 인사했다.
“그, 그동안…… 연락도 안 드려서 죄송해요.”
“그래. 유온아,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니? 이리 와 보렴.”
어머니는 처음엔 굳은 표정이었으나, 유온을 보더니 조금 풀어져 손을 내밀었다. 주춤주춤 다가가자 어머니는 유온을 곁에 앉히고 얼굴을 살폈다.
“어디 아팠던 건 아니지? 휴대폰은 왜 계속 꺼져 있었어.”
“아……. 충전을……, 죄송해요.”
일부러 충전하지 않은 것이었지만 다른 문제가 있었던 듯이 얼버무렸다. 죄송하다는 말을 하며 유온은 저도 모르게 윤서경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다행히 다른 말은 없이 유온을 자기 쪽으로 다시 부를 뿐이었다. 어머니가 조금 당황했다. 그 당황을 모른 척 윤서경의 옆으로 갔다. 이유건의 시선이 느껴졌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확인하는 게 무서웠다.
“유온아! 이리 와. 형 옆에 앉아.”
이유연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윤서경의 옆자리는 이유연의 옆자리이기도 했다. 늘 그렇듯 어머니의 맞은편에 윤서경이, 이유건의 맞은편에 자신이 앉는 배치였다. 원래는 차만 마실 예정이었는데 아버지의 강경한 말에 식사를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유온은 언제나 그렇듯 체할 생각으로 왔다.
“우선 설명을 들어야겠네, 윤 대표.”
아버지가 엄한 눈으로 윤서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윤서경은 마주 볼 뿐 큰 반응은 하지 않았다. 자신은 옆에서 이렇게 보기만 해도 무서운 눈빛인데 윤서경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설명할 것도 없습니다. 제가 유온 씨를 돌려보내고 싶지 않아서 데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게 이유가 되나?”
“여기 두 분이 알파시니 이해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 아버지와 이유건이 인상을 찌푸렸다. 형질의 특성을 가지고 따지면 반박할 말이 없었다. 유온은 혹시나 누군가가 제게 사실인지 물을까 걱정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윤서경이 알파로서 오메가인 자신을 곁에 붙잡아 두고 싶어 했는가, 그렇게 묻는다면 유온은 잘 모르겠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유온아.”
가장 걱정하던 순간이 왔다. 제 이름을 부르는 이유건의 목소리에 유온은 뻣뻣하게 굳은 채 그를 보았다. 이유건은 아버지와 빼닮은 엄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 형.”
“지금 네 뜻으로 윤 대표랑 같이 있는 게 맞니?”
“…….”
“네 가족은 우리야, 유온아.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당황을 안 하겠어. ……스스로 판단이 어려우면 도와 달라고 해야지. 세상에 너를 도와줄 사람은 가족뿐인데.”
유온은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가 말하는 ‘이런 상황’은 유온이 윤서경의 호텔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는 상황일 것이다. 이유건은 마치 윤서경이 유온을 가둬 두었고, 판단력이 약한 유온이 현실을 분간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유온은 스스로의 의지로 윤서경 곁에 있는 것이었다. 몇 년 전부터 그래 왔듯, 또 앞으로 그럴 것이듯. 하지만 유온이 틀렸다고 확신하는 이유건의 말투는 늘 그렇듯이 유온을 흔들었다.
“우선 식사하시죠.”
손끝만 말아 쥐고 있었을 때 윤서경이 아슬아슬하던 분위기를 깨뜨렸다. 그제야 유온은 그를 보았다. 이유건의 말은 상당히 직접적으로 윤서경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차분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직원들이 곧 죽과 전채를 내왔다. 유온은 작은 그릇의 죽을 내려다보았다. 먹고 싶지 않지만 먹어야 했다. 숟가락을 들려 하는데 윤서경이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문제는…….”
유온이 그 말에 흠칫한 것과 동시에 그의 품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바로 휴대폰을 확인한 그가 미간에 주름을 새겼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 편히 식사하시고 계십시오.”
유온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윤서경이 없으면 가족들 사이에 자신 혼자 남는다. 저도 모르게 숟가락을 꽉 쥐는데, 몸 위로 윤서경의 페로몬이 훅 내려앉았다. 최근 들어 느낄 일이 잦은 그의 체향에 불안이 누그러졌다.
윤서경이 자리를 뜨고 잠시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만 울렸다. 정적을 깬 건 이유건이었다.
“이유온.”
“……네.”
유온은 곧바로 숟가락을 내려놓고 이유건을 보았다.
“형이 보낸 메일 읽었어?”
“네……. 다, 답장, 죄송해요.”
형이 그렇게 메일을 보내 주었는데 답장조차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유온을 괴롭게 만들었다. 양심이 아프고, 마음이 무거웠다.
“네가 잘 있었으니 됐어. 그보다…….”
때마침 직원이 문을 두드렸다. 다음 코스가 나온 듯했다. 이유건은 말을 멈췄다가, 직원들이 음식을 모두 내려놓고 빈 죽 그릇을 가지고 나간 뒤 다시 이었다.
“네가 원한다면 당장 파혼하자.”
“…….”
유온의 얼굴이 굳었다. 시선이 저도 모르게 가족을 죽 둘러본다. 유온에겐 너무 놀라운 말인데 가족 누구도 동요하지 않았다. 이미 상의를 마친 모양이다. 자신과 관련된 일은 대체로 가족들이 상의한 후 통보하는 식이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그 뜻밖의 말에 유온은 눈을 느리게 깜빡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해 놓고도 순간 깜짝 놀랄 만큼 반항적인 행동이었다.
“아, 아니요, 저, 저는 파혼은…….”
이유온에게 이 결혼을 자신이 먼저 무른다는 선택지는 절대 존재하지 않았다. 윤서경에게 버림받는다면 모를까, 가능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와 결혼하고 싶었다. 똑같이 괴로운 결혼 생활을 해야 한다고 해도 좋았다.
“그러니? 너는 싫다고?”
“……전…….”
이유건의 말은, 다시 기회를 줄 테니 잘 생각하라는 뜻이었다. 그가 원하는 선택지는 윤서경과의 파혼 하나인 듯했다. 그래도 집안에 이득이 되니 결혼을 허락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시계의 초침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째깍째깍, 이유건이 시선으로 카운트를 하고 있었다. 유온의 입에서 제가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다급함에 입이 마르는 듯했다. 그러나 유온은 보일 듯 말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파혼을 원하지 않아요.
이유건이 바란 답이 아니었다.
“그래. 하지만 형은 네가 윤 대표와 파혼했으면 해.”
“…….”
눈앞에 놓인 음식의 냄새가 역했다. 가족들은 자연스럽게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우아하게 수저를 움직이는 가족들 사이에서 유온은 젓가락조차 들지 못한 채 마른 목을 물로 적셨다.
“그런데……, 형, 서경 씨랑 결혼하는 게, 회사에 더…… 좋지 않을까요.”
이건 유온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타당한 이유였다. 그러나 유온이 그 말을 하자마자 이유연이 날카롭게 유온을 노려보았다.
“네가 윤 대표님이랑 결혼하면, 진 회장은?”
“…….”
“진 회장은 어쩔 건데?”
진 회장은 원래 유온이 결혼하려던 건설사의 회장이었다. 이전부터 이야기가 나오던 사이인지라 그쪽은 완전히 화명의 두 오메가 자식 중 한 명과 결혼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당연히 그건 유온의 역할이었다. 이유연은 한 번도 그런 소문도 안 좋고 나이 든 알파와 결혼할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을 테니까. 그러나 그건 유온이 윤서경과 결혼하게 되지 않을 경우의 일이었다.
혼담을 깨기에 진 회장은 너무 위험하고 힘이 있는 사람이었다. 유온이 가지 못한다면 이유연이 그와 결혼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파혼이라니. 아버지와 형은 부경과 확실하게 사돈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것만은 확실했고 실제로도 그랬었다.
그런데 지금은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가족들의 눈길은, 정말로 유온이 파혼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왜 반응이 이렇게 바뀐 걸까. 이유연이 절대 진 회장과 결혼할 수 없다고 해서? 아니, 예전엔 그걸 이유로 파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었다.
당황한 유온이 우물우물 입을 열었다.
“저는…….”
“회사 걱정은 안 해도 괜찮아. 윤 대표는 유연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유건의 말에 이유연이 테이블에 두 팔을 대곤 유온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생각보다 윤 대표 눈이 낮더라. 좀 더 어려울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네? 부경이랑 혼담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걱정 말고 진 회장님이나 잘 모셔.”
“형…….”
“왜? 네가 했는데 난 못 할 것 같아?”
“…….”
“그게 말이 돼?”
이유연이 자못 다정하게 물었다. 윤서경이 남기고 간 향은 그 잠깐 사이 가족들에게서 흘러나온 향에 희석되었다. 어머니가 테이블 위에 한 손을 올렸다. 아까 유온을 쓰다듬던 손이었다.
“유온아.”
“……네, 어머니.”
“형이 네 대신 힘들어하는 걸 봐야 마음이 풀리겠니?”
원래, 이렇게까지……,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었는데. 애초에 파혼하라고 말하지 않았고, 이렇게 유온을 몰아세우지도 않았다. 잠시 혼란스러운 기색이다가 금방 결혼을 허락했다. 심지어 그런대로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이유연도 부모님이 억지로 달랬다. 그런데 지금은 대체 왜? 멍하니 있는데 아버지까지 유온을 불렀다.
“너한테 실망하고 싶지 않구나.”
하마터면 거기서 유온은 네, 그렇게 할게요, 하고 대답할 뻔했으나 입을 꾹 다물었다. 가족들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졌다. 평소라면 진작 고개를 끄덕여야 했을 유온이 고집을 부리고 있어서였다.
압박감은 점점 심해졌다. 차가운 시선이 쏟아지는데도 알겠다는 그 짧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 때문에 작은형은 안 좋은 상대와 결혼해야 하고, 부모님과 큰형은 속이 상한다. 그걸 아는데 미련이 너무 커서 욕심을 부리게 됐다. 이유온. 이유건이 다시 낮은 목소리로 유온을 불렀다.
속이 뒤집혔다. 유온은 납처럼 파리해진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등이 식은땀 때문에 축축했다. 왈칵 올라오는 구역질에 유온은 얼른 물을 마셨다.
“죄송해요,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그래.”
이유건이 대답했다.
“다녀오면서 생각하고, 오면 바로 대답해.”
유온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휘청거리며 일어났다. 급하게 화장실로 달려갔지만 먹은 게 없으니 헛구역질밖에 나오지 않았다. 나와서 거울을 보자 눈에 실핏줄이 터져 벌겠다.
손을 씻고 입을 헹구고 천천히 나오는데 마침 익숙한 얼굴의 호텔 직원이 보였다. 같은 체인이다 보니 그쪽 호텔 룸과 이곳 식당을 오가며 일하는 듯했다.
식사를 가지고 올 때 잠깐씩 마주칠 뿐인 사이였지만 그 공간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만으로 반가웠다. 유온은 공연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저…….”
“네. 식사는 맛있게 하고 계세요? 불편한 점은 없으시고요?”
“괜찮아요. 아, 혹시…… 물 좀 가져다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라임도요…….”
새큼하고 차가운 물을 마시면 가슴의 무게가 해소될 것 같았다. 유온의 부탁에 직원은 칭찬이라도 들은 것처럼 밝게 웃으며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툭 쳤다.
“야.”
“아……. 형.”
이유연이었다. 그는 멀리 사라진 직원과 유온을 번갈아 보더니 푸핫 소리를 내며 웃었다.
“너 지금 직원한테 지시한 거야? 하하, 진짜 웃기다. 그런 것도 할 줄 아세요, 이유온 씨? 누가 보면 엄청 대단한 사람인 줄 알겠네.”
정말 우스운 일을 봤다는 듯 깔깔거리는 이유연 앞에서 유온의 얼굴이 조금씩 뜨거워졌다. 맞는 말이었다. 제가 뭐라고 남한테 뭘 요청하고 있었을까. 이유연이 웃을수록 부끄러움은 커졌다. 어찌할 바를 모르며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였다. 이유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불쑥 다가온 체온이 등부터 어깨를 넓게 감쌌다.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밀어낼 듯 부드럽고 편안한 체향이 머리끝부터 온몸을 덮었다. 멍하니 고개를 들자, 윤서경이 차가운 얼굴로 이유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자리를 오래 비웠죠.”
굳은 표정에서 눈매만 조금 풀며 그가 말했다. 유온은 자신을 안고 있는 체온에 어리둥절한 상태로 눈앞의 이유연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무섭게 느껴지던 형의 얼굴이, 크게 변한 것도 없는데 갑자기 평범했다.
“유온 씨.”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 만난 그때처럼. 불안을 잠재우는 향이 안개처럼 몸을 감쌌다. 코끝에, 입술에, 눈과 귀와 온몸의 피부에 윤서경이 닿아서 스며들었다.
윤서경의 등장에 이유연은 표정을 구겼다. 당장 뭐라고 소리칠 듯한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움츠리자 윤서경은 유온의 몸을 약간 틀어 시선을 피하게 하곤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시계를 찬 손목이 가까워지자 향수 냄새도 함께 가까워졌다. 그의 체향을 가리지도 체향에 눌리지도 않고 잘 어울리는 향수였다.
“열이 조금 있네요. 음식이 입에 안 맞았습니까?”
유온은 겨우 고개만 저었다. 그제야 그가 이유연에게 짧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다는 걸 알았다. 윤서경이 휴대폰을 꺼내더니 어디론가 전화해서 올라와, 짧게 한 마디 했다. 계단에라도 있었는지 이한영이 익숙한 얼굴의 호텔 직원 한 사람과 함께 올라왔다.
“차에 가서 기다려요.”
“아……. 아뇨, 안에 부모님이랑 형…….”
“인사는 내가 하고 갈 테니까.”
그렇게 말한 윤서경이 한 번 더 유온의 어깨를 힘주어 안고 떨어졌다. 어느새 이한영과 직원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괜찮아요. 금방 가겠습니다.”
윤서경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꼭 자신을 달래는 것 같았다. 이한영과 직원은 재촉하는 기색이 없도록 반걸음 정도 떨어져서 시선을 내린 채 서 있었다.
유온은 그 두 사람과 윤서경과 이유연을 번갈아 두리번거리다가 다시 짧게 재촉하는 윤서경의 말에 걸음을 옮겼다.
가족들이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냥 돌아섰다. 휴대폰을 꺼 놓고 형의 메일에 답을 하지 않은 것처럼 또 가족들로부터 도망쳤다. 정말 윤서경과 파혼하고 집에 돌아가면 무서울 정도로 크게 혼날 게 분명했다. 그런데 뭘 믿고 이렇게 행동하는 걸까. 눈앞에 진창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무작정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왜인지 그 진창에 빠지지 않을 것 같은 이상한 생각이 든다.
레스토랑은 건물 3층이었다. 이한영과 직원은 로비가 있는 1층을 지나 지하 2층까지 내려갔다. 주차장 특유의 어둑한 조명 아래, 출입구 바로 앞에 윤서경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대표님은 금방 오실 겁니다. 추우니까 차 안에서 기다리시죠.”
이한영이 웃으며 차의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올 때는 이한영이 운전해서 왔는데, 윤서경이 올 거라고 하면서 조수석 문을 열어 주는 걸 보니 돌아갈 땐 따로 가는 모양이었다.
직원이 총총 돌아가고 이한영은 시동을 걸어 히터만 틀어 둔 뒤 바깥에 나가서 섰다. 조수석 옆에 서 있는 게 꼭 보초라도 서 주는 것 같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윤서경이 내려왔다.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한 태도로 나와 직접 운전석 문을 열었다. 유온은 주행 시동을 거는 그를 보며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우물거렸다.
유온이 입을 열기도 전에 윤서경은 차를 출발시켰다. 뒤에서 이한영이 꾸벅 인사를 하고 있었다. 빠르게 주차장을 빠져나간 차가 복잡한 도로로 올라탔다. 여전히 할 말을 찾지 못한 유온이 제 손톱을 내려다보기 시작했을 때, 윤서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쪽에서 파혼 이야기를 하더군요.”
“…….”
아, 윤서경에게도 직접 말했구나……. 그만큼 가족들의 뜻이 강한 것 같아서 순간 막막해졌다. 아무리 자신이 원해도 가족의 반대가 있으면 결혼이 어려워지지 않을까. 왜 갑자기 기억과 다르게 흘러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유온 씨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저는……. 부모님이랑 형들이 반대하시는 게, 거, 걱정…….”
“난 이유온 씨랑 결혼하는 거지, 그쪽 집안을 보고 결혼하는 게 아닙니다.”
“…….”
“화명이랑 결혼해서 내가 얻을 이득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유온은 운전하는 윤서경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는 유온과 함께 식사를 하고, 유온에게 케이크를 건네줄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평소보다 조금 거친 것 같았다. 차분하기만 하던 체향에 날 선 기색이 얼핏 비쳤다. 티 내지 않으려 하는 듯했지만 예민한 유온이 그런 알파의 분위기를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집안의 의견 같은 건 고려하지 않을 거라는 뜻입니다.”
“그래도…….”
그래도 온가족이 반대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결혼할 수 있을까. 부모님과 형들의 표정과 말이 떠올랐다. 낙심하는 유온에게, 윤서경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내가 자리 비운 사이에 무슨 말을 들었습니까?”
“아, 겨, 결혼 이야기 하셨어요……. 걱정하시는 것 같아요.”
“걱정?”
“……네…….”
윤서경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유온은 눈을 내리깔았다.
“내가 실수했습니다. 역시 다시 만나지 않게 하는 게 나았는데.”
그 후 윤서경은 잠시 조용했다. 뭘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멀리 자신이 머무는 호텔이 보였다. 벌써 며칠을 저기서 지냈는데 외관은 여전히 낯설었다. 외출을 거의 하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방에 올라갈 때까지도 아무런 말이 없었고, 유온은 먼저 말을 붙일 성격이 못 되었기에 침묵만 흘렀다. 현관을 열어 유온을 들여보낸 뒤 윤서경은 복도에 선 채로 말했다.
“바로 쉬어요. 허기지면 데스크로 연락하고.”
“네…….”
오늘 죄송했다고 해야 할지 감사했다고 해야 할지 또 갈피를 못 잡아서 헤맸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시선을 떨어뜨렸을 때, 매끄럽게 닦인 구두 끝이 성큼 다가오는 게 보였다. 의아하게 고개를 든 유온의 몸이 앞으로 끌려갔다.
유온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자신이 윤서경의 품 안에 있었다.
등에 손을 짚어 가려 줬을 때나 어깨를 감싸였을 때도 거리가 가깝긴 했다. 그러나 이 정도는 아니었다. 체향이 가까워지는 걸 넘어 심장 소리까지 들렸다.
일정한 속도의 심장 박동은 느리고 안정적이었다. 반면 제 박동은 미친 듯이 빨라지고 있었다. 윤서경의 한 손은 등을 감쌌고, 다른 한 손은 그보다 한 박자 늦게 올라와 뒤통수를 감쌌다. 머리를 안은 손에 가볍게 힘이 들어가고 그의 가슴에 완전히 몸을 기대게 되었다. 심장 뛰는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옅게 뿌린 향수 냄새와 체향이 섞이면서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윤서경의 체온은 유온보다 무척 따뜻했다. 한겨울에 바깥을 헤매다가 따뜻한 장소를 만나면 꼭 이럴 것 같았다. 온몸이 사르르 녹고, 마음까지 온기로 간질간질하게 더워지는.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은데 유온은 그 상태로 뻣뻣해진 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두 팔도 어설프게 든 그대로였다. 이래서야 윤서경이 커다란 조각상을 껴안은 꼴이었다.
그러나 윤서경은 그런 유온의 등을 쓸어내리더니 자신 쪽으로 좀 더 끌어당겼다. 유온은 완전히 그 품에 들어가 푹 안겼다.
포옹은 사람의 마음을 위로한다고 한다. 유온은 여태껏 그 의미를 실감한 적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전까지는. 가족들도 유온을 꼭 안아 주긴 하지만 이런 편안함을 느껴 보진 못했다. 오히려 더 긴장될 뿐이었다. 이, 온몸이 녹아 버리는 듯한 안온함과는 달랐다.
숨을 크게 쉬어 윤서경의 체향을 들이마신 유온은, 용기를 내어 팔을 조금씩 뻗었다.
채 마주 안기도 전에 윤서경이 몸을 떼어내고 가 버리면 어쩌나 걱정했다. 하지만 유온의 두 팔이 그 단단한 몸을 끌어안을 때까지, 윤서경은 그저 유온을 안은 채 이따금 손을 쓸어내리거나 할 뿐이었다.
이제 완전히 몸이 밀착했다. 두 몸 사이에는 차가운 바람이 몰래 끼어들 빈틈조차 없는 듯했다. 유온은 그게 어색하고 당황스럽고, 심지어 미안한 마음마저 들면서도 가만히 머리를 그쪽으로 기울였다. 이유온이 태어나서 처음 해 보는 어설픈 기댐이었다.
가족들에게 다그침을 받으며 잔뜩 풀이 죽었던 마음이 물들듯 편안해지고 있었다. 한참 후, 윤서경이 유온의 머리카락에 코끝을 댄 채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팔을 풀었다.
내내 쏟아진 윤서경의 체향에 절여지다시피 한 유온은 나른한 얼굴이었다. 조금 전 가족들과 그런 일이 있었다고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마음이 흐물흐물하게 풀어져 있었다.
무심코 배 위에 손을 얹었다. 며칠은 아무것도 먹지 못할 것 같았는데 허기가 졌다.
“배가 아픕니까?”
윤서경의 물음에 유온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배고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식탐이 심하다고 자주 혼났기에 남에게 식사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으려 했다. 윤서경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 더더욱 싫었다.
“그럼 간단한 걸로 식사를 올려 보낼 테니까 먹고 나서 쉬어요.”
유온은 머뭇대다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한 걸 올려 보내겠다는 말에 좋다고 하는 정돈 괜찮을 것 같았다.
“많이 긴장했던 것 같은데, 마사지라도 하겠습니까?”
하지만 마사지까진 필요하지 않았다. 이번엔 고개를 저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밥만 먹을게요…….”
“그렇게 해요.”
윤서경이 평소보단 조금 느린 걸음으로 현관을 빠져나갔다. 강하게 떠도는 향은 신경 안정제라도 된 것처럼 점점 긴장을 누그러뜨리고 심지어 기분이 조금 좋아지게까지 만들었다.
소파에 늘어지듯 앉아 있던 유온은 직원이 가지고 온 더운 샐러드와 수프를 금방 다 먹었다. 그리고 두 개로 늘어난 입욕제 중 하나를 써서 목욕하고, 한층 나른해진 채 나머지 입욕제 하나를 끌어안고 자리에 누웠다.
* * *
그날 새벽이었다. 오후가 되기도 전에 잠들었던 유온은 묘한 기척에 눈을 떴다. 윤서경의 향이 났다. 입욕제에서 나는 건지, 그가 주위에 뿌려 두고 간 것의 잔향인지. 하지만 어느 쪽도 아니었다. 생생하고 어딘가 난폭한 향이었다.
침대에서 내려와 문을 연 유온은 사냥감이라도 잡듯 강렬하게 몸을 덮친 향에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으며 움츠렸다가 조심스럽게 다시 떴다. 어둠 속에 윤서경이 서 있었다.
체향이 흘러나오다 못해 눈에 보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넘실거렸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가 흘끗 시선을 들었다. 평범하던 눈동자는 짐승의 것처럼 위압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표정은 무서울 정도로 굳었고, 눈에는 핏발이 선 채였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모로 기울이더니 중얼거렸다.
“아, 그래……. 여기 있었지…….”
갈라진 목소리가 나지막이 흘러나왔다. 유온은 곧바로 상황을 알아차렸다. 윤서경의 러트였다.
* * *
반갑지 않은 타이밍에 급한 용건이 들어왔다. 윤서경이 어떤 자리에 있는지 알면서 사소한 일로 연락할 이한영이 아니었다. 나가 보자 과연, 협력 업체가 부경과 복잡하게 얽힌 외국 기업체의 부도 소식이었다. 고의 부도였으나 전혀 조짐이 없어 부경조차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사태였다.
우선 급한 일을 처리하는 것만으로 꽤 시간이 걸렸다. 아무리 내키지 않는 자리라 해도 식사하는 중간에 30분 가까이 돌아가지 않는 건 결례였다. 게다가 이유건이 하려 한 말과, 그걸 듣는 이유온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서둘러 돌아가는데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유온의 작은형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이유온을 비웃으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즐거워했다. 이유온은 그 앞에서 얼굴이 발개진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윤서경은 이유온의 저런 모습이 조금 답답했었다. 제 할 말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누가 괜한 트집을 잡아도 제 잘못이라 여기며 입을 다물고, 가끔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의도가 지나쳐 기상천외한 동문서답을 하기도 했다.
한데 헛소리에도 그저 기가 죽어 아무런 말도 못하는 걸 보니 뒤늦게 짐작이 갔다. 가족이 저 모양이다. 처음엔 이유건과, 아마 그의 폭력을 모르는 척했을 가족들로부터 떨어뜨려 놓자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수준이 생각을 훨씬 뛰어넘었다. 이유온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매일, 매일, 저런 폭력 속에서 자랐다.
큰형은 신체적으로, 작은형은 심리적으로 이유온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유온의 태도로 보아 이따금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 부모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자식들 둘이 하는 꼴을 보면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갔다.
이유온을 먼저 차로 보내고 이유연을 지나쳤다.
‘대표님!’
이 정도로 상대하지 않겠단 의사를 보였으면 조용해질 법도 한데, 이유연은 밝은 웃음을 지으며 따라왔다.
‘아까는 장난친 거였어요. 유온이도 평소에는 잘 웃는데, 오늘은 몸이 조금 안 좋은가 봐요. 제가 챙겼어야 했는데.’
‘상대가 무안해하면 장난이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이유연은 움찔했지만 쾌활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말하는 소리는 명랑했고 티 없이 자란 느낌이 확 나는, 천진한 도련님이었다. 한 집안에서 자란 두 사람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유온이가 좀 조용하죠? 감수성이 예민해서 그래요. 저랑 같이 피아노도 배웠는데, 유온이는 완전히 감성적으로 쳐요. 신기하다니까요.’
이런 말만 들었다면 윤서경은 이유연이 정말 이유온을 칭찬하고, 예뻐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유온 씨가 피아노를 칩니까.’
‘아, 말 안 했구나. 피아노 쳐요. 나중에 저랑 같이 치는 거 보여 드릴게요. 유온이도 저랑 듀엣으로 치는 거 좋아하거든요. 나중에 유온이랑 같이 집에 오시면 쳐 볼게요.’
윤서경은 가만히 이유연을 내려다보았다.
‘유온 씨가 당신이랑 피아노를 칠 일은 없을 겁니다. 혹시 듀엣 상대가 필요하다고 하면 내가 더 제대로 된 사람을 찾아 줄 테니 이유연 씨는 끼어들 필요 없습니다.’
이 말을 할 땐 식당의 입구에 이르러 있었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오늘의 유일한 손님을 위해서 직원 몇 사람이 입구 근처에 나와 있었고, 그들 모두 윤서경의 말을 들었다. 겉으로 반응하는 사람은 없었으나 이유연의 얼굴이 재빨리 그들을 향했다가 붉게 달아올랐다.
피아노라.
윤서경은 피아노 생각을 하며 이유연을 그 자리에 두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이유온의 부모와 이유건은 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 중이었다.
‘대표님, 식사는 한꺼번에 올릴까요?’
‘됐습니다. 지금 있는 것도 내가세요. 차만 한 잔 부탁하죠.’
‘네.’
직원들이 조용히 움직여 윤서경 앞의 상을 치웠다. 이유온의 어머니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윤 대표, 그래도 식사해야지요. 유연이는 오는 길에 유온이 못 만났니?’
‘유온 씨는 제가 먼저 차로 보냈습니다. 몸이 안 좋은 것 같더군요.’
‘네?’
세 사람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얼굴이 안 좋던데, 불편한 소식이라도 들었습니까?’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경우 없는 무례를 참아야 합니까, 윤 대표.’
이유건이 말했다. 윤서경은 흘끗 그를 보았다. 제 아버지도 가만히 있는데, 이유건은 알파 페로몬을 감추지 않고 쏟아냈다. 하긴, 이유온의 아버지는 딴에 무게를 잡느라 나서지 않는 것이긴 했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마침 이유온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유온이가 없는 자리라서 조금 그렇지만, 언제 또 윤 대표의 얼굴을 볼 날이 올 수 없으니 지금 이야기하지. 이 결혼은 없었던 일로 했으면 하네.’
‘유온 씨가 동의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유온이는 심약한 애예요. 윤 대표한테 휘둘리면서 힘들어하는 모습은 더는 못 보겠습니다. 집으로 돌려보내 주시죠.’
마침 직원이 들어와 찻잔을 내려놓았다. 마실 생각은 없지만 구색을 맞추려 내오게 한 차인데, 찻잔을 보자 괜히 그날 달랑 윤서경의 찻잔 하나만 들고 왔던 이유온의 모습이 떠올랐다.
‘듣고 있습니까? 내 말을 잊은 건 아니겠죠. 유온이를 계속 그렇게 감금해 두면 법적인 조치를 취할 거라고. 부경의 삼남이 오메가를 호텔에 감금했다는 뉴스가 나오면 꽤 재미있을 겁니다.’
윤서경은 흘끗 눈을 들었다. 대놓고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난 이유연과 달리 이유건은 겉으로 보기엔 차분했다. 그러나 쏟아져 나오는 페로몬으로 보아 그가 가장 흥분한 상태였다.
가만히 그를 보던 윤서경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유건이 이유온을 향해 느끼는 감정은 아무리 봐도 소유욕이었다. 알파가 오메가인 형제에게 소유욕과 집착을 가지는 건 생각보다 흔한 일이다. 남을 존중하지 않는 성격일수록 그 경향이 심각했고.
여과 없는 소유욕에 윤서경은 무척 불쾌해졌다. 한집에 살 때 이유온이 이유건의 페로몬을 덮어썼을 생각을 하니 역시 눈앞의 이 알파를 죽이고 싶었다.
……어렵지 않을 텐데.
그러나 윤서경은 그 욕구를 참고 말했다.
‘원하는 대로 해 보세요. 대신, 화명은 부경의 삼남이 원하는 오메가와 결혼하기 위해서 무슨 짓까지 하는지 보시게 될 겁니다.’
‘윤서경 씨!’
윤서경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유온을 오래 혼자 두려니 걱정스러웠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자 이한영이 차 앞에 서 있었다. 차에 오르자 이유온은 죄라도 지은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어이가 없었다. 뭘 잘못했다고 이래.
아니, 제 실수였다. 가족과 역시 마주치지 않도록 해야 했다. 이번 식사도 이유건의 헛소리를 받아 줄 마음이 없었건만 흔쾌히,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이유온의 모습에 방심해 버렸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만나게 하지 않았을 텐데.
곧 호텔에 도착했고 방에 데려다주기만 한 뒤 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현관에서 돌아섰을 때, 이유온의 얼굴은 희었고 온몸이 젖은 것도 아닌데 물에 빠졌다 나온 것처럼 축 처진 채 무겁게 보였다. 그러면서 당장 날아가 버릴 듯 가벼워 보이기도 했다. 발밑에 드리워진 그림자까지 침울했다.
윤서경은 저도 모르게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가 저 창문 너머로 하늘하늘 날아가 버리기라도 한다는 듯이.
끌어안자 목각 인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뻣뻣하게 있던 이유온은 얼마 후 주춤거리며 윤서경의 몸에 팔을 둘렀다. 그 별것 아닌 동작에 윤서경은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뛰었다. 안은 팔에 힘을 주었을 때 희미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이유온의 향이었다. 고집스러울 정도로 내놓지 않아서 윤서경은 그가 혹시 베타가 아닌가 생각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지금도 향이 난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착각인 듯 여리고 간신히 느껴지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 조금마저도 놀랄 만큼 달콤했다. 윤서경은 이유온의 머리에 코끝을 묻은 채 조금이라도 더 향을 느껴 보려 했다.
꽃이 가득 핀 정원의 안개. 시적인 표현이지만 그보다 더 이 향을 잘 표현할 말은 없었다. 향은 잦아들었다가 조금 피어나길 반복했다. 이유온이 일부러 감추는 것 같았다.
체향은 원래 모두 조금씩은 편안하게 흘리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걸 완전히 감추고 있는 건 단정하면서 어딘가 금욕적인 느낌까지 들었다. 칼라가 높은 셔츠의 단추를 끝까지 채우고 온몸에서 손과 얼굴 말곤 드러낸 부분이 없는 차림처럼.
더 있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윤서경은 이유온에게서 떨어져 방을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머릿속을 맴도는 그의 모습을 잊기 위해 다른 걸 생각했다.
피아노라. 정말 좋아하나? 이유연이 말한 것이라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좋아한다면…… 그 방에 피아노를 놓을 자리가 있던가?
피아노 브랜드를 생각하며 업무에 복귀했다.
그날 밤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 * *
“서경 씨…….”
유온은 조금 겁먹어서 그를 불렀다. 그는 평소와 똑같은 차림이었지만 조금 달랐다. 재킷만 벗은 차림, 팽팽하게 조인 셔츠와 베스트 아래 가슴이 쉴 새 없이 씨근거렸고, 머리카락은 손으로 흐트러뜨렸는지 느슨했다. 더웠는지 반쯤 걷어붙인 소매 아래 굵은 팔엔 핏줄이 잔뜩 곤두선 채였다. 오른쪽 손목의 시계가 어두운 속에서 창밖의 빛을 시리게 반사했다.
윤서경은 유온을 잡아먹을 듯 빤히 쳐다보다가 천천히 다가왔다. 날뛰는 체향이 거실을 온통 채우고 있었다. 실체도 없는 냄새가 유온의 두 발목을 휘어감는 것 같았다. 유온은 움직이지도 피하지도, 그렇다고 마주 다가가지도 못했다.
윤서경의 걸음은 느렸다. 표정은 조급하고 사나웠다. 눈동자는 젖은 듯 몽롱하지만 날카로웠다. 밀도 높은 체향에 유온의 눈이 점점 풀어졌다. 몸이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발갛게 물들기 시작한 유온의 눈가에 윤서경의 손이 닿았다. 큰 짐승이 눈앞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윤서경은 유온의 속눈썹을 만지다가 손을 뒤로 넘겨 머리카락을 쓸었다. 손끝이 귓바퀴를 따라 내려가고 다시 올라와 뺨을 감쌌다. 얼굴이 천천히 가까워진다. 긴 속눈썹이 내리깔리며 윤서경의 뺨에 그림자가 졌다. 모양 좋은 입술이 점점 가까워지다가 거의 맞닿은 순간, 윤서경이 움직임을 멈췄다.
“…….”
뺨을 감싼 손이 떨어지고 유온의 얼굴 바로 옆에서 움켜쥐어졌다. 유온은 그가 자신을 당연히 때리려 하는 줄 알고 순순히 눈을 감으며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입술에 가벼운 숨결이 닿았다.
윤서경의 몸이 멀어졌다. 눈을 뜨자 그는 두 걸음 정도 떨어진 자리에 서 있었다. 헐떡이는 숨과 뜨거운 체온이 여전히 느껴졌고 체향도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는 유온에게서 돌아서더니 소파에 던져두었던 재킷을 잡아채듯 들어 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뒷모습에 유온의 두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윤서경이 막 현관문의 손잡이를 잡으려 한 순간, 유온은 그의 베스트 끝단을 꽉 쥐었다.
러트가 올 때마다 윤서경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던 게 떠올랐다.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지금 어디에 가 있을지 생각하느라 잠도 자지 못했다. 그렇다고 윤서경에게 어딜 갔느냐 물을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지금이라면, 잡으면 잡혀 줄 것 같았다. 이런 상태인 그가 여길 나가 어디로 가는 것도 싫었다. 무심코 잡고도 차가운 뿌리침과 뭘 하는 거냐 물을 목소리를 생각하니 무서웠다. 그래도 손을 놓진 않았다.
윤서경이 느리게 고개를 돌려 제 옷을 잡은 유온의 손을 보았다. 긴장해서 떨리는 손이 그의 눈에 비쳤다. 그다음 행동은 빨랐다. 윤서경은 곧바로 유온을 안아 들더니 입을 맞췄다.
말캉한 입술을 위와 아래 번갈아 빨아서 벌리게 한 그가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고작 입 안이라 해도 처음으로 몸속에 타인의 살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유온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입만 벌리고 있었다.
혀로 입 안을 샅샅이 핥은 윤서경은 단 과일의 즙이라도 빨듯이 유온의 입술을 세게 빨았다. 순식간에 입술이 부풀었다. 그러나 그런 강렬한 키스에도 유온은 집중할 수 없었다. 윤서경이 유온의 몸을 끌어당겨 다리를 벌린 채 제게 매달려 안기도록 하고는, 트랙팬츠 위에서 엉덩이와 그 사이를 더듬고 있었다.
바지 아랫단이 자세 때문에 끌려 올라가 종아리가 절반쯤 드러났다. 슬리퍼도 들려 안기면서 한 쪽씩 툭툭 떨어져 맨발이었다. 키스에 열중하는 사이 유온은 자연스럽게 두 손을 윤서경의 어깨에 올리고 있었다.
윤서경의 손이 말랑한 볼기를 꽉 쥐었다가 놓았다. 손은 그대로 미끄러져 옷에 가려진 구멍 위를 가만히 더듬었다. 헐떡이며 거칠게 호흡하는 소리가 귀를 적셨다.
은밀한 곳에 닿은 손길에 유온은 흠칫 놀라서 입을 다물며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윤서경은 허락하지 않고 유온을 한층 세게 끌어안더니, 입 안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미끈한 살덩어리가 점막에 밀착하며 좁은 입 안을 꽉 채울 듯 집요하게 빨아댔다. 신음과 숨결이 섞인 거친 입맞춤이 오래 이어지며 심장을 더 빨리 달리도록 재촉했다.
윤서경의 손은 힘이 잔뜩 들어간 채 얇은 옷 한 겹을 사이에 두고 아래를 감싸 더듬었다. 제가 들어갈 자리를 가늠하고 확인하는 손길은 러트를 맞은 알파답게 조급하고 사나웠다. 그의 손이 아래를 만지면 만질수록 피부 아래로 물기가 번지듯 간지러워지는 것 같았다.
배 속이 따끈따끈했다. 심장이 뛰며 솟구친 혈류가 뜨거워져갔다. 꽉 다물어져 있는 몸속을 유온은 뒤늦게 자각했다. 제 몸, 납작한 아랫배 뒤쪽으로 그런, 타인의 신체를 받아들이기 위한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윤서경은 축축한 그 길의 입구와 유온의 아랫배를 거푸 더듬었다. 허벅지 아래, 옷에 눌린 채 얼핏 닿는 성기가 벌써 단단했다.
귓가에 내리는 뜨거운 호흡에 몸을 움츠렸던 유온은 아래를 스치는 옷의 감촉에 순간 움찔했다. 저도 모르게 다시 다리를 움직여 보자 역시 아래가 미끌미끌했다. 그곳이 젖어 가는 걸 바로 알지 못했던 유온이 눈을 가늘게 떴다. 윤서경을 바라며 밀부가 젖어 가고 있었다.
젖은 구멍 위로 천이 닿는 느낌이 이상했다. 미끌미끌하고 축축했다. 조금 전까지 평범하게 입고 있던 옷이라 더 부끄럽게 느껴졌다. 윤서경은 이제 옷 위로도 알 수 있을 만큼 젖은 그곳을 손가락과 손바닥으로 질컥질컥 문지르고 비벼 댔다. 천을 잡아당기거나 점막 안까지 닿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세게 누르기도 했다. 그건 유온의 기분을 더더욱 이상해지게 만들었다.
유온은 한 손을 내려 꾸물거리며 바지를 벗으려 했다. 윤서경이 그 손을 잡아 끌어당겨서 아예 자기 목에 감도록 하더니, 직접 옷을 벗겼다. 바지와 속옷이 한꺼번에 떨어지고 하체가 훤히 드러났다.
“아…….”
유온의 작은 신음을 들으며 윤서경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아래쪽을 보았다. 낮게 숨을 몰아쉬는 윤서경의 얼굴에는 열이 가득하지만 그래도 이성이 남아 있었다.
희고 가느다란 허벅지와 무릎을 물끄러미 보던 그가 그 위로 손을 얹어 길게 쓸어 올렸다. 윤서경의 손에 덮일 만큼 가는 허벅지에는 안쪽을 빼면 살이 없는 편이었다. 매력이라곤 없을 그 허벅지를 보이는 게 싫어서 꾸물거리며 다리를 오므렸으나, 윤서경은 유온의 뺨에 입 맞추며 허벅지를 손으로 세게 움켜쥐어 벌렸다. 허벅지 안쪽의 부드러운 살이 거센 아귀힘에 그의 손가락 사이로 동그랗게 올라올 만큼 꽉 쥐어졌다.
씻을 때나 옷을 갈아입을 때 제 손으로 만지면서는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이상한 감각이 내달렸다. 유온이 움츠리자 윤서경은 허벅지를 쥐었던 손을 놓고 그대로 아래로 미끄러뜨려 지금까지 옷 위로만 만지던 음부를 직접 만졌다.
“아…….”
저도 모르게 작은 신음이 샜다. 윤서경의 손가락은 길고, 매끈하고, 끝이 단단했다. 그 손가락이 젖은 채 꽉 다물린 음부를 느릿느릿 더듬어 만졌다. 유온의 머릿속에 윤서경의 손가락 모양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것이 자신의 신체 일부를 더듬고 있다 생각하니 배 속 어딘가가 시큰시큰해지는 것 같았다.
젖은 구멍을 윤서경의 손끝이 갉작갉작, 느리게 어루만졌다. 감질날 정도로 얕은 자극이었다. 러트인 만큼 사실 자신을 그대로 엎드리게 해 짓눌러 놓고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올 때까지 함부로 해댈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윤서경은, 눈빛이나 내뱉는 숨결을 보면 분명 심하게 흥분해 있는데 완전히 이성을 잃지 않았다.
손길은 계속해서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는 깊이까지만 겨우 들어오며, 대체로 그마저도 거의 들어오지 않고 유온의 앞과 뒤쪽을 고루 만져 주며 애무했다.
유온의 눈이 점점 더 열에 젖어 들었다. 연약한 살을 내리 더듬는 자극에 안쪽에선 점점 더 애액이 흘렀고, 습하고 미끌미끌하게 풀어져 갔다. 윤서경은 그대로 유온을 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큰 보폭으로 걸어 침실로 들어간 윤서경은 유온을 너른 침대 한가운데에 눕히고 그대로 그 위에 올라탔다. 안겨 있을 때와 달리 위에서 그가 그림자를 드리우며 내려다보자 위압감이 느껴졌다. 흐트러져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흥분한 눈빛이 형형했다.
주위가 어두운데도 그의 얼굴 윤곽은 뚜렷했다. 발정기에 제 앞에 놓인 오메가를 보는 눈길은 욕구와 욕정으로 넘실거렸다. 무거울 정도로 강렬한 페로몬이 그의 전신에서 쏟아졌다. 속옷조차 입지 않은 채 여과 없이 그에 노출된 유온의 몸도 그의 온도에 맞추어 물이 끓듯 달아올랐다.
유온은 키스로 부은 입술과 젖은 눈을 한 채 윤서경을 보았다. 그게 윤서경의 어떤 심리를 자극했는지, 그는 유온의 한쪽 다리를 붙잡아 들어 올리더니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두 다리가 크게 벌어졌다.
놀란 유온이 몸을 가려 보려 하기도 전에 윤서경은 벌어진 허벅지 안쪽을 손끝으로 죽 쓸며 내려가 구멍 입구까지 가서, 그곳이 얼마나 젖었는지 확인하듯 회음과 입구 근처에 손가락을 짚은 채 벌렸다.
“……아…….”
구멍이 열려 벌어지는 느낌과 함께 입구 근처로 미끄러운 액체가 재차 맺혔다. 윤서경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더니 둥그런 입구 근처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점성이 있는 액체가 그의 손가락에 엉기고 문질러졌다. 유온이 발등으로 침대 시트를 문지르며 신음하자, 그는 가늠하듯 계속 밀부 근처를 꾹꾹 누르고 문지르다가 어느 순간 미끄러지듯 손가락을 안으로 찔러 넣었다.
“아!”
잠깐 사이 꽤 젖었다고 생각했는데도 손가락이 들어오자 아픔이 느껴졌다. 유온은 몸을 굳혔고, 윤서경도 유온의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은 채 잠시 가만히 있었다.
몸속에 타인의 신체 일부가 침입하는 건 기묘한 기분이었다. 만진 적도, 존재를 제대로 인식해 본 적도 없는 곳, 성교를 위한 기관의 내벽을 단단한 손가락이 만지고 있었다. 좋아하는 상대의 손이었다. 그 생각만으로 다시 아래가 축축해졌다.
윤서경은 흘끗 유온의 얼굴을 살피곤 손을 움직였다. 이물이 들어오자 구멍은 더더욱 젖기 시작했다. 안쪽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안아 들듯 올리고 있는 유온의 무릎에 입을 맞추거나, 입술로 쓸거나 하면서 윤서경은 젖은 구멍을 손가락으로 드나들었다.
겨우 한 손가락이 들어오는 것에 익숙해졌을 때 윤서경은 손가락의 개수를 늘렸다.
“으응, 으……, 읏…….”
하나도 간신히 익었고, 두 개로 늘어나면 빠듯할 것 같았는데 안을 밀고 들어온 크기는 그보다 컸다. 윤서경은 둥글게 모은 세 손가락으로 좁은 아래를 벌리며 깊게 들어왔다. 유온은 배를 들듯이 하며 몸을 비틀었다. 헐렁하게 몸에 걸쳐져 있던 티셔츠가 흘러내려 가슴이 드러났다.
배 속이 뻐근했다. 유온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곤 눈을 가늘게 뜬 채 할딱거렸다. 내뱉는 숨이 뜨거웠다. 손가락을 깊게 집어넣은 채 잠시 가만히 있던 윤서경은 유온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가쁘게 내뱉던 숨이 조금 가라앉은 것 같자 손목을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아……! 아아, 응, 으읏……!”
힘 있는 팔이 안으로 거칠게 손가락을 밀어 넣고 빼내며 드나드는 마찰에 점막이 마구 문질러졌다. 안을 긁히면 긁힐수록 배가 자꾸만 뜨끈하게 달아오르고 근질근질해졌다. 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생소한 감각은 무섭기까지 했다. 무엇이라도 붙들고 싶었다. 되는 대로 손을 뻗자 잡힌 건 베개였다. 유온은 그것을 끌어당겨 얼굴에 닿지 않도록 끌어안았다.
그래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구멍은 점점 벌어졌고 안쪽은 민감해졌다. 빠르게 몰아세우는 손길에 숨은 달음박질이라도 친 것처럼 가빴다. 마른 가슴이 확 부풀었다가 꺼지길 반복했다. 애액이 줄줄 흘러서 윤서경의 손가락이 드나들 때마다 찰박거리며 튀었다.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액체가 제 몸에서 나온 게 맞는지 이상할 지경이었다.
“아, 아…….”
언제부터인가 아프다는 생각은 사라졌다. 부드럽게 풀어진 구멍은 알파의 손길에 그저 기뻐하기만 했다. 젖은 내벽을 만지고 입구를 누르며 오가는 손에 머리가 저릿했다. 유온은 베개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너무 크게 튀어 나올 것 같은 신음을 참았다.
윤서경이 갑자기 손을 빼냈다. 안에 잔뜩 고여선 그의 손을 적셔 놓던 애액이 밖으로 확 튀었다. 유온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윤서경이 젖은 손으로 어깨에 걸치고 있던 다리를 쥐어 놓으면서, 침대 위로 유온의 두 다리가 모두 축 늘어졌다. 유온은 허전해진 안쪽을 저도 모르게 조였다. 윤서경의 시선이 오므라드는 구멍에 고정되었다.
여전히, 아니, 조금 전 이상으로 그의 눈은 열에 들떠 있었다. 평소와 달리 전혀 여유가 없는 얼굴에 유온은 가슴이 뛰기까지 했다. 그와 처음으로 보내는 러트였다. 몇 시간, 길면 며칠을 그에게 안겨 있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기쁜 기분으로 물끄러미 윤서경을 올려다보는데, 그가 다시 유온의 몸 위를 덮더니 유온이 안고 있던 베개를 빼앗아 옆으로 던졌다. 유온의 시선이 베개를 따라갔다. 윤서경은 베개 대신 제 몸을 유온에게 안겨 주었다.
유온이 기꺼이 베개 대신 윤서경의 목을 끌어안았을 때 아래에 축축하고 단단한 것이 닿았다. 매끄러운 부분이 구멍 입구의 주름 하나하나를 만지듯 문질러졌다. 귀두와 기둥이 고루 회음부터 구멍과 엉덩이 골, 성기 아래쪽까지 닿았다. 유온은 약간 당황했다. 원래, 원래……, 이렇게…….
아래를 보고 싶었지만 윤서경의 상체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느끼는 것만으로도 안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유온은 무심코 도망치려 몸을 움찔했다. 그게 알파를 자극했다. 윤서경은 유온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허벅지를 꽉 틀어쥐고 성기 끝을 구멍에 누르더니, 그대로 박아 넣었다.
“흐, 으……!”
유온의 눈이 크게 뜨였다. 단번에 긴장한 온몸이 빳빳하게 굳었다가 그대로 격렬하게 떨렸다. 들이켠 숨이 채 내뱉어지지도 않았다. 넣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던 성기는 허벅지 사이가 미끄러워질 정도로 질척하게 흐른 애액과 윤서경의 힘에 쉽게 밀려 들어왔다.
하지만 삽입만 쉬웠을 뿐 충격은 고스란했다. 배가 완전히 윤서경의 것으로 꽉 차 버린 것 같았다. 윤서경과의 체격 차이, 성기의 크기, 삽입한 자세, 살이라곤 없는 유온의 몸 때문에 배에 희미한 굴곡이 생겼다.
“……아, 아…….”
유온은 부들부들 떨며 간신히 신음을 흘렸다. 윤서경이 흥분에 흐려진 얼굴을 한 채 그런 유온을 만족스럽게 내려다보았다. 그 눈길에 긴장이 조금 풀렸다.
아래는 더 벌어질 수 없을 만큼 빠듯하게 열렸고, 입구를 벌린 그 압박감 그대로 명치 언저리까지 성기가 들어차 있었다. 버거운 물체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애액이 계속 흘렀다. 내벽을 적시고 흘러나오는 미끄러운 액체를 윤서경도 민감한 살갗으로 느끼고 있을 것 같았다.
억지로 벌어진 충격에 굳은 듯하던 안쪽의 살이 조금씩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바르르 떨리듯 움직이는 내벽이 윤서경의 성기에 달라붙어 조여들었다. 윤서경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몸을 굽혀 유온에게 입 맞췄다.
그가 몸을 움직이면서 안쪽에서 성기도 위쪽으로 조금 들렸다. 유온이 다시 몸을 떨었다. 연약하게 내뱉은 숨결이 윤서경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윤서경은 그렇게 유온에게 입술을 붙인 채 허리를 쳐올렸다.
“아……!”
입술이 잠시 떨어진 틈이었다. 성기가 반쯤 빠져나갔다가 다시 안을 때리며 들어왔다. 그 잠깐 사이 조밀하게 다물렸던 길이 비틀려 열렸다. 숨을 내쉰 윤서경이 유온의 뺨과 목덜미에서 냄새를 맡다가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체향. 감추지 말고……, 내보내 봐요.”
“읏…….”
유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제야 주위에 자신의 체향이 흐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쏟아진 애액에서 나온 향이었다. 이미 그가 맡았다고 해도, 체향을 억누르는 건 오랜 습관이었고 타인 앞에서, 그것도 윤서경 앞에서 내보내고 싶진 않았다.
거듭 말해도 유온이 듣지 않자 윤서경은 화가 난 것처럼 유온의 두 손목을 붙잡더니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윤서경에 비하여 작은 몸이 마구 흔들렸다.
“……아, 아, 아! 으응, 흑, 아아……!”
아프다고 말할 뻔했지만 그러면 윤서경이 멈출 것 같아서 속으로 넘겼다. 배 속을 얻어맞는 듯했다. 하지만 아픈 것만이 아니라, 무섭게 일어선 성기가 내벽을 때릴 때마다 온몸이 떨렸다.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열락이었다.
“흐, 으응……, 으, 흑! 아!”
점점 생각이 무뎌졌다. 쾌락에 절어 머리가 마비되어 가는 것 같았다. 아래는 철벅거릴 정도로 젖었고 애액이 허리를 타고 뚝뚝 떨어졌다. 윤서경이 잠깐이라도 나갈 때마다 배 속이 근질거리다가, 안을 세게 문질러 주면 해소되었다. 격렬한 감각에 온몸에 땀이 솟았다. 새빨개진 얼굴로 눈물을 흘리던 유온은 견디지 못하고 억제하던 체향을 확 흘렸다.
한순간 윤서경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는 살이 맞닿을 만큼 유온의 안에 성기를 바짝 밀어 넣은 채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체향을 느끼는 것 같았다. 얼른 다시 거두려 했으나, 윤서경은 팔을 뻗어 유온의 몸을 와락 껴안고 뺨과 귓가에 비비듯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대로 있어요.”
“……읏, 하지만……, 맡기 싫으실, 텐데…….”
“왜요?”
유온은 배가 아픈 듯, 저린 듯, 이상한 감각 속에서 대답했다.
“이상하다고 했는데…….”
그러자 입맞춤이 멈췄다.
“누가?”
“…….”
“누가 너한테 그런 말을 했어?”
낮고 갈라진 목소리였다.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이 그대로 머리채를 잡아챌 거라 생각하고 유온은 눈을 감았다. 하지만 윤서경은 유온의 머리를 살살 쓸어내렸다.
“그대로 있어요. 거두면 나도 거둘 거니까.”
“…….”
유온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윤서경이 다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소강되는가 싶던 열이 곧바로 올라왔다.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윤서경의 손이 몇 번쯤 묽은 액체를 쏟은 유온의 성기로 향했다.
“아……! 흐윽, 아, 안 돼…….”
양쪽으로 밀려드는 쾌감이 버거웠다. 그의 손이 감싸고 몇 번 쓸어주며 안쪽을 함께 찌른 것만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비더니 정액이 쏟아졌다. 한 차례 절정을 겪었으나 갈증은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 윤서경은 그런 유온의 상태를 안다는 듯이 계속해서, 지금까지보다 빠르게 하반신을 밀치듯 쳐올렸다.
“아, 아……, 아, 으, 응……!”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사정했는데, 몸속에 고인 무언가가 해소되지 않은 기분이었다. 유온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윤서경에게 매달렸다. 그는 유온을 안은 채로 점점 더 빠르게 움직였다. 안쪽은 이미 잔뜩 부었고, 짓누를 때마다 유온의 입에서 비명을 끌어냈다.
그러던 순간 갑자기 온몸이 서늘해지듯 이상한 느낌이 퍼졌다. 배가 빳빳해지고 현기증이 일었다. 이어, 파도처럼 격렬한 감각이 덮쳐들었다.
“흐으윽……! 아, 아……, 아…….”
멍한 신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희게 무언가가 번쩍거렸다. 사정과는 완전히 다른, 알파와의 섹스로 인한 절정이었다. 안에서 애액과 다른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미끈거리는 물이 꽉 조인 내벽과 성기의 틈새를 조금씩 적셨다. 유온은 정신없이 떨며 여파가 다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윤서경 또한 덜덜 떠는 유온을 몰아세우지 않았다. 그는 가쁜 숨을 쉬며 유온을 지켜보다가, 떨림이 조금 가라앉나 싶으니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기가 다시 안을 찌르고 들어왔을 때도 유온의 몸은 아직 들떠 있었다. 그 몸에 다시 새로운 자극이 찾아오니 도망치고 싶었다. 또다시 침대를 짚으며 몸을 빼려 하다가 윤서경에게 붙들렸다.
“왜 자꾸 도망가.”
“아……, 아, 아, 잠깐, 잠깐, 서경 씨, 잠시만……!”
유온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괴롭기까지 한 쾌감 속에서 유온은 마구 버둥거렸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물이 떨어졌다. 숨결이 잔뜩 섞이고 드문드문 끊어지는 긴 비명이 새어 나왔다.
그때 윤서경이 유온의 두 다리를 벌려 허벅지에 얹으며 상체를 가까이했다. 그도 사정하면 끝날 거라는 생각에 숨을 몰아쉬며 올려다보는데, 안쪽의 느낌이 묘했다. 할딱거리며 윤서경을 보던 유온의 눈이 커졌다. 안에서 윤서경의 성기가 느릿하게 부풀고 있었다.
“으, 응, 아, 안 돼……, 아……, 읏……!”
그러나 노팅을 시작한 알파는 제정신이 아니었고 유온이 버둥대다 못해 팔뚝을 손톱으로 긁어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렇게 안에서 성기가 커지다간 배를 비집고 나와 버릴 것 같았다. 윤서경의 단단한 허벅지 위에 올라간 다리가 맥없이 미끄러져 더욱 벌어졌다.
유온이 겁을 먹기 시작했을 때, 또다시 새로운 감각이 찾아들었다. 절정과는 달랐다. 애액이 안을 흠뻑 적시며 쏟아지고 온몸이 풀어졌다. 노팅을 받아들이기 위한 반응이었다. 전신을 고양시키는 감각에 유온은 눈을 가늘게 뜨며 신음했다. 이제는 안에서 성기가 커지면 커질수록 짜릿하고 달콤한 쾌감만 퍼졌다.
“하아, 아……, 아…….”
피부 여기저기가 따끔따끔 저렸다. 윤서경이 손을 뻗어 유온의 뺨을 감쌌다. 자신을 안는 알파의 손길에 유온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기댔다. 입술이 내려왔다. 잔뜩 붓고 젖은 입술로 키스를 나누며 두 사람은 같은 쾌감 속에 빠져들었다. 몸속에서 성기가 완전히 부풀고, 얼마 후 안으로 배가 불러질 만큼 많은 양의 정액을 쏟아냈다.
정액은 대부분 몸속 어딘가로 흘러 들어갔다. 원래 크기로 돌아온 성기를 천천히 움직이던 윤서경이 안에서 빠져나갔다. 빠끔 벌어진 구멍에서 흘러들지 않고 남은 정액이 뭉클거리며 흘러나왔다.
지친 입술 사이에서 색색거리는 숨이 샜다. 유온은 거의 풀린 눈으로 멍하니 윤서경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 * *
유온은 고요함에 눈을 떴다. 소란이 아니라 정적에 깨어나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몸을 일으켰을 때, 왜 잠이 깬 건지 알 수 있었다. 넓은 창밖으로 희끗희끗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눈이고 함박눈이었다.
창가로 다가가기 위해 일어나는데 온몸이 저릿했다. 유온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평소 자신이 머무는 방이 아니라, 윤서경의 침실이었다. 왜 여기에 있으며 몸이 아픈 건지 생각하다 잠들기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유온은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섹스를 한 흔적은 남아 있지만 어디 하나 지저분한 곳 없이 깨끗했다. 시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적셔 놨는데.
부끄러운 생각을 밀어내며 유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가로 다가가자 내리는 눈이 더 잘 보였다. 어두운 하늘에서 떨어진 눈은 멀리 땅 위에 쌓였다. 이따금 우산을 쓴 사람들이 조그마하게 지나갔다.
왜 눈이 내리면 이렇게 조용해질까. 물끄러미 창밖을 보던 유온은 어둠 속에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다행히도 옷을 입고 있다. 유온은 그대로 슬리퍼도 신지 않은 채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은 불이 켜지지 않았는지 어두웠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눈에 비친 희부연 빛이 유일한 조명이었다. 그 차가운 어둠 속에 윤서경이 서 있었다.
유온은 고개를 갸웃했다.
윤서경의 분위기는 이상했다. 눈은 멍했고, 뺨은 굳어 있었고, 입술은 꽉 다물린 채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면서도 다 녹지 않은 눈송이가 검은 코트에 묻어 있었다. 차디찬 바람이 그의 몸에 배어 무척 추워 보였다. 또한 지칠 대로 지친 듯, 피로와 무력함이 역력했다.
그는 꼭…… 먼 길을 돌아온 사람 같았다.
유온이 그를 부르려 막 입을 열었을 때, 그가 먼저 말했다.
“……미안합니다, 이유온 씨.”
“서경 씨……?”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