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롤로그(1권) (1/18)

0

“그걸 내가 알아야 합니까?”

유온은 차가운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남자의 이름은 윤서경. 유온의 배우자였고, 유온을 매우 싫어했다.

예상은 했지만 매몰찬 대답이었다. 그래도 관심을 가져 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유온은 이렇게 말했다. 저기, 저 오늘 병원에 다녀왔어요. 의사가 그러는데…….

채 끝맺지도 못했다.

“……방해해서 미안해요…….”

우물쭈물 겨우 내뱉은 유온은 윤서경의 시선을 피해 도망치듯 그의 서재를 빠져나왔다. 문을 닫을 때 윤서경이 다시 통화를 재개하는 소리가 들렸다. 제 방으로 돌아온 유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까지고 숨길 순 없었다. 하지만 더 말하기엔 저 싸늘한 태도가 너무 무서웠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그도 알게 될 것이다.

발작을 해서 병원에 실려 가거나, 죽게 된다면. 그러면 의사가 유온이 죽은 원인을 알릴 테니까. 발견이 너무 늦어진 병이 있었는데 현대의학으로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고.

유온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실은 자신도 아직 얼떨떨했다. 앞으로 살날이 몇 달도 남지 않았다니 남의 이야기 같았다. 의사는 운이 안 좋으면 당장 며칠 후에도 죽을 수 있으니 연명 치료라도 시작하자고 했다.

‘그걸 하면 살 수 있나요?’

‘하루라도 더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몇 달, 어쩌면 며칠이나마 목숨을 부지하자는 뜻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벌어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어차피 이 병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고 해체할 방법은 없다. 하루하루 더 사는 건 회복에 대한 희망을 품는 것 같아서 싫었다.

어느새 웅크린 몸이 스스로 느끼기에도 차가웠다.

윤서경과 결혼한 지 3년이 지났다. 3년 동안 유온은 결혼식에서 서약할 때 말고는 그와 손 한 번 잡아 본 적 없었다. 그는 유온과 아이를 낳는 건 고사하고, 유온의 얼굴을 보는 것도 싫어했다.

그래도 만약 그가 허락한다면 언젠가 아이를 낳고 싶었다. 평범한 가족이 되고 싶었다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아이를 가지고, 낳고, 기르는. 그게 너무 큰 꿈이라면 최소한 그와 집 안에서 대화라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유온의 바람은 언제나 이루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바람을 이룰 수 있을 만큼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런 주제에 욕심은 많아서 윤서경과 결혼했다.

하지만 윤서경은 이제 유온이 자신의 영역 근처에만 와도 불편한 기색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러트가 되면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어디에서 그것을 풀고 있는지 유온으로선 알 방법이 없었다.

외로웠다. 사랑받은 적도, 좋았던 일도, 이젠 앞으로 살날도 없다.

‘진짜 나한텐 아무것도 없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슬픔이 와르르 밀려왔다. 참고 삼키려 애썼다. 분명 이 감정은 막대하다. 느끼기 시작하면 눈을 빛내며 자신을 완전히 잡아먹겠지. 매몰은 순식간일 것이다.

유온은 시큰해지는 가슴을, 그렇게 하면 달랠 수 있다는 듯 손으로 눌렀다. 과거 모든 슬픔에 그렇게 대처했듯이.

이번에도 그런 것이라 생각하고 눈을 감은 채 감정의 파도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려 했다. 하지만 파도는 아무리 지나도 물러가지 않았다. 눈을 반짝 뜬 유온은 예감했다. 이건 지나가 버릴 파도가 아니라 거대한 해일이었다.

해일은 순식간에 닥쳐와 유온의 나약한 몸과 정신을 휘몰았다.

망망대해로 끌려가 검은 해수면 위를 표류하며 잠깐씩 정신이 들었다. 의사가 말한 발작은 빨리도 찾아왔다. 당장 내일이라도, 라고 했지만 정말로 당장이 될 줄은 몰랐다.

어쩔 수 없었다. 이 병은 슬픔이 원인이었고 슬픔으로 발작하니까. 윤서경의 그 한 마디는 충분히 유온을 상처 입혔다.

몸이 앞으로 쓰러졌다. 쿵,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리가 들리고,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 다급하게 외치고 뛰어다니는 소리가 먹먹하게 뒤엉켜 울렸다.

숨을 쉬기 어려운가 싶었는데 가슴에 차갑고 단단한 뭔가가 달라붙더니 몸을 내리치듯 흔들었다.

온몸에 격렬한 통증이 닥쳤다. 늑골이 조각조각 갈라지는 듯했다. 단단한 기계가 쿵, 쿵, 하고 가슴을 거세게 때렸고 그때마다 몸이 딸려 올라갔다가 힘없이 떨어졌다. 그게 몇 번 계속되었지만 변화는 없었다. 심장이 멎어 박동을 되찾아 오려 한다는 걸 어렴풋이 알았다.

그러나 결국 머리맡의 기계는 선고를 내렸다. 살아 있음을 상징하는 녹색의 곡선이 가라앉아 직선이 되었다. 삐이이……, 모든 게 끝났음을 알리는 음울한 소리가 울렸다.

눈을 깜빡이고 싶은데 몸의 어디도 움직이지 않았다. 몸은 죽었지만 영혼의 일부가 아직 조금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윤서경이 보였다. 그는 이상한 표정이었다. 신기했다. 늘 그렇듯 차갑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 꽃을 주문해 뒀었는데, 찾아오는 걸 잊었네.

시간이 지나도 찾으러 오지 않으면 버려지겠지. 아쉬웠다. 그래도 결혼기념일이라고 준비한 선물이었다. 윤서경이 꽃을 좋아하니까.

어쩌면 그런 꽃을 주려 한 것부터 욕심이었는지도 모르고…….

이어 눈앞이 검게 가라앉았다.

한 번도 행복해 본 적 없는 이유온의 죽음이었다.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