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PARIS ■ (31/31)

■ PARIS ■

공동 작업은 일종의 릴레이 형식으로 진행됐다.

서로 아무런 사전 계획을 세우지 않은 상태에서 먼저 캔버스를 마주했던 이현은 페인팅용 나이프를 사용해 거친 질감을 살려 캔버스 전체에 짙푸른 이미지를 입혔고, 그 후 벤이 그래픽 작업으로 효과를 준 밤하늘의 구름 사진을 콜라주처럼 배치했다. 처음부터 구체적인 주제를 합의하고 시작한 것처럼, 쪽빛의 심해와 야공(夜空)은 조화롭게 어울려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것을 다시 이어받은 이현은 사진과 배경의 연결 부위를 덧칠하고, 젯소와 물감을 이용해 입체적인 구름을 그려 넣기도 하며 배경과 사진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 가는 작업 중이었다.

벤의 사진은 전용 캔버스에 UV 평판 출력으로 인쇄했기 때문에 그 위에 유화 작업을 하는 것도 가능했다. 아마도 자신이 직접 체험해 본 가장 현대적 미술 기법일 거란 생각에 이현은 혼자 피식거렸다.

그림을 다시 시작하기로 조심스럽게 마음먹었을 때만 해도, 타인과의 공동 작업, 그것도 다른 장르와의 혼합 작업에 대해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정말로 다시 그릴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조차도 없었으니까.

「체인징을 알기 전에도 너, 네가 파리에 가야 한다는 거, 알고 있었잖아.」

동해의 비 내리던 해변, 자동차 안에서 라우가 했던 말은 옳았다. 물리적으로 멀어지는 것이 두려워 그가 제공해 준 테두리 안에서 안주하며 스스로 얻은 기회를 포기해서는 안 됐다. 무의식에서는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논을 하더라도 마음은 바뀌지 않을 거란 핑계로 ‘더 핸즈’의 제안을 그에게 얘기하지 않았던 거겠지.

처음 해 본 사랑의 품은 안락했었다.

라우의 무조건적인 포용과 이해 속에서 과거를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인생의 경험과 그 경험을 통해 검증된 확신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의 보호는 비슷한 또래들과 나누는 유대감과는 다른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약간은 막무가내식으로 그가 밀어붙이지 않았더라면, 당시의 자신은 다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염두에도 두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잘못이 아닌 과거는 그에게서 보상받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하려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잠시 붓질을 멈추고 허리를 편 이현은 출입문 옆쪽의 테이블 앞으로 걸어갔다. 작업실 내에 마련되어 있는 블루투스 스피커를 통해 재생하고 있었던 음악의 볼륨을 조금 높이고 잠시 스트레칭을 하며 식어 버린 커피를 마셨다.

넓게 탁 트인 ㄴ자 구조의 공동 작업실에는 조소 작업 중인 한 명을 제외하고는 이현뿐이었다. 발소리도, 도구를 내려놓고 들어 올리는 작은 소음도 없이 고요한 공간 속에는 음악 소리뿐이었다. 이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코너 저편에서 작업 중이었던 동료는 도중에 방으로 돌아갔는지도 모르겠다.

커피는 이미 식어 있었지만, 이현은 거기에서 온기가 전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머그를 감싸며 좀 전까지 작업 중이던 작품을 돌아봤다.

가로 250센티미터, 세로 180센티미터의 캔버스는 아직 이현이 다뤄 본 적 없는 대형 사이즈였다. 하지만 정밀하게 묘사하는 방식의 작업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이즈에 비해 캔버스를 채우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평소 혼자 작업하던 방식대로 이 정도 사이즈를 감당하려면 정신적, 육체적으로도 상당한 집중과 소모가 필요할 것이다. 넓은 면 위를 나이프로 과감하게 채워 가는 경험도 새로웠지만,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재검토하는 데에도 이번 작업은 꽤 도움이 되었다. 체력도 더 기르고 싶었고, 색의 배합에 대해서도 더 심층적인 공부가 필요했다.

아직은 고정된 스타일을 갖기보다 그림 속에 자연스럽게 자신의 변화를 반영하고 싶었다. 그것이 평론가들에게서 고유한 스타일을 보여 주지 못하는 아마추어라는 비평을 끌어내더라도 말이다(실제로 그런 시각에서 이현을 탐탁지 않게 바라보는 평론가들이 꽤 있었다).

뭔가를 전하려 하거나 의미를 이식하려 하지 말고, 순간순간 렌즈와 붓이 유도하는 리듬에만 집중하자는 것이 이번 작업을 두고 벤과 이현이 정한 유일한 규칙이었다.

작품을 어떻게 채워 가겠다는 의도나 설계를 버리고 손끝의 감각에만 의지하는 것은 이전의, ‘더 핸즈’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무렵의 이현에게는 불가능한 방식이었다. 그때는 사전에 치밀하게 구상하고 오차 없이 구상대로 표현하는 것만이 미술에 대한 예의이자 성실함, 진지함이라고 여겼었다. 동료들의 말에 의하면 수도승처럼 엄격했던 시기였다.

이런 식으로 현재의 자신을 의심 없이 자연스럽게 캔버스 위에 옮겨 내는 작업이 가능해진 결정적인 전환점을 이현은 기억하고 있었다.

운동선수가 날씨나 컨디션에 관계없이 매일 같은 시간에 트레이닝에 임하듯 그날도 이현은 평소와 다름없는 시간에 작업실로 내려왔었다. 특별한 계획이 설 때까지 드로잉이든 채색이든 습작을 계속하는 루틴대로 캔버스를 골라 이젤 앞에 앉았었다. 그저 손이나 풀자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캔버스의 크기, 랩을 씌운 나무 팔레트 위에서의 색 조합, 적합한 기법의 선택. 무엇 하나 힘들여 고민하지 않고 완벽한 계획을 따라 움직이듯 거침이 없었다. 표현하고자 하는 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무용수가 된 것 같았고, 목소리를 악기처럼 다룰 수 있는 가수가 된 것 같기도 했다.

모든 금기와 학습된 사회화의 틀을 깨고 해방과 자유마저 느꼈던 라우와의 섹스처럼, 바로 그 순간의 현재와 자기 자신에게만 충실한 몰입감 속에서 그려 낸 것이 <컬러풀 고스트>였다.

그리고 그것을 그리는 동안, 그를 다시 마주할 때임을, 자신이 그것을 원하고 있음을 알았다.

허기와 수면욕을 깨닫는 데에 특별한 각성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꽃눈이 성숙해진 장미의 봉오리가 개화하는 데에 어떠한 강제적인 힘도 필요치 않은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선택에 대한 어떤 의심도 남지 않았던, 찌꺼기가 깨끗이 정화된 듯했던 당시의 개운함이 머리가 아닌 몸에, 손바닥과 뺨과 입술에, 좀 더 깊은 안쪽에 남아 있었다. 일시적인 현상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이루는 일부가 된 경험이었던 것이다.

이현은 머그를 내려놓은 뒤 다시 붓을 쥐고 캔버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주한의 오피스텔에서 처음 소개받았던 제프 벡의 앨범이 한 바퀴 더 재생될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완전히 붓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집중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는 아득히 멀어졌던 음악 소리가 서서히 귀에 들어왔다. 마지막 트랙인 의 도입부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이 우연을 라우에게 전화로 얘기해 주면서, 이현은 너무 흥분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었다).

그 뒤 30분 정도 뒷정리까지 마친 뒤에야 이현은 2층의 공동 작업실을 나섰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저녁까지 거르고 마무리에 매달린 탓에 꼬박 일곱 시간 만의 탈출이었다. 동료들 중에는 소위 느낌이 왔을 때는 스무 시간씩 작업실에 틀어박히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지만, 이현에게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작업 시간을 의식하고 나서인지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서이현.”

3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에 막 발을 디디려던 이현은 난간을 쥔 채 아래쪽 계단참을 내려다봤다. 청바지에 도톰한 체크무늬 재킷을 걸친 편안한 차림의 유니가 작은 꽃다발을 들고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데이트 후에 막 귀가하는 길인 듯했다.

“웬일이야? 이렇게 늦게까지 작업실에 있었어?”

“응. 벤하고 공동 작업, 오늘 끝냈거든.”

손에 든 꽃을 내려다보자 유니는 선심을 쓰듯 향기를 맡아 보라며 이현에게로 다발을 내밀었다.

바랜 듯한 분홍빛의 자나 장미. 라우가 청혼했을 때 테라스를 장식하고 있던 꽃이었다.

포장이라고 할 것도 없이 OPP 비닐을 둘둘 말아 잘려 나간 줄기의 아래를 리본으로 묶은 것이 전부인 소박한 꽃다발을 향해 이현은 얼굴을 숙였다.

데이트 도중 지하철 역내의 꽃집 앞을 지나갈 때, 문 닫기 전 막판 세일로 판매하고 있던 것을 보고 미셸이 사 주었다고 설명하는 유니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향기 좋다.”

“그치? 이 꽃, 말린 후에도 색이 예쁘다고 해서 한번 잘 말려 보려고.”

마지막까지 팔리지 않고 남아 있었던 꽃은 벌써 겉이 약간 시들어 있었지만, 안쪽은 여전히 싱싱했다. 보드라운 꽃잎을 조심스럽게 만지는 유니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이현은 어쩔 수 없이 라우를 떠올렸다. 그를 연상하게 하는 계기는 다양했지만 이렇게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무방비 상태로 마주하게 될 때면, 그리움을 수습하는 데에 상당히 애를 먹어야 했다.

“너 근데… 혹시 열 있어? 얼굴도 좀 붉고, 눈이 몽롱한데?”

“음? 잘 모르겠는데? 그냥 졸려서 그런 거 아닌가.”

눈꺼풀을 비비는 이현의 손을 끌어내린 유니는 그의 앞머리를 들어 올리고 이마에 손을 짚었다.

“열 있네. 꽤 높은 것 같은데 몰랐어? 작업 무리하게 했나 보다.”

“오늘 마무리해야 전시 일정에 차질이 없으니까.”

“그래도 하루 정도는 어떻게 될 텐데, 성실하기는. 그럼 이제부터는 푹 쉴 수 있는 거지?”

“응, 오늘 약 먹고 푹 자면 괜찮겠지. 그러니까, 누나….”

“응?”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난간을 문지르고 있는 이현을 보고 있던 유니가 알 것 같다는 듯 코를 찡긋거리며 어깨를 툭 두드렸다.

“알았어, 대표님한테는 비밀로 할게.”

“별거 아니고 그냥 열이 좀 나는 건데, 직접 보지 못하니까 괜히 더 걱정하거든….”

유난스러운 연애를 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 열심히 변명했지만, 유니는 특별히 놀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 역시 꽤 티를 내는 연애 중이라 관대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열이 있다는 말을 들어서일까. 방으로 돌아와 곧장 씻고 나와 보니 몸살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약을 챙기기도 귀찮을 만큼 빨리 침대 속으로 들어가 눕고 싶은 마음뿐이었지만, 애태우며 걱정할 사람을 생각해서라도 자기 관리를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싱크대 위 선반의 상비약 케이스에서 종합감기약을 꺼내 작은 종이상자의 겉면에 권장된 대로 두 알을 삼켰다. 허리와 다리에 힘이 쭉 빠지는 탈력감에 침대에 앉자마자 상체를 젖혀 털썩 드러누웠다.

“…….”

다리를 침대 아래로 늘어뜨린 채 침대의 중간쯤을 가로지르며 누운 이현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메신저 앱을 실행시켜 오늘 라우와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되짚으며 거슬러 올라갔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보고나 실없고 때로는 유치하기까지 한 대화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하루의 끝에 더듬어 보고 있자면 웃음이 났다. 그와 연애를, 그것도 애틋한 장거리 연애를 하고 있다는 실감이 대화창 안에서 차곡차곡 쌓여 가고 있었다.

서울은 이른 아침이었다. 팬텀이 정상 영업 중이었다면 라우가 한창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을 시간이지만, 아마 지금은 느지막이 잠에서 깨어나 막 하루를 시작하려 하고 있을 것이다.

아직 잠과 현실의 경계에서 뒤척이고 있다면 일부러 깨우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현은 잠깐 망설인 끝에 통화 아이콘을 터치했다.

[작업 끝난 건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연결되는 통화에 누운 채 손등으로 눈을 가리며 소리 없이 웃었다. 목소리가 완전히 풀려 있는 것으로 봐서는 다행히 깨어난 직후는 아닌 듯했다.

“네. 지금 방이에요.”

[목이… 잠긴 것 같은데.]

“어… 피곤해서 그런가 봐요. 오늘 평소보다 작업 시간이 좀 길긴 했거든요.”

[그럼 얼른 푹 자야겠네.]

“네, 졸려요. 음… 되게 오래 잘지도 모르겠어요.”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느릿하게 말했다.

[연락 없어도 걱정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충분히 자요.]

걱정할까 봐 걱정하지 말라는 그의 말이 재미있어서 허리를 틀어 모로 누우며 힘없이 웃었다. 그는 자신을 배려해 어서 자라고 권했지만, 통화를 끝내기가 아쉬웠다.

“뭐 하고 있었어요?”

무성의해 보이거나 형식적일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대상이라면 관심의 표현이 되는 질문이기도 했다.

해괴한 꿈을 꾼 탓에 평소보다 조금 일찍 하루를 시작했고, 기분 전환을 하기 위해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를 직접 만들고 거기에 팬케이크까지 두 장 구워 막 접시를 비운 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며, 라우는 아주 상세한 보고를 해 주었다.

직접 만든 요리로 아침 식사를 한 것에 대해 칭찬을 바라는 눈치였기 때문에 이현은 잘했다고 몇 마디 칭찬을 해 주었다. 이런 식으로 나이 차가 무의미해지면서 연장자와 연하로서의 고정적 역할이 바뀌는 순간 역시 연애를 하고 있다는 실감의 일부였다.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인 라우와 그런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자신의 모습이 상상돼서, 이현은 그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소리를 죽이며 웃었다.

“대표님이 구워 준 팬케이크 맛있었는데.”

[이번에 만나면 몇 장이든 구워 줄게.]

“빨리 보고 싶어요.”

[…….]

잠시 말이 없었던 전화기 건너편에서 점잖게 달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루만 더 참으면 모레는 만날 수 있으니까.]

보고 싶다는 라우의 말을 이런 식으로 넘기는 건 항상 자기 쪽이었기 때문에 웃음이 났다. 침대 위로 다리를 끌어 올린 이현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눈꺼풀이 가물거렸지만, 목소리를 더 듣고 싶었다. 마음까지 덩달아 약해진 건지, 답지 않게 그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생각마저 일었다. 하지만 통화가 길어지면 몸 상태를 그에게 들킬 것 같았다. 하루를 시작하려는 그에게 걱정거리를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모레에는 그가 이쪽에 도착할 테니 그때까지 컨디션을 회복하는 데에만 신경 쓰면 조금 아팠던 것쯤은 들키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 잘게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잘 자. 내 꿈 꿔.]

일부러 느끼하게 목소리를 까는 라우의 장난에 마지막까지 웃으며 통화를 끝냈다.

아침이 시작되는 서울과 달리 깊은 밤인 이곳은 고요하기만 했다. 아파트 안도 창밖의 골목도 조용했다.

정적 속에서 몽롱해지며 매트리스 깊숙이 몸이 꺼지는 기분은 불쾌하지만은 않았다. 페로몬에 빠져드는 순간과 약간 비슷하기도 했다. 당장이라도 잠이 들 것 같았는데, 왠지 속이 어수선했다. 어깨 위로 이불을 끌어 올리고 눈을 감고 있던 이현은 머리맡 선반으로 팔을 뻗었다.

최근 읽고 있는 몇 권의 책과 지갑, 손목시계, 열쇠 같은 매일 사용하는 소지품들, 수키킴에게 받았던 그림이 든 액자 옆에 나란히 놓인 검은색 가죽 케이스를 집어 다시 몸을 눕혔다.

영상 통화를 할 때 그의 왼손이 슬쩍슬쩍 화면에 잡힐 때마다 반지에 시선이 갔다. 그에게 얘기한 적은 없지만, 길고 곧은 손가락에서 빛나는 반지를 볼 때면 있는지도 몰랐던 독점욕과 소유욕이 충족되는 야릇한 만족감을 느꼈다.

아니, 그를 향한 이상 욕구에 대해서는 이전에도 잠깐씩 인지하고 있었다. 단지, 요구하거나 강요할 필요도 없이 그가 먼저 충분할 정도로 채워 주고 있었기에 드러낼 기회가 없었을 뿐.

어쩌면 라우와 자신은 이제야 정식으로 연애를 시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감정의 깊이가 시작 단계라는 뜻은 아니다.

내면에서 무르익은 사랑과, 그 사랑을 표현하고 교환하는 방식인 연애의 영역은 언뜻 일치하는 것 같으면서도 별개로 작용할 수가 있었다. 서로의 존재는 이미 삶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지만, 그와의 연애 형식은 이제 막 시작한 연인들과 비슷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무서운 속도로 상대에게 집중하느라 그 외 모든 것을 탈락시켜 버리는 그런 불균형이 아닌, 단계를 전부 뛰어넘어 상대와 곧장 깊숙하게 연결되고 싶은 욕구에만 매달리는 맹목적 초조함이 아닌… 아무것도 아닌 일상의 작은 부분까지 알고 싶어 하고, 조심스럽게 질투를 내비치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독점욕만을 충족시키려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충실한 이해자가 되기 위해 기꺼이 스스로를 검열하고 억제하는… 이번에는 그런 연애를 하고 있었다.

라우는 더 자주 이곳에 오고 싶어 했었다. 앞으로는 이 관계 때문에 생활이나 삶을 허물지 말자고, 한 달에 한 번으로 그의 방문을 제한한 것은 이현 자신이었다. 대체적으로는 버틸 만했고, 가끔은 아주 힘들었다.

「아무 때나 불쑥 변덕처럼 보고 싶다고 해도 바로 달려갈게.」

한 달에 한 번이라는, 스스로 정한 규칙을 무시하고 예전의 그 약속을 핑계 삼아 그를 소환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 와 줬으면 좋겠다고 말만 하면 당장 날아올 것을 알아서 더 유혹적이었다. 이곳에서의 생활을 이전보다 더 생기 있게 만들어 주는 것도 라우와의 관계였지만, 더 진한 외로움을 느끼는 이유도 이곳에 그가 없다는 헛헛함 때문이었다. 만질 수 없고 안을 수 없다는 물리적 고통은 어떤 면에서는 관념보다 훨씬 더 독하고 선명했다.

실은 그에게 얘기해 주는 것보다 더 자주 그의 꿈을 꾸었다. 가끔 이 방에서 혼자 상자 속의 반지를 물끄러미 들여다보곤 한다는 것도 그에게는 얘기할 수 없었다.

케이스의 뚜껑을 닫은 이현은 그것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 두지도 못한 채 잠 속으로 노곤하게 빨려 들어갔다. 내 꿈을 꾸라는 그의 인사는 웃음을 주기 위한 농담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그 인사가 주문이 되어 줬으면 했다.

■ ■ ■

사흘 후면 피렌체로 떠난다. 한 달쯤 신중하게 얘기가 오간 끝에 2주일 전에 결정되었다. 집안에서는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된 피렌체가 활기 넘치는 도시일 거라며, 내가 휴가를 위한 여행이라도 떠나는 것처럼 일부러 들뜬 분위기를 만들고 있지만, 영국의 저택 내 정원의 호수 곁 테이블에서 티타임을 가지며, 바다 건너 들려오는 소식, 그것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좋을 대로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소식들에만 의존하고 있는 그들은 변화의 실체를 전혀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

도구로 취급되어 기차와 마차에 짐짝처럼 실려 오갈 뿐이더라도 유럽 본토에서 내가 피부로 느끼고 있는 정세의 감각을 이제 그들은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

이탈리아 통일은 안정기에 접어들지 못했고, 남부 지역에 대한 착취로 인해 곳곳에서 도시 경제가 침체되면서 불만과 원성이 쌓여 가고 있다. 피렌체뿐만이 아니라 현재 유럽에서 안전한 도시란 없다고 봐야 한다.

유럽 전체에서 교섭과 결렬, 전쟁이 끊이지 않으며 불안감이 조성되고, 그와는 별개로 묘한 흥분과 기대감이 사람들 사이를 떠돌며 공기를 술렁이게 한다.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꿔 버릴 거대한 변화가 닥쳐오리라는 예감에 떨면서도 한편으로 사람들은, 피지배 계층들은 은밀한 내면에서는 그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변하고 있다. 나와 우리 일족, 자신들의 권위와 재산을 유지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귀족들을 제외하고 세계 전체가 변화의 물결에 뛰어들 준비와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 역시 가만히 입을 다물고 그들의 손에 내 모가지를 쥐여 주지는 않을 것이다.

에리히의 주인 가문이 저택을 버리고, 안주인의 본가가 있는 보헤미아 왕국 쪽으로 도주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워낙 먼 곳에서 수집한 정보이기 때문에 확실치 않기도 했지만, 긴박한 상황에 50여 명에 달하는 하인들을 그대로 대동한 채 움직이지는 못했을 확률이 높았다. 대다수 하인들에게 몇 푼씩 쥐여 주고는 독립시켜 도주의 규모를 축소했을 것이다.

에리히라면, 먹고 자는 문제를 직접 해결해야 하더라도 기회가 주어졌을 때 서슴없이 자유를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리에서 빠져나온 그가 어디로 향했을지 알 수 없다. 혹시 그 역시도 내 소식을 수소문하고 있지는 않을까.

정보를 손에 넣기 위해 큰돈을 지불할 수는 없어도 거리의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정보는 때로 귀족들이 돈을 들이는 정보보다 더 빠르고 현실과 밀착돼 있고 쓸모 있었다.

만약 그가 나의 이번 여행에 대해 들었다면, 혹시 우리가 피렌체에서 만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의 주인가(家)의 소식을 알고 나니 그런 기대를 억누르기가 어렵다.

그러나 다시 만나는 것만이 사랑의 완성은 아닐 것이다. 함께 있지 못한다 해서 그를 향한 사랑을 중단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나누었던 시간이 인생 전체로 보자면 순간에 불과할 뿐이더라도, 그가 나의 평생의 사랑임을 깨닫기 위해 평생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

그 찰나의 만남만으로도 그가 나와 내 삶을 얼마나 바꾸었는지. 돌 속에 피가 돌게 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변화를 일으킨 사랑이다. 단지 시간을 문제 삼아 한때의 열병으로 취급할 수는 없다.

계획이 실패할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지금껏 왜 이런 결심을 하지 못하고 우울한 피해자 행세를 하며 끌려다녔는지 스스로가 한심할 만큼, 이미 마음은 편안하고 결심은 깨끗하다.

더 이상 그들이 나의 인간다움을 훼손하고 착취하도록 방관하지 않겠다. 운명을 개척하는 영웅이 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뒤집어 바꿀 수 없다면, 베어서 끊어 내는 절단을 통해서라도 이 순환을 멈추게 할 것이다.

피렌체에서는 오스트리아와 관련된 좀 더 정확한 소식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돈을 받고 에리히의 행방을 알아봐 줄 사람을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히려 이제 나는 2주의 시간이 빨리 흐르기만을 바랄 정도다.

어디에 있든 살아만 있으라고, 에리히가 나에게 외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가 나의 생존을 바란다면 악착같이 살아남겠다. 그러나 이제는 체념이 아닌 선택으로, 기회를 노리는 전략으로서 그렇게 하겠다.

그의 향기는 전혀 희미해지지 않고 있다. 그를 갈구하는 피의 뜨거움도 여전하다. 그의 마음이 식고, 그의 안에서 나와 내 향기가 희미해졌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불안은 조금도 없었다. 나 같은 비관주의자에게는 그 자체로 기적이었다.

그가 내 귀에 자신의 마음을 속삭이고, 향기로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처럼 확신할 수가 있다. 이것이 디디와 나 사이의 특별한 결속 때문이라면, 이런 몸으로 태어난 것도 더는 저주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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