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Side by Side (30/31)

   2. Side by Side

누군가가 풍선껌을 불고 있다.

세로 110센티미터, 가로 80센티미터 정도의 직사각형 캔버스가 꽉 차도록 풍선껌을 불고 있는 사람의 흉상이 그려져 있었지만, 풍선껌의 크기가 아주 큰 탓에 그것을 불고 있는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 코를 대면 막대 사탕의 달콤한 향이 풍길 것 같은 배경의 강렬한 핑크색과 풍선껌의 푸른색은, 자연적이거나 건강한 것과는 거리가 먼, 불량식품의 인위적인 색소를 연상시키는 색감으로, 최인우 작품 특유의 기괴한 경쾌함, 불편한 경쾌함을 부각시켰다.

“작품, 벌써 전부 판매됐다며.”

이번 전시회에서 인우가 발표할 세 점의 작품 중 풍선껌을 그린 캔버스 앞에서 유독 오랜 시간을 감상하고 있었던 슈슈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이젠 팬도 제법 많아졌으니까. 열성적인 컬렉터도 두세 분 있거든.”

“개인전, 확실히 인상적이긴 했어. 이후 작품들도 다 좋았고.”

슈슈는 그럴 만하다는 듯 수긍했다.

팬텀의 재오픈 후 첫 전시회이기도 했던 자신의 개인전에서, 인우는 총 열여덟 점의 작품을 발표했었다. 이전의 독특한 개성은 그대로 이어 가면서도, 한층 더 깊어진 자아와 세계, 미술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보여 줬다는 호평을 받으며 성황리에 치러졌었다. 전 작품이 전시 기간 내에 모두 판매되어 라우와 한 실장을 놀라게 하기도 했었다. 홍콩 아트페어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 중 하나가 인우의 그림이었던 시절을 생각하면, 놀랄 만한 결과였다.

“진료 시간 외에는 거의 작업하면서 보내느라, 요즘 얼굴 보기 힘들어.”

탕아 아들의 믿기지 않는 변화를 얘기하는 듯한 라우의 말에 슈슈는 웃어 보였다. 마지막 전시실을 마저 둘러보기 위해 두 사람은 인우의 작품 앞을 벗어났다.

팬텀의 2층 전시실은 지난 리모델링을 거치면서, 홀을 크게 두 개의 방으로 나누던 기존의 콘크리트 벽을 허물었다. 덕분에 전시 성격과 규모에 맞게 매번 공간을 재배치하는 것이 예전보다 더 자유로워졌다. 자연광 아래서 감상하는 것이 어울리는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을 모두 효과적으로 전시할 수 있도록, 창의 위치와 크기까지 전부 바꾸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홀을 세 개의 룸으로 나누었다. 관람객들이 흥미로운 짧은 여행을 떠난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각 룸은 미로 같은 복도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작품 자체에만 집중했던 팬텀의 이전 전시에서는 볼 수 없었던 방식이었다.

미로 같은 복도의 벽에는, 지난 약 3개월간 팬텀을 방문했던 관람객들의 다양한 얼굴이 빔프로젝터로 투사되고 있었다. 촬영의 목적을 설명하고 그에 동의한 관람객들을 라우가 직접 사진으로 찍어, 영상으로 엮은 작업물이었다. ‘각양각색’이라는 전시 주제를 표현하기 위한 라우의 아이디어였다.

당당하게 모델 같은 포즈를 취한 사람, 부끄러워하며 입을 가린 채 웃는 사람, 뻣뻣하게 경직된 사람,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 편안하게 렌즈를 응시하는 사람….

생김새만큼이나 서로 다른 성격이 드러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천천히 걷다 보면, 동굴 끝에서 빛을 만나듯, 햇살이 환하게 쏟아지는 마지막 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번 전시에서 유일하게 자연 채광이 비치는 전시실이었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높은 천창에서 쏟아지는 여름 햇살에 눈이 부셨다. 어두운 복도를 막 빠져나온 눈이 적응하기 위한 잠깐의 틈이 필요했다. 터널이나 동굴을 벗어나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는 여정을 축소시켜 설계한 구조였다.

“전시 기획 좋은데? 마지막 전시라고 진짜 신경 많이 썼네.”

팬텀을 떠나는 것이 결정된 후, 지난 5개월 동안 미련이 남지 않도록 이번 전시 준비에 매진해 온 것은 사실이었다. 라우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오늘 미리 와 보길 잘했어. 전시 시작되면 아무래도 이런 느낌은 아닐 테니까.”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흰빛으로 가득한 고요한 전시실 자체에 매료된 슈슈는 방의 중심으로 천천히 걸어 나가며 감탄했다.

“…….”

작품 하나하나를 감상하기 위해 몸을 돌리던 그의 눈길이 한 작품에 서서히 고정되었다. 라우가 팬텀에서 진행하는 마지막 전시에 출품하기 위해, 이현이 ‘더 핸즈’ 측의 양해를 구하고 보내온 작품이었다.

전시실의 벽 한 면을 독차지할 정도의 대형 작품은, 수많은 별과 태양이 함께 장식하고 있는 환한 하늘을 그리고 있었다.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의 공존. 좋든 싫든, 인정하든 하지 않든, 세계를 이루는 구성원으로서 이미 공존하고 있는 각각의 존재들.

이번 전시의 주제와도 일맥상통하는 이현의 작품은, 지난겨울 발표했던 벤과의 공동 작업을 떠올리게 했다. 밤하늘의 주인이 달과 별만이 아니듯,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한낮의 하늘에 별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팬텀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라우가 단독으로 기획하고 진행한 전시의 테마를 ‘각양각색’으로 선정한 것도, 표현 기법이나 양식에 있어서는 유연한 변화를 보여 주는 이현의 작품들이 그 주제에 있어서만큼은 다양성의 존중과 공존이라는 일관된 흐름을 보여 주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자아와 관계를 뿌리부터 뒤흔든 경험들이, 자기 자신과 세계를 보는 관점 자체를 바꾸어 가고 있었다.

슈슈는 감상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몇 걸음 뒤에 서 있던 라우를 돌아봤다. 라우는 불길함을 느꼈다. 입술을 꾹 다물어 미소를 억누르며 고개를 젓는 표정을 보아하니, 어쩐지 놀리는 말이 이어질 것 같았다.

“이런 거 그리는 사람하고 사귀는 건 어떤 기분이야?”

“음… 말해도 이해 못 할 그런 기분?”

“재미없는 놈.”

이현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연인 사이임을 주변 사람들에게 정식으로 밝힌 뒤, 라우는 내내 놀림의 대상이었다. 어울리지도 않게 유난스러운 연애를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매번 당하기만 하는 게 억울해서 모르는 척 뻐기듯 받아치자, 슈슈는 불퉁한 표정으로 다시 그림을 향해 몸을 돌렸다.

“너, 연인으로서도 갤러리스트로서도… 이현 씨 진짜 놓치면 안 되겠다.”

라우는 아주 잘 알고 있다는 뜻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몇 걸음 앞으로 걸어가 슈슈의 옆에 나란히 섰다.

“내가 소장하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다. 이번엔 진짜 아슬아슬했어.”

행복한 엄살 부리지 말라는 듯 슈슈는 피식거렸지만, 라우는 진심이었다. 꼭 연인으로서의 독점욕 때문이 아니라, 미술을 아끼는 컬렉터로서도 이번 작품은 소유하고픈 욕구가 남달랐다.

“그럼, 벌써 판매된 거야?”

“파리에서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작가고, 한국에서 전시하는 첫 작품이니까. 작품을 보지도 않고 구입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았어.”

“그런데도 참은 거야? 훌륭해. 칭찬받을 만한 인내심이야.”

어깨에 툭 팔을 걸친 슈슈가 장난스럽게 토닥토닥 어깨 끝을 두드렸다.

“2차 시장에 나오기만을 벼르고 있는 건데, 인내심은 무슨.”

“충동을 다스리는 법을 터득해 가고 있잖아. 발전 가능성이 있어.”

라우는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밀어내며 혀를 차듯 웃었다. 장난기가 거의 사그라졌을 때쯤, 슈슈가 다른 작품들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실은 2주 전인가? 선유가 작업실에 한 번 왔었어.”

“…….”

“전시 열 수 있도록 연결해 준 거 고맙다고, 작품 하나 가지고 인사하러 왔더라.”

귀국 후 전시를 열어 줄 갤러리를 찾던 홍선유는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이 조용히 사라졌었다. 이현이 파리로 떠나고 라우도 더 이상은 타인의 일에 에너지를 할애할 상태가 아니었고, 슈슈도 더는 홍선유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었다.

그렇게 1년여 이상의 시간이 지나며 홍선유라는 이름도, 한국 미술계가 그 이름에 품고 있었던 탐탁지 못한 인상도 희미해졌을 때쯤, 수도권의 한 소형 개인 갤러리에서 ‘서뉴(SEONEW)’가 아닌 ‘홍선유’의 첫 전시가 열렸다. 슈슈의 주선이었다.

“나하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하더라. 그동안 많이 생각해 봤다면서.”

“…….”

의도한 것은 아닌데, 저도 모르게 라우의 걸음이 멈췄다.

“그런 표정 하지 마. 거절했으니까.”

“뭐가. 네 인생이고, 네 결정이잖아. 어떤 선택을 하든 이젠 관여 안 해.”

멋쩍게 시선을 피하며 하관을 문지르는 라우를 보며 슈슈는 옅게 웃었다.

“한때 열의를 다해 사랑했던 사람의 몰락을 보는 게… 씁쓸했던 거지, 선유와의 관계에 미련이 남았던 건 아니었거든.”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믿지 못했고, 이해하지도 못했었다. 홍선유가 슈슈를 배신했다는 사실만을 부각시켜 받아들였고, 그런 배신을 당하고도 그를 도우려는 슈슈를 미련스럽다고 비난했었다. 지금도 어쩌면 완전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깊이 얽혀 버린 관계는 외부에서 바라본 몇 가지 단서만으로 명확하게 판결할 수 없는 문제임을, 그것에 대해서만큼은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모든 걸 잃고 바닥까지 내려가 본 후라 그런지 작품도 많이 바뀌었더라. 그렇지 않았으면, 연결 못 시켜 줬을 거야. 소개는 내가 했지만, 작품이 그쪽 오너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성사되지 못했을 전시였어.”

다행이지, 뭐. 일부러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그렇게 덧붙인 슈슈는 전시실을 완전히 빠져나가기 전,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모험과 여행의 종결을 본 듯 아쉬우면서도, 이어질 일상에 대한 기대감으로 현실을 추스르게 되는, 그런 영화 한 편을 보고 난 기분이었다. 개별 작품들의 수준을 떠나 좋은 전시라는 생각에, 슈슈는 라우의 등을 툭 치며 웃었다. 앞장서던 라우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슈슈의 어깨 너머로 이현의 작품을 한 번 더 눈에 담은 라우는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그만 내려가자는 신호를 해 보였다.

계단을 내려온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1층 안쪽의 카페로 향했다. 일이 있을 경우 주로 팬텀 쪽에서 작업실을 방문했던 예전과 달리, 슈슈가 팬텀을 직접 찾아오는 비율이 늘어난 데에는 카페의 역할이 컸다. 가끔은 개인적으로 방문해 커피를 마시고 갈 때도 있었다.

‘각양각색’ 전시 때문에 오늘 팬텀의 모든 전시홀은 관람이 중단되어 있었지만, 카페에는 빈자리가 몇 개 없었다. 외부와 면한 남쪽과 서쪽의 벽면 전체를 창으로 바꾸어 전망과 채광이 훌륭했기에, 그것만으로도 금세 SNS에서 소위 ‘핫 플레이스(Hot Place)’로 등극할 수 있었다. 그 탓에 한두 달은 전시 관람객보다 카페 손님이 더 많은 수준이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기로 접어들어 갤러리 자체가 마비되는 일은 없었다.

애초에 이 카페를 추진했던 주한의 목적대로, 예쁜 사진을 찍기 위해 카페를 방문했던 손님이 전시를 둘러보고 가는 경우도 많았고, 비치된 팸플릿을 관심 있게 살펴보는 손님들도 많았다. 이 정도면, 갤러리로 진입하는 문턱을 낮추겠다는 주한의 목표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주한이는 이제 카페 쪽 담당으로 완전히 자리 잡았는데?”

“의외로 접객이 체질에 맞는 것 같더라고. 물 만난 물고기야.”

바 안쪽에서 주문을 받고 음료를 만드는 일을 능숙하게 혼자 처리하고 있는 주한에게 시선을 주며, 두 사람은 피식 웃었다. 슈슈가 하나 남은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 동안, 라우가 음료를 주문했다. 원래는 픽업도 셀프서비스였지만, 주한이 직접 쟁반을 가지고 테이블로 찾아왔다.

“작가님, 저녁에 오실 거죠?”

얼음이 짤랑거리는 아이스커피를 내려놓으며 주한은 그 얘기부터 꺼냈다. 눈을 크게 뜨고 눈썹을 치킨 얼굴은 참석을 강요하고 있었다.

라우 위쿤이 팬텀에서 개최하는 마지막 전시를 보기 위해 이현과 유니가 파리에서 날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비자 문제로 유니가 재작년 12월에 잠깐 다녀갔던 것을 제외하면, 두 사람 모두 첫 귀국이었다. 두 사람을 환영해 주자며 주한은 지인들을 초대해 저녁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오랜만에 소울 메이트 만난다고 신났네, 권주한.”

“진짜 소울 메이트는 그쪽에서 만난 것 같던데요, 뭐.”

쟁반을 옆구리에 끼며 심드렁하게 받아치는 주한에게서 섭섭한 기색이 엿보였다.

“여하튼, 작가님, 빠져나갈 생각 하지 마시고 꼭 오세요. 아셨죠?”

거듭 다짐을 받으려는 주한에게 슈슈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제야 주한은 표정을 풀고, 특별히 더 맛있는 커피로 준비했다며 넉살을 떨고는 테이블을 떠났다. 유니에게 연인이 생긴 것이 탐탁지 못한 척해도, 자리로 돌아가는 뒷모습은 꽤나 들떠 있었다.

커피에 손을 대기 전, 또 한 번 손목시계를 확인하는 라우를 건너다보며 슈슈는 스테인리스 빨대로 음료 안을 가볍게 저었다.

“테이크아웃 잔에 달라고 하지.”

“어?”

“비행기. 17시 도착이랬나?”

“어.”

“그만 가 봐.”

“…아직은 시간 괜찮아.”

“마음이 벌써 공항에 가 있는 것 같은데, 뭐. 아까부터 시계만 보잖아.”

그렇지 않아도 티 내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던 라우는 헛된 노력을 하고 있었단 생각에 피식 웃음이 새었다. 실은 주한이 들떠 있는 것 이상으로, 발이 땅에서 떠 있는 느낌이었다. 전시를 보기 위해 서울로 오겠다는 이현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이런 상태였다.

이현이 ‘더 핸즈’에서 곧 나오고 나면 유럽 미술관 투어도 하기로 했고, 이후에는 같은 단체 소속으로 계속 함께 있을 수 있으니 무리해서 일정을 조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었지만, 이현은 꼭 가고 싶다며 드물게 고집을 부렸었다.

“한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봤으면서도 그렇게 좋아?”

“내가 그쪽으로 가는 거하고, 서이현이 여기로 오는 건 다르니까.”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빨리 가 버리라고 핀잔하는 슈슈를 피해, 라우는 커피가 든 유리컵을 들고 일어났다.

적당한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한 방문객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슈슈에게 혹시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는지를 물었다. 슈슈는 흔쾌히 촬영에 응했다. 그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라우는 눈짓으로만 슈슈와 인사를 나누었다.

주한이 테이크아웃 잔에 옮겨 담아 준 아이스커피를 손에 쥐고 팬텀을 나섰다. 올려다본 하늘은 빈 캔버스처럼 깨끗했다. 라우는 왼쪽 가슴의 포켓에 꽂혀 있던 선글라스를 쓰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언젠가 이현에게 선물했던 것과 같은 선글라스였다.

■ ■ ■

두 사람은 레인 샤워 수전에서 쏟아지는 물줄기의 중심에서 살짝 벗어난 곳에 서 있었다. 맨몸 위로 흰 거품이 미끄러졌다. 마사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폭포수처럼 강한 수압으로 쏟아지는 풍부한 물줄기는, 라우에게 등을 보인 채 벽을 보고 선 이현의 왼쪽 어깨를 계속해서 씻어 내렸다.

라우는 이현의 목덜미와 어깨에 입을 맞추며 거품을 풍성하게 짜낸 스펀지로 그의 등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왼쪽 어깨에서부터 등의 곡선을 타고 흘러내린 물줄기는, 거품이 이현의 피부에 닿기가 무섭게 그것을 씻어 내렸다.

흰 거품이 군살 하나 없는 미끈한 육체를 따라 흘러내려 엉덩이의 곡선 사이로 사라지는 광경을 내려다보며, 라우는 이현의 뒷덜미에 입술을 묻고 피부를 가볍게 깨물었다.

“음, 거긴… 직접 할 수 있는데요.”

이현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났다. 등을 전부 닦은 것 같지도 않은데 순서를 건너뛰고 아래로 내려가, 다리 사이로 은근하게 밀고 들어오는 스펀지 때문이었다.

라우는 이현의 어깨 위로 고개를 내밀며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그래? 정말?”

이현은 손바닥으로 얼굴의 물기를 훔쳐 내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코끝이 닿는 거리에 라우의 얼굴이 있었다. 눈꺼풀을 내리뜨고 라우의 입술을 바라봤다. 물기에 젖은 입술은 평소보다 더 섹시하게 보였다. 이번 귀국을 위해 5주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현은 고개를 좀 더 뒤로 젖혀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부드럽고 폭신한 살점을 마주 비빈 시간은 짧았지만, 더 깊은 접촉을 갈구하도록 만들기에는 충분할 만큼 자극적이었다.

“혼자 할 수 있어도 내가 해 주는 게 더 좋지 않아?”

진지한 얼굴로 동의를 구하는 라우의 말에 이현은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뒤따라 낮게 웃으며 귓바퀴를 가볍게 씹었다. 엉덩이 쪽에서 앞쪽으로 역행한 스펀지가 고환을 밀어 올리고, 허벅지 안쪽의 속살을 넓게 문질렀다. 무심한 척 움직이고 있지만, 더 이상 샤워라고 보기 어려운 애무에 가까운 손길이었다.

“음….”

거품과 물기가 뒤섞여 미끄러워진 피부 위를 스펀지가 아닌 그의 맨손이 쓰다듬는 느낌에, 이현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눈을 감았다. 스펀지가 아랫배를 문지르고, 라우의 오른손이 엉덩이를 넓게 둥글리듯 쓰다듬었다. 저도 모르게 엉덩이 근육에 힘을 주자, 손가락이 둔부와 둔부 사이의 골을 파고들었다. 그가 애널을 원하고 있음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이현은 자신의 페로몬을 느꼈다.

이제는 라우의 것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페로몬도 분명하게 잡아낼 수 있었다. 고체 형태의 입욕제가 따뜻한 물속에서 서서히 풀어지며 점점 진한 색과 향을 퍼뜨리듯이. 그의 욕구와 흥분에 자극될수록, 페로몬의 움직임이 조금씩 더 활발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애널 주변을 누르고 비비는 손가락에서 욕망이 뚝뚝 묻어나는데도, 라우는 곧바로 본격적 섹스에 돌입하려 하지는 않았다. 저녁 식사 모임에 참석하기 전, 이미 한 차례 서로에게 달려들다시피 했던 섹스를 의식하는 듯했다.

5주 만에 마주한 서로의 실물이었다.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끌어안고, 입술을 탐하고, 거의 찢듯이 상대의 옷을 벗겨 냈었다.

아랫배를 꽉 맞붙인 채 허리를 흔들어 성기를 자극하는 라우의 어깨를 끌어안고, 이현은 그의 어깨 너머로 소파 위에 걸려 있는 <컬러풀 고스트>를 처음 대면했었다. 자신의 그림 앞에서 그와 성적 행위를 하는 것은 묘한 기분이었다.

본격적으로 삽입에 돌입한 뒤에는 체인징을 막을 수 없고, 그렇게 되면 라우의 눈 때문에 외출에 제약이 생긴다. 그렇다고 지인들과의 저녁 식사 테이블에서 선글라스를 쓰고 있을 수도 없었다. 수위 높은 애무를 나누고 서로의 손으로 사정에 도달하는 정도에서 인내심을 발휘했지만, 삽입이 없었다 하더라도 세 번이나 사정하고 나니 체력 소모가 대단했다.

베타였던 때의 이현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만일 어쩌다 단시간 안에 세 번을 사정했다 하더라도, 그날 안에 다시 성욕을 느끼고 발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피부가 스치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뜨거운 눈길을 마주하기만 하면, 순식간에 성욕이 새롭게 자극될 것을 알았다. 그를 만나 디디의 페로몬이 자극된 시점부터 그래 왔듯이.

스펀지로 페니스를 부드럽게 닦아 내며 오른손으로는 애널 위를 마사지하듯 문지르던 라우는 당장은 그것만으로 만족하며 물러났다.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본 이현은 이번엔 자신이 등을 문질러 주겠다며 그의 어깨를 돌려세웠다. 어째서인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주춤거리며 돌아선 라우의 등은 못 본 사이 더 단단해져 있었다.

손바닥으로 얼굴의 물기를 한번 훑어 낸 이현은 스펀지 위에 샤워젤을 좀 더 덜어 냈다. 팔을 늘어뜨린 채 몸을 완전히 이완시킨 상태에서도 라우의 등에는 근육의 굴곡이 선명했다.

목덜미와 등이 연결되는 자리에 스펀지를 꾹 눌렀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풍성한 거품이 움푹 파인 척추 주변의 골을 타고 주르륵, 한꺼번에 흘러내렸다.

터질 듯 팽팽하고 단단한 그의 균형 잡힌 육체에 자신의 페로몬이 진해지고 있었다. 속마음을 그대로 읽히는 것처럼 아직은 그런 적나라한 교감이 쑥스러웠다. 무방비하게 서 있는 그의 어깨 뒤쪽을 스펀지로 문지르면서, 이현은 애써 다른 화제를 꺼냈다.

“아까 인우 형하고 둘이 대화했던 거 신경 쓰였죠?”

“아니. 둘이 따로 대화한 것도 몰랐는데?”

경직된 말투로 즉각 대답한 반응이 오히려 질투를 증명한다는 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아마 그는 지금 간접적으로 불만을 드러내고 있는 듯했다.

“그럼, 무슨 얘기 했는지 다 말해 주지 않아도 되겠네요.”

“…….”

등을 보이고 서 있는 탓에 라우의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어도, 풀 죽은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현은 목을 푸는 척 웃음을 삼켰다. 날렵하고도 탄탄한 허리를 스펀지로 쓰다듬으며 그의 어깨에 턱을 얹었다.

“예상했겠지만… 그때의 기습 키스, 미안하다는 얘기였어요.”

정식으로 사과할 틈도 없이 당시에는 모든 일이 한꺼번에 터졌었고, 그리고 폭발의 파장이 가라앉았을 때쯤에는 이현은 이곳을 떠나 있었다. 계속 직접 만나서 사과하고 싶었다고. 약 2년 만에 만난 인우는 꽤 달라진 인상으로 말했었다.

그동안 아주 가끔 메시지를 통해 서로 안부를 전하기는 했지만, 넉살 좋게 파고들었던 예전과 달리 일정한 거리를 두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자신과 라우 모두에게 미안하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에, 이현은 굳이 그 거리를 지우려 하지 않았었다.

라우는 고개를 비스듬히 젖혀 물줄기에 얼굴을 씻어 냈다. 돌아서서 이현을 마주하고는 허리를 숙여 짧게 입을 맞췄다. 스펀지를 빼앗아, 이미 이현이 스스로 닦아 낸 가슴을 다시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가 그냥 감정을 드러내기를 바랐다. 사소한 것이든 묵직한 것이든, 받아 주고 싶었다. 이현은 라우의 어깨에 두 손을 얹고 바깥쪽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질투하는 거 안 싫어요. 아직도 내가 싫어한다고 오해하는 거… 아니죠?”

그가 내리뜨고 있던 눈을 들었다.

“간섭하고, 통제하고, 가둬 두고 싶고… 다행히 그 정도의 증세는 아니지만. 그래, 솔직히 신경은 쓰여. 별로 기분 좋지는 않아.”

“키스했던 거, 아직도 불쾌한 건 아니죠?”

얼굴의 물기를 훑어 낸 라우는 장난스럽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니야. 그냥 그 키… 그 사건을 입에 담는 것도 싫은 거지.”

또 한 번 예상치 못한 순간에 라우의 입술이 다가왔다. 지나친 억측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키스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입술을 겹치고 있었다. 마치 인우와의 키스가 연상될 때마다 자신의 키스로 그것을 덮으려는 것처럼.

이현은 더는 웃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왜.”

감정을 인정한 쑥스러움을 감추려 불퉁하게 구는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질투하는 아위가 왜 좋은지 아세요?”

“…….”

“되게… 귀엽거든요.”

빈틈없을 정도로 모든 방면에서 배려해 주는, 연인 사이에 흔히 있을 법한 막무가내의 투정 한 번 부리지 않는 라우가, 유독 자신을 향한 타인의 호감에 대해서만큼은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 이현을 미소 짓게 했다.

라우는 웃음을 참는 사람처럼 아랫입술을 물고 이현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귀엽다는 말을 듣는 자체가 어색하면서도, 이현에게서 그 말을 듣는 것이 싫지만은 않은 듯한 그런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이상해.”

뭐가 이상하냐고. 이현은 눈을 크게 뜨는 것으로 질문을 대신했다.

“최인우는 형인데, 왜 난 대표님이야?”

“이젠… 대표님이라고 잘 안 부르는데.”

“흠, 형이라고 부르지도 않지.”

이현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앞으로는 형이라고 부를까요?”

“최인우하고 같은 호칭으로 불리는 건 싫어.”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아마도 누구의 앞에서도 보인 적 없었을 그의 이런 얼굴들이 사랑스러웠다. 더 많은 표정을 보고 싶었다.

이현은 그의 두 뺨을 손에 가두고 만지작거렸다.

“아위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전 이런 시간도 좋아요. 그냥… 우리 둘이 바보 같은 얘기를 하면서 떠드는….”

그가 이현의 허리를 더 바짝 당겼다. 내리뜬 눈꺼풀 안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했다.

“네가 좋은데, 내가 어떻게 안 좋겠어.”

“너무 그렇게 정답만 말하지 마요.”

“…….”

그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이현을 내려다보았다. 이현은 쏟아지는 물줄기의 한가운데로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거품기가 남은 서로의 몸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맞물린 입술 안으로 새어 드는 물줄기마저도 자극적이었다.

이미 반 정도 발기한 서로의 페니스를 애써 모른 척하며 샤워를 마쳤다. 샤워부스 안의 습기 탓에 조금 더웠던 몸은, 욕실을 나서자 시원한 공기에 금세 보송하게 말랐다. 파리에서 간단히 챙겨 온 캐리어를 뒤질 것도 없이, 이현이 아래층에 두고 갔던 속옷과 파자마가 라우의 드레스룸에 정리되어 있었다.

서로의 머리카락을 말려 주겠다는 핑계로, 하나의 드라이어를 사이에 두고 또 한참을 엉켜 장난을 쳤다. 머리카락이 다 말랐을 때쯤에는 갈증이 날 정도였다.

“저 맥주 마시고 싶은데, 아위는요?”

“지금 침실 냉장고에 맥주가 없는데. 가져다줄게.”

문을 향해 바로 몸을 돌리려는 라우의 어깨를 이현이 다급하게 붙잡았다.

“제가 갔다 올게요.”

“…….”

“버릇… 나빠져요.”

라우는 피식 웃으며 바싹 마른 이현의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버릇 좀 나빠져도 될 것 같은데.”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그는 순순히 이현을 보내 주었다.

달빛이 흐르는 거실은 불을 켜지 않아도 충분히 밝았다. 두 병의 맥주를 가지고 거실을 빠져나오기 전, 이현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뒤를 돌아보았다. <소외>가 걸려 있었던 자리를 <컬러풀 고스트>가 차지했다는 점만 제외하면, 공간은 거의 그대로였다.

바로 오늘 아침에도 이곳에서 하루를 시작한 것 같기도 하고, 실제로 파리에 가 있었던 시간보다 더 오래 떠나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집 안 곳곳, 추억이 남지 않은 자리가 없었다. 이런 곳에서 그는 침묵을 지키며 자신을 기다렸던 것이다.

이현은 문득, 처음 <소외>를 발견했던 자리에 서 있음을 의식했다. 그리고 소파 위에 걸린 <컬러풀 고스트>를 올려다보았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엇이 상실되거나 획득되고 무엇이 무엇으로 대체되었는지, 굳이 헤아려 볼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즐거운 과거라도 회상하듯 희미하게 웃으며, 이현은 자리를 벗어나 서둘러 계단을 올라갔다. 인기척을 감지한 센서가 간접조명을 밝혀 주는 복도를 지나 침실의 문을 열었다.

“…….”

슬리퍼를 신지 않은 맨발을 막 방 안으로 들이려던 이현은 잠시 멈칫했다. 윗옷을 입지 않은 라우가 침대 헤드에 느슨하게 기대어 앉아 있었다. 과거의 어느 시점을 떠올리게 하는 비슷한 장면에, 이현은 웃으며 침대로 다가갔다.

엉덩이를 끌어 좀 더 안쪽으로 옮긴 라우는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침대 위로 막 올라가려던 이현의 시선이 협탁 위의 액자에 고정되었다.

“이건… 진짜 좀 부끄러운데.”

“응?”

맥주를 건네받던 라우가 허리를 굽혀 이현의 시선이 향한 곳을 돌아보았다. 액자를 발견한 얼굴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그는 어정쩡하게 멈춘 이현의 옆구리를 향해 팔을 뻗었다.

“왜. 난 <소외>나 <컬러풀 고스트>만큼 마음에 드는데.”

“진심이에요?”

라우의 팔이 이현의 허리를 감아 낚아챘다. 갑작스럽게 균형이 무너진 이현은 라우의 허벅지 위에 주저앉았다. 그가 이현의 손에서 맥주 한 병을 가져가며 씩 웃었다.

“<소외>가 나를 알기 전의 서이현에 대한 그림이라면, ‘토끼 씨’는 서이현이 본 내 모습이잖아.”

아이처럼 좋아하며 웃는 그의 얼굴에 이현도 웃음이 새었다. 그의 무릎에서 내려가 바로 옆자리에 그를 마주 보고 앉았다. 뚜껑을 비틀어 오픈한 맥주병을 서로 가볍게 부딪치고는 샤워 후의 갈증을 해소했다. 머릿속이 얼얼할 정도로 시원한 맥주를 들이켜면서, 이현은 액자 속 그림을 힐끔거렸다.

저녁 약속을 위해 외출하기 전, 침실에 올라와 ‘토끼 씨’ 그림을 발견했을 때, 이현은 눈을 의심했었다. 누군가 시공간을 뛰어넘은 마법이라도 부려 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엔, 그의 존재를 의식하며 아무도 모르는 혼자만의 변덕을 부렸던 과거를 들킨 것 같아 얼굴이 뜨거워졌었다.

작년 여름, 휴가를 이용해 발리에 갔었다고 라우는 설명했었다. 스미냑 해변에서 모래를 만나고, 이한이 합류한 뒤 두 사람에게 체인징을 고백하고, 이한의 주먹에 얼굴을 맞았던 일까지도.

「네가 침묵 속에 있었던 동안 네 곁을 지켰던 사람들이 그 둘이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날 때릴 자격 충분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이현에게 라우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었다.

유럽 미술관 투어가 끝나면 발리로 가서 며칠 휴가를 보낼 계획이었고, 그건 이미 모래, 이한과도 상의가 끝난 일이었다. 라우와 함께 방문할 계획을 몇 차례 얘기하는 동안에도, 두 사람은 그를 만나 체인징을 들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현은 더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라우가 맥주병을 복근의 위쪽에 걸치듯 내려놓았다. 그는 초록색 병을 내려다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모래 씨는 골든이었어.”

“…누나가요?”

“아주 드물지만, 스스로 제어법을 터득하는 사람들도 있거든. 자신의 상태나 감정을 객관적으로 상대화하고, 그것을 컨트롤하는 데에 능한 사람들.”

그렇다면, 모래가 그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골든이 되어 있다 해도 충분히 수긍이 갔다. 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테스트를 받아 보라고 권했었어. 골든으로 정식 판명이 되면 아무래도 이것저것 편해지니까. 그런데 모래 씨는 그냥… 웃기만 하더라.”

그의 제안에 모래가 어떤 식으로 웃었을지, 이현은 그림으로 그려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마도 그녀에게 골든이라는 공식적 인증은 별다른 의미 없는 행정상의 구분일 뿐일 것이다. 골든으로 인정을 받든 그렇지 않든, 그녀 자신도 그녀의 생활도 그것에 맞춰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라우가 팔을 뻗어 이현의 목덜미에 손을 감았다. 그러고는 이현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며 미소 지었다.

“서이현도 골든이 되기까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본인의 페로몬 감지도 아주 빠른 편이었고.”

감은 목덜미를 가볍게 주무르며 라우는 입술을 포개었다. 상대를 확인하고 교감하는 순한 짐승들처럼 코끝과 입술을 비비며 애정을 표시했다. 입술이 닿은 그대로, 이현이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요.”

“…….”

라우의 얼굴은 예상하지 못한 선물을 받은 사람 같았다. 너무 감격한 티를 내지 않으려 얼굴을 쓸어내리는 그를 보면서, 이현은 떨림 같은 통증을 느꼈다. 자신의 표현이 부족해 그를 감정적으로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결코 애정을 강요하거나 보채지 않았지만, 그런 배려가 단지 체인징의 죄책감 때문이 아님을 알았다. 그건 그저,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그는 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아꼈을 것이다.

“많이 보고 싶었어요.”

서툴고 직설적인 방식이었다. 그렇게라도 감정을 표현하려는 이현의 의도를 알아챈 라우가 웃으며 코끝을 비볐다.

“나도 아주 많이 서이현 보고 싶었어. 네가 온다고 하니까 좋으면서도, 평소보다 한 주 더 늦게 봐야 하는 게 억울했을 만큼.”

비교적 건전한, 키스라기보다는 뽀뽀라는 명칭이 더 어울릴 법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쪽, 가벼운 마찰음을 내며 잠시 떨어졌던 입술이 조금 더 깊게 겹쳐졌다. 건전함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라우는 부드러운 살점의 촉감을 음미하듯 턱의 방향을 바꿔 가며 입술을 비비다, 이현의 아랫입술을 천천히 강하게 흡입했다.

“으, 음….”

이현이 목 안쪽에서 신음하며 라우의 맨가슴에 손을 올렸다. 라우는 입술을 놔주지 않은 채 조금씩 얼굴을 뒤로 물렸다. 쪼오오옥, 진하게 빨리는 선정적인 효과음과 함께 이현의 입술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서로의 입술에서 느껴지던 맥주의 쓴맛이 점차 페로몬 향에 뒤덮여 가고 있었다.

손가락 끝으로 라우의 맨가슴 위를 두드리며 이현은 조금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일은 우리, 일정 비어 있으니까….”

“…….”

이현의 손에서 맥주병을 가져간 라우는 두 유리병을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렇게 부추겨서 어떻게 하려고 그래.”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쉰 그는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이현의 허리를 안아 좀 전처럼 다시 자신의 허벅지 위로 올렸다. 저녁 내내 그토록 기다렸던 온전한 둘만의 시간이었다.

진한 키스를 나누며 라우는 이현의 티셔츠를 가슴 위로 밀어 올렸다. 이현은 그가 옷을 벗기기 쉽도록 팔을 들어 협조했다. 갸름해지고 어두워진 그의 눈은 순식간에 고양되어 있었다. 짙게 뿜어져 나오는 페로몬에 자신의 페로몬이 얽혀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만으로도 그와 밀착된 하반신이 움찔거렸다.

이현의 벗은 등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며, 라우가 하체를 밀어 올려 은근하게 비벼 왔다. 트레이닝팬츠 안에서 이미 발기하기 시작한 페니스의 두둑한 부피감이 얇은 파자마 너머로도 분명하게 전해져 왔다.

“샤워할 때, 계속 이거 힐끔거렸지.”

침묵하거나 부정하는 대신 이현은 슬쩍 웃었다. 주저하지 않고 허리를 움직여, 사타구니를 눌러 오는 불룩한 둔덕을 지그시 압박했다.

“그러는 아위도 거기… 계속 지분거렸… 흐윽.”

이현의 맞대응은 마무리되지 못했다. 등을 쓰다듬던 라우의 손이 파자마 안으로 불쑥 파고들어 둔부를 움켜쥔 탓이었다.

자신의 어깨에 이마를 박고 숨을 들이켜는 이현의 귓불을 잘근거리며, 라우는 젖은 목소리를 억누르고 빠르게 속삭였다.

“맞아. 그랬어. 점잖은 척하고 있었지만, 실은 공항에서부터 죽는 줄 알았거든. 기대했어. 집에 오자마자 서이현 몰래 벌써 약도 챙겨 먹었을 정도로.”

올해 2월에 처음으로 페로몬을 자각한 후, 이현은 처방대로 오메가를 위한 억제제를 복용하고 있었다. 의사는 이현이 완전히 발현하기 전에는 임신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고 했지만, 라우는 그때부터 꾸준히 피임약을 복용 중이었다. 일정 시간 동안 정자의 첨체와 꼬리에 작용해 난자에 침투하는 것 자체를 방지하는, 알파 전용의 경구 피임약이었다.

그러나 오메가를 위한 억제제나 알파의 피임약 따위와는 무관하게, 고스트와 디디 사이에 작용하는 인력은 여전했다. 둘은 여전히 서로의 페로몬을 감지했고, 일정 수준 이상으로 진해진 상대의 페로몬에는 전혀 대항할 수 없었다.

체인징이 완료된 후에는 고스트와 디디의 상황이 어떻게 달라질지, 관련 자료나 문헌이 전혀 없으니 일단은 두고 보는 수밖에 없다고. 현재로서는 마커스조차도 그 이상을 추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결말은 두 사람에게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알파와 오메가의 관계만으로 자리 잡든, 혹은 고스트와 디디 사이의 인력이 남아 거기에 더해지든. 어떤 방향에 대해서도 두 사람은 각오를 마친 상태였다.

“으, 흐음….”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 머금어 쪽, 쪽, 부드럽게 긴장을 풀어 주는 기분 좋은 키스에 이현은 낮은 신음을 흘렸다. 나른하게 풀어진 눈꺼풀 아래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샤워하는 동안, 서로 머리카락을 말려 주고 장난치는 동안에도. 그는 발기를 하고 페로몬을 풀기는 했어도 그것을 해소하려 들지는 않았었다. 그런 그의 내부에, 실은 자신에 대한 욕망이 팽팽하게 들어차 있었다고 생각하니 이현은 웃음이 났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에로틱한 기분이 들었다.

라우의 두 손이 파자마의 허리 밴드를 끌어 내리고 있었다. 이현은 엉덩이를 살짝 들어 올리며 그의 귀에 속삭였다.

“제가 뭐라고 말해도 멈추지 않아도 돼요. 페로몬은… 거짓말 안 하니까.”

미리 그렇게 일러 뒀지만, 두 번의 사정과 노팅이 진행되는 동안 이현은 한 번도 제지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솔직한 욕구의 표현과 과감한 자세로 라우의 여유와 자제심을 위태롭게 했다.

스스로의 페로몬을 제대로 감지할 수 있게 되면서, 이현은 성행위 앞에서 주춤거리기보다 해방감을 만끽하게 되었다. 문제가 있다면, 페로몬으로 인한 정상 범주 밖의 성욕도 체력의 한계에 부딪힐 수가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실제로 전신을 애무하고, 이현의 몸을 들어 올리고, 허리를 흔들고, 근육을 태워 가며 힘을 쏟는 것은 라우였다. 하지만 성적으로 너무 예민한 상태에서 긴 시간 동안 전신에 쾌감을 느끼는 것도 탈진의 원인이 될 수 있었다.

몇 시간에 걸쳐 두 번의 노팅과 사정이 이루어진 후에도 라우는 여전히 이현의 안에 있었다. 페니스를 찔러 넣기 힘들 정도로 가득 찬 체액을 빼 주기 위해 가끔 물러나기는 했지만, 삽입 상태에서 앞뒤로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틈만 확보하고 나면 곧바로 귀두가 입구를 틀어막았다.

이현은 녹초가 되어 매트리스 위에 늘어졌지만, 라우는 아직 부족했다. 엎드린 이현의 뺨과 목덜미, 어깨에 입을 맞추며 그는 이현의 배를 안아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무릎으로 선 상태에서 가슴과 등을 겹친 채 이어져 있었다. 체위가 바뀌면서 그의 페니스가 몸속에서 새롭게 자리를 찾아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흐으, 흑… 으으흐….”

두 번째 노팅이 남긴 잔류 감각 때문에 이현은 아직 배 속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위에 새로운 자극이 더해지자, 이현은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젠 뭔가를 더 느낄 에너지조차 남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런데도 페로몬은 반응을 보인다. 머리와 세포가 흥분하지만, 무릎과 허리에 힘을 주어 몸을 지탱할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괜찮다고. 힘을 빼고 자신에게 의지하라고. 그가 속삭인다. 그 속삭임에마저도 오싹거림을 느꼈다. 애널이 멋대로 조여들고, 페로몬이 그의 페로몬과 뒤엉킨다. 이현은 거의 흐느끼고 있었다.

끝까지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끝이 아니었다. 정액과 애액으로 범벅이 되어 본래보다 더 좁아진 내벽 안을, 라우는 서서히 파고들고 있었다. 차라리 그가 세게 박아 주기를 원했다. 좀 전에 노팅을 했을 때처럼 미쳐 날뛰며, 이 조마조마함을 박살 내 버리기를 바랐다. 젖지 못하는 남성 베타의 뻑뻑한 몸을 안듯이 느리기만 한 라우의 진입이 이현의 정신을 바싹 타게 만들었다.

“하윽. 흑!”

힘없이 늘어져 있던 이현의 고개가, 뒤에서 누가 잡아챈 것처럼 한순간 확 젖혀졌다. 아래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라우의 귀두가 막다른 극단, 내벽의 끝을 쿵 들이받았다.

이현은 이제 해방이라고 생각했다. 끝까지 진입했으니 몸을 부술 듯한 삽입이 이어질 거라고. 애를 태우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계 없는 쾌락으로 몰아붙여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라우는 절반 정도만 밀어 넣은 상태에서 잘게 허리를 털었다. 그러다 한 번 쿵, 또 여러 번 얕게 들락거리다 단번에 뿌리까지 쿵. 게다가 짓찧는 박자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매번 달랐다. 언제 깊숙이 박혀 올지, 이현은 거의 불안을 느낄 정도였다.

그가 남겨 둔 배 속의 빈 공간이 참을 수 없이 가렵고 허전했다. 노팅만이 이 갈증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팽창과 수축을 빠르게 반복하는 그의 음경의 힘찬 맥박이 내벽을 마구 두드려주길 바랐다. 

바로 그 노팅 때문에 이렇게 온몸이 아플 만큼 예민해져서, 흐르는 타액조차 수습하지 못할 정도로 육체의 통제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는데. 

그런데도 다시 또 노팅을 바라고 있었다. 

이현은 헉헉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시야에 들어오는 자신의 페니스는 정신적 탈진과는 별개로 완전히 빳빳하게 발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등 뒤에 바짝 붙어선 라우가 허리를 털어 대는 진동으로 페니스는 정신없이 끄덕거리고 있었다. 

“으으... 으.”

이현은 어깨를 비틀며, 가슴을 안은 라우의 손을 쥐어뜯었다.

“서이현, 이거 뭐야? 이거 지금… 어떻게 한 거야?”

“흐… 흐으, 흑… 하으….”

허릿짓마저 멈춘 라우는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현은 물음의 내용조차도 제대로 인지할 수가 없었다. 호소하는 것처럼 흐느끼는 자신의 울음만이 생생했다.

라우는 한 번 더 느리게 허리를 뒤로 빼 귀두와 내벽 사이에 틈을 벌렸다. 필요한 만큼의 성적 필요를 채워 주지 않는 알파를 자극해 사정과 노팅을 유도하려는 오메가의 본능에 대해 알고는 있었다. 겪어 본 적이 없었을 뿐. 알파의 본능 역시 지금까지의 라우에게는 이론일 뿐이었던 것처럼. 

지금까지의 이현의 애액과는 어딘가 달랐다. 한 번씩 울컥 밀려 나오던 멍울 같은 애액이 아니었다. 귀두를 흠뻑 적시고 내벽과 음경 사이로 빠르게 젖어 드는 그것은 훨씬 더 묽고 훨씬 더 뜨뜻했다. 그리고 끊김 없이 흐르고 있었다. 이현의 몸 안에서, 요도가 아닌 애널로, 그에게 골든 샤워를 당하고 있는 듯한 감각. 

라우는 미칠 듯 끓어올랐다. 

“읏… 아니야, 이거… 거긴…!”

더 이상 자제하지 않는 난타질에 이현은 눈앞의 허깨비를 쫓으려는 것처럼 공중에 손을 내저었다. 

“느껴져? 너 지금 완전히….”

“하지, 마…. 말하지 마요….”

이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흐느꼈다. 몸의 안쪽은 물론, 사타구니와 허벅지, 시트까지 푹 적시며 쏟아지고 있는 애액이 무엇을 연상시키는지, 그 역시 똑똑히 자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라우는 고개를 저으며 이현의 어깨에 얼굴을 문질렀다. 전신의 모공을 이용해 자신의 페로몬을 내보내고, 이현의 페로몬을 들이쉬는 것 같았다. 이현이 유도하는 대로, 그의 페로몬이 요구하는 대로, 허리를 흔들어 응할 수밖에 없었다. 

“서이현은 뭐야? 이런 거… 어떻게 할 줄 아는 건데? 응?”

“흐읏, 흑… 아무것도 안 했, 어….”

상체를 단단히 결박해 몸을 지탱해 주고 있음에도 이현의 허벅지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라우는 허리를 낮춰 무릎을 벌리고, 허벅지 위로 이현의 허리를 당겼다.

“나한테 더 기대서 앉아.”

“깊, 어… 이거, 더 깊어서….”

어린애처럼 우는 이현을 달래려 상하로 가볍게 몸을 흔들자, 그 진동에 내부가 자극된 이현은 더 서럽게 울었다.

“또… 또 노팅이야. 싫어….”

“노팅 아니야, 이현아. 이거 내가 흔드는 거야.”

이현을 진정시키려 라우는 그의 귓가에 여러 번 키스했다. 이현의 페로몬은 압도적인 짙은 향을 풍기며 그가 성적으로 더 강한 쾌감을 원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데, 정작 이현의 입술은 그것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교접 부위를 메운 음경의 테두리를 따라 묽은 애액이 계속해서 새고 있었다. 팽팽하게 곤두선 라우의 허벅지가 완전히 젖어 음란하게 번들거렸다. 이현이 미끄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 라우는 가슴과 아랫배를 더 꽉 끌어안아야 했다.

내벽이 바깥쪽으로 밀리며 배 속이 부푸는 감각이 느껴지자, 이현이 눈을 크게 뜨고 사지를 버둥거렸다.

“흐읍! 흣! 노팅, 아… 아니라며….”

“미안. 미안해. 좀 전엔 정말 아니었어…. 이현아, 미안.”

“쿠, 쿤…. 흐윽.”

이현이 더듬더듬 라우의 반지 낀 왼손을 찾아 쥐었다. 손가락과 손가락을 꽉 얽으며 거듭 자신을 부르는 이현의 목소리에 라우는 몇 번이고 대답을 반복했다. 귓가에 입을 맞추고, 가슴을 쓰다듬고, 다리 사이를 애무하며 함께 노팅을 통과했다.

더 깊은 곳으로 자신을 끌어당기고, 제어력을 허물어 원하는 형태의 교합을 유도하는, 반항할 수 없는 페로몬에 끌려가는 것. 

이게 알파구나. 

라우는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가 돼서야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자신이 우스웠다. 골든 알파라는 그럴듯한 명칭이 무색하도록 지금껏 자신은 알파의 실제 삶을 전혀 모른 채 살아왔던 것이다. 억누르고 은폐하는 방식만이 최선이라고 여기면서. 이현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끝내 수정되지 못했을 굳은 생각들.

품 안의 존재에게 라우는 새삼 무한한 애정을 느꼈다. 해변에 몸을 던져 부서지고 흡수되기를 끝없이 반복하던 뭍을 향한 바다의 그리움처럼, 이현을 향한 애정이 마르지 않을 것을 알았다. 눈앞의 벗은 어깨에 입술을 비비며 라우는 소리 없이 사랑을 말했다.

■ ■ ■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평소보다 시야가 흐릿했다.

부연 이물감이 어젯밤 체인징의 결과라는 것을 인지한 라우는 다시 눈을 감으며 옆자리로 팔을 뻗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손에 잡혀 오는 것이 없었다.

라우는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취침 모드로 가동되고 있는 에어컨의 냉기에 시트 밖으로 드러난 맨몸이 서늘했다.

이현의 따뜻한 몸을 어루만지며 침대에서 좀 더 늑장을 부리고 싶었던 그는, 잠을 쫓기 위해 얼굴을 여러 번 쓸어내렸다. 그리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괸 채 비어 있는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

자리의 주인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아직 숨이 완전히 살아나지 않은 베개 위에 종이가 한 장 놓여 있었다. 드로잉 노트에서 찢어 낸 페이지였다.

정원에 있을게요.

잠든 얼굴 구경하다가

너무 잘생겨서 그려 봤어요.

‘토끼 씨’보다 낫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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