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One by One
■ SEOUL ■
홀그레인 머스터드 소스에 단호박을 곁들인 로스트 비프 샌드위치로 가벼운 식사를 끝낸 후, 라우는 저녁을 대접받은 것에 대한 감사 표시로 직접 드립 커피를 내려 주겠다며 식탁에서 일어났다.
“이거,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네. 자료 정리는 그렇게 귀신같은 사람이.”
드리퍼와 필터를 찾기 위해 싱크대 위 수납장을 연 라우는 폭격이라도 당한 듯 무질서한 내부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현이 이 집을 떠나면서 가사 일을 돕지 못하게 된 후로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2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는 동안 한 실장은 좀처럼 마음에 드는 가사도우미를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팬텀이 공사 중인 시기라 현재는 스스로 집안일을 하고 있었지만, 조만간 새로운 도우미를 구해야만 했다.
“일단 눈에 안 보이기만 하면 되니까 여기저기 쑤셔 넣고 있는 거지, 뭐. 그냥 더 넓은 데로 이사 갈까 생각 중이야.”
정리 정돈에는 소질이 없으면서도 주변이 깔끔하지 않으면 신경이 예민해지는 그녀의 습성을 잘 알았다. 운 좋게도 그는 팬텀 고객의 소개로 좋은 분을 만나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지만, 다른 것도 아닌 집안 살림을 믿고 맡길 사람을 찾는 것이 돈만으로 해결되는 고용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았다.
인품이 선하다고 해서 무조건 오래가게 되는 것만도 아니었다. 결국은 나와 얼마나 잘 맞는 사람인가에 초점이 맞춰진다는 점에서 살림을 맡길 사람을 찾는 일은 연애와도 닮아 있었다.
상부 장을 대강 훑어본 뒤 아래쪽 수납장을 차례로 열어 보고 있던 라우는, 더 넓은 집을 최후의 해결책처럼 얘기하는 한 실장의 말에 허리를 펴고 그녀를 돌아봤다.
“집에 방문해서 정리하고 수납해 주는 전문 서비스도 있다던데.”
“그런 정보는 대체 어디서 듣고 오는 거야?”
한 실장은 고개까지 젖혀 웃으며 샌드위치의 마지막 한 입을 털어 넣었다.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라우 역시 스마트폰 잠금 화면을 드래그하는 순간 범람하는 양질과 저질의 잡다한 정보에 꾸준히 노출되며 살아가는 한국 거주인이었다. 이전에는 핸드폰을 과거의 PDA 수준으로 사용했었지만, 요즘은 손에 쥐는 횟수가 상당히 늘었다.
부족한 수납공간에도 불구하고 벽면을 따라 보기 좋게 차곡차곡 쌓아 놓은 책들과 그림 도구, 서랍 속의 양말과 속옷 하나까지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는 세 평 남짓한 이현의 스튜디오를 떠올리던 라우는 왼손 엄지로 약지의 반지를 문지르며 다시 허리를 숙였다.
냄비 받침, 작은 찜기, 그리고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는 오너먼트와 함께 커다란 샐러드볼 안에 방치돼 있던 드리퍼를 발견한 라우는 드리퍼와 함께 구출해 낸 오너먼트의 끄트머리를 쥐고 흔들어 보였다.
“이건 왜 주방 수납장 안에 있는 거야?”
“아… 그냥 다시 넣어 놔 줘.”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식탁 위에 쓰러지는 한 실장의 부탁대로 지팡이 모양의 장식을 제자리(?)에 넣어 둔 라우는 식탁에서 일어난 지 약 10분 만에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시간을 들여 원을 그리듯 조금씩 필터 안의 원두 가루에 물을 부으면 커피 향이 공간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페로몬에 대한 저항감 탓에 향수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향기에 거북함을 느꼈던 과거와 달리 최근에는 조금씩 향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 시작은 이현의 페로몬과 그의 체취 때문이었지만, 만약 이현이 자신을 받아들여 주지 않았더라면 커피 향기에 휴식을 느끼는 여유는 불가능했다. 아니, 커피 향기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마도 알파이자 고스트로서의 자신을 이전보다 더 강하게 부정하게 됐을 것이다. 거의 증오에 가깝도록. 경고를 무시하고 과다하게 억제제를 복용해 후각을 망가뜨려서라도 페로몬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려 시도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용서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자신도, 지금 가지고 있는 미래에 대한 희망도 있을 수 없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잘못과 자신의 존재를 포용해 주는 것으로 스스로를 좀 더 수용할 수 있게 되는 삶을, 과거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가치 판단을 남의 손에 맡겨 버리는 의존적인 짓이라고 여겼었다.
하지만 지금의 라우는 더 이상 상대에게서 애정을 확인받으려 애쓰는 연인들을 비난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 그들의 심정에 공감하는 바였다.
두 잔의 커피를 가지고 식탁으로 돌아온 라우는 맞은편의 한 실장에게 한 잔을 건넸다.
그러고 보니, 처음 이현에게 작정하고 페로몬을 개방했던 장소가 이 식탁 앞이었다. 그때는 지금 한 실장이 앉아 있는 자리에 라우 본인이, 그리고 지금 라우의 자리에 이현이 앉아 있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인 당시의 이현을 떠올리자 입가가 간지러웠다. 막을 수 없이 새어 나오는 미소를 숨기려 라우는 머그를 입술로 가져갔다.
새로운 사람을 일상과 삶 속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너그럽지 못했었다. 자신의 주변에도 부모님 주변에도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는, 혹은 겉과 속이 다른 인물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했던 탓인지 사람을 믿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조건 없는 믿음으로 시작해 반복되는 실망을 겪으며 곁에 둘 사람을 걸러 내는 과정을 거치는 것보다, 처음부터 기준을 정해 두고 그에 부합하는 사람들만을 수용하는 편이 감정상으로도 시간상으로도 효율적이라 생각했었다.
그런 굳어진 관성으로 이현을 대하려 했지만,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그가 무해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자극을 조심스럽게 대하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호기심을 숨기지 않는 모습이 소극적 성격을 가진 여느 사람들과는 달랐다. 과감하거나 사교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폐쇄적이지도 않았다. 불평하는 법이 없는 과묵한 입술은 그가 또 어딘가에서 혼자 묵묵히 무리하고 있지는 않은지 시선으로 찾게 만들었다.
초반에 호감을 주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느 시기까지는 결점을 능숙하게 감출 수 있다고. 드물게 빠른 속도로 이현을 받아들이려 하는 자신을 저지해 보려 했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최인우와 그 사이에 연애적인 사건이 끼어들게 되지는 않을까, 거의 초조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당시에는 그것을 인정할 생각이 없었음은 물론이고, 이유를 알고자 하지도 않았었지만.
두고 보기만 하기가 조금 찜찜해서 던져 주는 여유로운 조언인 척, 바로 이 자리에 앉아 있었던 이현에게 연애에 대한 최인우의 가벼움과 위험성을 떠들어 댔던 자신을 떠올리자, 가증스러움에 바람 빠지는 헛웃음이 흘렀다. 당시의 이현이 그것을 남자의 추한 경계심으로 의식하지 못할 만큼 연애사에 둔한 사람이라서 다행이었다.
“이거.”
“…….”
한 실장이 식탁 너머로 파일 하나를 건네주면서 라우의 회상이 중단되었다.
“권주한이 제출한 보고서야.”
“요즘 왜 이렇게 시키지도 않은 보고서 작성이 잦아?”
라우는 파일을 받아 펼쳐 보며 피식 웃었다.
“국내 10대 대형 미술관과 갤러리들, 작년 상반기 관객 연령대 분포도야. 그거 넘기면 최근 5년 사이 연령대 변화를 짚은 그래프도 있고.”
그 외에도 공식적인 자료가 발표되지 않은 팬텀 주변의 몇몇 갤러리들에서 주한이 친분을 이용해 직접 수집한 수치들도 포함된 보고서였다. 변화가 한눈에 들어오도록 정리된 그래프들은 하나같이 20대들이 전시회의 새로운 주 방문객으로 떠오르고 있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작품 구매력을 가진 것은 여전히 40대 이상의 미술 애호가들이었지만, 팬텀처럼 어느 정도 덩치가 있는 중급 규모의 갤러리는 작품 판매 수익만이 아니라, 전시를 통한 수입도 무시할 수 없었다.
새로운 작가 발굴을 위해 오전부터 종일 예닐곱 군데의 소형 갤러리들을 순회하면서 라우와 한 실장이 직접 피부로 느낀 부분이기도 했다.
특정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개최했다고 해서 소속이 확정된 작가인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최근에는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독점 계약 시스템을 유지하는 갤러리에 소속되지 않은 채 자유로운 작업을 우선하는 추세가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전통적 권위를 가진 기존 미술계에서 인정받아 몸값을 올리는 것은 그들의 관심 밖이었다.
실험적 성격의 예술 공동체들은 장르를 뛰어넘은 다양한 협업을 추진하는 것은 물론이고, 작가들의 작품을 활용한 포스터와 엽서, 노트, 가방, 핸드폰 케이스, 의류 등을 소량 생산하며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품을 소비하는 젊은 세대에게 미술은 소장해서 전시해 두는 감상용이 아닌 자신의 취향과 개성을 드러내 주는 액세서리와도 같았고, 자신의 흥미에 부합하는 전시회를 선택해 관람하는 것은 여가를 ‘나답게’ 보내는 놀이의 연장이었다. 한국에서만 두드러진 현상이 아닌 피할 수 없는 세계적 흐름이었다.
클래식 음악이 그렇듯 ‘소수의 고상한 취미’라는 기존 이미지를 탈피해 미술이 좀 더 다양한 형태로 대중의 삶 속에 스며드는 것 자체는 환영할 일이었다. 하지만 이쯤에서 각 갤러리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한 번쯤 고려하고 점검해 볼 필요가 있었다.
오픈 당시에만 하더라도 팬텀은 파격적 경영관을 가진 이단아로 취급받았지만, 현재의 팬텀은 전통적 미술관을 고수하는 기존 업계와 실험적인 프로젝트들의 경계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도 저도 아닌, 이쪽에도 저쪽에도 온전히 섞이지 않는 모호한 정체성. 부정할 수도 없게 팬텀이 자신의 삶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는 생각에 라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커피를 삼켰다.
보고서에는 팬텀을 좀 더 유연한 방향으로 바꾸고자 하는 주한의 의욕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보고서 안에서 주한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싶은지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권주한이 이렇게 정신 차릴 줄 알았으면 유니는 진작 해외로 보낼걸 그랬어.”
“유니하고는 다르게 스스로를 잘 믿지 못하는 편이잖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닥치면 곧잘 해내는데, 그 전까지는 굳이 나서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책임을 주면 더 잘하는 타입이라는 거, 나도 이번에 알았어.”
흐뭇하게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한 실장이 표정을 바꾸어 눈을 내리깔고 차분히 덧붙였다.
“어떻게 보면 팬텀에 가장 동화적인 집착을 갖고 있는 게 주한이기도 해. 그래서 가끔 짠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그 말에는 라우도 동의했다. 생각에 잠겨 머그의 표면을 쓸던 한 실장은 문득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봤다.
“갤러리 SNS는 어떻게 하고 싶어?”
재오픈 후에 팬텀의 공식 SNS 계정을 열어 운영하고 싶다는 주한의 제안에 대한 질문이었다.
“하고 싶어 하잖아. 하게 해 주지, 뭐.”
대답 후에 커피를 마시던 라우는 맞은편의 시선을 의식하고 고개를 들었다.
“왜?”
“많이 변했다 싶어서.”
“요즘 권주한 열심히 하잖아. 열심히만 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하고 있고. 맡길 만하다 싶으니까 맡기자는 거지.”
“아니, 꼭 그 얘기가 아니라.”
빈 접시를 앞쪽으로 밀어낸 한 실장은 그 자리에 팔꿈치를 기대며 라우의 얼굴을 살폈다.
“팬텀에 미련 없는 사람처럼 굴잖아.”
“내가?”
“정이 떨어졌다 그런 게 아니라, 뒤로 한발 물러나서 꼭 생각이 딴 데 가 있는 사람처럼….”
좀처럼 정확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지, 미간을 좁히고 검지로 뺨을 긁던 그녀는 문득 어깨를 낮추며 피식거렸다.
“이현이가 없어서 그래?”
농담기를 섞어 던진 질문에 라우는 머그를 입술로 가져가며 웃었다. 하지만 부정하지도 않았다.
완전히 틀린 얘기는 아니었지만, 단지 그것만인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갤러리 내에 카페를 함께 열고 싶다는 주한의 기획을 허가했을 때부터, 그러니까 이현이 자신을 받아들여 주기로 한 것을 몰랐던 때부터 이미 무의식중에 팬텀과 심리적 거리를 벌려 왔는지도 모르겠다.
“이젠 둘이 잘 정리된 거잖아.”
“…….”
“……맞지?”
조심스럽게 확인하듯 재차 물으며 한 실장은 라우의 왼손에 시선을 주었다. 라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 말 파리에서 돌아온 후 라우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두고 한동안 주변이 시끄러웠다.
한국에서는 결혼을 약속하지 않은 연인 사이에도 반지를 맞추는 일이 드물지 않았기에, 라우의 반지가 단순한 커플링이냐 깊은 뜻을 가진 반지냐를 두고 그들 나름대로 추측이 있었던 것 같지만 라우는 거기에 대해 공식적으로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설명하기 복잡한 의미를 가진 반지이기도 했지만, 이 반지가 복잡한 의미를 가지게 되기까지의 과정 역시 간단하지가 않았다.
“류 대표는 어떨지 몰라도, 난 이현이가 ‘더 핸즈’에서 나온 후에 꼭 같이 일하고 싶어. 이현이가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게 아니라, 자기 그림을 가장 잘 이해하고 케어해 줄 팀은 팬텀이라는 확신을 주고 싶은 거야.”
라우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견 자체에 대한 동의라기보다는 한 실장이 어떤 마음인지를 충분히 이해한다는 끄덕임이었다.
“그러니까, 이현이한테 잘하라고. 류 대표 사적인 실수 때문에 이현이 놓치고 싶지 않거든.”
그녀의 말에 라우는 표정을 풀고 웃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건네는 농담이었지만 그의 발을 저리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시간이 꽤 흘렀을 거라는 체감에 시계를 확인한 라우는 아직 커피가 반 정도 남은 잔과 자기 몫의 접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실장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더 있다가 가. 인우도 이쪽으로 오기로 했는데.”
“…….”
인우라는 이름에 잠시 멈칫했던 라우는 몸을 돌려 개수대 쪽으로 향했다. 거절하겠다는 표시였다.
“사적으로 만나는 거지만, 아마 인우 개인전 얘기도 할 텐데. 같이 있지?”
“약속 있어.”
“이 시간에?”
한 실장은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더 권하려 들지는 않았다. 옆자리에 걸쳐 두었던 재킷을 집어 든 라우가 팔을 꿰며 현관 쪽을 향할 때 벨이 울렸다.
걸음이 느려지는 라우를 한 번 쳐다본 한 실장은 그를 앞질러 걸어가 현관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방문객은 인우였다.
“가려고?”
“어.”
어정쩡하게 현관에 선 채로 엇갈린 둘은 서로를 보는 둥 마는 둥 건성으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벽에 기대 팔짱을 낀 채 그런 둘을 보고 있던 한 실장이 혀를 찼다.
“뭐야. 둘이 아직도 껄끄러워?”
“껄끄럽긴 뭐가.”
유치하게 남겨 둔 앙금 따윈 없다는 듯 라우는 말도 안 된다는 웃음을 섞어 부정했지만, 어느 모로 보나 둘 사이의 분위기는 매끄럽지 못했다.
이현에게 키스했다는 사실을 인우에게 듣고 난 후 1년도 훌쩍 넘는 시간이 지났다. 그것에 불같이 질투하거나 인우를 원껏 몰아붙일 틈도 없이 체인징 사실을 알게 된 이현에게 집중해야만 했었다. 이현이 파리로 떠난 후에는 오랫동안 그 허함과 고통에 키스에 대한 질투 따위는 하찮게 느껴질 정도였다. 무엇보다 자신이 한 짓을 생각하면 키스를 이유로 인우를 비난하는 것은 자격 없는 짓거리 같았다.
이전처럼 가끔 둘이 바에 가서 술을 마시기도 하고, 나름대로 미안함에 잘해 보려 하는 건지는 몰라도 저쪽에서 좋은 술이나 안주를 마련해 집으로 찾아올 때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인우의 얼굴을 보면 키스가 떠오르는 순간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치밀어 오르는 흉포한 분노는 시간이 아무리 많이 지나도 사라질 것 같지가 않았다. 시간이 아무리 많이 흐른다 한들, 눈앞의 남자가 이현에게 키스를 했다는 사실 자체가 사라질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그럴 만한 짓 했어.”
한 실장 앞에서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며 물러서는 태도조차도 좋게 보이지가 않았다. 혹독한 죗값을 치르는 중이라며 유세라도 떠는 거냐고 비아냥거리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라우는 문을 향해 발을 떼었다.
시답잖은 문제로 다투고는 서로를 무시하는 고집 센 형제들을 보듯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쉰 한 실장은 라우에게 짧게 인사를 던지고는 먼저 등을 돌려 식당으로 돌아갔다.
“며칠 있다 파리 간다며?”
문고리를 잡았던 라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현 씨한테 들은 거 아니야.”
인우는 한 실장이 사라진 쪽을 가리키며 변명하듯 덧붙였다.
“개인적으로 연락 같은 거 안 해.”
“…….”
확실하게 해 두는 발언을 듣고 나자 간사하게도 마음이 다소 누그러지는 것을 느끼며 라우는 목을 가다듬었다.
“해 보지 그래? 반가워할 텐데. 나와는 달리 마음이 넓으니까.”
“이현 씨 이제 유부남…이나 마찬가지잖아.”
인우의 시선이 라우의 왼손을 향해 비스듬히 기울었다. 라우는 이번엔 보호하듯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주먹을 가볍게 말아 쥐었다. 이현은 이 반지에 아무런 책임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현관에 선 채로 어디까지 해명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이, 저쪽에서 먼저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남자에, 알파에… 과거에 내 결혼 상대에게 기습 키스한 전적까지 있는 놈이 계속 치근거리고 다니면 나 같아도 기분 별로일 것 같아서. 안부나 전해 줘.”
누그러지려 했던 마음이 이전보다 더 흉하게, 발로 힘껏 밟은 페트병처럼 확 일그러졌다. 인우의 구두를 내려다보고 있던 라우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이현이한테 전화해서 치근거릴 생각이었냐?”
“…….”
인우는 아차 싶은 얼굴이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는 것 정도는 안다. 이현에 한해 이전보다 더 쉽게 유치해지고 시비를 걸듯이 돼 버리는 자신을 라우 본인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거면 그냥 계속 연락하지 마라. 안부 정도는 내가 전해 줄 테니까.”
현관을 빠져나온 라우는 최인우 탓에 지체된 시간만큼 걸음을 재촉했다.
■ ■ ■
라우는 벌써 30분째 드레스룸에 머물고 있었다. 벤치형 소파 위에 옷더미를 쌓아 두고 오래 고민한 끝에 흰색 셔츠에 진회색 스웨터를 골랐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상의를 전부 벗은 라우는 셔츠를 집으려던 손을 멈칫 거두어들였다. 썩 내키지가 않았다.
색깔별, 소재별로 정리된 셔츠들이 가지런히 정렬된 가장 안쪽 옷장 앞으로 돌아가 새롭게 골라낸 것은, 몸을 따라 흐르는 유연한 소재에 넓은 칼라로 슬쩍 멋을 부린 검은색 셔츠였다.
편안하고 따뜻해 보이는 것도 좋지만, 섹시하게 보이고 싶기도 했다. 그것도 포기하기는 어려웠다.
두 벌의 상의를 소파 위에 나란히 눕혀 둔 그는 팔짱을 낀 채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잠시 고민하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니, 이젠 결정을 내려야 할 시간이었다.
그때껏 벗고 있었던 상체에 급히 셔츠를 걸쳤다. 침실이 아닌 복도 쪽으로 이어진 문을 통해 곧장 드레스룸을 빠져나간 라우는 단추를 잠그면서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하지만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푸른색과 흰색의 이미지에 잠시 정지해야만 했다.
그림이 저곳에 걸린 지 한 달이 지났지만, 마주할 때마다 매번 바다에 잠긴 것처럼 호흡이 멈추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에는 자신이 바닷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린 시절 상상처럼 돌고래라도 된 듯 원하는 대로 마음껏 몸을 움직이고 부유할 수 있도록 자신을 받아 주는 바다였다.
그림 속 손가락 한 마디만 한 서퍼는 이현이 아니라 라우 자신이었다. 캔버스 너머로 무한하게 확장하며 서퍼를 품어 주는 바다는 이현이었다. 라우가 감상하기에는 그랬다.
미소와 함께 거실을 가로질러 식당을 지나 주방으로 들어설 때쯤 라우는 맨 위의 두 개를 제외한 나머지 단추를 모두 잠글 수 있었다. 몇 병 남지 않아 썰렁해 보이는 전용 냉장고에서 와인을 한 병 꺼냈다. 건성으로 라벨을 한 번 확인하고는 오프너와 잔을 챙겨 식당 테이블 위 미리 세팅해 두었던 노트북 옆에 내려놓았다.
인테리어 소품 삼아 벽에 기대 세워 둔, 청동으로 테두리를 장식한 대형 거울 앞에서 그는 다시 한번 매무새를 점검했다. 팬츠 안으로 셔츠 자락을 정리해 넣고, 소매를 팔꿈치 아래까지 말아 올렸다. 너무 정갈하게 정돈된 것 같아,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얽어 살짝 흩트렸다. 세 번째 단추를 하나 더 풀었다가 의도가 너무 빤히 보이는 건가 싶어 자조하며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려놓기도 했다.
스스로도 신기할 만큼 이 시간이 다가오면 늘 떨렸다. 숨을 쉬는 것이 벅차서 심호흡이 필요했다. 자신을 아는 그 누구라도 이런 모습을 본다면 어울리지 않는다며 놀릴 게 분명했다.
노트북 앞에 앉은 라우는 달콤하지만 도수는 꽤 높은, 디저트용으로 구비해 놓았던 레드와인을 오픈해 잔에 반 정도 차도록 따른 뒤 두어 모금을 마셔 갈증을 달랬다.
두 손을 기도하듯 모아 코와 입을 가린 채 숨을 길게 내쉬고 나서야 통화를 연결했다.
“…….”
검게 정지해 있던 화면에 기다리던 얼굴이 나타나면, 오히려 떨림이 멎고 어깨의 높이가 낮아졌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 미소가 새어 나왔다. 라우는 헐겁게 말아 쥔 주먹으로 입가를 가리고는 두어 번의 헛기침으로 목을 풀었다.
“잘 지냈어?”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 화면 속에서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얼굴이 웃으며 대답했다.
[몇 시간 전에도 통화했잖아요.]
“그땐 얼굴은 못 봤잖아.”
저쪽에서도 노트북 모니터 상단의 렌즈를 통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계산하지 못하고, 그저 화면 속 얼굴을 좀 더 가까이 보고 싶다는 욕심에 몸이 자꾸만 앞으로 기울었다.
“살이 조금 빠졌나?”
[아닌데….]
“조금만 더 자세히 보여 줘.”
서울 기준 매주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자정(파리는 오후 5시였다)에 정기적으로 영상 통화 데이트를 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주중에 영상 통화를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로의 스케줄과 시차 탓에 평소에는 긴 통화가 어려웠다. 매일 틈이 날 때마다 목소리를 듣고, 사진을 찍어 메신저로 주고받으며 일상을 공유해도, 갈증은 좀처럼 채워지지가 않았다.
“지금 601호인가?”
[네. 방해 안 받고 집중하려고 여기로 왔어요.]
한창 은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뜨겁게 통화하던 중 옆방의 준이 찾아와 중단돼야만 했던 지난주의 데이트를 연상시키는 이현의 말에 라우는 소리 없이 웃으며 노트북 옆을 더듬어 와인잔을 찾았다.
‘더 핸즈’에서 채 5분이 되지 않는 거리에 라우가 마련해 두었던 스튜디오를 두 사람은 601호라 부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현의 스튜디오와 구분하기 위해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 지금은 하나의 별칭처럼 굳어졌다. 실제로 그 방이 601호이기도 했지만, 밀회를 위해 도시 외곽의 허름한 호텔에서 늘 같은 방을 빌리는 영화 속 연인들의 암호 같아서 마음에 들기도 했다.
이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생활했지만, 한 주에 한두 번 정도는 601호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스케치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춥지 않아?”
[커튼도 치고, 라디에이터도 켜 뒀어요.]
“옷장에 스웨터나 맨투맨티셔츠들 있으니까 쌀쌀하면 꺼내 입고.”
[네, 알아요.]
화면 속 이현의 웃음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라우는 의자를 좀 더 앞으로 끌어당겨 앉았다.
“벤과의 작업은 어떻게 된 거야. 그 얘기 좀 해 봐.”
[음, 전화로 말씀드렸던 게 다인데….]
반대로 이현은 약간 뒤로 몸을 물리며 머그를 감싸 쥐었다.
약 열흘 후 ‘더 핸즈’의 전시실에 걸리게 될 새로운 작품 두 점을 완성한 이현은 며칠 전부터 벤과 공동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현의 새로운 연작인 <구름의 여행>에서 영감을 받은 벤이 제안한 것으로, 벤이 직접 촬영한 뒤 그래픽 작업을 한 사진과 이현의 그림이 한 캔버스 안에서 겹쳐지는 형태였다. 처음부터 주제나 구성을 함께 계획한 것이 아니라, 릴레이 형식으로 주고받으며 이루어지는 실험적이고 자유로운 형태의 작업이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또 뜻하지 않게 이루어지는 조화와 충돌, 그로 인한 새로운 에너지와 방향. 그 자체가 주제나 마찬가지였다.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라우는 일부러 자세를 좀 더 느슨하게 바꾸며 말했다.
“안 그래도 이번 작품 완성하느라 피로가 쌓여 있었을 텐데, 괜찮은 건가….”
[규칙적으로 작업하는 거 아시잖아요. 전시 스케줄하고 관계없이 어차피 매일 작업량은 일정해서 그렇게 무리하는 건 없어요. 공동 작업은 처음이라 재미있기도 하고….]
흠. 라우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와인잔을 향했다. 왼손에 끼고 있던 반지가 유리에 부딪히며 마찰음을 냈다. 그리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라우는 습관처럼 왼손 엄지로 약지의 반지를 쓸고는 다시 잔을 고쳐 쥐었다.
긴 슬럼프에 시달리며 ‘더 핸즈’에서의 퇴실까지 고려하고 있었던 벤에게 창작 의욕이 생겼다니 다행이긴 했지만, 지난 화요일쯤 이현에게 이 공동 작업에 대한 얘기를 듣고 난 이후 내내 마음이 쓰였던 것도 사실이다.
[대표님이 먼저 얘기해 보라고 하셨잖아요.]
조심한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침묵이 너무 길어졌었나 보다. 화면 속 이현의 시무룩해진 얼굴과 목소리에 라우는 잔을 내려놓고 빠르게 표정을 환기시켰다.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
하지만 이현은 속지 않는 눈치였다. 라우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면서 멋쩍게 웃었다.
“그렇게 티가 났나?”
[그래서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
“아니야, 농담이야. 미술계에 몸담아 온 기간만 몇 년인데, 설마 내가 연인의 공동 작업도 이해 못 하겠어?”
그래도 완전히 의심이 가시지 않는지, 이현은 고개를 비스듬히 숙인 채 화면을 힐끔거렸다.
“작업 활동이 활발한 건 물론 환영할 일이지만, 몸 상할까 봐 그러지. 그게 다야. 내가… 곁에서 챙겨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절대 거짓말은 아니었다. 바로 곁에 있었다면, 이 정도로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을 테니까.
[젊고 건강하잖아요.]
“그래, 서이현 자기 관리는 내가 배워야 할 정도니까… 믿어. 믿는데도 괜히 걱정되는 거라 어쩔 수가 없네. 응원할게요, 서이현 씨. 질투 안 할게. 속상해하지 마라. 응?”
장난기를 가미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달래듯 이야기하자, 그제야 이현은 피식 웃었다.
[질투…가 싫은 건 아니에요.]
“응, 알아.”
화면 속에서 부자연스럽게 끊기는 미소를 바라보는 라우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보고 싶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흘러나온 중얼거림이었고, 이현에게 하는 고백이라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가끔 자신이 그의 곁에 없다는 사실이 허전함을 넘어 이상하게 여겨질 때가 있었다. 고문 비슷한 자격으로 주한과 막내들의 스터디 자리에 동석해 있다가도, 한 실장과 다른 갤러리들의 전시를 둘러보다가도, 고객의 초대로 다과 모임이나 식사 자리에서 사교를 하다가도… 문득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시간 낭비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불안감을 느껴야만 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보니까….]
이현이 팔을 쓸며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쑥스러워하는 특유의 표정이 그를 더 보고 싶게 만들었다.
“응, 그것도 아는데… 그래도 보고 싶네.”
너는 보고 싶지 않은 거냐고, 그런 보채는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보고 싶다는 마음이 그 안에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아니까.
“오늘 한 실장하고 잠깐 서이현 얘기 했었어.”
[어떤 얘기요?]
“‘더 핸즈’ 소속이 아니게 됐을 때, 작가 서이현은 어떻게 할 계획을 갖고 있는지 궁금해하더라. 지금 넌 어떤 갤러리라도 같이 일하고 싶은 작가니까. 한 실장이라면 더 그럴 거고.”
이현은 쑥스러운 듯 그저 웃었지만, 라우도 한 실장도, 그가 ‘더 핸즈’ 이후에 반드시 팬텀으로 되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청혼을 하면서 그에게 얘기했듯, 이현이 개인적으로도 화가로서도 더 많은 경험을 쌓길 원한다면 라우 자신은 그의 결심이 흔들릴 만한 어떤 제스처도 하지 않을 것이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거리를 둔 생활을 할 수는 없으니, 그의 이후 행보에 따라 주변을 정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각오도 되어 있었다.
“드러내 놓고 묻지는 않고 있지만… 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그런 공백기를 가져야 했던 건지 궁금해하는 눈치야. 반지에 대해서도 그렇고.”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단정한 얼굴을 바라보며 라우는 와인을 좀 더 마셔 가슴속의 불편한 감각을 억눌렀다.
“계속 이렇게 감출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감춰서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내 잘못만 공개되는 게 아니니까 결정이 쉽지 않네.”
[…….]
“불편한 화제인 거 알지만… 네 마음 무겁게 하려고 꺼낸 얘기는 아니야.”
[알아요.]
“너에게 뭔가를 감추고 혼자 결정하는 거. 그게 아무리 사소하게 느껴지는 사안이라도, 혹시 당장은 너를 곤란하게 하는 얘기더라도, 앞으로는 너에게 비밀 같은 건 절대 만들지 않기로 했거든.”
일주일 내내 기다렸던 데이트의 분위기를 좀 더 가볍게 하기 위해 라우는 일부러 진지한 표정으로 농담을 덧붙였다.
“널 생각하면서 벌이는 자위의 횟수까지도.”
[자위 횟수 정도는 비밀로 해도 돼요.]
다행히 이현은 웃어 주었다.
“봐줄 거야?”
[봐줄게요.]
이전의 자신이었다면, 둘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주변에 알리는 문제로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현에게 갚아 나가야 할 죄지, 다른 사람들은 상관없다는 이유로.
만나는 사람들마다 붙잡고 자기소개처럼 떠들고 다닐 생각은 없다. 하지만 자신의 비겁한 일면을 알 권리가 있는 사람들은 분명 존재했다. 그것을 자백하자면 고스트라는 무거운 비밀도 함께 털어놔야만 했다. 그 두 가지를 실토하지 않고서는 반지가 가진 절반의 의미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일단 그 얘기는… 대표님 여기 오시면 그때 자세히 하기로 해요. 저도 더 생각해 볼게요.]
체인징 사실을 고백하는 과정에서 이현의 오메가화와 그 이유에 대한 공개가 불가피했기에 다른 무엇보다 이현의 의사가 우선되어야만 했다. 지인들에게 자신의 실체를 까발리고 그것에 대해 그들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달게 받아들이겠다는, ‘참회하는 죄인’ 역할에 성실히 임하는 것만으로 될 문제가 아니었다.
[음… 근데요.]
드물게 먼저 화제를 전환하려 하는 이현의 시도에 귀를 기울이며 라우는 와인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자위 횟수… 궁금하긴 해요.]
와인을 막 삼키고 있던 라우의 입술이 다급하게 잔을 밀어냈다. 순발력을 발휘해 의자를 뒤로 빼며 물러난 덕에 청바지에 와인 자국을 남기는 것은 피할 수 있었지만, 바닥에는 몇 방울을 흘리고 말았다.
요즘 이현은 생각지 못한 발언으로 라우를 놀라게 할 때가 있었다. 페로몬의 영향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이런 부분에서 과감해지는 이현은 새로운 느낌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처음 만났던 때로부터 2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 시간만큼 이현도 나이를 먹었고, 언제까지나 상대의 리드에 얼굴을 붉히는 모습으로 남아 있을 리는 없었다. 원래의 성격도 내성적일 뿐 솔직하지 못하거나 내숭을 떠는 것과는 거리가 멀기도 했지만.
[비밀로 안 했으면 좋겠어요.]
티슈로 바닥의 와인을 닦아 내고 제자리로 돌아온 라우에게 한 번 더 쐐기를 박는 이현의 얼굴에서 일반적인 유혹적 표정을 찾기는 어려웠지만, 그의 쑥스러움과 과감해지려는 노력을 라우는 감지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현은 무거운 주제로 이 시간을 채우고 싶지 않은 마음에 일부러 더 용기를 내준 것일지도 모른다. 이럴 땐 정말 어쩔 줄 모를 정도로 그가 예뻤다.
“아… 그 얘기가 화제에 오르면 오늘 통화 꽤 길어질 텐데.”
라우의 허풍에 이현의 웃음이 좀 더 짙어졌다.
“요즘 자위할 땐 왼손만 쳐다봐도 사정할 것 같다는 것만 얘기해 둘게.”
라우는 화면 속 이현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빠르게 뛰는 맥박은 그를 향해 달려가기를 원했다.
라우는 와인을, 이현은 커피로 추정되는 머그 안의 음료를 마시며 잠시 서로를 응시하기만 했다. 먼 거리를 뛰어넘어 둘 사이에 고여 드는 긴장과 욕구를 의식하며, 라우는 어느새 바닥을 드러낸 잔에 와인을 좀 더 채웠다.
이현이 곁에 있는 것처럼, 그래서 조심스럽게 거리를 좁혀 손을 뻗으면 그를 만질 수 있는 것처럼, 스킨십의 분위기를 조성하려 몸 안의 피가 달콤해지고 있었다. 그에게 다가가고 싶었고, 뺨을 쓰다듬고 싶었고, 그와의 키스를 원한다는 감정을 전하고 싶었다.
기껏 통화를 연결해 놓고 침묵하고 있는 이 순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고요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자신 역시 라우와 다르지 않음을 전해 오는 이현을 힘주어 바라보던 라우는 반지를 쓰다듬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네 페로몬 맡고 싶어.”
[저두요….]
머뭇거리면서도 솔직한 진심을 얘기하는 이현을 뜨겁게 바라보다, 라우는 좀 더 느슨하게 자세를 무너뜨리며 팔걸이에 팔꿈치를 기댔다.
만약 지금 곁에 있었더라면, 이현에게 어떤 식으로 키스하고, 어떤 식으로 침대로 데려가 어떤 식으로 옷을 벗겨 어떤 애무를 하고 싶은지를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높낮이가 없는 어조와 낮은 목소리로, 손가락으로는 입술을 만지작거리면서, 최근의 심각한 뉴스에 대해 얘기하듯이.
이현은 언뜻 곤혹스러워 보이는 표정으로 중간중간 눈을 내리깔거나, 입술을 잘근거리거나, 애꿎은 머그를 쥐었다 놓으며 라우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들썩거리는 그에게서 짙은 페로몬이 풍기고 있을 게 분명했다.
골든은 페로몬에 대한 방어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상대의 방어력을 허물 수 있는 강력한 페로몬을 방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뛰어난 골든 알파와 골든 오메가가 서로를 향해 발산하는 페로몬이라도 이현과 자신 사이의 인력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라우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것이 고스트와 디디 사이의 인력인지, 아니면 서로에 대한 사랑에 기반을 둔 것인지, 혹은 그 둘의 동시 작용인지는 몰라도, 이현이 곁에 없는 지금도 자신의 페로몬이 제어력을 뚫고 불규칙하게 발산되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이현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서로를 미친 듯 갈구하는 두 젊은 육체에게 약 9,000킬로미터라는 거리는 가혹하기만 했다. 이현과의 사이에 몇 마디 야한 말들이 오가는 것만으로, 그의 페로몬의 향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청바지 안에서 자신의 알파가 반응하고 있었다.
“방으로 갈까?”
[…….]
자신의 허스키한 목소리에 끈적한 점성이 고여 드는 것을 느끼며 라우는 입술을 혀로 축였다.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으로 다시 걸까?”
[…….]
화면 속 이현이 붉은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아프게 비틀면서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트북과 와인을 그대로 두고 일어난 라우는 침실로 자리를 옮겼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봤을 때 통화가 길어질 것이 분명했기에 생수와 담배, 보조 배터리 등을 침대 옆 협탁으로 전부 옮겨 놓았다. 간접 조명의 밝기를 어둑하게 조정하고, 청바지를 벗어 소파에 걸쳐 두었다. 실제 이현과의 잠자리를 준비할 때와 똑같이 분위기에 신경을 썼다.
멀리 떨어진 연인과 영상을 이용한 일종의 폰섹스를 즐기기 위해 준비하는 자신의 모습에 헛웃음이 새기도 했지만, 이것마저 없었더라면 이전처럼 주말마다 파리행 비행기에 체크인을 했을 것이다. 이현에게 혼나더라도, 화가 난 이현이 자신을 냉랭하게 대하더라도, 도저히 못 참았을 것 같다. 영상 통화마저 없던 시절에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장거리 연애를 했던 건지.
다리를 길게 뻗고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카메라를 켜고 자신의 모습을 점검했다. 같은 시각, 이후에 이어질 비밀스러운 데이트에 기대감을 가지고 601호 자신의 침대 속으로 파고들고 있을 이현을 상상하며 통화를 시도했다.
잠깐의 대기 끝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던 화면이 작아지면서 오른쪽 상단으로 이동하고 대신 그 자리에 이현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사이 이현 역시 테이블 앞에서 침대 위로 자리를 옮긴 모습이었다.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메인 조명을 죽이고 침대 옆 은은한 스탠드를 켜 둔 화면 속 배경에 라우는 입가를 문지르며 피식거렸다.
“아… 우리 너무 목적이 적나라하다.”
입을 꾹 다문 채 소리 없이 따라 웃는 이현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미소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페로몬이 날뛰었다. 무릎을 세운 라우는 느슨하게 벌려 앉은 다리 위에 핸드폰을 쥔 팔을 걸쳤다.
“음? 뭐야… 옷 갈아입은 건가?”
소매를 두어 번 말아 올린 줄무늬의 긴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던 이현의 목 언저리에 흰색 셔츠 깃이 언뜻 보인 것 같았다.
[대표님 거… 잠깐 빌렸어요.]
“카메라 좀 멀리 밀어 봐요. 자세히 보게.”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하면서도 이현은 좀처럼 카메라의 렌즈를 정면으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몇 번을 더 조른 뒤에야 못 이기는 척 팔을 뻗어 자신의 상반신을 보여 주었다.
라우는 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커다란 손으로 하관 전체를 문질렀다. 이현이 입고 있는 것은 분명 자신의 셔츠였다. 601호의 옷장 속에 갖춰 둔 여벌 옷 중 하나였다.
[이거 입고 있으면… 조금은 같이 있는 것 같아서….]
이현은 변명하듯 말했지만, 옷장 안에는 침대 위에서 좀 더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스웨터나 티셔츠도 있었다. 자신의 옷을 입고 함께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면 꼭 불편한 셔츠일 필요가 없었다. 짓궂은 질문을 던져 곤란해하는 이현의 모습을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마른침과 함께 삼켜 버렸다.
영상 통화 데이트를 앞두고 30분 이상 옷을 골랐던 것처럼, 이현도 자신의 눈에 비치는 스스로의 모습을 의식해 주고 있다는 사실에 그의 모습이 더 사랑스럽게 보였다.
윗단추를 두어 개 푼 상태로 걸치고 있던 이현은 느슨한 셔츠의 깃을 잡아당겨 코와 입을 묻었다.
“세제와 섬유유연제 냄새밖엔 안 날 텐데.”
이 상황에서 어떤 자극도 흥분도 느끼지 않는 척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이현에게 보이지 않는 화면 밖에서 라우는 자신의 다리 사이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빠르게 몸을 불려 가는 성기를 자제시키듯 두어 번 주무르며 이현의 모습을 계속 주시했다.
[그냥… 대표님 냄새는 다 좋으니까.]
자신의 헐렁한 셔츠를 걸친 연인의 모습에 열광하는 심리에 라우는 별로 공감할 수가 없었다. 그 뻔한 고전적 유혹에 어떻게 자극을 느낄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고전이 고전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어깨선이 맞지 않고 품이 헐렁한 자신의 셔츠를 걸친 이현에게서 보호 본능 따위를 느낀 것이 아니다. 자신의 소유물을 상대와 공유한다는 데서 오는 친밀감이나 소속감에 더 가까웠다.
내가 사용하던 집에서 휴식을 취하며 내 옷을 스스럼없이 걸치고 있는 그의 모습, 거기에서 진한 밀착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밀착감에는 거리감을 유지할 때의 긴장이나 설렘과는 또 다른 종류의 섹시함이 있었다. 그가 좀 더 자신에게 속해 주길 원했고, 좀 더 분명하게 그의 것이 되길 바랐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 소속감을 의식하기 전부터 이미 그랬던 것 같다.
“서이현 그거 입고 있는 모습만 가지고도 두세 번은 사정할 수 있을 것 같아.”
라우의 말을 농담 섞인 과장으로 받아들였는지 이현이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 하얗고 커다란 베개를 등 뒤에 겹치고 하얀 셔츠를 입은 이현의 웃음기 남은 얼굴에 문득 장난스럽고도 은밀한 호기심이 떠올랐다.
[그래서… 몇 번이나 했어요?]
“…….”
무엇을 얘기하는지 몰라 잠시 기억을 더듬던 라우는 ‘자위 횟수’에 대해 얘기했던 아래층에서의 통화를 떠올리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말하면 날 짐승 보듯 할 것 같은데.”
[안 그래요.]
대표님 성욕은 어느 정도 아니까. 그렇게 덧붙이면서 살짝 눈을 내리까는 이현은 셔츠 자락을 만지작거리는 것 같았다.
“확실히 해 두고 싶은데, 알파가 성욕이 왕성한 건 맞지만, 요즘 내가 자위가 잦아진 건 너와 떨어져 있기 때문이지 단순한 성욕 문제가 아니라고.”
원하는 건 서이현이지 성욕을 풀고 싶은 게 아니다. ―거의 억울함을 담아 확실하게 못을 박는 라우에게 이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평균은 됐으니까, 한 번에 가장 여러 번 사정한 횟수만 알려 줘요.]
“자위로?”
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리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지금까지?”
크게 고개를 끄덕거리는 화면 속 연인은 아무래도 자신을 곤란하게 하면서 즐거워하고 있는 듯했다. 이쪽에서는 괴롭히고 싶은 충동을 힘들게 참았는데 이렇게 코너에 몰아 놓고 재미있어하다니. 억울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이런 방향으로 뻗어 가는 이현의 괴롭힘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었다.
“지난주에 우리 데이트 끝나고 나서, 혼자 여섯 번 정도 더 했어.”
[…….]
이현의 놀란 얼굴이 좀 더 멀어지면서 화면이 크게 흔들렸다. 라우는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검지로 화면을 가리켰다.
“짐승이라고 생각하지, 지금?”
[…….]
이현은 얼른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머뭇거리며 눈을 굴린 짧은 순간을 없었던 것으로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근데 통화할 때도 두 번이나….]
지난주 이 시간에도 화면 속의 서로를 통해 자극을 나누며 은밀한 시간을 가졌었다. 이현의 말대로 라우는 통화 중에 두 번 사정을 하긴 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애무와 긴 전희를 거쳐 이현의 몸의 길이와 무게를 감당해 내며 삽입하고 노팅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몇 시간씩 이어지는 제대로 된 섹스라면 모를까. 자신의 성기를 문질러 사정에 도달하는 자위 따위로는 아무것도 해소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현에게 어느 정도 시원해질 때까지 자위를 지켜봐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원래는 그 정도까진 아니야. 일반적인 남성 베타 정도의 성욕으로 조절해 가면서 살아갈 수 있어. 그런데 요즘엔….”
[알아요. 저 때문인 거. 그래서 안 싫어요. 오히려….]
알파·오메가에 대해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수준의 지식을 갖춘 지금의 이현이라면, 현재 자신의 상태가 교류 중인 특정 오메가에게 자극을 받아 성적으로 왕성해진 상태임을 알고 있을 터였다.
말끝을 흐리며 내리떴던 이현의 눈이 순간 생기를 띠고 다시 라우를 마주했다.
[사실 오래전부터 궁금했던 게 있는데… 웃지 말고 대답해 주세요.]
“네.”
고분고분한 대답에 피식 웃은 이현은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러는지, 몇 번이나 목을 가다듬고 눈을 굴리며 뜸을 들였다.
[대표님, 아니 쿤은… 성기가 자연적으로 완전히 시들 때까지 섹스해 본 적이 있어요?]
“…….”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웬만한 일로는 당황하는 법이 없는 라우였지만, 질문을 들은 순간 흠칫 몸을 뒤로 뺄 수밖에 없었다. 이현의 표정이나 말투가 본격적으로 자위에 돌입하기 전 분위기를 달구기 위해 던진 성적 농담이 아닌 진지한 궁금증을 드러내고 있어 더욱 그랬다.
[과거 경험을 캐자는 게 아니라….]
“그건 당연히 알지.”
라우는 턱밑을 문지르며 미간을 좁혔다. 이현이 먼저 이런 일에 대해 묻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질문에 성실하게 응하고 싶었다. 의식하지도 못한 채 살았던 부분이라 정확한 답변을 주기 위해 한참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없어.”
[한 번도?]
“한 번도.”
재차 확인까지 한 이현은 흠… 숨을 내쉬며 생각에 잠긴 얼굴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귀 뒤에 머리카락을 꽂은 그대로 손을 멈춘 채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감추려 힘을 주는 이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자신의 연인은 어떤 최초를 확인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라우는 무릎 위에 걸치고 있었던 핸드폰의 상단에 가볍게 이마를 박았다.
“누군가의 페로몬이 내 방어벽을 뚫은 적도 없었어.”
[…….]
“타인의 페로몬을 불쾌하지 않다고 느낀 것도 처음이었고, 노팅과 체인징을 전혀 조절할 수 없었던 것도… 처음이었어.”
라우는 핸드폰 액정 너머, 침대의 맞은편 벽에 걸린 그림을 잠시 바라보았다.
누구와도 다르다는 소외감에 경직돼 있던 자신을 위로해 준 그림과, 모든 것을 바쳐 쌓아 올렸던 기존의 자신을 무너뜨리고 파괴하면서까지 미치도록 원했던 그 그림의 주인. 그리고 그렇게 무너져 버린 자신과의 미래를 선택해 줌으로써 폐허 위에 다시 기회를 부여해 준….
그 그림과 그것의 주인이 지금 자신의 시야 안에 함께 있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운 좋게 손에 들어와 있는 그런 행운이 아니었다. 운명이나 연분 같은 것을 인정하지 않는 라우였지만, 산출해 낼 수도 없을 정도의 희박한 확률을 뚫고 자신의 디디를 만나 여기까지 온 여정을 더듬어 보면, 눈앞의 존재는 상식적 언어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이현과 몸을 섞을수록 그의 페로몬도 빠르게 강해졌었다. 최초의 노팅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에는 이미 삽입을 한 상태에서는 무슨 수를 써도 체인징을 억제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더, 그에게 말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체인징을 막을 방법이 없었으니까.
어떤 골든 오메가도 넘어서지 못했던 방어벽을 너무나 간단히 허물어뜨린 베타.
당시에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이현의 페로몬의 영향력 아래 있을 때의 자신은 러트 상태의 알파, 그 자체였다.
이성도 교육된 사회성도 완전히 날려 버린 채 눈앞의 오메가와 페로몬을 섞으며 그 몸 안에 몇 번이고 정액을 퍼붓는다는 생식적 본능에 점령된 상태의 알파.
평소에 아무리 점잖고 온순하고 다감한 기질을 가진 알파라도 러트 상태에서는 본능이 우선된다. 히트 상태의 오메가 역시 마찬가지다. 베타들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발정 상태였고, 라우 자신도 가장 피하고 싶어 했던, 결코 되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의 페로몬에 점령된 순간에는 어떤 불쾌감도 느낄 수 없었던 건지.
어떤 말로도 충분하게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로, 모든 최초이자 절대라는 것을, 서이현이라는 의미와 영향력의 절댓값을 자신의 연인은 아직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뭐 어떤가. 평생을 두고 몇 번이든 그가 알고 싶어 할 때마다 되풀이해 들려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손 하나 까딱일 힘도 없는 것처럼 늘어져 누운 상태로 항상 그런 걸 궁금해하고 있었구나. 서이현은.”
손안의 이현을 향해 상체를 구부리며 라우는 다소 짓궂게 웃어 보였다.
[그냥… 노팅 직후에도 쿤은 항상 발기한 상태니까, 만족 못 하는 건가 싶어서….]
시선을 피하면서 목을 주무르는 이현은 일부러 그러는 건가 싶을 만큼 애를 태우고 있었다.
“일단, 지금 발기한 상태부터 어떻게 좀 해 줬으면 좋겠는데. 서이현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난 아까부터….”
잠시 말을 멈춘 라우는 핸드폰의 방향을 틀어 아래를 비췄다. 브리프의 중심을 팽팽하게 밀어내고 있는 성기의 불룩한 부피감을 이현에게 드러냈다. 귀두의 형태가 옷감 위로 뚜렷하게 드러날 정도로 제대로 부풀어 있었다.
“이런 상태거든.”
다시 얼굴 쪽을 향해 끌어온 화면 속에서 이번에는 이현도 확실하게 궤도에 들어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라우는 조금 더 얼굴이 괜찮아 보인다고 생각하는 각도로 렌즈의 위치를 조정하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얼굴을 이용해 상대의 성욕을 더 강하게 끌어내려 하는 자신의 값싼 유혹에 가벼운 환멸을 느끼면서.
“서이현도 이렇게 만들고 싶은데.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원하는 대로 움직일 준비가 돼 있다는 듯한 수동적인 발언에 이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이 만든 진동이 성기를 울리는 것 같았다.
[음… 셔츠 단추, 풀어 주세요.]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라우는 망설임 없이 셔츠의 단추로 손을 뻗었다. 두 개의 단추는 처음부터 채워져 있지 않았다. 좀 더 위에서 아래를, 상반신을 넓게 비추도록 핸드폰을 천장을 향해 들어 올린 채 세 번째 단추부터 빠르게 풀어 내려갔다. 벌어진 틈으로 손을 넣어 자신의 가슴을 넓게 쓸었다. 도발하는 자세에 이현이 낮은 웃음을 흘렸지만, 이미 그 웃음은 단순한 재미나 즐거움의 표현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몸을 더 느슨하게 젖혀 반쯤 눕듯이 기댄 채 상반신 전체를 느리게 쓰다듬으며 화면 속 이현을 향해 속삭였다.
“네가… 지금 내 배 위에 있었으면 좋겠어.”
[…….]
라우의 목소리는 벌써 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양쪽으로 갈라진 셔츠를 더 바깥쪽으로 밀어내 노출의 강도를 높였다. 숨을 천천히 크게 몰아쉬는 탓에 더 선명하게 부각된 복부의 근육 위를 문지르며 이현에게 자신의 바람을 털어놓았다.
“내 배 위에 앉아서… 가슴 위로 상체를 숙이고… 얼굴을 만져 줬으면 좋겠어.”
화면 속 이현이 입술을 달싹거리다 질끈 깨물었다. 붉은 살점을 빨고 싶어서 허벅지에 강한 힘이 들어갔다.
서서히 흐트러지기 시작하는 서로의 호흡에 귀를 기울이며, 서로의 모습에 집중했다. 실제 섹스와 달리 지금은 원하는 모습과 부분만을 편집해 상대에게 공개할 수 있었다. 6인치의 프레임 속 모습은 이현이 자신에게 보이고 싶어 하는 그의 모습이었고, 달리 말하자면 화면 밖의 이현은 그가 자신에게 숨기고 싶어 하는 부분들이었다. 숨기고 싶지만, 곧 드러내게 될.
이현의 손이 머뭇거리며 입술로 향했다. 자신이 해 주던 것처럼 손가락 사이에 살점을 쥐고 꼬집듯이 비트는 이현을 보며 라우는 화면 밖에서 브리프 위로 성기를 쓰다듬었다. 앞을 뚫고 나올 것처럼 바짝 기립한 페니스를 어르고 달래듯 느리게 훑는 것만으로도 삽입을 원하는 허리가 들썩거렸다.
이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그렇게 하면… 나랑 키스하는 기분인가?”
이현이 고개를 저었다.
[부족해요.]
섹스를 할 때가 아니면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응석을 부리는 것 같은 이현의 목소리에, 으음… 라우는 낮게 신음하며 속옷의 밴드 안으로 손을 찔러 넣었다.
키스하고, 피부를 어루만지고, 유두를 자극하고, 엉덩이를 핥으며 안을 탐할 이현의 육체가 없으니 할 것이라고는 곧장 자신의 성기를 자극하는 시시한 행위뿐이었다. 발기시키기 위해서라면 사실 마찰을 일으키며 문지를 필요조차 없었다. 이현이 몇 마디 말을 하고 웃어 주는 것만으로도 너무 잘 서서 문제였으니까.
“예전에 우리 같이 찍었던 동영상. 보면서 한 적 있어?”
[…….]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지그시 내리뜨는 눈이 이미 긍정을 말하고 있었다. 벌써 한참 전에 찍었던 그 영상을 재생시켜 놓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이현을 잠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프리컴이 울컥거리며 쏟아져 음경을 타고 손을 적셨다. 당장이라도 어딘가에 성기를 찔러 넣을 것처럼 엉덩이 근육에 바짝 힘을 주었지만, 힘을 쓸 곳이 없었다.
“그때처럼… 키스하고 싶어.”
[흐, 흐읏….]
영상 속 키스 장면을 떠올리는지, 이현이 낮게 신음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입술을 비틀던 손가락을 입 안으로 한 마디쯤 밀어 넣었다. 그는 긴장을 풀고 서서히 해체되고 있었다.
“혀… 밖으로 꺼내서 문질러 봐요.”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던 이현은 손가락을 문 그대로 입술을 열었다. 촉촉하게 젖은 붉은 살덩이가 내밀어지고 색색거리는 숨결과 함께 그의 중지와 검지가 그 위를 뒹굴었다.
눈에서 열이 느껴질 정도로 라우는 이현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하… 흐… 후… 무거운 웨이트 기구를 들어 올릴 때처럼 호흡을 조정하며 브리프의 밴드를 밀어내 성기를 끄집어냈다. 화면에는 아슬아슬하게 골반까지만, 음모가 무성해지기 시작하는 경계선까지만 드러나 있었지만, 몸의 중심을 향한 자신의 손목과 팔의 움직임만으로도 그가 자신의 다리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거라는 걸 알았다.
혓바닥을 문지르는 이현의 어깨 역시 간헐적으로 움찔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하반신에 느껴지는 짜릿함이 그의 민감한 몸을 움츠러들게 하고 있을 것이다.
타액을 잔뜩 묻힌 이현의 손가락이 화면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평소보다 느리게 깜빡거리는 눈꺼풀에 입을 맞추고 싶어서 라우는 자신도 모르게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서로의 혀를 빨고 싶은 욕구에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자꾸만 입술을 축이고 있었다.
손에 쥔 음경은 곧 폭발할 것처럼 단단했다. 삽입을 원했다. 이런 손장난 따위가 아니라 이현의 내벽에 의해 조여지고 압박되는 마찰로 절정에 도달하길 원했다.
벌써부터 핸드폰을 제대로 들고 있기가 힘겨운지, 이현은 왼팔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매트리스 위에 핸드폰을 받치고 아래에서 위로 비스듬히 자기 모습을 비췄다. 목덜미 부근이 훤히 드러나는 흰 셔츠를 걸친 이현의 상반신이 화면의 절반을 채웠다. 살짝 고개를 숙여 렌즈를 내려다보며 그가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소리….]
“들려?”
성기를 빠르게 훑어 내는 아래쪽에서 얕은 물웅덩이를 잘박거리는 것 같은 젖은 마찰음이 일고 있었다. 그에게도 들리고 있을 게 뻔했고, 그러라고 일부러 더 손의 압력을 조절해 찌걱거리는 소음을 유발하고 있으면서도 라우는 모르는 척 굳이 그에게 확인을 요구했다.
이현이 곁눈질로 화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여 줘요. 보고 싶어요….]
그의 요구대로 핸드폰의 방향을 바꾸었다. 손으로 쥐지 않아도 천장을 향해 바짝 서 있을 만큼 음경에는 뿌듯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 핏줄이 돋은 뿌리를 쥐고 귀두까지 느리게 훑으며 거슬러 올라갔다. 음경 전체를 뒤덮고 흐르던 쿠퍼액이 기둥을 말아 쥔 라우의 손에 쓸려 거꾸로 밀려 올라가는 장면이 화면에 그대로 노출되고 있었다.
이현을 좀 더 도발하고 싶었다. 그가 자신을 더 원하고, 자신의 성적 능력에 매료되기를 바랐다. 가진 건 몸뚱이밖에 없다는 막무가내식의 패기도 아니고, 성적 능력으로 어필하고 싶다니. 원색적이고 천박한 접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을 주변의 어떤 남자보다 쓸 만하다고 평가해 주길 원했다.
성기가 흔들릴 때마다 그가 항상 힐끔거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라우는 아랫배에 붙도록 음경을 잡아당겼다 놓으며 탄력을 과시했다. 고환 쪽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벌떡 튕길 때마다 쿠퍼액이 튀어 올랐다. 아예 뿌리를 쥐고 더 노골적으로 흔들어 대기도 했다. 지나치게 묵직한 데다 길게 뻗은 성기가 둔하게 끄덕거리며 헐떡이는 모습은 화면 속에서 더 음란하게 연출됐다.
이현이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음경 전체가 지끈거렸다.
이현이 어떤 표정으로 이 흉측한 물건을, 음란한 쇼를 보고 있는지 궁금했다. 사타구니 아래쪽에서부터 상반신을 비추도록 핸드폰의 방향을 조절했다. 자신의 얼굴까지는 화면에 잘 잡히지 않았지만, 일그러져 신음하는 이현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현은 좀 전보다 더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사이 셔츠의 단추가 전부 풀어져 있었고, 양쪽으로 벌려진 옷자락 사이로 흰 가슴이 슬쩍슬쩍 아른거렸다. 타액을 바른 손가락으로 지분거렸던 건지, 이현의 유륜 주변이 번들거렸다.
“젖꼭지, 만졌던 건가?”
[…….]
라우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이현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화면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다시 돌아온 이현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정면이 아닌 45도 각도의 측면에서 이현을 비추는 화면은 여전히 위아래, 좌우로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핸드폰을 쥐지 않은, 팔을 아래로 뻗은 오른쪽 어깨의 움찔거림이 심상치 않았다.
“서이현, 지금 뭐 해?”
[흐으, 흑. 흐….]
이현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화면을 힐끔거리며 라우의 성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현아, 아래 좀 비춰 봐.”
[시… 싫으… 흑….]
이현이 턱을 쳐들며 신음함과 동시에 핸드폰이 젖혀지면서 시야에서 그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 라우는 초조했다.
“우리 지금 섹스 중인 거잖아. 난 이렇게 다 보여 줬는데.”
[…….]
이현이 고개를 좀 더 돌려 화면을 바라봤다. 왼쪽 무릎 위에 핸드폰을 걸치고 있는 것 같은데, 화면에 비치는 얼굴은 거의 옆모습에 가까웠다. 다리를 제법 벌리고 있어야 가능한 각도였다.
렌즈를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이현의 얼굴은 불그스름하게 익어 있었다. 뺨도 입술도 빼꼼히 보이는 혀도 온통 촉촉하고 뜨거워 보여, 화면 안으로 달려들고 싶게 만들었다.
“보여 줘.”
[…….]
간절함을 담은 애원조의 목소리였다.
엄청난 아마추어가 다급하게 촬영한 영상처럼 한바탕 화면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화면을 채운 장면에 라우는 욕설을 뱉으며 음경의 뿌리를 틀어쥐어야 했다. 상체가 저절로 튀어 올랐다.
차마 완전히 적나라하게 공개하지는 못하겠는지,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히 기울인 렌즈는 이현의 다리 사이를 비추고 있었다.
세운 무릎을 넓게 벌리고 커다란 베개에 상체를 기대 엉덩이를 아래로 뺀 이현은 허벅지 바깥쪽에서부터 팔을 감아 애널 안에 중지를 넣고 있었다.
깨끗한 흰 피부와 대조되는 검은 음모에서 촉촉한 윤기가 흘렀다. 매끈한 아랫배가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하고, 발갛게 부은 페니스는 벌어진 셔츠 사이로 드러나 더욱 은밀한 인상을 주었다. 반쯤 눕듯이 베개에 기대 있는 자세 탓에 발기한 페니스는 그의 아랫배에 붙어 있었다. 화면은 그렇게, 벌린 사타구니와 성기만을 비추고 있었다.
[흐… 흐윽, 흐….]
끙끙거리는 이현의 신음이 화면과 겹쳐지고, 라우의 맥박이 빠른 속도로 거칠어졌다. 뿌리를 쥐고 있는 음경이 불끈거리며 쿠퍼액을 쏟아 냈다.
“더… 자세히 보여 줄 수 있어?”
마르고 갈라진 목소리는 격정을 억누르느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현의 손가락이 더듬고 있을 감촉을 알고 있었다. 촉촉한 애액으로 가득 차 질척하게 감겨 오는 점막의 구불구불함. 이현의 손가락에 질투를 느낄 지경이었다. 더 자세히 보고 싶었다.
“서이혀언….”
성기를 비추고 있던 핸드폰을 얼굴로 가져와 재촉하며 졸라 댔다. 이현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가빠지는 신음이 라우를 더 안달하게 만들었다.
[흐윽, 흐… 쿠, 쿤….]
“어, 이현아.”
힘겨워 보이는 모습으로 라우를 찾는 목소리 끝에 위에서 넓게 비추던 화면의 범위가 한순간 확 좁혀졌다. 이번엔 극단적일 정도로 가까웠다. 안으로 촘촘히 빨려 들어간 주름과 손가락뼈의 움직임까지, 바로 코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했다. 이현의 회음에 얼굴을 박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라우는 본능적으로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이현의 손가락 주변으로 새어 나온 애액이 그의 손등을 타고, 벌린 다리 사이를 타고, 스프레드 위로 줄줄 흐르고 있었다. 라우의 귀두에서 흐르는 쿠퍼액 만큼이나 많은 양의 애액은 안에서 뭔가가 터진 것처럼, 뭔가가 잘못된 것처럼 쉼 없이 흘러내렸다.
“미치겠네.”
라우는 고개를 젖혀 침대 헤드에 뒷머리를 박아 대며 잇새로 중얼거렸다.
[흐, 흐윽, 쿤….]
보이지 않는 이현의 얼굴이 자신을 찾는 목소리에 애가 달았다. 페로몬이 일으키는 비정상적 수위의 흥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그는 아직 경험이 부족했다. 애액이 줄줄 새는 아래를 틀어막은 채 들썩거리는 이현의 몸을 어떻게든 해 주고 싶었지만, 자신은 9,0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현아, 빨고 싶어.”
[하으, 흐… 흐.]
여러 번 침을 삼켜도 계속해서 목이 탔다. 전신의 핏줄이 파열될 것 같은 흥분으로 라우는 헉헉대며 빠르게 음경을 훑었다. 혈관을 내달리는 페로몬이 이현을 원했다. 고스트로서의 자신이 디디를 원했다. 눈앞에 데려다 놓으라며, 사방의 벽에 몸을 부딪쳐 가며 자해를 하듯 울부짖었다.
“서이현 거기, 빨갛게 말랑말랑해질 때까지 내가 빨아 주고 싶어.”
[해 줘…. 빨아 줘요…. 아위가 부드럽게 해 줘.]
함께 있을 때, 이현은 섹스 중에 뭔가를 요구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가 어떤 형태의 애무를 원하기도 전에 라우가 가만히 두질 않았으니까.
하지만 폰섹스 중에는 달랐다. 곁에 없는 서로를 통해 절정에 도달하기 위해 불가능한 스킨십을 요구해야만 했다. 요구하고 그것에 대답하는 것만으로, 상대의 혀가 은밀한 곳으로 파고들어 날름거리는 상상을 동원해 쾌감을 고조시켜야만 했다. 라우 또한, 요령 없이 안을 휘젓는 그의 손가락을 빼내고 대신 자신의 혀를 찔러 넣은 다음 그의 가장 연약한 부위를 집요하게 공략하는 상상만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베타들에게는 어떤지 몰라도, 페로몬에 지배된 상태에서의 알파와 오메가에게 그건 고문이었다.
“지금 내 페로몬… 터질 거 같아.”
얼굴을 잔뜩 찌푸린 라우는 성기를 움켜쥐고 등허리를 높이 밀어 올렸다. 이현의 페로몬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 있음에도, 페로몬 분비를 조절할 수가 없었다. 이현에 한해 자신의 컨트롤 능력은 처음부터 제 기능을 하지 못했었다.
“네가 맡아 줬으면 좋겠어. 이거 맡고 너 미치는 거 보고 싶어.”
[맡고 싶어요…. 아위 페로몬, 계속… 여기 있는 것 같아.]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이현의 아래가 뻐끔거리고 있었다. 부드러워지고 있는 것이다. 받아들일 준비를 끝내고 자신을 향해 벌름거리는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다. 이현의 페로몬을 온몸에 뒤집어쓰고 그를 안고 밤새 짐승처럼 얽히길 원했다.
“나도 그래…. 서이현 다리 사이에 파묻혀 있는 것 같아…. 이현아, 더 벌려 줘. 안에… 들어가게 해 줘.”
더는 억제할 수 없는 질주 본능에 상체를 세운 라우는 핸드폰을 매트리스 위에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무릎을 꿇은 채 다리를 넓게 벌려 뒤꿈치에 엉덩이를 올리고 오른손으로 성기를 감쌌다. 대부분의 베타 남자들처럼 그저 손으로 성기를 훑어 내며 사정에 이르는 것만으로는 만족스러울 만큼 열기를 발산할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열량을 소모하기 위해, 이현의 다리 사이를 비추는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라우는 허리를 흔들었다.
이현이 검지를 하나 더 애널 안에 밀어 넣었다. 아무런 저항감 없이 부드럽게 손가락을 받아들이는 입구의 벌어짐을 주시하며 입술을 혀로 핥았다.
[으, 음… 흐윽….]
그의 신음이 낮아지면서 흐느낌에 가까워졌다.
안에서 양 손가락 사이를 조심스럽게 벌린 이현이 시트 위에 엉덩이를 비비적거렸다. 가로로 긴 타원형으로 벌려진 구멍에서 유백색의 탁한 애액이 주르륵 새어 나왔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왼쪽 주먹을 움켜쥔 라우는 매트리스 위로 상체를 무너뜨렸다.
날뛰는 음경을 이현의 좁은 몸속에 끼우고 침대를 부술 듯 허리를 흔들고 싶었다. 전신이 갑갑한 사슬에 죄이는 것 같았다.
오메가로 변하고 있는 이현의 몸속을 드나들고 싶은 욕구, 자신의 디디와의 결합을 원하는 갈증은 성욕이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도 부족했다. 호흡하려는 본능만큼이나 생명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처럼 느껴졌다. 닿지 못하면 죽을 것처럼.
그 몸을 꽉 껴안고 밤새 몇 시간이고 안쪽을 찌르고 싶었다. 퍼부어진 쿠퍼액과 엄청난 양의 정액, 이현 스스로 내보낸 분비물이 뒤섞여 완전히 달콤하게 녹아내린 내벽에 수없이 성기를 비비고 몇 번이고 노팅하며 그를 몸부림치게 하고 싶었다. 머릿속의 조합과 배열이 엉망이 돼서 본능만 남은, 자신이 경멸하던 그런 알파가 된다 해도, 상대가 이현이라면 상관없었다.
매트리스 위에 엎어져 힘겨워 보이는 이현의 신음을 들으며 라우는 얼굴을 몇 번이나 쓸어내렸다.
“이현아… 힘들지? 손가락, 넣었다 뺐다 해 봐…. 내가 해 줬던 것처럼, 응? 빨리 가야, 편해지지….”
[흐으, 흐… 싫… 안에, 넣고 싶어…. 아위가, 해 줬으면 좋겠…어…. 이거 싫, 싫어…. 비벼 줘…. 노팅, 하고 싶어…. 아위가 해 줘….]
이성의 범주를 완전히 벗어난 횡설수설 끝에 이현은 핸드폰을 놓쳐 버렸다. 화면은 무의미하게 천장을 비추고 있었지만 아래를 쑤시는 삽입음과 흐느낌 같은 그의 신음은 계속 이어졌다.
“이현아… 내가 미안해…. 내가… 진짜 나쁜 놈이야….”
[쿤… 쿠운… 하으, 으, 아위….]
이현이 성적인 흥분 때문이 아니라 곤경과 위험에 처해 자신을 찾는 것처럼 느껴져, 미칠 것 같았다. 페니스는 사정을 향해 치달아 가고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가슴은 통증으로 저릿했다.
화면 너머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현이 절정을 맞이한 듯, 한동안 끊어질 듯 말 듯 연약하게 이어지는 나른한 신음만이 계속됐다.
시트 위를 쥐어뜯으면서, 대상 없이 무의미하게 허리를 흔들며 라우 역시 뒤이어 사정에 도달했지만, 육체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아무것도 해소된 것 같지가 않았다.
이번이 세 번째 폰섹스였고, 이현은 매번 이전보다 더 솔직하고 섹시한 모습으로 자신을 홀리게 했지만, 온갖 음란한 말들과 과감한 화면으로 서로를 자극하는 와중에도, 심지어 사정의 순간에조차, 가장 원하게 되는 것은 늘 포옹과 키스였다.
안고 싶고, 입 맞추고 싶었다. 이현의 모든 욕구에 응해 주고 싶었다. 오르가슴에 도달한 후 잘게 떨며 숨을 몰아쉬는 그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경련하는 내부를 오래 느끼고 싶었다.
사정 후에도 전혀 가라앉지 않은 성기를 움켜쥔 채 시트 위에 엎어진 상태로 라우는 왼손의 반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만지작거렸다.
“보고 싶다.”
이번에도 역시 이현에게 들려주는 고백이라기보다는, 저장할 수 있는 범위 이상으로 가슴에 고인 감정이 저절로 입술을 열고 나온 발화에 가까웠다. 사정의 여운에 흐느적거리며 시트 위에 몸을 비비고 있을 이현이 그 혼잣말을 들었을지, 그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저 혼자 묵묵히 천장을 향해 누워 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어 엎드린 자신의 얼굴을 비추도록 액정을 옆으로 세웠다. 언제부터 화면을 마주하고 있었던 건지, 베개에 모로 누운 이현이 렌즈를 통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좋았어?”
이현이 땀에 젖은 얼굴로 엷게 웃었다. 좋았다고도, 별로였다고도 할 수 없어 곤란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직 해소되지 않은 격정이 몸 안에 가득해 자신의 손길을 원하는 얼굴이기도 했다.
“아직 안에 움찔거리겠다. 그치?”
그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아래가 동하는지, 이현은 입술을 지그시 물면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화제를 돌리려는 듯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웃음기 띤 표정으로 짓궂게 물어 왔다.
[오늘은… 이따 몇 번 더 할 것 같아요?]
사정 이후 이성이 돌아온 척하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아직 떨림이 남아 있었다. 뺨을 시트에 대고 누워 있던 라우는 팔꿈치를 짚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팔꿈치를 괴고 엎드린 채 손가락을 얽어 머리카락을 흩트리며, 라우는 생각에 잠긴 척 아랫입술을 물고 눈을 가늘게 뜬 채 허공을 바라봤다.
“음… 오늘은 안 할래.”
[거짓말.]
믿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야유하듯 웃어 버리는 이현의 얼굴을 화면 위로 어루만졌다. 그가 농담으로 여긴다 해도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외로움의 실체를 그가 다 모르기를 바랐다. 애정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만 아는 것으로 충분했다.
“우리 이제 며칠 후에 만나니까, 오늘부터는 금욕하려고.”
[어… 안 그래도 될 것 같은데. 안 놀릴게요. 건강에 안 좋을 수도 있고….]
며칠간의 금욕 후에 자신에게 퍼부어질 성욕이 겁나는지 흠칫 표정을 굳히며 진지하게 설득하려 하는 이현을 보며, 액정 위에라도 키스를 퍼붓고 싶은 기분이었다. 유치하고 유난스럽게 티 내는 연애라고 비웃었던 그런 방식의 애정 표현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원하고 있는 자신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자위조차도 이제는 네가 곁에 없다는 사실에 대한 자학적 확인 같아서 내키지 않는다고 자백하는 대신, 쑥스러움과 자괴감을 무릅쓰고 입술을 동그랗게 모아 내밀었다.
[…….]
뭘 요구하는지 알아챈 이현은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잠시 피식거렸다. 안 어울리는 짓을 하고 있다는 건 알지만, 이왕 유치해지기로 했으니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기다렸다. 여전히 웃음기가 가득한 얼굴로 화면을 돌아본 이현은 해 줄까 말까 고민하는 건지 눈을 굴리며 두어 번 목을 풀었다. 그러고는 입술을 오므리며 다가왔다가 쪽 소리가 나도록 압력을 주며 뒤로 멀어졌다.
민망한 건지 으으, 하는 의성어와 함께 잠시 그가 화면에서 사라졌다. 베개에 엎드려 웃는 목소리를 들으며 라우 역시 어깨를 떨며 웃음을 흘렸다. 서로 안 어울리는 짓을 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9,000킬로미터의 장거리 연애에 이런 수위의 유치함이 가끔 끼어드는 정도는 눈감아 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현과 자신을 변호했다.
“미리 말해 두는데, 일주일 내내 안 재울 거야. 아니, 서이현이 잠들더라도 난 계속할 거야.”
다시 화면으로 돌아온 이현에게 애처럼 부은 목소리로 선언했다.
9,000킬로미터라는 숫자는 라우에게 물리적 문제라기보다는 정서상의 문제였다. 각오했던 것보다 더 많이 고통스러웠지만, 장거리 연애에 따른 애달픈 그리움 정도라고 이현이 인식하도록 표현에 늘 주의했다. 주말마다 파리를 왕복하며 몰래 그를 눈에 담고 돌아와야 했던 시절에 비하면 이건 아주 행복하고 꿈 같은, 기꺼이 감수할 가치가 있는 고통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