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숨김없이
옆자리로 옮겨 선 라우가 부축하듯 어깨를 감싸 왔다. 그의 코트 자락을 붙잡은 채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채 몇 걸음 걷기도 전에 그는 파리의 전형적인 오래된 아파트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양쪽으로 열 수 있는 대문 옆 벽에 설치된 패드에서 비밀번호를 누르자 현관문이 열렸다. 정원이 두세 명밖에 되지 않을 것 같은 비좁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6층으로 향했다.
어깨를 맞대고 손을 잡고 있었지만 정면을 바라볼 뿐 서로를 돌아보지 못했다.
6층에 내려선 라우는 코트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세 개의 문 중 하나를 열었다. 옆집의 현관문 안에서 음악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현관 안으로 들어서 문을 닫은 라우가 이현을 돌려세웠다. 눈물은 멈춰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보고 있는 대상이 정말 그라는 실감이 조금씩 선명해질수록 처음 마주친 순간보다 감정은 더 들썩거렸다. 지금은 그저, 보고 듣고 만지는 것으로… 계속해서 그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1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벌려 놓은 간극을 확인하듯 푸른 눈동자가 이현의 얼굴을 꼼꼼히 더듬었다. 무슨 말인가 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거리던 그는 이 순간에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한 듯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리고 더 가까이 다가와 이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이현은 벌어진 코트 자락 안으로 팔을 넣어 셔츠 위로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어깨에 코와 입술을 묻고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섹스할 때를 제외하고, 한 번도 이렇게 적극적으로 그에게 스킨십을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바보였다. 왜 아꼈을까.
한참을 서로 안고만 있었다.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문에 등을 기대고 선 라우는 가끔씩 고개를 숙여 이현의 머리카락과 이마, 관자놀이에 입술을 묻었다.
아마도 친구들끼리 이른 성탄절 파티라도 하고 있는 모양인지 옆집의 소음이 한 번씩 벽을 타고 새어 들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기울여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좀 진정이 됐어?”
그의 목소리였다.
“더… 말해 봐요.”
“……응?”
“아무 말이나 좋으니까, 목소리 더 듣고 싶어요.”
어깨에 묻고 있던 얼굴을 그의 목덜미에 비비며 조금은 조르듯이 말했다. 전에는 그의 앞에서 늘 의젓하려고 노력했었지만, 지금은… 1년이 넘는 시간을 통과한 끝에 주어진 이 순간에 약간의 보상을 원했다.
목소리를 듣고 싶으니 아무 말이나 해 보라는 요구가 조금 난처했는지 이현의 어깨 끝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하던 그는 문득 나직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처음이었다. 이현은 그의 가슴에서 몸을 일으켜 얼굴을 쳐다보았다. 뒷머리를 문에 기대고 내려다보던 그가 노래를 멈췄다.
“무슨 노래예요?”
“음… 이라는 곡인데, 가수에 대해서는 잘 몰라. 브라질 출신인 남녀 가수가 듀엣으로 부른 곡이라는 것밖에.”
“포르투갈어예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 잘될 거야, 그런 정도의 뜻인가 봐.”
“포르투갈어도 할 수 있어요?”
이번에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가 보여 주는 모든 반응이 새로웠고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입술 끝에 보일 듯 말 듯한 옅은 미소를 걸고 비스듬히 바라보는 그의 눈은, 재회를 이룬 사람이 아닌 이별을 앞둔 사람처럼 날카롭게 긁혀 있었다.
그의 눈에 섞인 그늘은 재회를 이루었다고 해서 한순간에 걷어 낼 수 없는 것임을 알았다. 자기 안에 쌓여 온 시간의 축적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두를 생각은 없었다.
다시 가슴을 겹쳐 그의 어깨에 턱을 얹으며 말했다.
“더 불러 줄래요?”
끊어질 듯 말 듯 나직하게 부는 휘파람 같은 그의 노래가 좋았다. 중간중간 가사를 잘 모르는 부분은 허밍을 섞어 가며 부르는 노래에 눈이 감겼다.
노래가 끝난 후에도 한참을 침묵 속에 서로 더 기대 있었다. 섣불리 몸을 움직였다가 중요한 무언가를 망칠까 겁나는 사람들처럼.
“혹시, 향수 냄새인가?”
“…….”
조심스럽게 물어 오는 그의 질문에 몸을 떼어 낸 이현은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냄새를 맡았다.
“아까 백화점에서, 점원이… 한번 뿌려 보는 게 어떻…겠냐고….”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변명을 늘어놓는 자신의 모습이 문득 우스워서 팔을 떨어뜨리고 피식 웃었다.
“네. 대표님이 쓰시던 거랑 같은 거라서… 사 봤어요.”
거리의 가로등과 맞은편 건물에서 새어 드는 불빛이 전부인 어둠 속에서 그의 눈이 감격을 말하고 있었다. 문에서 등을 일으킨 그가 손끝을 가만히 잡아 왔다. 마주 힘을 주어 그 손을 움키며 이현은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근데, 여긴… 어디예요?”
이현의 질문에 라우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난감함을 드러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훑어 낸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가끔씩 와서 지내는 곳.”
“…여기서요?”
자세하게 둘러볼 것도 없이 보이는 것이 전부인 스튜디오였다. 가로로 긴 형태의 방은 정면에 여섯 쪽의 창이 있어 채광이 좋을 것 같았고,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긴 했지만 결코 넓고 쾌적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현관을 기준으로 오른쪽에는 다리 없는 젠 스타일의 침대와 그 옆으로 고작 세 칸짜리 옷장이, 그리고 왼쪽에는 책상 겸 식탁으로 쓰이는 것 같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그게 가구의 전부였다. 테이블 뒤쪽으로 좁은 복도 끝에 주방과 욕실이 있는 구조였다. ‘더 핸즈’에서 이현이 쓰고 있는 방보다 아주 조금 더 넓은 정도였다.
그와 긴 시간 교제했던 것도 아니고, 그의 재정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악명 높은 파리의 호텔 값을 감당할 수가 없어 중심가에서도 멀리 떨어진 19구에 스튜디오를 장만했을 리는 없었다.
“언제…부터요?”
정리되지 않은 잠자리와 테이블 위에 흩어져 있는 노트북과 자료들, 의자에 걸쳐진 재킷 등 방 곳곳 그의 흔적을 돌아보며 이현이 물었다.
“올해… 가을쯤에 계약했어. 그 전부터 이 근방에 괜찮은 매물이 나오는지 계속 알아보고 있긴 했는데, 좀처럼 원하는 위치에 물건이 나오지 않아서….”
라우는 잠시 망설인 끝에 덧붙였다.
“여기서는… ‘더 핸즈’가 바로 보이지가 않으니까.”
그림이 예정보다 빨리 도착해서 이곳에 온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말이 안 되는 얘기이긴 했다. 그랬다면 왜 ‘더 핸즈’로 바로 찾아오지 않고 골목에서 서성거렸겠는가. 벤이 말하던 ‘운하 옆 카페에서 가끔 마주치는 미남자’가 라우라면, 그가 이 주변에 나타난 것은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다.
“아….”
이현의 신음을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인 건지 라우가 거리를 좁혀 바짝 들어서면서 양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알아, 반칙이지. 처음엔 정말, 가까이에 있다는 느낌만이라도 원해서….”
이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구의 잘못이고 누구의 책임이 더 크고… 그런 얘기는 더 하고 싶지 않았다. 잘못을 이미 인정하고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건 네 잘못이었다고 반복해서 책임을 상기시키는 것은 불필요했다.
그의 어깨에 손을 얹은 이현은 넓은 어깨를 주무르듯 쓰다듬었다.
“우리가 다시 만난 게 지금이라는 게 중요해요.”
팔을 쥔 그의 손의 힘이 약해졌다.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신중하게 숨을 내쉬었다.
“처음 몇 달은… 지하에 내려가지도 못했어.”
“…….”
“호텔이나 아니면 다른 집으로 옮길까 생각도 했었지.”
그의 어투는 덤덤했다. 이만큼 힘들었다고, 고통을 호소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몇 달이 지나고 난 후엔… 지하에서 살다시피 했고.”
이현은 입술을 물었다. 어깨 위에 얹었던 손을 옮겨 그의 목을 감쌌다.
“떠난 사람보다 남은 사람이 더 힘들다는 거…. 함께 지냈던 장소들과 함께 알고 있는 사람들…. 모든 게 그대로 남아 있는 곳에서 지내야 한다는 거…. 어쩌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그리워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일 거예요.”
그렇지 않다고, 그가 고개를 저었다. 지난 시간의 의미를, 자신만이 고통을 인내해 온 것이 아님을, 이미 서로가 알고 있었다.
“많이, 힘들었죠…?”
그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며, 좀 더 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4층에 있는 방을 쓰는데, 옆방에 홍콩에서 온 친구가 있어요.”
“…….”
“저한테 조금 호감을 보여서….”
불안을 숨기지 못하고 흔들리는 그의 눈을 보며 이현은 말을 이어 갔다.
“남자친구가 있다고 말했어요. 선을 그어 둬야 할 것 같아서.”
“…….”
“저, 거짓말한 걸까요.”
서로를 발견하자마자 어떤 설명도 불필요함을 느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문제를 마주하던 순간의 화끈거리는 아픔과 공백을 견딘 진통은 여전히 몸속에 남아 있어서 거부와 상처를 겁내고 있기도 했다.
넘쳐흘러 자신을 삼켜 버리려 하는 감정을 어떻게든 억누르기 위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그가 고개를 저었다.
커다란 두 손이 순간적으로 뺨을 감싸며 달려들 듯이 입술을 겹쳐 왔다. 고개를 꺾어 방향을 바꿔 가며 격렬하게 입술을 머금었다 놓은 그가 이마를 맞댄 채 호흡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그리고 입술의 표면이 스치고 얕게 비벼지는 부드러운 입맞춤을 이어 갔다.
그의 어깨 끝으로 손을 옮겨 갔다. 자신의 뺨을 감싸고 있느라 굽어진 팔을 따라 손을 미끄러뜨렸다. 그의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를 부드럽게 얽으며 조금 더 깊숙하게 입술을 겹쳐 왔다. 젖은 점막이 닿는 순간에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목 안쪽에서 신음이 흘렀다.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전에 키스를 할 때면 늘 그랬듯이.
낮은 속삭임을 주고받듯 입술의 표면만을 사용했던 키스가 점점 진해졌다. 입 안을 가르고 들어오는 혀를 입천장과 혓바닥을 이용해 지그시 빨아들이며 이현은 붙잡은 팔을 강하게 움켰다.
오랜 금욕 끝에, 사랑하는 대상이 눈앞에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순식간에 온몸이 타오를 이유는 충분했다. 젊고 건강한 육체는 눈앞의 그를 바라보고 감미로운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지난 시간. 삶 자체에 대한 의욕을 상실한 것처럼 막막하다가도 때가 되면 허기를 느꼈고, 아무리 오랜 시간을 뒤척여도 결국은 잠이 들었었다. 그리고 점차 생활이 안정되어 가면서 식욕이나 수면욕과 마찬가지로 성욕도 제자리를 찾았다.
그동안의 시간이 꼭 숭고한 정신적 고행만으로 채워져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하루하루의 생활은 현실이었다.
그가 키스하는 방식, 등과 가슴을 압박하는 무게감, 손으로 쓰다듬었던 그의 몸의 굴곡, 묵직한 성기의 흔들림과 빳빳한 기립, 그것이 파고들 때 안쪽이 억지로 열리는 감각, 몸속에 커다란 심장을 하나 품고 있는 것처럼 전신을 두근거리게 하던 노팅의 수축과 확장. 그런 것들을 떠올리며 몇 번이나 자위했었다.
그것을 더러움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성욕을 느꼈다 해서 지나가는 아무나와 몸을 비비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입 안에서 굴곡을 일으키며 혓바닥 위에 부드럽게 몸을 비비는 그의 젖은 살덩이에 자신의 혀를 마주 비볐다. 그가 뺨을 쥐고 있던 손을 끌어 내려 이현의 코트를 바깥쪽으로 밀어냈다. 팔을 털어 옷을 벗기는 데에 협조한 이현이 이번에는 라우의 코트를 어깨 너머로 젖혔다. 그가 아예 허리를 낮춰 쪼듯이 연속해서 입을 맞춰 왔다. 그 탓에 걸음이 뒤로 밀려났다.
그의 저돌적인 입맞춤을 받아 내며 셔츠의 버튼을 푸는 손길이 다급했다. 이현이 위쪽에서부터 두 개를 푸는 사이, 거의 뜯어내듯이 아래쪽에서부터 모든 버튼을 열고 올라온 라우가 뒷목과 허리를 잡아채 가까이 확 끌어당겼다. 입술과 입술이 깊이 겹쳐졌다.
“흐읏….”
벌어진 셔츠 자락 사이에서 향기가 피어올랐다. 아주 진하지는 않았지만 코밑을 스친 것은 분명 ‘그 향기’였다. 더는 환각이 아니었다.
그것을 자각한 순간, 몸의 중심에서 자신을 부추기듯 불안할 정도의 두근거림이 일어나는 것을 분명하게 느꼈다.
코트에 이어 셔츠까지 바닥에 떨군 라우의 맨몸. 어서 그 몸에 자신의 살을 비비고 싶다는 욕구뿐이었다. 이현이 스웨터와 그 안에 받쳐 입은 티셔츠를 한 번에 쥐고 위로 끌어 올리자 라우가 탈의를 도왔다.
뭔가를 급하게 찾기라도 하는 사람들처럼 서로의 등에 두른 팔을 움직여 손이 닿는 모든 곳을 어루만졌다.
아랫입술을 머금고 입 안에서 굴리면서 라우가 입술만큼이나 젖은 눈으로 내리뜬 눈꺼풀 아래에서 이현을 바라보았다.
“하, 흑.”
한순간 강한 힘을 주며 빨아들이는 흡입에 그의 안으로 쑥 빨려 들어가는 듯한 아찔함이 이현을 흔들었다. 아릿한 통증과 함께 입술에서부터 붉은 액체가 번져 나가는 이미지.
스스로 속옷 안을 더듬을 때마다 침대에 모로 누워 손가락 사이에서 입술을 비틀곤 했지만, 그것으로는 도저히 이 아픔을 동반한 흥분을 흉내 낼 수가 없었다.
“으으, 음. 으음….”
목을 고쳐 안으며 발끝을 세워 적극적으로 키스에 응했다. 그의 머리카락을 헤집고 귓바퀴를 문지르고, 흥분으로 팽팽하게 당겨진 탄탄한 목덜미와 벌어진 가슴을 손끝으로 긁듯이 움켰다.
진해진 그의 향기가 머릿속을 느슨하게 만들고 반대로 전신을 타이트하게 조여 오고 있었다. 백화점의 명품 코스메틱 매장에서 돈을 주면 누구나 자신의 방으로, 자신의 손목과 목덜미로 옮겨 놓을 수 있는, 그런 향수가 아니었다.
성 앞에서 왠지 모르게 움츠러들던, 적극적인 성은 천박한 것이라는, 모르는 사이 사고의 바탕을 점령하고 있던 고정관념으로부터 해방시켜 자신에게서 낯선 모습을 끌어냈던 ‘그 향기’가 그의 페로몬이었다는 사실.
그것에 만족감을 느끼고, 탐욕과 갈구, 그리고 강한 성적 흥분을 느끼는 스스로를 부정할 수 없었다.
다른 누구도 이 향을 알지 못하게 하겠다던 그의 약속.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알 수 없는 것이 단지 공평함이었다면, 이것은 독점욕, 유치한 우월감과 닿아 있었다. 숭고하고 거룩하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잠시도 입술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그의 뺨을 감싸 조금 뒤쪽으로 밀어낸 이현은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입술에 얕게 키스했다.
“어때요.”
“…….”
“지금도… 나에게서 페로몬이 흘러나오고 있어요?”
그냥 어서 키스를 하게 해 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입술만 쳐다보면서 아랫입술을 이로 긁고 있던 그의 눈이 이현의 눈을 향했다. 미간이 좁혀지면서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뭐… 그게, 무슨….”
그는 뒷말을 잇지도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대표님은 제 페로몬 느낄 수 있는 거잖아요.”
어깨를 비틀어 몸을 돌려세운 그는 한 손으로 허리를 짚은 채 얼굴의 아래쪽을 쥐어짜듯이 문질렀다. 키스로 한껏 고양된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벗은 맨가슴이 빠르게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최인우인가? 아니면… 정세인?”
이현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봤어요. 일기장.”
“…….”
최인우나 슈슈에게 들었다는 것보다 더 놀란 얼굴로 라우가 돌아보았다.
곧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떨어뜨린 그는 테이블 앞으로 걸어갔다. 노트북 옆 잔에 아주 조금 남아 있던 위스키를 한 번에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독한 기운에 얼굴을 강하게 찌푸리고는 다가와 이현의 양팔을 붙잡았다. 다시 앞에 선 그의 눈빛이 단단했다.
“체인징에 네 책임은 조금도 없어.”
그가 무엇을 염려하는지 알았다.
“고스트와 다이아몬드 더스트 사이의 페로몬에 대해 전부 알고 있으면서도 섹스에 계속 응했던 거라면 몰라도… 넌 어떤 것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어.”
그가 무엇을 위해 그 일기에 대해, 다이아몬드 더스트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었는지도 알았다.
“체인징은 순전히 나의 잘못이야.”
“알아요.”
“…….”
다이아몬드 더스트의 존재와 그 페로몬에 대해 모르는 상태에서 이현이 자신을 따라온 거라 생각했던 아위는 혼란을 느끼고 있었지만, 이현은 흔들릴 이유가 없었다. 더는 흔들리고 싶지도 않았다.
“1년 넘는 시간 동안 그것에 대해 서로 충분히 생각했던 거 아니었어요? 우리, 그 얘기… 다시 해야 해요?”
이현의 팔을 붙잡고 있던 라우의 손이 머뭇거리며 거두어졌다.
그림을 받아 보고 찾아온 게 아니라면, 그는 오늘 이현과 이런 만남을 가지게 될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상태였을 것이다.
재회의 충격, 그리고 자신을 차갑게 외면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안겨 오는 이현의 태도에 대한 감격으로만 가득 차 있었던 그에게서 고통의 흔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넌 아직… 충분한 사과를 듣지도, 충분한 보상을 받지도 못했어.”
이현이 풀썩 웃었다. 그의 발언을 조소해서가 아니었다.
“제가 그런 걸 바랐다고 생각하세요?”
그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고 가볍게 흔들었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과거의 모든 서랍을 전부 열어 확인하고, 모든 가능성을 전부 점쳐 보았었다. 결론은 이미 내려져 있었다. 그의 염려와는 달리 일기장이 결론을 바꾼 것이 아니다.
“어머니를 잃은 아버지와 저에게… 사망 보험금이나 합의금은 충분한 보상이 될 수 없어요. 사고를 냈던 운전사가 무릎을 꿇고 눈물로 사죄한다고 해도, 충분한 사과가 될 수 없구요. 아니, 설사 그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해도 아버지와 저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을 거예요.”
이현은 고개를 저으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리고 라우의 어깨에 얹었던 손을 미끄러뜨려 그의 두 손을 가볍게 쥐었다.
“그런 것은… 이미 일이 일어난 후의 뒤늦은 수습 외에 아무것도 아닐 거예요.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이상, 어차피 이런 일에 충분한 사과나 보상이란 존재하지 않아요.”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는 탓에 평소보다 더 핏줄이 도드라진 그의 손을 내려다보며, 이현은 지난 시간의 일부를 허물어 라우 앞에 내보였다.
“오래 생각해 봤어요. 저에겐 두 가지 길이 있었어요. 희생당하고 배신당했다는 절망에 시달리면서 그 대가로 ‘사과’와 ‘보상’을 원하는 만큼 요구하면서… 대표님을 비난하고 미워하는 힘으로 살아가는 것과, 대표님의 후회를 받아들이고 우리가 서로에게 주었던, 그리고 앞으로 서로에게 줄 수 있는, 존재 깊숙한 위안과 이해에 다시 한번 희망을 가져 보는 것.”
라우의 손이 이현의 손을 한 번 꽉 잡았다 놓았다. 그리고 팔을 쓰다듬으며 거슬러 올라와 어깨를 쓸고 목을 감싸고 귓가를 덮으며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나를 체인징했다는 사실만큼이나, 나를 다시 그릴 수 있게 해 준 사람이 아위라는 것도 변하지 않아요. 저는… 다른 무엇도 아닌 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지금 이 장소에 있는 거예요.”
담담한 듯 이야기하는 이현의 눈이 젖어 들고 있었다. 라우가 바짝 다가서며 이현을 안았다. 세상의 모든 사과를 늘어놓고 세상의 모든 보상을 다 해 주고 싶어도, 지금 이 자리에서는 그런 말들이 무의미함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때 얘기했었지. 네가 받아 주지 않더라도, 나를 너에게 줄 수밖에 없다고.”
“…….”
맞닿은 그의 가슴 안에서 뛰는 심장과 귓가에 닿는 숨결, 그리고 그의 진심을 느끼며 이현은 그의 등을 안았다.
“네가 나를 용서해도 혹은 하지 않아도, 내가 너를 체인징하지 않아서 너에게 지은 죄가 없었더라도… 나는 너에게 속해 있어.”
눈을 감자, 눈물이 흘러내려 그의 어깨를 적셨다. 그저 서로를 꽉 끌어안았다. 공백의 시간을 버틴 서로를 위로했다. 서로의 어깨와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그래서… 제 페로몬은 어때요? 좋은 향기예요?”
그에게서 몸을 떼어 내고 눈물을 아무렇게나 닦아 내며 웃었다. 이현의 뒷머리를 감싼 라우가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잔뜩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5월의 장미처럼?”
일기장의 주인이 에리히의 페로몬에 대해 묘사한 구절을 빗댄 이현의 인용에 그가 입술을 놓으며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입술을 겹치고는 잘게 여러 번 키스했다.
“장미 냄새를 맡고 이런 걸 하고 싶어진다면, 이상하지 않아?”
이현이 웃으며 라우의 뺨을 감쌌다. 한 번 더 진하게 포개진 입술이 열정적으로 파고들었다.
“골든으로 쌓아 온 제어력을 상실하게 하고, 아무런 방어벽도 없는 무방비한 레귤러로 만들어 버리는… 절대적인 향이야.”
제법 거창하게 들리는 설명이 쑥스러워 이현은 피식 웃으며 라우의 뺨을 놓고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의 가슴쯤으로 떨어졌던 시선은 곧바로 다시 눈을 향했다. 언젠가 비슷한 말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거… 그런 뜻이었던 거네요.”
“…….”
이번에는 라우가 복잡한 표정 위에 쓴웃음을 더하며 이현의 맨 어깨를 쓰다듬었다.
시카고에서. 결혼하자는 말을 듣고, 사랑한다는 말로 답했던 그때.
이현의 등 뒤에 바짝 붙어 누워 몸 안쪽에 손가락을 넣고 자극하면서, 라우는 완전히 흥분한 얼굴로 그런 비슷한 말을 했었다.
그건 체취에 대한 얘기가 아니었다.
고스트만이 감지하고 반응할 수 있는 다이아몬드 더스트의 페로몬.
라우의 향기를 맡은 자신이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알고 있었다. 어떤 형태의 자극도 닿은 적 없는, 깊숙한 곳에 봉인되어 있는 가장 말초적인 본능을 두드려, 평소의 자신을 유지하는 테두리를 벗어난 말과 행동을 하도록 꾀어내는 감미롭고 강렬한 유혹.
라우 역시도 자신의 페로몬에 그런 자극을 받을 거라는 사실에 생각이 닿자 입이 말랐다. 상상과 기대감이 순식간에 호흡을 흐트러뜨렸다.
어깨를 쓰다듬는 그에게로 좀 더 다가서면서 그의 양 허리에 손을 올렸다. 목덜미에 코를 비비고 턱선을 따라 입을 맞췄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옆구리를 쓰다듬어 오는 그의 귓가에 입술을 묻고 속삭였다.
“제어하지 못하게 하려면, 내가… 어떻게 하면 돼요?”
의외의 질문이었는지 잠시 그의 손이 멈췄다. 그리고 허리를 감아 당기며 한숨을 쉬듯 속삭였다.
“숨만 쉬고 있어도 충분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분명 그는 조심스러워하고 있었다. 끌어안은 탓에 맞닿아 오는 성기는 벌써 단단해진 상태인데도, 엉덩이를 움키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손이 상체에만 머물러 있었다.
“이제 페로몬이라는 거 알았으니까, 우리 서로 성욕에 대해서 거짓말은 못 하겠어요.”
“…….”
“지금, 아위 거… 많이 진한데.”
멈칫, 잠시 몸을 굳힌 그가 무너지듯 이현의 어깨 위에 이마를 묻으며 피식 웃었다.
“진짜 그러네. 내가 서이현한테 얼마나 자주 욕구를 느끼는지, 이제 그대로 다 들킬 거 아냐. 큰일 난 것 같다.”
쑥스러워하는 듯한 웃음기 섞인 목소리 끝에 라우가 고개를 돌려 그대로 목덜미를 물었다.
“아.”
자국을 새길 것처럼 얇은 피부를 강하게 빨아들이며, 허리를 안은 손으로 등을 한차례 훑고는 청바지 안으로 손을 찔러 넣었다.
“으… 음.”
엉덩이의 살집을 움키는 악력에 이현의 턱이 들렸다. 팽팽하게 당겨진 목덜미를 핥으며 올라온 라우가 벌어진 입술을 빨다가 안으로 혀를 미끄러뜨렸다.
입술을 오므려 뜨겁게 젖은 그의 혀를 빨면서 이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의 가슴에 자신의 가슴을, 그의 성기에 자신의 성기를 비비고 있었다.
라우가 맞닿은 아랫배 사이로 손을 찔러 넣었다. 다급하면서도 정확한 움직임으로 버클을 풀고 지퍼를 열었다. 엉덩이를 주무르고 있던 다른 손까지 이용해 청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밀어냈다. 밖으로 드러난 이현의 성기를 눈으로 본 그의 향기가 확 진해졌다. 숨소리가 불규칙해졌고 화가 난 사람처럼 어깨가 들썩거렸다.
그의 페니스는 슬쩍 보아도 발기했음을 눈치챌 수 있을 만큼 눈에 띄게 부풀어 팬츠의 앞섶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의 벨트를 향하는 이현의 손이 떨렸다. 더딘 손길이 답답했는지, 라우가 이현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치며 스스로 벨트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위에서는 방향을 달리한 입맞춤을 쏟아부으면서, 아래에서는 순식간에 벨트와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려 성기를 드러냈다.
“으음… 흐흑.”
이현은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뭉개듯 밀어붙이며 음경과 음경이 서로 닿도록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성기의 접촉을 느끼자 몸에 불이 붙는 것 같았다. 미칠 것 같았다.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인데, 당장 그를 갖길 원하는 조급증은 이전의 자신에게서는 볼 수 없는 낯선 기질이었다.
“흥분했어?”
“흐, 흐으… 흡.”
달래듯 다정한 그의 속삭임에 입술을 깨물고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
내려다보니 좀 전보다 더 부풀어 오른 그의 음경이 위협적으로 진동하고 있었다. 귀두에서는 벌써 진한 향을 풍기는 액체가 흘러내렸다.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그것은, 우리에 갇혀 질주를 갈구하는 짐승 같았다. 알파의 페니스는 파고들어 마찰할 준비를 빠르게 마친 상태였다.
그가 허리를 낮춰 이현의 음경이 시작되는 뿌리에 자신의 뿌리를 밀착시키고는, 아래에서 위로 비비며 밀어 올렸다. 직접적인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그 유연한 허릿짓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너무 오랜만에 느껴 보는 이 폭발 같은 흥분을 어떻게 표출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갑갑했다. 그래서 이현은 몸을 흔들었다. 앞뒤로 흔들 때마다 살이 부딪치며 서로 감기는 찰박거리는 소리에 한 번씩 호흡과 어깨가 내려앉았다.
서로의 육체에 팔을 감고 하의를 허벅지에 걸친 채, 조금이라도 더 상대의 성기에 가까이 닿기 위해 몸의 방향을 바꿔 가며 흔드는 모습은 조금도 우아하지 않았다. 고결함이나 성스러움과는 완전히 반대편에 있었다.
소리 내어 말해 보는 것은커녕 머릿속에서 정확하게 떠올려 본 적도 없었던 음란한 단어들을 입에 담고, 그가 유도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은밀한 욕망들을 직설적으로 요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이제는 안다.
그런 해방을 다시 원했다. 사람들이 금기된 일, 잘못된 일, 바르지 못한 일인 것처럼 얘기하는 모든 행위. 그러면서도 호기심을 버리지 못하고 궁금해하고, 또 일부는 실제로 자신의 침실에서 은밀하게 행하고 있는 모든 일을 그와 벌이고 싶었다. 그의 근육의 마지막 꿈틀거림 하나까지 전부 자신의 몫이길 원했다.
“음. 으음. 음.”
엉덩이의 살집을 반죽하듯 주무르던 그의 손이 골 사이를 미끄러졌다. 손가락 하나가 애널 위를 노골적으로 만지작거렸다.
“그동안… 여기에도 자위해 줬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귓가에서 달콤한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 다리 사이에 손을 넣어 손가락을 넣고 느끼는 이현을 상상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입구를 마사지하듯 둥글게 더듬던 손가락이 금방이라도 파고들 것처럼 힘을 주어 살갗 위를 문질렀다. 자극을 받은 몸이 저절로 수축하며 엉덩이에 힘이 들어갔다. 이현은 그의 어깨를 꼬집듯이 손끝을 움켰다.
“이현아….”
나른한 환상에 홀린 것 같은, 또는 어쩔 도리 없는 고통에 짓눌린 것 같은 목소리였다.
“여기, 젖었어….”
“읏.”
그 말을 듣는 순간, 몸 안에서 작은 덩어리가 왈칵 쏟아지는 감각에 이현은 가슴을 움츠렸다.
완전히 흥분한 그는 이제 손가락이 아닌 손바닥 전체를 이용하고 있었다. 뒤에서부터 앞쪽으로. 다리 사이를 드나들며 약한 피부 위를 문지르는 그는 전혀 호흡을 조절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떡하지…. 미안해… 서이현 이렇게 다 젖어서….”
테이블 위에서 실수로 컵을 엎질러 상대의 옷을 적시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맥락 없는 사과를 중얼거렸다.
그가 몸을 들어 올릴 것처럼 힘을 줄 때마다 이현의 뒤꿈치가 들썩거렸다. 골반 사이에서 두 음경이 스치고 비벼지고 서로를 튕겨 내기를 반복했다. 향기가 후각을 뒤덮어 산소가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숨을 쉬기 위해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젖어 있다는 그의 말대로 손바닥이 살갗을 밀고 당길 때마다 아래에서 점성을 가진 액체가 찌걱거렸다.
“계속 흘러서, 질퍽거려….”
그는 커다란 몸을 굽히고 목덜미와 어깨, 가슴… 입술이 닿는 모든 곳에 입을 맞추고 이를 세워 피부를 물고 냄새를 들이마셨다. 흥분을 끌어안은 채 어딘가에 퍼붓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으으, 윽… 잠…깐….”
밀어붙여 오는 그의 힘에 밀려 뒷걸음질 치면서 이현은 균형을 잃지 않도록 그의 목을 꽉 안아야 했다. 입 안에 유두를 물고 바짝 조여 대던 그가 눈을 위로 뜨며 올려다보았다. 눈동자가 완전히 풀려 있었다.
단단하게 뭉쳐진 유두를 입술 밖으로 밀어낸 뒤에도 혀끝으로 톡톡 건드리면서, 그가 다리 사이를 문지르던 손바닥을 오목하게 모아 지그시 압박해 왔다.
“밖으로 새면 안 되잖아…. 내가 계속 이렇게 하고 있을까?”
청각에 가해지는 자극에 이현이 아랫입술을 깨물자 그가 덤벼들면서 입술을 빼앗았다. 그 힘에는 더 버티지 못하고 등 뒤의 침대로 무너져 버렸다.
매트리스 위에 털썩 주저앉은 이현의 몸을 라우의 상체가 넓게 뒤덮어 왔다. 정신없는 키스가 벗은 몸 위에 쏟아졌다. 그는 이현의 허벅지 아래로 자신의 무릎을 밀어 넣으며 이현을 더 안쪽으로 몰아갔다. 매트리스의 중심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그가 빨고 있던 유두를 이 사이에 물고 아프게 당기며 뒤로 물러났다.
“아… 으….”
얼얼한 쾌감에 이현이 고개를 젖히며 신음한 순간 유두를 놓은 그는 어정쩡하게 흘러내려 있던 하의를 벗어 버리기 시작했다. 이현도 청바지를 발목 쪽으로 밀어냈다.
순식간에 먼저 알몸이 된 그는 이현의 스니커즈를 먼저 벗겨 낸 뒤, 청바지의 엉덩이 쪽을 쥐고 잡아챘다. 뒤집혀 벗겨진 청바지가 스니커즈와 함께 바닥 어딘가로 내던져졌다.
무릎을 넓게 벌리고 선 그가 천천히 다리 사이로 밀려들어 왔다. 허벅지 근육이 팽팽하게 날 서 있었다. 창을 등지고 선 탓에 그의 몸 앞판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지만, 그가 움직일 때마다 묵직하게 끄덕거리는 성기의 윤곽은 뚜렷했다.
젖어 있는 것은 이현의 다리 사이만이 아니었다. 음경을 타고 흘러내린 알파의 흥건한 쿠퍼액이 시트 위로 떨어지며 자국을 만들었다.
팔꿈치로 매트리스 위를 짚고 반 정도 누운 이현의 전신을 탐하듯 훑어 내려가는 라우의 시선이 무거웠다. 그는 강한 두통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얼굴을 몇 번 찡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페로몬의 작용을 조금이라도 억제하려는 시도임을, 지금의 이현은 알고 있었다.
이현은 상체를 일으켜 그의 허리춤을 붙잡으며 무릎으로 일어섰다. 균형을 잡기 쉽도록 허리를 감은 그의 팔에 의지해 몸을 완전히 일으키고는 손바닥으로 그의 고환을 감싸 부드럽게 주물렀다.
“으음―.”
미간을 찌푸리며 낮게 신음하는 라우의 얼굴을 확인한 이현의 뺨이 상기되었다.
두둑한 부피감을 가지고도 전혀 늘어지지 않고 음경 아래에 보기 좋게 바짝 올라붙은 그의 고환은 아래로 살짝 당겼다 놓을 때마다 묵직하게 흔들렸다. 성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 진동에 이현의 숨이 흐트러졌다.
그것을 느낀 라우가 이현의 턱을 들어 입을 맞췄다. 이현의 허리를 안고 있던 다른 한 손이 엉덩이로 내려가 살집을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듯이 흔들었다.
서로에게서 원하는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전신을 이용할 필요도 없었다. 일부의 흔들림만으로도 이미 이성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쥐고 경직된 근육 위를 쓰다듬으며 이현은 고환에서 음경으로 손을 옮겨 갔다. 둘레를 감아쥐어도 엄지와 중지가 서로 닿지 않는, 굵게 발기한 음경을 움키고 천천히 쓸어 올렸다. 안쪽에 끓는 액체를 가득 채운 것처럼 뜨겁게 달아오른 기둥은, 당장이라도 안에 담긴 것을 확 쏟아 놓을 듯 이미 한계에 도달한 것처럼 보였다.
원통형이라 하기에도 애매할 정도로 각 부위의 형태가 뚜렷하게 두드러지고, 특히나 뿌리와 연결된 부위에 혀의 설소대처럼 힘살이 탄탄하게 돋은 음경은 이목구비가 진한 그의 얼굴과도 닮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이 지적이고 세련된 인상 아래 절제된 성적 매력을 풍기는 것과 달리, 그의 하반신은 지극히 노골적이었다.
핏줄이 선명하게 불거져 울퉁불퉁한 페니스와 얇은 피부로 감싸인 손바닥 사이에서 끈끈한 액체가 질척하게 밀리는 감각에 이현은 급한 요의를 느끼는 사람처럼 허리를 꼬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밭은 숨이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당장이라도 손아귀를 벗어나 튕겨 나갈 것 같은 페니스를 자신의 성기 쪽으로 기울여, 귀두에서 흐르는 반투명한 선액으로 자신의 음경을 칠했다. 그 광경만으로도 사정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어깨를 붙잡은 손이 채근하듯 피부 위를 긁고 있었다.
“아위도… 완전히 젖었어요. 계속 흘러서… 아파 보여.”
그의 집 거실에서 <소외>를 처음 봤던 날 그랬던 것처럼 그의 성기에 대한 호기심은 여전했다. 타인의 맨 성기를 처음 보는 성에 미숙한 청년처럼 여전히 그의 페니스를 시각에 담는 것만으로도 성욕이 고양되었다.
“아프지 않아…. 왜 이렇게 된 건지 알잖아. 더 세게 자극해 줘.”
서로 입술을 뗀 상태에서 혀를 내밀어 이현의 입술 뒤쪽 점막을 찌르면서, 라우가 자신의 페니스를 감싼 이현의 손을 부드럽게 겹쳐 쥐었다. 그의 손도 페니스만큼이나 뜨거웠다.
“진짜 아프게 될 만큼 더 흔들어 줘. 네 손… 너무 기분 좋아….”
말을 마친 그가 혀를 뾰족하게 세워 입 안으로 찔러 넣었다. 발기한 성기처럼 꼿꼿하게 세운 상태에서 끝부분을 살짝 굽힌 혀로 입천장을 살살 긁으면, 야릇한 간지러움에 뒷목이 움츠러들었다. 겉으로 드러난 피부 위를 간지럽힐 때와는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으으음… 흠.”
호흡 사이로 신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그의 요구대로 페니스를 훑어 올리는 속도를 더하자 라우 역시 억눌렀던 깊은숨을 토해 내며 혀로 입 안을 요란하게 휘저었다.
둔부를 흔들고, 손가락을 활짝 벌려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살집을 강하게 움키고, 쥐어뜯듯이 애무하고 있던 아래쪽 그의 손이 골 사이를 손날로 긁어 댔다.
귀두에서 또 한 번 울컥 쏟아져 나와 손등 위로 주르륵 흐르는 그의 액체를 내려다보며 이현이 물었다.
“나 때문에… 내 페로몬 때문에, 이렇게 된 거예요?”
그가 이현의 다리 사이, 얇고 연약한 속살 위를 애무하며 고개를 꺾어 귓바퀴에 입술을 비볐다.
“다 벗은 서이현이 눈앞에 있고, 그런 서이현이 내 성기를 손에 쥐고 있는데… 페로몬이 없었더라도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손바닥을 오목하게 모아 귀두를 덮고 문지르기 시작한 이현의 손길에, 라우는 괴로운 듯 인상을 쓰며 한쪽 어깨를 비틀었다.
이현은 그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어느 정도는 거짓이 섞인 듣기 좋은 과장이라고.
알파와 오메가에 대해 거의 아무런 지식이 없었던 이전과는 달랐다. 베타 앞에서 알파와 오메가의 페로몬은 무력하며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아무리 성적으로 흥분해 베타를 향해 페로몬을 뿜어 대도 상대는 아무런 자극을 받지 않았다.
알파·오메가와 베타가 서로에게 성적으로 끌릴 수는 있었고, 멋진 시간을 가질 수도 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페로몬이 작용하는 알파와 오메가 사이의 섹스에서 얻는 쾌감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물론 육체의 쾌감만이 섹스의 만족도가 될 수는 없다. 사랑하는 상대와의 섹스에는 페로몬이 일으키는 화학 작용으로는 대신할 수 없는 정신적 충족이 있었고, 그렇기에 세상에는 드물게나마, 관계를 지속해 나가는 베타와 알파, 베타와 오메가 커플이 존재했다. 모래와 이한처럼, 엘렌과 마커스처럼.
하지만 이현은 라우와 함께 닿을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인 교감과 쾌감을 모두 원했다.
그가 자기 외의 누구에게도 페로몬을 맡지 못하게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자신은 아무리 해도 닿을 수 없는 그의 깊은 곳에 다른 누군가는, 누군가들은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불쾌했다.
이 욕구의 근원이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던 성향 때문이든, 디디에게 내재되어 있는 고스트에 대한 본능이든, 상관없었다. 욕구의 대상인 그가 거부하지 않는다면 억제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결정했다.
“진해졌어요…. 아위의 페로몬….”
질척거리는 그의 쿠퍼액과 농도를 더해 가는 페로몬을 느끼면서, 이현의 목소리는 거의 떨리고 있었다.
“네가, 기분 좋게 해 주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정말 기분 좋은 듯 나른했다. 그러나 느슨하게 풀어진 여유로움은 아니었다. 귓가를 데우는 꽉 잠긴 허스키한 목소리와 습한 숨결에 자꾸만 턱이 들리고 입술이 벌어졌다.
이현은 그의 쿠퍼액으로 완전히 젖은 손바닥을 귀두에서 거두었다. 폭주를 억제하느라 불규칙하게 부풀기를 반복하고 있는 복근과 가슴의 퍽퍽한 윤곽을 더듬으며 거슬러 올라갔다. 손으로 코와 입을 덮고 그의 눈앞에서 혀를 내어 손가락을 핥았다. 농후한 냄새에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이 죄다 활짝 벌어지는 기분이었다.
“신기해?”
자신의 은밀한 냄새를 들이마시는 이현을 바라보는 라우의 눈은 끓고 있었다. 당장 이현의 안으로 들어가 미친 듯이 허리를 흔들고 싶다는 눈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는 여전히 거대한 욕구와 페로몬에 맞서 스스로를 억압하고 있었다.
미소를 지으며 이현을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콧잔등과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고, 엉덩이의 골 사이를 더듬는 손은 그 안쪽의 좁고 뜨거운 통로에 대한 갈구로 가득했다.
이현은 자신의 중지에 혀를 감으며 그의 허리를 안아 서로의 성기를 비볐다. 그가 반사적으로 원을 그리듯 허리를 움직여 아래에 마찰을 일으켰다.
“예전엔, 이게 페로몬인지 몰랐으니까.”
과거의 그가 왜 자신의 밑을 문지른 손을 핥아 댔었는지 이젠 안다. 어째서 라우 위쿤만이 처음부터 자신을 오메가로 판단했었는지도.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자신의 일부에 대해서, 오직 한 사람, 라우만은 그것을 감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페로몬에 국한된 얘기가 아닌 어떤 상징처럼 느껴졌다.
자신을 둘러싸고 흐르는 그의 향기가, 향수 따위가 아닌 오직 자신만이 향유할 수 있도록 그가 절제해 온 페로몬이라는 사실을 의식하며, 그의 눈을 마주했다.
“신기하기도 한데… 그보다 더 야해요.”
그가 한순간 잇새로 짧은 욕설을 뱉으며 더 참지 못하고 애널 안으로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그것은 일종의 항복처럼 느껴졌다.
“흐읏!”
푹 소리가 날 것 같은 단번에 깊이 파고드는 진입이었지만, 미끄러운 내부는 저항감 없이 길을 열었다. 오래 인내했던 만큼 그는 들어가자마자 정신없이 점막을 훑었다. 긴 중지가 입구에 턱턱 걸리도록 빠르게 팔을 움직여 열을 일으켰다.
참을 수 없이 기분이 이상했다.
허리가 저절로 튀었다. 그의 어깨를 비틀어 쥐고 근육의 굴곡이 춤을 추듯 넘실거리는 등을 긁어 댔다. 젖은 내부를 빠르게 미끄러지는 그의 손끝은 이미 자신의 손으로 만지던 곳보다 더 깊은 부위까지 도달하고 있었다.
이현의 엉덩이에서, 두 성기가 가두어진 골반과 골반 사이, 입술과 입술 사이에서. 두 육체 사이에 질척이는 소리가 가득했고, 그만큼 향기가 진동했다.
“어떻게 이걸… 향수라고 생각했었는지, 바보 같아요. 내가 손으로 만지고… 안에서 조일 때마다, 이렇게… 살아 있는 리듬처럼 강약을 그리면서 반응하는데.”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는 둔해지기 마련이니까.”
그가 내리뜬 눈꺼풀 아래서 황홀하게 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현은 그의 두 뺨을 손안에 가두었다.
“나도 그래요?”
“…….”
“아위가 안을 쑤실 때마다, 내 페로몬도 날뛰어요?”
그가 손가락 하나를 중지에 겹쳐 밀어 넣으며 올려다보는 이현의 턱을 이로 긁었다.
“서이현의 페로몬은… 한계 없이 상승하는 아찔한 곡선 같아. 그래서 내가… 못 참게 돼. 이상해져.”
“못 참게 하고 싶어요. 이상해졌으면 좋겠어. 예전처럼.”
개수를 늘린 그의 손가락이 내부를 파열시킬 것처럼 빠르게 들락거렸다. 손가락만이 아닌 팔 전체의 힘을 이용한 삽입은 이현을 들어 올릴 기세였다.
“젖은 알파로… 여기, 꽉 채우고… 전처럼 노팅해 달라고 정신없이 조를 때까지… 안쪽에 많이, 많이 비빌까.”
이현은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라우가 허벅지 뒤를 당겨 균형을 무너뜨리며 매트리스 위에 이현을 눕혔다. 향기 속에 털썩 누운 것처럼 페로몬이 일시에 강하게 피어올랐다.
무릎으로 버티고 선 라우가 다리 사이로 천천히 들어섰다. 자리를 잡은 그는 두 사람의 쿠퍼액이 뒤섞여 번들거리는 이현의 페니스를 길고 뜨거운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
“으으… 윽.”
너무 오랜만에 느끼는 자신의 손이 아닌 라우의 손의 압박이었다. 등허리가 저절로 공중에 떠올랐다. 사타구니에 그의 하반신이 바짝 밀착해 왔다. 곧 다가올 뜨겁고 집요한 파고듦과 파괴적인 흔들림에 대한 기대감으로 페로몬에 푹 젖은 이현의 전신이 덜덜 떨려 왔다. 시트를 그러쥘 수밖에 없었다.
이현의 페니스를 능숙하게 흔들어 좀 더 단단하게 만든 그는, 자신의 양쪽 허벅지 위에 걸쳐진 이현의 다리를 쓸고 내려가 발목을 쥐고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발목이 하나로 모아졌고, 겹쳐진 두 다리가 그의 오른쪽 어깨 위에 걸쳐졌다.
“하. 하으, 흑.”
이현의 숨이 불규칙하게 툭툭 끊어졌다. 시트를 움켜쥐고 있던 손이 이제는 그것을 쥐어짜듯 비틀었다. 곧 안으로 밀고 들어올 그의 것에 대한 기대감을 전신으로 고스란히 드러내면서도 이현은 부끄러움을 의식할 수 없었다.
허벅지를 양쪽으로 더 넓게 벌려 이현의 엉덩이 양쪽을 받치듯 자리를 잡은 그가, 귀두로 애널 입구를 조준하는 대신 이현의 허벅지 사이로 음경을 미끄러뜨렸다.
“…….”
그것도 물론 충분히 자극적인 마찰이었고, 유연한 굴곡을 일으키며 천천히 허리를 흔드는 그의 모습에 몸속이 두근거렸지만, 이현이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뭐…예요?”
“이게 뭔지 잊어버렸어?”
그가 이현의 종아리를 가볍게 깨물며 번들거리는 얼굴로 씩 웃었다. 오른쪽 가슴 위에서 이현의 다리를 안고, 군살이 없어 언뜻 날씬해 보이지만 충분한 두께를 가진 허리를 앞뒤로 움직이면서.
강도 높은 운동과 노동으로 단련된 팔뚝이 회음을 드나들고 있는 것처럼 완전히 딱딱하게 발기한 그의 페니스는 한계를 말하고 있었다. 펄떡거리는 박동이 허벅지 사이에 그대로 느껴질 정도였고, 페로몬은 코와 입을 포악하게 틀어막는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이현은 무릎을 굽혀 발끝으로 그의 어깨를 지그시 밀어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안에 들어와요.”
“…….”
잠시 허리의 움직임을 멈추고 이현을 내려다보던 그가 발목과 종아리에 여러 번 키스하며 다시 허벅지 안쪽을 문질렀다.
“너무 오랜만이잖아.”
처음으로 라우를 받아들였을 때도 아무 문제가 없었던 몸이었다. 지금처럼 흥건하게 젖은 상태에서 삽입이 무리일 리가 없었다.
이현의 몸이 거부하듯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낀 라우가 다시 허릿짓을 중단했다. 다리를 발목부터 골반까지 길게 쓰다듬다 제자리에 내려놓고는 허리를 숙여 가슴을 겹쳐 왔다.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이마와 콧등, 입술에 입을 맞췄다.
“다음에… 다음에 그러자.”
“싫어요. 알파로 안에 비벼 준다며.”
“이현아….”
부드럽게 달래는 목소리는 달콤한 동시에, 이성과 본능의 계속되는 충돌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이현은 그의 얼굴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속삭였다.
“나랑 안 하고 싶었어요?”
“그런 말이 어딨어.”
한 손을 아래로 뻗어 그의 뜨거운 분신을 휘감았다. 손에 닿기만 해도 불꽃이 튈 정도로 서로가 서로를 원했다. 꺼끌한 그의 턱을 이로 잘근거리며 얼굴을 만지던 손으로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귓가에 입을 맞추면서 손으로는 귀두를 자극했다. 매달리듯 안겨 오는 이현이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듯, 라우는 이현의 등을 받쳐 마주 안으며 머리카락 위에 입술을 묻었다.
“내 안에 들어오고 싶어서 이렇게 커졌으면서… 왜 참는 건데.”
그에게 뿐만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이런 식으로 얘기해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조차도 가물거렸지만, 늘 그에게 투정을 부려 왔던 것처럼 어색함이 없었다.
그것이 페로몬의 작용인지, 서로를 가로막고 있던 비밀이 파괴된 만큼 거리가 좁혀졌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어도, 1년 만의 재회임에도 오히려 허물없이 그를 대하는 것이 이전보다 더 쉬웠다.
직접적인 자극이 가해지고 있는 그의 귀두에서는 쿠퍼액이 진물처럼 흘러나왔다. 그의 이성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건 그의 성기는 분명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이현의 손은 물론 배까지 질척하게 젖을 정도로 선액을 흘리면서도 갈등하고 있던 그가, 이현의 어깨 위로 무너지며 호소하듯 고통으로 속삭였다.
“사랑해…. 정말 널 사랑해.”
“사랑하는 서이현이 원하잖아요.”
“…….”
그가 고개를 들어 이현에게 눈을 맞췄다. 차단하지 못한 페로몬에 노출된 채로 그것에 저항하고 있는 지금의 그가 얼마나 거대하고 절대적인 힘에 맞서고 있는 것인지, 이제 이현은 이론적으로나마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완벽에 가까운 골든의 방어력을 무너뜨릴 정도의 페로몬에 그가 이만큼 저항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닌 무엇으로도 설명될 수 없었다. 사랑한다고 해서 모든 알파가 이렇게 견딜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현은 그의 얼굴을 감쌌다.
“억제하지 마요. 내 앞에서만큼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어요. 당신이 알파든 고스트든 뭐든… 디디인 나도, 사람들이 말하는 정상의 범주를 벗어난 존재인 건 마찬가지니까.”
이현이 디디인 것마저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그의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내 앞에서 아무것도 감추지 마요. 전부를 원하니까. 당신의 어둡고 초라하고 멋지지 않은 부분까지 다. 우리가 다시 시작하려면… 그런 각오로 서로를 끌어안아야만 해요.”
코끝을 비비자 그가 입술을 꾹 겹쳐 왔다. 혀를 쓰지 않은 채 몇 번이고 입술을 떼었다 마주하며, 파도치는 바다처럼 푸르고 희게 부서지는 눈동자로 이현을 바라보았다.
“다 보여 줘요. 나를 오메가로 만든 증거로 당신 눈이 어떻게 변하는지, 지금까지 어떤 고독 속에서 있었는지… 전부 보여 줘요.”
치미는 감정을 삼켜 내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고개를 떨군 그가 목덜미 깊은 곳과 귓가, 얼굴에 달라붙은 귀밑머리와 관자놀이에 느리게 입을 맞췄다.
“초라하고 멋지지 않아. 겁에 질려 있었어.”
“…….”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계속 거부해 왔던 알파의 본능에 가장 비참하게 함락된 모습으로… 스스로를 파괴하면서까지, 기형적인 방식으로라도 너를 얻으려 했어. 그게 사랑의 깊이를 말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페로몬을 핑계 대며 그 뒤에 숨지도 않겠어.”
다음 순간 고개를 들고 이현을 다시 마주한 그의 눈은 무르지 않았다. 갈등하고 있지도 않았다.
“남은 모든 생으로 너에게 갚아 나갈 거야.”
그는 의미심장하게 말하지 않았다. 속삭이는 목소리는 가벼운 한숨 같았다. 그래서 오히려 더 진심으로 느껴졌다.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이현이 엷게 웃었다.
“서로에게 빚이 있는 관계를 바라는 게 아니에요. 책임감이나 죄책감으로 곁에 있길 바라지도 않아. 여기서부터의 우리 관계는… 내 선택으로 시작되는 거니까.”
이번에는 라우가 잔뜩 찌푸린 얼굴 위에 미소를 올렸다. 이 자리에서 말로 설득하려 하기보다, 앞으로의 모든 시간 속에서 증명해 나가겠다는 그런 의미의 미소 같았다.
고개를 돌려 자신의 뺨을 감싼 이현의 손바닥에 입을 맞춘 그는, 다음엔 이현의 입술에 입술을 포개었다. 폭신한 살점이 부드럽게 비벼지며 입술을 열었다. 서로를 교환하듯 벌린 입술 사이로 혀를 내밀어 얽었다. 타액과 함께 서로의 가장 은밀한 체취를, 페로몬을 주고받았다.
아래에서, 그의 허리가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불거진 성기로 배를 쓸고 내려간 그가 이현의 가슴에 키스하며 귀두로 회음을 긁었다.
“흐… 윽.”
이현은 그의 머리를 안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무릎을 세운 채 다리를 벌리고 뒤꿈치를 들어 올렸다. 발끝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입술 안쪽의 점막과 혓바닥을 이용해 유두를 폭신하게 감싼 그가 유륜과 그 주변의 피부까지 넓게 빨아들여 잘근거렸다.
“아….”
이현은 뒷머리를 시트에 비비며 턱을 쳐들었다. 미끈거리는 음경의 머리가 입구에 비벼지고 있었다.
입 맞추듯 혹은 서성거리듯, 몇 번 입구 주변을 맴돌며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던 귀두가 지그시 힘을 주며 밀고 들어왔다. 페로몬 덩어리가 몸 안으로 직접 들어오는 기분에 이현은 신음하며 허리를 느리게 비틀었다. 턱의 방향을 바꾸어 가슴을 빠는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뒤로 살짝 물러났다가 그보다 더 깊이 진입하기를 반복하고 있는 아래는, 벌려지는가 싶으면 곧바로 가득 채워졌다. 그의 맥박이 자신에게로 옮겨 오고 있었다.
“알파….”
자기도 모르게 신음처럼 터져 나온 중얼거림이었다. 입술만을 이용해 아프지 않게 유두를 씹던 그가 그것을 뾰족하게 당겼다 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상체를 이현의 몸에 바짝 붙인 채 얼굴을 향해 다가오자, 가까워지는 거리만큼 삽입이 깊어졌다.
“하으으… 흐!”
이현은 라우의 어깨를 움켜쥐고 바르르 떨었다. 밭은 숨이 터지고 도망치려는 것처럼 다리가 허우적거렸다. 그가 번들거리는 푸른 눈으로 이현의 반응을 주의 깊게 살피며 얕게, 그러나 빠르게 허리를 흔들어 내부에 진동을 일으켰다.
아직 전부가 들어오지 않은 탓에 그가 허리를 털어도 사타구니와 엉덩이가 서로 닿지 않았다. 그런데도 두 사람이 흘려 댄 체액으로 척척하게 젖은 교접 부위에서는 찰박거리는 난잡한 소음이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하으, 흐… 흐윽….”
무겁고 커다란 짐승이 몸 위에 엎드려 있어 꼼짝도 할 수 없는 것 같은 압박감이었다. 이현은 숨을 쉬기 위해 입을 벌리고 헉헉거렸다. 그런 이현의 반응을 모조리 훑고 있는 라우의 눈동자가 어느새 완전히 풀려 있었다. 성기의 마찰이 횟수를 더할수록 그는 점점 해방되고 있었다.
“서이혀언… 보고 싶었어….”
1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의 그리움에 대해 많은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그는 그저 이현의 등 아래로 팔을 넣어 꽉 부둥켜안은 채 보고 싶었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하고 싶었어.”
“흐으, 읏… 하윽!”
“너무 하고 싶어서… 벗은 너를 만지고, 입술을 빨고, 네 몸의 어디든 좋으니까 여기… 이거, 너한테 비비고 싶어서… 밤새 자위한 날도 있었어…. 너도 그랬어?”
손을 뻗어 아직 이현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남아 있는 자신의 뿌리를 쥐고 흔들며 그렇게 물어 오는 라우에게서 향기가 흘러내렸다. 누군가 그의 몸을 스펀지처럼 비틀어 안에 든 페로몬의 원액을 쥐어짜 낸 것 같았다.
이현은 자신의 머릿속에도 스펀지처럼 숭숭 구멍이 뚫리는 것을 느끼며 다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리 입을 크게 벌려도 폐 속으로 들어오는 것은 이성의 마비를 일으키는 그의 향기뿐이었다.
매달리듯 그를 마주 안고 도톰한 아랫입술을 빨면서, 외로움에 몸부림쳤던 숭고하지만은 않았던 밤들을 자백했다.
“그랬어요…. 가장 미웠을 때조차도, 몸에 심어진 열은 그대로여서… 아위가… 원망스러웠어.”
“…….”
난잡한 밀어를 주고받으면서도, 아위는 이보다 더 고결한 사랑의 고백은 들어 보지 못했다는 듯한 얼굴로 이현을 바라보았다. 또는 이 낯선 도시에서 이현이 감당해 왔을 외로움의 책임을 스스로에게 돌리며 뼛속 깊이 자책하는 것 같은 얼굴이기도 했다.
이현의 입술과 그 주변, 그리고 뺨 위로, 라우는 자신의 뜨거운 입술을 찍어 나갔다.
“네가 느낄 고통이나 외로움… 하루도 상상하지 않은 날이 없어…. 어떻게 너를 아프게 한 놈이, 내가 될 수가 있는지….”
“으, 흐윽. 하으!”
이현의 몸 위에 완전히 올라타려는 사람처럼 위를 향해 허리를 쳐올리면서 라우는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이미 일상과 상식의 영역을 벗어나 있었다.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그것 때문에 너를 잃었는데도, 난… 네 안에 들어가서 노팅하고 싶은 욕구로 계속 미칠 것 같았어. 미안해… 미안해, 이현아….”
이번에는 미안하다는 말의 반복이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고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후에는 거의 울부짖듯이 사과를 쏟아 놓으면서도, 그는 이현을 헤집는 아래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납작하게 몸을 낮춰 가슴을 이현에게 꽉 맞붙인 채 허리만을 들썩거리는 그는 노련한 기수 같았다. 떠들리는 그의 허리를 따라 뒤로 빠졌던 페니스가 내려앉는 허리와 함께 이현을 짓찧을 때마다 매트리스가 프레임 위에서 덜컹거렸다. 그마저도 교접음의 일부로 느껴질 만큼 이미 이현의 정신도 반 이상 흐트러진 상태였다.
“미안해, 내가… 내가, 정말 잘할게….”
무너지듯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미안하다는 말도 정말 잘하겠다는 말도 생각해 보면 몸을 섞을 때마다 그에게 여러 번 들어 왔었다. 그토록 잘해 주기만 했던 그가 무엇을 그렇게 미안해했는지, 지금은 알고 있었다.
이현은 땀으로 번들거리는 그의 두꺼운 어깨를 쓰다듬다 목에 팔을 감았다. 이 모든 대화가 이루어지는 동안에도 멈추지 않았던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그의 꼬리뼈쯤에서 두 발목을 교차시키고 무릎 사이를 조이면, 그가 깊은 상처를 입은 짐승 같은 신음을 흘렸다.
“이현아… 서이현… 서이혀언….”
이현이 눈앞에 있고 이현의 몸속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그는 그리움에 타들어 가는 사람처럼 이현을 부르며 허리를 움직였다. 쾌감으로 전율하는 것인지 슬픔으로 울부짖는 것인지도 알 수 없게 땀에 젖은 얼굴이 온통 일그러져 있었다.
“여기 있잖아요…. 나 봐요.”
이현은 그의 뒷머리를 당겨 자신을 보게 했다. 흐리멍덩해진 눈동자가 초점을 맞추려는지 눈꺼풀을 몇 번 깜빡거렸다. 풍성한 속눈썹마저도 반들반들 젖어 있었다. 얼굴을 더 자세히 보려는 것처럼 그는 이마에 달라붙은 이현의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쓸어 넘겨 주었다.
“으으, 으… 흐읍….”
라우의 사타구니가 엉덩이 아래에 완전히 밀착되는 감각에 이현은 입술을 물고 뒷머리를 시트에 문질렀다. 마침내 그의 전부가 자기 안에 있었다.
앞뒤로 힘을 주어 파고들던 허리가 원을 그리듯 둥글게 움직였다. 까슬한 음모로 교접 부위 주변을 일부러 더 끈적하게 쓸고 있었다. 느릿느릿 허리를 돌리며 주의 깊게 이현의 반응을 살피는 그는 포획의 기회를 노리는 짐승 같았다.
이현의 엉덩이 바깥쪽을 감싸듯이 무릎을 꿇고 브이 형태로 벌리고 있던 그의 허벅지가 더 안쪽으로 바짝 들어서면서 이현의 엉덩이를 추켰다.
“크… 흣.”
이현의 허리가 공중으로 떠오르면서 서로 이어진 부위에 자극이 가해졌다. 최대치로 벌려진 입구는 그의 것이 조금만 방향을 바꾸어도 아래나 위로 당겨지며 자극을 전달했다. 평소에는 의식도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부위인데 이 순간에는 그 어떤 신체 부위보다 과민하게 성적 기능을 하고 있었다.
라우는 그런 이현의 사소한 반응 하나하나가 살 오른 먹이라도 되는 것처럼 모조리 자신의 시선 안에 가두어 삼켜 내는 듯했다.
몸을 굽힌 그는 이현의 등을 안은 상태에서 앞쪽을 향해 어깨에 손을 걸었다. 이현은 혀로 입술을 적시고 마른침을 삼켰다.
이현의 몸이 위로 밀려나지 못하도록 단단히 붙잡은 채 격렬하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안쪽 깊은 곳에 고여 있던 애액과 그의 쿠퍼액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이미지가 이현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흑! 하으, 읏! 크흑!”
몸통이 완전히 고정된 이현은 그의 아래에서 몸부림쳤다. 위에서 잡아 내리면서 동시에 아래에서 쳐올리는 탓에 그의 힘은 조금도 낭비되지 않고 그대로 이현의 안에 퍼부어지고 있었다. 좀 전까지 불구덩이 속에서 달구어진 쇳덩이로 몸속을 자비 없이 난타당하는 느낌이었다.
흥건히 젖은 내부에는 전혀 뻑뻑함이 없는데도, 마찰이 일어날 때마다 그의 음경이 쓸린 자리에서 불꽃이 이는 것같이 뜨거웠다.
“아으, 쿠… 쿤… 흐윽!”
“왜 그래, 이현아…. 힘들어? 아파서 그래?”
“하… 하으, 흐… 흐윽….”
이현은 아랫입술을 꽉 물고 고개를 흔들었다. 살짝 약해지는가 싶었던 삽입이 좀 전보다 더 강한 힘을 더해 내부를 찧어 댔다. 그의 허벅지에 받쳐져 엉덩이가 들린 탓에 두 다리는 자연스럽게 무릎이 굽혀진 상태로 이현의 가슴 쪽을 향해 접혀 있었고, 그의 음경의 뿌리가 입구에 턱턱 막힐 때마다 종아리가 덧없이 허우적거렸다.
땀으로 손이 미끄러질 때마다 그는 이현의 어깨를 계속 고쳐 안았다. 그의 힘을 분산시킬 수 있는 틈이 전혀 없었다. 분명 헐떡거리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입구가 알아서 꾸물거리며 그의 것을 물었다 놓고 있었다.
그는 목이 졸리는 사람 같은 기묘한 신음을 흘리며 이현의 어깨에 이마를 박았다. 넓은 어깨와 등의 모든 근육이 곤두선 채 번들거렸다.
그가 몸 전체를 천천히 뒤로 물리자 몸속 가득했던 체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음경 표면과 귀두의 도드라진 부분이 내벽을 긁으며 빠져나가는 근지러움에 허리가 빠질 것 같았다. 허벅지가 자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크흡! 흑!”
귀두만을 남기고 물러났던 그가 허리가 아닌 전신의 힘을 이용해 단번에 뿌리까지 밀어 넣었다. 이현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저 그의 등을 꽉 붙잡으며 숨을 삼켰다.
쑤욱 빠져나갔다 단번에 푹 박혀 오며, 손끝 발끝과 머리까지 울리게 하는 거센 타격. 그는 이현의 가슴 위에 엎드려 그 짓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하아아… 후….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거리며 입술을 벌린 그가 고개를 쳐들었다. 이현에게 둘러싸인 쾌감을 음미하듯 신음하며 허리를 잘게 털었다.
“네 페로몬이 펄펄 끓고 있는 좁은 관에다… 페니스를 담갔다 빼는 기분이야….”
뜨거운 건 그의 음경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흘러내려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사이로 이현을 내려다보면서 그가 코를 찡그리며 웃었다. 역광의 어둠 속에서 광기 어린 섹스 중에 드러내는 흰 미소가 이질적이었다.
“서이현 씨.”
장난스럽게 부르는 라우의 꽉 잠긴 목소리에 이현은 잠시 한숨 돌리며 그의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만지작거렸다.
“여전히 섹스를… 잘하시네요.”
생각지도 못한 갑작스러운 그의 칭찬이 엉뚱해서 이현도 피식 웃음이 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섹스 잘하는 게 별건가. 상대를 미치게 하면… 그게… 잘하는 거지. 안 그래요?”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귓가에 짧게 입을 맞추고는, “미안해.”라고 속삭였다.
“하으, 흐. 흑… 크읏!”
갑작스러운 사과의 뜻을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섹스가 소강상태에 접어드는 것인가 싶었던 방심의 순간, 누군가 우악스러운 손으로 목덜미를 콱 졸라 온 것처럼 숨이 틀어막혔다.
“내가 지금… 미친 것 같거든.”
단지 상징적인 표현만이 아니라 정말 정신의 일부가 비정상적인 영역으로 밀려나 버린 것처럼, 그렇게 말하는 라우의 눈은 초점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그러니까 서이현은, 섹…스를… 아주, 잘하는 거지.”
이전의 모든 노팅과 달리 아무런 예고가 없었다.
배 속에서 두근거리는 성기의 맥박과 그 맥박에 맞춰 물결처럼 퍼지는 페로몬의 확장이, 단숨에 이현의 눈에서도 초점을 앗아 갔다.
노팅 시의 성기는 뒤로 뺐다 밀어 넣는 삽입의 반복이 불필요했다. 아니, 접착시켜 놓은 것처럼 점막에 완전히 들러붙은 탓에 앞뒤로 문지르는 행위 자체가 불가능했다.
성기는 저 스스로 부풀었다 꺼지기를 빠르게 반복하며, 문지르는 마찰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내벽을 미친 듯이 두드리며 자극하고 있었다. 알파가 아니면 결코 줄 수 없는 방식의 쾌감이었다.
그가 꽉 끌어안은 자세 그대로 이현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무릎을 꿇은 그의 허벅지 위에 이현이 올라탄 자세가 되면서 가슴과 가슴이 맞닿았다.
“으, 흐으으, 흐… 하으윽!”
자신의 몸무게만큼 내부에 더해지는 압력 때문에 이현은 사지를 내저으며 벌벌 떨었다. 눈동자에 습기가 어리고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터… 터질 것 같… 배 속이… 빨리… 안 돼.”
라우는 겁에 질려 횡설수설하는 이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공포에 대한 처방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현의 입 안에 혀를 넣어 페로몬을 흡입하게 했다. 삽입을 주저하며 허벅지 사이에 성기를 비비려 했던 그는 페로몬에 모조리 삼켜진 후였다. 여기까지 온 알파는 결코 멈출 수 없었다. 그가 삽입 자체를 피하려 한 이유이기도 했다.
“오랜만이어서… 잊어버린 거야? 서이현 이거, 하룻밤에 몇 번도 할 수 있잖아….”
성기가 완전히 꽉 끼어 후퇴와 삽입을 할 수 없는 대신, 그는 허벅지를 흔들어 그 위에 올라앉은 이현의 몸에 진동을 일으켰다.
“흐으으, 흐… 하으, 으… 흑….”
겨우 몰아쉬고 있던 이현의 숨이 덜덜 떨렸다.
“우리 둘 다, 완전히 맛이 가서… 온 방을 기어 다니면서 아침까지 하고 또 했잖아….”
그의 허벅지를 타고 전해지는 떨림에 몸속을 때려 대는 노팅의 박동이 더해졌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제대로 의식할 수가 없었다. 등을 가로질러 감싼 라우의 팔이 아니라면 곧장 허리가 무너지면서 뒤로 넘어갈 것 같았다.
라우의 음경과 귀두가 확장하면서 점막을 쿵, 쿵, 두드려 댈 때마다 금방이라도 사정에 도달할 것 같은 오싹거림과 두근거림이 전신을 휘감았다. 붉게 달아오른 그의 페로몬이 위험할 정도로 빠르게 혈관 속을 내달리는 것 같았다.
이현은 입술을 다물지 못한 채 헉헉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이… 이런 건, 처음….”
“처음? 어떤 처음?”
그는 이현의 관자놀이에서 턱선을 타고 목줄기로 흘러내린 땀방울을 혀로 핥으며 거슬러 올라갔다. 귓가에 바짝 입술을 대고 비밀을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췄다.
“이렇게… 오메가처럼 느끼는 건 처음이야?”
“…흐읏!”
오메가라는 단어에 반응하는 자신을 어쩔 수 없었다. 의지와 관계없이 내벽이 크게 꿈틀거리며 그를 쥐어짰다. 오르가슴의 상승감이 높은 곳으로 몸을 쏘아 올렸다.
라우의 어깨를 비틀면서 이현은 턱을 벌린 채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덮쳐 오는 뒤쪽의 쾌감이 너무나 강렬해서 페니스가 사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절정에 달한 이현의 얼굴을 핥듯이 올려다보던 라우가 뒤이어 사정했다. 점막에 얼얼함을 느낄 만큼 강한 압력으로 정액이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노팅 끝의 사정은 페로몬 그 자체였다. 진동하는 야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아무리 진해져도 불쾌하지 않은, 다리를 벌리고 엉덩이를 흔드는 난잡한 행위 앞에서 주춤거리게 하는 모든 제약을 마비시켜 버리는 그 향은 절정의 순간을 더 황홀하게 했다.
이현을 힘주어 껴안은 라우는 긴 사정이 잦아들 때까지 멈추지 않고 허리를 흔들었다. 그의 페니스로 빈틈없이 꽉 찼다고 생각한 내부에 꾸역꾸역 정액이 들어차면서 생기는 압박감과 배 속이 팽팽해지는 것 같은 포만감은,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더 외설스러웠다. 그가 허리를 튕겨 몸을 쳐올릴 때마다 입구가 비벼지면서 벌려지고 당겨지는 느낌마저도 이전과는 달랐다.
“또… 또 갈 것 같… 하, 하윽!”
질끈 깨문 이현의 아랫입술을 그가 낚아챘다. 퍼즐을 맞추듯 상대의 아랫입술과 윗입술 사이에 자신의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번갈아 겹쳐 가며 서로를 삼키려 안달했다.
아래에서는 노팅이 잦아드는 속도와 함께 점성을 가진 액체가 그의 성기 둘레를 따라 찔끔찔끔 새고 있었다. 페니스가 아닌 다른 구멍에서 체액이 흐른다는 그 야릇함에 이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흑… 크흣!”
감각을 음미할 겨를도 없이 이현의 양 허리를 붙잡은 그가 한순간 쑥 빠져나갔다.
엄청난 압력으로 안을 누르고 있었던 만큼 빠져나가며 일으키는 마찰도 엄청났다. 말 그대로 아래가 빠질 것 같았다. 이현은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내려치기까지 했다. 진저리 쳐지는 쾌감 때문이었다.
라우가 곧바로 이현의 허리를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무릎으로 버티고 선 이현의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무자비한 굵기의 성기가 직전까지 꽉 틀어막고 있었던 애널이 미처 다물어지지 못하고 벌름거렸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그 음란한 수축과 이완이 그대로 느껴졌다.
“못 서 있겠… 으, 흐윽….”
“나 잡아.”
라우가 자신의 어깨 위에 이현의 손을 놓으며 허리를 더 단단히 받쳐 주었다. 체액 덩어리가 다리 사이에서 주르륵 쏟아지는 생경함에 이현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를 내리누르듯이 기댄 채 숨만 몰아쉬었다.
라우는 이현의 다리 사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가 흥분에 억눌린 쉰 목소리로 욕설을 뱉었다. 이현은 겁나는 장면을 확인하듯 고개를 그대로 둔 채 시선만 조심스럽게 끌어 내렸다.
서로의 정액과 애액이 뒤섞인 반투명한 액체는 허벅지 안쪽을 타고 흐르는 정도가 아니었다. 벌어진 애널 입구에서 후드득 직선을 그리며 곧장 떨어져 시트 위에 고여 들고 있었다.
“으으, 흐윽….”
이현은 그의 어깨를 붙잡고 있던 손가락을 굽혀 피부에 손톱을 박았다. 이현의 허벅지와 엉덩이가 움찔거리며 경련할 때마다 애널은 과도하게 삼키고 있던 분비물을 왈칵 쏟아 냈다. 페로몬의 마비 사이로 희미하게 수치를 느끼면서도, 라우와 마찬가지로 이현은 그 음란한 배설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허벅지 안쪽을 느리게 더듬어 올라간 그의 손이 액체가 새는 입구 주변 도톰하게 부어오른 살을 만지작거리다, 손을 오목하게 모아 그것을 받아 냈다. 그러고는 이현의 몸에서 흘러나온 탁한 분비물로 자신의 성기를 문질렀다.
노팅의 여운이 완전히 가라앉지 않아 불끈거리는 검붉은 음경은 몸 밖으로 밀려 나온 그의 심장 같았다. 이현은 그것을 다시 또 몸속에 넣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노팅을 마친 직후임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은 그의 페니스처럼, 자신의 성욕 역시 절대 지치지 않을 것 같았다.
이현은 마른 입 안을 혀로 훑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렇게 흘러나오면… 혹시 그거,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이현의 다리 사이에 정신이 팔려 있던 라우는 모호한 대명사를 포함한 질문에 비스듬히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그의 흰자에 붉은 핏줄이 선명했다. 여전히 진정되지 않은 숨을 고르며, 이현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밖으로 다 나와 버려도 괜찮아요? 그거랑은… 상관없나?”
“…….”
그제야 이현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아챈 라우는 미간을 강하게 찌푸렸다. 튀어 오르듯 무릎을 세우며 일어나 이현의 입술에 덤벼들었다.
“으음, 음. 흠.”
극도의 허기 뒤에 먹이의 향긋한 살에 얼굴을 파묻은 짐승처럼 그는 갖가지 방법으로 이현의 입술을 점령했다. 페로몬을 녹여 낸 물이 줄줄 흐르는 엉덩이를 움켜쥔 두 손은 아예 그것을 비틀어 안에 든 액체를 모조리 짜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걸 걱정하는 거야?”
그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이현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괴로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널… 어떻게 할까. 나랑 가자, 서이현. 아니면 내가 여기 계속 있을게. 아무것도 필요 없어. 그냥 내가… 너만 아는 바보가 되는 게 낫겠어. 나랑 있자. 어?”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이현의 후각을 적시고 또 적시는 페로몬과 술에 취한 사람 같은 횡설수설이, 어떤 지점 이상으로 치솟은 그의 흥분을 증명하고 있었다.
라우는 재빨리 이현의 허리를 돌려세웠다. 엉덩이에 바짝 붙어 서서 뒤에서 허리를 안아 거의 들어 올리듯이 앞쪽으로 이현을 몰아갔다. 이현의 손목을 쥐고 베개가 기대어져 있는 침대 헤드로 가져갔다.
“꽉 잡아.”
서울 집에 있는 그의 침대와 달리 허술해 보이는 얇은 합판이었다. 이현이 더듬더듬 헤드의 가장자리를 움키자 그가 다리 사이에서 곧바로 자리를 잡았다.
뒤를 돌아보니 시선을 느낀 그가 눈동자만을 움직여 이현과 눈을 맞췄다. 표정의 변화 없이 엉덩이의 골 사이를 더듬던 그의 손이 허리를 타고 올라와 지그시 등을 눌렀다. 어정쩡하게 상체를 숙이자 자연스럽게 엉덩이가 뒤로 더 내밀어졌다. 쳐들린 엉덩이 아래로 벌어진 구멍과 고환, 거꾸로 매달린 음경이 그에게 전부 드러나 있을 거란 상상에 어깨와 허리가 비비 틀렸다.
“으으… 으. 흐윽.”
첫 번째 노팅이 남긴 흔적이 아직도 축축하게 남아 있는 좁은 틈 속으로, 매끄러운 귀두를 앞세운 묵직한 덩어리가 스르륵 밀려들어 왔다. 진입이 쉽다고 해서 느껴지는 압박감까지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좀 전의 첫 번째와 달리 내벽은 한껏 민감해져 있는 상태였다.
귀두를 벌름거리며 미끄러져 들어와 안을 빠듯하게 채운 것만으로도 이현은 몸을 떨면서 침대 헤드를 붙잡은 손에 힘을 줘야 했다.
“크으, 흣!”
음경의 기둥과 부푼 귀두가 안을 긁으며 물러나다가 입구 근처에서 멈추고, 다시 단번에 푹 찌르며 몸속을 강타했다. 그 행위가 빠르게 반복됐다. 침대 헤드를 밀어내듯이 팔에 힘을 주고 있는데도 몸이 계속 앞으로 쏠렸다. 들쑤시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무릎이 점점 더 시트를 구기며 앞으로 밀려 나갔다.
“하, 하으, 흑… 흐윽.”
이현의 등에 자신의 가슴을 바짝 붙이고 어깨 너머로 얼굴을 내민 라우는 이현의 모든 반응을 낱낱이 주시하고 있었다. 신음을 낮춰 보려 아랫입술을 깨물자, 그가 팔을 뻗어 입술을 끌어당기고는 대신 자신의 손가락을 물렸다.
“으, 음. 음. 흠!”
입술을 오므리면 겹쳐진 중지와 검지가 혓바닥 위를 불이 나게 문질렀다. 아래에서도 위에서도 질퍽거리는 빠른 삽입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었다.
가끔씩 웃음소리가 와르르 터져 나오던 옆방도 어느 순간부터 잠잠했다. 어쩌면 덜컹거리는 소리의 원인을 눈치채고 파티를 중단한 채 모든 신경을 이쪽 방에 곤두세우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다 해도 이 짓을 멈출 도리는 없었다.
입 안의 여린 점막을 여기저기 건드린 그의 손가락이 빠져나가면서 베개와 시트 위로 타액이 늘어졌다. 그것의 잔해가 아래턱으로 흘러내렸지만 닦아 낼 여유가 없었다.
바로 귓가에서 헐떡거리는 그의 숨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상체를 일으킨 그가 이현의 왼쪽 허벅지를 안에서부터 바깥쪽으로 감아쥐고는 그대로 다리를 들어 올렸다.
“나하고 있자. 서이현. 어?”
한쪽 다리가 들린 체위 탓에 내부에서 페니스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 상태에서 그가 불쑥 성기를 부풀렸다.
“아으, 흐. 흐읏!”
구석구석 문질러지고 두드려지고 흠뻑 젖은 후 눅진하게 녹아내린 내벽에 두 번째 노팅이 퍼부어졌다.
이현은 헤드를 붙잡은 채 상체를 무너뜨리며 애원하듯 신음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럼에도 그는 다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자신의 왼쪽 다리를 세워 이현의 허벅지 아래 받치고 교접 부위를 더 바짝 밀착시켰다. 이현은 침대 헤드를 쥔 손을 놓치고 주르륵 미끄러져 베개 위를 내리치고 쥐어뜯었다.
상체를 숙인 탓에 더 바짝 쳐들린 엉덩이 안에서 그의 노팅이 박동하고, 소변을 보는 개처럼 한쪽 다리를 든 탓에 외부를 향해 활짝 벌려진 애널에서는 그 개가 흘려 대는 침처럼 페로몬 액이 뚝뚝 새고 있었다.
미칠 것 같았다. 평소의 신음과는 완전히 다른, 엉엉 우는 것 같은 울부짖음을 숨기려 베개 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대답해 줘….”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지만, 이현의 허리가 내려앉지 못하도록 꽉 붙잡은 채 노팅의 쾌감 속에서 허리를 튕겨 대는 그는 사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너만이… 내 통제력을 부수고, 유령 같은 삶에 색깔을 부여할 수 있어. 네가 아니면 나는….”
말을 다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두 번째 사정이 시작됐다.
배 속을 난타하는 홧홧함에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흔들면서 이현은 베개 위에서 고개를 돌렸다. 흰색 커버로 감싼 푹신한 베개에 절반쯤 얼굴이 가려진 채 라우를 돌아보았다. 성행위에 몰입해 앞뒤로 펄떡거리는 허리와 다르게 마주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이 너무나 간절해서 무슨 말이든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몸의 안과 밖을 모조리 흔들고 있는 이상은 무리일 것 같았다.
농도를 더하는 페로몬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기 전, 사랑한다는 말만을 겨우 속삭였다. 그것이 그의 귀에 닿았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 ■ ■
눈을 뜬 곳은, 침대 맞은편에 싱크대가 있고 발밑으로는 두 쪽의 창문 앞에 낡은 책상이 놓인 자신의 방이 아니었다.
이현은 눈을 깜빡이면서 시야에 들어온 전경을 점검했다. 이곳이 어디고, 어떻게 자신이 이곳에 누워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날이 완전히 밝은 것 같은데 길게 연결된 창문의 위쪽으로 내다보이는 하늘은 어제와 같이 여전히 낮고 어두웠다. 눈이 내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
굼뜬 의식이 마침내 어젯밤 눈 속에서 그와 재회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처럼 곧바로 가슴이 뛰었다. 이후의 일들도 연거푸 수면 위로 딸려 올라왔다.
그가 가끔씩 와서 머물고 있었다는 ‘더 핸즈’ 근처의 스튜디오식 아파트.
의식이 어느 정도 제 기능을 회복하자, 뒤이어 육체에 남은 어젯밤의 흔적이 앓는 신음을 자아냈다. 허리 아래가 묵직했다. 특히나 엉덩이 안쪽이 멍이 든 것처럼 얼얼했다.
너무 많이 비벼 대고 노팅으로 두드린 탓에 살짝 화끈거리는 감각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게 굵고 딱딱한 것을 품고 그렇게 오랫동안 섹스를 즐겼음에도 어디 한 곳 찢어지거나 상처 입은 곳은 없었다. 보편적으로는 그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며, 고스트와 디디 사이의 설명할 수 없는 상호 작용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었다.
과거 자신이 알파와 베타의 차이에 대해, 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성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었는지를 생각하며 비식거리는 동안, 이번에는 등 뒤에 바짝 붙은 체온과 규칙적인 숨소리가 인지되었다.
그러고 보니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묵직한 팔이 자신의 옆구리에 걸쳐져 아랫배를 느슨하게 안고 있었다.
그가 정말로 돌아온 것이다. 그것도, 그림을 받아 보기도 전에.
아니, 그는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이제 자신이 제자리를 찾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그의 팔의 무게와 평온한 호흡을 가만히 느끼며 얼마 동안 그대로 누워 있었다. 한 무리의 어린아이들이 잔뜩 신이 난 목소리로 웃고 떠들며 골목을 달려갔다. 눈은 그쳤지만 밤사이 제법 쌓여, 누구도 밟지 않은 새 눈을 찾아 동네를 휘젓고 다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멀어지는 그 명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이현은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누웠다.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시트로 자신의 몸을 돌돌 말아 준 뒤 그 몸을 껴안고 잠든 그는 정작 알몸이었다. 라디에이터로 공기를 데우는 난방에는 한계가 있었다. 창문이 벽 한 면을 거의 차지한 데다 어젯밤 커튼도 치지 않고 잠든 탓에 실내 공기는 그다지 훈훈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전혀 추위를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시트를 나누어 덮어 주고 싶었지만, 그러다 곤히 자고 있는 그를 괜히 깨우는 꼴이 될 것 같았다.
침대 위에 비치된 여러 개의 베개를 두고 굳이 하나의 베개를 서로 사이좋게 나누어 베고 있었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기억의 부분 부분이 삭제되어 어떻게 잠자리에 들었는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다리 사이와 허벅지 안쪽이 찝찝하지 않은 걸 보니 분명 샤워를 하거나 그가 젖은 타월로 닦아 준 것 같은데… 아마도 후자 쪽이 유력했다.
기억에 확실하게 남아 있는 자신의 마지막은, 샤워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일 힘도 없이 그의 품에서 축 늘어진 채 네 번째인가 다섯 번째 삽입을 받아 내며 흐느적거리는 모습이었으니까.
팔을 접어 관자놀이 아래 받치고 이현을 향해 누운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미간에 주름을 잡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고단해 보였다. 아래턱과 코밑, 턱과 이어진 목덜미 위쪽이 넓게 파르스름했다.
그의 팔꿈치가 앞머리를 살짝살짝 건드리는 위치에서 가만히 얼굴을 올려다보기만 하고 있던 이현은, 몸을 완전히 휘감은 시트의 위쪽으로 겨우 손을 빼냈다. 밤새 까끌하게 올라온 짧은 수염을 조심조심 손끝으로 쓸어 보았다.
움찔거리지도 않기에 깊이 잠든 것 같아, 따끔따끔한 촉감을 느끼며 한참 놀다가 살짝 표정을 살폈다. 좀 전과는 다르게 숱이 많고 긴 속눈썹이 가끔씩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자는 거 아니죠?”
일부러 아주 작은 소리로 물었는데도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를 감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어설펐어?”
간밤의 길고 과격했던 정사를 반영하듯 그의 목소리 역시 꽉 잠겨 있었다.
눈을 감은 채 심각한 표정으로 묻는 목소리에 슬쩍 웃자, 그 역시 눈을 감은 채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당겨 꽉 끌어안았다.
“안 추워요?”
“밤새 누가 뜨겁게 해 준 덕분에. 전혀.”
그의 목덜미에 코끝이 닿은 상태로 조심스럽게 물었고, 그는 안은 어깨 끝을 둥글게 문지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왜 나 안 봐요?”
“좀… 무서운데.”
“뭐가요.”
뭔가를 무섭다고 말하는 그가 신기해서, 이현은 그의 목덜미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그가, 강하고 커다란 육체와 경제적·사회적으로 스스로를 지키고도 남을 만큼의 힘을 가진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 것 같았다.
색이 변해 버린 눈동자를 마주한 자신의 눈에 잠깐이라도 멈칫하는 기색이 스쳐 지나갈까 봐, 아주 잠깐이라도 경멸이나 혐오로 흔들리는 자신을 보게 될까 봐, 그는 움츠린 채 스스로를 감추고 있었다.
이현은 그의 턱 끝에 코를 비비며 말했다.
“숨기지 않기로 했잖아요.”
“…….”
그의 빼곡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몇 번 깜빡이다 천천히 들어 올린 눈꺼풀 아래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여전히 라우였다.
“입술, 또 부었다. 눈가도 조금 빨갛고.”
그의 손이 이현의 입술과 눈가를 만지작거렸다.
예전에 거의 매일 미친 듯이 몸을 섞었던 날들이 바로 며칠 전인 것처럼 그는 ‘또’라는 표현을 사용해 지난 시간의 거리를 지워 버렸다.
“그런 것까지 다 보여요?”
이현의 질문에 그가 어깨를 떨며 낮게 웃었다. 그리고 등을 당기며 다시 이현의 얼굴을 자신의 어깨에 묻었다.
“이렇게 가까이에 있으니까.”
그가 얼굴을 마주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눈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현은 그의 가슴을 슬쩍 밀어내며 턱을 들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턱 끝을 쥐고 살짝 끌어 내렸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의 눈이 달라 보이는 것은 동공 때문이 아닌 홍채에 일어난 색 변화 때문이었다. 빛을 흡수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진 동공은 그대로 검은색이었다. 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원인으로 희게 탈색된 홍채가 비정상적으로 팽창한 탓에 검은 동공이 거의 가려져 있었다.
홍채 근육 조직의 움직임에 의해 밝은 곳에서는 동공이 축소되고, 어두운 곳에서는 확대되면서 반응하듯이, 그의 동공은 팽창된 홍채에 의해 심하게 왜곡된 상태였다. 깜빡일 때마다 좀 더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기는 했지만, 일반적이지 않은 상태임은 분명했다.
평소의 푸른빛이 거의 다 사라진 홍채에는 흰색에 가까운 연한 회색빛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사람마다 다르다는 홍채의 무늬만큼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마치 빛을 투영시키는 프리즘이나 정교하게 조각한 대리석처럼 각도를 달리하며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바둑알 같은 흰색을 띤 인공적인 느낌은 결코 아니었다. 유령 같은 섬뜩함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현은 갈라진 목소리를 다듬으려 몇 번 목을 풀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게 된다면 뭐라고 할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내 눈에는… 너무 아름다워요.”
“…….”
“숨기지 마요. 예뻐요.”
“…….”
“스노우볼 같아요.”
그는 말이 없었다. 사랑스러움과 감격, 옅은 슬픔이 섞인 행복이 목구멍을 틀어막은 것 같은 복잡한 표정으로 그저 이현을 마주 바라보았다.
춥지 않다는 그의 말대로 열을 품은 따뜻한 손바닥이 뺨을 덮어 왔다. 커다란 손바닥은 뺨을 전부 덮고 귓가를 지나 머리카락 사이를 느리게 쓰다듬었다.
“네가 그렇게 봐 준다면 됐어. 세상이 나를 고스트라고 부르건, 아니면 나 같은 존재가 있다는 사실조차 아예 잊었건… 이젠 상관없어.”
비장할 것도 없다는 듯 오래전에 이미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는 듯, 덤덤한 어투로 그렇게 말한 라우는 이현의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는 이마에 입술을 길게 눌렀다. 가만가만 머리카락을 만져 주는 손길이 나른하게 기분 좋아서 이현은 얌전히 눈을 감았다.
“머리, 많이 길었죠?”
“…음?”
“중간중간 유니 누나가 잘라 주기도 하고 미용실도 가긴 했는데, 그래도 작년보다는 많이….”
얘기를 잠시 중단한 이현은 턱을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혹시, 마지막으로 여기 왔던 게 언제예요?”
라우는 이번에는 다른 이유로 이현의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다 체념하듯 한숨을 내쉬며 자백했다.
“2주일 전…?”
“2주일 전에 봤으면, 머리카락이 많이 길었다고 할 순 없겠네요.”
좀 전에 그가 보였던 애매한 반응이 이해가 됐다. 이현은 피식 웃으며 다시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에 이마를 내주었다.
“올 때마다 볼 수 있었던 건 아니었어.”
낮게 잠긴 허스키한 목소리가 조용히 이어졌다.
“운이 좋으면 외출을 하거나 외출에서 돌아오는 너를 잠깐 볼 수 있었지만, 접근할 수 있는 거리에 한계가 있었으니까.”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간 적도 있다는 뜻이에요?”
그가 별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웃으며 이현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보지 못하더라도, 가까이에 네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충분했으니까.”
이현은 웃을 수가 없었다. 그가 투자한 돈과 시간이 곧 사랑의 증명이 되기 때문이 아니다. 입장을 바꾸어 머릿속에 그려 보면, 그가 느꼈을 감정을 아주 쉽게 상상할 수 있었고, 또 거기에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오히려 어떤 반응도 보일 수가 없었다.
시트 위로 빼낸 팔을 그의 옆구리에 두르고 눈앞의 어깨에 지그시 입술을 눌렀다. 라우가 허리를 틀어 좀 더 가까이 몸을 밀착시키며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꽤 오랫동안 정지해 있었다. 길고 격정적이었던 밤의 끝에서 이제야 재회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음미해 보듯이.
그리고 한참 만에 라우는 이현을 가슴에서 떼어 냈다.
“배고프겠다. 아무것도 안 먹이고 너무 오래 괴롭혔네.”
감정의 들썩임을 숨기려 일부러 톤을 높인 목소리였다.
“괜찮은데….”
“여기서 뭘 만들어 먹질 않아서 대단한 건 없지만, 간단히 만들어 줄게요.”
이현은 몸을 일으키는 라우의 손목을 붙잡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대신, 커피 주세요. 커피 마실게요.”
고작 커피만 먹이는 것이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잠시 내려다본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한 번 꽉 잡았다 놓아주었다. 그리고 침대 옆 옷장 안에서 새 속옷을 꺼내 입고 매트리스에서 내려가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탄탄한 허벅지를 반 뼘쯤 감싸고 내려오는 검은색 복서 브리프. 속옷 취향도 그대로였다. 사소한 것에서 눈앞의 대상이 실제 라우임을 실감한 이현은 또 한 번 가슴이 뛰었다.
사랑 때문이건 페로몬 때문이건, 둘 모두의 영향이건, 그를 눈앞에 두고 거부하는 것은 1년 이상을 떨어져 지낸 지금에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사이 라우가 찾아와 사랑을 호소했다면 자신은 충분한 시간을 가지지 못한 채 분명 그리움에 항복했을 것이다.
다시 만난 것이 지금이어서, 그가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준 사람이어서, 다행이었다.
실내에 곧 신선한 커피향이 가득했다. 커피향을 맡은 것만으로도 머리가 조금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서울에 있는 그의 집, 지하 스튜디오의 간이 주방 이상으로 협소한 주방에 서서 속옷 차림으로 커피를 내리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현은 무겁게 가라앉는 몸을 추슬러 베개에 기대앉았다.
기분 탓인지 그의 모든 행동이 평소보다 조금 느려 보였지만, 익숙한 반경 안에서 손에 익은 일을 처리하는 것에는 큰 지장이 없어 보였다.
조금은 다행이라고 느끼며 이현은 시선을 옮겼다. 어젯밤 엉망으로 벗어 바닥에 팽개쳐 두었던 옷들이 단정하게 개켜져 테이블 위에 정리되어 있었다.
눈도 잘 보이지 않았을 그가, 자신이 잠든 사이 파르스름한 어둠 속에서 젖은 타월로 몸을 닦아 주고 옷을 정리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홍콩에서도 그랬다. 처음 삽입을 했던, 아마도 라우 역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첫 체인징이 이루어졌을 그 당시에도, 그는 자신이 일어나기 전 호텔을 떠나면서 옷을 전부 깔끔하게 정리해 두었었다.
그날 아침, 왜 그가 사라질 수밖에 없었는지. 다시 나타났을 때 왜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는지.
이제야 알게 된 과거의 진실을 더듬으며, 이현은 한약을 달이듯 정성스럽게 드립 커피를 내리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다시 바라보았다.
“저, 언제 잠든 거예요?”
그가 뜨거운 물이 든 포트를 바로 세우며 뒤를 돌아봤다.
“음… 세 번째 노팅 뒤에 등을 애무하다가 키스를 하려고 얼굴로 올라가니까, 잠들어 있더라고.”
“아… 죄송해요.”
어깨 너머로 이쪽을 다시 돌아보며 슬쩍 웃은 그가 포트를 선반 위에 완전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두 잔의 머그를 이쪽으로 가지고 오면서 시트 위로 드러난 이현의 상체를 힐끔거렸다.
“오랜만이었는데 너무 무리시켜서… 내가 미안하지.”
그의 시선을 따라 아래를 내려다봤다. 가슴과 배, 옆구리가 깨물고 빨아들인 흔적으로 얼룩덜룩했다. 그가 건네는 머그를 받아 쥐면서 이현은 자세를 바꾸는 척 베개에서 등을 떼고 무릎을 세워 몸을 가렸다.
라우 역시 간밤의 흔적을 짓궂게 파헤치며 열기를 되짚어 보는 대신, 모르는 척 이현의 발치에 걸터앉아 커피를 마실 뿐이었다.
오랜만이기는 해도 이미 수없이 여러 번 몸을 겹쳤었고, 선을 넘어 나사가 완전히 풀려 버린 모습을 서로에게 드러낸 것이 처음도 아닌데. 어쩐지 첫 관계 후 아침을 맞은 커플처럼 쑥스럽고 어색했다.
마실 것이라도 있어 다행이라는 듯, 두 사람 모두 한동안 커피를 마시는 데에만 열중했다. 적어도 그런 척을 했다.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마룻바닥 어딘가를 내려다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던 라우가 먼저 조용히 침묵을 깨뜨렸다.
“어젯밤에… 네가 한 말들.”
이현에게 옆모습을 보이고 앉아 있던 그가 천천히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눈동자의 색은 마주할 때마다 속을 움찔거리게 했지만, 거부감 때문이 아니라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그는 하기 어려운 말을 꺼내려는 사람처럼 어깨와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 천천히 꺼트리면서 숨을 쪼개어 내쉬었다.
“나를 다시 받아 주겠다는 뜻으로… 생각해도 될까?”
매트리스를 받친 낮은 프레임 위에 발을 올리고 무릎 위에 느슨하게 팔을 걸친 라우는 얼핏 편안해 보였다. 하지만 머그를 쥔 손과 팔에는 팽팽하게 근육이 당기고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이현은 시트를 덮은 무릎 위에 머그를 올리고 손으로 표면을 쓰다듬으며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그리고 자신을 변화시킨 증거로 하얗게 변해 버린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페니스의 열기와 힘주어 벌려졌던 감각, 끝없이 퍼부어지던 정액이 아직 몸 안에 남아 있는 것처럼, 자신과의 섹스의 흔적이 그의 육체에도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 깊은 곳의 독점욕과 소유욕을 은근하게 만족시켰다.
이현이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어깨와 가슴에서 가까스로 긴장이 빠져나갔다. 하지만 완전히 편안해진 것 같지는 않았다.
서울로 보낸 그림을 보고 찾아온 것이 아니라면, 그에게 어젯밤의 만남은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돌발 상황이었다. 이현이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의 결정에 도달했는지도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이현 역시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하지만 그 모두는 지금 이 자리에서 몇 마디 대화로 한 번에 해소할 수 있는 틈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을 들여 천천히 지워 나가야 할 상흔이었다. 그때까지 서로에게 약간의 불안과 조급, 갈증을 느낀다 하더라도 그것이 꼭 관계의 흔들림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시트 위로 이현의 발목을 느슨하게 쥔 라우가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거린 끝에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거 마시고 같이 나가서 제대로 된 아침도 먹고… 저녁까지… 같이 있을 수 있을까.”
이현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아… 저도 그러고 싶은데… 매일 규칙적으로 작업하는 시간은 꼭 지키고 싶어서요.”
그는 곧바로 웃으며 수긍했지만, 커피잔을 입술로 가져가는 얼굴은 섭섭함을 감추려 애쓰는 것 같았다. 자신과의 시간보다 작업을 우선해서 느끼는 섭섭함이 아니라, 단지 함께 보내지 못하는 시간에 대한 아쉬움임을 알기에, 연속으로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미리 말해 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 저녁엔… 외부에서 초대받은 작은 파티가 있어요.”
‘늦은 발현’에서 주최하는 이른 크리스마스 파티가 하필 오늘 저녁이었다.
“아마 거기서… 10시쯤까지는 자리를 지켜야 할 것 같아요.”
수축과 팽창을 바쁘게 반복하던 희뿌연 홍채가 이현의 얼굴에서 아쉬움을 읽어 내고는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이현의 발목을 쥐고 있던 손이 부드럽게 종아리로 타고 올라와 마사지하듯 만지작거렸다.
“그럼, 끝날 때쯤에 맞춰서 그쪽으로 데리러 갈까?”
이현은 조금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한된 기간 동안 최대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은 것은 이현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오해하지 않기를 바랐다.
“언제 서울로 돌아가세요?”
왼손으로 종아리를 주무르며 오른손에 든 머그를 기울여 커피를 마시던 그가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기울인 머그 위로 이현을 올려다보았다.
“여기에 계속 있을 생각인데. 어젯밤에 그렇게 하기로 합의한 거 아니었나?”
“…….”
분명 그가 그런 말을 중얼거렸던 기억이 있었다.
함께 있자고. 계속 이곳에 있겠다고.
하지만 그때는 둘 다 페로몬에 완전히 취해 있었고….
눈을 굴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이현은 곧 그가 농담한 것임을 깨닫고 한 박자 늦게 피식 웃었다. 가끔 한 번씩 그의 농담을 따라가기 어려운 것도 여전했다.
“아마 유니에게 들어서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지금 팬텀이 공사에 들어갔거든. 한 실장이 휴가를 줘서 일주일 정도 틈이 생겨서… 27일에는 돌아갈 예정이었어.”
27일이라면 이제 닷새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크리스마스에는… 계속 같이 있을 수 있어요.”
“나 때문에 계획을 변경하는 건 아니고?”
이현은 고개를 저으며 머그를 가볍게 흔들었다.
“성탄절 정도는….”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표현을 하고, 생각만큼 함께할 수 없는 상황에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하며 이현에 대한 갈구를 표시하고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라우는 조심스러워하고 있었다. 시간의 공유를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 있기는 한 건지 끊임없이 자문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그가 안타까웠지만, ‘죄를 사한다’는 식의 몇 마디 말을 건넨다고 해서 간단히 청산할 수 없는 과거의 무게에 대한 라우 스스로의 몫임을 알고 있었다.
문득 엷게 웃는 웃음소리에 이현은 고개를 들었다.
“꿈 같다.”
정말 꿈을 눈앞에 둔 것 같은 표정과 목소리로 라우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이렇게 다시 만날 약속을 정하고 있는 것도… 함께 밤을 보낸 뒤에 너를 안고 눈을 떠서 하루를 시작하고 있는 것도… 누군가가 곧 터트려 버릴 꿈 같아.”
침대의 프레임에 머그를 내려놓고 몸을 기울여 다가온 그가 이현의 세운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이현은 그런 그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무릎 위에 턱을 얹으며 눈을 맞춰 왔다.
신기하게도 색소가 탈색된 것 같은 옅은 홍채에서도 감정은 전해져 왔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설원 같았다.
“하지만 누가 됐든, 터트려 버리도록 그냥 두진 않겠어.”
힘준 각오를 담은 그의 발언에 어쩐지 입이 말랐다. 이현은 손등으로 슬쩍 얼굴을 가리며 시선을 피했다. 손목을 붙잡아 아래로 당기며 단단히 깍지를 껴 오는 힘에 다시 눈을 맞추니, 그는 미간을 잔뜩 좁힌 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깍지 낀 손을 매트리스 위에 누르며 이현의 세운 무릎 위로 상체를 내밀었다. 혀를 쓸 줄 모르는 것처럼 입술의 표면만을 꾸욱 눌렀다 떼는 입맞춤은 서툰 첫 키스 같았다.
커피가 넘치지 않도록 머그를 쥔 손에 힘을 주면서 이현은 생각했다.
어젯밤이 첫 섹스는 아니었지만, 관계 후 함께 맞는 첫 아침이기는 했다. 아주 오래, 어쩌면 평생, 이 아침을 기억하게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