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침묵의 대가
69번가의 H&W 갤러리에서 센트럴파크의 남동쪽 가장자리와 면한 라우의 아파트까지는 평소에는 자동차로 5분 도보로는 10분이면 충분한 가까운 거리였다. 하지만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볼 드롭(Ball Drop) 행사가 한창 진행 중일 미드타운으로 향하는 길뿐 아니라 맨해튼 도로 전체가 주차장이 된 것처럼 꽉 막혀 있었다.
하지만 라우는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팔짱을 낀 채 시트에 깊이 몸을 묻고 차창 밖으로 지나쳐 가는 들뜨고 흥분한 사람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다보았다. 평균적으로는 서울의 겨울보다 기온이 높은 뉴욕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이곳의 추위는 항상 실제 기온보다 더 사람을 움츠러들게 하는 면이 있었다.
거리에는 비까지 부슬거리고 있었지만, 기사가 낮게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는 리포터가 높은 목소리로 볼 드롭 행사에 200만 명이 몰렸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200만 명의 인파가 몰린 타임스퀘어 광장을 상상하자 편두통이 시작됐다. 하지만 물론 인파에 대한 상상 때문은 아니었다. 일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살 만했지만 잠깐의 틈만 주어져도 스트레스가 심했다. 몇 달째 계속 이어지고 있는 두통과 불면증에 대해 스스로 내린 처방은 술과 담배뿐이었다.
라우는 창문을 반쯤 내리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거리의 소음이 좀 더 가까워졌다.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대여섯 명의 무리가 요란하게 부부젤라를 불어 대며 지나갔다. 라우는 몇 모금 피우지 않은 담배를 꺼 버리고 창문을 닫았다.
오늘 오후에 호텔 측으로부터 전화를 받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기분이 가라앉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룻밤에 만 달러가 훌쩍 넘는 룸을 평소보다 더 높은 금액으로 예약해 두고도 나타나지 않는 고객에게, 호텔 측은 상냥하게도 확인 전화를 걸어 주었다. 그 전화를 받기 전까지 라우는 예약 사실조차도 잊고 있었으니 불필요한 친절이었다.
이현과 함께 뉴욕에 올 것이라는 가정하에, 그가 편안하게 볼 드롭 행사를 볼 수 있도록 예약해 두었던 룸이었다.
뉴 이어 이브 볼(New Year Eve Ball)이 떨어지는 장면을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는 전망을 가진 룸을 예약하기 위해 인맥까지 동원한 작전이 필요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불필요한 짐, 받아 줄 대상이 사라진 선물이었다.
체크인하지 않더라도 환불은 불가하다며 주저하는 목소리로 안내하던 호텔 직원은 상관없다는 라우의 답변을 듣고서야 명랑한 새해 인사를 남기고 전화기 너머에서 사라졌다. 상대는 개운했을지 몰라도 라우는 그 이후 일에 집중하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다.
이현과의 기억에서 도망치듯 서울을 떠나왔지만, 한 번도 그와 함께한 적이 없는 이곳에서조차 그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더 강하게 뇌를 조여 오는 두통에 라우는 결국 차량 내에 준비된 위스키를 마시기 시작했다. 천천히 두 잔을 비운 뒤에야 간신히 아파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H&W에서 제공해 준 기사에게 따로 선물을 준비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선물을 대신할 팁을 전달하고는 짧은 새해 인사를 건네고 차에서 내려섰다. 도어맨 중 하나가 라우의 차를 알아보고 우산을 펼치며 급하게 다가왔다.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혼자가 된 후에야 숨통이 조금 트이는 기분이었다. 어퍼이스트사이드의 점잖은 고급 콘도 내부에서는 거리의 들뜬 분위기가 다른 세상의 축제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다행이었다.
현관으로 들어서자마자 코트를 벗어 주방 조리대 앞 스툴에 대강 던져두고는 냉장고를 열어 맥주부터 꺼냈다.
냉장고 앞에 선 채로 단숨에 반 정도를 마시고 거실의 창문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센트럴파크를 둘러싼 평소보다 더 화려하게 빛나는 스카이라인을 바라보며 나머지 맥주를 마셨다.
서울은 이미 새해 아침이 시작된 시간이었다. 파리는… 파리는 그보다 조금 늦게, 이제 막 새해 첫날의 새벽이 밝아 오고 있을 것이다. 그라면, 이현이라면, 부지런하게 하루를 시작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이불 속에 누운 채 한 해의 다짐을 하고 있을지도. 푸르스름한 미명 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으로 눈동자를 굴리는 이현을 상상하던 라우는 어깨를 털며 피식 웃었다.
H&W와 진행하기로 했던 페티본의 전시회 일로 이미 약 3주간 뉴욕에 머무른 상태였고, 신년일인 내일 하루를 쉬고 1월 2일, 전시회 오픈 행사에 참석하고 나면 라우가 소화해야 하는 필수 일정은 전부 끝나는 셈이었다. 하지만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는 아직 예매하지 않았다.
그를 만나러 가려는 것도 아니고, 이곳이나 서울이나 그가 없다는 점에서는 똑같이 공허한 도시일 뿐인데, 의미도 없이 예약 날짜만 늦추고 있는 자신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자신이 이제는 낯설지도 않다는 생각에 한숨을 쉬듯 웃으며 바닥을 드러낸 맥주를 한 병 더 꺼내기 위해 몸을 돌렸다.
주방으로 향하던 라우는 갑작스러운 벨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로비에서 걸려 온 콜이었다. 뉴욕에 거주 중인 지인이 몇 명인가 있었지만 연락도 없이 찾아올 정도의 친분은 아니었다. 어쩌면 운전기사가 팁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급하게 뭔가를 사 왔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인터폰 너머에서 전해 온 방문객은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올려 보내도 좋다는 답변을 한 뒤 2~3분 정도가 지나자 현관 벨이 울렸다.
‘HAPPY NEW YEAR’라고 새겨진 엉터리 마술사 같은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쓰고 부부젤라를 입에 문 슈슈가 복도에 서 있었다.
“뭐야.”
“호텔에서 주더라고. 네 것도 가져왔는데.”
차림새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지만, 슈슈는 그렇게 대답하며 등 뒤에 숨기고 있던 모자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라우는 한숨을 내쉬며 등을 돌리고 먼저 집 안으로 사라졌다.
“혼자 새해맞이 하고 있을 생각하니까 불쌍해서 여기까지 날아왔는데, 반응이 그거야?”
“돈 벌고 있는데 내가 왜 불쌍해.”
라우가 새로운 맥주를 꺼내 뚜껑을 비틀며 뒤따라 들어온 슈슈를 향해 눈썹을 추켜 보였다.
“뉴욕 지점 안 열게 됐는데도 H&W 일 때문에 고생하고 있잖아. 사실… 거의 손해라고 봐야지.”
자신의 소장품과 홍콩에 보관된 아버지의 소장품을 H&W에 대여해 주는 대가로 받게 된 금액은 그 자체로는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지만, 팬텀 뉴욕 지점이 오픈하고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H&W의 협조와 지원을 약속받는 조건으로 체결한 계약이었기에, 결론적으로는 수지가 맞지 않는 거래인 것이 사실이었다.
뉴욕 지점 오픈이 무기한 연기(실질적으로는 무산)되었음에도 계약을 이행해 준 것에 대해 클로이 켄트는 감사를 표했지만, 사업상으로 고마워하는 마음이란 실제적 가치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번 일이 사업상으로 자신의 완벽한 실패이자 손해임을 라우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 언제 구입했어? 여기 와서? 아님 원래 소장하고 있던 거야? 홍콩에서 가져온 건가?”
주방을 지나쳐 막 소파에 앉으려던 슈슈가 반가운 표정으로 정면의 벽에 걸린 그림을 가리켰다. 이현을 위해 아버지로부터 구입해 가져온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이었다. 대표작 중 하나는 아니었지만 누가 보더라도 호퍼의 작품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특징이 뚜렷했다.
라우는 맥주를 마신다는 핑계로 시선을 피하며 어물쩍 대답을 회피했다. 슈슈 역시 작품의 출처를 꼭 알고 싶은 것은 아니었는지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소파도 새로 들였네? 식탁도 못 보던 거고. 기껏해야 1년에 한 번 정도 묵는 아파트인데 언제 또… 이렇게 새로 꾸몄…어.”
이 아파트에서 이현과 함께 지낼 계획이었음을 알아챈 슈슈의 목소리가 서서히 늘어졌다.
서울이나 다른 도시에 보유하고 있는 집들만큼 넓지는 않았지만 이곳에서 이현과 시작하고 싶었다. 작업실도 물론 따로 낼 생각이었고, 집에서도 언제든 붓을 잡을 수 있도록 세 개의 침실 중 하나는 아틀리에로 개조를 끝낸 상태였다. 뉴욕으로 오기 전까지도 이현이 머물렀던 지하 스튜디오에는 내려가 보지도 못했던 것처럼, 라우는 그 방도 완전히 봉인해 두고 있는 상태였다.
그를 잡아 두기 위해 준비했던 모든 것들이 가시 박힌 올가미가 되어 거꾸로 자신을 조이며 살을 파고들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슈슈의 측은한 눈빛을 잠시 마주한 라우는 애써 가벼운 어투로 말을 돌렸다.
“이런 시기에 갑자기 호텔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 재주 좋네?”
“그래도 몇 년 동안 뉴요커였잖아. 인맥 좀 동원했지. 돈도 좀 들었고.”
“맥주 줄까?”
“술 좀 줄여.”
“조금이라도 자려면 어쩔 수 없어.”
“차라리 수면제 처방을 받아.”
라우에게서 맥주병을 건네받으며 슈슈는 미간을 찌푸렸다.
“불쌍해서 왔다더니 잔소리하러 온 거였네.”
“몇 달째 일에만 매달리고 사람들하고도 전혀 안 어울리고. 은둔이라도 하려고 그래? 인우하고 아직 화해도 안 했지, 너?”
“일일이 화해는 무슨. 애들도 아니고.”
슈슈가 앉은 2인용 소파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은 라우는 팔걸이에 몸을 기댄 채 상체를 앞으로 굽히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젱 슈이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이 전시회 준비 때문에 바빴어. 두 달 동안 홍콩에만 서너 번을 다녀왔었고. 내가 너무 일만 열심히 하고 바쁜 와중에도 시간 내서 친구들과 놀지 못한 게 널 걱정하게 했다면 미안하다. 어?”
하지만 슈슈의 눈에서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입을 다문 채 한숨을 내쉰 라우는 맥주병을 내려놓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나가자. 내가 같이 안 놀아 줘서 그렇게 불만이었다는데 여기까지 온 사람하고 술 한잔 정도는 해야지. 샤워하고 옷 좀 갈아입고 올 테니까 기다려. 금방 돼.”
침실이 모여 있는 복도 쪽으로 사라지는 라우의 뒷모습을 보던 슈슈는 부부젤라에 장식된 술을 만지작거리다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파트의 구조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라우가 이 아파트를 물려받은 뒤 몇 번 함께 머문 적이 있었다. 홍선유와 그 일이 터진 직후 서울로 돌아갈 때까지 임시로 지냈던 곳도 이 아파트였다.
가장 안쪽 마스터룸의 문은 한 뼘쯤 열려 있었다. 침실에 딸린 전용 욕실에서 물줄기가 쏟아지는 소리를 확인한 슈슈는 조용히 문을 밀었다.
불 꺼진 침실의 전면창으로 바라보는 뉴욕의 야경은 여전했다. 순간적으로 몸에 힘이 빠질 만큼 황홀했다. 절로 걸음이 멈추고 한숨 같은 감탄이 흘렀다.
5번가의 남쪽 끝자락이라는 위치 덕에 왼쪽으로는 겹겹이 빼곡하게 들어선 고층 빌딩 숲이 바로 코앞에 들이닥친 것 같은 박력을, 센트럴파크 너머로는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다이내믹한 스카이라인을 모두 감상할 수 있었다.
인우와 셋이 이곳에 들렀던 적도 있었다. 다른 국제적인 대도시에서라면 저택을 하나 마련할 수 있을 정도인 이 아파트 가격의 절반은 전망 때문일 거라며 충격받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던 인우의 말이 떠올라 슈슈는 어둠 속에서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 엷은 웃음은 점차 굳어지다 곧 사라졌다. 이현에게 이 야경을 보여 주고 싶었을 라우의 심정을 상상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차분하게 한숨을 내쉰 슈슈는 침대 맞은편, 전면창 앞에 놓인 간결한 디자인의 긴 책상 위에 준비해 온 봉투를 내려놓았다. 라우 위쿤의 이름으로 예약한 뉴욕발 파리행 비행기 티켓이었다.
라우는 갖고 싶은 모든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소유할 수 있는 남자였지만, 그런 사람이더라도 때로는 주변에서 보내 주는 격려와 확신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사랑 앞에 위축된 시기라면 더욱 그러했다.
안쪽 욕실에서 문득 물소리가 끊겼다. 서둘러 돌아선 슈슈는 방을 빠져나가기 전에 한 번 더 멈칫해야만 했다. 서울에서 7,000마일 가까이 떨어진 이곳에 <소외>가 걸려 있었다.
이현이 파리로 떠난 후, 라우는 한 번도 스스로 이현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고, 어쩌다 다른 사람들이 그 이름을 거론할 때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었다. 잊은 것은 아니겠지만, 잊으려고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자신의 마음을 내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잊은 것도 아니었고, 잊을 생각도 없었다. 주변에 고통을 호소하고 조언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었을 뿐. 고작 한 달의 출장 여행을 위해 그림을 이곳까지 가져온 그의 정성이 모든 것을 대변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크고 강하게만 느껴졌던 아버지가 지극히 인간적인 걱정거리를 적어 둔 수첩을 우연히 엿보게 되었을 때와 비슷한 기분에, 슈슈는 못 본 척 시선을 내리깔며 서둘러 방을 나섰다.
셔츠의 단추를 다 잠그지도 않은 채 코트를 팔에 걸친 라우가 복도를 걸어 나온 것은 그로부터 약 5분 뒤였다.
“타임스퀘어에서 카운트다운 볼 수 있는 자리 아니어도 되지? 그런 건 예전에 다 해 보셨을 거 아니야. 오랜만에 모트 스트리트(Mott Street)에 가서 양꼬치에 고량주나 마시자. 옛날에 우리 새해 카운트하던 것처럼.”
코트를 소파 등받이에 걸쳐 둔 라우는 셔츠의 단추를 채우면서 차이나타운행을 제안했다. 억지로 즐거움을 가장하는 라우를 올려다보던 슈슈는 망설이던 끝에 어렵게 말을 꺼냈다.
“부적치고는… 너무 크지 않아? 특히나 뉴욕까지 가지고 오기엔.”
“뭐가.”
세 번째 단추를 채우던 라우가 힐끔 시선을 던졌다.
“이현 씨 그림.”
“…….”
잠시 손이 느려지기는 했지만, 단추를 채우는 데에만 집중한 척 그는 아무 말 없이 아랫입술을 이로 긁기만 했다.
“이현 씨, 이번 달 중순에 ‘더 핸즈’ 통해서 처음으로 작품 공개했더라.”
마지막 단추를 채우면서 고개를 든 라우는 천장을 바라보며 볼 안쪽을 혀로 더듬었다.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은 화제라는 티를 내고 있었지만, 슈슈는 그가 감정을 드러내도록 자극을 멈추지 않을 생각이었다.
“두 점 다 공개 즉시 판매됐고. 그럴 만큼 인상적인 작품들이었어. 훨씬 솔직해지고 깊어지고 그러면서도 표현은 명확하고 단순해진….”
중지로 눈썹을 긁은 라우는 돌아서서 냉장고 앞으로 걸어가 맥주를 꺼냈다.
“너 혹시….”
조심스럽게 운을 떼는 슈슈의 말을 끊으며 라우가 한 모금 마신 맥주를 조리대 위에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뭐가 궁금한 건데? 혼자 힘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해 보려는 서이현의 결정과 노력을 무시하고 내가 그 그림들을 사들인 거 아니냐고?”
“…….”
라우라면 이현의 모든 작품을 소장하길 원할 것이고, 분명 그의 활동을 주시하고 있을 거라고 슈슈는 생각했었다. 그런 단순한 생각으로 꺼낸 말이었다. 하지만 라우의 말처럼 그런 방식은 이현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내 생각이 짧았어. 미안해. 하지만… 너도 이현 씨 소식 다 알고 있었던 거잖아. 지켜보고 있었던 거 맞네. 근데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건데?”
“너야말로 나한테서 무슨 얘기를 듣고 싶은 건데?”
라우가 언성을 높였다. 답답하다는 듯 천장을 향해 턱을 쳐들며 제자리를 서성거리던 그의 헝클어진 눈이 슈슈를 향했다.
“힘들어 죽겠다고 줄줄 우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어서 이래? 주변 사람들에게 얘기하는 걸로 뭐가 달라지는데?”
볼을 부풀리며 긴 한숨을 내쉰 라우는 외출을 위해 스타일링한 머리카락을 흩트리며 거실로 돌아와 슈슈의 맞은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렇게 해서 상황을 극복해 나가는 사람들도 있겠지. 안타깝지만 네 친구는 그런 타입이 아닌 거고.”
고개를 젖혀 등받이에 뒷머리를 기댄 라우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럼 보러 가. 뭐라도 해 보라고. 가서 뭐라도 해 보고 무슨 말이라도 해서 이현 씨하고 해결을 봐.”
고개를 젖힌 자세 그대로 눈을 내리뜨고 슈슈를 멍하니 보고 있던 라우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네가 했던 말이 다 맞아.”
앞뒤 없이 말을 던져 놓고는 과거에 있었던 우스운 추억이라도 떠오른 사람처럼 어깨를 떨며 웃었다. 웃음기가 완전히 가실 때까지 그는 얼굴을 몇 번이나 쓸어내렸다.
“홍선유 얘기하면서 네가 그랬지. 내가 보기엔 네가 어리석은 것 같고 걱정되더라도, 그게 네가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네 삶을 어리석게 살 권리 정도는 너한테 있는 거 아니냐고.”
“…….”
“사실 그 말뿐만이 아니야.”
상체를 세워 앉은 라우는 소파 테이블 한쪽에 놓인 담뱃갑을 집어 들었다. 그가 외출한 사이 집은 깨끗하게 청소되어 재떨이는 말끔히 비워져 있었지만, 소파 테이블의 상판 아래 쌓여 있는 여러 갑의 새 담배가 슈슈의 눈에 띄었다.
익숙한 움직임으로 담배에 불을 붙인 그가 라이터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가 홍선유와의 과거를 나름대로 받아들이게 된 과정들. 거기에 대한 네 생각 그대로… 그 애가 나를 받아들여 주길 바랐었으니까.”
상황이 달라지자 바로 태세를 바꾼 자신의 얄팍함을 비웃듯 낮게 피식거린 라우가 입술을 한 번 씹었다 놓으며 표정을 바꾸었다.
“네 사랑에 대해서 내 기준으로 떠들었던 말들… 미안하다.”
“…….”
진심이 느껴지는 묵직한 사과 앞에 슈슈의 눈이 커졌다. 불필요한 사과라는 의미로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라우는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허벅지 위에 팔꿈치를 괸 채 첫 모금을 빨아들인 이후 피우는 것을 잊어버린 것 같은 담배를 손에 쥔 라우가 담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연기 속에서 본 환영을 묘사하듯 홀린 것처럼 입을 열었다.
“런던에 있을 때, 홍선유와 만났었어.”
만났었다는 말의 뜻을 파악하지 못한, 가벼운 궁금증을 표시하는 슈슈의 무방비한 얼굴을 바라보며 라우는 강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몇 개월 정도, 서로 내키면 연락해서 자는 사이였어.”
“아….”
슈슈의 입술이 벌어지고, 반사적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털썩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라우는 그가 상황을 인지하고 입장을 정리할 수 있도록 어떤 설명을 더 덧붙이려 하지 않았다.
슈슈의 얼굴에서 최초의 얼얼한 충격이 가시고 차분한 빛이 돌아오는 데에는 예상보다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라우는 몇 모금 피우지도 않은 담배를 비벼 끄면서 고백을 이어 나가고자 했다.
“네가 처음 홍선유를 나에게 소개했을 때 말렸던 건….”
“나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한 거였을 테니까?”
“…….”
“끝까지 나에게 말하지 못했던 건 내가 받을 충격 때문이었을 거고.”
옆자리에 놓아두었던 보라색 모자를 집어 들고 챙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리며 슈슈는 눈을 내리깔고 웃었다.
“맞아. 아마 이 얘기를 그 당시에 들었다면 감당 못 했을 거야. 오히려 죄 없는 너를 원망하고 몰아붙였을 것 같다. 그때는….”
그저 열정적이기만 했던, 철없던 시절을 돌아보는 사람 특유의 모호한 웃음을 지으며 슈슈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때의 난 누구에게 어떤 말을 들었더라도 홍선유와 여기에 왔을 거야. 그러니까… 그때 말 안 하길 잘한 거야, 너.”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갑갑함에 라우는 입술을 열고 숨을 들이쉬었지만, 이미 과거를 정리한 슈슈에게 자신이 더 할 수 있는 말은 없음을 알았다.
“그땐 네가 선유와 잤다는 질투심 때문이든, 선유가 목적을 가지고 나에게 접근했다는 걸 믿고 싶지 않은 이유 때문이든… 상황을 부정하고 난리를 피웠었겠지.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홍선유와 내가 틀어진 것도 너와 홍선유의 과거 문제 때문이 아닌데.”
“…….”
“사람들은 결국 최초의 접근 목적이나 바람을 피웠다는 결과만으로 우리 관계 전체를 정의하겠지만… 당사자인 내가 내린 정의가 진짜 우리 관계인 거니까.”
라우가 아닌 스스로에게, 혹은 과거의 자신에게 얘기하듯 이곳이 아닌 다른 어딘가를 보는 것 같았던 슈슈가 문득 눈을 맞춰 왔다.
“안 그래?”
눈썹을 치키며 장난기를 섞어 물어 오는 슈슈를 보며 라우는 소리 없이 마주 웃어 보였다. 때를 놓친 고백과 사과에 대해 보여 준 친구의 반응에 라우는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온기라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너는 뭐라고 정의 내렸는데?”
라우의 질문에 어깨를 들었다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쉰 슈슈는 만지작거리고 있던 모자를 머리 위에 얹으며 일어섰다.
“옛날처럼 취해서 새해 카운트하자며. 나가자.”
■ ■ ■
“총 156유로입니다.”
“네, 영수증 부탁드려요.”
영어로 얘기해 준 점원에게 이현은 불어로 대답했다. 아직은 많이 서툰 발음이었지만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되도록 불어로 얘기하려 노력 중이었다. 점원이 이쪽을 쳐다보며 싱긋 웃었고 이현은 마주 웃어 보였다.
각종 화구용품은 물론 다양한 문구류 전반을 취급하는 까닭에 미술학도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대형 화구점은 파리에만 네 개의 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 이현은 19구의 ‘더 핸즈’에서 가장 가까운 마레(Les Maris) 지구의 지점을 주로 이용했다. ‘더 핸즈’의 다른 작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두 달간 나름대로 단골처럼 다닌 곳이었지만, 워낙 규모가 큰 데다 많은 점원들이 각기 다른 시간대에 일하고 있어 아직은 모든 점원에게 눈도장을 찍은 것은 아니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Bonne année)!”
“당신도요(Vous de même).”
짧은 새해 인사를 기분 좋게 주고받은 뒤 봉투를 챙겨 상점 밖으로 나섰다. 서울의 한겨울 추위에는 비할 바가 못 됐지만,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날 파리 날씨는 바람 탓인지 제법 맵게 느껴졌다.
상점의 입구 옆에서 커다란 백팩에 짐을 옮겨 넣은 이현은 코트의 깃을 세워 바람을 막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오른쪽으로 작은 공원을 끼고 북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단골로 드나드는 서점 겸 갤러리 ‘뚜(tout)’가 도보로 2분 거리였다.
테두리를 하얗게 칠한 ‘뚜’의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자 훈훈한 공기에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먼저 펴졌다. 대부분 그렇듯 홀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고, 서점 카운터 뒤쪽으로 연결된 갤러리에서 이야기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누군가 나와 보기를 기다리며 이현은 천천히 책을 둘러보았다. 아트 서적과 함께 성별과 관련된 서적들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뚜’에서는 여러 책들을 뒤적거리다 보면 훌쩍 시간이 흐르곤 했다.
“지난번 책은 어땠어? 벌써 다 읽은 거야?”
프랑스식 억양이 섞인 영어로 말을 걸어오는 밝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뚜’의 서점 파트를 책임지고 있는 보보(Beau Beau)가 특유의 환하고 부드러운 미소로 이현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현은 마주 웃으며 보고 있던 사진집을 내려놓았다.
“아니요, 아직 반 정도밖에 못 보긴 했는데 아주 흥미롭게 읽고 있어요. 보보의 추천대로 에세이는 또 에세이 나름의 특징이 있더라구요.”
“그치? 에세이들이 아무래도 심리적 접근성이 더 좋거든. 그래서 대부분은 에세이부터 시작해 전문 서적으로 옮겨 가는 경우가 많아. 너와는 달리.”
보보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이현의 어깨 아래쪽을 검지로 가볍게 꾹 눌렀다. 이현은 비스듬히 시선을 떨어뜨리고 뒷목을 쓸며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파리에 온 뒤 알파와 오메가에 대한 서적을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대야 할지 몰라 한 번에 대여섯 권씩 무턱대고 사들였었고, 그렇게 2주일 정도를 드나드니 보보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추천이 필요한지를 물었었다.
그 뒤로 한 달이 더 지나면서 이현이 19구의 ‘더 핸즈’에 소속된 작가라는 사실과 보보가 남자 친구와 함께 ‘뚜’를 운영하고 있는 오메가라는 사실까지 서로 교환하게 됐을 때쯤, 보보는 자신이 25세에 뒤늦게 발현해 한동안 방황했었다는 이야기를 꺼냈었다. 그의 남자 친구 역시 20세 이후 발현을 겪은 알파였다.
옷이나 음식 취향을 언급하듯 가벼운 수다처럼 얘기한 것도 아니었지만, 무겁고 중요한 비밀을 어렵게 털어놓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알고 보니 보보와 그의 남자 친구는 ‘뚜’를 통해 ‘늦은 발현(Apparition Tardive)’이라는 모임을 운영하고 있었고, 몇 주 내내 ‘뚜’를 드나들며 알파와 오메가 관련 서적을 탐독하는 이현이 혹시나 뒤늦은 발현으로 방황 중인 알파나 오메가가 아닐까, 라는 생각에 이현이 털어놓기 쉽도록 먼저 자신의 입장부터 밝혔던 것이다.
“근데 말이야…. 이쯤이면 그냥 인정하는 게 어때?”
팔짱을 낀 보보가 가판 옆 기둥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가늘게 뜨고 이현을 바라보았다. 이현은 좀 전까지 보고 있었던 사진집의 표지 위를 쓸면서 살짝 눈을 크게 떴다.
“그냥 알파·오메가에 관심이 많아서 그렇다기엔 너무 전문적으로 파고들잖아. 흥미 위주로 관심을 가지는 베타들은 많아도 너처럼 작정하고 파고드는 경우는 드물다고. 베타이면서 너 정도 지식을 갖추고 있는 건 아마 전공자 정도일걸?”
“그건 너무 과찬인 것 같은데요.”
피식 웃으며 농담으로 넘기려는 이현에게 가까이 다가온 보보는 팔짱 낀 넓은 어깨로 이현을 슬쩍 밀쳤다.
“애인이 알파나 오메가인 거지? 어? 아니면 짝사랑하고 있는 상대가 알파나 오메가이거나.”
“…….”
애매한 웃음으로 일관하는 이현을 몇 번 더 재촉하던 보보는 팔짱을 풀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휴, 내가 우리 집 강아지한테서 파파라는 말을 듣는 게 더 빠르지.”
대답을 듣기를 완전히 포기한 듯 돌아서서 카운터로 향하는 보보의 뒷모습을 보며 이현은 소리 없이 씩 웃었다.
“웃기는. 웃는 거 이쁘다고 무기 삼지 말라고.”
휙 돌아보고는 눈을 흘기는 보보에게 다가간 이현은 백팩을 뒤져 리본을 매달아 장식한 작은 액자를 하나 내밀었다.
“이거… 드리려고 잠깐 들렀어요. 새해 선물이에요.”
말 그대로 뜻밖의 선물을 받은 것처럼 작은 감동에 말을 잃은 표정으로 액자를 내려다보던 보보는 카운터 위로 팔을 뻗어 이현의 뺨을 살짝 두드렸다.
“근사한 선물이 아니어서 좀 그렇지만요….”
“무슨 소리야? 이 그림이 나중에 얼마가 될 줄 알고.”
일부러 정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액자를 든 팔을 길게 뻗어 감정하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림을 살펴보는 보보의 행동에 이현은 피식 웃음이 새었다.
고맙다는 인사와 비쥬(Bisou), 포옹이 한차례 이어진 뒤 보보는 사양하는 이현에게 기어이 좀 전에 이현이 들춰 보고 있었던 사진집을 선물로 챙겨 주었다.
그리고 문 앞까지 이현을 따라 나와서는 그치고는 드물게 머뭇거리는 신중한 표정으로 작은 카드를 한 장 내밀었다.
“이현, 네가 내켜 하는 것 같지 않아서 그동안 권하지 않았었지만, 괜찮으면 모임에 한번 나와. 핵심적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늦은 발현’이라는 모임명을 사용하고 있지만, 알다시피 우리의 궁극적 목적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른 모든 성별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촉구하는 거야. 활동이 결실을 보여서 다행히 모임에는 베타들도 늘어나는 추세고. 네가 베타든 알파든 오메가든, 너 자신의 성별과 다른 성별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언제든 환영이야.”
“…….”
이현은 그가 건넨 카드를 받아 들었다. 아랫입술을 혀로 축이고 이로 지그시 깨물었다. 지금으로서는 어떤 확답도 할 수가 없어서 그저 카드를 들여다보기만 했다.
보보가 그런 이현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이현은 카드를 코트 주머니에 넣고 그를 향해 이를 보이지 않고 웃어 보였다.
“Bonne année.”
“Bonne année.”
여전히 어색하기만 한 비쥬를 다시 한 번 나눈 뒤 바람 부는 거리로 나선 이현은 이번엔 메트로 역을 향해 좀 더 북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12월 31일 오후 5시부터 1월 1일 정오까지는 지하철, 버스, 트램, RER 등 파리 시내의 모든 대중교통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그 때문이 아니더라도 한 해의 마지막 날은 세계 어느 도시든 혼잡하기 마련이었다.
평소보다 더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안쪽 출입문 앞에 자리를 잡고 선 이현은 핸드폰을 꺼내 유니에게 메시지부터 발송했다. 30분 내로 약속 장소에 도착할 예정이라는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빠르게 답장이 돌아왔다. 벌써 도착해 주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아무런 풍경도 보이지 않는, 지하철 내의 사람들을 희미하게 비추는 출입문의 유리에 머리를 기댔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해 긴장으로 연신 커피를 들이켜고 있을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자 웃음이 흘렀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오늘. 유니, 그리고 그녀의 친구인 미셸(Michelle)과 함께 개선문에서 열리는 새해 카운트 행사를 보러 가기 위해 생필리프뒤룰역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샹젤리제 거리로 입성하기 전 상대적으로 조금 덜 붐비는 라 보에띠 거리 근처에서 저녁 식사를 해결할 계획이었다. 미셸의 제안이었다.
그녀는 유니보다 네 살, 이현보다는 다섯 살이 연상이었고, 인도계 영국인으로 파리 생활 10년 차의 파리지앵이기도 했다. 프랑스와 유럽권에서는 제법 인지도가 있는 중형 디자이너 브랜드에서 일하고 있는 그녀는 ‘더 핸즈’ 갤러리를 자주 찾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관람객과 갤러리스트로 만나 가까워진 유니와 미셸은 최근 2~3주 사이 갤러리 밖에서 만나는 횟수가 급격히 잦아졌다. 서로를 대하는 두 사람의 기분 좋은 조심스러움을 보고 있자면, 그들이 단지 상대를 친구로서 의식하고 있는 것만은 아님을 자연히 느낄 수가 있었다.
이현은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눈치 없는 방해꾼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제발 같이 가 달라고 부탁하는 유니는 아직은 미셸과 단둘이 새해를 맞는 것이 걱정되는 눈치였다.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어쩌면 라우와 자신도 이런 단계를 놓치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에게 호감을 품고 조심스럽게 가까워지는 단계.
순서란 일종의 매뉴얼일 뿐 절대적으로 따라야 하는 지침이 아니고, 라우와 관계를 지속하는 동안 서로에 대한 이해나 관심, 교감이 부족하다고 느꼈던 적은 없지만… 만약 이런 단계를 거쳐 조금씩 가까워졌다면, 그랬다면, 서로의 상황이나 상대에게 가지고 있는 바람에 대해 설명하고, 그 설명에 대해 고려해 볼 수 있는 시간적, 감정적 여유가 갖춰졌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지난 두 달 동안 별생각을 다 해 봤었다.
생각이라고 해 봤자, 대부분은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해 보는 상상이었다. 그리고 그런 류의 상상들이 으레 그렇듯 결말 부분은 늘 부옇게 흐려져 있었다.
두 달이라는 시간을 꼬박 투자해 몸으로 깨달은 사실은 그것이었다.
가정형을 동원해 과거의 선택을 지우고 그 자리에 새로운 선택을 써 넣어 봐도, 그것이 더 좋은 결과로 이어졌을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가 없다는 것.
지하철이 생필리프뒤룰역의 플랫폼으로 들어서자, 이현은 기댔던 몸을 바로 세우고 백팩을 한 번 추킨 뒤 인파에 휩쓸리듯 지하철에서 내려섰다. 파리 지하철의 출구 안내는 불친절했지만 유니가 미리 보내 준 설명 덕에 엉뚱한 출구로 나와 지도 앱을 재검색하는 번거로움을 덜 수 있었다.
약속 장소인 카페로 가는 길의 중간쯤, 사진관 앞에서 유니와 먼저 만났다. 그녀는 독특하면서도 본인에게 잘 어울리는 스타일링으로 ‘더 핸즈’ 스태프들과 관람객들 사이에서 이미 유명했지만, 특별한 날을 맞아 평소보다 좀 더 신경을 쓴 듯했다.
‘더 핸즈’에서 나온 시간이 달랐기 때문에 오늘은 서로 얼굴을 보는 게 처음이었다. 긴장과 설렘이 공존하는 얼굴의 그녀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찌른 이현의 팔에 팔짱을 끼며 어깨를 움츠렸다.
“으으, 멋 내다 얼어 죽겠어.”
수능 날이 되면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는 한국처럼 파리에도 그런 날씨 징크스가 있는지도 모르겠다며, 쌀쌀해진 날씨에 대해 얘기하며 두 사람은 안쪽 골목으로 꺾어 들었다.
약속 장소의 간판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을 때쯤 맞은편에서 걸어오며 손을 흔드는 미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디자이너답게 그녀 역시 멋진 차림이었다.
과감한 디자인에 도전하기를 즐기는 유니와 미니멀한 스타일을 즐기는 미셸은,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어우러지는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누구나 알고 있는 당연한 공식 같은 어울림이 아닌 의외성을 가진 흥미로운 조화로움이었다.
서로를 발견한 두 사람의 얼굴에 생기가 돌고 눈빛이 반짝거렸다. 어째서 사람들이 사랑을 숨길 수 없다고 하는지, 타인을 통해 확인하니 더 잘 알 것 같았다.
이전의 자신도 그랬을 것이다. 그런 느낌을 알고 있었다. 상대가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머리가 인식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들썩거림. 그냥 좋고, 너무 좋아서… 자신도 모르게 빨라지려 하는 걸음을 늦추기 위해, 미소가 너무 많이 퍼져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애를 써야 했던 감각들.
이현은 추위를 느끼는 척 코트의 깃 안으로 턱을 당기며 쓴웃음을 지우기 위해 지그시 입술을 물었다.
미셸이 추천한 카페는 라 보에띠 거리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간 자리에 위치하고 있기도 했고, 일단 겉에서 보기에는 특별한 점이 없었다. 커피 한 잔, 점심 한 끼에서도 파리의 낭만을 느끼길 원하는 관광객들에게는 별로 인기가 없을 것 같았다.
지역 주민들과 근처 직장인들이 주요 고객이라 비교적 좋은 가격에 괜찮은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라는 미셸의 설명이었다.
“이전 직장이 샹젤리제 근처였는데 그때 찾아낸 카페 중 하나야. 매일 20유로짜리 점심을 먹을 수는 없어서 여기저기 찾아보고 다녔었거든.”
미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카페 안을 슬쩍 둘러보았다. 격자무늬의 타일 바닥과 흰색 테이블보를 덮은 둥근 테이블, 붉은 가죽 쿠션을 덧댄 의자와 안쪽 자리를 차지한 묵직한 마호가니 바. 낡았지만 깨끗하게 잘 관리된 곳이라는 느낌이었다.
이현의 눈에는 이곳도 충분히 이국적이고 멋진 장소였지만, 특별한 날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두 사람이 좀 더 대중적인 장소를 고른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마스는 같이 보내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새해는 이렇게 함께 맞이할 수 있어서 정말 좋다.”
미셸의 요청대로 와인을 먼저 세팅해 준 웨이터가 테이블을 떠나고, 미셸이 의자를 당겨 앉으며 유니를 향해 슬쩍 웃어 보였다.
소속이 분명하게 정해진,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한 예술가들을 위한 특별 비자를 발급받은 이현과 달리 취업 비자를 신청해 두었던 유니는 얼마 전 비자 문제로 열흘 정도 서울에 다녀와야 했었다.
미셸은 그 탓에 함께 보내지 못했던 크리스마스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거리를 좁히려 하지 않으면서도 유니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을 감추려 하지 않았고, 그건 유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호흡이 아주 잘 맞는 두 명의 댄서처럼 서로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올해는 두 사람을 만나서 훨씬 더 특별했어.”
“우리야말로 미셸이 있어서 파리 생활에 좀 더 빨리 적응할 수 있었어. 고마워요.”
미셸의 건배 제안에 유니가 응답했고, 이현 역시 동의의 의미로 미셸을 향해 미소 지으며 잔을 들어 올렸다. 막 잔을 부딪치려는 순간, 미셸이 멈칫 잔을 뒤로 빼면서 장난스러운 얼굴로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 ‘더 핸즈의 다음 예비 스타’의 성공적인 파리 데뷔와 첫 판매를 축하하면서.”
미셸은 한 미술 잡지에서 이현의 작품 평론에 사용한 표현을 인용하며 건배를 마무리했다. 이현은 쑥스러움에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정말 축하할 일이고 자랑스러워할 일이야. 이현은 전업 화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아주 성공적으로 증명한 거라구. 이대로만 간다면 ‘더 핸즈’의 스튜디오를 빠르게 비워 줘야 할 수도 있겠는데?”
미셸은 와인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일정 기간 이상 작품으로 성과를 보이지 못하거나, 작품 판매 수익이 미화로 최대 3만 달러를 넘으면 더 이상 ‘더 핸즈’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후자의 이유로 단체를 떠나는 것은 모든 소속 작가들의 바람이기도 했다.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신인 작가의 작품이 3만 달러 이상 판매되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잖아. 그러니 ‘더 핸즈’에서는 작품 활동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한, 생계의 걱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창작이 가능한 거고.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한 정도의 후원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창작과 관련해서는 비용에 제한받지 않고 원하는 작업을 할 수 있으니까, 금전 문제로 고생하는 작가들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지.”
웨이터가 식전빵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몸을 잠시 뒤로 뺐던 미셸은 빵이 담긴 바구니로 손을 뻗으며 이현을 향해 덧붙였다.
“물론, 능력과 가능성을 보이지 못했다면 소속 제안도 받지 못했겠지만.”
빠질 수 없는 에스카르고와 소고기 스튜, 쌀밥을 곁들인 연어 스테이크와 그릇에 넘칠 정도로 푸짐한 감자튀김과 함께 나온 오리고기까지. 푸짐하게 먹고 마시며 다양한 화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이, 세 시간이 훌쩍 지났다.
“오늘은 제가 살게요. 처음으로 그림… 판매한 기념으로.”
웨이터가 영수증을 가지고 오길 기다리는 동안 이현이 머뭇거리며 제안했고 예상했던 것처럼 두 사람은 단호하게 더치페이를 강조했다.
“그동안 너무 많이 신세 지기도 했으니까… 이럴 때 한 번쯤은 제가 내게 해 주세요.”
비상금 수준의 약간의 용돈을 제하고 그림을 판매한 금액은 모두 라우에게 입금했기 때문에 사실 여유가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기회에 그동안 두 사람에게 받아온 배려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지 않고서 넘어갈 수는 없었다. 둘은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이현의 진심을 알기에 끝까지 거부하지는 않았다.
거리로 나서니 좀 전보다 분위기가 훨씬 들떠 있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흥분한 젊은이들 몇몇이 세 사람을 앞질러 지나쳐 갔다. 미셸, 유니보다 한두 걸음 뒤에 걸으며 이현은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돈이 입금된 후에도 라우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이현 역시 두 달이 지나도록 전화는 물론 메시지 하나 보내지 않았다.
처음부터 만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접점을 만들지 않은 채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이현은 그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으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가, 자신이 보낸 돈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있으리라는 것도.
하지만 그가 자신의 돈에 손을 댈 수 없는 것처럼, 자신 역시 그 돈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사람은 돈을 보내고 다른 한 사람은 그 돈을 확인하는 것만이 서로를 연결해 주는 유일한 고리와도 같았다.
얼른 오라며 걸음을 멈추고 손짓하는 유니와 미셸에게로 서둘러 다가가며 이현은 핸드폰에서 손을 떼었다.
그가 연락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샹젤리제 거리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인파가 대단했다. 미셸은 당황한 이현과 유니를 숨은 명당으로 안내했다.
“굳이 앞쪽으로 갈 필요는 없어. 불꽃놀이가 하이라이트인데 사실 뒤쪽에서 봐야 한눈에 들어와서 더 멋있거든.”
옴짝달싹하기도 힘든 인파 탓에 세 사람은 한 줄로 이동해야만 했다. 미셸은 바짝 뒤따라오는 유니의 손을 자연스럽게 찾아 쥐었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이미 거나하게 취한 상태에서 손에 맥주병을 하나씩 쥐고 있었고, 노래를 부르고 고함을 지르며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요란한 새해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깨진 술병과 담배꽁초가 바닥에 나뒹굴고 생각했던 것보다 흥청망청하기는 했지만, 새해가 밝아 온다는 들뜸 때문인지 다들 눈살을 찌푸리기보다는 웃으며 응해 주는 분위기였다.
“뉴욕에서 볼 드롭 행사를 본 적도 있는데 그쪽 인파에 비하면 그래도 여긴 버틸 만해. 그땐 화장실도 못 가고 10시간 가까이 죽는 줄 알았거든. 추위도 여기하곤 비교가 안 되고. 한국은 어때? 한국도 이런 신년 카운트 행사가 있어?”
유니가 종로 보신각, 제야의 종 타종 행사에 대해 미셸에게 설명했다. 미셸은 커다란 종을 서른세 번 치는 것으로 새해를 맞이하는 행사에 매우 흥미를 보이면서 언젠가 직접 보러 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 얘기를 하면서 미셸이 유니의 눈을 따뜻하게 바라봤기 때문에, 이현은 그녀가 유니와 함께 가고 싶다는 뜻을 비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유니 역시 마주 웃는 것으로 그 뜻을 모른 척하지 않았다.
11시가 조금 넘자 개선문의 조명 쇼가 시작되었고 새해가 됨과 동시에 화려한 불꽃놀이가 이어졌다. 여기저기에서 비쥬와 함께 새해 인사를 나누는 모습들이 눈에 띄었다. 커플들은 진한 키스를 나누기도 했다. 미셸과 유니 역시 친구 사이의 키스보다는 좀 더 의미심장한 입맞춤을 오래 주고받았다.
서울은 이미 일곱 시간 전에 새해가 시작되었을 시간이었다.
뉴욕… 뉴욕은 아직 새해를 여섯 시간 정도 앞둔 저녁이었다.
라우가 약 3주 전부터 H&W와의 전시회 일로 뉴욕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은 유니로부터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체인징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그녀에게 라우와의 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으로 오히려 유니는 그와의 관계가 단절되었음을 추측하는 것 같았다. 일부러 그의 얘기를 자세히 전해 주지는 않았지만, 대화 속에서 그의 소식이 언급되는 것을 부자연스럽게 피하지도 않았다.
그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복잡한 통증이 일었지만, 한편으로는 누군가에게서 그의 소식을 듣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살 것 같기도 했다.
화려하게 피어올라 새해의 희망을 전하는 불꽃을 바라보며 그가 외롭지 않게 새해를 맞이하기를. 누군가가 그와 함께해 주기를. 그가… 너무 많이 아프지 않기를 빌었다.
한꺼번에 몰리는 인파를 피하기 위해 불꽃놀이가 끝난 뒤 곧바로 샹젤리제 거리에서 빠져나왔는데도 지하철역 입구에는 이미 접근할 엄두조차 나지 않을 만큼 사람이 몰려 있었다. 몇 개의 역을 지나치며 30분 이상을 걸어간 뒤에야 세 사람은 겨우 역 안으로 진입하는 데에 성공할 수 있었다.
라틴 지구로 더 잘 알려진 6구에 살고 있는 미셸과는 서로 플랫폼이 달랐다. 미셸과 유니는 철로를 사이에 두고 마지막까지 손을 흔들며 아쉬움을 표시했다. 미셸의 과장된 장난스러운 연기에 유니는 피식거리면서도 창피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미셸의 지하철이 먼저 도착하고 곧바로 이쪽 플랫폼에도 지하철이 들어왔다. 샹젤리제 거리뿐만 아니라 파리 시내 곳곳에서 새해 카운트를 즐긴 사람들로 지하철 내부 역시 북적거렸다.
“아… 가 보길 잘했다. 그치?”
미셸과 헤어지자 긴장이 풀렸는지 유니는 지하철 문에 머리를 기대며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두 번 가 볼 필요는 없는 것 같아. 난 한 번으로 충분한 경험이었어.”
추위와 기다림, 과하게 술에 취해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몇몇 파리 청년들이 떠올랐는지 유니는 이번에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지친 표정을 지었다.
“누나 방에서 미셸하고 단둘이 보내는 게 더 좋았겠지?”
제법 짓궂은 이현의 농담에 유니는 장갑 낀 손으로 이현의 볼을 콕 찍어 내며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이곳에 온 뒤로 달라진 것 중 하나는 유니에게 더 이상 존댓말을 쓰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부터 유니와 주한은 존댓말은 관두라고 했었지만 처음부터 존댓말을 쓴 사이라 그런지 바꾸기가 쉽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매일 얼굴을 보며 지내다 보니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누나, 점심 같이 드실래요?’가 ‘누나, 점심 같이 먹을까?’로 바뀌어 있었다.
호감을 가진 상대를 만났어도, 그림 그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환경이 갖춰져 있어도, 이 낯선 도시에서의 생활에 서로가 있어 얼마나 의지가 되고 감사한지는 일일이 말로 전할 필요조차도 없었다.
생 마르탱 운하 주변으로 즐비한 카페와 펍의 흥분된 열기에서 벗어나 안쪽 골목으로 접어든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앞뒤로 크게 흔들며 밤 산책을 즐기듯 천천히 ‘더 핸즈’로, 집으로 향했다.
전시실과 오피스가 자리한 1층 로비는 어둡고 적막했지만, 위층의 공동 거실 쪽에서 떠들썩한 소음이 들려왔다. 성탄절 때처럼 공식적인 파티가 열린 것은 아니었지만 파리가 고향이 아닌 작가들이 대부분이라 조촐하게 맥주 파티라도 열고 있는 듯했다.
“개선문은 어땠어? TV로 보니까 올해도 인파가 엄청난 것 같던데.”
현재 ‘더 핸즈’에 가장 오래 머문 작가 중 한 명인 독일 출신의 벤이 유니와 이현을 발견하고는 제일 먼저 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멋있었어. 기다리는 게 좀 지루하고 다리가 아팠지만.”
“그래도 파리에 왔으면 한 번쯤은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우리도 다 첫해에는 개선문 아니면 에펠탑에서 새해를 맞았었거든.”
불어를 하지 못해도 큰 불편은 없을 거라던 ‘더 핸즈’ 측의 사전설명은 사실이었다. 직업을 가지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지 않는 한, 파리는 물건을 사거나 음식점에서 주문을 하는 등의 소통은 영어만으로도 충분한 도시였다.
게다가 ‘더 핸즈’에서는 소속 작가들에게 기초 불어 회화를 가르쳐 주는 수업도 진행하고 있었다.
“같이… 마실래요? 아직 피자랑 맥주도 많이 남았는데.”
머뭇거리는 태도로 조심스럽게 권하는 준(June)은 이현과 함께 가장 열성적으로 불어 회화 수업에 참석하는 작가 중 한 명이었다. 마른 몸에 키가 크고 아직 청년보다는 소년에 훨씬 가까워 보이는 그는 한국 나이로 계산해도 바로 몇 시간 전까지 열아홉 살이었던 ‘더 핸즈’의 막내였다.
“어… 그러고 싶긴 한데 조금 피곤해서. 항상 자던 시간을 넘겼더니 많이 졸리기도 하고.”
이현의 둥근 거절에 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아쉬워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의 감정을 감출 필요가 없고 상대의 감정을 모른 척할 필요가 없었던 유니와 미셸과 달리, 이현은 그가 아쉬워하는 이유를 알아채지 못하는 척하며 짧은 새해 인사를 건네고 유니와 함께 거실을 떠났다.
“너 그렇게 막 친절하게 대해 줘도 되는 거야?”
계단참으로 접어들자 유니가 목소리를 낮추며 팔을 툭 건드렸다.
“준이 너 좋아하잖아. 근데 네가 그렇게 다정하게 대하면 괜히 기대할 수도 있다구.”
이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
“뭐가 안 그래. 얘가 은근히 잔인하네.”
“그게 아니라, 남자친구 있다고 했어.”
“……그랬어?”
“어.”
유니는 자세한 사정이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파고들려고 하지는 않았다.
묻지도 않은 사람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며 먼저 떠들어 댔던 건 아니었다. 홍콩 출신인 준에게 자신의 남자친구도 영국, 한국, 홍콩 혼혈의 홍콩인이라는 얘기를 자연스럽게 흘렸을 뿐이었다. 준이 가지고 있는 희미한 호감을 감지하고, 그가 자신에게 더 마음을 두지 않았으면 하는 의도로 했던 말이기 때문에 실제로 자연스러워 보였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사실… 남자친구가 있다는 그 말이, 자신의 남자친구도 홍콩 출신이라는 말 자체가 거짓이 아닌지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다.
유니와 헤어져 4층으로 올라온 이현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가방부터 바닥에 내려놓았다. 불도 켜지 않고 코트도 벗지 않은 채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준에게 피곤하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방에서 혼자가 되자 그제야 진짜 피로가 느껴졌다.
목을 주무르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생각났다는 듯 주머니 안에서 보보가 주었던 카드를 꺼냈다. ‘늦은 발현’의 모임 목적과 웹사이트에 대해 소개하는 간략한 문구를 들여다보며 카드 모서리로 입술을 톡톡 두드리던 이현은 상체를 젖혀 드러누웠다.
아래층 거실에서 누군가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했는지 낡은 문틈 사이로 희미하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현은 누운 채로 아랫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천장에 비치는 창틀의 그림자를 올려다보았다.
창문은 닫혀 있었지만 가는 바람과 함께 순간적으로 라우의 향기가 코밑을 감돌았다. 내재된 기억이 불러온 환각임을 알면서도 이현은 그 희미한 잔향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의식을 집중했다.
그의 환영이 보인다거나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거나…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런 계기가 없을 때에도 그의 향기는 홀연히 기억에서 살아나 실제 후각을 자극해 왔다.
길을 가다 멈춰 서서, 한창 작업에 몰두해 있다가도, 퍼뜩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린 게 몇 번인지 모른다.
그가 해 주었던 키스처럼, 키스를 할 수 없을 때 가끔 그가 해 주었던 것처럼. 그리고 혼자 있을 때 종종 그와의 키스를 떠올리며 그랬던 것처럼. 이현은 손가락 사이에서 입술을 강하게 비틀었다. 아릿한 통증을 느끼며 누운 채로 몸을 돌렸다. 운하 쪽에서 쏘아 올린 소규모 폭죽의 푸르고 붉고 하얀 불빛이 어른거리는 창문을 바라보며 몸을 웅크리고 중얼거렸다.
해피 뉴 이어.
……아위.
■ ■ ■
장마 같지도 않은 장마. 습하기만 할 뿐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줄기도 몇 번 보지 못했던 마른장마는 벌써 7월 초에 지나갔고, 이번엔 무슨 태풍이 온다고 했던가, 빗방울이 창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제법 단단했다.
방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책, 화집, 프린트한 보고서, 팸플릿 샘플 등의 자료 중에서 집으로 챙겨 갈 것들을 골라내 책상 위에 쌓아 두고 있던 라우는, 등 뒤의 열린 문밖에서 사무실이 잠시 소란스러워지는 기척에 손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양손 가득 도시락이 든 쇼핑백을 들고 있는 최인우가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었다.
인우를 반기는 것인지 도시락을 반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직원들의 반응에 라우는 피식거렸다. 그리고 페이지를 훌훌 넘겨 보던 뇨만 구나라사(Nyoman Gunarsa)의 화집을 먼저 골라 놓은 책더미 위에 얹어 놓았다.
뉴욕 지점 오픈은 취소되었어도 고용하기로 결정했던 디렉터를 그대로 영입했기 때문에, 유니의 이직에도 불구하고 팬텀은 결국 이전보다 두 명의 직원이 더 늘어난 셈이었다.
덕분에 라우는 사무실 가장 안쪽, 이전에는 잘 사용하지 않았던 자신의 방에서 업무를 보는 일이 잦아졌다. 다른 직원들과의 사이에 물리적 거리를 두고 소파 세트를 앞에 둔 채 커다란 책상 뒤에 앉아 있는 것은 선호하는 방식이 아니었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더 편하기는 했다.
사실 이제는 처음 팬텀을 오픈했을 때처럼 퇴근 이후에도 함께 몰려다니며 사적으로도 서로를 알아 가고 정을 쌓을 만큼의 열정이 남아 있지 않았다. 촬영 장소로 자기 집 정원을 쓰겠다며 휴일 아침부터 쳐들어오는 직원들도 이제는 없었다. ‘올드 퓨처’의 홈페이지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 유니의 파리 생활 포스팅이 간간이 업데이트되고 있었지만, 의류 판매는 벌써 1년 가까이 중단된 상태였다.
팬텀에 대한 애정, 일에 대한 열정이 식은 것은 아니다. 단지 어떤 한 시기가 지나 버렸음을, 아련한 향수와 애틋한 감정 속에서 추억이 되어 갈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았다.
“다들 아주 신났더라? 퇴근하고 다 같이 한잔하러 간다던데?”
방 안으로 들어온 인우가 턱짓으로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자신과 라우의 도시락을 소파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라우는 하던 일에서 손을 놓고 도시락을 개봉하는 것을 거들었다. 얼핏 보기에도 반찬만 대여섯 가지가 되는 도시락은 구성이 화려했다. 직원들이 환호할 만했다.
“왜 또 실실대는데?”
냉장고에서 작은 생수병 두 개를 꺼내 오는데, 이쪽을 힐끔거리며 혼자 웃는 인우의 표정이 마음에 안 들어 생수를 건네주려다 말고 어깨를 툭 쳤다.
“이제 너는 불러 주지도 않나 봐?”
“실망시켜서 미안하다만, 내일 아침 일찍 비행이라 거절했거든?”
던지듯 생수병을 안겨 준 라우는 소파에 털썩 앉으며 자기 몫의 생수의 뚜껑을 비틀었다.
“갤러리 전체가 2주일이나 문 닫고 쉬는 건 오픈하고 처음 아니야?”
“작년엔… 제대로 휴가도 못 줬으니까.”
작년 이맘때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내키지 않아 멈칫하며 잠시 시선을 얼버무렸던 라우는 생수병을 기울여 목을 축였다.
올해도 작년과 같은 홍콩의 아트페어에 참석했었다. 새로운 멤버들과도 별 탈 없이 페어를 무사히 치렀고 1년간 성장한 만큼 작년보다 더 좋은 성과를 냈다. 하지만 이제 라우에게 홍콩은, 적어도 그 시기의 홍콩은, 온통 이현의 기억이었다.
아직은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더 많았던, 그래서 흘깃거리고 탐색하며 자신의 기준으로 상대의 의도를 짐작하기도 하고, 멋대로 실망하거나 알 수 없는 이유로 깎아내려 보기도 하며… 그래도 결국은 상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던.
사진을 보여 달라며 팔을 뻗어 오던 몸이 가슴에 닿았던 감촉이나 처음 피워 본다는 담배 연기 사이로 주고받았던 시선 하나에도 지그시 입술을 깨물어야 했던… 당시에는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려 했고, 알게 되었더라도 웃어넘기려 할 뿐 인정하지 않으려 했겠지만, 거부할 수 없는 궁금증을 계속해서 부추기던 조용한 한 청년과, 그리고 끌림의 기억.
아주 오랫동안 그저 잠잠하게 고여 있기만 했던 페로몬의 표면을 이현이 손끝으로 쓸고 지나가면, 그의 향기를 쫓아 겹겹의 파문이 일어나던 기억이기도 했다.
볼을 부풀렸다 꺼뜨리며 숨을 크게 내쉰 라우는 생수병을 내려놓고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드물게 병원에서 야근을 하다 온 인우는 허기가 졌었는지 벌써 윤기 흐르는 현미밥을 한 숟가락 뜨고 있었다.
“너희 휴가 중간에 나도 일주일 휴가 얻었거든. 그때 강원도에 어머님 작업실 좀 써도 될까?”
“누구 데려갈 거면 거긴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데. 너하고 가볍게 만나는 애들이 기대하는 화려하고 세련된 곳이 아니라서.”
잡채를 집어 올리던 인우의 젓가락질이 느려졌다. 그리고 도시락 위로 상체를 숙인 상태 그대로 고개만 돌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라우를 올려다봤다.
“그 작업 하려고 빌려 달라는 거 아니거든?”
억울해하는 인우를 향해 어깨를 으쓱인 라우는 모르는 척 떡갈비의 귀퉁이를 젓가락으로 허물었다.
“작업에 실컷 집중하고 싶어도 생각만큼 시간이 나야 말이지. 휴가 동안 그림만 그릴 거야. 요즘은 전업 작가들이 부럽더라.”
“…….”
“아… 나도 병원만 아니면 ‘더 핸즈’에 지원해 보는 건데.”
휴가 동안 그림에만 집중할 거라는 말에 인우를 돌아봤던 라우는 다시 떡갈비 위로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허물어 낸 음식 조각은 좀처럼 라우의 입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벌써 하반기 합동 전시회 준비에 들어가는 건가? 변했네, 최인우.”
“아니, 개인전 준비하려고.”
“…….”
이번에는 라우의 젓가락질이 완전히 멈추었다.
분명 재능이 있고, 그림을 통해 감정을 토해 내길 원하는 갈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동안 인우는 짝사랑하는 상대와 자신 사이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선을 그어 둔 채 더 깊이 빠질 것을 염려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사람처럼 그림을 대해 왔었다.
작년 말부터는 작업량도 늘고 작풍도 서서히 변해 오기는 했지만, 남는 시간에 조금씩 작업해 합동 전시회 때에 두세 점 발표하는 게 고작이었던 인우에게서 개인전을 하고 싶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두세 점 가지고 개인전 열 생각은 아니겠지. 킵해 둔 작품이라도 있어?”
그 모든 변화에 대해 일일이 언급하고 넘어가는 대신, 라우는 별일 아니라는 듯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그래서 하반기 단체전은 빠지려고. 내년 초 개인전 목표로 집중할 거야.”
“개인전 여는 목적으로 작품 수만 채우는 건 반대야.”
“그건 내가 제일 원치 않아.”
뉴욕에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우가 먼저 집으로 찾아왔었다.
이현이 상황을 알게 된 시점에서 이미 꽤 많은 시간이 지나 있기도 했지만, 말과 행동의 의미를 일일이 설명해야 할 만큼 서로를 모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인우는 답지 않게 스스로의 잘못을 하나하나 짚어 내며 정식으로 사과를 해 왔었다.
마치 자신이 치우침 없는 객관성을 가진 재판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체인징에 대해 판결을 내리고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상처 주었던 말들에 대해서.
격해진 감정이 섞이기는 했어도, 라우 역시 인우나 슈슈의 말이 본질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현에게 키스한 일에 대해서는 그렇게… 너그러워질 수가 없었다.
「내가 아니라 서이현에게 사과해야 할 일이고, 서이현이 용서했다니 그걸로 끝난 거지.」
―라며 멋진 척을 했던 건 어쩌면 이현이 용서했더라도 자신의 용서는 바라지 말라는 뜻이 될 수도 있었다.
인우가 용기를 깨끗이 비우고 나자 라우는 커피를 권했다. 자신의 도시락은 아직 절반이 남아 있었지만, 두 사람분의 커피를 내렸다. 커피가 내려지는 동안 커피메이커를 올려 둔 캐비닛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여전히 비가 퍼붓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 비가 밤새 계속되진 않을 테고 미리 확인해 본 바에 의하면 그다지 위협적인 풍속의 태풍도 아니었다. 내일 오전의 비행이 영향받을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현 씨한테… 정말 말 안 할 거야?”
“…….”
라우는 팔짱을 풀며 등 뒤의 인우를 돌아보았다. 그는 진지한 답변을 요구하는 굳은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라우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다시 몸을 돌려 방금 내린 커피를 두 잔의 머그에 나누어 담았다.
라우에게서 잔을 건네받은 인우는 머그를 두 손으로 감쌌다. 습기 때문에 강하게 틀어 둔 에어컨 탓인지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머그의 온기가 반가운 듯했다.
“이현 씨도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야 할 권리가 있어.”
“고스트가 곁에 없으면, 다이아몬드 더스트는 평범한 베타야.”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라우는 머그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일어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리모컨을 들어 에어컨의 온도를 조절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 타국에서 작업을 해 나가는 것만 해도 벅찰 텐데, 당장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부분을 가지고 굳이 혼란스럽게 할 필요가 뭐가 있어.”
“스물세 살이 된 서이현, 보고 싶지 않아?”
“…….”
갑작스럽게 말의 방향을 확 틀어 버리는 인우를 돌아본 라우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어깨를 들었다 낮추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소파 테이블 위에 두었던 머그를 가지고 책상 앞으로 돌아가 쌓아 놓은 자료 더미를 분류하기 시작했다.
가끔 생각났다는 듯 머그를 들어 커피를 마시면서 책상 위를 정리하는 라우의 옆모습에 한참 경직된 시선을 던지던 인우가 표정을 풀고 피식 낮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멍청한 질문을 했네. 휴가 잘 다녀와라.”
이현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하거나, 그에게 연락을 취하지 않는 자신의 태도를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몰라도, 라우 자신은 이현을 잊으려는 것도, 그를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그를 향한 사랑을 멈추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단지,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이현에게 말했던 대로, 자신의 진실을 지키며 때를 기다릴 뿐이었다.
분류한 자료들을 쇼핑백과 서류 가방에 나누어 넣는 작업이 거의 끝나갈 때쯤 누군가 열린 문을 두드렸다. 주한이었다.
힐끔 쳐다보며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내자 답지 않게 쭈뼛거리며 다가온 그가 파일을 하나 내밀었다.
“뭐야, 이게.”
“음, 일종의 사업 계획서라고 할까요.”
쑥스러움을 숨기려 검지로 뺨을 긁으며 일부러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는 주한을 힐끔 쳐다본 라우는 파일을 받아 들었다.
<팬텀의 내일을 위한 제안 : 한 해 방문객 30퍼센트 증가 달성!>이라는 제법 의미심장하고 의욕에 찬 제목을 단 기획서였다.
“의욕을 보이면 밀어 주신다면서요. 그래서 생각해 봤죠. 특별한 소수를 위한 사치품으로서의 미술품을 전시하는 장소가 아닌, 대중이 미술을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친화적인 장소로 팬텀이 거듭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요! 뭐, 물론… 커피 마시려는 손님들이 갤러리에 드나드는 게 대표님은 탐탁지 않으실 수도 있겠지만, 요즘은 콧대 높은 미술의 시대는 지났거든요. 그렇게 대중들이 미술과 자주 접촉하다 보면….”
“한 실장에게는 보여 줬어?”
“네? 네.”
선 채로 훌훌 훑어본 기획서는 비슷한 사례의 제시, 제안이 통과될 경우 필요한 예산의 견적, 기대되는 예상 수익까지 포함해 꽤 그럴듯하게 보였다.
라우는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 입매를 굳히며 다른 자료들과 함께 파일을 서류 가방에 넣었다.
“알았어, 휴가 동안 생각해 볼게.”
“……네?”
“검토해 보고 대답하겠다고.”
“아… 네. 감사합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 퇴짜를 맞을 거라 생각하고 열렬한 설득 멘트까지 준비했었는지, 검토해 보겠다는 라우의 말에 주한은 좋아하기보다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싸울 태세를 갖추고 덤벼들었다가 상대의 포옹을 마주한 사람 같았다.
“저기, 대표님, 비즈니스석 감사해요.”
문 앞까지 가서야 주한은 뒤를 돌아보며 잊은 말이 생각났다는 듯 라우를 불렀다.
“선물 사 와.”
“용돈도 감사해요.”
A4 용지 한 장 더 넣을 틈 없이 꽉 찬 서류 가방의 지퍼를 채우며 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틀에 기대서서 문고리를 만지작거리던 주한이 특별할 것 없다는 듯, 힘을 들이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현이, 맛있는 거 사 주고 올게요.”
“…….”
라우는 결국 손을 멈추고 책상에 기대앉았다. 정면에 보이는 창문에서는 여전히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긴 휴가를 앞둔 직원들이 들뜬 목소리로 웅성거리며 사무실을 떠나는 기척이 들려왔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숨을 들이쉰 라우는 혀끝으로 입술을 축였다. 다음 순간엔 바닥을 내려다보며 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옆을 돌아보자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눈을 가렸다. 긴 손가락으로 머그의 위쪽을 집어 들어 올렸다. 에어컨의 희망 실내 온도를 좀 더 높여 두었음에도, 그사이 커피는 완전히 식어 있었다.
■ ■ ■
아이는 여전히 벽을 치고 그 벽 너머에서 가시를 세우고 있었다. 모임 내내 팔짱을 낀 채 불만이 가득한 삐딱한 표정으로 비스듬히 허공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기는 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더라도 강제력이 있는 모임도 아닌데 스스로 계속 참석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희망이 있다며, 보보는 느긋하게 기다려 보자는 입장이었다.
“오늘은 어땠어? 너만 힘든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될수록 좀 낫지? 세상에 ‘비정상’이 얼마나 많은지 말이야.”
모임 후 사람들이 떠나고 벽 쪽에 길게 붙여 놓은 다과 테이블 앞에 서서 쿠키를 집어 먹는 아이의 어깨를 툭 치며 보보는 싱글거렸다. 남자 오메가와 여자 알파는 ‘비정상’이라던 아이의 표현을 빌린 짓궂은 응수였다.
“쿠키는 나중에 먹고 뒷정리를 먼저 좀 도와주는 게 어떨까, 엉?”
보보는 뒤에서 아이의 목에 팔을 감아 당겼다. 균형을 잃고 끌려가며 불평을 터트리면서도 아이는 보보가 걸어오는 그런 장난이 아주 싫지만은 않은 눈치였다.
보보는 아이를 조심스럽게 대하지 않았다. 점잖게 가르치려 하거나, 우리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소위 ‘어른’의 모습으로 접근해 봤자 이 아이에게는 효과가 없을 거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보보와 그의 남자친구는 3주 전, 라 빌레트 공원에서 아이를 처음 만났다. 놀이터에서는 어린아이들이 뛰어놀고, 피크닉 나온 가족들이 샌드위치를 먹으며 웃고 떠들고, 수영복 차림으로 일광욕을 즐기는 커플들이 키스를 나누기도 하는 평화로운 공원의 한구석, 안내소 건물 뒤쪽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그늘에서 아이는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구긴 채 바닥에 앉아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마치 일부러 숨어 있는 것 같은 아이가 이상했던 보보와 남자친구는 다가가 도움이 필요한지를 물었다.
아이는 히트 사이클이 시작되고 있었다. 억제제를 복용하지 않은 상태였고, 두 사람은 곧바로 아이를 근처의 작은 병원으로 데려가 처방을 받고 억제제를 복용하도록 했다.
니콜라스라는 이름의 14세 소년은 자신이 오메가로 발현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학교에도 가정에도 알리지 않았고, 억제제 따위는 필요 없다며 히트 사이클을 맨몸으로 견디려 하고 있었던 위험한 상황이었다.
두 사람은 아이를 ‘늦은 발현’에 초대했다. 자신은 절대 오메가로 살지 않을 거라며 두 사람과 헤어졌던 아이는 오늘로 세 번째 모임에 얼굴을 내민 상태였다.
“닉, 이제 슬슬 부모님에겐 얘기해야지.”
사용한 의자를 반으로 접어 전시실 뒤쪽에 차곡차곡 겹쳐 놓던 보보가 슬쩍 운을 띄웠다. 하지만 아이는 얼굴까지 벌게져서 펄쩍 뛰었다.
“절대, 절대 안 돼요! 아버지가 알게 되면 쫓겨난다구요!”
“아버지가 그렇게 싫다면서 그 집에서 쫓겨나는 건 무서운가 봐?”
“…….”
오메가가 됐다는 걸 알면 아버지는 자신을 보려고도 하지 않을 거고, 자신이 창피하고 역겨워서 정신병원 같은 곳에 보내 버릴지도 모른다고, 모임에 처음 나왔을 때부터 아이는 겁먹은 얼굴로 얘기했었다. 학교에서는 따돌려지고 괴롭힘을 당할 거고 제대로 된 직장도 구하지 못할 거라며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끝나 버린 것처럼 비관하고 있었다.
결국 오메가인 자신에 대한 부정은 닉 스스로의 판단이라기보다는 사회와 주변이 가지고 있는 오메가에 대한 편견 때문인 셈이었다.
“하여튼. 진짜. 나한테 말도 없이 아버지한테 얘기해 버리면 안 돼요. 알았죠?”
“내가 왜 네가 스스로 해야 할 일을 대신해 주겠어? 누구 좋으라고? 그런 기대는 하지 마시길.”
거의 애절해 보이는 표정으로 팔에 매달리는 아이의 이마를 아프지 않게 툭 밀어내며 보보는 사악하게 웃어 보였다.
불안과 반항심이 폭발해 아이가 뛰쳐나가지는 않을까, 그렇게 해서 그대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은 아닐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두 사람을 힐끔거리고 있던 이현은 마지막 의자까지 정리를 마친 뒤 다과 테이블 위에 올려 둔 낡은 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저… 그만 가 볼게요.”
“어? 나도 같이 가요!”
아이는 커다란 초코칩이 박힌 쿠키 여러 개를 집어 들며 이현을 따라나섰다. 운하를 사이에 두고 아이의 집과 ‘더 핸즈’는 걸어서 20분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아이가 처음 모임을 나온 날 그것을 서로 알게 된 뒤, 세 번째 함께하는 귀갓길이었다.
닉은 지하철 안에서는 절대 알파니 오메가니 하는 얘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거리에서 걷고 있을 때는 ‘뚜’에 있을 때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솔직하게 이런저런 얘기를 꺼내 놓았다.
“남자 오메가 같은 건 왜 있는 걸까요? 그냥 확 죽고 싶어요.”
로미에흐역에서 내려 운하를 왼쪽에 두고 걸으면서 닉은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바닥에 뒹구는 돌을 걷어차며 말했다. 햇볕이 내리쬐는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에 어울리지 않는 극단적 발언이었지만, 죽고 싶다는 닉의 말에 심각한 무게가 실려 있지 않다는 건 이제 이현도 알고 있었다.
“알파인 연인과의 사이에 아이를 원해서 남성 오메가를 부러워하는 남성 베타도 있어.”
“그 사람은 게이인가 보죠!”
“음… 그 사람의 연인은 여성 알파였는데?”
“남자가… 오메가가 돼서, 자기 여자친구의 아이를 임신하고 싶어 한다구요?”
엽기적이고 역겨운 범죄에 대해 들은 것 같은 얼굴로 이현을 돌아본 아이는 충격이 컸는지 걸음까지 멈추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있었으면 했고, 만약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자신이 오메가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던 거지.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누가 아이를 갖는가가 그렇게 중요한 건가?”
망설임 끝에 이현이 ‘늦은 발현’의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한 지 반년 이상이 지났다. 그동안 다양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속 깊은 얘기, 고민과 상처와 극복, 또는 극복하지 못한 좌절을 들을 수 있었다. 절대적으로 옳은 성별, 좋은 성별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상황과 환경에 따라 원하는 성별도 자신의 성별을 받아들이는 방향도 제각각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반년이었다.
이현은 닉의 편견을 깨 줄 수 있을 만한 몇 명의 남성 오메가들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그러나 돌아온 반응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사람들이 어쨌건 나는 원한 적 없다구요! 그럼 그런 남자들이나 오메가로 만들어 줄 것이지! 난… 난, 이런 괴물이 되는 거… 진짜 싫다구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소리친 닉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채 이현에게서 등을 돌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이의 발언에 이현은 잠시 가볍게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얼얼함을 느꼈다.
베타도 아니고 오메가도 아닌 절반의 상태에서 멈춰 버린 스스로를 바로 그렇게… 괴물이라고 표현했었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현아.」라고.
처음으로 그렇게 불러 주었던 그는 무너지는 하늘 아래 선 사람 같았다. 감히 자신에게 함부로 다가오지도 못하던 그의 앞에서 스스로를 괴물이라 표현함으로써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가슴에도 깊숙이 칼을 꽂았던 것임을 지금은 알 수 있었다.
이번엔 이현이 걸음을 멈추었다. 몇 걸음 앞서 걷던 닉은 이현이 멈춘 것을 뒤늦게 눈치채고 돌아보았다. 강한 햇빛을 마주한 탓에 닉은 눈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남성은 삽입을 하고 여성은 삽입을 받아들인다. 임신을 위해서는 남성과 여성 양쪽 모두가 필요하지만, 실제적으로 임신을 하는 것은 여성 쪽이 된다…. 그걸 ‘정상’이라고 하는 건 베타의 기준이야.”
“세상의 대부분은 베타잖아요.”
“대부분이 베타라고 해서 모두가 베타인 건 아니지. 대부분이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정상’으로, 나머지 소수를 ‘비정상’으로 취급하는 게 정당할까?”
“…….”
열네 살 소년에게 너무 어려운 얘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이현은 어깨에 힘을 빼고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어 티셔츠의 왼쪽 가슴에 매달린 포켓에 꽂아 넣었다.
“내 말은… 어느 하나만을 정상으로 내세워 다른 모든 것을 비정상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는 거야.”
닉은 여전히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삐딱하게 이현을 올려다보았다.
“형은 뭐예요? 진짜 베타 맞아요?”
의심스럽다는 투였다. 아이는 베타들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자신들을 ‘정상’으로 규정하는 세계에서 자라 온 것이다. 마치… 할아버지의 마을 같은 곳에서.
혼란과 불안, 분노, 공포가 뒤섞인 닉의 솔직한 눈동자를 마주 보면서 이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아무것도 아니야.”
“그게 뭐예요.”
“베타일 수도 있고, 앞으로… 오메가가 될 수도 있겠지.”
이현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닉은 모르더라도, 이 말을 하고 있는 자신은 말 뒤에 숨은 의미와 무게를 알고 있었다.
서울을 떠나 지난 10개월 가까이 자기 안에서 쌓아 올렸다 허물기를 되풀이하고, 다가갔다가 돌아서기를 반복했던 주제에 대해 이런 식으로 입 밖에 내게 될 줄은 몰랐다.
“모임에서 봤잖아. 20대 중후반에 발현된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지. 내가 앞으로 뭐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그리고… 앞으로 무엇이 되든 혹은 되지 않든, 나는 여전히 나인 거고, 괴물이 아니야.”
“…….”
“내가 아닌 다른 어떤 누구도 괴물로 보고 싶지 않기 때문에 ‘늦은 발현’에 참석하고 있는 거고.”
불만과 의문이 여전히 남아 있음에도 닉의 표정은 처음보다는 누그러져 있었다. 이현은 다시 걷기 시작하며 닉의 등을 격려하듯 툭 건드렸다. 닉이 이현을 바라보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회와 가정에서 영향 받아 피부에 스민 닉의 편견이 하루아침에, 혹은 어떤 결정적인 한마디로 인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반년간 느낀 것이 있다면 변화는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형은… 휴가 안 가요?”
아버지의 휴가에 맞춰 매년 가는 프랑스 중부 르와르 지역의 할머니 댁으로 가족 여행을 간다며 한참을 떠든 닉은 그렇게 물었다.
다른 친구들처럼 유럽 내의 다른 나라로 가지 못하는 것을 투덜대면서도 1년에 한 번 있는 여행이 기대되는 눈치였다. 자신이 오메가가 되었고, 여행을 즐기기 위해 이전과 달리 억제제를 챙겨 먹어야 한다는 사실도 지금만큼은 완전히 잊은 것 같았다.
“대신 한국에서 친구가 와.”
“친구요?”
“어. 그래서 내일 공항에 마중 가려고.”
“되게… 친한 친구인가 봐요. 여기까지 오는 거 보면.”
마치 눈치를 살피듯 약간은 조심스럽게 그렇게 묻는 닉을 향해 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10분 전만 해도 죽고 싶다며 삶을 비관했던 것은 까맣게 잊은 닉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어쩌면 보보의 말대로 시간과 관심이 필요할 뿐, 닉은 결국 적응해 나가고 자신을 건강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자신보다는 보보가 훨씬 더 이런 상황을 많이 겪어 왔을 테니 그의 말을 믿고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흔들림 없이 자신의 진실을 지키는 것으로 아이를 움직이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닉과 헤어져 ‘더 핸즈’에 도착했을 때쯤엔 등이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기온은 한국보다 낮아도 구름 없는 맑은 날씨 탓에 햇볕이 강했다. 얼른 방에 가서 샤워를 하고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마실 생각에 걸음을 재촉하는데 ‘더 핸즈’ 건물에서 나오던 장발의 남자가 이현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이현.”
“벤.”
“너 땀 좀 봐.”
“응, 오늘 꽤 덥네.”
이현이 손등으로 턱밑의 땀을 훔치며 말했다.
“아파트도 찜통이야. 차라리 카페에 가려고.”
“거기도 덥긴 마찬가지잖아.”
“거기선 적어도 아름다운 남녀들이라도 볼 수 있잖아.”
누구나 동의하는 당연한 진실에 대해 얘기하듯 벤은 중얼거렸다. 벤은 단순히 피사체로서 아름다운 사람들을 감상하기를 좋아했고, 자신의 그런 미적 기호, 취미를 숨기지 않았다.
“같이 안 갈래?”
그렇게 묻는 벤에게 이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늦은 발현’ 모임이 있는 날은 오후부터 저녁까지 작업 계획이 있었다.
찜통이라는 벤의 말과 달리 로비로 들어서자 서늘하게 식은 공기에 숨통이 트였다. 아래층은 시원해도 위쪽 스튜디오들은 한껏 달궈져 있을 게 뻔하기는 했다.
열린 문 안쪽을 슬쩍 들여다보니 일요일이라 관람객이 꽤 많은 것 같았다. 조용히 방으로 올라가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이현을 불러 세웠다.
“이현 씨, 소포가 하나 와 있던데요.”
장난스러운 표정의 유니가 왼쪽 옆구리에 자그마한 꾸러미를 하나 안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사무실에 있다가 귀가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따라 나온 모양이었다. 이현은 웃으면서 계단에서 발을 떼었다.
“금요일에 왔던 건데, 피에르가 휴가 떠나면서 너한테 전해 주라고 메시지 남기는 걸 깜빡했나 봐.”
그녀가 안겨 준 상자는 세로가 두 뼘이 채 되지 않는 작은 종이상자였다. 그리 무겁지도 않았다.
“미국에서 온 것 같던데, 미국에 아는 사람이 있었어?”
이현은 박스를 내려다보고 보낸 사람을 확인했다. 필체에서도 단정함과 다정함이 그대로 묻어났다.
Marcus Dunham. 마커스였다.
■ ■ ■
짐바란에 위치한 리조트에서 더블 식스 비치까지는 자동차로 40분 이상이 소요되었다. 직선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았지만, 해변에 가장 인접한 도로는 너무 비좁아 자동차 진입이 불가했기 때문에 꼬불꼬불한 내륙 도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회벽을 그대로 드러내고 넝쿨 식물들로 벽면을 장식한 카페 건물 앞에서 차를 세운 라우는 일렬로 주차된 오토바이의 행렬을 지나 해변으로 들어섰다.
왼쪽 주머니에 꽂아 둔 선글라스를 습관처럼 꺼내 쓰고는 좀 더 북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비치 바들이 저마다 모래사장에 늘어놓은 빈백과 파라솔, 알록달록하게 칠한 테이블 따위가 해변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더블 식스 비치는 발리의 많은 해변 중에서도 석양이 특히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본격적인 선셋이 시작되려면 아직 두 시간 이상이 남아 있었지만, 좋은 자리를 원하는 사람들은 벌써부터 칵테일을 한 잔씩 시켜 두고 느긋하게 해가 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래와 이한.
두 사람은 모두 대형 서핑 스쿨에서 풀타임 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오전 타임부터 저녁 전까지 꽉 짜여진 스케줄에, 강습이 끝나고 나면 촬영한 동영상으로 수강생들의 자세를 모니터링해 추가 지도를 해 주어야 했다. 업체에서 숙식을 제공하는 대신, 스쿨의 스태프로서 수강생 및 투숙객들과 어울리며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도 일의 연장이었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느긋하게 본인의 서핑도 즐기면서 휴양지의 파라다이스에서 유유자적하는 생활은 아닌 듯했다.
파트타임 강사로 일하거나 좀 더 시간을 낼 수 있는 다른 일을 하면서 여유 있게 지낼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의 수입으로는 당장의 생활만 겨우 해결할 수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이 매달 이현을 거쳐 라우에게 보내오는 돈의 액수를 보자면, 1억의 빚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해결하기 위해 1~2년은 바짝 고생을 하기로 각오한 듯했다.
그들이 소속된 서핑 스쿨에서 운영하는 비치 바 앞에 도착한 라우는 발리 전통식으로 지어진 목재 건물 앞, 두 개씩 나란히 짝을 지어 늘어놓은 비치체어에 자리를 잡았다. 흰색 피케티와 반바지의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곧바로 다가와 메뉴판을 건넸다. 즐겨 마시는 브랜드의 맥주 한 병과 재떨이를 부탁한 라우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맥주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불을 붙이지 않고 필터를 문 채 바다를 바라보았다. 파도는 잔잔했다. 먼바다에서부터 균일한 높이로 밀려와 스르륵 모래 안으로 빨려 들어가며 사라졌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흡연 욕구도 함께 사그라졌다. 피우지 않은 담배를 그대로 재떨이에 떨어뜨려 놓은 라우는 기분 좋을 정도로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바다 위 서퍼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통이 넓은 편안한 핏의 린넨 팬츠가 바닷바람에 펄럭거리고 바닥을 디딘 가죽 샌들 사이로 모래가 파고들었다. 휴양지 특유의 뜨거움과 나른한 몽롱함이 지난 1년 가까이 혹독한 겨울에만 머물러 있는 것 같았던 내면을 조금은 느슨하게 풀어 주는 것도 같았다.
등받이에 완전히 몸을 기대고 다리를 체어 위로 끌어 올려 길게 뻗었다. 발목을 서로 교차시키고 머리 뒤에서 깍지를 끼자 저절로 눈이 감겼다.
왜 이곳으로의 여행을 결정했는지 모르겠다.
발리는 이미 서너 번 정도 경험이 있었음에도 2주간의 휴가를 결정했을 때부터 다른 곳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현을 대신해 두 사람의 안부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어쩌면 자신이 모르는 과거의 이현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과 간접적으로나마 접촉함으로써 이현과 닿아 있다는 희미한 위안이라도 갖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들은 자신의 얼굴을 모르고 있었으니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둬서 나쁠 게 없을 것 같았다. 혹시라도… 이현에게 전해 줄 수 있는 날이 올 경우를 대비해서라도 말이다.
해변에서 멀지 않은 얕은 바다에서 강사의 도움을 받으며 보드 위에서 일어서고 넘어지기를 반복하는 초보 서퍼들 사이로 파도를 넘어오는 한 서퍼가 눈에 띄었다.
파도가 잔잔한 만큼 화려한 기교를 보이는 것도 아닌데 부드러운 곡선의 행적이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물 위에 있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파도가 그를 해변으로 부드럽게 옮겨 주는 것 같은 자연스러운 흐름을 타고 있었다. 무엇보다 먼 거리에 있어 표정이 전혀 보이지 않음에도, 그가 바다 위에 있는 이 순간을 온몸으로 즐기고 있다는 것이 전해져 왔다. 라우는 그가 바로 모래임을 확신했다.
지금의 자신이 그렇듯, 모래사장에 혼자 앉아 자유롭게 파도를 타는 모래와 이한을 바라보고 있었을 좀 더 어렸던 시절의 이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지나온 과거라 하더라도, 당시의 어린 그가 느끼고 있었을 심해의 어둠과 침묵에 잠겨 버린 듯한 고독이 자신의 가슴에 그대로 옮겨 오기를 원했다. 그의 미래에 자신이 함께하기를 바랐던 욕심만큼 과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쉽게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을 그의 많은 밤 중 단 하룻밤까지도 전부 자신의 몫으로 나누어지기를 바랐었다. 이 순간까지도 간절함은 변함없었다.
바다에서부터 걸어 나오는 그녀는, 자신의 이름과는 달리 모래와 맞닿아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더 닮아 있었다. 사진으로 익히 보아 온 얼굴이기는 했지만 웻슈트를 입고 머리카락이 흠뻑 젖은 상태에서도 그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강습이 막 끝난 후 수강생들의 요청으로 시범을 한 번 보인 것이었는지, 해변으로 올라온 그녀는 기다리고 있던 두세 명의 다른 한국인들과 잠시 대화를 나눈 뒤 그들을 이끌고 바가 있는 이쪽으로 천천히 옮겨 왔다.
선글라스 뒤에서 그녀의 동선을 좇고 있던 라우는 무리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녀 역시 자신을 알아보고 미소를 건네 오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혹시라도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더라도, 오랜 친구를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것 같은 반가운 표정을 지을 리는 없으니 착각이 분명했다.
하지만 착각이 아니었는지, 몸을 틀어 맥주병을 집으려 하는 라우의 비치체어 바로 앞에서 그녀가 멈춰 섰다.
“어? 토끼 씨!”
“…….”
라우는 선글라스 뒤에서 미간을 좁혔다. 그녀가 뭐라고 말한 건지, 자신이 맞게 듣기는 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무언가 말로 설명하려던 그녀는 곧 고개를 내젓고 라우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푹신한 소파와 동양풍의 쿠션들로 꾸며진 이국적인 느낌이 가득한 바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물방울이 맺힌 그을린 얼굴을 손으로 훑어 내고는 씨익 웃으며 벽면을 가리켰다.
“…….”
아무렇게나 북 찢어 낸 잡지의 한 귀퉁이, 세계 이곳저곳의 지도, 그리고 이곳을 방문했던 손님들로 보이는 사람들의 다양한 웃는 얼굴이 담긴 폴라로이드 사진 사이에 이현의 그림이 몇 장 섞여 있었다.
A4 용지보다 좀 더 작은, 아마도 스프링노트에서 찢어 낸 듯한 종이에 볼펜으로 낙서하듯 편하게 그린 스케치였지만 이현의 그림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유니와 주한을 그린 것이 분명한 그림 옆, 커다란 토끼 귀를 달고 조끼에 매달린 회중시계를 보고 있는 것은 분명 라우 자신이었다.
그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고자 이곳까지 날아오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이렇게 생각지도 않은 장소에서 그의 흔적을 마주하는 것은 전혀 각오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옆에 선 그녀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그림을 보며 말했다.
“알아볼 수밖에 없겠죠? 이현이가 진짜 재주가 있긴 해요.”
감정이 파도처럼 덮쳐 온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지난 약 1년간의 인내가 전부 무너지며 이현과 함께 비가 퍼붓는 바다를 바라보았던 그 순간으로 되돌아갈 것 같았다. 사실은 이현의 안에 남아 있는 자신을 향한 사랑을 어떻게든 상기시켜, 스스로의 과거를 팔아 그의 동정심을 자극해서라도, 가지 말라고 매달리고 싶었던 그 순간으로.
그녀에게서 전해져 오는 바다의 찬 기운을 느끼며 라우는 자신의 눈을 가려 버렸다.
■ ■ ■
이곳에 도착한 지 사흘째, 요제프 루스와 첫 만남을 가졌다.
요제프는 유순한 이미지의 도련님으로, 내가 이 일로 관계를 갖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오메가가 돼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를 적대시하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오스트리아의 문화인지 루스 집안만의 가풍인지는 몰라도 요제프의 오메가 시종이 만남 내내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 알파·오메가 시종은 보통 큰돈을 받고 하급 귀족이나 상인과 결혼을 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아들을 오메가로 바꾸어 알파와 혼인시키는 것으로 신분을 공고히 하려는 집안에서 오메가 시종을 몸종으로 남겨 두다니. 그것도 신기한 일이었지만, 알파인 손님 앞에 무방비하게 페로몬을 흘리는 오메가 몸종을 노출시킨다는 자체가 여하간 드문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