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권-1. Pull Out1) (25/31)

   1. Pull Out1)

건물로 이어지는 입구 앞에는 관람 시간이 마감되었음을 알리는 안내판과 함께 바리케이드가 세워져 있었지만, 육중한 정문은 닫혀 있기는 해도 잠겨 있지는 않았다. 기억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는 문을, 이현은 거의 온몸으로 밀어내며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여전히 병적일 정도로 화이트톤 일색이었다. 잠시 현관의 홀에 멈춰 서서, 상앗빛 곡선형 계단과 높은 천장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모두 퇴근하고 사무실에 라우만 남아 있는 지금, 다른 조명은 전부 꺼진 상태에서 홀 천장에 매달린 구조적인 디자인의 샹들리에만이 창백한 빛을 이현의 머리 위에 드리우고 있었다.

세련되게 치장한 손님들로 늘 북적거리는 부유한 귀족의 성 같았던 팬텀은, 한때 화려했던 과거를 간직한 채 몰락한, 유령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도는, 을씨년스러운 폐가 같았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이 투영된 것뿐 실제로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감상적 대응은 최대한 억제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백팩의 어깨끈을 비틀어 쥐며 숨을 들이쉰 이현은 사무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어제 아침 헤어진 뒤, 이틀 만에 보는 라우가 가장 안쪽 그의 책상 뒤에 서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 인기척에 이쪽을 돌아본 그는 손에 들고 있던 A4 용지를 흔들며 미소 지었다. 맥이 빠질 정도로 그는 그대로였다.

사무실에 혼자 남은 그는 타이의 매듭을 느슨하게 끌러 내리고, 셔츠 소매를 팔꿈치 아래까지 말아 올린 편안한 모습이었다. 이현은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출입문 바로 앞, 넓은 회의 테이블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지금이라도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에게 다가가면, 어제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팔을 뻗어 어깨를 안고 입을 맞춰 줄 것 같았다. 아마 분명히 그럴 것이다.

슈슈에게서 처음 이야기를 들은 이후, 이 순간까지… 몇 번이나 그런 유혹을 느꼈다.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그저 그의 판단에 자신을 맡기고 침묵하는 것. 그렇게 해서 스스로를 팽개치고, 그의 비밀을 외면하고, 예정되어 있었던 대로 거짓된 희망의 미래를 택하는 유혹을….

하지만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그를 해체하고, 그의 위선을 악랄하게 까발리고 싶은 비틀린 충동이 곧바로 뒤이어 끓어오르며 이현을 괴롭혔었다. 서로 다른 두 충동은 이 순간까지도 서로를 향해 사납게 짖고 있었다.

이현은 마른침을 삼키며 최대치로 팽팽하게 몸을 불린 백팩을 의자에 내려놓았다. 쥐고 있던 종이를 내려 두고 다른 종이를 집어 드는 라우는 전화기 너머의 상대와 하반기 합동 전시회에서 각 작품을 전시할 위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얘기가 잘 풀리지 않는지, 방금 새로 집어 든 종이를 던지듯 내려놓고 그 손으로 이마를 긁은 뒤 허리를 짚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무리 지어야 할 사항이 많은 지금, 보통은 유니가 담당했던 일에까지 그가 직접 관여하는 이유는 아마도 마지막까지 자신의 팬텀에 최선을 다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팬텀에 대한 애착이 희미해진 것도 아니고, 팬텀의 운영에 대한 그의 신념에 변형이 일어난 것도 아니다. 그 자신이 설명한 것처럼, 더 큰 목적을 위해 자연스럽게 운영 노선을 바꾼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왔어요?”

통화를 마친 라우가 이쪽을 보며 웃었다. 그 무방비한 웃음을 단번에 부숴 버리고 싶은 잔혹성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며 이현은 최대한 애를 써 미소 비슷한 것을 짧게 지어 보였다.

“팬텀에 온 거, 오랜만이죠?”

눈꺼풀이 쑥 꺼지고 흰자위에 핏발이 선 라우가 책상 사이를 걸어 이쪽으로 다가왔다.

“떠나기 전에 한번 들르고 싶었나?”

평소처럼 그가 건네 올 짧은 키스와 스킨십에 아무렇지 않게 응할 자신이 없었다. 이현은 질문에 답하는 대신 창문 쪽으로 걸어가며 그에게 커피를 권했다. 진하게 내려 주기를 부탁한 그는 이현이 벗어 놓은 백팩에 관심을 보이며 손잡이를 쥐고 무게를 가늠하듯 위로 두어 번 당겨 보았다.

“무슨 짐을 이렇게 많이 챙겨 갔었어요? 며칠 여행이라도 다녀온 사람 같네.”

어젯밤 늦게까지 유니와 주한의 집에서 떠들썩한 송별회를 치렀다고, 그는 아직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들이 출근한 집에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다 퇴근한 두 사람과 다시 한번 의기투합해 어울리다 보니 이 시간이 되었을 거라고, 그런 추측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현은 유니나 주한의 오피스텔이 아닌 라우의 집에서 나온 길이었다.

‘다녀온 사람’이 아니라 ‘다녀올 사람’이라고. 아무것도 모른 채 일상적인 얘기를 꺼내 놓는 그를 비아냥거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커피 머신 앞에서 이현은 입술을 물었다. 그를 직접 눈앞에 두면 어떤 식으로든 감정이 한 방향으로 정리되지 않을까 생각했었지만… 여전히 내부에서는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두 잔의 머그와 함께 테이블 앞으로 돌아가 라우에게 한 잔을 건넸다. 그리고 그가 흥미를 보일 만한 이야기를 던짐으로써 또 한 번 스킨십을 저지했다.

“그게 아니라, 스튜디오에… 집에 들렀다 오는 길이에요.”

“…….”

의도한 대로 머그를 받아 들던 라우의 손이 멈칫했다. 이현은 대단한 일도 아니라는 듯 머그를 입술로 가져가며 높낮이 없이 말했다.

“아버지에게 가 보려구요.”

“지금?”

“네.”

그는 속내를 읽어 내려 탐색하는, 빈틈없는 시선으로 이현을 오래 응시했다. 다정한 염려를 바탕으로 한 것 같았던 그의 살피는 시선이 지금은… 구속과 결박처럼 갑갑하기만 했다.

“직접 찾아뵙지 않고 떠나는 것도… 내키지는 않겠죠.”

라우는 수긍의 의미로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유니가 가족들을 직접 만나고 온 것처럼. 먼 곳으로 떠나기 전, 무거운 짐을 조금이라도 정리하기 위해 아버지를 찾기로 결심한 거라고. 그는 아마도 이현의 동해행을 그렇게 결론 내린 듯했다.

하지만 자신이 아버지를 찾아가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는 유니의 경우처럼 자발적이지도 건설적이지도 않다고, 이현은 속으로 냉소했다.

“임 선생은… 너무 걱정 안 해도 될 거예요. 한 달 전쯤 큰아들 부부에게서 첫 손녀를 본 뒤로 얌전해진 것 같으니까.”

잠시 말을 멈추고 커피를 한 모금 삼킨 라우는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할아버지가 되고 나니 세상을 보는 시선이 조금은 바뀌었는지도 모르지.”

김이 피어오르는 머그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라우는 고개를 돌렸다. 테이블의 모서리를 사이에 두고 서너 발자국 떨어진 자리에 서 있는 이현을 바라보는 눈길이 예리하게 빛났다. 평소와 미묘하게 차이 나는 거리감을 눈치채고 의아하게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현이 머그를 입술로 가져가려는 순간, 그가 성큼 거리를 좁혀 왔다.

“음.”

정면이 아닌 이현의 오른쪽 어깨 옆에 선 그는 힘을 주어 물건을 들어 올리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이현의 몸에 팔을 둘렀다. 왼쪽 상박 위에서 깍지를 끼며 힘을 주고는 이현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그러는 동안 이현의 시선은 내내 손에 쥔 머그를 향하고 있었다.

“……괜찮겠어요?”

“뭐가요.”

“거기로 혼자 다시 돌아가는 거. 그리고… 아버지를 마주하는 거.”

“…….”

턱을 비스듬히 틀어 이현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기울여 눈높이를 낮춘 라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이현은 그에게서 이전과 같은 신뢰와 친밀감을 느끼려 애썼다. 그러나 그 노력은 곧, 그를 찌르고 구멍을 만들어 음침한 비밀을 밖으로 끌어내고 싶은 적의로 변해 버렸다.

“내가 데려다줄까? 바다도 볼 겸.”

그의 말을 농담으로 치부하기 위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왜요, 괜찮은 생각 아닌가? 충동적으로 같이 떠나는 짧은 여행이라고 생각하면….”

라우가 이현의 어깨를 돌려세워 자신과 마주 보도록 했다. 이현은 머그를 쥔 채 어정쩡하게 그의 가슴쯤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라우의 팔이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허리를 감아 왔다.

“강원도에, 인제 쪽에 어머니가 가끔 쓰시는 작업실이 있어요. 이전 주인이 별장으로 쓰려고 지은 곳이라 창으로 보이는 풍경도 고즈넉하고 벽난로도 있고 꽤 아늑해요. 지금 출발해서 느긋하게 달리다가… 거기서 두세 시간 잠깐 눈도 좀 붙이고… 동해에서 일출도 같이 보고….”

“여기서 하실 일 많잖아요.”

관자놀이와 뺨, 입술 옆쪽에 차례대로 입을 맞추며 나른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를 가로막았다. 그러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냉기를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그에게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 같았다.

라우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이마를 이현의 이마에 마주 대었다.

“아… 일이 정말 많기는 해. H&W에서도 페티본의 전시회 일정을 빨리 잡았으면 좋겠다고 닦달이라 홍콩에도 조만간 다녀와야 할 것 같거든. 뉴욕에 가서도 팬텀 지점 오픈보다도 그쪽 일 처리에 먼저 매달려야 할 상황이야.”

엄살 부리며 얘기하는 라우의 입김이, 그 숨결이 더 이상 달콤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이현은 절망을 느꼈고, 그것을 파괴해 버린 그가 원망스러웠다.

“그럼, 꼭 이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요.”

“……뭘… 말이죠?”

되묻는 라우의 목소리에서 서걱거리는 약간의 경직이 느껴졌다.

“이렇게 무리하시면서까지 서둘러서 뉴욕으로 가야 하는, 아니, 서울을 떠나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의 팔이 이현의 허리를 놓았다.

고개를 기울여 안색을 살피는 눈빛은 평소와 다른 이현에 대한 의혹을 담고 있긴 했지만, 아직은 염려에 더 가까웠다. 이현이 체인징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아닐지 의심하기보다, 아버지와의 만남을 앞두고 심각한 긴장과 혼란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방향을 잡은 듯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어깨 끝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묻는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이현이 알고 있는 라우의 모습 그대로 만지는 손끝과 말끝의 물음표 하나까지 세심했다. 이것이 그의 전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자신을 향한 모든 것에 그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힘주어 입술을 다물었던 이현은 머그의 따뜻한 표면을 엄지로 쓸다 입을 열었다.

“뉴욕 지점, 저 때문인 거죠?”

고개를 들지 않았기에 라우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현은 자신의 어깨 위에 올린 손과 연결된 탄탄한 팔목을 내려다보았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일부인 마냥 쓰다듬고 매만졌던 그의 육체는 이제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존재했다.

“대표님을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기면서 충격받고 걱정했을 때, 한 번쯤 다시 생각해 봤어야 했는데…. 아마 저도… 그냥 믿고 싶었나 봐요.”

누구와도 나눠 본 적 없는 내면의 고독을 서로 보듬은 사이라 해서, 그것이 서로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의 곁을 더 오래 지켜 온 사람들의 반응을 너무 쉽게 간과했었는지도 모른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믿고 싶은 것을 믿으려 했던, 이기적 동기가 눈을 멀게 한 것이다.

“저 때문에 대표님이 자신을 지탱해 온 신념을 무시하고, 그것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걱정을 사고, 신뢰를 잃고… 스스로에게서 멀어지는 선택을 하고 있다고….”

격양되는 감정을 누르려 이현은 잠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우리가 함께 있는 것이 대표님을 병들게 하고 있다는 걸… 마주하기가 무서웠던 거겠죠.”

어깨 위의 손이 이번에는 힘을 주어 강하게 붙잡아 왔다.

“내가 무슨 도덕적으로 대단한 목표라도 정해 두고 그걸 위해서 고행하듯 살아온 것처럼 생각해 주는 건 다들 고마운데… 나름의 신념 같은 게 전혀 없었다고 할 순 없어도 나에게 결국 사업은 사업이에요. 시카고에서 만난 사람들과 뜻밖에 얘기가 잘돼서, 지점을 내기에 적절한 기회라고 판단한 것뿐이라고 설명했잖아요.”

그럴싸한 논리였지만, 지금의 이현에게는 허점이 보였다. 소속 작가들의 작품이 그에 걸맞은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소위 속물적인 부분에 자신의 손을 담그기를 꺼리지 않을 뿐, 그것은 그가 미술을 사업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였다.

이현은 고개를 들었다.

“저 때문이 아니라면, 대표님 혼자서라도 뉴욕에 가시는 거죠?”

라우의 얼굴이 사납게 굳어졌다. 그러고는 곧 불길한 예감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흔들며 표정을 순화시켰다. 어깨 위의 손을 목으로, 뺨으로 옮겨 쓰다듬으며 그가 이현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왜 그래요. 어디서 무슨 얘기라도 들었어요? 누가 뭐라고 해요? 응?”

자신을 담고 있는 눈동자와 익숙해진 부드러운 손길만이 그의 진실이라 믿고 싶었다. 다른 진실에는 눈과 귀를 닫아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몸이 변해 버렸다는 사실을 제 눈으로 확인하고도 그를 믿고 싶어질 만큼의 신뢰를 쌓아 두고, 그 높고 두꺼운 벽 너머에 다른 진실을 키우고 있었던 그에게 배신감이 치밀었다.

이현은 그게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입술을 깨물었다. 머그 안의 커피가 흔들리고 있었다. 어떤 결심을 굳힌 듯 휙 고개를 들어 라우를 마주 봤을 때 이현의 눈에는 광채가 돌고 있었다.

“‘더 핸즈’의 제안, 고려해 보려구요.”

라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푸른 눈동자가 잿빛으로 부서지고 뺨이 짧게 경련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자신이 들은 말에 있는 그대로의 뜻 외에 다른 숨은 뜻이 있을 거라 믿고 싶은 것 같은 되물음이었다.

이현은 그의 불안을 외면하고 테이블 쪽으로 어깨를 완전히 틀었다. 그 단호한 움직임에, 이현의 목과 어깨를 감싸고 있었던 라우의 손이 힘없이 툭 허공으로 떨어졌다.

머그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이현은 의자의 등받이를 두 손으로 꽉 붙들었다. 라우가 곁으로 바짝 다가서자 초조함과 흥분이 전해져 왔다. 커다란 손이 이현의 어깨를 붙잡아 자신을 보도록 억지로 돌려세웠다.

“아니, 그럴 수는 없어. 계약금 1억이 포함된 내용의 전속 계약서를 작성했던 거, 잊진 않았겠지?”

“그 돈이 아니더라도… 지금까지 제가 대표님에게 받은 많은 것들… 어떻게 잊겠어요.”

이 상황과 별개로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를 벌하기 위해 ‘더 핸즈’를 염두에 두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처음부터 그랬어야 하는 일이었다.

유니의 말대로다. 그와 진지한 연인 사이였다면, 정말로 서로를 신뢰했다면, ‘더 핸즈’의 제안을 받았을 때, 그와 의논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깊은 곳에서는 그가 가라고 하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가지 않기로 결정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대해 그가 죄책감을 느끼게 되지는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자기 자신의 힘으로 얻은 기회를, 그의 곁에 있기 위해 묻어 버리려 했던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이마 위에 라우의 무거운 한숨이 느껴졌다. 억지로 부드럽게 만들어 낸, 긴장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그가 이현의 어깨를 흔들었다.

“당황해서 나온 말일 뿐이지, 정말 그 1억을 빌미로 널 못 가게 하겠다는 게 아니야. 알잖아.”

“돌이켜 보니까… 너무 많은 걸 받아 왔고, 받고 있더라구요. 내가 이렇게 뻔뻔한 애였나 싶어서 놀랐을 정도로요…. 현재의 저는 전부 대표님이 만들어 준 거였어요. 입고 먹고 잠자는 생활에서부터… 그림을 다시 그리고, 과거를 위로받는 것까지… 저는 다 대표님에게 기대고 있었어요.”

위험한 상대에게 쫓길 수도 있는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이유로, 사회적 능력이 없는 어린 나이라는 이유로, 그가 괜찮다고 부담이 아니라고 했다는 이유로… 지금까지의 제안들을 너무 쉽게 받아들였다. 멈칫하기는 했었지만, 설득하는 그의 말들에 친절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은 결국 자신이었다.

또 한 번의 긴 한숨 뒤에 라우가 허리에 손을 짚으며 잠시 틈을 두었다.

“연인에게 기대고 위로받고 도움을 받는 거. 그게 뭐가 나빠? 나 역시 마찬가지야. 나도 네가 있어서 위로받았고, 너에게 뭔가를 줄 수 있었다면… 그게 내 행복이야. 그게 잘못인가?”

“전 단순히 도움만 받은 게 아니에요. 자기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권리와 책임까지 타인에게 의지하는 게… 사랑일까요.”

“…….”

이현이 보이는 갑작스러운 혼란의 이유를 찾듯, 라우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리며 이현의 얼굴을 훑었다. 그러고는 가까이 다가와 이현의 팔을 쓸며 낮은 목소리로 호소했다.

“가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었나? 응? 내 옆에 있겠다고?”

그랬었죠. 당신이 나를 오메가로 바꾸고 있다는 걸 몰랐을 때는.

이현은 짧은 몇 마디 말만으로 그의 세계를 단번에 부숴 버리는 상상을 한다. 상상만으로도 몸이 떨려 오는 이 격렬함의 정체가 분노인지 흥분인지도 구분할 수가 없을 만큼 감정은 격해져 있었다.

오늘 체인징 이야기를 꺼낼 생각은 없었다. 일단 동해로 가서 물리적 시간과 거리를 두고 감정과 입장을 차분히 정리할 작정이었다. 직접 얼굴을 보고 얘기하지 않으면, 아버지를 보러 간다는 이야기를 납득하지 않을 것 같아 할 수 없이 이곳으로 왔지만… 얼굴을 마주한 상태에서 모든 혼란을 수면 아래에 가두어 두기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금까지 노팅을 몇 번이나 했었죠?”

“…….”

갑작스러운 화제의 전환에 라우는 이마와 미간을 찌푸렸다.

“열 번? 스무 번? 하룻밤에 두세 번 한 적도 있으니까… 50번, 아니 70번은 될까요?”

붉은 혀로 마른 입술을 축이는 라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현은 그를 명중해 피를 흘리게 할 돌을 손안에 움켜쥐었다.

“어제, 인우 형 집에 있었어요.”

“…….”

라우는 뒤로 물러섰다. 늦은 저녁 시간, 푸르스름해진 아래턱을 넓게 문지르며 코앞에 닥친 현실을 외면하듯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오늘, 형이랑 같이 병원에 갔었구요.”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굳어 버린 그를 보며 이현은, 그를 파괴하고 그에게 고통을 주고 싶은 복수심이 그를 옹호하고 믿고 싶은 마음을 거칠게 덮쳐 쓸어버리는 것을 느꼈다.

“……임신이래요.”

눈을 크게 뜬 라우가 입술을 벌리고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그런 라우를 비웃듯 이현의 입가가 비틀리며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정말… 이런 상황이라도 원하셨던 거예요?”

임신이 아니라는 말에 안심을 하는 건지, 실망을 하는 건지도 모를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멈춰 서는 라우를 바라보며 이현은 입매를 비틀었다.

“언젠가 나를 통해서 아이를 갖게 될 날이라도 꿈꿨나요?”

“…….”

“그래서 나를… 오메가로 만들려고 했어요?”

“아이는 필요 없어. 거기까진 생각해 본 적도 없어!”

라우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항변 뒤에 자신을 노려보는 이현의 붉어진, 부릅뜬 눈을 바라보다 시선을 내리깔았다. 스스로가 한 짓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혀로 입술을 축이며 몇 번이나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마른침을 삼킨 뒤 눈을 꽉 감았다가 다시 이현을 바라보았다.

“서이현.”

“…….”

이현의 어깨를 향해 뻗은 손이 허공에서 머뭇거렸다.

“이현아.”

무너지는 하늘 아래 서 있는 사람 같은 목소리였다. 처음 이현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던 때처럼.

이현은 다가오는 그의 손을 피해 등을 돌렸다.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눈가에 몰려드는 습한 압력을 거부하기 위해 눈을 부릅뜨며, 이현은 성큼성큼 테이블을 돌아 라우의 맞은편, 먼 거리에서 몸을 돌려세웠다.

“50퍼센트 진행됐대요.”

“아니야…. 벌써 그렇게까지 진행됐을 리가 없어. 기껏해야 35퍼센트 정도….”

“35퍼센트, 50퍼센트… 그게 무슨 차이가 있는데요!”

어머니의 사고 후로, 어쩌면 그보다 더 이전에 머리가 어느 정도 큰 무렵 이후로, 누군가에게 이렇게 여과되지 않은 감정을 그대로 내던지는 건 처음이었다. 고함을 지르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현은 길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얽어 훑어 내렸다.

“전 지금 아무것도 아니에요. 베타도 오메가도 아닌… 그냥….”

힘겹게 마른침을 삼킨 뒤 그보다 더 힘겹게 말을 이었다.

“괴물이에요.”

하늘과 땅, 공기와 햇빛의 존재를 매 순간 실감하지 않듯, 성별을 특별히 의식해 보지 않았다. 이현에게 성별이란 산이나 강처럼 한자리에 고정된,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고한 진실 중 하나였다. 성인이 된 이후에 알파나 오메가로 발현하는 경우가 있기는 해도 무척 드문 확률인 만큼 자신과는 무관한 세계의 일로 못 박았고, 그 가능성에 대해서조차 고려해 본 적이 없었다.

페로몬으로 그와 교감할 수 있고 임신이 가능한 오메가였더라면 그와의 관계는 어땠을까. 그런 상상을 짧게 해 본 적이 있지만, 그건… 어떤 가능성도 없는 일임을 분명하게 인지한 상태에서 막연히 그려 본 가정이었을 뿐, 오메가가 되고 싶다는 갈구가 아니었다. 설사 되고 싶었다 하더라도, 이런 방식으로는 아니었다.

내면의 부패는 얼마든지 모른 척하며 살아갈 수 있어도 육체의 아픔이나 병에 대해서는 누구도 방관하지 않는다. 종이에 벤 손가락에 맺힌 피 한 방울에도 아파하며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인다.

사회적으로 아무것도 소유한 것이 없는 사람이라도 그 자신의 육체만큼은 의심의 여지없이 그 자신의 것이었다. 그런 육체의 정체와 그에 대한 소유권마저 불분명하게 되었을 때 인간이 느끼는 불안은 표면적인 흔들림에서 그치는 수준이 아니었다.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못해. 생각하더라도 네 앞에서 입 밖에 내지 못해. 내가 그렇게 두지 않아.”

테이블 앞으로 바짝 다가서며 그렇게 말하는 라우의 목소리는 자신이 하는 말이 말뿐인 허튼소리가 아님을, 그대로 실행하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보여 주고 있었지만, 이현은 거기에서 어떤 감동도 받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을 이렇게 변형시킨 라우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웃었다.

“다른 사람들은 상관없어요. 제가 스스로를 그렇게 느껴 버렸으니까.”

눈을 감은 라우는 두 손을 기도하듯 모아 코와 입술을 뒤덮었다. 피부를 아래로 당기며 손을 끌어 내리고, 생각할 말을 찾듯 미간을 바짝 모았다. 하지만 이현이 먼저였다.

“뉴욕에 가서 얘기하면… 결과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격정을 최대한 억제하느라 목소리가 얕게 떨리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과 멀어지고, 대표님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팬텀까지 변형시켜 버리고… 그리고, 저에겐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먼 곳으로 떠난 뒤에 털어놓으면….”

“…….”

“그럼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대표님을 받아들일 거라고… 그런 계산을 한 거예요?”

고통을 인내하는 사람처럼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테이블 너머 이현을 바라보던 라우는 이현에게 다가가는 대신 테이블을 밀어낼 듯 앞으로 바짝 다가서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야. 너에게 내 인생을 걸었다는 증명이 되길 바라서….”

“지켜 온 모든 것을 저 때문에 망쳐 버리는 대표님을 보는 게… 어떻게 저한테, 사랑의 증명이 될 수 있어요?”

“…….”

든든한 갤러리의 지원을 받으며 뉴욕 미술계에서 화려하게 활동하는 것은 ‘성공’을 목표로 하는 화가라면 누구나 동경할 만한 환경이었다. 자신에게 그런 환경을 갖춰 주기 위해 그가 무리하게 희생하며 경영 노선에 변화를 준 것은 아닐지, 몇 번이나 조심스럽게 의문을 가졌었고, 용기를 내 실제로 그에게 묻기도 했었다.

그렇지 않다는 그의 답변에도 완전하게 개운해지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불안의 원인이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때는 비밀의 존재를 몰랐으니 그 외에 다른 이유를 짐작할 수가 없었을 뿐.

더 파고들었어야 했을까. 그의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의혹이 깨끗이 제거될 때까지 몰아붙여야 했을까.

그런 방식으로 진실을 알게 됐더라도, 시기가 조금 앞당겨졌을 뿐 지금과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무의미한 가정을 되풀이해 보는 짓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몸의 심에 가득 찬 독기를 털어 내려 고개를 세게 가로저었다. 후회의 씨앗이 될 어리석은 판단은 절대 하지 않을 것 같았던, 슈슈가 말했듯 실패를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라우를 향해 천천히 시선을 맞추었다.

“왜 그랬어요?”

이현의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다.

“베타인 나는 마음에 안 들었어요? 부족했어요?”

“절대 아니야.”

즉답이 이어졌다.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던, 해결하지 못할 일은 없을 것 같았던 라우는 지금, 스스로를 옹호할 수 있는 어떤 적극적인 해명도 내놓지 못한 채, 그저 이현의 질문에 최소한의 부정과 긍정으로만 응하고 있었다.

“알파, 오메가, 베타… 아니면, 알려지지 않은 어떤 존재더라도 상관없어. 지금의 너로는 부족하다거나, 네가 다른 존재이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랬던 게 아니야.”

“그럼 왜 그랬어요?”

이 질문에 대한 라우의 답변만이 상황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끌어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인 것처럼, 이현의 목소리는 이제 추궁이 아닌 애원의 빛을 띠고 있었다.

테이블에 몸을 의지해 가장자리를 더듬어 짚어 가며, 이현은 라우에게로 다가갔다. 스킨십이 아직 어색한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연인들이 그렇듯, 다가가기를 망설이는 멈칫거리는 손으로 그의 배와 가슴 부근의 셔츠를 스치듯 만졌다 놓기를 반복했다.

“무슨 말이든 해 봐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이유가 있었다고….”

자신이 그를 납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숨어 있기를. 라우가 그 답을 내놓기만 하면 모든 혼란과 분노와 슬픔이 사그라지고, 다시 그를 사랑하기만 하면 되는, 그런 이유가 어딘가에 감춰져 있기를.

무슨 말인가 할 것처럼 달싹거리던 라우의 입술이 다시 꾹 다물렸을 때, 이현은 그의 셔츠의 허리 부근을 꽉 붙잡았다.

“당신은 그만두려고 했는데… 밝히는 내가, 매번 노팅을 졸라서 어쩔 수가 없었다고… 내가 유혹해서 생긴 일이라고! 쓰레기 같은 자기 옹호라도 해 보라구요!”

이현이 흔드는 힘에 아무런 저항 없이 그저 흔들리던 라우가 감싸 안듯 이현의 팔을 붙잡았다. 초점이 흐려진 그의 눈에서는 아무런 의지가 느껴지지 않았다.

첫 노팅을 했을 때처럼, 접촉 사고가 있었던 날 몸을 겹쳤을 때처럼, 투명해서 바닥이 그대로 들여다보일 것 같은, 그래서 그 깊이가 가늠되지 않는 맑은 슬픔만이 넘칠 듯 가득 찬 눈이었다. 눈의 가장자리가 붉게 충혈된 채 허공의 한 지점을 응시하며 가끔씩 상체를 조금 휘청이는 그는 취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라우는 가슴과 어깨를 부풀려 숨을 들이쉬었지만 그마저도 시원스럽지 못했다. 흐리멍덩한 눈이 느리게 깜빡거리며 이현의 눈을 찾았다. 이전의 습관대로, 이현의 이목구비와 얼굴 곳곳 수없이 입을 맞췄던 자리를 하나하나 더듬어 새기듯 내려다보았다. 피로함으로 마르고 갈라진 입술이 다시 몇 번이나 벙긋거리며 발언을 시도했다.

“……사랑해.”

녹슨 쇠못에 긁힌 것 같은 목소리로, 숨소리처럼 나직하게 속삭인 한마디였다.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유일한 진실을 심장에서 뜯어내 꺼내 보인 것처럼 아무런 과장도 감상적 호소의 의도도 느껴지지 않았다.

원망이나 혼란이 아닌, 이전 같은 다정함, 안타까운 염려를 담고 있는 것 같은 눈으로 이현은 오래 라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제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에요.”

라우의 가슴을 힘없이 밀어내며 돌아서는 이현의 걸음이 약하게 비틀거렸다. 상박에서 팔꿈치로, 손목에서 손끝으로… 마지막까지 이현을 놓지 않고 있던 라우는 거리를 늘려 가는 이현을 결국 손안에서 놓쳐 버렸다.

비어 버린 두 손을 그대로 허공에 어정쩡하게 내버려 둔 라우는, 의자 위에 두었던 백팩을 어깨에 메고 문을 향해 걸어가는 이현의 동선을 눈으로 좇았다.

거칠게 일어난 입술의 껍질을 잘근거리던 고른 치아가, 이현의 손이 문고리를 잡는 순간 입술을 놓쳤다. 눈을 찌를 정도로 길어진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라우는 목을 풀었다.

“금요일 밤에 팬텀 식구들과 저녁 식사 약속한 거 기억하죠? 늦지 않게 맞춰서 돌아와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좀 전까지의 파헤침을 그저 며칠이 지나면 저절로 치유될 연인 사이의 흔한 다툼으로 치부하려 애를 쓰는 목소리에, 문을 반쯤 연 이현이 뒤를 돌아보았다.

처음 만났던 무렵의 화려함과 쉽게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았던 견고한 방어선을 모두 지워 버린 라우는, 땀으로 번진 분장을 그대로 둔 채 대기실에 홀로 남겨진 무명 배우 같았다. 그때와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누구도 믿지 않을 것 같았다.

그가 한 번 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전화… 꼭 켜 두는 거 잊지 말고.”

“…….”

“……걱정되니까.”

망설이듯 확신 없이 덧붙인 그를 바라보던 이현은 시선을 거두고 문을 나섰다. 이현이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은 거의 입을 대지 않은, 식어 버린 커피 한 잔뿐이었다.

■ 대단한 착각 ■

두세 모금 피운 뒤 재떨이에 걸쳐 놓은 담배는 누가 흡입해 주지 않아도 저 혼자 타들어 가며 연기를 피워 올렸다.

점점 길어지던 회색 재가 스스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저절로 재떨이에 목을 꺾는 모습을 지켜보던 인우는 손에 든 잔을 천천히 입술로 가져가 호박색 액체를 삼키고 미간을 찌푸렸다.

처음 피워 본 담배는 생각만큼 독하지는 않아서 꼴사납게 기침을 콜록거리지는 않았지만, 많은 흡연자들이 번번이 금연에 실패하는 이유가 이해될 만큼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입 안을 채우는 연기에는 위스키 같은 향긋함이 전혀 없었고, 그것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는 독을 태운 연기를 삼키는 기분이었다.

다만, 바싹 마른 길고 하얀 몸체가 조금씩 타들어 가며 연기를 피워 올리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멍하니 시간을 죽이기에는 괜찮은 방법이었다.

담배가 절반 정도 타들어 갔을 때쯤 인우는 시간을 확인했다. 조금 전 주차장 관리실을 통해 한 방문 차량의 진입을 허가하고 난 뒤 5분 정도가 지나 있었다. 자신의 살점을 뜯어 먹을 굶주린 맹수의 공격을 기다리는, 아무런 훈련도 없이 원형 경기장에 내던져진 사형수 출신의 베스티아리(Bestiarii)의 심정이 이런 것이었을까. 자신의 거창한 비유에 어깨를 떨어 가며 마른 웃음을 흘렸다.

다시 한번 잔을 기울이려는 찰나, 긴 복도 너머에서 쾅, 쾅 힘주어 한 번씩 끊어 치듯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손을 멈췄던 인우는 그대로 술을 좀 더 마셨다. 타격과 타격의 간격이 점점 좁아져 문을 부술 듯 요란해진 뒤에야 잔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바깥쪽으로 문을 밀자,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검은색의 긴 트렌치코트를 아무렇게나 걸친 라우가 또 한 번 막 문을 두드리려던 주먹을 느슨하게 풀며 팔을 내렸다.

“초인종 어디 있는지 몰라?”

대답 없이 거칠게 어깨를 밀치며 현관 안으로 들어서는 그에게서 알코올 냄새가 훅 끼쳐 왔다.

“너, 설마 직접 운전해서 온 건 아니지?”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가던 그가 뒤를 돌아보며 그런 걱정이 가증스럽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몸을 휙 돌려 거실로 들어선 그는 소파테이블 위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필터에 가깝게 타들어 간 담배를 집어 들어 뺨이 파이도록 깊숙이 빨아들이고, 연기와 함께 빠르게 말을 뱉었다.

“어떤 상태야?”

“뭐가.”

“서이현. 서이현 몸.”

그거 말고 달리 뭐가 있냐는, 답답하게 구는 상대에 대한 신경질적인 반응이 되돌아왔다. 인우를 돌아본 얼굴은 초조함과 술기운으로 붉게 흐트러져 있었다. 한순간 불꽃을 튀긴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얼굴을 쓸어내리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검사했다며. 몸 상태는 어때? 괜찮은 거겠지?”

한 번 더 빨아들인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면서 시선을 피하는 라우는, 자신이 질문했으면서도 대답을 듣기가 두려운 사람 같았다.

“다 정상이야. 자궁 위치도 안정적이고, 자궁으로 연결되는 오메가 로드(Road)의 두께나 길이도 이상적이야.”

이쪽을 돌아본 라우는 눈을 찌푸렸다. 허리를 편 상태에서 고개를 숙인 탓에 헝클어진 앞머리가 눈을 가리며 쏟아졌다.

“누가 그런 게 궁금하대? 혹시 어디 다른 부위에서 이상이 일어났다거나 그런 건 없는 거냐고. 건강에… 아무 문제 없는 거냐고.”

“체인징을 안 했으면 이런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잖아?”

“…….”

미간을 더욱 좁히며 눈을 부릅뜨는 라우의 얼굴을 보며 인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전부 건강해. 아직 난소는 제대로 발달하지 않은 상태고, 덕분에 자궁 전체를 보자면 절반 정도 완성됐지만, 일반적 오메가의 페로몬은 지극히 미미한 정도야. 아직 억제제까지는 필요하지 않은 정도. 너에게만 반응한다는 그 특수한 페로몬은 모르겠지만.”

그제야 라우는 어깨에 들어간 힘을 조금 누그러뜨렸지만, 그렇다고 그에게서 풍기는 거칠고 불안정한 기운마저 잠잠해진 것은 아니었다.

선 채로 겉옷도 벗지 않은 채 그는 테이블 위의 담뱃갑을 집어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성급한 움직임으로 얕게 빨아들인 첫 모금의 연기를 짧게 훅 뱉어 내며 그가 중얼거렸다.

“자궁이 아니라, ‘트라이 존(Triangle zone)’이겠지.”

“민튼에서 성교육은 너만 받았냐?”

“네가 알파고 거기다 의사라면, 일상에서도 구분해서 사용해. 자기 외의 다른 성별에는 무관심하고 무지한 일부 알파 새끼들처럼 굴지 말고.”

소파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그의 맞은편까지 걸어간 인우는 가슴 앞에서 팔짱을 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지금 남한테 그런 설교나 하고 있을 입장이냐?”

턱을 들어 고개를 젖힌 라우가 연기를 길게 뿜으며 대답했다.

“너한테 설교를 못 할 건 뭔데?”

혀를 차는 인우의 앞으로, 코트를 걸친 커다란 검은 인영이 바짝 다가섰다.

“왜 말했어?”

“…….”

“나에게서 직접 듣는 게… 조금이라도 충격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라고 했잖아. 왜 말했어?”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지만, 억누른 목소리에서 새어 나오는 노기가 오히려 그의 분노의 강도를 말해 주고 있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회청색 눈동자는 평소보다 푸른빛이 두드러져 불꽃이 튀는 듯했다.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서며 입술을 강하게 비틀어 이죽거렸다.

“네 죄책감을 덜기 위해 사실을 말해 주고, 병원에 데려가서… 공포에 떨고 있을 애를… 혼자 그렇게, 다 끌어안고 검사를 받게 하고…. 그렇게 해서 서이현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었나?”

“이현 씨가 혼자 검사받은 게 마음에 걸려? 지금? 그 공포를 준 게 누군데!”

“최소한 병원에 데리고 가기 전에 넌 나에게 말해야 했어!”

라우의 검지가 인우의 가슴팍을 찔러 댔고, 인우는 그 손을 강하게 쳐내면서 그를 향해 턱을 쳐들고 덤벼들었다.

“말했으면? 이현 씨가 네 손을 잡고 병원에 가고 싶어 했을 거라 생각해?”

“…….”

라우가 혀끝으로 입술의 양옆 가장자리를 훑으며 인우의 두 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핏발 선 눈은 여전히 끓고 있었지만 타격을 입은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인우에게서 등을 돌린 그는 담배를 한 번 빨아들인 뒤 재를 털었다. 무성의하게 조준한 탓에 회색 재의 대부분이 재떨이를 벗어나 테이블 위에 흩어졌다.

인우는 그런 라우의 뒤로 붙어 서서 귓가에 이죽거렸다.

“이현 씨, 보고 있기가 정말 괴롭더라. 어떻게든 해 주고 싶더라고.”

비아냥거리기 위해 일부러 명랑한 말투를 사용하는 인우의 도발에 라우는 돌아보며 눈을 찌푸렸다. 마주한 인우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입매를 차갑게 비틀어 웃음을 쥐어 짜냈다.

“우리가 키스했던 거, 이현 씨가 얘기 안 했나 봐?”

“…….”

라우의 양쪽 턱의 근육이 단단하게 뭉쳐 움찔거리고, 눈 밑의 뺨이 경련을 일으켰다. 저도 모르게 꽉 말아 쥔 주먹 안에 담배가 말려 들어갔지만 뜨거움을 느끼지도 못한 채 그것을 내버리듯 던지고 인우에게 덤벼들어 목을 졸랐다. 순식간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인우는 핏발 선 눈으로 라우를 똑바로 노려보며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쳐 뜯어내려 애썼다.

그는 전혀 힘을 조절하고 있지 않았다. 인우가 코와 입을 동원해 컥컥거리기 시작하자 그제야 소파 위로 내던지듯 인우를 팽개쳤다. 당장이라도 다시 뛰어들어 가차 없는 폭력을 휘두를 것처럼 주먹을 꽉 틀어쥔 어깨가 크게 들썩거렸다.

“너 같은 새끼를… 그래도 친구라고….”

“마찬가지야!”

인우가 벌떡 몸을 일으켜 라우의 코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평소처럼 별생각 없이 가볍게 들이댔었다는 걸 부정하진 않겠지만. 또 모르지. 네가 관심을 보이는 것 같지 않았으면 진심이 됐을지도. 아니, 그런 사람을… 곁에서 계속 지켜보면서도 진심이 안 되는 게 오히려 힘들지 않았을까? 너만 눈이 있는 건 아니거든.”

“…….”

인우는 자신이 생각하는 서이현에 대해 격양된 어조로 떠들어 댔다. 어떤 요령도 부리지 않고 인생이 주는 모든 감각을 그대로 고통스럽게 통과하려 하는 이현의 순수한 진지함을 이야기했다.

대부분의 것들이 이미 갖춰진 환경에서 태어나 자란 덕에 필사적일 필요도 망가질 필요도 없이 여유 있는 척하며 살아왔던 자신이나 라우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특히나 더 그런 태도가 마음을 끌 수밖에 없음을 고백했다.

“그렇게 자신을 포장하고 방어하려는 보호막 한 겹 없이 솔직하게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는 사람 앞에서라면 나도 솔직해질 수 있을 것 같았어. 솔직해진다 해도 서이현은 비웃지 않고 들어 줄 사람이니까.”

말없이 어깨를 들썩이며 인우의 말을 듣고 있던 라우는 도망치듯 몸을 돌렸다. 테이블 위의 술잔을 잡기 위해 허리를 숙이려는 라우를 인우가 다시 거칠게 돌려세웠다.

“그래도 너니까! 누구에게도 흔들린 적도 집착을 보인 적도 없던 네가 자신을 허무는 것 같고, 끌려가는 것 같았으니까! 기쁘게 물러나서 지켜봤어.”

라우는 트렌치코트의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턱을 아래로 당기고 눈을 치켜뜨며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네가 나에게 서이현을 양보하기라도 했다는 건가? 네가 진지하게 뛰어들었다면, 서이현이 널 택했을 거라고?”

“그거야 모르는 얘기지.”

“…….”

“네가 일을 이렇게 만든 지금은 더더욱 알 수 없는 얘기가 돼 버렸고.”

인우는 눈썹을 치키며 비리게 웃어 보였다. 라우는 강한 햇빛 아래 선 것처럼 눈을 찌푸렸다.

“나한테 실컷 화풀이하고 싶어서 쫓아왔겠지만, 여기 왔을 때 이현 씨, 이미 알고 있었어.”

라우의 눈이 좀 더 가늘어졌다.

“슈슈에게 들었다고 했어.”

이번에는 다시 눈이 커졌고, 움츠렸던 어깨가 넓게 펴졌다.

“물론 슈슈는, 너와 이현 씨가 합의한 상태에서 함께 체인징을 진행하는 거라 생각하고 있었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인우의 말을 더듬어 보던 라우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복도를 향해 거실을 가로질렀다.

“어딜 가려고.”

곧장 따라붙은 인우가 험악한 힘으로 그를 돌려세웠고, 라우는 팔을 털어 단번에 그 손을 떨쳐 냈다. 포기하지 않고 인우는 이번엔 아예 그의 앞을 막아섰다.

“내가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이젠 슈슈 목이라도 조르게?”

“못 할 것도 없지.”

“정신 차려, 라우 위쿤. 네가 지금 누구에게 어떤 소리를 하든. 나를 반 죽여 놓고 슈슈를 족친다고 해도… 결국 이현 씨를 돌아서게 한 건 네 자신이라고!”

“…….”

“자기 외의 다른 성별에는 무지한 일부 알파 새끼들이라고? 네가 그 알파 새끼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그놈의 페로몬에 질질 끌려가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의 몸에다 한 짓을 생각해!”

미친 새끼.

한 자, 한 자 짓씹어 뱉듯 그렇게 덧붙이는 인우의 얼굴은 한순간 더 이상 친구도 뭣도 아닌 것처럼, 냉정한 거리를 둔 비린 경멸만이 가득 차, 뒷목이 서늘해지도록 차가웠다.

어쩌면 그 냉기에서 라우는 자신이 벌인 짓에 대한 세상의 객관적 판결을 체감했는지도 몰랐다. 말을 잃은 듯 잠시 두 손을 늘어뜨리고 무력하게 서 있던 그는, 헝클어진 눈은 그대로 둔 채 입술만을 움직여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최인우.”

“…….”

“지금까지 넌 운이 좋아서 골든이 되지 않고서도 품위를 유지하며 살 수 있었을 뿐이야. 내가 서이현에게 끌려갔던 페로몬의 강도까지 갈 것도 없어. 골든 오메가가 작정하고 방출하는 페로몬에만 노출돼도, 넌 그냥 상대가 손가락 하나로도 조종할 수 있는 장난감으로 전락할 뿐이야. 인간으로서의 존엄도 의지도 상실한, 그저 삽입하고 사정하고 싶어서 바닥을 기면서 애원하는… 단지 발기한 좆이 전부인 사정 기계.”

미리 준비해 놓기라도 했던 것처럼 그의 발언에는 막힘이 없었다. 어절마다 힘을 주어 또렷한 테두리를 부여해 이야기를 쏟아 놓는 그의 얼굴에서는 어느새 붉은 술기운이 완전히 걷혀 있었다. 이제는 오히려 창백해 보일 정도였다. 곤두선 눈의 핏발과 이상스러운 광채만이 그의 흥분을 대변하고 있었다.

인우의 앞으로 더 다가서는 라우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알파라는 게 무슨 대단한 계급이고, 페로몬이 초능력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는 놈들이 있을지 몰라도, 그게 페로몬에 지배된 알파의 본모습이야. 너도 다를 거 없고.”

깊은 속내는 꺼내 보이지 않은 채 일정한 범위 안에서는 서로가 혼자였던, 접근을 허락하지 않고 접근하려 하지도 않았던, 그동안 오래 유지해 왔던 거리가 완전히 허물어지고 있었다. 상대에게 손상을 입힐 가장 잔인한 말들로 치고받으며 서로를 침범하고 있었다.

“그래,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좀 전의 라우와 마찬가지로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고 서 있었던 인우가 얼굴을 쓸어내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운 좋게도, 그리고 지나치게 위험한 세계는 요령 좋게 피해 온 덕분에, 지금까지 페로몬에 호되게 당해 본 적이 없는 걸지도. 아니, 그게 사실이겠지. 딱 내가 방어하고 감당할 수 있는 선의 상대만 상대하면서… 성적 유희의 도구로 페로몬을 적당히 사용하면서… 알파가 뭐고 오메가가 뭔지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지도 않았으니까.”

후회스러운 과거를 더듬어 보듯 물렁해졌던 인우의 시선이 다시 단단하게 뭉쳐지며 라우를 마주했다.

“하지만 네 덕분에 정신 차렸지.”

“…….”

“수도승이라도 되는 것처럼 페로몬을 억제하며 사는 너를 볼 때도 페로몬에 대한 경각심이 별로 와닿지 않았었거든. 다르게 생각하면 페로몬은 하늘이 주신 선물인데, 오히려 왜 저렇게 답답하게 굴까 싶었지. 근데 페로몬에 지배된 네가 신세 망치는 걸 보면서 제대로 깨달았다.”

이번엔 인우가 라우의 앞으로 다가서며 그의 가슴팍을 찔러 댔다. 이죽거리는 입술에 독기가 가득했다.

“그래서? 무릎 꿇고 매달리기라도 했냐? 너는 모르고 있지만 네가 가지고 있는 강력한 페로몬이 골든 알파의 방어벽을 무너뜨리고 나를 홀려서 저항할 수가 없었다고. 압도적으로 사랑해서 벌어진 잘못이라고. 천하의 라우 위쿤이 그런 구질구질한 변명이라도 늘어놨냐고. 어?”

가슴을 쿡쿡 찌르며 빈정거리는 인우의 도발에 뒷걸음질 치며 순순히 당해 주고 있던 라우가 한순간 눈에 살기를 띠며 인우의 손가락을 쳐냈다.

“너 설마, 그 얘기까지 서이현에게 떠들어 대진 않았겠지?”

“무슨 얘기.”

“서이현에게도 페로몬이 있다는 얘기.”

목소리를 낮춰 이를 가는 라우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던 인우는 어깨를 털며 혀를 찼다.

“라우 위쿤, 뭐 하는 건데, 너? 꼴에 이현 씨 생각해 준답시고 그 얘긴 안 한 거냐? 이제 와서 그 얘기 하나 빼놓는다고 뭐가 달라져?”

“그럼, 이제 와서 그 얘기 하나가 뭐를 바꿀 수 있는데?”

“적어도 네가 개인적인 욕심을 충족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자신을 체인징한 거란 생각 때문에 느끼는 충격과 고통은 조금이라도 줄여 줄 수 있겠지.”

“…….”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라우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눈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라우에게만 작용한다는 자신의 정체불명의 페로몬에 대해 알게 된다면 이현은 일시적으로는 더 혼란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더불어 인우 역시 그것이 합의하지 않은 체인징을 정당화시켜 준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이현의 가장 큰 고통이 체인징 자체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벌인 죄의 무거움에 대한 것이라면, 그 고통을 아주 조금이나마 약화시킬 수 있는 진통제는 현재로서는 그것뿐인 듯했다.

모든 것을 떠나, 그에게는 유일한 희망(아무리 실낱같더라도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이 될 수도 있는 이현의 페로몬에 대해 고집스럽게 침묵을 지키려 하는 라우의 태도에 인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는 이현을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체인징에 어느 정도 자신의 책임도 있을지 모른다고, 그렇게 나누어 떠안으려 할 이현을 보호하고 싶은 것이다.

체인징 자체의 잘잘못을 떠나 지금 그의 이 선택까지 비웃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이현을 생각하는 마음이 크다면 처음부터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그랬냐고, 똑같은 내용으로 더 이죽거릴 반발심도 이젠 희미해져 버렸다. 활활 타고 난 뒤에는 사그라져 재가 되는 일만 남은 불길처럼.

“망칠 만큼 망쳐 놨으니까 이젠 이 일에서 손 떼. 당사자들끼리의 문제고, 네가 끼어들어 더 날뛰어 봤자… 그 애만 더 혼란스럽게 할 뿐이야.”

오랜 침묵 끝에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얘기한 라우는 등을 돌렸다. 현관으로 향하는 그를 뒤따르며 망설이다 인우가 말했다.

“슈슈한테 가지 마.”

“걱정 마. 안 죽여.”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심하게 대답하는 라우의 어깨를 돌려세웠다.

“너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고. 이현 씨 잃은 거로도 모자라서, 친구까지 다 잃고 싶어? 적어도 오늘 하루는 좀 참아. 머리 좀 식히라고.”

대답하지 않는 그가 불안해서 어깨를 쥔 손에 힘을 더하며 억지로 비린 미소를 쥐어짰다.

“서이현을 잃었으면 나머지 모든 건 의미가 없다고, 설마 라우 위쿤이 그런 소릴 지껄일 건 아니겠지?”

“누가 그래? 내가 서이현을 잃었다고.”

무감각한 얼굴로 그렇게 말한 뒤 인우의 손을 떨쳐 낸 라우는 지체 없이 현관을 나섰다. 말의 내용과 달리 아무런 확신도 자신감도 느껴지지 않는, 알맹이를 뺏긴 껍데기처럼 텅 빈 목소리였다.

■ ■ ■

어부는 되기 싫어도, 배 위에서 바로 썰어 먹는 회 한 점에 소주 한 잔은 평생 포기 못 한다고. 이한은 자주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었다.

그 맛을 본 사람이라면 동의할 수밖에 없는 얘기였지만, 그보다도 이현은 귀항하는 어선의 뱃머리에 서서 멀리 가물거리며 가까워지는 항구를 바라보며 마시는 믹스커피 한 잔이 더 각별했다. 노동으로 피로해진 육체에 번지는 쌉싸름한 단맛의 위로와 종이컵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집중하고 있으면, 뭍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잠깐이나마, 이렇게 저항하지 않고, 파도가 흔드는 대로 흔들리며 사는 삶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었다. 할아버지와 큰아버지처럼.

만선이랄 것까지는 아니어도 귀항하는 길에 ‘바다가 씨가 말랐다’는 할아버지의 욕설 섞인 거친 푸념을 듣지 않아도 될 만큼 어획량은 넉넉했다. 가을이 깊어 가는 시기는 특히 국산 생물 고등어가 고소하게 기름이 오를 때라 인기가 좋았다. 대형 선박이 아니더라도 신경 써서 부지런을 떨면 제법 살림에 도움이 될 만큼 재미를 볼 수 있었다.

우리 배가 만선이면 남의 배도 그렇고, 많이 잡혀 봐야 결국 값이 떨어져 이러나저러나 먹고 살기 힘들기는 한가지라고 하면서도, 커피를 소주처럼 삼키며 중얼거리는 할아버지의 얼굴은 평소보다 피어 있었다.

“비리비리하던 놈이 제법 쓸 만하게 됐어.”

바다의 짠내와 봐주지 않는 매운바람이 주름 사이사이에 배어 있을 것 같은 할아버지의 억센 얼굴이 이현을 돌아보며 웃었다.

“서울 가서 그림 그렸다기에 더 비실해졌겠구나 했더니.”

“현이야 살집이 없어 그렇지 원래도 다부지기는 했죠. 손끝도 야무지고.”

저장고 덮개에 걸터앉아 자잘한 도구들을 정리하고 있던 큰아버지가 거들고 나섰다. 이한처럼 뱃일에 정통하지 않아, 그물을 끌어 올리는 일이나 그물에서 분리해 낸 고기를 저장고에 던져 넣는 작업처럼 특별한 요령이 필요 없는 일을 조금 도운 게 다였지만, 기대치가 낮아서 그런지 평가가 후했다.

“그럼 제가 배 탈까요?”

“쓸데없는 소리.”

나름대로 농담이라고 해 본 말이었지만, 이한에게는 그렇게 배를 타기를 강요했던 할아버지는 단칼에 입매를 굳혔다.

“그림 그려서 집안 빚을 그만큼 갚을 만큼 재주가 되는 놈이 배는 무슨 배. 제 애비보다야 크게 될 놈이지.”

항구 쪽을 힐끔거리며 그렇게 뱉은 할아버지는 피우던 담배의 불씨를 두툼한 손끝으로 눌러 끄고 조종실 안으로 슥 들어가 버렸다. 그런 할아버지의 등을 좇다 전방을 바라보니 부두에 익숙한 인영 하나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마을을 떠나기 전, 가끔씩 이현이 항구에 나와 배를 기다리곤 했던 정박지에 아버지가 나와 있었다.

“드러내 놓고 티는 안 내지만, 너 왔다고 요즘 기분이 좋은 것 같더라. 사람 많은 항구에는 웬만해서는 안 나오는 놈인데.”

슬슬 정박을 준비하며 밧줄을 풀어내던 큰아버지는 이현의 어깨에 툭 손을 얹으며 흐릿하게 웃어 보였다.

바쁘게 움직이는 뱃사람들 사이에서 점퍼 주머니에 깊이 손을 찌른 채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은, ‘기분이 좋은 것 같다’는 큰아버지의 말과 달리 어떤 균열도 없이 무표정했다.

하지만 이현은 아버지가 어딘가 모르게 이전과는 달라졌다는, 적어도 아버지와 관련해서는 그 비 오던 새벽, 아버지에게서 돌아서서 이한을 따라 대문을 나섰던 것이 아무 쓸모도 없는 철없는 가출이 돼 버린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까지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어판장으로 옮기는 건 됐으니까, 그만 가 봐.”

“그래도… 양이 많은데.”

“평생 둘이 해 온 일인데, 네 손 하나 빈다고 쩔쩔매기라도 할까 봐?”

큰아버지가 별 싱거운 소리를 다 한다는 듯 피식 웃으며 이현의 뒷머리를 문질렀다. 멋쩍게 웃은 뒤 부두로 제일 먼저 뛰어 올라간 이현은 큰아버지가 던져 준 밧줄을 받아 콘크리트 기둥에 단단히 매듭을 지었다. 며칠 해 본 일이라고 자세가 조금은 그럴듯해졌지만, 연한 손바닥에 밧줄이 쓸릴 때면 여전히 쓰라렸다.

여행하기 좋은 시기라 평일임에도 관광객들이 제법 몰려 부두 주변은 평소보다 더 북적거렸다. 어획물을 어판장으로 옮기느라 서두르는 뱃사람들이, 낭만적인 저녁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들에게 길을 비키라며 불평하는 거친 소리마저도 부두의 일부로 녹아 있었다. 인구가 넘쳐 나는 서울에서도 느껴 보지 못했던 활기와 삶에 대한 생생하고 끈질긴 집착이 갓 잡아 올린 생물처럼 곳곳에서 펄떡거렸다.

아버지와 함께 어판장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부두를 빠져나가던 이현은 문득 자신이 생각보다 이곳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좋아하는 쪽에 더 가까울지도 몰랐다.

권태나 무기력에 빠져 소극적 죽음을 자처하는 사람에게는 혀를 차고 손가락질을 해도, 사람이라면, 살고자 하는 간절한 몸부림에 대해서는 함부로 욕할 수 없는 법이었다.

손을 놔 버리고 물러서서 그깟 체면을 챙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처절하게 달려드는 편이 나았다. 그것은 구질구질함이 아닌 생에 대한 절박함이었고, 그것이야말로 무채색 침묵 속에서 자신이 갈구했던 강렬하고 다채로운 살아 있는 삶의 색이었다.

침묵이 지긋지긋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헛된 평화에 실금 같은 균열이라도 만들어 보려고, 이곳을, 아버지 곁을 떠나기로 했던 게 아니었던가.

그런 생각으로 바라보니 시선이 닿는 구석구석이 이전과는 다르게 보였다. 비린내 진동하는 칙칙하고 질척한 진흙탕 같았던 어판장이 폐와 눈을 찌르는 싱싱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그저 험하고 무뚝뚝하게만 보였던 사람들의 표정도 다채롭고 강렬했다. 무너지는 하늘 아래 선 것처럼 소리를 지르다가도, 걱정거리 하나 없는 양 웃어 젖히는 사람들.

이곳은 그대로인데, 내가 달라져서 돌아온 것이겠지.

아버지보다 한발 앞서 소리 없이 쓰게 웃으며 분주한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던 이현의 눈과 걸음이 문득 멈추었다.

이현도 얼굴을 알고 있는 조합장과, 언제나 그렇듯 심각한 얼굴로 얘기를 나누고 있는, 임 선생이었다.

그 역시 이현을 발견하고는 마주 선 조합장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고정하며 잠시 눈을 갸름하게 떴다.

라우의 말대로 그는 얌전했다.

이현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접했을 것이 분명한데도 며칠째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이현 역시 특별히 그를 신경 쓰지도 않았다. 지금 통과하고 있는 이 일의 고통에 비하면 임 선생에 대한 염려 따위는 우스웠다. 혹시라도 그가 물리적 협박을 가해 온다 하더라도 무서울 게 없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 그가 자기를 건드리려 한다면, 분풀이할 대상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잘됐다고, 어디 한번 그래 보라며 악을 쓰고 덤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똑바로 눈을 마주한 채 움직이지 않는 이현을 씁쓸하게 바라보던 임 선생은 먼저 눈을 피하며 조합장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가요, 아버지.”

이현 역시 옆에 와서 선 아버지의 등을 밀면서 어판장을 벗어났다.

이곳에 온 지 사흘째.

이현은 심심하다는 핑계로 사흘 내내 바다에 따라 나가고, 뭍으로 돌아오면 저녁 식사 전에 아버지와 산책을 나갔다. 아버지의 산책에 이현이 뒤를 따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아버지는 뒤처지는 이현을 기다려 준다거나 거리를 확인하려 뒤를 돌아보는 법도 없이 묵묵했지만, 그렇지만 거기에는 분명 이전에는 없었던 균열, 미세한 실금, 변화의 징조가 있었다. 오늘 아버지가 부두에 나와 있었던 것도 그 일부라고 할 수 있었다.

마을의 중심을 가로지른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집이 속한 북쪽 마을의 반대편, 임 선생의 집을 비롯한 번듯한 별장과 저택이 들어선 남쪽 언덕까지 쉬지 않고 발을 놀렸다.

점퍼 주머니에 두 손을 푹 찌르고 고개를 숙인 채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돌리지 않고, 풍경을 감상하는 법도 없이 걷는 행위에만 집중한 아버지는, 느긋한 걸음으로 족히 한 시간은 걸릴 가파른 오르막을 30분 만에 거뜬히 주파하였다.

항구에서 가까운 북쪽 마을보다 훨씬 높은 지대에 위치한 덕에 남쪽 언덕의 정상은 탁 트인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마을 주민 중에는 일부러 여기까지 올라와 ‘지긋지긋한’ 바다를 감상하려는 ‘한가한’ 사람이 없었다.

관광객들을 위해 절벽 가장자리를 따라 둘러놓은 난간 주변으로 네다섯 개의 벤치가 멋없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어디서 부르는 목소리라도 따라가는 사람처럼 허겁지겁 절벽 끝에 오른 아버지는 그 벤치에 앉아 적게는 30분에서 많게는 1시간을 멍하니 앉아 있곤 했다.

뭔가를 던져 보기는 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버지를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처음에 이현은 그저 아버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곧 알게 되었다. 어쩌면 아버지야말로 무언가를 털어놓기에 가장 적절한 상대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들은 말을 누구에게 옮길 리도 없을 뿐 아니라, 어떤 이야기를 듣더라도 비난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모두가 원하는 이야기 상대였다.

서울에 도착해서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을, 어떤 구간은 생략하고 어떤 부분은 자세하게 풀어 가며 이현은 두서없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까지.

겉으로는 아무런 반응도 없지만 속에서는 아버지가 어떻게 생각할까, 처음엔 말을 고르고 탈락시키느라 속도가 붙지 않았지만… 자신이 골든 알파인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확인한 뒤에는 좀 더 과감해질 수 있었다.

한 실장을 다시 만난 이야기와 유니, 주한에 대한 이야기. 라우의 집에서 마주친 <소외>와, 수키킴을 만나게 해 주었던 홍콩 출장, 라우가 모래와 이한의 탈출을 도와주었던 이야기를 지나… 어제는 시카고와 보스턴 여행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가끔씩… 현실에서 겪은 체험보다 더 아련하게 그리워지는 꿈을 꿀 때가 있었다. 그런 꿈을 더듬어 볼 때 으레 그렇듯 이현은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라우를 이야기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빛나는 그의 당당한 여유와, 그 여유를 버려두고 자신을 위해 폭력을 사용한 뒤 그가 보였던 애처로운 혼란, 그리고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아 거절의 말을 돌려주긴 했지만…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만들었던 결혼 이야기까지.

그때 그는 어떤 마음으로 결혼을 얘기했던가.

분명한 것은 당시의 자신이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엉킨, 감당이 되지 않는 거대한 문제를 껴안은 사람이 떠올릴 만한 절박한 선택이었다는 사실이었다.

해가 등 뒤의 산 너머로 기울어질수록 점점 검어지는 먼바다를 내다보는 아버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이현은 허벅지 위에서 슬그머니 주먹을 말아 쥐었다. 오늘은 그 이후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였다.

저녁 바닷바람이 사정없이 온몸을 흔들어 댔다. 점퍼가 펄럭거리고 머리카락이 멋대로 휘날렸다.

“전 지금, 아버지에게 짐을 주는 거예요.”

“…….”

“제가 혼자 지고 가야 하는 이야기의 무게를… 아버지에게 떠넘기는 거라구요. 아버지가 미워서, 아버지도 무거워지고… 힘들어졌으면 해서요.”

“…….”

“그래도 그게… 서로 아무것도 나누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요?”

아버지의 반응을 돌려받지 못하면 괴로울 것 같아서, 말을 거는 것을 포기하고 지내 왔었지만… 일단 얘기를 시작하고 나니 그것은 생각만큼 고통스럽지 않았다. 왜 그렇게 겁을 냈나 싶을 정도로.

반응하지 않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이현은 혀로 입술을 축였다.

“내가….”

목소리가 떨렸다.

“오메가가 되어 가고 있다고 해도… 그래도 아무 말도 안 하실래요?”

먼바다를 향하고 있던 아버지의 시선이 절벽 아래의 바위에 와서 부딪는 파도에까지 가까워졌지만, 그 외 다른 반응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침묵을 대면하고 나니 오히려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허벅지 위에서 오른손 손바닥을 의미 없이 꾹꾹 누르며 이현은 자신을 조소했다.

“절반은 오메가래요. 바꿔 말하면 절반은 오메가가 아닌 거죠. 절반은 베타고, 나머지 절반은 베타가 아닌 거구요….”

스스로의 말이 궤변처럼 느껴져 이현은 또 한 번 힘없이 피식거렸다.

눈앞의 저 바다를 건너 그와 함께 다른 대륙까지 건너갔었다는 사실이, 그와 나눈 순간순간의 모든 기억과 감정들이… 지나치게 상상에 심취한 끝에 진실이라 믿게 된 허무맹랑한 거짓 같았다.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이번엔 아버지가 아닌 이현의 눈이 먼바다 끝 수평선을 향했다.

“그 사람이 그랬어요, 아버지….”

“…….”

“제가 태어나서 처음… 사랑하게 된 사람이요….”

눈앞이 서서히 흐려지고 있었다. 고인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턱을 들었지만 목소리의 떨림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침착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고, 마주한 그의 얼굴 앞에 분노가 일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분노뿐이었더라면, 더 이상 그의 꼴도 보기 싫다는 마음의 냉각만이 명확한 결론이었더라면… 차라리 덜 괴로울 것 같았다.

“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어떤 해명이나 변명도 없이, 바라보는 것마저 감히 죄스럽다는 듯 조심스럽게 자신의 얼굴을 더듬으며, 거대한 진실 앞에 겸허히 굴복하듯, 사랑한다는 한마디를 겨우 힘겹게 꺼내 놓았던 그의 표정과 목소리가 잊히지 않았다.

“용서하고 싶은데… 용서할 수가 없어서… 용서를 못 하겠는데도, 그 사람을… 용서하고 싶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가장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 가장 견고한 침묵으로 벽을 쌓아 자신에게서 분리해 두었던 사람에게, 가장 절실한 용서에 대해 털어놓고 있다는 현실이 어딘가 우습게 느껴졌지만… 이번에는 조소조차도 할 수 없었다.

반응하지 않는 아버지를 곁에 두고 이현은 눈을 감았다. 고개를 쳐든 탓에 눈물방울이 관자놀이로 귓가로 흘러내렸다. 눈가에서는 데일 듯 뜨거웠던 눈물은 귓가로 흐를 때쯤에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 ■ ■

8년 전 무대에서 은퇴한 후 현재는 안무가이자 교수로 활동 중이라는 50대의 모델은, 현역 무용가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움직임이 유려했다.

스튜디오 내에 마련된 열 평 남짓한 배경 위에서, 그녀는 입체의 공간에 선을 그리고 점을 찍고 상승과 하강, 환희와 절망을 그려 나갔다. 말 그대로 어떤 소품이나 도구의 도움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육체 하나로.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의 육체에 대한 완벽한 주인이었고, 그녀가 공간 속에 풀어 놓는 지배력과 장악력에 모두가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육체에 제한된 것일지라도, 인간이 스스로를 온전히 지배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쩌면 타인보다도 더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현을 만난 이후의 자신에 대해서만큼은 라우는 그것을 인정해야 했다.

작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라우는 스태프들과 슈슈의 뒤편, 조명이 닿지 않는 벽에 등을 기댔다. 흡입력 강한 영화의 스토리에 몰입한 관객처럼 숨을 죽이고 팔짱을 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녀에게서, 그녀의 호흡을 담아내기 위해 자세를 낮추고, 촬영용 계단 위로 올라서고, 바닥에 엎드리며 또 다른 호흡을 만들어 내는 슈슈에게서. 그렇게 두 사람의 호흡이 엉키고 멀어지며 만들어 내는 또 하나의 리듬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에너지가 대단하죠? 최근에 안무하신 작품인데 1시간 20분 정도 되거든요. 오늘이 세 번째 촬영이에요.”

라우의 곁으로 다가온 슈슈의 조수가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한창 곤히 자고 있을 때 누군가 억지로 흔들어 깨운 것처럼, 라우는 몰입에서 빠져나와 그의 말에 반응을 보이기가 쉽지 않았다.

“대표님께서 가장 잘 아시겠지만, 작가님이… 전시 일정에 맞추려고 작업을 서두르고 그러시는 분은 아니잖아요. 그래도 두세 점 정도만으로도 괜찮다고 하시면, 그건 어떻게 맞출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는 라우의 방문이 하반기 합동 전시회 때문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시카고 다녀오신 뒤에 한동안은 쉬실 줄 알았는데, 요즘 열의가 대단하시거든요.”

그동안 슈슈는 주로 여러 명의 모델을 동원해 미리 자신이 준비한 설계대로 포즈를 제안하는 방식을 택해 왔었다. 이번처럼 단 한 명의 모델을 상대로, 모델이 표현하는 세계를 담아내는 작업은 처음이었다. 한 장의 사진 안에서 작품의 존재감이나 입체감을 드러내는 데 있어 이전보다는 더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슈슈에게 열의와 영감을 주었는지는 몰라도, 라우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그는 내성적이고 유약한 청년이라는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파인 아트(Fine Art) 사진가로서 착실하게 도전과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대표님 떠나시기 전에 마지막 전시회니까 아마 꼭 출품하고 싶으신가 봐요.”

라우는 팔짱을 풀어 팬츠 주머니에 손을 찌르며 피식 웃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슈슈와 벌써 몇 년을 함께 일해 온 조수는 의외의 반응에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라우를 힐끔거렸지만, 겉으로 드러내 묻지는 않았다.

1시간이 넘는 작품이 끝이 나고, 무용수는 어딘가로 막 달려 나가려는 듯한 상태에서 멈춘 자세로 어깨와 등을 약하게 들썩거리며 호흡을 다스리고 있었다. 흔히 생각하는 무용의 마무리 동작과는 거리가 있는 자세였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바닥나지 않은 운동 에너지가 이후에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에 대해 상상과 기대를 자극하는 면이 있었다.

무용이 끝난 후에도 얼마간 더 위치와 자세를 바꿔 가며 셔터를 누른 슈슈가 모델에게 다가가 수고하셨다는 말과 함께 어깨에 손을 얹는 것으로 촬영은 끝이 났다.

감독의 오케이 사인 후에도 장면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는 배우처럼, 무용수도 슈슈도, 한동안 들썩거리는 감정을 애써 자제하기 위해 말을 아끼는 분위기였다.

라우는 자신을 발견하고 멈칫 얼굴을 굳히는 슈슈에게 개인실에 가서 기다리겠다는 신호를 해 보인 후 걸음을 옮겼다.

슈슈가 방으로 온 것은 30분 정도가 지난 후였다.

“꼴이 그게 뭐냐. 대표님 무슨 일 있는 거냐고, 우리 스태프들 걱정하더라.”

방의 안쪽, 소파에 앉은 라우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입구 쪽 책상 앞에서 사진집 더미를 뒤적거리며 슈슈가 말했다.

지난 며칠.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것은 물론이고, 거울 앞에 서서 매무새를 신경 쓴다는 자체가 우습고 무의미하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처참한 수준으로 파괴된 내면에 비하면 외양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라우는 슈슈의 얘기에 반응을 생략한 채 지난 며칠간 계속해서 자신을 괴롭혀 온 질문을 꺼내 놓았다.

“그날 무슨 얘기를 했고, 서이현이 어떤 반응을 했는지, 전부 말해 봐.”

손을 놓고 라우를 돌아보는 슈슈의 무표정한 얼굴에 서서히 조소가 떠올랐다.

“네가 그 얘기를 하고 싶어 할 줄은 몰랐는데? 너한테 아주 불리한 얘기 아닌가?”

“서이현과 나의 관계에서라면 그렇겠지만, 너와의 관계에서 그게 왜 나에게 불리한 얘기가 되지? 오히려 너에게 불리한 얘기라면 모를까.”

라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슈슈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왜 말했어?”

“넌 왜 이현 씨한테 말 안 했어?”

슈슈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울 정도로 라우의 몸은 크고 이글거리는 푸른 눈이 내뿜는 분위기는 고압적이었지만, 슈슈는 오히려 충돌을 기다렸다는 듯이 거리를 좁혀 바짝 다가섰다.

“난 당연히… 네가….”

한순간 날카로운 빛을 뿜었던 슈슈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한숨을 내쉰 뒤 이마를 긁으며 한자리를 맴도는 슈슈는 겁에 질린 사람 같았다.

“이현 씨한테 말도 없이 그런 짓을 벌이고 있을 거라고… 어떻게 내가… 상상이나 했겠어?”

라우는 아랫입술을 물어뜯는 슈슈의 어깨를 붙잡아 돌려세웠다.

“그런… 타인의 사적인 얘기, 알고 있더라도 입 밖에 내지 않는 놈이잖아. 근데 왜… 그날은 그렇게 안 하던 짓을 했던 건데?”

어깨를 으스러뜨릴 것처럼 힘을 주는 라우의 손을 쳐낸 슈슈는, 본의 아니게 비밀을 발설해 버리게 된 자체에 대해서는 유감을 가진 듯 시선을 끌어 내리며 목소리의 독기를 낮추었다.

“최종적인 고독을 내보일 수 있는 상대를 만나서 다행이고, 그게 이현 씨여서, 넌 억세게 운 좋은 놈이라고…. 그 얘기 하다 나온 말이야. 고의적으로 비밀을 폭로하려고 떠든 게 아니라고.”

“…….”

빈주먹을 그러쥐는 라우의 어깨가 낮아졌다. 책임을 묻고 절망을 쏟아부을 대상이 사라진 것 같은 허탈감에 헛웃음이 새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무너진 관계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재건해야 할지 막막하고… 스스로가 좆같아서. 일을 망친 건 슈슈라고, 그에게 모든 원망을 퍼부을 생각만으로 버텨 왔던 지난 며칠의 광기가 몸에서 스르륵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사진집과 포트폴리오, 알아보기 힘든 악필로 휘갈긴 메모 등이 뒤섞인 어지러운 책상 위를 내려다보고 있던 슈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니. 정정할게. 네가 이현 씨와 체인징을 합의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았더라도, 얘기했을지도 모르겠다.”

차분하게 들릴 정도로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추측한 슈슈는 책상 위에서 책 한 권을 집어 라우가 있는 방향으로 던지듯 내려놓았다.

“너야말로 이런 식으로 할 수밖에 없었어?”

라우는 동요 없는 눈으로 덤덤하게 책을 내려다봤다. 10월 호 미술 잡지였다.

“부탁하지 않겠다고,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지? 그럼 그건 더 이상 너와는 관계가 없는 나와 홍선유 사이의 일 아닌가?”

“그걸 어떻게 이 일하고 비교를 하지?”

“뭐가 다른데?”

라우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혀를 차며 아랫입술을 혀로 축였다.

“아, 그래. 다르지. 훨씬 끔찍해.”

“…….”

“홍선유가 나에게 한 짓보다 몇 배는 끔찍하지.”

“넌 서이현과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을 다 알지 못해.”

비아냥거림을 끊어 내려는 라우의 단호한 발언에 슈슈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얼굴은 찌푸리고 있었다.

“라우 위쿤. 너 그런 소리 하는 거 보니까 진짜 사랑에 빠졌구나? 듣기 싫을 정도로 직설적이고 현실적이긴 하지만, 그만큼 틀린 소리를 하는 놈은 아니었는데. 근데 너도 사랑에 눈이 멀고 나니까 별수 없네.”

“…….”

“그런 일을 벌여 놓고… 이현 씨와 너 사이에 있었던 일을 나는 다 모른다고?”

슈슈의 입술이 흉하게 비틀렸다.

“그럼 넌? 너는 홍선유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을 다 알고?”

“…….”

가볍게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던 라우는, 뭔가를 감추려는 것처럼 곧바로 꾹 다물었다.

슈슈와 홍선유, 자신과 이현. 서로 완전히 질이 다른 일이라고 확고하게 그어 두었던 선이, 구둣발로 한 번 슥 문지르자 맥없이 흐릿해져 버린 기분이었다.

손바닥으로 얼굴 아래를 거칠게 문지르며 몸을 돌린 라우는 책상의 가장자리에 손을 짚어 몸을 기댔다. 무대의 대기실처럼 책상 위로 길게 붙은 거울 속에서, 구겨진 옷을 입고 면도도 제대로 하지 않은 남자가 지저분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난 홍선유가 한 짓을 다 용서한 것도 아니고, 거기에서 전부 회복된 것도 아니야. 다시 만나서 어쩌고 싶은 건 더더욱 아니고. 단지… 많은 시간이 지났고, 이젠 나도 그 여파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과거를 바라볼 수 있게 됐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슈슈가 거울을 통해 라우에게 시선을 맞췄다.

“홍선유 역시 고통스러워했다는 걸 이젠 알 수 있으니까.”

라우는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떨구었다. 평소와 달리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이 이마와 눈을 가리며 무겁게 떨어져 내렸다. 책상을 짚은 손등 위에 사납게 불거진 핏줄과 뼈마디를 내려다보는 라우의 미간이 바짝 좁혀졌다.

이현을 체인징하는 동안 자신이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는 것.

오메가가 되어 가며 반응을 보이는 이현을 의식할 때마다 알파로서의 자신의 피가 기쁨으로 날뛴 것까지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그 외 대부분의 절대적인 시간은, 바늘이 촘촘히 박힌 벽이 사방에서 거리를 좁혀 오는 출구 없는 방에 갇힌 것 같은 고통과 공포에 시달려 왔다는 것.

이현이 그것을 참작해 주기만을 기대하고 있는 한, 유사한 이유로 과거의 무게를 덜어 내려는 슈슈를 막아설 명분이 없었다.

거울 속에서 뒤로 멀어진 슈슈가 반대쪽의 커피메이커 앞으로 걸어가 반쯤 채워진 유리 주전자에서 커피를 따르며 말했다.

“그때는 내 고통에 함몰돼서 그것밖에는 볼 수 없었어. 그렇게 해야만 내가 편할 거란 생각에, 선유의 고통은 스스로 자초한 당연한 죗값이라고… 외면하려고 했었지만… 그게 아니더라.”

라우는 눈이 부신 사람처럼 이마를 찌푸린 채 눈을 치켜뜨고 거울 속에서 슈슈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나를 속이는 동안 분명 걔 역시 나만큼, 어쩌면 나보다 더 오래 고통스러웠을 거라는 사실을 마주하고, 그 고통의 깊이를 상상해 보는 게… 냉정을 되찾고 나를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됐으니까. 결국, 나만 바보였고, 나만 손상을 입었고, 나만 힘들다는 생각이 사람을 괴롭게 하는 거 아니겠어?”

이쪽으로 돌아선 슈슈는 쓰게 웃으며 라우에게도 커피를 권했고, 라우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필요한 건 카페인보다는 알코올이었지만, 슈슈의 작업실에는 술이 상비되어 있지 않았다.

“네가 모르고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우리 둘 사이의 일들…. 다른 사람과 섹스하고 나를 기만했지만, 그게 우리 사이에 있었던 전부는 아니었고, 한때는 그 일 때문에 그 외 모든 것들도 거짓으로 치부하며 증오하려 했지만… 오래 가지 못했어. 그건 사실이 아니라는 걸… 깊은 곳에선 알고 있었으니까.”

머그의 표면을 쓰다듬으며 차분히 얘기하던 슈슈는 커피로 입술을 축인 후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런 짓을 벌이는 동안에 홍선유 역시 죄책감과 불안으로 내내 고통스러웠을 거라는 걸…. 순간적 쾌락을 좇았지만, 거부하지 못한 그 짧은 쾌락 때문에 그 외 모든 시간을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는 걸, 지금은 아니까. 한때 그래도 서로의 바닥까지 내보이고 보듬었던 상대로서… 어떻게든 상황을 극복해 보려는 발악을 모른 척할 수가 없는 것뿐이야.”

이번 일을 계기로 자신의 위치를 받아들이고 정신을 차리든지, 더 추한 타락으로 완전히 망가지든지. 이후의 선택은 홍선유의 몫이겠지.

그렇게 덧붙인 슈슈는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신 후 담담한 시선과 목소리로 라우에게 말했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네가, 감히 이현 씨가 너를 용서해 주기를 바라진 않겠지.”

“…….”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이현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그럴듯한 말은 전혀 떠오르지 않아도, 슈슈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화풀이를 할 독한 말들은 넘쳐 나서… 홍선유의 서울 활동을 방해한 일에 대한 복수심으로 슈슈가 고의적으로 발설했다는 사실만 확인하고 나면, 벼려 왔던 모든 날 선 말들을 퍼부을 작정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자신을 지탱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직 할 일이 많았다. 무너져 모든 것을 놓아 버리기엔 일렀다. 타인을 원망하는 힘으로라도 버텨 내며 이현을 되찾을 방법을 쥐어 짜내야만 했다.

하지만 무기를 꺼내 보기도 전에, 상대가 가진 무기를 본 것만으로도 전의가 무너졌다. 슈슈가 하는 말들은 기막히게도 또렷하게 자신의 현재를 비추고 있었다. 슈슈가 홍선유의 고통을 짐작해 과거의 무게를 덜어냈듯 이현이 자신에게 관용을 베풀어 주길 간절히 바랐으니까.

그러나 최악인 점은, 그런 슈슈마저도 홍선유를 완전히 다 용서한 것도 아니며, 홍선유와 새롭게 시작해 볼 마음 따위는 전혀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제는 자신과 관계없는, 멀어진 과거였기에 가능한 관대함이었다.

더 이상 비난의 기색조차도 느껴지지 않는 슈슈의 차분한 얼굴을 보며, 믿기지 않는 현상이라도 목격한 사람처럼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은 라우는 책상을 짚었던 손을 떼고 까끌한 아래턱을 짓이기듯 넓게 문질렀다.

“내가 한 짓이 홍선유가 한 짓보다 더 끔찍하다고 했지? 홍선유를 용서한 너조차도 그놈과 다시 시작해 볼 생각은 없다고.”

“…….”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서이현은 날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안심해라.”

벗겨 낸 쓸모없는 껍질을 내버리듯 그렇게 말한 라우는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짧게 욕설을 뱉었다.

지난 며칠, 원망할 수 있는 모든 상대를 끌어와 탓해 봤지만, 가장 증오하는 건 결국 고스트이자 알파인 자신이었다.

처음부터 그게 싫었다. 알파인 것도 고스트인 것도, 고귀한 특별함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게 그렇게 귀한 특권이라면, 원하는 다른 놈들에게 갔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아무 소용도 없는 불평과 자기 부정을 몇 번이나 반복했었다.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여 갈무리할 것인지, 겨우 정리가 됐다고 생각했던 소년 시절 이후, 다시 또 그 문제를 파헤쳐 끄집어 낼 때가 올 줄은 몰랐다. 그것이 타인을 원하는 갈망 때문일 거라고는 더더욱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네가 한 짓이 홍선유가 한 짓보다 더 무겁다는 생각은 변함없지만… 이현 씨는 내가 아니잖아. 난 너희 둘 사이의 일을 다 모른다며. 그 자신감은 어디 간 건데?”

입술을 잘근거리며 재킷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는 라우를 눈치챈 슈슈가 한숨을 쉬며 다가와 말없이 재떨이를 앞에 놓아 주었다. 슈슈는 비흡연자였지만, 흡연자인 방문객들에게까지 철저한 금연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담배에 불을 붙인 라우는 급하게 첫 모금을 빨아들였다.

“파리로 가겠다더군.”

“파리?”

그리고 ‘더 핸즈’의 제의에 대해 슈슈에게 이야기했다. 이현에게 제안이 간 것을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모르는 척, 그를 자신에게 붙잡아 두기 위해 뉴욕 지점 진행을 서두르는 데에만 혈안이 돼 있었던 자신의 폭주에 대해서도 털어놓았다.

파괴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뿐임을 알면서도 어쩌면 한번 발을 들인 이상 앞으로 나아가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35퍼센트와 50퍼센트가 뭐가 다르냐던 이현의 외침처럼, 이미 시작해 버린 시점에서 언제 말을 하든 일의 무게는 가벼워질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어쩌면 이현이 먼저 사실을 알고 자신을 찾아왔을 때… 올 게 왔다는, 드디어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다는, 처벌을 받아들이겠다는 겸허한 체념이 한구석에 존재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이현을 놓을 용기는 없으니 누군가 대신 자신을 멈춰 주기를. 박살을 내서라도 이 폭주를 중단시켜 주기를 기다려 왔었는지도….

이야기를 들은 슈슈는 착잡한 표정으로 여러 번 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어깨의 힘을 누그러뜨린 뒤 머그를 내려놓고 라우의 등 뒤로 다가와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그게… 이현 씨에게 좋은 기회인 건 부정할 수 없지만… 네가 열어 줄 수 있는 기회들도 그보다 부족하진 않아.”

“정세인.”

“…….”

“정세인.”

“그래, 듣고 있어.”

돌아서서 슈슈를 마주 본 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꽉 다문 입술과 묽어진 눈빛이 체념을 선택한 것처럼 보였다.

“나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서이현은 연인에게 받는 도움을 반기는 타입이 아니야. 각자의 삶을 희생하고 함께 있는 것만이 연인 사이에 있어 최상의 선택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건 알아.”

“다시 그림을 그리는 데 내가 도움을 줬다고 해서, 그가 내 옆에 팬텀에 남아 있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애초에… 도움을 주는 척, 그를 채무로 묶어 둘 수 있다는 저열한 생각을 했던 건 나지만.”

씁쓸하게 피식거린 라우는 담배를 깊숙이 빨아들이며 슈슈에게서 몸을 돌렸다. 짧아진 담배를 끄고, 담뱃갑을 집어 새로운 담배를 한 개비 손에 쥐고 만지작거렸다.

“라우 위쿤. 나를 속일 순 없어.”

거울을 통해 슈슈를 힐끔 쳐다보며 입술에 담배를 물었다. 마른 입술의 껍데기가 필터에 달라붙었다.

슈슈가 다시 한번 라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번에는 아귀에 힘이 실려 있었다.

“이현 씨는 네 평생의 사랑이야. 실수…라고 하기엔 큰 잘못이 있었지만, 네 진심을 전하려 계속 노력한다면, 이현 씨라면… 마음을 움직일 거야. 너, 이현 씨 파리로 보내면 안 된다고.”

담배에 불을 붙이려던 라우가 귀찮다는 듯 슈슈의 손을 쳐내며 돌아섰다.

“왜? 나한테 서이현이 필요하니까? 넌 내 평생의 사랑이고, 네가 없으면 난 그저 어디에도 발붙이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떠도는 유령일 뿐이니까, 날 용서하고, 스스로의 가치로 쟁취한 기회마저 포기하고… 내 옆에서 오메가가 되는 운명을 얌전히 받아들이라고. 그런 말을 하라는 건가?”

“…….”

“네 말대로, 평생의 사랑에게?”

섣불리 반응하지 못하는 슈슈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라우가 다시 담배를 입술에 물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그게 두 번째 체인징과 뭐가 다르겠어.”

“파리로 간다고 해서 꼭 헤어져야 한다는 건 아니야. 자주 만나지야 못하겠지만,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네가 파리로 가서….”

“정세인. 왜 이러는 건데, 갑자기?”

슈슈를 향해 돌아선 라우는 언성을 높였다. 눈 속에 다시 열기가 타올랐다.

“나 같은 쓰레기는 사랑을 잃고 비참해져서 죗값을 치르길 바라는 거 아니었나? 어?”

슈슈는 말없이 라우의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궁지에 몰려 뱉어 내는 말임을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는 서로를 잘 알았다. 체인징 자체를 비난했지만, 라우가 이현을 잃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고스트 판정받고 미국으로 가기 전에 네가 그랬었지. 고치고 올 거라고. 중간에 내가 보스턴으로 한 번 보러 갔을 때는 거의 다 나았다고 했었고. 아위, 그건 병이 아니야. 네가 고스트인 것도,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도…. 두 사람 모두 받아들이기 어려운 특수한 일이라는 건 알지만, 이현 씨… 꼭 잡아야 한다고, 너.”

“이제 안 될지도 몰라.”

슈슈가 어깨를 흔드는 대로 상체를 휘청이며 중얼거린 라우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자기가… 괴물 같다고 하더라. 오메가도 베타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괴물. 자신을 괴물로 만든 사람을 어떻게 용서하겠어.”

거울 속 비참한 자신을 허망한 눈으로 주시하며 덧붙였다.

“괴물이 된 기분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게 나인데… 어떻게 내가, 다시 나를 사랑해 달라고 할 수가 있겠어.”

“그럼 어떻게 하려고?”

“…….”

대답 대신 몇 모금 피우지 않은 아직 긴 담배를 미련 없이 비벼 끈 라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우는 것만도 못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게 다였다.

■ ■ ■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구름이 낮고 바람이 강했다. 어업을 쉬는 날이면 으레 그렇듯 할아버지와 큰아버지는 함께 소주를 기울일 상대를 찾아 일찌감치 제각각 외출한 뒤였다. 이런 날은 대체로 두 분 다 귀가가 늦어졌기 때문에 큰어머니도 모처럼 이웃에 나가고, 집에는 이현과 아버지 둘뿐이었다.

이현은 종일 스케치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곳에 온 뒤로 드로잉노트만 벌써 세 권째였다. 한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포기했던 그림이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것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때도 차라리 이런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부질없는 후회인 것을 알면서도, 손을 쉬었던 몇 년을 생각하면 자꾸만 아까운 생각이 들어 초조했다.

그림에 대한 욕심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부자연스럽게 억누르고 있었을 뿐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 잘 그리고 싶다는 상대적 의미의 욕심이 아니다. 그리고 싶은 대상을 그리고 싶은 모습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자유로움을 원했다. 브랜드 옷이나 넉넉한 용돈을 바란 적도 없었던 이현이 욕심을 부리고 집착을 보였던 대상은 그림뿐이었다.

아니, 유일하게 욕심을 낸 대상은 아니었다.

처음엔 분명 옷깃이 스칠 정도의 인연도 없을 것 같은 상대였다. 거리를 좁혀 다가왔던 것은 자신이 아닌 라우였고, 흐릿했던 관계에 확신을 불어넣어 줬던 것도 라우였다. 돌이켜 보면, 크게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원한다는 갈구와 갖지 못하는 고통에 허덕이기도 전에 어느 순간 그의 마음은 손안에 들어와 있었다.

자신에게 보였던 경계심이 누그러지는 데에 시간이 걸리기는 했었지만, 마음을 허락하는 데 신중했던 만큼 이후의 그는 불분명한 태도를 보여 불안하게 하거나 상처를 주는 일이 없었다.

그를 비난하고자 하는 냉기와 옹호하려는 온기는 여전히 하루에도 수십 번씩 엎치락뒤치락하기만 할 뿐, 최종적 승자를 가리지 못하고 있었다.

상념이 섞이자 손이 느려졌다.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을 열어 두고 보스턴의 풍경을 스케치하고 있던 이현은 등 뒤에서 책을 보던 아버지가 일어나는 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는 벽에 걸린 점퍼를 내려 팔을 꿰고 있었다.

“오늘은 산책 쉬는 게 좋겠어요.”

“…….”

아버지는 손을 멈추지 않고 점퍼의 지퍼를 채웠다.

이현은 여닫이를 슬쩍 밀어 밖을 내다보았다. 이현이 떠나 있던 동안 할아버지가 이웃에서 얻어 왔다는 잡종견 진돌이가 제 집에서 몸을 반쯤 내밀고 엎드려 있다, 문을 여는 이현을 보고는 귀를 쫑긋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현이 온 지 하루도 안 돼 따르기 시작한 붙임성 좋은 녀석이었다.

그사이 날씨는 더 궂어져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고집을 꺾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매일 같은 시간에 반복되는 이 산책마저도 아버지에게는 스스로를 향한 단죄의 의미일지도 몰랐다.

말리는 것을 포기하고 산책을 준비하기 위해 문을 닫으려는 찰나,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밤에 식구들이 모두 귀가한 후가 아니면 대문을 잘 걸어 두지 않는데, 모르는 사이 바람 때문에 문이 닫혔던 모양이었다. 이현은 바깥쪽으로 문을 더 밀어내면서 목소리를 높여 누구인지를 물었다.

“……영감님 계십니까?”

잠깐의 틈을 두고 돌아온 대답에 이현은 멈칫했다. 짧은 순간, 기대를 품었다 실망하는 자신의 속내가, 누구에게 들킨 것도 아닌데 멋쩍고 씁쓸했다. 누구이기를 기대했던 것일까.

쓴웃음을 지으며 슬리퍼를 신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대문을 밀어 보니, 뒷맛이 개운하지 않은 음식이라도 삼킨 것같이 내키지 않는 표정을 한 임 선생이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꾸벅 인사부터 한 이현은 자꾸 닫히려 하는 대문을 어깨로 밀어내며 강한 바람에 눈을 찌푸렸다.

“할아버지 안 계신데요.”

“잠깐… 나 좀 보겠나?”

쓰게 입맛을 다시며 그렇게 말하는 임 선생은 처음부터 할아버지가 아닌 이현을 만나러 온 듯했다. 이현은 옆으로 비켜서며 길을 터주었다. 이곳에 오기로 마음먹었던 때부터 각오했던 순간이기도 했기에 당황스러울 것도 없었다.

할아버지가 사용하는 사랑방으로 안내하려 했지만, 그는 일이 있어 금방 가 봐야 한다며 툇마루 한쪽에 걸터앉았다. 손님이 오시면 내놓는 음료라고는 믹스커피밖에 없어서 그것이라도 한 잔 내놓을까 싶었지만 곧 그만두었다. 방문을 열어 아버지에게 좀 기다리라는 말을 해 두고는, 사이에 두세 사람 정도가 앉을 만한 거리를 두고 이현도 툇마루에 엉덩이를 붙였다.

사정없는 바닷바람에 마당을 굴러다니지 않도록, 세숫대야나 양동이, 빗자루 등 잡다한 마당 살림을 한쪽에 모아 덮어 놓은 천막의 가장자리가 사납게 펄럭거렸다. 낯선 사람을 보고도 짖지 않고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하는 강아지의 순박한 얼굴을 보며 이현은 가볍게 말아 쥔 주먹을 다른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모래는… 건강한가?”

“…….”

“뭘 어쩌자는 게 아니네. 그저, 건강한지만 알고 싶다는 거지.”

경계하는 눈으로 돌아보는 이현을 힐끔 쳐다본 그는 변명조로 덧붙였다.

“죄송하지만, 두 사람에게 아저씨가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지는 한, 저는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을 생각이라서요.”

옆얼굴을 쳐다보는 임 선생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이현은 내내 강아지에게 눈을 고정하고 있었다. 한참 만에 시선을 거두며 길게 한숨을 내쉰 임 선생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지난달에 첫 손녀가 태어났네.”

“…….”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네는 것도 이 상황에 우스운 일인 것 같아 이현은 잠자코 주먹 안쪽을 문지르며 앉아 있었다.

“보통은… 2차 성징 시기가 돼서 발현이 이루어져야 알 수 있지만… 병원에서 그러더군. 알파로 발현할 확률이 꽤 높다고.”

“…….”

이현이 손을 멈추었다. 임 선생을 향해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아주 드물게 징후를 가지고 태어나는 아이들도 있다는데, 확률이 높다고 해서 반드시 알파가 된다는 얘기는 아니라고는 하지만… 확률을 무시할 수도 없으니까.”

임 선생이 내뿜는 푸르스름한 담배 연기가 광기 어린 춤을 추는 유령처럼 이현의 얼굴 앞에서 어지럽게 흩어졌다. 깊은 주름을 잡아 미간을 찌푸린 임 선생은 착잡한 시선으로 마당 어딘가를 응시했다.

“만일에 대비해 지금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려고 하네.”

이런 보수적인 어촌에서 여자 알파는 흉측한 돌연변이 취급을 받는다는 이유로 모래의 성별을 지금껏 숨겨 왔던, 베타 남성인 이한과의 관계를 반대했던 임 선생이었다. 그런 그가 굳이 이현을 찾아와 집안의 비밀을 털어놓는 것은 모래에게 자신의 변화를 전해 달라는 우회적 의미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현은 몇 달 사이, 몇 년을 보지 못한 것처럼 늙고 지쳐 보이는 임 선생의 옆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어떤 독한 마음을 먹었는지 몰라도… 어떻게 해도 뒤를 밟을 수가 없게 길이 막혀 있더군. 그 애가 그렇게 매정한 애가 아닌데… 에미 애비를 뒤에 놓고 그렇게….”

말끝을 흐리며 대신 담배를 입술로 가져가 빨아들이는 임 선생의 모습에, 모래가 겹쳐 보였다.

「너희 아버지도 세월 가면 언젠가 용서 안 하시겠냐. 네 일이라면 너 어릴 때부터 그렇게 끔찍하셨던 양반인데.」

큰아버지의 말에 끝내 울음을 터트렸던 모래의 눈물을 기억한다.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결정하는 길을 택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자신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부정하는 철부지는 아니었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대로 사랑을 한다. 각자의 방식대로의 사랑을 기반으로 선택을 하고,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희생시킨다. 이현이 지금껏 실제의 세상에서 보고 들은 한에서 완벽한 사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시인하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우의 사랑만은 흠 없이 온전하다고, 자신의 과거까지도 보상해 준 고마운 그의 사랑에는 단점도 약점도 없다고, 무의식의 어딘가에서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 같다.

“가끔씩… 전화라도 한 통 하라고 해 주겠나? 내가 미우면 제 어미를 생각해서라도….”

바람이 절반 이상을 피운 것 같은, 짧게 타들어 간 담배를 툇마루 옆면에 지익 그어 불씨를 꺼트린 임 선생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순간적으로 마음이 약해져, 건강하게 잘 있다는 소식이라도 전해 줄까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자신이 끼어들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임 선생이 일어서자, 깡총거리는 걸음으로 뛰어온 강아지가 그의 발치에서 킁킁거렸다. 임 선생은 그런 강아지를 한 번 내려다보고는 너무 오래 지체했다는 듯 서둘러 마당을 벗어났다.

임 선생을 쫓아 대문 근처까지 갔던 강아지가 이번에는 이현에게 달려와 신발 앞코를 물고 흔들었다. 허리를 굽혀 강아지의 털을 쓰다듬은 이현은 그제야 느껴지는 추위에 팔을 쓸며 방으로 돌아갔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현은 서둘러 점퍼를 걸치고는 서랍을 뒤져 허름한 머플러 하나를 꺼내 아버지의 목에 꼼꼼히 둘러 주었다.

“바람이 독해요.”

무감한 눈으로 선 아버지는 이현이 손을 거두자 곧바로 등을 돌려 방을 나섰다. 이현은 아버지의 몫까지 두 개의 우산을 챙겨 그 뒤를 따랐다.

한 방향이 아니라 사방에서 몰아치는 것 같은 바람도 아버지의 행진을 막지 못했다. 바람의 저항에도 아랑곳없이 평소와 똑같은 빠른 속도로 언덕길을 오른 아버지는 눈을 찌푸리게 하고 어깨를 움츠러들게 하는 매운바람을 맞으며 평소처럼 벤치에 앉아 있었다.

이현은 그 곁에 앉아 절벽 아래 바다를 내려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라우와의 이야기는 어제를 끝으로 뒷얘기가 더 남아 있지 않았다.

사납게 울부짖듯이 요동치며 하얗게 거품을 무는 바다는, 푸르고 흰 그의 눈을 떠올리게 했다.

자신의 과거에 고통을 느껴 주었던 그의 공감과, 어렴풋하게나마 아버지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용서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던 그의 사랑이… 거짓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전부가 거짓이었다면 덜 힘들 것 같았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것은, 그가 자신에게 사랑과 배신을, 공감과 침묵을 동시에 주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시원하게 비가 퍼붓기를 바랐지만, 언덕을 내려와 마을의 중심을 통과할 때까지도 하늘은 낮게 으르렁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할아버지의 집으로 이어지는 북쪽 오르막길의 초입, 조잡한 벽화들이 시작되는 입구에 다다랐을 때쯤에서야 이현은 뺨과 콧등에 한두 개의 빗방울을 느꼈다.

그리고 상어 가족을 그린 벽화 앞에 주차된 흰색 SUV를 발견했다. 이현의 걸음이 느려졌다. 평소라면 개의치 않고 자신의 페이스대로 움직였을 아버지가 보조를 맞추며 속도를 늦췄다.

라우가 운전석에서 내려섰다.

지난 시간 시달려 온 혼란과 갈등이 무색하게도, 그를 보고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반가움이었다. 그런 자신의 반응에 어이가 없고 맥이 빠져, 이현은 고개를 숙이며 허탈한 웃음을 짧게 흘렸다.

피는 못 속인다고 했던가. 혹은 몸은 솔직하다고 했던가.

물론 두 문장 모두 이런 상황을 설명하는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머리와 가슴이 벌이는 팽팽한 다툼을 제쳐 두고, 육체가 먼저 그를 향해 보이는 즉각적인 반응에 이현은 왠지 그런 말들이 떠올랐다.

다음으로 든 생각은, 그가 이 장소와 참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라우는 청바지에 무늬 없는 티셔츠, 심플한 점퍼와 스니커즈 차림이었지만, 이곳에서는 충분히 눈에 띄는 세련된 착장이었다. 궂은 날씨 탓에 주변에는 지나가는 사람 한 명 없긴 했지만, 이국적인 외모와 훌쩍 큰 신장만으로도 이곳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그를 안달 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이곳에 왔지만, 혹시 그가 찾아오지는 않을까, 전혀 상상조차 해 보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상상 속에서 그를 마주한 자신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로 눈길을 피해 버렸었다. 상상은 늘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의 얼굴을 바로 볼 수 있었다. 매일 아침저녁 등교를 하기 위해 지나다녔던, 모래, 이한과 늘 어슬렁거렸던 장소에 그가 있다는 실감이 나지 않아서, 스크린 밖으로 걸어 나온 영화 속 인물을 보듯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이현의 앞까지 걸어온 그는 굳은 입매를 끌어 올려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잘, 지냈어요?”

면도도 말끔히 했고 머리카락도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얼굴이 엉망이었다. 피부는 꺼칠하고 눈이 푹 꺼져 있었다. 턱선이 더 두드러지도록 야윈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겨우 며칠이었는데, 이런 인사는 이상한가?”

그렇게 말하며 턱 주변을 넓게 문지르는 그는 특별하지 않은 침착한 분위기를 조성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긴장과 조심스러움을 숨기지는 못했다.

“이현 씨가 못 올 것 같아서… 오늘 저녁 약속은 취소했어요.”

나름대로 가벼운 농담처럼 건넨 얘기 같았지만 이현은 웃을 수 없었다. 이현의 계속되는 침묵에 작게 한숨을 내쉰 그는 흐린 먹구름 아래에서 눈을 찌푸렸다.

“잠깐 시간 좀 내줄래요?”

이현은 곁에 선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먼저 들어가세요. 저, 잠깐 얘기 좀 하고 갈게요.”

“…….”

아버지의 시선이 라우를 향했다. 그러나 그 시선 속에 어떤 감정이 떠오른 것은 아니었다.

인사를 하는 것이 예의일지, 아니면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 될지. 복잡한 표정으로 고민하는 것 같았던 라우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악수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라우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안녕하세요, 서이현 씨가 소속된 갤러리의 대표인 라우 위쿤입니다.”

“…….”

표정 없는 눈으로 그의 얼굴을 쳐다보는 아버지의 옆모습을 보던 이현은 먼저 걸음을 떼며 라우를 향해 말했다.

“가요.”

그러나 채 두세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이현의 손목이 뒤로 당겨졌다. 이현의 놀란 눈이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강한 힘은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자신을 당기고 있었다.

“…….”

멀어진 거리만큼 아버지가 한 발 다가왔다. 이현이 둘러 주었던 머플러를 풀어 이번에는 아버지가 이현의 목에 감아 주었다.

이 순간만큼은 바로 곁에 선 라우의 존재조차도 의식되지 않았다.

아버지의 눈동자는 여전히 감정을 읽을 수 없도록 닫혀 있었다. 여전히 어떤 한마디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있었던 것이다. 불쑥 찾아온 흐린 푸른색 눈의 이 남자가 누구인지 아버지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이 남자를 따라간 후에 자신이 받게 될지도 모를 상처에 대해 염려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뭉툭한 손끝이 머플러의 끝을 한 번 꾹 쥐었다 놓았다. 그리고 이현의 손에 들린 두 개의 우산 중 하나를 가져가 무게를 덜어 내고는 천천히 돌아서서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코너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이현은 그 등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것을 해결이나 화해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치열한 갈등의 시작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갈등이야말로 해결과 용서로 가기 위해 오래전 몸으로 통과해야만 했던 과제였다. 그것 없이는 해결과 용서는 물론이고, 상처를 개성으로 새기는 것도 불가능했다.

“어디 조용히 얘기할 만한 곳이 있으면 거기로 가죠.”

라우의 목소리에 이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런 작은 시골 마을에서 그의 외모는 너무 눈에 띄었다. 어디를 가든 이목이 집중될 게 뻔했다. 머플러 안으로 턱을 당기며 차분한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그냥 차에서 얘기하는 게 좋겠어요. 여기 말고 다른 곳으로 가요.”

가는 길에 하나둘 빠르게 늘어난 빗방울은 해안가에 다다랐을 때쯤에는 세차게 퍼붓는 호우가 되어 있었다. 종일 꾸물거리며 별렀던 만큼 빗줄기는 맹렬했다.

해변 입구의 상가에서 정차한 라우는 편의점에 뛰어 들어가 테이크아웃 커피를 두 잔 사 왔다. 그러고는 이현이 알려 준 대로 속도를 줄여 서서히 해변 가장자리의 샛길로 접어들었다. 바다에 가장 가깝게 차를 세울 수 있는 장소였다.

“형이랑 누나가 항상 여기서 서핑을 했었어요. 저는… 저쪽에 앉아서 두 사람을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냈구요.”

이현이 상가 앞의 모래사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한번 해 보지 그랬어요.”

가르쳐 줄까? ―몇 번이나 그렇게 물었던 모래의 권유가 생각나 이현은 엷게 웃으며 손안의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게요. 그렇게 긴 시간이었는데 한 번쯤은 해 볼 걸 그랬어요.”

그 말을 끝으로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이현은 오른쪽으로 펼쳐진 해변을 바라보았고, 라우는 그런 이현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모두 가끔씩 생각났다는 듯 커피를 입술로 가져갈 뿐이었다.

침묵은 의외로 독하거나 날카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침묵 속에서도 뭔가 말을 해야 한다는 부담이나 어색함 없이 서로를 받아들였던, 이전과 같은 편안함도 아니었다. 팬텀에서 부딪쳤던 때처럼 격렬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았지만, 감정이 모두 사라지고 서로를 보며 웃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시카고 가기 전에, 최인우에게 진료받고 나서 복용했던 약.”

침묵을 밀어낸 라우의 목소리에 이현은 천천히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허벅지 위에 쥐고 있는 커피잔을 내려다보는 그의 턱 근육이 단단하게 뭉쳐 있었다.

“대부분이 영양제였지만… 아주 가벼운 강도의 억제제도 섞여 있었어요. 만약을 대비해야 했으니까.”

“인우 형에게 들었어요.”

“…….”

라우의 얼굴이 이현을 돌아보았다. 빠른 반응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는지, 그는 후회하는 것처럼 입술을 깨물며 다시 시선을 끌어 내렸다.

전화기를 켜 두라고 했던 라우는 정작 한 번도 연락이 없었다. 그를 헤아리고 이해하고… 그러고 싶지 않은데도, 그가 왜 전화를 하지 못하는지, 그 심정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기다리지 않았다.

오히려 인우는 하루에 한 번은 전화를 걸어 왔었다. 이곳에서의 문제에만 집중하고 싶어 받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라우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을 뿌리치기가 어려웠다.

찾아오기를 바라지도, 전화를 걸어 주기를 바라지도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궁금했다. 관심 없다고 하면서도 곁눈질을 보내는 것 같은 개운하지 못한 모순을 드러내는 자신이 낯설었었다.

인우는 기습적 키스에 대해 거듭 사과했고, 그 키스를 라우에게 얘기해 버렸다고 미안해하며 말했었다. 하지만 라우는 인우라는 이름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키스 얘기를 꺼내 뭔가를 확인하려 들지는 않았다.

빗줄기는 조금도 잦아들 기미가 없었다.

우산도 없이 빗속에 서 있는 기분이 들 정도로 퍼붓는 비는, 홍콩에서 돌아온 후, 훠궈를 먹으며 뒤풀이를 했던 날을 떠오르게 했다. 그때 라우가 자신을 데려다주었던 차도 이 SUV였다. 큰아버지와의 만남 후 집 앞으로 찾아간 자신을 말없이 안아 주었던 라우에게로 자연스럽게 생각이 연결되었다.

한동안 침묵하던 라우가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 천천히 꺼트리며 숨을 내쉬었다. 이현은 생각을 중단하고 커피를 조금 마셨다.

“내가 어떤 얘기를 하더라도 과연 그게 네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덜어 줄 수 있을지, 확신이 없지만… 용서를 구할 자격조차 없다는 이유로 입을 다물고 있기만 하는 것도 그다지 훌륭한 대응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어.”

일부러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손톱 끝으로 종이컵의 표면을 긁으며, 아마도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한 채 통증 속에서 그가 준비했을 말들을 기다렸다.

“멈추지 못했어.”

“…….”

“무거운 잘못인 걸 알고 있었고, 최인우나 슈슈의 생각과 달리, 심지어 너에게 이해시킬 자신도 없었어. 그런데도 왜 멈추지 못하는 건지 그때도 지금도 스스로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어리석고 무모했어.”

짧은 한숨 뒤에 이야기가 이어졌다.

“너를 오메가로 만들고자 했지만, 그 이상으로 내가… 너의 알파이길 바랐어. 변명으로 들릴 뿐이라는 걸 알지만, 그게 솔직한 이유일 거야.”

홀더에 종이컵을 꽂아 둔 라우는 핸들에 손을 얹었다.

“베타들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의 격렬한 성적 반응과 충견 같은 맹목적인 보호 본능…. 오메가에 대한 알파의 그런 성질들이 야만스럽고 굴욕적이어서, 골든이 되기 위한 훈련에 누구보다 열중했었지만… 나를 그렇게 만드는 상대가 너라면, 기꺼이, 자진해서 그 목줄을 나에게 채우고 싶었어.”

불필요한 껍데기를 모두 덜어 내고 알몸의 자신이 남을 때까지 여러 번 체에 걸러 낸 말들임을 증명하듯, 그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있었지만 감정적이지는 않았다. 감정이 흘러들어 와 뒤섞이려 할 때마다 스스로 강하게 억제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베타들 간의 사랑을 뛰어넘는, 대화와 감정의 교류 이상으로 더 원초적인 곳에서부터 서로에게 묶인 사랑을 할 수 있는 알파라는 사실에 처음으로 기쁨을 느낄 수 있었지만… 사랑을 알아 가면서 알파로서의 자신도 깨어난 건 내 입장일 뿐, 너는 베타지. 베타로서 나와 사랑하고 싶었을 테고.”

핸들의 윗부분을 꽉 틀어쥐는 그의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덩달아 종이컵을 쥔 이현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평생에 대한 약속만큼 얄팍한 감상은 없다고 비웃으며 살아왔지만, 슈슈 말처럼 나도 어쩔 수 없는 거겠지.”

마른 웃음을 흘린 그가 이현을 향해 살짝 몸을 틀었다.

“그동안 내가 해 왔던 말들, 모두 진심이야.”

“…….”

“평생 그 누구도 내 페로몬이 어떤 향인지 알 수 없을 거야. 너만이 나를 알파로 만들 수 있고, 알파인 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 나의 이성과 감정, 그 너머 알파라는 육체의 본질까지도 평생 네 것이야.”

거창한 내용이었지만 그는 웅변하듯 말하지 않았다. 이보다 더 하잘것없고 초라한 얘기는 없다는 듯 차라리 겸허했다.

이현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라우의 얼굴을 마주했다.

“용서를 받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라… 그저, 내가 너에게 바치는 거야. 네가 받아 주지 않더라도, 너에게 줄 수밖에 없어서….”

다가갈 수 없는 상대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머뭇거렸던 좀 전까지와 달리 그의 눈은 이현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차분하게 잿빛이 섞인 푸른 눈은 감정을 호소하고 있지도, 그렇다고 강요하고 있지도 않았다.

이 순간만큼은 사랑을 전하는 자체에만 온전히 몰입한 모습이었다. 그것이 훌륭한 사랑이건 비틀린 사랑이건… 있는 그대로.

이현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 작은 움직임에 시선을 고정한 라우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핸들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흘깃 쳐다보며 이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 하신 말들, 그걸 의심하진 않아요.”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 최대한 애쓰는 것 같았지만, 라우의 눈이 희미한 희망으로 흔들리는 것을 이현은 볼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음을 의식하며 이현은 종이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여기까지 온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여전히 혼란스러워요.”

라우가 무슨 말을 할 듯 몸을 가까이 기울였다가 아랫입술을 물며 다시 뒤로 물러났다. 핸들 위에서 그의 손은 이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알파로서도 저와 사랑하고 싶었다고 하셨지만… 페로몬에 지배받는다는 게 어떤 건지, 저는 몰라요.”

“네가 알아야 할 이유도 의무도 없어.”

“…….”

빠르고 단호하게 말하는 라우의 눈을 보며 이현은 고개를 저었다.

“의무가 없진 않죠. 대표님이 저를 체인징하고 있다는 걸 몰랐을 때 저는…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렇다고 믿으면서도, 알파로서의 대표님에 대해서는 알고자 하지 않았던 건데요.”

“너를 체인징하길 원한 건 알파로서의 욕구지만, 알파로서의 나는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그런 이해를 요구하려는 의미로 한 말이 아니야.”

이현은 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표님이 저를 체인징한 것과는 별개로 얘기하는 거예요. 알파로서의 대표님을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표님의 체인징을 제가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요.”

말없이 이현을 바라보던 라우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뒤 정면을 향해 몸을 돌리며 신음하듯 숨을 내쉬었다.

“……그래.”

꺼질 듯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핸들 위에 몸을 숙이고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그는 비가 퍼붓는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몸속에 가득 들어차 흘러넘치려는 감정을 억지로 자기 안에 잡아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이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곳으로 오기 전, 팬텀으로 그를 만나러 갔을 때는 혼란과 당황, 부글거리는 배신감이 지배적이었다면, 최초의 감정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 난 지금, 상황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은 슬픔과 안타까움에 가까웠다.

“골든 알파니까 페로몬에 대해서는 거의 완벽에 가까울 만큼 자유로운 거겠지. 잘은 모르지만 베타와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겠지. 그냥 그렇게만 생각했어요.”

알파로서의 모래에 대해서도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처럼.

이현은 고개를 푹 떨구고 손에 쥔 종이컵을 내려다보았다. 목구멍이 꽉 조여 와 입을 열기가 쉽지 않았다.

“난 베타인데, 어떻게 대표님의 페로몬을 자극한 거죠?”

정면을 응시하던 그의 얼굴이 경직된 표정으로 이현을 돌아보았다.

“인우 형이 그랬었잖아요. 그렇게 페로몬을 억제해서 뭐 할 거냐고. 베타가 되려고 그러는 거냐고. 그만큼 철저하게 페로몬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인데… 오메가도 아니고 베타인 나에게는 왜 그렇지 못했던 거예요?”

아무 소용도 없는 말을 몰아붙이듯 쏟아 놓은 것이 후회스러워, 이현은 조수석의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눈가가 뜨거워지는 감각에 아랫입술을 깨물며 미간에 힘을 주었다. 손에 든 것이 커피가 아닌 술이었으면 했다.

한참 동안 아무런 기척이 없었던 옆자리의 라우가 조용히 담배에 불을 붙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싸한 담배 향이 실내에 퍼져 나갔다. 두세 모금 정도를 천천히 피운 호흡 뒤에 라우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외부에서 나를 자극하는 페로몬을 방어하는 데에는 능숙했지만, 내부의 자극에는 그렇지 못했던 거겠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원하는 욕구는 내 안에서부터 시작된 거니까.”

“…….”

“이렇게 원한 대상이 네가 처음이라서 확실한 답은 알 수 없지만… 타인의 페로몬은 조절할 수 있어도,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을 조절하는 법은 몰랐던 게 아닐까.”

납득할 수 없었다. 그에게 받아 온 것들은 단지 의식주의 해결과 그 이상의 풍족한 생활만이 아니었다. 모든 공감과 조언, 그에게 과거를 털어놓고 이해받았던 순간의 충만함이 여전히 몸속에 남아 있었다. 그는 결코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현은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성숙한 사람도 때로 성숙하지 못한 실수를 한다.

아버지 역시 어머니의 사고 전에는 타인의 기준으로 자신의 삶을 휘젓지 않는 온화한 중심을 가진, 어린 이현이 생각할 수 있는 선에서 가장 성숙한 사람 중 하나였다.

느리게 담배를 빨아들이는 호흡 뒤에 라우의 무거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미숙함을 넘어 추하고 이기적이었지.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지독한 짓 중 하나일 거야.”

이현의 동정심을 자극하기 위한 자아비판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어조는 타인에 대해 얘기하듯 했다.

몇 모금 마시지도 않은 상태로 식어 가는 커피잔을 내려다보며 이현은 라우의 체인징을 강간에 비유하던 인우의 가차 없는 차가움을 떠올렸다. 자신을 피해자로, 라우를 개자식으로 깨끗하게 분리하던 그의 명쾌한 판결.

지난 며칠간, 어딘가에 정답이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생각을 거듭했었다. 하지만 라우를 끊어 내는 것. 혹은 그를 받아들이는 것. 어느 쪽을 바라보아도 완전하게 만족스럽지 않았다. 인우가 했던 것처럼 체인징 하나만을 개별적으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도 없었지만, 다른 모든 것으로 체인징을 깨끗이 덮을 수도 없었다.

“맞아요. 이기적이고 추하고, 지독한 행동이었어요.”

“…….”

“하지만… 그게 전부도 아니었어요.”

“…….”

“그걸 나는 아니까… 이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거겠죠.”

그것이 솔직함이었다. 그를 차갑게 내칠 수도 없고, 온전히 받아들일 수도 없는 데서 오는 서성거림의 반복.

“대표님이 바꾼 건 내 몸이니까. 이 일로 대표님에게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건 당사자인 저뿐이고… 어딘가에 정답이 있는 게 아니라, 제가 내린 결정이 옳은 결정인 거잖아요….”

이현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눈두덩이를 눌렀다. 급하게 담배를 비벼 끈 라우가 이현의 손에서 종이컵을 거두어 홀더에 고정시켰다. 이쪽을 향해 몸을 돌린 그는 이현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어깨를 만지지는 못했다.

“그래, 맞아. 선고를 내릴 수 있는 건 너뿐이야. 네가 내린 결정이 옳은 결정인 거야.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 너에게 다른 기준을 들이대고, 네 결정을 재단할 수 없어.”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이현은 얼굴 전체를 강하게 찌푸렸다. 더는 보고 있을 수 없다는 듯 라우가 이현의 뒷목을 감아 끌어당겼다. 관자놀이에 그의 입술이 닿아 왔다.

“그때 했던 말 기억해? 시카고에서. 우리 처음 서로 사랑한다고 했을 때.”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들었던 순간을 쉽게 잊을 수는 없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지금 이 말의 진심이 의심받거나 훼손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너에게 부탁했었잖아.”

“…….”

“용서는 감히 네 앞에서 입에 담을 수도 없어. 단지…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만 알아줘. 어떤 누구도 내 페로몬을 맡지 못하게 하겠다는 말. 나는 계속 지키면서 여기 있을 테니까….”

이현은 고개를 저었다. 독기만이 가득한 척 그와 자신을 몰아세우는 것을 포기하고 솔직해지고 싶었다. 그러는 편이 차라리 편안할 것 같았다.

“모르겠어요…. 대표님이 정말 미운데, 왜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 버린 거냐고 원망을 퍼붓고 싶은데… 제가 가 버리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이현의 몸에서 자신의 몸을 떼어 낸 라우가 이현의 양어깨를 꽉 쥐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눈을 맞추었다.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지만 더 이상 흔들리고 있지는 않았다.

“이현아.”

“…….”

“체인징을 알기 전에도 너, 네가 파리에 가야 한다는 거 알고 있었잖아. 날 용서해 주기 위해서… 네가 택해야 하는 길을 희생하지 마.”

그에게 기대 위로받고, 그의 사랑 안에서 자신과 과거를 마주할 수 있었던 기억까지 침범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에게 줄 수 없는 가치를 상대에게서 계속 기대하는 것은 사랑일 수 없었다. 떠나야 하는 이유는 체인징만이 아니었다.

라우의 손길이 다시 한번 부드럽게 이현을 당겼다.

난 괜찮아. 난 정말 괜찮아. ―그가 몇 번이나 반복해 귓가에서 속삭였다.

“계속 사랑할게. 아무 때나 불쑥 변덕처럼 보고 싶다고 해도 바로 달려갈게. 그런 뒤에 다시 꼴도 보기 싫다고 하면 바로 사라질게. 그걸 몇 번이나 반복한다 해도 상관없어. 그러니까 나 때문에 아무것도 포기하지 마.”

이현은 숨을 들이켰다. 내려다보이는 그의 가슴팍을 꽉 붙잡았다.

“이미 충분히… 나 때문에 변해 버렸잖아.”

부드럽게 스미는 그의 목소리는 자신이 알고 있던 라우 위쿤이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부드러움만을 취해 가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에게 파리는 그렇게 가기 힘든 곳도 아니야. 알잖아. 지금까지도 1년에 한두 번은 다녀오던 곳인데 네가 있다면 한 달에 한 번, 아니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못 가겠어? 물리적 거리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가 오지 않을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현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을 굽혀 그의 셔츠를 더 꽉 그러쥐었다. 자동차 위로 수 톤의 모래가 쏟아지는 것 같은 빗소리가 차라리 다행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에서 차단된 채 혹은 세상을 전부 차단한 채 그와 단둘이 빗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서로의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최소한 표면적으로 그렇게 보이도록 감출 수 있을 때까지 그저 가만히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라우의 목덜미쯤에 뺨을 기대고 있던 이현이 그의 셔츠를 쥐고 있던 손으로 슬그머니 가슴을 밀어내며 몸을 일으킨 후 자동차는 천천히 해변을 빠져나왔다.

오르막 아래 작은 공터까지 돌아가는 동안에도 두 사람 모두 아무 말이 없었다. 이현은 우산을 가지고 있었지만, 라우는 트렁크에 늘 가지고 다니는 파라솔처럼 커다란 우산을 펼쳐 이현과 함께 오르막을 올랐다.

대문 앞에 도착한 뒤에도 둘 중 누구도 쉽게 돌아서지 못했다. 이현은 우산 아래 가까이 마주 선 그를 오래 올려다보았다. 매일 이 대문을 드나들던 시절에는 누군가가 자신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올 날이 올 거라는 자체를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죽은 과거 속으로 현재가 불쑥 끼어든 기분이었다.

이현을 보는 라우의 눈은 가라앉아 있었다. 손을 뻗어 만지고 싶은 애틋함이나 함께 있고 싶고 붙잡고 싶은 미련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현을 흔들리게 하지 않으려는 그의 의지는 확고했다.

“운전… 조심하세요.”

이현에게서 그 말을 들은 것이 세상에서 가장 아까운 행복이라는 듯 엷게 웃으며 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좁은 마당을 지나 툇마루에 올라서서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의 우산은 여전히 대문 위로 삐죽 솟아 있었다. 미동도 하지 않는 우산에서 시선을 떼고 방으로 들어가니 아버지는 좌식 책상 위의 스탠드를 켜고 이현의 그림을 보고 있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놀라고 감동할 기력조차 없이 몸과 정신이 심하게 지쳐 있었다.

그와 함께 있는 동안 억누르는 데에만 집중했던 감정이 밖으로 서서히 스며 나왔다. 벽에 등을 기댄 채 미끄러져 바닥에 주저앉자 기다렸다는 듯 순식간에 눈앞이 흐려졌다.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팔을 걸쳤다. 고개를 숙이니 무게를 이기지 못한 눈물이 금세 허벅지 위로 떨구어졌다. 주먹을 꽉 쥐었지만 흐느끼는 소리를 온전히 죽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오히려 그게 더 좋았다.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멀어져 본 경험이 있는 아버지는 어쩌면 이 순간에 적당한 위로 따위는 없음을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묻어 두지 않고 현재 속으로 끊임없이 과거를 불러들인다면, 언젠가 다른 모습과 의미로 과거가 재탄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상처가 개성으로 거듭나는 그런 순간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런 희망도 고통을 묽게 만들 수 없었다.

문을 열고 달려 나가 아직 대문 앞에 있을, 혹은 그리 멀리 가지 못했을 그를 뒤따라가, 모든 것을 내던지고 그저 그를 끌어안고 싶었다. 빗소리는 오랜 시간을 들여 아주 서서히 잦아들었다.

■ ■ ■

두 사람은 서로 단단히 깍지를 끼고 있었다. 어깨와 어깨가 틈 없이 꼭 맞붙어 있었다. 별로 대단한 내용을 얘기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상대가 한마디 할 때마다 열렬한 리액션이 이어졌다. 쥐고 있던 핸드폰을 가방 앞주머니에 넣으면서도 남자는 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 10월 중순이었지만, 두 사람의 무릎 위에는 라피아를 엮어 만든 여름용 모자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행복의 절정에 있는 한 쌍의 남녀. 더운 휴양지로 신혼여행을 떠나는 커플인 듯했다.

체크인 수속을 마친 뒤 수화물에 이상이 있어 호출을 받게 될 경우를 대비해 이현은 근처 벤치에 앉아 있었다. 불과 두 걸음 정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커플을 별 의미 없이 바라보고 있던 이현은 달콤한 귓속말을 하기 시작한 그들에게서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캐리어를 실은 카트를 앞세우고 공항 안으로 막 들어서는 4인 가족, 체크인 줄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음에도 들뜬 표정으로 서로 재잘거리며 장난치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친구들, 빠듯하게 도착했는지 여권과 티켓을 쥐고 걸음을 서두르는 외국인 비즈니스맨…. 다양한 사람들을 흥미롭게 둘러보던 이현은 허리를 굽혀 허벅지 위에 턱을 괴면서 옆자리의 유니를 돌아보았다.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던 그녀가 이현의 시선을 알아채고는 눈을 맞추며 씩 웃어 보였다. 이현이 마주 웃자 그녀가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대표님 오늘… 합동 전시회 최종 점검 때문에 늦게까지 팬텀에 계실 거라고 했어.”

그녀는 아마도 이현이 라우를 기다린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현은 자신조차도 의아할 정도로 깨끗하게 그런 기대를 품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저 엷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니는 모르고 있었지만, 어제 저녁, 이현은 그를 만나기 위해 팬텀으로 찾아갔었다.

2층으로 올라갔을 때, 그는 계단을 올라가자마자 정면에 보이는 전시장의 중심에 서서 작품들의 위치를 고민하고 있었다. 처음 그를 만났던 장소였다. 어딘가 야릇한 기분에 이현은 곧바로 그에게 다가가지 않고 난간에 기대서서 잠시 그를 바라보았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계단을 올라오며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었고, 그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이현이 유니와 주한을 돕고 있었다. 이런 사람이 아마 골든 알파가 아닐까 싶었던 강렬한 위압감과 외모의 화려함이 그의 첫인상이었다. 「한 실장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죠?」 그때의 그가 이현에게 궁금해한 것은 고작 그것뿐이었었다.

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리고 손에 든 작품 리스트를 훑어보며 눈썹을 만지작거리는 그를 바라보면서, 이현은 시간이 가져온 변화의 폭이 새삼스러워 풀썩 웃기까지 했었다.

이현을 발견한 그 역시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보이며 쥐고 있던 파일을 데스크 위에 내려놓았었다.

사흘 전 동해에서 올라온 이현은 주한의 오피스텔에서 함께 지내고 있었다. 그날 할아버지 댁 대문 앞에서 헤어진 뒤 처음 보는 라우였다.

「그쪽에 도착하면… 연락드릴게요.」

이번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들에 대해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다가 이현은 팔을 쓸어내리며 그렇게 말했었고, 입술을 꽉 다문 라우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었다. 파리로 만나러 가면 된다던 그의 말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이현이 고개를 끄덕였던 것처럼.

그리고 비스듬히 시선을 내리깐 그에게 이현이 먼저 키스했었다. 뒷목을 쥐고 끌어당겨 입술을 겹치자 맞닿은 그의 가슴이 순식간에 단단하게 경직됐었다. 턱을 틀어 입술 안쪽의 점막을 비비자 그제야 그는 망설임을 버리고 강하게 허리를 감아 왔다. 모든 것을 내던지고 이현 하나만을 움키려는 것 같은 포옹이었다.

깊숙이 고개를 숙여 코끝이 뭉개지도록 자기 안으로 파고드는 라우의 숨이 가늘게 떨리며 흐트러졌었다. 그런 그의 길게 자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이현은 그가 자신에게 늘 그렇게 해 주었듯 그의 아랫입술을 강하게 빨아들였다. 내리뜬 눈꺼풀 아래에서 그가 아프게 웃으며 바라보았다.

영원히 잊지 못할, 벌써부터 그리운 향기 속에서 키스를 나눈 뒤 팬텀을 나온 이현은 늦은 밤까지 거리를 쏘다녔었다.

“별문제 없나 보다. 그만 들어갈까?”

5분 이상이 지났음을 확인한 유니가 옆자리에 놓아두었던 크로스백을 어깨에 걸치며 먼저 일어났다. 배낭을 멘 이현은 여전히 혼잡한 홀을 한 번 돌아보고는 유니의 뒤를 따라 출국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딘가에서 그가 가슴의 포켓에 늘 꽂고 다니는 선글라스를 쓰고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찾아내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또한, 실제로는 아니더라도 그가 지켜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상해와 암스테르담을 경유해 샤를 드골 공항으로 향하는 비행은 스물다섯 시간을 훌쩍 넘길 정도로 길었고, 이코노미 좌석은 비좁고 딱딱했지만, 이현은 지루함도 불편함도 느낄 수 없었다. 잠든 유니에게 왼쪽 어깨를 내준 채 불 꺼진 기내에서 오직 한 가지만을 생각했다.

■ ■ ■

“전시장 마지막으로 돌아보고 왔어. 배치 좋더라.”

“갤러리 운영이 몇 년인데, 뭘 새삼스럽게.”

한 실장의 칭찬에 라우는 재떨이에 재를 턴 담배를 입술로 가져가며 건조하게 반응했다. 지쳐 보이는 그를 건너다보며 한 실장은 소리 없이 쓰게 웃었다.

VIP 오프닝을 하루 앞두고 외근을 마친 뒤 보고와 미팅을 핑계로 라우의 집을 방문했지만, 실은 그가 걱정스러운 마음에 들른 것이 더 컸다. 예상대로 그는 저녁도 거른 채 일에 매달리다 방금 퇴근한 길이었다. 한 실장이 사 온 햄버거에도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감자튀김을 몇 개 삼킨 것이 다였다.

“유니도 없고 하니까, 내일은 내가 9시까지 나갈게. 한 실장은 10시쯤 나와.”

“주한이 있잖아.”

“그놈을 어떻게 믿어. 유니 없이 치르는 첫 번째 큰 행사니까 일단 나가서 처음부터 감독해야지.”

반 정도 태운 담배를 비벼 끈 라우는 테이블에 느슨하게 기대 있던 자세를 바로 세운 뒤 맥주를 마셨다. 지난 몇 주간 그가 어떤 시간을 보내 왔는지 곁에서 지켜봤기에, 한 실장은 위로의 말을 건네는 대신 재킷과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림, 치웠네?”

앞서가던 라우가 거실 한가운데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그녀는 소파 위, <소외>가 걸려 있었던 자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라우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뒷목을 문지르며 풀썩 웃었다. 그리고 먼저 돌아서서 현관으로 향했다.

신발을 다 신고도 바로 나가 버리지 못하고 뜸을 들이던 한 실장이 라우의 배를 가볍게 툭 쳤다.

“한잔하러 나갈래?”

“동정하는 거야?”

“하면 안 돼? 상당한 동정심을 필요로 하는 얼굴인데.”

라우는 피식 웃으며 팬츠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복도의 벽에 어깨를 기댔다.

“고맙긴 한데 피곤하다. 내일 뒤풀이에서 버티려면 체력 좀 비축해야지.”

한 실장이 떠난 뒤 식당으로 돌아간 라우는 남은 음식들을 정리하고 컵을 개수대 안에 넣었다. 주방과 식당, 거실을 빠져나오면서 차례대로 조명을 껐다.

2층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희미하게 비쳐드는 계단을 오르고, 흰 벽으로 둘러싸인 복도를 지나 침실로 들어간 그는 뒷목을 주무르며 고개를 젖혔다. 눈이 감기고 한숨이 흘렀다. 욕실로 이어지는 복도에서 새어 나오는 간접조명이 방을 비추는 빛의 전부였지만, 더 환하게 밝힐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두 팔을 툭 늘어뜨린 라우는 갑자기 할 일을 빼앗겨 어리둥절해진 사람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고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소파 옆 냉장고 앞으로 걸어가 쟁반 위의 위스키를 잔에 반 정도 따랐다. 소파에 털썩 몸을 기댄 뒤 등받이가 높은 일인용 의자를 반 바퀴 회전시켰다.

얼음을 넣지 않은 위스키를 식도 너머로 흘려보내며, 침대에서 정면으로 마주 보이는 벽에 걸어 둔 그림 한 점을 어둠 속에서 오래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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