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딩 Ding2)
예상외로 지극히 심플했던 주한의 방과 달리 온갖 물건들로 가득 찬 유니의 방은 세 사람이 동시에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로 비좁았다. 게다가 곧 떠날 사람이 만들어 내는 특유의 어수선한 분위기 탓에 방 안에는 불안정한 기운이 떠돌고 있었다.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가져가라며, 유니는 본격적인 술자리를 갖기 전, 주한과 이현을 먼저 자신의 방으로 초대했다. 공간을 채운 대부분의 물건은 옷과 책이었다.
이미 한차례 정리를 끝냈는지 절반 정도가 비어 있는 2층짜리 행거를 뒤적거리며 취향의 옷을 골라내는 데 열중한 주한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현은 유니의 이야기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마음대로 하라고 하더라. 언제는 너한테 우리 허락이 필요했었냐고.”
여러 크기의 책과 잡지, 프린트한 자료 등으로 어지러운 싱글 침대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이어 가던 유니가 쓴웃음 뒤에 맥주를 한 모금 삼켰다.
“그래서?”
행거 아래의 박스를 뒤져 니트 한 벌을 힘들게 끄집어내던 주한이 동작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차는 주한과 달리 유니는 손이 닿는 거리에 있던 잡지 한 권을 무의미하게 뒤적이며 어깨를 한 번 으쓱여 보일 뿐이었다.
“허락받으러 온 거 아니라고 했지. 외국에 나가서 일하게 됐고, 언제 돌아올지 확실치 않으니까, 그래도 얘기는 해 둬야 할 것 같아서, 그래서 온 거라고.”
오늘 오후, 그녀는 가족들을 만나고 왔다고 했다. 집을 나온 뒤 몇 번인가 짧은 통화를 한 적은 있지만 실제로 만난 것은 처음이란 얘기에, 내색은 하지 않았어도 이현은 적잖이 놀랐었다.
그녀가 집을 나온 지 최소한 4년 이상이 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 시간 동안 가족을 전혀 만나지 않았었다는 것에 한 번 놀랐고, 긴 공백을 허물고 스스로 가족을 찾아간 그녀의 결정에 한 번 더 놀랐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관성은 작용해서, 일단 거리가 벌어지고 나면 그 간극을 역행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내버려 둔 채 관망하는 데에는 아무런 힘이나 저항도 필요 없었다. 그쪽이 훨씬 쉽다. 얼마든지 회피의 핑계가 있었음에도, 그녀는 어려운 쪽을 택한 것이다.
“그러게 그냥 전화로 얘기하라니까.”
그녀가 받았을 상처 생각에 불퉁하게 중얼거리는 주한의 등을 내려다보며 유니는 피식 웃었다.
“부모님이 뭐라고 했든, 부모 자식 사이에 전화로 전할 말은 아니잖아.”
지금껏 그쪽에서 궁금해하지도 않는, 최소한 반기지 않는 소식들을 계속 전화로 전해 왔으면서도 이번에는 굳이 직접 대면하기를 택한 것에는 분명 그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선택들이 최초의 선택에 뒤따른 부수적 개념이었다면, 이번엔 그녀의 인생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 전환점 같은 의미였던 것이다. 거주 장소가 국내에서 해외로 바뀌는 것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피곤한 듯 고개를 뒤로 젖히고 뒷목을 주무르면서 유니는 천장을 향해 중얼거렸다.
“집으로 돌아와서 대입 준비를 다시 해서 교대에 입학하라고,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시더라. 내가 집을 나가서 스스로 이룬 것들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인정할 생각이 없는 거지. 당신들에 대한 반발심이나 반항심으로 삐딱선을 타고 있는 거라고,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신다는 게….”
말을 다 잇지 못한 유니는 작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뒤적이던 잡지를 탁 소리가 나게 덮었다.
“예전엔 적어도 나를 위한 거라고 생각했었거든.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정착하는 것. 부모님 기준에서는 그게 잘사는 삶이니까, 내가 잘살길 바라서 강경하게 나오는 거라고. 그런데 지금까지도 그런 소리를 하시면서 나의 현재 생활이나, 내가 꿈꾸는 미래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려고 하지 않는 걸 보니까… 이젠 잘 모르겠더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가장 인정받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또 한 번 부정당한 유니의 좌절 앞에서 이현도 주한도 섣불리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없었다.
“고생을 해도, 안정적이지 않아도, 나는 이게 더 행복하다는데… 왜 자꾸 나중에 후회할 거라는 소리를 하는 건지…. 피로 이어진 부모 자식이라도,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고 자란 형제라도, 행복의 조건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 거 아니냐? 어?”
다리를 길게 뻗어 주한의 등을 꾹꾹 누르며 동조를 구하는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이현은 내부에서 일어난 압력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처음부터 맛이 느껴지지 않았던 맥주를 기계적으로 삼켜 냈다. 그것만이 지금의 무력한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인 것처럼 느껴졌다.
“하다못해 우리 네 식구는 입맛도 제각각인데, 행복의 조건 같은 까다로운 부분이 같을 리가 있겠냐고.”
그렇게 말하는 유니의 목소리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육체적 피로라기보다는, 완전히 놓아 버리지 못하고 어딘가에 가늘게나마 붙들어 두고 있었던 미련의 끈을 잘라내 버릴 때가 왔음을 직시한 체념에 가까웠다.
원하는 결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그녀 자신은 문제로부터 도망치지도 않았고, 도망을 정당화하기 위한 변명을 늘어놓지도 않았다. 어색하고 불편할 게 뻔한 상황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
자신의 가족이 살고 있는 집. 세상에서 가장 안락해야 할 그 집 문 앞에서 그녀가 얼마나 망설이고 서성거렸을지, 이현은 자연스레 상상해 볼 수 있었다.
같은 집에 살면서도 아버지에게 말 한마디 거는 게 쉽지 않았었다. 어차피 대답을 듣지 못할 테니 해 봤자 소용없다는 변명으로 자신의 회피를 합리화했었다. 아버지에게 말을 걸고 침묵을 되돌려 받는 괴로움을 반복하는 것에 비하면, 회피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유니는 되돌아올 반응을 예상했으면서도 문 앞에서 돌아서지 않았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고, 해야 할 말을 전했다. 그 이후의 일들은 그녀의 책임이 아니었다.
말없이 맥주병을 기울이던 유니가 생각났다는 듯 서둘러 병에서 입술을 떼어 냈다.
“아, 우리 가족도 비슷한 부분이 있긴 하네.”
“…….”
“도대체 누굴 닮은 거냐고 엄마, 아빠가 학을 떼는 이 고집은 아마 엄마, 아빠한테서 그대로 물려받았을걸?”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웃음을 보이기까지 했다. 복잡한 감정을 애써 차단하기 위한 웃음이었지만, 부모에게서 더는 어떤 이해도 기대하지 않기로 결정한 그녀는 한편으로는 홀가분해 보였다. 더는 미련을 가질 여지가 없음을 최종적으로 확인한 것이다. 인생의 다음 코스로 나아가기 전, 그녀는 뒤에 남겨 둘 것들과 간직할 것들을 분명하게 분리하고 있었다.
모두가 각자의 선택을 화력으로 삼아 어딘가로 나아가고 있었다. 뒤에 남겨 둘 미련도, 잘라 낼 대상도, 심지어는 실수와 후회마저도 다들 스스로 선택하는 것만 같았다.
이현은 오직 자신만이 무엇에도 부딪쳐 본 적 없는 겁쟁이 같았다.
이것은 응보인가. 문제를 들춰내고 파고들어 돌파구를 찾으려 하지 않은…. 물러서고, 멀리 돌아가고, 모르는 척 침묵해 왔던 ‘비겁한 평화’에 의존해 왔던 대가인가. 가장 즉물적으로 자신의 것이라 인식할 수 있었던 육체마저도 타인에 의해 바뀌어 버린 것은?
생각이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자기 비하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 이현은 맥주를 더 마셨다. 지금은 뭔가를 생각하기에 적당한 상황이 아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빈 맥주병을 싱크대 위에 내려놓고 냉장고에서 새 맥주를 꺼낸 유니가 개수대에 멍하니 기대선 이현의 어깨를 툭 밀쳤다.
“오늘 왜 이렇게 말이 없어?”
“…….”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지금 내 머릿속이 누나의 방보다 더 뒤죽박죽이라고. 전체를 한눈에 담을 수도 없을 만큼 커다란 문제에 짓눌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개미 한 마리가 된 기분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털어놓을 수 있는 배짱이 있었더라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그것조차도 알 수 없었다. 아직 스스로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문제를 남에게 설명하기란 불가능했다.
걱정스럽게 올려다보는 유니의 얼굴을 마주 보며 이현은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팔을 뻗어 이현의 뒷머리를 가볍게 흩트리며 유니가 흐릿하게 웃어 보였다.
“왜, 헤어지는 게 섭섭해서 그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주한이 눈을 빛내며 이현의 어깨를 힘주어 붙잡았다.
“서이현, 그럼 네가 대표님한테 얘기해 봐. 뉴욕 가지 말자고.”
그리고 유니에게 뒤통수를 가볍게 한 대 얻어맞았다.
“아, 왜 때려?”
“이현아, 얘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거 알면서 그냥 막 지껄이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
평소처럼 시시한 말싸움을 벌이는 두 사람을 보면서, 이현은 어떻게든 마지막으로 셋이서 보낼 수 있는 이 시간에 집중하려 애썼다.
자신의 몸이 라우에 의해 오메가로 변하고 있다는… 그 문제는, 인터넷 가십 기사만큼이나 현실과 동떨어진 타인의 얘기 같았다. 하지만 실감을 하지 못해도 그와 별개로 충격은 몸과 정신에 타격을 입혔다. 내부를 감싼 껍데기가 흔들리면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이탈해 떨어지고, 깨지고, 뒤섞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실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당장 뭘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그런 문제는 어딘가에 처박아 두고, 눈앞의 상황에 집중하고 싶었다. 외면하고 덮어 두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특기가 아니던가. 자신과 라우의 뉴욕행이 무산되더라도 유니는 파리로 떠날 것이다. 이현은 그녀와의 이별을 소홀히 다루고 싶지 않았다.
“이 자식 이거 진짜 마음이 완전 딴 데 가 있는데?”
눈앞에 손을 흔들어 보이는 주한을 향해 웃음 비슷한 것이라도 만들어 보려 애썼지만… 무리였다. 정작 가장 필요한 순간에 특기는 발휘되지 못했다.
이현은 손바닥으로 몇 번이나 얼굴을 쓸어내렸다.
“왜, 뭔데 그래.”
유니가 조심스럽게 이현의 손목을 끌어 내리며 물었다. 그녀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마주하자, 이현은 이 충격을 누구에게든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충격을 다른 개체에게로 발산해 그 영향을 분산시켜야만, 자신의 몸과 정신이 파열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은… 몸이 좀 안 좋아서….”
슈슈의 말이 사실이라면, 몸이 좋지 않다는 건 아주 거짓말인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새었다.
“얼굴색이 안 좋긴 하네. 입술도 허옇게 질렸고.”
주한은 그제야 걱정이 되는지 이현의 얼굴을 주의 깊게 살폈다. 유니가 이현이 쥐고 있던 맥주병을 빼앗아 싱크대 위에 내려놓았다.
“집에 가서 쉬는 게 좋겠다. 컨디션 조금 저조한 정도로 몸이 안 좋다고 할 애도 아니고.”
“…….”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꼼짝하지 않는 이현의 머리카락을 흩트리며 유니가 달래듯 말했다.
“다시 못 볼 것도 아닌데 뭘 그래. 금요일에 대표님 집으로 갈 거니까 그때 또 보면 되지.”
계획대로라면 이현과 라우는 토요일에 출국할 예정이었다. 그 때문에 금요일에는 팬텀을 일찍 마치고 다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저녁 식사가 문제가 아니라, 뉴욕행도 어쩌면 취소될지 모른다고. 단 한순간에, 모든 것이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불확실함 속으로 내몰렸다고.
두 사람 앞에 내던지듯 고백해 버리고 싶은 자포자기의 충동을 안으로 삼키면서, 이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침대 옆 구석에 세워 놓았던 아직 풀지 않은 배낭을 그대로 집어 들었다. 짐을 쌀 때보다 가방은 더 무겁게 느껴졌다.
“선물, 고마워.”
어깨를 가볍게 주무르는 손길에 돌아보자, 유니가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지난번에 아무도 가지고 가지 않았던 여행 기념품을 오늘 이현이 가지고 온 것에 대한 얘기였다.
“전 그냥 가지고 오기만 한 거고… 대표님이 사신 건데요, 뭐….”
“그렇지. 대표님이 주신 거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유니는 지금껏 라우가 자신에게 주었던 많은 기회와 배려의 목록을 헤아리는 듯했다. 배신이 아니라고, 한 실장이 그렇게 말해 줬다고 해서 단번에 유니의 마음이 편해질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라우가 유니나 주한의 노동력을 팬텀에 묶어 두기 위해 모든 기회를 제공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현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아니, 지금에 와서는 더는 그런 식으로 라우를 잘 아는 척 얘기할 수 없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이제, 가장 알 수 없는 혼돈과 미지의 영역에 속한 멀고 흐릿한 존재로 밀려나 있었다.
집까지 태워다 주겠다는 주한과 유니를 한참 설득한 끝에 이현은 오피스텔을 나설 수 있었다. 그들이 라우에게 연락을 하거나, 라우가 그들에게 연락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가 그런 염려를 과감하게 중단시켰다.
누군가 자신을 걱정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고려해 행동을 제한할 수 있는 여유가 전혀 없었다.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라우를 향한 반발심은 희미하게 피어올라 그가 걱정을 하든 말든, 지금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싶었다.
10월이 가까워져 오는 밤공기는 써늘했다. 거대한 덩치의 고층 빌딩 사이로 내달리는 바람은 어깨를 움츠러들게 했다. 하지만 손에 든 재킷을 입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유니, 주한과 헤어져 혼자가 되고 나니, 이제는 문제를 해결해야 할 차례가 되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제대로 의식하고 파악해야만 했다. 이건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소극적 태도 같은 관념의 문제도 아니었다. 육체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니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하아….
오피스텔 앞 높은 화단에 걸터앉은 이현은 혼란이 묻어나는 한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피부가 아릴 정도로 얼굴을 벅벅 문지른 뒤 청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누구에게 연락을 해야 할까. 길게 고민할 필요도 없이, 빈약한 연락처에 저장된 번호는 채 열 개가 되지 않았다.
‘아위’라고 저장된, 이전에는 ‘대표님’이었던 이름 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엄지로 한참을 문질렀다. 그 이름으로 대표되는 기억을 쓰다듬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지워져 버리기를 원하는 것인지, 이현 자신조차도 알 수 없었다.
■ ■ ■
“이현 씨.”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인도에 바짝 붙여 차를 정차해 둔 인우가 반쯤 달리듯 이쪽으로 빠르게 걸어오고 있었다. 이현은 엉거주춤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죄송해요, 갑자기….”
“아니, 신경 쓰지 마요. 정말 괜찮으니까.”
바닥을 내려다보고 서서 입술을 잘근거리며 가방의 어깨끈만 만지작거리는 이현을, 인우는 채근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시답잖은 농담을 걸어오며 실실거리지도 않았다. 갑작스럽게 연락해 오늘 재워 줄 수 있는지를 물은 시점에서, 이미 평소의 자신과는 한참 동떨어진 행동을 한 셈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인우는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감지했을 것이다.
발부리를 향해 내리뜬 시선을 그대로 둔 채 이현은 가방끈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정말 죄송한데, 저, 오늘… 당장 갈 곳이 없어서…. 형이랑 누나랑, 같이 있기 싫은 게 아니라… 지금, 생각이 너무 복잡해서….”
“이현 씨, 설명하려고 할 필요 없어요. 일단 가요.”
이현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올리며 인우가 횡설수설을 가로막았다.
“…….”
하지만 이현은 차가 있는 방향을 향해 어깨를 당기는 힘을 따르지 못하고 그대로 자리를 지켰다. 이현이 쥐고 있던 작은 쇼핑백을 자기 손에 옮겨 들면서 인우가 흠, 숨을 내쉬었다.
“위쿤한테는… 얘기 안 할 테니까.”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인우에게 눈을 맞춘 이현은 이번에는 어깨를 끄는 힘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운전하는 중간중간 인우는 이현이 앉은 조수석을 힐끔거리긴 했지만,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그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이현은 모르는 척, 차창 밖의 풍경에 멍한 시선을 던지며 바싹 말라 갈라진 입술만 잘근거렸다. 이대로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설명할 필요 없고, 문제를 마주할 필요도 없는 먼 곳으로 달아나 버렸으면 좋겠다는… 너무나 자기다운 발상에 자조하면서.
언젠가 팬텀의 파티에서 얘기했던 대로 32층에 위치한 인우의 아파트 거실 창밖으로는 말 그대로 서울의 야경이 발아래 넓게 펼쳐져 있었다. 라우의 집 2층이나 옥상에서 바라보는 것과는 또 다른 개성을 가진 풍경이라는 생각을 하던 이현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와 연관된 생각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 전면창 앞에 바짝 붙어 서서 야경에 대한 감탄을 쏟아 놓았다.
“야경이 마음에 들었다니 그건 다행인데… 가방은 좀 내려놔요. 무슨 귀중품이라도 들었나?”
주방에서 두 개의 잔을 가지고 나온 인우가 등 뒤에서 창문을 통해 눈을 맞추며 피식 웃었다. 이현은 겸연쩍게 웃으며 백팩을 어깨에서 끌어 내린 뒤 건네는 잔을 받아 들었다. 인우의 잔에 든 것은 얼음을 넣은 위스키였지만, 이현의 몫은 따뜻하게 데운 우유였다. 큰아버지가 찾아왔던, 비가 퍼붓던 여름밤. 떨고 있던 자신을 욕조 속에 앉혀 놓은 라우가 가져다주었던 것과 같은.
“저, 형, 괜찮으시면 저도….”
“아… 집에 지금 맥주가 없는데….”
“저도 위스키 마실 수 있어요.”
어른들이 하는 건 다 할 수 있다며 오기를 부리는 것으로 오히려 스스로의 새파란 설익음을 드러내는 애처럼 굴고 있다는 생각에 이현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피식 웃으며 머리카락을 흩트리고는 우유가 든 잔을 가지고 주방 쪽으로 사라지는 인우의 등을 보면서 뒤늦게 후회스러웠지만, 굳이 그를 다시 불러 세우지는 않았다.
평소와 다른 언행의 연속에 당황스러운 것은 이현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관성과 통제를 벗어나 불쑥불쑥 돌출하는 예상 밖의 태도들은 망치로 두더지를 잡는 게임을 연상하게 했다. 그러나 자리를 바꿔 가며 약을 올리는 두더지를 잡기 위해 망치를 내려칠 의욕이 생겨나질 않았다.
얼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돌리던 이현은 소파 뒤쪽, 두 개의 전면창이 서로 마주 닿는 코너 앞에 어지럽게 흩어진 이젤과 그림 도구들에서 시선을 멈췄다.
캔버스 위의 작품은 채색이 반 이상 진행된 것 같았다. 난색을 주로 이용한 명랑한 만화풍의 그림체에 기괴한 분위기를 살짝 끼얹는 평소 인우의 작풍과는 거리가 있었다.
훨씬 더 과감하고 직설적이었다. 그러면서도 평소보다 더 풍부한 이야기와 감정을 담고 있었다. 익살스러운 농담으로 내면의 무게를 희석시켜 표현하려는 평소와 같은 의도가 느껴지지 않았다. 여유로움을 가장한 회피와 외면에는 이제 신물이 난다는 듯 캔버스 위에서 벌거벗은 채 버둥거리는 남자의 필사적인 몸짓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현 씨, 이쪽으로 와요.”
소파와 주방 사이, 열 명 정도의 인원이 거뜬히 만찬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길고 널찍한 식탁 앞에서 인우가 잔을 들어 보이며 이현을 불렀다.
“그림… 작업하고 계셨던 거예요?”
“난 원래 누가 옆에서 빤히 보고 있어도 잘 그리는 사람인데, 이현 씨가 본다고 생각하니까 괜히 쑥스럽네.”
“집에서 그리시는지 몰랐어요.”
“작업실을 따로 가져야 할 만큼 그림에 모든 걸 건 사람도 아니니까. 누구 말처럼.”
주방에서 가지고 나온 쟁반 위의 잔을 식탁 위에 내려놓으며 인우가 눈만을 들어 이현을 힐끔 쳐다보고 웃었다. 그가 말하는 ‘누구’의 정체를 알 것 같았지만, 이현은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렸을 뿐 달리 반응하지 않았다. 얼음을 서너 개 넣고 위스키를 부은 잔을 건네받으며 인우의 맞은편에 앉았다.
“작품 느낌이 조금… 달라진 것 같아요.”
“그림에 관해선 진짜 점쟁이네. 누구 말처럼.”
조금은 의도적으로 반복해서 라우를 언급하는 것 같아서, 이번에는 인우를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시선을 끌어 내리며 손안의 잔을 쓰다듬다가 뜨거운 커피를 마시듯 천천히 술을 입 안으로 흘려 넣었다.
“아마 이현 씨는 그림 앞에서만큼은 솔직하니까, 작가가 의도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림 속에 녹여 놓은 진심을 그렇게 잘 알아보는 거겠죠. 문학이나 음악처럼, 그림도 공부를 하면 그만큼 보이는 것들이 많아지고, 그에 따라 해석의 폭이나 깊이도 넓고 깊어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림을 학문적 해석의 대상으로밖에 보지 못하는 한계는 공부만 열심히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건 아니라고, 난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눈을 들어 인우를 바라보았다. 상체에서 힘을 빼고 의자에 느슨하게 몸을 기댄 인우는 장황하게 늘어놓은 진지한 이야기가 멋쩍은 듯 뒷목을 쓸며 웃고 있었다. 어쩌면 그의 변화는 그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지도 몰랐다.
모두가 어딘가로 나아가고 있었다. 자신이 변화를 두려워하며 사고와 상처가 뒤틀어 버린 모습 그대로 굳어 있는 동안, 자신과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은 충격과 변형마저 양분으로 삼아 안으로 끌어들여 흡수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상처가 곧 개성이었다. 라우의 말대로….
하지만 아무런 대가 없이, 상처 자체가 그대로 개성이 될 수는 없었다.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상처를 마주하고 에누리 없이 온몸으로 고통의 시간을 통과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광채였다.
아랫입술을 치아로 아프게 당기자 입술에 남은 술맛이 감돌았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라우가 자주 마시는 위스키의 독함은 그와의 키스를 연상시켰다. 바로 오늘 아침, 그가 외출하기 전에도 깊은 키스를 나누었지만, 지금은 전생의 기억을 더듬듯 아득히 멀고 흐릿하기만 했다.
이현은 술잔을 쥔 손과 입술을 문 치아에 힘을 준 뒤, 잔 속의 얼음을 뚫어지게 쏘아보며 이어 말했다.
“스스로 그림을 포기했던 사람을… 그림 앞에서 솔직하다고 할 수는 없을 거예요.”
“다시 그리고 있잖아요. 그림을 완전히 놓아 버릴 수가 없었던 거지. 그게 중요한 거죠.”
인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현은 자기 몫의 술을 모조리 비워 내며 자비 없이 단호하게 자신을 단정 지었다.
“감사하게도… 다시 그리게 됐죠.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수많은 모퉁이를 돌며 힘껏 달려도 결국 처음 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미로 속에 갇힌 것처럼, 라우에게로 귀결되는 대화를 피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이현은 쓰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소파 위에 두었던 쇼핑백을 가지고 돌아와 식탁 위에 그것을 내려놓고 인우를 향해 조금 밀었다.
“이거….”
“…….”
조금 커지는 인우의 눈이 내용물에 대해 묻고 있었다.
“스타벅스 시티 텀블러예요. 이건 시카고에서 산 거고, 이건… 보스턴에서….”
두 개의 텀블러를 하나씩 꺼내 놓으며 설명하던 이현의 손과 말이 문득 느려졌다. 풀썩 웃으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포장이라도 좀 할 걸 그랬네요. 제가 센스가 없어서….”
“텀블러 고른 거 보니까 센스 좋은데 뭘 그래요. 스타벅스 시티 텀블러가 이 정도면 굉장히 예쁜 편이거든. 보스턴에서도 사다 줄 줄은 몰랐는데. 둘이 오붓하게… 보내기에도 시간이 부족했을 텐데. 고마워요. 사실… 기억 못 할 것 같아서 별로 기대 안 하고 있었거든.”
보스턴에서 구입한 오렌지색 텀블러를 쥐고 감상하듯 이리저리 돌려 보면서 인우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입가에 아주 흐릿한 미소를 떠올렸다.
보스턴에서, 인우의 선물로 텀블러를 사고 싶으니 잠깐만 스타벅스에 들르자고 했을 때. 질투심을 드러내며 찡그렸던 라우의 미간과 어린 소년처럼 투정하던 말투. 그리고 텀블러를 고르는 자신을 방해하며 뒤에서 끌어안은 채 허리를 당기던 그의 팔의 감촉과 등에 닿았던 체온이… 눈앞의 텀블러 하나로 되살아났다.
그러나 그것 역시도 오늘 아침의 키스처럼, 영화나 소설에서 접한 가상 인물을 통한 간접체험처럼, 밀착력 없이 감각의 언저리를 겉돌았다.
‘둘이 오붓하게’라는 지점에서 자기도 모르게 말의 속도를 늦춘 인우의 반응으로 이현은 감지할 수 있었다. 오늘 자신의 갑작스러운 연락이 라우와 연관된 것일 거라고, 인우는 이미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하긴. 요즘의 자신에게서 라우를 제외한다면 무엇이 남겠는가. 대단한 추론을 끌어올 것도 없이 아주 간단한 문제였다.
강제로 멈춰 서게 된 지금, 뒤를 돌아보니 당장 하루하루의 생활뿐 아니라 삶이라는 거대한 설계와 관련된 사항들이 모조리 라우와 연관되어 있었다.
상대의 영향이 자신의 삶 자체를 좌지우지하는 것.
그가 있고, 없고에 따라 모든 것이… 가깝게는 의식주에서부터 멀게는 삶의 방향까지,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변화돼 버리는 것.
그것을 사랑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의존이자 위탁이 아닐까.
어머니를 잃고 세상을 등져 버린 아버지의 사랑처럼, 자신이 가장 두려워했던 방식의 사랑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먼바다에서 시작된 해일이 해변을 밟고 선 사람의 육감에 일으키는 미세한 진동 같은 새로운 공포를 떨쳐 내려, 이현은 술을 더 삼켜 냈다.
“보스턴에 있었을 때, 엘렌과 마커스의 집 근처에 진짜 멋진 스타벅스가 있었거든요.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이 아니라 개성 있고 전통 있는 지역 카페 같은 느낌의…. 아, 혹시 형도 엘렌과 마커스 아세요? 아마 아시겠죠? 대표님과 오래전부터 친구로 지내 오셨으니까…. 정말 좋은 분들이신데, 제가 갔을 때도….”
“이현 씨.”
등받이에 기대 있던 몸을 앞으로 기울여 테이블 위에 커다란 손을 툭 내려놓으며, 인우가 이현의 답지 않은 재잘거림을 멈춰 세웠다.
“아무것도 묻지 않을 테니까 억지로 떠들려고 할 거 없어요. 물론… 얘기하고 싶다면 언제든 들어 주겠지만.”
“…….”
인우를 응시하던 이현의 시선이 비스듬히 식탁 위로 기울었다.
연락처 목록에서 인우의 이름을 선택했을 때부터, 실은 그에게 도움을 구할 생각이었다. 충격의 여파를 그에게 분산시킬 작정이었다. 하지만 내막을 확인해 가는 과정에서 더 큰 손상을 입게 될 것이 분명했기에… 그것을 기정사실로 만들어 버리기가 두려워 시기를 늦추고 있을 뿐이었다.
아직 충분히 희석되지 않아 독한 알코올의 기운이 느껴지는 위스키로 입술을 적신 이현은, 인우가 아닌 잔에 눈을 고정한 채 누군가 자신을 조종하는 것처럼 홀린 듯 입을 열었다.
“오늘, 슈슈 작가님이 집에 오셨어요.”
“…….”
“대표님에게 할 말이 있어서 오신 것 같았는데, 금요일까지 대표님 스케줄이 꽉 차 있어서 오늘도 외출하셨었거든요. 누나랑 형 만나러 가기 전까지 시간이 남아서 같이 기다리다가….”
슈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려고 하니, 외계인을 만났다든가, 자신의 장난감 인형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허무맹랑한 얘기를 하려는 어린애가 된 기분에 헛웃음이 새었다.
골든 알파는커녕 평범한 알파나 오메가와도 별 인연 없이, 베타로 이루어진 세상만을 의식하고 살아왔던 자신에게는 ‘베타를 오메가로 만들 수 있는 고스트의 능력’이란, 인형과의 대화 이상으로 상식적이지 않은, 전설이나 괴담에 가까웠다.
이현은 잔을 쥐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뭉개듯 문지른 뒤 그대로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형은 혹시 아세요?”
어떻게 이야기를 이어 가야 할지 몰라, 방향을 틀어 인우에게 질문을 던졌다. 무너지는 육체를 억지로 떠받치듯 무겁게 턱을 괸 채 시선을 내리깐 이현은 지쳐 보였다.
“팬텀, 고스트…. 대표님이 그런 단어들에 집착하는 이유.”
“…….”
인우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고, 반대로 눈빛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그것을 본 이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불길하고 섬뜩한, 믿고 싶지 않은 예감이 전신을 차게 얼리는 것 같았다. 얼어 버린 몸 위로 누군가 사정없이 채찍을 갈겨 댔다.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순식간에 호흡이 흐트러졌고, 마른침을 삼키고 입술을 혀로 적셔 봐도 모래를 가득 문 것처럼 입 안이 버석거렸다.
알고 있는지를 물었지만, 그것은 질문의 형식을 빌린 것뿐이었다. 알고 있다는 반응을 돌려받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럼… 다른 것도… 알고 있었어요?”
잔을 쥔 손도 불길한 예감을 말로 옮기는 입술도, 의지와 무관하게 떨리고 있었다.
차마 제 입으로 인정할 수 없어, 무슨 말인가를 할 것처럼 입술을 벌렸다가 곧 질문과 관련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을 것처럼 꽉 다물어 버리며 비감하게 시선을 떨어뜨리는 인우의 얼굴. 그 자체가 답변이었다.
“아마 아셨나 보네요.”
계산을 거친 행동이 아니었다. 그저 견딜 수가 없어서, 숨 쉬고 살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잠시 몸을 숨기고 숨을 고르며 정비할 장소가 필요해 찾아든 곳조차도 실은 적진이었다. 지금까지 어떻게 모르고 지내 왔던 건가 싶을 만큼, 도처에 라우의 비밀을 아는 사람들뿐인 것 같았다. 위협과 위기는 바로 지척에 있었다.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들의 미소 바로 뒷면에.
평화로운 일상이란 얼마나 쉽게 파괴될 수 있는 연약한 유리 바닥인지… 어머니의 사고로 인해 충분히 학습했으며 지나칠 정도로 그것을 경계하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지만… 일단 삶이 심술을 부리기로 작정을 하고 나면, 거기에 충분한 대비란 있을 수 없었다.
가방이나 재킷을 챙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도 없이 그저 생존을 위해, 이현은 식탁 앞을 벗어나 현관을 향해 빠르게 그리고 거칠게 걸음을 옮겼다.
“이현 씨, 이현 씨!”
현관으로 이어진 복도의 중간 지점에서 인우는 강하게 이현의 팔을 붙잡았다. 강제로 몸이 돌려세워지며 마주한 인우의 얼굴은 필사적이었지만, 그런 것에 마음을 허물고 싶지 않았다. 단단해지고, 잔혹해지고 싶었다. 그의 가슴쯤을 향해 곧바로 시선을 끌어 내리며 이현은 허리를 숙였다. 그의 배를 밀어냈다.
“변명 같겠지만, 나도 얼마 전에야 알았어요. 이현 씨, 제발… 얘기 좀 들어 줘요. 지금, 위쿤도 나도… 꼴도 보기 싫겠지만… 이현 씨가 정 싫다면 내가 나갈 테니까… 조금만… 여기서 나가려고 하지만 말아요. 어? 지금 나가서 어디로 가려고 그래?”
두 팔을 붙잡고 일으키려 애쓰는 인우의 아귀힘에 팔이 저릴 정도였지만, 이현은 그 아픔을 의식할 수조차 없었다.
라우가 그만의 특별한 능력으로 자신의 몸을 오메가로 바꾸고 있다는 얘기를 슈슈에게 들었을 때. 그때는… 본능적인 충격은 있어도 실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눈앞에서 마주한 인우의 반응이, 막연히 떠도는 괴담 같았던 그 이야기를 실제 자신의 몸에 일어나고 있는 현실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이현이 도망치고 싶었던 대상은 인우라기보다는 그 현실감이었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날개 가진 벌레 떼를 떨치려는 사람처럼 이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형 잘못이 아닌 거 알아요. 잘못한 사람은 형이 아니라는 거. 근데 지금 저에겐, 머리로 아는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어요…. 머리의 기능이 멈춰서 사지가 제멋대로 따로 노는 것처럼… 통제가 안 된다구요! 저도… 침착하게 대처하고 싶은데… 몸이….”
“자책하지 마. 이런 상황에서 어떤 누가 침착할 수 있겠어? 그게 이상한 거야.”
“뭐가 이상한 거고, 뭐가 정상인 건지… 그런 것도 이젠 모르겠어요. 제가 이걸, 이 상황을… 대표, 님을… 어떻게…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해요?”
고개를 쳐들어 인우를 올려다보는 이현은, 나이에 비해 감정 변화의 폭이 크지 않았던 평소의 균형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혼돈 속에서 겁에 질린 어린 소년의 얼굴로, 인우의 팔을 붙잡고 흔들며 질문을 반복했다.
“이게… 도대체 뭐예요, 형?”
“…….”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기를 기다리며 라디오를 듣고 있던 택시를 덮쳐 온 트럭처럼.
아무런 전조도 없이 일상의 옆구리로 돌진해 들어와 모든 것을 때려 부수고, 흐름을 깨트리고, 계획을 망치고… 속살 안에 받아들였던, 자기 자신만큼 가깝게 느꼈던 사람의 감촉을 한순간 정체불명의 낯선 섬뜩함으로 만들어 버리는 파괴력.
그런 강도의 충격을 일생에 두 번 겪게 될 거라고는….
이현의 두 팔을 꽉 쥐고 쓴 약을 입 안 가득 문 것 같은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인우가 이현을 강하게 당겼다. 어깨를 끌어안고 등을 조이는 그는 힘을 전혀 조절하지 않고 있었다.
“이해할 필요도, 받아들이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어. 넌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으니까.”
“그럼 전… 뭘 하면 돼요? 어떻게 하면 돼요?”
“…….”
“비난하고 원망하고 책임을 따지고… 그럼 되는 건가요?”
“그렇게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면 돼.”
라우와 마주 보고 끌어안을 때보다 상대의 어깨가 조금 더 낮은 곳에 있는 느낌은 어색했다. 맞닿은 가슴의 체온과 귓가와 뺨이 겹쳐지는 감촉이, 그가 아니라는 사실이… 이현을 움츠러들게 했다.
하지만 이제는 라우와의 포옹에서도 이전과 같은 친근함과 안심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을 다른 사람의 품에서 깨닫고 있었다.
이현은 인우의 가슴을 천천히 밀어냈다.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 할 것처럼, 움켜쥐듯이 바짝 몸을 조이던 두 팔은, 좀 전까지의 압박이 거짓말인 것처럼 너무나 쉽게 스르륵 풀려나갔다.
이현은 휘청거리는 걸음을 가다듬으며 뒷걸음질 쳐 등 뒤의 벽에 털썩 몸을 기댔다. 최소한의 냉정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목소리를 낮게 가다듬었다.
“그런 다음에는요? 그렇게 실컷 감정을 배설한 뒤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예전으로 다시 돌아가면 되는 거예요? 아니면….”
아니면… 절대 용서해서는 안 되는 일인 건가요.
입술이 하얗게 질리도록 세게 깨물어, 뒤이어 하려던 말을 삼켜 냈다. 아직은 라우가 자기 몸에 일으켰다는 끔찍한 변화보다, 그가 자기 앞에서 보여 주었던 진실한, 적어도 그의 진실이라 믿었던 모습과 치유와 공감의 말들이 더 현실에 가까운 탓이었다. 그 축적들이 아직은 그를 옹호하려 시도하고 있었다.
“미안해…. 정말,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지…. 아니, 이미 이건 사과의 문제가 아니지…. 알게 된 시기가 언제였든 간에, 입을 다물고 있었던 나도 똑같은 미친놈이고….”
이현은 고개를 저어 인우의 말을 가로막았다. 인우의 말대로 사과의 문제가 아니었다. 침착해지기 위해 지금 필요한 것도 사과의 말이 아니었다.
이현은 아랫입술을 뜯으며 중얼거렸다.
“형이 미안하다고 하실 일은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모르겠어요….”
“알파인 나도 이해할 수가 없는데, 베타로 살아온 너는… 말할 것도 없겠지. 스스로 말해야만 네 충격이 조금이라도 덜할 거라는 그 자식 말에는 동의했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네가 받을 충격이 그렇게 무서웠다면, 그 자식은 애초에 이런 짓을 벌이지 말았어야 해. 그런 궤변에 넘어가 침묵하고 있었던 나도 이 일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거 알아."
인우의 목소리가 점점 흥분으로 고양되고 있었다. 그는 이현의 맞은편 벽에 등을 기대며 왁스로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피를 뽑기 전처럼 주먹을 힘주어 쥐었다 펴길 반복하며, 팔꿈치 아래까지 끌어 올린 맨투맨티셔츠 아래 드러난 자신의 팔뚝을 사나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페로몬이 날뛰었다. 한 번도 휘둘려 본 적 없었던 알파로서의 본능이 자신을 지배했다…. 그 대단한, 완벽에 가까운 골든 알파의 입에서 나온 변명치고는 너무 궁색하잖아? 페로몬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면… 널 보고 만지면서, 네 곁에서는 자신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면… 그럼 아예 네 곁에 있는 것 자체를 포기했어야지.”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던 주먹을 꽉 움켜쥐는 인우는 그것으로 뭔가를 내리치고 싶은 욕망을 참는 것처럼 보였다. 팔뚝의 혈관이 푸르게 불끈거렸다.
“욕정의 대상을 매일 바라보고 관찰했으면서… 강간의 의도는 전혀 없었다는 변명이나 다름없어.”
인우의 목소리는 속삭임처럼 낮고 조용했지만, 자신이 내린 결론에 재고의 여지는 없다는 듯 금속처럼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
강간이라는 단어가 주변과 체내의 온도를 몇 도쯤 낮춰 버린 것 같았다. 이현은 흠칫 몸을 굳히며 인우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눈앞에 없는 라우에 대한 분노로 끓어오른 그는 이현을 의식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성행위 자체에는 어떤 강요도 강제력도 작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일어날 수 있는 육체의 본질적인 변화에 대해 자신은 전혀 통보받지 못했다. 일반적 의미의 강간은 아니었지만, 인우의 비유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그것은 지나치게 부당한 비약이라며 선뜻 라우를 옹호하고 나설 수가 없었다.
정말 그런 것일까. 그는 강간만큼이나 역겨운 짓을… 내 몸에 한 것일까.
그 단어의 엄중함이 머릿속을 휘저으며 부유하던 온갖 잡념들에 찬물을 끼얹은 기분이었다. 차가워져야 한다. 일시적인 혼탁함 뒤의 진실을 왜곡 없이 보기 위해서는 차갑고 무겁게 가라앉아야만 했다. 하지만 쉽지는 않았다.
“어떻게… 베타를 오메가로 만들 수 있는 거예요? 어떤 방법으로 제가….”
목소리의 끝은 여전히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죄책감 가득한 인우의 시선이 조심스럽게 이현을 마주했다.
“노팅을 통해서인데….”
“…….”
“일반적인 노팅은 베타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지만… 고스트는 특별한 노팅이 가능해. 설명될 수 없는 어떤 화학 변화를 일으킬 수 있어. 그 상태로 베타에게 지속적으로 노팅하면 조금씩 오메가로 변하게 되고, 그걸… 체인징이라고 부른다고, 그렇게 들었어.”
슈슈에게서는 이렇게까지 구체적인 설명은 듣지 못했었다. 라우가 골든 알파이자, 베타를 오메가로 변화시킬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가진 ‘고스트’라는 것. 상대를 오메가로 바꾸려는 시도가 일어날 때마다 몇 시간 이내에 그의 눈동자 색깔이 말 그대로 유령처럼 혼탁해진다는 것. 그뿐이었다.
이현은 떨려 오는 몸을 스스로 단단히 감싸 안았다.
“그럼, 그 많은 노팅 때마다….”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 뒤에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가장 내밀한 교감이라 생각했던 라우와의 섹스가, 자신을 철저하게 기만한 그의 도구였다는 사실이 충격에 충격을 더했다.
믿고 싶지 않다는 듯 작게 고개를 가로젓는 이현의 어깨를, 인우가 다시 한번 힘주어 붙잡았다.
“내일 병원에 가자. 어느 정도 진행된 건지, 지금 멈추면 베타에 가깝게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건지… 검사해 볼 수 있을 거야. VIP 검진으로 조치하고 내가 직접 진료할 테니까.”
이현의 눈이 인우를 바라보았다. 이제 와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냐는 듯 초점이 흐릿한 눈이었다. 인우는 폭력 앞에 무방비한 어린 짐승 같은 이현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풀며 할 수 있는 한 가장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물론, 네가 준비가 안 됐다면 지금 바로 하지 않아도 돼.”
“검사 결과를 아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초음파만으로도 어느 정도 바로 확인이 가능할 거야.”
“자궁…이 발달한 정도로 알 수 있는 거겠네요.”
“…….”
강간이라는 단어에서 느낀 금속성의 날 선 써늘함만큼이나 자궁이라는 말이 일으키는 이질감이 낯설기만 해서, 절로 말이 느려졌다. 입매를 굳히며 시선을 피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하는 인우를 보면서 이현은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까지 함께 있고 싶으니 섹스하지 말고 같이 자자고 했던 라우의 말을 기억한다. 섹스한 뒤에 같이 자면 안 되는 거냐고 되물었던 자신의 질문을 뒤이어 떠올리자, 쓴웃음이 새었다. 그래, 그럴 수 없었겠지…. 그때 그는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보았던가.
안타까움? 미안함? 갈등과 애처로움? 어떤 복잡한 이야기가 그 안에 뒤섞여 있었더라도, 이 순간, 그의 감정을 헤아리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막아서고 싶지 않았다.
이현은 숨을 깊이 들이쉬면서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홍콩에서의 첫 삽입과 첫 노팅 후, 정신 나간 사람처럼 자신의 몸에서 정액을 긁어냈던 그의 다급함의 이유를… 몇 번이나 반복해 사과했던 이유와 ‘불필요한 뒤처리’의 이유를, 지금은 막연하게나마 알 것 같았다. 수습할 수 없는 것을 수습하기 위해 뭐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의 혼란을.
「원해요. 그거 해 줘요. 노팅… 또 해 줘요.」
그에게 노팅을 조르던 자신의 음란한 속삭임들이 생생했다. 스스로의 상박을 안고 있던 팔을 풀어 얼굴을 마구 짓이기듯 쓸어내렸다. 다시금 가파르게 빨라지는 호흡을 제어하기가 어려웠다. 차라리 라우의 거실에서 처음 <소외>를 다시 마주했을 때처럼 정신을 잃었으면 했지만, 미련한 육체는 고통의 모든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볼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했던 모든 시간이 다르게 보였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규범과 도덕에서 해방되어 거창하게도 자유로움마저 느꼈던 그와의 섹스. 섹스가 끝난 뒤 다시 떠올리면 혼자서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만큼 노골적인 말들을 지껄이고도, 상대에게 더 깊은 친밀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던, 서로에게 밑바닥을 보이고 이해받은 것 같은 깊은 안심.
그것들은 전부 착각이었다. 그에게는 자신과의 섹스가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다른 방향의 목적을 가진, 적어도 다른 목적을 포함한 행위였던 것이다.
“내가 그랬어요….”
“…….”
“내가 해 달라고… 노팅해 달라고, 원한다고… 몇 번이나….”
“그게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라고!”
인우가 이현의 어깨를 흔들며 격양된 목소리로 외쳤다. 자신의 잘못이라는 뜻에서 한 말이 아니었지만, 인우의 오해를 정정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라우 위쿤이 개자식일 뿐, 너는 아무것도 몰랐던 피해자야. 넌 조금도 네 탓을 해서는 안 돼.”
“…….”
큰아버지가 찾아왔던 그날처럼, 비에 흠뻑 젖은 것 같았다. 멍청하게도, 그날 차에서 뛰어내려 아무것도 묻지 않고 먼저 자신을 안아 주었던 라우의 체온이 그리웠다. 지금 이 차가움 속으로 내몬 것이 그인데… 그의 체온으로 따뜻해지고 싶어 하다니….
자신의 사랑은 아마도 의존과 위탁이었을 것이란 생각 끝에, 이현의 눈에 물기가 스몄다. 감정적으로 굴고 싶지 않아 틈을 주지 않고 곧바로 그것을 닦아 내려 손을 든 순간, 인우의 고개가 깊숙이 기울어졌다.
“…….”
혀가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입술이 눌릴 정도로 깊숙이 겹쳐지는 입맞춤이었다. 굳어 버린 이현이 두세 번 느리게 눈을 깜빡이는 동안, 인우는 입술의 각도를 조금 비틀어 안쪽의 점막을 가볍게 비빈 뒤 천천히 입술을 떼어 냈다.
“……뭐예요, 이게.”
등허리에 누군가 총을 겨누기라도 한 것처럼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이현이 입술만을 움직여 물었다. 이현의 어깨를 붙잡고 있던 손을 떼어 내 항복하듯 손바닥을 내보인 인우가 자신의 뒷목을 문지르며 어색한 미소를 만들었다.
“새로운 충격을 받으니까… 체인징의 충격이 잠깐이라도 사라지지 않았나?”
평소처럼 가벼운 태도로 질 나쁜 장난을 걸었던 척하고 있었지만, 인우의 눈빛은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입술은 경련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대답을 요구하듯 똑바로 올려다보는 이현의 시선에 그는 곧 건들거리는 연기를 포기했다. 다문 입술 사이로 무거운 숨을 흘리고 무언가에 날카롭게 긁힌 눈으로 이현을 찌르듯 바라보았다.
“못 보고 있겠어.”
“…….”
“너에게는 나 역시도 이 일에 연루된 개새끼일 뿐이라는 거 알아.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 자식처럼 네 몸을 바꾼 당사자는 아니야. 그 자식이 널 진심으로 원하고 아낀다고 생각해서 물러났었지만, 그것만 아니었다면….”
“그런 가정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인우의 가정과 함께 좀 전의 입맞춤 역시도 자신에게는 어떠한 의미도 없다는 듯, 이현의 목소리는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형도 이 일로 충격이 크다는 건 알겠어요.”
그렇게 결론지으려 하는 이현의 앞으로 인상을 쓴 인우가 성큼 다가섰다.
“그런 식으로 모르는 척하려고 하지 마. 너도 기억하겠지만, 호감을 더 먼저 드러냈던 건 나였어.”
“네, 기억해요. 그리고 거기 있었던 게 제가 아니었더라도 형은 똑같은 행동을 했을 거라는 것도 알아요.”
“…….”
데이트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혹은 한 번 같이 자기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말끝마다 수작을 걸어왔던 초반 인우의 태도는, 어떤 진심도 담기지 않은 전형적인 바람둥이의 습관적 행동에 불과하다고 여겼었다.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결정적인 선을 넘으려 하지는 않았기에 이현은 그를 내버려 둔 채 반응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 이상의 감정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의 가벼워 보이는 태도 뒤에 내재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이제 와서 그 가능성을 언급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행위였다.
그때 아버지가 다른 반응을 보였더라면, 그때 어머니가 사고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우리가 레스토랑을 다른 곳으로 바꾸지 않았더라면, 트럭 운전사가 제때 차량 점검을 받았더라면…. 그런 가정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형도 너무 혼란스러워서… 잠깐 실수한 거라고, 그렇게 생각할게요.”
이 일은 이제 그만 여기서 마무리 짓자고, 지친 목소리로 얘기하는 이현을 인우의 눈이 원망을 담아 바라보았다.
“나에 대해서는 혼란조차도 느끼지 않는구나.”
“…….”
“나에 대해서는 이렇게 침착하게 대처할 수가 있어.”
굳이 지금 이 시점에 또 다른 문제를 자신에게 던지려 하는 인우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의 감정이 진심이든 아니든, 지금은 깃털 하나만큼의 무게도 더 견딜 자신이 없었다.
“저, 오늘… 다른 곳에서 잘게요.”
재킷도 가방도 없이, 아무 대책도 없이 현관 쪽으로 돌아서려 하는 이현의 어깨를 붙잡아 돌려세우는 인우의 손은, 이번에는 조심스러울 것 없이 단호했다.
“그럴 거 없어요. 이현 씨 말대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충동적 실수였으니까.”
“…….”
“근데.”
“…….”
“실수에도 타이밍이 있나 봐.”
아프도록 꽉 쥔 이현의 한쪽 어깨를 거실 쪽으로 밀면서, 인우는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겉으로만 실실거리면서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겁쟁이로 사는 것보다… 목숨을 건 일생일대의 실수를 벌이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드네.”
쓰게 자조하는 목소리로 인우가 등 뒤에서 중얼거렸다. 떠밀리며 거실 쪽으로 걸어가던 이현이 뒤를 돌아보자, 그가 격려하듯 어깨를 두어 번 주무르며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못 보던 얼굴인데, 누구? 새 애인?」
팬텀 앞에서, 라우의 자동차 앞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렇게 말하며 호기심 어린 흥미를 보였던… 그때의 인우가 겹쳐 보였다. 하지만 틀린 그림 찾기의 두 그림처럼 어딘가 미묘하게 어긋나는 구석이 있었다.
보지 말라는 듯,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이현의 뺨을 손으로 부드럽게 밀어내면서 인우가 피식 웃었다.
“그럼 적어도… 뭔가가 일어나긴 할 테니까.”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더는 웃고 있지 않았다.
■ ■ ■
모래가 소장하고 있었던 많은 책들 중,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저서가 있었다.3) 장르와 내용을 가리지 않고 그녀에게 여러 권의 책을 빌려 읽으며 시간을 죽이곤 했었지만(당시에는 어떤 훌륭한 책이든 이현에게는 시간을 죽이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었다), 매끄럽게 다듬어지지 않은 데다 오역이 난무하던 그 책을 어떻게 해서 선택하게 됐었는지, 지금에 와서는 그 과정의 기억은 흐릿했다.
활자로 시간의 봉투를 채워 가득 차면 내버리고, 또 다음 봉투를 펼쳐 활자를 쑤셔 넣기를 기계적으로 반복했던 행위였기에, 문장의 유려함이나 가독성은 당시 이현에게 문제가 되지 않기도 했었다.
분명 모국어 활자임에도 불어 원서를 읽는 것처럼 더듬더듬 느리게 읽어 나가야 했던 그 불친절한 번역 속에도, 자신의 삶으로 가져올 만한 문장이 있었다.
‘선물을 주는 주체는 그것에 상응하는 가치를 되돌려 받거나, 상대의 기억에 남겨지는 것을 바라서는 안 된다. 또는 자신의 의식 속에서도 상대를 위한 희생의 상징으로 그것을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당시 이현은 그 구절을 통해 모래와 이한을 떠올렸었다.
겉으로 멀쩡히 밥도 먹고, 잠도 자고, 학교에도 가고, 군대에도 다녀오고… 말썽 한 번 피우는 법 없이 조용히 지냈던 이현을 집안 어른들은 문제가 없는 아이로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저 주어진 임무를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것에 불과했다.
시험 일정이 고지되면 성실히 준비했지만, 높은 점수를 얻고 싶다는 욕망 때문은 아니었다. ‘그런 일’을 겪고도 반항 한 번 하지 않았지만, 어른들의 생각처럼 ‘다행스럽게도 모든 것을 잘 이겨 낸 속 깊은 아이’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격렬한 충격과 혼란, 원망이나 슬픔 따위를 느끼지 못하도록 내면을 무감각하게 만들어 가고 있었을 뿐이다. 인간적인 욕구와 감정이 완전히 탈수되어 진심으로 웃거나 진심으로 화내지 못하는 상태는, 조용한 죽음, 소극적 죽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사람을 곁에 두고도 그 무기력에 함께 매몰되지 않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무감각한 상태로나마 자신이 생을 유지해 나갈 수 있도록 비춰 주는 그들의 빛과 에너지는 어딘가에서 저절로 샘솟는 것일 리가 없었다.
아버지가 세상과 함께 자신을 외면했어도, 세상이 전부 자신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모래와 이한이 있었다.
다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선물이었다.
상응하는 가치를 되돌려 받기를 기대하지 않는, 상대가 알아주는 것조차 바라지 않는, 자크 데리다가 주장한 선물의 조건에 온전히 부합하는 선물.
그 책의 내용에 대해 대화를 나누면서, 모래는 자크 데리다의 다른 정의에 대해서도 언급했었다.
‘만약 용서할 만한 것을 용서하겠다고 한다면, 용서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용서는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
오토바이의 간단한 부품을 교체하는 동안 단골 수리 센터의 낡은 소파에 앉아 모래와 함께 사장님이 내준 율무차를 마시면서, 이현은 아버지를 떠올렸었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할 수 있는, 그런 성숙함을 갖추고 있었다면… 감정을 마취시키는 것으로 자신을 보호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용서할 수가 없었고, 용서할 수 있는 방법도 알 수가 없어서, 거기에 대해서도 그저 무감해지려 했었다.
아버지를 봐도 눈시울이 벌겋게 젖어 들지 않도록, 날 선 말들을 쏟아내 감정을 소모시키지 않을 수 있도록, 수돗가의 세숫대야나 마당 한쪽의 빗자루를 보듯, 아무런 감정 없이 아버지를 볼 수 있도록, 마음의 표면을 딱딱하게 만드는 것이 당시의 이현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팬텀으로 이어진 오르막길을 서행하는 택시 안에서, 따스한 불빛을 밝힌 저녁 무렵의 삼청동 거리를 내다보며, 이현은 이번엔 라우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한 일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일까.
아버지의 침묵과 마찬가지로?
중학교를 마침과 동시에 어촌 마을로 옮겨 가, 모래와 이한 외의 사람들과는 거의 교류도 없이 좁고 단조로운 세계에서만 지내 왔던 이현에게, 팬텀은 활기가 넘치고 화려하고 예측이 불가하면서도, 예술에 대한 열정과 존중이 공존하는 신세계였다.
처음 한 실장을 따라가 전시회 준비를 도왔던 날, 팬텀을 떠나는 택시 안에서 느꼈던 감정이 여전히 생생했다. 차의 방향을 틀어 돌아가 보면, ‘갤러리 팬텀’이 있던 자리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을 것 같았던 비현실적 감각. 혹은 너무나 현실처럼 느껴지는 꿈을 꾸고 난 뒤처럼 얼떨떨한 기분.
그때 이현은 묘하게 틀어진 현실 감각 뒤에서 ‘욕구’를 느끼고 있었다. 팬텀이 현실이기를,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기를 바랐다.
빛을 차단해 어둡게 하고, 물을 주지 않아 바싹 마르게 해도, 인간의 가슴에는 기어코 빛이 새어 들고 물이 스며 언젠가는 욕구가 자라게 된다는 증거로, 이현은 그 후에도 착실히 욕구를 증식시켜 왔다.
<소외>로 인해 과호흡을 일으켰던 밤, 침대 위로 올라온 라우의 접촉을 거부하지 않았었다. 키스와 섹스와 노팅을 나 외의 다른 사람과 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그를 향한 욕구를 분명하게 드러냈었다.
그리고 라우는… 나를 통해 그 자신의 욕구를 추구하고 있었다. 내가 욕구하는 대상이 반드시 같은 방식으로 나를 욕구하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이번에야말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결실로 이어질 거라고 조심스럽게 낙관하며, 미래니 희망이니 극복이니… 그런 개념들을 불러들였었던 자신을 비웃으며, 이현은 차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트렌디한 카페와 상점들이 즐비한 거리는 월요일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짧은 가을의 정취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활기를 띠고 있었다.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모두 베타로 여기며 스쳐 지나갔던 사람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오랜 친구의 얼굴처럼 유심히 바라보는 사이, 팬텀의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현은 땀이 배어난 빈손을 허벅지 위에서 꽉 움켜쥐었다.
다이아몬드 더스트 6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