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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디디(DD) (22/31)

   2. 디디(DD)

하버드 대학을 천천히 돌아보는 데에는 두 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 9월 중순의 맑은 가을 날씨에, 대학이라기보다는 전원 마을 같은 느낌의 캠퍼스 내부를 둘이서 느긋하게 이곳저곳 걸어 다녔다.

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물론 많았지만, 운동이나 산책을 나온 지역 주민들도 드물지 않게 눈에 띄었다. 대학과 대학 외부가 담이나 벽 따위의 경계선으로 정확히 구분 지어져 있지 않은 구조 덕에, 세계적인 명문 대학이라는 타이틀이 연상시키는 권위적이고 근엄한 이미지와 달리 상당히 지역 친화적이었다.

마커스, 엘렌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한 후 11시쯤 그들의 집을 나선 우리는 보스턴 미술관에서 에드워드 호퍼의 <브루클린의 방>을 비롯한 소장품들을 감상한 뒤, 1번 버스를 타고 찰스강을 건너 하버드로 이동해 왔다.

그렇다. 우리는 함께 버스를 탔다. 나에게 좀 더 친근한 형태의 여행을 하기 위해 그는 일부러 보스턴에 차를 준비해 두지 않았다.

어제, 시카고에서 보스턴으로 올 때는 전세기를 탔지만.

버스와 전세기를 이용한 여행.

미국 국내선 비행기는 일등석은 물론이고 비즈니스 클래스 좌석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라, 그는 미국 내에서 이동할 때는 주로 전세기를 이용한다고 했다.

미국은 이런 전세기 임대가 상당히 활성화되어 있어(그의 말에 의하면 공항마다 상주해 있는 렌터카 회사들처럼) ‘생각만큼’ 비싸지 않다며 그는 나를 안심시키려 했었다. 내가 없었더라도 전세기를 탔을 거고, 기준 인원 이내라면 한 명이든 두 명이든 렌트 비용은 결국 같기 때문에 나를 위한 추가 지출은 없다는 설명이었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편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공항에 도착한 그와 나는 택시를 타고 곧장 비컨힐(Beacon Hill)이라는 동네로 향했다. 열세 살부터 열다섯 살까지 그가 홈스쿨링을 하며 살았던 집, 그가 완벽에 가까운 골든 알파가 될 수 있도록 곁에서 지도해 주었던 은사와도 같은 분의 집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페로몬, 그중에서도 특히 알파의 페로몬에 대한 세계적 권위자로, 보스턴에 있는 대학에서 오랜 세월 연구하며 학생들을 지도해 온 마커스는 부인인 엘렌과 함께 30년째 그 집에서 거주 중이었다.

마커스와 엘렌은 상상만큼, 아니, 그보다 더 친절하고 다정한 분들이었다. 그분들은 예의나 사교로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를 반가워하셨다. 몇 년이나 만나러 오지 않은 그를 원망하는 말들은 반대로, 몇 년 만에 그의 얼굴을 본 행복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가 연인이라고 소개한 나에 대해서도 똑같이 따뜻한 환영을 보여 주었다. ‘제 소중한 사람’이라는 설명을 들었던 제인이 나에게도 아들을 대하는 것 같은 다정한 미소를 보였던 것처럼.

보스턴에서 우리의 숙소는 오성급 럭셔리 호텔의 스위트룸이 아닌 마커스와 엘렌의 집이었다. 그분들이 예전 모습 그대로 남겨 놓은, 10대 소년이었던 그가 사용했던, 집 앞 골목이 내다보이는 2층의 가장 끝 방.

어제는 오후에 도착해 마커스, 엘렌이 우리를 위해 준비한 식사를 좋은 와인과 함께 즐기고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지나갔다. 그리고 오늘은 저녁 식사 시간까지는 그와 관광을 할 수 있었다. 이번 미국행에서 단 하루 주어진, 단둘만의 시간이었다.

서울에서 주로 입는 세련된 슈트나 스마트한 캐주얼이 아닌 의상 탓인지, 아니면 고급 세단의 운전대를 잡고 있거나 뒷좌석에 타고 있지 않아서인지, 그는 평소보다 훨씬 어려 보이고, 조금은… 껄렁해 보이기까지 했다.

검은색 팬츠에 검은색 신발, 검은색 티셔츠에 가죽 재킷을 걸치고 팬츠의 뒷주머니나 재킷의 주머니에 손을 꽂은, 혹은 나의 어깨에 팔을 걸친 그는 걸음걸이나 표정마저도 평소와 조금 달랐다.

존 하버드 동상의 왼발 발등을 만지면 자손이 하버드에 입학하게 된다는 속설을 얘기해 주며 반들반들하게 광이 나도록 칠이 벗겨진 동상의 발등을 만질 때, 그는 내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 「서울에 돌아가면 일단 하버드에 입학할 자손부터 열심히 만들어야겠네.」라며 짓궂은 농담을 하기도 했다.

동상 앞에서 그와 나는 우리 삶의 두 번째 셀카를 함께 찍었다. 화면 속의 우리는 여전히 어색했다. 자신을 향한 렌즈 앞에서 편안하고 자유로운 그도 셀프 촬영 모드에는 영 익숙해지기 어려운 것 같았다. 찍힌 사진을 보고는 내 머리카락을 흩트리며 픽 웃었다.

어색한 기념 촬영을 마지막으로 투어가 끝난 후에는 선물을 사기 위해 기념품 매장에 들렀다. 시카고와 마찬가지로 보스턴에도 특산물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며 하버드 티셔츠나 몇 장 사 가자고 귀찮다는 듯 얘기하는 그의 옆모습을 보며 티 나지 않게 웃었다. 정말 귀찮으면 아무것도 안 사 가도 될 텐데.

COOP이라는 간판을 단 매장의 규모는 엄청났다. 일상의 모든 물품에 하버드 로고를 붙여 놓은 것 같았다. 의무적으로 선물만 구입한 뒤 바로 나갈 것처럼 관심이 없어 보였던 그는 의류 코너에서 회색 바탕에 벽돌색으로 HARVARD라고 새긴 후드티셔츠를 입어 보라며 부추겼다.

“음… 어때요?”

탈의실에서 나온 뒤 그에게 그렇게 묻긴 했지만, 어떻고 말고 할 것도 없는 누구에게나 어울릴 만한 지극히 무난한 티셔츠였다.

고개를 어깨 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이고 잠깐 나를 쳐다보고 있던 그가 눈동자를 굴리고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한숨과 함께 천장을 올려다봤다. 반응의 이유를 알 수 없어 잠자코 서 있는 내 쪽으로 다가와서는 뒷목을 감싸 쥐며 가까이 당겨 이마를 맞대었다.

“사람들이 내가 미성년자하고 데이트하는 줄 알겠는데.”

“그 정도는….”

“그 정도야.”

내가 끌려가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얼른 벗어야겠어. 목소리를 낮춰 말하며 주변을 둘러보는 그의 표정은 진지했지만, 이게 그의 농담이었다.

탈의실로 들어가 다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나에게서 티셔츠를 받아 간 그는 원래 자리에 그것을 되돌려 놓는 대신 쇼핑 바구니 안에 추가했다.

내 시선의 의아함을 눈치챘는지 3층짜리 진열대에 가득 채워진 머그컵 중 하나를 집어 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며 그가 설명했다.

“지금 여기서 입지 말라는 거지, 안 산다는 얘긴 아니었는데? 많이 어려 보인다는 거지, 안 어울린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었고.”

고개를 저으며 피식거리자, 그도 내 쪽을 돌아보며 씩 웃었다. 그리고 철제 기둥에 붙어 있는 하버드 마크의 마그넷을 떼었다 다시 붙이기를 반복하며 말했다.

“형이랑 누나 것도 뭔가 사는 게 어때.”

“티셔츠, 머그컵, 노트랑… 연필도 샀잖아요.”

그가 들고 있는, 이미 수북해진 바구니 안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아니, 발리.”

“…….”

의도한 것도 아닌데 시선이 저절로 아래를 향했다. 그의 호의와 배려로 이런 여행을 하고 있었지만, 고마움 외에 미안함이나 부담을 전혀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꼭 내가 아니더라도 그는 자신의 주변 사람들, 특히 자신보다 어린 사람들에게 아주 관대했지만, 나에게 주는 것들은 관대함이나 호의, 친절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우리가 연인이라고 하더라도.

심지어 그는 여행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사용할 용돈까지 서울에서 미리 따로 챙겨 주었다. 그 돈으로 나는 누나와 팝콘, 커피를 사 먹고, 카페에서 머핀을 먹고, 미술관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인우 형에게 줄 텀블러를 구입했다. 그 돈으로 모래와 형의 선물을 사도 되겠지만, 그것도 결국은 그의 돈이었다. 남겨 두었다가 그에게 돌려줄 생각으로 최대한 아껴 쓰고 있었던.

“서이현, 우리 사귀는 사이 아닌가?”

내 침묵의 의미를 아마도 그는 간파했을 것이다. 그가 다트를 하듯 철제 기둥에 마그넷을 붙여 놓고 나를 돌아봤다. 그리고 머그컵 진열대의 가장자리를 붙잡고 선 나에게 다가와 어깨에 팔을 걸쳤다.

“그냥 사귀는 것도 아니고… 서로 사랑한다고도 했고, 결혼 얘기까지 오간 사이잖아.”

그가 관자놀이를 내 옆머리에 부딪히며 계속 말했다.

“아, 결혼 얘기는 내가 거절당했지만.”

그의 말에 웃어 버렸다. 그가 고개를 숙여 귓가에 입술을 바짝 대고 목소리를 낮췄다.

“그깟 1억, 넌 금방 상쇄시킬 거야.”

“…….”

“그리고 나에게서 자유로워지겠지.”

어깨에 두른 팔을 거둬들인 그는 나보다 앞서 걸어가 자그마한 동물 캐릭터 인형을 매단 열쇠고리를 잔뜩 걸어 둔 벽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1억을 상쇄시키기 전이더라도, 뉴욕으로 가게 된다면 아르바이트를 할 수도 있을 거고.”

“……그래도 돼요?”

그의 앞으로 바짝 다가가 오른손을 붙잡으며 물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나의 얼굴 구석구석을 더듬듯 내려다보았다. 내 눈이 빛나고 입술이 웃고 있다는 걸 그제야 자각했다. 나도 모르게 붙잡은 손을 힐끔 내려다본 그는 열쇠고리에 매달린 곰 인형을 내 코에 문질렀다.

“결혼 얘기를 꺼냈을 때보다 반응이 더 좋아서 심란한데.”

“…….”

그가 웃으며 뒤로 물러나 열쇠고리를 원래 자리에 걸어 두었다.

“넌 그래도 되냐고 물었지만, 이건 내가 허락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지. 설마 ‘임 선생’이 뉴욕까지 사람을 보내서 너를 미행하거나 납치할 사이즈의 인물은 아닐 거고. 거기서라면 일을 해도 위험하지는 않을 테니까.”

내가 그에게 모래의 아버지가 ‘임 선생’으로 불린다는 얘기까지 했던가 잠시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그라면 확실한 일 처리를 위해 좀 더 이것저것 알아봤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래와 형에게 보내 줄 선물까지 포함해 계산을 마치고 매장 밖으로 나온 뒤, 우리는 버스를 타고 다시 찰스강을 건넜다. 마커스, 엘렌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로 한 7시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고, 얼마 안 되는 시간이지만 우리는 그 시간을 온전히 둘이서만 보내기로 했다.

“너무 허름한가?”

그가 테이블에 팔을 기대며 물었다.

“영화에서 보던 그런 미국 같아서 좋은데요.”

8절 정도 되는 크기의 종이에 글자를 빼곡하게 써 넣은 한 장짜리 메뉴판을 손에 들고 펍 안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보스턴 다운타운 모퉁이 한 건물의 2층에 위치한 펍은 지금까지 그와 함께 갔던 다른 음식점이나 바들처럼 세련되거나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아니었다. 미국까지 왔으니 가장 미국스러운 펍에도 한번 들러 보는 게 어떻겠냐며 그가 데려온 곳이었다. 허름하고 대중적이지만 그만큼 편안한 분위기였고,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방문했을 때보다 더 미국에 왔다는 실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점심과 저녁 사이의 애매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펍 안은 시끌벅적했고, 창문이 있음에도 실내는 어둑했다. 창문 앞 반원 형태의 안락해 보이는 좌석이 남아 있었지만, 우리는 둘뿐이었고 오래 있을 예정이 아니었기에 입구의 오른쪽 벽을 따라 세워 놓은 스탠딩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저녁 식사에서 입맛을 잃지 않기 위해 간단히 맥주 두 병과 양파 튀김을 주문했다. 음식은 금방 서빙되었다.

“좀 아까 뉴욕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맥주의 첫 모금을 마신 그가 상체를 굽혀 자신의 배꼽쯤 오는 테이블에 몸을 기댔다.

“생각보다 빠른 진행이 가능할 것 같아.”

클로이 켄트의 점심 모임에서 기대보다 이야기에 많은 진전이 있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파티에서 그가 클로이에게 얘기했던 작가의 전시회를 H&W 뉴욕 지점에서 강하게 원했고, 그는 자신의 아버지와 그 자신이 소유한 작가의 작품들을 좋은 가격에 대여하기로 거의 합의를 본 것이나 다름없다고.

“그리고 물론 그 대가로 팬텀의 뉴욕 지점 오픈도 순조롭게 진행될 거고.”

그는 맥주를 두어 모금 더 마신 뒤 내 쪽으로 깊이 몸을 기울였다.

“서둘러 준비하면 내년 봄에 맞춰 오픈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아.”

클로이가 소개해 준 사람들 중에는 지점 오픈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적절한 거래처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며 그걸로 시간을 상당히 절약할 수 있게 됐다는 얘기가 이어졌다.

지금은 벌써 9월도 반 이상이 지난 시점이었다. 내가 아무리 세상 물정에 어두운 어린애라도, 뉴욕 같은 대도시에 갤러리를 오픈하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서울이라는 먼 곳에서 메일이나 화상 회의, 전화만으로 진행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일이라는 것도. 게다가 그는 자신을 대신할 누군가를 고용해 이 일을 처리하길 원하지 않고 있었다. 언젠가 누나가 했던 말을 빌리자면, 팬텀은 그에게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증명의 문제였으니까.

“그러기 위해서 예상보다 좀 더 빨리… 뉴욕에서 지내야 할 것 같고.”

망설이는 얼굴로 그렇게 얘기한 그는 상체를 곧게 펴고 맥주를 마셨다. 말없이 맥주병의 목을 만지며 서 있는 나를 조금 쳐다보다가 자세를 고쳐 원형 테이블의 양쪽을 손으로 짚었다.

“바로 뉴욕으로 완전히 옮기겠다는 게 아니라, 준비를 하려면 아무래도 왔다 갔다 하는 것보다는 그쪽에 머무는 게 효율적이니까.”

“…….”

“조금 긴 여행이라 생각하고… 같이 가 줬으면 좋겠는데. 넘쳐 나는 미술관과 갤러리를 돌아보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완전히 옮길 것인지에 대한 결정은 갤러리가 준비된 후에 해도 되니까.”

자신 없는 시선이 내 얼굴 위에 머물렀다.

“언제쯤….”

그가 긴 중지로 지압하듯 미간을 누르며 대답했다.

“서울로 돌아가는 대로 일단 한 실장과 얘기를 해 봐야 하겠지만, 지금 예상대로만 정리가 된다면 2주일 안에는 뉴욕으로 갈 생각이야. 거긴 내 아파트도 있고, 사적인 물건들만 챙기면 되니 거주지를 옮기는 자체의 문제는 그리 번거로운 일도 아니니까.”

홍콩에만 거액의 집이 두 채, 서울에도 내가 아는 게 두 채, 그 외에도 런던 사우스켄싱턴과 뉴욕 어퍼이스트에도 그가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던 누나의 말이 생각났다.

그는 가죽 재킷의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가 작게 욕설을 중얼거리며 다시 그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펍은 금연이었다. 대신 맥주병을 기울여 갈증이 나는 사람처럼 빠르게 연거푸 삼켜 내는 그를 바라보며 나 역시 맥주를 비워 나갔다.

팬텀이 그에게 먹고 살아야 하는 생업의 문제가 아닌 자기 증명의 수단이라면, 어째서 그가 그동안의 방침에 급격한 변화를 주면서까지 뉴욕 지점 오픈을 서두르는지. 그것에 대해 확인해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그와 함께 뉴욕으로 가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분명히 해야만 하는 부분이었다.

벽 쪽으로 좀 더 몸을 이동시켜 그에게 가까이 다가서면서 몇 번이나 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이미 대표… 쿤에게, 너무 많은 걸 받고 있지만… 혹시라도 저 때문에 아위가 뭔가 중요한 것을 희생하시거나… 자신을 바꾸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점점 떠들썩해지는 펍 안의 분위기와 무관하게 그의 차분한 시선이 나를 응시했다.

“전… 지금도 충분해요. 부족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어떤 무엇도… 저 때문에 무리하시거나, 희생하지 마세요….”

고개를 숙여 손에 쥔 맥주병을 내려다보고 다시 얼굴을 들었을 때도 그의 눈은 그대로였다. 파도가 잠잠한 날, 평화롭게 햇빛을 반사시키는 바다 같았다.

“제가… 오버해서 생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

“뉴욕 지점 오픈 서두르시는 게 혹시, 저 때문인 건지….”

내 눈을 응시하던 그가 벽 쪽으로 기대서면서 가까이 다가왔다. 조명이 잘 닿지 않는 어두운 구석에서 나란히 벽에 기대 바의 홀을 내다보고 서 있는 구도가 되었다. 나는 그를 향해, 그는 나를 향해, 몸의 방향을 조금 틀었다.

벽에 뒷머리를 기댄 그가 오른팔을 뻗어 나의 긴 머리카락을 넘겨 귀 뒤에 꽂아 주었다. 펍 안쪽의 한 그룹이 요란하게 환호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내기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선의를 베푼 기억이 없는데, 어떻게 이런 천사를 만났을까.”

상황을 비틀어 표현하는 말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표정과 말투만으로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비트는 말이라 하더라도 그 뾰족한 날이 내가 아닌 그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혀로 볼 안쪽을 느리게 긁으며 벽에서 몸을 떼고 맥주를 마시는 그의 옆모습을 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유니 누나도 주한이 형도, 대표님을 상사이자 연장자로서 의지하고 존경해요. 그리고… 은인으로 생각하구요.”

“…….”

“아마… 알고 계시겠지만요.”

나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그들 관계에 대해 주제넘은 발언을 한 것은 아닐까 하는 뒤늦은 불안에 맥주병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손으로 시선이 떨어졌다.

팔짱 낀 상체를 테이블에 기댄 채 홀 안으로 무의미한 시선을 던지고 있던 그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내가 다른 누군가에게 뭘 했고 뭘 줬든, 그건 전부 나 자신과 내 삶이 영향받지 않는 선 안에서 이루어진 얄팍한 친절이었어. 지금까지 계속 그런 방식으로 살아왔고…. 한계선 없이 뭐든 다 허물어 내줄 수 있는 상대는 너뿐이야.”

그의 눈이 다시 나를 향했다. 더는 평온하지 않은, 파도가 이는 눈이었다.

테이블에 기대고 있던 상체를 일으킨 그가 팔을 뻗어 뒷목을 감싸 끌어당겼다. 당기는 손의 힘은 부드러웠지만, 겹쳐진 입술은 열정적이었다. 오늘 보스턴을 돌아다니는 동안, 손을 잡기도 했고, 포옹을 하기도 했고, 입을 맞춘 적도 있었지만, 이건 미술관 계단을 내려오면서 짧게 나눈 입맞춤과는 달랐다. 입술이 뭉개지고 점막이 비벼지는 진짜 키스였다.

“괜찮아. 알파와 오메가 커플로 생각하겠지.”

주변을 신경 쓰는 나의 경직을 느꼈는지 그가 이마를 맞붙인 채 빠르게 속삭였다.

“다른 무엇으로 생각한다고 해도 상관없고.”

덧붙인 그는 다시 입술을 겹쳐 왔다. 혀를 쓰지는 않았지만, 입술 전체를 이용해 핥아 올리고, 살점을 비비고, 방향을 바꿔 가며 겹치는 진한 키스였다.

나의 경직을 그가 어떻게 해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장소에서 아무렇지 않게 진한 스킨십을 할 수 있을 만큼 대담한 성격이 아니었을 뿐, 나 역시 사람들이 우리를 뭐라고 생각하든, 그것을 신경 쓰는 것은 아니었다.

젖은 마찰음과 함께 입술이 멀어지고, 목을 감쌌던 그의 손이 어깨와 상박을 천천히 쓸고 내려갔다. 마지막에는 손끝을 잠깐 만지작거린 뒤 놓아 주었다. 좀 전까지 내게 키스했던 입술을 잘근거리며 그가 검지로 테이블 위를 두드렸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그런 마음을 먹었어도… 너를 위해 희생할 게 없는 것 같았지.”

“…….”

“돈, 시간, 애정. 그런 가치들을 쏟아붓는다 하더라도, 거기에서 아무런 손해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그걸 희생이라고 하진 않잖아?”

씁쓸한 짧은 미소 끝에 맥주를 마시는 그에게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와 함께 보내는 시간, 그에게 보내는 애정을 스스로 희생이라 여기지 않는다면, 그가 나에게 주는 것들을 희생이라고 우길 수도 없었다.

그리고 돈.

나를 위해 사용하는 돈들이 그의 재정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할 정도의 금액이라면… 그 액수가 나에게 얼마나 큰 금액인지와 별개로, 그에게 있어 희생이라 할 수 없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적어도, 희생이 아니라는 그의 생각에 대해 부정할 근거가 없었다.

일부러 문제에서 거리를 유지하려 하는 냉소적 태도를 보이던 그는 입을 다문 채로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맥주병의 목을 쥔 채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너에게 뭘 주고 있어도, 무슨 일을 벌이고 있어도, 나를 걱정하거나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사실, 고마워할 필요조차도 없을 정도지. 아무것도 희생하고 있지 않으니까.”

길고 곧은 손가락으로 그는 맥주병을 쓸어내렸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손을 따라 아래를 향하면서 속눈썹의 섬세한 그늘이 뺨에 드리워졌다.

“시카고에서, 여유 있는 척 생각할 시간은 충분하다고 말했었지만… 사실은 애초에 너를 두고 뉴욕으로 갈 생각 따윈 전혀 없었을 만큼, 어떤 결정을 내리기 위한 고려 대상에 네가 포함되어 있다 하더라도, 오히려 결정의 최종 동기는 교활하고 이기적이니까.”

혀를 차듯 웃은 그가 맥주병에서 손을 떼며 나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그러니까, 서이현 씨.”

“…….”

“함께 뉴욕으로 가 주겠다는. 난 그 대답만을 원해.”

확신과 자신에 차 있는 듯 보이지만, 확신과 자신으로 보일 만큼 강한 간청을 담은 눈이었다.

나야말로 한국이나 서울에서의 생활에 미련이 있을 리 없었다. 내 열정이나 경력, 노력의 결과가 그곳에 있는 것도 아니었고, 모래와 형도 떠난 뒤였다. 소중한 것을 찾자면, 팬텀과 연관된 소수의 인간관계뿐이었다.

그의 거주지가 다른 도시로 바뀌고, 그가 나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면, 그 제안을 거부하고 서울에 남을 생각은 없었다. 단지, 유니 누나가 그랬던 것처럼, 그가 지금까지의 방침을 허물면서까지 뉴욕 지점 오픈을 서두르는 동기가 무엇인지 걱정이 됐을 뿐.

리드의 제안에 대해 그와 상의해 보라던 누나의 말이 희미하게 떠올랐지만, 그건 애초에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그가 뉴욕으로 가게 된다면 더더욱, 내 그림에 대한 가장 깊은 이해자를 두고 굳이 파리로 가야 할 이유가 없었다.

깊숙한 곳에 자리한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입술만으로 미소 지었다.

머리를 껴안듯 내 목 뒤로 팔을 둘러 앞머리를 쓸어 올린 그가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그리고 눈꺼풀과 뺨에 키스하고, 입술을 겹쳤다. 키스하는 장면을 남들에게 보인다는 어색함과 쑥스러움을 무시하고 눈을 감으며 그의 입술에 응했다.

그의 말대로 알파와 오메가 커플이라고 생각해 버릴지도 몰랐다. 다른 무엇으로 생각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 ■ ■

마커스와 엘렌의 집에서는 저녁 식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바쁜 두 사람을 대신해 그들의 집안일을 맡고 있는 마거릿은 물론이고, 마커스와 엘렌까지 주방 일에 나선 것 같았다. 그들의 두 번째 아들이나 다름없는(그러면서도 첫 번째 아들보다 나이가 많은) 그의 방문을 그들은 진정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비록 어제 이곳에 도착해 내일이면 떠나야 하는 짧은 일정이더라도.

앞치마를 두른 마커스가 현관문을 열어 주자, 집 앞까지 풍기고 있었던 요리 냄새가 한층 더 진해졌다. 그와 나는 펍에서 양파 튀김을 거의 그대로 남겨 두고 나왔기 때문에, 음식 냄새를 맡자 가볍게 식욕이 자극되었다.

엘렌과 마커스가 기르는 아홉 살 된 초콜릿색 래브라도 리트리버 종인 테드가 마커스와 함께 현관까지 나와 꼬리를 흔들며 우리의 귀가를 반겼다.

“별로 볼 게 없는 동네죠? 젊은 사람들한테는 심심할 거야.”

“조용하고 평화로워서 살기 좋은 곳 같았어요.”

관광이 무료하지는 않았을까 걱정해 주는 마커스에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과장이나 인사치레가 아닌, 보스턴에 대해 느낀 그대로의 감상이었다. 2년이나마 그가 살았던 도시라고 생각하니 눈에 들어오는 모든 풍경이 의미 있게 다가오기도 했고, 그와 함께라는 설렘과 긴장감으로 심심할 틈은 전혀 없었다.

마커스가 눈가에 멋진 주름을 잡아 웃으며 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위, 조나스에게 전화 좀 해 봐라. 네가 왔다고 했더니 어찌나 시끄럽게 구는지. 너, 연락이 뜸했던 거에 대해서 그 녀석한테도 불평 좀 들어야 할 거다.”

주방 쪽으로 향하려던 그의 등에 대고 그렇게 말한 마커스는 나를 향해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와 함께 주방에 들러 엘렌과 마거릿에게 외출에서 돌아왔다는 인사를 한 뒤 도와줄 일이 없는지 물었지만, 준비는 거의 끝났다며 그들은 응접실로 나를 쫓아내다시피 했다.

그가 마커스의 서재에서 조나스와 통화를 하는 동안 나는 1층의 응접실에서 마거릿이 내준 와인을 한 잔 마시며 기다렸다. 두꺼운 카펫이 깔린 응접실 곳곳에 장식된 가족사진을 하나씩 둘러보면서.

“쿤의 열세 살 생일 파티 때 찍은 사진이네. 그 나이에 벌써 믿기지 않을 만큼 미남이었죠?”

돌아보니 마커스가 내가 든 액자를 가리키며 응접실 입구에서 웃고 있었다.

“그렇게 무뚝뚝하게 구는데도 인기가 얼마나 많았는지.”

마커스의 말에 손에 든 사진 속 무표정한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그에게도 덜 여물어 풋내가 나는 10대 시절이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지만, 사진 속 소년은 한눈에도 그가 분명했다. 좀 더 파르스름하고, 지금보다 좀 더 날카로운 선을 가진 라우 위쿤.

“저녁 식사 전에 잠깐 쿤을 빌려도 될까요? 그 녀석에게 줄 게 있는데 지금이 아니면 시간이 나지 않을 것 같아서.”

물론이라고 대답했고, 마커스는 편안히 있으라는 말과 함께 서재로 사라졌다. 어두워지고 있는 골목이 내다보이는 안락한 분위기의 응접실에서 나는 느긋하게 나머지 사진들을 둘러보았다. 가족사진 사이에는 그의 사진도 상당히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지냈던 소년 시절의 사진뿐 아니라,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만남을 가지며 이어 온 그들의 돈독한 관계를 증명하듯 사진 속에는 한 소년이 장성한 남자가 되어 가는 과정의 궤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어젯밤 4시간 이상 이어졌던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마커스가 얘기해 준 어린 시절 그의 별명은 ‘네버 스마일(Never smile)’이었다. 절대 웃지 않는 소년.

다 지난 일이라는 듯 마커스와 엘렌은 가볍게 이야기했고, 그 역시도 두 사람의 놀림을 흘려들으며 그저 웃고 말았지만, 웃을 수 없는 소년 시절을 지내 온 또 한 사람으로서 그가 왜 ‘웃지 않는 소년’일 수밖에 없었는지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낙엽이 굴러가는 것만 봐도 웃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웃음이든 눈물이든, 혹은 감격이나 분노든, 감정을 가장 풍부하게 느끼고 그것을 표출해야 하는 시기에 웃음을 억제했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좋지 않은 징조였다.

자신을 위해 부모님이 원치 않는 이혼을 해야 했다던 그의 이야기를 되짚어 보며, 좀 더 젊은 시절의 마커스와 엘렌이 하얀 보트 위에서 찍은 사진 옆, 또 다른 그의 독사진을 손에 들었다. 승마복을 근사하게 차려입고 윤기가 흐르는 털을 가진 멋진 말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내가 모르는 시간 속에서, 지금의 나보다도 어린 그가 도전적인 눈빛으로 나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디디(DD).”

“…….”

등 뒤에서 들려온 차분한 목소리에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응접실 입구에 서른두 살의 그가 서 있었다.

그가 나를 뭐라고 부른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나를 부른 것이 아니라, 어떤 단어를 발음한 것일 수도 있었다. 액자를 손에 쥔 채 그를 향해 몸을 좀 더 돌리며 웃어 보였다.

“잘 못 들었어요. 뭐라고 하신 거예요?”

“다이아몬드 더스트(Diamond Dust)라고… 혹시 들어 봤습니까.”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는 메말라 있었다. 말을 마친 그는 힘겹게 마른침을 삼켰다.

“얼음 결정이 대기 중에서 햇빛을 받아 빛나는 현상, 이라는 정도로 알고 있는데….”

“…….”

문이 따로 없는 응접실 입구의 벽에 어깨를 기대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아몬드 더스트.

다른 이름으로는 세빙(細氷).

미세한 얼음 결정, 즉 빙정이 지표에서 가까운 공중에 뜬 상태에서 태양 광선을 받아 빛나는 현상으로,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눈과 달리, 대기 중에 떠 있는 먼지가 보석으로 바뀌어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캐나다나 아이슬란드의 오로라, 혹은 사막의 신기루만큼 잘 알려진 현상은 아니지만, 언젠가 책에서 접한 이후 기회가 된다면 한 번쯤 눈으로 보고 싶다고 생각하기는 했었다.

“마커스가 갑자기 그 얘길 꺼내더군요. 동료 학자가 작년 겨울 하얼빈으로 여행을 갔었다면서… 운이 좋아서 규모가 큰 다이아몬드 더스트를 만나게 되면 아주 신비롭고 환상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고.”

왜 갑자기 그 이야기가 나온 건지에 대한 궁금증은 풀렸지만, 그보다는 그의 분위기가 마음에 걸렸다. 어쩌다 보니 대화 중에 나온 화제를 언급하는 사람의 가벼운 분위기가 아니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행동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차분한 행동과 달리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은 불안, 혹은 격정적 감정의 들썩임이 느껴졌다. 액자를 원래의 자리에 내려 두고 그를 향해 완전히 몸을 돌려세웠다.

그가 벽에서 몸을 떼고 가까이 다가와 나의 뺨을 감쌌다. 거리가 좁혀지자, 그의 몸 전체에 들어찬 긴장이 더 분명하게 느껴졌다. 자기 몸 안에 가둔 감정을 주체하기가 어려운 것 같았지만, 그는 그것을 허물어 내보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중에… 같이 보러 가지 않을래요?”

“…….”

“뉴욕 지점 오픈이 무사히 끝나고… 모든 게 다 정리가 되고 나면… 둘이서 느긋하게.”

그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지만, 혹은 웃으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피로해 보였다. 더 말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지만, 억지로 캐물어도 소용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입을 열어야 할 가장 적절한 시기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 ■ ■

어제와 마찬가지로 식사 자리는 떠들썩하고, 화기애애하고, 유쾌했다. 그들은 시간을 공유하지 않은 내가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해 주었고, 자신들의 추억을 나에게 들려주는 식으로 대화를 이어 갔다. 덕분에 나는 아마도 팬텀의 그 누구도, 인우 형이나 슈슈조차도 모르고 있을 보스턴에서의 2년 동안의 그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학교에 나가지 않고 홈스쿨링을 하고 있었음에도 편지와 선물이 끊이지 않았던 과거 그의 인기와(엘렌은 슈퍼스타와 한집에 사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그가 돌아가고 난 뒤 한동안 허전했을 정도로), 마라톤이 취미인 엘렌과 마커스의 설득으로 하프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던 ‘네버 스마일 보이’가 완주 후 처음으로 보여 줬던 환한 미소의 위력, 그 무뚝뚝한 소년이 그들을 떠나 홍콩으로 완전히 돌아가던 날 남겨 두었던 열 줄짜리 편지 등에 대해서.

엘렌과 마커스가 풀어놓는 이야기에, 그는 때때로 미간을 긁거나 한숨을 내쉬거나 얼굴을 쓸어내리며 아주 곤혹스러워했고,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리려 몇 번이나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어떤 누구와 함께 있더라도, 노련하게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소 과격하고 짓궂은 방법으로라도 대화를 중단시켜 버릴 수 있는 그를 잘 알고 있는 나에게는, 곤란해하면서도 자신의 과거를 기꺼이 화제로 제공하는 그가 새롭고 신기했다.

60대 중반으로 들어선 엘렌과 마커스에게 그는 아들이자 손자나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리고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대부분의 일반적인 조부모라면, 오랜만에 찾아온 손자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지금의 그들처럼 행복해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쿤이 떠난 후에 조나스가 특히 힘들어했었지. 처음엔 아주 거만하고 비사교적인 놈이라며 싫어했어도 한 달도 안 가 곧 형제처럼 붙어 지냈었으니까.”

지나 버린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듯 잔잔한 미소와 함께 테이블 위를 내려다보며 마커스가 얘기했고, 식탁 주변에 모인 사람들의 다리 사이를 스치며 돌아다니고 있던 테드의 윤기 흐르는 등을 토닥이며 엘렌이 그런 마커스를 가볍게 놀렸다.

“조나스보다 당신이 더 힘들어했으면서 무슨 소리예요. 실연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한 달을 기운 없이 지내더라니까?”

조나스는 마커스와 엘렌의 아들이었다.

어제 저녁 식사 자리에서 조나스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보다 두 살 아래로, 지금은 피츠버그라는 도시에서 제약 회사의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조나스는 여성 알파인 엘렌과 남성 베타인 마커스 사이에서 태어난, 말 그대로 기적적인 존재였다.

알파 여성의 자궁과 난소, 난자는 베타 여성과 달리 완숙하게 발달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 정도는 사람마다 달라서, 아주 낮은 비율이긴 해도 임신이 가능한 경우도 있으며, 의학의 도움을 받아 그 가능성을 더 높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어젯밤 처음 알았다.

마커스와 엘렌은 아이를 원했고, 엘렌은 운 좋게도 성숙한 난자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 번의 힘든 실패 끝에 대리모를 통하지 않고 기적적으로 조나스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당시 엘렌이 가지고 있던 조건이 아주 훌륭하기도 했었지만, 마커스와 엘렌이 조나스를 가졌던 때로부터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성공률은 낮고 비용은 어마어마한, 장벽이 높은 시술이었다. 수요가 많지 않은 탓에 발전과 보급이 더욱 더딜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엘렌과 마커스의 설명이었다.

모래와 형이 해당 시술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생각할지, 아니, 두 사람이 아이를 원하기는 하는지조차도 당장은 알 수 없었지만, 서울로 돌아가는 대로 엘렌과 마커스, 그리고 그의 도움을 받아 관련 자료들을 두 사람에게 메일로 보낼 예정이었다.

자녀를 갖는 것이 사랑의 완성이나 증명이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에게도 희박한 가능성이나마 선택지가 주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 나를 들뜨게 했다.

시술을 진행할 경우, 상당히 많은 비용이 요구되겠지만… 만일 두 사람이 검사를 통해 희망의 확률이라도 정확히 알기를 원한다면, 임 선생은 기꺼이 그 비용을 대야 한다는, 단호한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적의와 복수심을 바탕으로 한 강렬하고 분명한 의지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러한 입장을 고수하는 것이 나다운 행동이든 아니든, 반성하고 철회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디저트로 호두 파이를 먹고, 와인이 여러 병 비워지고, 식탁 위에 군데군데 장식해 두었던 양초가 짤막해지고 그중 몇 개는 불꽃을 꺼뜨렸을 때쯤, 테드가 불안한 소리로 낑낑거리며 같은 자리를 빙빙 돌기 시작했고, 볼일을 보고 싶어서 저런다며, 제법 취한 마커스 대신 엘렌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가 함께 갈 것을 자처했다.

흥에 들떠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는 마커스와 나를 단둘이 남겨 두고 자리를 비우는 것이 불안한지 잠시 내 쪽을 슬쩍 쳐다보기는 했지만, 그는 곧 와인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인은 이제 그만 마시는 게 좋겠다며 마커스를 염려하는 말과 함께.

“아… 이젠 나도 노인이 된 거지. 쿤이 이 집에 왔을 때만 해도 의욕 넘치는 40대였고, 자정이 지날 때까지 떠들썩하게 즐겨도 멀쩡했었는데 말이야.”

엘렌과 함께 다정하게 식당을 나서는 그의 듬직한 뒷모습에 시선을 주던 마커스가 흐뭇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쿤도 그렇고 조나스도 그렇고, 자기를 정립하려 고민하고 방황하던 10대 소년들이 언제 이렇게 완전히 장성한 청년들이 된 건지…. 이젠 더 이상 20대도 아니고 다 컸지.”

“…….”

“내 평생 라우 위쿤이 애인을 집에 데리고 오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마커스는 의자에 느슨하게 기대고 있던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장난스러운 말투로 애인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그의 성격을 고려했을 때 이 일이 얼마나 특별한 사건인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나와 함께 방문한 것이, 그 혼자 방문한 것보다 몇 배는 더 기쁘다는 얘기와 함께.

적어도 그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의 연애에 대해 일관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소리 없이 웃으며 내 몫의 와인을 좀 더 마셨다.

마커스는 어제 저녁 조나스와 관련해 나누었던 대화를 다시 상기하며 모래와 형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자리에 없는 타인의 일이다 보니 자세히는 묻지 않았지만, 간단한 몇 가지 언급만으로도 상황의 핵심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마커스는 경험과 지혜가 풍부한 사람이었다.

“엘렌과 나도 쉽지 않았지.”

와인잔의 아래쪽을 손으로 더듬으며 마커스가 목소리를 조금 낮추었다.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을 낳고 몇십 년 이상을, 이렇게 노인이 될 때까지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었다는 게… 지금도 가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한때는 우리 미래에 자신이 없기도 했었고.”

몇십 년 이상을 함께한 배우자가 아닌 이제 갓 사랑에 빠진 대상에 대해 이야기하듯 꿈속을 걷는 것 같은 미소를 짓는 마커스를 보면서 내 입가에도 잔잔한 미소가 감돌았다.

“페로몬에 대해 연구하기로 결심하신 것도… 엘렌의 영향이 컸을까요?”

용기를 내서 질문했고, 마커스는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베타인 나는 영원히 페로몬의 영향력을 체험할 수 없지만… 이론만으로라도 그녀를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었으니까.”

가끔씩 수명이 다한 촛불이 타닥거리는 소리뿐인 고요한 실내에, 마커스의 목소리가 낮고 차분하게 이어졌다.

“나를 처음 만났던 고등학생 때부터 이미 그녀는 거의 완벽하게 페로몬을 조절할 수 있는 골든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와 만나면서 페로몬의 존재를 의식할 필요가 전혀 없었지만… 공부를 계속해 나갈수록… 그녀를 사랑한다면서도… 내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녀가 불평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녀에게 페로몬이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환상인 것처럼 여겨 왔다는 걸 알게 됐지.”

마커스는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바닥에 아주 조금 남아 있던 와인을 마저 비워 냈다. 나는 홀더 안에서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는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촛불을 내려다보며 뒷이야기를 기다렸다.

“골든이 되었다고 해서 페로몬이 사라지는 게 아니고, 단지, 억제하고 있을 뿐이라는 거. 페로몬을 직접 경험하지는 못해도… 먹고 싶은 식욕과 자고 싶은 수면욕을 억지로 조절해야 할 때 느끼는 스트레스와 부담감 정도는 베타인 나도 상상하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으니까.”

“…….”

“지극히 베타 중심적인 사고로 그녀를 대해 왔다는 걸 깨닫게 됐던 거지.”

마커스의 말에 두개골을 몽둥이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아찔하고, 어지럽고, 부끄러웠다. 시선이 맞은편의 마커스를 향하지 못하고 부산스럽게 허공을 맴돌았다.

“1년 정도는 중심을 잡기가 힘들었지. 갑자기 내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이나 행성의 존재처럼 그녀가 멀게 느껴지기도 했고, 잘해 나갈 자신이 없었어. 지금 생각하면 봐주기 힘들 정도로 나약하고 감정적이었지. 그 이전까지 알파로서의 그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 그만큼 모든 게 다 혼란스러웠던 거야.”

나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가 남겨 두고 일어선 옆자리의 흔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깔끔하게 음식을 비운 접시, 가지런히 놓아둔 나이프와 포크, 비어 있는 의자 위의 냅킨 같은 것들 하나하나가 그를 연상시켰다.

단 한 번도 나에게, 알파로서의 자신을 이해해 주기를 요구하지 않았던.

“내가 오메가였다면 그녀와 완벽한 짝을 이룰 수 있었을 텐데. 하다못해 알파였더라면 적어도 페로몬에 대해 이론적으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녀와 공감하며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왜 나는… 이렇게 무수한, 흔해 빠진… 먼지와도 같은 베타 중 하나일 뿐일까. 나중에는 그런 못난 자기 부정에까지 빠져들었으니까.”

나는 반 정도 채워져 있는 잔을 들어 와인을 물처럼 들이켰다. 몽롱하게 퍼져 있던 술기운이 단번에 사라지고 정신이 또렷해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더 많은 양의 술이 필요했다.

“베타들 사이에서는 페로몬의 동물적 충동, 부정적인 면만 강조되고 있지만, 사실 그건 페로몬 관리에 소홀한 일부 문제적인 알파·오메가들의 얘기지. 대부분의 알파와 오메가는 골든이 아닌 이상 페로몬을 컨트롤하기 위해 평생 약을 복용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베타로 치자면, 천식이나 당뇨 같은 지병을 가진 환자처럼.

취기나 피곤이 몰려오는지, 마커스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메마른 목소리로 그렇게 덧붙였다. 가장자리에 온화한 주름이 드리워진 옅은 갈색의 눈동자가 충혈된 것 같기도 했다.

“성범죄를 유발하는 위험한 마약 같은 면이 페로몬의 전부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서 작용할 때는 최상의 교감을 끌어내고 해방에 가까운 자유를 느끼게 하는 매개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걸 알고 나니, 더 견디기가 힘들었지. 그녀가 나 외의 누군가와 페로몬으로 교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도, 나와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깊은 교감의 세계가 그녀 안에 내재돼 있고, 나에게는 그것의 공유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대상 없는 질투와 자격지심에 휘둘리기도 했었어.”

가까이에 세워져 있던 반 정도 남아 있는 와인병을 집어 잔을 채웠다. 마커스가 자신의 빈 잔도 앞으로 내밀었다. 마커스를 걱정했던 그의 말이 떠올라 망설였지만,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뒤뜰 쪽에서 테드가 두 번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렌과 그는 어제 이후 처음으로 가진 둘만의 시간을 좀 더 느긋하게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마커스와 나는 잠시 침묵 속에서 와인을 마시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가 페로몬을 완벽하게 컨트롤할 수 있는 골든 알파고, 페로몬 작용을 극도로 꺼리고 경멸하는 보기 드문 알파라고 얘기했었다.

그는 한 번도 내가 오메가였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식의 바람을 비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완전히 안심하고 있었다. 그가 알파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최소한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마커스의 말대로, 베타 중심적인 사고로. 모래에게도 그랬던 것처럼.

알파의 특징이 무엇인지, 어떤 억제력이 필요한지, 그것이 어느 정도의 부담인지… 그들이 불평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알고자 하지 않았고, 페로몬이 그들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그들 삶에서 중요한 문제가 아닐 거라고, 멋대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페로몬을 향유할 수 있고 페로몬으로 그의 깊은 곳을 건드릴 수 있는 오메가라는 존재가 신경 쓰였었다. 과거의 마커스처럼.

하지만 그가 나에게 불분명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을 원할 때, 내면에서 일어나는 나약한 불안은 터무니없는 상상력을 부추길 수 있었다. 그건 아마도 가장 성숙한 정신을 가진, 예를 들어 마커스와 같은 사람이라도 피하기 어려운 추한 본능의 일면일 것이다.

“베타인 나와 함께하게 된다면, 그녀는 평생 알파로서의 자연스러운 자신을 부정하고, 억제하고, 자유로운 교감의 기회를 잃어버린 채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그녀와 온전하게 사랑할 수 없는 결함을 가진 존재라는 결론을 내리고, 1년 정도 헤어졌던 시기도 있었지.”

마커스는 입가를 문지르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깔끔하게 다듬은 짧은 은빛 수염이 촛불의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새로 채우고 다시 반 이상을 비운 잔을 손안에서 가볍게 흔들면서 마커스는 맞은편의 나를 향해 미소를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알파와 베타였기 때문에… 함께하는 매일이 일상이 된 후에도 당연한 행복이란 없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오래도록 서로의 존재에 감사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됐지. 계속 함께 있고, 더 온전히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한 알파와 베타라는 걸, 늘 잊지 않을 수 있으니까.”

마커스는 자신의 옆자리, 비어 있는 엘렌의 의자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거기에 그녀가 앉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온화한 미소를 지었고, 그리고 테이블 위로 길게 팔을 뻗어 나에게 건배를 제의했다. 나는 기꺼이 내 잔을 내밀었다.

함께하는 매일의 행복을 당연시하지 않는 사랑. 그것은 어쩌면 가장 어려운 사랑의 실천일지도 모른다. 하늘과 땅과 공기의 귀함에 대해 매일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그럼에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노력할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특별한 기념일을 이벤트로 채우는 것보다 더.

복도 너머 뒤뜰로 이어지는 뒷문이 열고 닫히는 소리와 함께 엘렌과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커스는 잔 속에 남아 있던 와인을 얼른 마셔 버리는 것으로 증거를 인멸했다. 우리는 서로 마주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요? 또 내 험담인가?”

그가 등 뒤에서 허리를 숙여 나의 목을 끌어안으며 볼에 키스했다. 그의 그런 스킨십에, 마커스와 엘렌은 눈을 크게 뜨고 서로를 마주 봤다. 특히 마커스는 헛기침을 하며 와인 대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기까지 했다.

“이러다 서울에 돌아가자마자 이별 선고받을 것 같아서 무서운데. 내 험담은 이제 진짜 그만해 주세요.”

그의 농담을 끝으로 길었던 저녁 식사가 마무리되었다. 다음 날 마거릿이 뒷정리를 하기 쉽도록 모두 함께 식기들을 주방으로 옮겨 놓은 뒤 식당을 나섰다. 앉아 있었을 때는 괜찮아 보였던 마커스는 한꺼번에 취기가 오르는지 조금 휘청거렸다. 복도에 나와서 보니 얼굴이 검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가 침실까지 부축하려 했지만, 마커스는 그 정도는 아니라며 테드를 데리고 1층 안쪽의 침실로 먼저 사라졌다.

그런 마커스의 뒷모습을 불안하게 바라보다 2층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엘렌이 나의 팔을 가볍게 붙잡았다. 그 모습을 돌아본 그가 먼저 올라가 있겠다며 나의 뒷목을 살짝 감싸 쥐었다가 2층으로 향했다. 호기심과 장난기 넘치는 표정으로 그런 그를 잠시 올려다보고 있던 엘렌은 계단 아래에서 나의 팔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저 애가 누군가에게 애정을 쏟고, 그 애정을 돌려받길 원하는 모습을 영영 못 보면 어쩌나, 그게 늘 마음이 쓰였었거든. 자기 삶에 타인을 들이는 것을 고집스럽게 거부하던 녀석이라….”

자신과 마커스에게는 이번 방문이 무엇보다 소중한 선물이었다며 그녀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나의 뺨에 키스해 주었다. 그에게 사랑을 받는 것밖에 한 일이 없었던 것치고는 너무 큰 감사를 받은 것 같았지만, 그녀에게 마주 웃어 보였다.

그는 방에서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도우려 했지만 거의 끝나 간다며 그는 먼저 씻으라고 욕실로 등을 떠밀었다. 샤워를 하고 나와 보니 모든 정리가 끝나 있었고 잠들기 좋도록 조명까지 어둑하게 조절되어 있었다. 그는 욕실로 들어가면서 먼저 잠들어도 괜찮다고 얘기했지만, 나는 침대에 눕는 대신 창가의 테이블 앞에 자리를 잡고 드로잉노트를 펼쳤다.

핸드폰 카메라로 몇 장 담아 두기도 했지만, 이 방에서 느낀 인상을 스케치로 남겨 두고 싶었다. 어젯밤과 오늘 오전에 그렸던 스케치 옆으로 창문에서 내다보이는 거리의 조각, 서로 얽힌 가로수의 마른 가지들과 붉은 벽돌로 지어진 고풍스러운 건물들, 비컨힐의 상징과도 같은 은은한 가스불 가로등의 불빛 등… 20세기 초반으로 시간 여행을 떠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풍경들을 그려 넣었다.

약 20년 전, 바로 이 자리에 앉아 이 거리를 내다보고 있었을 열세 살 그의 시선을 상상해 보며 연필을 움직이는 사이, 그가 방으로 돌아왔다.

샤워를 마친 그는 아래에 얇은 실내복을 입고 상의는 벗은 채였다. 가까이 다가오자 차가운 물기가 느껴졌다.

“안 피곤한가? 내일도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등 뒤에 선 그가 어깨를 가볍게 주무르던 손을 가슴으로 미끄러뜨리면서 몸을 낮췄다. 어깨에 턱을 얹고 스케치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목덜미에 입술을 묻어 왔다. 닿는 순간 잠깐 차가웠던 입술은 곧 따뜻해졌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가슴을 안은 탄탄한 팔을 쓰다듬으며 그를 살짝 돌아보았다.

“그냥… 이 방에서 지내던 시절의 아위는 어땠을까. 그런….”

귓가에서 그가 마른 웃음을 흘렸다. 내 목에 팔을 두른 그대로 마룻바닥 위, 내가 앉은 의자의 왼쪽에 무릎을 꿇고 앉으며 다른 팔로 아랫배와 가슴 위를 부드럽게 애무했다.

“이틀 동안 마커스와 엘렌에게서 충분히 들은 것 같은데.”

하지만 웃으면서 말할 수 없는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런 이야기는 몇 년 만에 만나 이틀을 머물다 떠날 소중한 사람과의 저녁 식사 테이블에서 화제로 삼기에는 적절하지 않았으니까.

“여기서… 골든 알파가 되기 위해 마커스와 훈련했던 거죠?”

“…….”

조도를 낮춰 놓은 어둠 속에서 말없이 나를 올려다보던 그는 깊은 숨을 내쉬고는 몸을 일으켜 맞은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랬지. 어머니와 함께 2년 동안 이곳에서 지냈고, 한꺼번에 너무 큰 변화들이 일어난 탓에 불만과 혼란을 침묵과 거부로 표현하는 전형적인 못된 사춘기였고.”

우스운 농담이라도 한 것처럼 그가 내 쪽을 보며 피식 웃었지만, 나는 웃지 못했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그는 자세를 바꿔 창틀에 등을 기대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만나 봤다시피 엘렌과 마커스는 좋은 분들이고, 조나스도 나를 잘 따라서 그렇게 암울하기만 한 기억은 물론 아니지만… 관계를 제외한, 내 안의 문제만으로 보자면 지금의 재수 없게 뒤틀린 성격의 발판이 마련된 시기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오른팔을 의자의 등받이에, 왼팔은 테이블 위에 걸치고 창문에 뒷머리를 기댄 채 나를 돌아보면서 그는 또 웃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웃지 못하는 나를 잠잠히 응시하다 어두운 방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특별해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죠. 남다른 능력이나 개성으로 타인과 구분되기를… 더 나아가 그들보다 높은 곳에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 자아가 막 정립되는 시기에는 그런 욕구가 더 두드러지기 마련이고. 하지만 그 특별함이 능력의 우수함이나 개성의 독특함이 아닌… 그것을 넘어서는 힘을 가지고 있을 때, 어떤 사람들에게 특별함은 고독의 다른 말일 뿐이기도 해요. 테두리 밖으로 밀어내 무리에서 분리시키고 단절시키는 것 같은….”

나도 모르게 꽉 쥐고 있었던 연필을 스르륵 내려놓고 손바닥 안에 고인 땀을 바지 위에 닦아 냈다. 내가 내려놓은 연필을 이번에는 그가 왼손으로 쥐고 손안에서 요령 좋게 돌려 보였다.

“폭력적인 가정에서 태어난 것이 아이의 잘못이 아닌 것처럼, 내가 나인 것도 누군가의 실수나 죄가 아닌데…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도, 주변의 모든 사람이 이제부터는 스스로를 엄격하게 통제해야 한다고 얘기하니까… 아무래도 사고가 부정적으로 흘러가더군요. 거기다 멀쩡히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부모님은 나 때문에 이혼까지 했으니, 열세 살짜리가 자기 자신이 싫어질 만도 하지.”

“부모님께서 왜 이혼하셔야만 했던 건지… 물어도 될까요.”

그가 창문에서 머리를 떼고 나를 조금 오래 응시했다.

“……왜요.”

“이 문제에 대해서 서이현이 먼저 물어 줄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을 못 해서. 나에 대해 그만큼 궁금해졌다는 게 반갑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그리고 한편으로는 또 어떻다는 건지. 그는 매듭을 짓지 않은 채 모호하게 웃으며 연필 꼭대기에 달린 지우개로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렸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예방 같은 거였죠.”

“…….”

“아버지의 외가가 영국에서는 꽤 대단한 가문이에요. 아버지의 외할아버지는 당시 영국에서 서른 개 남짓밖에 남지 않은 공작 직위를 가진 분이었고, 지금은 아버지의 외삼촌, 그러니까 외할아버지의 장자가 후계자로 직위를 세습한 상태죠. 현대의 귀족 직위라는 게 형식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공작쯤 되면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영국을 포함한 유럽 사회에서, 또 전 세계의 상류 사교계에서 여전히 그건 매력으로 작용하고, 실제로 아버지의 외가는 그 직위를 유지한 덕에 막강한 부를 쌓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죠.”

그는 이제 연필의 지우개로 아무것도 지울 것이 없는 테이블 위를 문지르고 있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의 이야기에 나는 그저 입술을 벌리고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은 채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간략히 얘기하자면, 그들로부터 나의 친권과 양육권을 지키기 위해 이혼한 거라고 보면 됩니다. 가장 완벽한 알파… ‘특별한 알파’를 가문의 후계자로 만들길 원하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리고, 당사자인 나나 그 부모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얼마든지 그 일을 진행시킬 수 있을 만큼 비정한 사람들이기도 하고.”

그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그들로부터 온전히 보호하기 위해 그의 부모님은 이혼을 결정했고, 그의 어머니에게 양육권을 일임하기 위해 그의 아버지의 부정(不貞)이 이혼 사유가 되었다는 얘기였다. 물론 그의 아버지는 외도를 저지른 적이 전혀 없었고, 모든 것은 부모님 두 분이 합의한 작전이었다.

부모의 이혼에 죄책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던. 오래전 그가 해 주었던 이야기를 새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그런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를 수없이 자문해야 했다던 그의 말이 바로 어제 들은 이야기처럼 지금도 생생했다. 그 배경에 이런 이유가 있었다면, 어느 누구도 그에게 행복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한참 자기만의 생각에 잠긴 듯이 보이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타인의 경험을 전달하듯 관망적이었던 어조가 사라져 있었다.

“자신을 보이는 것도, 타인의 대외적 얼굴의 뒷면을 아는 것도, 성가시고 부담스러운 일이라며 혼자이기를 택해 왔지만, 실은….”

손등의 핏줄이 더 선명하게 불거지도록 연필을 꽉 붙들면서 그는 목소리를 죽였다.

“두려웠을 겁니다.”

스스로가 꺼내 놓은 말이 믿기지 않는 것처럼, 그는 피식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서도 금방이라도 꺼져 버릴 것 같은 바싹 마른 목소리로 힘겹게 덧붙였다.

“남들과 다른, 테두리 밖의 존재인 나는,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질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모든 사람들이 골든 알파와 골든 오메가를 동경했다. 베타들마저도 그랬다. 그들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늘 매력적인 특권층으로 다루어졌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어떤 사람들에게 특별함은 그저 고독일 수도 있었다. 특별함이란 결국 상대적 가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감각도 제각각일 수밖에 없었다.

마커스의 얘기를 듣기 전이었다면 지금 그가 하는 얘기들을 반도 이해하지 못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전에 대표님이 그러셨잖아요…. 또 그리고 싶은 얘기들이 생길 거라고.”

연필을 쥔 자신의 손을 향하고 있던 그의 시선이 천천히 내게로 옮겨 왔다.

“확실히 저는 어렸고, 지금도 어려서… 그리고 일련의 일들이 제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겁고 압도적이어서… 어떤 저항도 해 볼 수 없도록 꽉 짓눌린 기분이었어요. 겨우 목숨만 이어 가는 삭막하고 비인간적인 매일이 앞으로의 제 삶이라고, 체념하고 받아들였었어요.”

가슴을 부풀리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테이블 아래에서 양손을 꽉 맞잡았다. 개 짖는 소리는커녕 내가 이 방에 들어온 뒤로 차 한 대 지나가지 않았던 정적으로 가득 찬 골목을 한 쌍의 남녀가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며 지나가고 있었다. 동쪽에서부터 가까워져 온 그들의 목소리는 서쪽으로, 내가 앉은 자리의 등 뒤로 멀어져 갔다. 그들의 발소리가 희미해졌을 때쯤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팬텀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다양한 삶에 대해 알게 되면서… 신기하게도, 그것만으로도, 저를 누르고 있던 무게가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생각을 말로 전하는 것은 역시나 나에게는 쉽지 않아서, 횡설수설이 되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내가 아는 한 그는, 대화 시에 인내심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으니까. 적어도 나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의 상처를 위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상처를 보여 주는 거라던 그 상투적 문구가… 전에는 단지, 나만 힘든 건 아니라는 이기적 안도감에 대한 얘기 같았지만, 지금은… 공감과 격려에 대한 얘기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됐구요.”

“상처를 다루고 싶다는 얘기인가? 그림으로.”

간결하게 핵심을 집어내는 그의 이야기에 어깨의 힘을 빼면서 풀썩 웃었다. 그리고 자세를 좀 더 무너뜨리며 뒷목을 쓸었다.

“하지만… 지금의 저는 자신의 상처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는 사람이니까요. 제가 정말 그려야 하는 건 주한이 형도 아니고, 여행 중에 만난 인상적인 풍경들도 아닐 거예요…. 그런데도 지금은, 그 이상을 그릴 수 없을 것 같아요.”

옆으로 앉아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을 챙겨 놓은 보스턴백을 뒤져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온 그는 나에게도 한 대를 권했다. 어둠 속에서 평소보다 더 커 보이는 앞에 선 그를 잠시 올려다보다가 열린 담뱃갑 안에서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연기가 빠지도록 창문을 조금 연 뒤 원래의 자리에 원래의 자세대로 앉아, 나와 달리 능숙하게 담배에 불을 붙이는 그의 옆모습에 한참 시선을 주었다. 짧고 깊게 연기를 빨아들였다가 입술에 아주 작은 틈을 만들어 그 사이로 가늘게 뱉어 내는 호흡을 흉내 내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처음 만났던 무렵보다 좀 더 날카로워진 것 같은 양쪽 뺨에 깊은 파임을 만들며 연기를 빨아들인 그가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걸며 말했다.

“서이현 본인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몰라도, 느리더라도 성실하게 자신과 주변을 제대로 마주 보려고 하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그림이 돌파해야만 하는 과제인 것처럼 얘기하지 말아요.”

“…….”

“극복하지 못한 상태라도 좋으니까, 상처를 건드려 봐요. 상처는 사람마다 다른 지문 같아서… 그걸 건드려서 그리는 그림은 누구의 것과도 겹칠 수 없으니까. 상처가 저절로 낫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것을 계속해서 쑤시고, 덧나게 하고, 눈으로 볼 수 있거나 귀로 들을 수 있는 다른 형태로 치환해 그것을 공개하는 것. 그게 예술의 역할 아닐까요.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더 이상 진지한 고찰만이 예술의 의미가 아니게 되어도, 결국 사람들의 내면 가장 깊은 곳을 건드려, 보고 싶지 않은 것을 까발리고 직시하게 만드는 것은 형식의 파괴나 예술의 전통적 의미에 대한 조롱 같은 것들이 아니라고, 난 그렇게 믿거든.”

재떨이 대신으로 담배와 함께 가져다 놓은 작은 장식용 접시 위에 그가 재를 털 때, 벗은 어깨 근육의 테두리를 따라 보조개 같은 홈이 파였다.

내내 옆으로 앉아 있던 몸을 돌려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기대면서, 그가 담배를 쥔 손으로 눈썹 위를 매만졌다.

“우리가 가장 감추고 싶고 부정하고 싶은 상처와 흠집이… 어쩌면 우리 자신을 다른 누구와도 동일하지 않은 유일한 독립적 개체로 만들어 주는 개성과 정체성일 수도 있다는 거지.”

“…….”

침묵 속에서, 천천히 담배를 피우면서, 서로의 눈과 입술을 시선으로 더듬었다. 그가 먼저 시선을 피해 고개를 떨구며 무겁게 웃었다.

“이 방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이런 얘기를 하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는데. 아마 그때의 나에게는 얘기해 줘도 믿지 않겠지.”

열어 놓은 창문으로 불어 들어오는 보스턴의 9월의 밤바람은 부드럽지만은 않았다. 담배를 비벼 끈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의자의 등받이를 짚으며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내 손에 들린 아직 타다 남은 담배를 가져가 불씨를 죽이며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은 바싹 말라 있었지만, 점막을 가르고 들어와 안을 채우는 혀는 뜨겁게 젖어 있었다.

바로 이 자리에서, 특별하다는 고독, 보편적이지 않은 소외 속에 매몰되고 있었을 열세 살의 그를 떠올리면서 그의 뺨을 감쌌다. 언젠가는 <소외>보다 더 진한 위로를 그에게 줄 수 있기를. 상처를 곧 개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성숙을 실현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내가 아니라면, 그를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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