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1. 바람의 도시 (21/31)

   1. 바람의 도시

노스 미시건 애비뉴와 면하고 있는 그의 침실 창문에서는 윌리스 타워와 함께 시카고 전망을 감상하기 좋은 장소로 유명한 존 핸콕 타워가 바로 코앞이었다.

북쪽과 동쪽으로 창을 낸 넓은 거실에서는 좀 더 탁 트인 시원한 조망이 가능했다. 존 핸콕 타워 뒤쪽, 또 다른 세계적인 유명 체인 호텔의 건물 너머로 마치 바다 같아 보이는 미시간호의 수평선도 슬쩍 보였고, 동쪽으로는 시카고 현대 미술관이 지척이었다.

그와 같은 스위트룸 내의 또 다른 침실인 내 방에서는 남쪽과 동쪽의 창문을 통해 쇼핑 거리로 유명하다는 메그니피션트 마일의 화려한 전경을 바로 내다볼 수 있었다.

그와 내가 같은 스위트룸에 묵는 것에 대해 유니 누나는 잠시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침실도 욕실도 두 개인데 굳이 따로 방을 하나 더 쓸 필요는 없겠다는 결론을 스스로 내렸는지, 곧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었다. 서프라이즈 이벤트처럼 그가 준비한 일등석과 오성급 호텔 룸에 들떠서 사소한 의혹은 쉽게 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슈슈 작가와 누나, 그와 나, 그리고 기사님까지 이번 출장 여행의 동행은 총 다섯 명이었고, 그의 배려로 다섯 명이 모두 일등석으로 편안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보통 시카고까지의 일등석 왕복 티켓이 대략 1,200만 원이라는 누나의 설명에 나는 마음까지 편안할 수가 없었지만.

여하튼 괜히 긴장이 돼서 누나의 눈치를 살피는 나와 달리, 로비의 카운터가 아닌 자신의 스위트룸 거실 소파에서 체크인 서류에 사인을 하는 그는 상황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기사님은 그렇다 쳐도… 슈슈와 누나가 아직 같은 거실에 있는데 나의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특별한 다정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오후 일정을 물어본 탓에, 나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말까지 더듬어야 했었다.

어쩌면 그는 이대로 자연스럽게 주변에 알려지는 것도 정말 상관없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사실은 우리 지금 연애 중이라며 일부러 발표를 하는 것도 유별나게 느껴지기는 했다.

그는 좋은 연애 대상이 아니라며, 설익은 짝사랑 중이라면 얼른 마음을 접으라던 주한이 형의 충고가 떠올랐다. 그렇게 충고했던 대상과 기어이 연애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누나와 실장님은 어떨지….

연애와 관련해 가볍게나마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자신이 어색해, 볼을 부풀리며 후… 숨을 내쉬고 다시 연필을 쥐었다. 해가 저물어 가는 시카고 다운타운의 모습을 스케치 중이었다. 그의 침실 창가에서,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길 기다리며.

“그래서, 오후 내내 시카고 미술관에만 있었던 건가?”

침실 안쪽 드레스룸과 연결된 욕실에서 나온 가운 차림의 그가 이쪽을 보며 웃는 낯으로 물었다. 젖어 있는 머리카락을 타월로 가볍게 쓸어 올리듯 털어 내는 일상적인 동작에도, 우습게도 가슴이 들떴다.

그에게 미리 말해 두었던 계획이 워낙 거창했던 터라 조금 겸연쩍어서 고개를 끄덕이며 나 역시 슬쩍 웃었다.

그가 복도처럼 길게 이어진 드레스룸 입구의 벽에 기대며 양손을 가운의 앞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일반 갤러리와는 규모가 다르니까.”

그의 말대로였다.

미국 3대 미술관 중 하나라는 타이틀에는 그다지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었지만, 다양한 성격을 가진 수많은 갤러리들이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는 시카고에서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찾는 곳인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첫 번째 방문지로 선택한 그곳은, 크게 본관과 신관으로 나누어진 두 개의 건물에 약 30만 점의 작품을 보유하고 있었다.

“부지런히 본다고 했는데도… 본관 1층이랑 지하, 그리고 별관은 가 보지도 못했어요.”

오전 10시경 오헤어 공항에 도착해 호텔 룸에 체크인했을 때는 정오쯤이었고, 이번 출장의 주인공인 슈슈 작가를 포함해 그와 유니 누나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바로 전시회 주최 갤러리 측과 미팅이 잡혀 있었다.

그들이 저녁에 있을 VIP 대상 오프닝 파티를 준비하기 위해 호텔로 돌아올 때까지 나는 시카고 미술관과 그 주변의 두 개의 갤러리를 더 돌아볼 계획이었고.

하지만 무리한 일정이었다. 시카고 미술관 하나조차도 충분히 돌아보지 못했으니까.

드물게 아쉬움을 표시하는 내 모습이 신기한지, 잠시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바라보던 그가 장난스럽게 검지를 까딱거리고는 먼저 드레스룸 안으로 사라졌다. 자연의 빛이 사그라질수록 화려해지는 도시의 불빛을 스케치만으로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던 것을 멈추고, 드레스룸 안으로 그를 따라갔다.

그는 가장 안쪽의 옷장 앞에서 파티 복장을 고르고 있었다. 나는 욕실 입구 바로 맞은편, 드레스룸의 서랍장과 전신 거울 사이에 마련된 벨벳 벤치에 엉거주춤 걸터앉았다.

“어땠어요? 서이현이라면 본관 2층이 제일 마음에 들었을 것 같은데.”

그의 정확한 예상에 뒷목을 쓸며 피식 웃었다. 그가 말한 본관 2층에는 15세기 이후 유럽 회화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예전에 부모님의 화집에서 자주 접했던 눈에 익은 작품들이 많았다. 당시에는 책에서 삽화만 골라보는 아이처럼, 작가명이나 작품명을 확인하지 않았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흥미가 생긴 작품 앞에 오래 머물면서 작품과 작품의 캡션을 핸드폰에 담고(시카고 미술관은 사진 촬영이 가능했다),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가의 이름들을 기억에 새겼다.

피카소, 모네, 렘브란트…. 아무리 무지한 나라도 이름 정도는 들어 봤던, 그리고 그들의 작품이라는 것을 몰랐을 뿐 작품 자체는 알고 있었던 화가들의 작품 앞에서 발길이 오래 머물렀다.

선 하나에서도 긴 세월 동안 자신의 삶을 기꺼이 그림에 저당 잡힌 채 무수하게 연습한 내공이 느껴졌고, 얄팍한 기교나 어설픈 흉내로는 접근할 수 없는 경지의 색감과 터치들, 거짓 없이 시간을 바친 자들에게만 허락되는 깊이감 앞에서는 조금 경건해지기까지 했었다. 그들은 분명 운이 좋아 사후에까지 뛰어난 작가로 평가되는 화가들이 아니었다.

“사실 전 형식보다는 내용을 더 중시하는 편이라 파격적인 작품이 많은 현대미술은 이해하기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멀리하기도 했었고. 그런데 오늘 전시관을 돌아보면서… 현대미술이라고 해서 꼭 파격적인 형식으로 메시지를 전하려는 작가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어떻게 보면 다양한 화가들이 있는 게 당연한데… 제가 좁은 식견으로 편견을 가졌던 것 같아요.”

가운을 벗은 알몸의 그가 탄탄한 허벅지 위쪽을 착 감싸는 검은색 복서 브리프를 착용하는 뒷모습에 시선을 보내며 고백했다. 속옷을 입은 그는 상반신만을 비추는 서랍장 위 거울 앞에서 머리를 먼저 만지기 시작했고, 나는 그런 그를 올려다보며 서랍장 모서리에 관자놀이를 기댔다.

인상적으로 감상한 몇몇 현대 미술가 중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에 대해 그에게 이야기했다.

전적으로 개인적인 감상이었지만, 과감하게 캔버스를 가로지르는 긴 직선의 구도는 단지 인상적인 느낌을 주기 위한 형식만이 아닌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작가의 고민을 거친 형식으로 읽혔다. 내용을 중시하느라 그 반작용으로 자신도 모르게 형식을 소홀히 하거나 등한시했던 나에게는 작은 돌파구를 발견한 듯 신선한 감각을 준 작품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일반화된 사실이라 하더라도, 지금껏 그림에 있어 자신의 세계에만 갇혀 있었던 내게는 그런 깨우침 하나하나가 소중했다.

어릴 때, 실장님과 그림을 그리던 그쯤. 그림으로 세상을 보고 나타내며 그 과정에서 다시 또 새로운 세상을 접하게 되는 놀이가 너무 재미있었던, 그 시절의 흥분이 몸속에서 새롭게 분열하는 기분이었다.

머리 손질을 마치고, 가슴 쪽에 핀턱이 잡힌 셔츠를 걸친 채 맞은편 옷장에 기대 내 이야기를 듣던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에드워드 호퍼 같은 가장 미국적인 작가에게 흥미를 보이는 게 의외인 것 같았는데… 생각해 보니 그런 것도 아닌가.”

“…….”

“위대한 예술은 작가의 내면세계를 훌륭하게 표현하는 것이라는 게, 에드워드 호퍼의 신념이었거든.”

씩 웃은 그는 그 외에도 호퍼와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그의 작품을 모티브로 삼거나 오마주한 <셜리에 관한 모든 것>, <캐롤> 같은 영화들과 열일곱 명의 작가들이 모여 그의 그림에서 받은 영감으로 집필한 단편들을 모은 소설집인 <빛과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까지.

“보스턴 미술관에 호퍼의 작품 <브루클린의 방>이 전시되어 있을 거예요. 관심이 있으면 이번 여행에서 잠깐 시간 내서 보러 가도 되고.”

셔츠의 앞가슴 쪽 단추를 채우며 그가 말했다.

그와 나는 3박 4일의 시카고 출장이 끝나면, 다른 일행들과 함께 서울로 돌아가는 대신 보스턴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소년 시절 그가 2년 정도 신세를 졌었던, 은사와도 같은 부부를 뵈러 가는 2박 3일의 짧은 여행이었다.

시카고와 보스턴은 비행기로 약 2시간 20분 거리였지만, 미국 내에서는 그다지 먼 거리도 아니고,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했으니 이번 기회에 꼭 인사를 드리고 싶다며, 그는 함께 가 줄 수 있는지를 물었었다. 그에게 중요한 사람들을 함께 만나고, 그에 대해 좀 더 깊이 알 수 있는 기회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단둘만의 여정에 대한 은근한 기대감도 없지 않았다.

셔츠의 소매에 커프스까지 채운 그는 여러 벌의 슈트 중 선택한 턱시도 슈트의 팬츠를 입고 내 앞을 가로질러 전신 거울 앞에서 매무새를 다듬었다. 클래식하기보다는 넓은 어깨와 날렵한 허리선, 긴 다리의 탄력을 강조해 주는 트렌디하고 경쾌한 인상의 슈트였다. 그의 외출 준비가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침대를 사이에 두고 바라본 맞은편 창밖으로 어느덧 완전히 해가 저문 시카고의 야경이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다시 내 앞을 지나친 그는 서랍장의 가장 위 칸을 열고 허리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전담 직원이 정갈하게 정리해 둔 여러 개의 타이와 스카프를 훑어보며 말했다.

“호퍼가 사망한 후에 아내인 조세핀이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그의 작품들을 전부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 기증했어요. 뉴욕 현대 미술관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도 호퍼의 주요작들을 소장하고 있고. 뭐, 뉴욕이야… 에드워드 호퍼뿐만이 아니라, 여러 나라 여러 시대 작가들의 작품을 접할 수 있는 최적의 도시이긴 하지만.”

마지막에 덧붙인 말이 어딘가 뉴욕의 홍보 문구처럼 들리기는 했지만,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폭이 넓은 드레시한 실크 블랙 타이와 간결하고 이지적인 느낌을 주는 작은 크기의 블랙 보타이. 서로 성격이 다른 두 가지 타이를 고른 그는 하나씩 번갈아 가며 셔츠 위에 대고 거울에 비춰 보았다.

그리고 셔츠의 깃을 세운 뒤 보타이를 두르며 나를 내려다보고 슬쩍 웃었다.

“떨어져 있던 게 겨우 몇 시간인데, 그동안 서이현에게 변화가 너무 많았네. 내가 모르는 생각, 또 뭐 있어요?”

그의 말투에 피식 웃으며 오른쪽 손바닥을 마사지하듯 엄지로 꾹꾹 눌렀다. 쑥스러움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혼자만의 정리된 생각이나 결심을 말로 하는 것에는 아주 서툴렀지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의 도움이 너무 컸다. 그는 들을 자격이 있었다. 아니, 실은 내가 그와 공유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그리지 않고 있었던 시간이 너무… 아깝게 느껴졌어요.”

셔츠의 깃을 제자리에 돌려놓던 그의 손이 느려졌다. 그리고 내 쪽을 향해 돌아서며 부드럽게 웃었다.

“최고의 자극이네.”

내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해 준 그를 향해 마주 엷게 웃었다.

“저는 그렇게 요령이 좋은 편도 아니고… 저한테 그림은 어학 같은 거라서, 매일 거르지 않고 꾸준히, 되도록 자주 사용해 주면서 머리가 아니라 몸에 밀착돼 있게 해야 한다는 거… 제가 알거든요.”

그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들으려는 자세를 보이며 준비를 멈추고 서랍장의 가장자리에 기대섰다.

“최소한, 보통의 직장인들이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 정도는 매일 그림에 할애해야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

“이젠, 전업이니까요.”

너무 진지하게 구는 것 같아 말의 무게를 덜어 보려 가볍게 웃으며 보탠 말에, 그가 미소를 보였다. 하지만 눈빛은 복잡했다. 생각에 잠겨 있는 눈이었다. 서랍장에 기대 있던 몸을 세운 그는 내가 앉은 벤치의 맞은편, 양쪽으로 열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고풍스러운 욕실 문에 등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예전부터 계속 생각하고 있었던 프로젝트이긴 한데….”

혀로 입술을 축인 그는 팔짱을 낀 오른손으로 왼쪽 상박을 주무르면서 뜸을 들였다.

“팬텀의 미국 지점을 오픈할까 해요.”

“…….”

그의 어조는 차분했고, 크게 대단한 일이 아닌 척 담담하게 말하려 하고 있었지만, 비장함이나 조심스러움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다. 나 역시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그를 보는 눈이 커지고 어깨가 굳었다.

“세계 미술 시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도시 중 하나가 뉴욕이다 보니… 아무래도 그쪽이 되지 않을까 하는데.”

그는 망설이듯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간단한 일이 아닌 만큼 바로 실행에 옮길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추진하려고 생각 중이에요. 그렇게 되면… 서울은 한 실장에게 맡기고… 아마도… 내가 지점을 돌보게 될 거고.”

말끝이 점차 느려지고, 드레스룸의 바닥을 향해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던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사실은 서이현 씨의 데뷔 자체를 미국에서 치르고, 활동도 이곳에서 시작했으면 했어요. 이번 전시는 데뷔전이라고 하기엔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오늘 VIP 파티와 내일 오픈 이벤트에 참석하는 갤러리스트, 큐레이터, 컬렉터들은 최고의 영향력을 가진 인사들이니 실질적인 데뷔전을 치르는 것이나 다름없죠.”

그가 직접 주최 갤러리 측과 논의해, 슈슈 작가의 전시와는 별개로 다른 소규모 홀에서 내 그림과 팬텀의 다른 소속 작가들의 작품을 10여 점 정도 함께 전시하기로 협의한 것은 알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슈슈의 전시가 메인이고 그 외 10여 점의 작품은 부수적인 이벤트이니 부담 가질 것 없다고, 서울에서 그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런데,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진 미술업계 종사자들 앞에서 데뷔전을 치르는 것이나 다름없다니….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언론에 노출되고 사진을 찍히는 상황에 불편함을 느끼는 슈슈 작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긴장을 알아챈 그가 다가와 부드럽게 뺨을 쓸었다.

“마침 좋은 기회가 생겼으니 테스트 삼아 전시해 보는 것뿐이니까 그렇게 긴장할 거 없어요. 이름을 알려 둬서 나쁠 거 없는 사람들이니 눈도장 찍는 정도라고 생각하면 돼요.”

그의 손안에서 고개를 끄덕였지만 가슴이 뛰고 있었다.

“최고의 환경과 조건에서 작업하고, 그에 걸맞은 인정을 받도록 해 주고 싶어요. 그게 내가 갤러리스트로서, 딜러로서, 서이현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지원이니까.”

엄지로 나의 아랫입술을 쓸면서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과 표정에서는 이미 결정을 내리고 각오를 다진 사람 특유의 단단함이 느껴졌다.

“간단한 일이 아니라서 적어도 내년이 돼야 구체적인 윤곽이 나오겠지만. 내가 뉴욕으로 옮기게 되면… 같이 가 줄래요?”

“…….”

뭐라 반응하기가 미묘했다. 갑작스럽기도 했지만, 내 느낌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나의 자의식 과잉이 아니라면, 나를 위해 그가 무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해외 지점을 오픈하는 자체가 그의 오랜 꿈이었던 것은 사실일지 몰라도, 적어도 나 때문에 서두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나를 내려다보며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씁쓸함을 감추지 못하는 굳은 미소와 함께 느리게 입술을 훑던 손이 멀어져 갔다.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해외에 지점을 낸다는 게 한두 달 안에 해결되는 일이 아니니까. 생각할 시간은 충분해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머뭇거리는 내가 못내 섭섭한 눈치였다. 하지만 그의 생각처럼, 결정이 어려워 대답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모래와 형도 떠난 마당에 한국이나 서울에 미련은 없었다. 그와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고백은 감정에 휩싸인 입바른 소리가 아니었다. 그가 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라면 믿고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해외 지점의 오픈을 서두르고 싶어 하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초조함이, 가슴 깊은 곳에서 막연한 불안을 조성했다. 내가 아는 한 그는 중요한 일을 앞두고 초조해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그런 이미지 역시 내가 가지고 있는 부족한 정보로 만들어 낸 그에 대한 환상인 것일까.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긴장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데, 내가 괜한 불안을 느끼는 것일까.

그런 생각의 방황이 눈에 훤히 드러나고 있을 나를 보며 그가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외출 준비를 마무리하기 위해 서랍장 앞으로 돌아가 셔츠 위에 향수를 몇 번 뿌렸다. 견고한 직선으로 디자인된 묵직한 검은색 병은, 그가 자주 사용하는 두어 개의 향수 중 하나였다. 짙고 무겁고 강렬한 향이 그의 존재감과 어울렸다.

“마지막 날은 시간 비워 뒀으니까 그때 같이 관광도 하고, 오늘 못 갔던 갤러리도 같이 가 봐요. 시카고 갤러리를 다시 방문하는 것도 좋고. 시카고는 세 번째이긴 한데, 항상 일 때문에 왔었거든. 나도 안 가 본 곳이 많아서 기대되네.”

두 번째 서랍 안에서 시계를 골라 손목에 감으면서, 그가 목소리의 톤을 명랑하게 끌어 올렸다.

“같이 가 달라고 해 놓고 여기까지 와서 혼자 있게 해서 미안해요.”

옷장 앞에서 재킷을 꺼내 걸치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 괜찮으니까 전시회에 집중하세요.”

어느새 외출 준비를 완전히 마친 그가 미소를 띤 채 물끄러미 나를 돌아봤다. 그리고 천천히 뒤로 돌아 내 앞으로 걸어왔다. 그의 완벽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숨소리를 낮추게 됐다.

그는 나의 두 뺨을 감싸 살짝 들어 올려 자신의 얼굴을 보게 했다.

“이해심 많고 속 깊고, 더 바랄 게 없을 정도인데… 왜 난 자꾸 떼쓰는 서이현이 보고 싶을까.”

“…….”

“파티 같은 거 안 가고 계속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이게 출장이 아니라 우리 둘의 여행이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그렇게 칭얼거리면서 나한테서 안 떨어지려고 하는 그런 서이현.”

그의 바람은 항상 이렇게 구체적이었고, 농담을 하는 얼굴은 심각할 정도로 진지해서 나를 웃게 했다. 그가 나를 따라 피식거렸다.

“하긴. 그런 떼를 쓰는 시점에서 이미 서이현이 아니겠지.”

얼굴을 감싼 그의 손을 쥐고 향수 냄새가 밴 손바닥에 볼을 비비며 말했다.

“막상 제가 진짜 그러면 생각이 달라지실 거예요.”

뜻을 알 수 없는 미소로 나를 잠시 바라보던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과연 그럴까.”

비이성적인 감정의 돌출과 유치한 욕구에 애를 태우는 것이 자기뿐이라는 듯 씁쓸해하는 그를 올려 보다, 쿵, 그의 퍽퍽한 아랫배에 이마를 묻었다. 아주 약간의 원망을 담아서.

“그런 생각 하기 시작하면, 더 떨어지기 싫으니까… 저도 참는 거예요.”

뒷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그의 손길에 아랫배가 간질거렸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단둘이 보스턴으로 향하게 될 여정을 내가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지. 그런 철없는 나를 고백할까 하다가 아랫입술을 한 번 꾹 물었다 놓고 고개를 들었다.

“이것만 기억해 줘. 참지 않는 서이현도 나는 늘 환영이라는 거.”

그가 허리를 숙여 입술을 겹쳐 왔다. 입술만을 가볍게 비볐다 떨어지는 아쉬운 입맞춤에 달콤한 한숨이 새었다.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흩트린 그가 시계를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휴대폰과 담배 같은 몇 가지 소지품을 챙겨 드레스룸을 나섰다.

“난 갤러리에서 그쪽으로 바로 이동하겠지만, 유니는 슈슈 때문에 호텔에 들를 거예요. 유니하고 같이 움직이면 돼요.”

“슈슈 작가님은… 애프터 파티에 참석 안 하세요?”

그의 손에 이끌려 현관 쪽으로 따라 나가던 내 질문에 그가 멈칫 뒤를 돌아봤다.

“음… 공식적인 자리는 갤러리에서 열리는 파티까지고, 말이 애프터 파티지 내가 소수의 몇 명만 초대한 사적인 모임 같은 거니까, 슈슈가 참석해야 할 의무는 없거든.”

반대로 나는 갤러리에서 열리는 파티의 참석은 면제받았지만, 좀 더 소규모인 뒤풀이에는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가 내 그림을 해외에 전시할 기회를 주기도 했고, 소개하고 싶은 사람들도 있다고 해서, 그것까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짧은 복도를 지나 현관 앞 홀에 멈춰 선 그는 나의 손을 놓고 허리를 안았다.

“파티에 오면 서이현 또 긴장해서 음식 거의 못 먹을 게 뻔하니까, 룸서비스로 꼭 저녁 먹고 나와요. 식사 거르면 또 예전처럼 이것저것 다 준비하게 할 테니까.”

현지식과 서양식 식사를 전부 준비하게 했던 홍콩에서의 기억이 떠올라 그의 재킷의 가슴팍을 만지작거리며 소리 없이 웃었다.

“최인우도 식사 거르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했잖아요. 파티에 오면 아마 술도 조금은 마셔야 할 테니까. 아, 약도 꼭 챙기고.”

인우 형에게 진료를 받은 결과는 역시나 가벼운 위염이었다. 신경성일 확률이 높다며, 지금은 심각한 상태가 아니지만 만성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소견이었다. 형이 몇 가지 영양제도 추천해 줘서 약과 함께 복용 중이었다.

정성을 봐서라도 꼭 챙겨 먹으라며, 그는 일주일 치의 약을 보관할 수 있는 칸이 나눠진 플라스틱 케이스에 매일 복용해야 하는 약과 영양제를 항상 직접 챙겨 주었다.

“저 그런 거로 속 썩이지 않는 거 아시잖아요. 슈슈 작가님 기다리고 있겠어요.”

얼른 가 보라고 가슴을 밀면서 웃자, 그는 장난스럽게 섭섭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전에는 슈슈한테 가지 말라고 그렇게 붙잡더니.”

쑥스러운 기억에 열이 오르는 얼굴을 숨기며 현관 밖으로 그의 등을 떠밀었다. 전용 엘리베이터와 연결된 현관 밖으로 완전히 사라지기 전, 근사하게 차려입은 그가 열린 문틈 사이에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따 봐요. 너무 예쁘게 하고 오진 마.”

고개를 가로저으며 생각했다. 거울부터 좀 보시고 그런 말씀을 하시죠, 대표님.

■ ■ ■

그가 호텔 측에 요청해 둔 고급 세단은 시카고 올드타운의 부촌을 향해 북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미시간호의 영향으로 희뿌연 안개가 고층빌딩들을 휘감고 있었고, 쭉 뻗은 직선도로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소리도 없고 진동도 없이 매끄럽게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모험 가득한 이야기 속으로 자진해서 빨려들어 가는 것 같았다.

인간미가 상실되고 황폐해진 미래 도시나 <배트맨>의 배경이 된 고담 시티를 떠오르게 하는 스산한 풍경에 조용히 팔을 쓸며 창문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애프터 파티를 위해 좀 더 화려하고 자유로운 복장으로 바꿔 입은 유니 누나는 세단의 뒷좌석에서 급하게 화장을 수정하고 있었다.

“오늘 대표님 엄청 의욕이 넘치시더라? 웬일로 내일은 인터뷰까지 하시겠대. 주인공은 아티스트들이라며 본인이 앞에 나서는 건 그렇게 꺼리시더니.”

섀도의 명암을 좀 더 짙게 칠하며 누나가 말했다. 그냥 슥슥 대강 칠하는 것 같은데, 누나에겐 그 느낌이 어울렸다.

“뭐, 확실히 대표님 인터뷰하고 사진이 나가면 홍보가 되겠지. 우리가 시카고에서 언제 다시 전시회를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름을 알려 놔서 나쁠 건 없잖아?”

아이섀도의 케이스를 닫으며 이쪽을 돌아본 누나에게 마주 웃어 보였다.

가볍게 생각하는 누나의 추측과 달리 어쩌면 그는 뉴욕 지점 오픈을 미리 염두에 두고 인터뷰를 수락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 미소는 어정쩡했다. 누나에게는 아직 아무런 귀띔도 하지 않은 건가.

“하여튼 오늘 오프닝 파티 진짜 장난 아니었어. 솔직히 이 갤러리가 그렇게 막 파워가 대단한 데는 아니거든? 근데 참석자 리스트가 얼마나 빵빵한지. 와… 나 정신 못 차리고 명함 막 뿌리고 다녔잖아.”

내 쪽으로 완전히 몸을 틀어 앉은 누나의 표정과 목소리에는 파티의 흥분이 아직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을 알아보고 스카우트해 줄 곳이 있을지 모른다며 부지런히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명함을 교환했던 홍콩에서의 누나가 생각났다. 유학이든 이직이든, 누나가 해외에서의 경험을 원한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뭐야, 서이현, 아직도 긴장했냐? 애가 아주 말이 없어졌네.”

우리 사이에 가로놓인 팔걸이의 컵홀더에 걸어 두었던 커피를 마시면서 누나가 나의 경직된 얼굴을 보고 뺨을 쿡 찔렀다.

“아직 이런 파티는 어색해서요…. 그리고, 영어도 걱정이고….”

시카고행이 결정된 뒤, 누나와 형을 가르쳐 주시는 영어 선생님에게 일주일에 두 번 수업을 받았었다. 따로 공부도 했고, 저녁 시간에 그가 조금씩 봐주기도 했었다. 그와의 공부는… 거의가 야한 단어나 문장을 배우는 식으로 발전해 결국엔 스킨십으로 이어지는 데이트의 연장이었지만.

어쨌든 공부를 더 했다고는 해도 겨우 3주간이었다. 영어에 대한 부족한 자신감에, 사교적이지 못한 성격까지 커버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쌓을 수 있는 시간은 아니었다.

“잘하면서 괜히 그런다. 선생님이 너 칭찬하시던데? 몇 개월 안에 권주한 앞지르겠다고 해서 걔 요새 너 땜에 완전 열공 모드잖아.”

일등석 타고 와서 오성급 호텔에 투숙한다고 자랑했더니 출장이 아니라 호화판 관광 아니냐고, 이럴 줄 알았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따라갈걸 그랬다며 권주한이 아예 울더라고. 그렇게 덧붙이면서 누나는 팔걸이 위의 쿠션을 두드리며 즐거워했다.

애프터 파티 사진도 찍어 보내서 약 올려야겠다고 벼르는 누나는 실은 형을 놀리고 싶은 게 아니라 현재를 공유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붙어 있을 땐 그렇게 아웅다웅하면서도 막상 떨어져 있으니 조금은 허전한 모양이었다. 가끔은 둘의 그런 우정이 부러웠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치는 동안에도 흔히들 말하는 단짝을 만들어 본 적이 없었다. 모래와 형은 물론 소중한 친구들이었고, 내 앞에서 연인 티를 낸 적도 거의 없었지만, 두 사람의 단단한 결속은 사람들 앞에서 손을 잡거나 끌어안지 않아도 눈에 보이는 것처럼 선명한 기류 같은 것이라, 우리 세 사람이 친구로서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삼각형을 그리기는 어려웠다. 서로 쌍둥이나 도플갱어 같은 유니 누나와 주한이 형 사이에서도 나는 색깔이 달랐다.

그렇게 생각을 따라가다 보니, 놀랍게도 나에겐 그가 있었다.

그와 나를 이어 주는 고리가 단지 서로에 대한 뜨거운 열정, 연애 감정으로서의 설렘만은 아니었다. 그는 굳어 버린 콘크리트 같은 나에게서 가장 많은 이야기와 감정과 생각을 끌어내고, 어떤 왜곡도 없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가 나에게 갖는 의미는 연애의 대상, 그 이상이었다.

문득 그가 보고 싶었다. 너무도 분명하고 구체적인 감정에, 마치 그에게 들키기라도 한 듯 어두운 차 안에서 얼굴이 붉어졌다.

차가 멈춰 선 곳은 휴 헤프너가 거주했었다는 ‘오리지널 플레이보이 맨션’에서부터 불과 한 블록 떨어진 거리의 3층짜리 저택 앞이었다.

안에서 파티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표시하기라도 하듯 근엄하고 육중한 벽돌 건물의 입구 주변에는 화려한 조명이 장식되어 있었다.

“여기 조명발 장난 아니겠다. 이현아, 사진 좀 찍어 줘.”

크리스마스 시즌의 루미나리에를 연상시키는 조명을 둘러보며 작은 클러치 안에서 핸드폰을 꺼내던 누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 배터리…. 보조 배터리도 다 됐는데. 이현아, 네 폰으로 사진 좀 찍자. 지금 시카고 출장, SNS에 실시간 업로드 중이거든. 네 작품 전시돼 있는 것도 찍어서 올렸는데, 봐 봐, 지금 댓글만 100개가 넘… 어… 꺼져 버렸네.”

누나의 손안에서 까맣게 암전된 핸드폰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웃어 버렸다.

다행히 저녁 시간 내내 호텔에서 충전한 내 폰은 멀쩡한 상태였다. 현관 앞 아치형의 구조물 아래에 포즈를 잡은 누나를 찍으려고 핸드폰의 잠금을 푸는데, 누나가 포즈를 무너뜨리며 관심을 보였다.

“뭐야, 뭐야?”

가늘게 뜬 눈이 음흉해 보였다.

“언제부터 꿀벌 서이현이 핸드폰 잠금을 설정해 놓는, 그런 아이였어?”

“아… 그게 아니라… 여행에서 혹시 분실하기라도 할까 봐…. 로밍 중인데 누가 주워서 통화라도 하면 안 되니까….”

“뭘 또 그렇게 열심히 변명을 하고 그러냐. 원래 다 비밀도 있고 그런 나이인 거지. 지극히 정상이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누나의 얼굴에는 장난기 넘치는 웃음이 여전했다. 핸드폰을 잠근 데에 다른 이유가 있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다.

한 차례의 촬영 뒤 누나가 벨을 눌렀고, 부드러운 인상의 고용인이 문을 열어 주었다. 저택 안은 미로 같았다. 길게 이어지는 복도를 따라 몇 개의 방과 작은 응접실을 지나는 동안 파티의 떠들썩한 소음과 음악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왔다.

먼저 도착해 있었던 그가 복도의 저쪽 끝에서 우리를 마중 나오고 있었다. 재킷도 입지 않고, 셔츠의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리고, 깔끔하게 넘겼던 머리카락도 이마 위로 흘러내린 그는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다.

술이 매우 센 편이라 지금까지 취한 모습을 보지 못했는데, 취한 것까지는 아니어도 그의 들뜬 기분에 술이 하나의 이유가 되기는 한 것 같았다. 그게 신기해서, 나의 어깨에 팔을 걸친 그의 얼굴을 흘깃거렸다.

좀 전에 지나쳤던 응접실보다 훨씬 더 넓은 홀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그는 나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 속삭였다.

“너무 예쁘게 하고 오지 말라니까….”

그렇게 말은 하지만, 지금 입고 있는 복장은 이 모임을 위해 그가 직접 골라 선물해 준 옷이었다. 아티스트로서 참석하는 자리이니 너무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된다며, 캐주얼한 핏의 슈트에 네이비와 화이트의 스트라이프 티셔츠를 매치해 주었다.

“음… 이건 뭐지? 이런 거 하면 더 의심 살 텐데?”

내 관자놀이에 이마를 맞대면서 그가 내 목에 두른 작은 반다나 스카프를 장난스럽게 잡아당겼다.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을 향해 있었기 때문에 가볍게 목이 말라 왔다.

사실 목덜미 이곳저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인우 형이 다녀간 뒤 잠자리를 했던 그날 이후로 그는 가슴과 목덜미를 중심으로 자국을 남기는 버릇이 생겼다.

목 한가운데처럼 눈에 확 띄는 곳에 남기지는 않았지만, 하필 오늘 골라 준 옷이 보트넥 티셔츠라 쇄골 위의 붉은 자국이 드러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미안, 미안. 다 나 때문이지. 내가 건방졌어.”

원망스럽게 쳐다본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어깨에 두른 팔을 더 조여 끌어안으며 사과했다. 되풀이해 미안하다고 하면서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앞서가던 누나가 뒤를 돌아봤지만, 그가 워낙 평소와 달리 들떠 있었기 때문에 밀착된 스킨십도 술기운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작은 연회를 열어도 될 정도로 넓은 홀의 이곳저곳에서 모임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와 마찬가지로 정식으로 차려입고 있긴 했지만, 타이 없이 셔츠의 단추를 풀고, 소매를 걷어 올리고, 느슨하고 유쾌하게 풀어진 모습들이었다. 멋진 실크 이브닝드레스 차림의 한 여성은 킬힐을 벗어 두고 맨발로 칵테일을 즐기며 유쾌한 표정으로 대화 중이었다.

홀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잘 알거나, 혹은 서로의 존재에 대해 이전부터 인지하고 있었던 분위기였다. 그의 말대로 격식이 요구되는 비즈니스 파티의 연장선 느낌은 아니었다.

그는 누나와 나에게 제일 먼저 모임의 공간을 제공해 준 저택의 주인들을 소개했다.

뉴욕이 고향인 한국계 미국인 여성 제인 송과 시카고에서 멀지 않은 올랜드 파크 출신인 코너 드레이크는 그의 부모님과 런던에서 유학 시절을 함께 보낸 부부로, 시카고에서 패션 사업을 하고 있는 동업자이자 가능성이 있는 신인 미술가들이 내놓는 작품의 열렬한 컬렉터이기도 했다.

“시카고에서 소규모 파티를 열 만한 장소 섭외를 좀 부탁드렸더니, 본인들 집이 있는데 어딜 가냐고 흔쾌히 여길 내주신 분들. 아, 유니는 아까 갤러리에서도 인사드렸었지?”

부부와 누나가 먼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었고, 그는 자신이 매우 기대하고 있는 팬텀의 새로운 소속 작가라고 나를 소개했다.

“코너와 나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의 좋은 작품을 구매하는 걸 즐기거든요. 사실 이미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은 정말 너무 터무니없이 비싸잖아.”

제인은 억울하다는 듯 외쳤지만, 두 분이 경제적인 이유로 유명 화가들의 작품 구입을 자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바로 알 수 있었다.

“갤러리에서 이현 씨 누드화를 보고 아위에게 바로 구매 의사를 밝혔는데, 아직은 판매 예정이 없다면서 거절하더라구.”

주지도 않을 거면서 괜히 눈앞에 흔들면서 자랑하는 심술 같아서 얄미웠다며 제인이 그에게 눈을 흘기는 사이, 감사하게도 코너가 홀 한쪽에 마련된 바에서 누나와 나를 위한 칵테일을 가져다주었다.

“아위, 참,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내가 일부러 초대했는데. 괜찮을까?”

“물론이죠. 제인이 소개하는 분이라면 따로 시간을 내서라도 인사해야죠.”

그는 흔쾌히, 그리고 유쾌하게 대답했지만, 칵테일 잔을 입술로 가져가는 눈은 순간적으로 다른 생각에 골몰해 있는 것 같았다. 좀 전까지 높은 소리로 웃고 떠들던 사람 같지가 않았다.

“시카고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아닌데 이번에 두 사람 타이밍이 잘 맞았어. 서로 한번 만나 보면 좋을 것 같아서. 곧 도착한다고 좀 전에 연락받았는데. 아, 저기 오네!”

제인의 반가운 손짓에 나 역시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짧은 순간, 주한이 형으로 착각했다.

손으로 문지르면 까슬까슬할 것 같은 바짝 깎은 머리카락과 극단적으로 마른 체형 탓에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 훌쩍 큰 키와 긴 팔다리. 거기에 전신을 뒤덮은 블랙 컬러까지.

“오 마이 갓. 이게 무슨 일이야? R.R.이잖아!”

주한이 형을 떠오르게 하는 그 사람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 누나는 칵테일 잔을 급하게 입술에서 떼어 내면서 내 옆구리를 마구 찔렀다. 흥분한 누나와는 대조적으로, 그는 여전히 동요 없는 눈빛으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남자를 무심히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제인, 코너!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부부를 향해 활짝 웃으며 다가온 남자는 그들과 최근에도 만남을 가졌었는지, 간단하고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주한이 형보다 훨씬 장난기가 덜한 인상이었다. 닮았다고 생각한 것이 이상할 만큼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인상을 풍겼다. 나이도 주한이 형보다 서너 살 정도는 많을 것 같았다. 다 떠나서 일단, 외국인이었고.

“자, 이쪽은 내가 후원하고 있는 단체의 리더인 리드 로저스(Reed Rogers). 그리고 이쪽은 서울에서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는 라우 위쿤.”

그가 먼저 고개를 끄덕이며 악수를 청했고, 악수에 응하며 남자가 말했다.

“실은 오늘 VIP 오프닝에 갔었어요. 전시, 잘 봤습니다.”

“그랬어?”

제인이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R.R. 그러니까 리드 로저스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제가 초대받은 건 아니었는데, 알고 지내던 다른 갤러리 스태프가 동반 1인 자리가 하나 남는다면서 관심 있냐고 묻더라구요. 제가 지금 시카고에서 빈둥거리고 있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도 그는 남자에게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혹은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제인과 코너가 후원하는 단체라면, 어떤…?”

그런 질문을 건네기는 했지만, 일부러 그 남자를 소개해 주려 한 부부의 입장을 고려한 최소한의 예의 같았다. 오늘 VIP 오프닝에 왔었다는 남자에게 슈슈의 작품에 대한 감상 대신 다른 질문을 꺼낸 것도 의외였다.

“일종의 예술가 공동체예요. 정확히는 경제적, 환경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신진 미술가들 중 뛰어난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을 선별해 생계와 작업 활동을 후원하는 단체인데, 저는 전반적인 운영을 맡고 있구요.”

“흠.”

특별한 감흥을 보이지 않는 그의 반응에도 남자는 성실하게 답변을 이어 갔다.

“다 함께 공동의 목적을 추진하는 것도 아니고, 지극히 개인적인 성격을 띤 단체이긴 한데… 일단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공동체라고 해 두고 있는 느낌이에요.”

이상하게도, 남자의 설명을 들을수록 단체에 대한 이미지가 모호해지는 것 같았지만, 그는 굳이 추가 질문을 하지 않았다. 제인이 웃으면서 남자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리드 자신도 원래는 화가야. 아주 어린 나이에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경력도 있지.”

“네, 그 상 때문에 그림과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긴 했지만요.”

남자는 상을 받았던 경력을 원망하는 듯한 표정과 말투를 보였다.

“이젠 그리지 않아요. 돈을 위해 갤러리들이 교묘한 매니지먼트로 스타를 만들어 내고 단물을 빼먹은 뒤 거품이 가라앉을 것 같으면 내버리는 시스템에 학을 뗐죠. 저 역시 실제 그만한 재능이 있었다기보다는 그런 시스템이 탄생시킨 거품 잔뜩 낀 반짝 스타 중 하나였구요.”

말의 내용은 상당히 신랄했지만, 어조는 그렇지 않았다. 그동안 그에게 소위 ‘세계 미술 시장’의 일부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홍보와 매니지먼트 없이 경쟁이 불가한 상황에 대해 조금씩 들어 왔던 덕에, 남자의 말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의 단체에서 초보 예술가들을 돕게 된 것이기도 해요. 현재는 소설을 쓰면서 재단 운영에만 힘쓰고 있습니다.”

“올해 초에 발간한 단편집, 인상적이었어요.”

누나의 상기된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집중되었다.

남자가 시원하게 드러난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웃음 띤 얼굴로 누나와 자신을 번갈아 가리켰다.

“유니 씨죠? 우리 서로 팔로잉하는 사이잖아요.”

누나 쪽에서 일방적으로 그 남자를 아는 게 아니었다. 남자는 옛 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반가워하며 누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순식간에 대화의 흐름이 두 사람에게로 옮겨 갔다.

누군가 뒤뜰로 이어지는 커다란 폴딩도어 앞, 유리 천장 아래 놓인 그랜드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도 그쪽으로 집중되었다.

“오늘 전시회에 대한 실시간 포스팅도 잘 봤어요. 전시, 유니 씨가 디렉팅한 거였어요?”

“아뇨. 이번 전시회 주최는 이쪽 갤러리였고, 전 그냥 저희 쪽 담당이었어요.”

“파티 규모가 굉장하던데.”

“주최는 이쪽 갤러리인데, 무슨 이유인지 저희 대표님이 이번에 힘 좀 쓰셨더라구요.”

제인과 코너, 그를 주축으로 한 바로 옆의 어른들이 재즈 피아노 연주를 감상하며 호응하는 사이, 리드 로저스라는 남자와 누나는 대화를 이어 갔다.

누나는 소개가 늦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남자와 나를 서로 인사시켜 주었다. 남자는 ‘이현’이라는 발음을 어려워하면서도 재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유니란 이름은 국제적으로 사용하기에는 편리하고 예쁜 이름이지만, 이현이라는 이름을 소리 낼 때 발음 기관에서 느껴지는 저항감이 이국적인 기분을 느끼게 한다는 말로, 누나에게 가벼운 원망을 사기도 했다.

“내 이름이야말로 제일 별로예요. 어떤 언어권에 있는 사람도 어렵지 않게 발음할 수 있는 이름이긴 하지만, 그만큼 기억에도 남지 않는다니까요?”

남자는 이마에 주름을 만들면서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서너 줄의 뚜렷한 주름을 만드는 특유의 표정이 습관인 것 같았다. 나이가 들어 보이게 하는 주름은 아니었다.

바에 앉아서 셋이 천천히 이야기하지 않겠냐는 누나의 제안을 남자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다른 참석자들은 모두 마이클 잭슨의 유명한 히트곡을 재즈풍으로 편곡한 피아노 연주에 빠져 있었다. 잘은 몰라도 어설픈 실력은 아닌 듯했다.

자리를 떠나기 전, 바로 곁에서 반쯤 몸을 돌리고 대화 중이던 그의 어깨를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누나와 함께 바에 있겠다고 얘기하자 그는 웃으면서 내 뺨을 만졌다. 바라보는 눈빛은 내가 보기에도 사랑스러움으로 가득했다. 그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와 가까운 자리에서 그와 친밀하게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은근한 호기심, 혹은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냈고, 그와 달리 나는 시선을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아닌 척, 이쪽을 흘깃거리는 몇몇 시선들이 부담스러워 어색하게 웃으면서 그의 손을 붙잡아 슬그머니 끌어 내리고 자리를 피했다.

홀 한쪽, 과감한 프린팅의 벽지를 배경으로 한 커다란 S자 형태의 바 안에서 정식으로 차려입은 바텐더 두 명이 손님들의 요구에 따라 칵테일을 만들거나 술을 내주고 있었다.

S자의 굴곡이 움푹 들어가는 부분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은 뒤, 남자는 건배를 제안하면서 자신을 리드라고 불러 달라고 했다.

리드는 오늘 오후에 갤러리 1층 전시실에서 내 그림을 봤다며 바 앞으로 상체를 기울여 내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면도칼 따위를 사용해 일부러 밀어 놓은 가는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고 보니 리드에게는 피어싱이 하나도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작품에서 장인급의 노련함이나 세월의 깊은 무게가 느껴지진 않았지만… 여백을 두고 배경을 생략한 과감함이나, 한색 계열의 블루 톤을 가지고 노을의 무상함이나 쓸쓸함을 제대로 표현해 낸 개성과 색감 같은 것들 때문에, 이렇게 어린 사람의 작품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누나를 사이에 두고 나와 떨어져 앉은 리드는 잠시 자신의 상체를 멀리 뒤로 빼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예상대로인지도 모르겠어요. 작품들이 뭐라고 할까…. 어떻게 보면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노인이 과거를 돌아보는 것 같은 애틋한 향수가 느껴지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성장기의 한가운데를 아프게 통과하고 있는 소년의 예민한 통증 같기도 했거든요.”

“아… 음….”

내 그림에 대해 구체적이고 열정적인 감상을 들려줬으니 이쪽에서도 뭔가 피드백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맞는 말이라며 동의하는 것도 감사하다고 하는 것도, 적절한 대응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칵테일 잔의 가는 다리를 만지작거리며 뜸 들이는 나를 대신해 누나가 나서 주었다.

“얘 이번이 첫 전시거든요. 자기 작품에 대한 감상 듣는 게 쑥스러워서 이래요.”

그 뒤 우리 셋은 다양한 주제에 대해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친한 친구들끼리의 가벼운 수다 같은 느낌이었다. 날카로워 보인 첫인상과 다르게 리드는 어울리기 까다로운 상대가 아니었다. 특히 누나와 그는 만난 지 약 2~3분 만에 이미 아주 오랜 사이 같았다.

자신의 예술적 심미안에 대한 자신감이 대단했던(지나쳤던) 유명 미술관의 디렉터가 한 비엔날레에서, 거물 예술가가 작품으로 전시한 쓰레기통을 진짜 쓰레기통으로 오해하고 지나쳐 갔던 일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리드의 익살스러운 언변에 웃고 있을 때쯤, 뒤에서 누군가 양어깨에 손을 올리며 지그시 누르는 무게가 느껴졌다.

“음, 재미있게 보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네.”

올려다보니 그가 웃고 있었다.

어느새 피아노 연주가 끝나고 홀에는 처음 도착했을 때보다 좀 더 빠른 리듬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클럽처럼 조명이 더 어두워졌고, 동시에 음악 소리는 더 커졌다. 사람들이 환호하며 흥을 끌어 올렸다.

“대화 중에 미안하지만… 두 사람에게 꼭 소개하고 싶은 분이 있어서. 잠깐만 실례해도 될까요?”

리드에게 양해를 구한 뒤 그가 누나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홀의 가장 안쪽에 마련된 소파 세트였다. 홀 이곳저곳을 채우고 있는 네다섯 개의 크고 작은 소파 세트 중 규모는 가장 작지만, 가장 화려하고 안락하게 꾸며진 공간이었다.

소파와 소파 사이, 그리고 아마도 오늘 파티를 위해 일부러 준비해 놓은 듯한 원형 스탠딩테이블 사이,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있는 사람들과 달리, 그 주변에 모인 대여섯 명의 그룹은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클로이, 제가 말씀드린 친구들입니다. 팬텀의 디렉터인 유니, 아티스트인… 이현.”

그는 누나와 나의 어깨에 두른 손에 번갈아 힘을 주며 그들에게, 정확히는 검은색 슈트 차림의 여성에게 우리를 소개했다. 이번엔 우리에게 그 여성을 소개할 차례였다.

“그리고 이쪽은….”

“저 알아요.”

그를 사이에 두고 서 있는 탓에 누나의 얼굴을 보기 위해 상체를 좀 더 앞으로 기울여야 했다. 그 역시 눈앞의 여성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누나의 발언에 놀란 얼굴이었다.

“H&W 갤러리의 뉴욕 지점 수석 디렉터, Ms. 클로이 켄트. H&W 갤러리로 옮겨 가시기 전엔 크리스티 뉴욕에서 15년 동안 모던 아트 부분 경매 스페셜리스트로 일하셨구요.”

누나는 높은 연봉을 받는 유능한 비서처럼 보였다. 짙은 스모키 메이크업과 ‘어른’들이 선호하지 않는 개성 강한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소파에 앉아 있었던 여성이 얇은 입술 위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누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나에게 이렇게 관심이 많은 젊은 갤러리스트가 있었다니, 괜히 긴장되네. 나 뭔가 나쁜 짓 하면서 살았던 거 아닌가?”

그녀의 농담에도 누나는 편하게 웃지 못했다. 자신의 우상을 만난 아이 같은, 꿈꾸는 얼굴로 그녀의 반응 하나하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저도 이 정도인 줄은 몰랐네요. 아마 이 홀 안에 있는 분들의 경력은 대부분 유니 손바닥 안에 있을 겁니다. 예술에 대한 이해도와 센스도 훌륭한 데다 굉장한 노력가고, 거기다… 야망까지 있죠.”

야망이야말로 누나가 가진 가장 매력적인 장점이라는 듯 그가 마지막 말에 유난히 힘을 주었다. 누나의 유학이나 해외 갤러리로의 이직에 부정적이었던 그가 주요 인사 앞에서 아낌없이 칭찬하자, 누나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꿈틀거리면서도 다른 사람들 모르게 그를 향해 엄지를 세워 보였다.

전 세계에 총 일곱 개의 본점과 지점을 소유한 글로벌 갤러리의 뉴욕 지점 수석 디렉터라는, 굉장히 화려한 경력의 보유자인 듯한 클로이 켄트는, 소파 옆 비어 있던 스탠딩테이블로 자연스럽게 우리를 안내했다. 홀을 돌아다니던 웨이터 한 명이 재빨리 다가와 누군가 남기고 떠난 빈 잔을 치우고 우리의 주문대로 새 술을 가져다주었다.

“이쪽 서이현 군은 아직 정식 데뷔 전인 신인입니다. 이번에 슈슈의 전시회를 통해 작품 몇 점을 선보이게 됐지만,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인 테스트 수준의 공개죠. 미술계에 강렬한 인상을 남길 만한 데뷔전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

신중하면서도 확신을 가진 그의 발언에 켄트는 입술을 적실 정도로만 샴페인 잔을 기울이며 슬쩍 미소를 보였다.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한 미소였다.

그녀가 샴페인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어느 정도 인정받고 성공을 거둔 기성 작가가 아닌 신인이 데뷔전을 H&W 뉴욕 갤러리에서 치른다면 그보다 더 성공적인 등장은 없겠죠.”

“같은 생각입니다.”

그가 동의하자, 그녀의 미소가 좀 더 진해졌다.

켄트의 곁에 선 누나와 그의 곁에 선 나는 대각선상에서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누나의 눈빛은 그들의 대화가 대체 무슨 뜻인지, 나에게 혼란을 얘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뉴욕의 유명 갤러리에서의 데뷔전이라니…. 누나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들은 바가 없었다.

“미스터 라우가 소장하고 있는 페티본의 작품들을 H&W에서 전시할 수 있도록 협조할 수 있다는 건, 결국 그런… 제안인 거겠네요.”

그와 켄트 사이를 바쁘게 오가던 누나의 시선이 또 한 번 나를 향했다. 우리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친 채로 경직되었다.

그는 지금 나의 데뷔전을 조건으로 켄트와 거래를 진행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런 것 같았다.

“제가 소장하고 있는 건 세 작품뿐이지만, 아버지께서 페티본의 오랜 팬이라 주요작 30여 점 이상을 소장하고 계시죠. H&W에서도 물론 그의 대표작을 상당수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음… 아버지의 소장 리스트를 확인해 보시면 흥미가 생기실 거라 확신합니다. 페티본의 전시로는 세계 최대 규모로 기록될 겁니다.”

말을 마친 그는 매력적인 미소를 보이며 자기 몫의 잔을 들어 건배를 유도했다. 상대가 이 제안을 절대로 거절할 수 없을 거라는 확신과 여유가 느껴지는 태도였다. 켄트 역시 젊은 갤러리스트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누나와 나도 건배에 동참하기는 했지만, 미소도 아니고 찌푸림도 아닌 누나의 묘한 표정을 봤을 때, 아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아버지의 소장품이라는 카드를 꺼내 든 그가 낯설다는 생각.

“내 입장에선 당연히 입맛이 도는 제안이긴 한데… 페티본의 작품 30여 점 이상을 소장하고 있는 개인이 미술업계에서 알려지지 않았을 수가 있나?”

“대부분 익명으로 매입하셨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교적 규모가 있는 갤러리의 운영진이셨기 때문에 일단 관심 있는 작품의 정보에 대한 접근이 쉬웠고, 대부분 경매에는 대리인을 통하거나 유선상으로 참여하셨으니까요. 게다가 소장 자체에 의미를 두는 분이지, 소유를 과시하는 분은 아니라서 소장은 늘 조용히 이루어졌습니다.”

“흠. 페티본의 작품을 30여 점 소장하고 계신 분이라면 컬렉션이 그게 전부일 것 같진 않고…. 그만한 규모의 컬렉터라면 아마도 내가 알고 있는 분이실 것 같은데. 이전에 어떤 갤러리를 운영하셨었는지 물어도 될까요?”

누나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의 내용보다, 그가 과연 질문에 대답할 것인가에 더 의식이 주목된 것 같았다. 반신반의하면서도 누나는 그가 대답하지 않을 것이라는 쪽으로 예상을 굳히는 듯했다. 아니, 그보다는, 대답하지 않기를 바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홍콩의 갤러리 더 페이스(The Face)의 설립자였고, 지금은 명예 고문이시죠.”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곧바로 미세하게 경직되어 흔들리는 누나의 눈빛과 표정을 보니… 그가 누나와 형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수키킴 선생님이 어머니라는 사실만은 아닌 듯했다.

아버지 이야기는 내게도 처음이었다.

더 페이스 갤러리.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홍콩에서 참석했던 대저택에서 열린 파티의 주최가 바로 더 페이스 갤러리였다. 그리고 과거에 그와 실장님이 처음 만나 함께 일했던 곳이기도 했고. 파티에서 잠깐 자리를 함께했던 그의 옛 동료들이 그가 설립자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인상을 주는 이야기가 오간 기억이 없었다.

답변을 들은 켄트의 미간이 좁혀졌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그녀는 고개를 기울이고 되물었다.

“미스터 닉 라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티 홍콩에서도 더 페이스 갤러리의 작품을 꽤 구입했었죠.”

“아들이 같은 업계로 뛰어들었다는 소문은 못 들었는데.”

“부모님의 명성에 비하면 활약이 미미하다 보니.”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웃음은 자신의 말이 생각과는 다른 것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농담을 이해한 켄트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이해해요. 길 가다 1달러짜리 지폐 한 장만 주워도 부모덕이라고 할 만한 상황이니 숨기고 싶기도 했겠지. 수키킴과 닉 라우라면, 동양판 피카소와 칸바일러로 미술계에서는 워낙 유명한 분들이니까. 아, 혹시 부모님을 이렇게 표현해서 실례가 됐을까요?”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좋은 의미로 하신 말씀인데 왜 그렇게 받아들이겠습니까.”

“나도 개인적으로 수키킴의 굉장한 팬이에요. 운이 따라 주지 않아 작품은 한 점도 소장하지 못했지만.”

내내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던 누나의 입술이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 듯, 그를 향해 약간 벌어졌다가 곧 굳게 다물렸다. 연두색 칵테일이 담긴 잔을 꽉 붙잡으면서, 누나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클로이 켄트를 만났다는 사실도 더 이상 누나를 열광시키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두운 조명과 이야기에 집중된 의식 탓에, 그가 정말 누나의 어색한 반응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는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가 곁에 선 나의 어깨에 손을 짚어 힘주어 주무르면서 켄트 쪽으로 좀 더 상체를 기울였다.

“실은 서이현 작가의 전시를 시작으로 제 갤러리의 뉴욕 지점을 오픈해 활동할 생각입니다. 물론 뉴욕 미술계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H&W와 협력적인 관계를 원하구요.”

“대표님.”

한국어로 불쑥 그를 부른 누나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놀란 표정이었다. 켄트가 누나를 돌아보며 괜찮은지를 물었다. 누나는 곧 표정을 수습하고 어색하게나마 웃음을 보였다. 나에게뿐만이 아니라 누나에게도, 그가 뉴욕 지점에 대해 귀띔하지 않은 것 같다는 추측이 확실해진 순간이었다.

“아… 죄송해요. 서울에 남은 다른 직원과 통화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실례가 안 된다면… 잠깐 자리를 비워도 될까요?”

양해를 구한 누나가 서둘러 곁을 지나쳐 갈 때, 그는 누나의 어깨를 붙잡으며 무슨 일이 있는지를 물었고, 누나는 켄트 쪽을 힐끔 쳐다보고는 아무래도 이전 파티에서부터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것 같다며 그녀에게 잘 좀 둘러대 달라고 부탁했다.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춤을 추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누나는 홀을 가로질렀다. 뒤쫓아 가는 게 좋을지, 만약 뒤따라간다면 내 입장에서 누나에게 무슨 말을 해 줄 수 있을지, 그가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지에 대해 갈등하는 사이, 누나는 홀을 벗어나 복도로 꺾어 들어 시야에서 사라졌다.

“확실히 일회성의 전시회 이상으로 흥미가 생기는 이야기네요. 관심을 보일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

그렇게 말한 켄트는 그 자리에서 서너 명의 사람들을 바로 그에게 소개했다. 더 페이스 갤러리의 창립자와 수키킴의 아들이 뉴욕에 오픈할 갤러리에 대해 개인적, 사업적 흥미를 보이는 사람들로 두 개의 스탠딩테이블 주변이 금세 북적거렸다.

테이블에 둘러선 사람들 중 몇몇은 오늘 갤러리에서 내 작품을 봤었다며 짧은 감상을 들려주기도 했다. 또 몇몇 사람은 그의 갤러리의 다른 소속 작가들에 대해 궁금해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의 부모님에 대한 관심과 그에 대한 호감을 에둘러 표시하며 친분을 쌓기 위해 애썼다.

딱딱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편하게 느낄 수 있는 자리도 아니었다. 그는 유쾌한 태도로, 너무 나서지 않으면서도 능숙하게 자리의 분위기를 리드하고 있었지만, 그가 정말 이 자리를 즐기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뭐든 부모덕이라는 질투도 싫지만, 아첨도 싫기는 마찬가지였다고. 자수성가라는 타이틀까지 쥐고 싶었던 왕자님의 얄팍한 쇼라고 수군거릴, 타인의 삶을 평가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희생될 생각은 없다고.

출신과 배경을 떠나 그저 자기 자신이길 원했던 그의 이야기들…. 그날 밤에 이루어졌던 조심스러운 공감과 교감.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그가 보여 주고 있는 모습들…. 혼란스러운 것은 누나만이 아니었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그를 판단하려는 것이 아니다.

부모와 가족의 덕을 보겠다는 것이 부도덕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가 싫어질 이유가 될 수도 없었다. 어쩌면 이것은 더 높은 목적,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융통성을 발휘해 선택한 차선책일 수도 있었다.

단지, 그의 생각이 이전과 달라졌다면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를 이해하고 싶었다.

지금이라도 자리를 떠나 누나를 찾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비어 버린 내 잔을 웨이터에게 내주고 새로운 칵테일을 건네준 옆자리의 여성에게 웃으며 감사를 표시했다. 시카고에서 발행되는 한 미술 잡지의 편집장이라는 그녀는 다음 호 잡지에 슈슈의 전시회 기사를 실을 예정이라고 했다.

그때 문득,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 바깥쪽으로 당기며 높은 목소리로 요란한 인사를 건네 왔다.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인지 짧게 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그녀는 그리 반가워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녀의 몸이 반쯤 뒤로 돌려지면서 생긴 빈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남자는, 홀 안의 대부분의 사람들과 달리 원색의 컬러풀하고 패셔너블한 의상으로 화려하게 꾸미고 있었다.

조심성 없는 움직임 탓에 흘러넘칠 것 같은 칵테일을 홀짝거리며, 남자는 그녀와 나를 사이에 두고 대각선으로 마주 선 그를 삐딱하게 올려다봤다.

“여기서 괜찮은 투자 얘기가 새고 있다고 하던데. 돈 냄새가 솔솔 나더라고.”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백금발에 가까운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말끔하게 넘겨 고정한 남자는 옷차림 때문인지 취기로 인해 살짝 비틀거리는 자세 때문인지, 약간 호전적으로 느껴졌다.

“오늘 파티 주최자인 여기 미스터 라우가 뉴욕에도 지점을 낼 계획이라고 해서 다들 그 얘기 중이었어요.”

모여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금발의 남자와 서로 안면 정도는 있는 사이인 것 같았다.

“그런 얘기라면 나도 아주 관심이 많은데….”

“그런데 아마 투자는 불필요할 것 같네요. 자금에 있어서 그는 도움을 받을 이유가 없는 것 같으니까.”

누군가의 설명에 남자는 뺨을 긁으며 그를 향해 탐색하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흠. 아쉽네. 그쪽 갤러리에 재밌는 일이 많을 것 같던데….”

오늘 오후에 내가 다녀왔던 시카고 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멋지게 기른 수염과 학구적인 느낌의 안경테가 인상적인)가 나서서 금발의 남자를 그에게 소개했다.

슈슈의 전시회를 주관한 이쪽 갤러리의 초청으로 오늘 VIP 오프닝에 참석하기 위해 마이애미에서 왔다는 남자는, 한 유명 화가의 무명 시절에 2만 달러에 구입했던 작품을 10년 뒤 천만 달러의 이익을 남기고 되판 것으로 유명한 한 컬렉터의 아들이라고 했다. 현재는 남자 본인 역시 미국 남부에서 유명한 컬렉터 중 한 명이었다.

“컬렉터는 무슨. 그냥 투기꾼이란 얘기네.”

그가 내 귓가에 입술을 바짝 대고 한국어로 속삭였다. 미소 띤 얼굴이라 누구도 말의 내용을 짐작하지는 못했을 거고, 유니 누나나 주한이 형이었다면 노련하게 맞장구를 치며 함께 웃었겠지만, 나는 괜히 가슴이 떨려서 맞은편 남자를 힐끔거렸다.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고, 자신의 머리카락 색만큼 화려한 칵테일이 담긴 잔을 들어 보이며 남자가 이쪽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나는 어색한 미소조차도 짓지 못한 채 슬쩍 시선을 돌렸다.

금발 남자가 온 뒤부터 자리의 분위기는 남자에 의해 휘둘리기 시작했다. 다들 흥이 오를 정도로만 술을 즐기고 있는 데 반해 남자는 다소 과하게 취해 있었다. 그리고 어느 문화권에서든, 취하지 않은 사람 열 명이 취한 사람 한 명을 당해 내기란 어려운 일인 듯했다.

“베타들은 인정하기 싫은 것 같지만, 알파나 오메가들이 예술계에서 훨씬 더 두각을 드러내는 게 사실 아닌가? 특히나 미술계에서는 알파들도 오메가의 섬세함과 창의성은 못 따라간다니까?”

남자는 자신의 투자 노하우가 사전에 작가의 성별과 외모를 반드시 확인하는 거라며 자랑스럽게 떠들어 댔다.

“오메가들 중에 간혹 유난히 신비로운 분위기를 가진 사람들이 있는데, 난 그런 작가들의 작품은 무조건 수집해요. 뭐랄까… 그런 오메가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정상의 자리에 오르거든.”

혼자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눈을 가늘게 접으며 어깨를 들썩이며 웃은 남자는 말을 덧붙였다.

“그림 실력으로든, 오메가로서의 매력으로 미술판의 힘깨나 있는 노인네들을 홀려서든.”

“말끝마다 오메가, 오메가…. 듣기가 좀 거북하네요.”

더는 들어 주기 어려웠는지, 그가 남자를 저지하고 나섰다. 점잖은 어투였지만 무겁게 끊어지는 단어와 단어 사이의 호흡이 그의 불쾌감을 충분히 전달해 주고 있었다.

남자는 테이블에 기대 거의 반 엎드려 있었던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눈을 빛냈다. 마치 그가 반응을 보이기만을 기다린 사람 같았다.

“아, 불편하셨나요? 오해하지 마세요. 비하의 의도는 전혀 없으니까.”

사람들은 이제 영화 속 악인의 최후를 확인하기 위해 스크린 속에서 이어지는 악행을 견디는 관객의 심정으로 남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남자는 그 자체로 하나의 불쾌한 쇼 같았다.

“오히려… 제가 이런 쪽으로 좀 고지식한 편이라, 알파는 역시 오메가랑 이어져야 한다는 주의거든요. 잠자리의 쾌감도 뭐… 베타와는 비교가 안 되니까요.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지만, 페로몬에 취한 발정기 오메가와의 잠자리는… 아… 그 순간엔 진짜 목숨을 내놓으라면 내놓을 수도 있을 것처럼 죽여주니까요. 베타로 태어난 남자들이 불쌍할 지경이라니까?”

자리에 있던 모두의 얼굴이 불편함으로 딱딱해졌지만, 남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무례하고 경박했다.

모래, 실장님, 인우 형, 그리고 아위까지. 그동안 만나 왔던 주변의 알파들은 얼마나 상식적인 사람들이었는지.

눈앞의 이 추한 남자 역시 내가 인정하든 하지 않든, 모르고 살아왔던 세계의 한 일면이라는 사실에, 알몸 위를 기어가는 뱀의 비늘을 느낀 것처럼 섬뜩했다.

남자는 무리 안에서도 특히 그를 노려 건드리고 있었고, 그는 이 도전에서 등을 돌리는 것으로 상황을 소극적으로 해결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는 자신의 술잔을 기울이며 남자에게 냉담한 시선을 던졌다.

웨이터에게서 새로 채운 잔을 건네받던 남자는 반 정도의 술을 홀 바닥과 자신의 화려한 재킷 앞자락에 쏟아 버렸다. 그러고는 혼자 목소리를 높여 웃고는, 술이 흐른 손가락을 혀로 핥았다.

“슈슈가 골든 오메가라는 사실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동시에 그의 아름다운 외모를 홍보에 사용하시는 미스터 라우라면 저와 뭔가 통하는 게 있겠다 싶었는데…. 아, 과연 탁월한 전략이십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골든 오메가의 작품이라니,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오늘 다섯 점이나 구입했으니까요.”

남자가 오늘 슈슈의 작품을 예약했다는 이야기에 그의 눈썹과 입술이 꿈틀거렸다.

“근데. 슈슈가 끝이 아니었네요…?”

테이블에 팔꿈치를 기댄 남자는 말끝을 늘이며 내 쪽을 향해 짧은 시선을 던졌다.

이번에는 그의 전신이 딱딱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남자를 내려다보는 눈은 더 이상 스크린 속, 현실과 무관한 악당을 보듯 냉담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남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해 대신해서 자신을 죽여 달라고 상대를 부추기는 사람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난 현재의 유명세 따위에는 연연하지 않아요. 이런 오메가의 작품이라면… 앞으로 2~3년 동안 그려 낼 작품을 통째로 예약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렇게 매력적인데… 빈 캔버스에 선 하나 그어 놨으면 또 어때.”

“……!”

내 쪽을 향해 은근하게 기울어지던 남자의 얼굴을 커다란 손바닥이 움켜쥐었다.

안면을 강타하는 퍽, 하는 소리 뒤에 남자의 손에 들려 있던 잔이 홀 바닥에 부딪혀 조각나는 파열음이 이어졌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반사적으로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나 역시 코앞에서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어깨가 딱딱해졌다. 그가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러서라는 듯 나의 아랫배를 슥 뒤로 밀었다.

순식간이었다.

그는 남자의 오른쪽 어깨 아래와 옆구리를 가격했다. 일부러 정확한 급소를 피한 듯한 공격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남자는 바닥에 고꾸라졌다. 움직임의 반경이 크지도 않았다. 그의 움직임은 너무나 간결해서, 남자가 엄살을 부리는 것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비명과 괴성, 웅성거리는 소리가 이어지고, 남자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지만 복부를 감싸 안고 웅크린 채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이상한 신음을 흘리며 계속 몸을 더 웅크렸다.

즉각 제인과 코너가 달려와 상황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상대를 쓰러뜨린 뒤에도 어깨를 들썩거리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그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단단하게 말아 쥔 주먹은 달려들어 더 공격하지 않기 위한 억제처럼 보였다.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조절하지 못하는 그가 낯설었다. 섣불리 그에게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알아 온 그는 훨씬 더 노련하게 이런 상황을 다룰 수 있을 것 같은, 이성과 요령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건장한 고용인 두 명이 코너의 호출을 받고 곧장 달려와 남자를 연행하듯 부축해 홀에서 데리고 나갔다. 코너가 그 뒤를 따랐다. 자리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 중 몇몇이 제인에게 다가가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대신해 그들에게 사과했다.

“아니에요. 솔직히 큰돈 쓰는 고객이라 다들 어쩔 수 없이 참고 있었지만, 여기서 미스터 라우를 탓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자신의 소속 작가들을 돈으로 살 수 있는 창부 취급을 하는데… 어떻게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있겠어요?”

그들의 설명을 들은 제인은 여전히 거칠게 호흡하며 서 있는 그와 그의 등 뒤에 서 있는 나에게 차례대로 시선을 주었다.

별실로 가서 잠시 쉬는 게 좋겠다며 제인이 그를 부드럽게 회유했다. 그때까지 자신의 폭주를 막는 것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그가 천천히 나를 돌아봤다.

그리고 말없이 팔을 뻗어 손을 잡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먼저 잡아 준 그의 손을 그저 꽉 붙잡았다.

돌아온 코너에게 홀의 상황을 수습해 주길 부탁한 제인은 그와 나를 복도 안쪽의 한 방으로 데리고 갔다. 안락한 소파와 차를 마실 수 있는 테이블로 꾸며진 작은 응접실이었다.

3인용 긴 소파에 그와 제인이 나란히 앉았고, 제인이 권한 대로 맞은편 팔걸이의자에 내가 자리를 잡았다. 그가 내 손을 놓지 않으려 했지만, 지금은 이렇게 하는 게 좋겠다며 제인이 그를 설득했다.

“같은 방에, 눈앞에 이현 씨가 있잖아. 괜찮아. 위험하지 않아. 괜찮아.”

그녀는 그에게 얼음을 타지 않은 위스키와 담배를 권했다. 흥분 상태인 사람에게 술을 권하는 것이 괜찮을까 걱정이 됐지만, 위스키 한 잔과 함께 담배 한 대를 다 피웠을 때쯤 그의 눈은 거의 평소대로 돌아와 있었다.

후우…. 어깨를 무너뜨리며 길게 숨을 내쉰 그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제인의 집에서 이런 소란을 일으키다니….”

“얘기 다 들었어. 내 집에서 이런 소란을 피운 것보다, 내 집에서 그런 저질스러운 소리를 떠든 게 더 용서 못 할 일이니까 사과하지 마.”

한쪽 코너에 마련된 간이 바의 전기 포트에서 가지고 온 따뜻한 물을 컵에 따르면서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 설명도 못 들었더라도, 네가 이유 없이 그랬을 리 없다는 거 잘 알고.”

그렇게 덧붙이고는 그의 등을 두어 번 툭툭 두드린 그녀는 신중한 시선으로 나와 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현 씨, 너와 교류하는 오메가인 거지?”

“…….”

조심스럽기는 했지만, 그녀는 확신을 가지고 묻고 있었다.

그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시선이었다. 아무 뜻도 없는 단순한 응시 같기도 했고, 복잡한 감정을 전하기 위한 짙은 호소 같기도 했다.

“교류 중인 오메가에 대한 보호 본능이 자극받았던 거 아니야?”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수준 이하의 인간에게서 모욕을 들었다 한들, 제어력이 강한 그가 폭력을 휘두르는 것으로 상황을 해결하려 했을 리 없다고. 그녀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야?”

“…….”

그녀의 확신에 의문이 섞여 들어갔다.

여전히 그는 대답 없이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저항의 의지를 잃은 것 같은 텅 빈 시선이 나에게 대신 대답해 보라고 말하는 듯했다. 내가 오메가인지, 베타인지, 어떤 무엇인지를.

홍콩에서. 처음 삽입을 하고 노팅을 한 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내 안에서 정액을 긁어내며 거듭 사과했던, 그때의 눈과 겹쳐 보였다. 커다랗고 견고한 그가 순간 한없이 무력하고 연약한 소년처럼 느껴질 정도의 어떤 맑은 슬픔이, 그의 영혼의 바닥을 투명하게 비추는 듯했다.

그러나 들여다본 그 바닥마저도 투명했다. 아무것도 없는 것과는 다르다. 투명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오랫동안 응시하던 것이 무색하게, 그가 한순간 미련 없이 시선을 거두었다. 등을 구부정하게 기울여 등받이에 느슨하게 몸을 기대며, 낯선 물체를 보듯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아닙니다. 그는 베타예요.”

제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래? 내가 큰 실수를 했네…. 좀 아까 네가 보인 반응이… 영락없이 그런 기미라서. 미안해요, 이현 씨. 내가 너무 넘겨짚었어요.”

“아닙니다. 정말… 신경 쓰지 마세요.”

금발의 남자가 그랬듯 불쾌한 의도를 담은 추측이 아니니 제인은 미안해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무의식중에 모든 사람을 베타로 생각하고 대하는 것처럼, 그녀 역시 자신의 경험에 의한 기준에 따라 나를 오메가로 판단했을 뿐이었다. 정말 괜찮다고 반복해서 이야기하자, 그녀는 조금 안심한 듯한 미소를 보였다.

“제… 소중한 사람인 건, 맞아요.”

“…….”

제인과 나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는 늘 나에게 아낌없이 애정을 표현해 주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 그런 식으로 나의 의미를 분명하게 정의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우리의 시선을 모르는 척, 잔을 들어 조금밖에 남지 않은 위스키를 마저 비워 냈다.

“그랬어?”

제인의 얼굴이 밝았다. 아들의 첫 연인이라도 소개받은 것처럼 설레고 흐뭇해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교제한 지 얼마나 됐는지, 어떻게 시작된 관계인지, 누가 먼저 고백했는지… 등등, 커플들에게 공식처럼 따라붙는 그런 질문들을 늘어놓지는 않았다.

나를 향해 살짝 짓궂은 미소를 보내오며 눈을 빛내는 제인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시선을 얼버무리며 후… 소리 나지 않게 긴 숨을 내쉬었다.

“오늘 너에게 좋은 인상 받은 사람들이 많아.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코너와 나도 지지할 거고. 좀 아까 일은 염두에 두지 마. 미술판에서 계속 저런 식으로 지내 왔다면 드러나지 않은 적이 훨씬 많을 테니까.”

네가 신경 쓸 정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지금쯤 네가 누구인지를 알아내고 저쪽에서 오히려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 거라고. 그녀는 그렇게 덧붙이며 격려하듯 그의 손목을 한 번 꽉 쥐었다 놓았다.

“힘이 좀 있다고 그걸 휘두르는 재미로 여러 사람 괴롭게 하며 살아왔으니 다른 힘을 만나 자신이 괴로워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는 모여 있던 다른 사람들과 제인, 코너… 그리고 나에게 피해를 준 것이 미안할 뿐, 금발의 남자를 신경 쓰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제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은 좀 더 쉬다가 나와요.”

그녀가 나간 뒤에도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빈 잔을 내려다보고, 나는 진정하는 데에 도움이 될 거라며 제인이 내준 따뜻한 물이 담긴 컵을 쥐고 그 온기를 느끼며 각자의 생각에 골몰했다.

아니, 생각은 무슨. 앞에 앉은 상대에게 모든 의식을 집중하고 있었다. 작은 소동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어지고 있는 파티 음악의 울림이 둥둥, 아주 희미하게 벽을 타고 전해져 왔다.

침묵을 깬 것은 그였다. 툭툭,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렸다. 하지만 나를 보는 눈은 내가 자신의 요구를 들어줄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나간 문을 한 번 돌아보고 주춤거리며 일어나 그의 옆자리로 옮겨 갔다. 그는 그런 나를 빤히 보고만 있었다. 아주 만지고 싶다는 눈으로. 아주 많이 만지고 싶지만, 내가 어떻게 느낄지 몰라서 섣불리 그럴 수 없다는 눈으로.

이제 아무것도 마실 것이 없는 빈 잔을 손안에서 무의미하게 빙빙 돌리며 그는 할 말을 찾는 듯했다.

“내가 무서운가?”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틈을 두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믿어 줄지 모르겠지만… 누굴 때려 본 건 처음이야.”

“…….”

“호신을 위한 몇 가지 격투 무술은 아주 어릴 때부터 익히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후의 방어 수단이고… 누군가 성질을 건드린다고 해서 그때마다 폭력을 쓸 수는 없는 거니까. 물리적 힘의 위험성과 그것을 제어하는 정신과 이성의 가치에 대해서도 병행해서 배웠었고. 뭐… 이런 장면을 목격했으니 믿음이 가지는 않겠지만….”

자조적인 쓴웃음과 함께 그는 또 손안의 잔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내 앞에서 자신 없어 하는 그의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는 어린아이 하나가 앉을 수 있을 만큼의 틈이 남아 있었다. 그 거리를 반 정도로 줄이며 푹신한 쿠션 위에서 엉덩이를 끌어 그에게 좀 더 다가갔다. 걷어 올린 셔츠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의 피부 위를 간질이듯 가볍게 위아래로 쓰다듬다가 손목을 향해 내려갔다.

그는 아주 신기한 움직임이라도 보는 것처럼 그런 나에게 똑바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내 움직임에 응하며 잔을 내려놓고 손을 내주었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바닥에 천천히 내 손바닥을 마주 겹쳤다.

“믿어요.”

그의 푸른색 눈동자 속에 옅은 안심이 떠올랐다. 절망 속에서 가는 희망을 발견한 사람처럼 그의 눈빛은 간절했다. 이렇게까지 나에게 자신 없어 할 정도의 일인가. 그가 필요 이상의 무게로 자신을 비난하는 것 같아 안쓰러웠다.

“무서워하지 말아 줘…. 다신 안 그럴게….”

자신을 경멸하지 말아 달라고, 그는 괴로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혹시라도 내가 자신에게 거리를 두려 할까 봐 두려워하는 그를 보면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의 일들이 떠올랐다. 그때의 그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임시로 일을 도와주고 금방 떠나 버릴 알바생.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소중한 팬텀 식구들을 위해 나를 경계하기도 했었다.

지금은 안다. 그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까지 무조건적인 친절을 보이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우선시하고 그들에게만 집중하는 스타일이다. 그 소중한 사람들에게조차 자신을 모두 드러내고 공유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누군가가 보기에는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 역시도 그런 이유로 처음엔 벽을 느끼고 낙담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바로 그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나에게 온전히 집중된 그의 애정을 독점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일이다. 한 사람이 가진 동일한 성격이, 처음엔 힘들게 하는 이유였다가, 다음엔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장점이 된다는 것이. 나를 섭섭하게 하고 답지 않은 반항심을 불태우게 하기도 했던 그의 벽 너머의 세계에 일단 들어오고 나니, 이제는 그가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지 않은 것에 안심하는 내가 있었다. 스스로의 얄팍함에 나야말로 조소가 새었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와 겹친 손에 깍지를 꼈다.

“무섭지 않아요. 충분히 그럴 만한 상황이었다고, 다른 분들도 다 그렇게 말했잖아요. 화나는 게 당연해요. 그리고, 화내 줘서 고마워요. 솔직히 저도… 많이 화났었어요.”

“…….”

“폭력을 옹호하려는 건 아니지만… 모든 상황에서 늘 이성적이고 균형 잡힌 판단만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사람이니까….”

그의 눈에 좀 전보다는 더 안심한 기색이 짙어졌다.

“그딴 소리나 듣게 하려고 여기까지 같이 온 게 아닌데…. 미안해.”

금발의 남자가 했던 말들을 다시 떠올리며 그는 인상을 썼다.

“그건… 아위가… 미안해할 부분 아니니까,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아위라는 이름으로 불린 것에 대한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그가 흐릿하게나마 미소를 보였다. 아위라는 호칭을 통해, 내가 정말 이 일로 자신을 밀어낼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제야 완전히 안심하는 것 같았다.

그가 눈을 맞추면서 서로 깍지 낀 손을 들어 내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의 손등을 향해 굽혀진 내 손가락의 마디마다 입을 맞췄다. 너무나 소중한 것을 얻어서 감히 강하게 움켜쥐지도 못하는 것 같은 입맞춤이었다.

“네가, 그런 악취를 맡지 못해서 다행이야.”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서 안도와 함께 푸른 노기가 느껴졌다.

나는 물론 알아채지 못했지만, 아마도 금발의 남자는 나에게 페로몬을 개방했던 것 같다. 오메가로 착각하고, 페로몬으로, 성적으로 나를 교란시키고 유혹하려 했다면… 그가 그렇게까지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화를 표출했던 게 더 이해가 됐다.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를 천박한 방식으로 유혹하는 혹은 모욕하는 장면을 코앞에서 목격하고도 평정을 유지할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테니까.

홍콩에서 더 페이스 갤러리의 파티에서 만났던 남자(생각해 보니 그 역시 화려한 금발이었다). 그 남자가 나에게 페로몬을 개방했을 때도 그는 거칠게 나왔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완전히 절제의 경계 밖으로 뛰쳐나올 정도는 아니었다.

나의 중지 위에 가만히 입술을 묻고 눈을 내리뜬 그의 풍성한 속눈썹을 바라보다,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실은 제인에게서 ‘교류 중인 오메가에 대한 보호 본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신경이 쓰였었다. 갑갑하게 구는 것처럼 보일까 봐 망설여졌지만, 궁금증이 그것을 앞섰다.

“오메가가 대표님 연인이 되면, 그렇게… 딴 사람처럼, 그 사람 위해서… 물불 안 가리게 되는 거예요?”

“…….”

내 손가락에서 입술을 떼지 않은 채 그가 눈을 올려 떠 나를 보았다. 눈동자를 굴리며 잠시 얼굴 구석구석을 꼼꼼히 뜯어보던 그가 결론을 내리듯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야. 상대가 너라면, 그런 본능과는 관계없어. 네 행복과 안전에 대한 위협을 두고 볼 수 없는 거지, 겨우 본능 때문이 아니라… 오메가여서가 아니라… 너니까.”

그의 마지막 말이 조금 야릇하게 들렸다. 해석하기에 따라, 마치 내가 오메가이기 때문에 일어난 ‘본능’이 아니라, 나에 대한 자신의 ‘애정’ 때문이라고, 좀 전의 행동 바탕에 깔린 진심을 호소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 발언 같았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베타인 나에게는 불필요한 설득이었지만, 어디까지나 해석하기 나름이었다. 질문의 핵심에서도 조금 벗어난 답변이었지만, 집요하게 굴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유치하고 가벼운 질투에서 나온 발상일 뿐이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가정하며, 있지도 않은 가상의 상대에게 가져 보는 비생산적이고 일시적인 감상.

우리 사이에 다시 침묵이 고여 들었다. 하지만 제인이 방을 나간 직후보다는 한결 긴장이 누그러진 침묵이었다.

할 말이 있으나 망설여지는지, 그가 시선을 내리깔며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았다.

“그리고. 왜 그런 말을 해?”

티 내지 않으려 애쓰는 것 같긴 했지만, 섭섭함과 불만을 토로하며 투정하는 목소리였다.

“무슨….”

“다른 사람이 내 연인이 된다는 얘기 같은 거. 그냥 가정해 보기만 하는 거라도 좀….”

그런 일로 불퉁하게 구는 그가 귀여워서, 그제야 나도 긴장이 풀리면서 웃음이 났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가볍게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물론 기분 좋은 공격이었다.

예전의 나는, 연애에 있어서 그가 이런 사소한 일에 여유를 잃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그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바로 이런 순간에야말로 내가 그와 ‘연애’를 하고 있음을 실감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아마도 다른 모든 연인들이 그런 것처럼, 하찮은 일로 섭섭해하기도 하고 좀 더 섬세한 애정을 요구하기도 하는…. 타인에게는 어디까지나 너그럽고 여유 넘치고 소위 쿨한 사람이라도, 한 대상 앞에서만큼은 조금은 막무가내가 되기도 하며 자신의 견고한 습성을 무너뜨려 빈틈과 불균형을 드러내게 되는, 그런 순간들이 내게는 연애의 의미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가 커다란 몸을 숙여 내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자신의 얼굴을 감췄다.

웃지 말라고, 자기는 심각하게 말하고 있는데 내가 웃음으로 얼버무리려고 한다면서, 어리광 부리듯 목덜미에 입술을 비비다가 그래도 내가 계속 웃음을 멈추지 않자, 나중에는 얄밉다는 듯 깨물었다.

웃음기를 꾹 참으며 고개를 숙여 그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뺨을 쓰다듬었다. 그가 깍지 끼지 않은 왼손을 뻗어 나의 오른팔을 쓰다듬었다.

“조금만. 괜찮을까?”

애처로울 정도로 조심스러운 물음에 묵묵히 그의 허리를 껴안으며 눈꺼풀 위에 입술을 묻었다. 그가 허리를 세워 나를 마주 봤다. 두 손으로 나의 얼굴을 감싸고 엄지로 부드럽게 뺨을 쓰다듬었다. 눈을 뜬 상태에서 엄지의 안쪽이 속눈썹 위를 가볍게 쓸었다. 깃털이 쓸어내리는 듯한 간지러움에 조금 웃자, 입술이 겹쳐졌다.

말캉하지만 건조한 입술이 각도를 바꿔 가며 천천히, 나의 입술을 머금고, 꾹 누르고, 혀로 더듬었다. 뺨에서 귓가로 옮겨간 커다란 손이 손바닥을 밀착시켜 세상의 소리로부터 나를 차단했다.

깊은 물속에 잠긴 것처럼 공기가 흐르는 소리만이 가득한 세계에서 그의 체온과 입술, 그의 향기만을 느끼는 것은 참 멋진 일이었다.

평소처럼 과감하게 파고들어 점령하고, 부어오를 정도로 아프게 빨아들이는 대신 부드럽게 점막을 비비고 혀를 섞는, 몸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열을 지피는 느린 키스에 결국 끝에는 달콤한 숨이 새어 버렸다.

여기서 키스를 더 진행시키면 위험할 것 같아, 그의 가슴팍을 살짝 밀어내며 고개를 숙였다. 손바닥이 닿은 그의 단단한 가슴도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한 흥분으로 부풀었다 꺼지기를 빠르게 반복하고 있었다. 그의 향기를 취한 나의 온몸이 몸살에라도 걸린 것처럼 욱신거렸다. 드러난 피부뿐만이 아니라… 깊은 안쪽까지도.

사실, 시카고에 오기 며칠 전부터 지금까지 삽입 섹스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많이 바빴다. 출발 이틀 전 밤, 둘 다 도저히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몇 시간씩 이어지던 섹스를 30분으로 줄여 빠르게 끝냈던 것이 최근 닷새 사이의 유일한 섹스였다. 그마저도 노팅까지 갈 여유는 없었다.

욕실의 샤워기 아래서 치러 냈던 그 30분의 섹스를 통해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은, 내가 더 이상 그런 생략된 관계만으로는 충분히 만족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었다.

노팅을 하지 못했을 뿐, 분명 그가 안에 들어와 전립선 위를 문질러 주고 사정까지 시켜 줬음에도, 꺼지지 않는 열로 괴로워해야 했다. 원한다는 욕구를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늘 그가 뜨거운 눈으로 다가와 차고 넘칠 정도로 충족시켜 줬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까지 섹스가 주는 쾌락에 익숙해졌다는 걸 몰랐었다.

심지어, 그가 아주 왕성한 욕구를 가진 사람이고, 나는 좋아하는 그가 다가와 섹시한 분위기를 풍기면 거기에 몸이 동해 응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마음도 어느 정도 있었다.

하지만 과거 어느 시점까지는 그랬을지 몰라도, 더는 아니었다. 분명 한 차례 사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더 원하는 갈증에, 남은 사무를 더 처리하기 위해 그가 돌아간 뒤에도, 스스로의 몸을 만지고 허리를 비틀고 아래에 손을 넣으며 그를 찾는 자신의 모습에 너무 놀랐었다.

때문에, 솔직히 현재 욕구 불만 상태였다. 조용한 공간에서 그의 향기에 둘러싸여 그와 키스에 몰입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당장 달려들어 그의 셔츠를 벗겨 버리고 맨살을 맞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키스만으로 끝내기란, 이런 비유는 좀 그렇지만… 소변을 중간에 끊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는 내게서 몸을 떼기는 했지만, 여전히 두 팔을 붙잡은 채 더 원한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아쉬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분위기를 그런 쪽으로 몰아가면 안 될 것 같아 헛기침을 두어 번 한 뒤 말을 돌렸다.

“누나가… 많이 충격받은 것 같았어요.”

“…….”

“아마 다른 것보다도…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알게 돼서 당황한 게 아닐까 싶어요. 제가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얘기… 나눠 보실 거죠?”

힐끔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묻자, 그가 나의 상박에 머물고 있던 손을 미끄러뜨려 손목을 쥐었다.

“그럴게요.”

그리고 고개를 깊이 숙여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죽을 것 같다, 지금.”

입술을 떼어 내며 고통스럽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나 역시 죽을 것 같았다. 그런… 나에 대한 욕구로 가득 찬 목소리를 들은 것만으로도 몸속이 떨렸다. 낯선 것을 지나쳐 당혹스러울 정도의 성욕에 스스로 수치심을 느껴 괜히 가슴팍을 움켰다. 건강한 범위의 성욕이 아닌 탐욕을 부리는 호색한 같아서 이건 아무래도 좀 솔직해질 수가 없었다.

“먼저 나갈 테니까 5분, 아니 10분만 여기에 좀 더 있다가 나와요.”

“…….”

“지금 서이현 얼굴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서 묻지 않았다.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먼저 일어났다.

이제는 다 식어 버린 물 한 잔을 천천히 전부 비운 뒤에야 방을 나섰다. 소동에도 불구하고 파티는 여전히 한창이었다. 불청객의 퇴장으로 오히려 더 흥이 오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과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속한 무리로 다가가는 대신 누나를 찾아보기로 했다.

누나는 유리 온실을 연상하게 하는 테라스 창 너머의 수영장 풀사이드에서 리드 로저스와 이야기 중이었다. SNS상에서는 서로 팔로잉하는 사이라도 실제로는 오늘 처음 만난 두 사람이었지만, 대화를 나누는 표정을 봤을 때 가볍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방해하지 않는 게 좋을 듯했다.

홀과 수영장 사이의 테라스에 어정쩡하게 멈춰 서 돌아보니, 그는 어느새 소동이 벌어지기 전의 유쾌하고 여유 가득한 모습으로 돌아와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도 아닌데, 그는 늘 무리의 중심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와 대각선으로 마주 보고 선 한 남성이 큰 몸짓을 곁들여 가며 무슨 이야기인가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가볍게 웃었고, 그가 웃음을 보이자, 순간 다들 웃음의 액션이 커졌다. 자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 그런 분위기가 더 분명하게 눈에 보였다.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임시 스태프로 참석했던 첫 번째 VIP 오프닝 파티가 떠올랐다. 그때 주한이 형과 함께 안내 데스크를 담당했던 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겉으로는 모든 것을 쉽게 손에 넣은 것처럼 보여도, 수면 아래에서는 이를 악물고 죽어라 발을 저어 대는, 절박한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보려 애쓰면서.

바깥 공기를 좀 더 쐬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눈에 띄어 누나와 리드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테라스의 안쪽, 풍성한 잎을 가진 정원수 뒤 조명이 닿지 않는 그늘로 옮겨가 철제 의자 위에 조용히 걸터앉았다.

좀 전에 서 있던 자리에서보다 그의 얼굴이 더 잘 보였다. 누군가의 농담에 맞장구를 치며 웃음을 터트리는 그의 얼굴을 보다가, 내가 따라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의식하고 나자 웃음이 어색하게 굳어져 갔다.

첫 번째 VIP 오프닝 이후 많은 것들이 달라졌고, 다른 세계의 사람 같았던 그를 내 몸 밖에서 나를 바라보는 두 번째 자아처럼 가깝게 느끼기도 했었지만… 서울에서 열세 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다른 대륙의 타지에서 유리 한 장을 사이에 두고 그를 바라보는 이 순간, 나와는 무관한 TV 속 인물의 언행에 울고 웃는 관람자가 된 기분이었다.

좀 전의 키스가 남긴 뜨거움이 벌써 다 증발된 과거 같아서, 입술을 매만졌다. 그가 늘 해 주는 것처럼 아프도록 강하게 꼬집었지만, 거기에 쾌감은 없었다.

테라스의 그늘에서 올려다본 짙은 안개에 감싸인 시카고의 달은 부옇게 흐려져 아무것도 비칠 수 없는 거울 같았다.

■ ■ ■

파티는 새벽 2시까지 이어졌다. 대부분의 게스트들은 12시에서 1시 사이에 돌아갔지만, 우리를 포함한 마지막 멤버들이 제인과 코너의 배웅을 받으며 각자의 세단을 타고 시카고의 밤 속으로 흩어진 것은 새벽 2시 무렵이었다.

오랜 친구라도 된 것처럼 사람들과 떠들썩하게 인사를 나눈 그는 차에 오르자마자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을 얽어 흩트리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앞 좌석의 그가 창문을 내리자 습기 가득한 차가운 밤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시원했다.

“뉴욕 지점 얘기. 저한테 뭐 하실 말씀 없으세요?”

나의 옆, 운전석 바로 뒷자리에 앉은 누나는 더 기다리지 못하겠는지 먼저 얘기를 꺼냈다.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일인 거 알잖아. 처음 듣는 일처럼 당황할 필요 있어?”

그는 창문 쪽을 향해 연기를 길게 뿜으며 답했다. 피로로 인해 무겁게 가라앉아 갈라진 목소리였다.

“언젠가는 해외에 지점 낼 거라고. 술 마시면서 점심 먹으면서 커피 마시면서, 먼 미래에 언젠가는 이루고 싶은 꿈처럼 지나가듯이 얘기하시긴 했었죠. 근데 어느 날 갑자기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 꿈이 현실화돼서 당장 뉴욕으로 가게 됐다고 얘기하시는데… 어떻게 당황을 안 해요?”

따지듯 빠른 어투는 아니었다. 최대한 감정적이지 않기 위해 누나는 최선을 다하는 것 같았다. 팔짱 낀 손이 스스로의 팔을 꽉 붙잡고 있었다.

“시카고 전시회에 하반기 합동 전시회 준비까지 겹쳐서, 나도 너희도… 갤러리 전체가 정신없이 바빴잖아. 거기서 뉴욕 지점 얘기 꺼내 봤자 너희들 심란하기만 할 거 뻔해서 일부러 입 닫고 있었어. 서울 돌아가서 얘기하려고 했고. 이런 방식으로 알게 돼서 미안하긴 한데… 유니야.”

그가 몸을 돌려 누나와 눈을 맞췄다.

“얘기를 꺼낸 시기에 대해서 너무 큰 의미 부여는 하지 말자. 어?”

내 쪽에서는 그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꺼칠해 보이는 옆모습만으로도 오늘 하루가 그에게 녹록지 않았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마도 그건 누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금발의 남자와 그가 벌인 소동에 대해 누나가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도의 차이를 객관적으로 비교하자는 게 아니라… 오늘 밤이 그와 누나, 그리고 나를 포함해 우리 모두에게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았으리라는 생각에, 어쩔 수 없는 이 분위기의 냉랭함이 안타까웠다.

“실장님도 아세요?”

누나가 질문했다. 그가 다시 정면을 향해 몸을 돌려 앉으며 담배를 빨아들였다.

“너무 이르다고 반대하는 중이야. 돌아가서 이번에 올린 성과에 대해 이야기하면 반응이 달라지겠지. 어떻게든 설득할 거고.”

“왜 갑자기 그렇게 서두르시는 건데요?”

“…….”

잠시 틈을 두고 기다렸지만, 누나는 그 질문에 대해 답을 들을 수 없었다.

“갑자기 인터뷰에 응하겠다고 하시질 않나, 사비까지 끌어와서 무리한 규모로 파티를 여시질 않나…. 이상하다 싶었어요. 지금까지 사업 문제에 대표님 개인 자금까지 끌어온 적 없었잖아요.”

누나가 잠시 말을 멈추고 푸우우, 숨을 길게 내쉬며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올드 타운에서 호텔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여전히 도시 전체가 안개에 휩싸여 있기는 했지만, 눈앞에 직선으로 펼쳐진 도로 끝에 목적지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뉴욕에서 초대한 대형 갤러리 관계자들, 비행기와 숙소 비용까지 다 대표님이 부담하셨죠?”

그가 오른팔을 창틀에 걸치며 관자놀이에 손을 짚었다. 뒷좌석에서 듣기에도 담배를 빨아들이는 호흡이 깊었다.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투입하지 않았던 것뿐이지, 특별히 개인 자금과 팬텀 자금을 정확히 구분하려고 의식해 온 게 아니야.”

“제가 대표님하고 몇 년인데, 그걸 믿을 것 같으세요?”

“…….”

그는 좌석에서 등을 떼고 차량 내의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대표님이 평범한 집안 사람이 아닐 거란 건 알았어요. 하지만… 팬텀 오픈 이후에 한 번도 배경을 이용하신 적 없다는 것도 알아요. 근데… 지금까지 그렇게 숨겨 왔던 가족 배경까지 공개해 가면서 영업해야 할 만큼… 왜 갑자기 지점 욕심이 확 커진 거예요?”

누나의 목소리는 비난을 한다기보다는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 그의 모습은 나에게도 의아했으니 몇 년을 함께해 온 누나에게는 어땠을지. 굳이 대단한 상상력을 끌어올 필요도 없었다.

연기가 완전히 빠지고 난 뒤에도 여전히 창문을 올리지 않은 채 그가 마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업적 측면에서 판단했을 뿐이야. 슈슈의 전시회가 좋은 계기가 될 거고, 서이현 씨 데뷔전을 파격적으로 치러 내면서 지점을 오픈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홍보가 없을 것이다. ―그게 다라고. 결정을 내렸으니 그에 따라 노선을 바꿔 과감하게 움직였을 뿐이고.”

그게 만약, 누나와 같은 질문을 그에게 했을 때 내가 돌려받을 수 있는 답변이라면, 아마도 완벽한 납득은 어려울 것 같았다.

부모님에 대한 다소 복잡한 감정과 일거수일투족을 배경과 연결 짓는 사람들 틈에서 느껴 왔던 그의 회의감은, 단지 어둡게 뭉뚱그려진 삶에 대한 불만으로 그친 것이 아닌 그 자신의 근간을 이루는 신념이나 정체성의 일부가 된 것 같았으니까.

배경에 대해 밝히지 않은 것도, 사업에 끌어와 이용하지 않았던 것도, 결코 별 뜻 없는 행동일 수 없었다. 가족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통해 내가 전해 받았던 인상은 그랬다. 홍콩에서 누나와 형이 해 주었던 얘기를 빌리자면, 두 사람의 생각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곧 안개 속에서도 호텔의 모습이 뚜렷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누나는 드러난 팔을 쓸면서 말했다.

“홍콩 다녀온 후에 유엔빌리지 빌라로 출근하시면서… 거기서 계속 뉴욕 지점 관련해서 추진하고 계셨던 거죠?”

이젠 누나의 목소리도 많이 지쳐 보였다. 그를 더 추궁해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권주한 말대로네. 거기서 진짜 음모를 꾸미고 계셨을 줄이야.”

아직 여름이 한창이었을 때, 넷이서 그의 집 옥상에서 햄버거를 먹었던 날 형이 했던 우스갯소리를 떠올리며, 누나는 뒤늦게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로 웃었다.

자동차가 호텔의 정문 앞에 멈춰 섰다. 버석거리는 침묵 속에서 누나가 가장 먼저 차에서 내렸다.

엘리베이터 홀을 향해 걸어가면서 힐끔 살펴본 그의 얼굴은 누나가 보이는 혼란에 거의 동요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그대로 다른 문제, 무엇인지는 몰라도 더 큰 어떤 문제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새벽 2시의 엘리베이터에는 우리 셋뿐이었다.

우리보다 먼저 12층에서 내려야 하는 누나는 문 앞에 서서 자신의 클러치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대표님은 팬텀의 오너고, 사실 팬텀에 대한 모든 결정에 대해 저희에게 그때그때 설명해 주셔야 할 의무가 없다는 거 알아요. 사생활이나 가족 관계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구요. 그런데도… 이런 식으로 알게 되니까… 섭섭한 건 어쩔 수 없나 봐요. 죄송해요. 아무리 잘난 척해도 아직 어린애일 뿐이네요.”

나와 함께 문의 맞은편 벽에 나란히 기대어 서 있던 그는 누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다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엘리베이터는 7층에서 막 8층으로 향해 가고 있었다.

누나가 반쯤 몸을 돌려 나를 돌아봤다.

“넌…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으리라는 확신이 반쯤 섞인 시선이었다. 바꿔 말하면, 반쯤은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아… 그게….”

“뉴욕 지점 얘긴 서이현 씨도 오늘 오후에야 들은 얘기야.”

뭐라고 얘기해야 가장 현명한 대답일지 망설이는 사이, 그가 대답을 대신했다. 듣기에 따라 나를 감싸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대표님이 닉 라우와 수키킴의 아들이라는 건 미리 알고 있었다는 말씀이세요?”

누나의 예리한 질문이었다. 드러난 허점에 대고 기다렸다는 듯이 단숨에 칼을 꽂는 듯한, 그런 악의에 가득 찬 질문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

그는 부정하지 않았고, 누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팔을 뻗어 내 어깨 위에 툭 손을 올려놓았다.

“너한테는 얘기해 줬으면서 왜 우리한테는 숨겼냐고, 그런 소리 하려고 꺼낸 질문 아니야. 진짜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12층임을 알리는 차분한 목소리의 안내 방송과 함께 문이 열렸다. 웃지 않느니만 못한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며 내 어깨를 한 번 쥐었다 놓은 누나의 지친 시선이 그를 향했다.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내일 10시에 로비에서 봬요.”

그가 누나에게 수고했다는 인사를 다 마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

12층에서 16층까지, 1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 침묵 속에서 소리도 없이 공기를 빼내 가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일요일에… 같이 못 보내게 돼서 어쩌죠?”

분위기를 전환해 보려는 노력일까.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면서 그는 완전히 다른 화제를 꺼내며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목을 당겨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는 그에게서 짙은 피로감이 느껴졌다.

파티가 끝날 무렵, 그는 클로이 켄트를 비롯한 몇몇 주요 인사들의 일요일 점심 식사 모임에 초대를 받았다. 아마도 켄트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풀리려는 듯했다. 그 탓에 우리의 점심 일정은 취소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지금 그에게 묻고 싶고 듣고 싶은 얘기는 그런 것들이 아니었지만, 적당한 타이밍이 아닌 듯했다.

“그래도 저녁엔 같이 보낼 수 있으니까….”

카드키로 룸의 현관문을 여는 그의 허리에 어정쩡하게 팔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달칵. 양쪽으로 활짝 열 수 있도록 만들어진 현관문의 오른쪽 문을 안쪽으로 밀면서, 그가 이해해 줘서 고맙다는 듯 짧게 미소 지었다.

그의 방인 마스터룸과 거실, 그리고 내 방으로 갈림길이 나뉘는 현관 앞의 작은 홀에서 그는 나를 놔주지 않고 자신의 침실 쪽으로 그대로 손을 잡아끌었다.

“저….”

멈칫거리며 팔을 뒤로 빼는 나의 힘에, 그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오늘, 따로 잘까요?”

“…….”

“지금 많이 늦었는데… 내일 정식 오픈이라 오전에 나가 보셔야 하잖아요.”

순간 그의 눈이, 아스팔트 위에 쭉 미끄러지며 요란하게 긁힌 핸드폰의 액정처럼 보였다.

내 손을 놓은 그가, 꽃이 담긴 화병과 스탠드, 전화기 따위를 올려 둔 장식장의 가장자리를 의미 없이 손끝으로 훑었다. 제대로 청소가 되었는지를 확인하듯이.

“정말 날 걱정해서야? 아니면, 따로 자고 싶다는 네 마음을 간접적으로 표시한 거야?”

“…….”

자신의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이미 그가 후회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가 입을 꽉 다문 채 코로 무겁게 숨을 뱉으며 자신의 얼굴을 뭉개듯 쓸어내렸다.

“미안. 지금 그 말은 그냥 바보 같은 화풀이였어. 미안해…. 종일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탓에 예민해진 것 같으니까… 오늘은 네 말대로 따로 자는 게 좋겠어.”

누나에 이어 그 역시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힘든 하루였을 텐데 잘 견뎌 줘서 고맙다고. 잘 자라고. 그는 정성스럽게 굿나잇 키스를 해 주었지만,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함께 자면서, 서로의 맨살과 체온을 더듬으며 피로와 불안을 달랠 걸 그랬다고. 한참을 뒤척이며 후회했다.

■ ■ ■

서울에서 미리 알아봤을 때, 9월의 시카고는 평균 4일에 한 번꼴로 비가 온다고 했었다. 우리는 이틀째 아침에 바로 비를 만났다.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시카고의 웅장한 건축물들 사이로 낮게 내려앉은 연회색 구름과 안개가 서로 뒤섞인 풍경은 어깨에 우산을 걸치고 종일 거리를 쏘다니고 싶을 만큼 운치가 있었지만, 행사 진행에는 차질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갤러리 입구에 설치해 두었던 포토월이 무용지물이 되었고, 대신 뒤에 마련되어 있는 작가와의 Q&A 순서에 간단한 촬영 시간을 갖는 것으로 일정이 변경되었다.

적지 않은 인원들을 실내로 인솔하느라 갤러리 실내외는 한동안 아수라장이었다.

전시회의 정식 오픈일인 오늘은 시카고의 여러 언론사와 미술에 대해 다루는 SNS, 블로그의 운영자들, 그리고 일반 관람객들까지 몰린 탓에 갤러리 실내는 물론이고 그 주변까지 북적였다.

갤러리 측에서 제공한 캔 음료를 하나 받아 들고 인파에 휩쓸려 떠밀리듯 2층으로 올라간 나는 계단에서 그리 멀지 않은 비교적 한산한 난간 주변에 자리를 잡았다.

임시로 마련된 전시홀 중앙의 데스크 뒤쪽에 슈슈가 서 있었고, 슈슈를 보좌하듯 한 발 뒤에 대기한 그와 누나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슈슈와 누나는 사람들에게 가려져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지만, 서울보다는 평균 신장이 좀 더 큰 이곳에서도 그의 얼굴만큼은 사람들의 머리 위로 한 뼘 이상 솟아 있었다.

동양의 도시에서 날아온, 섬세하면서도 강렬한 사진을 찍는 아름다운 골든 오메가 포토그래퍼에 대한 관심은 시카고에서도 대단했다. 슈슈와의 셀카 촬영이나 사인을 요청하는 10대, 20대 관람객 수도 상당했다.

미국에서 열린 슈슈의 첫 번째 개인 전시회이니만큼, 갤러리에 직접 와서 축하하는 것이 예의인 것 같아 오픈 시간에 맞춰 방문했지만,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진땀을 흘리며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슈슈를 보고 있자니 나 하나라도 축하를 덜어 주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나보다 한 시간 정도 먼저 갤러리로 출발하면서 그는, 슈슈와 함께 있는 자기를 봐야 할 텐데 정말 괜찮겠냐고, 질투심으로 자기의 품에 뛰어들어 키스라도 퍼부었다가는 갤러리가 아수라장이 될 텐데 걱정이라고, 반쯤은 나를 놀리듯 말했었지만… 약 3주 전만 해도 그를 슈슈에게 보내기 싫어 떼를 썼던 것이 무색할 만큼, 지금은 아무렇지 않았다. 어차피 그때도 그를 믿지 못해서 질투했던 건 아니었으니까….

어젯밤 그렇게 헤어진 것이 마음에 걸려 분위기가 어색하지는 않을까 걱정했었지만, 아침에 거실에서 만난 그는 다행히 컨디션을 회복한 것 같았다.

비공식적이긴 해도 내 작품이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되는 날이라며, 그는 꽃다발, 정확히는 꽃바구니를 준비해 두기까지 했었다. 두 팔로 끌어안듯이 들어 올리면 시야가 가려질 정도로 풍성하고 아름다운 꽃바구니였다. 그 자체로 작은 정원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화려하고 호사스러웠다.

거실로 나왔을 때 이미 외출 준비를 거의 다 마치고 있었던 그는 어젯밤 일을 언급하며 다시 한번 사과했다. 그리고 저녁 식사를 위해 근사한 곳에 예약을 해 두었다며, 5시에는 호텔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으니 그때쯤 호텔 룸에서 보자고 서로 시간을 맞췄다.

「백유니도 함께 가야 해서 로맨틱한 데이트는 못 되겠지만.」

처음부터 누나를 빼고 움직일 생각도 없었으면서 불만인 척 그렇게 말하는 그의 뺨에 내가 먼저 입을 맞췄었다. 물론 좀 더 진한 입맞춤으로 발전하기도 했고.

거실에 선 채로 꽃향기 속에서 나누었던 아침의 키스에 대해 생각하다, 현실의 그와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에 잠시 멈칫했다. 착각인가 싶었지만, 그가 장난스럽게 얼굴을 구기며 힘들어 죽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분명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피식 웃으며 1층에 내려가 있겠다는 뜻에서 검지로 아래를 가리켜 보이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오케이 사인을 보내왔다.

새롭게 입장하고 있는 관람객들로 계단마저 상당히 붐비고 있었다. 그래도 내려가는 줄은 올라가는 줄에 비하면 상황이 낫기는 했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행렬 사이, 10대 청소년들로 보이는 한 무리가 슈슈의 외모에 대해 흥분한 목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누군가 슈슈 곁에 서 있던, ‘검은 머리에 블루 다이아몬드 같은 눈동자’의 희귀한 조합을 가진 키 큰 남자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러자 또 다른 누군가가 영국 출신의 유명한 할리우드 배우 이름을 대며 그를 닮았다고 했다. ‘뭐? 농담하는 거냐? 저 남자가 훨씬 잘생겼지!’ ―그의 눈을 블루 다이아몬드에 비유했던 시크한 차림의 소녀가 팔짱을 낀 채 단호하게 부정했다.

사람들의 이런 호들갑을 이해한다. 오늘의 주인공은 슈슈지만, 어떻게 해도 그는 배경에 녹아들어 존재감을 숨길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그의 외모만 보고도 사람들이 드러내는 호기심, 호감, 열광 같은 것들에 일일이 자극당했다가는 신경이 버티지 못할 거다.

갤러리 관계자들의 인솔에 따라 천천히 계단을 겨우 다 내려왔을 때쯤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인우 형이었다. 대부분 갤러리 밖으로 향하는 행렬에서 빠져나와 1층 홀로 꺾어 들면서 통화를 연결했다.

“네, 형.”

[……음. 뭐지? 이현 씨가 원래 날 이렇게 반겼었나?]

잠시 뜸을 들인 뒤 그렇게 말하는 형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져 멋쩍게 웃었다. 해외에서 지인의 전화를 받으니 평소보다 반가웠던 게 사실이었다.

[첫 번째 전시, 축하한다고 전화했는데. 바빠요?]

“아니요. 지금 혼자예요.”

[첫 전시가 시작된 기분은?]

“위층에 있다가 저도 지금 막 보러 내려왔어요. 걸려 있는 걸 못 봐서 그런지, 아직… 실감은 잘 안 나요.”

[얘기하는 거 보니까 아직 내 꽃다발은 못 받았나 보네.]

“네?”

[호텔 측에 얘기해서 외출하기 전에 받아 볼 수 있게 준비해 달라고 했는데. 시간이 안 맞았나 보네.]

아쉬움을 애써 감추는 형의 목소리에 내가 다 미안해졌다. 커다란 아레카야자 화분 옆의 벤치에 걸터앉으며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아직 받지도 못했는데 뭐가 고맙냐고, 형은 웃었다.

[어제 VIP 오프닝이었죠? 이현 씨 그림 혹시 판매됐어요?]

“아… 아니요. 대표님이 이번엔 그냥 전시 반응만 체크할 거라고….”

[판매는 안 한대요?]

“네. 이번에는요.”

팔 생각이 있기는 한 건지. 혼잣말처럼 그렇게 중얼거리는 형의 목소리를 들으며 음료의 캔을 만지작거렸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커플이 안쪽 전시실로 이동하며 벤치 앞을 지나쳐 갔다. 내 그림이 걸린 전시실 방향이었다. 괜히 가슴이 뛰었다.

[몸은 좀 어때요? 식사하는 데 불편하지 않아요?]

“많이 좋아졌어요. 식욕도 거의 회복됐고, 추천해 주셨던 영양제 덕분인지 컨디션도 괜찮구요.”

[흠… 아직도 말 안 했나 보네.]

“네?”

전화기 너머에서 형이 입술 양 끝을 당겨 미소 짓는 것이 느껴졌다.

[누가 진료했는데 효과가 없겠냐고 잘난 척 좀 했어요.]

시카고에는 딱히 대표적인 기념품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며, 뻔하긴 하지만 여행 선물은 스타벅스의 시티 텀블러가 좋겠다는 형의 진지한 너스레를 끝으로 통화를 마쳤다.

긴장이 조금 풀어진 기분이었다. 아직은 잘 보이고 싶기도 하고, 시선을 의식하느라 긴장을 놓을 수 없는 그와의 시간과 달리, 형과 얘기할 때는 편안했다. 그가 주는 긴장감은 불편함과는 전혀 다른 기분 좋은 조여듦이긴 했지만, 가끔은 느슨해지는 순간도 필요했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계단까지 붐비는 2층과 달리 아래층은 한결 한산했다. 전시홀의 위치를 안내하는 벽면의 멋진 타이포그래피를 따라 좀 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입구와 위층의 소란에서 멀어질수록, 실내에 흐르고 있는 차분하면서도 몽롱한 느낌의 라운지 음악이 조금씩 귀에 들어왔다.

“…….”

콘크리트 벽의 코너를 돌아 부드러운 간접 조명을 받으며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본 순간, 컨버스 스니커즈 안에서 발가락이 꿈질거렸다. 얼굴로 열이 올랐다. 귓바퀴의 윗부분이 빨갛게 불타는 것이 느껴졌다.

어느 날 학교에 갔더니 교문 옆 게시판에 자신의 일기장이 페이지별로 낱낱이 전시되어 있더라. ―그런 기분이었다. 혹은 꿈에서 간혹 그런 것처럼, 옷을 다 입은 사람들 사이에 홀로 알몸인 채 창피를 당하고 있는 자신을 또 다른 자신이 되어 지켜보고 있는 곤혹스러움에 가까웠다.

첫 느낌은 그랬다.

스무 명 정도 되어 보이는 관람객은 대부분 위층이 조금 한산해지기를 기다리며 시간을 때우려는 사람들 같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완전한 무명이었고, 나 같은 입장에서 이런 기회를 갖게 되는 자체로 아주 큰 행운이고 감사한 일임을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소외>와 아직 제목을 정하지 못해 임시로 <무제(Untitled)>가 된 주한이 형을 그린 누드, 그 이후에 완성한 다른 한 작품까지. 총 세 점의 그림이 서로 간격을 두고 나란히 걸려 있었다.

생각보다 전시장은 좁지 않았다. 총 10여 점의 작품들은 서로의 개성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고 전시되어 있었다. 저마다의 방식대로 그림 앞을 떠도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걸리지 않은, 입구 오른쪽의 빈 벽으로 다가가 슬쩍 어깨를 기댔다.

몇 안 되는 관람객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신작 두 작품에 관심을 더 두는 반면, <소외> 앞에 유난히 오래 머물고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띄었다.

비닐을 씌운 장우산으로 바닥을 짚고 꼿꼿이 선 남자는 어깨를 살짝 넘기는 긴 머리를 가진 동양인이었다. 얼핏 보이는 옆모습만으로 확신할 수는 없지만, 한국인 같았다. 그리고 얼핏 보이는 옆모습만으로도 남자가 상당히 말끔하고 준수한 외모를 가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두 개의 최근작에 비해 표현 양식에 있어 당돌함과 장난기가 넘치는 <소외> 앞에서 키득거리던 두세 명의 청소년들과 부딪힌 뒤에도 남자는 한참을 더 멈춰 있었다.

그 뒤, 남자는 세 그림 사이를 오가며 몇 번이나 캡션을 확인했다. 마치, 자신이 본 것이 틀림없는 사실인지를 확인하려는 사람처럼.

천천히 산책하듯 동선을 따라 움직이면서 길어야 10초 정도 그림 앞에 머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남자의 행동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나를 표현하는 수단으로서의 그림이 아닌, 보는 사람이 자신의 뜻대로 해석하고 느끼고 받아들이는 그림으로서의 의미를 처음으로 현장에서 마주한 순간이었다.

최초의 수치심은 희미해져 갔다. 거기에 걸린 것은 더 이상 나의 치부가 아니었다.

장발의 남자를 비롯한 이곳에 있는 모든 관람객들의 가벼운 농담거리고, 가로등이나 상점의 쇼윈도처럼 스쳐 지나가는 무미건조한 일상이고, 또는 그들이 바라보는 그들 자신의 치부였다.

남자는 마침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림 앞에서 몇 걸음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보는 남자는 예상대로 보통 이상의 미남자였다. 벽에 기대어 서 있던 나와 눈이 마주쳤고, 나는 영어 선생님에게 배운 에티켓대로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남자는 인사를 무시한 채 굳은 표정 그대로 전시실을 빠져나갔다.

마음에 드는 그림을 발견한 사람의 즐거운 얼굴은 아니었다. 아마도 내 그림을 오래 들여다본 것이 그리 긍정적인 이유 때문은 아니리란 예감에 조금 미안해졌지만, 이미 거기에 걸린 것들은 내 손을 떠나 존재하는 개체였다. 누군가의 얼굴을 딱딱하게 만든다 해도 이제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30분 정도 그곳에서 벽에 기대선 채로 관람객들을 관찰했다. 내 그림을 관람하는 사람들이 보이는 다양한 반응을 지켜보는 동안, 신기하게도 무언가를 그리고 싶은 욕구가 자극받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늘 내 안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그리고 싶다는 욕구가 다른 방향에서부터 반응을 끌어내고 있었다.

그 흥미로운 낯선 감각에 좀 더 충분히 자신을 노출하고 싶기도 했지만, 계획된 일정을 위해서는 그만 움직여야 할 시간이었다.

전시장을 빠져나오기 전, 좀 전의 그 남자처럼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내 안에서 나왔고 또 한때는 나의 일부였던, 그러나 지금은 나와 무관하게 존재하며 다른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그들의 관점에 따라 형태를 달리하며 살아 움직이는 그림들.

좀 아까 벤치에 앉아 있을 때 내 앞을 지나쳐 갔던 커플이 <소외> 앞에 멈춰 서서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모습을 좀 더 바라보다 미련 없는 걸음으로 전시장을 빠져나왔다.

2층은 아직도 파티가 열린 것처럼 떠들썩했지만, 다행히 슈슈에게 축하 인사를 직접 전할 수는 있었다. 그는 바쁜 와중에도 잠시 자리를 비우고 갤러리의 입구까지 나를 배웅해 주었다.

“과보호한다고 불평할까 봐 웬만하면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낯선 도시고 비도 오는데, 그냥 차를 타고 움직이는 게 어때요.”

두 사람이 함께 쓰기에 큰 무리가 없을 정도로 지름이 넓은 우산을 받쳐 들고 내 쪽을 향해 좀 더 우산을 기울인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였다.

하지만 그를 만나기 전의 나는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버스를 타는 번거로움과 운동화 속으로 스미는 물기에 젖은 양말의 불편 같은 것들을 삶의 일부로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잘 지내 왔었다. 심지어 빗줄기는 그사이 많이 가늘어져 부슬부슬 흩날리는 정도였다.

맨몸으로 불길 속에 뛰어들겠다는 말이라도 들은 것 같은 표정을 짓는 그의 얼굴 앞에서 웃음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 못 갔던 갤러리 두 군데만 방문하고 곧장 호텔로 돌아갈 거고, 이동할 때마다 바로바로 메시지 드릴게요. 걱정하실 만한 행동 안 한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팬츠의 주머니에 꽂고 있던 손을 꺼내 내가 입은 재킷의 목 언저리 부분을 정리해 주면서 그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마 부근에 숨결이 닿았다.

“대체로는 그렇지. 가끔씩 돌발 행동으로 철렁하게 할 때가 있어서 그렇지.”

내가 그랬던가? 걱정할 만한 행동은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의아한 얼굴로 올려다보자 그가 졌다는 듯한 얼굴로 웃으며 나에게 우산을 건네주었다.

그 후에도 여전히 표정을 풀지 못하고 이것저것 아주 상식적인 주의를 늘어놓는 그를 반강제로 먼저 들여보낸 뒤 비 오는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어제 시카고 미술관에서 예정보다 긴 시간을 보내느라 방문하지 못했던 두 개의 갤러리를 천천히 돌아보고, 다시 호텔로 걸어서 돌아가기까지 4시간 이상이 소요되었다. 중간에 잠깐 갤러리 주변의 카페에서 커피와 머핀을 먹으며 15분 정도 쉬었던 시간을 제외하면 내내 서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다리가 무겁기는 했다.

호텔 룸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서는 바를 붙잡고 코너에 몸을 기대야 했다. 육체적 피로감이 꽤나 오랜만이라는 생각에, 번쩍거리는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실없이 웃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는 거의 매일 이삿짐을 옮기며 땀으로 티셔츠를 흠뻑 적시는 게 일상이었다는 게 까마득했다. 게다가 지금은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도시, 시카고에 와 있었다.

몸은 피로했지만, 그리고 싶은 이미지들이 가득해 마음이 급했다. 창작자에게는 경험이 재산이라던 그의 말은 옳았다. 갤러리에 걸린 내 그림을 마주했던 오전부터, 호텔에 돌아올 때까지. 보고 듣고 감각하는 모든 것들이 바늘처럼 따끔하게 감각의 살갗을 찔러 생생한 빨간 핏방울이 맺히게 하는 자극이었다.

아직은 하나의 구상으로 모여지지 않은 제각각 산재하는 이미지들이었지만, 무뎌지기 전에 붙잡아 두고 싶었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재킷만 벗어 두고 바로 스케치를 시작했다. 몇 페이지에 걸쳐 간략한 크로키로 원하는 이미지를 기록했다. 필요한 부분에는 짧은 메모도 덧붙였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기에 집중해서 네다섯 페이지의 스케치를 마무리한 뒤 서둘러 옷을 벗고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보니 그가 내 방에 와 있었다.

창가의 테이블 앞에 서서 드로잉노트를 내려다보고 있던 그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았다.

“언제 오셨어요?”

일부러 애쓰지 않아도, 그를 발견하자마자 얼굴의 근육이 풀어지면서 웃음이 새어 나오려 했다. 아랫입술을 꾹 물면서, 빨라지려 하는 걸음을 애써 늦추면서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나의 전신을 짧은 순간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애무하듯 열렬한 허기진 시선이 방금 샤워를 마친 육체를 팽팽하게 감아 오는 기분이었다.

“아… 미안해요. 펼쳐져 있길래 조금 봤는데.”

눈빛이 전해 오는 욕구를 억누른 채 그가 사과했다.

“괜찮아요.”

쥐고 있던 페이지를 내려놓으며 미안한 표정을 짓는 그를 향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나의 젖은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에서 비비면서 가볍게 허리를 안았다. 그림을 봐도 괜찮다는 말이 아마도 그를 기분 좋게 만든 것 같았다.

짙고 강렬하면서도 결코 천박하지 않은, 깊이 가라앉는 것 같은 무게감을 가진 그의 향기를 좀 더 맡고 싶어서 재킷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코를 묻었다. ‘그 향기’는 날 듯 말 듯 희미했지만, 그가 사용하는 모든 향수와 모든 조합은 다 좋았다.

“행사는 잘 마치셨죠?”

“음, 행사 자체는 잘 마쳤는데….”

말끝을 흐리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눈을 가늘게 뜬 그가 나의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말했다.

“내일 점심 모임에 같이 가자고 했더니 슈슈가 불만이 대단해서…. 꼭 영업이니 뭐니 그런 게 아니어도 사람들과 친분 정도야 만들 수 있는 건데. 예전보다는 나아졌어도 여전히 고집스럽게 폐쇄적이라니까.”

내가 알 필요 없는 얘기에 대해 길게 푸념했다 싶었는지 그쯤에서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표정을 바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나가기 전에 한 번 더 샤워하고 싶은데. 준비하면서 기다리고 있을래요?”

“그럴게요.”

그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뒤, 머리를 먼저 말렸다. 일부러 기르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시카고에 오기 전 그와 함께 커트를 하러 갔을 때도 다듬기만 했기 때문에,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지 않으면 조금 지저분해 보이는 정도로 길이가 어중간했다.

젤이나 왁스를 사용해 멋을 부릴 줄도 모르니 아무래도 서울에 돌아가면 짧게 잘라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옷을 갈아입기 위해 막 가운의 매듭을 풀어낸 찰나, 현관의 벨이 울렸다. 예정보다 좀 더 일찍 준비를 마친 누나가 미리 올라온 것 같았다. 끈으로 다시 허리를 조여 매듭을 지으며 현관으로 향했다.

“누구세요?

“……라우 위쿤 씨 계신가요?”

“…….”

잠시 멈칫한 뒤 이어진 문밖의 목소리는 누나가 아니었다.

둥근 렌즈를 통해 복도를 확인해 보니 한 남자가 문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호텔 관계자 같지는 않았지만, 그의 이름을 대고 찾아온 사람이니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왼쪽 문의 고리를 잡고 안으로 당겨 열자마자, 한눈에 방문객을 알아볼 수 있었다. 오전에 갤러리에서 <소외> 앞에 오래 서 있었던 남자였다.

이상한 우연에 나는 저절로 눈이 커졌지만, 저쪽에서는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다. 초조해 보이는 분위기의 남자는 미간을 좁히며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혹시 한국인?”

그렇다고 대답하자, 의혹이 담긴 시선이 샤워 가운 차림의 나를 한차례 훑고 지나갔다. 남자는 내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아내려는 의도를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이 방 주인은요? 그쪽이 문 함부로 열어 줘도 돼요? 되게 화낼 텐데.”

이 방 안에서 문을 열어 준 나보다 방문객인 자신이 그를 더 잘 안다는 듯한 말투였다.

“지금… 샤워 중이세요.”

나의 대답에 남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어깨를 털며 혀를 찼다. 대낮부터 잘하는 짓이네, 라는 중얼거림으로 미루어 봤을 때, 아마도 남자는 그와 내가 좀 전까지 서로 뒤엉켜 섹스라도 했다고 짐작하는 모양이었다. 덧붙여 나를, 그가 방으로 데리고 온 섹스 상대쯤으로 결론 내린 듯했다.

“들어가서 좀 기다릴게요. 그래도 되죠?”

양해를 구하는 듯했지만, 남자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하지만 남자의 말대로 나에게는 아무나 멋대로 방에 들일 권리가 없었다. 남자의 앞을 은근하게 가로막으며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선 누구라고 전해 드릴지 말씀해 주시면….”

곁눈으로 나를 돌아보는 남자의 입매가 비틀렸다. 남자는 나에게 자신의 어떤 감정도 숨기거나 완화해 표현할 의사가 없어 보였다.

“백유니 벌써 왔어요?”

그의 목소리였다.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던 타월을 끌어 내리며 마스터룸 안에서 현관 홀을 내다보던 그가 천천히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표정이 사라진 얼굴과 시선만으로는 그가 남자를 보고 느끼는 감정을 읽어 내기 어려웠다.

“뭐야.”

그가 보인 적대적인 반응에 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몇 년 만에 만나서 하는 말이 그거야?”

“뭐냐고.”

맨발로 현관 앞까지 걸어온 그는 나의 팔을 당겨 자신의 뒤로 물러서게 했다. 남자를 압박하듯 몰아세우는 태도를 보니, 적어도 반가운 손님은 아닌 듯했다.

두 사람 모두 샤워 가운 차림인 그와 나를 번갈아 쳐다본 남자는, 곧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할 말 있어서 왔어.”

“이런 식으로 찾아와서 할 말이 있다고 하면 귀한 시간 쪼개서 들어 줘야 하는 사이였나, 우리가?”

“슈슈 작품 잘 팔리더라. 오늘이 오픈인데 거의 솔드 아웃 딱지 붙어 있던데. 같은 호텔에 묵고 있지?”

“그래서. 협박이라도 하시려고?”

남자는 코웃음을 치며 시선을 비스듬히 떨어뜨렸다. 그리고 비닐을 씌운 장우산으로 홀의 타일 위를 툭툭 두드렸다.

“형, 참 대단해. 나 진짜 놀랐잖아. <소외> 작가, 결국 찾아냈더라?”

“…….”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그의 약점을 찾아내려 이곳저곳을 찔러 대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상대의 약점을 노리는 사람치고는 남자 본인이 궁지에 몰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그는 복잡한 얼굴로 남자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왼쪽 뒤편에 선 나를 잠깐 돌아보고는 결정을 내렸다.

“서재에 가서 기다려.”

나에게는 물론이고 팬텀 식구들에게도, 그는 그런 식으로 단호한 명령형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코너를 사이에 두고 마스터룸 바로 옆에 자리한 정면에 보이는 서재의 문을 가리키며 그가 한쪽으로 비켜섰다. 내 앞을 스쳐 가며 가벼운 경멸과 호기심이 어린 눈으로 나를 잠시 힐끔거린 남자는, 서재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폐부의 바닥에서부터 끌어 올린 것 같은 깊은 한숨을 내쉰 후, 그가 내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려 마주 섰다. 피로가 누적된 얼굴이 난감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예전에 알던 놈인데… 그림을 그리거든. 시카고까지 왜 온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얘기를 들어 봐야 할 것 같은데.”

“…….”

“봐서 알겠지만… 가볍게 무시해도 될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라서….”

“그렇긴… 하네요.”

“하아… 진짜 이러려던 게 아닌데…. 약속, 또 못 지키게 돼서 어떡하지? 유니하고 둘이서라도 다녀오는 게 어때요?”

나의 소극적인 반응이 상황에 대한 불만이라고 생각했는지, 양쪽 어깨를 잡으며 허리를 숙여 나를 들여다보는 그의 얼굴은 미안함을 가득 담고 나의 기색을 살피고 있었다. 의도치 않게 연속으로 취소하게 된 데이트 약속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남자의 얼굴. 딱 그런 얼굴이었다.

하지만 나는 저녁 약속이 취소된 것에는 아무런 불만도 없었다.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다면 물론 더 좋았겠지만, 이런 상황이 그의 탓도 아닌데 불쾌감을 드러내며 원망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제가 남아 있으면… 신경 쓰이실까요?”

“…….”

내 질문이 의외였는지 잠시 멈칫했던 그는 곧 여러 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왜 신경이 쓰이겠어. 그런 거 전혀 없어요. 약속이 번번이 취소되니까 실망했을 것 같아서 그랬던 거지.”

“외출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대표님하고 같이 있고 싶었던 거니까… 괜찮으시면 그냥 여기 있고 싶어요. 무슨 일인지, 걱정…도 되고.”

그가 어깨를 쥐고 있던 손으로 나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의 가슴쯤을 내려다보고 있던 시선이 그의 눈에 맞춰졌다. ‘걱정’이라는 표현 안에, 그를 다른 남자와 단둘이 남겨 두고 싶지 않은 옹졸함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그에게 들킬 것 같았다.

“혹시, 예전에….”

“…….”

입을 맞출 듯 다가오던 그의 얼굴이 멈췄다. 고개를 저으며 눈앞의 가슴을 슬쩍 밀었다. 이런 질문을 하려 하는 자신이 낯설었다. 그와 연애를 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지만, 연인다운 행동을 하는 자신에게는 아직 적응이 더 필요했다.

“아니, 아니에요. 누나에겐 제가 잘 설명할게요. 얼른 들어가 보세요.”

몸을 돌리려는 나의 어깨를 그가 다시 붙잡아 세웠다.

“전에 사귀었던 놈인지 묻는 건가?”

“…….”

“그래?”

설사 그런 사이였다 하더라도, 현재의 우리 관계와는 무관한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를 믿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못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대답하지 않았다. 어딘가로 숨고 싶었다. 귓바퀴가 붉어지고 얼굴에 열이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물어도 돼. 너, 그런 일로 날 추궁할 자격 있는 사람이잖아.”

어깨를 약하게 흔들며 그는 자꾸만 내 얼굴을 들여다보려 했다. 팔을 들어 얼굴을 감추면서 그를 밀어냈다.

“이, 일단… 얘기부터 나누세요.”

어깨를 붙잡고 있던 손을 팔로 미끄러뜨렸던 그는 마지막엔 내 얼굴을 감쌌다. 붉어졌을 얼굴이 결국 공개되었지만, 그는 그것을 놀림거리로 삼지 않았다. 내려다보는 얼굴은 진지하기만 했다.

“나중에… 다 얘기할게.”

말을 마치자마자 나를 끌어안았다. 포옹 자체는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짐작한 타이밍이 아니었기에 조금 놀랐다. 게다가 나를 품에 새기려는 것처럼 강한 힘이 상체를 조여 오고 있었다.

시카고에 온 뒤 시간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좀처럼 여유가 없었던 그의 여정을 생각하니, 이 포옹이 꼭 지금의 상황만을 내포하는 것은 아닌 듯했다. 내가 먼저 안아 주지 못한 것이 미안할 만큼, 그가 유난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알 것 같았다.

“다 얘기할게.”

한 번 더 강조하며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넓은 등에 팔을 마주 둘렀다. 고민 끝에 두어 번 등을 토닥이자, 네다섯 살짜리에게서 뜻하지 않은 위로를 받은 사람처럼 그가 웃었다.

우선 옷부터 갈아입기 위해 그가 마스터룸으로 돌아가고, 나 역시 누나에게 전화로 상황을 알리기 위해 내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약속이 취소된 것에 누나가 실망할까 걱정했지만, 오히려 누나는 홀가분한 눈치였다. 서로 속으로는 어색한 거 뻔한데 화기애애하게 연기해야 하는 상황이 부담스러웠다며 차라리 잘됐다고 얘기하는 누나의 말에 달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온통 서재 쪽으로 쏠려 있는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해 통화를 마친 뒤 가운을 벗고 옷을 갈아입었다. 좀 전의 스케치들을 더 다듬어 보려고 테이블 앞에 앉았지만, 집중이 쉽지 않았다.

거실과 내 방 사이의 작은 주방에 마련된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 캔 꺼내려는 차에 또 한 번 현관에서 벨이 울렸다.

“아, 이현 씨…. 아위, 류 대표, 안에 있죠?”

이번엔 슈슈였다. 오전에 갤러리에서 봤던 오픈 행사에 참석했던 복장 그대로였다.

“네…. 그런데 지금 손님이 오셔서 얘기 중이세요.”

어차피 뉴욕 지점 때문에 인맥 관리하는 중이겠지. 슈슈가 못마땅한 얼굴로 중얼거리며 문 안쪽을 가리켰다.

“거실에서 좀 기다려도 될까요?”

그에게 또 하나의 고민거리가 찾아온 것 같았지만… 슈슈라면 방으로 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거실로 안내한 뒤 음료가 필요한지를 물었다. 커피를 부탁했던 슈슈는 주방으로 향하는 나를 불러 세워 맥주를 달라고 했다. 거실로 돌아온 내 손에는 두 병의 맥주가 들려 있었다.

“고마워요. 나 신경 쓰지 말고 이현 씨는 방에서 쉬어요.”

“아니에요. 작가님 오시기 전에 저도 마침 맥주 한 병 꺼내고 있었어요.”

“기다리는 동안 같이 마셔 주면 나야 고맙죠.”

슈슈는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하늘색 실크 쿠션이 놓인 1인용 벨벳 소파에 앉은 슈슈와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똑같은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오른쪽 창으로는 시카고의 동쪽이, 정면으로는 거실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 좌석이었다. 거실 내에는 우리가 앉은 자리 외에도 두 개의 소파 세트가 더 마련되어 있어, 스무 명 정도의 인원이 가벼운 파티를 할 수도 있을 만큼의 시설과 공간이 확보되어 있었다.

“작품, 잘 봤어요.”

“아…. 바쁘셨을 텐데, 일부러 봐 주시고. 감사합니다.”

“<소외> 작가가 이현 씨라는 거, 난 오늘 처음 알았어요.”

“…….”

“아위 그 자식, 미술계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집 안에 그림은 잘 전시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그 작품만큼은 집을 옮길 때마다 항상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뒀었거든요.”

그에 대해 잘 아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에게 있어 <소외>가 얼마나 특별한지를 얘기했다. 그런 얘기를 듣는 것은 물론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거기에 슈슈까지 가세할 줄은 몰랐다.

“…왜요?”

내 시선을 눈치챈 슈슈가 맥주병에서 입을 떼며 웃었다. 너무 빤히 쳐다봤나 싶어 급히 고개를 돌리며 사과했다.

“아니요, 그냥… 작가님이 그 자식이라는 말을 하시는 게 의외라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슈슈는 또 웃었다. 그리고 다시 맥주병을 기울이며 나를 향해 장난스럽게 눈썹을 위로 올려 보였다.

“작업하다 잘 안 풀리면 그거보다 더 심한 욕도 해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슈슈는 내 얼굴을 보며 계속 웃었다.

“자기 집에 처음 방문하는 모든 사람에게 저 그림의 주제가 뭐일 것 같냐고 질문하는 게 아위의 즐거움 같은 거였어요.

유명한 작품도 여러 점 소장한 놈이지만 유난히 그 그림에만 집착을 보였었는데…. 근데 이현 씨가 그 <소외> 작가고, 실장님과는 과거에 인연이 있었다니. 어떻게 그렇게 얽히나 몰라요. 오래 산 건 아니지만 가끔 인생이 참 웃겨요. 그죠?”

자신 역시도 인생이 만들어 놓은 코미디의 소재가 된 적이 있는 사람처럼, 슈슈는 씁쓸하게 웃으며 맥주를 마셨다.

마냥 화사해 보이는 그에게도 물론 인생은 온실 속이 아닌 야생에서 벌어지는 실제 상황이었을 것이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면서도, 슈슈에 대해서도 어느샌가 편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나, 문득 미안해졌다.

“아위가 잘해 줘요?”

“……네?”

기습 공격 같은 질문에 꼴사납게 맥주가 목에 걸려 콜록거렸다. 붉어진 얼굴을 사레가 들린 탓으로 할 수 있어 차라리 다행이었다.

미안하다고, 괜찮냐고 하면서도 슈슈는 뭘 그렇게 놀라냐는 듯 웃었다.

“아위하고는 유치원 때부터 친구예요. 이현 씨 대하는 태도만 봐도 바로 알죠. 거기다 그 자식, 숨길 생각도 전혀 없어 보이던데, 뭐.”

내가 아는데, 숨기려고 마음만 먹으면 자기가 누구와 연애하고 있는지 신도 속일 놈이거든요. 그렇게 덧붙인 슈슈의 얘기에 애꿎은 맥주병만 만지작거렸다.

“잘해 주냐고 묻긴 했지만, 이현 씨라면 껌뻑 죽는 수준인 것 같던데. 맞아요?”

얘기해 보라며 부추기는 슈슈는 조금쯤은 내 반응을 재미있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럴수록 내 얼굴은 점점 더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와 단둘이 하는 연애에도 완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는데, 그것을 다른 사람 앞에서 얘기하는 것은 나에겐 아직 너무 높은 허들이었다.

어떻게든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려 보려 애쓰는 사이, 거실과 연결된 복도 쪽에서 서재의 문이 열리는 기척이 들렸다. 대화가 끝난 모양이었다. 마침 잘됐다는 생각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맥주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유?”

거실에서 서재와 마스터룸으로 이어진 복도는 길지 않았다. 게다가 슈슈와 내가 앉은 자리에서는 복도가 바로 들여다보였다. 유령이라도 본 듯이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난 슈슈가 부른 것은 그가 아니었다. 자신의 눈을 의심하듯 슈슈의 미간이 바짝 좁혀졌다.

“혀, 형….”

그보다 앞서 서재에서 나오던 남자가 슈슈의 목소리에 반응했고, 남자를 뒤따라 나오던 그는 상황을 발견하고는 인상을 구기며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낭패라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슈슈의 눈은 남자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네가 왜… 여기….”

“어…. 나, 이번에 서울에서 개인전 열려고 알아보는 중인데, 우리 갤러리에서 좋은 곳 소개해 준다고 해서 일부러 와 봤더니… 위쿤 형이네.”

복도를 지나 주춤주춤 거실의 입구까지 걸어 나온 남자는 어색하게 웃으며 뒷목을 쓸었다. 그리고 복잡한 시선으로 슈슈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잘 지냈어? 작품… 더 좋아졌더라.”

“…….”

“발목은… 좀 어때.”

“그게 언제 일인데.”

슈슈는 씁쓸하게 웃으며 손안의 맥주병을 내려다보았다.

발목 얘기를 들은 순간, 기억 속에서 한 페이지가 펼쳐졌다. 연이은 발목 부상과 수술 부위 감염의 부작용으로 무용을 포기해야만 했던 슈슈의 과거에 대해 알려 주었던 포털사이트의 검색 결과들.

물리적 실체가 없는 단지 시선일 뿐인데도 무언가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는 무기라도 되는 것처럼 허공에서 조심스럽게 마주 닿는 두 사람의 시선을 숨죽여 지켜보다가, 어쩌면 남자의 과거의 상대는 그가 아니라 슈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관에서 그와 남자 사이에 감돌았던 긴장감이 적의에 가까웠다면, 지금 슈슈와 남자 사이의 분위기는 훨씬 더 복잡, 야릇했다. 오히려 그는 남자의 뒤쪽에서 팔짱을 낀 채 상황에서 한발 물러나 있는 제삼자의 느낌이었다. 표정이 상당히 험악하기는 했지만….

“어떻게 할 거야? 그동안 잘 지냈는지 서로 근황 얘기라도 하면서 차라도 마시려고?”

그가 남자의 어깨 너머로 슈슈를 바라보며 물었다. 서로 이런 식으로 얘기를 나눌 필요조차 없지 않냐는 은근한 압박이 전해지는 어조와 표정이었다.

하지만 슈슈는 바로 답하지 못한 채 몇 번이나 그저 입술을 달싹거렸다. 남자 역시 슈슈를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잘근거릴 뿐 좀처럼 어떤 말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다가가 거리를 좁히지도, 돌아서지도 못하는 두 사람 대신 그가 나섰다.

“홍선유, 여기 볼일 더 남았어?”

볼일이 있는지에 대해 ‘잘’ 생각해 보라는 뉘앙스를 띤 재촉에 남자는 그를 돌아봤다. 그리고 다시 소파 앞에 선 슈슈를 바라봤을 때, 남자의 시선은 극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남자가 힘주어 입을 꾹 다물었다, 마른 목소리로 느리게 말했다.

“전시, 축하해. 그럼….”

그리고 완전히 다 돌아설 때까지도 남자는 슈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슈슈는 아무 말도 없었다.

현관 쪽으로 사라지는 남자와 그의 뒷모습, 그리고 망연히 굳어 버린 슈슈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는 사이,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전이되어 나의 몸과 정신이 뻣뻣해지는 느낌이었다. 슈슈의 곁에서 숨을 크게 쉴 수조차 없었다.

그는 곧 거실로 다시 돌아왔다. 자리를 피해 주는 게 나을 것 같아, 슈슈와 내가 마신 맥주병을 챙겨 주방에 가져다 두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테이블 앞에 다시 앉았지만, 그림이 그려질 리 없었다.

선유.

한 번뿐이었지만, 슈슈는 분명 남자를 그렇게 불렀고, 그는 남자를 홍선유라 불렀었다.

지나친 망상일지 모르겠지만, 홍콩 아트페어에서 그와 함께 관람했던 그림. <침대 위의 연인들>에 대한 기억이 현재와 겹쳐졌다.

당시, 그림 앞에서 그가 보인 반응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잊지 않기 위해 곱씹어 두었던 화가의 이름은 분명 SEONEW였다. 20대의 한국인 작가. 뉴욕의 한 갤러리에 소속되어 있었던.

그때 그는 그 그림과 화가에 대해 나에게 듣고 싶은 얘기가 있는 것 같은 태도를 보였었다. 그저 우연히 눈에 들어온 작품 중 하나에 대한 감상을 묻는 느낌은 아니었다. 머뭇거리는 나에게 더 솔직하고 신랄하게 그림을 비판해 보라며 부추기는 듯한 느낌까지 받았었다. 그 역시도 1~2년 안에 거품이 꺼지고 가치가 반 이상 하락할 작품이라며 냉정한 평가를 내리기도 했었다.

「예전에 알던 놈인데… 그림을 그리거든.」 ―좀 전 현관 홀에서의 설명까지 덧붙여 보니 아주 말이 안 되는 망상인 것만도 아닌 듯했다.

하지만 그 남자가 <침대 위의 연인들>의 SEONEW라 하더라도, 거기서 내가 더 추리해 낼 수 있는 부분은 없었다. 더 많은 정보를 위해 검색을 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나 슈슈처럼 가까운 사람들의 사생활을 캐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내키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생각에 깊이 빠져 있었던 건지, 노크 소리가 들려왔을 때는 깜짝 놀라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

경직된 대답 뒤에 거실과 연결된 쪽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얘기 좀 할까요.”

방으로 들어오지 않고 문의 입구에 선 채로 그가 말했다. 거실로 나오라는 사인 같아서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슈슈는 이미 돌아간 뒤였다. 좀 전에 슈슈와 내가 앉아 있었던 1인용 소파 세트 맞은편, 3인용 소파 앞의 테이블 위에 위스키와 온더록스잔, 재떨이, 담배와 라이터 등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차분한 아이보리 컬러의 긴 패브릭 소파에 나를 앉게 한 그는 맥주를 좀 더 마시겠냐고 물었다. 취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뭔가 마실 것이 필요하기는 했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주방에서 맥주를 한 병 가지고 왔다. 그리고 내 방과 거실 사이의 식당에서 식탁 의자를 하나 끌어와, 나의 오른쪽, 테이블의 모서리 부근에 자리를 잡았다.

위스키가 3분의 1쯤 남아 있는 잔을 들어 손안에서 만지작거리며 그가 말했다.

“갑자기 분위기가 좀 그랬죠…. 무슨 일인가 싶었을 텐데. 미안해요.”

굳이 대답하지 않은 채 이어질 이야기를 기다렸다. 가장자리를 앤티크한 골드 컬러로 장식한 테이블 위의 어딘가를 응시하는 그의 얼굴은 앞으로 내가 듣게 될 이야기들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손안에서 맥주병의 표면에 빠르게 물기가 맺히고 있었지만, 안에 든 액체로 목을 적실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이 얘기를 알게 되는 게… 서이현 씨에게는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지만….”

테이블 위 한 지점을 응시한 그대로 그는 위스키를 한 모금 삼켰다.

“슈슈나… 좀 아까 그 자식, 홍선유에 대해 혹시라도 오해하게 되는 건 더 싫으니까, 얘기할게요.”

무릎 위에 팔을 괴고 상체를 숙이고 있었던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침착하다기보다는 모든 감정이 배제된 핏기 없는 얼굴이었다.

“홍콩 아트페어에서 같이 봤었던 <침대 위의 연인들>이라는 그림, 혹시 기억합니까.”

나의 추측이 지나친 망상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맥주병을 쥔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을 주며 그를 향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좀 전에 왔던 남자가 홍선유예요. 그 그림을 그린 작가입니다.”

그 짧은 정보만을 꺼내 놓은 뒤, 그는 한동안 뒷얘기를 이어 가지 못했다. 얘기하겠다고는 했지만, 나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 것이 과연 가장 현명한 선택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맥주병의 표면을 엄지로 문지르면서 그에게 말했다.

“제가 꼭 알아야 하는… 그러니까… 대표님과 저의 관계에 직접적인 영향이 없는 거라면… 말씀하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다른 분들도 연관된 일이니까….”

그의 시선이 다시 한번 말없이 그런 나를 향했다. 나 역시 조용하게 시선을 마주하고 그의 결정을 기다렸다. 평소보다 메말라 보이는 그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홍선유는… 슈슈의 연인이었고, 슈슈가 무용을 그만둬야 했던 결정적인 사고의 원인 제공자였고.”

“…….”

“그리고, 그보다 더 이전에는 나와 교제했었던 남잡니다.”

“…….”

마지막에 덧붙인 말을 듣고는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시고, 그리고 호흡을 멈췄다. 둥글게 커진 눈이 나의 당황을 모조리 그에게 드러내고 있을 것을 알면서도 수습이 잘 되지 않았다.

나의 반응을 눈에 담으며, 그는 오히려 담담했다. 이런 반응이 따라올 거라고 예상하거나 혹은 각오한 얼굴이었다.

“교제라고 하기에도 우스운… 이전의 다른 모든 관계가 그랬듯, 반년도 지속되지 못한 애착 없는 육체관계일 뿐이었지만… 어쨌든 만남이 있었던 건 사실이죠. 홍콩에서 H.M.I.S. 교육 과정을 마치고 런던으로 옮겨 가 대학을 다닐 때였고. 난 3학년이라 영국의 대학에서는 졸업반이었고, 홍선유는 R.C.A. 영국 왕립 미술대학의 1학년이었어요. 아버지 사업으로 중학생 때 가족이 모두 런던으로 옮긴 뒤 사업도 잘 풀리고 그래서 아주 자신만만하고 건방진 놈이었죠. 어리기도 했고. 그때는 나도 어릴 때라 나름 그걸 매력으로 봤었는데.”

그런 어린 날의 자신을 비웃듯 그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짧게 조소했다.

“그렇다고 그런 시건방짐을 받아 주고 포용해 줬던 건 아니지만.”

그는 한 모금 정도 남은 위스키를 털어 넣고 다시 잔을 채우며 말을 이어 갔다.

“연애나 사랑 따위에 쏟을 시간도 정서적 여유도 없는 인간이었고, 졸업반이라 내 문제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에 가끔 만나 성욕을 해소하는 상대 정도로 생각했었죠. 그쪽 역시 나 말고도 몇 명의 상대가 더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거기서 얘기를 멈춘 그는 힐끔 나를 한 번 쳐다봤다.

“이런 과거 얘기를 해 봤자… 별로 점수를 딸 것 같지는 않지만.”

지금 그의 얘기만으로 보자면, 그의 과거 연애사에 대한 주한이 형의 추측은 어느 정도 맞았다고 볼 수 있었다. 내 경우엔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한 그의 찰기 없는 연애가 더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사귀자는, 서로에게 구속력을 가진 연인이 되자는 그런 말 따위 없었던 것처럼 헤어질 때도 그저 연락이 뜸해지면서 흐지부지 멀어졌는데… 런던에 남아 독자적인 커리어를 쌓을지, 아버지의 제안대로 홍콩으로 돌아가 아버지 회사의 일을 익힐지 고민하던 시기에 뜬금없이 다시 연락이 왔더군요.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져 아버지를 제외한 가족들이 런던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가게 됐다면서… 런던에 남게 해 달라고. 자기 하나 먹여 살리고 공부시키는 것쯤 일도 아니지 않냐며.”

다시 생각해도 기가 막힌 듯 그는 혀를 차며 웃었다.

“그 자존심 강한 성격에, 육체관계뿐이었던, 그나마도 다 끝난 사이인 나를 찾아와 그런 부탁을 입에 담았다는 용기 자체는 가상했지만, 그런 순간에조차 맡겨 둔 빚을 받으러 온 것처럼 달려드는 꼴에 오히려 그나마 남아 있던 정도 다 떨어지더군요. 성공에 대한 집착은 원래도 강한 편이었지만, 경제적 뒷받침이 사라지고 나니 그림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고 뭐고 성공하겠다는 악만 남은 것 같아, 더 이상은 그나마의 매력이고 뭐고도 없었죠.”

입매를 굳히며 미간을 찌푸린 그는 손안의 온더록스잔을 한 바퀴 돌린 뒤 위스키로 마른입을 적셨다.

“그 뒤 홍선유는 런던을 떠날 수밖에 없었으니 그냥 그렇게 끝이라고 생각했어요. 서울에서 지내고 있던 슈슈에게서 자신의 연인이라며 홍선유를 다시 소개받기 전까지, 앞으로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기억에서 치워 버렸던 대상 중 하나였죠.”

“아….”

나도 모르게 흐른 탄식 같은 신음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게 다가 아니라는 듯 나를 보며 삐딱하게 웃었다.

“소개를 받기 전부터 슈슈가 푹 빠진 연애 상대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홍선유였다니. 소개받던 자리에서 나를 보고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을 짓더군요. 왜 아니겠어.”

그는 허공을 쏘아보며 차분한 어조를 무너뜨리고 입술에 힘을 주어 말했다.

“슈슈는 오메가고, 홍선유 그놈은… 내가 알기로는 뼛속까지 바텀인 베타 게이였으니까. 그것도 섹스에 대해 남들보다 두 배 이상은 탐욕스러운. 근데 그런 놈이 오메가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눈앞에 홍선유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서 눈앞의 그 남자를 비난하기라도 하듯 그가 덧붙였다.

“물론 오메가 남성이라고 무조건 받아들이는 쪽의 섹스를 선호하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오메가의 본능은 그쪽으로 쏠리게 마련이에요. 알파와 오메가는 베타보다 성적 본능이 아주 우세하게 작용하니까. 그리고 슈슈는 오메가로 발현된 순간부터 자신의 본능과 운명에 순응하며 성장해 온 사람이었고. 슈슈와 홍선유를 굳이 베타인 게이 남성 두 명에 비유하자면… 절대 성향이 바뀔 수 없는 바텀 둘이서 사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홍선유의 본성을 아는 내 입장에선 기가 찼죠. 다 큰 남자 둘이 플라토닉 러브를 할 것도 아니고. 그 둘이 성생활을 포함한 연애를 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얘기였으니까.”

잠시 이야기를 멈춘 그는 담배를 피워도 될지 물었다. 대답 대신, 내 쪽에서 더 가까운 곳에 놓여 있던 담뱃갑과 라이터를 집어 그에게 건넸다. 씁쓰레한 향이 연기와 함께 피어올랐다. 그가 깊숙이 들이마셨던 만큼 긴 호흡으로 연기를 밀어내며 말했다.

“함께 뉴욕으로 유학을 가게 됐다는 얘기를 들은 순간, 홍선유의 목적이 뭔지 대강 알 것 같았지만… 문제는.”

그의 미간이 바짝 좁혀졌고, 그는 두통을 느끼는지 눈꺼풀 위를 강하게 눌렀다. 그 유학 자금의 출처가 슈슈였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내가 홍선유와 과거에 관계가 있었고, 그래서 그놈이 어떤 놈인지 알고 있으며, 네 남자친구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널 이용하려 하고 있다고. 슈슈에게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중 어떤 말도 오랜 친구에게 쉽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는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린 뒤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아들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너는 오메가다. 베타 남성과는 미래가 없다…. 그런… 마음에도 없는 뻔한 소리들을 들이밀면서 회유하려 했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죠.”

두 사람은 그때 이미 1년 넘게 만남을 지속해 온 상태였고, 둘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기 위해서는 그가 자신과 얽힌 홍선유의 과거를 전부 밝혀 슈슈에게 충격을 주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랑에 깊이 빠져 상대를 신뢰하고 있는, 행복해하는 친구의 얼굴 앞에서 그 선택이 쉬울 리 없었다.

“모두 털어놓는다면… 당장 홍선유와 뉴욕으로 떠나는 것은 막을 수 있을지 몰라도, 슈슈가 배신의 충격을 겪어야 하는 건 어차피 마찬가지였으니까. 너무나 소중한 첫사랑이 자신의 절친한 친구의 상대였다는 충격까지 가세한다면… 당시엔 지금보다 훨씬 더 유약했던 녀석의 정신이 버틸 수 있었을지….”

담배를 쥔 손을 팔걸이에 걸친 채 연기를 피워 올리는 담배 끝을 내려다보며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천천히 담배를 입술로 가져갔다.

“당시에는 휴가를 이용해 잠깐 서울에 들렀던 상태라 다시 홍콩으로 돌아가야 했고, 일상으로 돌아가고 나니 타국에서 전화상으로 녀석을 말리는 데에는 더 한계가 있었죠.”

그는 이번에는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결국은 그거였어. 그 녀석이 내 눈앞에서 당장 받게 될 충격이 두려워서 더 적극적으로 뜯어말리지 못한 거지.”

자책하는 목소리였다. 갑자기 그는 술잔을 들어 얼음도 넣지 않은 위스키를 여러 모금 삼키고, 담배를 빨아들였다. 술과 담배라는 몸에 좋지 않은 물질들로 간접적으로나마 자신을 벌주려는 사람 같았다.

슈슈의 연인이 과거에 그와 관계가 있었던 남자였다. ―그것을 알게 된 슈슈가 연인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로 흘러갈 거라 생각했지만, 상황은 그보다 더 복잡했다.

그는 결국 홍선유의 과거와 실체에 대해 슈슈에게 말하지 않는 쪽을 택한 것 같았고, 그렇다면 두 사람이 헤어진 것도 그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 테니까.

“그 둘은 기어이 예정대로 뉴욕으로 떠났고, 놀랍게도 뉴욕으로 가고 나서도 2년을 더 같이 살았지.”

술을 한 모금 더 삼킨 뒤 그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이제 그의 이야기는 과거를 회상하는 혼잣말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하긴, 헤어지지 않았던 2년이라고 해서 온전히 서로에게 집중한 시간이었는지는 알 수 없는 문제이긴 해. 들키지 않았을 뿐, 그 짓거리가 2년 내내 이어졌을지 누가 알겠어.”

냉소적으로 입매를 비튼 그가 어느새 짤막해진 담배를 거친 동작으로 재떨이에 비벼 껐다.

“슈슈는 연습 중에 얻은 부상으로 아킬레스건 복원 수술을 받았어. 규칙적으로 센터에 나가 재활 치료를 받고 있었지. 그때만 해도 수술 결과도 완벽했고, 무용을 계속할 수 있을 확률이 아주 높았어. 걱정할 수준은 아니었지. 하지만 어느 날 담당 치료사가 집안 사정으로 조퇴를 해야 했고, 낯가림이 심했던 슈슈는 다른 치료사와 훈련하는 대신 스케줄을 변경하고 예정보다 훨씬 일찍 집으로 돌아갔지.”

그가 앞서 말했던 ‘그 짓거리’라는 표현으로, 이후 벌어진 일들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예상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이 바싹 타들어 가는 느낌에 나는 처음으로 손에 쥔 맥주를 마셨다. 맥주는 이미 미지근해져 있었다.

“연인과, 최소한 연인이라고 믿었던 남자와 매일 함께 잠들고 하루를 함께 시작했던 바로 그 침대에서, 자신의 연인이 엉덩이에 다른 남자의 성기를 꽂은 채 침실 문이 열린 것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교성을 질러 대며 섹스에 몰입해 있는 장면을 목격해야 했지. 자신을 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다른 남자에게 안긴 쾌감에 어쩔 줄 몰라 하며 헐떡거리는 연인의 모습을….”

그 현장의 또 다른 목격자가 된 것처럼 얼굴이 강하게 찌푸려졌다. 맥주병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고개를 숙였다. 끔찍한 얘기였다.

“그 뒤에는 뭐… 엉망진창이었지. 나도 슈슈에게 간략하게 들은 얘기라 자세히는 모르지만, 슈슈는 뛰쳐나가고, 슈슈를 붙잡기 위해 그 자식이 속옷 한 장 걸치지 않은 채 알몸으로 뒤쫓아 나오고… 아파트 계단에서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 거의 실성한 사람처럼 울부짖으며 몸부림치던 슈슈가 계단을 헛디디면서 수술했던 발목에 같은 부상을 또 한 번 입게 된 거지. 당시엔 통증도 못 느꼈을 정도로… 그만큼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하더군.”

아마도 더 큰 고통이 있었더라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에게 홍선유를 소개했던 시점에서 이미 1년, 뉴욕으로 떠난 뒤 2년. 그것만 해도 총 3년을 함께한 연인의 외도를 그런 식으로 목격하게 된다면… 슈슈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침착한 태도를 보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나라면….

내려놓았던 맥주병을 다시 찾아 쥐었다. 미지근해진 맥주는 쓴맛이 강해지고 탄산은 밍밍해져 있었지만, 그저 기계적으로 액체를 삼켜 냈다.

“그걸로 무용수로서의 슈슈의 삶도, 두 사람의 관계도 끝나 버렸어. 물론 홍선유는 더 이상 슈슈의 금전적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됐고. 그 뒤에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1년 정도 휴학한 뒤 결국 졸업을 하긴 했더군.”

홍선유의 후일담이야 아무래도 좋다는 말투로 얘기한 그는 다시 잔을 채웠다. 채운 잔을 조금씩 비워 가면서, 그는 고통스럽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사고가 있고 약 1년 뒤 그는 서울에서 실장님과 함께 팬텀을 오픈했고, 완전히 폐인이 돼 버린 슈슈에게 카메라를 쥐여 주고 첫 개인전을 치를 정도로 사진에 집중하도록 하기까지, 1년이 더 걸렸다고 했다.

그러는 동안 슈슈를 지켜보며 느껴 왔던 죄책감에 대해 그는 무겁게 털어놓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홍선유와 다 끝난 지금에 와서 그 자식과 나의 과거, 그리고 둘 다 그 사실에 대해 입 다물고 있었다는 걸 슈슈가 알게 된다면… 아마 이번엔 재생이 불가하겠지. 내가 지난 시간 동안 자신에게 해 왔던 모든 제안과 언행 하나하나를 죄책감에서 나온 동정이라 생각할 거고. 선천적으로 사고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놈이니까.”

<침대 위의 연인들> 앞에서 그가 왜 작품이나 작가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었는지. 눈앞에 홍선유가 다시 나타났을 때 그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다 알겠다는 건방을 떨려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짐작과 공감은 가능했다.

결코 가볍지 않은 죄책감의 무게를 자신의 일부로 짊어진 채 지금까지 슈슈를 대해 왔을 그의 시간을 생각하다, 시선을 떨어뜨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죄송해요….”

“…….”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는 놓치지 않았다. 얼굴에 와 닿는 그의 시선을 느꼈지만 마주 보지 못한 채, 그의 시선이 건네고 있을 질문에 답했다.

“슈슈 작가님에 대해서… 철없이 질투나 했던 게….”

그가 피식 웃었다. 내가 그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는 그런 웃음이었다. 그의 무릎쯤을 향하고 있었던 시선을 끌어 올리자, 엷은 미소와 따뜻한 온기를 가진 그의 얼굴이 나를 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 혼잣말하듯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과거에 매몰된 것 같았던 그가 아니라, 현재의 이 순간에 나를 보고 있는 그로 돌아와 있었다.

“최인우는 발현 직후 중등부 과정에서 민튼으로 편입한 경우고, 그때부터 친구였지만… 슈슈는 유치원 때부터 함께였어요.”

아시아권 부호들의 자녀들이 모인 H.M.I.S.는 공식적으로 알파·오메가들만을 위한 교육 시설이라 표명하지는 않았지만, 중등부 이후 편입을 위해서는 본인이 알파나 오메가로 발현했음이 확인되어야 했고, 유치부와 초등부의 입학을 위해서는 최소 부모 중 한 명이 알파나 오메가여야만 했다. 그 역시 공식적 항목은 아니었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암묵적 조건이었다.

중·고등부에도 베타 학생이 간혹 섞여 있기는 했지만, 집안의 영향력이 특별하게 뛰어난 경우에 한했고, 발현이 이루어지지 못한 경우 무언의 압박에 의해 학교를 옮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니, 그것은 H.M.I.S. 내에서 거의 전통으로, 당연한 절차로 인정받고 있었다. 때문에, 그곳에서 고등 교육 과정까지 마친 학생은 최상위 기득권층의 알파·오메가라고 보아도 무방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냉정하단 소리를 들을 정도로 남에게 무관심했던 데다가 외동이었던 나에게는 함께 자란 형제나 마찬가지인 놈이야. 하지만… 어떤 누구도, 어떤 경우에도, 너의 감정보다 우선하는 건 없어.”

그는 확신에 찬 어조로 분명하게 못을 박았다. 그 점에 대해서는 그동안 그가 보여 주었던 행동으로 이미 충분히 신뢰하고 있었다.

“그런 걱정은… 안 해요.”

나의 중얼거림에 한 번 더 미소를 보인 그는 한참을 그대로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둘 다 피로한 하루를 보내고 저녁 식사도 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허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창밖은 어느새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누구나 타인의 일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거리와 냉정한 시각을 유지하면서 그럴듯한 결론을 내리고 명쾌한 훈수를 두지만… 막상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이미 결론이 나온 뒤에도 망설이지. 이유는 간단해.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결론이라도 허점은 있기 마련이고, 남의 인생에 대해서는 간단히 지울 수 있었던 그 사소한 실패의 확률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는 무시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다가오거든. 단 1퍼센트의 실패 확률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의 입을 틀어막고, 발을 묶어 버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문제가 악화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런 두려움 때문에 아버지의 침묵을 방치하고 문제를 외면해 왔던 게 나였으니까.

다시 또 거부되는 것이 겁나서, 아버지를 침묵에서 끌어내려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무엇이라도 시도하지 않으면 관계의 변화도 없다는 것을 알지만, 알면서도… 그저 상황을 방관하는 쪽을 택해 버리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한 말을 스스로 곱씹듯, 다시 또 한참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평소보다 옅은 푸른색을 띤 눈빛에서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내가 시선을 돌리는 순간,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힘겹게 버텨 내는 사람의 얼굴이었고, 그의 힘겨움을 이해했다.

“사랑이라는,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감정 따위에 휩쓸려 판단력이 흐려진 거냐고 슈슈를 몰아붙였었지만, 지금은….”

뒷말을 완전히 마무리하지 않은 채 그는 도망치듯 고개를 돌리고 술을 마셨다. 그리고 다시 나를 바라보며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

“너를 잃는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매일 생각해.”

“…….”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생각에 사로잡히지. 네가 옆에 없을 때는 물론이고, 이렇게 함께 있을 때도… 네 안에 들어가 노팅으로 너와 연결되고 네가 주는 쾌락에 완전히 젖어 든 절정의 순간에조차 사실 나는, 두려워하고 있어.”

너무나 의외의 고백이었고, 가벼운 충격마저 느꼈다. 그만큼 깊게 사랑한다는 고백 같기도 했지만, 그가 나를 통해 경험하는 가장 압도적인 감정이 두려움인 것은 원치 않았다.

“서이현.”

어떤 동요나 떨림도 없이 그의 목소리는 고요하고 침착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뒤에 이어질 말에 대해 막연한 공포를 느끼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아귀가 맞지 않는 문짝이 거센 바람에 덜컹거리듯 가슴속이 어수선했다.

“…….”

“……결혼할까.”

그러나 차분한 얼굴로 그의 입술이 꺼낸 발언은 위협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다.

충동이라면 어떤 희미한 격양이라도 느껴졌을 텐데, 그의 목소리와 나를 보는 눈빛과 표정은 오랫동안 준비한 이야기를 꺼낸 것처럼 흔들림 없이 고요했다.

너무나 많은, 하고 싶고, 해야만 하는 말들이 가슴 안에 가득하지만, 그 한마디로 모두를 대신하고자 하는… 겸허한 신중함마저 느껴졌다.

그의 진지함과 별개로 너무나 갑작스러운 이야기였기에, 얼떨떨한 미소로 그를 바라봤다.

그가 두 손으로 온더록스잔을 헐겁게 쥔 채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영국이든, 프랑스, 독일, 미국, 어디든… 알파 남성과 베타 남성의 결혼이 합법인 국가에서라면 가능한 일이니까. 어떤 나라든 내가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취득하는 건 어렵지 않고. 그렇게 하면, 내가 가진 모든 권리가 법적으로 너에게도 보장되고… 혹시라도 내가 잘못될 경우에도 그 권리를 전부 안전하게 네 앞으로 돌릴 수 있으니까.”

마치 그가 잘못될 수 있는 가능성이 바로 앞에 닥쳐오기라도 한 것 같은 이야기에 나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고, 그 경직을 눈으로 확인한 그는 실언을 했다는 듯 잠시 입을 닫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깟 물질적 혜택 따위를 빌미로 널 묶어 놓으려는 건 아니지만….”

아니, 아닌 것만도 아닌가. 자조적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는 아래턱을 넓게 쓸었다. 그리고 샤워 후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채 그대로 말라 버린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얽어 흩트렸다.

“이제 겨우 스물두 살인 너에게 결혼 얘기를 꺼내다니… 미친 소리겠지.”

좀처럼 반응을 보이지 않는 내가, 이 제안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혹은 진지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고. 그는 그렇게 해석한 모양이었다. 잔을 내려놓고 손바닥으로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불을 붙였다.

동요 없이 결혼 얘기를 꺼낸 그의 태도가 침착함이 아닌, 긴장과 불안으로 인한 무표정, 굳어 버린 경직이었음을 이제 알 것 같았다.

상체를 깊이 숙여 허벅지에 팔꿈치를 괸 그는 한동안 담배를 입술로 가져가는 행위만 반복할 뿐이었다. 나의 반응에 낙담한 것처럼 보이는 고개 숙인 얼굴을 바라보며 손안에서 맥주병을 비틀었다.

나 역시 온 마음을 다해 그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그의 사랑은 늘 나보다 몇 걸음이 빨랐다. 따라잡기 벅차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느린 나를 기다리느라 매번 멈춰 서야 한다면 어느 순간 그가 지치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두려움이 일었다.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며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다 느리게 입을 열었다.

“이렇게… 뭔가에 쫓기듯이 꺼낸 말이 아니라… 대표님의 미래나 인생 계획… 같은 걸 충분히 고려한 뒤에 말씀해 주신다면… 그러면 저도 그때, 마음을 다해서 대답할게요.”

나를 응시하던 그가 상체를 펴면서 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충동적으로 꺼낸 말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 안에 무게가 없다는 뜻은 아니야.”

“…….”

“진심 없이 그냥 기분으로 한 말은 더더욱 아니고.”

반 정도밖에 피우지 않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버리는 그를 보면서, 이번에는 내가 조금 초조해졌다.

그의 진심을 못 본 척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와 같은 남자가 결혼이라는 단어를 꺼냈을 때는, 거기에 가벼움 따위가 섞여 있을 수 없다는 걸 어떻게 내가 모르겠는가.

조급함을 느낄 정도로 그가 나를 원한다는 것은 기쁘지만…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택한 결혼은 원치 않았다.

이제는 물이 흥건하게 맺힌 맥주병을 두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누군가와 이런 관계를 갖는 게 처음이어서… 제가 어딘가에서 대표님을 불안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 마음, 절대 가볍지 않아요.”

돌아보면 그는 늘 나에게 더 깊은 애정을 갈구했었다. 때로는 농담처럼, 때로는 진지한 눈으로. 하지만 단 한 번도 그것을 나에게 강요한 적은 없어서, 내가 슈슈에게 갖는 질투심처럼 그저 그렇게 연애를 구성하는 자잘한 감정 중 하나라고만 받아들였었다.

그와는 달리 가진 것이 없지만… 빈약하게나마 다시 자라기 시작한 나의 감정도, 묻어 두고 외면했었던 과거까지도, 그에게 모든 것을 내보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아직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뭔가를 내 안에 붙잡아 두고 그에게 주지 않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그는 불안해하는 것일까.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의 균형이 객관적 조건과는 무관함을 머리로는 알지만… 누구와 연애를 하든 불안해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 그가 나를 상대로 드러내는 초조함이 가끔 믿기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고, 이렇게… 온전히 그에게 빠져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대표님이 있어서 여기까지 왔어요.”

“…….”

“모래 누나와 형의 일도 그렇고, 그림을 다시 시작한 것도… 아버지 얘기를 누군가에게 할 수 있었던 것도… 전부, 대표님이 있어서 가능했어요.”

그의 불안을 지울 수 있는 사람이 나뿐이라면, 침묵을 깨는 용기를 내야만 했다. 숨을 깊이 들이쉬고, 그것을 조금씩 나누어 삼키듯이 말을 이어 갔다. 손에 쥔 맥주병의 물기가 내게서 배어난 땀처럼 느껴졌다.

“충동적으로 꺼낸 얘기일 거라고,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결혼 얘기를 들었을 때, 다른 건 다 제쳐 두고 우선 기뻤을 만큼… 저 역시도, 아위를 원하고… 사랑해요.”

“…….”

사랑한다는 고백이 아닌 헤어지자는 선언을 들은 것 같은 얼굴.

그는 무너져 내리는 하늘 아래 서 있는 사람 같았다.

채워 주고 충족시켜 주는 다정한 밀어가 아니라 모든 것을 앗아 가는 잔혹한 선고를 들은 사람처럼 그의 입술이 탄식하듯 벌어지고 찌푸린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참았던 숨을 깊이 들이쉬며, 나는 맥주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젖은 손을 바지 위에 문질렀다. 입술이 저절로 굳게 다물어졌다.

너무 설익은 고백이었을까. 고작 몇 달간의 만남 뒤에 스물두 살이 꺼내 놓은 사랑이라는 단어는 믿음을 주기엔 너무 가벼웠을까.

하지만 말로 하지 않아 왔을 뿐, 주고받아 왔던 우리의 교감 속에 녹은 감정은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사랑으로 진화해 왔다고 확신했다.

그에 대한 나의 감정은 단지 좋아한다는 말 안에 전부 담기에는 복잡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를 통해 내가 본 것은 핑크빛 두근거림이나 설렘만이 아니었다. 사랑의 정의가 결국 사람마다 연인마다 다른 것이라면, 그를 바라보는 지금의 내 감정에 가장 근접한 단어는 아무리 고르고 골라도 사랑이었다.

“…….”

“…….”

깊은 잠을 떨치려는 사람처럼 그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몇 번 가로저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거칠게 얼굴을 비볐다. 다시 나를 바라본 눈에는 붉은 핏발이 서 있었다.

독한 말에 쏘이고 난 뒤 쓰라림을 느끼는 것 같은 얼굴로 한참 나를 응시하던 그가 의자에서 일어나 옆자리로 옮겨 왔다. 흠…. 다문 입술에서 흐르는 숨소리가 무거웠다.

내 뺨을 감싸 자신을 향하게 하고, 길고 단정한 손가락으로 나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한 번도 진지한 상대를 가져 본 적 없는 가벼운 남자라는 걸 알게 됐어도… 서이현은 날 사랑해 주는 건가.”

꽉 잠긴 목소리로 애써 농담을 꺼낸 그에게 소리 없이 미소를 보였다. 그가 엄지로 귓바퀴를 문지르며 마주 웃었다. 나를 향해 웃을 때의 그는 참 따뜻했다. 그럴 때의 그는 원하는 걸 충분히 누리고 있는 사람처럼 행복해 보여서, 내가 그에게 마음을 잘 전하고 있는 줄 알았다.

고개를 숙여 그의 턱선에 뺨을 비비고,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겨우 억제하고 있는 이성 아래 제 진짜 욕심을 아시면… 많이 놀라실 거예요.”

그가 가져 왔던 가벼운 과거 관계들에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나 아닌 누구에게도 진지한 마음을 준 적 없다는 사실로 안도하고 기뻐하는 나라는 것을.

그가 다시 한번 나의 얼굴을 감싸 자신을 향하도록 했다. 나를 보는 얼굴에는 감정이 흘러넘치고 있었지만, 그 흐름이 정확히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지는 않았다. 그에게 결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나도 아마 이와 비슷한 표정이지 않았을까.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함.

뺨을 감싼 상태에서 시선이 얼굴을 더듬고 조심스럽게 거리가 좁혀졌다. 그의 입술은 평소보다 메말라 있었다. 표면이 살짝 눌릴 정도로 맞닿았던 입술이 멀어지고, 그가 코끝을 마주 비비며 눈을 내리깐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억제할 수도 없고, 억제하지도 않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선 그렇게 놀랍지 않을 것 같은데.”

뺨을 쓰다듬던 손이 머리를 감싸고 내려가 뒷목을 쥐었다. 이마와 이마를 맞댄 상태에서 그가 다시 한번 속삭였다.

“더 놀랍게 날 사랑해 줘.”

“…….”

“올바르고 건강한 방법 같은 게 아니어도 좋으니까, 내가 정말 놀랄 정도로… 나에 관해서 만큼은 자제력도 품위도 다 잊어버리고. 나쁜 놈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을 정도로, 나에게 욕심을 부려 줬으면 좋겠어.”

“…….”

“그게 아니면 안 돼. 안 될 것 같아.”

그 자신은 이미 그런 방식으로, 정도를 벗어나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두 손으로 나의 목을 넓게 감싸 쥔 그의 팔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가 나의 눈꺼풀과 콧등에 입술을 눌렀다. 그리고 목을 좀 더 끌어당겨 얼굴을 서로 바짝 밀착시키고 관자놀이와 귓가에 길게 입을 맞췄다.

“이전에 어떤 누구에게도 해 본 적 없는 말이라는 것만이, 내가 너에게 이 말을 통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가치인 것 같아서….”

그래서 나의 사랑 앞에 자신의 고백은 초라할 뿐이라며, 그는 곧 쿠키 조각처럼 부스러져 버릴 것 같은 물기 없는 목소리로 귓속에 바람을 불어넣듯 속삭였다.

“사랑해.”

내 귀에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은 속삭임이었다. 하지만 내가 들었다면 그걸로 충분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전하는 사랑한다는 속삭임 뒤에는 입술이 겹쳐졌고, 입술이 닿지 않은 순간에는 사랑을 이야기했다. 마치 자신의 입술은 나에게 입 맞추고 사랑을 말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듯이.

지금껏 많은 감정과 이야기를 공유하면서도 관계를 규정하는 직접적 표현들을 은연중에 피해 왔던 우리지만, 그는 더는 말을 아끼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그렇게 여러 번 반복하는데도, 그의 입술이 풀어놓는 사랑의 의미는 조금도 가벼워지지가 않았다. 오히려 그 단어를 한 번 말할 때마다 그의 일부가 조금씩 잘려 나가 버리는 것처럼, 그 정도의 희생을 각오하고 소리 내는 말인 것처럼, 그의 사랑은 무게를 가지고 내 안에 흘러 들어와 쌓여 갔다.

사실, 이미 감정이 분명하다면 말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치부했었다. 그러면서도 역설적으로, 그 중요함을 알기에 마음을 확신하면서도 말로 옮기지 않았던 것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것 역시 그를 불안하게 만든, 그에게 주지 않고 내 안에 붙잡아 둔 무언가 중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모든 면에서 좀 더 말로 표현할 필요가 있었다.

“초라하다고… 하지 마세요.”

입술과 입술이 스치는 거리에서 손끝으로 그의 뺨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말을 다 마치기가 무섭게 입술이 삼켜졌다. 입술 겉면은 건조했지만, 그 뒷면의 점막과 밀려들어 오는 살덩이는 뜨겁게 젖어 있었다.

그가 들려주는 사랑이란 단어는 달콤함이나 정서적 충족 같은 연애의 영역을 넘어 더 본질적인 곳에 벌어져 있는 틈으로 스미는 것 같았다. 그의 속삭임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부풀었다. 당장 그를 원했다.

입술을 벌려 나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 머금었다 놓은 그가 뺨을 거슬러 올라가 입을 맞추며 반대로 목에서부터 가슴으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티셔츠를 구기며 가슴 위를 더듬던 손이 티셔츠 안으로 들어가 맨살을 어루만진 순간 신음을 터트리며 그의 머리를 안았다.

입술과 혀로 귀를 애무하면서 그가 등 뒤로 손을 옮겨 바지 속을 파고들어 엉덩이를 움켰다. 몸을 살짝 들어 올려 그의 손이 움직이기 쉽도록, 나를 만지기 쉽도록 틈을 만들어 주는 내 모습이 새삼 이런 행위에 제법 익숙해졌음을 자각하게 했다.

그러나 소파 위로 나를 밀어 쓰러뜨리는 그의 무게에 그런 생각은 곧 흐지부지 흩어졌다.

두툼한 부피감을 가졌지만 옷을 입으면 미끈해 보이는 긴 전신을 이용해 지그시 눌러 오는 그의 무게감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턱이 들리고 입술이 벌어졌다. 퍼즐이 맞춰지듯 그의 입술이 벌려진 입술에 겹쳐졌다.

맞닿은 아랫배 사이로 들어간 그의 손은 어느새 내 청바지의 버클을 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허리를 움직여 빈틈없이 밀착된 하반신에 자극을 가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으으, 음… 흐윽.”

마찰과 열을 일으키는 움직임에 팔을 더듬어 소파의 등받이를 꽉 붙잡았다.

청바지의 앞섶을 활짝 벌려 놓은 뒤, 티셔츠를 위로 밀어 올리면서 그가 뜨거운 혓바닥으로 맨살을 핥고 올라왔다. 겨드랑이까지 티셔츠가 밀려 올라가자 엄지로 젖꼭지를 몇 바퀴 둥글리고는 아래에서부터 위로 쓸어 올리듯이 혀로 애무했다.

“흐으… 흐윽.”

둥글게 뭉쳐져 평소보다 불거져 나온 젖꼭지를 반복해서 핥아 올리는 혀의 자극에 허리가 위로 붕 떠올랐다. 눈을 치뜬 채 그런 나의 반응을 주시하며, 그가 드러난 상체를 손으로 더듬어 허리로 내려갔다. 옆구리 부근에서 청바지와 브리프를 한 번에 붙잡은 그는 유륜 주변의 살까지 입 안으로 강하게 빨아들였다.

“아으, 흣! 흐흡.”

소파의 등받이를 쥐어뜯던 손으로 그의 어깨를 꽉 붙잡았고, 그는 여전히 나를 올려다보며 입 안에 문 조그만 살덩이를 혀끝으로 긁어 댔다. 허리를 몇 번이나 강하게 튕겨 대며 소파 등받이 대신 그의 어깨를 아프게 움켜쥔 뒤에야 그는 젖은 효과음과 함께 젖꼭지에서 떨어졌다.

엉덩이와 음모, 성기가 절반 이상 드러날 정도로 이미 아래로 당겨져 있던 청바지와 브리프를 그가 한 번에 붙잡아 끌어 내렸고, 나는 천장을 향해 다리를 들어 그것을 벗기는 데에 협조했다. 뒤집힌 채로 벗겨진 청바지가 소파 아래로 버려졌고, 좀 전에 샤워를 마치고 갈아입었던 흰색 브리프는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

허리를 펴고 나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그가 가늘어진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속옷으로 코와 입을 막은 채 자신의 허벅지 위에 걸쳐진 나의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으며 뭉근하게 허리를 비벼 왔다. 브리프의 냄새를 맡는 것 같기도 했고, 입을 맞추는 것 같기도 했다.

오랜만에 다리 사이로 느끼는 그의 뜨거움에 고백의 여운이 더해져, 그저 숨을 몰아쉬면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쪽. 브리프에 입을 맞추는 소리를 낸 그가 자신의 검은색 반소매 티셔츠를 단번에 벗어 버린 뒤 속옷과 함께 그것을 바닥에 내버렸다.

그리고 몸을 눕혀 소파와 나 사이의 얼마 안 되는 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 몸을 옆으로 세워 누웠고, 그가 등 뒤에 몸을 바짝 붙이고 누우며 소파 위에 뒹굴던 쿠션 하나를 나의 머리 아래 받쳐 주었다. 목 아래 빈 공간으로 팔을 넣어 가슴을 당겨 안고는 뒷덜미에 입을 맞추고 피부를 이로 잘근거렸다. 다리 사이로 그의 단단한 허벅지가 파고들었다.

“으으음… 흐으, 흠.”

눈꺼풀이 느슨해지면서 몸에 힘이 빠졌다. 가슴을 문지르는 그의 손에 내 손을 겹치며 등 뒤의 그를 바라보자 입술이 맞물렸다. 그의 윗입술이 아랫입술을 밀고 내려가고, 다시 도톰한 아랫입술이 아랫입술을 밀고 올라왔다. 혀를 쓰지 않은 키스는 아슬아슬 애를 태우는 듯했지만, 다리 사이를 비비는 허벅지의 움직임과 성기를 흔들어 단단하게 세우는 손길은 노골적이었다.

그는 일자로 툭 떨어지는 끈과 밴드로 허리를 조이는 실내용 팬츠를 입고 있었고, 그건 내 엉덩이골 사이에서 단단해져 가는 그의 페니스의 부피감을 숨기기엔 턱없이 얇고 부드러웠다.

“서이현….”

귓바퀴에 코끝과 입술을 비비며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만으로도 몸이 떨렸다. 사실 정말 좋은 목소리이기도 했다. 듣기에 아주 편안한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그 특유의 낮은 긁힘이 오히려 인상적인 악센트를 만들어 잊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관계 중에 톤을 더 낮추고 바람을 잔뜩 섞어 귓가에 속삭일 때는… 특히나 더.

“사랑해.”

울룩불룩 불규칙한 귀의 곡선들을 입술로 긁으며 더운 숨결과 함께 이런 고백을 들을 때는… 말할 수 없이 더 섹시했다.

옆구리 위로 팔을 뻗어 내 성기를 쥐고 아래에서 위로 빠르게 훑어 내면서 그는 자꾸만 더 몸을 밀어붙여 왔다. 그에게 짓눌리다시피 반쯤은 엎드린 상태로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흐윽, 흑.”

유두를 집어 비틀고 당기는 그의 손목을 꽉 붙잡으며, 엉덩이를 뒤로 밀어 그의 페니스에 더 바짝 밀착시켰다.

음모가 퍼진 부위를 넓게 손으로 쓸던 그가 자신의 사타구니와 내 엉덩이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검지와 약지가 애널의 양쪽을 벌리고 중지가 탐색하듯 입구 주변을 문지르다 좁게 다물린 점막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앓는 신음을 흘렸다. 통증 때문은 아니었다.

“하앗, 흑. 흐윽.”

매달리듯 붙잡고 있던 손목을 놔 버리고 팔을 뒤로 뻗어 그의 엉덩이를 움켰다. 얇은 옷감 아래로 단단하게 뭉쳐 꿈틀거리는 근육의 움직임이 만져졌다.

서두르지 않고, 난폭하지 않게, 하지만 곧 터질 것 같은 폭발 직전의 거센 흥분을 바로 뒷면에 숨긴 채. 길고 꼿꼿한 손가락은 안을 더듬고, 휘젓고, 간지럽게 점막 위를 미끄러지고, 그러다 한 번씩 삽입을 흉내 내며 빠른 속도로 안을 찔러 댔다.

“하으흐, 흐. 흐윽. 크….”

아마도 고의적으로, 가장 느끼는 부위 위를 진하게 긁으며 지나갈 때마다 턱을 쳐들며 눈을 감고 그의 엉덩이를 내 쪽으로 더 강하게 당겼다.

“벌써부터… 냄새가 진짜 진해….”

음미하듯 열 오른 그의 목소리에 눈을 뜨고 뒤를 돌아봤다. 턱선과 뺨, 귓가에 키스하고 있던 그의 입술이 기다렸다는 듯, 흥분과 신음으로 인해 벌어진 내 입술을 머금었다. 그의 입술은 더 이상 건조하지 않았다.

냄새가 진하다는 것이 아마도 그에게는 흥분의 정도를 의미하는 것 같았다. 평소보다 나의 반응이 빠르다는 뜻이었다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의 향기야말로 거실 전체의 공기에 진하게 배어, 나를 포함한 공간 속의 모든 것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안에서, 손가락을 구부려 흥분 상태의 예민한 점막을 자극하면서, 서로를 향해 벌려진 입술이 살짝살짝 비벼지는 거리에서, 그가 젖은 눈으로 바라보며 속삭였다.

“나를… 골든에서 레귤러로 만들어 버리는 냄새.”

곧바로 진한 키스가 이어졌다. 그의 방어벽을 허물어 버리는 것이 나라는 황홀함에, 누워 있는데도 쓰러질 것처럼 눈앞이 아찔했다. 키스와 함께 밀려드는 향기에 자신을 완전히 열어젖히며 눈을 감았다.

“……읏.”

하지만 다음 순간, 몸속에서 감지된 낯선 감각에 반사적으로 그의 손목을 붙잡아야 했다. 고개를 틀어 입 안을 달콤하게 점령하던 그의 혀를 밀어내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고조되는 흥분을 저지당한 그는 귓가에 달뜬 숨소리를 흩어 놓으며 나의 저지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저, 잠깐… 지금 좀….”

이젠 거의 완전히 엎드린 내 위에 올라타듯 몸을 겹친 그는, 삽입을 한 것처럼 전신에 커다란 굴곡을 일으키는 동시에 엉덩이를 밀어 올리듯 손가락으로 들어올 수 있는 끝까지 파고들었다.

“잠깐이 아니잖아…. 왜 멈춰야 하는데.”

“안에서, 뭐가 나온 것 같….”

“…….”

그가 잠시 동작을 멈췄다. 하지만 곧 좀 전보다 빠르게 안을 쑤시며 온몸을 내게 비벼 왔다. 귓가를 적시고 잘근거리는 젖은 숨결에 흥분이 생각을 뒤덮었다. 벌린 입술 안으로 그의 다른 손이 들어와 볼 안쪽의 점막을 건드렸고, 나는 반사적으로 입을 오므려 그 긴 손가락을 흡입했다.

“쿠퍼액이 흘러 들어가서 그래.”

“그게 아닌… 흐읍.”

다리 사이에서 부드럽게 쑤욱 빠져나가는 손가락의 움직임에 말을 다 마칠 수 없었다. 검지와 중지에 번갈아 힘을 주며 혓바닥을 더듬는 그의 손가락은 너무나 부드럽고 유연해서 있는 줄도 몰랐던 입 안의 모든 감각을 깨우는 것 같았다. 더는 사고가 불가능했다.

빠져나간 손이 외설스러운 움직임으로 다리 사이를 문지르며 드나들었다. 손바닥이 쓸고 지나가는 자리마다 질척하게 젖어 있었고, 그는 그것을 상기시키려 일부러 음란한 마찰음이 일도록 손바닥을 비틀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이거 봐. 이렇게 많이 흘렸는데…. 이러면, 움찔거릴 때마다, 안으로 새어 들어갈 수밖에 없….”

보지 말라고 말하는 대신 뒤로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당겨 키스했다. 이젠 뭐가 됐든 좋으니 얼른 더 깊게, 더 가깝게 그를 원했다. 키스를 통해 아무리 그의 향기를 호흡해도 전신이 타는 것 같은 갈증을 꺼뜨릴 수가 없었다.

손가락이 빠져나간 만큼 나의 엉덩이에 더 바짝 밀착한 성기를 강하게 치대며, 그가 아랫입술을 아릿하게 빨아 주었다. 입술 사이에 물고 압박을 가하던 말캉한 살점을 탁 놓으며, 비밀스러울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침대로 갈까.”

“…….”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일으켜 앉은 그는 자신의 허벅지 위에 마주 보고 앉도록 나를 당겼다. 그 상태에서 나를 안고 일어나 침실까지 이동하는 동안에도 조금이라도 흥분이 식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입술, 턱선, 목덜미, 어깨… 입술이 닿는 모든 곳을 옮겨 다니며 키스를 쉬지 않았다.

나를 허리에 매단 채 무릎으로 침대 위에 올라선 그는 그대로 나와 함께 침대 위로 쓰러졌다. 커다란 베개에 파묻힌 나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얼굴 구석구석을 내려다보는 푸른 눈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파도치는 바다를 연상시키는 눈동자는 물론이고, 스치듯 한 번 보더라도 잊을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단지 그림이나 조각처럼 오차 없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자신만의 오묘한 분위기와 존재감을 풍기며 자신을 눈에 담은 사람들의 인상에 깊은 자국을 남기는… 이 아름다운 남자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바로 오늘, 사랑이라는 표현을 서로에게 처음 허락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홀린 듯 그를 바라보는 사이, 코끝과 입술에 키스한 그가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검은색 실내복의 사타구니가 부자연스럽게 불거져 있었고, 대단한 양을 쏟아 내는 골든 알파의 쿠퍼액으로 인해 팬츠의 다리 사이가 더욱 진한 검은색으로 젖어 있었다.

빠르게 하의를 벗어 내고 반쯤 발기한, 그 상태로도 많은 남자들의 최대 팽창치를 웃도는 페니스를 나의 고환 위로 미끄러뜨리며 그가 다리 사이에 자리 잡았다.

“흐으… 음….”

페니스가 속살에 닿아 오는 느낌만으로도 엉덩이가 공중에 들렸다. 그가 나의 다리를 쓸어내려가 양쪽 발목을 쥐고 가슴을 향해 밀어 올렸다. 자연히 무릎이 굽혀졌고, 다음 순간엔 굽혀진 다리가 다시 펴지면서 그의 어깨 위에 발목이 걸쳐졌다. 자세 때문에 엉덩이에 그의 사타구니가 더 바짝 밀착되었다. 둔부 사이에 비벼지는 음모의 감촉이 숨소리를 더욱 어지럽혔다. 그가 나의 허벅지와 종아리를 쓰다듬으며 허리에 굴곡을 일으켜 맞닿은 아래에 외설적인 자극을 가했다.

“하으, 흐으. 흡. 흐, 흣.”

서로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가슴을 들썩거리는 우리 둘의 호흡이 불규칙한 리듬으로 긴장감을 조성했다.

그가 나의 어깨 옆으로 손을 짚으며 상체를 굽히자, 나의 하체도 그의 움직임과 함께 반으로 접혔다. 다가오는 그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팔을 굽히고 상체를 낮춰 키스한 뒤 다시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환과 페니스 위를 비비는 그의 뜨거운 알파가 더 깊숙한 곳을 문질러 주기를 기다렸다.

“아으, 흑!”

시트를 틀어쥐며 입술을 물었지만, 귀두가 밀고 들어오는 아래에서 느껴지는 것은 고통이나 통증과는 거리가 멀었다.

번들번들하게 젖은 두툼한 귀두는 섹스를 쉬었던 며칠 사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려 잔뜩 수축한 내벽을 거리낌 없이 밀고 들어왔다. 고통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새살이 돋으며 하나로 봉합되어 아물어 가고 있던 생살이 무자비한 외부의 진입으로 인해 억지로 벌려지는 것 같은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솔직해지자면, 그게 오히려 더 좋았다. 뜨겁게 끓는 거대한 무언가에 의해 천천히, 분명하게 꿰뚫리고 지져지는 충족감으로 턱을 쳐들고 입술을 벌렸다. 그의 것은 언제나 폐와 심장까지 찌르고 들어오는 것처럼 숨을 틀어막고 피의 순환을 방해했다. 그리고 아주 조금의 호흡과 아주 약간의 혈액만으로도 그 어느 때보다 나를 살아 있게 했다.

내가 보이는 반응 하나하나를 씹어 삼킬 듯 주시하며 그가 상체를 낮춰 아랫입술을 머금고는, 입술과 치아를 이용해 아릿한 자극을 흘려 넣었다. 머리를 마비시키는 짙고 독하고, 야한 향기와 함께.

“으음, 음… 하으, 윽.”

내 무릎이 어깨에 닿을 만큼 그가 바짝 몸을 밀착시킨 순간, 내부의 더 깊숙한 곳이 벌어졌다. 섬세한 근육이 꿈틀거리는 그의 팔을 뜯듯이 쓰다듬으며 턱을 쳐들었다. 뒤로 빠져나갔다, 빠져나간 것보다 좀 더 깊이 파고들기를 반복하는 자신의 리듬에 맞춰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팔을 움켜쥐었던 손을 놓고 넓고 두꺼운 어깨로, 팽팽하게 당겨진 길고 탄탄한 목덜미로 거슬러 올라갔다.

심각해지거나 뭔가가 마음에 안 들거나, 그리고 또 가끔 장난기가 발동할 때마다 급한 경사를 그리며 미간 쪽으로 낮아지는 짙은 눈썹과 그의 다소 복잡한 혈통을 증명하듯 눈썹과 짧은 거리를 두고 깊숙이 자리한 청회색 눈동자, 남성적인 폭과 높이를 가진 곧은 라인의 콧대, 또… 가만히 다물고 있을 때도, 살짝 벌어져 있을 때도, 그리고 영어의 F와 L을 발음할 때는 특히 더 섹시해지는 육감적인 입술까지… 손가락으로 느리게 더듬어 내려갔다.

그는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깊이 숨을 몰아쉬면서 나의 손길에 얼굴을 내맡긴 채 내 안으로 더 깊이 파고드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다. 손가락이 입술 위를 덧그릴 때 그가 입술을 오므려 입을 맞췄다. 아랫입술을 넓게 벌렸다 끌어 올리며 입술 안쪽의 젖은 점막을 손가락에 비비는 그의 눈을 올려다보며 꽉 잠긴 목소리를 억지로 끌어냈다.

“아위의 페로몬은, 어떤 향일지… 가끔 궁금해요.”

“…….”

의외의 말이었는지 그의 눈이 좀 더 가늘어졌다. 붉게 젖은 혀로 아랫입술을 살짝 축인 그는 내 안을 넓혀 가던 허리의 속도를 잠시 늦추었다.

“아마, 정말… 좋은 향기겠죠?”

“…….”

“저는… 알 수 없겠지만.”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그가 다시 허리를 유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팔을 굽혀 상체를 내게로 완전히 기울이면서 자신의 알파를 깊숙이 밀어 넣어 숨을 틀어막았다. 더는 아무 말도,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를 느끼고, 끌어안고, 페로몬이 아닌 그의 향수를 들이마시며 그가 흔드는 리듬에 동화되는 것 외에는.

머리카락에 가려지는 목덜미 깊숙한 자리에 입술을 묻고 피부를 빨아 자국을 새기면서, 그는 자신을 좀 더 재촉했다. 그가 내 안을 파고드는 흔들림에 매트리스 전체가 출렁거렸다.

“하윽, 흑… 흐읍….”

그의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을 때, 그의 얼굴은 내 얼굴 바로 앞으로 옮겨 와 있었다.

“내가 골든인 거 잊었어?”

“…….”

“아무도 맡지 못하게 할 테니까….”

그러니까 그런 얼굴은 하지 말라고. 어떤 누구도 그 향을 알지 못하게 하겠다고.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한 것도 아닌데, 그는 먼저 약속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땀에 젖은 목덜미를 당겨 먼저 키스하면서, 아무도 맡지 못하게 해 달라고 속삭였다. 내가 맡을 수 없는 그의 향기마저도 내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내 것으로 봉인해 두고 싶은 이런 욕심이 건강한 사랑인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진입과 후퇴를 반복하며 몸 안에 열을 일으키는 그의 움직임 때문에 생각을 더 길게 이어 갈 수도 없었다.

내벽이 자신의 사이즈에 완전히 적응할 때까지 느리고 진득하게 자제했던 그는, 곧 싸움을 걸듯 덤벼들며 입술을 집어삼키고, 원하는 만큼 과격하게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허리나, 성기만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늘 그랬듯 전신에 굴곡을 일으켜 그 힘으로 나를 가르는 그의 방식은 엄청난 에너지를 요구했고, 그만큼 엄청난 쾌감을 쏟아 놓았다.

내벽을 긁으며 물러났다가 안에 흥건하게 고인 체액이 몸 밖으로 튈 만큼 단번에 쑤시고 들어오는 빠듯한 묵직함에, 그의 어깨에 올린 발끝을 펼쳤다 오므리길 수없이 반복했다.

“하으, 흐. 흐. 흑.”

먼바다에서부터 밀려오는 해일을 감지하듯 몸속의 피를 서서히 흔드는, 다가오는 노팅의 감각에 그의 어깨를 힘주어 붙잡고 헉헉거렸다.

지금까지의 노팅들이 흥분에 완전히 지배당한 상태에서 일어난 사고 같았다면, 이번엔 달랐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은 쾌감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기는 했지만, 또렷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는 눈이었다. 아래에서 일어나고 있는 격렬한 마찰이 믿기지 않을 만큼 차분하고 냉정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배 안에서, 나의 몸속에서, 자신이 살아 있음을 내게 입증하듯 힘차게 맥박 치는 그의 노팅을 받아 내며, 페니스에 손 하나 대지 않은 상태에서도 나는 사정했다. 그러나 더는 앞의 사정이 문제가 아니었다. 사정이 끝난 뒤에도 쾌감과 오르가즘은 계속됐다.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성기는 정액인지 쿠퍼액인지도 모를 체액을 계속 흘려 대며 멋대로 반응하고 있었다.

진한 키스 뒤에 그가 코끝이 뭉개질 정도로 내 뺨에 얼굴을 비비며 완전히 거칠어진 호흡 사이로 나를 불렀다.

“서이현….”

“…….”

“사랑해.”

“……저도 그래요.”

앞으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순간의 진심만큼은 의심받거나 훼손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는 미간 쪽으로 눈썹을 잔뜩 모은 채 나의 입술을 머금었다 놓으며 말했다.

그리고 무언가에 의해 꽉 틀어막힌 것 같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내가, 정말 잘할게.”

전에도 그에게 이런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이렇게 많은 것을 주고도 더 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그의 목을 감싸 뜨거운 입술에 키스했다.

내 안에서 느끼는 노팅의 쾌감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쓰다듬고, 눈꺼풀과 코와 뺨과 입술에 키스하며 그의 이름을 부르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내 안에서 노팅을 하고 있는 순간에조차 실은 불안하다고 했던 그의 말이 가슴에 남아 있었다.

의도를 알아챈 것인지 몰라도 그가 나를 내려다보며 흐리게 웃었다.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온몸에 키스를 퍼붓고 자국을 새기고, 내 몸을 꽉 끌어안고, 나의 내벽을 최대로 팽창시키며 부풀어 오른 노팅 상태로 뜨겁게 안을 지지며 사정했다. 노팅이 잦아드는 순간 다리 사이로 엄청난 양의 정액이 주르륵 새어 나가는 감각까지도 섹스의 연장이었다.

식사도 하지 않고, 자정이 지날 때까지 더 서로의 몸에 매달렸다. 땀과 정액, 2리터쯤 되는 생수통을 그대로 엎은 것처럼 시트를 흥건히 적신 체액, 그리고 그가 남긴 울긋불긋한 흔적을 전신에 새긴 알몸의 육체 하나가 섹스 후 그의 침대에 남은 전부였다.

선 채로 샤워를 할 기력도 없이 늘어진 나를 위해, 늘 그랬듯 조금도 지치지 않은, 여전히 발기 상태를 유지한 그가 욕조에 목욕물을 준비해 주었다. 아무것도 먹을 생각이 없었지만, 그는 욕조에 몸을 담그고 나른하게 풀어진 나에게 바나나와 우유 한 잔을 가져다주었다.

물에 몸을 담가 분비물을 씻어 내는 정도로 목욕을 마친 뒤에는 난장판이 된 그의 침대 대신 내 방으로 가서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섹스를 한 뒤 처음으로 함께 잔다는 사실에 나는 들떠 있었다. 그리고 드물게도, 그것을 숨기기가 어려웠다. 커다란 베개 하나를 나누어 베고, 서로를 향해 누워 후희를 즐기듯 상대의 몸을 쓰다듬었다.

그는 베개 아래, 목과 어깨 사이의 뜬 공간 안으로 넣은 팔을 굽혀 나의 어깨를 감싸고, 다른 한 팔로는 나의 허리를 안아 옆구리 부근을 느리게 만지작거렸다.

그의 등에 팔을 두르고 엄지로 피부 위를 쓸던 나는 턱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내일 자고 일어나면 두꺼비나 야수가 돼 있는 건 아니죠?”

그가 눈을 감은 채로 웃었다. 그리고 안은 어깨 끝을 둥글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원래 두꺼비나 야수였다가 진정한 사랑을 깨달으면 사람으로 변하는 스토리 아닌가? 순서가 잘못된 것 같은데.”

결혼하자는 말을 들었던 것도, 서로에게 사랑이라는 표현을 허락했던 것도, 정말 있었던 일인가 싶게 아득했지만, 몸을 뒤척이며 나를 좀 더 강하게 끌어안는 그의 팔과 이마에 닿은 그의 입술이 그 모두에 대한 증거였다.

이젠 자야 할 시간이라며 이마에 입을 맞추고 머리카락을 쓸어 주는 그의 손길에 눈을 감았다. 가장 깊은 잠은 그의 품속에 있었다.

■ ■ ■

호수에 가까워질수록 바람은 더 강해졌지만, 비현실적일 정도로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는 맑은 날씨였다.

“일요일인데 시카고 사람 다 어디 갔나 했더니 네이비 피어(Navy Pier)에 몰려 있었네.”

가죽 재킷 주머니에 찌르고 있던 손을 빼 머플러가 날아가지 않도록 재킷 안으로 여미면서 누나가 중얼거렸다.

인파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비교적 한산했던 시내에 비하면 부두 주변에는 사람이 꽤 있는 편이었다. 특히나 관람차와 회전목마 같은 놀이기구가 있는 방향으로 가족 단위 나들이객들과 관광객들이 몰리고 있었다.

누나와 나는 좀 더 한적하게 미시간호의 풍경을 즐길 수 있는 곳을 찾아, 대관람차를 대각선으로 바라보는 쪽을 향해 이동했다. 어디든 시야가 탁 트여 보기에는 멀지 않은 것 같은데, 막상 걸으면 보는 것만큼 목적지가 쉽게 가까워지지 않았다. 2~3분이면 도착할 줄 알았지만, 우리가 점찍은 벤치에 도착하기까지 10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자, 이제 맛을 봅시다.”

침엽수로 보이는 나무 아래 등받이 없는 벤치에 자리를 잡자마자 누나는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팝콘을 개봉했다. 시카고의 명물이라며 아무리 바빠도 꼭 먹어 볼 거라고 출장 전부터 누나가 기대했던 팝콘이었다.

한 봉지씩 구입한 치즈 맛과 캐러멜 맛 팝콘을 개봉해 놓고 누나는 캐러멜 맛을 먼저 몇 알 집어 먹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인상을 썼다.

“우왁, 진짜 달아! 이거 사람이 먹어도 되는 거야?”

뇌가 녹아내릴 것 같은 단맛이라는 누나의 평에 호기심이 생겨 나도 몇 알 입에 넣어 보았다. 아… 정말 많이 달았다. 내 경우에는 뇌까지 단맛이 전달되기도 전에 치아가 먼저 녹아내릴 것 같았다.

“빨리 치즈 맛을 먹어, 치즈 맛.”

누나는 응급 처치를 하듯 허겁지겁 내 입에 치즈 맛 팝콘을 넣어 줬고, 조준을 잘못한 팝콘 몇 알이 점퍼 안이나 다리 사이로 굴러떨어졌다. 우리 둘 다 웃음이 터졌다.

별것 아닌 일로 서로 한참 웃고 난 뒤, 치즈 맛과 캐러멜 맛 봉투에 번갈아 손을 넣으며 시시콜콜한 일들을 떠들었다. 누나는 이번 출장 중에 만난 별난 사람들에 대해, 나는 갤러리와 미술관에서 접한 그림들에 대해.

“그나저나 정말 넓다. 끝이 안 보이니까 넓다는 생각도 안 들 정도야. 바다를 보면서 넓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잖아?”

눈앞의 미시간호를 바라보며 누나가 말했다. 어깨가 높아질 정도로 깊이 들이마셨던 숨을 그만큼 길게 내쉬는 누나는, 심호흡을 한다기보다 한숨을 쉬는 것 같았다.

누나의 말대로였다. 수평선을 가진, 한계가 없는 눈앞의 푸른 정경은 ‘넓이’라는 개념을 적용하는 것조차 어색하다는 면에서 바다와 닮아 있었다. 하늘의 넓이에 대해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처럼, 바다도 마찬가지였으니까.

할아버지 댁에 있었을 때, 바다는 생활과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내륙의 사람들에게 하늘과 땅이 당연한 기본 전제인 것처럼.

바다는 늘 바람으로, 그 바람에 섞인 짠내로, 모든 대문과 자동차를 빠르게 녹슬게 하는 부식력으로, 고개만 돌리면 시야에 들어오는 푸르고 흰 반짝임으로, 어디에나 존재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었다.

내가 아버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도 나에게 버림받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을까.

형과 함께 그 집을 떠나오던 밤, 나를 붙잡지 않았던, 나를 그저 어둠의 일부로밖에 보지 않는 것 같았던 아버지의 침묵을 떠올려 본다.

아마도 아버지는 나와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의 세계에서는 이미 내가 제외되어 있었으니, 아니, 모든 것이 제외되었으니, 내가 아니라 세상이 아버지에게 등을 돌린다 해도 상실감이나 버려진 기분을 느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의 설득과 호의로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됐고, 홍콩이나 시카고 같은 생각지도 못했던 도시들을 다녀 보며 자극을 받고, 그가 예언한 대로 다시 그리고 싶은 이야기들이 생기고, 그에게 과거를 털어놓으며 뭔가를 극복한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그의 애정이라는 안전한 테두리 안에서 보호구를 착용하고 그가 뒤에서 잡아 주는 자전거의 페달을 밟은 것이나 마찬가지일 뿐, 저쪽 세상에 남겨 두고 온 실제의 내 현실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어쩌면 다름 아닌 바로 그것이, 나로 인해 그가 느끼는 불안의 원인일지도 모른다.

내가 그에게 완전히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 다시 말해, 외면하고 있는 자신의 문제는 결국 그곳, 아버지가 있는 곳에 있을 테니까.

어젯밤 그와 나누었던 사랑한다는 속삭임과 모든 애정 넘치는 말들과 그와 함께 잠들고 깨어나는 행복감에 그의 품에서 조용히 지어 보았던 미소는, 두 사람이 함께 노력해서 만들어 온 현재가 아니었다.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침묵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모른 척해 왔을 뿐.

시카고는 서울보다 기온이 낮을 거라며… 지금 입고 있는 이 점퍼조차도 그가 여행 전에 미리 준비해 준 옷이었다. 아니, 지금 내 몸에 걸친 모든 것은, 햇빛을 차단해 주고 있는 선글라스와 속옷 한 장까지도 전부 그의 선물이었다. 서울의 스튜디오 옷장 안에는 피카소도 즐겨 입었다는 브랜드의 스트라이프 티셔츠가 디자인과 컬러별로 걸려 있었다.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낸 빛은 아직 어디에도 없었다. 경제력과 관련된 얘기만이 아니다. 그가 나에게 준 것은 옷이나, 지낼 곳, 호화로운 여행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비춰 주는 빛에 의지해 자신의 손을 보고, 앞과 주변을 보고, 그 빛에 의지해 무언가를 붙잡은 것이다.

바다를 연상시키는 눈앞의 대상에서 도망치듯 손안의 커피를 향해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이스커피가 든 컵의 표면에는 물방울이 가득 맺혀 있었다. 인우 형의 선물을 위해 들렀던 스타벅스에서 사 온 커피였다. 어느새 얼음이 절반 이상 녹아 있었다.

“어제… 약속 취소되고, 밤에 리드 만나러 나갔었어.”

“…….”

생각에서 빠져나와 누나를 돌아봤다. 누나의 얼굴은 여전히 미시간호를 향해 있었다. 그러나 선글라스 뒤의 그 또렷한 검은 눈동자가 실제로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SNS 메시지로 연락이 왔더라. 자기는 내일 파리로 돌아가는데, 잠깐 술이나 한잔하지 않겠냐고.”

쥐고 있던 팝콘을 털어 넣은 누나는 손에 묻은 부스러기를 털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지금쯤이면 비행기 안이겠네. 무심하게 중얼거리면서.

“기분도 꿀꿀하고 그래서 알았다고 하고 나가긴 했는데, 그냥 술 한잔하자는 얘기가 아닐 거라는 건 솔직히 짐작했었어. 파티에서 좀 길게 얘기를 나눴었는데 그때 이미 느낌이 왔었거든.”

“…….”

누나가 무슨 얘기를 하려 하는지, 나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끼어드는 대신 잠자코 뒷말을 기다렸다.

“리드가 운영을 맡고 있는 단체 기억해? 제인과 코너가 후원하고 있다던.”

“네.”

“같이 일해 보지 않겠냐고 제안하더라.”

“…….”

예상한 대로의 내용이었는데도 말문이 막혔다. 우리가 집어 먹는 사이 가벼워진 팝콘 봉투가 바람에 날아갈 것 같아 손으로 붙잡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아… 어… 누나는, 뭐라고….”

“아직 대답 안 했어. 시간을 좀 달라고 했지.”

누나의 얼굴이 내 쪽을 향했다. 눈동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근데, 나만 제의받은 거 아니야.”

“…….”

리드가 직접 시스템을 구상하고 직접 발로 뛰어 후원자들을 모아 개설했다는 단체, ‘더 핸즈(The Hands)’는 생계로 인해 창작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신인 아티스트 중 단체와 방향성이 일치하고 가능성이 풍부한 사람들을 선별해 일정 기간 동안 숙식과 창작 재료, 창작 공간을 제공해 주고,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매니지먼트까지 담당해 주는 미술 재단이었다.

누나의 말에 의하면, 파리의 한 작은 아파트가 아티스트들의 숙소이자 단체의 사무실 겸 전시실로 사용하는 ‘더 핸즈’의 본부였고, 한 자리 비어 있는 스튜디오의 새로운 입주민으로 리드가 나를 추천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제인과 코너 외에도 여러 미술 애호가들과 기업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는 ‘더 핸즈’에서는, 여느 갤러리나 딜러와는 달리 작품 판매에 수수료를 부과하지 않았고, 단체에 속해 있는 동안의 모든 수익이 전액 작가의 몫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다들 신인 작가이기 때문에 금액의 단위가 크지는 않았지만, 화가로서 자리를 잡는 과정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보통 갤러리들이 부과하는 수수료는 작품가의 30~50퍼센트였다. 수수료가 30퍼센트라면 아주 저렴한 축에 속했다. 그러니 작품 판매가에 수수료를 포함시키지 않으면, 이득을 보는 것은 작가만이 아니었다. 부유한 소수의 컬렉터들 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좋은 작품을 ‘적당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것이 ‘더 핸즈’가 추구하는 미술의 방향성이었고, 나 역시 그들의 생각에 동의하고 매력을 느낀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어때?”

누나는 약간 내 눈치를 보듯이, 상체를 기울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얼음이 거의 녹아 처음보다 색이 많이 옅어진 커피가 든 컵을 만지작거리며 혀로 아랫입술을 살짝 축였다. 갈증을 느끼고 있었고, 손에는 커피가 있는데도, 그것을 마시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제안은 정말 기쁘고… 그리고 감사하지만….”

누나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누나가 내 쪽으로 좀 더 다가와 앉으면서 선글라스를 벗어 손에 들었다.

“단체의 성격이나 운영 시스템, 시설에 대한 안내 같은 걸 메일로 보내고 싶대. 일단 받아서 살펴보기만 하는 건 상관없잖아. 아직 안 알려 주긴 했는데… 네 메일 주소, 알려 줘도 되지?”

“자료를 받아 보더라도… 제 생각은 안 바뀔 거예요.”

첫 만남에서부터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누나의 또렷한 눈동자가 힘주어 나를 바라보았다. 강한 바람에 까만 단발머리가 얼굴을 향해 아무렇게나 날리고 있었지만, 누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거, 대표님 때문이야?”

“…….”

“대표님하고는… 사귀는 거…지?”

자신의 질문을 스스로 엉뚱하다고 느꼈는지, 누나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피식 웃었다.

“내가 대표님을 두고 너한테 이런 질문을 하게 될 거라고는 진짜 상상도 못 했거든.”

벤치 위에 다리를 올려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팔을 걸치며 웃음의 이유에 대해 설명한 누나는, 손에 쥐고 있던 선글라스를 입가에 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지. 상대가 너라는 게 문제가 아니야. 대표님의 연애 상대가 누구인지, 연애를 하고 있기는 한 건지, 그런 쪽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었으니까. 근데 절대 너 같은 애한테 장난 같은 걸 칠 사람은 아니고. 확실하게 사귀는 거 맞지?”

“……네.”

원하는 걸 얻지 못할 테니 그를 좋아하고 있다면 그만두라고 주한이 형이 경고했을 때. 그때도 나는 그와 나의 관계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때는 그와 나, 둘만을 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조심스러운 단계였기에, 서로 좋아하고 있다고, 내가 그를 일방적으로 짝사랑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형에게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누나를 상대로 ‘확실하게 사귀는 관계’임을 인정하고 있었다. 대답 전에 조금 망설이기는 했지만, 그건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내 대답에 누나는 씩 웃으며 팔을 뻗어 내가 쓰고 있는 선글라스의 렌즈를 톡톡 두드렸다.

“이거, 대표님 거하고 똑같은 거잖아. 그 양반이 자기 거하고 똑같은 걸 사 주면서 소유권을 주장하고 싶어 하다니.”

놀리듯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웃은 누나는 팝콘 옆에 내려 두었던 커피를 한두 모금 마셨다.

“널 유난히 예뻐하신다고 생각은 했지만 원래 소속 작가들은 세심하게 잘 챙기시는 분이기도 하고, 네가 누구한테든 미움받을 애는 아니잖아. 그냥 나이도 어린 애가 하는 짓도 예쁘고 그랬는데 소속 작가까지 됐으니까 당연히 예뻐하시는구나 했지. 처음엔 죽어도 다신 안 볼 사이인 것처럼 무례하게 구는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서 상대가 보여 주는 장점까지 모르는 척하는 분은 아니잖아.”

그 말 그대로였다. 예의 바른 사람은 아닐지 몰라도 상대에게 멋대로 기대를 품고 실망하는 일도 없었다. 장점은 확실하게 인지하고 인정했고, 주변의 필요를 섬세하게 살피는 사람이기도 했다.

누나와 형에게 오피스텔을 제공하고, 영어 과외를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출장 환경을 쾌적하게 조성해 주는 것이 단지 상사로서의 배려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내가 그런 유형의 사람을 처음 본 것이었을 뿐,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과호흡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 앞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냉혈한도 아니었다. 내가 아니었더라도 응급 처치를 하고 편안한 곳에 눕혀 쉬게 하는 정도의 친절은 보였을 사람이었다. 과호흡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진정시키고 잠들게 하기 위해 누구에게나 애무를 하고 사정을 시켜 줄 사람은 아니긴 했지만.

누나와 서로 마주 보며 피식 웃고 난 뒤, 빨대로 컵 안의 얼음을 뒤적거리며 오늘 아침을 떠올렸다.

그가 슈슈와 함께 클로이 켄트의 점심 모임에 참석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시카고에서의 마지막 날인 오늘, 누나와 둘이서 관광을 하기로 약속했었고, 내가 먼저 일어나 외출 준비를 시작했었다.

그를 깨우지 않기 위해 마스터룸의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조용히 준비를 마친 뒤, 잠들어 있는 그가 신기해서 옆에 앉아 조금 내려다보다 침대에서 내려가려는 찰나 그에게 손목을 붙잡혔었다.

「그렇게 보기만 하고, 키스도 안 해 주고 가는 건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많이 피곤한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서울에서부터 수면 부족에 피로가 쌓였을 테니 그럴 만도 했다. 다시 몸을 돌려 그를 끌어안고 뺨과 입술에 쪽, 입을 맞췄었다.

약을 챙겨 먹었는지 질문하고 답을 들은 뒤에야 내 손목을 놔주고 다시 베개에 파묻혔던 그는, 방을 나서려는 나의 등에 대고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고 또 한 번 사과했었다.

하지만 정말 관광은 아무래도 좋았다. 출장을 온 뒤로 그에게 힘든 일들이 한꺼번에 닥친 것 같아 그게 걱정이었다. 물론 그중 대부분은 이미 서울에서부터 그를 압박해 오고 있었던 문제들이고, 내가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지만.

“그럼… 대표님 왜 이렇게 갑자기 뉴욕 지점 얘기 서두르시는 건지, 얘기 들은 거 없어?”

나와 마찬가지로 한참 말없이 미시간호를 바라보며 자신만의 생각에 잠겨 있던 누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아는 얘기가 있다고 해도 연인인 너한테 해 준 얘기를 털어놓으라고 하는 건, 좀 아니긴 하지.”

누나가 내 쪽을 힐끔 돌아보며 웃었다. 그리고 곧 다시 넓이가 가늠되지 않는, 고로 우리의 눈에는 무한이나 마찬가지인 호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집을 나왔을 때쯤에 난 완전히 악에 받쳐 있었어. 난 머리도 좋고, 요령도 좋고, 뭐든 다 잘하니까… 부모의 경제적 지원을 받기 위해 그들이 정해 놓은 코스를 따르지 않아도, 얼마든지 내 뜻대로 인생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자만에 차 있었지만… 실제로는 고졸의 무경력자가 내 현실이었지. 한 갤러리에 말단으로 들어가서 말도 안 되는 적은 급여를 받으면서 거의 노동력 착취를 당하고 있었어. 더 적은 돈을 받고서라도 일하겠다는 사람은 줄을 섰으니, 경력을 쌓길 원하는 사람은 그 시기를 참고 넘기는 수밖에 없거든. 내가 똑똑하고, 요령도 좋고, 뭐든 다 잘한다는 건… 그 사람들에게는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더라. 어차피 말단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그런 게 아니니까.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제대로 관련 학과를 졸업한 전공자들도 이 바닥에서 처음 시작이 다 그래. 갤러리스트라고 하면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너도 일해 봐서 알다시피 실무는 잡다한 사무 처리가 대부분이니까.”

누나는 쓰게 웃으며 커피를 몇 모금 마셨다.

“그러다 대표님을 만난 거야. 하는 일은 이전 갤러리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아도… 좀 더 잘해 보려는 노력을 알아봐 주고 인정해 주는 사람을 만나니까, 같은 일을 하는데도 보람이 다르더라. 잘난 척해도 결국은 나도 어린애라서, 대표님이나 실장님 같은 어른의 인정과 칭찬이 있어야 더 잘 성장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됐지.”

“…….”

“대표님하고 실장님은… 나랑 권주한에게는 두 번째 부모님 같은… 아마 그런 분들일 거야.”

곁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에 무슨 뜻인지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지만, 선뜻 알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날. 애프터파티 후 엘리베이터에서 누나는 그에게 공사를 혼동해 죄송하다고 했지만, 누나도 그도, 나까지도, 팬텀을 중심으로 한 그들의 관계가 공과 사의 영역으로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실장님은 몰라도 대표님은 이렇게 얘기하면 내가 왜 니들의 부모냐고 질색하겠지만.”

그가 어떤 말투로 어떤 표정을 지을지 너무 잘 그려져서 나도 누나를 보며 따라 웃었다.

“대표님이나 실장님께는 리드에게 내가 제안받은 얘긴 당분간 비밀로 해 줘. 혼자 조용히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너도, 대표님하고 상의라도 해 봐. 둘이… 진지한 관계라면 더더욱.”

내 마음이 달라질 일은 없었다. 그래서 대답하지 않고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주한이 형한테는… 얘기하실 거죠?”

누나는 팔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흩트리며 웃었다. 누나의 웃음 역시 불분명했다.

“그만 가자. 바람이 너무 분다. 너 감기 걸리게 했다고 대표님이 내 출장 보너스 깎으면 어떡하냐.”

누나는 선글라스를 다시 쓰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렇게 먹고 싶다고 했던 팝콘은 반도 비우지 못했지만, 네이비 피어를 나오는 길에 미련 없이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슈슈와 누나는 서울로, 그와 나는 보스턴으로.

다음 날 우리는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윈디 시티(Windy City), 모든 것을 날려 버리고 뒤섞어 버리는 바람의 도시, 시카고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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