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고백
■ 미온수 ■
운영 상황 보고 회의는 그가 가장 피하고 싶은 업무 중 하나였다. 병상 150여 개 정도를 갖춘 중소형 종합병원에는 운영에 큰 변수를 끼칠 만한 사건이 별로 없었다. 약 10여 년 전, 최소 자격을 충족해 종합병원으로 승격되었지만, 그의 외증조부 대부터 신뢰를 쌓아 온 산부인과가 여전히 병원의 주 수입원이었다.
수술실과 응급실, 장례식장까지 갖추고 있긴 했지만, 생사가 달린 중요한 수술이 필요한 환자가 내원하는 일도 없었고, 확신이 없는 환자는 더 큰 병원으로 인계한다는 것이 병원 자체의 방침이라 까다로운 문제가 발생하는 일도 없이 운영은 안정적이었다.
대형 종합병원들만큼 치열한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원내에는 어느 정도 정치세력이 형성되어 있기도 했지만, 원장과 부원장의 아들인 그는 그것에서도 적당히 한 발 빠져 있을 수 있었다.
골칫거리 둘째 아들이 얌전히만 굴어 준다면 더 바랄 게 없는 부모는 주 35시간 이상은 절대 일하지 않겠다는 요구도, 위험한 수술은 맡지 않겠다는 요구도, 모두 수용하고 그를 고용했었다.
애초에 의사가 된 것 자체가 그의 뜻과는 무관했다. 내과 전문의 타이틀을 달고 다른 형제들도 모두 한자리를 하고 있는 집안의 병원에 진료실을 내고 출근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선에서, 그와 부모는 서로 합의를 본 셈이었다.
최소한의 책임과 최대한의 자유.
그 자신이 원했던 삶이었고 불만은 없었지만, 서른이 넘으면서부터는 뭔가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불만이 없다는 것이 곧 만족을 뜻하지는 않았고, 인간다움이니 유한한 삶의 의미니 하는 것에 대해 가끔씩 스스로에게 책임을 느낄 정도의 교양은 있었으니까. 원하든 원치 않았든.
회의 직후 과장급들 사이에서 태국 치앙마이 골프 투어 얘기가 나오자마자, 그는 약속을 핑계로 먼저 자리를 빠져나왔다.
얼른 가운부터 벗고 오랜만에 밤 상대라도 찾아 나서야 할 것 같았다. 욕구불만은 꼭 성적인 부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은 해소 가능한 것만이라도 해결을 봐야 할 것 같았다.
“쌤, 안에 손님 와서 기다리세요.”
진료실 맞은편 내과 데스크에서 간호사가 그를 다급하게 부르며 붙잡았다. 막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으려던 그는 걸음을 멈췄다.
“손님요?”
“그… 갤러리 운영하시는 친구분요.”
“걔가요?”
원수가 찾아왔다는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그는 목소리를 높이며 얼굴을 구겼다. 그의 반응에 간호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쌤 친구분이신 게 확실해서 기다리시라고 했는데… 제가 잘못한 걸까요.”
그는 서류철을 들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요. 아니에요. 짚이는 게 있네요. 전 오늘은 이제 퇴근한 거로 처리해 주세요. 저 나가는 거 신경 쓰지 마시고 일 보시구요.”
그는 처음과는 달리 가벼워진, 흥미로움까지 더해진 표정으로 자신의 진료실로 들어섰다. 일곱 평 남짓한 아담한 진료실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존재감이 창문 앞에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누가 보면 네 방인 줄 알겠다?”
“…….”
넓은 어깨와 상대적으로 날렵한 허리선이 강조된 네이비 컬러의 이탈리아식 리넨 슈트를 걸치고 팬츠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있던 장신의 남자는 미동도 없었다.
“무슨 급한 일이 있길래 병원으로 다 쫓아왔냐? 어? 신혼 재미에 푹 빠져서 정신 못 차리는 거 아니었나?”
그는 책상 위에 서류를 던져두고 가운을 벗으며 남자의 뒷모습에 대고 히죽거렸다.
두 번 정도 외부에서 함께 있다가 잠깐 들른 적은 있어도, 남자가 그를 보기 위해 병원으로 찾아온 것은 아마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겨우 두어 번 잠깐 얼굴을 본 것으로 자신의 지인임을 기억하고 있었던 간호사가 대단하다…고 생각할 뻔했지만, 사실 스치듯 한 번 봤어도 잊기 어려운 외모이기는 했다.
여하튼 연락을 취해 약속을 잡는 절차를 무시해야만 했을 정도로 이 견고한 남자를 다급하게 만든 일이 무엇일지, 그는 즐거움으로 입가가 자꾸만 실룩거렸다. “뭐야, 건드리면 반응을 해.”
방의 한쪽 벽면에 붙박이로 설치된 캐비닛에 가운을 벗어 넣은 뒤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못 박혀 있었던 남자의 등이 그제야 목소리를 냈다.
“너는….”
“…….”
“알파로서 한 오메가에게 얽매여 본 적이 있나?”
“뭐?”
“없겠지. 한 오메가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 본 적이 없을 테니까.”
남자의 목소리는 그를 비난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기대할 수 없는 곳에서 희망을 찾는 사람처럼 메말라 있었다. 그가 예상한 남자의 다급한 방문의 이유는 이런 방향이 아니었다.
“뭔 소리 하는 건데. 이게 본론이야, 서론이야, 뭐야?”
그는 팔짱을 끼고 한쪽 어깨를 캐비닛에 기대며 미간을 찌푸렸다. 남자는 딱히 감상할 것도 없이 평범한 창밖의 풍경에 끈기 있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너의 판단이나 선택, 의지보다 상대의 페로몬이 압도적으로 우선해서 작용하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너 자신으로 있을 수 없고, 그 오메가의 알파로서만 존재하고 작용하게 되는 그런 경험에… 노출돼 본 적이… 없겠지.”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사납게 눈을 구기며 걸어가 단단한 어깨를 낚아챘다.
“이현 씨한테 그새 질렸냐?”
마주한 남자의 얼굴은 그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감안해 주고 싶지가 않았다.
“진심인 거 아니었나? 위험하니 어쩌니 하는 건 좋은 핑계고, 네 집에 앉혀 놓고 싸고돌고 싶을 정도로 이현 씨한테 빠진 줄 알았더니…. 천하의 라우 위쿤이 어디 웬 오메가한테 코 꿰여서 페로몬이 어쩌니 하고 앉아 있는 거냐? 이 미친….”
그를 향한 남자의 눈이 경멸로 비틀렸다. 일그러진 입술이 그의 흥분을 불식시켰다.
“그 서이현 얘기야.”
그는 남자의 어깨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말이야, 그게.”
남자가 그의 손목을 잡아 자신의 어깨에서 끌어 내리며 빠르게 말했다.
“짧게 끝날 얘기 아니야. 네 집에서 봐.”
소모전을 벌일 기력이나 시간조차 없다는 듯, 초조함과 피로감이 응집된 목소리였다. 혹시 이후에 선약이 있지는 않은지, 남자는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그 어떤 선약이 있었더라도 우선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분위기였다.
각자의 차로 그의 집을 향해 움직였다. 운전하는 내내 그는 남자의 말을 곱씹어 봤지만, 집에 도착한 이후 듣게 될 내용을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남자가 연락도 없이 병원으로 불쑥 자신을 찾아올 정도의 사정이라면, 최근에는 이현과 관련된 일밖에는 없을 거라는, 거기까지의 예상은 적중했지만, 진료실에서 남자가 꺼낸 얘기는 전부 수수께끼였다.
알파로서 한 오메가에게 얽매여 본 적이 있는가.
생식에 대한 알파와 오메가의 본능을 누구보다 차갑게 경멸하는,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페로몬 조절이 가능한 남자에게서 평생 들을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질문이었다. 그 질문이 베타인 서이현과 관련된 것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껏 본 적 없었던 남자의 심각해 보이는 분위기가 마음에 걸렸다. 별것도 아닌 일로 무게 잡을 위인이 아니었다. 열 살 어린 상대에게 빠져 어울리지도 않는 새콤달콤한 고민이나 하고 있을 거라던 두 번째 예상은 거하게 빗나간 셈이었다.
남자는 먼저 도착해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코너를 돌자 현관 옆 벽에 망령처럼 멍하니 기대어 서 있었다. 맨정신이 분명한데도 술에 취해 흐트러진 것처럼 보이는 모습에 그는 평소처럼 농담을 건넬 기분도 나지 않았다. 쯧, 혀를 차며 패스워드를 눌러 문을 열었다.
이번 봄에 이사한 뒤로 남자의 방문은 두 번째였다. 서로에게 있어 가장 가깝게 지내는 친구라고 할 수 있었지만, 남자가 그의 집으로 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살림과 생활의 흔적이 거의 없는, 견본주택처럼 황량한 주방 앞 식탁에 남자를 앉게 했다. 술을 마실지 물었고,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를 피워도 되는지 물었다.
독한 술이 필요해 보이는 몰골이라 위스키와 얼음을 내주었다. 술 앞에서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남자는 재떨이 대용으로 접시 하나를 내주자 기다렸다는 듯 재킷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 담배가 반 정도 타들어 가고, 온더록스잔에 한 잔씩 따른 위스키가 절반이 비워질 때까지도 남자는 말이 없었다.
“말을 해, 미친놈아. 사람이라도 죽이고 왔냐?”
답답함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남자는 바싹 마른 웃음을 흘리며 식탁 위에 힘없이 놓아두었던 손을 천천히 그러쥐었다 풀기를 반복했다. 사람을 죽인 것과 별로 다를 것도 없을지 모르겠다는 그런 웃음 같아서, 그는 온더록스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페로몬 같은 건.”
인간다운 감정을 전부 연소시켜 내면의 틀만 남은 것 같은 목소리였다.
“진화가 덜 된 짐승이라는 증거 같아서… 처음 발현이 시작되고 그것의 작용을 느꼈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 육체가 나의 통제 아래 있는 게 아닌… 육체에서 벌어지는 작용에 의해 내가 좌지우지된다는 게 수치스럽고 굴욕적이었어.”
그 역시 물론 소년 시절의 남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남자는 유별났었다. 동양 최고의 재력가들의 알파·오메가 자녀들이 모인 H.M.I.S. 내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재력과 명예, 정통성을 모두 갖춘 가문의 출신이자, 발현과 동시에 골든 알파로 성장할 가능성 90퍼센트 이상을 판정받았던 남자는, 알파로서의 스스로에게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었지만, 또래의 다른 알파들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골든이 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런 그를 두고 골든이 아닌 알파·오메가를 무시하는 놈이라며 견제하는 세력들도 있었지만, 당시의 남자는 하찮은 또래들의 평판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었다.
굳이 말하자면 남자는, 골든 알파가 되고자 한 것이 아니라 페로몬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그는 그 정도로는 남자를 이해하고 있는, 몇 안 되는 학생 시절부터의 친구 중 하나였다.
“알파와 오메가 사이의 인력이니 오메가에 대한 알파의 보호·귀속 본능이니… 생식을 최우선 목적으로 두고 살아가는 짐승 같아서… 페로몬에 관련된 건 전부 끔찍했어.”
페로몬을 상대로 그렇게까지 완벽하려고 애쓰는 남자를, 그 역시도 이해하지 못했던 시기가 있었다. 고급 억제제의 값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아닌 이상, 알파나 오메가, 그것도 골든의 자질을 타고난 알파나 오메가로 태어난 것은 오히려 유리한 조건이었다.
자신이 불리한 입장이라면 모를까, 알파로서 정점에 위치한 남자가 왜 그렇게까지 주어진 환경을 거부하는 것인지, 참 피곤하게 산다며 고개를 젓고는 했었다.
하지만 깊은 내면에서는 남자의 그런 태도에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자신은 어떤 것에도 그 정도의 열의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무언가를 그렇게까지 원해 본 적도, 미워해 본 적도, 능력을 최대치로 발휘해 본 적도 없었다.
골든 알파로의 성장 가능성을 40퍼센트로 판정받았었고, 40퍼센트라면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기대해 볼 수 있는 수치였지만, 그는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했었다.
결국 지금의 그는 약간의 페로몬 조절이 가능한, 골든도 아니고, 그렇다고 억제제에 완전히 의지해야만 하는 레귤러(Regular) 알파도 아닌 어중간한 선에 멈춰 있었다.
뭐든지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습관이 밴 배경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짐작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나이가 돼서 환경을 탓하며 징징거릴 수는 없었다. 자신을 뿌리부터 점검해 나갈 의욕과 에너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비장한 의무라도 짊어진 것처럼 페로몬과 싸워 나가는 남자의 절제를 불필요한 저항이라고 말하면서도, 실은 자신의 삶과 대비되는 그 치열함을 높이 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페로몬이 불러일으키는 인력이나 흥미, 성욕… 전부 역겹고 불쾌할 뿐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어떤 누구의 페로몬도 유혹적이라고 느껴 본 적 없었지만….”
식탁 위의 한 지점을 내려다보며 느리게 말을 이어 가고 있었던 남자는 그저 흰색일 뿐인 식탁 위에서 놀라운 것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국 나 역시 알파일 뿐이었던 거지. 적어도… 한 사람에게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본 남자의 피로해 보이는 얼굴에서 푸른 두 눈만이 동물적인 허기를 띠고 번뜩이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처럼 허탈해 보였던 좀 전까지의 무기력한 모습이 거짓인 것 같은 광채였다.
“알아듣게 얘기해. 그게 이현 씨하고 무슨 상관인데.”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남자는 새로운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불을 붙였다.
뺨이 홀쭉하게 파일 정도로 담배를 깊이 빨아들인 남자가 연기를 길게 뱉으며 물었다.
“……고스트(Ghost)에 대해서 혹시 들어본 적 있나?”
담배 연기 사이로 마주하는 남자의 눈은 그사이 색을 달리해, 텅 비어 있는 것 같았다. 푸른빛이 더 강해 보였던 좀 전과 달리 잿빛 우울이 강조된 이 눈이야말로 유령 같다고 생각하며 그는 곧 시작될 본론을 기다렸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오랜 시간 함께 자라 온 친구가 낯선 존재가 되어 자신의 집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친구의 새로운 정체성을 채 받아들이기도 전에, 남자가 저지른 행위에 대한 충격이 앞선 충격을 완전히 뒤덮어 버렸다.
“농담이지?”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의 충격이었기에 오히려 그렇게 되묻는 그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의심도 섞여 있지 않았다. 차라리 명랑할 정도였다. 그러나 남자의 굳은 표정은 농담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
“고스트? 야… 그건 너무 멀리 간 거 아니냐? 고스트가 언제 적 고스트야? 위키피디아에서도 세 줄 정도로 다루고 넘어갈 정도로 이젠 씨가 마른, 아니, 과거에도 진짜 존재했는지 아닌지 검증조차 이루어질 수 없는 유럽 왕실의 구전 속에나 등장하는 게 고스트인데…. 고스트라는 호칭 자체를 알고 있는 알파·오메가도 이젠 별로 없을걸? 라우 위쿤, 너 굳이 그런 전설까지 끌어다 오지 않아도 충분히 특별하잖아.”
“…….”
맞은편에서 이쪽을 응시하는 남자의 눈은 동요가 없었다. 안다. 알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지어내 떠들고 있을 인물이 아니었다.
“지금 한 얘기가 만약 농담이 아니라 전부 진짜라면… 넌 완전 돌은 새끼인 거고.”
목소리의 톤을 바꿔 싸늘하게 내뱉은 그는 얼음도 채우지 않은 채 위스키를 따르고, 찬물이라도 마시는 것처럼 들이켠 뒤 큰 소리가 나도록 식탁에 내려놓고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그래, 네가 고스트야. 권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처럼, 훈련된 어떤 조절 감각을 통해 노팅 시에 화학 작용을 일으켜서 베타를 오메가로 만들 수 있다고 쳐. 어차피 알파·오메가의 페로몬 작용 원리도 과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판에 그런 변이 작용은 불가능하다며 우기는 것도 우스운 일이겠지.”
말을 하면 할수록 머리는 차갑게 식어 가는데, 그와는 별개로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대면한 상황에 대해 자신에게 화를 낼 권리가 있는지, 그것을 검열해 볼 여유조차도 없었다.
“근데, 너 훈련했다며. 어릴 때 2년 동안 미국에 가 있었던 것도 그거 때문이라며. 왜 이현 씨한테는 그 안전장치를 풀었던 건데?”
비아냥거리며 몰아붙이자, 즉답이 이어졌다.
“실패한 적 없었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어떤 누구에게도. 체인징까지 갈 것도 없이 노팅의 조절에도 실패한 적 없었어. 노팅 상태에서만 체인징을 걸 수 있으니, 노팅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체인징을 시도하게 될 염려조차도 없었지.”
“노팅도 체인징도… 조절하지 못했잖아, 서이현한테는!”
소리친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이럴 땐 담배를 피울 줄 알았으면 좋겠다. 어릴 때 하지 말라는 짓은 골고루 다 하고 다니면서도 왠지 모를 고집에 담배에만은 손을 대지 않았었는데, 살다 보면 독한 술만큼 독한 담배로 자신을 마비시키고 더럽히고 해롭게 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
“실수라고 생각했어. 잠시 뭔가 잘못됐던 거라고.”
시선을 피한 채 남자는 변명하듯 말했고, 그는 주먹으로 식탁 위를 내리치며 언성을 높였다.
“그걸 확인하려고 두 번, 세 번 또 잤다는 거냐? 씨발, 체인징인지 뭔지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
식탁 위의 한 지점을 내려다보고 있던 남자의 시선이 날카롭게 그를 향했다.
“그걸 확인하기 위한 이유만으로 내가 누군가와 잘 것 같아? 타인에게도 페로몬에도 그 정도로 호기심이 넘치지 않아.”
“지금까진 네 본질에 대해서까진 아니어도 네 패턴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네 얘길 들으니까 네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게 돼서 말이다.”
“…….”
거기에 대해 남자는 입을 다물고 술을 들이켰다. 변명의 여지가 없음을 수긍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납득, 적어도 화를 가라앉힐 수 있을 정도만이라도 그가 변명을 해 줬으면 했다.
그게 없으면 이야기를 이어 나갈 수 없는 것처럼, 새로운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나서야 남자는 이전보다 조금은 차분해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그 무렵엔 그저 느낌이 야릇하다는 정도였어. 페로몬이라고 확신할 만큼 정확하게 감지되는 건 없었지. 페로몬을 억제하고 있는 골든 오메가인 건 아닐까, 그때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나면서 두고 보니 그것도 아니었어. 어느 순간부터는 단지 야릇한 느낌만이 아니라 진짜 페로몬을 풍기기 시작했지. 게다가… 자신이 내보내는 페로몬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내가 개방하는 페로몬을 분명하게 감지하면서도 그게 페로몬이라는 걸 전혀 의식 못 하더라.”
“페로몬을 개방했다고? 네가?”
“…….”
이야기를 들을수록 점점 더 혼란 속으로 내몰리는 기분이었다. 남자는 대답을 보류했다. 대신 이야기를 이어 가는 동안 피우기를 멈추고 있었다는 것을 문득 의식하기라도 한 듯 담배를 입술로 가져가 깊숙이 빨아들였다. 그리고 무너지듯 말했다.
“그래, 몇 번이나.”
이마와 얼굴을 짓이기듯 문지르는 손에 들린 담배가 머리카락에 불을 옮겨 붙일 것처럼 위태로웠다.
잠시 기억을 더듬어 정리한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이건 말이 안 돼. 이현 씨는 내 페로몬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었어.”
“…….”
남자의 사나운 눈이 말뜻을 묻고 있었지만, 그는 겁을 먹어 줄 생각이 없었다.
“왜? 서이현에게 페로몬을 개방할 수 있는 게 너뿐인 줄 알았어? 세상에 알파가 너 하나는 아니지.”
루프탑 바에서 이현과 단둘이 만나, 알파와 오메가, 페로몬에 대한 이현의 질문에 답을 해 줬던 저녁을 떠올리며 그는 술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어쩌면 그때 이현은 남자와의 관계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기운을 느끼고 그런 질문을 했었는지도 모른다는, 뒤늦은 생각이 따라붙었다. 당시에는 그저 라우 위쿤에게 끌리면서 자연히 갖게 된 알파에 대한 궁금증이라고만 생각했었지만….
“개방할 수 있는 건 나뿐이 아니어도, 그에게 작용할 수 있는 페로몬을 가진 건… 나뿐이라는 건가?”
생각에 잠긴 그의 얼굴에서 결론을 읽어 내고 그렇게 이죽거리는 남자의 얼굴은… 기뻐 보였다. 억제하려 하고 있기는 했지만, 이현에게 실제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자신의 페로몬뿐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한 그는 독점의 기쁨을 완전히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 점점 알 수 없게 된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혀를 차듯 웃었다.
“그러게. 불행하게도 말이야. 그때 만약 내 페로몬에 반응을 보여서 이현 씨와 나 사이에 뭔가가 일어났다면, 너 같은 놈한테 잘못 걸려서 신세 망칠 일도 없었을 텐데.”
차가운 푸른 시선이 날카롭게 그를 찔러 왔다.
“자극하는 말, 지금은 자제했으면 좋겠는데?”
소년 시절에도 본 적 없었던, 불안정한 위기감과 공격성으로 가득한 남자의 눈에서 시선을 돌리며 그는 술잔을 찾았다. 남자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서이현이 스스로를 베타라고 생각하든, 아니면 희귀한 변이 형체든, 어차피 나와 상관없는 일이고, 그런 것에 호기심을 가질 만큼 남에게 관심이 많은 성격도 아니야.”
“…….”
“하지만 무시할 수가 없었어. 행동 하나하나를 눈으로 좇고 있었고, 궁금했고, 알고 싶었고, 들춰 보고 싶어서… 다가가서 건드려 보지 않고는…. 애초에 고스트 따위가 아니었다면….”
거기까지 말한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한번 담배를 빨아들였다. 두세 모금밖에 피우지 않았는데도, 저 혼자 타들어 간 담배는 어느새 짤막해져 있었다.
“이해가 안 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너 그럼… 언제부터 이현 씨 페로몬을 감지했던 건데.”
남자가 짧게 코웃음을 치며 담배를 비벼 껐다.
“잊었나 본데, 난 처음부터 서이현을 오메가라고 했어.”
“근데 오메가도 아니라며. 너 때문에 지금 오메가로 변하고 있다며. 그런데 그 전에 어떻게 이현 씨 페로몬을 네가 느꼈다는 건데? 그럼 서이현은 뭐야? 뭐인 건데?”
남자는 식탁 위에 내려놓은 손을 가볍게 그러쥐었다.
“나도 그에게… 몇 번이나 그렇게 물었어. 너는 뭐냐고. 아니, 물었다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웠지만…. 그 자신도 알지 못해. 지금도 베타라고만 알고 있지. 보스턴에 있는, 어릴 때부터 날 봐주셨던 교수님도 그런 존재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는 게 현재 상황이야.”
술잔을 쥔 남자는 손안에서 천천히 잔을 돌리며 아랫입술을 강하게 물었다 놓았다.
“하지만 이제, 서이현이 뭐든… 상관없어. 그걸 밝혀내자고 여기까지 온 것도 아니고.”
뇌까리듯 빠르게 말하고는 잔 속에 남아 있는 술을 단번에 모두 삼켜 버렸다. 그런 남자를 바라보며 그는 혀를 찼다.
“일을 여기까지 끌고 와서… 상관이 있고 없고를… 네가 판단할 게 아니지.”
“…….”
“성인이 된 후에 발현이 오면 몸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야. 남성이 오메가로 발현하거나, 여성이 알파로 발현할 경우엔 심리적 충격이 더 심해서… 끝까지 적응하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람도 있어. 알고 있겠지만 드문 이야기도 아니야. 그런데… 자기 몸이 스스로 발현한 것도 아니고… 타인에 의해서….”
그는 차마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친구의 비밀과 그 친구가 벌인 사건의 황당함을 어느 정도 현실적으로 인식하고 나니, 이번엔 이현에게 사실을 알릴 일이 막막했다. 남자가 자신을 찾아온 것도 결국은 그것 때문일 것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지금까지도 내내 유지해 왔던 비밀을 새삼스레 공유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아. 그렇게… 나약한 사람도 아니고.”
남자가 또다시 담뱃갑에서 새로운 담배를 꺼내며 말했다.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니면, 견디고 이겨 낼 수 있는 정신을 가진 사람이면… 그런 사람한테는 그런… 그런 짓을 해도 되냐?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 절대 너다운 짓이 아니야. 페로몬 어쩌고를 이 세상에서 제일 혐오하던 라우 위쿤은 어디 간 건데?”
“알파로서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없는 넌 이해할 수 없어.”
그는 자신이 들은 말을 의심했다. 갑작스럽게 브레이크가 걸려 무게 중심이 앞으로 쏠린 것처럼 앞으로 탁 걸려 넘어질 것 같았다. 오늘 남자에게 들은 다른 말들만큼이나 충격을 가하는 단어 선택이었다.
“…….”
“…….”
그가 입을 벌린 채 말을 잃었고, 남자 역시 자신이 무의식중에 고른 말, 사랑이라는 단어를 의식하고는 어떤 이유에서든 눈을 피했다. 그러나 뱉은 말을 수정하거나 취소하려 하지 않았다.
눈치 없는 불청객처럼 남자가 식탁 위에 꺼내 놓은 두 개의 핸드폰 중 하나가 진동으로 몸을 떨었다. 두 사람 모두 그것을 힐긋 내려다봤고, 남자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잠깐 좀.”
통화 내용을 들을 수 없는 먼 곳까지 이동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앉은 자리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소파의 뒤쪽까지 걸어간 뒤에야 남자는 통화를 연결했다.
“응, 나예요.”
바로 직전까지 머리카락이라도 쥐어뜯을 것 같은 표정으로 좌절과 혼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던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온한 목소리에, 반대로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남자의 등을 노려보았다.
“아니, 괜찮아요. 얘기해요. 편한 분위기라 잠깐 빠져나왔어. …난 여기서 먹고 있지. 저녁 먹었어요? 음… 남기지는 않았고? …와, 잘했네. 바꾼 식단이 효과가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어… 나는 아마 좀 더 걸릴 것 같은데. …작업 중일 수도 있으니까 출발하면서 메시지 남길게요.”
전화기 저편의 상대, 이현에게는 고객과의 저녁 약속 자리라고 둘러댄 모양이었다. 웃음기까지 섞인 목소리로 남자는 막힘없이 잘도 떠들어 댔다.
기가 막혔다. 그 통화는 어디를 어떻게 들어 봐도 한창 푹 빠져 있는 연인을 대하는 분위기였다. 라우 위쿤의 연애가 이런 형태일 거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오늘 저녁 몇 시간 동안 받은 충격으로 한꺼번에 10년은 나이를 먹은 기분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고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남은 잔을 단번에 비워 냈다.
통화를 마치고 식탁으로 돌아오는 남자는 이 자리를 떠나기 전과 똑같은, 음침하고 어두운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앉자마자 위스키로 입술을 적신 남자는 도리어 말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그의 시선의 의미를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하, 이중인격이세요?”
“일부러 걱정 끼칠 필요 없잖아.”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게 누군데, 네가 지금 이현 씨 걱정한다는 소리가 나오냐?”
“…….”
“지금 모르게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이냐고. 남의 인생을 멋대로 가지고 놀고….”
그의 비난에 남자는 위나 심장에 실질적인 통증이라도 느끼는 사람처럼 상체를 구부정하게 숙이며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그렇게…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마.”
“그럼 어떻게 얘기해 줄까?”
이런 식의 비난은 감정적 소모밖에 가져오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 역시 이런 방법 외에 이 순간의 충격을 감당하고 표출할 건전한 출구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멈출 수가 없었다.
입술을 다문 채 길게, 천천히 숨을 내쉰 남자는 새 담배를 입술에 물었다 다시 손으로 옮겨 쥐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해도 되는 말인지 아닌지를 고르는 것처럼 한참을 망설였다.
“우리, 서로에게 진지해.”
날숨에 섞어 얘기한 문장은 한숨 같았다.
남자가 그렇게 비장하게 선언할 필요도 없이, 그 역시 그렇게 알고 있었다. 이현에 대한 남자의 남다른 관심은 아주 초반부터 감지하고 있었고, 이현이라면 스스로를 고립시켜 온 남자의 벽을 허물고 열중을 끌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고 예상했었다. 그 진지함이 이런 쪽으로 흘러갈 줄은 몰랐을 뿐.
“한쪽이 다른 한쪽 모르게 몸을 바꿔 놓는 게 진지함인가? 그래 놓고 한참 뒤에 내 페로몬이 알파와 오메가로서 너와 결합하길 원했다며 구질구질한 변명을 늘어놓는 거? 네 그 잘나신 알파성과 페로몬이 서이현을 원했다고?”
“…….”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이현의 가족도 오랜 친구도 아니었지만, 남자는 미간을 좁히고 입매를 굳히면서도 감정적인 비난에 맞서지 않았다. 그의 비난을 통해서라도 자신을 벌하고 싶은 사람처럼 입을 다물고 견뎠다.
평소와 다르게 약해진 모습에 더 약이 오르고 화가 치밀어 그는 더 독하게 남자를 도발하고 나섰다.
“왜? 아예 100퍼센트 오메가로 만들어서 임신까지 된 다음에야 말하지 그랬냐? 어?”
“…….”
남자는 어깨 쪽으로 턱을 돌려 시선을 더 옆으로 기울이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남자의 반응이 의미하는 바를 감지한 그는 혀를 차며 묵직한 갈색 술병의 목을 꽉 붙들었다.
“생각 안 해 본 게 아닌가 보네. 이거 진짜 미쳤네.”
그리고 술병을 기울여 빈 잔을 채워 서너 모금을 삼켰다. 희석시키지 않은 위스키가 식도를 따라 이동하는 뜨거움조차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는 건데? 지금 이 얘기 나한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나?”
“…….”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도 자신이 고스트라는 사실을 침묵하고 살아온 남자였다. 이제 와서 그것을 자백하기 위해, ‘진지한 상대’를 오메가로 변화시키고 있는 죄책감을 대화로 덜어내 보기 위해 자신을 찾아왔을 리가 없었다.
담배가 필터 앞까지 바짝 타들어 가도록 남자는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술을 두 잔이나 더 비웠지만 눈동자 가장자리가 약간 충혈됐을 뿐 술의 힘을 빌리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이젠 더 빨아도 연기조차 나지 않을 것 같은 담배를 비벼 끄면서, 남자는 바짝 조인 목소리로 조급하게 말했다.
“체인징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해서… 그 사람, 지금 몸이 좀 불편해.”
“그 사람…?”
하. 더는 할 말도 없어서 그는 그저 자꾸 고개만 가로저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 누군가와의 관계를 순순히 인정하고, 그것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남자의 모습이 낯설기만 했다. 육체관계뿐인 상대들에 대해서도 이렇다 저렇다 입에 담는 법이 없었으니까.
“보통은 식욕이 부진하거나, 속이 쓰리거나, 복부에 불쾌감을 느끼고… 사람에 따라서는 오심이나 구토를 느끼는 경우도 있는데… 몇 주 전부터 그런 증상이 시작됐는지 음식을 입에 잘 대지 않아.”
“몸 내부가 변하고 있는데 당연히 속이 안 좋겠지!”
“정확한 건 아니지만 대략 10~20퍼센트 정도 변화했을 거야. 본인은 가벼운 위염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데…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니 병원에 가 보겠다고….”
힘을 잃고 늘어지는 남자의 목소리에 그는 앉은 상태에서 상체를 뒤로 멀리 물렸다.
“너… 이… 아니, 아니겠지.”
지쳐 보이는 남자의 푸른 눈이 그를 향해 호소의 빛을 보내왔다. 그는 강하게 도리질 치며 남자의 애원을 거부했다.
“설마 너… 이 미친 짓거리에 나도 가담하라는 거냐?”
생기를 잃은 탈색된 잿빛 같았던 남자의 눈에 순간적으로 푸른 광채가 일었다.
“넌 처음부터 내가 그에게 흥미를 갖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걸 알고 계속 부추겼고.”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인간 특유의 절박함이 남자에게서 이젠 공격력을 끌어내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 식탁 앞에 앉고 난 이후 남자가 제정신으로 보이지는 않았었다.
“그와 내가 잘되길 바랐던 거 아닌가? 사랑을 모르던 비참한 놈이 진실한 감정에 눈을 뜨게 되는 동화 같은 엔딩을 바라면서 재미있어했던 거 아니냐고.”
“그래, 내가 좀 재미있어했다. 그게 뭐 그렇게 대수냐? 내가 부추겼기 때문에 네 말대로 니들이 진지해진 거고, 내가 가만히 있었으면 일어날 일이 안 일어났어?”
남는 게 없는 말싸움에 불과함을 깨달았는지, 남자는 커다란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적의를 거둬들였다. 푸른 눈과 어울리지 않는 새까만 머리카락을 마구 흩트리던 남자는 식탁에 팔꿈치를 괴고 쓸어 넘긴 머리카락을 정수리에서 움켜쥐었다.
“도와줘라. 너밖에는… 부탁할 데가 없다.”
“네가 이현 씨한테 다 얘기해. 그러면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어지는 일이고,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언젠가는 해야 하는 일이야.”
가장 이성적인, 그래서 어쩌면 가장 무책임할 수 있는 답변에 남자는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던 손을 놓으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는 심각한 중독자처럼 다시 또 담배를 찾았다. 이렇게까지 연거푸 담배를 피우는 모습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정작 불을 붙인 뒤에는 필터를 입술로 가져가는 횟수보다 손에 쥐고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무엇이든 그저 매달릴 대상이 필요할 뿐인 듯했다.
손에 들린 담배에서 가늘게 피어오르는 푸르스름한 연기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입술은 건조하게 바싹 말라 있었다.
“말해야 한다는 거… 알고 있었어. 나중에 수습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니까 멈춰야 한다고.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를 조금만 더 오메가로 만들기를 원하는 내가 있어. 서로가 페로몬으로 더 깊이 엮이게 되면, 그럼 나를 거부하기가 더 어려워질 거라고. 사실을 자백해도 나를 받아 줄 확률 역시 그만큼 높아질 거라고. 그런 비겁한… 페로몬에 의지한… 이전의 내가 가장 경멸했던 방식을 통해 그를 곁에 두려 하는 내가 있고, 그 목소리의 달콤함을 무시하지 못해서… 여기까지 온 거야.”
생각났다는 듯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아들인 그는 길어진 재를 털어 내며 말을 이었다.
“서이현이 실제로 어떤 존재든 페로몬을 방출해 내 페로몬을 자극한다는 점에서는 나보다 더 상위의 골든 오메가인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 페로몬에 저항할 수도 없고 내 페로몬을 컨트롤할 수도 없으니까. 그런 강도의 페로몬에 노출돼 본 적 없는 너는 이해 못 해. 페로몬이 일으키는 실제적 효과를 베타에게 납득시키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할 거라고 본다. 나 역시 과거에 이론으로 접했을 때와 실제 체험했을 때의 차이가 엄청나다고 느꼈으니까. 오래 교류를 나눈 오메가가 아님에도… 이미 그에게 강하게 예속된 감각과 그를 중심으로 내 삶 전체가 재배열되고 모든 에너지가 그를 위해 소비되길 원하는 충동은… 장담하는데, 그걸 거부할 수 있는 알파는 없어.”
자신이 하지 못했다면 어떤 알파도 할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담긴 목소리였다. 남자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는 가장 우수한 알파였으니까.
하지만 자신 역시 알파로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바로 납득할 수가 없었다. 술잔을 쥔 손에 힘을 주며 고개를 저었다.
“너에게서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뜨려서라도, 넌 그 상황 자체에서 이현 씨를 분리했어야 해.”
“…….”
“결국 넌, 그가 오메가가 되기를 거부하고 너를 밀어낼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시간을 끌면서 상황을 악화시켜 온 것뿐이야.”
거기에 대해 남자는 더 변명하려 하지 않았다. 꺼칠해진 얼굴과 깊어진 눈으로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너를 앞에 두고 고해성사를 하려는 것도, 이해를 구하려는 것도 아니야. 그의 충격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적어도… 그가 나를 통해서 이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도록, 최악의 방식으로 알게 되는 일만큼은 피할 수 있게… 도와 달라는 부탁을 하려고 온 거야.”
중요한 얘기들, 꼭 알아야만 하는 얘기들은 이미 다 쏟아져 나온 뒤였다. 그럼에도 그는 남자의 마지막 발언에 답을 할 수 없었다. 아직도 여전히 무수한 질문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이 상황과 분리된, 철저한 제삼자인 나에게도 이만큼 충격적이라면… 이현에게는 어떨 것인가.
가죽 채찍이 등줄기를 호되게 후려친 듯 상체가 흠칫 떨렸다. 무의식적으로 맞은편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푸른 눈 속에서도 불안이 일렁거렸다. 그러나 아마도 남자가 직접 맛보고 있을 공포는 비교할 수 없이 더 진할 것이다. 그간 느껴 왔을 이현과의 관계의 깊은 결속만큼, 이현을 원하는 강렬함의 농도만큼, 공포는 남자를 틈 없이 압박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어느덧 술병은 거의 비워진 상태였다.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을 마셨음에도 취기로 인한 정신의 느슨함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극도의 예민함이 불러온 진한 피로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돌아가. 오늘은 해 줄 말이 없다.”
배웅을 하려는 의지도 없었고, 저쪽에서도 배웅을 받으려는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와 핸드폰을 손에 쥔 남자는 곧장 식탁 앞을 떠나지 않고, 돌아섰던 몸을 반쯤 되돌렸다. 남자의 커다란 인영이 새하얀 식탁 위를 뒤덮었다.
“베타와 알파. 나 같은 놈에게는 그게 가장 이상적인 관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어. 굳이 페로몬까지 끌어오지 않아도 그는… 나를 흔들고 자극하고 매료시켰으니까. 하지만… 안 되겠더라. 나를 원하는 그의 페로몬에 내 페로몬으로 응할 때, 정신과 육체와 페로몬까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그와 결속하고 교감하는 기쁨에 기꺼이 전복돼 버리지. 알파로 태어나 그런 상대를 만나 보지 못한 놈들이… 안됐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남자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턱을 문지르며 말끝을 흐렸다. 목소리는 오랜 시간 고함을 지른 것처럼 갈라져 있었다. 원래도 허스키한 목소리가 더욱 거칠었다. 술 때문인지, 감정 때문인지, 핏줄이 터진 눈동자 역시 거칠기만 했다. 사랑을 털어놓는 남자의 얼굴은 그 사랑의 결실을 보기도 전에 모조리 빼앗겨 버린 사람 같았다.
“좀 전의 얘기는 그냥… 이번 부탁과는 별개로 친구인 너에게 하는 근황 보고쯤으로 들어 줘라.”
친구로서 하는 보고 좋아하네. 그만큼 절실한 상대이니 제발 부탁을 들어 달라는, 결국은 간청을 빙자한 협박이면서.
그는 남자를 외면한 채 술잔을 기울였고, 남자는 중간중간 숨을 골라 가며 버석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카고 다녀와서… 내가 다 털어놓을게. 그때까지만… 시간 좀 벌 수 있게… 도와줘라, 제발.”
“…….”
“간다.”
입매를 비틀며 술을 마셨을 뿐, 그는 인사에 답하지 않았다.
현관으로 이어진 복도를 향해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불같은 감정이 일었다. 분노와도 닮았고, 경멸과도 맞닿아 있었지만… 아마도 가장 닮은 감정을 찾자면 질투일 것 같았다.
무엇을 향한,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막연하다. 그저 열정을 다해 덤벼들어 빼앗고 싶을 정도로 뜨거운 질투가 일었다.
■ ■ ■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인우 형의 방문은 반가웠다.
매주 목요일은 오전까지만 진료를 보는 날이라 근처의 단골 주류 매장에 들른 김에 연락해 봤다는 형의 전화를 받았을 때, 순간적으로 조금 망설이기는 했지만 흔쾌히 형의 방문을 받아들였다.
현재의 생활에 아무런 불만은 없었지만, 단조롭게 반복되는 안정된 멜로디에 합류한 이색적인 화음처럼 손님의 방문은 기분 전환이 되었다. 시카고 출장과 하반기 합동 전시회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이번 주에는 유니 누나와 주한이 형에게서도 지금껏 아무 연락이 없었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근데, 진짜 좀 섭섭하다.”
볼드한 와인잔에서 입술을 떼고 겹쳐 꼰 다리 위에서 잔을 돌리며 형이 말했다.
풍부하면서도 깊이감 있는 육감적인 인상의 레드 와인과 내가 서툰 솜씨로 접시에 담아 내온 크림치즈 크래커는 형이 가져온 선물이었다. 가져온 와인과 어울리는 안주가 아니어서 미안하다며 형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었지만, 와인 맛도 아직 잘 모르는 내가 그것과 어울리는 안주를 따질 리가 만무했다.
손님인 형에게 내준 소파의 맞은편에 끌어다 놓은 작업용 의자에 앉아 있던 나는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으며 형을 건너다봤다.
“이 집으로 들어오고 나서 이현 씨, 나하고는 한 번도 안 본 거잖아요.”
“아….”
“누가 못 만나게 하기라도 하는 건가?”
다시 와인잔을 기울여 검붉은 액체를 삼키면서, 형은 약간 짓궂은 투로 얘기했다.
긴 시간 함께 자라 온 자신의 친구라 해도 질투를 느낀다고 그는 그렇게 말했었고, 아마도 그 친구는 인우 형을 말하는 것이었겠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가 나에게 형을 만나지 말라고 한 적은 없었다.
“아…니요. 갑자기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결정되고, 환경이 바뀌고 하면서 정신이 없어서…. 또, 그림에 집중하고 있기도 했고…. 대표님은 외출도 초대도 편하게 하라고 하셨지만….”
길게 이어지는 횡설수설은 형의 헛기침 소리로 중단되었다.
“음… 난 라우 위쿤 때문이라고 한 적 없는데 왜 그 녀석 편을 들어요?”
“…….”
귀가 확 달아오르는 느낌에 고개를 떨어뜨렸고, 형은 웃었다. 나의 서툰 변명을 웃음거리 삼는 조소는 아니었다.
진한 풍미의 크림치즈가 가득한 유난히 고소한 크래커를 하나 집어 베어 문 형은, 허벅지 위에 떨어진 부스러기를 털어 냈다.
“뭐… 아쉬운 사람이 움직여야지 어쩌겠어요. 그 덕에 이렇게 좋은 작품 선점할 수 있는 기회도 잡았으니까, 일단은 그걸로 만족해야지.”
전부터 통화를 할 때마다 형은 주한이 형을 모델로 한 그림을 궁금해했었다. 주변 사람들 모두 주한이 형을 모델로 고른 내 선택을 의외라 생각해 호기심을 보이는 것 같았다.
80퍼센트 정도 완성된 그림을 형에게 보여 주었고, 통화했을 때와는 달리 말을 아끼는 진지한 태도로 오랫동안 천천히 그림을 감상한 형은, 작품이 완성되면 구입하고 싶다는 말로 나를 놀라게 했다.
스케치와 함께 채색 연습도 병행하기는 했었지만, 어쨌든 다시 그리기 시작한 뒤로 첫 번째 완성작이 될 테니 아직은 많이 부족한 수준일 게 분명했다. 당연히 습작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형의 제안은 기쁘면서도 얼떨떨했다.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뒤 잔의 가느다란 부분을 손끝으로 비비며 어렵게 입을 뗐다.
“그 얘기 말인데요, 형…. 아직 판매를 하기엔 너무 부족한 것 같아서….”
“컬렉터인 내가 돈을 지불하고서라도 이현 씨 작품을 소장하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 그걸로 가치는 충분한 것 같은데.”
“말씀은 정말 감사하고 기쁘긴 한데….”
이번에 내 말을 가로막은 건 형의 액션이 아니었다. 주차장과 이어진 복도 쪽의 두꺼운 철문에서 들려온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였다. 와인잔을 막 입술로 가져가던 인우 형은 이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아… 대표님 오셨나 봐요.”
인우 형의 눈매가 미세하게 일그러졌지만, 거기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기도 전에 바깥쪽에서 문이 당겨졌다.
“…….”
문을 연 동시에 안으로 막 들어서려던 그는 눈에 띄게 흠칫 걸음을 멈췄고, 문을 마주 보고 앉아 있던 인우 형은 그를 향해 와인잔을 흔들어 보이며 웃었다. 조금 커진 상태로 딱딱하게 굳은 그의 눈이 형과 나, 테이블 위의 와인과 크래커를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왠지 모를 긴장감에 나도 모르게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연락도 없이.”
그는 내 쪽을 힐끔 보기는 했지만, 형에게 먼저 아는 척을 했다.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연락했어. 이현 씨한테.”
빽빽하게 들어찬 자료들로 불룩해진 서류가방을 인우 형의 옆자리에 무겁게 던져 놓으며 그는 다시 한번 나를 쳐다봤다. 눈매와 입매가 굳어 있었지만, 인우 형 앞에서 평소와 같은 모습을 요구할 수도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왠지 모를 불안감에 좀처럼 다시 자리에 앉을 수가 없었다. 소파에 기대앉아 느긋하게 와인을 마시는 인우 형을 가운데에 두고 그와 내가 삼각형의 두 꼭짓점처럼 마주 서 있었다.
“너야말로 여긴 이현 씨 스튜디오인데, 그렇게 마음대로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오고 그래도 되냐? 집주인이라고 너무 사생활 침해하는 거 아니야?”
“그게 아니라, 제가 그냥… 편하게 다니시라고 했어요. 저 때문에 대표님 계속 정원으로 왔다 갔다 하시는 게 죄송해서….”
형은 이번에는 드러내 놓고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와인을 마시며 잔 너머로 치켜뜬 눈은 연거푸 그에 대한 변명을 자처하는 나를 의아하게 보고 있었다.
“근데 둘 다 왜 서서 그래? 이현 씨, 좀 앉아요. 야 집주인, 네가 앉아야 세입자도 편하게 앉을 거 아니야.”
재킷을 벗어 소파의 등받이에 걸쳐 놓은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형의 옆자리에 앉으며 두통에라도 시달리는 사람처럼 눈썹 주변을 손으로 문질렀다.
“뭐 하러 왔어?”
“이현 씨 보러 왔지. 권주한 누드를 그린다는 재미있는 소문이 자자한데, 아무리 기다려도 불러서 보여 줄 것 같지가 않아서.”
그에게도 잔을 가져다줘야겠다는 생각에 테이블 앞을 지나쳐 계단을 향해 가려는데, 그가 손목을 붙잡았다. 올려다보는 시선이 끈기 없이 메말라 있었다. 늘 나를 쓰다듬듯이 보던 눈과는 완전히 달랐다.
“어디 가요?”
“와인…. 대표님 잔도 갖다 드리려구요.”
와인을 홀짝이는 형의 시선이 그에게 붙잡힌 손목을 곁눈으로 훑고 있었지만, 인우 형이라면 그와 나 사이의, 이전과 달라진 기류에 대해 이미 눈치채고 있을 것 같기는 했다.
“됐어요. 마시지 않을 거니까.”
고개를 숙이고 연신 이마 주변을 문지르면서, 그가 귀찮고 피곤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가 앉으라는 뜻으로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다. 인우 형이 있기 때문에 평소와 달리 딱딱하게 구는 것이 아니라, 명백히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확신했다.
그와는 반대로 의문과 호기심을 가지고 끈적하게 달라붙어 오는 인우 형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아, 저 그림 예약 걸었으니까 내 거다?”
접시 위에서 크래커를 한입 크기로 부서뜨리면서 인우 형이 말했고, 그가 미간을 좁히며 형을 돌아봤다.
“무슨 예약.”
“이현 씨 지금 작업하는 작품, 완성되면 내가 구매하겠다고.”
“얼마가 될 줄 알고?”
그는 어깨를 한 번 들썩이며 혀를 차듯 웃었다.
“나야 팬텀의 소속 작가인 동시에 중요한 고객인데, 설마 터무니없는 가격 책정으로 그동안의 신뢰를 깨 버리기야 하겠어?”
그가 테이블 너머 대각선의 자리에 앉은 나를 잠깐 건너다봤다. 그의 얼굴은 압력을 못 이겨 금이 간 도자기 같았다. 나를 향한 시선을 거둬들이면서 그가 이마를 가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아직 정해진 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야. 구두로라도 예약받을 단계가 아니라고.”
“어쨌든 작가와 갤러리 양측에 구매 의사를 분명하게 밝혔으니까, 판매가 결정되면 내가 1순위라는 것만 확실히 해 달라는 거야.”
접시 위에서 부순 크래커의 남은 조각을 한입에 털어 넣은 인우 형은 작업 시간을 너무 많이 뺏은 것 같다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뻔히 보이는 어색한 분위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었다. 인우 형이 특유의 무심함과 가벼움으로 분위기를 지적해 주기를 이렇게 바란 적이 없었다. 그와 단둘이 남았을 때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 가야 할지, 입이 바싹 마르는 기분에 잔에 남아 있던 와인을 전부 비워 버렸다.
지금 그가 보이는 거친 태도, 실은 더 거칠게 드러내고 싶지만 억누르고 있는 듯한 태도에서 새어 나오는 위압감이 질투 때문이더라도… 이건… 얼마 전 바로 이 스튜디오에서 나를 끌어안고 그간의 질투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종류였다. 뜻대로 풀리지 않는 연애 문제에 난감해하는 미성숙한 소년의 풋풋한 감정이 아니었다.
“이현 씨, 그때 그 그림 기억나요?”
벗어 두었던 재킷을 챙겨 입은 형은 그와 나 사이에 오가는 기류 따위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생긋 웃으며 물었다.
“이사한 집 침실에 걸 만한 작품 추천해 달라고 했을 때 이현 씨가 골라 줬던 내 그림.”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현 씨도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그림 결국 판매 안 했어요. 지금 내 침대 머리맡에 걸려 있는데…. 난 예전엔 내가 그린 그림은 다시 보기가 껄끄러웠거든. 나조차도 거둬들이길 거부한 자아의 찌꺼기를 보는 것 같아서. 근데 그때 이현 씨가 ‘솔직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솔직함’이라고 말해 주고 나서부터는 내 그림이 친근하게 보이더라고.”
테이블을 돌아 나온 형은 앉아 있는 나의 오른쪽 어깨를 짚고 가볍게 주물렀다. 허벅지에 팔꿈치를 괴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고 있던 그가 삐딱하게 고개를 치켜들어 그런 형의 손을 쏘아보았다.
“언제 기회 되면 한번 보러 와요. 이현 씨라면 언제든… 환영이니까.”
나의 뒤쪽으로 이동하면서 양쪽 어깨에 손을 올린 형은 위에서 아래로 가볍게 누르듯 힘을 주었다 손을 뗐다. 입술 앞에서 손을 깍지 낀 그의 시선의 무게를 그대로 받아 내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 쪽으로 걸어가던 형이 몸을 돌려 뒷걸음질 치며 웃었다.
“아 그리고, 진료 예약 잡아 뒀으니까 병원에서 봐요. 날짜하고 시간은 류 대표 통해서 전달할게요.”
선 채로 그와 형을 번갈아 쳐다봤다. 인우 형이 오고 나서 기사님은 일찍 들어가시게 한 후였고, 누가 됐든 주차장 문을 여닫아 줘야 했지만, 그는 움직일 기미가 없어 보였다.
투둑투둑, 갑작스러운 소음에 정원 쪽의 창을 올려다보니 소나기라도 내리는 건지 시작부터 제법 굵은 빗방울이 창으로 덤벼들고 있었다.
“웬 비. 차 밀리기 전에 빨리 가 봐야겠네.”
그와 나를 한 시야에 담으며 천천히 뒷걸음질 치던 형이 삐딱한 웃음과 함께 다시 현관 쪽으로 돌아섰다. 할 수 없이 뒤따라 나서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 했을 때,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그가 나의 어깨를 붙잡았다.
“미안하지만, 위층에서 맥주 좀 갖다줄래요?”
눈으로는 내가 아닌 형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 아래로 내리누르는 듯한, 평소보다 강한 힘에서 책망의 기운을 느꼈다면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일까.
맥주를 가지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배웅을 마친 그는 테이블 앞에 서서 와인병을 쥐고 라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와인을 마신 형이 제대로 대리를 불러서 돌아갔는지 궁금했지만, 직감상 그런 걸 물을 타이밍이 아닌 것 같았다. 걸음의 속도를 늦추며 다가가 초록색 반투명한 맥주병을 주춤주춤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저기… 제가 외출을 한 게 아니라, 형이 집으로 오신 거라서….”
그가 퇴근한 직후에는 서로 한나절 떨어져 있었던 시간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사람들처럼 밀착되어 끊임없이 사소한 스킨십을 나누곤 했었다. 이런 식으로 불안정하게 냉각된 기류 속에서 거리를 유지하기는 처음이었다. 이 낯선 불편함이 역설적으로 그간의 부드러운 친밀감을 부각시키고 있었다.
조용히 와인병을 내려놓은 그가 서너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팔을 쓸며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나를 돌아봤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깨지기 직전의 도자기 같았다. 균열을 파괴로 몰아가지 않기 위해 있는 힘껏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그의 인내가 느껴졌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대표님 퇴근하실 시간이기도 했고….”
“왜 변명을 하죠?”
“그건….”
그건, 그의 기분이 너무 좋지 않아 보여서.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의 질문이 진짜 답변을 원하는 궁금증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것 같았다.
맥주를 가져다준 것에 대해 상투적으로 고맙다고 말하며 그는 뚜껑을 비틀어 단번에 3분의 1을 비워 냈다. 그사이 투둑거리는 것을 넘어 제대로 쏟아지기 시작한 빗소리가 실내에 불규칙한 리듬을 새기고 있었다. 단 몇 분 사이 방은 급격하게 어둑해졌지만 둘 중 누구도 불을 켤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림은… 갤러리와 상의 없이 예약 같은 걸 체결하면 곤란합니다.”
인우 형의 일방적인 의사 표현이었을 뿐 내 쪽에서 그것을 수용하겠다는 표시를 한 적은 없었지만, 지금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그가 기분을 풀고 웃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처음이라 잘 몰랐으니까 이번엔 내가 어떻게든 최인우와 얘기해 보겠지만….”
그는 턱을 치켜들어 맥주병을 급하게 기울였다. 마시는 게 아니라 들이붓는 것처럼.
“서이현 씨 그림을 누구에게 보낼지… 앞으로는 적어도 상의라도 할 수 있게 해 줘요.”
하기 힘든 말을 억지로 뱉는 것처럼 그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그의 저조한 기분이 만약 질투 때문이고, 그 범위에 그림까지도 포함되는 거라면, 형에게 그림을 판매할 의사가 없었다는 걸 얘기하는 게 조금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떤 식으로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할지, 없는 말주변을 쥐어짜며 머리를 굴리는 사이 서류가방 안에서 벨이 울렸다.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시고 병을 내려놓은 그는 핸드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입을 다문 채 코로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연결했다.
“왜 또.”
일과 관련된 전화일 거라 생각했지만, 첫마디는 허물이 없었다. 그는 내 쪽을 힐끔 쳐다보고는 등을 돌려 소파 앞을 벗어났다.
“늘 했던 것 같은 그런 파티야. 우리하고 그쪽하고 같이 만든 초대자 리스트고, 최종 명단도 전부 확인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언론사도 영향력 있고 진지한 곳들로 엄선해서 초청했고. 여기서 하던 거하고 똑같이 하면 돼. 나하고 유니가 계속 붙어 있을 거고, 다를 거 하나도 없어.”
통화 상대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이젠 나의 기분도 급격히 하락하고 있었다.
5분 정도 스튜디오 내를 서성거리며 슈슈 작가를 설득하는 데 애를 먹던 그는 문득 내 쪽으로 짧은 시선을 던지며 목소리를 낮췄다.
“알았어. 30분 내로 도착하니까 가서 얘기해. …뭐? 치즈 케… 하… 알아, 어디 거 말하는 건지. 사 갈 테니까, 사람 불러 놓고 그사이에 잠들어 버리지나 마.”
하락한 기분과 함께 가슴의 온도도 내려가는 것 같았다.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것에만 질투를 느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불평을 드러내는 대화에서도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그들만의 오랜 역사가 느껴졌다.
몰아치듯 일어나는 난폭한 감정은 너무나 낯설어 당혹스러웠다. 귀찮은 척, 곤란한 척하지만, 결국 슈슈의 요구를 다 들어주고 있지 않냐고. 매몰찬 목소리와 표정으로 그를 비난하고 공격하고 싶었다.
슈슈와의 관계가 오래전부터 신경 쓰였었고, 누나를 업어 주는 것 같은 스킨십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에게 자백하기도 했었지만… 이전의 감정들은 이만큼 추하지는 않았었다. 얼굴과 마음 전체가 불에 그을려 오그라들고 구멍 난 비닐처럼 흉측하게 확 일그러지는 것 같은 기분에 손으로 입가를 문지르며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빈 공간 한가운데 멈춰 선 채로 그가 말했다.
“파티도 한다는 얘기는 못 들었다며, 파티도 사진 촬영도 싫다고 난리인데… 다시 원점이네요. 홍보 없이 새로운 시장을 어떻게 공략하겠다는 건지. 미안하지만 오늘 저녁은… 혼자 해결해야겠어요.”
슈슈에게 가 보겠다는 확정적인 발언에 순간적으로 시선이 그를 향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어딘가로 급하게 메시지를 보내는 그의 옆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심장박동이 점점 빨라졌다. 약해졌다 강해졌다 불규칙하게 쏟아지는 빗소리가 불안함을 가중시켰다.
실장님이 재촉해도 늘 귀찮다는 듯 대처했었으면서, 지금은 왜 굳이 슈슈를 직접 만나겠다는 건지. 그게 왜 지금이어야 하는지. 그를 거칠게 추궁하고 싶은 충동은 난감하기만 했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추한 면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소파 등받이에 걸쳐 두었던 재킷을 쥐고 나를 스쳐 지나가려는 그를 뒤따르면서 팔꿈치 위쪽을 가볍게 붙잡았다.
“안 가면… 안 돼요?”
어떤 세련된 화술의 기교도 없이 절박함을 뚫고 나온 한마디는 직설적이었다.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는 그의 눈이 조금 커졌다.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도 놀랐지만, 가장 핵심적인 말을 이미 던져 버린 뒤라면 얄팍한 자존심이나 두려움 따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지금 이렇게 하고 가시면….”
“…….”
그를 붙잡을 만한 더 좋은 말이 떠오르지 않아, 아랫입술을 강하게 물었다 놓았다. 얼굴을 마주할 용기까지는 없어서 그의 어깨쯤으로 시선을 떨어뜨리며 무력하게 말했다.
“안 가셨으면 좋겠어요.”
그는 곧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두어 번 접은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의 근육이 날 서 있었다. 셔츠 아래의 넓은 가슴이 평소보다 큰 폭으로 꺼졌다 부풀며 옷감을 팽팽하게 밀어냈다. 서로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고, 상처를 주기로 작정한 소모적인 폭언이 오가지도 않았지만, 우리는 이미 상대의 감정에 소모되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자격을 준 것이다. 연애의 민낯의 일부를 본 기분이었다.
시야 안에서 그가 어깨의 힘을 풀면서 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내가 너무… 여튼, 같이 있지 않는 게 더 나을 겁니다.”
“…….”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지금 가는 건 그냥 일 때문이니까….”
그러니까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말라는 뜻 같았다.
그를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일일 뿐, 슈슈와는 아무 관계도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보내고 싶지 않은 내가, 인우 형과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을 알면서도 과격해진 기분을 숨기지 못하고 비뚤게 나오는 그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이해가 됐다.
내 어깨 위에 툭 손을 올려 한 번 힘주어 잡은 뒤 그는 방을 나가 버렸다. 그냥… 아무 사이도 아닌 것 같은, 그와 주한이 형 사이에 오갈 법한, 그냥 그런 스킨십이었다.
위층만큼 방음이 훌륭하지는 않은 탓에 강한 소나기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처럼 빗소리가 요란했다. 감정을 다스리려 멍하니 한참을 빗소리 속에 서 있었다.
어질러진 테이블이라도 치워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움직여 봤지만, 부산스럽게 손을 움직이기만 할 뿐 효율이 없었다. 크래커 접시를 쟁반에 올리려다 와인병을 쓰러뜨려 남아 있던 검붉은 액체가 쏟아졌다. 그런 일로 짜증을 내는 성격이 아닌데, 자신의 바보 같은 실수를 소리 내어 비난하며 테이블과 바닥에 고인 와인을 닦아 냈다.
겨우 그걸 치웠을 뿐인데 고된 육체노동이라도 치른 것처럼 몸이 늘어졌다. 내키지도 않는 정리는 그만두고 소파에 주저앉아 그가 남겨 두고 간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달콤한 날들만 있을 거라고, 그렇게까지 철없는 꿈을 꾼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와 다투게 된다면 그건 좀 더 심오하고 내적인 이유 때문일 거라고, 멋대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지금은 함께 있지 않는 게 더 나을 거라는 그의 판단이, 어쩌면 조금이라도 더 성숙한 결정이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자위하려 노력하면서, 소파 위로 다리를 끌어 올려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맥주병을 올렸다. 뭐 얼마나 담배 맛을 안다고, 오랜만에 담배 생각이 났다.
“…….”
빗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기계음에 몸이 흠칫 굳었다.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였다.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지만, 미리 짐작하고 기대했다가 나중에 실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잊고 간 물건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류가방을 두고 갔으니까. 어쩌면 화가 풀리지 않아 좀 더 다툼을 이어 갈 생각으로 되돌아온 것일지도 모르고.
잠금이 해제되고, 그가 문을 열었다. 문을 연 뒤에도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손잡이를 쥔 채 복도에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들어가도 되는지, 허락을 구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테이블을 돌아 빠르게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본 그의 눈은 방을 나가기 전처럼 더 이상 감정을 통제하려 하지 않고 있었다.
“유치하게 굴어서 미안해.”
“…….”
자신의 잘못임을 분명히 해 두고 싶은 것처럼, 그는 힘주어 말했다.
“그러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데… 잘 안 돼. 열 살이나 많으면서 이런 일로 감정 조절도 못 하고… 한심하지.”
그가 전부 열지 못한 문을 어깨로 밀어내면서 나는 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다른 놈하고 술 마시고 있는 걸 본 것만으로도 화가 났는데… 네 그림, 어쩌면 화가 서이현으로서의 첫 작품이 될 수도 있는 그림을 다른 놈에게 보이고, 그걸 내가 없는 곳에서 다른 놈의 손에 넘겼다는 게….”
그는 말을 멈추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네가 꼭, 다른 놈과 자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가 돌 것 같아서….”
그가 스스로를 더 무너뜨리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남은 두 걸음을 다가가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겹쳤다. 놀란 그의 몸이 뻣뻣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잃어버렸다 되찾기라도 한 것처럼, 맞닿은 그의 입술은 전보다 더 달았다.
엉겁결에 내 옆구리를 붙잡았던 그의 손이 천천히 허리를 안아 왔다. 이번엔 내가 유치해지고 한심해지고 솔직해질 차례였다.
“가지 말아요. 그분하고 단둘이 있는 거… 싫어요.”
귀찮은 떼를 부리는 나의 말이 아름답고 고아한 고백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가 감격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팔이 강하게 허리를 감으며 입술을 겹쳐 왔다. 아릿한 통증을 느낄 정도로 강하게 입술을 짓씹으며 흡입하는, 그의 키스였다. 나를 뒤덮어 밀어뜨릴 것처럼 다급하게 키스하는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더욱 깊게 밀착된 입술 사이로 그의 혀가 파고들어 점막 곳곳을 들쑤셨다.
반쯤은 나를 들어 올리듯이 껴안은 채 그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등 뒤에서 경쾌한 소리를 내며 도어록이 자동으로 잠겼다.
텅 비어 있는 스튜디오 중앙을 곧장 가로지르며 바닥 어딘가에 재킷을 내던진 그는 벌써 나의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도드라진 어깨뼈의 윤곽을 더듬고, 다른 손으로는 청바지 위로 엉덩이를 움켜 쥐어짜고 있었다.
덜컹, 탁. 소파 앞으로 옮겨 두었던 작업용 의자가 종아리에 부딪혀 요란하게 쓰러졌다. 개의치 않고, 그를 믿고, 목에 두른 팔을 더 조여 안으며 입 안의 혀를 압박했다.
홍콩에서의 기억이 떠오르는 키스였다. 그의 호텔 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거실을 헤집으며 정신없이 서로 얽혔던 밤.
「느낌상, 첫 키스일 것 같기도 했고.」
그가 그렇게 짚고 넘어가지 않았더라면, 무딘 나는 인생의 첫 번째 키스라는 의미도 달리 의식하지 못한 채 지나쳤을지도 모르겠다.
엉덩이를 비틀고 있던 그의 손이 앞으로 이동해 버클을 풀고 지퍼를 열었다. 남의 옷을 벗기는 게 아니라, 입고 있는 자신의 옷을 벗는 것처럼 늘 막힘이 없었던 손길과 달리 오늘의 그는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으으, 음…. 벌어진 틈으로 곧장 파고들어 속옷 위로 성기를 휘감는 손길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목 안쪽 깊은 곳에서 울리는 신음 때문에 그의 혀를 머금고 있기가 버거웠다.
조임을 풀면서 고개를 뒤로 빼려 하자, 그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골반을 밀어붙이며 허리를 바짝 당겨 안았다.
미끈거리는 뜨거운 혀가 뒤로 물러났다가 뾰족하고 단단하게 힘을 주어 입술 사이를 미끄러져 들어왔다. 가늘어진 눈으로 마주한 그의 시선은 이미 들끓는 열기를 나에게로 집중시키고 있었다.
허리를 자꾸만 고쳐 안아 당기며, 성기를 자극해 발기를 유도하면서, 동시에 꼿꼿하게 세운 혀로 입 안을 범하는 다발적인 애무에 나 역시 빠르게 그의 흥분의 속도를 따라잡고 있었다.
“으… 흐으, 흠… 음.”
성기의 삽입을 연상시키는, 또한, 성기의 삽입을 연상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하게 보이는 혀의 드나듦에 볼 주변이 확 달아올랐다. 그러나 동시에 페니스에도 열이 더해지며 뿌듯하게 단단해지기 시작한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다리 사이로, 계속 더 깊은 곳으로. 흥분을 끌어내려는 그의 손길은 평소보다 힘이 들어가 있었다.
“흑. 흐읍, 윽….”
순식간에 불이 붙은 강한 성욕을 끌어안고 눈앞의 상대에게 퍼붓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하는 곤혹스러움이, 밑을 문지르는 손바닥의 거친 마찰에서 그대로 전해져 왔다.
이성과 절제, 경험의 능숙함이 만든 여유 안에서 통제되지 못하고 불규칙하게 삐져나온 그의 흥분이 싫지 않았다. 나로 인해 균형과 패턴을 잃고 휘청거리는 그의 모습을 통해 애정의 크기를 가늠해 보며 하찮고도 은밀한 쾌감을 느끼는 내가 있었다.
능숙하지 못하게, 흥분을 강제로 억누르느라 거의 벌벌 떨면서 다리 사이에 마찰을 일으키는 그의 손이 좀 더 드나들기 쉽도록, 허리를 낮추며 두 발 사이의 폭을 넓게 벌렸다. 별것 아닌 그 행위에서 새삼스레 그와 섹스에 돌입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했고, 동시에 뒷덜미가 짜릿하게 당겼다.
흥분의 증폭을 알아챈 그의 눈이 갸름해졌다. 스르륵 입 안을 빠져나간 그가 이번엔 입술 위의 이곳저곳에 쪼듯이 입을 맞추며 드문드문 말을 이어 붙였다.
“다시, 한번만… 말해, 줄래요….”
윗입술 전체에 촘촘히 입을 맞춘 그가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기대며 코끝을 마주 비벼 왔다.
“가지 말라고. 그게 누구든, 내가 다른 사람과 단둘이 있는 게 싫다고.”
“…….”
좀 전에 내가 했던 말을 그의 입을 통해 확인하자, 부끄러움에 시선이 방황했다. 지금 바지 안에서 야릇하게 성기를 만지는 손길보다 좀 전의 내 발언에 더 부끄러움을 느끼는 자신이 문득 이상했다.
“흐으, 읏….”
대답 없이 눈을 피하자, 성기를 쓰다듬는 손이 더 노골적으로 변했다. 콧등과 뺨 위를 스치며 이동한 입술이 귓가를 뒤덮고 더운 숨을 흘리며 나의 의식을 자꾸만 더 흐려 놓았다.
“세상과 분리해 놓고 싶을 만큼… 날 독점하길 원한다고, 말해 줘요.”
“싫지… 않으세요, 그런 거.”
입술을 깨물었다 놓으며 겨우 그렇게 되묻자, 귓가에서 그가 옅게 웃었다.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왜 싫겠어요.”
“…….”
“내가 서이현 씨한테 그러고 싶은데, 반대의 경우라고 싫을 리가.”
흥분과 욕정에 극단적인 방향의 정신적 욕구까지 뒤엉킨 그의 얼굴은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나에게 듣고 싶어 하는 독점욕 가득한 말들이, 실은 그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인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그의 얼굴을 살피는 사이, 앞섶을 헤집던 그의 손이 빠져나갔다. 대답을 듣지 못한 그는 자신의 초조함을 나에게 밀어붙였다. 이번엔 엉덩이 쪽에서 속옷 안으로 불쑥 손을 밀어 넣은 그는 내 몸을 자신에게로 바짝 당겨 붙이며 전신을 이용해 마찰을 일으켰다.
꿈틀거리는 그의 육감적인 육체가 나를 꽉 조여 품에 가두었다. 그의 어깨와 가슴, 팔의 단단한 부피감과 발기한 성기의 뜨거운 탄력. 성적 매력으로 꽉 짜여진 육체에서 흘러나오는 섹시함은 옷을 입은 상태에서도 날것처럼 생생했다.
“말해 줘요. 내가 널 원하는 만큼 너도 날 원한다고. 똑같다고. 피하지 않겠다고 말해 줘….”
그가 불안해하는 것처럼, 나에게는 그런 욕구가 없어서 대답을 늦추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커다란 몸을 마주 꽉 안고, 나를 가둔 팔 안에서 허리를 꿈틀거리며 그의 몸에 내 몸을 비볐다. 과감하게, 솔직해질 수 있었다. 이젠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원해요…. 유치한 고집을 부리는 제가, 너무 낯설 만큼… 저도 대표님, 많이 원해요.”
“…….”
믿지 못할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 표정으로 나의 얼굴 구석구석을 더듬어 살핀 그가 입술을 겹쳐 왔다. 넓은 어깨가 위아래로 격렬하게 들썩거릴 정도로 다리 사이를 자극하는 손과 다르게, 키스는 느리고 신중했다.
아랫입술을 빨다가 끌어당기며 부드럽게 놓는 감각이 말랑한 살점을 아릿하게 했다. 에로틱한 기분에 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얼굴에 쏟아지는 키스는 간지러울 정도로 다감했고, 다리 사이를 비비고 움키고 흔드는 손길은 무례할 만큼 거칠었다.
위와 아래를 서로 다른 사람에게 애무받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차이가 극명했지만, 이것이 그의 방식이었고, 그의 애무 외에는 알지 못하는 나에게는 비교 대상도 없었다.
“안에… 완전히 다 젖었어.”
소중한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가 목소리를 낮춰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달콤하고 뜨거운 숨결에 무너져 내릴 것 같은 한숨을 내쉬며 그가 이끄는 대로 속옷 안으로 손을 넣었다.
“으… 흣.”
깜짝 놀랄 정도로 속옷 안은 흥건했다. 조금 과장하자면, 프리컴을 흘린 게 아니라 혹시 소변을 실수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러나 점성을 가지고 손에 들러붙으며 늘어지는 액체는 과한 성적 흥분으로 인한 체액이었다.
담백한 자위가 성생활의 전부였던 때에는 몰랐던, 인체의 신비였다. 요즘 들어 가끔 이렇게 다량의 체액이 분비될 때가 있었다. 흥분에 대한 증거나 마찬가지이니 그는 내가 이럴 때마다 은근히 좋아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아직은 좀…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것도 섹스가 모두 끝난 뒤에 밀려오는 가벼운 회한일 뿐, 자신의 흥분을 실체로 확인하는 것도, 그것이 그를 자극해 더 날뛰게 하는 것도 싫지 않았다. 나는 이전의 나에게서 멀어져 변하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아래로 깊이 꺾어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스치듯 입술을 미끄러뜨리다 강하게 피부를 깨물었다.
“하으, 으… 흐윽.”
내 손에 겹쳐진 그의 손은 점점 더 속도를 더했다. 흥건하게 젖은 사타구니를 그와 함께 비비는 쾌감에 허리가 튀었다. 젖은 피부와 손바닥 사이에서, 삽입을 연상시키는 마찰음이 질척거렸다. 그의 이가 피부를 뚫을 것처럼 힘을 주어 목덜미를 씹어 댔지만, 아프다기보다 짜릿했다.
“이렇게 야해서, 어쩔 거야….”
진심으로 걱정하는 목소리였다. 좌절을 느끼는 것 같은 한숨이 목덜미에 내려앉았다.
“일할 때도 네 생각만 난다고, 요즘.”
“…….”
“서른이 넘어서… 머릿속에 종일 섹스 생각밖에 없다는 게, 스스로가 얼마나 한심해지는지 알아요?”
그래도 잘 참고 일 잘하고 있을 거면서.
마치 그가 내 생각으로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기를 바라는 것 같은 자신의 속마음에 흠칫 놀라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허리를 안고 있던 그의 다른 한 손이 입술을 문질렀다.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상태였지만, 입술은 그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이리저리 밀려났다.
“여기….”
목덜미를 움키듯 쓸어내린 손이 티셔츠 위로 유두를 긁었다.
“여기랑….”
속옷 안에서 내 손과 겹쳐져 있던 손이, 밴드 밖으로 삐져나올 정도로 발기한 성기를 스윽 쓰다듬었다.
“여기.”
“…….”
내 몸의 민감한 지점을 하나씩 짚어 나가는 그의 다음 목표가 어디인지 알 것 같아서, 음란하게도, 기대하는 것 같은 태도로 마른침을 삼켰다. 페니스를 쓸던 손이, 속옷 안에서 어정쩡하게 멈춰 있던 내 손등을 지나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일부러 더 비비적거리며 고환을 누르는 손등에 뒤꿈치가 들썩거렸다.
“……여기도.”
“으흐, 흐… 흐윽.”
애널 위를 정확히 꾸욱 누르며 빙글빙글 문지르는 손가락의 움직임에, 그의 어깨에 이마를 박으며 안달을 냈다. 허리를 들썩거리는 자신의 솔직함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아무 때나 불쑥불쑥 떠올라서. 진짜. 곤란해.”
발끝으로 바닥을 밀면서 하체에 힘을 주자, 페니스를 조이는 것도 아닌데 그가 미간을 좁히며, 아… 감탄 같은 신음을 흘렸다.
“책임져, 서이현. 책임질 거지? 응?”
“으으, 흐… 흐으으….”
손가락이 깊숙이 쑤욱 밀고 들어오는 감각에 진저리를 치자마자, 손톱만 남기고 다시 밀려 나갔다. 그리고 곧게 편 그대로 다시 깊이 찌르고 들어왔다.
혀를 세워 귀 안으로 밀어 넣으면서 그는 거친 호흡을 쏟아 냈다.
“흐으으, 응… 흐. 흐아윽….”
빠르게 안을 들락거리는 손가락만으로도 가볍게 가 버릴 것 같았다. 입을 벌리고 감당하지 못한 신음을 뱉어 내면서, 속옷 안에서 꺼낸 손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체액이 묻은 손은 온통 미끄러웠다. 마찬가지로 젖어 있을 게 분명한 그의 손이 안을 파고들 때마다 노골적인 삽입음이 찌걱거렸다. 흥분한 뜨거운 혀가 귓가를 휘감았다. 청각마저 그가 손에 움켜쥐고 핥아 대는 기분이었다.
“부드러워…. 여기는 또 왜 이렇게 젖었어…. 서이현 ‘베타’에서 나는 소리 좀 봐.”
“하으, 흑… 흐으….”
아랫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나의 그곳을 ‘베타’라고 부르는 그의 속삭임에, 속에서 미칠 듯한 흥분이 들끓었다. 아니, 그 들끓는 흥분을 누가 엎어 버린 것 같았다.
베타, 알파, 오메가. 그저 남자와 여자처럼, 일상적으로 흔히 쓰는 말일 뿐인 그 단어가 마치… 그와 섹스하는 데 이용하는 애널을 나의 두 번째 성기로 지칭하는 성적 은어 같아서, 그와 침대에서 야한 말들을 속삭일 때와 같은 저속한 쾌감이 밀려왔다.
내 안으로 들어와 나의 베타를 어떻게 하고 싶은지, 흥분한 숨소리와 함께 속삭이는 허스키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아래에 힘을 주어 그의 손가락을 쥐어짰다. 안에서,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그의 손가락이 내벽을 들쑤셨다.
“같이 만지고 싶어.”
대체 뭘 같이 만지고 싶다는 건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손가락을 붙잡아 그곳으로 잡아끄는 그를 뿌리치지 못했다. 반쯤은 주저하면서도 반쯤은 호기심을 어쩌지 못한 채, 그의 손이 이끄는 대로 중지를… 나 자신의 그곳에 밀어 넣었다. 이미 그의 손가락 하나가 들어가 있는 나의 베타에.
“으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생경한 감촉에 어금니를 깨물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속옷을 다 적실 정도로 흘린 쿠퍼액이 그의 손을 따라 흘러 들어갔던 건지, 내벽이 생각보다 젖어 있어 그게 더 얼굴을 달아오르게 했다.
온몸으로, 은밀한 몸속까지, 그와의 섹스를 기대하며 젖어든 자신을 마주한 기분은… 아주 적나라했다. 부정하며 숨을 곳이 없었다.
애널의 쾌락을 알게 됐어도, 엉덩이를 이용한 자위가 불필요할 만큼 자주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의 애널에 손을 넣어 보기는 처음이었다. 내 몸인데, 타인인 그의 손가락이나 페니스를 넣는 것을 훨씬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하윽, 흐… 하지… 잠깐, 그거 싫….”
안에서, 그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에 감겨 왔다. 정말, 정말 이상한 감각이었다. 어깨를 딱딱하게 굳히며 차가운 음식을 이로 깨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내 안에서 내 손가락과 얽혀 새로운 마찰을 즐기는 그는 반대로 뜨거운 물이라도 뒤집어쓴 사람 같았다.
“왜 싫어? ……느껴서?”
“…….”
정곡을 찔린 것처럼 말문이 막혔다. 마른 입 안을 적셔 보려 침을 삼켰지만, 삼킬 수 있는 아무런 물기가 없었다. 나의 손과 같은 방향으로 손을 포개, 안을 힘주어 꾸욱 밀어 올리면서, 그가 다른 손으로 나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느끼는 거. 나랑 하면서 느끼는 거, 지저분한 일 하는 게 아니잖아. 우리 둘이 하면서 기분 좋다고 느끼는 거에… 죄책감 느끼지 마요.”
사회적으로 형성된 성적 억압에 알게 모르게 노출되어 있었던 나는 좋아하는 상대와의 성관계에서도 아직 죄의식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성이 완전히 날아가기 전까지는.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젖은 내벽 안에서 내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비비는 그의 행위에서 내가 지저분함을 느끼는지를 생각해 봤지만,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답은 나와 있었다. 상대가 그가 아니었다면, 이런 행위에 동의했을 리가 없었다. 대상이 그였기 때문에, 둘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은밀한 사건들은 뒷맛이 떫지 않은, 연애에 포함된 비밀이 될 수 있었다.
내 손가락을 내벽 위에 지그시 누르는 그의 자극에 신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러난 이마에 입을 맞춘 그가 겨드랑이 아래로 팔을 넣어 등을 껴안으며 귓가에 입술을 묻고 속삭였다.
“여기야…. 내가 서이현 안에 들어와서 매일 미치는 곳.”
“흐으, 흑….”
손가락과 점막으로 동시에 느끼는 내 안에서의 그의 움직임은 훨씬 더 적나라했다.
“여기에 서이현하고 같이 들어와 있으니까, 되게….”
뒷말을 생략한 그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아랫입술을 깨물며 웃었다. 말의 내용과 어울리지 않게 수줍어 보이기까지 한 그 웃음에 왠지 모르게 아래가 동했다. 눈앞의 남자를 가지고 싶었다. 그의 움직임에 응하기만 하고 있었던 손가락을 스스로 더 깊이 찔러 넣었다. 나를 보는 그의 눈의 온도가 단번에 뜨거워졌다.
“응, 흐윽… 흐….”
처음 스스로 애널을 만지는데… 그 애널 안에 그의 손가락도 함께 있다는 자각이… 나를 부추겼다. 그는 내 얼굴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미세한 반응 하나하나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와 함께, 나는 열정적으로 팔을 흔들었다. 허리를 낮췄다 높이기를 반복하며, 안을 찌르는 손에 맞춰 리듬을 만들기까지 하고 있었다.
“장난 아니네.”
목소리를 잔뜩 억눌러 그렇게 중얼거린 그가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을 뻗어, 너덜너덜 엉망으로 늘어난 채 반쯤 벗겨져 있었던 젖은 속옷을 아무렇게나 더 아래로 밀어냈다. 지퍼가 벌어져 있던 청바지는 벌써 예전에 흘러내려 종아리 중간에 걸쳐져 있었다.
그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며 아래를 내려다보자, 발갛게 부어오른 성기가 온통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와 내가 안을 쑤실 때마다 페니스는, 위로 아래로 혹은 옆으로, 칠칠치 못하게 사방으로 덜렁거렸다.
그의 얼굴은 마주하지 못하면서도, 아래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서는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씨근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머리 위에서 함께 아래를 주시하고 있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의 손이 느려지는가 싶으면 그가 봐주지 않겠다는 듯 속도를 높였다. 근육과 핏줄이 팽팽하게 곤두선, 굵고 탄탄하면서도 미끈한 팔이 시야 안에서 나를 들쑤셨다. 그 반동으로 성기가 널을 뛰었다.
“아으, 흐, 흐으, 윽.”
흥분이 치고 올라와 가슴을 뒤덮는다고 느낄 때쯤 어김없이 왈칵, 귀두에서 체액이 토해지는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예전에 알고 있던 쿠퍼액의 느낌과는 달랐다. 사정감과도 닮아 있었지만, 사정이 뭔가가 끝나 버린 듯 푹 꺼지는 후련함을 주는 것과 달리, 지금은 몸이 타들어 갈 것처럼 더 부푸는 욕구를 느꼈다.
엉망으로 흔들리는 음경을 타고 흐르던 체액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주르륵, 허공으로 늘어져 회색 바닥 위에 둥근 자국 몇 개를 남겼다. 허기진 상태에서 고기를 앞에 두고 침을 흘리는 짐승을 연상시키는 원초적이고 야만적인 장면이었다.
시각적 자극에 달아올라, 흐느낌 같은 신음을 터트리며 그의 셔츠를 비틀어 쥐었다.
“하으, 흐… 하윽. 크흡….”
몸을 움직이는 박자는 유연했지만, 숨을 쉬는 박자는 완전히 놓쳐 버렸다. 과호흡을 호소하는 사람처럼 입을 벌리고 헐떡거리면서도, 나는 그에게 기대 온몸을 비비 틀면서 계속해서 그와 함께 몸속을 찔러 댔다.
등을 타고 올라와 어깨 뒤에서 넘어온 그의 손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몇 번이나 이마에 입을 맞췄다. 턱을 쳐들면 그는 곧바로 고개를 숙여 입술을 빨아 주었다. 향기가 진동했고, 머릿속에는 붉은 연기가 자욱했다.
음경을 타고 흐른 다량의 쿠퍼액이 손바닥으로 다리 사이로 흘러내렸고, 아마도 내 손을 타고 내벽 안으로 빨려 들어갔는지, 그와 나의 손가락 사이로 스민 점액이 내부에서 난잡한 교접음을 일으켰다. 음경에서, 나의 베타에서, 흘러내려 고인 체액이 허벅지 안쪽의 연한 피부 위를 흐르는 감각에 머리카락이 쭈뼛 일어섰다.
“느껴져요? 조였다 풀었다… 지금 안에 엄청난데.”
그가 나의 턱을 쥐고 아랫입술을 씹으며 안에 든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가늘게 뜬 눈꺼풀 안에서 나를 살피는 눈동자는 평소보다 푸른빛이 진하게 감돌아 차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서이현이 이렇게 조이면… 서이현 손가락도 기분 좋은가? 지금 내가 좋은 것처럼? 갑자기 궁금하다.”
응? 어때요? ―라고 덧붙이며, 은근하고 짓궂게 물어 오는 그의 목을 안아 끌어당겼다. 고개를 숙여 나에게 귀를 내준 그의 뺨에 내 뺨을 바짝 붙였다. 혀를 내어 그의 귀를 적셨다. 그가 위아래로 고개를 움직여 맞닿은 뺨을 비볐다. 몸속에서 피어오르는 흥분에 집중해 솔직해지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그냥….”
“…….”
“흥분, 돼요.”
흥분이라는 단어에 그가 순간적으로 전신을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음, 그냥 흥분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삽입 섹스를 위한 준비를 마친 내벽의 축축함과 말랑함에 대한 속삭임이 이어졌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확인시켜 주기라도 하듯, 일부러 더 질퍽대는 소리가 나도록 체액이 고인 내부를 긁으며 미묘하게 자극했다.
“흐으, 흑… 윽.”
“나도야. 서이현이 이렇게 잘, 많이 흘리니까… 나도… 아주 많이 흥분했어…. 손가락 빼고, 다른 거 넣을까? 그거 넣고 갈까?”
그의 목소리에는 흥분으로 인한 불규칙한 숨결이 뒤섞여 있었다. 가슴을 들썩이며 음란한 밀어를 불어 넣는 음성에, 또다시 내벽이 멋대로 조여들었다.
이대로는 선 채로 가 버릴 것 같았다. 대체로 몇 시간씩 이어지는 장기전이었기 때문에, 그와의 잠자리에서는 될 수 있는 한 첫 번째 사정을 늦춰야 했다. 앞뒤 더 잴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개의 손가락이 천천히 몸 밖으로 빠져나갔다. 물러나는 감각마저도 자극적이어서, 어깨를 잔뜩 움츠리며, 사정하지 않도록 음경의 뿌리를 쥐어야 했다. 손가락이 빠져나가자마자 채 닫히지 않은 틈으로 체액이 새는 느낌을 그에게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숙이고 옷을 벗는 데에 집중하는 척했다.
그 사이 발목까지 내려간 청바지를 벗고, 늘어나고 젖어 버린 속옷도 벗어 버렸다. 속옷은… 아무래도 버려야 할 것 같았다.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나를 지켜보던 그가 티셔츠를 마저 벗겨 주었다.
알몸이 되고 나니 그제야 문득 빗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맨몸으로 빗속에 선 것처럼 선득할 정도로 큰 소리였는데, 이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행위에 집중해 있었다는 생각에 머쓱했다.
어색하게 서서 한 팔로 가슴 앞을 가로질러 어깨를 문지르며 다른 손으로 슬쩍 성기를 가리려 했지만, 불거진 부피감 탓에 쉽지 않았다. 심지어 전신을 훑는 그의 시선이 성기를 더욱 자극하고 있었다.
못 참겠다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는, 자신의 셔츠 단추를 풀면서 성기를 가린 내 손목을 찾아 쥐고 침대로 이끌었다. 가벽 너머 침실로 들어가 나를 침대 가장자리에 앉혔다.
두꺼운 매트리스를 이중으로 올리고, 토퍼까지 쌓은 침대는 그의 사타구니까지 올라올 정도로 높이가 상당해서, 심플한 디자인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약간 호사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단추를 전부 풀어 놓은 벌어진 셔츠 사이로 그의 가슴이 슬쩍 드러났다. 침대에 올라앉으며 힐끔 시선을 던지자, 그가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내 코를 가볍게 깨물었다.
“밝히기는.”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한 발 멀어진 그는 벨트의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망설임 없이 검은색 브리프를 끌어 내리자 성기가 튕겨 나왔다. 뛰쳐나왔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의 탄력과 묵직함이었다.
허리를 굽혀 하의를 전부 벗어 버리고,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진 얼굴로 다가온 그는 내 가슴을 천천히 밀었다. 침대를 가로질러 누운 나의 다리를 위로 밀어 올려 무릎을 세우게 했다. 빗소리가 또 갑자기 크게 들렸다.
“흐으음… 으으, 흑….”
바짝 발기한 그의 성기가 허벅지 뒤를 스친 것만으로 누운 몸이 비틀렸다. 엉덩이 근육이 수축하며 애널이 조여들었다. 그것을 전부 주시하면서 셔츠까지 마저 벗어 낸 그가, 바깥쪽으로 무릎을 천천히 밀어내며 다리를 더 벌리게 했다.
그에 의해 벌려지는 다리 사이를 의식하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사타구니를 향해 오른손이 허벅지 안쪽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뜨거운 손바닥은 좀 전에 흘린 체액의 흔적을 따라가고 있었다.
양쪽으로 둔부가 갈라져 골을 이루는 시작 지점까지 손을 미끄러뜨린 그가 젖어 있는 회음을 문질렀다.
“흐으흑… 흐으….”
허벅지에 힘을 주며 신음하자, 그가 얼굴은 그대로 다리 사이에 둔 채 눈을 올려 떠 나를 쳐다봤다. 원망이나 분노를 담아 노려보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 역시 흥분해 있었다.
눈을 맞춘 상태에서 그가 세운 양 무릎 위를 짚으며 좀 더 바짝 다가섰다. 발기한 음경이 벌린 허벅지 안쪽의 속살을 비벼 왔다.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유연한 허리 놀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누운 채로도 나는 숨이 가빴다.
발기한 성기가 착 달라붙은 아랫배와 땀이 배어 나온 가슴이 부풀었다 꺼지기를 빠르게 반복했다. 그의 음경이 방향을 바꿔 고환의 갈라진 틈 위를 미끄러지며 꾸욱 누른 순간에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무릎과 무릎 사이의 간격을 더 넓게 벌렸다. 내려다보는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침실 밖에서부터 쌓여 온 욕구가 극에 달해, 꼴이 우스울 거라는 걱정은 이미 계산 밖이었다. 성기 주변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유혹이 명백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비가 내리는 탓에 평소보다 일찍 어둑해진, 불을 켜지 않은 실내에서 그의 푸른 눈이 번들거렸다.
나에게 이런 면이 있는지 몰랐지만, 나의 돌발적인 행동에 그가 보이는 반응들이 짜릿한 쾌감이 되어 돌아올 때가 있었다.
타인의 생식기를 처음 보는 미숙하고 늦된 청년의 얼굴로 그가 내 다리 사이에 집중하고 있는 지금처럼.
“…….”
사타구니 양쪽을 쓰다듬던 손을 더 깊이 미끄러뜨려 방금 전까지 우리가 함께 드나들었던 나의 베타 주변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눈이 커지고, 호흡이 거칠어지고, 돌벽처럼 단단해 보이는 어깨가 들썩거렸다. 그는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내 무릎을 쥔 손에 강한 힘이 들어갔다.
입구를 양쪽에서 당겨 조금 벌려 보이자, 그는 거의 목이 졸리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한 손을 자신의 성기로 가져갔다. 침대 가장자리에 엉덩이를 대고 누워 다리를 벌린 내 앞에 서서, 이미 충분히 단단해진 자신의 음경의 뿌리를 움켜쥐었다.
“흐읏, 읏… 크흑.”
부풀어 오른 귀두가 베타의 입구에 자리를 잡으며 지그시 누르는 감각만으로도 나는 허리를 튕기며 시트를 그러쥐었다. 팔을 들어 이마와 관자놀이의 땀을 아무렇게나 닦아 낸 그가, 들썩이는 나의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혀를 찼다.
“나 말고 다른 남자는 다 늑대라는 그딴 소리는, 자신감 없고 덜떨어진 놈들이나 하는 거라고 비웃었는데….”
“…….”
알파 특유의 많은 양의 쿠퍼액으로 매끄럽게 젖은 그의 귀두가 들어올 듯 말 듯 입구 앞을 문지르기만 하며 자꾸 미끄러졌다. 그 감질나는 접촉에, 하체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움찔거렸다.
“나도 그 덜떨어진 무리에 합류해야 할 것 같아.”
한숨을 내쉰 그는 귀두를 천천히 밀어 넣었고, 귀두를 넣은 것만으로도 전신을 누르는 것처럼 밀려오는 압박감에 나는 턱을 쳐들고 입술을 뻐끔거렸다.
“하으, 으… 흐… 흐으, 흑.”
그가 나의 옆구리를 붙잡았다. 나는 잘게 경련하면서, 아래에 가해진 압력으로 금세 습기가 차오른 눈을 들어 그를 찾았다. 성기의 위치와 살짝 맞지 않는 침대의 높이 때문에 다리를 벌려 무게 중심을 낮춘 그는, 귀두를 삽입한 상태에서 허리를 얕게 흔들어 입구를 길들이고 있었다.
“잘생기고 귀여운데, 몸도 멋지고. 그런 사람이 섹시하기까지 한데… 어떻게 내가 안 불안하겠어.”
“…….”
농담인지 진담인지.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귀두를 받아들이고 있는 다리 사이의 사정보다 그의 말들이 더 낯 뜨거웠다.
고개를 돌려 버리는 나의 몸 위로 그가 상체를 숙이며 양손에 깍지를 껴 왔다. 그리고 하나로 합쳐진 손을 입가로 가져가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크흑. 윽. 흐….”
상체를 숙인 만큼 안으로 더 진입하는 뜨거움에 입술을 깨물며 허리를 흔들었고, 가까워진 곳에서 그의 눈이 탐욕스럽게 나의 반응을 주시했다. 젖은 숨결이 얼굴 위에 쏟아졌다.
“침대 위에서 이렇게 과감해지는 거… 당연히 너무 좋고, 야해진 서이현 때문에 일상이 불가해진다고 해도 환영인데… 한편으로는 자꾸 불안해.”
“그건… 진짜, 아닌 것 같아요.”
“뭐가.”
상대의 매력 때문에 불안한 거로 치자면, 나야말로 세계 1위 타이틀을 거머쥘 자신이 있었다. 나를 그 분야의 세계 1위로 만들어 준 사람이 거꾸로 지금 자신의 불안에 대해 얘기하고 있으니, 이건 정말 공감이 되지 않았다.
“지금, 서이현의 매력에 대해서 동의 못 하겠다는 건가?”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허리를 튕겨 불쑥 더 깊이 파고들었다. 신음을 안으로 삼키며 깍지 낀 손에 매달리듯 힘을 줘야 했다. 그가 시트 위에 내 손을 못 박으며 상체를 겹쳤다.
허리를 들썩거리면서 뜨거운 혓바닥을 귀에 비볐다. 그가 허리를 들어 올렸다가 내리찧을 때마다 몸속 깊은 곳이 징징 울려 댔다. 아직도 페니스는 절반도 들어오지 못한 상태였지만, 내벽이 갈라지는 느낌은 선명했다.
“흐윽, 흐. 흐. 하으.”
깊은 삽입이 주는 빈틈없이 꽉 채워지는 쾌감에 헐떡거리며 나도 모르게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그가 잠시 멈칫하며 숨을 고르듯 한숨을 내쉬었다. 깍지 낀 손을 입술로 가져가 나의 손가락 마디를 깨물었다.
“이러면서 아니라고 하지. 어디서 뭘 보고 배웠길래 이래?”
“읏….”
귀를 이루는 복잡한 굴곡을 정성껏 핥으며, 그가 나의 움직임에 자신이 얼마나 자극받는지를 속삭였다.
그는 나에게 ‘잘한다’고 했다.
꽉 다물린 입구를 억지로 열고 들어올 때 느껴지는 귀두를 태우는 것 같은 작열감과 빡빡한 내벽을 비집고 파고들 때 음경 전체를 잘근잘근 씹어 대는 것 같은 농밀한 압박감.
그리고 그러한 거부와 경직이 무색하게, 삽입이 거듭될수록, 음경이 점막을 비비고 귀두의 도드라진 부위가 전립선 위를 긁어 댈수록, 점차 부드러워지고 벌어지고 젖어 들어가 종국에는 질척하게 성기를 휘감으며 달라붙어 오는 나의 베타의 열정적인 솔직함에 대해 속삭였다.
간혹 학술적이기까지 한 그 모든 노골적인 언어들로 이루어진 밀어를 듣는 동안, 나는 미칠 것처럼 신음하고, 고개를 젓고, 허리를 흔들며 그를 압박했다. 그 역시 쿠퍼액으로 내 안을 흥건하게 적시면서 철벅거리는 교접음과 함께 더 깊숙한 곳으로 나를 내몰았다.
빌 듯이 일그러져 흐느끼는 얼굴을 내려다보며, 그는 골반을 양옆으로 느리게 흔들었다. 여린 속살에 그의 음모가 쓸리는 감각마저도 나를 진저리치게 했다.
“그럼 보여 주면 되겠네. 서이현이 얼마나 섹시한지.”
“…….”
무슨 의도인지 몰라 불규칙한 숨만 색색 내쉬는 사이, 그가 입술에 키스한 뒤 상체를 일으키며 멀어졌다. 안을 터트릴 듯 꽉 맞물려 있었던 굵은 음경이 점막을 뒤로 당기며 빠져나가는 과정이 생생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것 보라는 듯, 그가 땀에 젖은 얼굴로 나를 보며 씩 웃었다.
“아아아….”
전부 빠져나가고 귀두만 남았을 때, 나는 기대감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에 고개를 저으며 이상한 소리를 내기까지 했다.
입구의 위쪽을 날카롭게 긁으며 빠져나간 음경은 단단한 탄력을 과시하며 그의 아랫배를 세게 갈기고 진동했다. 페니스에 엉켜 있던 체액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아직 닫히지 않은 채 벌어져 있을 게 뻔한 구멍에서 점액이 새는 감각에 상박에 소름이 돋았다. 몸속에서 체액이 흘러 나가는 이 느낌이야말로 섹스에 대한 가장 생생한 실감 같을 때가 있었다.
생각해 본 적 없는 곳을 이용해 알파와 섹스하지 않았더라면 느껴 볼 수 없었을 야릇한 오싹함에 어깨를 움츠리며 다리를 오므렸다.
심각한 얼굴로 그런 나를 바라보며 자신의 성기를 훑던 그는 열려 있던 문밖으로 걸어 나가 테이블 위의 핸드폰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내 핸드폰이었다.
뭘 어쩌려는 건지 감이 오지 않아 느릿느릿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거치적거릴 것 같은 성기를 앞세운 그가 침대 위로 올라왔다. 화면이 잠겨 있지 않은 것에 잠깐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는 액정 위를 몇 번 터치했다. 그리고 문득 팔을 멀리 뻗으며 액정을 향해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꺾었다.
그가 촬영을 시작했다는 것을 자각하자마자 나도 모르게 엉덩이가 슬금슬금 뒤로 빠졌다. 그가 재빨리 내 다리 사이로 바짝 들어앉으며 허리를 안아 당겼다.
그의 다리가 나의 허벅지 아래로 파고들어 사타구니가 서로 가까워지면서 발기한 두 성기가 서로 스쳤고, 그것만으로도 나는 뒷목이 저릴 만큼 느껴서, 키스해 오는 그에게 항복하듯 입술을 벌렸다.
“으으, 응… 흑… 음.”
얼굴의 오른쪽을 비추고 있는 카메라에 신경이 쓰였지만, 발기가 너무 오래 유지되고 있는 탓에 극도로 민감해진 몸은 그와의 키스를 더 원했다.
아랫입술을 빨던 그의 흡입이 떨어져 나갔다. 노골적으로 아쉬운 눈을 하고 있을 것 같았지만, 그런 것을 수습할 여유가 없었다.
“이건 서이현 핸드폰이고… 찍고 난 후에 파일을 어떻게 할지는, 서이현 마음에 달린 건데.”
“…….”
내리뜬 눈꺼풀 아래서 그가 지그시 나를 보았다.
“어때요. 흥미 없어요?”
놀랍게도, 흥미가 있었다.
그가 흔들어 보이는 핸드폰의 화면에 우리가 어떻게 비칠지, 외설스러운 호기심이 나를 잡아끌었다. 내가 이렇게 성적으로 호기심과 도전 정신이 넘치는 놈이었나. 그와의 섹스는 늘 낯선 감각, 낯선 자신과의 조우였다.
허리를 만지작거리는 그의 팔을 쓰다듬으며, 코앞의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꾹 눌렀다. 키스가 더 깊어질 수 있도록 그가 턱을 기울였다. 입술만을 이용해 나를 부드럽게 훑으며 물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그의 벗은 어깨를 쓸어 올라가 탄탄한 긴 목덜미를 손으로 감았다. 그의 입술을 머금기 위해 입을 벌렸다. 두 입술이 위와 아래로, 아래와 위로, 위치를 바꿔 가며 서로 겹쳐지고 어긋났다.
우리는 키스할 때 눈을 감는 일이 별로 없었다.
미디어에서 보여 주는 이미지처럼, 실제로 사람들이 키스를 할 때 대부분 눈을 감는지는 모르겠다. 그가 어떤 이유로 눈을 감지 않는지, 그것도 잘 모른다. 나도 처음엔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단지 키스를 하고 있는 그는 어떨지 궁금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지금은 키스를 하는 순간에도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아까워서 눈을 감지 않게 됐다. 입술과 혀뿐만이 아니라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감각으로 그를 온전히 느끼길 원했다. 그것이 음란한 욕구라도 상관없다.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아마도 높은 확률로 그럴 것이다)과 침대 위에 있는데, 좀 음란하면 또 어떤가.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는 그의 말이 효과를 본 것인지, 나치고는 제법 발칙한 생각마저 들었다.
지금도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혀를 얽고 있었지만, 지금은… 이 침대 위의 세 번째 주인공처럼 느껴지는, 그의 왼손에 들린 핸드폰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섹스에 대한 흥분과 집중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를 비추고 있는 전면 촬영 모드의 화면이 피부를 긴장하게 하고, 그를 느끼는 감각들을 더 예민하게 벼려 놓았다.
“흐… 흐으, 음… 흐, 흑.”
숨을 틀어막으며 입 안을 가득 채웠다가 볼 안쪽과 입술 뒤의 점막을 간지럽게 긁으며 빠져나가는 혀의 유연한 애무에 신음하던 나는, 이 흐느낌까지도 영상 속에 기록되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문득 목구멍을 좁히며 소리를 낮췄다.
나의 의식을 눈치챘는지, 그가 미소하며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내 턱 끝을 가볍게 쥐고 입술 표면이 서로 스치도록 비비며 속삭였다.
“화면 봐요. 우리 키스하는 거.”
겁쟁이처럼, 손가락 사이의 틈으로 겨우 공포 영화를 보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눈을 돌렸다.
혀를 둥글게 말아 혓바닥 뒤를 핥아 올리는 구애의 동작에 혀를 내밀어 주자, 으으, 음… 흐음. 음. 곧바로 그에게 삼켜져 얼얼하도록 강하게 흡입되었다.
그가 내 혀를 조이면서 곁눈질로 위치를 조정하고 있는 화면 속에는, 그와 키스하고 있는 실제의 나 이상으로 생생하게 그와 얽혀 있는 또 다른 자신이 농밀한 키스 중이었다.
아니, 오히려 화면 속의 내가, 실제의 나보다 훨씬 더 성적으로 부각되어 보였다. 스스로 느끼는 나는 아직 머뭇거리며 방어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 같은데… 화면 속의 나는 노골적이고 과감하고,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쪽이 진짜일까.
개진개진 풀어진 흐리멍덩한 눈으로 그에게 혀를 빨리며 목 안쪽에서 신음을 울리는 내 모습은, 오늘 처음 만난 타인보다 낯설었다.
그의 입술과 나의 이 사이에 드러난, 미처 다 삼켜지지 못한 붉은 살덩이의 번들거림은, 몇 번의 클릭으로 의도치 않게 마주쳤던 소년 시절의 첫 포르노보다 강렬했다.
“흐으, 흑. 음. 으으음… 흐음.”
그가 핸드폰을 좀 더 멀리 밀어내자, 화면 속에 그의 얼굴이 나란히 드러났다.
평소처럼 서로 정면으로 마주 보는 대신, 핸드폰 쪽으로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인 우리는, 화면 속의 자신과 상대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며 그들을 통해 자극을 시험했다.
입술을 서로 비비고, 일부러 입술 밖에서 혀를 비비고, 엎치락뒤치락 얽어 대는… 로맨틱하지만은 않은 키스의 모든 과정이 액정 상단에서 깜빡이는 빨간 점과 함께 낱낱이 공개되었다.
화면 속 그들은 실제의 나와 그인 동시에, 나와 그를 모델로 만든 안드로이드 같았다. 자아를 강타하는 것 같았던 최초의 충격은 생각보다 너무나 간단히 흩어지고, 그 뒤에는 자신의 안드로이드를 앞에 둔 사람다운 호기심이 발동했다. 혹은, 태어난 후 20여 년 만에 거울을 처음 본다면 이런 기분일지도 모르겠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그 역시도 자신이 제안한 새로운 놀이에 노골적인 흥미를 드러내고 있었다.
혀를 내어 나의 입 안을 휘저으며 액정을 통해 내 반응을 확인하던 그는 뒷목을 부드럽게 쓰다듬다 가까이 당기며 입술로 내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놓길 반복했다.
“화면에서 눈을 못 떼네. 누구한테 반한 거야? 둘 중 누구야? 응?”
귀엽다는 듯 얘기하는 그의 놀림에 화면에서 시선을 돌리며 아닌 척했지만, TV 속에서 누군가 맛있게 식사하는 모습을 보면 식욕이 도는 것처럼, 액정 속 우리의 음란한 뒤엉킴에 성욕이 자극받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굳이 추궁해 대답을 들으려 하는 대신 목을 감고 있던 손으로 상체를 애무하며 아래로 내려갔다. 목덜미를 파고드는 그의 입술에 턱을 들어 응하면서 화면 속 자신과 눈이 마주쳤고, 왠지 모르게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려진 내 다리를 밀어 무릎을 접게 했다. 약간 움츠러드는 태도로 머뭇거리며 그가 이끄는 대로 자세를 바꾸어 앉자, 무릎을 세우고 앉은 나의 고환 아래로 손이 파고들었다.
“으으, 흐….”
고개를 젖히며 상체를 뒤로 기울이자, 무게 중심이 뒤로 옮겨진 만큼 다리 사이가 더 넓게 드러났고, 그의 손가락이 좀 전의 삽입으로 부드럽게 이완된 젖은 애널 안을 만지작거렸다. 고개를 숙이고 점검하듯 내벽 이곳저곳을 꼼꼼히 누른 그가, 일부러 은근한 뉘앙스를 담아 입구를 비비적거리다 손가락을 빼내며 나를 올려다봤다.
띠링. 띵. 첫 번째 영상이 끝난 동시에 곧바로 두 번째 촬영이 시작됐다. 그는 긴 엄지로 화면 오른쪽 하단의 아이콘을 터치해 카메라의 방향을 바꾸었다. 후면 카메라로 전환된 핸드폰이 갑자기 나의 가슴 앞으로 바짝 들어섰다.
실험적인 독립영화에나 쓰일 법한 극단적인 클로즈업과 불안하게 흔들리는 화면 속, 딱딱하게 뭉친 유두가 나의 시야에서도 아주 잘 보였다.
“하으, 하… 흐으….”
몸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는데 진한 애무를 받은 것처럼 신음이 들떴다. 시트 위를 짚은 팔이 후들거리고, 가슴이 움찔거렸다. 그는 거의 탐구적으로 보일 만큼 진지한 표정으로 각도를 이리저리 바꿔 가며 화면 속 나의 유두를 연출하는 데에 몰입하고 있었다.
“…….”
그의 손이 멈추고 시선이 천천히 위를 향해 나에게 맞춰진 것은, 화면 속에서 유두를 애무하기 시작한 나의 손 때문이었다.
예민해 보이는 불그스름한 빛깔로 뭉쳐진 유두는 바로 전날 밤의 긴 애무로 인해 살짝 부어 있었다. 중지를 이용해 그 도톰하게 불거진 살점을 아래에서 위로 반복해 쓸어 올렸다.
그는 화가 난 사람처럼 넓고 두꺼운 어깨를 들썩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화면을 통해 꺾어지고 둥글려지는 유두를 주시하던 그는, 카메라를 뒤로 빼고 직접 가슴에 덤벼들었다.
“흐읏, 흑… 흐, 읍.”
손가락 위에 그의 혀가 겹쳐졌다. 조그만 유두 하나를 놓고 뒤엉켜 애무하는 손가락과 혀를 카메라에 담으며, 그는 화면 속 자신을 의식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실제의 그와 화면 속 그를 번갈아 내려다보던 나는 유두를 이리저리 꺾어 그의 혀를 애태우던 손가락을 슬며시 그의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눈을 들어 힐끔 나를 올려다본 그가 입술을 넓게 벌려 유두와 내 손끝을 동시에 머금었다. 단단하게 뭉친 젖꼭지와 함께 그의 입 안에서 손가락이 굴려지는 감촉으로 등이 휘고 허리가 들썩거렸다.
어중간하게 헤집어졌다 비워진 아래는 다시 빡빡하게 채워지기를 원하며 자꾸만 움찔거렸다. 원하든 원치 않든, 이제 나는 페니스의 사정만으로는 후련한 쾌감에 도달할 수 없었다.
“으으, 흑… 으… 응.”
사정을 하더라도 정액이 나오지 않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미 너무 많은 프리컴이 흘렀다. 이젠 페니스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는 어떻게 이렇게 오래 발기를 유지하며 사정을 참는지, 이것도 골든 알파 특유의 성적 능력인 건지.
하지만 지극히 평범한 스물두 살의 베타인 나는 이제, 그의 페니스로 안을 문지르며 사정에 도달하길 원했다. 너무나 원했다.
극단까지 몰린 나를 동물적으로 감지한 그가 입술을 우물거려 손가락을 뱉어 놓은 뒤 유두를 압착하듯 세게 빨았다. 빠는 동시에 입 안에서는 날름거리는 혀끝으로 빠르게 유두를 긁었다.
“흐으윽, 흑… 하읏.”
발을 구르다시피 종아리를 버둥거리며 등을 둥글게 말고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대로 그의 몸이 나를 덮치며 밀어 왔다.
덤벼드는 무게를 못 이겨 시트 위에 쓰러져 누운 채 허리를 공중에 띄웠다. 턱을 이리저리 꺾어 가며 더 강하게 젖꼭지를 짓씹는 그의 가슴팍에 발기한 페니스를 마구 문질렀다.
“윽. 그… 흐. 흑.”
제대로 된 말이 되지 못한 감탄사 같은 신음이 입가로 흘러내렸다. 드디어, 그가 조금은 다급하게 안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직전에 삽입이 있었던 덕에 그는 세 번 정도에 나누어 끝까지 페니스를 밀어 넣을 수 있었다.
“하으, 흐… 흐윽. 흐….”
팽팽하게 꽉 들어찬 페니스의 압박감에 흐트러진 숨을 다 고르기도 전에 그가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잦아드는가 싶었던 신음은 금세 격렬한 섹스를 연상시키는 덜덜거리는 호흡으로 바뀌었다.
그는 이제 입술 밖에서 혀를 굴려 유두를 건드리며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좀 더 붉어진 유륜 전체를 자신의 얼굴과 함께 화면에 담고 있었다.
“서이혀언….”
가슴에서 올려다보는 그의 눈은 흐리멍덩했다. 허리를 묵직하게 흔들어 안을 쿵쿵 찧으면서 위로 올라온 그가 달착지근한 소리가 나도록 입술을 맞추었다 떨어뜨렸다.
“거봐, 예쁘잖아. 내 말이 맞네, 뭐.”
자신의 말을 확인시켜 주려는 것처럼, 그가 내 턱을 돌려 화면을 보게 했다.
“흣. 으으, 흑….”
속도를 높여 찌르는 힘에 의해 격렬하게 흔들리는 자신의 모습은 그에게 혀를 빨리던 키스 장면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음란했다. 화면 속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흔들리며 신음하는 얼굴뿐, 그의 페니스 둘레로 찌걱거리며 체액이 새어 나오고 있을 교접 부위를 비추는 것도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섹스 그 자체를 연상시켰다.
그동안의 섹스는, 내가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했기에 가능했던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화면 속의 나는 상상보다 훨씬 더 성적으로 해체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조금은 더… 담백하게, 쾌락 앞에 머뭇거리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그와 섹스해 왔지만, 착각이었다.
뒤늦게 손등으로 입술을 가려 얼굴 가득 흘러넘치는 섹스의 흔적을 숨겨 보려 했지만, 화면에서 눈을 떼지는 못했다.
“지금 네 안에 있는데도… 화면 속의 널 보면, 하고 싶어지는데.”
빠르게 나를 꿰뚫는 그의 흥분한 숨소리가 빗소리를 누르고 청각을 가득 채웠다.
“이래도, 서이현이… 안 섹시해?”
어절과 어절 사이마다, 뚝뚝 끊어 허리를 쳐올리며 그가 물었다. 화면 속의 우리가 겹쳐져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내가 섹시…해서든, 화면 속에서 상대화된 자신의 섹스 장면을 보고 있다는 비일상적 자극 때문이든, 이제는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믿기지 않게도 나는, 나를 보며 흥분하고 있었다.
“흐으, 흐으윽. 흐… 흐읍.”
틈 없이 맞물린 하반신을 질척하게 비벼 오는 그를 바라보면서 입을 가린 손등을 치워 버렸다. 망설여져서 입술이 달싹거렸다.
“나… 항상, 이래요?”
질문에 질문으로 응한 나의 회피에 그가 오히려 눈에 광채를 띠며 자신의 아랫입술을 혀로 축였다. 그 질문 자체가 스스로의 모습에서 발견한 선정적 일면에 대한 인정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아래를 치대는 허리의 움직임도 한층 더 진해졌다. 질퍽질퍽질퍽. 쿠퍼액으로 푹 젖은 안을 잘게 찧어 대는 교접음은 그 소리의 근원지인 당사자들이 듣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그가 허리를 뒤로 뺄 때마다 두툼한 귀두에 들러붙어 찐득하게 늘어지는 반투명한 점액이 눈에 보이는 것 같은, 그런 소리였다.
“왜. 지금 서이현이 어떤 것 같은데 그렇게 물어요?”
“으, 너무….”
“내가 불안한 게, 이제 이해가 돼?”
음란한 답변을 기대하며 상기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목을 끌어안아 당겨 입술을 포갰다. 띠링. 그가 핸드폰을 시트 위에 던져 버리고 나를 뒤덮었다. 굴곡을 가진 넓은 가슴이 맞닿으며 상체를 무겁게 눌러 왔다. 상체가 겹쳐진 만큼 아래의 마찰도 더욱 깊어졌다. 그의 허릿짓에 따라 두둑한 고환이 흔들리며 애널 아래를 때리는 탄력에 머릿속이 더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이런 거, 대표님 말고 다른 사람한테… 못 보여 줘요. 그러니까, 걱…정… 흐읏.”
나에게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파랗게 이글거리는 눈으로 내려다보던 그가 목덜미로 덤벼들었다. 살점을 물어 흡입한 뒤 입 안의 압력으로 아프게 짜내며 씹어 댔다. 자국이 남을 것 같은 통증이 아릿하게 비뚤어진 쾌감을 일으켰다.
허억, 허억. 한계 지점을 돌파해 끓어오른 그는 어떤 욕구도 억제하지 않고 있었다. 나를 뒤덮은 넓은 어깨가 눈앞에서 크게 부풀며 들썩거렸다.
“널 이렇게 만들 수 있는 것도, 이런 너를 볼 수 있는 것도. 나뿐이야.”
자신감에 넘치는 선언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뿐이어야 한다’는 간절한 바람처럼 들리는 목소리였다. 자리를 옮겨 목덜미의 다른 위치에 자신의 자국을 새기면서 그는 폭주했다. 내 위에 바짝 엎드려 하반신만을 빠르게 들썩거리는 그의 번들거리는 커다란 몸은 지독히 동물적이었다.
“흐으, 흐으윽. 흐… 읏, 하윽.”
사정의 감각이 코앞까지 닥쳐오며 넘어갈 듯 숨이 거칠어졌다.
두 주먹으로 시트 위를 짚으며 상체를 일으킨 그는 침대와 함께 나를 부술 것처럼 거칠고 빠르게 허리를 흔들었다. 허리만이 아니었다. 어깨에서부터 등과 허리, 엉덩이와 허벅지까지 전신에 커다란 굴곡을 일으켜 그 반동의 힘을 내 안에 퍼붓고 있었다. 나는 거의 발작을 일으키듯 간헐적으로 경련했다.
“서이현… 정신 차리고 나 봐 봐.”
“흐으, 흑.”
그는 뜨거운 손으로 내 손목을 쥐고 아래로 끌어 내려 손보다 더 뜨거운 성기를 더듬게 했다. 안으로 찌르고 들어갔다가 찐득하게 빠져나가는 굵은 음경의 밑동이 만져졌다. 펄떡거리는 뜨거운 기둥은 저만의 독립적인 맥박을 가진 듯했다.
파란 광채로 번들거리는 눈이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 알파야.”
“…….”
사정 직전의 치솟아 오르는 고양 속에서 그의 말은 일종의 작은 선언처럼 들렸다. 찌푸린 미간이 순간, 성욕 때문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한 번 더 강조했다.
“네 거라고. 네 골든.”
그가 말하는 나의 알파가, 내 베타를 벌리며 밀고 들어오는 움직임이 손안에 만져졌다. 최대치로 넓혀져 가장자리가 팽팽하게 당겨진 애널의 입구를 드나드는 굵은 성기를 본능적으로 쓰다듬었다.
그가 고개를 숙여 그런 내 손의 움직임을 내려다보며 스으으읍, 흐… 숨을 들이켰다.
내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만큼의 마디를 남겨 두고 허리를 털어 대는 빠른 움직임에, 젖은 내벽이 욱신거렸다.
“흐으으으… 흐윽… 크흐, 흐읍.”
“네 알파가… 서이현 베타에다 지금 어떻게 해? 응?”
비벼지고 문질러지며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여린 속살은 더 강하게 한계까지 몰아붙여지기를 갈구하며, 그가 원하는 답을 던져 주도록 나를 종용했다.
어깨 위를 짚은 그의 팔을 긁으며, 아래에서는 그의 음경의 뿌리를 안으로 당기며, 나는 덜덜 떨었다.
“섹…스… 하흐, 흑. 섹스해요…. 대표님 알파가, 여기, 베타에… 세….”
그가 욕설을 뱉으며 상체를 숙여 입술이 뭉개지도록 야만스럽게 키스했다. 그의 키스치고는 요령 없이 엉망이었지만, 그래서 더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욕구가 그대로 전해져 왔다.
“으으, 음. 응… 흐으. 흑….”
“서이현 섹스 당하는 소리, 더 들려 줘. 네가 내는 소리, 듣고 있기만 해도 갈 것 같은 거… 모르지? 흥분돼 미치겠어.”
이성을 완전히 허물어 천박하게 성에 집착하는 그의 고백이 자극에 자극을 더해 나를 내몰았다. 이미 알몸인 나를 그가 말로써 옷 벗기고 있었다. 나야말로 미칠 것 같았다.
“하윽, 흑! 크으, 흑.”
음경이 배 속에서 두근거리는 느낌으로, 노팅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했다. 영화 <조스>의 타이틀 배경 음악처럼 원초적 공포를 자극하며 다가오는 노팅의 느낌에 양팔로 시트를 틀어쥐고 허리를 마구 뒤쳤다.
나의 반응을 살피던 그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고, 띵, 다시 카메라가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 관음적인 제3의 시선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처음에 흘렸던 쿠퍼액이 허옇게 말라붙은 자리 위에 다시 새로운 쿠퍼액이 흐르는 나의 성기를 담아내던 후면 카메라가 다리 사이, 우리의 교접 부위를 향했다.
“으으으, 흐! 흐으….”
안에서 힘차게 맥박치는 노팅이 주는, 거의 난폭할 정도의 압도적 쾌감은 반복을 거듭해도 자극의 강도가 전혀 무뎌지지 않았다. 두근, 두근. 그가 내 안에 새로운 심장을 하나 박아 놓은 것 같았다.
광채가 흐르는 그의 눈이 약 6인치의 화면을 통해 노팅에 대한 내 모든 반응을 한 뼘 단위로 쪼개고 확대했다. 입술과 가슴, 아랫배,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체액이 엉킨 젖은 사타구니와 터질 듯 부풀어 움찔거리는 페니스가, 왜곡을 허락하지 않는 렌즈에 의해 그의 두 눈 앞에 낱낱이 까발려졌다.
눈을 크게 뜬 채 허리와 등을 펄떡거리면서 나는 귀두 한 번 문지르지 않고 사정했다. 내 심장보다 더 생생하게 나를 때리는 내 안의 맥박에 허공을 휘저으며 아래턱을 덜덜 떨었다.
“괜찮아…. 숨 쉬고, 서이현.”
“흐으, 흑… 대표님… 대, 표님….”
노팅 상태에서의 사정이 보여 주는 황홀한 쾌락의 꿈속에서 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그를 찾았다. 그가 핸드폰을 쥐지 않은 손으로 내 손에 깍지를 껴 시트 위에 누르면서 맞붙은 아래를 지그시 비벼 왔다.
“어, 괜찮아. 네 대표님 여기 있어. 괜찮아, 이거 뭔지 알잖아. 노팅이야.”
이미 사정을 마친 나의 안을 어르듯 잘게 흔들면서, 화면을 통해 노팅이 일으키는 나의 변화를 낱낱이 기록하면서, 그가 이름을 불러 달라고 속삭였다.
내가 사정했어도 그는 여전히 노팅 상태였다. 수축했다 확장하는 박자에 맞춰 울컥울컥 내 안에 토해지는 정액의 뜨거움이 생생했다. 깍지 낀 손을 놓고 나의 왼쪽 허벅지 뒤를 밀어 올린 그는 노팅의 쾌감에 자신을 완전히 내던지기 위해 질주하는 짐승처럼 허리를 털어 댔다.
어느새 어둑해져 창문 밖에서 새어 든 인공의 불빛이 그의 벗은 몸 위에 반사되었다. 핸드폰 화면의 빛을 받은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창백해 보였지만, 내 몸에 탐욕을 부리는 두 눈은 선명한 푸른빛이었다.
젖은 눈으로, 벌린 입술로, 그를 불렀다.
“아위.”
“…….”
“쿤.”
“…….”
불러 보고 나니, 알 것 같았다. 직함이 아닌 이름으로, 얼마나 그를 부르고 싶었었는지.
그에게 소중히 여겨지는 사람들의 특권 같아서 나를 작아지게 만들었던, 그의 이름들. 할 수만 있다면, 다양하게 불리는 그의 모든 이름들을 다 내 것으로만 하고 싶은 욕심을 알게 된다면, 그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어깨와 가슴을 크게 들썩이며 그가 쏘듯이 나를 보았다.
“서이현.”
“…….”
이번엔 그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노팅의 붉은 일렁거림을 담고 있던 카메라는 이미 우리를 비추고 있지 않았다. 나를 마주하는 건 그에게서 튀어 오르는 푸른 불꽃뿐이었다.
“시카고에, 같이 가자. 같이 가 줘.”
“…….”
“같이… 가 줄래?”
질문에 대한 답을 듣기가 두려워서인지, 아니면 노팅 상태의 알파가 느끼는, 나는 알 수 없는 쾌감 때문인지, 괴로워 보이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흔들리다, 메말라 갈라진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갈게요. 같이 있을래요.”
띠링. 촬영이 완전히 중단되는 소리와 함께 모든 것에서 차단된 우리는 서로에게 완전히 집중했다.
성기가 겨우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로 노팅이 잦아들 때까지 허리를 흔들어 나의 흥분을 계속해서 유지시킨 그는 음경을 빼지 않은 상태에서 나를 돌아눕게 했다.
벌써 전신에 힘이 다 빠져나간 것 같았지만, 뒤에서 아랫배를 안아 올리는 그의 팔에 의존해 시트 위를 짚고 버텼다. 쿠퍼액과 정액이 뒤섞인 애널 내부를 짓찧을 때마다, 진흙으로 가득 찬 구덩이 속을 주먹으로 쑤시는 것 같은 교접음에 자꾸만 입이 말랐다.
놀랍게도 그는, 건전지를 갈아 끼우기라도 한 것처럼, 흥분을 다시 고조시키기 위한 어떤 과정도 없이 곧바로 다시 노팅에 돌입했다.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바로 다음 노팅이 이어진 건 처음이었다.
“흐으으, 흐… 안, 돼… 죽을 것 같… 하으, 이상해. 이상해요…. 흐물거려….”
말 그대로 배 속이 흐물거리며 녹아내릴 것 같은, 그래서 나 자신이 형체를 잃고 액화할 것 같은 두려운 쾌감에 시트 위를 기면서 도망치려 했다. 나는 울고 있었다. 생리적인 눈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진짜 의미는 알 수 없었다.
그가 뒤에서 나를 뒤덮으며 나의 의식이 분산될 수 있도록 성기를 훑어 주었다. 귀와 뺨에 키스가 퍼부어졌다. 배 속에서 그의 알파가, 아니 나의 알파가, 모든 내장이 화끈거리도록 마찰을 일으키며 팽창하고 있었다. 연약한 내장과 함께 자아가 폭발해 파괴될 것 같았다.
“미안해…. 조금만 참아 줘. 나 때문에 한계까지 가 줘. 다 보여 줘…. 도망치지 마.”
도망치지 마, 서이현. 제발.
한숨과 뒤섞인 애타는 목소리로 그가 무너지듯 반복해 중얼거렸다. 도망치도록 놔주지도 않고 있으면서. 어차피 내 안에서 노팅 중인 페니스에서 도망칠 수 있는 방법도 없는데.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건지. 바보처럼.
뒷목과 어깨 위의 여러 지점을 깨물고 빨고 짓씹어 울긋불긋한 점을 새기면서, 그는 이전 노팅이 남긴 뜨거움과 떨림이 아직 가시지 않은 내 안에 또 한 번 새로운 심장을 박아 넣었다.
그렇게 모든 욕구와 충동과 에너지를 바닥까지 전부 소비하고, 완전한 소강상태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소요됐는지 알 수 없었다. 진을 다 빼 놓은 이 섹스가 어떻게 시작됐었는지조차 가물거렸다.
아니, 실은 기억한다.
서로에 대한 구속과 독점의 욕구였다. 그러한 권리가 있음을 확인받고 싶은, 유치하면서도 절실한 욕망이 시작이었다.
소유욕의 허기를 실컷 채우고 난 뒤, 핸드폰에는 총 다섯 개의 영상이 남았지만, 차마 그것을 재생시켜 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러나 삭제하지도 않았다.
몇 시간씩 이어진 격렬한 운동을 마치고 귀가한 사람처럼 한참을 시트 위에 그대로 엎드려 있어야 했다. 아니, 운동보다는 심한 구타를 당한 것 같은 느낌에 더 가까웠다. 몸속이 떨리고, 온 피부가 욱신거렸다.
그는 노팅이 잦아든 뒤에도 바로 빠져나가지 않고, 한참을 그런 내 위에 엎드려 느리게 애무하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얼굴과 상체에 오래도록 키스했다. 내 눈동자에 어느 정도 초점이 돌아오고, 호흡이 안정된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른한 신음과 함께 완전하게 시들지 않은 성기를 빼낸 뒤 내 위에서 내려갔다.
곤죽이 된 나와 달리 지친 기색이 없는 그는 침실 밖으로 나가 타월과 마실 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허리에 두른 타월 위로 발기한 성기의 윤곽이 뚜렷하게 솟아 있었다. 짧은 간격을 두고 두 번 연속의 노팅을 치른 뒤였지만, 섹스로 그의 발기를 가라앉히는 것은 오늘도 실패였다.
육체의 구석구석에 잔류해 흐르는 섹스의 강한 여운을 애써 모른 척하며, 우리는 침대 가장자리에 나란히 걸터앉아 그가 가지고 온 생수를 들이켰다. 확실히 우리 둘 다 수분이 필요했다. 몸속의 체액을 모조리 짜낸 기분이었으니까.
3:13. 5:37. 어떤 것은 12:02.
핸드폰의 비디오 앨범 속 각 영상의 재생 시간을 속으로 헤아려 보고 있는 내 옆에서 그는 자신이 남긴 자국 위를 옮겨 가며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가 스튜디오에 불을 켜 두어서 침실에는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빛이 스미고 있었다. 더 이상 퍼붓고 있지는 않았지만, 비는 여전히 부슬거렸다.
“이건 너무 진하게 남았다. 할 때 아팠겠어.”
터치해 보기 두렵게 만드는 동영상의 섬네일들을 한참 보고 있자니 갈증이 밀려와 물을 더 마신 뒤 그를 돌아보았다.
쇄골 바로 위에 남은, 피멍처럼 유난히 짙은 키스마크를 가리키며 미안한 듯이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가끔 보이지 않는 곳에 한두 개의 마크를 남길 때는 있었지만, 오늘처럼 목덜미와 쇄골, 어깨, 가슴에 걸쳐 여러 개를 새기기는 처음이었다.
서로 여과 없이 질투를 드러낸 뒤의 섹스였기에, 피부 위에 흔적을 남기는 빈약한 수단으로나마 소유권을 주장하고 싶었던 건가 싶어, 몸에 남은 자국에 입을 맞추는 그의 모습이 어쩐지 귀엽게 보였다. 그 소유욕을 표시할 당시에는 전혀 귀엽지 않았지만.
피식 힘없는 웃음이 흘렀다. 얼룩덜룩해진 상체를 내려다보며 나름 농담을 해 보았다.
“마음에 드세요?”
나의 어깨를 돌려 유두 위쪽에 남긴 흔적에 입 맞추던 그가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나를 올려다봤다. 그러고는 상체를 뒤로 젖혀 거리를 두며 자신과의 섹스가 내 몸 위에 남긴 붉은 자취를 훑어보았다.
“아주 많이. 작품으로 어디에 출품할까 봐.”
흠 없이 잘생긴 탓에 그는 생김새만으로도 이미 진지했다. 가벼워 보일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그런 얼굴로 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그런 농담을 할 때면 아직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잘 알 수 없었다.
“사실 공유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내 쪽으로 더 바짝 다가와 맨 어깨에 입을 맞추면서, 그가 웃으며 말했다. 커다란 몸을 웅크리듯 다리 사이로 두 팔을 늘어뜨리고 내 어깨에 뺨을 기댄 그의 모습에 사랑스러움을 느껴 나 역시 웃었다.
민망하게도, 웃을 때마다 아래에서 그의 노팅이 짙게 뿌려 놓은 체액이 질금질금 새어 나왔다. 실은 어떻게 막아 볼 수도 없이 주르륵 흐르는 정도였다. 깔고 앉아 있는 타월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저절로 상체를 곧게 세우게 되는 감각을 그에게 들키지 않으려, 손안의 생수병과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출근을 안 해도 되는 직업이라… 이럴 땐 좋네요.”
장난스럽게 눈을 빛내며 웃던 그가 내 허리를 만지작거리며 코끝을 마주 비볐다.
“섹스하기에 좋은 직업이라고, 지금 그런 소릴 하는 건가? 서이현 진짜 너무 야해졌다.”
딱히 부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사실이었으니까. 후희를 즐기듯 가볍게 키스해 오는 그의 입술에 응하며 목 안쪽에서 느긋하게 신음하다, 문득 그와 함께한 첫 번째 시각적 기록이 섹스 영상이라는 생각에 조금 씁쓸해졌다. 좀 전의 그 영상들에 죄책감이나 꺼림칙함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우리 관계가 섹스가 전부가 아니라는 증거를 하나쯤 갖고 싶었다. 맥락 없는 충동이었다.
“대표님.”
“…….”
꿈틀거리는 눈썹이, 섹스 후에 평소대로 돌아온 호칭에 대한 불만을 얘기하는 것 같았지만, 그는 말로 생각을 드러내려 하지는 않았다.
“같이… 사진 한 장 찍으실래요?”
의외의 제안이었는지 그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곧 미소를 지으며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내 뒤로 옮겨 앉아 허리를 껴안았다. 어깨 위에 턱을 괴듯 뺨을 밀착시키며 그가 사진을 찍기 위한 자세를 잡는 동안, 카메라를 열어 렌즈의 방향을 바꾸었다.
열린 문밖의 어지러운 테이블 위를 비추던 화면이 우리 둘의 흉상으로 바뀌었다. 하루하루를 꼭 붙어 지낸 지 벌써 한 달 정도였지만, 함께인 우리를 눈에 담을 일은 없었기에 신선한 투샷(Two-shot)이었다.
벗은 가슴 위까지 잡힌 구도 탓에 사진의 느낌이 조금 야릇했다. 팔을 뻗은 정도를 조절해 봤지만, 얼굴만 꽉 차는 구도도 별로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니까 이거, 제 첫 번째 셀카예요.”
“나는? 난 두 번째일 것 같아?”
그가 허리를 좀 더 강하게 껴안으며 나를 돌아봤다. 그러고 보니 핸드폰을 쥐고 셀카를 찍기 위해 각도를 찾는 그의 모습은 상상이 안 돼서 픽 웃음이 났다.
자연스러워 보이는 그와 달리 화면 속 경직된 자신을 바라보다 팔을 끌어 내리며 고개를 숙였다.
“어색한데… 그냥 하지 말까요?”
“왜, 나 벌써 기대하고 있었는데.”
진심으로 실망스러워하는 그의 목소리에 다시 주춤주춤 팔을 들어 올렸다.
“둘 다 윗옷을 안 입고 있으니까, 그렇게 건전해 보이진 않네.”
액정 속의 우리를 톡톡 두드리며 웃은 그가 내 볼에 입술을 눌렀다. 오른팔이 나의 가슴을 가로질러 왼쪽 어깨를 감쌌고, 화면발마저 잘 받는 잘생긴 얼굴이 화면 속에서 나에게 입을 맞출 듯 바짝 다가왔다.
“좀 더 웃어 봐요.”
경직된 내 표정을 풀어 주기 위해 그가 옆구리를 쓰다듬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어떻게 해도, ‘우리 방금 섹스했어요’ 티 내는 커플이긴 하겠지만.”
찰칵. 조금은 어색하고 싱거운 웃음과 함께 우리 둘의 모습이 4:3의 비율로 박제되었다.
커플. 그가 의식하고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노팅의 후유증만큼이나 인상적인 잔류감을 남기는 단어였다.
좀 전에 찍은 사진을 자신의 번호로 전송하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가장 가까운 곳에 있음에도 그가 그리운 느낌을 받았다. 내 안에서 두 번이나 노팅을 하고 난 직후인데도 그가 부족한 것 같았다. 그가 내게 거리감을 두어서 느끼는 허기가 아니었다. 스스로에게조차 말로 설명할 수 없어 그저 그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 ■ ■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버거운 주제에 뒤처리를 해 주겠다는 그의 친절을 거절해 봤자 괜한 고집일 것 같았다.
그가 몸 안을 부드럽게 훑어 내는 동안 어떻게든 샤워기의 거치대 기둥이라도 붙잡고 스스로 몸을 추스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버티지 말고 편하게 기대라며, 그는 안쓰러워 죽겠다는 목소리로 몇 번이나 관자놀이와 뺨에 입을 맞추며 능숙한 손길로 안을 씻어 냈다.
침대 위에서 이미 많이 새어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샤워기에서 흐른 물줄기를 따라 배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탁한 액체의 양은 굉장했다. 내 몸 안에 저렇게 많은 양의 정액이 고여 있을 수가 있구나, 신기할 만큼.
뒤처리를 끝낸 내가 욕조에 앉은 뒤에야 그는 샤워를 시작했고, 대강 물기를 훔친 몸 위에 가운을 걸치고 나가 시원한 맥주 두 캔을 가지고 돌아왔다.
나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아 앉으며 그가 맥주를 건넸다.
“이 방에서 같이 목욕하는 건 처음이네.”
내가 사용하고 있는 아래층에서 섹스를 한 것 자체도 처음이었다. 위층 그의 욕실보다는 좁았지만, 여러 톤의 푸른색 타일을 사용해 모든 벽과 바닥, 천장을 마감한 이 욕실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고급 월풀 욕조가 아닌 아기자기한 크기의 타일이 붙은 좁은 욕조 안에서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아 어색해하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것도 즐거웠다.
“집요하게 들릴 것 같긴 한데….”
“…….”
“무슨 얘기 했어요. 최인우하고.”
그 질문을 꺼내기가 스스로도 멋쩍었는지, 그는 나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냥… 그림, 얘기요.”
“서이현 첫 번째 작품, 딴 남자한테 냉큼 안겨 주겠다는 얘기?”
욕조 턱에 팔꿈치를 기대고 머리를 삐딱하게 기울인 그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빙 꼬고 있었다. 불만 가득한 얼굴이 열 몇 살짜리 소년 같아서… 이런 모습이야말로 사진으로 남겨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배터리가 거의 소모된 핸드폰은 침대 위에 있었다.
“형이 사고 싶다고 하시긴 했지만… 아직 그런 수준이 안 되는 것 같다고, 일단은 그렇게 말씀드렸었어요.”
머리카락을 꼬고 있던 손을 놓으며 그가 고개를 바로 했다.
“그럼 아까 내가, 예약 같은 걸 체결하면 곤란하다고 했을 때 억울했겠네.”
“억울한 것까지는….”
내가 너무 온순해서, 오해를 사고 피해를 보는 상황에서도 입을 다무는 것에 익숙한 것 같아서, 밖에 나가 상처를 받는 일을 겪을까 걱정이 된다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말하는 것처럼 온순하고 착해서 입을 다물고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단지, 평범한 사람들보다 체념에 익숙하고, 문제들이 겉으로 불거지는 것이 두려워 피하는 것이 몸에 밴 비겁자일 뿐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그에게 사실 나는 이런 인간이라며 실체를 고하는 대신, 잠자코 맥주를 마시며 그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누리는, 그런 비겁자.
“최인우가 가져온 와인. 유혹할 때 많이 주문하는 술인 거 알아요?”
아까… 1층에서 내려왔을 때 라벨을 읽고 있던 게, 그걸 확인하던 거였나. 눈꺼풀 위로 흐르는 물방울을 손으로 씻어 내며 고개를 저었다.
“유혹… 그런 거 없었어요. 아무것도.”
“알아. 설사 그 자식이 유혹했더라도 넌 단호했을 거라는 것도.”
거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확고한 목소리였다.
“그걸 알면서도 왜 그렇게 조절이 안 됐던 건지.”
그렇게 말하며 욕조 틀 위에 올려 두었던 맥주를 들어 여러 모금을 들이켜는 그는 자신의 질투를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천장에 가깝게 높이 매달린 작은 창으로 빗소리가 여전했다.
그가 맥주 캔을 원래의 자리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시카고 얘기.”
“…….”
“아까는 노팅 상태에서 얘기한 바람에 충동적으로 꺼낸 말처럼 들렸을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거 알아줘요.”
처음 그의 이름을 부르며 느꼈던 소유의 충족감과 그 후 마치 고백처럼 되돌아왔던 권유의 순간이 떠올랐다. 입이 말라 맥주를 더 마셨다.
“사실 이 집으로 들어와서 서이현 씨 다시 그림 그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 혼자 생각하고 있긴 했는데… 권주한 그림 완성되어 가는 거 보면서… 비공식적인 파티 자리에서라도 좋으니까, 이번 기회에 서이현 씨 그림도 소개하고 오면 좋을 것 같다고 구체적으로 바라게 됐거든. 그리고 화가로서의 성과를 떠나서, 여행은 자극이 되기도 할 거고. 창작자에게 경험보다 중요한 재료는 없으니까.”
흐릿하게 웃은 그는 가닥가닥 뭉쳐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리고 재미있는 기억이라도 떠오른 사람처럼 허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멋지지 않은 모습 다 보인 마당에 더 솔직해지자면.”
쑥스러워하며 꺼낸 말과 다르게, 시선을 옮겨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움츠러듦 없이 강렬했다. 자신의 감정에 망설임이 없음을 분명하게 전해 오고 있었다.
“내가… 서이현하고 떨어져 있고 싶지 않은 이유 때문이기도 하고. 단 며칠뿐이더라도.”
확신을 실어 말했으면서, 말을 하고 난 뒤에 그는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맥주를 삼키는 길고 탄탄한 목덜미를 바라보며 나 역시 맥주를 두어 모금 마셨다.
고작 며칠의 이별이 자신 없었던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떨어지고 싶지 않다, 가까운 곳에 있고 싶다… 그런 투정 같은 욕심 때문만이 아니라, 막연한 공포마저 느꼈을 정도로, 그래서 되도록 그의 출장에 대해 의식하지 않으려 했을 정도로, 나는 다가올 그의 부재에 본능적인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 상대와 연애를 하게 되더라도, 내가 이렇게까지 밀착된 관계를 원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가 먼저 말해 줘서, 사실 나는 안도하고 있었다.
“지난번에, 전시회 다녀온 뒤에 제가 그랬었잖아요.”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침묵보다 차라리 거짓이 낫다고.”
맥주 캔을 욕조 가장자리에 올려 두고 손으로 물을 떠 올려 얼굴에 끼얹었다. 흐르는 물기를 손바닥으로 쓸어 냈다.
“아마 그건, 제가 침묵하는 사람이어서 그랬을 거예요.”
“…….”
입술을 한 번 꾹 닫았다, 이어 말했다.
“침묵하는 저 자신이 싫었기 때문에.”
나를 보는 그의 눈은 내가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려 하는지를 이미 아는 듯했다. 아마도 그의 거실에서 난데없이 과호흡을 일으켰던 그때부터 궁금했을 이야기. 그러면서도 묻지 않고 기다려 주었던 그의 배려.
차분하게 응시하는 그의 잔잔한 푸른 눈이, 들을 준비가 되었음을 전해 오고 있었다.
과거를 이야기하기 위해, 큰마음을 먹거나 적당한 타이밍을 만들기 위해 계획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가, 그를 향한 내 마음의 표현이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서로에 대한 것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이야기라도 소중한 비밀이 되는, 그와 내가 그런 관계라고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
“충돌 사고였는데… 가해자 트럭의 제동장치 고장이 원인이었어요. 누군가 법규를 지키지 않은 것도 아니었고, 잔인한 의도를 가진 범죄자가 얽힌 사건도 아니었어요….”
욕조 틀에 팔을 걸치고 있었던 그가 쥐고 있던 맥주 캔을 놓고 팔을 거둬들였다.
“어머니는 희생됐는데… 사고의 원인 제공자는 있어도, 욕하고 미워하고 증오할… 끔찍한 동기를 가지고 고의적으로 일을 벌인 가해자가 없다는 게… 그게 오히려 힘들어서… 갑작스러운 상황을, 감정을… 어쩔 줄 몰랐던 것 같아요.”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던 태국 레스토랑에서 전화로 사고 소식을 전해 들은 아버지가 자세한 설명도 해 주지 않은 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뛰쳐나가고,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직접 이곳저곳에 수소문해 어머니의 사고를 확인했었다.
그리고 나는 택시를 타고 혼자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의 장례에 참석하기를 거부한 아버지가 다음 날 새벽 유령 같은 몰골로 돌아왔을 때까지 불안과 혼란 속에 떨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어떤 사고가 일어났고, 어떻게 그 자리에서 즉사했는지, 혹시 앞의 기사가 오보였다는, 어머니가 살아 있다는 정정 기사가 나지는 않았을지… 반복해서 기사를 검색하며 밤을 보내는 것은… 이미 죽은 뒤에 무덤 속에서 또 한 번의 사망 선고를 기다리는 것 같은, 눅눅한 죽음의 그림자가 피부를 서서히 뒤덮는 것 같은, 끔찍함이었다.
인터넷 기사뿐 아니라 TV 뉴스에서도 사고 소식을 전했었다. 요즘 세상에 교통사고는 이목을 모을 대단한 뉴스거리도 못 됐지만,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일어난, 5명이 중상을 입고 3명이 사망한 대형 충돌 사고라면 얘기가 달랐다.
뉴스 말미에 아나운서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덧붙이며 제법 유감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그것은 곧 평소의 꼼꼼한 차량 점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는 연관 뉴스로 연결되며 그의 말끔한 얼굴 위에서 사라져 버렸다.
가해자의 차량 정비 소홀이 원인인지, 차체의 결함이 원인인지가 사건의 핵심이라고들 했지만, 어디까지나 가해자 입장에서의 해석일 뿐이었다.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은 원인이 무엇으로 규명되느냐에 그의 인생이 달려 있었으니까.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어머니의 사망이 확인되자 곧바로 장례를 준비했고, 간단한 삼일장이 치러졌다. 작업실에 틀어박혀 입을 닫아 버린 아버지는 내버려 두고, 외조부모는 나를 장례에 참석하게 했다. 상주는 외할아버지였다. 큰아버지 댁으로는 아무 연락도 가지 않았다.
장례가 모두 끝난 뒤 상복을 입은 그대로 집에 돌아왔을 때까지도 아버지가 작업실에서 나오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혼자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막막해 한이 형에게 연락을 했었다.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해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아무것도 드시지도 않고, 뭘 물어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무 무섭다. 너무 무섭다….
형에게 이야기하는 동안, 내 말은 점점 감정적인 횡설수설이 되어 갔고, 몸에 맞지 않는 어색한 검은 양복을 입은 채 침대 위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나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눈물을 흘렸었다. 아마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지한 상태에서 처음으로 흘린 눈물이었을 것이다.
그 전까지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사고와 자세한 설명 없이 나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기만을 요구하는 주변 상황 때문에, 어머니의 죽음 자체를 전혀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이틀 뒤 집으로 찾아온 외조부모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앞에 두고 이걸로 완전히 인연을 끊자는 얘기를 하고 돌아갔다. 이렇게 된 마당에 자신들은 한국 생활에 아무런 미련도 없고, 유럽으로 가서 작품 활동을 하며 여생을 보내겠다고 했다. 사고와 관련된 법적 문제와 서류상의 문제, 가해자와의 합의 문제도 전부 자신들이 처리하겠다고. 현관을 나가기 전, 나를 바라본 그들의 눈은 잠시 복잡한 빛을 띠기는 했지만, 그보다 더 차갑게 등을 돌렸었다.
사고로 인한 갑작스러운 죽음이었고, 어떤 누구도 대비해 둔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혼돈 속에 있었고, 모두가 저마다 어떻게든 현실적 균형감을 찾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아버지만을 제외하고.
며칠이 지나도 아버지는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서툴게 차린 식사를 가져다드리면 맨밥을 조금 먹기는 했지만, 여전히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걱정과 무서움으로,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감정조차 막혀 있었다.
“그때… 어차피 제대로 잘 못 자기도 했지만, 밤에 자다가 깨면 일어나서 작업실 문을 열어 봤었어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 버린 아버지 옆에서 자는 것은 무서웠지만… 그래도 혹시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을까, 그것도 겁이 났거든요…. 혹시 죽어 가면서 괴로워하고 있는데… 내가 그걸 모르고 있는 건 아닐지….”
담담하려 애썼지만, 어쩔 수 없이 목소리가 떨렸다. 젖은 손으로 얼굴을 문질러 눈가에 어린 물기를 숨겼다.
“어머니가 없는 세계가 아버지에게는… 아무 가치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얼마든지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큰아버지가 오시고 할아버지 댁으로 옮겨 가게 됐을 때, 차라리 안심했어요…. 이제 그 모든 무게를, 나 혼자 짊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아버지의 상태가 전혀 나아지지 않자, 어쩔 수 없이 큰아버지가 일을 놓고 집으로 오셨다. 병원에 가기를 완강히 거부하는 아버지 탓에 없는 연줄을 여기저기 이어 돈을 더 들여 의사를 집으로 불러야 했다.
아버지의 증세에 대해 의사는 심리적 실어증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감정에 큰 충격을 입힌 사건을 겪은 후, 실제로 육체에는 아무런 결함이 없는 사람의 청각이 마비되는 현상. 주어진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 자체를 잠재의식이 사전에 차단해 버리는 무의식 활동이라는 것이… 심리적 실어증이라는 진단을 큰아버지에게 전해 들은 뒤 내가 인터넷으로 조사해 본 대략의 내용이었다.
잠재의식이 의식의 반응을 차단해 버린다는 것은 아마도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 행위일 거라고.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즉, 듣고 말하는 것을 중단해 버리는 것이, 아버지에게는, 듣고 말하며 세상과 소통하는 것보다 더 안전한 일로 느껴졌다는 뜻이었다.
그 세상에, 아들인 내가 포함되어 있더라도 말이다.
「아무 문제가 없는데, 네 아버지 스스로 입을 닫은 것일 수도 있다더라. 다 들리고, 말도 다 할 수 있는데, 그냥 안 하기로 마음먹은 것일 수도 있다고.」
의사가 다녀간 그날 밤, 큰아버지는 우리 집 부엌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그렇게 말했었다.
알 것 같았다.
배우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그들의 유품을 꺼내 보지도 못하는 많은 사람들과 달리, 어머니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작업실에서 나오지 않으려 하는 아버지의 고집을 바라보면서… 알게 되었다. 아버지에게 나는 어머니와의 사랑으로 인해 얻게 된 부수적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어머니와의 사랑이 위협 없이 온전할 때는 나의 존재 역시 어머니와의 사랑의 일부분으로서 그에게 소중하지만, 어머니가 부재하게 된 상태에서의 나는 가치가 희미해져 버리는 것이다.
아버지가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남은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아내를 잃은 슬픔을 치유해 나갈 수 있을 정도의 사랑은 아니었던 것일 뿐. 아내를 잃은 슬픔이 아버지의 세계를 뒤덮어 버렸고, 그리고, 그 세계에 나도 포함되어 있었을 뿐.
그 모든 일련의 사건이 지나간 뒤, 나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되었다. 더는 그리고 싶은 것이 없었고, 그건 나에게 말하고 싶고 표현하고 싶은 것이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사랑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한쪽이 사라지는 것으로 다른 한쪽을 괴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것이 사랑이라면, 보험을 들어서라도 대비해야 하는 위험 같았다. 그러나 보험은 사고의 뒤처리에 대한 수고를 덜어 줄 뿐, 사고에 대한 예방이 될 수 없음을 어머니의 사고를 통해 뼈에 새긴 뒤였다.
그 겨울이 끝나기 전에 나와 아버지는 할아버지 댁으로 거처를 옮겼다. 나 혼자서는 아버지를 감당할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어떤 제안에도 완강하게 버티던 아버지가 바닷가의 그 마을로 돌아가자는 큰아버지의 말에는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중학교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 우리 세 식구가 오랫동안 함께 살았던 집을 떠났고, 아버지는 그 후로도 6년이 넘도록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무릎을 세우고 앉아, 발목 앞에서 양손을 느슨하게 깍지 끼고 이야기를 이어 가던 나는 머뭇거리며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가 너무 힘든 표정을 짓고 있지 않기를 바라면서.
“…….”
“흠…….”
바람과 달리 금방이라도 격렬하게 분출될 것 같은 감정을 통제하느라 힘겨워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며, 나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경직된 어깨를 무너뜨리며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림을 그만뒀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그리고 이야기를 듣는 동안 물기가 말라 버린 얼굴을 손으로 거칠게 쓸어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네가… 어쩌다 보니… 시간이 흐르면서 친구들과 노는 게 더 재미있어지고, 그림이 시시하게 느껴져서… 사춘기의 변덕으로 자연히 붓과 멀어지게 된… 그런 것이기를 바랐어. 혹시라도….”
“…….”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될까 봐 무서웠으니까.”
그런 바람을 가지는 것으로 나의 현실을 외면하려 한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다는 뉘앙스였다. 이 이야기의 어디에도 그의 잘못이 개입된 부분은 없었는데도.
나의 오른쪽으로 느슨하게 뻗고 있었던 그의 종아리를 최대한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가에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렇지도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이젠 막, 죽을 것 같지는… 않아요. 이겨 낸 건 아니지만, 무뎌지기는 했거든요.”
“…….”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듯한 얼굴로 그는 나를 보고 있었지만, 그런 말이 내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으며 정제되지 않은, 나중에 후회할 감정을 쏟아 내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억제하고 있었다. 표정만으로도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벽돌 사이를 시멘트로 메우고, 그 위에 타일을 발라 만든 욕조는 혼자 쓰기에는 충분했지만, 그가 다리를 쭉 펼 수 있을 정도로 길지는 않았다. 어정쩡하게 굽힌 그의 긴 다리를 마사지하듯 쓰다듬으며 이젠 많이 꺼져 버린 빈약한 거품을 내려다봤다.
“<소외>는 사고 이전에 그린 거고, 그때만 해도 부모님 사이에서 제가 느꼈던 감정은 치명적인 수준이 아니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몰라도 저는… 꼭 강렬함만을 그림으로 그리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냥… 다른 친구들이 그 나이 때 부모님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고 저마다 다른 이유로 자기 부모의 교육 방식에 불만을 갖는 것처럼… 저 역시 그 연장선에서 부모님의 유대에 철없는 질투를 느꼈던 정도였어요….”
그런 어느 가정에서나 있을 법한 성장기 특유의 자기중심적인 감정으로 그렸던 그림이, 어떻게 과호흡까지 일으킬 정도로 공포를 자극하게 됐는지. 그는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후련해 보이지는 않았다.
세운 무릎 위에 한 팔을 올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오른손으로는 그의 발목을 주물렀다.
“그 과정에서,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아마도 제 내면을 부자연스러운 형태로 일그러뜨렸을 거예요. 그리고 전… 그 상태로 굳어 버리도록 자신을 방치해 왔었구요….”
“…….”
그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나를 바라보는 눈 속에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들이 떠올랐다 사라져 갔다.
이런 얘기를 듣고 당사자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그것이 사람들에게 부담스러운 숙제가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부모님의 이혼에 대한 충격으로 성격이 바뀌어 버렸던 친구 앞에서는 모두가 실수로라도 그런 쪽의 화제를 꺼내지 않기 위해 조심하곤 했었다. 배려로서든, 불편함 때문이었든.
“무엇을 느낀다는 게, 주변과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감정의 변화를 겪게 되는 게, 두렵고 조심스러웠어요. 제가 원한 건…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없이 계속 무사한 날들이 이어지는 거였어요. 그게 나를 지키기 위한 최선이라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더 숙여 무릎 위에 턱을 얹었다. 모래와 형, 유니 누나와 주한이 형. 자기 앞에 놓인 삶의 방해를 돌파하기 위한 그들의 몸부림 앞에서 느꼈던 자신의 초라함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제가 추구하려고 했던 건, 평화로움이나 무사함이 아니라 무미함이었다는 걸… 알 것 같아요. 아버지와는 또 다른 형태의 침묵이었을 뿐이라는 걸. 스스로 저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거죠….”
그들이 택한 방식만이 절대적으로 옳은 유일한 답은 아닐지 모른다. 그들의 현재가 완벽한 모습인 것도 아니다. 내가 보고 들은 모든 선택 뒤에는 누군가의 희생이 남아야만 했었다. 중요한 건, 내가 그들의 선택과 그 선택을 책임지려는 그들의 노력에서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택한 방식을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최선이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극단적 침묵이라면, 나는 좀 더 약화된 ‘작은 침묵’이었다.
“그때 넌….”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는 것 같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드물게도 살짝 떨리고 있었다.
“겨우 열여섯 살이었어. 그런 상황을 처리하고 정리하는 데에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고. 그런 의무를 포기해 버린 너의 아버지와 주변 어른들의 잘못이지, 넌 정서적으로 환경적으로 보호받고 지켜졌어야 할 존재였어.”
그의 목소리와 표정은 분노를 억누르려는 사람처럼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오래 분노하고 원망도 하고 그랬었어요. 분노와 원망의 대상은 대부분 아버지였지만, 어떤 때는 걷잡을 수 없이 확장되다가 나중에는 대상이 어디까지인지도 알 수 없을 때가 있었어요. 하지만 모든 사람이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물론 그렇게 된다면 좋겠지만… 전 그럴 수 없었던 거고….”
무거운 과거를 공유하는 것이 사랑의 필수 과정인지, 나는 모른다. 두 사람이 모두 괴로워지는 것보다는 둘 중 한 사람만 그것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그에게 이야기하는 동안 알 것 같았다. 지나온 과거의 고통에 대해 그에게 공감을 받고 싶었던 게 아니다.
굵기를 가늠하듯 날렵한 그의 발목을 손으로 가만히 감싸 쥐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건방진 얘기고, 아직은… 많이 이른 얘기겠지만….”
“…….”
“지금은, 아주 조금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아요. 물론 다는 아니지만. 아직도… 묻고 싶은 게 많고, 원망과 미움이 너무 커서 그 질문들을 꺼내고 답을 듣는 것도 무섭지만… 그냥 조금, 알 것도 같다는 아주 막연한 느낌은, 들어요….”
이상하게 숨이 차올랐다.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깊이 들이마셔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 타인이… 자신의 삶에서, 다른 어떤 무엇보다, 어쩌면 자신의 자녀보다도 더 중요해진다는 것의 의미 같은 걸….”
그의 눈꺼풀이 구겨졌고, 눈빛이 거칠게 흔들렸다. 어떻게든 감정을 억누르려 애써 왔던 자제를 완전히 포기한 사람 같았다.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손에 쥔 발목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시카고, 같이 가자고 해 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노팅 상태에서 충동적으로 대답한 건 아니었어요.”
과거에 대한 고백보다 어쩌면 나에게는, 이성이 본능을 제어하는 이런 순간에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감정에 대해 오랫동안 침묵을 유지했던 만큼 확실히 그랬다. 하지만 이제는 변화를 원했다.
“가고 싶어요. 저도, 대표님이랑…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요.”
무슨 말을 할 듯 말 듯 입술을 움직거리기만 하던 그가 무너지듯 괴롭게 속삭였다.
“미안해.”
“대표님이 왜요.”
“그냥… 이런 얘기를 하면서, 울지도 못하는 네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짓이기듯 문지르며 말을 다 잇지 못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 팔을 뻗어 허벅지 위에 망연히 놓인 그의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예전에 이미, 많이 울었으니까….”
“…….”
“그리고 이젠, 쿤이… 아위가 있으니까….”
첨벙거리는 물소리와 함께 그가 나를 뒤덮어 왔다.
젖은 입술이 깊이 겹쳐지고, 높은 코가 뺨을 눌러 왔다. 커다란 두 손이 뺨과 귀를 뒤덮자, 평소엔 들을 수 없는 공기가 흐르는 소리가 먹먹했다. 혀를 쓰지 않고 몇 번이나 입술을 포개어 비비는 키스는 성애라기보다는 위로였다.
그의 넓고 단단한 어깨를 끌어안아 꽉 붙잡으며, 그제야 나는 감정이 넘쳐흐르도록 놓아주었다.
“저, 그렇게 생각해도 되죠?”
“…….”
“대표님이 있으니까 이젠 혼자가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해도… 착각하는 거 아니죠?”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꼭 붙인 채로 그는 입술을 꽉 깨문 채 잠시 말이 없었다.
“솔직하게 말해도 될까.”
“…….”
턱을 쥐고 자신의 눈에 시선을 맞추게 한 그를 올려다보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린 너를 그런 고독 속에 버려둔 너의 아버지에게 화가 나지만… 내가 만약 너를 잃고 같은 일을 당한다면… 그보다 더 나은 방법으로 대처할 자신이 없어. 이런 얘길 하기엔 이른 것 같아 믿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믿지 못할 리가. 바로 같은 이유 때문에 어렴풋하게나마 아버지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나인데.
그는 열심히 꾸민 말들로 나를 위로하거나, 애써 안심시키려 하지 않았다. 키스 후 욕조 밖으로 나를 데리고 나가, 커다란 타월로 내 몸 구석구석의 물기를 닦아 주었다. 엉망이 된 침대로 다시 돌아가 우리는 한 번 더 몸을 겹쳤다.
평소보다 서로의 얼굴을 더 많이 만지고, 서로의 눈을 더 많이 들여다보고, 육체에 자극을 가하는 것보다 서로의 존재를 감각하고 확인하기 위한 행위처럼. 애무의 시간은 길고 길었고, 이전의 섹스들처럼 원초적으로 몰아치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더 진득했다. 틈 없이 완전히 하나가 되어 비벼지는 아래를 몇 번이나 손으로 확인하며 부족함 없이 충분하게 그를 느꼈다.
아마도 열여섯 살의 겨울 이후, 처음으로 타인 앞에서, 나 자신 앞에서, 가장 연약한 약점과 가장 숨기고 싶은 치부를 드러낸 날이었을 것이다.
다음 날 나는 화면을 드래그하기만 하면 바로 쓸 수 있었던 핸드폰에 처음으로 잠금을 설정했다. 그리고 약 3주 뒤, 우리는 함께 시카고로 향했다.
다이아몬드 더스트 5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