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걱정 (19/31)

   3. 걱정

형의 포즈나 표정에서는 첫날 같은 어색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물속에 깊이 잠긴 듯 조용한 공간에 형이 소개해 줬던 제프 벡의 앨범이 낮은 볼륨으로 재생되고, 우리는 작업에 필요한 최소한의 대화만 주고받으면서도 지루함 없이 시간을 채워 나갔다.

이 정원에서의 네 번째 작업인 오늘, 야생목처럼 이리저리 비뚤게 가지를 뻗은 옥향 앞의 바위에 걸터앉아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는 나체의 형은 편안함을 넘어 자유로워 보였다.

그 기운이 그대로 나에게도 전달됐고, 지난 며칠간의 작업을 거치면서 구성과 색채에 대한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거의 완전하게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여러 장의 사진으로 형의 포즈를 기록하고, 드로잉노트 한 권이 다 차도록 여러 장을 스케치했다. 이제 밑준비는 어느 정도 끝난 듯했다.

형의 어깨에서 팔로 떨어지는, 극단적으로 마른, 그래서 공격적이고 날카로워 보이는 동시에 위태롭고 예민해 보이며 상처받기 쉬워 보이는 복잡한 직선의 라인을 한 번 더 눈에 새기며 접이식의 테이블 이젤 위에서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수고 많으셨어요, 형. 편하게 계셔도 돼요.”

연필을 내려놓으며 그렇게 말한 뒤에도 형은 바로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지난 사흘 동안에도 계속 그랬다. 감정적으로 강하게 몰입한 장면을 촬영한 뒤 곧바로 그 신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배우와도 비슷했다.

포즈를 취하고 있을 때와 달리 허리에 힘만 뺀 채 잠시 그대로 앉아 있던 형은 먼저 두 손으로 눈 주변을 꾹 누르고, 목을 양쪽으로 늘인 다음 팔다리를 쭉 뻗어 기지개를 켜듯 스트레칭을 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근처의 다른 바위 위에 던져두었던 샤워가운을 집어 들었다.

웃으면서 내 쪽으로 다가올 때쯤에는 겨우 평소의 형으로 돌아와 있었다.

작업을 하기 좋도록 세팅해 두었던, 그의 야외용 테이블 세트 위에 어질러진 도구들을 추스르던 손을 멈추고, 아이스박스에서 갓 꺼낸 시원한 맥주를 형에게 건넸다.

“나중에 다시 또 부탁드릴 수도 있긴 한데, 일단은 오늘까지만 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그래? 이거 은근히 힐링되는 기분이었는데. 좀 아쉽네.”

맞은편 벤치에 털썩 주저앉으며 코끝을 긁는 형의 얼굴은 함께 작업을 하기 이전보다 훨씬 친근하게 느껴졌다. 형을 더 잘 알게 됐다는 얘기가 아니라 오히려… 잘 안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을 지우고 공백으로 남겨 두게 됐다는 의미의 친근함에 가까웠다.

“다 벗고 나무 사이에 가만히 앉아 있는 거, 되게 기분 좋더라. 그런 거 쉽게 해 볼 기회가 없잖아.”

맥주를 마시면서, 좀 전까지 자신이 고요하게 앉아 있었던 자리를 멍하게 바라보는 형은 긴 숙면에서 깨어난 사람 같았다.

“형이 편안하다고 느껴서 저도 집중해서 그렸어요. 남은 작업도 즐겁게 할 수 있을 것 같구요. 감사해요.”

“올드 퓨처 말고도 패션 잡지 모델 두세 번 해 본 적 있긴 한데, 별로 재미없었거든. 현장 사람들의 파장도 뭔가 나랑 안 맞고. 근데 이번엔, 아… 좋았어.”

그렇게 말하며 맥주 캔을 기울이는 형은 빈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내가 형을 그린다는 행위로서만 인식했던 이번 작업은, 실제로 진행을 하는 동안 점점 의미가 달라졌다. 그리는 대상과의 교감, 몸 안쪽에 새겨져 있던 오래전의 그 감각을 연약하게나마 깨워 주었다. 바라보고 관찰하고 그려 내면서 대상을 이해하고 사랑했던 기억들.

“뭐야, 벌써 끝났어?”

익숙하고도 반가운 목소리의 등장에 형과 나는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실망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유니 누나가 주차장과 연결된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와 함께였다.

“너 왜 내 알몸 못 본 걸 아쉬워하냐?”

“뭐래. 내가 네 몸 한두 번 보냐? 장작개비 같은 몸, 볼 게 뭐가 있다고 누가 그걸 보고 싶어 해? 홀딱 벗고 쩔쩔매는 거 보고 놀려 주려고 한 거지.”

누나와 형이 거의 습관적으로 말씨름을 주고받는 사이, 두 사람의 눈을 피해 그와 시선으로 짧은 인사를 교환했다.

청량해 보이는 옅은 하늘색 스트라이프의 리넨 소재 슈트에 깔끔한 티셔츠를 매치해 편안해 보이는 차림의 그는 저녁 메뉴로 내가 선택한 햄버거 프랜차이즈의 종이봉투를 들고 있었다.

“흥, 과연 진짜 내 알몸을 봤어도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내가 다른 데는 다 말랐어도 말이야, 거기 하나는 어디 가서 빠….”

“서이현, 보고 싶었어. 여전히 한 마리 꿀벌이네?”

한쪽 입술을 삐쭉 위로 끌어 올린 못마땅한 얼굴로 형의 거드름을 듣고 있던 누나는 형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몸을 휙 돌려 내 쪽을 보며 활짝 웃었다. 누나와는 바비큐 파티 이후 처음 보는 자리였다.

“꿀벌은 또 뭐야. 아… 스트라이프!”

형은 좀 전의 무시 혹은 외면에 대해 추궁하는 것도 잊고 누나가 지은 나의 별명에 흥미를 보였다. 좀 전까지 티격태격했던 두 사람은 금방 또 죽이 맞아 새 별명 하나에 맞장구를 주고받으며 즐거워했다. 이런 시끌벅적함도 조금 오랜만인 것 같았다.

“대표님, 별명 잘 짓지 않았어요? 이현이한테 어울리죠? 서꿀벌. 허니비(Honeybee).”

종이봉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그가 내 어깨에 팔을 걸친 누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 뒤 곧바로 나에게 넘어온 시선이 스트라이프 티셔츠를 입은 가슴과 배를 훑었다.

“그러게. 여기저기 부지런히 꿀 따러 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보니까… 꽤 어울리네.”

새로 지은 내 별명에 대해 그와 형의 동의를 얻은 누나는 그게 제법 기쁜지 나를 보며 씩 웃고는 아이스박스 쪽으로 다가가 맥주를 꺼내 그와 나에게도 한 병씩을 권했다.

꿀벌 하면 통통한 엉덩이를 내세운 귀엽게 캐릭터화된 이미지가 먼저 떠올라, 뻣뻣한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지만, 세 사람 모두 즐거워하는 것 같아 잠자코 누나가 권하는 맥주를 받아 들었다. 물이 맺힌 병의 표면을 쓸자 아이스박스 안에서 얼음물에 잠겨 있는 동안 불어 버린 종이 라벨이 쭈글쭈글하게 밀려났다. 언젠가 이 장소에서 이런 순간이 있었던 것 같은 기시감에 잠시 손에 쥔 병을 내려다보았다.

“작업은 어때요? 순조로워요? 모델이 아마추어라 힘들진 않고?”

반투명한 초록색 맥주병을 기울이며 농담조로 얘기하는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직은 구상 스케치 단계이긴 하지만… 모델분이 잘해 주신 덕분에 그리고 싶은 이미지가 분명하게 잡혀서 순조로운… 것 같아요.”

맞은편의 형을 향해 웃어 보이자, 형은 가운 앞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어깨를 으쓱이며 칭찬을 받은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흠….”

그는 뜻 모를 신음을 짧게 흘린 뒤 맥주를 몇 모금 마셨다.

“그리고 형하고 같이 하는 작업은 일단 오늘까지면 될 것 같아요. 일부러 시간까지 빼 주시고, 감사했습니다.”

이번 주에 그는 나의 작업을 위해 형의 퇴근 시간을 5시에 맞춰 주었다. 요즘 팬텀이 워낙 바쁘다는 걸 알아서 처음엔 주말에 작업을 하겠다고 했지만, 작가의 필요에 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업무는 없다며 그는 매우 적극적이었다.

“뭘요. 작가님이 필요하시다면 권주한 정도야 개인 비서로도 내드리죠.”

좀 전의 살짝 굳은 듯했던 표정을 부드럽게 허물며 그는 농담을 했다.

“그럼 이제 본격적인 작업 들어가는 거겠네? 기대된다, 서이현 작품.”

“슬슬 배고픈데, 나머지 얘기는 먹으면서 합시다. 해도 지기 시작했고, 오늘은 옥상에서 먹을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 기미가 보이자, 그가 누나의 눈앞으로 팔을 뻗어 핑거스냅으로 두어 번 딱, 딱 소리를 내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의 제안에 다들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형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제일 먼저 집으로 들어가고, 나는 그림 도구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와 누나는 맥주와 다른 먹거리들을 좀 더 챙기겠다며 현관 안으로 사라졌다. 오랜만의 부산스러움에 괜히 기분이 좋아서 스튜디오로 내려가 도구들을 제자리에 정리하는 내내 웃음이 났다.

성큼성큼 계단을 두세 개씩 뛰어오르며 다시 정원으로 나와 보니, 그가 여러 병의 맥주를 넣은 장바구니를 들고 현관을 나서고 있었다.

“저도 같이 들게요.”

얼른 다가가서 안에 든 몇 병이라도 꺼내어 나누려고 하자, 그가 뒤에서 내 목에 팔을 감아 결박하듯 조르며 등을 밀었다.

“이 정도쯤은 혼자 들어도 되니까 얼른 올라갑시다.”

마주 보고 포옹을 하거나, 라면을 끓이기 위해 인덕션 앞에 서 있을 때 그가 뒤에서 안아 주거나… 그럴 때는 많았지만, 이런 느낌의 스킨십은 아마 처음이었다. 주한이 형과 그가 나누는 허물없는 사이의 스킨십 같아서, 진한 애정을 표현할 때와는 또 다른 의미로 등에 닿은 그의 체온이 좋았다.

“…….”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뒤에서 목을 안은 그가 얼굴을 깊이 숙이더니 뺨에 입술을 꾹 눌렀다.

그가 실수할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주변을 살폈고, 나의 반응에 그가 귓가에서 작게 웃었다.

“둘 다 벌써 올라가 있어요.”

“그래도….”

“음. 나랑 이런 사이인 거 들키는 게 그렇게 싫은가.”

건물의 코너를 돌아 정원에서 멀어지자, 주변의 그늘이 한층 더 짙어졌다. 앞쪽에 옥상으로 연결된 콘크리트 계단의 입구가 보였다. 옥상은 아직 올라가 본 적이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게 아니라….”

지금 들키면 정확히 설명할 말이 없었다. 우리는 우리만의 방향과 속도로 관계를 진행시키고 있었지만, 타인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또 다른 문제였다. 그들의 의견에 휩쓸리지 않을 자신은 있었지만,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한다면 유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주변에 관계가 알려진다면, 아마도 나보다는 그가 비난을 받게 될 것 같았다.

“괜히 심술부린 거니까 그런 표정 하지 마요.”

계단의 초입에서 그가 한 번 더 뺨에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근데….”

두 계단 정도 뒤에서 뒤따라 올라오며 은근하게 운을 떼는 그를 돌아보자, 가늘게 눈을 뜬, 어쩐지 약간은 새침해 보이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업어 준 거하고 꿀벌이라는 별명 붙여 준 거하고, 뭐가 더 질투할 일일까. 어떻게 생각해요?”

“…….”

그의 진지한 표정에 오히려 웃음이 났다. 웃음으로 얼버무리려는 거냐며 허리에 덤벼들려는 그를 피해 서둘러 계단을 뛰어올랐다.

순간적으로 에너지를 쏟은 탓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옥상에 올라서니 정원에서보다 훨씬 더 시원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그리고 시야에 펼쳐진 새로운 광경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고작 2층 주택의 옥상이었지만, 지대가 높은 곳에 자리 잡은 덕에 눈앞에 걸리는 것 하나 없이 시야가 탁 트여 있었다. 모래와 형의 옥탑방도 전망이 훌륭했지만, 한강과 그 너머의 풍경까지, 말 그대로 서울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듯한 뷰는 아니었다.

바다를 향해 흐르는 한강의 서쪽, 이제 막 오늘치의 노을이 만들어지고 있는 서쪽 하늘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동해와 인접한 할아버지의 마을에서는 온전한 일출을 실컷 볼 수 있었지만, 일몰의 화려한 강렬함은 늘 산맥에 가려져 그 여운 정도만 맛볼 수 있었으니까.

“여기 좋지? 웬만한 루프탑 바보다 전망이 더 끝내준다니까? 대표님, 남자 꼬실 때 여기로 데려오죠? 그죠?”

옥상에는 캐노피 같은 천막으로 천장을 두르고 그 아래 널찍한 테이블과 의자까지 갖춘 방갈로와 스탠드형 조명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서, 누나의 말대로 근사한 루프탑 바 같았다.

“내가 이런 데까지 데려오면서 정성을 들여야 넘어올 것 같아?”

“하… 얄미운데, 반박할 수가 없다. 가만히 있어도 알파, 오메가, 베타, 남녀노소가 좋다고 덤벼드니까, 그러니까 대표님이 매너가 부족할 수밖에 없어.”

휴양지를 연상시키는 라탄 의자의 등받이에 느슨하게 기대 있던 몸을 일으키며 누나가 혀를 찼다.

그리고 모두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 햄버거를 한입 크게 베어 물면서 말을 이었다.

“매너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신입들한테 좀 잘해 주세요. 최지원 씨 오늘 울었던 거 알아요?”

그는 여러 종류의 햄버거가 있다며 어떤 것을 먹고 싶은지 내게 고르게 하면서 조금은 성의 없게 대답했다.

“특별히 못되게 군 기억이 없는데, 왜 울었을까? 다 큰 사회인이.”

“대표님이 자료 조사 정리한 방식 지적하셨잖아요. 그 뒤에 화장실 다녀오는 걸 봤는데 눈이 빨갛더라구요. 민망해할까 봐 울었냐고 묻진 않았는데 뻔하죠. 일 처리가 맘에 안 드시는 건 아는데… 바로 얼마 전까지 학생이었잖아요. 좀 봐줄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대학 졸업반이라고 해도 너랑 비슷한 나이잖아.”

“…….”

그의 발언에 이번에는 누나가 대꾸할 말을 잊고 잠시 햄버거만 우물거렸다. 그러나 맥주와 함께 입 안의 햄버거를 모두 삼킨 뒤 곧바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사회생활 자체를 제가 먼저 시작했잖아요. 나이로만 생각하시면 안 되죠. 그리고 요즘처럼 바쁜 때 기껏 뽑아 놓은 신입이 그만둔다고 하면 우리만 아쉽다구요. 잘해 줄 자신 없으시면 아예 시카고 가실 때까진 계속 빌라로 출근하셔도 되구요.”

“빌라…요?”

대화 도중에 끼어들 생각은 없었지만, 전혀 모르는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되묻는 질문이 새어 나갔다.

세 사람의 시선이 나를 향했고, 특히 주한이 형은 과장될 정도로 눈을 크게 떴다. 내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더 의외라는 듯.

“그래도 명색이 같이 사는 동거인인데, 그런 얘기도 못 들었어?”

“오버하지 말자, 권주한.”

그의 목소리에서 평소보다 엄격함이 느껴진 것은, 형의 어조와 표정에 그를 향한 비난의 뉘앙스가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옆자리의 나를 돌아보며 먹고 있던 버거를 쟁반 위에 내려놓았다. 나는 치즈 와퍼를, 그는 치킨 버거를 선택했고, 우리 둘 모두 아직 한두 입 정도밖에는 먹지 못한 상태였다.

“내가 있어 봤자 사람이 늘어서 사무실도 비좁고, 신입들도 눈치 보고, 나도 불편하고… 그래서 요즘 가끔씩 다른 쪽으로 출근해서 사무 좀 처리하고 그러거든요. 서이현 씨도 알잖아요. ‘그’ 복층 빌라.”

팬텀 내부의 상황을 일일이 나와 공유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를 추궁하려는 의도도 아니었다. 내 쪽으로 몸을 틀고, 평소의 침착함에서 조금 벗어난 모습으로 열심히 상황을 설명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필사적인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내가 믿어 주기를 원해서 애쓰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기는 했다.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처음부터 뭔가를 의심하지도 않았고.

“에이, 처음에야 가끔이었지, 요즘엔 일주일에 3일 이상은 그쪽으로 가시잖아요. 어디 울룩불룩 베이글남한테 푹 빠져서 일도 땡땡이치고 연애하러 다니시나 했다니까요.”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몰라도 누나의 그런 의미 없는 발언 하나에 의심을 품을 정도로 그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지금 푹 빠져 있는 베이글남’이 있다면, 아마도 그건 나일 거라는… 아주아주 나답지 않고 건방진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푹 빠졌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누나의 표현을 빌린 것이고, 난 울룩불룩한 베이글남도 아니었지만.

“연애를 하면 다행이지. 몇 번 같이 자고 질리면 끊어 내는 것도 연앤가?”

고개를 뒤로 젖혀 케첩을 듬뿍 찍은 감자튀김을 입 안으로 떨어뜨리며 주한이 형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 내가 왜 여기서 다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을까.”

그는 천장을 향해 턱을 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엄살을 피우는, 나를 의식한 것이 분명한 그의 과장된 몸짓에 웃음이 났다. 내가 동요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그는 이쪽을 돌아보며 그제야 슬쩍 웃었다.

주한이 형은 내가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만 알아챘을 뿐, 그와 내가 이미 느슨하게나마 공동의 책임으로 묶인 관계라는 것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에게 적대적으로 구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아마도 그를 공격하기 위함이 아닌 나에게 경각심을 주려는 의도 같았다.

‘이 남자는 같이 사는 사람에게도 자기 얘기는 전혀 털어놓지 않는 냉정한 남자야. 상대를 손쉽게 갈아 치우는, 진지하게 연애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는 남자라고.’

대각선으로 맞은편에 앉은 나를 향해 그것 보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형은, 아마도 그런 말들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그가 이전에 가벼운 관계들만을 전전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일지도 모르지만, 상관없었다. 적어도 그에게 내가 몇 번 같이 자다가 질리면 그만인 상대가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있었고, 지금은 그걸로 충분했다. 내 쪽에서도 연인이라는 공인된 위치를 달라며 그를 재촉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잠시 멈췄던 식사를 이어 가기 위해 햄버거를 감싼 종이 포장을 좀 더 끌어 내리는 사이, 누나가 말했다.

“요즘 진짜 거기 틀어박혀서 무슨 음모라도 꾸미시는 거예요?”

퇴근하고 바로 그와 함께 이쪽으로 온 누나는 배가 많이 고팠었는지 벌써 본인 몫의 햄버거를 전부 해치우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 내고 있었다.

“그래, 세계 정복의 음모를 짜고 있다, 왜. 내가 사무실에 있으면 분위기만 싸늘해진다며. 상황 보고받고 피드백하는 데에 지장 없고, 고객 관리도 제대로 하고 있으니까 된 거 아닌가?”

“뭐, 그렇긴 해요.”

이젠 약간 짜증스러워 보이는 그의 답변에 누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잔뜩 구긴 냅킨을 테이블 구석으로 던졌다. 그러고는 테이블 위에 팔짱을 기대며 바로 앞의 컵에 꽂힌 빨대를 향해 고개를 늘였다.

“이현아, 근데 너희 누나랑 형은 지금 어디래? 도착할 때 되지 않았어?”

“네, 며칠 전에 무사히 발리에 도착했어요.”

“서이현, 그런 소식은 메신저로 좀 알려 주고 그래라. 이놈도 은근히 매정한 구석이 있다니까.”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귀찮은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핀잔하는 누나의 말에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괜히 웃기만 했다.

얼마 전 덴파사르 공항을 통해 발리에 도착한 모래와 형은 꾸따 비치(Kuta Beach) 부근에 임시 숙소를 잡고 일자리를 알아보는 중이었다. 메일에는 건강해 보이는 두 사람의 사진도 두세 장 첨부되어 있어 좀 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핸드폰에 저장해 놓은 사진을 누나와 형에게 보여 주었다.

발리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완전히 검게 그을린 두 사람은 눈과 이가 하얗게 빛나는 얼굴로 배낭을 멘 채 꾸따 해변의 노을을 배경으로 밝게 웃고 있었다.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장면이었다.

“근데 이현이는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해요? 대표님이 어떻게 좀 해 주실 수 없어요?”

그에게 맥주를 한 병 건네받은 누나가 뚜껑을 열기 위해 냅킨으로 병의 주둥이를 쥐고 돌리며 그에게 물었다.

“저… 괜찮아요, 누나. 하고 싶은 걸 못 하는 것도 아니고, 가고 싶은 곳을 못 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요즘 진짜 잘 지내고 있는데….”

“그래도 보디가드 겸 기사님 없이는 어딜 못 간다니. 이건 무슨 톱 아이돌의 삶도 아니고. 답답하지 않아?”

그를 힐끔 돌아봤지만, 자신이 대답할 질문이 아니라는 듯 묵묵히 맥주를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테이블 위의 어딘가를 향해 비스듬히 기울어진 시선이 무거운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아 나까지 덩달아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나는 현재의 모든 상황에 대해 그에게 감사하고 있는데, 그 어떤 불편함도 그로 인해 생긴 것이 아니고, 그는 오히려 위험의 가능성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려는 사람인데… 그것에 대해 왜 그가 미안해하는지 속상했다.

“별로 답답하지는…. 원래 그렇게 돌아다니는 편이 아니어서….”

“차라리 이현이도 해외로 나가는 편이 낫지 않아요?”

“…….”

주한이 형의 꽤나 과감한 의견에 그를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형에게 집중되었다. 그림 작업을 위해 전부 빼 두었던 피어스를 다시 착용한 형의 얼굴은 화려한 동시에 반항적으로 보였다.

형은 마시던 맥주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제법 진지해 보이는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이현이 누나의 아버지라는 분, 보통이 아닌 분이니까 대표님도 이렇게 조심하시는 걸 텐데, 그럼 이현이 누나랑 형이 발리에 무사히 도착했다고 이현이가 안전해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집 앞 편의점 한 번 맘 편히 못 나가는 생활을 계속하게 할 수도 없지 않아요? 아예 이현이도 외국으로 나가 버리면 해결되는 거 아닌가?”

“그렇게 쉽게 얘기할 문제는 아니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의 목소리는 형의 제안을 완전히 터무니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너희 누나의 아버지라는 분, 성격이 그렇게… 대단해? 널 갑자기 납치해 가서 협박하거나 그럴 수 있을 정도로?”

누나는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그런 인물이 자신의 주변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거리에 존재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그럴 수 있는 분이긴, 해요.”

「임 선생이 너를 어떻게 할지 모른다고, 이놈아! 제 딸 위해서라면… 가진 거 없는 네놈 하나쯤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병신 만들 위인이야.」

모두 걱정할 걸 알기에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마을을 떠나오던 날, 마당에서 형을 몰아세웠던 할아버지의 겁에 질린 목소리가 지금까지도 생생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건 뭐건 이쪽에서도 눈 뜨고 당하진 않아. 좀 더 강경한 방법으로 의사 전달을 할 수도 있지만… 그걸 원치 않으니까 안 하는 것뿐이고. 지금으로서는.”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담뱃갑과 라이터를 집어 들면서 그가 빠르고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지금은 방어적으로 상황에 대처하고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이쪽에서도 얼마든지 공격적인 조치가 가능하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는 어조였다.

주한이 형이 테이블 위에 세워 두었던 맥주병을 실수로 쓰러뜨리면서 그 화제는 그렇게 흐지부지 중단되었다. 꼭 그것 때문이 아니더라도, 금요일 밤을 맞아 라이브 클럽에 밴드의 공연을 보러 갈 계획이었던 형과 누나는 슬슬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그와 나는 두 사람을 배웅하기 위해 계단 쪽으로 함께 이동했다.

“이현아, 우리랑 같이 안 나갈래? 가끔은 나이의 앞자리가 같은 사람들과도 시간을 보내는 게 어떨까 싶은데.”

“흠, 그런 말은 나이의 앞자리가 다른 사람의 카드를 반납한 후에 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그의 응수에 누나는 고개를 젖히고 웃어 댔다. 그리고 센스 있었다는 칭찬과 함께 자신보다 30센티미터 이상 큰 그의 어깨에 힘겹게 팔을 둘렀다. 그가 슬쩍 몸을 빼며 손을 피했지만, 누나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을 뿐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런 일상적인 스킨십까지 피해 달라는 건 아니었는데…. 그날 밤 가장 밑바닥의 질투심을 드러내 버렸던 자신의 유치함이 떠올라 얼굴이 붉어졌다.

“야, 같이 가자니까 왜 대표님 눈치를 봐? 대표님이 막 너한테 빨리 그림 그려서 수익 내라고 닦달하냐?”

그를 힐끔거린 내 시선을 형은 눈치를 봤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이미지가 확실할 때, 그림을 빨리 진행시키고 싶어서요.”

“그러니까, 아저씨 취급도 악덕 고용주 취급도 다 좋은데, 카드부터 반납하고 하라고.”

손바닥을 내밀고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그의 자세에 두 사람은 갑작스럽게 대화를 끊고 서둘러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나는 알지 못하는 괴상한 노래를 큰 소리로 합창하며 두 사람이 건물의 코너를 지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내려다보았다. 대문을 나선 후에도 얼마 동안은 두 사람의 노랫소리가 끊기지 않았다.

마지막 노을의 불씨가 잦아들어 가는 옥상에는 그와 나 둘뿐이었다. 그는 방갈로 저쪽 난간에서 맥주를 마시며 골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형과 누나의 멀어지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조금 웃고 있을 것 같았다.

문득 그가 이쪽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두 팔을 120도 각도 정도로 느슨하게 벌려 보였다.

“…….”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머뭇거리며 다가가 넓은 어깨 위에 턱을 괴며 조심스럽게 허리에 팔을 감았다. 벌려져 있었던 두 팔이 몸통을 조이고, 오른쪽 뺨에 그의 오른쪽 뺨이 밀착되었다.

“스케치.”

“…….”

“여기서 며칠 더 이어졌으면 내가 어떤 추한 꼴을 보였을지 모르겠어.”

“…….”

“생각보다 일찍 끝내 줘서 고마워요. 다 이해하는 척했지만, 아… 사실 아슬아슬했거든.”

그의 어깨 위에 지그시 턱을 누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작업 들어가는 거죠?”

“네.”

“필요한 게 있거나,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뭐든 말해 줘요.”

“네, 그럴게요.”

그와의 이런 포옹이 아주 편안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닿은 자리마다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나 의식이 예민해졌고, 혹시 나의 어정쩡한 자세가 그를 불편하게 하고 있지는 않을지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빨리 지나가 버리기만을 바라게 되는 그런 불쾌한 불편함과는 달랐다.

“말로만 그러지 말고. 그게 내 일이기도 하고, 또… 개인적으로도 도움이 되고 싶으니까. 폐를 끼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하지 말고 바로바로 말해 줘요.”

내가 어떤 지점에서 망설일지를 정확하게 내다보고 있는 그의 염려에 슬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마주 안고 내려다보는 서울은 이제 오후에서 저녁으로 완전히 접어들고 있었다. 시야를 가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남산에서부터 불어 내려온 제법 선선한 바람이 옷자락과 머리카락을 흔들고 지나갔다.

커다란 크루즈의 뱃머리에서 나는 세상의 왕이라고 외쳤던 <타이타닉>의 잭 도슨의 기분을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을 하며 한강의 구불구불한 물길을 바라보다, 스스로의 실없는 감상에 피식거렸다. 언젠가 영국에서 실시한 ‘가장 느끼한 영화 대사’를 가리는 설문에서 타이타닉의 “I’m the king of the world”가 1위에 뽑혔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통일성 없이 따로 노는 영양가 없는 연상들이었다.

그리고 아무 의미 없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잡념들에 자신을 맡기고 멍하니 부유하는 이런 시간이, 아주, 아주 오랜만이라는 것에 생각이 닿았다.

도시에 피를 돌게 하는 여러 종류의 불빛들의 흔들림과 깜빡임과 느리고 빠른 이동을 바라보다, 이 순간을 공유하고 있는 그의 체온이 기분 좋아서 고개를 돌려 그의 어깨에 뺨을 기대며 목덜미에 깊이 입술을 묻었다. 나름대로의 어리광이었다.

그가 고개를 숙여 뺨과 귓가에 입을 맞춰 주었다. 나를 안고 있던 팔이 달래듯 천천히 등을 쓸어 주었다.

문득,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충동이라고 표현했지만, 기분이나 감정에 심취한 폭발적 욕구는 아니었다. 그런 거라면 지금까지 황홀한 잠자리를 갖는 동안 이미 몇 번이나 그에게 사랑을 얘기했을 것이다.

사랑을 자각하게 된 어떤 논리적인 자기 이해도, 계기가 될 만한 특별한 사건도 이곳에선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저 이 순간에 그에게 사랑을 말하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뿐이었다.

“…….”

“……왜 그래요.”

순간적으로 그의 몸을 급하게 밀어냈다. 자신의 몸을 그의 몸에서 급하게 떼어 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가 허전해진 두 팔을 벌려 보이며 갑작스러운 행동의 이유를 물었다.

“어… 노을, 더 지기 전에 사진 좀 찍어 두려구요.”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약간의 장난기를 더해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자연스레 떠오른 사랑이라는 단어로부터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작업할 때 사용하라고 그가 내어 준 디지털카메라로 서쪽 하늘을 몇 장 찍기 시작했다. 렌즈의 방향을 바꿔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는 그의 모습도 카메라에 담았다. 천막이 바람에 펄럭거리는 방갈로를 배경으로 전신을 찍고, 줌을 당겨 굴곡이 단정하고 뚜렷한 옆얼굴도 찍었다.

“또 별로 안 먹었네.”

반 정도 남긴 나의 햄버거를 보고 그가 혀를 찼다. 얼른 카메라를 내리고 정리를 돕기 위해 테이블로 다가갔다.

“햄버거 먹고 싶다면서요. 먹고 싶다고 한 것도 이렇게 못 먹으면 진짜 큰일인데.”

“작업 때문에… 요즘 약간 흥분 상태인가 봐요. 안 먹어도 배부른 것 같아서….”

“식욕이 없는 건 알겠지만… 여름이기도 하고, 입맛 없다고 매번 이렇게 음식 남기면 내가 너무 걱정되잖아요.”

트레이닝 업체의 담당 전문가와 상의해서 위에 부담이 없으면서도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할 수 있는 식단을 준비해야겠다며 그는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일반적인 음식으로는 안 되겠어. 양념이 적게 들어간, 비위를 건드리지 않을 신선한 요리들 위주로 준비하게 할 거고, 양도 절대 무리하게 많이 먹으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대신 그것만큼은 입맛 핑계 대지 않고 전부 비우는 거로 약속해요. 응?”

저녁은 별일 없는 이상 그가 퇴근한 후에 함께 먹곤 했지만, 나의 아침과 점심은 매일 출근하시는 가사도우미분이 일정한 시간에 맞춰 준비해 주고 계셨다. 지금까지 그가 마련해 준 환경들만으로도 분에 넘쳤다.

어쩌면 짧은 기간에 급격하게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느라 위가 조금 과민해진 것이거나, 단순히 계절 탓에 입맛이 조금 없어진 것일 수도 있었다. 전자든 후자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흔한 증상이었다.

“그렇게까지 안 해 주셔도 지금도 충분….”

“약속해 줘요.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

그의 표정에서 장난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이렇게 못 먹은 지 2주가 다 돼 가요. 뭔가 대책을 세워야지. 작업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확답을 재촉하듯 나의 오른쪽 어깨를 두어 번 흔드는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그는 웃어 보이며 내 뺨을 한 번 쓰다듬고 종이백 안에 감자튀김 봉투를 구겨 넣었다.

2주가 다 되어 간다고 구체적인 기간까지 언급하는 걸 보니, 그동안 계속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내가 미안해할까 봐 되도록 겉으로 티를 내지 않으려 했던 거겠지.

이렇게 해야 그의 마음이 편하다면 일단 응하기야 하겠지만… 어디까지가 친절의 수용이고, 어디서부터가 원래의 나를 등져 버리는 선을 넘은 행동인지 솔직히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일정한 시간이 되면 매번 다른 메뉴의 식사가 준비되어 있고, 정원에 물을 주고 돌아오면 그사이 방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서랍과 옷장 속에는 항상 완벽하게 세탁된 옷들이 가득한 세계는… 그의 세계였지, 나의 세계는 아니었으니까.

아이스박스는 일단 그대로 옥상에 두기로 하고 나머지 짐을 함께 아래층으로 옮겼다. 그사이 해가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쓰레기를 분류하고 함께 차를 한 잔 마신 뒤, 작업 방향을 궁금해하는 그와 함께 스튜디오로 내려갔다.

실제로 그리는 동안 변화가 있을 수도 있지만, 일단 지금 구상하고 있는 이미지에 대해 스케치와 사진을 보며 이야기했다. 그는 아주 진지한 태도로 들어 주었고, 어떤 조언이나 질문도 하지 않았다. 타인의 그림에 대한 그의 그런 거리 두기가 부모님이나 과거의 실장님과 많이 닮아 있어서 더 편하게 얘기할 수 있었다.

“음? 이런 건 언제 찍었어요?”

초안 스케치를 위해 이젤을 고르던 나는 손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소파의 등받이에 걸터앉아 조그만 디지털카메라를 내려다보던 그가 내 쪽을 향해 액정을 돌려 보이며 씩 웃었다. 좀 아까 옥상에서 찍은 그의 사진들이었다.

“아까… 정리할 때 조금….”

귀가 뜨거워졌지만, 골라낸 이젤의 필갑 높이를 조절하며 거리낄 것 없는 척, 태연한 척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을 보니 이미 가볍게 흘려 넘겨 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그가 가까이 다가와 뒤에서 허리를 안았다. 짙게 풍기는 몇 가지 향수의 조합이 호흡과 함께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뭐야, 왜 도촬을 해요? 모델 해 달라고 하면 나도 잘할 수 있는데.”

“…….”

좀 더 후에. 내 안에서 모든 것이 온전히 무르익었을 때, 그에게 부탁할 생각이었다. 그에 대한 것은 어느 하나라도 조급히 서두르다 망쳐 버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잘 찍었던데요? 찍는 사람이 피사체를 바라보는… 애정 가득하면서도 수줍은 시선이 그대로 드러나 있던데.”

구부정하게 허리를 조금 굽혀 나의 어깨를 턱으로 지그시 누르면서 그는 즐거운 듯 얘기했다. 빨개진 귀와 목덜미가 눈에 선했지만, 그의 해석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이제 알겠죠?”

“…….”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반대로 나를 올려다보느라 천천히 위를 향해 들어 올려지는 풍성한 속눈썹을 손으로 쓸어 보고 싶었다.

그의 입술이 완만한 곡선으로 휘어졌다.

“홍콩에서 내가 왜 사진 안 보여 주려고 했었는지.”

“…….”

“여전히 모르겠다는 얼굴이네?”

허리에 감았던 팔을 풀고 그가 눈앞에서 카메라를 흔들어 보였다.

“찍는 사람이 피사체를 보는 시선이 여기에 다 나와 버리잖아요. 거기다 서이현 씨는 그런 걸 읽어 내는 데에는 거의 점쟁이 수준이니까. 바로 들켜 버렸겠지.”

홍콩에서, 우리 둘 사이에 그 이전과는 다른 미묘한 시선의 교환과 긴장감이 감돌았던 것까지는 나도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호감이나 끌림이라고 정확히 명명하기엔 불충분한, 공기 중의 떠도는 분위기 같은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의 흥미를 좀 더 자극할 만한 다른 누군가가 나타나는 순간 바로 사라져 버릴 그런….

“그때까지 대표님은… 저한테 별로 관심 없었으니까….”

“흠, 관심 없는 사람하고 같이 있으려고 굳이 파티 중간에 빠져나오고 그러나? 그것도 우리 갤러리의 전시회 뒤풀이 모임에서?”

카메라를 쥐지 않은 손으로 내 팔을 어깨에서부터 쓸어내려 가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깍지를 끼면서, 그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얘기했다.

“언제…요?”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본 그는 겹쳐 쥔 손을 들어 나의 손가락 마디를 깨물었다.

“이것 봐, 이렇게 무심한 사람일 줄 알았어. 아… 그럴 것 같아서 마음 안 주려고 했는데.”

엄살을 피우는 그의 말투 속 이야기의 내용이 어디까지 진심일까. 나에게는 그가 무심한 사람이었는데, 그 역시 나를 그런 사람으로 생각했었다니. 그래서 마음을 주지 않으려고 했었다니.

내가 모르는, 나를 의식했던 그의 이야기에 가슴속이 괜히 간질거려서 깍지 낀 손에 지그시 좀 더 힘을 주었다.

망설이듯 잠시 뜸을 들이다, 그가 허리를 좀 더 조여 안으며 내 뺨에 자신의 뺨을 밀착시켜 왔다.

“최인우, 백유니, 권주한까지 다섯 명이 스페인 주점에서 술 마셨던 날. 최인우하고 내가 갤러리로 갔었던 거 기억나요?”

“네, 하지만 그땐….”

벌써 몇 달 전 일이었다. 모든 장면과 순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끌려왔다는 그의 말에, 억울한 표정으로 불평했던 인우 형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땐 누가 누구를 따라온 것이든 끌려온 것이든, 그런 문제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었는데….

“정말 내가 그 자리에 왜 따라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럼?”

“그거야… 뒤풀이가 지루…해서….”

―라고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점점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돌아보니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사적으로 가지는 소소한 술자리에 참석하기 위해 팬텀의 공동 전시회 뒤풀이 같은 자리를 먼저 빠져나올 그가 아니었다.

당시에는 팬텀의 운영 방식에 대해서도, 그의 성격에 대해서도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에 별생각 없이 지나갔었지만, 인우 형이 함께 빠져나가자고 그를 닦달한 것조차도 아니었다면 훨씬 의아한 일이기는 했다.

사파리 차량의 뒷좌석에 턱을 괴고 앉아, 밖에서 풀을 뜯고 있는,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는 연약한 초식 동물 한 마리를 내다보듯 무덤덤했던 그의 시선이 실은 관심과 탐색을 덮기 위한 능숙한 껍질이었다면. 외면할 수 없고 거리를 둘 수 없어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 내 앞에 섰던 거라면.

그렇다면 어쩌면, 알려 준 적 없었던 나의 나이를 미리 알고 있었던 것도, 흥미 없어 보였던 나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는 것도 의미 없는 우연이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아….”

뒤늦은 깨달음에 나도 모르게 멍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가 어깨 위로 목을 길게 빼고 나의 얼굴을 돌아봤다. 이제야 알겠냐는 표정이었다. 새삼스레 눈을 마주하기가 쑥스러웠다. 그가 만지작거리며 장난을 치고 있는 겹쳐진 두 손을 향해 시선을 끌어 내렸다.

카메라를 옆의 소파 위에 던져둔 그가 내 몸을 돌려세우고 두 손을 붙잡아 자신의 허리 뒤로 두르게 했다. 가슴과 가슴이 닿았고, 눈높이쯤에 그의 입술이 있었다. 후각을 점령해 오는 무겁고 짙은 향기에 욕심을 부리며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꼭 ‘그 향기’가 아니더라도 그에게서 풍기는 모든 향에는 어딘가 묵직한 에로틱함이 스며 있었다.

내 팔로 자신을 안게 한 그는 자신의 두 팔도 내 몸에 둘렀다. 살짝 고개를 숙인 그의 입술이 귓바퀴에 닿아 간질거렸다.

“지금만큼의 깊이였다고는 말 못 해. 하지만 무시할 수 있는 감정도 아니었어. 적어도… 주변에 다른 남자가 알짱거리는 게 신경 쓰여서 꼴사나운 짓을 할 정도로는.”

그가 꼴사나운 짓을 한 적이 있었던가. 아니, 그 전에 내 주변에 연애 대상으로서 어필하려는 남자들이 있기는 했던가.

얼른 떠오르는 건… 수키킴 선생님과의 만남 후 다 함께 소호의 바를 찾았던 저녁, 암스테르담에서 왔다던 주근깨의 남자 정도였다. 그때 가던 길을 되돌아왔던 그 남자는 내게 메일 주소를 교환할 수 있는지 물었었고, 그는… 그런 쪽으로 눈치가 빠를 것 같았던 그는 사적인 상황임에도 자리를 피하지 않고 계속 곁에 남아 있었다.

설마 그 모든 게 다 나를 의식해서였다는, 그런 말을 하는 건가.

그의 티셔츠의 허리 부근을 손으로 붙잡으며 나도 모르게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금 샤워하고 나온 것 같은, 손톱 끝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질 것 같은 얼굴의 남자가 내 갤러리 전시 홀에 서 있는 걸 처음 봤을 때부터, 구두 속의 모래알처럼 신경이 쓰였지. 긍정적인 방향으로든 부정적인 방향으로든 어떤 한 사람이 계속해서 신경을 잡아끄는 건, 나에겐 꽤 드문 일이라… 괜한 자존심에 의식하지 않는 척도 해 봤지만….”

그가 안았던 팔을 풀고 두 손으로 내 뺨을 감싼 채 눈을 맞췄다. 색의 왜곡률이 가장 낮은 창백한 조명 아래 그의 푸른 눈동자가 내 눈을 더듬었다. 그 안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미세한 과거의 흔적이라도 찾듯 꼼꼼하고 정성스러운 눈길이었다.

“다른 건 다 그렇다 쳐도… 다른 놈들이 주변을 맴도는 건, 거기에는 도저히 괜찮은 척할 수가 없었어. 그게 암스테르담에서 온 어린애든, 뉴욕에서 왔다는 느끼한 갤러리 관계자든… 긴 시간 서로의 못 볼 꼴을 다 드러내고 함께 자라 온 내 친구라고 해도.”

“…….”

그가 열거하는 인물 하나하나는 스스로 인정하는 질투의 여정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단숨에 그가 하는 말들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흠, 진짜 아무것도 몰랐다는 얼굴이네. 이런 쪽으로 예민하지 않은 게 서이현 매력 중 하나이긴 하지만… 누가 들이대도 그것도 눈치 못 챌 것 같아서 그건 좀 겁나는데. 잘라 내지 않는 걸 기회를 주는 거로 착각하는 놈들이 가끔 있거든.”

뺨을 감싸고 엄지로 광대 위의 피부를 문지르는 그의 손목을 붙잡아 아래로 당기며 고개를 저었다.

“홍콩에서는 그렇다고 쳐도… 스페인 주점에 갔을 무렵이면 정말 초반인데…. 아니에요. 그땐 대표님 정말 저한테 관심 없었고… 오히려 경계했던 거 맞는데….”

손목을 끌어 내리려 하는 나의 힘에도 꿈쩍하지 않고, 그가 허리를 굽혀 더 가까이에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일상적으로 흔히 볼 수 없을 정도의 잘생긴 얼굴은 그 자체로 어떤 박력이 될 수도 있었다. 괜히 움츠러들어 목소리가 작아졌다.

“왜…요….”

“아주 가끔씩이긴 하지만, 이렇게 고집부리는 것도 왜 안 미울까. 그 생각하고 있었어요.”

신기하다는 듯 얼굴 구석구석을 살피는 그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해서 나는 웃을 수도 없었다.

뺨을 놓아준 그가 이번엔 한 손을 정수리 위에 올리고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최인우하고 어떻게 돼 가는지, 그건 왜 그렇게 만날 때마다 떠봤다고 생각해요? 진짜 걱정돼서? 관심도 없고 경계하고 있는 상대를 왜 걱정해, 내가?”

“아….”

좀 아까만 해도 그땐 아직 나에게 관심이 없었던 게 분명하다며 나름대로 의견을 피력했던 나는 그의 설명이 훨씬 더 논리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사실이다. 그때의 그가 정말 나에게 무관심했고, 그것을 넘어 나를 적대적으로 여기고 있었다면, 인우 형과의 관계를 걱정하거나 궁금해할 이유가 없었다. 그보다 더 질 나쁜 유혹에 넘어가 신세를 망칠 만한 일에 말려든다 해도 멀찍이 방관했겠지.

입술 사이로 흐르는, 납득이 되었음을 알리는 나의 감탄사에 그는 한숨을 쉬며 내 볼을 양쪽으로 잡아당겼다.

“기어이 여기까지 다 말하게 하지. 폼 잡는 건 하나도 못 하게 하고 밑바닥을 다 드러내게 해.”

내가 너무나 얄밉다는 표정으로 볼을 실컷 만지작거리는 그의 얼굴 한구석에서, 감정에 대한 솔직한 자백을 쑥스러워하는 예상치 못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질투를 드러낼 때조차 망설임이 없었던, 연애를 비롯한 모든 상황에 유연하고 능숙하다고 생각했던 그의 소년 같은 모습이 신선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꼴사납고 싶지 않은데, 생각처럼 되지 않아 속상한, 설익은 소년의 풋풋함이 그의 얼굴 아래에서 어른거렸다.

하지만, 내 앞에서 그가 어떤 폼을 잡으려 했는지는 알 수 없어도, 내 눈에 그는 단 한 번도 멋지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불필요한 염려였다.

한참 만지작거리다 볼살을 모아 붕어 입술을 만들고 그 위에 쪽 입을 맞춘 그는 나의 등 뒤에 걸린 벽시계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서이현의 인력에 저항하고자 한 나의 혼란기는 이런 식으로 소파 앞에 서서 지나가는 말로 흘릴 얘깃거리가 아니니까, 오늘은 일단 이 정도로만 하고… 더 방해 안 할게요. 작업해요.”

별것 하지 않아도 둘이 있을 때면 시간은 늘 빠르게 지나갔다. 뒤를 돌아 시계를 확인하니 스튜디오에 내려온 뒤로 어느새 한 시간 가까이가 지나 있었다.

“자기 전에 메시지만 하나 보내 줄래요?”

“그럴게요. 근데 혹시 많이 늦을지도 모르니까….”

1층과 연결된 계단에 오르는 그를 뒤따라가 난간 가장자리를 붙잡고 올려다보았다. 그가 웃으면서 팔을 뻗어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안 기다리고 졸리면 잘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집중해요.”

난간 너머로 허리를 깊이 숙인 그는 두 뺨을 손으로 감싸고 이마와 미간, 콧등에 차례대로 입을 맞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입술을 마주 겹쳤다. 혀를 쓰지 않은, 입술의 접촉뿐인 키스였지만 그것만으로도 가벼운 떨림이 일었다.

혼자 남은 뒤, 몇 시까지 스케치를 했는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시간을 확인했을 때는 11시였고, 그 뒤로는 시간에 대한 개념이 희미해졌다. 실제로 연필을 움직여 보니 도중에 몇 번 계획이 바뀌어 초안만 세 가지로 추려졌고, 확정된 초안의 대략적인 밑그림을 캔버스에 올리고 난 뒤에는 완전히 녹초가 된 상태였다.

간신히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겨우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 베개에 얼굴을 묻고 나니, 그제야 창밖에서 가볍게 튕기는 빗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큰비는 아니었다.

몸과 정신을 텅 비워 낸 것 같은데도 오히려 충만하게 차오르는, 탈력감과 만족감이 공존하는 나른함 속에서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눈꺼풀과 사투를 벌였다.

금요일 늦은 밤. 그는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을까.

무엇을 하고 있든, 그가 이 집의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의식만으로도 입가의 근육이 부드럽게 당겨졌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것처럼 온몸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안도감을 느끼며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나 자신의 상태와 주변의 환경에 대해 안정을 느낀다는 것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감각이었다.

옥상에서 그와 안고 있었을 때도 나는 비슷한 감각을 느꼈다. 내가 그곳에서 세상의 왕이라도 된 것 같다고 느꼈다면, 그것은 모든 것을 발아래로 굽어보는 듯한 전망 때문이 아니었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몰랐다. 어느 순간 의식이 암전되었고, 한참 뒤, 누군가 베개를 고쳐 베게 해 주고, 몸을 추슬러 어깨를 끌어안는 감촉이 잠잠했던 의식의 수면을 얕게 흔들었다.

스튜디오 내에는 미리 설정해 둔 습도와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어, 한여름이더라도 이불을 잘 덮고 자지 않으면 도중에 체온이 내려가곤 했다. 식어 있던 피부에 닿아 오는 따뜻한 맨가슴의 체온이 기분 좋아서, 몸을 웅크리며 바로 앞의 탄탄한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모르는 사람의 낯선 감촉이 아니었다. 익숙하고 친근한 향기와 온도는 나를 안전하다고 느끼게 했다. 눈을 떠서 상대를 확인할 필요조차 없었다.

꿈일지도 모른다. 가장 편안한 자세를 찾아 상대의 목덜미에 이마를 비비면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꿈이더라도 상관없었다. 이것이 꿈이더라도, 이만큼의 애정과 안심을 내게 줄 사람이 실제의 세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등 뒤로 둘러진 팔이 조심스럽게 나를 안았다. 정수리 위에 입술이 닿았다. 잘 자요. 그 한마디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낮은 속삭임 뒤에 의식은 다시 수면 아래로 깊이 가라앉았다.

■ ■ ■

미동도 없는 깊은 숙면 뒤의 기상은 늘 갑작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한순간에 쑥 떠밀려 나간 것처럼, 깨어난 직후에는 잠시 내가 어디에 있는 건지 생각을 가다듬어야 했다.

“잘 잤어요?”

“…….”

옆으로 누운 채 나의 가슴을 향해 아래로 내리뜬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거리다, 머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베개 위에서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음….”

잠긴 목이 아직 꽉 조여들어 있어 매끄러운 소리가 나오지 못했다. 이리저리 어지럽게 굴려지는 나의 눈동자가, 어떻게 그가 여기에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대신하고 있었다.

잠에서 깬 곳은 분명 아래층의 내 침대였지만, 동시에 그의 벗은 품속이기도 했다.

두 개의 베개를 쌓아 높게 돋우고 그 위에 반으로 접은 자신의 팔을 더해 베고 내 쪽을 향해 누운 그는 다른 한 팔을 나의 어깨에 가볍게 걸치고 손등으로 뺨을 어루만졌다.

“어찌나 두더지처럼 파고들던지. 젖꼭지라도 물려 줘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가 나보다 한 칸 높은 곳에서 몸을 웅크려 내려다보며 웃었다. 그의 몸에 바짝 밀착해 있는 나의 상체를 보니 이번엔 그의 말이 과장인 것만은 아니었다.

“언제, 여기… 어떻게….”

아직도 상황 파악이 잘 되지 않아 질문은 제대로 된 문장이 되지 못하고 뚝뚝 끊어졌다.

“왜 메시지 안 보냈어요?”

“자기 전에 분명히 보냈….”

몸을 뒤집어 엎드려 팔꿈치로 침대 위를 짚었다.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을 머리카락을 대강 수습하며 핸드폰을 찾아 베개 주변을 더듬었다. 침대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핸드폰을 주워 잠금을 해제하자, 액정에 곧장 떠오른 것은 메시지 앱이었다.

[오늘은 작업 여기까지 하고 그만 다여ㅏㅓㅓ 퓨]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잠이 들었었는지, 오타 가득한 문장은 전송이 되지 않은 채 메시지 입력창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

낭패감이 섞인 탄성을 뱉으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귀 뒤에서 움켰다. 내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아간 그가 화면 속 문장을 확인하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아침의 자연광 속에서 침대에 누워 웃고 있는 그의 모습도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좀 전에는 잠에서 깨 보니 그가 있다는 사실 자체에 당황해 정작 눈앞의 그를 제대로 인식할 정신이 없었다. 침대 위에서, 전희나 후희나 섹스 중이 아닌 그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어? 그거 왜…. 보내지 말아요.”

액정을 클릭하는 그의 손이 쓰다가 말아 버린 오타 가득한 메시지를 전송하는 것 같아 팔을 뻗어 막아 보려 했지만, 그는 여유롭게 몸의 방향을 틀어 나를 따돌렸다.

“그냥 지워 버리면 아깝잖아요. 이렇게 귀여운 건 소장해야지.”

천장을 향해 누운 그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그러고는 그의 곁에 엎드려 있는 나의 귓바퀴를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아깝다. 졸려 죽겠는데도 나한테 문자 보내려고 애쓰는 서이현, 눈으로 봤어야 하는데.”

연애가 아닌 다른 무엇이라고 할 수 없는 종류의 애정이 담긴 표현들에 아침부터 등줄기가 간지러웠다. 눈을 뜨자마자 이런 애정 속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좀… 심장에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같이… 잔 거예요? 아니면, 좀 전에 오신 거예요?”

귓바퀴를 만지는 손가락에 조심스럽게 내 손을 겹쳐 쥐며 물었다.

“3시쯤 불이 꺼지는 것 같았는데, 그러고도 한참 동안 메시지가 안 오길래 내려와 봤죠.”

그럼 밤사이 누군가가 잠자리를 고쳐 주고 품에 안아 주는 것 같았던 감각은, 꿈이 아니라 그가 침대 안으로 들어오는 기척이었던 건가. 그의 손에 겹쳤던 손을 미끄러뜨려 근육이 뚜렷하게 쪼개진 팔을 쓰다듬으며 아쉬운 목소리를 냈다.

“깨우시지 그랬어요….”

“쓰러질 때까지 작업하다가 잠든 사람을 어떻게 깨워요.”

“그래도… 아깝잖아요.”

“…….”

귀를 만지던 그의 손이 뺨을 넓게 감싸며 무엇이 아까운지를 시선으로 물어 왔다. 얼굴 전체를 감싸고도 남는 커다란 손바닥은 늘 기분 좋아서, 얌전한 고양이나 강아지처럼 뺨을 비비게 됐다.

“처음 같이 잠든 건데, 전 몰랐으니까….”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나를 사랑스럽게 보고 있는 그의 감정이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전해져 왔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어쩌면 말보다도 더 알아듣기 쉽고, 말보다 더 믿을 수 있는 표현들이었다.

그가 엄지로 나의 입술 표면을 가볍게 문지르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 주는 건 기쁘지만, 서이현 씨가 깨 버리면, 아마 또 같이 자는 데 실패할 확률이 높으니까.”

지난 주말, 함께 사케를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그는 섹스 없이 잠만 같이 자자고 했었지만, 결론적으로 우리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었다.

처음부터 무리한 계획이기는 했다. 그날따라 평소보다 더 특별한 대화들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였고, 바로 곁에 누운 서로의 피부와 체온을 모른 척하고 잠을 청하기엔, 이자카야에서부터 우리 사이를 감돌았던 짜릿하고 야릇한 긴장감이 최대치로 팽창해 있었다.

그런 약속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현관으로 들어서자마자 서로에게 달려들어 진한 키스를 시작했었다. 골목의 자동차 뒤에 숨어 나누었던 그런 장난 같은 키스만으로는 조금도 만족할 수 없다는 듯이.

그는 이미 현관에서 나를 반 정도 벗겨 버렸었다. 나 역시 그의 벗은 몸을 원해서 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어깨와 가슴을 헤집었었다.

누군가 우리의 모습을 지켜봤다면, 침실에 도착하기도 전에 무너질 결심을 왜 했던 거냐며 비웃었을 정도로 그날 밤 우리는 포기가 빨랐었다.

서로의 마음에 대한 확신이 깊어질수록 잠자리에서 나의 행동도 과감해지고 있었다. 기본적인 성격으로 인한 수줍음은 여전히 잔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럼없이 먼저 그에게 입을 맞추게 되었고, 팔을 두르게 되었고, 다리를 벌린 모습이나 쾌감에 떠는 모습을 그에게 보이는 것도 더는 망설여지지 않았다.

또 하나의 변화가 있다면, 야하고 격렬하고 성적인 자극이 넘쳤던 그와의 잠자리가, 이제는 달콤해지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감정의 교류란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와 나누는 모든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 준 듯했다. 애욕의 해소만이 아닌, 애정의 표현이라는 의미가 실리고 나니 키스 하나조차도 이전과는 감상이 달랐다.

성욕이 일어난 때와 장소에 마침 상대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눈앞의 상대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구체화된 성욕 속에서, 그날도 우리는 또 이른 여름 해가 푸르스름하게 밝아 올 때까지 몸을 겹쳤다.

다음 날 나는 여느 때처럼 그의 침대에서 눈을 떴지만,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VIP 고객의 초대로 브런치 모임에 다녀온다는 메모가 그의 베개 위에 놓여 있었다. 결국, 우리가 함께 아침을 맞이하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잠결에 그랬는지, 웅얼거리면서 품으로 파고드는데… 순간적으로 확 깨워 버릴까 싶긴 했어요.”

입술을 비비던 엄지로 코끝을 톡 건드리며 그가 웃었다. 만약 그랬다면 아마 긴장으로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을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함께 누워 잠을 청하는 그 시간을 의식하지 못한 게 자꾸 아쉬웠다.

“섹스…하면… 정말 아침까지 같이 못 있는 거예요?”

“…….”

눈꺼풀이 미세하게 움직거리는 그의 표정을 보고 나니, 내가 얼마나 멍청한 질문을 했는지 뒤늦게 실감이 밀려와 베개에 얼굴을 박고 싶어졌다. 역시나 그는 잠시 뒤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두 손으로 내 얼굴을 쥐었다.

“그럴 리가요. 알다시피 요즘 좀 바빠서… 아침에 일찍 나가야 할 때가 많으니까. 내가 좀 많이 강철 체력이긴 하지만, 요즘 우리 횟수를 생각하면 수면 시간도 조금은 신경을 써야 하고.”

그의 다정한 설명에 오히려 얼굴이 더 붉어졌다.

“아직… 잠이 덜 깼나 봐요, 제가. 이상한 걸 물어서 죄송해요.”

변명하는 나의 얼굴을 한차례 요란하게 주무른 그는 몸을 일으켜 앉으며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엎드린 나의 등 위에 상체를 겹치며 귓가에 코끝을 비볐다.

“내가 아침 준비할 테니까 그동안 정원 좀 돌보고 있을래요?”

정말, 아주… 심장에 무리가 많이 가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 ■ ■

나는 8월의 뜨거움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느리고 게으르게, 그러나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한 자국을 남기며 흘러가는, 찐득하게 녹아내린 아이스바 같은 8월의 시간에 대해 제대로 기억해 두고 싶다.

8월의 태양이 내리쬐는 정원. 호스와 연결한 아쿠아건에서 뿜어지는 물줄기 위에 걸쳐진 무지개의 포물선에 대해. 여름 그 자체를 상징하는 듯한, 참나무에 매달린 매미들의 울음소리에 대해. 티셔츠를 벗은 피부 위로 조금씩 배어나기 시작하는 땀방울들이 주는 살아 있음에 대한 자각에 대해.

그의 말대로 밤사이 내린 비는 아주 조금뿐이었는지, 정원으로 나왔을 때는 맹렬한 햇볕에 땅이 바싹 말라 있었다. 8월도 이제는 중순에 다다랐지만 무더위는 여전했다.

충분한 햇빛과 물이 공급되니, 연일 계속되는 폭염에 사람은 흐물흐물해져도 식물들의 잎은 생기가 넘쳤다. 잡초 역시 덩달아 생명력이 강해져, 며칠 사이 또 고개를 내민 잡초를 먼저 제거한 뒤 정원 한구석의 수도에 호스를 연결했다.

솨아아아아.

물이 분사되는 소리만으로도 주변의 온도가 1, 2도는 낮아지는 기분이었다. 서툰 솜씨로 가지를 쳐 놓은 옥향을 향해 물줄기의 방향을 조절하며 왼손을 아쿠아건의 입구에 가져다 댔다. 물은 차가웠다. 벗은 어깨와 등에 쏟아지는 볕은 나를 태울 듯이 뜨거웠다.

정신을 멍하게 만드는 매미 소리와 물소리 속에서 차갑게 식은 왼손을 입술로 가져갔다.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아랫입술의 살점을 모아 만지작거렸다. 순식간에 야릇한 기분이 피부 위를 감돌았다. 선글라스를 낀 상태에서도 눈앞의 세상이 표백한 것처럼 하얗게 보일 만큼 쨍한 햇빛 아래에서 나는 그의 입술을 연상했다.

통증을 동반할 정도의 강렬한 흡입은 그대로 나를 향한 그의 갈망의 깊이였다. 강하게 이로 베어 삼켜 버릴 것처럼 빨아들이는 그의 방식을 기억하며 엄지와 검지 사이를 강하게 비틀었다. 매미 소리가 롤리팝 캔디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듯 의식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살점이 팍 터지면서 피가 나오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입술을 비틀었다. 발기할 것 같았다.

으흠, 흠.

기척을 내기 위해 일부러 꾸민 헛기침 소리에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팔짱을 낀 채 열어 둔 현관 틀에 기대선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의외로 수치심은 들지 않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부끄럽지 않았다. 아쿠아건을 그대로 켜 둔 채 계단 위의 그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엷은 미소와 함께 흰 빛 속에 서 있던 그가 팔짱을 허물며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뒤에서 나를 끌어안아 촉촉하게 배어난 땀으로 번들거리는 가슴과 배 위를 어루만지며 귓가에 입술을 비볐다.

나의 여름이 조금 더 뜨거워졌다.

“언제부터 그렇게… 혼자 있을 때 입술 꼬집고 그랬어요?”

가끔씩 진짜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한다니까. 그렇게 덧붙이는 그에게서는 달콤한 시럽 향기가 풍겼다. 아침으로 과일을 곁들인 팬케이크를 굽겠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키스가 하고 싶었으면 들어와서 날 덮쳐 주지.”

목덜미로 파고드는 그의 입술을 받아 내며 고개를 꺾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작은 새 두 마리가 키 큰 참나무 꼭대기 앞을 빠르게 지나쳐 날아갔다. 가슴을 애무하며 목덜미에 키스하는 그의 손과 입술은 태양 같았다.

“늘 이렇게 윗옷 벗고 정원에 있었던 건가.”

어깨에서부터 위팔 사이를 쓰다듬는 그의 손에 내 손을 겹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미리 연락 좀 줘요. 이렇게 좋은 걸 지금까지 놓쳤다니 너무 아깝잖아.”

목덜미에서부터 미끄러져 내려가 팔로 이어지는 어깨의 끝점에 입을 맞춘 그는 나의 옆쪽으로 와서 서면서 뒷목을 부드럽게 주물렀다.

“선글라스, 잘 어울려요. 하긴, 뭔들 안 어울릴까.”

자신의 광대뼈쯤을 톡톡 두드리는 그를 향해 마주 웃으며 옥향에서 조팝나무 쪽으로 호스의 방향을 바꾸었다. 좀 더 멀리까지 길어진 물줄기에 무지개가 그리는 포물선도 좀 더 커졌다. 옥향과는 물이 닿는 소리도 조금 달랐다.

“저… 병원에 가 보려구요.”

“…….”

목과 어깨를 가볍게 주무르던 그의 손이 서서히 멈췄다.

“가벼운 위염이거나 아니면 더위를 좀 타는 것 같아서 그냥 지나가겠지 했는데… 대표님도 많이 걱정하시는 것 같고, 솔직히 증상이 나아질 기미가 안 보여서… 진료를 받아 보려구요. 별것 아니긴 하지만, 차도가 없는데도 버티는 게 미련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입맛이 별로 없다거나 음식의 냄새에 가벼운 오심이 이는 정도로 이만큼 걱정을 해 준 사람이 지금까지 없기도 했고, 스스로도 그다지 먹는 것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기에 식욕부진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그냥 그렇게 지나가겠지, 습관대로 방치하려던 생각이 컸었다.

하지만 세심한 그는 내가 말하지 않았어도 증상을 알아챘고, 누군가가 그렇게까지 소중히 여기는 내 몸을 정작 나 자신은 무심하게 방치한다는 것이… 그것을 아껴 주는 상대에 대한 무례로 느껴졌다.

게다가, 아직 실감은 안 나지만, 어쨌든 전업 작가로 작품 활동을 꾸준히 이어 가려면 체력과 건강을 일정 상태 이상으로 유지하는 것도 자기 관리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다음 주에 잠깐 시간 내서 낮에 잠깐… 다녀올…게요.”

한참 말이 없다 싶었는데, 돌아보니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린 그대로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은 듯 정지한 옆모습은 더더욱 조소 작품 같았다. 상앗빛이 감도는 것처럼 우아하고 섬세하지만, 그 얇은 한 겹 뒤에 비치는 거칠고 야성적인 본성이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긴장감과 섹시함을 끌어냈다.

우아함 뒤의 야성을, 혹은 야성을 감싼 우아함을 표현하는 것은 보통의 솜씨로는 불가능했다. 그는 대가의 손끝에서 태어난 역작 같았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나의 감탄 섞인 시선을 눈치챈 건지, 아니면 하고 있던 생각이 마무리된 건지. 그가 흠칫 자신을 의식하며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요…. 잘 생각했어요. 몸이 안 좋으면 의사를 만나 봐야지. 최인우가 봐 줄 수 있게 내가 예약해 둘게요.”

그가 인우 형에게 가 보라고 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눈이 조금 커졌다.

“그렇게 보여도 진료는 꼼꼼하게 봐 주거든.”

그가 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짧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문득 진지한 표정과 함께 내 쪽으로 몸을 돌려 한 걸음 더 바짝 다가왔다. 그의 커다란 인영에 얼굴의 절반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생각에서 빠져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정은 여전히 좀 전에 자신만의 세계 속에 잠겨 있던 그대로, 시간을 비켜나 정지한 듯했다. 그러나 나를 보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오히려 자신의 세계 속으로 나를 당겨 가두고 싶어 하는 듯 갈망하는 얼굴이었다.

그가 고개를 숙여 나의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어깨에서부터 팔을 미끄러져 내려가 양쪽 옆구리를 두 손으로 쓰다듬는 손길에 아쿠아건의 머리가 흔들렸다. 나의 다른 생각들도 함께 흔들리며 흩어졌다. 하…. 한숨 같은 신음이 가늘게 새어 나왔다.

그의 두 손이 옆구리에서 등 쪽으로 더듬거리며 넘어가 허리를 강하게 안았다. 어깨에서 목덜미로 올라온 입술이 턱선을 따라 미끄러졌고, 나는 기대감으로 눈을 감으며 입술을 벌렸다.

“으으, 음. 으음.”

단번에 깊이 겹쳐지는 키스에 아쿠아건을 놓쳐 버렸다. 뭍에 꺼내 놓은 긴 장어처럼 요란하게 몸을 꼬며 펄떡거리던 호스는 곧 잠잠해져 잔디 위에 조용히 머리를 늘어뜨리고 물을 흘렸다.

나는 8월의 뜨거움에 대해, 나의 입술과 혀에 이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감각을 덧그리는 그의 키스의 과정 하나하나에 대해, 타인을 향한 나의 최초의 감정이 조심스럽게 익어 가는 여름날의 달고, 시고, 뜨겁고… 때로 깜짝 놀라게 하는 낯선 맛에 대해 빠짐없이 기억해 두고 싶었다.

한 개인의 역사에 있어 이후의 모든 관계에 대한 기준점이 된다고들 하는 최초의 반함과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그 반함의 대상, 라우 위쿤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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