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침묵과 거짓
현관문이 열리고, 냉장고 문을 연 것처럼 안쪽에서부터 시원한 공기가 새어 나왔다.
실내는 충분히 시원했지만, 문을 열어 준 주한이 형은 티셔츠를 입지 않은 채였다.
“신발은 그냥 신고 들어와. 서양식이거든.”
여기저기 찢어진 검은색 스키니진에 투박한 워커를 신은 형은 먼저 뒤로 돌아 방으로 들어가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좀 전에 샤워를 마쳤는지 머리카락 끝에 물방울이 남아 있었다.
“사실은 자주 쓸고 닦는 거 귀찮아서 그냥 이렇게 지내는 거지만.”
그렇게 덧붙인 형은 뒤를 돌아보며 킥킥거렸다.
그림을 그릴 장소로 나는 형이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곳을 원했고, 형이 택한 곳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형의 집이었다.
충정로와 시청을 잇는 서소문 고가도로가 내려다보이는 오피스텔은 서울에서는 드물게 전망이 탁 트여 있었고, 러시아워에도 30분 정도면 충분히 팬텀에 출퇴근할 수 있는 위치였다.
“팬텀 정직원 되면서 대표님이 숙소로 쓰라고 내주신 거. 백유니는 위에, 23층 살아.”
형은 검지를 세워 천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형의 집은 21층이었다.
“구경하고 싶다고 했는데 너 작업 방해할까 봐 오지 말라고 했어. 어디 보자, 음료수가… 맥주밖에 없는데, 마실래?”
언뜻 보기에도 텅 빈 것 같은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던 형이 이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방 한가운데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나는 괜찮다고 대답하며 어깨에서 가방을 끌어 내렸다.
형이 맥주 캔의 풀탭을 따는 소리가 경쾌했다.
“그래서, 난 어떡하면 돼? 너 그리는 동안 한 자세로 버텨야 하는 거면 미리 몸 좀 풀자.”
“그냥… 형이 평소에 지내시는 대로 편하게 하시면 돼요. 그리고 싶은 이미지가 분명해질 때까지는 여러 모습을 스케치하려구요.”
입술의 피어스를 만지작거리며 좁은 방 안을 둘러보던 형은 침대 옆 벽을 따라 스탠드에 고이 모셔져 있었던 두 대의 기타 중 하나를 붙잡았다. 먼지가 전혀 앉지 않은 것을 보고 소중히 관리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 기타나 좀 만질까.”
그리 넓지 않은 스튜디오형 원룸이었지만, 덩치 큰 가구가 없는 탓에 갑갑한 느낌은 없었다. 한쪽 벽면 전체를 채우는 커튼식 2층 행어와 그 맞은편의 싱글 침대, 그리고 전망 좋은 전면창 앞에 놓인 원형 테이블이 가구라고 할 수 있는 살림의 전부였다. 자주 쓸고 닦지는 않더라도 짐이 간결해 지저분해 보이지는 않았다.
“거기 앉아서 그릴래?”
가로세로가 각각 한 뼘 정도 될 것 같은 소형 앰프를 전면창 앞 테이블에 놓고 기타와 연결시키면서 형은 턱짓으로 침대를 가리켰다.
“아니면 내가 침대에서 칠 테니까 네가 여기서 그릴래? 그림 그리기에 조건이 좀 열악하다.”
형은 난감한 표정으로 좁은 방 안을 둘러봤다.
“오늘은 간단하게 크로키 정도로만 스케치할 거라 괜찮아요. 필요하면 다음엔 이젤 가지고 올게요. 형이 편한 대로 하시는 게 제일 좋아요.”
“모델이 편한 대로 작업한다니, 특이한 작가님이네.”
피식 웃은 형은 악보가 꽂힌 클리어파일을 펼쳐 놓고 기타를 튜닝하기 시작했고, 나 역시 가방에서 스케치 도구를 꺼내 형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새삼스럽게 차분히 돌아본 형의 방에는 잡지에서 찢어 낸 사진이나 포스터 한 장 붙어 있지 않았다. 펑크 밴드를 했던 경력과 옷의 취향을 고려했을 때, 형이 사는 집이라면 아마도 이러할 것이라고 멋대로 상상했던 이미지와 달리 방에서는 취향이나 생활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깔끔한 것과는 조금 달랐다. 잠만 자고 나가는 공간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그러고 보니까 이런 식으로 단둘이 있는 건 처음인가?”
열 손가락에 다섯 개 이상의 반지를 낀 길고 마른 손가락으로 코드를 짚으며, 고개를 숙여 기타에 시선을 고정한 채 형이 말했다.
“일할 때 빼고는 그런 것 같아요.”
“처음 만났을 때 생각나네.”
첫 만남을 떠올리는지 형은 벗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고, 나의 등장에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욕을 했던 형을 생각하며 나도 따라 웃었다.
그때는 정식으로 팬텀에서 일하게 될 줄도 몰랐고, 팬텀의 소속 작가가 돼서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될 거라고는 더더욱 짐작도 하지 못했었다.
수키킴 선생님을 만났고, 모래와 형이 한국을 떠났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됐고, 정의하기 복잡한 관계 속으로 자신을 내몰아 왔다.
초봄에서 한여름이 됐을 뿐인데, 참 많은 것들이 달라졌음이 새삼스러웠다.
형이 짚는 손가락을 따라 방 안에 전자음이 퍼져 나갔다. 일렉 기타의 음을 눈앞에서 듣기는 처음이었는데, 현악기 특유의 서글픈 음색에 섬세한 떨림이 더해져 상당히 매혹적이었다.
무슨 곡인지는 몰라도 펑크는 아니었다. 느리고 나른하게 공간 속을 공명하는 음이 표현하는 것은 희로애락 같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다. 형이 연주하는 곡은 좀 더 과격하고, 시원하고, 직관적일 거라 생각했던 예상도 어긋났다. 복잡한 음이 만드는 긴장감 속으로 벨 소리가 뒤섞였다. 형의 핸드폰이었다.
“받아도 돼?”
“네, 편하게 움직이셔도 돼요.”
“너그러운 작가님이네.”
피식 웃은 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개수대 옆에 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발신자를 확인한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악당 같은 웃음이었다.
“네. 나 지금 모델 하는 중이요. 아니, 사진 말고 그림.”
의자로 다시 돌아와 털썩 주저앉으며 형은 테이블 위의 맥주를 들이켰다.
“오늘? 좀 갑작스럽네…. 몇 시요? …그때쯤이면 괜찮을 것 같긴 한데… 내가 가 주면 뭐 해 줄 건데?”
형의 표정이 좀 더 은근해졌다. 상대방에게서 어떤 답변을 들었는지 몰라도 어깨가 들썩거렸다. 나는 손을 움직일 생각은 하지 않은 채 그런 형을 관찰하고만 있었다.
팬텀에서 일할 때의 형이나, 유니 누나와 셋이 있을 때, 다른 팬텀 식구들과 함께 있을 때 내가 봐 왔던 형과는 사뭇 달랐다. 말 그대로 사생활이라는 느낌이었다. 우리와 함께 있을 때는 짓지 않는 표정이었고, 들려주지 않는 목소리였다.
누나보다는 형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있다는 생각에 모델을 부탁했지만, 그조차도 지극히 단편적인 생각이 아니었을지, 그런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 증거로 스케치가 좀처럼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무엇을 그려야 할지, 누구를 그려야 할지, 이 집에 들어온 후부터 방향을 잃은 상태였다.
“아… 나 요새 일 때문에 스트레스 겁나 쌓였는데, 아저씨 운 좋네? 딱 기다리고 있어요.”
가벼운 웃음으로 통화를 마무리한 형은 매트리스 위에 핸드폰을 던져 놓았다. 그리고 다시 기타를 잡으며 나를 힐끔 쳐다봤다.
“충격받은 얼굴이네?”
“아니요, 충격은 별로…. 예전에 형이 얘기해 주기도 했었고.”
“아….”
고양이가 있었던 홍대의 한 술집에서 만났던 일을 떠올린 형은 멋쩍게 웃으며 얼마 전 아주 짧게 자른 머리카락을 벅벅 문질렀다.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놈이 그런 얘기 늘어놔서, 그때 너도 꽤 놀랐겠다?”
그 반대였다.
“형이랑 누나를 좀 더 알게 된 것 같아서 오히려 좋았어요…. 전 제 얘기를 잘 못하는 사람이라서.”
유니 누나와 형에게 분명 호감을 갖고 있긴 했었지만, 낯선 사람은 일단 경계해야만 했던 당시의 상황도 그랬고, 나의 내성적인 성격도 있었기 때문에, 그 호감을 꾸준히 이어 가려는 적극적 노력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때는 먼저 다가와 줘서 고마웠다.
잠시 나를 쳐다보던 형은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악보를 내려다봤다.
“별 의미도 없는 얘기야. 그냥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도 떠들 수 있는. 내가 입이 좀 가볍잖아.”
그럴지도 모른다.
형은 나 같은 성격이 아니니, 부모와 자식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형태의 갈등처럼 보이는 그 사건에 대해서도, 길 가다 우연히 싸움에 휘말린 정도의 일처럼, 누구에게나 쉽게 털어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조가 가벼웠다고 해서, 혹은 형이 가벼운 마음으로 털어놨다고 해서, 벌어진 그 일들 자체가 가벼울 수는 없었다. 적어도 나는 그 이야기를 통해 권주한이라는 한 개인을 좀 더 구체적으로 느꼈다.
다시 연주를 하는가 싶었던 형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뒤 기타를 끌어안으며 망설이듯 이야기를 꺼냈다.
“이건 좀 찌질한 얘기이긴 한데… 사실 처음에 너한테 동질감 느꼈었거든.”
“…….”
“팬텀 식구들은 다 한 가닥씩 하는 사람들인 데다가 일하면서 만나게 되는 작가들도 그렇고, 우리 고객 중에는 또 유난히 창작하는 사람들이 많잖아. 끼 있고 재능 넘치고 잘나가는…. 맨날 그런 사람들한테 둘러싸여 지내다 보면 솔직히 좀 주눅 들게 되거든.”
의외의 발언에 손이 완전히 멈췄다. 나에게는 형 역시도 그렇게 반짝거리는 사람 중의 한 명이었으니까.
위에서 아래로, 부드럽게 기타 줄을 쓸어내려 듣기 좋은 소리를 만들어 내면서 형이 말했다.
“근데 넌 그냥 평범한 내 또래 같아서, 그래서 네가 왔을 때 약간 안심했었지. 너랑 내가 평범한 거고, 다른 사람들이 지나치게 잘난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근거가 생겼으니까.”
거기까지 얘기한 형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기타의 핑거보드에 손가락을 얹었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
“근데 결국은 너도 잘난 놈이었다니. 배신자.”
“아니요, 전 아직… 아무것도 못 보여 드렸어요. 앞으로 진짜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지… 그것도 지금은 자신이 없구요. 팬텀 일도 능숙하고 올드 퓨처까지 운영하는 형이 훨씬….”
“팬텀은 숙식 제공까지 해 준다고 하니까 시작한 거였고, 올드 퓨처도 솔직히 백유니가 주인이지. 난 그냥 어쩌다 좋은 사람들 만나서 운 좋게 실제보다 멋진 역할을 맡게 된 변태 양아치야. 그리고 넌 대표님이 픽했잖아. 다른 건 몰라도 대표님, 가능성 구별해 내는 것만은 진짜 귀신이니까 믿어도 돼. 그렇게 발굴해서 갤러리 몸집 불려 준 작가들도 여럿이고.”
어쩌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운 좋게 실제보다 멋진 역할을 맡게 된 변태 양아치. 자기 확신이 강하고 거침없어 보이는 형이 스스로를 그렇게 가혹하게 재단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런 시각으로 보자면, 나야말로 어쩌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운 좋게 기회를 부여받은 겁쟁이일 뿐이었다. 이전에 나를 지탱해 준 건 모래와 형이었고, 지금은… 눈앞의 주한이 형을 비롯한 많은 분들과 그리고 특별한 한 사람.
나야말로, 대표님과 실장님, 누나와 형 같은 단단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미미함을 절감해 왔었다. 형은 그런 감정을 느낄 필요가 없는 사람 같았지만, 형이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그 자체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았다.
잘 안 되는 부분이 있는지, 형은 짧은 멜로디를 반복해서 연주했다. 어딘가 깊숙한 곳의 감정을 건드리는 멜로디였다.
“그리고 사실 그 그림, 나도 좋아했거든. 대표님 거실에 걸려 있던 네 작품. 서양화과에 입학하긴 했어도 그냥 부모님이 인서울 보내겠다고 입시 컨설팅받아서 집어넣은 거라 그림에는 별 관심도 없었고, 특히나 추상화 같은 건 알맹이도 없으면서 괜히 있어 보이는 척하는 것 같아 더 별로였는데… 그건 좋았어. 내 생각에 미술은 문학으로 치자면 시에 가까워서, 소설처럼 명확한 서사나 주제를 꼬집을 순 없지만, 그 그림은… 보고 있으면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거든. 뭐 약간, 세상살이 너만 힘든 건 아니야, 힘내! 이런 느낌?”
마지막에 형은 잠시 고개를 들어 나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그리고 다시 예의 그 멜로디가 반복됐다.
형 자신의 평가와는 별개로, 나에게는 이런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포장 없이 털어놓을 수 있는 형이 여전히 빛나 보였다.
마르고 긴 형의 손가락이 핑거보드 위에서 빠르고 정확하게 줄을 누르며 음을 만들어 냈다. 내 눈엔 그의 손이 가장 아름답기는 했지만… 손등에 뼈의 움직임이 그대로 드러날 정도로 마른 형의 손에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건조하고 차가워 보이지만, 섬세하게 움직이며 외로움을 호소하는 연약함… 같은.
소설보다는 시에 가까운 건 미술만이 아니라 음악도 그럴지 모른다. 문외한이라 정확히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어도, 형의 연주를 들으면 알 수 있었다. 형이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가볍고 깊이 없는, 단지 운만 좋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전신의 크로키를 중단하고 좀 더 단단한 연필로 바꿔 형의 손을 집중해서 묘사하는 사이, 연습은 서서히 연주로 변해 갔다.
조각조각 쪼개어 몇 번씩 되풀이했던 각각의 마디들이 매끄럽게 이어지는 멜로디가 되고, 일관된 색채를 띠고 하나의 흐름을 이룬다. 형이 그런 느낌을 실어 연주한 건지, 원래 곡의 느낌인지는 몰라도, 가사 없이 멜로디만 연주하고 있을 뿐인데도 스토리가 그려지는 듯한 곡이었다.
연필을 멈추고 물었다.
“이거… 제목이 뭐예요?”
“<커즈 위브 엔디드 애즈 러버스(Cause We’ve Ended As Lovers)>라는 곡인데, 내가 이렇게 버벅대면서 연습하고 있어서 그렇지, 원래는 완전 죽이는 곡이거든.”
오늘 이 방에 들어온 뒤 가장 생기 넘치는 표정으로 형이 대답했다.
“제프 벡(Jeff Beck)이라고 세계 3대 기타리스트 중 한 분인데…. 뭐, 세계 3대 기타리스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어쨌든 그 형님의 곡이지.”
공룡이나 자동차,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의 캐릭터에 대해 이야기하는 어린애처럼 상기된 얼굴로, 형은 기타리스트의 이름과 앨범 명, 곡의 제목을 메신저로 직접 보내 주기까지 했다.
“앨범 한번 다운받아서 들어 봐. 이 곡이 마음에 들면 같은 앨범에 있는 다른 곡들도 괜찮을 거야. 꼭 오리지널로 들어 보라고.”
약속한 6시까지는 두 시간 정도가 더 남아 있었지만, 그 시간 동안 나는 형의 외향 묘사밖에는 할 수 없었다. 정물과 다를 게 없는 껍데기뿐인 스케치였다. 내가 그에게 보여 줬던 노트 속의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형을 조금은 알고 있다고, 그래서 그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적어도 오늘 내가 그리러 온 형은 이곳에 없었다.
6시가 되자 형은 같이 나가자며 티셔츠를 훌훌 뒤집어쓰고 거울 앞에서 멋을 부렸다. 자신감과 유쾌한 반항 정신으로 가득 찬 펑크족의 모습으로, 내가 아는 권주한으로 조금씩 변해 갔다.
거울 앞에 서서 귀에 장식된 피어스의 개수를 늘리며 형이 말했다.
“대표님이 데리러 오신댔나?”
“……네.”
“데이트?”
예상하지 못한 물음에 당황했지만, 제 발이 저릴 뿐이라 생각하며 침착함을 가장했다.
“그냥, 추천해 주시고 싶은 전시회가 있다고 하셔서….”
“주말 저녁에 단둘이 만나서 전시회 보는 게 일반적인 데이트 아닌가? 뭐 나야 일반적인 데이트에 대해서 잘 모르긴 하지만.”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인 형은 거울을 통해 나를 보며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좋겠네, 서이현.”
“…….”
뭔가를 알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며 입술을 뜯는 사이, 형이 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려 나를 마주했다.
“야, 네가 그렇게 반응하니까 내가 더 당황스럽다. 대표님 좋아하는 거, 설마 그게 비밀이었냐?”
나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할 필요도 없다는 태도였다. 형은 완전히 확신하고 있었다.
“어… 어떻게….”
“어떻게는 무슨. 바비큐 했던 날, 내가 대표님한테 닿을 때마다 네가 하늘이 무너지는 표정을 짓길래 알았지. 근데… 지금 이게 진짜 하늘이 무너진 표정이네.”
누나는 내 표정을 보지 못하는 자리였으니 몰랐을 거고, 실장님은 연애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둔감한 편이니 눈치 못 채셨을 거라며 형은 나를 위로했지만, 동시에 감추려고 하는 놈이라기엔 너무 노골적이었다며, 침대에 앉아 있던 나의 볼을 꼬집어 양쪽으로 늘리기도 했다.
“난 또 하도 티를 내길래 동네방네 소문내고 싶어 하는 줄 알았지. ‘나 대표님 좋아해요. 대표님 내 거! 그러니까 주한이 형, 대표님 자꾸 만지지 마요!’ 이러면서.”
그날, 형과 그의 친밀한 스킨십을 부러워했던 건 사실이지만, 나의 그런 시선을 형이 전부 의식하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내가 그렇게까지 감정을 들키기 쉬운 놈이었다니, 좀… 충격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에 대한 감정에 한해 숨기지 못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가끔씩 한이 형조차도 나의 무감함을 참지 못하고 화를 내곤 했으니까.
“근데 뭐야, 설마 진지하게 좋아하는 거야? 연예인 좋아하는 것 같은 그런 동경이 아니고?”
사색이 됐을 게 뻔한 나의 반응에, 형의 표정도 점점 진지해졌다. 내 머리카락을 흩트린 형은 팔짱을 끼면서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하긴. 넌 가볍게 좋아한다는 게 어떤 건지도 모를 것 같긴 해.”
이전에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어서, 그를 좋아하는 마음에도 둔감했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내가 어떤 상태가 되는지, 상대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아무런 정보가 없어서 더 혼란스러웠었다.
그런데 타인인 형은 아주 간단하게 내가 이럴 것 같다는 말을 한다. 내가 누군가를 어떻게 좋아할 것 같은지, 차라리 형에게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근데 넌 대표님 같은 사람은 연애 상대로 생각도 안 할 것 같았는데. 진짜 의외다.”
“…….”
거울 앞으로 돌아가는 형의 뒷모습을 향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표정으로 물었다.
“대표님, 상사로서 연장자로서 편하고 뒤끝 없고 잘 챙겨 주고, 그러면서 생색도 안 내고, 여러모로 다 좋고 배울 점도 많지만… 솔직히… 연애에 진중해 보이는 사람은 아니잖아. 그래서 딴 사람은 몰라도 넌 절대 안 넘어갈 줄 알았거든.”
눈썹 옆의 피어스와 입술 피어스를 얇은 체인으로 연결하는 형의 등을 보다가 손 안의 핸드폰으로 시선을 끌어 내렸다. 10분쯤 뒤 오피스텔 앞에 도착한다는 그의 메시지가 가벼운 진동과 함께 액정에 떠올랐다.
“화술 수려하고 매너 세련됐고, 외모도… 그래, 뭐 솔직히 환상적이고. 대표님의 사람 홀리는 매력은 인정하는데.”
링 형태의 입술 피어스에 체인을 채운 형이 이쪽을 향해 돌아섰다.
“좀 더 안정감 있고 포용력 있는 사람이 네 취향 아니야? 아니면, 뭐야. 너도 결국 라우 위쿤의 외적 조건에 흔들린 거냐?”
그리고 분위기를 좀 더 가볍게 만들기 위해서인지, 가까이 다가와 장난스럽게 내 어깨를 흔들었다.
어떻게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는지, 형과 누나를 신기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다. 혹시 속으로는 치열한 짝사랑 중인 것은 아닐까 상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적어도 주한이 형은 그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를 좋아했다면, 그래서 좀 더 그를 자세히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면, 그를 포용력 없고 불안한 사람으로 표현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별다른 반응 없이 애매하게 웃으며 맥없는 인형처럼 흔드는 대로 그저 흔들리고 있는 나의 어깨를 놓은 형은 한숨을 내쉬며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좁은 침대의 매트리스가 출렁거리며 형의 무게를 튕겨 냈다.
“야, 내가 원래 진짜 남의 연애에 훈수 두고 그런 놈 아니거든. 오히려 팔짱 끼고 지켜보다가 삐딱선 타기 시작하면 낄낄대면서 즐기는 놈이지. 근데 넌… 말로는 사랑이라면서 감정에 취해서 드라마 찍는 거나 즐길… 그런 놈이 아니니까. 너 마음 다치고 힘들어할까 봐 하는 얘긴데….”
무거운 비밀이라도 고백하는 사람처럼 형은 뜸을 들이며 어렵게 말을 이어 갔다.
“아직 그냥 설레고 두근거리고 그런 정도의 단계인 거면, 웬만하면 마음 정리해라.”
앞의 이야기를 주춤거렸던 것에 비해 마음을 정리하라는 충고의 말은 조금 우회적인 명령처럼 들릴 정도로 망설임 없이 분명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그에 대해서 설레고 두근거리는 단계를 지났는지 아닌지, 일단 나는 그것부터 알 수 없었다. 그를 생각만 해도 진정되지 않는 들썩임이 느껴졌으니, 그것을 설렘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거기에는 분명 높은 곳에서 발을 헛디뎌 훅 낙하하듯 철렁하는 감각도 공존했다.
게다가 좋아하는 마음의 발전 과정에 대한 다양한 경우를 수집해 그 사이에서 일정한 패턴을 찾아 단계로 정리할 수 있을 만큼 나는 경험이 많지 못했다.
그 역시도 나를 좋아하는 것 같은 분위기이니 한번 잘해 보라고, 둘이 잘 어울린다고, 그런 격려를 원했던 건 아니지만, 그와 나, 둘 모두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서 너무도 깨끗하게 정리하라는 충고를 받고 나니, 처음으로 우리 둘의 관계에 대한 외부의 시선에 생각이 닿았다.
아마도 그렇게… 잘 어울리는 그림은 아닌 듯했다.
요즘 들어 조금 변화가 있었던 그와 나의 관계에 대해 형에게 설명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는 사이, 형은 짧은 머리카락을 문지르며 침대에서 일어나 냉장고에서 새 맥주를 꺼냈다.
“네가 보기엔 백유니랑 나랑 대표님하고 아주 가까운 사이 같지?”
“…….”
홧술을 마시는 사람처럼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켠 형은 손등으로 거칠게 입가를 훔쳐 냈다.
“근데 우린 대표님에 대해서 거의 몰라. 사생활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우리가 같이 일한 이후로 대표님이 제대로 된 연애를 한 적이 없다는 건 알지. 오는 사람은 가려 받을지 몰라도, 가는 사람은 안 잡는 주의인 건 확실해. 진지한 관계가 되는 건 기대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그렇게 말한 뒤에 여러 모금의 맥주를 단번에 삼켜 내는 형은 하기 싫은 얘기를 억지로 하는 사람 같았다.
형의 추측은 어느 정도는 맞고, 어느 정도는 빗나가 있었다.
이전의 나였다면 아마도 그에 대한 형의 평가에 동의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형이 말하는 그의 모습이, 관계를 분명하게 정의하고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나태라면, 그것에 대해서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나 역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침대 위에서 그는 자신의 욕구보다 나의 쾌감을 우선해 주었고, 긴 시간 동안 정성 들인 애무를 통해 단지 성기만이 아닌 몸의 구석구석을 쾌감으로 깨워 주었다. 끝난 뒤에는 섹스보다 더 낯 뜨거울 정도로 살뜰한 뒤처리가 이어졌고, 입맞춤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달콤했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오래 비겁할 수 있었다.
그를 좋아하면서도, 그것을 분명히 전하지 않은 채 모호한 상태에서 책임을 미루며, 그 안에서 일종의 안락함마저 느꼈었다.
이렇게 그가 나에게 어떤 고통도 주지 않고, 나 아닌 누군가와 잔다거나 나 아닌 누군가를 특별하게 대하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지금처럼만 나를 대해 준다면… 이 상태가 계속 유지되는 것만으로도 좋을 거라고.
그러니 무책임하다는 평가는 나에게도 적용되어야만 공정했다.
옆에 앉은 형이 맥주 캔을 입술로 가져갈 때마다 입술의 피어스가 캔에 부딪히는 금속성의 마찰음이 딸각거렸다. 나도 맥주를 한 캔 달라고 할까 싶었다. 오랜만에 담배를 좀 피우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둘 중 어느 것도 형에게 요구하지는 않았다. 손안의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내가 이러고 다니는 거… 그러니까, 나보다 나이 많은 남자들 만나서 육체관계뿐인 만남이나 하고 돌아다니는 거, 대표님도 다 알아. 하지만 절대 터치 안 하지. 백유니가 유학 가면 붙잡을 것처럼 말하지만, 막상 진짜 그런 순간이 오면 이래라저래라 같은 소린 한마디도 안 할걸? 남의 인생에 개입하게 되는 걸 병적으로 꺼린다는 얘기야. 대표님, 친절하고 다정하지. 나도 그거 많이 감사해. 근데… 진짜 깊은 곳까지는 절대 들어오려고 하지 않고, 들여보내 주지도 않아. 그게 라우 위쿤 씨라고.”
그렇게 말하며 마지막 남은 맥주를 단번에 모조리 비워 내는 형의 옆모습은 그에 대한 나의 감정이 아닌, 자신의 감정을 얘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타인의 진짜 깊은 곳까지는 들어가려 하지도 않고, 들여보내 주지도 않는 라우 위쿤에 대한 섭섭함을 호소하는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돌아본 형은 부모나 선생님의 관심을 갈구하다 지치고 상처받은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수키킴이 그의 어머니라는 것을 누나와 형은 모르고 있다는 얘기를 그에게 들었을 때. 의외라고 생각했었고, 조금 놀라기도 했었다. 어쩌면 그런 부분이 형이 말하는 그의 냉정한 거리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나와 형에게 그가 보이는 모습들을 단순한 친절이라고만 할 수는 없었다.
나도 주한이 형에 대해서, 형도 나에 대해서, 그리고 형도 그에 대해서, 모두가 조금씩 실제와 어긋난 허상을 보고 있었다. 혹은 부분을 전체로 왜곡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전의 나 역시 그에 대해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지금도 그럴지 모른다.
하지만 더 알기를 원했다. 좀 더 실제에 가까운 그를 보고 싶었다.
동시에 그에게, 이 사람들에게, 나를 보여 주고 싶었다. 세상과 연결된 감각을 차단하는 것으로 자신을 보호하려 했던 겁쟁이가 나의 실체이고, 현재의 내가 보여 줄 수 있는 전부라 하더라도.
아버지처럼 입을 닫아 버리고 그 닫힌 세계 안쪽으로 침잠해 버리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적어도 몸부림이라도 쳐 봐야만 했다. 말없이 곁을 지켜 주었던 사람들과 또 그 안에서 빠져나와 다시 예전처럼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해 주었던…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형.”
“…….”
“혹시 다음 스케치 때… 누드…로 해 주실 수 있을까요?”
형의 눈이 커졌다. 갑작스럽게 화제를 전환했으니 더 그랬을 거다.
“누드?”
“네, 형만 괜찮으시다면요.”
형은 다 마신 맥주 캔을 만지작거리며 윗니로 입술 피어스를 잘근거렸다.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대표님 댁 정원에서… 그리고 싶은데.”
그러다 피식 웃으며 나를 삐딱하게 쳐다봤다.
“심지어 야외 플레이?”
나도 형을 따라 웃었다.
“작가님이 그리고 싶은 이미지가 좀 떠오르셨나 보네. 부모도 내놓은 놈인데 못 할 거 없지. 외설도 아니고 예술을 위해서라는데. 하지, 뭐. 하자!”
허벅지 위를 손바닥으로 맵게 갈기면서 형은 맥주 캔을 완전히 찌그러뜨렸다. 좀 전에 좋아하는 기타리스트에 대해 얘기할 때보다 더 생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나의 연애 대상으로는 적합하지 않은 그의 불완전성에 대해 형은 더는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심지어 언제 그런 이야기를 했었냐는 듯 다음 스케치의 컨셉이나 자세에 대해 들뜬 어조로 떠들어 댔다.
나란히 형의 오피스텔 현관을 나서면서, 문득 바비큐를 했던 날, 나에 대한 인우 형의 관심이 진심이라면 양심 없는 짓이라고, 유난히 목소리를 높였던 형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때 형은 인우 형을 빗대 그와 나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야, 근데 나 진짜 정상이 아니긴 한가 보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내 어깨에 팔을 걸치며 형이 피식거렸다.
“왜 누드로 하자니까 갑자기 확 재밌냐? 오늘 네가 그리러 온다고 했을 땐 그냥 되게 막연했거든. 근데 지금은 흥미가 생기고 피가 돌고 그런 느낌?”
어쩌면 형의 그런 변화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그리는 나 자신부터가 무엇을 그려야 할지 막연한 상태였었고, 지금은… 그것이 분명해졌으니까.
로비를 나서자 정문 앞 도로변에 정차해 있는 그의 세단이 바로 보였다. 차를 발견한 우리가 걸음을 늦추자 소매를 걷어 올린 캐주얼한 셔츠에 청바지, 청록색 로퍼 차림의 그가 뒷좌석에서 내려섰다.
그냥 시야에 들어오기만 해도 좋고, 좋아서, 온몸의 피가 그를 향해 달려가는 것 같은 이 느낌은… 형의 표현대로라면 설렘과 두근거림이었다. 적어도 설렘에 아주 가까운 감각이었다.
내 쪽을 바라보며 얼굴 근육을 부드럽게 이완시키는 그 역시 나와 많이 다르지 않을 거라고, 지금은 그렇게 느낄 수 있었다.
“쫙 빼입고 이 시간에 어디 가냐?”
그는 형에게 먼저 아는 체를 했다.
“아저씨 꼬시러요.”
그리고 형의 대답에 풀썩 웃었다.
“적당히 까불고 다녀. 그러다 또 칼침 맞는다.”
“부모하고도 이 판 났는데 칼침 꽂을 데가 더 어디 있어요. 이제 의절할 관계도 없는데 실컷 즐기기나 해야죠.”
형의 거침없는 발언에 그가 살짝 눈가를 굳히며 나를 살폈다.
“이현이도 알아요. 나 칼침 맞고 쫓겨난 거.”
그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지금 그 아저씨들보다 네가 더 나이가 많아지면 그럼 그땐 네 취향의 아저씨들 연령대도 같이 높아지는 거냐, 아니면 그때도 여전히 지금 아저씨들 나이의 남자들이 네 취향인 거냐.”
그의 농담에 이번에는 형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웃었다. 하지만 형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이기 때문인지, 평소처럼 마냥 장난스럽게만 볼 수가 없는 웃음이었다.
“글쎄요, 전 아직 서른 살도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팔팔한 청춘이라서요. 거기까진 생각을 안 해 봤네요.”
그를 놀리듯 일부러 얄미운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얘기한 형은 내 어깨를 툭 치면서 뒷걸음질 쳤다.
“갈게. 데이… 전시회 관람 재밌게 자알 해라.”
그러고는 그의 얼굴을 힐끔 살피며 나에게 몰래 윙크를 해 보였다. 형이 이 상황에 대해 걱정을 하는 건지 재미있어하는 건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전시가 8시 30분까지라. 우리도 서두를까요?”
손목시계를 확인한 그가 자동차 뒷문을 열어 주었다. 횡단보도를 가로지르며 맞은편에서 서서히 다가오는 택시를 불러 세우는 형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뒷좌석에 올라탔다.
운전석에는 몇 시간 전 나를 이곳으로 데려다주었던 기사님이 앉아 있었다. 내 차를 가져 본 적도 없지만, 누군가가 운전해 주는 차를 타는 건 더욱 어색했다. 아마도 언제까지나 어색한 일일 것이다. 택시를 타는 일조차도 지금까지의 나에게는 사치였으니까.
반면에 그는 앞좌석에 있는 누군가의 존재를 늘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운전석과 뒷좌석 사이에 슬라이딩 블라인드가 설치된 세단이 준비되어 있었던 홍콩에서처럼 진한 키스나 애무를 하려고 들 때는 없었지만, 기사님이 보고 듣고 있다는 사실을 특별히 의식하지도 않았다.
그가 가진 차들은 SUV를 제외하고는 거의 뒷좌석의 안락함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쇼퍼 드리븐(Chauffeur driven) 성격이 강한 차량들이었다. 운전은 누군가에게 맡기고 자동차에서는 온전한 휴식을 취하거나 혹은 그 시간마저 쪼개어 무언가를 검토하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람들을 위한 자동차들.
그것에서부터 우리 둘의 차이는 극명했다.
버스로 열 정거장 정도의 거리를 걷는 것쯤은 지극히 당연한 일상인 나와 고급 세단의 뒷좌석을 자신의 개인적인 방처럼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그.
주말 저녁의 도로 위를 빼곡하게 채운 테일 라이트 행렬 사이로 우리를 태운 자동차가 섞여 들어갔다. 실내에는 바이올린 협주곡이 적당한 볼륨으로 흐르고 있었다. 차이콥스키의 유명한 곡이었다.
“그림은 잘 그렸어요?”
그가 내 쪽을 향해 몸의 방향을 살짝 틀면서 물었다.
“…네.”
사실 그림의 결과는 별 소득이 없었지만 그에게 자세히 보고할 만한 내용도 아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둘만의 시간에 대한 즐거움을 숨기지 못하는, 숨기려 하지 않는 미소로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그냥 보는 것과는 다르다. 그는 요즘 이렇게 내 얼굴을 ‘들여다보곤’ 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흥미롭고 기특한 일을 흐뭇하게 관찰하는 눈으로.
그의 이런 얼굴을 마주하고 있을 때면 불안하지 않았다. 만약 주한이 형의 말처럼 선을 긋고 싶은 거라면, 이런 표정까지 연기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불안이 잦아든 것은 그런 유추 때문만은 아니었다.
집들이를 겸해 바비큐 파티를 했던 날부터였을 것이다.
그날 그의 서재에서 우리는 이상하리만큼 평소보다 더 격렬하게 흥분해 있었고, 그 과열이 일으킨 혼란을 틈타 상대에 대한 소유와 구속의 욕구를 내비쳤었다. 지금까지 잠자리에서 해 왔던 단순한 성적 발언들과는 분명 달랐다. 그에게 거부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그날 밤에는 나를 지배하지 못했다.
그 역시 차라리 내가, 그와의 섹스밖에 모르는 바보가 돼 버렸으면 좋겠다는 과감한 발언으로 나를 놀라게 했었다. 섹스에 대해 말하고 있었지만, 섹스에 대한 얘기가 아니었다. 어리석은 발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눈앞의 대상을 향해 순간적으로 솟구쳐 오르는 지나친, 너무 강한 소유욕이 만들어 낸 즉흥적인 탐욕이었다. 그것이 싫지 않았다.
“피곤해요? 말이 없네.”
“…….”
겹쳐 꼰 다리 위에 팔을 기대 상체를 약간 숙인 그는 왼팔을 뻗어 나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원래도 재잘거리는 사람은 아니지만.”
스스로 실없는 소리를 했다고 느꼈는지 그렇게 덧붙이며 웃은 그는, 처음 만났을 무렵에 비해 제법 길게 자란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고는 손을 거두었다.
어쩌면 좀 전 주한이 형과의 대화가 마음에 걸린 탓에 평소보다 더 경직된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관계에 명확한 이름 붙이기를 겁낸 것은 나도 마찬가지인데, 그에 대한 형의 얘기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함으로 그를 ‘나쁜 놈’으로 만든 것 같아 미안했다.
“피곤하지 않아요. 전시… 기대돼요.”
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는 표정을 짓기 위해 입술 양 끝을 끌어 올렸다. 전시가 기대된다고 말했지만, 실은 오늘 저녁 그와 보낼 시간 자체에 대한 기대감이었다.
「내가 잘할게.」라는 말에 대한 의식인지 몰라도, 요즘 그는 전보다 더 신경을 써 주었다. 여전히 걱정이 큰지 외출 전후로 꼭 연락해 주기를 바랐고,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도 그의 차량을 이용해야 했지만, 그렇다고 외출 자체를 막지는 않았다. 특히 저녁에는 거의 매번 밖으로 데리고 나가 맛있는 저녁을 사 주었다.
며칠 전에는 화방에 나갔다가 그의 퇴근 시간에 맞춰 만나기도 했었다. 밖에서 기사님이 대기하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볼일이 끝난 후 카페에서 그를 기다리는 동안, 평범한 연인의 데이트는 이런 것이 아닐까, 낯간지러운 기분을 느끼기도 했었다.
“오후에… 대표님은 뭐 하셨어요?”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 나가 보려는 어설픈 노력을 눈치챘는지 그의 눈가와 입가에 웃음기가 진해졌다.
“트레이너가 집으로 와서 운동했어요.”
그는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집으로 방문한 트레이너와 한두 시간 정도 집중적으로 근육을 단련했고, 자세히는 모르지만 이야기를 들어 보면 테니스나 승마, 수영 같은 다양한 운동에도 정통한 것 같았다. 반면에 나는 내 방에서 매일 간단한 맨손 체조로 근육에 적당한 긴장을 주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생활이 불규칙해지기 마련인데, 그럼 체력이나 근력이 많이 떨어진다며 그는 함께 운동을 해 보지 않겠냐고 권했다.
“웨이트 트레이닝이 지루하면 활동적인 다른 운동을 같이 해 보는 건 어때요. 집에만 있으면 답답할까 봐 걱정이라….”
아… 그래서 요즘 거의 매일 저녁 밖으로 데리고 나가 줬던 건가.
꼰 다리 위에 팔꿈치를 짚고 턱을 괸 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쪽을 보고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시트 위에 자연스럽게 놓아둔 그의 왼손에 시선이 닿았다. 조금 망설이다 그의 손가락을 슬그머니 붙잡았다.
턱을 괴고 있던 상체를 일으켜 세우는 그의 얼굴은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음… 이건 또 무슨 서비스일까. 괜히 겁나네.”
말로는 겁난다고 하면서도 그는 나의 돌발적인 스킨십에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중지와 약지를 가볍게 붙잡았던 나의 손을, 이번에는 그의 커다란 손이 깍지를 껴 단단히 얽어 왔다. 에어컨의 냉기 때문인지 그의 손은 기분 좋게 서늘했다.
퍼져 나가려는 웃음을 억지로 얼굴 안에 가둬 둔 것 같은 표정으로 그는 마주 잡은 손을 들어 나의 손가락에 입 맞췄다. 입술을 바로 떼지 않은 채 잠시 그대로 나와 눈을 맞췄다.
“…….”
그리고 다른 손을 뻗어 나의 아랫입술을 꼬집었다. 키스를 대체하는 우리만의… 스킨십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졌다. 요즘의 나는 이상할 정도로 강하게 그를 원했다. 지금도 겨우 이 정도 스킨십으로 순식간에 다리 사이로 열이 몰려 당혹스러웠다.
내 흥분을 눈치챈 건지 그가 힐끔 운전석 쪽을 살폈다. 그리고 아쉬움이 묻어나는 얼굴로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이런 얼굴 보여 줄 줄 알았으면… 내가 운전해서 올 걸 그랬네. 술 좀 먹일 생각으로 운전은 포기했는데.”
욕구를 해소하는 것도 물론 짜릿했지만, 이런 억눌림도 나쁘지 않았다. 조금… 참기가 힘들어서 귀찮은 일들이 생길 뿐.
“아, 그냥 집으로 가 버릴까.”
내 손을 더 힘주어 붙잡으며 한숨을 섞어 중얼거리는 그의 장난스러움에 피식 웃음이 새었다.
어쩌면 지금부터 사귀는 것이라든가, 연인이 되자든가, 그런 말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런 분명한 기준점 없이도, 상대에 대한 의무(다른 사람과 데이트하거나 스킨십을 해서는 안 된다는)가 발생했다는 것에 우리 둘 모두 암묵적으로 동의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나를 보는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면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확신이 고여 들었다. 이것이 그와 나에게 적당한 방향과 속도일 수도 있다는 조심스러운 예측과 함께.
나 역시 그의 손을 힘주어 붙잡았다. 차이콥스키의 협주곡 속 바이올린 독주가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 ■ ■
번화가에서 한참 떨어진 자리에 오래된 단독 주택을 개조해 마련한 실험적 성격의 소형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의 주제는 ‘침묵과 거짓’이었다.
팸플릿에 의하면 헬싱키 태생의 작가는, 정규 미술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재능을 알아본 미술계 권위자의 제안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아 볼 기회가 있었지만, 그녀는 제안을 거절했다.
그녀는 대형 갤러리들과는 절대 전시 계약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고, 그림을 판매한 소득 중 30퍼센트라는 높은 비율의 금액을 여러 여성·아동 재단에 기부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미술의 기법을 완전히 무시한 자유로운 작풍과 파격적인 행보 탓에 그녀의 그림에 대한 미술계의 평가도 양극화된 상태이며, 그녀 역시 현대미술계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 입장을 밝히는 데에 거리낌이 없다는 내용도 팸플릿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림 외적인 면에서 그녀가 보이는 태도는 사회적이었지만, 여러 개의 작은 방으로 구성된 전시장을 채운 작품들은 개인적 성향이 강했다. 무섭도록 내면으로 깊이 파고든 작품들은, 심연 속에서 부릅뜬 눈, 무엇도 은폐하거나 축소시키지 않는 거의 기계적일 정도로 있는 그대로를 비추는 눈을 마주한 기분이 들게 했다.
마지막 방을 빠져나왔을 때쯤엔 기력을 전부 뺏긴 듯했다. 타이틀 시퀀스부터 엔딩 크레딧까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긴장감 넘치는 영화를 감상한 후의 피로감과도 비슷했다.
갤러리로 탈바꿈하기 전, 누군가의 거주지였을 때 아마도 거실이었을 것 같은 메인홀로 나왔지만 그의 모습이 바로 보이지 않았다. 서로 편하게 관람한 뒤 만나기로 하고 전시장 입구에서 헤어지고는 그 후로 한 번도 동선이 겹치지 않은 상태였다.
외모 때문만이 아니라 큰 키 때문에라도 어디서든 눈에 띄는 사람이라, 같은 공간에 있다면 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팸플릿을 손에 쥔 채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이현.”
“…….”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자, 양손에 커피를 든 그가 입구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먼저 관람을 마치고 아래층의 카페에 가서 커피를 사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날 밤 이후로 그는 가끔씩 ‘씨’ 자 없이 나를 부르곤 했고, 그때마다 누가 간지럽히는 것처럼 목 뒤가 움츠러들었지만, 단 둘뿐인 집에서 그렇게 부를 때와는 뭔가 기분이 달랐다.
울렁거리는 느낌에 선뜻 움직이지 못하고 가만히 멈춰 선 나를 대신해 그가 웃으면서 이쪽으로 걸어왔다. 내 착각이 아니라, 홀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보고 있었다. 드러내 놓고 보거나 힐끔거리거나 그 차이였을 뿐, 모두가 그를 보고 있었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이해하면서도… 조금은 싫었다. 철없이 왜 이러는지.
“아무래도 주말이라 복잡하네. 일단 나갈까요?”
그가 건넨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아 들고 사람들 틈을 빠져나갔다. 실내와 달리 문밖의 공기는 후텁지근했다.
담을 허물어 골목과의 경계를 없앤 갤러리 입구 밖으로 나오자, 10미터쯤 떨어진 자리에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어딜 가든 입구 앞에서 차가 내려 주고, 나오는 길에는 바로 차가 대기하고 있는, 도무지 걸을 일이 없는 상황에 혼자 어색해하며 차에 올라탔다.
자동차는 곧바로 골목을 빠져나가 도로에 합류했다. 해가 저물어 가는 시간이라 그나마 한낮보다는 더위가 사그라진 상태였지만,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손부채질을 하거나 휴대용 선풍기의 미미한 바람을 얼굴에 쏘이며 한여름의 더위에 지친 모습이었다.
“올해는 더위를 별로 느낄 새가 없었던 것 같아요.”
“응?”
무심코 입 밖으로 나온 말에 그가 눈썹을 치키며 관심을 보였다.
“홍콩에서도 그렇고… 돌아온 뒤에도 얼마 안 돼서 대표님 댁으로 들어가면서 계속 차를 타고 움직였고… 그래서 여름이라는 걸 별로 실감을 못 한 것 같아서요.”
“정원 가꾸고 있잖아요. 그럼 더울 텐데.”
“그거야 제가 좋아서 잠깐씩 시간 내는 건데요. 그거 가지고 덥다고 하면… 너무 엄살이죠.”
그의 허락을 구하고 요즘 정원을 돌보고 있었다. 대강 가지치기를 해 주고 잡초를 제거하고 호스를 연결해 물을 주는 정도의 소일거리 수준이었지만, 계획하에 조성해 놓은 정원이라도 자연을 마주하는 시간은 상당한 기분 전환이 되었다. 형과 누나가 음산하다며 비난했던 정원은 지금은 제법 사람 손을 탄 티가 났다.
“…답답해요?”
잠시 말이 없었던 그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나는 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라….”
지금의 생활에는 아무런 불만도 없었고, 거리를 내다보다 별생각 없이 꺼낸 말이었는데. 어두워지는 그의 얼굴에 미안함과 괴로움이 비치는 것을 보고 괜한 얘기를 했나 싶었다.
나의 안전이나 쾌적함, 혹은 그림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위해 전부 그가 신경 써 주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이런 화제가 나올 때마다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친절이라는 말에는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감사함을 넘어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그의 호의와 배려 속에서 지내고 있는 건 오히려 내 쪽인데.
이럴 땐 그와의 나이 차가 두드러지게 실감이 났다.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경험이나 지혜 면에서도… 나는 그의 의지가 되기엔 부족하고, 아직 그에게 뭔가를 실질적으로 되돌려 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에 조급해졌다. 그림. 빨리 그림을 그려야 했다. 내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현재로서는 그것뿐일 테니까.
말없이 내 얼굴을 바라보던 그가 짧은 한숨을 쉬며 가볍게 손을 붙잡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참아 줘요.”
“원래도 돌아다니는 걸 즐기거나 활동적인 성격은 아니에요. 아시잖아요. 그리고 대표님이 밖에도 자주 데리고 나가 주시고…. 답답해서 한 얘기 아니니까 정말 마음 쓰지 마세요.”
그가 다시 웃기를 바라며 내가 먼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넘겨 주다가 부드럽게 뒷목을 당겨 내 이마 위에 입술을 묻었다. 기사님이 있는 자리에서 손을 잡는 것 이상의 스킨십을 한 건 서울에서는 처음이었다.
신경이 쓰였지만 그를 밀어내고 싶지는 않았다. 이마를 가린 머리카락 위 그의 입술이 기분 좋아서 목을 향해 뻗은 그의 손목에 가만히 얼굴을 기대고 침묵했다.
그사이 차는 속도를 줄이며 목적지의 입구로 진입하고 있었다.
“여긴….”
형, 모래와 함께 큰아버지를 만났던 호텔이었다. 그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그러고 보니 좀 전의 갤러리도 그의 집을 기준으로 차로 10분 정도 거리였다.
“요즘 입맛이 별로 없는 것 같아서 간단하게 요기도 하고 술도 마실 수 있는 곳으로 골랐어요. 오늘은 이거 먹어라, 저거 먹어라 절대 스트레스 안 줄게요.”
그가 데려가는 곳들은 하나같이 비싸 보이는 요리가 나오는 고급 레스토랑들이라 어쩔 수 없이 부담이 됐지만, 그런 기색을 비쳐 기껏 나를 생각해 준비한 사람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생각은 복잡했지만,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려 애쓰는 그를 향해 마주 웃어 보였다.
그와 함께 호텔 로비로 들어서는 기분이 묘했다.
불과 2주 전에 방문했던 장소인데 그때와는 함께한 사람도, 감정과 상황도,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모래와 형은 이제 며칠 뒤에는 무사히 발리에 도착할 예정이었고, 빚을 갚은 뒤로 큰아버지에게서는 별다른 연락이 없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다고 할 수는 없어도, 더 이상 바짝 뒤를 쫓기는 듯한 초조함에 불안해할 필요는 없었다. 모두 그의 도움 덕분이었다. 그런데도 왜 그는 나에게 미안해하는 건지….
정문 바로 앞쪽, 아래층으로 향하는 널찍한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에도 맞은편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은 그를 힐끔거리고, 그에 대해 수군거렸다.
“호텔에 입점해 있지만 캐주얼한 이자카야라서 분위기는 편안할 겁니다.”
정작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하긴 평생을 이런 시선 속에서 살아왔을 텐데 지금까지도 매번 타인의 관심에 신경이 쓰인다면 일상생활 자체가 불가능할 것 같긴 했다.
서울도 요즘은 특급 호텔들마저 젊은 고객층을 겨냥해 심리적 접근성을 높인 트렌디한 인테리어와 메뉴 구성으로 이미지 쇄신을 꾀하는 추세라는 그의 설명대로,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분위기는 ‘생각보다’ 친근했다. 적어도 호텔 레스토랑 특유의 거만한 벽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와 함께라는 사실이 편안함을 더해 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미스터 라우,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호감 가는 미소의 직원이 곧바로 다가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지금까지 그와 함께 방문했던 다른 여러 레스토랑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그는 처음 보는 낯선 손님이 아닌 중요한 고객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여전히 분위기가 좋네요. 이쪽은 오늘 제 일행입니다.”
“어서 오세요. 이곳 매니저입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영어로 건넨 인사에 그가 한국어로 답하자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한국어로 대응을 바꾼 매니저는 흔들림 없는 미소로 나와도 인사를 주고받았다.
실내는 그리 넓지 않았다. 셰프들이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카운터 좌석이 열 개 남짓, 그리고 대여섯 개 정도의 테이블이 전부로, 오히려 아담한 편이었다. 그러나 물론 차분하면서도 고급스러운 감각이 어느 정도 나를 긴장시키는 면이 있었다.
우리의 좌석은 가장 안쪽, 다락방으로 이어진 계단을 연상시키는 기울어진 천장 아래 아늑하게 자리 잡은 테이블이었다. 셰프의 추천 코스로 예약 시에 미리 주문을 해 두었기에 따로 메뉴를 고를 필요가 없었다. 일본식 청주인 사케는 마셔 본 적이 없었지만, 그의 추천으로 도수가 낮고 마시기 편하다는 사케를 주문했다.
“오늘은 요리 설명은 생략해 주세요. 이야기에 집중하고 싶어서요.”
“네,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그의 부탁에 직원은 미소로 답하고 물러갔다.
“대표님은… 영어가 가장 편하신 거죠?”
직원이 자리를 떠난 뒤 표백한 것처럼 새하얀 물수건을 만지작거리며 그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그렇죠. 정규 교육을 영어로 받았고, 부모님 두 분의 공통 언어가 영어라 가족끼리의 대화에도 영어를 사용해야 했으니까.”
“그런데 한국어도 굉장히 잘하세요. 한국에서 사신 적 없다는 얘기 들었을 땐 놀랐어요. 한국어 실력이, 어색함이 전혀 없어서….”
칭찬이 쑥스러운지 그가 비스듬히 시선을 떨어뜨리며 웃었다. 어둑한 간접 조명 때문에 명암이 짙게 드리운 그의 얼굴은 평소와는 또 다르게 매력적이었다. 뺨 위에 깃든 길고 풍성한 속눈썹의 그늘을 바라보며 그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어머니와 둘이 대화할 때는 계속 한국어를 사용하기도 했고, 부모님이 한국인 친구들과의 교류도 활발히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익숙해졌거든요. 다양한 프로그램이나 이벤트를 통해 한국 문화에도 지속적으로 노출시켜 주셔서 일단 문화 자체가 낯설지 않았던 것도 크고…. 또… 어머니가 한국 문학을 많이 소장하고 계셔서 문자에도 익숙했지만, 생생한 구어체는 대부분 학교에서 사귄 한국 출신 친구들을 통해서 익힌 거죠.”
잠시 말을 멈춘 그는 못마땅한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최인우 같은 놈들을 몇 명 사귀었었거든. 야한 말이나 욕부터 알려 주는 놈들.”
인우 형과 그의 학생 시절이 어느 정도 상상이 가서 그를 따라 조금 웃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화제가 나온 김에 자연스럽게 물을 수 있는 기회인 것 같았다.
“슈슈 작가님도… 같은 학교 출신이시죠?”
그가 대답을 보류하며 물잔을 들어 입술을 축인 뒤 다시 잔을 내려놓았다. 그사이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드물게 헛기침을 하기까지 했다.
“음… 왜 슈슈를 신경 쓰는 것처럼 느껴지지? 내 착각인가.”
나와 이런 관계가 된 만큼 슈슈와는 내가 상상하며 괴로워했던 그런 관계가 아님을 알 것 같았지만, 그렇더라도 팬텀 식구들이나 인우 형처럼 편하게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나는 슈슈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다지 건전하다거나 성숙한 감정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치부를 들킨 것처럼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지만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상체를 내 쪽으로 기울인 그는 즐거워 보였다. 푸른 두 눈이 장난기로 반짝거렸다.
“좀 더 질투해 봐요. 슈슈하고는 무슨 사이인 거냐고. 갤러리 오너와 소속 작가의 관계 이상인 건 아니냐고. 추궁하고, 캐묻고… 그리고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설명해도 막무가내로 날 꼬집고, 발로 차고….”
“그, 그런 짓은 안 해요….”
예약이 되어 있는지 바로 옆좌석은 아직 비어 있었지만, 한 테이블 건너의 커플이 신경 쓰였다. 나는 그쪽을 힐끔거리며 목소리를 낮춰 다급하게 부정했다.
“흠, 난 그래도 괜찮은데.”
진심인지 장난인지.
아쉽다는 듯 미간을 찡그린 그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상태에서 한 팔로 느슨하게 턱을 괴었다. 테이블 폭이 그리 넓지 않은 탓에 그의 얼굴이 아주 가까웠다. 뺨이 눌리도록 편하게 턱을 괸 그의 장난스러운 얼굴이 내 눈높이보다 조금 낮은 곳에 있었다.
손을 뻗어 잘생긴 얼굴을 만지작거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장소도 그렇고 나의 성격도 그렇고,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았다.
“아직은 나에 대한 독점욕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지난번엔 다른 사람이랑 하면 안 된다고 그렇게 노골적으로… 뭐라고 했었더라. 키스도, 손가락 넣는 것도….”
“저기, 대표님!”
벽을 등지고 홀을 향해 앉아 있는 나와 달리 그의 시야에는 나뿐이었다. 매니저분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 나는 너무 당황해서 테이블 위에 놓인 그의 손을 덥석 붙잡으며 말을 막았다.
그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한 번, 내가 붙잡은 손을 한 번, 번갈아 쳐다보았다.
“전시, 정말 좋았습니다.”
“…….”
막 글자를 배운 아이가 소리 내어 책을 읽듯 어색하게 끊어지는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의 이유를 알아챈 그의 얼굴에 곧 웃음기가 번졌다.
그가 남들에게 사적인 대화를 들키는 어설픈 실수를 할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아직 불안을 스릴로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이런 쪽에 노련하지가 못했다.
그가 내 손을 한 번 꽉 잡았다가 놓아주면서 허리를 세워 앉았고, 타이밍을 맞춘 것처럼 매니저가 우리 테이블 옆에 멈춰 섰다.
“애피타이저 먼저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오이를 곁들인 연어 샐러드가 서빙되었고, 매니저는 곧바로 여러 가지 모양과 색깔의 잔이 담긴 쟁반을 가져와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게 했다. 아직 식은땀이 날 것 같은 당황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는, 대강 아무것이나 눈에 보이는 대로 집어 들었다.
“미안해요. 내가 좀 지나쳤어요.”
다시 둘만 남게 되자, 그가 의자를 당겨 앉으면서 시선을 맞춰 왔다.
“서이현 씨가 질투 좀 해 주는 것 같으니까 들떴나 봐요.”
“…….”
완숙한 성인인 그는 질투 같은 미성숙하고 소비적인 감정을 귀찮아할 것 같았다. 연애 감정에 따라오는, 서로를 속박하고 독점하고자 하는 불건전한 욕구를 상대를 통해 실현하려는 신경전 역시 그는 피곤하게 여길 거라고. 주한이 형의 이야기 속 그의 모습도 그런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가 하는 이야기들은, 라우 위쿤에 대한 주변인들의 평가를 모두 편견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런 대화들은 그가 늘 해 오던 방식일까. 아니면 이번이 예외인 것일까.
“반응이 너무… 귀여워서 더 조절 못 한 것도 있고. 화난 거 아니죠?”
나를 놀리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가 이 시간을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표정과 눈빛을 보면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의식하고 나니, 나 역시 이런 실없고 유치한 티격거림이 즐거워질 것 같았다.
귀엽다는 말에 간지러운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실장님도 유니 누나나 주한이 형도 가끔 해 주는 말이었지만, 그럴 때는 이런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안심한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인 그는 젓가락을 집으면서 나에게도 음식을 권했다.
“그래서, 전시는 진짜 어땠어요?”
씹고 있던 연어를 마지막까지 삼킨 뒤 조금 뒤늦게 대답했다.
“아주… 강렬하고, 인상적이었어요.”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서이현 씨는 한계까지 개방된 자신을 마주하고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서 그리는 그런 그림을 원하잖아요. 오늘은 뭘 그려 볼까, 가벼운 마음으로 이젤 앞에 앉는 게 안 되는…. 그래서 이 작가 작품을 좋아할 것 같았어요.”
“가벼운 마음으로 그리는 그림이 나쁘다는 생각은 아니에요…. 가장 내밀한 고통에 대해서만 그렸던 것도 아니고…. 그냥, 저에게는 그림이 솔직해질 수 있는 수단 같은 거라… 감정이나 생각을 표현하게 될 때가 많을 뿐이거든요.”
실제 내 생각에 가깝게 제대로 전달이 되고 있는지 확신은 없었지만, 그에게라면 오해를 겁내지 않고 이야기해도 될 것 같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아요. 무엇이 더 가치 있는지 구분할 필요 없이 그저 작가마다 스타일이 다른 거니까. 그래서 미술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는 거고. 대부분의 평론가들이나 권력형 갤러리들은 수준의 고저를 나누길 좋아하지만.”
술이 나오면서 대화가 잠시 중단되었다. 잘게 부순 얼음이 가득 담긴 볼 안에 넣은 차게 식힌 사케와 함께 참치의 겉면만 살짝 익힌 타다키라는 요리가 서빙되었다.
그가 추천해 처음 마셔 보는 사케는 딸기향과 사과향 같은 과일향이 감돌아 마시기 편했다. 엉겁결에 내가 고른 푸르스름한 빛이 도는 동그스름하고 투명한 잔은 그의 눈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었다.
술의 맛에 대한 짧은 대화 뒤에 화제는 다시 ‘침묵과 거짓’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림에서 주제 의식이 아주 뚜렷하게 드러나는 점이 저와는 많이 달라서 그것도 신선했어요. 작가가 자기감정이나 생각을 발언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는 사람 같아서 더 매력적이었구요.”
“좀 더 복잡한 감정을 내포하고 있을 뿐이지, 서이현 씨 그림도 충분히 과감한 것 같은데.”
“…….”
테이블에 편안하게 몸을 기대고 한 손으로는 잔의 불룩한 아랫부분을 만지작거리면서, 그는 은근한 시선을 보내왔다.
“작품만 봐서는 이렇게 얌전한 평소 모습이 상상이 안 될 정도로.”
사실 작품은 침대에서의 모습에 훠얼씬 가깝지, 라고 덧붙이며 술이 반쯤 남은 잔을 입술로 가져가는 그의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바라보며 나 역시 갈증을 느껴 잔을 기울였다.
대화가 깊어지면서 젓가락을 움직이는 횟수보다 술잔을 기울이는 횟수가 더 많아졌다.
타다키 이후에도 정갈해 보이는 튀김과 몇 가지 종류의 꼬치구이가 차례대로 서빙됐지만 우리 둘 모두 맛을 보는 정도로만 손을 댔을 뿐이었다. 대신 720밀리리터의 사케는 벌써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사이 비어 있던 옆 테이블에도 주인이 나타났고, 레스토랑 내부에는 꼬치를 굽는 소리와 향, 주말을 맞은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대화 소리로 활기가 가득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의 모임으로 보이는 옆 테이블에서 그를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는 아주 짧은 한순간도 그것에 주의를 흩트리지 않았다. 조용한 공간에서 단둘이 있는 것처럼, 시야에는 나밖에 없는 것처럼, 오로지 내게만 의식을 집중한 그 덕분에 나 역시 점차 다른 모든 것들을 지워 낼 수 있었다.
“침묵과 거짓 중에, 어떤 게 더 폭력적이라고 생각해요?”
유자 소스를 곁들인 관자 구이를 요령 좋게 꼬치에서 분리해 내 접시에 덜어 주면서, 나를 보지 않은 채 그가 물었다.
그리고 곧바로 질문을 정정했다.
“아니, 개인적으로 어떤 걸 더 혐오합니까.”
좀 전의 전시를 진지하게 관람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머릿속에서 한 번쯤 떠올려 봤을 법한 주제였다. 나 역시 전시를 보는 동안 그것에 대해 골몰할 수밖에 없었기에, 대답을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거짓이 차라리 더… 나은 것 같아요.”
그는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침묵은 상황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긴 하지만… 좀 전의 그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그런, 진실에 대한 침묵이라면… 침묵이 좀 더… 폭력적이라기보다는 비겁한… 느낌이에요.”
생각을 말로 전하는 것은 쉽지 않아서, 신중하기 위해 띄엄띄엄 나열한 단어들은 결국 어지러운 횡설수설이 돼 버린 것 같았다.
잠시 무거운 시선으로 지그시 누르듯 나를 응시하던 그는 내게서 시선을 떼면서 얼마 남지 않은 술을 내 잔에 따라 주었다.
“보통은 침묵보다는 거짓을 훨씬 부정적인 가치로 느끼지 않나? 특히 한국은 아직 유교 문화의 영향이 깊게 남아 있어서, 침묵은 금이고 말은 아낄수록 좋다는 분위기니까.”
“저 자신도 별로 말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만약 진실에 대한 태도로서의 침묵과 거짓이라면, 저는 차라리 거짓이 나은 것 같아요.”
그는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괴고 느슨하게 깍지 낀 두 손으로 입술을 가리며 물었다.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는지, 옆 테이블에서 케이크를 꺼내 초를 꽂느라 부산스러웠지만, 내 이야기를 듣고자 귀를 기울이는 그의 진지한 얼굴을 보며 방해받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 갈 수 있었다.
“거짓 자체는 물론 상처를 만드는 폭력이 될 수 있지만… 거짓이 있는 곳에는 그것의 반작용으로 진실을 파헤치려는 움직임도 공존하는 것 같거든요. 하지만 진실의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침묵이라면… 그쪽이 훨씬 더 암담하고…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더 길고 참혹한 암흑기가 이어질 것 같은, 그런 생각 때문에….”
사실 나는 아버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아니, 어쩌면 자신을 벌주고 망가뜨리기 위해 택한 침묵이라는 무기에 대해 생각하며 대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가져온, 누구도 행복할 수 없는 현재라는 결과에 대해.
“그냥, 제 짧은 생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지만요.”
지나치게 무거운 쪽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 건 아닐까. 그가 나의 표정이나 어조에서 어떤 불길함을 읽어 내고 걱정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단지 전시회에 대한 감상일 뿐인 척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술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느려지는 말투가 주제의 무게를 따라 신중해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서서히 올라오는 술기운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꽤 빠른 속도로 둘이서 한 병을 다 비웠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불쾌하지 않은 취기였다. 생각과 육체가 몽롱하게 해체되는 기분을 느끼며 자세를 좀 더 무너뜨렸다.
“난 절대적인 결론을 내려 주길 원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서이현 씨 의견을 듣고 싶었던 거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낮추는 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됩니다. 독창적인 견해고, 충분히 흥미로워요.”
한 방 맞은 사람처럼 얼얼한 표정으로 그렇게 얘기한 그는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말이 없었다.
같은 술을 한 병 더 주문했고, 새 술의 첫 잔을 비워 낼 때까지. 그래서 다시 안정적인 대화의 조건이 갖춰질 때까지, 그의 눈은 평소보다 짙고 어둡게 자기 안을 향해 있었다.
비워 낸 잔을 손안에서 굴리면서, 그가 나의 가슴쯤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진실에 대해 외면하면서, 혹은 진실을 감추면서… 그 과정에서 거짓이 동반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런 면에서 보자면 침묵은… 어떤 면에선 이미 거짓을 내포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죠.”
보통의 소주잔보다 좀 더 큰 사케잔은 그의 커다란 손안에서 실제보다 더 작게 느껴졌다. 거스러미 하나 없이 깨끗한 그의 손을 바라보다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추측에 불과하지만, 그는 단지 전시의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 자신이 거짓을 내포한 침묵에 희생당한 적이 있거나, 반대로 그것을 끌어안고 있어 본 경험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결국 그 역시도 거짓보다 침묵을 더 비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매 순간 진실의 편에 설 수는 없겠지만… 결국 침묵이나 거짓에 핑계를 만들고 스스로 무뎌지는지, 아니면… 계속해서 양심에 자극을 느끼며 진실에 다가가고자 노력하는지… 그게 중요한 거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요.”
딱히 그를 위로하기 위해 지어낸 말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떠올리며 그의 질문에 대답하긴 했지만, 나 자신이 매 순간 눈부신 진실의 편에 서 왔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아니, 어떤 면으로 보자면 나 역시 아버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좀 더 희석된 버전의 아버지였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의 말은 그와 나, 둘 모두를 위한 변명이었다.
그가 무거운 것을 힘겹게 들어 올리듯 나의 눈으로 시선을 끌어 올렸다.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짓고 있긴 했지만, 말 그대로 씁쓸한 웃음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괴롭네.”
“…….”
“침묵과 거짓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한 비겁한 어른이 듣기엔… 상당히… 찔리는 내용이라서.”
농담처럼 얘기하고 있었지만, 내가 그의 뭔가를 건드렸음을 알 수 있었다. 잔을 기울이는 그를 따라 조금 급하게 한 잔을 전부 비워 버렸다. 오늘 하루 동안에만 두 번이나 그를 ‘나쁜 놈’으로 만들며 나는 순진한 피해자, 순수한 어린 양인 척할 순 없었다.
“법적으로는 성인이어도… 아직 자신을 어른이라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근데 꼭… 어른만 비겁하진 않아요. 침묵하는 비겁함이라면 저에게도… 아주 많아요.”
그가 웃으며 내 쪽을 힐끔 쳐다봤다.
“내가 가진 침묵의 비겁함에 비하면 서이현 씨의 비겁함은… 새벽이슬처럼 청량할 것 같은데.”
“안 그래요.”
살짝 감도는 취기 덕분인지, 내 어조는 제법 단호했다. 누군가와 얽혀서 피해를 입히는 침묵이나 비겁함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그건 내가 그보다 진실에 가까워서가 아니라, 단지 사회적 책임을 지고 있지 않은 상황 때문일 확률이 높았다.
여러 관계망에 얽혀 많은 기대와 의무에 엮이게 된다 하더라도, 생활 깊숙이 침묵을 끌어오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그렇게 장담할 수 있을까.
좀 전까지의 어두운 분위기를 떨쳐 내려는 듯, 그가 은근한 미소와 함께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래요? 음험하고 탁하고 비린내 나는 침묵이 있다고? 이렇게 깨끗하고 예쁜 몸에?”
“…….”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튀어 버린 대화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무방비한 타이밍에 불쑥 끼어든 야한 대화에 금세 열이 오르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린 뒤, 애꿎은 술을 좀 더 들이켰다.
“술을 마시는 거야 난 환영인데… 음식도 좀 먹어 가면서 마셔요. 입맛 없다고 먹는 걸 소홀히 하면 결정적일 때 체력이 버텨 주질 못해요.”
고추냉이를 올린 닭가슴살 꼬치를 먹기 좋게 내 접시에 덜어 주는 그는 더 이상 좀 전의 주제로 대화를 이어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더위에 노출될 일도 별로 없는데 더위라도 먹었는지, 요즘 입맛이 별로 없어 입이 조금 짧아진 거로 그는 걱정이 대단했다. 정확히는 입맛이 없다기보다는 음식에 대한 거부감이 들 때가 있어 가벼운 위염인가 싶기도 했지만, 그냥 입맛이 없다는 거로 해 두는 편이 걱정을 덜 끼칠 것 같았다.
그가 덜어 준 닭고기는 부드럽고 촉촉했다. 신선한 식재료를 사용한 요리였지만, 그럼에도 닭고기 고유의 냄새가 살짝살짝 비위를 건드렸다. 그래도 참을 만했다. 음식이 아닌 내 컨디션의 문제라는 걸 알기에 맛있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도 권했다.
“최인우 작품에 대해서, 솔직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솔직함이 드러난다고. 예전에 그렇게 말했었죠?”
젓가락을 드는 대신 두 개의 빈 잔을 채우면서 그가 말했다.
“서이현 씨가 그림을 그릴 때 좀 아까 그 작가처럼 가장 깊은 곳의 자신과 마주하는 사람인 건 알지만… 꼭 애써서 매번 극단을 그리려고 할 거 없어요. 지금 자신의 바닥을 마주하기가 힘들다면, 비겁하다고 느끼는 자신에 대해 그려 봐요. 그게 지금의 서이현이라면, 그것을 남겨 두는 것도 의미 있지 않겠어요?”
“…….”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뒤, 요즘 내가 무엇으로 고민하고 있는지 꿰뚫고 있는 사람 같았다. 그에게 고민을 상담한 적이 있었던가, 잠시 더듬어 봤을 정도로….
“인고의 과정을 이겨 내고 다다른 숭고한 결론만이 예술인 건 아니니까.”
채운 잔을 들어 건배를 제안하면서, 그는 슬쩍 웃으며 그렇게 덧붙였다. 처음 다시 그림을 그려 보자고 제안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돌아보면 그는 놀라울 정도로 나의 심리를 정확히 짚어 내는 이해자였다. 수키킴이라는 패를 꺼냈던 것도, 나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제안이었다.
마주 부딪친 잔을 반 정도 비워 낸 뒤, 잔을 내려놓지 않고 그대로 꽉 쥐었다.
“대표님.”
그의 시선이 부드럽게 나를 향했다.
“주한이 형 스케치요. 다음엔 정원에서 그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그가 눈썹을 끌어 올리며 되물었다.
“음, 우리 집 정원?”
“네.”
“그럼요, 언제든지 얼마든지 쓰세요.”
“저, 그게… 누…드를… 그리려고 하는데….”
“…….”
나를 보는 굳은 얼굴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누구? 권주한 누드?”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손목을 돌려 술잔을 흔들면서 뜻을 파악할 수 없는 오묘한 표정으로 잠시 침묵했다. 몇 번이나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이야기를 하는 대신 두 번이나 연거푸 잔을 채우고 비워 냈다.
그리고 식사 코스를 생략할 거라면 지금 디저트를 먹지 않겠냐고 물었다. 이미 취기가 돌고 있어 식사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그러자고 했다. 정갈한 식기에 담긴 말차 아이스크림이 금세 서빙되었고, 그는 좀 전의 이야기를 못 들은 것처럼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떠먹는 데에 집중했다. 적어도 그런 것처럼 보였다.
시선이 마주쳤고, 조마조마한 긴장감으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나를 마주한 그는 체념하듯 한숨을 쉬며 어깨의 힘을 뺐다.
“권주한 누드 그리겠다고 하면… 내가 펄쩍 뛰면서 반대할 것 같아서, 그래서 미리 얘기한 거죠?”
“어… 음….”
스푼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면서 얼버무렸다. 아니라고도 할 수 없었고, 맞다고 인정하기도 애매했다.
“그렇게 생각했다면, 제대로 본 거 맞아요.”
의외의 자백이었다. 그가 자조적인 한숨을 쉬면서 스푼을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태어났을 때부터 그림에 둘러싸여 살아왔고, 이 일을 해 온 지가 몇 년인데, 이제 와서… 작품과 사심도 구분 못 하고, 딴 놈 누드 그리겠다는 말에 눈이 돌게 될 줄은… 진짜 몰랐지만.”
“…….”
가감 없이 직설적인 감정 표현에 조금 놀라서 스푼을 놓치고 잠시 허둥거렸다.
“그런 표정 짓지 마요. 그렇게 느꼈다는 거지, 그래서 못 그리게 하겠다는 게 아니니까. 다행히… 그 정도 분별력은 남아 있어요. 아직까지는.”
그가 팔을 뻗어 가볍게 내 뺨을 꼬집으며 애써 웃어 주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가 꼬집었던 자리를 괜히 문지르면서 나도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단지 누드를 그리고 싶은 거라면 내가 대신하겠다고 하겠지만… 그게 아니라, 권주한을 누드로 그리고 싶은 거잖아요.”
못 그리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가 정말 이런 일에 질투를 보일까. 스스로의 걱정을 자의식 과잉으로 몰아가기도 했었던 나는, 그가 화를 내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기도 했지만, 질투를 숨기지 않는 그의 불만스러운 얼굴에 자꾸만 웃음이 났다.
억제하려 애쓰는 내 웃음을 혹시 질투에 대한 야유로 받아들인 건지, 그가 이마를 긁으며 변명하듯 말했다.
“한심한 거 나도 아는데… 10대 때도 해 본 적 없는 질투가 다 나네. 맞아요, 무지하게 질투 나요. 그런데 질투할 거 알고 신경 써 준 걸 아니까 더 추해지지 않고 그냥 가벼운 질투에서 끝날 수 있는 것 같아. 그러니까… 앞으로도 이런 일은 지금처럼 미리 말해 주면 좋겠어.”
“저도… 질투 날 때 있어요.”
“…….”
그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곧 기대감 넘치는 미소가 얼굴 전체로 퍼져 나갔다. 자세히 얘기해 보라는 듯 테이블 위에 팔짱을 끼고 상체를 내 쪽으로 기울였다.
술기운 때문도 있고, 그가 먼저 보여 준 고백에 용기가 생기기도 했다. 그 혼자서만 나쁜 놈인 것도 아니었고, 질투의 열기에 데여 화끈함을 느끼는 것도 그 혼자만의 고충은 아니었다.
스푼을 쥐고 세로로 세워 아이스크림을 받친 접시 위를 무의미하게 긁으며, 이번엔 그에게 나의 유치함을 공개했다.
“누나랑 형… 저도 분명히 좋아하고, 그런 의미 같은 거 전혀 없다는 거 알지만….”
“알지만?”
“업어 주고 그런 건…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
막상 말로 해 놓고 보니 너무나 철없는 요구, 아니, 생떼 같았다. 누나를 업어 줬을 때, 형과 허물없이 스킨십을 할 때, 부럽기도 하고 못난 감정이 불쑥 치밀기도 했지만, 그에게 하지 말아 달라는 요구를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바보 같은 감정이라는 걸 잘 알았으니까.
점점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을 내려다보다 말이 없는 그를 힐끔 쳐다봤다.
“지금 건 그냥… 못 들은 거로….”
그가 스푼을 내려놓으려는 나의 손목을 붙잡았다. 마냥 장난스럽지만은 않은 힘이었다.
“나만 유치하게 만들 겁니까. 그럼 앞으로도 백유니 취할 때마다 업어 줘도 돼요?”
인정하라고. 타당하지 못한 감정임을 알면서도, 그림의 모델이나 주변의 지인들까지 의식하고 경계하며, 상대를 온전하게 독차지하고 싶어지는 추한 욕구를 숨기지 말 것을. 함께 유치해지기를 요구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붙잡았던 손목을 놔주었다.
“내 얼굴 지금 어때요? 흉하지 않아요?”
자신의 뺨을 손으로 더듬으며 연기를 펼치는 그의 진지한 얼굴 때문에 피식 웃음이 새었다.
“분명히 흉할 텐데. 스물두 살짜리가 질투해 주니까 좋아서 입이 귀에 걸리려는 걸 억지로 참고 있는… 그런 얼굴 아닌가, 지금?”
자세히 좀 보라며 내 앞에 가까이 내민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손바닥으로 그의 뺨을 감쌌다. 좀 전의 그 자백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었다.
“그냥… 잘생겼어요.”
어쩌면 이젠 아무 감흥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지겹게 들어 왔을 말일 텐데, 태어나 잘생겼다는 칭찬을 처음 들어 본 사람 같은 표정으로, 그가 모든 것을 정지한 채 나를 응시했다.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을 번갈아 천천히 들여다보고, 그리고 내 손에 슬쩍 자신의 손을 겹쳤다. 낯 뜨겁지만, 순간적으로 주변의 모든 소음과 시선에서 차단된 듯했다. 둘만이 존재하고 있다는 착각. 우습게도 그 부분에서 이 시간이 데이트라는 실감을 느꼈다.
“여기 풀사이드랑 정원이 꽤 멋진데, 집에 가기 전에 조금 걸을래요?”
그가 나를 얼마나 순수한 어린 양으로 생각하든, 지금 그가 보내오는 시선의 의미를 파악하고 기대감에 가벼운 들뜸을 느낄 정도로는 나도 때 묻은 어른이었다.
그에게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옆자리에서 보내오는 호기심 어린 시선이 느껴졌지만, 더 이상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갑자기 대화 소리가 낮아졌기 때문에 그들이 우리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두드러졌고, 알파, 오메가라는 단어들이 간간이 섞여 들려왔다.
어쩌면 그들은 그와 나를 알파와 오메가 커플로 봤을 수도 있었다.
제1의 성별과 무관하게 알파와 오메가는 법적으로 결혼이 가능했다. 베타가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는 사회이기도 했지만, 한국은 그런 쪽으로 정서적 거부감이 뿌리 깊은 편이었기 때문에 법적 제도가 완전하게 정착된 것도 고작 10년, 15년 사이의 일이었다. 현재는 알파와 오메가 간뿐만 아니라, 임신을 할 수 있는 모든 관계를 법적으로 인정하자는 움직임도 국내에서 적극적으로 일고 있는 추세였다.
법적 허용이나 효력과 별개로 동성의 결합에 대한 대중적 편견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제1성별의 이성적 일치보다 결혼으로 발생하는 이해관계를 더 중시하는 상류층 사이에서는 동성의 알파·오메가 간의 결합이 이미 활발했다.
특히나 재벌가나 연예인들끼리의 결혼에서는 더욱 드문 일이 아니었고, 여전히 실제 대중 사회에서는 동성애가 배척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성 알파·오메가 커플을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가 큰 인기를 끌거나, 동성 파트너를 둔 알파나 오메가들이 방송인으로 활약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옆 테이블 그들의 시선이 혐오보다는 호기심에 가까운 빛을 띠고 있었던 것도, 미디어에 노출되는 그런 이미지들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 중의 누군가가 오메가로서 그에게 호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고. 오메가만이 그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겠지만.
내가 겪어 온 사회라고 해 봤자 학교와 군대가 전부였고, 두 사회 모두 제2의 성별이 분명하게 밝혀진 상태에서 운영되는 집단이었기에, 알파나 오메가로 오해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돌아보면 그런 오해를 받은 것은 마을을 떠나 팬텀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나를 오메가라고 오해한 채 알파인 그의 파트너로 보는 것 같은 그들의 시선에 어색한 불편함을 느끼는 한편, 상상력을 동원해 오메가로서 그와 함께하는 자신에 대해 은밀하게 그려 보는 내가 있었다.
언젠가의 잠자리에서 그에게 노팅을 조르며, 순간적으로나마 자신이 임신이 가능한 몸일 경우 그와의 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변화에 대해 기대했었던 기억이 떠올라 꺼림칙해졌다.
그런 자기 부정은 별로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기에 서둘러 상상을 잘라 내며 그를 따라 짐을 챙겨 들었다.
계산을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선 우리는 한 층 더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다. 아래층에는 클럽이 있어 조금 시끄럽다는 그의 설명이 있긴 했지만, 오늘 밤엔 단지 그것뿐만이 아닌 듯했다.
누군가가 소란을 피우기라도 했는지 우리의 시야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비명을 지르고 고함을 치는 소리와 그것을 제지하려 경고하는 소리, 무전기로 지원을 요청하는 소리들이 비일상적인 긴장감을 동반한 채 어수선하게 뒤섞여 들려왔다.
위쪽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에 오른 사람들도 소동의 근원지를 뒤돌아보며 서로 수군거리는 모습이었다.
에스컬레이터가 좀 더 아래로 이동하자, 따로 문이 없는 클럽의 입구에 모여 있는 작은 인파가 눈에 띄었다. 벽 앞에 놓인 벤치를 빙 둘러싼 클럽의 스태프들과 호텔 경비들의 틈 사이로 벤치에 늘어져 앉은 두세 명의 남녀가 언뜻 보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성적 흥분의 정당성과 그것을 방해받은 것에 대한 불만을 직설적인 단어를 사용해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페로몬, 발정, 섹스 같은 단어들은 고상한 인테리어의 호텔 내부에 누군가 잘못 배치해 둔, 어울리지 않게 튀는 소품 같았다.
무전 내용을 들어 보니 호텔 측은 그들을 경찰에 넘기기로 하고 경찰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는 분위기였다. 그들을 저지하고 입을 막기 위해 애를 쓰는 듯했지만, 쉽지 않아 보였다.
“일부러 억제제를 복용하지 않고 이런 데 오는 알파나 오메가들이 가끔씩 있어요. 발정 상태에서 술까지 마시면 그게 마약의 효과를 대신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는 최대한 개인적 감정을 배제하려 하는 것 같았지만, 강렬한 혐오를 숨기지는 못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완전히 내려섰을 때는 좀 더 분명하게 그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스스로 몸을 더듬고 옷을 벗으려 하는 그들을 건장한 경비들이 저지하고 있었고, 소동을 일으킨 사람들 중 하나는 경비에게까지 덤벼들어 자신의 몸을 비비며 완전히 풀려 버린 눈으로 음탕한 말을 쏟아 놓았다. 입을 틀어막고 고함을 지르며 위협을 가해도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보고 싶지 않은데도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확실히 그들은… 내가 보아 왔던 술 취한 베타들과는 달랐다.
주한이 형이 슈슈 작가에 대해 표현했듯 사람을 홀리는 몽롱한 느낌도 없었고, 숭고해 보이지도 않았다. 타인의 지극히 사적인 침대 위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기를 강요받은 것처럼… 거북하기만 했다.
그가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끌어안듯 힘을 주었다. 유해한 무언가로부터 나를 보호하려는 듯이.
“조용히 산책할 분위기가 아니네. 그냥… 집까지 걸을까요?”
애써 웃어 보이고 있었지만, 나보다도 그가 이 상황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곧바로 발길을 돌려 다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향했다. 아래층의 소동이 멀어질수록 기분도 점점 원래의 컨디션을 찾아 갔다. 그와 보냈던 좋은 시간의 여운을,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 때문에 망칠 이유가 없긴 했다.
기사님을 차와 함께 먼저 돌려보내고, 우리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의 집까지는 여유 있게 걸어도 10분이면 충분한 거리였다.
온도는 높았지만, 간간이 바람이 불어왔다.
그와 함께 걷는 건 아마도 홍콩에서 돌아온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았다.
맥주나 소주, 와인과는 또 다른 처음 마셔 본 사케의 달큰한 취기 때문인지, 그와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의식 때문인지, 나는 답지 않게 들떠서 자꾸 혼자 피식거렸고, 그는 그런 내가 재미있는지 계속 고개를 돌려 얼굴을 확인했다.
고급 테일러샵과 오래되고 소박한 미용실 등이 뒤섞여 있는 호텔 바로 앞 짧은 상점가를 지나자, 거리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높고 긴 담이 둘러진 커다란 집들이 들어선 고급 주택가에는 아주 드물게 자동차가 지나갈 뿐 사람의 그림자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바위만큼 커다란 연회색 벽돌로 담을 쌓은 저택 앞을 지날 때쯤 그가 반소매 아래 드러난 팔을 가볍게 붙잡았다. 그대로 천천히 팔을 쓰다듬으며 내려간 손이 내 손을 찾아 쥐었다.
그와 손을 잡고 걷는 밤길이, 문득 그와의 키스나 섹스보다 더 믿기지 않아서, 잡은 손을 몇 번이나 어깨높이로 들어 올려 눈으로 확인했다.
그런 나를 돌아보며 그가 피식 웃었고, 기분이 붕 뜬 나는 스스로 취한 것을 의식해 그의 어깨를 밀었다.
“왜… 자꾸, 봐요?”
회색 벽돌의 저택 앞 지정 주차 라인에 세워진 SUV 차량 뒤로 그가 불쑥 내 손을 잡아끌었다.
벽에 등을 기댄 그가 나를 안으면서 입술 앞에 검지를 세워 보였다. 그리고 내가 뭐라고 떠들기도 전에 입술을 겹쳤다. 깊은 키스가 아니라, 입술이 겹쳐졌다가 쪼옥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얕은 입맞춤이 장난치듯 여러 번 반복됐고, 그러는 사이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샜다.
“어… 음… 왜. 그러어케 웃어요.”
내가 더 많이 웃고 있으면서도 그에게 웃음의 이유를 묻는 나는 확실히 취해 있었다.
“예쁜 사람하고 있으니까 자꾸 웃음이 나는데 어떡해요. 그럼, 내 탓이 아닌 것 같은데.”
그의 천연덕스러움에 피식거리자, 다시 또 입술이 겹쳐졌다. 이번엔 따뜻한 혀가 입술을 핥는 감촉에 목 뒤가 움츠러들었다. 입술을 간질이는 그의 혀에서는 사케의 과일향과 함께 디저트로 먹은 아이스크림의 달콤함이 느껴졌다.
“취하니까 정말 잘 웃네. 방긋방긋이라는 단어를 이미지화하면 딱 이런 얼굴이겠어.”
내 허리 뒤에서 양손을 깍지 끼면서 그가 말했다.
잔뜩 낮춰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 때문에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데도 긴장이 됐다. 아니,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 주변이 지나치게 조용했기 때문에 목소리를 낮출 수밖에 없었다.
“내가 웃으며언… 좋아요?”
“좋죠. 평소엔 이 정도로 방긋방긋 웃지는 않으니까.”
그가 코끝을 마주 비비며 말했다.
아래쪽에서부터 차 한 대가 올라오는 소리와 라이트 불빛에 흠칫 몸이 굳어 순간적으로 그에게 더 바짝 밀착했다. 그렇게 자그마하지도 가녀리지도 않은 나를 품에 감추듯 꽉 끌어안으며 그가 관자놀이에 입술을 깊이 묻어 왔다.
그와 함께 있을 때는, 거실에서건 그의 침실에서건, 주방이나 아래층 스튜디오에서도, 스킨십에 제약을 받을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색다른 기분이었다.
그는 집이 아닌 곳에서라도 원하면 언제든 타인의 시선이 완전히 차단된 공간을 바로 마련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지금도 사실 집이 고작 5분 거리였기에 굳이 주차된 자동차의 뒤쪽 어두운 그늘에 숨어 목소리를 낮추며 언제 들킬지 모르는 짧은 키스와 포옹에 아쉬워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헤어짐이 아쉬워 집 앞에 도착하고도 한참을 서성이며 인적이 드문 자리로 숨어들어 소곤거리는, 아마도 대부분의 내 또래들이 하고 있을 연애와 비슷한 모습일 거란 생각을 하며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실없이 또 웃음이 흘렀다. 자신의 취기를 의식해 얼굴을 감추려다 웃는 모습이 좋다는 그의 말을 상기하며 눈을 피하지 않았다. 얼굴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매만지는 것 같은 시선으로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계속 이렇게… 웃게 해 줘야 하는데.”
연애의 사소한 즐거움(적어도 그와 비슷한)과 그것이 불러오는 염려와 걱정 사이를 오가는 듯, 문득문득 어두워지는 그의 눈빛에서 그늘을 지워 주고 싶었다.
“음, 그럼 또… 뽀뽀…해 주시면, 되는데….”
내 머리의 어디에서 그런 말이 나왔는지… 술의 힘이라고 해 두고 싶었다.
그의 푸른색 눈이 커지는 것을 보고, 죽을 것 같은 부끄러움과 후회가 취기의 빈틈을 비집고 올라왔다. 이런 소리를 지껄이려면 술을 더 마셨어야 했다.
“그 정도로 웃을 수 있다면야 종일이라도 해 드리지.”
그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허리를 더 조여 안았다. 그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몸을 좀 더 기댔고, 그가 턱을 틀어 진하게 입술을 겹쳤다.
입술을 벌렸다 다물기를 반복하며 상대의 입술을 머금었다 놓는 키스가 이어졌다. 가늘게 내리뜬 눈꺼풀 아래에서 서로의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넓고 탄탄하게 발달한 가슴 근육 위를 쓰다듬던 손으로 어깨와 목을 거슬러 올라가 그의 뺨을 두 손안에 가두었다. 그가 내 손목을 감싸 쥐며 고개를 돌려 손바닥에 입술을 비볐다. 밀착된 하반신에 단단해진 그의 성기가 느껴졌다.
나 역시 더 깊은 접촉을 원했다. 애를 태우며 코끝에 감돌다 멀어지는 그의 향기에 대한 갈증으로 순식간에 초조해졌다.
“오늘, 섹스하지 않고 같이 잤으면 하는데.”
“…….”
나의 손바닥에 뺨과 입술을 비비며 그가 차분히 속삭였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곧장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음표를 띄운 얼굴로 빤히 올려다보자, 그가 웃으면서 내 이마에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아.”
이마를 문지르는 내 손을 끌어 내리고, 그 자리에 입을 맞추며 그가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언제 이렇게 섹스에 익숙해져서는.”
그는 어느새 이런 분위기가 섹스로 이어지는 것을 당연한 수순으로 받아들이게 된 나를 놀렸지만, 그도 그럴 것이 최근 우리는 거의 매일… 섹스를 하고 있었다.
그의 집으로 들어간 직후에는 조금 조심스럽게 패팅이나 애무에서 멈출 때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저녁 식사 이후의 키스가 섹스로 이어지는 것이 공식처럼 돼 버린 상태였다.
그런 변화는 분명 바비큐 파티와 레이스 속옷의 그날 밤 이후부터였고, 그날 우리가 이전까지는 주변을 맴돌며 망설이기만 했던 어떤 선을 넘어 서로를 향한 진지함을 더 이상 숨기지 않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라고… 적어도 나는 변화의 이유를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역시 나와 다르지 않음을 점차 확신하고 있었고.
낮 동안 혼자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는 괜찮았지만, 함께 저녁을 먹고 대화를 하고… 나를 의식하고 원하는 그의 눈빛과 묵직하고 도발적인 그의 향기에 노출되고 나면 자제가 불가능했다. 요즘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그래서 더 어떤 의미인지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도 그의 성기는 뜨겁게 단단해져 있었다. 섹스를 원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그가 나 대신 이마를 문질러 주며 턱을 들어 허공을 바라보면서 장난스럽게 중얼거렸다.
“일단 시작하면 삽입하지 않는 게 불가능하고… 삽입하면 노팅하게 되고, 그럼 서이현 몸에 무리가 많이 가니까.”
“음, 그런데… 우리 요즘, 거의 매번 노팅하고… 그리고, 하룻밤에 두 번 노팅한 적도 있잖아요….”
“…….”
노팅을 미안해하라는 의미가 아니었는데, 그는 또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노팅을 그가 혼자서만 원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자주 했는데도… 제 몸, 괜찮았잖아요. 그런 뜻인데….”
그가 나의 뒤통수를 감싸 잡아당겼다. 그의 목덜미에 가까워지자 몇 개의 향수 냄새 속에 섞인 ‘그 향기’가 좀 더 분명해졌다.
나를 안은 힘이 너무 강해서 몸통이 뻐근했지만, 조금도 불편하거나 싫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닿은 귓가가 따뜻했다.
“나도 서이현하고 너무 하고 싶지. 늘 하고 싶어. 하고 싶은데. 근데… 한 번만. 아침에 눈 떴을 때도 네가 옆에 있는 게 어떤 건지…. 많이도 안 바랄 테니까. 나도 그냥 딱 한 번만….”
삽입 섹스를 하지 않는 것이, 혹은 노팅을 하지 않는 것이 아침까지 함께 있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 건지, 여전히 그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생각해 보니 그렇게 열정적인 밤을 여러 번 함께 했음에도 정작 함께 잠이 든 적은 없었다.
그와의 섹스를 아주 많이… 좋아하긴 하지만, 섹스 없이도 함께 잠자리에 들어 아침에 함께 눈뜨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거기에도 못지않은 관심이 있었다.
“그럴게요.”
담벼락에 기대고 있는 탓에 그의 등을 완전히 끌어안을 수는 없었지만, 팔 뒤쪽을 조심스럽게 붙잡으며 그의 목덜미를 향해 속삭였다.
섹스를 하고 나서 같이 자면 안 되는 건지 더 묻고 싶기도 했지만, 술기운 때문에 명확한 사고가 어려웠다. 생각은 형태를 구축해 가다 얼마 못 가 곧 스르륵 무너져 버렸다. 그의 향기가 가진 진한 뜨거움에 녹아내려 버렸다.
“서이현.”
귓가에 내 이름을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에, 그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나를 불러 주었던 목소리가 겹쳐졌다. 혹시 내가 그를 잃어버리더라도, 그렇게 그가 나를 찾아내 주기를, 불러 주기를. 그리고 나 역시 그에게 그럴 수 있기를.
그의 목덜미에 더 파고드는 것으로 부름에 대한 답을 대신하며, 마주 겹쳐진 그의 가슴의 고동을 가만히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