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잘할게
샤워 후 2층 서재를 향할 때까지도 형과 누나는 한창 이야기 중이었다. 평소보다 목소리가 들떠 있긴 했지만, 유학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는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은 술에 취한 사람들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구체적이었다.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거실 창으로 다가가 내다보니 테이블 위에 빈 맥주 캔이 수북했다. 휴대폰으로 음악까지 틀어 둔 두 사람은 분명 그의 말처럼 불확실한 미래에서도 불안보다 희망을 발견하고 있었다.
대책 없는 낙관주의와는 달랐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미래가 준비하고 계획할 수 있는 기대의 대상이었다.
한창 자기를 설명하고 싶고, 또 이해받고 싶을 시기라며 두 사람의 나이를 정의했던 그는 과거에 누군가에게 그런 욕구를 느꼈던 적이 있었던 것일까.
갈수록 범위를 넓히는 궁금증을 덮어 둔 채 거실을 빠져나와 계단을 올랐다.
2층 복도는 전부 불이 꺼져 있었지만 천장까지 이어진 거실의 전면창으로 비쳐 드는 달빛 덕분에 서재로 향하는 복도는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문을 두드리자 들어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문 쪽을 향하도록 놓인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 그리고 그와 이야기를 나눴던 소파 세트 옆, 두 개의 스탠드만 밝혀 둔 서재는 이곳에서 그에게 도움을 청했던 날처럼 어둑했다. 하지만 사물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촛불을 밝혀 놓은 듯 아늑한 주황빛이 잔잔했다.
“왔어요? 이쪽에 앉아요.”
그가 가리킨 것은 책상 앞의 긴 의자였다. 등받이가 없는 대신 비치체어처럼 한쪽 끝의 각도를 조절해 세울 수 있는 폭이 넓은 가죽 벤치였다.
엉거주춤 의자에 앉아 팔을 쓸고 있자니 그가 곧 하던 일을 정리하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사이 그 역시도 샤워를 마쳤는지 여름에 어울리는 짙은 푸른색을 연상시키는 샤워젤의 향기가 시원했다.
그가 곁에 앉으면서 갸름한 사각형의 물체를 내밀었다. 풀어 보기가 아까울 만큼 세련되고 아름다운 포장이 시선을 끌었다.
“이사 축하해요. 새로운 출발의 의미니까 축하할 일 맞는 것 같아서.”
“……감사합니다.”
“인사는 풀어 본 뒤에 해요.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으니까.”
그의 낮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리본을 풀고 포장을 벗겨 냈다. 포장지 안에서 나타난 심플한 상자 앞에서 한 번 손이 멈췄다. 가만히 아랫입술을 물었다 놓으며 양쪽으로 펼치도록 만들어진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
안에 든 것은 선글라스였다.
내 눈썰미가 틀리지 않았다면, 며칠 전 그의 차 안에서 써 봤던 것과 같은 디자인 같았다.
“홍콩에서도 이거 없어서 은근히 불편했죠? 하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아직 여름도 길게 남았으니까.”
옆에 앉아 허벅지 위에 팔꿈치를 기대고 턱을 괸 그가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 어….”
당황으로 굳어 버린 나는 눈앞의 선물에 빠르게 반응하지 못하고, 말문이 막혀 입만 벙긋거렸다.
그가 가볍게 웃었다. 방에는 우리 둘뿐이었지만, 허리를 세우고 상체를 내 쪽으로 기울인 그는 입술을 귓가에 바짝 밀착시킨 뒤 목소리를 낮췄다.
“근데 혹시… 다른 선물 기대했었던 건가?”
“…….”
다 알면서 일부러 짓궂은 장난을 쳤던 것일까. 목 뿌리에서부터 살갗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니, 기대했다기보다는, 예상하고 있었던 혹은 각오하고 있었던 내용물이 있었다. 그는 계속 ‘그것’에 대해 얘기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고 해서 실망한 것과는 다르다. 예상과 달리 성적인 의미를 전혀 담지 않은 이 선물은 그래서 오히려 더 선물 같았다.
늘 그의 왼쪽 가슴 포켓에 꽂혀 있는 선글라스. 물론 거의 매번 다른 디자인이었지만.
확실히 홍콩 공항에서 시내로 이동하는 자동차 안에서 선글라스를 쓰지 않은 건 나뿐이었다. 며칠 전 돌발적으로 그의 것을 빼앗아 써 봤던 일과 더불어 그때의 일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의미가 컸다.
아니라고, 고개를 여러 번 가로젓자, 그가 귓가에서 무너져 내리듯이 낮게 웃었다. 높은 코끝이 부드럽게 귓가에 비벼졌다.
“오른쪽 서랍, 한번 열어 봐요.”
“…….”
고개를 돌리자, 그의 코끝과 내 코끝이 닿았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시선이 서로를 끌어당겼고, 순간 그가 고개를 아주 살짝 틀어 입술의 표면이 겨우 스칠 정도로 짧게 입을 맞춰 왔다. 짧지만 느린, 조심스러울 정도로 신중한 입맞춤에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몸이 닿자마자 긴장과 흥분으로 굳어 버려 꼴깍 소리가 날 정도로 드러나게 타액을 삼켰지만, 그는 이번엔 웃지 않았다.
그가 가리킨 대로, 팔을 뻗어 벤치 앞 소파테이블의 서랍을 열었다. 또 하나의 포장된 상자가 텅 빈 서랍 속에 비스듬히 놓여 있었다. 한 번의 브레이크 때문인지 생각보다 차분한 손길로 포장을 벗기고 상자를 열 수 있었다.
향기로운 포푸리와 장식을 위해 잘게 자른 종이 위에 얌전히 놓인 것은 얇고 섬세한 검은 레이스의 속옷이었다.
그가 턱으로 내 어깨를 누르듯 기대 왔다. 우리는 함께 내 허벅지 위에 놓인 상자 안을 내려다보았다.
“정확히 해 두고 싶은 게 있는데, 분명히 남성용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진지하기까지 했다. 듣고 보니 앞쪽에 어느 정도의 부피감을 수용할 수 있는 여유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렇다 해도 어느 모로 보든 남성기를 편안하게 고정하기 위한 용도의 의류는 아니었다. 생필품으로서의 속옷이라기보다는… 두 사람 사이에 색다른 감흥을 끌어내기 위한 어른의 장난감에 더 가까웠다.
그가 야한 속옷 얘기를 꺼냈을 때 내가 생각한 것은 고작해야 작은 사이즈의 삼각형 브리프 정도였다. 일반적인 제품보다 사타구니가 조금 깊게 파진. 거기서 상상력을 더 확장시킨다고 해 봤자 남성용 티팬티 정도.
지금 눈앞의 이것도 남성용 티팬티의 범주에 속하기는 했지만, 성기의 윤곽과 색깔까지 훤히 비칠 게 뻔한 소재라든가, 양쪽의 긴 끈을 슥 잡아당기면 다리를 빼낼 필요도 없이 속옷이 바로 흘러내리도록 고안된 디자인이라든가… 고환이 삐져나올 것 같은 극단적으로 좁은 사타구니의 폭 같은 것들이… 각오를 훌쩍 뛰어넘었다.
나의 상상력이 빈약한 건지, 이런 걸 만든 사람들과 이런 걸 찾아낸 그의 상상력이 풍부한 건지….
“입어 줄 거죠? 약속했잖아요.”
그가 내 어깨 위에 턱을 괴고 칭얼거리듯 속삭였다.
약속한 적은 없었던 것 같지만, 약속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쯤은 나도 알았다. 설레며 기대하지는 않았어도, 무의식중에 각오를 하긴 했던 것 같다. 어쩌면 처음 침대 위에서 「어울릴 것 같은데.」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조금씩 자라 온 각오인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우리가 해 왔던 섹스를 돌아보면, 이 속옷을 못 입겠다고 버티는 상황이 더 우스울 것 같았다. 키스는 했으면서 뽀뽀는 부끄러워서 못 하겠다는 억지처럼.
선은 이미 예전에 넘은 것이다.
짧게 숨을 후 내쉬자, 그가 어깨에 얹었던 턱을 숙여 티셔츠 위로 입을 맞추었다. 어깨 끝을 향해 조금씩 입을 맞추며 이동한 입술이 거두어지고, 긴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내 턱을 쥔 그가 상자 안에 고정된 나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엄지로 턱을 간질이듯 더듬어 올라와 아랫입술을 살짝 뒤집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정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입술에 통증을 주는 마찰이 이어졌다. 지금은 단둘뿐인데 왜 꼬집듯 비비는 것으로 키스를 대신하는 건지 궁금했지만, 이 새로운 스킨십이 키스만큼이나 정신을 아찔하게 흔든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할 수 없었다.
“음….”
키스만이 아니라, 키스를 연상시키는 행위를 창조해, 그것으로도 자극을 끌어내는 그의 참신함에 감탄하는 사이, 짜릿한 고통을 가르며 신음이 흘러나왔다.
나를 보는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을 번갈아 가며 천천히, 깊이 들여다보는 시선은 내 안에서 뭔가를 찾는 듯했다. 예전부터 가끔씩 이런 방식으로 눈과 얼굴을 응시할 때가 있었다.
내가 아주 낯선 존재고, 그런 나에게서 거리감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껴 혼란스러우면서도, 그 간극의 비밀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외면하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사람처럼.
하지만 나에게는 푸르게 반짝였다가 하얗게 부서지는, 나의 존재에 의혹을 가지면서도 탐구하려 하는 그의 눈동자가, 훨씬 더 기이하고 신비로웠다.
아주 옅게 미소 지으며 그의 얼굴이 좀 더 가까워졌다. 아랫입술을 비비는 손가락 위로 입술이 겹쳐지고, 한동안 입술과 손가락이 함께 입술 표면을 더듬었다.
키스인 듯 키스가 아닌 다른 애무인 듯, 그가 가하는 새로운 방식의 자극에 홀려 입술을 완전히 그에게 내맡겼다. 짜릿한 통증을 가하는 손가락과 달콤하게 감싸는 폭신한 입술은, 단맛과 짠맛의 조화를 연상시켰다.
그러나 오늘의 그는 좀처럼 안으로 혀를 넣지 않고 입술 위에서만 오래 머물렀다. 평소와 다른 그의 키스 방식은 얼핏 그저 자극을 위한 행위처럼 보였지만, 몸을 겹친 횟수가 쌓여 온 만큼 그의 망설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들어오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 스스로 제한해 놓은 방어벽 너머로, 실은 침범하고 휘젓고 쥐어짜 내고 싶은 그의 열망이 똑똑히 느껴졌다.
이런 속옷까지 준비해 뒀으면서….
누나와 형이 뭐라고 말했든(두 사람이 겨냥한 것은 그가 아닌 인우 형이었지만), 경험이 어쨌고 나이가 어쨌든,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서이현’이 노련한 그가 유도하는 분위기나 테크닉에 휩쓸려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내가 먼저 원했었다.
상하좌우로 움직이며 손가락 위로 스치기만 하는 그의 입술을 내가 먼저 혀끝으로 할짝거렸다. 그의 커다란 몸이 순간적으로 굳어지며 나의 양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그러나 거부하듯 정지한 것은 한순간이었다.
스스로 구축했던 방어벽을 허물어 버리듯, 그의 혀가 입 안을 가르고 들어오면서 입술을 비비던 손가락 두 개가 함께 파고들었다. 지그시 혓바닥을 누른 채 앞뒤로 천천히 비비는 손가락의 움직임에 신음이 깊어졌다.
“으… 으음… 응.”
그의 손가락과 혀, 그리고 나의 혀가, 셋이서 몸을 섞는 사람들처럼 한데 뒤엉켜 엎치락뒤치락하는 난잡한 키스가 이어졌다. 뒤로 갈수록 혀는 과감한 곡선을 그리며 꿈틀거리고, 어깨와 가슴은 불규칙하게 들썩거렸다. 그의 손이 잠옷 대용의 반팔 티셔츠 안으로 들어와 등허리를 만지작거리자, 나 역시 순식간에 타올라 그의 맨살을 원하게 되었다.
그의 몸에 기대듯 가슴을 바짝 밀착시키며 흐려진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가빠진 숨소리를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나의 타액으로 흠뻑 젖은 그의 손가락이 입 안에서 빠져나와 입술 위를 느리게 덧그렸다. 코끝이 스치는 달콤한 거리에서 그가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망설이고, 정지하고, 고개를 저어 부정하고.
솔직함을 끌어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애를 태우던 평소의 거리 두기와는 달랐다. 허벅지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던 상자를 제자리로 돌려놓으며 내가 물었다.
“왜 그래요….”
비록 소극적인 형식을 띠고 있긴 했지만, 그에게 설명을 요구한 거의 최초의 질문이었을 것이다.
“…….”
말없이 나를 보며 안은 허리를 쓰다듬는 그의 눈은 역시나 뭔가가 달랐다.
“혹시… 하기 싫은 거면….”
그딴 말은 듣고 싶지도 않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그가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고, 그리고 잠깐이나마 포악했던 행동을 사과하듯 그 손으로 입술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한숨을 섞어 내게 속삭였다.
“타액… 더 줄래요?”
“…….”
티셔츠 안에서 허리를 감아 바짝 당겨 안으며, 그가 나의 윗입술 뒤로 혀를 찔러 넣어 점막을 간질였다.
“삼키지 말고… 전부 흘려 넣어 줘요. 내 안에.”
그렇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고통을 잊기 위해 약이나 술을 찾는 중독자의 금단 증세처럼 절박해 보였다.
“내가 다 원하니까… 내 거니까…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내가 전부 삼키고 싶어….”
말을 마치자마자 그가 다소 거친 동작으로 나의 목을 감쌌다. 턱 바로 아래, 목의 가장 위쪽을 한 손으로 움켜쥔 그는, 나의 턱을 밀어 올려 내 안에 자신의 타액을 흘려 넣는 것으로 시범을 보였다.
“흐윽, 흑… 흐어윽….”
턱을 쳐든 상태에서 그의 타액을 꼴깍꼴깍 받아 삼키면서… 높아진 안압에 흐려진 시야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흘려 넣어 주는 타액 속에 녹아 있는 향기는 평소보다 진하고 풍부해서, 내게는 이미 섹스의 상징처럼 굳어 버린 그 향기를 과다하게 삼킨 탓에 흥분이 몸속에서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목을 쥐었던 손에서 서서히 힘을 풀면서 그가 입술을 떼고 이마를 마주 대었다. 코끝을 비비고 다시 입술을 겹쳤다. 턱의 각도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입술의 접촉이 더욱 깊어지고, 그가 재촉하듯 혀를 넣어 입천장을 건드렸다.
삼키지만 않으면 타액은 자연스레 입 안에 고여 들었고, 내가 어떻게 해 보려는 시도를 할 필요도 없이, 혓바닥 위가 척척하게 젖어 드는 족족 그의 흡입에 의해 수분을 모조리 빼앗겼다.
“으으, 음. 으응… 흐윽.”
그의 흡입은 나 자체를 자기 안으로 빨아들일 것처럼… 나의 타액에 허기와 갈급을 느끼는 사람 같았다. 그에 의해 단단히 고정된 채 낱낱이 파헤쳐지는 감각이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신음을 끌어냈다.
허리를 안은 팔을 조이고, 목덜미를 감쌌던 손에 힘을 주어 쓸어내리면서, 그는 콧등과 미간에 힘을 주었다. 시야 안에 가득한 그의 푸른 눈 속에서는 흥분과 망설임과 죄책감이 서로를 팽팽하게 밀어내고 있었다. 지금껏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그의 가슴에 밀착시켰던 가슴을 조금 떼어 내면서, 입술에 흡착되다시피 한 혀와 입술을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대신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부푼 근육 위로 티셔츠를 만지작거리며 그를 쳐다봤다.
“진짜… 감기 아니에요? 식사도 거의 안 하셨잖아요. 코 막히고 그러면 식욕도 없으니까….”
내가 말할 수 있는 이유란 고작 그 정도였다.
그가 좀 전까지의 일그러졌던 표정을 얼른 지우고 건들거리듯 장난기를 담아,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한 번에 머금어 가볍게 깨물었다.
“왜요. 내가 감기 기운이 있으면 섹스도 못 하고 비실거리는 약골일까 봐?”
겨우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키스를 중지시킨 거냐며, 그는 볼멘 목소리로 허리를 당겨 다시 입을 맞추려 했다.
“그게 아니라….”
“아… 그러고 보니까 좀 아픈 것 같네.”
“…….”
과장된 농담조로 내 말을 가로막은 그가 검지와 엄지만을 이용해 속옷의 가장자리를 쥐고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의 손에 들린 속옷은, 상자 안에 있을 때보다 몇 배는 더… 야시시해 보였다.
“서이현 씨가 이거 입은 모습 보면, 그럼 깨끗이 나을 것 같은데.”
“…….”
그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장난으로 넘기려 하고 있었다.
속옷은… 처음부터 별로 거부할 생각도 아니었으니 그가 이런 핑계를 대지 않았더라도 입기는 했겠지만… 좀 더 그럴듯하게 아픈 연기를 해 주었다면 이쪽에서도 속는 척하기가 덜 겸연쩍었을 텐데.
집어 든 속옷을 자신의 얼굴 위에서 살랑살랑 위아래로 흔들며 레이스 사이로 나른하게 내리뜬 시선을 보내오는 그는 그렇게 해서 나를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레이스로 베일처럼 얼굴을 가린 그가 뺨을 맞대어 왔다. 까끌한 듯 매끄러운 천을 사이에 두고 그와 살을 비비자 금세 촉각이 곤두섰다. 면 티셔츠와는 다른, 긴장감을 일으키는 감촉이 거기에 있었다.
감추고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자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진 이 한 겹의 천 조각이, 곧 내가 입게 될 속옷이라는 사실을 상기하자… 아닌 척하기 어려운 호기심과 흥분으로 숨소리에 열기가 섞였다. 뺨을 비비는 그의 숨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입어 줄 거죠? 나한테 많이 고맙다면서요. 이거 입고….”
귓바퀴를 할짝거리는 혀의 뜨거움에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가 나의 손을 자신의 다리 사이로 가져가 뭉근하게 누르며 말을 이었다.
“여기랑 같이 비비면….”
황홀한 꿈을 눈앞에 그려 보는 목소리로 그는 달콤한 한숨을 섞어 속삭였다.
“어떤 기분일까.”
손바닥에 만져지는 그의 것은 벌써 부풀기 시작해 불룩하고 따스했다. 페니스의 온도와 부피감을 손으로 직접 느끼자, 또 한 번 내부가 들썩거렸다. 아랫입술을 윗니로 몇 번이나 고쳐 깨물어야 했다.
“음, 나만 궁금한 건가….”
“…….”
풀 죽은 듯한 그의 목소리에, 어깨에 이마를 묻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끄러워하지 마요. 이거 입히고 놀리려는 게 아니라… 더 섹시한 모습… 야하게 유혹하는 모습, 보고 싶어서 그래…. 응?”
뒷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머리카락 위에 입을 맞추는 목소리에,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갈아입는 과정을 낱낱이 감상하는 관음적 즐거움도 좋지만, 과정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곧바로 완성된 모습을 마주했을 때의 파격도 포기하기 어렵다며, 그는 나와 속옷을 번갈아 보며 한참을 고민했다.
“처음이니까, 전부 보여 달라고 하는 건 너무 좀… 야만적이겠죠?”
나를 생각해 후자의 방식을 택한다는 듯 말하는 그의 진지한 옆얼굴을 보다가 피식 웃어 버렸다. 그 역시 이런 속옷을 쥐여 준 시점에서 야만을 운운하는 자신의 발언이 멋쩍게 느껴졌는지, 마주 보는 눈꼬리가 쑥스러운 빛을 띠며 휘어졌다.
“안 볼게요. 처음이니까.”
두 번째, 세 번째에 대해 미리 못 박아 두려는 것처럼 ‘처음이니까’를 강조하면서 그는 자진해서 뒤로 돌았다. 커다란 등을 굽히고 앉아 손으로 눈을 가리기까지 한 뒷모습에서는 거의 천진함에 가까운 기대감이 느껴졌다.
과연 그의 기대처럼 섹시하거나 야한 모습이 될 수 있을지… 전혀 자신이 없어서, 굼뜬 움직임으로 천천히 파자마 팬츠를 끌어 내리는데, 비식거리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어깨 위로 한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 옷 벗는 소리부터 좋아서 그러니까, 내 반응은 신경 쓰지 마요.”
저렇게 기대감을 보이는데, 신경이 안 쓰일 수가….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벗은 파자마와 브리프를 개켜 테이블 위에 두고 앞판과 뒤판을 이어 주는 양쪽 끈이 리본으로 묶인 속옷에 다리를 꿰었다. 꽤 고급품인지 레이스는 거칠거나 뻣뻣하지 않았다. 하지만 특유의 살짝 까슬한 느낌이 다리를 스치며 올라오는 감각에는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섬유가 성기에 닿자, 으으… 하는 소리가 절로 날 것 같아 음성을 죽이고 어깨를 움츠렸다.
아무리 열심히 천의 가장자리를 당겨 봐도 앞판은 성기를 겨우 가릴 뿐 음모의 대부분을 가려 주지 못했고, 앞판보다 더 넓을 것도 없는 뒤판은 그나마도 엉덩이골 사이로 파고들어 거의 아무것도 가려 주는 게 없었다.
티셔츠를 슬쩍 들어 올려 아래의 상황을 확인하고 나니 환하게 불을 밝혀 두지 않은 그에게 고마워질 것 같았다.
후우….
소리를 내려는 의도가 없었기에 스스로의 한숨에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그의 등에 시선을 고정했다.
“다 입었어요?”
“…….”
다 입기는 했지만, 공개할 준비가 됐냐는 의미의 질문이라면, 그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겨우 가려지긴 했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삐져나올 것 같은 고환 때문에 티셔츠 자락을 끌어 내리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 정말 많이 작고… 그게, 뭔가, 다 가려지지가 않아서… 실망하실 것 같….”
횡설수설하는 변명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벤치 위에서 몸을 돌려 앉았다.
“음… 그게 뭐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가늘어진 그의 의아한 눈이 가리키는 건 다리 사이를 가린 티셔츠 자락이었다.
“어… 그러니까 이건….”
그가 쭈뼛거리며 망설이는 나의 양 손목을 부드럽게 휘감아 차렷 자세가 되도록 허벅지 바깥쪽에 바짝 붙여 고정시켰다.
“…….”
팽팽하게 부풀어진 레이스 아래로 비치는 음경과 고환의 뭉치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흐읏….”
상체를 숙여 레이스 위에 가만히 코를 묻고 깊이 들이쉬는 호흡에 어깨가 비틀렸지만, 그는 손목을 놔주지 않았다.
“실망이라는 말뜻을… 완전히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중얼거림은 나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티셔츠 아래로 드러난 다리 사이를 다각도에서 꼼꼼하게 관찰한 그는 한쪽 리본 끝을 손으로 쥐고 잡아당기는 시늉을 하며 나를 올려다봤다.
“…….”
실수로 살짝 삐끗하기만 해도 간단히 풀려 버릴 것 같은 가느다란 끈이 아슬아슬했다. 그 끝을 만지작거리며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눈에서 초점을 잃어 가는 뭉근한 흥분을 읽을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당겨 버릴 수 있음을 암시하듯 끈의 끝자락을 쥐고 잡아당기다 툭 내려놓은 그는 말없이 상의를 탈의했다.
옷을 벗는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속옷 안에서 성기가 움찔거렸다. 지난 일주일간 패팅만으로 끝났던 스킨십 때문인지, 오늘따라 몸이 보이는 반응이 빠르고 예민했다.
상반신을 드러낸 그가 손목을 붙잡아 나를 가까이 잡아끌었다. 벌린 무릎 사이로 걸어 들어가자, 벤치의 낮은 높이 때문에 곧 그의 입술이 성기에 닿았다. 따뜻하고 축축하게 피부 표면을 감싸는 감촉에 스르륵 눈이 감겼다. 엉덩이 근육이 절로 긴장하며 수축했다.
그가 턱을 비틀며 입술을 벌려 키스하듯 성기를 머금었다.
“흐으, 음….”
성급하게 덤벼들지 않는 느린 마찰이 가장 예민한 살갗 위를 녹이는 듯했다. 내려다보니, 그가 이쪽저쪽으로 얼굴을 꺾어 가며 혀와 입술을 충분히 사용해 레이스 안의 음경을 훑고 있어서… 마치 그와 타인의 키스를 지켜보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흐음음… 하아….
레이스 위에 얼굴을 묻은 채 깊숙이 들이쉬고 내쉬는 뜨뜻한 숨결에 성기가 젖어 들었다. 우뚝한 콧대와 육감적인 입술이 레이스 한 겹을 사이에 두고 성기를 지그시 눌러 왔다. 그러고는 조금씩 비틀리며, 단단해지기 시작한 음경에 얼굴 전체를 넓게 비볐다.
“흐으, 흠. 흐윽….”
점차 진해지는 애무에 무릎이 서로 맞붙고 상체가 굽어졌다. 그에게 잡힌 손목을 뒤쳐 빠져나와 가슴에 통증을 느끼는 사람처럼 티셔츠를 쥐어뜯듯 움켰다.
비어 버린 그의 손이 발목에서부터 맨다리를 쓸고 올라왔다.
“하으, 으… 흐….”
한 발로 다른 발의 발등을 누르며 뒤꿈치를 들썩거렸다. 굽어진 허리를 펼 수가 없었다. 한 손으로 그의 어깨 위를 짚고 매끄럽고 건강한 피부 위를 손끝으로 긁어 댔다.
허벅지 뒤쪽을 위아래로 부드럽게 간질이던 손이 훤히 드러난 엉덩이의 아래쪽을 가볍게 흔들자 둔부의 살집이 진동했고, 동시에 그의 뜨거운 혀가 레이스 위로 불룩한 부피감을 진하게 핥아 올렸다.
“흐아흐. 흐윽, 흐….”
사람들이 어째서 대체로 섹스를 누워서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몸의 심이 허물어진 것처럼 허리는 자꾸만 굽어 들고, 성기가 빳빳해질수록 반대로 무릎에는 힘이 풀려 몇 번이나 다리가 후들거렸다.
“금방 앉게 해 줄게요. 그 전에… 뒤도, 보여 줄래요?”
요구하는 그의 목소리는 흥분을 가두어 조절하려는 노력으로 허스키하게 꽉 잠겨 있었다. 그의 어깨를 밀어내는 힘으로 허리를 세운 나는 티셔츠를 움켜쥐고 천천히 뒤로 돌았다.
“하, 미치겠네 진짜. 실망? 실망?”
“흐으, 읍!”
미치겠다는 중얼거림과 동시에 예고 없이 엉덩이에 박혀 온 얼굴 때문에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으으….”
골반을 붙잡은 그는 엉덩이골 사이에 단단한 콧대를 끼우고 얼굴 전체를 이용해 위아래로 골을 긁어 댔다. 뒤판의 레이스가 골 사이로 파고들어 엉덩이가 시작되는 허리 라인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가는 끈 외에는 아무것도 살을 가린 것이 없는 헐벗은 뒷모습이 눈앞에 그려져 아랫입술을 물었다.
“으으, 음. 으음….”
얇은 레이스 위로 옴폭 들어간 애널의 홈 위를 누르는 젖은 살덩이의 파고듦에, 입을 틀어막았던 손 밖으로 신음이 줄줄 새어 나왔다.
“자기 자신에게 별로 관심 없죠?”
흥분이 스며든 빠른 어조로 그가 말했다.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남의 둔부를 양쪽으로 가르고 엉덩이에 침을 바르면서 열중한 상태에서 할 만한 질문도 아니었다.
티셔츠의 가슴을 움켜쥔 채 고개를 돌려 그를 내려다봤다.
“…….”
“자기감정도, 육체도… 자기 그림도… 아마 잘 모를 거야.”
그게 내 스케치를 보고 난 그의 감상일까. 높은 곳에서 뚝 떨어지는 것처럼 아득해지는 감각에 다리가 휘청거렸지만, 그가 골반을 붙잡았다.
둔부의 살을 이로 긁으며 그가 눈을 치켜떠 나를 올려다봤다.
“그거, 경우에 따라서는 되게… 잔인할 수 있는 거 압니까?”
그러고는 뻑, 뻑, 소리가 나도록 살집을 입에 물고 빨아들였다.
“읏!”
갑자기 몸이 뒤로 확 당겨지면서 중심이 무너진다 싶더니, 다음 순간 그의 허벅지 위에 주저앉아 있었다. 핏줄이 상박까지 불거진 두 팔이 결박하듯 내 허리를 꽉 안았다. 목덜미에 코와 입을 묻은 그는 정신없이 체취를 들이마셨다. 중간중간 인내를 동원하듯 티셔츠 위로 살점을 씹기도 했다. 흐으음, 하아, 흐으음, 하아. 빠른 심호흡을 거듭하는 그는 기억된 냄새의 근원지를 찾으려는 훈련견 같았다.
“눈앞에서 살랑거리면서 돌아다니는데… 나랑 섹스하고 싶다고 전신으로 유혹하면서… 자기는 그걸 몰라. 그게, 안 잔인해요?”
괘씸하다는 듯 그가 목덜미를 깨물었다.
언제 트레이닝팬츠와 속옷을 발목까지 끌어 내리고 성기를 내놓고 있었던 건지, 내 엉덩이 아래를 찌르는 딱딱한 음경이 느껴졌다.
그가 다급하면서도 정확한 손길로 나의 허벅지 안쪽에 손을 넣어 다리를 활짝 벌리게 했다. 그의 허벅지를 지지대 삼아 편안하게 벌려진 아래를 내려다보자, 검은 레이스 안에서 꿈틀거리는 나의 성기 아래로 그의 귀두가 번들거리는 머리를 내놓고 있었다. 다리가 벌려지면서 고환은 레이스 밖으로 반쯤 삐져나와 있었다.
“흐으… 흐윽!”
허벅지 안쪽을 파고든 그의 손이 다리 사이를 건드렸고, 나는 불에 덴 사람처럼 그의 무릎 위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오목하게 모아진 커다란 손바닥이 밑을 문질러 닦듯 깊숙한 곳부터 음경 위까지를 몇 번이고 쓸어 올렸다. 까슬한 레이스를 사이에 두고 문질러지는 감촉은 아주 생소했다.
나의 가슴 앞쪽으로 손을 들어 올린 그가 어깨 위로 목을 길게 빼고는 손바닥을 핥고 냄새를 맡았다. 굳이 내 시야 안에서. 확인시켜 주듯이.
나의 아래를 문지른 손을 혀로 핥으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부드럽고 다정하게 허리를 쓰다듬었다. 살짝 긁힌 것 같은 허스키한 음성에 젖은 꿀이 배어든 것처럼 찐득하고 달았다.
“나, 감기 다 나은 것 같은데. 서이현 씨 어떡해요.”
무슨 뜻인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아리송한 말에,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내 입술쯤에 그의 코끝이 있었고, 지금처럼 그가 턱을 살짝 쳐들면 딱 키스를 하기 좋은 구도가 갖춰졌다.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목을 늘이며 입을 맞춰 왔다. 정말 그의 눈에는 스물두 살짜리의 욕망쯤은 텍스트화되어 읽히는 것일까.
“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이네.”
레이스 아래의 성기를 주무르면서 그가 말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그의 눈이 ‘무엇을?’이라고 묻고 있었다. 그의 손길에 단단해지는 성기가 비좁은 속옷 안에서 꾸물거리며 생각을 방해했지만, 흥분으로 이성이 마비된 틈을 빌려서라도 묻고 싶었다.
“제가, 대표님이랑… 하고 싶어 한다는 거.”
“…….”
그가 가만히 나의 얼굴을 들여다보다 피식 웃으며 다시 입술을 겹쳐 왔다.
“골든 알파는 다 알아요.”
“거짓말이잖아요. 베타는 페로몬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고, 인우 형이… 읏.”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비비던 그가 한순간 아랫입술을 베어 물 것처럼 콱 깨물었다. 나도 모르게 입술로 손이 올라갔다.
“아파요….”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리자 그가 어깨를 내리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혀를 내어 방금 깨문 자리를 정성스럽게 핥았다.
“아프게 하는 거 좋아하면서?”
“이건… 그런 거 아니었잖아요.”
“그런 건 뭐고, 이런 건 뭔데. 아… 야하게 아픈 거 아니었다고?”
“…….”
“그렇구나. 서이현 씨는 아프게 하는 거 좋아하지만, 야하게 아픈 것만 좋은 거였구나. 앞으로 알아 둘게요.”
말을 돌리려 하는 것 같았지만, 굳이 대답을 들어야 하는 궁금증은 아니었다.
그와 섹스하고 싶다는 유혹을 전신으로 어필했다는 말은 어쩌면 사실일 것이다. 의도적인 유혹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대범함은 없었지만, 그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 감정과 욕망을 숨기는 데 철저했다고도 할 수 없었으니까.
“으… 읏.”
허리를 쓰다듬던 손이 더듬거리며 티셔츠 안으로 들어와 유두를 찾는 바람에, 얕은 의문마저 금세 흩어져 버렸다.
애를 태울 것도 없이 곧바로 돌기를 쥔 검지와 엄지는 유륜에서부터 넓게 살점을 쥐고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안에 든 것을 짜내듯 잡아당겼다.
“흐으, 흑. 흐읏….”
살점이 늘어나도록 뾰족하게 당긴 끝에 탁 놓치고, 다시 유륜 바깥쪽에서부터 쭈욱 짜내다 놓치기를 반복하는 애무는… 부피가 없는 판판한 가슴에서 무언가가 흘러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삽입하는 쾌감을 알기 전에 그보다 먼저 배운, 삽입을 당하는 강렬한 쾌감이 새겨진 육체는 흥분이 가중될 때마다 자꾸만 아래를 수축시키며 안쪽의 허전함을 호소했다.
미칠 것 같은 건 내 쪽이었다. 그에 의해 유두가 짜내지고, 목덜미를 빨리면서, 나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성기가 레이스에 쓸리면서 날카로운 저릿함이 하반신을 갈겨 댔다.
“오늘은… 일찍부터 적극적이네.”
치켜든 목덜미를 씹으면서 그가 칭찬하듯 말했다. 나 역시 그 말에 동의했다. 헐떡거림 탓에 벌써 입 안이 말랐고, 바로 귓가에서 속삭이는데도 그의 목소리가 아득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급하게 티셔츠를 끌어 올렸다. 젖꼭지를 꾹꾹 짜내는 그의 손이 전부 드러날 때까지.
애무를 눈으로 확인하자 머릿속이 뜨겁게 끓어올랐다.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을 조금이라도 억제해 보려 손등을 깨물었지만, 그의 허벅지 위에서 들썩거리며 비비 틀리는 허리의 움직임은 멋대로였다.
“가만히 못 있겠나 봐…. 부끄러운 거 아니었나? 이거, 다 삐져나왔는데?”
레이스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음낭의 일부를 만지작거리며 그가 내 귀를 씹었다. 이젠 그냥… 다 상관없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부끄럽지 않았고, 그의 사타구니에 스스로 엉덩이를 비비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분명히 알았다. 그가 어떻게 해 주기만을 기다리던 처음과는 이미 다른 내가 되어 있었다.
고환과 레이스의 경계를 더듬는 그의 손가락에 내 손을 겹쳤다.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자, 굶주려 사나워진 그의 얼굴이 나를 보고 있었다. 느긋하게 굴던 말과 달리 그의 얼굴에는 전혀 여유가 없었다.
혀를 내밀어 그의 아랫입술을 핥았다. 여러 번 핥으며 달아오른 숨을 흘렸다. 그의 길고 딱딱한 손가락을 더 깊은 곳으로 이끌었다. 벌려진 다리 사이, 그가 쾌감의 기억을 심어 놓은 곳으로.
“아으, 으….”
애널에 닿은 손끝이 레이스 위로 입구를 둥글리듯 문질렀다. 가슴을 애무하는 그의 팔을 붙잡고 입술을 잘근거렸다. 상체가 고꾸라졌고 숨이 덜덜 떨렸다. 그가 가슴을 당겨 안으며 나를 일으켜 세웠다. 들썩거리는 몸이 나의 행위 탓인지, 그가 쳐올리는 힘 때문인지도 알 수 없이 그저 그의 팔을 붙잡고 매달리며 헉헉거렸다.
“여기… 넣을까.”
레이스를 찢으며 안을 파고들 것처럼 애널 위를 짓이기는 그의 목소리도 잔뜩 억눌려 있었다.
“흐읏. 흐….”
우는 사람처럼 흐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 넣어서, 안에 문지를까.”
말을 하고 있는 그의 입 안에 혀를 밀어 넣었다. 참을 수 없이 그의 향기를 원했다. 실컷 마시고 싶었다. 그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그의 입천장을 핥고, 혀의 기둥에 내 혀를 비비고, 윗니의 뒤쪽을 건드리며 혀를 빨아 달라고 졸랐다.
“으응, 흐….”
그의 손끝이 끈처럼 가느다란 레이스를 옆으로 밀어내며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동시에 강한 흡입으로 혀를 빨리는 감각은 아래위로 정신을 아득하게 했다.
가슴을 가로질러 안은 그의 팔을 붙잡고 쓰다듬으며 젖은 눈으로 그의 눈을 마주했다. 삽입에 대한 나의 반응,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과 가파르게 치솟았다 무너져 내리기를 반복하는 호흡을, 그의 눈앞에 전부 공개했다.
한동안 입구에서 얕게 깔짝거리기만 하던 손가락이 곧게 펴지며 길게 쑤욱 밀고 들어왔다. 다리가 벌려진 하반신은 저항감 없이 손가락을 빨아들였다. 기다렸다는 듯 그의 손가락에 내벽이 감겨드는 것을 스스로도 분명히 느낄 수가 있었다.
“너무 조이지 마…. 손가락이 사정할 것 같다고.”
내 혀를 놓은 그가 손가락이 아닌 성기를 안에 넣은 것처럼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의 어깨 뒤로 팔을 둘러 목을 끌어안은 나는 그의 입술에 다시 매달렸다.
“더… 더….”
“더?”
“저도 아까… 줬잖아요.”
“내 타액, 왜 먹고 싶은 건데? 응?”
“하으흑. 흐읍.”
곧게 뻗은 채 쿵, 쿵, 안을 찧으며 올라오는 손가락의 삽입에 그의 어깨를 비틀어 쥐며 신음했다.
“냄새… 좋은 냄새가… 흐아, 흐….”
흐릿하게 번진 시야에서 그가 독 오른 얼굴로 어깨를 크게 들썩이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 꼴리게 하는 냄새잖아. 여기 안이, 움찔거리게 하는 냄새.”
꽉 문 어금니 사이로 그가 씹어 뱉듯 중얼거리며 안에 든 손가락을 돌려 내벽을 훑어 냈다. 그리고 아랫배와 나의 엉덩이 사이로 다른 손 하나를 밀어 넣었다.
“흐, 흣! 뭐… 이거 뭐가!”
먼저 들어와 있었던 왼손의 중지에 그의 오른손 중지가 겹쳐지고 있었다. 같은 손의 두 손가락이 들어올 때와는 완전히 다른 생소한 감각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상체를 경직시킨 채 숨을 멈췄다.
호흡을 정지한 입술 안으로 그의 혀가 거칠게 파고들었다.
“으으, 음. 흐음.”
밀려들어 오는 타액을 받아 삼키는 동안 아래에서는 각기 다른 방향에서 안을 파고든 두 손가락이 내부를 넓히고 있었다.
사타구니 앞쪽으로 들어간 왼손이 깊이 파고들면 엉덩이 뒤쪽으로 들어간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갔다. 다음 순간엔 서로 자리를 맞바꾸며 내 안에서 어긋나는 리듬을 만들어 냈고, 그 리듬은 점차 빨라졌다.
“흐으, 흐.. 윽… 흐음….”
그의 무릎 아래는 악어 떼가 득시글거리는 늪이고, 그의 목이 추락 직전에 붙잡은 나뭇가지인 것처럼 필사적으로 매달려 버둥거렸다. 신음이 새는 목구멍을 틀어막은 그의 혀 때문에 미처 다 삼키지 못한 타액이 입가로 흘러내렸지만, 닦아 낼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내 냄새 더 마시니까 어때요? 나랑 키스하면… 서이현 어떻게 돼?”
헐떡거리는 나의 턱 끝을 잘근거리며 대답을 채근하는 그는 이제 더 이상 말투에서도 여유를 가장하지 않았다. 나를 올려다보는 눈빛에는 단단한 총기나 이성적인 침착함이 남아 있지 않았다. 모든 가치에 성욕이 우선하고 있는 남자의, 아니, 알파의 얼굴이었다.
시소처럼 번갈아 오르락내리락 안을 쑤시는 손가락은 그대로 두뇌에 구멍을 내는 것 같았다. 그와 키스를 하고 그의 타액을 삼키면, 다리를 오므려 음부를 감출 줄 모르는 천치가 돼 버린다.
그런 자신을 고백하기 위해 고개를 숙여 그의 코끝에 내 코끝을 마주 비볐다. 나의 다리 사이로 사라진 그의 왼팔을 쓰다듬으며 내려가 이미 한참 전부터 발기된 채 다리 아래에서 흔들리고 있었던 그의 귀두를 더듬었다. 예상대로 이미 흠뻑 젖은 그것은 자신의 왕성한 체액을 카펫 위에 뚝뚝 흘리고 있었다.
“이거… 넣고 싶어져요.”
“왜, 손가락으로는 안 돼?”
“흐읍, 흑!”
더 빠른 속도로 번갈아 가며 거칠게 안을 들락거리는 두 개의 손가락이 만들어 내는 마찰은 머릿속에 불을 지폈다.
“손가락으로도 이렇게 좋아하는데, 이걸로는 안 되고?”
허리를 곧게 세웠다 무너뜨리기를 반복하며 귀두의 쿠퍼액을 손가락에 묻혀 만지작거렸다. 그가 그렇게 했듯이, 그의 체액이 잔뜩 묻은 손을 입으로 가져가 호흡을 들이마셨다.
“손가락은… 노팅, 못 하니까….”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눈꺼풀은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지만, 그 아래 박힌 눈동자는 허기와 욕망으로 생생하게 번들거렸다. 그는 자신의 체액이 묻은 나의 손가락 사이로 혀를 밀어 넣어 내 입술을 핥았다.
“내 냄새에 흥분하고, 자지 넣고 싶어서 허리 흔들고… 거기다 노팅까지 원해?”
“…….”
“그거 꼭… 오메가 같네.”
베타인 나에 대한 부정의 의미가 될 수도 있는 그 말이, 왜 그렇게 나를 자극했는지 모르겠다.
“흐으, 흐… 흐읍….”
불기둥처럼 치솟는 흥분에 크게 몸을 떨며 허리를 들썩거렸다. 입술 사이를 가로막은 손을 치워 버리고 직접 그의 혀를 머금어 타액을, 타액에 녹은 향기를 빨았다.
단지 섹스를 함께하는 것 이상의 의미로 그를 소유하고 속박할 수 있으며, 그에게서 알파의 본능을 끌어내 이성적 제어력을 전부 부숴 버리고 질주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오메가뿐이라면… 그가 나를 오메가 같다고 느끼는 것도 싫지 않았다.
그에게 그건, 상대가 자신에게 한없이 야하게 보이고, 걷잡을 수 없이 성적 충동을 자극한다는 의미일 테니까.
“음, 으음, 흡….”
빠른 속도로 내부에서 오르락내리락하던 두 개의 중지가 양쪽으로 벌어지며 입구를 벌리는 감각에 숨이 틀어막혀 그의 혀를 뱉어 냈다. 그의 어깨 뒤로 두르고 있던 팔로 땀에 젖어든 피부 위를 마구 헤집으며 가슴을 높이 밀어 올렸다.
송송 구멍 뚫린 뇌 속에는 가랑이 사이를 스치는 그의 성기를 넣길 원한다는, 명료할 정도로 간단한 하나의 욕구만이 가득했다. 이성적 제어력을 무너뜨리고 원색적 욕구만을 좇아 폭주하는 쪽은 오히려 나였다. 전신이 벌벌 떨릴 정도로, 이상할 정도로 삽입을 원했고, 생사가 달린 것처럼 절실한 욕구는 저절로 입을 열었다.
“넣어 줘요, 넣을래요…. 지금 넣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 흐윽.”
몸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고, 당장 그것을 막지 않으면 자신의 모든 것이 그 구멍을 통해 새어 나가 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가까운 욕구 속에서 그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거의 울고 있었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얼굴을 일그러뜨린 나의 턱을 핥으며 손가락을 깊숙이 밀어 넣던 그가 문득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좀 전까지 나의 모든 흥분의 흔적을 눈으로 핥듯이 좇던 그의 시선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고정되어 흔들리고 있었다.
“흐으, 흡.”
불안함에 허릿짓을 멈추었던 내 안에서, 그의 손가락 하나가 빠져나갔다. 그리고 남은 한 손이 안을 크게 휘저었다. 손의 방향을 바꾸어 가며 점막을 더듬고 긁어 댔다. 그 안에서 예상하지 못한 뭔가를 찾아내기라도 한 사람 같았다.
내가 의식하지 않아도 내벽은 수축하며 저절로 그의 손가락을 꽉꽉 조여 댔다. 나는 입을 틀어막고 그 자극에 몸을 떨었다.
“서이현….”
나를 부르는 목소리도 귀신에 홀린 사람 같았다. 입을 막은 채 그를 내려다보는 내 눈은 너무 오래 참은 욕구로 인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서이현….”
또 한 번 내 이름을 중얼거린 그는 앉은 자세에서 서서히 허리를 튕기며 안을 찌르는 속도를 높여 나갔다. 그를 너무 원해서 이젠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무릎 위에 앉힌 나를 흔드는 그의 진동이 점점 빠르고 격렬해졌다. 겨드랑이 아래로 고개를 숙여 티셔츠 위로 내 유두를 물어뜯기까지 하면서, 그는 봐주지 않고 아래를 찔러 댔다. 이젠 그가 더 급해 보였다.
서이현, 서이현, 서이현….
비극을 막기 위한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계속해서 내 이름을 중얼거리던 그는 “씨발, 서이현.”이라는 마지막 읊조림과 함께 안에서 손가락을 뽑아냈다.
앉은 자세 그대로 뒤에서 나를 들어 올려 벤치 위에 눕히고는, 60도 각도로 세워진 벤치의 한쪽 끝에 내 등이 닿자마자 허벅지를 밀어 올리고 엎드려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시간과 동작의 낭비가 전혀 없었다. 모든 것이 순식간이었다.
“윽.”
뾰족하게 세워진 혀가 가는 끈 같은 레이스를 옆으로 밀어내며 곧장 애널 안을 파고들었다. 아이스크림을 할짝거리듯 안에서 혀끝을 둥글게 말면서 점막을 훑었다. 그러다 나중에는 아예 입구에 입술을 대고 민망한 소리가 나도록 뻑, 뻑, 빨아 댔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안에 빨대라도 꽂고 싶은 사람 같았다. 들어 올려진 다리 사이로 내려다보는, 애널을 빠는 그의 얼굴에는 교양이나 품위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게걸스러웠다. 남아 있는 긴 겨울, 마지막으로 남은 먹이에 대해 보이는 동물의 집착 같았다.
손가락도 부족했던 나는 그보다 더 부드럽고 촉촉한 혀와 입술로 애널을 만지는 애무에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스스로 안에 손가락을 찔러 넣고 북북 긁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의 어깨를 밀어내듯 발끝으로 문질러 댔다. 팔을 뻗어 허우적거리며 그의 목을 끌어당겼다.
“싫, 어요…. 이제 싫어, 제발….”
그가 여전히 애널 위에 입을 맞춘 상태로 눈을 올려 떴다. 푸른 기가 옅어진 눈동자가 광기로 번들거렸다.
물어뜯어 버리고 싶지만 인내한다는 듯, 애널과 성기에 한차례 요란하게 키스를 퍼부은 그는 입가에 번들거리는 타액을 손등으로 훔쳐 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드러난 그의 성기 역시 광택제를 뿌린 것처럼 번들거렸다. 삽입을 미루고 있는 자체가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그의 것은 바짝 독이 올라 선액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녹아내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가 나의 엉덩이 아래로 허벅지를 찔러 넣어 자리를 잡았다. 가슴 근육과 아랫배의 복근이 평소보다 딴딴하게 부풀어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페니스의 기둥을 붙잡은 그는, 성가시다는 듯 애널을 가린 끈을 귀두로 밀어낸 뒤 영역을 표시하듯 입구 주변에 귀두를 넓게 문질렀다.
“흐으, 흡. 흐흑.”
가만히 누워서도 나는 질주를 한 것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귀두의 위치를 잡은 그가 상체를 숙여 두 손으로 내 뺨을 감싸고 이마를 맞대어 왔다.
“서이혀언… 서이혀어언….”
모음을 길게 늘여 나를 부르는 그는 지극히 기뻐 보이기도 하고, 괴로워 보이기도 하는… 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분 좋게 취한 사람 같기도 하고, 힘든 일이 있어 취기에 자신을 내던진 사람 같기도 했다. 평소에 자신을 무너뜨리는 일이 없는 만큼 그의 이런 모습은 낯설었고,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어 오히려 그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느끼게 했다.
뺨을 감싼 그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으며 그의 코끝에 내 코를 비볐다.
“왜 그래요…. 나… 뭐 잘못했어요?”
이마를 맞댄 채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사이사이 잔 입맞춤을 쏟으며 그가 어렵게 말을 이어 나갔다.
“아니. 너무 잘해…. 서이현은 너무 잘하고, 다 잘하지…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너무… 잘했어. 어떡하지. 서이현이 너무 잘해서?”
쪼옥, 마지막엔 좀 더 깊이 입술이 겹쳐졌고, 아래에서는 그의 귀두가 안을 열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것 봐. 서이현이 얼마나 잘하는지.”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흐윽, 흑. 하으.”
조금의 빈틈도 없이, 나를 벌리고 채우며 진입하는 굵고 묵직한 존재감에 그제야 모든 가려움이 해소되며 충만함이 밀려왔다. 그의 손목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등 뒤의 벤치에 뒤통수를 문질렀다.
“그냥 쑥 미끄러져 들어가는 거… 알겠어? 이게 말이 돼?”
그렇게 말하며 그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려는 것처럼 잠시 진입을 멈춘 상태에서 허리에 유연한 흐름을 만들어 아래를 지분거렸다. 그가 허리를 꿀렁거릴 때마다 입구가 위아래로 벌려지고, 기둥에 입구가 비벼지면서, 자릿한 쾌감이 전신을 내달렸다.
툭툭 치고 올라오는 사정감에 손 하나를 끌어 내려 앞을 만졌다.
삽입을 하며 그가 아래쪽 끈을 옆으로 밀어 둔 탓에 전체적으로 속옷이 틀어지면서 음경도 고환도 엉망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단단해진 성기는 비스듬히 기울어진 각도로 귀두를 내밀고 있었다. 더 이상 속옷의 구실을 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만지지 마요. 금방 가 버리지 마. 애널로 같이 가. 응?”
그가 내 손목을 끌어 올렸다. 나를 저지한 뒤에도 그의 시선은 여전히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골반 아래에 걸쳐진 리본의 아슬아슬함과 끈을 옆으로 밀어낸 채 애널 안을 드나들고 있는 삽입 장면의 자극성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한 그는 엷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금방 가겠어. 서이현 씨는, 안 어울리는 게 뭐예요, 대체?”
“이름….”
“…….”
“아까처럼, 그냥… 흐윽, 서, 서이현, 이라고….”
끝까지 전부 들어온 건지, 숨이 턱 막히는 느낌에 할딱거리며 겨우 말을 이었다. 신중한 눈빛으로 나를 보던 그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게 좋으면, 또 그렇게 부를까요?”
“흐읍, 흑.”
허리를 비틀어 애널 주변에 음모를 비비며 묻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상체가 좀 더 가까이 겹쳐지며 뺨에 입을 맞췄다.
“서이혀언, 내 냄새 좋아?”
좀 아까와는 약간 다르게, 어르고 달래는 듯한 부름이었다.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입술로는 뺨에 아기자기한 입맞춤을 쏟고 달콤한 목소리로 귓가에 소곤거리면서, 아래에서는 허리를 깊숙이 밀착한 채 얕게 흔드는 질척거림이 이어졌다.
그의 젖은 귀두가, 음경의 기둥이, 사타구니의 음모가, 애널의 입구와 내벽, 그리고 그 끝의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에 쪽쪽, 얕은 입맞춤을 쏟아 놓는 듯한 삽입이었다. 격렬한 삽입보다도 더 음란하게 느껴졌다.
그의 허리가 애널 안쪽 내벽만이 아니라, 인간다움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교육과 사회화의 조각들까지 흔드는 것 같았다.
“왜 좋은데? 내 냄새 맡으면 어떤데?”
“하으, 흐… 흐으, 흑….”
육체의 감각만이 존재하게 돼 모든 것을 잊게 된다고. 숨이 막혀 죽을 것 같고, 숨통이 트여 살 것 같다고… 모순 가득한 말을 쏟아 내는 내 목소리는 말라붙어 갈라져 있었다.
머릿속의 나사가 전부 헐렁해져서… 섹스밖에는, 그의 성기와 삽입, 시들지 않는 발기와 내장을 터트릴 것 같은 노팅밖에는 생각할 수 없게 된다고… 쉬어 버린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자백했다.
“내 침 빨면 노팅받고 싶어지는구나…. 할까? 오늘 또 노팅할까? 서이현, 노팅 좋아하잖아.”
그가 허리를 흔들 때마다 끈적한 액체가 기체를 만나 마찰을 일으키며 찌걱거리는 소리가 어지러웠다.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아랫입술을 깨물자, 그가 달려들어 낚아채듯 입술을 물었다. 그리고 좀 전과 태도를 바꾸어 애걸하듯 중얼거렸다.
“해 달라는 대로, 다 할게…. 다 하고, 다 줄게…. 그러니까… 노팅하게 해 줘. 응? 너한테 하고 싶어서 죽겠어.”
처음 이후로, 노팅을 원한 건 그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망설이며 주춤하는 그를 조르거나, 노팅을 하도록 무의식중에 부추긴 것은 나였다. 그런데도 그는 하게 해 달라며, 불필요한 부탁을 하고 있었다. 득과 실에 대해 결코 어두운 사람이 아닌데, 오류를 일으킬 정도로 머리에, 성기에 열이 몰린 것이다.
비정상 상태인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럼… 나랑만 했으면, 좋, 겠어요. 키스도, 손가락 넣는 것도… 섹스, 노팅도… 나하고만….”
“…….”
허리의 움직임을 늦춘 그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들은 표정이었다.
섹스 중의 흥분으로 파격적인 음담을 속삭인 적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아무리 열이 몰린 상태에서도 그에게 무언가를 요구해 본 적은 없었다. 그것은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한 지나친 행동 같았고, 침대 위의 열기를 식게 할 것처럼 느껴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어딘가에서 용기가 솟아났다.
나를 찬찬히 살펴보던 그의 허릿짓이 다시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끌어안은 목의 뒤쪽을 만지작거리며 덧붙였다.
“뭐든 다… 해 준다면서, 요….”
그가 내 머리 위의 벤치 끝을 붙잡으며 양쪽으로 벌린 허벅지를 한 번 더 추슬러 삽입의 깊이를 더했다.
“너랑 처음 한 뒤로, 이미 계속… 너밖에 없었어. 알잖아.”
그의 말대로였다. 확신이 부족했을 뿐, 그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가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순간 짐작은 깨끗하게 사실로 확정되었다. 그것이 가져오는 파급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의 귀두에서 다량의 쿠퍼액이 또 한 차례 쏟아진 건지, 내벽을 왈칵 적시는 덩어리가 배 속에 느껴졌다. 그가 미간을 좁히며 넓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얕게 치고 빠지는 것이 아닌, 끝까지 빠져나갔다가 단번에 쿵 짓찧으며 들어오는 삽입이 정신없이 몰아쳤다.
“서이현하고만 키스하고 섹스하면… 노팅, 해도 돼? 서이현한테 계속 해도 돼?”
그가 붙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벤치가 덜컹거렸지만, 둘 모두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전혀 없었다.
“해 줘요, 계속… 머릿속까지 부풀려 줘. 아니야, 안 돼요. 그만해야 해요. 어떡해요. 이렇게 섹스하고 노팅하다가… 머리까지 완전히 바보가 돼 버리면… 그럼 저 어떡해요, 대표님.”
고개를 끄덕였다가 마구 가로저었다가…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는, 지독한 횡설수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눈꺼풀, 눈 밑, 관자놀이, 뺨, 입술, 인중과 콧등… 얼굴 전체에 그의 키스가 퍼부어졌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고 하면… 나, 개새끼인가?”
“…….”
그의 말이 진심이 아닌 걸 안다. 우린 지금 둘 다 정상이 아니었다.
그의 목을 더 당겨 안으며,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진한 키스를 나눈 것처럼 황홀한 꿈을 꾸게 하는 입술에 내 입술을 겹쳤다. 겹쳐졌다 떨어지는 순간의 아쉬움마저도 키스의 연장선이었다.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그가 이마를 가볍게 부딪쳐 오며 낮게 욕설을 뱉었다.
굽힌 무릎 아래로 팔을 꿰고, 그 팔을 등까지 뻗어 그대로 나를 안아 일으켰다.
너무나 가볍게 몸이 들리고, 다음 순간 나는 그에게 안긴 채 공중에 떠 있었다. 자연히 그의 목을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지만, 그는 불안해할 것 없다는 듯 땀에 젖은 얼굴로 미소 지었다.
“앞으로는… 이렇게 하고 다닐까요? 이렇게 하고 출근하고, 미팅도 가고, 밥도 먹고… 그럴까 싶은데.”
실제로 연습이라도 해 보듯, 나를 안은 채 몇 걸음 걷기까지 하는 그의 농담에 이 상황에서도 웃음이 새었다.
“흐, 흐읏.”
그러나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벤치의 발치쯤에 멈춰 선 그가 골반을 움직여, 나를 들어 올리는 사이 빠져나온 성기를 더 밀어 넣은 뒤 허리를 튕기기 시작했다.
벽이나 책상 같은 어떤 사물에도 나의 무게를 나누어 의지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를 안고 흔드는 그의 근력에 감탄할 새도 없이, 새로운 체위에서 주어지는 낯선 강도의 자극에 온몸의 구멍이 크게 벌어지는 듯한 감각을 감당해야 했다.
“하으… 흐… 흐윽….”
그가 골반으로 나를 밀어내는 힘에 나 자신의 무게까지 더해져 반동은 배가 되었고, 그 상태로 다시 그에게 부딪힐 때마다 쿵, 쿵, 깊숙이 박혀 오는 그의 성기는, 내 안에 자신의 윤곽대로 홈을 파낼 것만 같았다. 눕거나 선 채로 할 때와는 안을 때리는 강도가 전혀 달랐다.
땀에 젖은 맨살이 서로를 때리는 마찰음은 평소보다 더 질척였다. 홍콩에서의 첫 삽입 이후로 우리는 젤을 사용한 적이 없었지만, 오늘은 그의 쿠퍼액의 양이 유난히 더 넘치는 듯했다. 튕겨진 내 몸이 그의 사타구니에 부딪히며 삽입이 이루어질 때마다 성기의 둘레를 따라 몸 밖으로 밀려 나가는 액체가 느껴졌다. 그러고도 내부의 점성은 마르지 않았다.
땀 때문에 미끄러지는 나의 몸을 한 번 추슬러 안으며 그가 뺨에 입술을 비벼 왔다.
“지금, 안이… 어떤지 알아요?”
나를 튕겨 내는 하체의 격렬함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흐으흐, 흐….”
문장의 형태로 말을 할 수가 없어, 바싹 마른 목으로 새된 신음을 흘리며 그저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마주 바라본 눈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랑에 빠진 남자의 황홀을 담고 있었다. 그것이 육체적 황홀이든, 정신적 황홀이든, 이 순간 말 그대로 그가 나에게 홀딱 빠진 것 같다는 감상을 갖게 하는 눈이었다.
“끈적하고 따뜻하게 감싸져 빈틈없이 밀착된 기분이 너무 좋아서… 발현했던 열두 살 이후 처음으로, 알파로 태어나길 잘했다 싶어요. 지금.”
그는 분명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지만, 섹스 중의 열에 들떠 늘어놓는 립서비스로는 들리지 않았다. 그런 식의 립서비스를 떠들 사람도 아니었지만.
베타인 나와의 섹스에서 그가 남성으로서의 쾌감은 느낄 수 있을지 몰라도, 알파로서의 만족을 얻기는 어려울 것 같았지만… 그가 페로몬을 통한 섹스를 즐기지 않는 사람임을 알기에, 그 말은 내게 더없는 고백처럼 들렸다.
“흐으, 흑. 흡!”
잠시 잦아드는가 싶었던 허릿짓에 속도감이 더해졌다. 그는 허리의 위치를 살짝 낮춰 아래에서 위로 나를 쳐올리며 반동을 가중시켰고, 나는 가슴과 가슴이 맞붙도록 그의 목을 꽉 껴안았다. 무릎을 굽히고 다리를 벌린 채 그에게 안겨 엉덩이만 들썩거리는 체위에 품위 따위는 없었지만, 그가 나에게 가르친 섹스에 품위는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었다.
바위처럼 단단하게 버티고 서서 빠르게 나를 튕겨 내는 그의 삽입은 거의 울부짖음 같았다. 자기 안의 뭔가를 나에게 퍼붓듯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것처럼, 그는 쉼 없이 빠르고 격렬했다.
“나는 그런데, 너는 아니겠지. 너에게 이건….”
그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기분이 너무 좋아서, 처음으로 알파로 태어나길 잘했다 싶은’ 쾌감에 젖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꽉 부둥켜안았던 팔의 힘을 느슨하게 풀어 그의 얼굴을 보았다. 나를 보는 그의 눈은 쾌감과 고통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손끝으로 그의 얼굴을 더듬으며, 그가 요구하지 않았음에도 나의 타액을 그의 입술 안으로 흘려 보냈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저도, 좋아요…. 모르겠어요?”
보통의 섹스가 어떤 것인지 모른다. 하다못해 나에게는 그와 비교할 다른 개인적 체험조차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와의 섹스에서 수치로 움츠러드는 것이 아닌 만족과 해방감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미안해.”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며 그는 미안하다고,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의 입술과 혀를 세차게 빨아들였다. 어떤 것이 누구의 것인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얽혀 타액을 나누었다. 농후하고 섹슈얼한 그의 향기에, 코를 비롯한 전신의 모든 구멍이 다 벌렁거리는 기분이었다.
그가 나를 흔드는 힘이 더욱 과격해지고, 자신의 힘을 버틸 수 있는 지지대 하나 없는 그는 방향 감각을 잃은 로봇청소기처럼 나를 들쳐 안은 채 방 안을 헤집고 다녔다.
쿵. 내 등이 벽에 닿고 나서야 그는 전진을 멈추었다. 나를 벽 안에 새겨 넣을 것처럼 전신으로 밀어붙이며 깊이 키스했고, 깊이 삽입했다. 마르지 않는 그의 쿠퍼액이 흥건하게 새어 나와 교접 부위 아래로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으으, 음. 으음….”
나는 그의 등을 긁으며 공중에 뜬 종아리를 버둥거렸다. 점막에 멍을 만들 것처럼 때리고 찧어 대며, 그는 노팅하고 있었다. 노팅의 두근거리는 힘찬 맥박을 느끼자마자 나는 사지를 버둥거리며 검은 레이스에 흰 정액을 쏟아 놓았다.
그는 나를 달래듯 위아래로 흔들었고, 나는 제발 놓아 달라고 쉰 목소리로 사정했다. 마음껏 사지를 떨고 싶고, 미친 것처럼 몸을 마구 뒤치고 싶은 욕구를 억제당하는 부자유마저 결국은 쾌감으로 이어졌다.
성기를 죄는 레이스가 갑갑해 스스로 리본의 한쪽 끝을 당겼다. 한쪽만 풀어진 속옷은 그와 완전히 밀착해 있는 하체 탓에 바닥으로 떨어지지 못하고 그와 나의 사타구니 사이에서 비벼지며 감각을 더욱 예민하게 했다.
그가 노팅을 한 상태에서 나는 두 번을 사정했을 정도로, 지금까지 중에 가장 긴 노팅이었다. 성기가 축소되어 내 안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되기까지 그는 도중에 나를 다시 벤치에 눕혀야 했다.
축 늘어진 나를 눕혀 놓고 열심히 관자놀이를 핥는 그의 입술과 혀의 뜨거움에, 내가 전신을 떨며 쾌감에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괜찮아, 나 여기 있잖아. 울지 마…. 울지 마라…. 내가 잘할게.”
입술 위에 계속해서 쏟아지는 잔 입맞춤도, 애절한 그의 속삭임도, 물속에서 물 밖의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이지러지고 아득했다.
처음 노팅했을 때도 그런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다. 여기 있으니까 괜찮다고.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 몇 번이나 목을 졸라 오는 노팅의 쾌감에 잘못 들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잘할게’라는 말은 그때는 없었던 내용이었다.
지금도 너무, 내가 해 준 게 없어 미안할 만큼 잘해 주는데, 뭘 얼마나 더 잘해 주겠다는 것일까.
막연한 생각 뒤에 들려온 것은 독실한 신앙처럼 되뇌는 나의 이름이었다.
서이현, 서이현….
그는 내 손을 붙잡고 몇 번이나 손등에 키스하며 나를 불렀다. 미안하다는 사과보다는 이편이 훨씬 듣기 좋았다.
그렇게 열심히 달래면서도 내 안에서 나가려고 하지는 않는 그를 향해, 괜찮다고, 온 힘을 쥐어짜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나를 아프게 하기라도 한 것처럼 안타까운 얼굴로 보고 있었지만, 나는 아픈 것이 아니라, 쾌감의 정점에 있었다. 그가 사과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 염려 ■
그는 서재에 있었다.
정원으로 이어진 테라스 창이 활짝 열려 있어 한강에서부터 강바람이 불어 들어왔지만, 8월을 코앞에 둔 한여름이었다. 바람과 함께 햇빛도 강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방을 채운 공기는 후텁지근했다.
“점심 맛있는 거 사 준다더니, 부른 데가 여기야? 기껏해야 배달음식이겠네.”
그녀는 열려 있는 서재의 문틀에 기대서며 웃음기 섞인 얼굴로 장난스레 불평했다. 책상 앞에 앉아 멍하니 정원을 내다보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리며 멋쩍게 웃었다.
“여기 와 있으면 점심 혼자 먹어야 하잖아. 같이 먹어 달라고 불렀지.”
남자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실내였지만, 그녀가 서 있는 방의 입구까지도 빛이 들이치고 있어 선글라스가 어색하지 않았다.
“샌드위치인데, 괜찮아?”
그가 가리킨 책상 앞 소파 테이블에는 로고가 찍힌 비닐 봉투와 종이 캐리어에 담긴 아이스커피가 올려져 있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샌드위치 전문점의 로고였다.
배달앱을 이용한 건지 기사가 대신 수고해 줬는지는 몰라도, 그녀가 도착하기 직전에 사 온 것인지, 방 안의 온도에도 불구하고 커피의 얼음이 전혀 녹지 않은 상태였다.
“여기 샌드위치면 얘기가 다르지.”
그녀는 반가워하며 소파에 자리를 잡고 시원한 커피부터 한 모금 마셨다.
최근 들어 그는 가끔 갤러리가 아닌 이곳으로 출근을 하곤 했다. 지금까지는 없었던 일이지만, 그가 사무실에 직접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곤란한 시기는 아니었기에 그녀는 별다른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유니와 주한은 그가 없어야 새로 뽑은 직원들이 덜 불편해한다며 오히려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먼저 먹기 시작하라며 그녀에게 샌드위치를 권한 뒤 의자에 앉아 바퀴를 이리저리 굴리며 장난을 치는 그는 별로 배가 고파 보이지 않았다.
“지난번에 전달했던 전시회 팸플릿 중에서 르네상스전에 관심을 보이던데, 아무래도 현대미술에는 큰 관심이 없는 것 같아. 멀리까지 가는 건 어렵겠지만, 비행시간 네 시간 이내에 있는 도시들에서 열리는 고전 작품 전시 소식들까지 알아볼 수 있도록 사무실에 얘기 좀 해 줘. 그 정도 조사는 신입들도 할 수 있겠지.”
랍스터 살이 푸짐하게 들어간 샌드위치를 막 한 입 베어 먹은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해외에서 열리는 전시더라도 보러 가게 해 주겠다는 뜻이야?”
“그래야지. 설치미술이나 체험형 미술에는 관심을 안 보여. 그렇다고 원하는 전시가 한국에서 열리기만 기다릴 수는 없잖아.”
정작 질문을 받은 그는 이런 조치가 당연하고, 그 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는 태도였다. 한참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자, 그제야 남자는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 이쪽을 쳐다봤다.
“……왜.”
“아니야, 아무것도.”
그녀는 고개를 저었고, 그는 선글라스 너머에서 미간을 찌푸렸다.
“왜, 뭔데.”
“그냥. 요즘 다른 작가들한테는 별로 신경을 안 쓰는구나 싶어서.”
“한 실장이 잘해 주고 있잖아. 그리고 난 원래 작가들보다는 VIP 고객 위주 담당 아닌가.”
“뭐… 그렇긴 하지.”
그런데도 왜 유독 한 명의 작가에게만 직접 나서서 신경을 쓰는가에 대한 질문이었지만, 그는 어떤 이유에서든 거기에 대해 설명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본인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의 심중을 캐내려고 해 봤자 헛수고라는 것을 그녀는 몇 년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아는 한 그는, 흥미가 없는 상대에 대해서는 투명인간을 대하듯 철저히 무시했고(그것도 별 힘을 들이지 않고), 싫은 상대에 대해서는 잔인할 정도로 적대감을 감추지 않는 사람이었다.
고객이나 작가에 대해서는 예외였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들에게까지 습성이 확장되기도 했다. 비즈니스를 위해서라면 타협을 하기도 하지만, 비즈니스를 위해 마냥 속없이 굴기만 하는 것도 그의 방식은 아니었다. 나름의 선이 있었다.
그런 그가 처음부터 무관심을 가장하며 흥미를 드러냈던 것이 이현이었기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든 혹은 더 개인적인 감정으로서든, 그가 이현에게 조금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녀에게 새삼스러운 얘기도 아니었다.
“서이현 씨 말이야.”
“…….”
두 번째로 샌드위치를 베어 물기가 무섭게 다시 또 이현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예전에 한 실장이 가르쳤을 때도 재능이 보였었나?”
아무래도 오늘 그가 자신을 이곳으로 부른 진짜 목적은 점심을 혼자 먹기 싫다는 귀여운 이유 때문이 아닌 듯했다. 그녀는 커피를 마셔 입 안의 샌드위치를 빠르게 씹어 삼킨 뒤 대답했다.
“아주 특별했지. 평소엔 온순하고 조용하고, 나이에 비해 떼쓰는 일도 없는 애가 그림에 대해서는 욕심도 집념도 넘쳤고, 그 욕심과 집념을 즐길 줄도 알았으니까. 그리고 엄청난 연습 벌레였고. 자기는 그걸 연습이라기보다는 놀이처럼 생각했지만.”
즐거운 듯 과거를 회상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난 남자는 어지러운 책상 한쪽에 반듯하게 놓여 있던 노트를 몇 권 가지고 일어나 느릿느릿 그녀의 맞은편으로 걸어왔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 그에게서 향수 냄새가 풍겼다.
그의 아버지 쪽 친가와 외가 모두 전통적으로 부유한 집안이었고, 그가 태어날 무렵 그의 어머니는 이미 세계적인 화가로 발돋움하고 있던 시기였기에, 그에게는 상류층 특유의 고상한 스타일리시함이 자연스럽게 배어 있었고 취향 또한 개성적이면서도 고급스러웠지만, 외출 준비의 마지막 단계에서 향수를 뿌리는 타입은 아니었다. 페로몬 방출을 극도로 지양하는 그였기에 향기로 자신을 치장하는 것에도 그다지 흥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 자신이 어느 정도까지 자각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확실히 요즘의 그는 ‘안 하던 짓’들을 하고 있었다.
“내 집으로 옮긴 뒤에 서이현 씨가 그린 ‘연습용’ 스케치야. 한번 봐 줘.”
여기서부터는 그녀도 모르는 이현의 이야기였다. 스물두 살의 이현이 그린 그림에는 그녀 역시 관심이 있었다.
샌드위치를 내려놓고 티슈로 손을 닦아 낸 그녀는 모처럼 심장을 뛰게 하는 긴장과 기대를 지그시 누르며 드로잉노트를 집어 들었다.
한 권이 서른 장 이상으로 채워진 노트가 네다섯 권이었고, 페이지마다 정성스러운 드로잉이 빼곡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타고난 재능이 부려 놓은 쉬운 마법이 아니었다. 하루하루를 그림에게 거짓말하지 않고, 손을 움직이고 종이를 할애한 충실한 시간의 결과물들이었다.
“내가 이현이하고 헤어졌을 땐 막 열두 살이 된 무렵이었고, 그때도 또래에 비해 무서운 테크닉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어….”
<소외>로 수상을 한 직후에 바로 붓을 놓았다 하더라도, 이현은 그녀와 헤어진 후에도 5년 가까이 더 그림을 그렸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녀가 알고 있는 이현의 성실함으로 5년을 더 그렸다면, 지금 보고 있는 스케치의 수준에 도달한 것도 믿지 못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서이현 씨가 그리지 않게 된 거.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그림에서 멀어진, 그런 게 아닌 거지?”
노트를 천천히 한 장 한 장 넘겨 보던 그녀가 시선을 들어 맞은편의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뜻이야.”
자기 몫의 샌드위치나 커피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남자는 양해를 구하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허벅지 위에 팔꿈치를 괴고 첫 모금을 깊숙이 빨아들였다.
“이전에 그렸다는 그림, 난 <소외>밖에 못 봤지만, 거기엔 굉장한 에너지가 있었어. 평소 어떤 성격을 가졌든…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있고… 아무도 자기를 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다는 완벽한 비밀을 보장받은 것처럼 자신을 드러내는 데에 망설임이 없는 대범함이 있었다고. 그런 그림은 어쩌다 운 좋게 그릴 수 있는 게 아니지. 테크닉처럼 그저 연습하기만 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야. 수키킴도 <소외>에서 그걸 발견했기 때문에 그를 특별상에 적극적으로 추천했던 거고.”
허벅지에 팔을 괸 채 담배를 쥔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면서, 그가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는 노트를 가리켰다.
“그런데 이 스케치들.”
“…….”
“놀라운 경지의 테크닉은 물론이고 뚜렷한 개성까지 갖추고 있어서, 도저히 몇 년을 쉬었던 사람의 솜씨라고 볼 수 없을 정도지만… 어떤 것에도 자신의 시각을 전혀 담고 있지 않아.”
“…….”
그 말에는 그녀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스케치는 사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정밀했고, 또 어떤 크로키는 예측할 수 없이 신선한 표현력으로 가득했지만, 이현의 그림에는 과거에 그녀를 전율하게 했던, 그리는 사람 본인의 목소리가 배제되어 있었다.
과거의 이현을 알고 있는 그녀에게 이 스케치들은 말하기를 거부하는 아이와도 같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서이현 씨에게 이건 그림이 아니지. 자기 얘기를 전혀 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림과 작가에 대한 그의 남다른 통찰력은 홍콩에서 함께 일했을 때부터 인정한 부분이지만, 그의 말대로 지금까지 단 한 작품밖에는 접해 보지 못한 작가를 거기까지 파악할 수 있다는 데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가 서이현이기 때문에 발휘되는 제한적 능력인지 궁금했지만, 확인할 길이 없었다.
잠시 혼란을 느끼는 사이, 선글라스를 낀 그의 얼굴이 그녀를 향했다.
“서이현 씨, 왜 그리지 않게 된 거야?”
그는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지만 가까이에서 바라보니 희미하게 눈의 윤곽이 비쳤다.
“나한테… 묻는 거야?”
그녀의 되물음에 그는 회피하듯 얼굴을 돌리며 크리스털 재떨이 위에 담배를 털었다.
“류 대표, 그런 거 남을 통해 들으려고 하는 사람 아니잖아. 아니, 본인에게도 묻지 않지. 내가 이혼한 거 알게 되면서 결혼했던 것도 처음 알았었지, 아마?”
“같이 일하는 데 결혼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불필요한 정보니까.”
연타로 내보이고 있는 ‘안 하던 짓’에 대한 변명으로는 너무나 빈약한 근거를 대며, 그는 담배를 깊이 빨았다.
“그림은 이현이가 그리는 건데… 이현이가 과거에 그림을 왜 그만뒀었는지, 거기에 대한 정보는 류 대표한테 필요하고? 그것도 본인이 아닌 나에게 물을 만큼?”
“…….”
그가 스스로의 변화와 변화의 이유를 제대로 직시하고 있는지, 그녀에게는 그것이 중요했다.
그가 침묵하며 담배를 흡입하는 사이, 플라스틱 용기 안에서 커피의 얼음이 녹아내려 서로 부딪히며 짤랑거리는 소리를 만들어 냈다.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모르는 빛은 성가셔.”
한참 만에 입을 연 그의 나른한 목소리는 혼잣말 같았다.
“자신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고, 그래서 그 힘을 조절할 줄도 몰라서 사방을 다 부수고 다니는 초능력자나 마찬가지지. 주변에서는 폭풍이 일어나도 정작 자신은 눈앞의 현상이 자기에게서 비롯된 결과라는 걸 전혀 몰라. 작가로서도, 한 개인으로서도, 그런 사람은 상대하기 어려워. 한 실장도 알 거야.”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짧고 깊게 담배를 빨아들이고 약간은 초조해 보이는 동작으로 재를 털었다.
“서이현 씨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재능을 가졌는지 전혀 모르고 있어. 아니, 안다고 해도 관심도 없겠지. 그에게는 자신의 상대적 위치가 중요한 게 아니니까. 자신의 언어였고 정체성이었던 그림을 되찾겠다고 어렵게 마음먹은 거고, 그렇게 해서 다시 한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고자 할 뿐인 거지. 누구에게도 우는소리 하지 않고,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스스로 일어나려 하고, 또 그렇게 해야만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에게 은혜를 갚는 길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자신이 어디까지 자각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지금 그가 거침없이 쏟아 놓는 말들은, 그가 이현에 대해 얼마나 오랫동안 진지하게 관찰하고 탐구했는지에 대한 증거였다.
마치 라우 위쿤 그 자신이, 스스로의 파급력을 모르는 어린 빛인 서이현이 휘두르는 폭풍에 휘둘리느라 곤란을 겪고 있다는… 그런 고백으로 들렸다.
“그가 그림 안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라면… 과거든 뭐든 알아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한 실장이 얘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면 물론… 억지로 물을 수는 없겠지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짧아진 담배를 비벼 끄는 그의 얼굴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꼭 알고 싶다는 미련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만 말해 줄 수 있을까.”
“…….”
담배를 잃은 손을 단단히 깍지 낀 그의 얼굴이 그녀를 향했다. 선글라스에 절반이 가려져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 어린 공포에 가까운 근심을 읽어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며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했다.
“학대… 같은 걸 받은 건가? 아니면, 몹쓸… 짓을 겪었다던가… 그런 쪽인가?”
그런 비극을 상상하며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그의 얼굴은 질문을 하고 있다기보다는, 자신이 헛다리를 짚은 것이라고 말해 주기를 애원하는 쪽에 더 가까웠다.
타인의 과거 앞에서 주저하고 두려워하는 낯선 그의 모습이, 그녀를 다소 불안하게 했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가까운 지인의 새로운 모습은 신선함보다는 당혹감을 줄 때가 더 많았다.
어쩌면 이현에 대한 그의 관심이 자신의 예상보다 더 진하고 무거운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혀로 아랫입술을 축였다. 그것을 반가워해야 할지, 경계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타고난 훌륭한 조건의 외모와 지적 능력, 거기에 배경까지 더해, 그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절박해질 필요가 없는 삶을 살아왔었다.
처음 서울에 와서 고작 60평짜리 갤러리를 오픈했을 때도 자신의 재능과 노력이 가져올 결과를 강하게 믿고 있었고, 그런 작은 갤러리의 오너임에도 늘 여유 있는 자신감으로 고객들을 대했다. 한 점이라도 더 판매하기 위해 굽실거리거나 당장의 이익을 위해 애가 달아 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림이라는 고가품의 소비자들 중에는 깍듯한 대우를 받으며 허영심을 채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높은 안목을 가진 매력적인 사람과 어울리고 있다는 데에서 우월감을 충족하는 부류도 있기 마련이었다. 실제로 팬텀이 여기까지 성장하는 동안, 그의 매력에 이끌려 충실한 고객이 된 사람들의 힘이 컸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 라우 위쿤이 지금, 스물두 살짜리 소속 작가에게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과거의 사건에 대한 염려로 초조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대답을 들을 수만 있다면 무릎이라도 꿇을 듯한 그의 분위기가 안타까워,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을까, 잠시 충동이 일기도 했지만, 하지만 이현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다. 그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혹은 하지 못했다면, 거기에는 이현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이현이에게 직접 듣는 게 좋겠어. 그래야 나중에 그 애하고 뒤탈도 없을 거야.”
“그 정도도 대답해 주지 못한다는 거야? 서이현 씨가 얼마나 입이 무거운지 한 실장도 알잖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의 입으로 직접 들으려면 얼마나 더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데… 그동안 이 무게를 지고 있으라고? 한 실장, 그러지 마라. 그 정도는 대답해 줄 수 있잖아.”
허벅지에 팔꿈치를 괸 채 깍지 낀 두 손을 입술 앞에 모은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류 대표가 생각하는 몹쓸 짓… 그런 쪽은 아니야. 그 이상은 정말 이현이에게 들어.”
더 이상은 절대 입을 열지 않겠다는 단호함을 담아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그녀는, 이미 식욕이 사라져 버린 상태였지만 샌드위치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는 여전히 무거운 얼굴이었지만, 좀 전보다는 평정을 찾은 듯했다.
작가와 작품을 대하는 그의 대외적 태도와 내면적 태도의 온도 차를 알고 있었고, 실제의 그는 겉으로 그 자신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미술을, 그 안에 자신의 진정성을 담고자 하는 진지한 작가성을 지지하고 사랑한다는 것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것을 알아봤기 때문에, 다들 은연중에 함께 일하기 까다로운 상대로 여겼던 그와 홍콩에서부터 마음이 맞았던 것이고, 서울에서 함께 갤러리를 열자는 제안도 흔쾌히 받아들였었다.
이현에 대한 그의 관심도 작품과 작가를 대하는 그의 열정의 연장선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사생활에 대해 서로 상세히 얘기해 오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알기로 그는, 지난 약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제대로 연인을 만든 적이 없었다.
가볍게 데이트하는 상대는 몇 번인가 있었지만, 좀처럼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그가 원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관계 발전에 실패를 한 것인지, 거기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런 이야기가 화제로 오를 때마다 그는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지만, 그뿐이었다. 어떤 상대에게도 그는 절실함을 보인 적이 없었다. 만족스러운 삶을 위해서는 서로 깊이 존중하고 사랑하는 연인이 필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그의 연애 방식이 미성숙하다거나 그가 가벼운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부족한 부분, 감추고 싶은 부분을 상대가 보지 못하도록 거리를 조절하는 데에 그는 상당히 능숙했고, 연애에서도 그런 태도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와 그의 상대들은 다툼은커녕 서로 큰소리를 내 본 적조차 없을 것이다. 정석대로의 데이트를 하고, 만남의 횟수에 적합한 밀도의 섹스를 나누고, 서로의 자아에 상처를 내지 않는 매너 있는 이별로 끝이 났을 것이다.
매너는 있지만 희생은 없고, 상대를 위해 결코 자신을 바꾸지 않으며, 유치한 감정 소모도 없는… 어떤 자국도 남기지 않는 만남과 뒷걸음질. 그것을 성숙한 연애라고 한다면, 지금까지 그의 연애는 분명 성숙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개인적 견해를 얘기해 보자면, 그것은 오히려 미성숙함이었다. 다툼이 없는 상태를 곧 평화라고 볼 수는 없었다. 아무런 위기가 없는 상황에서는 성숙을 증명할 수조차 없다.
그 자신이 연인의 부재에 결핍을 느끼든 그렇지 않든, 자기 자신이 아닌 또 다른 인간, 타인의 내부로 가장 깊숙하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사랑이 유일했다. 나를 알고자 하는 타인의 존재를 온몸으로 받아 내 볼 수 있는 것 역시 사랑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사는 동안 자기 자신의 밑바닥밖에는 볼 수 없다면, 그보다 지독한 외로움은 없을 거라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서로의 밑바닥을 드러낸 후에야 진정한 성숙함을 증명할 수 있다고. 좋은 일만 있어서 늘 웃을 수 있는 것을 강함이라 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녀 자신 역시 그 단계를 성숙하게 넘기지 못했지만, 규칙을 파괴하게 하고, 새로운 자신을 끌어내고, 멋지지 않은 자신을 마주하게 하며, 각양각색의 감정을 맛보게 해 주는 상대를 만나게 되는 것이 삶의 행운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녀의 눈에 지금의 그는 이전의 규칙을 파괴하는 새로운 자신과 마주하고 있었다.
여전히 샌드위치에는 손을 대지 않고 담배를 피우며 커피만 마시는 그를 힐끔거리는 사이, 뒤쪽 책상에서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보통 세 대의 핸드폰을 사용했고, 진동 상태가 아닐 때는 각각 다른 벨 소리로 핸드폰을 구별했다. 담배를 한 손에 쥐고 몸을 일으켜 책상 앞으로 걸어간 그는 핸드폰을 코앞에 들이대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그리고 담배를 빨아들인 뒤 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아… 젱 슈이얀, 며칠 뜸하길래 드디어 수긍한 건가 했더니.”
버튼을 눌러 벨 소리를 무음으로 전환한 그는 소파로 돌아와 등받이에 뒷머리를 기댔다.
“슈슈 연락은 계속 그렇게 피하기만 할 거야?”
“전화 받아 봤자 여지를 주는 꼴이 될 수 있어. 팬텀 입장은 분명하게 전했고, 전화로 우는소리 해도 변하는 건 없다고 못 박았는데… 얘 진짜 한 실장 의존도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선글라스를 벗고 눈을 감은 채 눈두덩이 위를 꾹꾹 누르던 그가 다시 선글라스를 쓰고 그녀를 쳐다봤다.
처음에 방침을 정해 준 것은 그였지만, 실질적으로 슈슈를 케어해 온 것은 그녀 자신이었기에, 현 상태를 그의 탓으로만 돌릴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 납득을 못 하면 설득을 해야지. 내 얘기는 소용이 없….”
“아, 미안. 잠깐 전화 좀.”
책상 위에 있던 그의 전화가 다른 벨 소리로 울렸고, 그가 튕겨 나가듯 빠른 동작으로 몸을 일으켜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갔다.
전화의 발신인을 확인하고 통화를 연결하는 그의 입술에는 희미하게나마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 나예요.”
상대가 누구인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와 함께한 세월이 짧지 않았지만, 요즘처럼 그가 알기 쉬운 사람으로 느껴진 적이 없었다. 알기 쉬운 라우 위쿤은 그녀에게 낯선 존재였다.
“아니, 통화할 수 있어요. 얘기해요.”
전화 반대쪽의 이야기를 한 마디라도 놓칠까 겁나는 사람처럼 핸드폰을 귀에 꼭 붙인 그는 정원을 향해 걸어 나가면서 그녀에게 편하게 샌드위치를 먹으라는 제스처를 해 보였다.
“아, 벌써 그런 시간인가? 점심은? 점심은 먹고 나갔어요?”
강한 햇빛 때문에 시곗바늘이 잘 보이지 않는지, 그는 왼쪽 손목을 선글라스 코앞까지 들어 올려 시간을 확인했다.
이현을 성가신 빛에 비유했던 사람치고는, 그 빛 속에서 기분 좋게 일광욕이라도 즐기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샌드위치 먹는 중인데. …아, 그게 아니라 오늘 좀 바빠서. …저녁엔 맛있는 거 먹죠. …이따… 내가 시간 맞춰서 그쪽으로….”
점점 먼 곳으로 걸어가고 있는 탓에 띄엄띄엄 들리는 통화 내용과 간간이 섞이는 그의 웃음소리를 흘려들으며 그녀는 샌드위치를 내려놓고 대신 커피를 집어 들었다.
그녀 자신 역시 진지한 연애를 해 본 지 꽤 됐지만, 지금 저 목소리가 사랑에 빠진 게 아니라면 라우 위쿤은 갤러리를 운영할 게 아니라 배우로 전향해야만 했다.
“아니요, 제시간에 퇴근할 겁니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그래요, 이따 봐요. …항상 조심하고. …그럼.”
통화를 마무리하는 인사를 하고 난 뒤에도 잠시 그대로 서서 전화를 귀에 대고 있던 그가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어깨를 치키며 웃었다.
“먼저 끊어요.”
웃음기가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 대상이 누가 됐건, 누가 먼저 전화를 끊을 것인가를 두고 라우 위쿤이 저런 대화를 하고 있다는 자체에 그녀는 충격을 받았다.
그도, 이현도, 그녀에게는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그가 궤도를 벗어나게 만들고, 그의 내면으로 침범해 들어가 그 안에 든 것들의 위치를 과감하게 바꿔 버릴 수 있는 상대가 나타나기를 바라기도 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연애를 통해 균형 잡힌 관계를 이어 나갈 수 있는가에 대해 묻는다면… 거기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자리로 돌아온 그는 통화를 하고 있었을 때와는 다른 사람처럼 표정이 어두웠다. ‘누군데 그렇게 전화하는 내내 입이 귀에 걸렸어? 요즘 연애하는 사람이야?’ 모르는 척 그렇게 물어보려던 그녀는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볍게 농담을 걸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단지, 이미 두 사람 사이에 뭔가가 시작되기는 했을 거라는 막연하고도 어딘가 불안한 추측을 해 볼 뿐이었다.
그녀는 한 모금 마신 커피를 내려놓으며, 그새 다시 또 흡연 욕구를 느끼는지 담뱃갑을 쥐고 만지작거리는 그를 힐끔 건너보았다.
“어쨌든 슈슈하고는 제대로 얘기해 봐. 아무리 슈슈가 나에게 의지하고 있어도 대표는 쿤이고… 슈슈는 간판 작가야. 다른 일보다… 우선해 줬으면 좋겠어. 이번 기회에 정말 독하게 마음먹은 거라면 더더욱 도망치지 말고 제대로 해결을 봐.”
아직 수익을 내지 못하는 갓 계약한 작가에게 대표인 그가 직접 나서서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있는 상황에 대해 에둘러 경고하고자 했지만, 새로운 담배에 불을 붙이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는 그는 그녀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이 서재에 들어온 뒤로 벌써 세 개비째였다. 평소보다 담배가 늘었다. 그가 보이는 모든 변화들이 그녀를 안심할 수 없게 하고 있었다. 변화를 반기며, 그것에 안정적으로 적응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래. 한 실장 다른 신경 쓸 일도 많을 텐데, 내가 너무 미뤄 두기만 했네. 제대로 얘기해서 마무리 지어 둘 테니까 슈슈 건은 일주일 정도만 시간을 더 줘.”
그의 목소리는 지쳐 보였다. 좀 전의 통화에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 버린 사람처럼. 반대로 얘기하자면, 이런 불안정한 상태로 좀 전엔 잘도 그렇게 별일 없는 사람처럼, 모든 게 좋고 순조로운 사람처럼 통화를 했구나 싶었다.
두 사람 모두 그 후로 샌드위치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하반기 합동 전시회에 참가 의사를 보인 작가들의 라인업과 작품 수를 협의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두 개비의 담배를 더 피웠다.
갤러리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면서 그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는 두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언제든 ‘매너 있게’ 간단히 끝낼 수 있는 관계를 원해 온 그가 스물두 살의 순진한 이현을 연애 대상으로 택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현은 피상적인 관계를 원할 아이가 아니었고, 그녀가 아는 한 라우 위쿤은 굳이 그런 사람을 상대로 골라 자신의 ‘성숙한 연애관’을 관철시키려 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실장님은 어떠세요? 인우 쌤이 이현이한테 진심이고, 이현이도 인우 쌤 좋다면, 실장님은 반대 안 해요?」
그렇게 물었던 유니에게, 남이 나서서 이러쿵저러쿵할 일이 아니라는 듯 대답했었고, 지금도 그것이 정론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염려스러운 마음까지 어쩔 수는 없었다.
라우 위쿤과 서이현.
그들을 연애라는 관계로 정의하려 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달콤한 솜사탕 같은 부드러움은 아니었다.
자신의 힘을 조절할 줄 몰라 파급력을 고려하지 못하고 주변에 폭풍을 일으킨다는 말이, 단지 작가로서의 이현에 대한 얘기가 아닌, 서이현 개인에게 끌리는 자신의 상황을 빗댄 얘기였다면?
“흠….”
누구도 함락할 수 없는 성채처럼 견고해 보이는 빌라의 주차장을 빠져나오면서 그녀는 신음 같은 한숨을 흘렸다. 라우 위쿤과 서이현이 주인공인 이야기의 결말을, 그녀로서는, 지금으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