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변화 (16/31)

   4. 변화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부부가 중학교 1, 2학년쯤 된 딸을 뒤에 세워 두고 카운터에서 체크인 절차를 밟고 있었다.

아마도 가족끼리의 해외여행 경험이 많지 않은지, 체크인 수화물 외에도 각자 배낭과 함께 크로스백을 하나씩 멘 부부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드디어 체크인이 무사히 끝나고, 기내에 부친 수화물에 이상이 없는지 점검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옆쪽 벤치에서 대기하라는 안내를 받은 부부는 수화물을 싣고 있었던 빈 카트를 끌고 이쪽으로 이동해 왔다.

그리고 내가 앉은 벤치의 맞은편 자리에 서로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카메라 배터리 캐리어 안에 넣지 않았지?”

“응, 배낭에 있어.”

대충 편하게 묶은 탓에 관자놀이 옆으로 흘러내린 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겨 주며 아버지가 물었고, 딸은 약간 귀찮아하는 말투로 대답했다.

“얘 오늘 잠을 잘 못 자서 걱정이야. 비행기 안에서도 불편할 텐데.”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우리 프라하 도착하면 몇 시랬지? 나 도착하자마자 카렐교에 가고 싶은데.”

피곤하기는 해도 여행이 기대가 되는지 스케줄을 묻는 딸을 보며, 부부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고 서로 미소로 마주 보았다.

팬텀에서 홍콩으로 다 함께 출장을 떠났을 때는 주변이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설렘도 있었지만, 긴장이 더 컸으니까. 지금 눈앞의 부부처럼. 하지만 여행객이 아닌 입장에서 공항의 벤치에 앉아 있으니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시야에 잡혔다.

모래와 형은 떠났다.

출국장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는 그런 뻔한 연출은 하지 말자며, 두 사람은 체크인 카운터 앞에서 헤어지자고 했다. 본인들은 출국장 쪽으로, 나는 우리가 들어왔던 게이트 쪽으로. 누구 하나가 남아서 뒷모습을 지켜보지 말고 각자 갈 길을 가자고.

하지만 손을 흔들며 돌아선 뒤, 나는 이 벤치에 돌아와 앉았다. 그냥, 너무 빨리 이곳을 벗어나면 안 될 것 같았다.

여름 방학과 휴가를 맞아 여행을 떠나는 가족들을 공항 어디에서든 쉽게 볼 수 있었다. 해외여행객이 한 해에 3천만 명에 달하는 시대였고, 해외여행이 더 이상 부유층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된 지 이미 오래였다.

할아버지 댁 마을에서도 1년에 몇 번씩 수협, 농협, 부녀회 등 여러 단체에서 주관하는 저렴한 패키지 해외여행의 기회가 있었고, 중학생 때도 개학 후에는 방학 동안 세계 각국을 다녀온 친구들의 여행기를 자주 들었었다.

우리 셋은, 어머니와 아버지와 나는, 그렇게 흔해졌다는 해외여행을 다녀온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과거에 많이 다녀 보신 것 같았지만, 세 가족이 함께 다녀올 기회는 없었다.

그것으로 우리 가족이 불행하다고 생각했다거나, 친구들의 여행담이 부러워 기가 죽었다거나, 그런 적은 없다. 부모님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을 우선으로 경제 활동을 하셨기 때문에 살림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브랜드 신발이나 옷을 입지 못한다는 이유로 불행하다거나 불우하다고 느낀 적은 전혀 없었다.

나는 어머니의 수상 발표 직후의 날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제법 큰 액수의 상금을 우리 가족을 위해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지, 매일 저녁 식탁에서 즐거운 얼굴로 의논하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10년 이상 타 왔던 중고차를 바꾸는 데에 보탤지, 어머니의 디지털 장비들을 보충하고, 아버지에게 물려받아 쓰고 있던 내 노트북을 새것으로 바꾸고, 아버지의 정장을 한 벌 맞춘 다음 남은 돈은 저축할지.

실제 돈을 쓰는 것보다 어디에 쓸지 고민하는 자체가 더 즐거운 것처럼 매일 저녁 식탁이 활기로 떠들썩했었다. 어머니가 드러내고 제안한 적은 없었지만, 셋이 함께 유럽으로 떠나는 미술관 투어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당시의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장면은 나의 가족이 함께 보냈던 실제의 추억이 아닌, 행복을 작위적으로 연출한 영상처럼 현재의 나에게는 현실감이 없었다. 게다가 전파가 혼선을 일으킨 듯 얼마 못 가 화면은 지지직거리다 그대로 암전된다. 몇 개의 후보 중 어떤 것도 현실화되지 못했던 우리의 계획들처럼.

너무 많은 것을 헤집었다고 직감하자마자 가슴속에서 안전장치가 덜컥 목덜미를 잡아채는 느낌이 있었다. 멈춰 서야 한다는 신호였다.

중요 페이지를 체크해 둔 색색의 테이프와 포스트잇이 빼곡하게 붙은 여행 책자를 뒤적이는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국장 게이트 앞에서는 오래 정차할 수 없으니 나오는 길에 전화를 달라고 했던 기사님의 말대로, 지금 공항을 나가려 한다는 연락을 취했다. 기사님은 5분 뒤에 게이트 앞으로 나오라고 했지만, 나는 서둘러 공항을 빠져나갔다.

어제에 이어 여전히 비가 흩뿌리는 실외는 습했지만, 에어컨 때문에 체온이 낮아진 터라 더위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출국장 앞을 오가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여행을 앞두고 상기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호텔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이질감이 느껴졌다.

문득 피로가 덮쳐 왔다. 긴장이 풀리면서, 요 며칠 제대로 자거나 쉬지 못했던 육체의 고단함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 같았다.

기사님이 알려 준 위치로 이동하기 위해 신호등을 두 번 건넜다. 어제오늘 우리를 편하게 이동하게 해 준 검은색 세단이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정차한 차량의 짙게 선팅된 앞유리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기사님의 윤곽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고 뒷좌석 쪽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생각보다 일찍 헤어졌네요.”

그의 목소리였다. 안쪽에 그가 타고 있었다.

한 손을 문의 가장자리에 짚고 허리를 숙인 채 나는 그대로 잠시 굳어 버렸다.

“어떻게….”

분명 모래와 형과 함께 타고 왔던 그 차였고, 운전을 해 주셨던 그 기사님이었다. 내가 아는 한 그는 이 차를 타고 함께 움직인 적이 없었다.

쯧, 혀를 찬 그가 이쪽으로 좀 더 다가와 앉으며 문을 짚은 내 손목을 끌어당겼다.

“또 다 젖겠네. 얼른 타요.”

엉거주춤 그가 이끄는 대로 차에 올라탄 뒤에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문 쪽으로 붙어 앉은 채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내가 여기 있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그는 오히려 이렇게까지 놀랄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사실은, 놀랐다기보다는 반가웠다. 표정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만큼 그가 반가웠다. 모래와 형을 무사히 보내고 난 뒤에야, 최근 며칠 동안 누가 독하게 쥐어짠 것처럼 가슴이 너덜너덜해져 있었음을 막 깨달은 뒤였기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의 등장이 기뻤다.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그는 벌써, 내가 좋아하는 상대로서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전혀 생각도 못 해서….”

차가 출발하고, 자세를 고쳐 좀 더 편안히 앉으면서 중얼거렸다. 어쩐지 그를 똑바로 보기가 멋쩍었다.

“내 차에 내가 타고 있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한 논리로 우기는 그의 농담에 웃음이 났다. 어떤 이유로 여기에 그가 있는 것이든, 이 순간 그가 주는 위로가 훼손될 수는 없었다.

뜻밖의 만남에 대한 기쁨이 여과 없이 드러나고 있을 것 같아 그의 가슴쯤에만 머물고 있던 시선에 선글라스가 포착되었다. 장마철이었지만, 그는 습관처럼 재킷의 왼쪽 가슴 포켓에 선글라스를 꽂아 두고 있었다.

“선글라스가 멋있는데….”

“응?”

예상하지 못한 화제인지, 그는 의문을 담아 말끝을 올렸다.

“한번… 써 봐도 돼요?”

나에게는 과감한 시도였다. 큰일을 치르고 난 뒤의 피로와 그의 등장으로 인한 흥분이 평소와 다른 모습을 끌어내고 있는지도 몰랐다.

관심을 끄는 제안이라도 들은 것처럼 흥미로운 얼굴로 나를 보며 입술 양 끝을 끌어 올려 소리 없이 웃은 그는 흔쾌히 선글라스를 건넸다. 심플한 프레임에 짙은 렌즈, 얇고 날렵한 다리가 이지적인 인상을 주는 선글라스는 표정을 숨기는 용도로 아주 적합했다.

“좀 보여 줘요. 잘 어울리네.”

내 어깨를 돌려놓고 얼굴을 들여다보며 재미있어하는 그를 마주하고도 시선을 피하지 않을 수 있었다. 아주 유용한 아이템이었다.

신기한 것을 보듯 눈을 빛내며 내 얼굴을 빤히 보던 그는 한참 만에야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재킷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하나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서이현 씨 새 핸드폰이에요.”

얼떨결에 받아 든 핸드폰은 주한이 형이 요즘 가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모 브랜드의 최신 기종이었다.

“지금까지 저쪽의 목적은 그 두 사람이었으니까 일단은 서이현 씨에게 직접적인 압력을 가해 올 필요가 없었겠지만, 두 사람의 추적이 불가능해졌다는 걸 알게 되면 정보를 캐낼 대상은 서이현 씨밖에 없게 되잖아요. 지금까지와는 상황이 다릅니다. 얼마든지 타깃이 될 수 있어요. 대비를 해야죠.”

자신의 핸드폰 액정 위에서 숫자를 찍어 가며 그가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말했고, 잠시 뒤 손안에서 가벼운 진동이 느껴졌다. 그가 보낸 메시지였다.

“새 번호니까 앞으로는 그걸 써요.”

하얗게 비워진 메시지함에는 아직 연락처에 등록되지 않은 그의 번호만이 찍혀 있었다. 어떤 흔적도 담지 않은 손안의 텅 빈 기계는, 과거를 전부 리셋하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게 해 주는 미래형 도구 같았다. 감상적이고 허황된 희망에 소리 없이 자신을 조소했다.

“어디에서 일하고 있고,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국경 안에서 그 정도 정보를 알아내는 건 생각보다 간단해요.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더라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에서 지내는 게 가장 좋죠.”

선글라스를 끼고 바라보는 그의 윤곽은 좀 더 흐릿했지만, 그 눈의 색깔은 오히려 더 선명해 보였다. 섹스 중에는 좀 더 탄산처럼 파랗고 하얗게 들끓는 그의 눈이 차분하게 나를 향했다.

“서이현 씨 아틀리에이자 임시 거처로 적당한 장소가 있어요. 지금 그쪽으로 같이 가 볼까 하는데, 괜찮겠어요?”

빠르게 진행되는 계획을 따라잡기가 조금 버거웠지만, 지지부진 시간을 끈다 해서 상황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며칠 동안 몸도 정신도 극한의 상태였을 텐데, 가는 동안 눈 좀 붙여요.”

내부 시스템을 잘 모르는 나 대신 이쪽의 컨트롤러로 팔을 뻗은 그가 좌석을 뒤로 젖혀 주었다. 가슴 앞을 가로지르는 그의 팔과 강렬한 향수 냄새에 순간적으로 전신이 바짝 긴장했다.

오늘은 내가 알고 있는 예의 그 향수가 아니었다. 짙고 무겁고 존재감이 뚜렷한 이 향기도 그에게 어울리긴 했지만, 이유 없이 조금은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겨우 향수일 뿐인데.

팔을 거두어들이면서 내 얼굴을 슬쩍 돌아본 그가 흠… 한숨 같은 신음을 흘리며 내 머리카락을 가볍게 흩트렸다.

“알겠으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말고.”

라고 말하면서 그는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손으로 입가를 문지르며 미간을 좁힌 옆모습이 곤란해 보였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니. 이상한 말이었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서 그는 내 눈을 볼 수도 없을 텐데.

■ ■ ■

“세대마다 전용 엘리베이터와 엘리베이터 홀이 따로 마련돼 있어서 입주자들끼리도 마주칠 일이 거의 없어요.”

주차한 자리의 바로 정면에 위치한 유리문을 카드키로 열면서, 그가 말했다. 유리문 안쪽은 3~4평 정도의 홀 공간으로 안락한 3인용 소파까지 갖춰져 있었다.

소파 맞은편 엘리베이터 옆 벽면에는 익숙한 위치에 버튼이 없었다. 버튼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검은색 디지털 패드뿐이었다. 그가 패드에 카드키를 툭 가져다 대자 문이 열렸고, 내부의 패드에 카드를 인식시키자, 이번에는 자동으로 5층에 불이 들어왔다. 지금 우리가 엘리베이터를 탄 주차장과 로비 층, 지하 1, 2층, 그리고 5층. 그 외의 다른 층으로는 이동할 수 없는 엘리베이터였다.

“들어올 때 봐서 알겠지만, 일단 외부인은 단지 안으로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 구조예요. 이쪽이 언덕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좀 더 탁 트인 한강 조망을 위해서 땅을 더 돋우고 시공했거든요. 1층에서 5층까지 한 층에 한 세대씩 총 다섯 세대가 거주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3층에서 7층까지라고 보면 돼요. 지하 1, 2층은 한강 조망이 시원하게 나오지 않아서 공용 공간으로 배치됐거든.”

부채질하듯 카드키를 흔들면서 설명하는 그의 얘기를 듣고 있기는 했지만, 내가 이 상황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그가 나를 데려온 이 빌라가 아주 대단히 고급스럽다는 것뿐이었다.

우리가 탔던 방향과 반대쪽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내리자마자 현관이었다. 정확히는 현관의 용도로 쓰이는 직사각형 형태의 방. 연한 골드베이지 톤의 대리석이 깔린 긴 현관은 불필요한 장식은 아무것도 없이 깔끔했다.

“신발은 그냥 신고 들어가도 돼요.”

현관에서 복도로 이어지는 턱 앞에서 머뭇거리자, 손잡이 없이 깔끔한 매립형 수납장을 열어 내부 상태를 대강 확인하던 그가 문을 닫고 뒤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현관에서 실제 생활 공간으로 가기 위해서는 꺾어진 복도를 또 한 번 지나야 했다. 현관에서는 내부를 전혀 볼 수 없는, 사생활 보호에 상당히 신경을 쓴 구조였다.

“건축 외형 자체가 외부인 접근이 어렵기도 하지만, 다섯 명 이상의 가드를 24시간 항상 배치해 두고 있어서 안전에 대해서는 상당히 안심할 수 있죠.”

복도의 끝에서 확 트였다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널찍한 거실이 나타났다. 천장이 높아 개방감이 뛰어났고, 그 높은 벽면 한쪽 전체가 유리로 마감되어 있었다. 덕분에 오늘 같은 흐린 날에도 빛의 양이 충분했다.

“임대 수입을 위해서 외국인 렌트용으로 구입한 집인데, 이전 세입자가 5월에 이쪽 회사와 계약 기간이 끝나면서 한국 생활을 완전히 정리하고 귀국했거든요. 그 뒤로 아직 다음 세입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어서, 안 그래도 이 집으로 옮길까 고려 중이었는데.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최소한의 가구만 갖춰진 심플한 거실을 천천히 훑어보던 그가 여전히 복도 끝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진열대 위의 티셔츠 하나를 집어 들고 묻는 것 같은 어투였다.

마음에 드냐고 나에게 질문하는 의도를 전혀 모르겠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해하고 있는 그 의도가 맞다면, 이번엔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건지, 그는 이 집이 갖고 있는 좋은 조건에 대해 좀 더 상세하게 어필하기 시작했다.

“복층 구조라, 서이현 씨도 나도 거의 따로 사는 것처럼 사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고, 나야 일 때문에 집에서는 저녁 시간만 보내는 정도일 테니까 얼마든지 편하게 그림에 집중하면서 지낼 수 있을 겁니다.”

거실 창 쪽으로 걸어간 그는 손잡이를 아래로 비틀어 잠금을 해제한 뒤 커다란 슬라이드식 미닫이창을 천천히 왼쪽으로 밀어냈다.

7층 높이의 빌라라는 것이 무색하게 전면창 앞으로는 넓은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잔디와 흙과 조경이 있는 진짜 정원이었다. 그 앞으로는 비가 흩뿌리는 회색 한강이 흐르고 있었다.

정원에서부터 비에 젖은 흙냄새와 함께 서늘한 공기가 밀려들어 왔다. 그제야 실내의 공기가 다소 후텁지근했음을 의식할 수 있었다.

“날씨 좋을 때는 정원에서 작업할 수도 있고, 방해받을 요소는 아무것도 없어요. 조용하죠?”

슬라이딩 도어를 끝까지 밀어 놓은 그가 이쪽을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내가 잘못 이해한 게 아니라면, 나의 아틀리에이자 임시 거처로 그는 지금 이런 고급 빌라를 추천하고 있었고, 아마도, 자신과 함께 이 집에서 지내자는 제안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반응이 없자 그가 내 앞으로 되돌아왔다. 연한 핑크빛처럼 보일 정도로 색이 고운 대리석 타일 위를 걸으면서도 그는 구두 소리를 거의 내지 않았다.

집 안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화분처럼 거실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내 앞까지 걸어온 그는 허리를 조금 숙여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봤다. 선글라스. 선글라스가 필요했지만, 이미 자동차에서 그에게 돌려준 뒤였다.

“집이 마음에 드는 얼굴이 아니네.”

마음에 들고 안 들고, 그 이전의 문제였다. 실장님 댁에서 계속 지낼 수는 없더라도, 이런 호화로운 집을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럼 어디서 지낼 생각이었어요?”

“…….”

머릿속의 의문을 읽어 내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물었다.

“한 실장 집에서 지내고 있다는 건 저쪽에서 금방 알아낼 텐데. 솔직히 한 실장 집은 이미 예전에 노출됐을 거라는 게 내 판단이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허리를 편 그는 가슴 앞에서 단단하게 팔짱을 꼈다.

“안전한 공간에서 그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필요한 편의는 전부 제공할 겁니다.”

“…….”

“서이현 씨를 위해 새로 구입한 것도 아니고, 비어 있는 김에 이 집에서 지내 볼까 고려 중이었으니까 부담 가질 건 전혀 없어요. 임대용으로 매입하긴 했지만, 구조도 전망도 마음에 드는 집이라 직접 살아 보는 것에도 계속 흥미가 있었고. 여기서 혼자 산다고 해서 어차피 이 공간을 내가 다 사용할 것도 아니니까.”

그가 아주 대단히 부유한 사람이라는 사실과는 별개로, 그와의 대화 속에서 경제적 격차를 실감한 적은 별로 없었다. 그는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인상에 남을 정도로 두드러지게 감각의 차이를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차피 비어 있던 집이고, 어차피 이쪽으로 옮길까 고려 중이었고, 어차피 혼자 살더라도 남는 공간이니까 자신이 금전적으로 희생하는 부분은 전혀 없다. ―라는 간단한 논리를 제시하는 그에게, 금전적 희생과는 무관하게 감정적으로 부담을 느낄 수 있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없을 것 같았다.

“팬텀하고, 실장님 댁 일은….”

겨우 그렇게 묻는 나를 잠시 내려다보던 그는 팔짱을 풀고 내 손목을 가볍게 붙잡았다. 그러지 말고 일단 여기까지 왔으니 집을 둘러보기라도 하라며 거실 너머 복도로 손목을 끌었다.

“서이현 씨가 그동안 실무에 도움이 많이 돼서 팬텀 일은 나도 많이 아쉽긴 해요. 하지만 그림에만 집중해야죠. 아니면, 최인우처럼 취미로 그릴 생각이에요?”

아래층의 메인 침실 앞에서 나를 돌아보며 그가 확인하듯 물었다.

취미로 그릴 생각은 아니었지만, 큰아버지가 나타난 이후로 모래와 형의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탓에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잠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그가 침실 문을 안쪽으로 열면서 말을 이었다.

“한 실장 도와주던 일도 보류할 수밖에 없는 거, 이해하죠? 일을 떠나서 지금 그 집을 드나드는 자체가 서이현 씨한테 그다지 안전하지 못하니까. 한 실장한테도 마찬가지고.”

그것 역시 생각이 닿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내 일인데도 그가 훨씬 더 폭넓게 상황을 조망하고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는 게… 고마우면서도 부끄러웠다.

먼지가 앉지 않도록 매트리스의 커버를 벗겨 놓은 침대 앞에 나를 세워 둔 그는 거실과 마찬가지로 정원과 연결된 전면창 앞으로 걸어가 속이 비치는 얇은 커튼을 대강 걷어 내고 창을 반쯤 열어 두었다.

거실보다는 좀 더 안락하게 꾸며지긴 했지만, 생활의 흔적이 없어 살풍경한 것은 침실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갑작스럽고, 모든 게 다 빨라서… 잘… 뭐가 뭔지….”

반소매 아래 드러난 팔을 의미 없이 쓸어내리면서 횡설수설 중얼거리는 내 앞으로 그가 되돌아왔다.

흠…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 꺼뜨리며 한숨을 쉬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마음이 갑갑했다. 친절과 호의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미안했지만, 예상을 한참 벗어난 빠른 전개를 따라잡기엔 지금의 내가 너무 작았다.

나를 마주 내려다보던 그가 미안한 표정으로 미간을 구기며 반듯한 이마 위를 긁적였다.

“내가 좀, 너무 몰아붙였죠?”

“…….”

그렇지 않다고,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그것만이 그에게 진심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것처럼.

나의 망설임과 염려를 매번 그가 먼저 알아채고 미안해하는 것도 싫었다. 좋아한다면서, 오히려 그 상대에게 많은 것을 받기만 하고 있는 자신의 부족함이 고개를 수그러들게 했다.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고려해 주셔서… 많이 감사해요.”

그가 없었다면,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이번 일을 나는 어떤 식으로 처리할 수 있었을까.

처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래도 형도, 아직 사회적으로 무능력한 우리에게는 실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없는 게 현실이었다.

모든 문제가 깨끗하게 종결된 것은 아니었지만, 자칫 최악으로 치달을 수 있었던 위기를 벗어나 상황을 이만큼 진척시킬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의 도움 덕분이었다.

“단지, 생각해 본 적 없는 선택지들이라… 당황스러운 거고. 대표님은 아무 잘못도….”

“알아요.”

심장 속에 손을 넣어 그 안을 휘저어 적절한 단어를 꺼내듯 힘겨운 내 고백을, 그가 멈춰 주었다.

“고마워하는 거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만 말해도 괜찮아요.”

“…….”

따뜻한 말에 용기를 내어 마주 올려다본 그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아주 미세한 균열이었지만, 눈앞의 대상인 나를 향한 연민과 공감, 안타까움 같은 것들이 얽힌 감정이 그의 눈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잠시 일을 도와주고 사라질 사람으로, 나를 테두리 밖에 고정해 두었던 예전의 그를 떠올려 본다.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어떤 형태로든, 이제 나도 그의 친절과 염려의 대상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의심할 필요가 없음을, 그의 눈이 말해 주고 있었다.

그 이상의 특별함. 유일함. 그런 것들을 바란다는 게… 주제나 분수 같은 것을 떠나서 말 그대로 너무나 욕심 같았다. 지금도 충분히 너무 큰 도움을 받고 있었으니까.

두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말없이 나를 응시하고 있던 그가 여유 없는 표정으로 도망치듯 시선을 피했다. 휴일이라 조금 편안하게 스타일링한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얽어 신경질적으로 흩트리는 그의 옆모습은 어딘가 초조해 보이기까지 했다.

“뭘 좋아해요? 술? 쇼핑? 여행? 그런 건 다 아닐 것 같고…. 알 수가 있어야지.”

공항까지 나와 주었던 것도 이 집으로 데려와 새로운 제안을 해 준 것도, 어쩌면 모래와 형을 떠나보낸 나를 위로해 주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아니면 백유니, 권주한 만나서 술이라도 마실래요? 그 녀석들은 아무래도 나보다는 낫겠지.”

누나와 형에게 당장 연락을 취할 것처럼 핸드폰을 꺼내 드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매달리듯 행동을 가로막은 나의 단호함에 놀랐는지 조금 커진 그의 눈이 나를 돌아봤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아랫입술을 깨물다, 항복하듯 그의 어깨 가장자리에 이마를 묻었다.

모래와 형이 무사히 이 나라를 떠난 지금 느끼는 안도감을 통해 역으로 나는, 그동안 내가 생각보다 깊은 불안에 시달려 왔음을 점차 실감하고 있었다. 무사히 떠났으니 이제는 한숨 돌렸다는 안심 뒤에 바짝 따라붙는… 가슴의 일부가 뚝 떼어진 듯한 허전함과 함께.

그 감정을 누군가와 위로하고 어루만져야 한다면, 상대가 되어 주길 바라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

잠시 멈춰 있었던 그가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의 손바닥이 뺨 전체를 감쌌다. 부드러운 힘에 의해 고개가 들어 올려졌다.

“슬픕니까.”

슬픔이라는 단어에 어울리지 않는, 정제된 그의 목소리는 좀 전까지와 달리 차분하기만 했다.

슬픔이라는 한 단어만으로 간단히 규정지을 수 없는 감정이라며 이름을 붙이기를 포기하고 있었지만, 가장 단순하게 바라보자면 이것은 슬픔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멀리 떠나서, 나는 슬펐다.

늘 해 왔던 대로 상황을 받아들인 척 표현하지 않으려 하고 있을 뿐, 허전하고 막막하고 그들 없이 계속될 나의 삶과 나 없이 계속될 그들의 삶이 벌써부터 섭섭했다. 이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섣불리 건드리지 못하고 서성거리기만 하고 있었던 나에게, 그는 슬픔을 인정할 기회를 주었다.

그의 손이 뺨이 아닌 귓가를 감싸듯 좀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꼭 ‘그 향기’가 아니더라도 다 좋았다.

“슬픈… 것 같아요.”

뺨을 감싼 그의 손에 슬며시 얼굴을 기대며 다시 정정해서 대답했다.

“네, 슬퍼요.”

“…….”

내게서 어떤 무형의 메시지를 읽어 내려는 것처럼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얼굴 곳곳을 꼼꼼히 바라보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그 향기’가 이전의 다른 향기 속에서 조금씩 감지되었다.

“내가 갖고 싶으면… 말만 하면 된다고 했잖아요. 언제든 가질 수 있다고. 바보같이….”

마지막 말을 허공에 날려 버리듯, 말을 마치자마자 그가 고개를 숙여 입술을 깊게 겹쳐 왔다. 허리가 당겨지고 가슴이 그의 가슴에 바짝 밀착됐다.

뒷머리를 감싸며 밀고 들어오는 힘에 입술이 벌어지고, 그의 혀가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익숙한 ‘그 향기’가 순식간에 코와 입을 장악하고, 향기의 진입에 코로 크게 숨을 내쉬며 그의 등에 팔을 둘러 꽉 붙잡았다.

내 안에 귀한 약이라도 흘려 넣어 주려는 것처럼 꼭 껴안은 채 그는 고개를 꺾어 가며 진하게 키스했다.

호흡이 부자유스러울 정도로 허리와 가슴을 압박하는 포옹은 거의 결박에 가까웠다. 아무런 틈도 없이 꽉 맞닿은 품에 안도감을 느끼며 나 역시 그를 안은 팔로 넓은 등을 힘껏 조였다.

혀끝으로 입천장을 긁으며 그의 혀가 내 안에서 성급하게 빠져나가고, 나는 아쉬워서 그의 재킷을 움키며 이번엔 그의 입술을 향해 내 혀를 내밀었다. 혀는 곧바로 삼켜졌다.

“으으, 음… 응.”

단번에 최대치까지 혀를 빨아들이는 강한 흡입에 목구멍 안쪽이 울렸다. 허리를 조이고 있던 그의 왼팔이 청바지 위로 엉덩이를 움켰다.

우리는 눈을 감지 않았다. 코끝이 비벼지는 가까운 거리에서 혀를 빨고 빨리며, 애욕으로 빠르게 젖어 가는 상대의 눈을 집요하게 탐색했다. 그 자체가 흥분의 또 다른 자극제인 것처럼.

자신의 존재를 강요하듯 갈비뼈가 뻐근하고 혀가 얼얼할 정도로 안고 키스하는 그의 힘은, 역으로 나의 존재를 분명하게 했다. 테두리가 희미하고 색감이 흐릿한 나라도 이 순간 그에게는 욕망과 필요의 대상이었다.

아니, 오늘만큼은 단지 성애의 대상만이 아니었다. 이 뜨거움은 분명 그가 건네는 위로였다.

“하으, 윽.”

가득 머금은 채 빨고 조이던 혀를 놓은 그가 벽을 향해 몸을 밀어붙였다. 둔탁한 아픔이 느껴지며 등이 닿은 순간, 굵은 허벅지가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성기에 좀 더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노골적인 마찰에 순간 정신이 하얗게 흐려지며 몸이 상승하는 듯했다. 그의 겨드랑이 아래를 지나 등을 안고 있던 팔을 어깨에 감아 몸을 좀 더 바짝 끌어안았다.

“하아으, 흐. 흐으.”

순식간에 달아오른 그가 어깨와 숨을 크게 들썩이며 두 손으로 엉덩이를 움켜 자신의 허벅지 위로 나를 끌어 올리듯 잡아당겼다.

내리뜬 눈꺼풀 속에서 서로의 입술을 내려다보며 혀를 내밀어 끝과 끝을 마주 비볐다. 젖은 살덩이가 몸 밖에서 비벼지는 마찰은 입 안에서 이루어지는 키스와는 또 달랐다. 보는 사람이 없어도, 은밀한 것을 외부로 공개하는 데서 오는 반항적인 쾌감이 혀끝을 짜릿하게 했다.

그가 엉덩이를 끌어 올릴 때마다 뒤꿈치가 들썩거렸다. 다리 사이에 비벼지는 허벅지는 갑작스럽게 폭발한 성욕으로 인해 평소보다 더 단단하게 뭉쳐 있었다. 안은 어깨와 맞닿은 가슴도 마찬가지였다. 근육이 쪼개진 굴곡이 옷 위로도 뚜렷하게 느껴질 만큼 그의 육체는 곤두서 있었다.

마치 삽입을 한 채 내 안을 드나드는 것처럼. 나를 당겼다 내려놓기를 반복하면서, 그는 중간중간 허벅지를 흔들어 다리 사이에 외설적인 자극을 더했다.

“으으으, 흐, 흐윽….”

그렇게 흔들 때마다 몸의 진동이 숨결의 떨림으로 이어졌고, 그런 나를 그는 풀린 눈으로 내려다보며 감상했다.

각도에 따라 하얗게 푸르게 색을 달리하며 부서지는 눈이 나를 통해 황홀을 보고 있는 것 같아서, 그게 내 착각이더라도, 나만 이렇게 그의 체온을 원하며 뜨거워지는 것은 아닌 것 같아, 일단은 다행이었다.

아무런 경험도, 경험으로 획득할 수 있는 테크닉도, 하다못해 타고난 요염함도 없을 게 뻔한 밋밋한 나에게서 그가 어떤 성적 매력을 발견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힐끔 아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어떡하죠? 오늘은… 벌써 못 참겠는데.”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듯 내려다본 그의 앞섶은 벌써 불룩했다.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평소에도 그의 페니스는 눈에 띌 때가 많았다. 그가 특정한 자세로 몸을 틀거나, 꼰 다리의 방향을 바꿀 때, 팬츠 주머니에 양손을 찌르고 있을 때. 솔직히 그것은 모른 척하기 어려울 만큼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와 자고 난 이후부터는 그럴 때마다 시야에서 억지로 그것을 밀어내기 위해 애를 써야 했었다.

그런 그의 성기가, 갑갑해 보일 만큼 두드러지게 솟아 팬츠의 지퍼를 팽팽하게 밀어내고 있었다. 빤히 내려다보는 내 시선을 알아챈 그가 이마에 입을 맞추며 작게 웃었다.

이마에서 눈꺼풀로, 관자놀이로 옮겨 가며 뜨겁게 입을 맞춘 그가 귓가에 입술을 묻고 속삭였다.

“지인짜 좋아하네, 내 물건.”

“읏….”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역할을 그에게만 떠넘기며 자기는 아닌 척하는 비겁함을 그만두고 싶었다.

그의 성기를 보고 있었던 게 맞고, 인위적으로 뭔가를 집어넣은 것처럼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부각된 부피감을 통해 다가올 짜릿하고 질척한 무언가를 기대한 것도 맞다. 그러니 부끄럽다는 이유로 부정하는 짓은 그만두자.

그가 괜히 일부러 더 비비적거리며 허벅지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양쪽으로 느리게 흔드는 골반의 움직임이 더없이 야했다.

“흐으, 윽.”

청바지 속에서 부풀고 있는 나의 성기와 지퍼를 찢고 나올 것 같은 자신의 성기가 만든 두둑한 언덕이 서로 슬쩍슬쩍 스칠 정도로만 흔드는 그의 허리 때문에 애가 달았다.

벌써부터 진하게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억제하려 아랫입술을 깨물었고, 그의 입술이 곧장 다가와 내가 깨문 입술을 빼앗았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가해지도록 세게 빠는 그의 방식은 내가 좋아하는 애무 중 하나였다.

달콤하게 퍼지는 아픔을 음미하며 그의 어깨에 두른 팔에 힘을 더했다. 발끝으로 대리석 바닥을 밀면서… 참지 못하고 스스로 그의 성기에 나의 것을 마주 비볐다.

“으음….”

그가 더 강하게 입술을 빨아들이며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등을 쓰다듬었다. 피부 위를 부드럽게 쓸 듯이 더듬어 올라간 손이 거꾸로 내려오면서 청바지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의 허벅지에 거의 올라앉다시피 한 탓에 위로 불룩하게 밀려 올라온 둔부의 살집을 비틀던 손이 더듬더듬, 골 사이를 파고들었다.

“흐으으. 흐윽.”

고개를 돌려 입술을 빼내고 도리질 쳤다. 그가 내 안에 들어올 수 있는 구멍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자극받은 나는… 그의 허벅지 위에서 뜀을 뛰듯 스스로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그런 자신을 의식하자마자 죽을 만큼 부끄러웠지만, 제어할 수 없었다.

가로젓는 고개와 들썩거리는 허리는 모두 내 몸의 일부였음에도 서로 완전히 다른 의사를 표현하고 있었다.

그가 골 사이로 미끄러뜨린 중지로 살갗을 세게 비비며 한 팔로 등을 당겨 안았다. 그의 어깨 위에 턱을 얹고, 완전히 밀착된 상태에서 마음껏 몸을 비볐다.

어깨와 가슴, 복부, 허벅지. 그의 육체의 모든 곳이 잘 단련된 근육들로 이루어져 있어, 몸을 비빌 때마다 그 두드러진 부피감의 굴곡에 흥분이 자극되었다. 울룩불룩하고, 퍽퍽하고, 주먹으로 내리쳐도 꿈쩍하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함을 온몸과 두 손으로 실컷 더듬었다.

다리 사이를 받치고 튕겨 올리는 허벅지와 골 사이를 드나드는 손가락이 자꾸만 삽입의 감각을 떠올리게 하는 탓에 저절로 허리가 비틀렸다. 옷을 벗은 그를 원한다는 갈증을 더는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의 목에 입술을 묻고 부드럽게 비비며, 모든 용기를 끌어모아 고백했다.

“저도… 못 참겠어요.”

애무로 인한 열기가 머릿속을 충분하게 휘저은 뒤에야, 그의 추궁과 부추김에 겨우 솔직해지기 시작했던 지금까지와 달리 더 빠르고 자발적인 항복이었다.

“…….”

말없이 정지했던 그가 청바지 속에서 손을 빼내는 동시에 나의 티셔츠 끝자락을 잡아 위로 들어 올렸다. 얼떨결에 그를 안고 있던 팔을 들어 응하자, 순식간에 티셔츠가 벗겨졌다. 현대적인 디자인의 슬림한 TV가 올려진 장식장 위에 티셔츠를 대강 던져 놓은 그가 허벅지에 팔을 감아 나를 들어 올렸다.

“읏.”

떨어지지 않으려 본능적으로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내 몸은 그의 얼굴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위치까지 올라가 있었다. 그보다는 반 뼘보다 좀 더 작은 편이었지만, 객관적으로 나는 결코 작고 아담하지 않았다. 180을 살짝 넘기는 나를 반동의 도움도 없이 번쩍 들어 올린 그는 침대 가로 걸어가며 무게를 가늠하듯 두어 번 나를 위로 흔들기까지 했다.

“마른 건 알았지만… 혹시 속이 텅 빈 거 아니죠?”

이건 정말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는 그의 얼굴은 심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키가 있는데. 하루에 한 끼는 먹어요?”

살이 좀 오를 때까지 가둬 놔야겠다고 덧붙이는 그의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에, 어릴 때 읽었던 동화 속 과자 집 마녀가 떠올라 웃음이 샜다.

“농담인 줄 아나 봐.”

나를 안은 채 매트리스 위로 쓰러진 그는 누운 나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내 양 뺨을 한 손에 쥐고 조물거렸다. 양쪽에서 누르는 힘에 입술이 모였다 풀어지기를 반복하면서 붕어 같은 얼굴이 되고 있을 것 같아 가만히 그의 손목을 잡아끌어 내리자, 이번에는 그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허리를 세워 재킷부터 벗어 던진 다음, 나의 다리를 하나로 모아 자신의 왼쪽 옆구리 쪽으로 밀어 놓으며 상체를 숙여 키스했다. 허리 아래로는 옆을 향하고, 허리 위는 정면을 향한 채였지만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목 뒤를 파고들어 어깨를 끌어안는 그의 팔을 느끼며, 나 역시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의 다른 한 손이 아래에서 청바지의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흐으음… 흐….”

지퍼가 벌어지자마자 불쑥 손을 넣어 브리프 위로 성기를 주무르는 강한 악력에 그를 안은 팔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내가 보이는 반응에 그 역시 달아오르는지 입 안을 휘젓던 혀의 움직임이 격렬해졌다.

성기 뒤쪽으로 깊숙이 넘어가 다리 사이를 넓게 문지르던 커다란 손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속옷 위로 애널 입구를 긁어 댔다. 자극하며 건드리는 야한 장난 같은 손길에 허리를 비튼 자세로 신음하며 그의 목을 자꾸 고쳐 안는 수밖에 없었다.

회음을 훑어 내듯 넓게 문지르며 빠져나온 그의 손이 뒤에서부터 청바지와 브리프를 한꺼번에 잡아끌어 내렸다. 허리 아래가 옆으로 비틀린 자세라 하의는 쉽게 벗겨졌다. 뒤집힌 채 벗겨진 청바지가 속옷과 함께 침대 아래로 무겁게 툭 떨어졌다.

의식하고 보니 어느새 나는 알몸이 되어 있었다.

비가 내리고 있어 평소보다 어둑하기는 했지만 아직 대낮이었다. 그의 소유이기는 했지만, 그가 사는 집은 아닌 빈집이었다. 그와 다시 몸을 겹치는 장소로 생각해 본 적 없는 배경이었다. 시간과 장소의 의외성이 이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몸을 긴장시켰다.

그런 생각에 좀 더 깊이 파고들 겨를도 없이, 이번엔 그가 자신의 벨트 버클을 풀기 시작했다. 구부정하게 내 위로 상체를 숙인 채 키스를 이어 가며 아래에서는 본격적인 섹스를 위해 벨트를 풀고 있는 그의 행위 자체가 마른침을 삼키게 했다.

쪼옥, 깊게 입술을 겹쳤다 뗀 그가 안은 어깨를 둥글게 문지르며 속삭였다.

“셔츠, 벗겨 줄래요?”

두 번째 단추까지는 풀어져 있었던 그의 셔츠에 손을 뻗어 하나씩 풀어 나가는 동작은 굼뜨기만 했다. 남의 옷을 벗겨 보기는 처음이었으니까.

서툴게 두 손을 꼼지락거리는 나의 이마와 콧잔등, 뺨, 입술에 번갈아 입을 맞추면서도 그는 어느새 팬츠를 벗어 내고 속옷 차림이 되어 있었다.

내려다보니 검은색 브리프 위로 발기한 그의 것의 형태가 선명했다. 브리프의 면을 찢을 것처럼 밀어내며 솟아오른 성기의 끄트머리 쪽은 이미 더 진한 색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고마워요.”

마지막 단추까지 전부 풀려 나가자, 그는 어깨를 안았던 손으로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셔츠의 단추를 풀어 준 정도로 고맙다는 인사를 받고 나니, 그가 좀 전처럼 나를 안아 올려 주거나 옷을 벗겨 줄 때마다 나도 인사를 했어야 하나 싶은, 바보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렇게 한다면 분위기를 깨는 것밖엔 안 될 게 뻔했다.

내게서 상체를 떨어뜨리며 허리를 세워 앉은 그는 알몸이 된 나의 다리를 자신의 옆구리 양쪽으로 뻗게 하며 자세를 잡았다. 벌려진 다리 안으로 들어서는 그의 몸통이 가장 은밀한 부위에서 이루어지는 밀착과 교합을 연상시켰다. 뺨에 열이 올랐다.

흐으음….

입을 꽉 다문 채 코로 숨을 조절하면서 그는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허리를 유연하게 돌려 브리프 차림의 아래를 나의 다리 사이에 문지르면서.

젖은 면의 감촉 아래로 불룩한 부피감이 회음을 집적거리는 야릇함에 나 역시 다리 사이가 젖어 드는 기분이었다. 내 몸에 전혀 손을 대지 않은 채, 그는 그렇게 잠시 아래를 밀착시킨 상태로 허리만을 움직여 성기와 회음을 접촉시켰다.

벌어진 셔츠 사이로 슬쩍 드러나는 몸통은 뚜렷한 윤곽을 그리며 쪼개진 복근이 새겨져 두껍고 탄탄했지만, 살살 돌아가며 자신의 성기를 원하는 곳에 문지르는 허리의 움직임은 그 두께에 비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유연했다.

“흐으, 흣. 흐윽.”

허리가 밀려오면서 불룩한 살덩이를 아래에 치댈 때마다 신음을 어쩔 수 없었다. 교접을 연상시키는 행위에 집중해 있는 그의 모습은 너무 섹시해서… 엉덩이 근육이 수축하며 저절로 그곳을 조여 댔다. 자신의 몸이 보이는 반응이 믿기지 않았지만, 그것이 내가 그에게 배운, 그를 통해 알게 된 섹스의 쾌락이었다.

“허벅지, 오므려 볼래요?”

나에게 해 보라고 말했지만, 그의 손은 말을 함과 동시에 이미 나의 다리를 밀어 올려 가슴 앞으로 모으고 있었다. 밀착된 허벅지와 허벅지 사이에 끼어 일부분만 볼록하게 삐져나온 고환에서부터 애널까지를 그가 손가락으로 느리게 주욱 그어 내렸다.

“이렇게 말랐는데, 엉덩이랑 여기는 제법 통통한 거 압니까.”

야하게. ―흘겨보듯 눈을 가늘게 뜨며 야릇한 미소와 함께 그렇게 덧붙이는 그의 표정이 더 야했다.

무릎을 짚고 서서 몸의 위치를 바꾸면서 그가 브리프 안에서 성기를 끄집어냈다. 비좁은 속옷 안에서 해방된 그것은 브리프의 밴드 안에서 튕겨 나오듯 벌떡 일어섰다. 모양이 선명하도록 부풀어 오른 귀두에서 흐른 쿠퍼액이 검붉은 기둥 전체를 적시고 있었다. 그의 몸이 드리운 그늘 아래에서 체액으로 번들거리는 성기의 위압감에 나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여기에… 좀 비빌게요.”

다리 사이가 조금도 벌어지지 못하도록 양쪽에서 단단히 붙잡은 그는, 살아 움직이듯 꿈틀거리는 음경을 오므린 허벅지 사이로 꾸욱 밀어 넣었다.

“으! 흐읏… 윽.”

연한 허벅지 안쪽 피부가 뜨겁게 펄떡거리는 젖은 음경에 쓸리는 기분은 오묘했다. 애널처럼 들러붙은 점막을 찢으며 들어오는 것이 아님에도 살을 가르고 들어오는 것 같은 삽입감이 느껴졌다.

뒤집힌 고환을 찌르고 들어온 그의 것이 나의 음경에 마주 닿았다. 공중으로 살짝 들린 엉덩이골에 묵직한 음낭이 툭 부딪쳐 왔고, 다음 순간 굵은 뜨거움이 허벅지 사이를 쑥 빠져나갔다 불쑥 다시 파고들었다.

쿠퍼액으로 흠뻑 젖은 그의 페니스는 막힘없이 허벅지 사이를 미끄러졌다. 흥건한 애널 속을 드나드는 교접음을 닮은 마찰음이 젖은 땅 위에 잘박거리는 빗소리처럼 방 안에 스며들었다.

연약한 점막으로 둘러싸인 애널 안이 아니기에 그는 속도를 조절하지 않았다. 위에서 아래로 찍어 누르듯 빠르게 그가 드나들 때마다 음경이, 두 개의 성기가 직접적으로 쓸리는 감각에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음경이 찌르고 들어올 때마다 애널 주변을 때려 대는 고환의 반동도 참기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툭, 툭, 툭, 툭툭… 탄력 있는 무게감이 엉덩이골에 부딪혀 오는 감각만으로도, 앞뒤로 흔들리다 그와 나 사이에 짓눌려 뭉개지는 그의 음낭이 눈에 그려졌다.

넣은 위치만 다를 뿐, 위에서 누르는 그의 무게감과 그로 인한 흔들림, 간질거리는 아랫배와 경련하는 손끝 발끝…. 모든 상황이 삽입을 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살을 스치는 페니스의 굵기와 뜨거움, 젖은 감촉은 허벅지 사이에서 더 뚜렷하게 느껴졌다.

그의 음경을 타고 흘러내린 많은 양의 쿠퍼액이 나의 음경과 음모로, 또 뒤쪽으로는 고환과 사타구니를 지나 애널 위까지 흘러내렸고, 흘러내리는 동선마저도 피부 위에 선명하게 느껴질 만큼 몸이 민감했다.

성기도 아니고, 하다못해 애널도 아닌, 고작 허벅지 사이를 드나드는 것으로 그는 이미 나를 사정 직전까지 몰아 가고 있었다.

숨이 끊길 것처럼 헐떡거리다 손을 더듬어 양쪽에서 허벅지를 누르고 있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하흐, 흐… 흑….”

애원하는 듯한 젖은 시선이 그의 눈을 찾았다. 멈춰 주기를 바라는 애원인지, 더 몰아붙여 주기를 바라는 애원인지도 모른 채 판단을 그저 그에게 맡기고 있었다.

고개는 그대로 아래를 향한 채 눈만을 치켜떠 나를 바라보면서, 그가 땀이 맺히기 시작한 얼굴에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이렇게 하다가… 삐끗해서 실수로 들어가 버리면 어떡하죠?”

그가 성기를 뒤로 빼면서 고개를 기울여 나의 회음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어… 벌써 많이 젖어서… 위험하겠는데?”

“…흣!”

갑작스럽게 애널로 향한 손길에 고개가 뒤로 확 젖혀졌다. 잡고 있던 그의 손을 꽉 비틀어 쥐면서 시트를 씌우지 않은 매트리스 위에 뒤통수를 비벼 댔다.

입구 바로 주변을 꾹꾹 누르는 그의 손길은 상태를 진단할 뿐인 것처럼 성적인 뉘앙스가 빠져 있었고, 나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그 때문에 오히려 더 수치가 자극되었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리고 싶은, 이 순간에 나만이 성적으로 몰입해 있다는 그런 수치가 아니다.

젖은 애널 주변을 지분거리면서, 그가 흥분하고 있지 않을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신음하며 입술을 잘근거리는 나의 반응 앞에서도 자신은 전혀 자극받지 않는 척 가장하는 것으로 둘 사이의 흥분의 균형을 깨트려, 긴장감을 극대화시키고 있을 뿐이라는 걸.

체액을 듬뿍 묻힌 손을 일부러 애널 위에 넓게 문지르면서, 그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는 내 손을 아래로 잡아끌었다.

“이거 봐요. 완전히 흥건하다니까? 얼마나 많이 흘렸는지….”

내 손에 체액을 묻혀 스스로 애널 주변을 문지르게 하면서, 그는 흥분한 눈을 아래에 고정시켰다.

“그, 그건… 대표님이…!”

붉어진 얼굴로 목을 쳐들고 손을 빼내려 버둥거렸다. 젖어 버린 건 그의 쿠퍼액 때문인데, 꼭 나의 분비물 때문인 것처럼 얘기하는 그의 말이 낯 뜨거워서… 어떻게든 가로막고 싶었다.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일상성을 벗어나 들끓는 눈이었다. 손목을 놓친 건지 놓아준 건지, 풀려난 손을 거둬들이자마자, 손가락 한 마디가 불쑥 안으로 파고들었다.

“윽…!”

갑작스러운 진입에 놀라 어깨를 움츠렸지만, 아픔 때문은 아니었다. 입구에는 아무런 저항감이 없었다.

손가락 한 마디를 내 안에 넣은 채로 그가 가슴 앞에서 모으고 있던 내 무릎을 바깥쪽으로 밀면서 상체를 깊이 숙여 입을 맞춰 왔다.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희미한 광기를 동반한 기쁨 같은 것이 어려 있었다.

“맞아요. 내가 이렇게 적셨어…. 나 때문에 이렇게 흘리고, 젖었어. 나 때문이야.”

안에 넣은 손가락을 얕게 넣었다 빼면서 그가 나의 양쪽 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뭔가를 찾는 것처럼 다급한 동시에 황홀경을 헤매듯 느슨한 눈이었다.

처음에 맡았던 강렬한 향수 냄새에 섞여 ‘그 향기’가 진해지고 있었다. 오래 사용해 그의 피부와 손톱 밑에 스민 향처럼, 옷을 벗은 맨살에서 피어오르는 향기. 평소보다 좀 더 멀게 가물거리는 그 향기를 흡입하기 위해 탐욕스럽게 코를 벌름거리며 그의 목을 안아 끌어당겼다.

그가 고개를 틀어 입술을 겹치며 혀를 넣어 왔고, 이제는 제법 능숙해진 것처럼 그것을 받아들이며 젖은 점막에 나의 혓바닥을 마주 비볐다.

아래에서는 손가락이 진입과 퇴보를 반복하는 사이 애널 안으로 더 많은 양의 쿠퍼액이 흘러들어 갔고, 위에서도 아래에서도 질척거리는 마찰음이 새어 나왔다.

더 깊숙한 것을, 더 나를 부술 듯한 압박과 흔들림을 원하는 자신을 끝내 마주 봐야만 했다. 손가락 한 마디의 부드러운 삽입으로는, 이제 더는 파괴되지도 변형되지도 않는 자신을.

입 안에서 내 혀를 둥글게 말았다가 옆으로 돌려세웠다가… 화려하게 키스하던 그가, 문득 눈을 가늘게 뜨며 입 안에서 물러났다.

“아래에서… 얼마나 물었다 놨다 하는지, 알아요?”

흐느끼듯 신음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알아요?’라는 질문에 대한 모른다는 대답이 아니라, 그저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스스로 애널을 조여 그에게 더 큰 자극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그가 내 안에 찔러 넣지 않은 다른 손의 검지로 입술을 톡 두드리면서 이마를 가볍게 부딪쳐 왔다.

“이 입으론 뭐 해 달라는 말 한마디 안 하면서.”

“…….”

내가 뭔가를 요구하고 조르기를 바라는 듯 가벼운 불만이 섞인 표정이 잠시 얼굴 위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이번 일을 도와 달라고 그를 찾아갔던 건… 아주 큰 부탁이었던 것 같은데….

“하으… 읏.”

그런 생각에 더 파고들 겨를도 없이 안쪽을 한 바퀴 훑어 낸 손가락이 쑥 빠져나갔다.

“다리, 좀 더 벌릴게요.”

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는 이미 다리가 벌려지고, 애널 입구에 귀두가 조준되고 있었다.

손가락과는 전혀 달랐다. 매끈거리는 귀두가 입구에 비벼지는 것만으로도 묵직한 압박감에 숨이 가빴다. 한 번에 어렵지 않게 밀고 들어왔던 손가락과 달리, 두툼한 귀두는 진입에 애를 먹었다.

귀두가 절반도 삼켜지기 전에 그는 다시 빼냈다가 집어넣기를 반복했다. 입구 주변에서 번들거리는 쿠퍼액을 최대한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흐으, 흐….”

넣고 빼기를 반복한 탓에 아래가 벌어져 씰룩이는 것이 느껴졌다. 울음 같은 신음을 터트리며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왜 가려요? 호기심 왕성한 서이현 씨.”

그가 부드럽게 손목을 붙잡아 끌어 내리며 달래듯 말했다. 올려다본 얼굴에는 희미하게 미소까지 걸려 있었지만, 아래에서는 넓적하게 부푼 귀두가 꿈틀거리며 점막을 가르고 있었다.

“다 넣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금방 기분 좋게 해 줄게요.”

“…….”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어 두려움과 기대감으로 몸이 살짝 떨리면서 구멍이 좁아졌다.

“흐, 흐아흑!”

수축하는 구멍을 억지로 헤집으며 귀두가 불쑥 들어섰다. 이제 겨우 귀두를 다 삼켰을 뿐이었지만, 절반 이상의 섹스를 치른 듯 하반신이 얼얼했다. 그러나 뻑뻑함 때문이 아니라, 그의 것의 크기 때문이었다. 입구 쪽은 이미 충분히 젖어 있었다.

확장된 채 진동하는 나의 동공을 내려다보며 그가 나의 다른 쪽 손목도 부드럽게 휘감았다. 그리고 우리의 교접 부위를 향해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도드라진 귀두로 전립선 위를 정확하게 조준한 삽입이 퍼부어졌다.

“흐으, 흐… 하흑. 윽!”

머릿속에서 번개가 내리치는 기분이었다. 번개가 연속적으로 내리치는 들판에 알몸으로 누운 기분이었다. 알몸 위에 비까지 퍼붓고 있었다. 실제로 창밖에서 빗소리가 거세지는 듯했지만,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끝까지 밀어 넣은 상태에서 음경의 기둥으로 전립선 위를 지나가는 감각과는 또 달랐다.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자극이었다. 전립선이라는 게 마치 애널 안에 숨은 또 다른 성기 같았다.

그의 성기가, 나의 애널이 아닌 성기에, 그러니까 페니스가 아닌 애널 속의 두 번째 성기에 섹스하고 있는 착각이 들게 했다.

깊은 삽입을 통해 자신의 성기에 압박을 가하려는 것이 아닌, 나의 전립선을 자극할 목적으로 얕게 파고들어 그 부분만을 짓누르듯 문지르고 빠르게 물러서기를 반복하는 그의 허릿짓은 하체를 자근자근 으깨 놓는 것만 같았다.

사정의 쾌감이 멀어졌다 다시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며 점차 고조되다 절정을 찍었던 지금까지의 삽입과 달랐다. 단숨에 페니스의 뿌리에 힘이 차오르면서 귀두 끝이 저릿했다.

“안… 돼, 안 돼요…. 그만!”

“그게 아니잖아…. 솔직해져요, 빨리.”

팔을 빼내려고 있는 힘껏 버둥거렸지만, 그는 그 버둥거림까지 반동으로 이용해 더 집요하게 안을 찔러 왔다.

엉덩이를 공중에 살짝 띄운 채 붙잡은 나의 손목을 내 골반 위에 눌러 몸을 고정시킨 그는, 자로 잰 것처럼 정확하게 전립선 위를 누르고 빠져나가는 행위를 믿을 수 없이 빠르게 반복하고 있었다.

셔츠에 가려져 있었지만, 탄탄한 허리를 빠르게 흔드는 움직임을 가늠할 수 있었다. 엉덩이의 근육을 조이고 풀기를 반복하며 내 안을 들락거리는 유연한 허리의 들썩거림을.

단추를 풀어 놓은 셔츠 사이로 불룩한 넓은 가슴과 선명하게 파인 복근이 땀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셔츠… 벗어 줘요.”

“…….”

“다 보고 싶어요.”

틀어막을 수도, 삼켜 낼 수도 없는 신음을 마구 터트리느라 입 안은 바싹 말라 있었다. 메마른 목으로 갈라지는 신음을 흘리며 그에게 드러낸 솔직함은, 그만 멈춰 달라는 애원도, 나를 놔 달라는 뿌리침도 아니었다. 내 안을 짓찧는 쾌감을 찾아 앞뒤로 털어 대는 그의 허리와 엉덩이의 음란한 헐떡임을 눈으로 보고 싶었다.

내려다보는 그의 눈이 가늘어지며 만족스러운 웃음기를 띠었다. 손목을 놔준 그는 셔츠를 어깨 너머로 젖히는 동안에도 허리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흐으, 흐… 흐읏….”

그가 손을 놔주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도망갈 것처럼 어깨를 뒤쳤던 나는 자유의 몸이 된 후에도 여전히 그에게 아래를 내주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사정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은 아쉬움이 참기 힘든 간지러움으로 아랫배를 괴롭히고 있었다.

땀에 젖어 피부에 들러붙은 탓에 소매 쪽이 쉽게 벗겨지지 않는지, 그는 두어 번 느슨하게 말아 놓았던 소매를 풀어 냈다. 그러고는 소매가 뒤집힌 채 벗겨진 셔츠를 침대 옆 안락의자에 대강 던져 놓았다.

그의 육체의 아름다운 비율과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탄력이 느껴지는 근육의 굴곡을 훑는 나의 탐욕이 눈 속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을 게 뻔했지만, 감추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애써 감출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폭발하기 직전의 상태처럼 긴장감으로 넘치는 상체의 근육을 부풀리고 숨을 몰아쉬는 그 역시, 자신의 성기와 연결된 채 흐트러져 누운 나의 알몸 구석구석을 눈으로 더듬었다.

진득하게 몸을 내리누르는 듯했던 눈이 한순간 장난기를 가지고 휘어지며 웃었다.

“벗으니까… 이제 내가 마음에 들어요?”

셔츠를 입고 있던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건 아닌데….

“으… 흐으, 흣!”

미처 대답을 할 틈도 없이 전립선을 긁어 대는 빠른 삽입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끝까지 들어오질 않으니 그의 골반이 사타구니에 강하게 부딪혀 오지도 않았고, 그러니 몸이 들썩거리는 반동도 없었다. 그런데도… 내려다보면 아래에서는 그의 허리가 쉴 새 없이 흔들리며 내 안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얌전히 누워 있는 나와 달리 그의 움직임만이 과장되게 부각되는 것은, 평소에 두 사람이 하나로 이어진 듯 함께 흔들리던 일체감과는 또 다른 질감의 흥분을 띠고 있었다. 성행위 중인 그의 움직임과 피부 위에 맺힌 땀방울 하나까지 카메라를 가져다 대고 클로즈업을 한 듯 생생하게 시각을 자극했다.

집요하게 한 지점을 공략하느라 몰입한 그의 표정과 일그러진 미간과 입술, 빠르게 요동치는 외설적인 허리를 홀린 듯 바라보며, 전립선이 문질러지는 쾌감 위에 스스로 흥분을 덧칠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봐요? 좀, 부끄럽네.”

거짓말.

―이라고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올려다보는 내 시선의 변화만으로도 속마음을 눈치챈 건지, 나의 가슴 양옆으로 주먹을 짚고 상체를 구부리면서 그가 멋쩍게 웃었다. 여유를 가장하고 있었지만,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차오르는 흥분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흐으… 흐윽, 흐.”

자세를 바꾸면서 엉덩이 양쪽으로 더 깊이 파고든 그의 허벅지 위에 올려진 다리와 엉덩이가 공중에 살짝 들렸고, 성기를 반 정도만 넣은 상태에서 그가 큰 원을 그리듯 허리를 둥글렸다. 회전하는 페니스를 따라 입구가 넓게 벌어지는 생생한 느낌에 도리질 치며 그의 팔뚝에 팔을 감았다.

일그러져 꽉 감긴 눈꺼풀을 어렵게 밀어 올리면, 그가 심각한 문제를 앞에 둔 것 같은 얼굴로 주의 깊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스르륵, 굵은 음경이 내벽을 질질 끌듯이 문지르며 천천히 밖으로 빠져나가는 감각에 나의 눈이 커졌다.

“허… 허흑… 흐….”

입구에 귀두가 턱 걸리는 느낌이 들었고, 나도 모르게 안 된다고 고개를 저으며 그의 팔을 꽉 붙잡았다.

“으읏. 흣!”

그가 허리를 더 뒤로 당기자, 애널의 입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귀두가 탁 튕기면서 빠져나가 그의 아랫배를 갈겼다. 쿠퍼액으로 미끈거리는 귀두가 입구의 위쪽을 들어 올리듯이 튕겨 나가는 감각은 발가락을 곱아들게 했다. 아니, 발가락이 쫙 펼쳐지게 했다. 뭐가 됐든 발가락까지 동원해 몸 밖으로 표출해야만 할 것 같은 저릿함이 몸을 울려 댔다.

같은 행위가 몇 번이나 반복됐다. 더 서두르지도 않고, 더 뜸 들이지도 않는 일정한 속도로. 그는 절반만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 형태감이 뚜렷한 귀두로 애널의 테두리를 튕기며 자극했다. 그러나 결코 마지막까지 들어오지는 않았다.

사정의 바로 문턱까지 두어 번이나 도달했다가 밀려난 상태에서 말초신경이 모인 입구를 괴롭히는 자극이 더해지자, 이제 나는 완전히 솔직해지고 비굴해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기둥처럼 버티고 있는 그의 팔에 이마와 콧대를 비비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제발요….”

사정을 코앞에 두고 예민해진 육체는 원하는 방식으로 절정을 맞길 원했다. 더 이상 내가 이전 같은 건조한 방식의 자위로는 사정할 수 없듯이. 내벽이 꿀렁거리고 입구가 움찔거리는 것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알아채고 그것에 자극받기를 원했다.

그가 허리를 지그시 눌러 오면서 상체를 낮춰 콧등에 입을 맞췄다.

“뭐가요.”

누가 이 밀애를 엿듣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일부러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이번에는 아주 조금씩 눈금을 나누듯 쪼개어 안으로 들어오는 음경의 진입에 완전히 애가 달아서 공중에 대고 아예 발을 굴러 댔다.

그가 안내하는 쾌락의 방향은 그렇게나 다양했고, 그가 나를 공략하고 함락할 수 있는 기술은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삽입도 다 같은 삽입이 아니었다. 어떻게 이런… 골든 알파는 다 이렇게… 잘하는 건가. 섹스를.

“배 속이… 이, 이상해요….”

“어떻게 이상한데요.”

어금니를 꽉 깨문 주름진 미간이 그 역시 몰아붙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는데, 그런데도 오늘 그는 며칠 전보다 인내심이 강했다.

내 안에 깊숙이 들어오는 게 싫거나… 아니면 겁나는 사람처럼, 입구에서부터 전립선까지만 자극하고 있었다. 한 번도 성기를 끝까지 밀어 넣은 적이 없었다.

“가려워요…. 안이, 배 속이 가려워요….”

의식하지 못했는데, 실제로 나는 아랫배 위를 긁어 대고 있었다. 피부 위를 긁는다 해도 해소될 수 없는 안쪽의 가려움인데.

그런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숨결이 누가 확 헤집어 놓은 것처럼 와르르 무너지며 거칠어졌다.

방어가 허물어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려, 가슴 옆을 짚은 그의 팔목에 입을 맞췄다.

“제발… 그냥, 세게… 안쪽까지, 해 줘요….”

그런 내 모습이 원하는 형태의 섹스를 얻기 위해 아양을 떨거나 비위를 맞추려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이런 일로 나를 위에서 내려다보듯 싸구려 정복감에 휩싸일 사람이 아니었고, 손이 닿지 않는 내벽을 문질러 이 근지러움을 해소해 줄 사람은 그뿐이었으니, 이 순간 당장 그 쾌감에 닿을 수만 있다면 더한 짓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지금까지 침대 위에서 그의 귓가에 쏟아 놓았던 말들을 떠올리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번들거리는 눈으로 내려다보며 짧게 묻는 그의 질문을, 어쩌면 나는 예상했던 것 같았다.

공포에 떠는 사람처럼 불규칙하게 갈라진 숨을 호흡하면서, 아랫배 위를 긁던 손을 다리 사이로 가져가 교접 부위를 더듬었다. 오케이 사인만 떨어지면 곧바로 나를 통째로 삼켜 버릴 준비를 마친 것처럼 그의 눈이 무섭게 이글거렸다.

그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애널 밖으로 반 이상 빠져나와 있는 그의 음경의 뿌리를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찾아 쥐었다. 그리고 내 안으로 잡아당겼다.

내려다보는 그의 동공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이라도 마주한 것처럼 확장된 채 진동했다. 입술이 벌어지면서 탄성 같은 신음이 흘렀다.

차라리 그와 나 사이의 거리를 지워 버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아, 다른 한 팔로 그의 목을 감아 당겼다. 뺨과 뺨을 맞대자 서로의 흐트러진 숨결이 서로의 귀를 적셨다.

“더 세게… 이거 더, 넣어 줘요…. 배 속에 꽉 채우고, 안에 전부… 이걸로, 자지로 문질러 줘요. 부술 것처럼 흐, 흔들어 줘요…!”

한번 입을 열자 말에 가속도가 붙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없이 음담을 쏟아 놓던 입을 그의 입술이 틀어막았다. 내가 말로 뱉어 버리기 전에 입 안을 뒤져 자신이 먼저 그 모든 음탕한 밀어들을 삼켜 버리려는 사람처럼 온 입 안을 거칠게 헤집었다.

“음! 으으, 읍!”

그가 나머지 절반의 음경을 단번에 밀고 들어왔다.

봐주는 것 없이 움츠리지 않고 넓게 펼쳐 입 안을 쑤시는 그의 혀를 머금은 나의 신음은 동굴 속에 있는 것처럼 둔하게 울렸다.

뿌리를 쥐고 있던 손이 그의 음모와 나의 다리 사이에 끼어 버렸다. 그는 놔주지 않겠다는 듯 사타구니를 강하게 비틀어 나의 손까지 압박했다. 손등에 까슬하게 비벼지는 음모의 감촉에 허리가 비틀렸다.

펄떡거리던 혀가 입 안에서 빠져나가고, 막혔던 숨을 시원하게 터트리기도 전에 이번엔 입술이 짓씹혔다.

“대체 이게… 뭘 막아 준다는 건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포악하게 입술을 씹는 그는 화가 난 사람 같았다. 최대 속도로 말을 모는 기수처럼 공중에 띄운 허리와 엉덩이를 격렬하게 흔들어 안을 찌르는 삽입도 이전의 망설임이 무색하도록 거침없었다.

하지만 내려다보는 눈은 섹스를 처음 해 보는 소년처럼 당혹감과 두려움으로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지만, 그렇게 보였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응? 대체 어떻게 해야….”

탄식하듯 그렇게 읊조리며 그는 이번엔 자신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다리 사이가 아닌 전신을 꽉 채우고 쿵쿵 찧어 대는 것 같은 삽입에 눈앞이 흐릿해졌다.

이상하다고. 죽을 것 같다고. 머릿속에 들어 있는 그나마의 얕은 지식들과 나쁘고 좋았던 모든 기억마저 전부 날아가 버릴 것 같다고. 관자놀이를 향해 죽 그어져 내리는 물기를 느끼며 그에게 호소했다.

“그게 왜 무서워…. 그러라고 내가 지금, 열심히 허리 흔드는 건데.”

눈물의 흔적을 지워 주는 그의 손길에 눈을 떠서 그를 올려다봤다. 그의 말이 맞았다. 오늘 나는 그것을 원했다.

“전부 지워 버리고 날려 버려. 응? 그냥 다 날려 버리자.”

명령형을 청유형으로 정정하며 호흡 속에 섞어 속삭인 그의 중얼거림은 연약하게 흩어졌다. 더 이상 그는 말이 없었다.

매트리스 안으로 밀어 넣을 것처럼 전신의 무게를 이용해 나를 내리눌러 고정한 그는 한순간 허리의 흔들림을 멈추고 꾸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허윽, 헉… 커흑.”

강렬한 중독성을 가진 노팅의 팽창이 주는 압박감에 차마 신음을 흘리지도 못하고 입을 벌린 채 컥컥거리며 배와 가슴 위에 정액을 쏟아 냈다. 그렇게 도달하고 싶었던 사정인데, 페니스로 느껴지는 앞쪽의 쾌감보다 새로운 맥박을 심어 놓듯 쿵쿵대는 안쪽의 쾌감이 우세했다.

안에서 그가 뛰고 있었다. 굳이 뒤로 빠졌다 앞으로 들어서는 마찰 없이도 노팅 상태의 음경은 살갗을 가르고 금방 끄집어낸 심장처럼 스스로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며 배 속을 두드려 댔다.

장기를 밀어 올려 목구멍을 틀어막는 것 같은 그 홧홧한 열기에 전신이 덜덜 떨렸다. 위험한 생각이지만, 절정의 순간에 목을 조르는 사람들의 기호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아래에서 밀어 올리는 압박에, 그의 키스로 인한 압박이 더해졌다. 호흡은 부족하기만 했지만, 그가 흘려 넣어 주는 향기에 매달려 키스를 거부하지 않았다.

압도적인 힘에 의해 짓눌리고 몰아붙여지는 섹스는 자신을 잊게 했다. 나의 모든 것을 해체해 드러내기를, 드러난 그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를 요구당하는 것 같은 섹스였다.

모든 것이 쓸려 나가고, 그 빈자리에 그의 모든 것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그에게도 이 섹스가 그런 의미일 거라는 막연한 확신이 주는 기묘한 안도감과 함께 향기 속에서 눈을 감았다.

■ ■ ■

침실 안쪽 드레스룸에서 새 시트를 가져온 그가 웅크린 내 알몸 위에 그것을 덮어 주었다.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목이 잔뜩 쉬어 있어 민망했지만, 목소리를 가다듬을 기력조차 없었다.

높은 교성을 질러 대는 것도 아닌데, 그와의 관계 후에는 언제나 목이 잠겨 버렸다. 신음을 인위적으로 억제하려는 노력도 목에 무리를 주는 모양이었다.

내 목소리가 여느 때처럼 갈라졌듯, 그의 성기 역시 사정을 했음에도 여전히 빳빳했다. 발기 전 모습으로 되돌아갈 때까지 섹스를 해 본 적이 있기는 할지, 있다면 누구와 어떤 섹스를 얼마나 오래 나누고 난 뒤였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물어볼 용기는 없었지만.

노팅을 포함해 여러 번 사정하며 아주 긴 시간 섹스했던 지난번과 달리 이번은 비교적 짧게 끝났지만, 척추가 흐물흐물해진 것 같은 탈력감은 마찬가지였다.

노팅을 하는 쪽인 그는 어떤지 몰라도, 받아 내는 쪽에는 상당히 체력 소모가 큰 행위인 것 같았다. 아직도 안쪽에 저릿저릿한 잔류감이 남아 있어, 간헐적으로 몸이 바르르 떨려 왔다.

어쩌면 이렇게까지 진이 빠지는 것은 내가 베타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알파의 노팅은 어쨌든 베타를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시트로 몸을 덮어 준 뒤 그대로 방을 나갔던 그가 커다란 컵에 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빈집이라 생수는 없지만, 정수기에서 따른 물이니까 좀 마셔요.”

주섬주섬 상체를 일으켜 앉아 컵을 받아 들었다. 잘게 떨리는 팔이 불안한지, 내가 컵을 입술에 가져다 대고 제대로 마실 때까지 그는 컵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곁에 서서 지켜보는 그의 페니스가 여전히 단단하게 발기한 채 번들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어색하기만 했다. 내 안에서 빠져나간 후 닦아 내지 않은 페니스에는 격렬한 삽입과 사정의 흔적이 허옇게 말라붙기 시작하고 있었다.

“담배 한 대 피울 정도로만 잠깐 쉴까요.”

마시고 난 컵을 받아 협탁 위에 내려놓으며 그렇게 제안한 그는 침대를 빙 돌아 맞은편으로 걸어갔다. 거추장스럽게 끄덕거리는 음경의 흔들림을 막기 위해 그는 다리 사이를 쥐고 움직였다.

성적인 뉘앙스가 전혀 없는 일상적이기까지 한 움직임이었지만, 붙잡고 움직이지 않으면 불편할 정도로 큰 성기라는 자체가 이미 너무나 성적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재킷을 집어 올리기 위해 그가 허리를 숙이자, 다리 사이로 음낭이 엿보였다. 묵직한 음낭의 탄력적인 흔들림을 흘깃거리며 나는 시트 안에서 몰래 허벅지 사이를 비벼야 했다. 살짝 발기가 될 것 같은 성기를 숨기기 위해 침대 헤드에 기댔던 몸을 스르륵 끌어 내려 매트리스 위에 엎드렸다.

그런 나를 힐끗 내려다보며, 그가 재킷 안에서 담배를 꺼내 선 채로 불을 붙였다.

완벽이라는 단어를 인간의 형태로 구현한 것 같은 옆모습이었다.

가슴팍의 두툼함과 근육의 부푼 정도, 등에서부터 날카롭게 꺾어져 내려가는 날렵한 허리선과 단단하게 솟아오른 엉덩이, 길고 탄탄한 다리. 언젠가 잡지 속에서 발견하고 유니 누나와 주한이 형이 킥킥거렸던, 외국인 모델의 다리 사이에 끼워져 있었던 샴페인 병을 떠올리게 하는 성기까지.

숱이 많은데도 늘 가볍게 나풀거리는 검은 머리카락과 감정에 따라 색과 온도를 달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회색이 섞인 푸른 눈동자.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가 100퍼센트 외모 때문이라 하더라도 나 자신조차 수긍할 수밖에 없을 만큼, 새삼 그는 아름다웠다.

그러나 처음 만났던 무렵에 그를 통해 보았던, 자신만만하고 흠집 하나 없는, 화려하게 세공되어 진열장 속에 전시된 보석 같은 아름다움은 아니었다.

그 역시도 마음을 누르는 과거를 가지고 있었고, 그 과거에 지배받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상대를 위로하고 싶지만 방법을 알 수 없어 횡설수설하기도 하는 서툰 면도 갖고 있었다.

자신만의 일그러짐과 흠집으로, 빛을 반사시켜 변형을 일으키는 지금의 그가 보여 주는 아름다움이 비교할 수 없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의 굴곡과 흠집을 더 알고 싶었고, 그가 원한다면 나에 대해서도 알려 주고 싶었다.

누군가는 세상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치부해 버릴지 몰라도, 당사자였던 나에게는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도록 존재를 일그러뜨려 버릴 만큼의 무게를 가졌던 일들뿐만 아니라, 사소하고 시시하고 웃음 나는 자잘한 일들에 대해서까지.

타인에게 나를 이야기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불안을 잠재우는 커다란 다정함 속에서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와 몸을 겹칠수록 감정은 짙어졌다.

이런 친절함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주한이 형이나 유니 누나가 어떻게 그를 연애의 대상으로서 좋아하지 않고 지낼 수 있는지 신기할 만큼.

안락의자 앞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재떨이를 가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그가 꽤 많이 흐트러져 버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담배를 빨아들였다.

필터를 문 채로 기지개를 켜듯 두 팔을 들어 올리고 가볍게 몸을 푸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고마워요.”

“…….”

동작을 멈추고 놀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그가 천천히 팔을 내리고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손가락으로 옮겨 쥐었다.

“고마울 만큼 좋았습니까.”

웃음기가 스민 목소리와 표정은 섹스에 대한 만족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고 설명을 덧붙일까 했지만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았다. 담배를 쥐지 않은 그의 손이 다가와 여전히 매트리스에 뺨을 대고 엎드려 늘어진 나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다 안다는 듯한 미소와 함께.

정원으로 통하는 유리문을 열어 놓은 탓에 나무 데크 위를 두드리는 빗소리가 가까웠다. 공항을 떠나올 때보다 빗줄기가 굵어져 있었다. 속이 비치는 얇은 커튼이 불규칙하게 공중에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가라앉은 잿빛 배경 속에서 나를 만지는 그의 모습이 특별한 질감을 가지고 눈 속에 새겨지는 듯했다.

머리카락에서 손을 거둔 뒤 왼쪽에 내려놓은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면서 그가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사실은 이 집에서 지내는 것에 대해서는 불편해할 거라고 예상했어요. 알면서도 혹시나 해서 제시해 본 플랜 B였고… A안은 따로 있습니다. 제안한 순서는 바뀌었지만.”

그가 담배를 쥔 손으로 매트리스 위를 짚으며 내 쪽으로 몸을 돌려 눈을 맞춰 왔다.

“한 실장도 서이현 씨가 혼자 지내는 것보다는 나하고 같이 지내는 게 좀 더 안심이 될 것 같다고 했고. 내 생각도 그래요. 당분간은 좀 불안할 것 같은데, 그렇다고 매번 샤워하러 들어갈 때마다 미리 연락을 달라고 하는 것도 그렇잖아요?”

장난기를 섞어 그렇게 말한 그는 담배를 짧게 훅 빨아들였다. 전신이 노곤하고 허리에 힘을 주기가 어려웠지만, 진지하게 들어야 하는 이야기인 것 같아 엎드렸던 몸을 일으키며 시트를 모아 하반신을 덮었다.

눈높이가 훨씬 비슷해진 위치에서 그가 나에게 잘게 부서진 시선을 주었다. 그러고는 피하듯 고개를 돌리며 담배를 빨아들였다.

“나도 여유를 주고 싶지만… 서이현 씨도 알다시피 상황이 이렇잖아요. 안전을 확보하는 게 최우선이라 나도 양보할 수가 없어요. 이해해 줘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타협의 여지를 남겨 두지 않으며 양보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아 버리는 내용과는 어울리지 않는 간절함이 섞여 있었다.

타인인 그가 나의 안전을 이유로 나에게 이해를 호소하는 것이 이상했다.

몸을 나눈 상대에 대한 의리 때문이든, 전속 작가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든, 그 외 다른 사소한 잔정이 덧발라진 무엇 때문이더라도… 나의 안전에 대해 강하게 염려하며, 제안을 사양할 수 없게 하려는 그의 단호함은, 술보다 쇼핑보다 호화로운 빌라에서의 생활에 대한 제안보다 더 분명한 위로가 되었다.

지겨울 정도로 끈질긴 장맛비 탓에 회색빛으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공기 속에서 미간을 좁힌 채 담배를 빨아들이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내 안에, 갑작스럽게 찾아오지만 지극히 자연스러운 욕구인 허기처럼, 문득 뚜렷한 충동이 만져졌다.

억지로 쥐어짜지도 않았고, 그래야 한다고 자신에게 강요하지도 않았다. 서서히 차올라 포화 상태에 이른 수위가 둑 위로 흘러넘치듯, 눈앞의 그를 그리고 싶다는 욕구의 발생은 자연 발생적이었다.

완전히 맥이 끊겨 버렸다고 포기하고 있었던 감각이 되살아날 것 같은 가물거림에 집중하려 그의 옆모습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왜 그래요?”

불안하게 떨리는 눈동자로 몸을 뻣뻣하게 굳힌 나를 돌아본 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시선을 피하며 어설프게 대답을 얼버무렸다.

“아니요, 그냥… 죄송해서….”

아직도 그 얘기냐며, 그가 피식 웃으며 팔을 뻗어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머그의 갈라진 실금에서, 공사가 중단된 공터에 버려진 시멘트 포대에서, 좌판 앞에 뚱하게 앉아 있는 노파의 얼굴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는 놀이는, 스스로 포기한 특권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붓을 오래 놓은 대가로, 두 번 다시는 그런 식으로 그리고 싶은 대상을 발견하지 못할 거라고.

그러나 그의 말이 옳았다.

홍콩에 가기 전, 옥탑방의 현관 밖에서 통화했을 때. 그는 나에게 분명 또 그리고 싶은 것이 생길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사실이었다.

머리 위에서 펄떡거리는 맥박이 전신을 찧어 대는 듯했다. 그가 내 안에서 노팅을 할 때처럼.

■ 억제 ■

평일 저녁.

귀가 도중 한 약국 앞에 차를 정차시킨 남자는 담배를 피우며 잠시 시간을 끌다 곧 마음을 정한 듯 반도 피우지 않은 담배를 서둘러 재떨이에 비벼 끄고 차에서 내려섰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았지만, 일터에서도 거주지에서도 애매한 거리만큼 동떨어진, 평소 찾을 일이 없는 지역을 선택한 그는, 중형 종합병원 앞에 자리 잡은 여러 개의 약국 중 가장 규모가 큰 약국으로 들어섰다.

출입문 밖에는 오후 10시까지라고 운영 시간을 표기해 둔 플라스틱 안내판이 걸려 있었지만, 이제 막 8시가 되었을 뿐인데도 약국 안은 한산하기만 했다.

“어서 오세요.”

입구를 등지고 앉아 컴퓨터 화면에 골몰하고 있는 일상복 차림의 중년 남성 대신 안쪽 조제실에서 나타난 흰 가운의 약사가 남자를 맞이했다. 3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무엇이 필요하냐는 질문을 미소로 대신하고 있었다.

남자는 흔히 볼 수 없는 이국적인 분위기의 상당한 미남자였고,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먼 거리에서도 이목을 끌 수밖에 없을 정도의 체격 좋은 장신이었지만, 누구에게 쫓기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초조해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고급스러운 취향이 자연스럽게 배어나는 옷차림과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작은 행동 하나에서도 드러나는 세련된 매너를 보자면, 남자는 적어도 금전적으로 위기에 처해 강도질을 하려는 괴한은 아닐 것 같았다.

쉽게 말 못 할 증세 때문에 약국을 찾는 환자는 사람들의 생각보다 훨씬 흔했다. 그녀에게는 단순한 질병에 불과한 무좀이나 치질도 환자 당사자에게는 꺼내기 어려운 얘기일 수 있었다.

그러나 카운터 앞까지 와서도 남자가 신경질적인 표정을 지으며 망설이는 것은 타인에게 밝히고 싶지 않은 수치심 때문이 아닌, 스스로 느끼는 굴욕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택지가 없었다. 그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열었다.

“억제제… 구입하려고 합니다.”

“네, 신분증 확인할 수 있을까요.”

남자의 일상적이지 않은 태도에도 불구하고, 약사는 의례적 태도로 일관했다. 그녀의 그런 대응이 남자를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해 주었다. 러트 상태의 알파인가 싶어 짐승 보듯 흘깃거리지 않아 줘서 고마웠다. 그런 시선을 받았다면 이 상황이 더욱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러트가 아니었기 때문에 더더욱.

알파라는 표식을 확인한 그녀는 남자에게 신분증을 돌려주며 물었다.

“평소 복용하시던 제품이 있으면 그걸로 드릴까요?”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따로 없습니다.”

잠시 등을 돌리고 뒤쪽의 선반을 눈으로 더듬은 약사는 짙은 녹색과 금색으로 고급스러움을 강조한 디자인의 종이 상자 하나를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가장 많이 찾으시는 제품이에요.”

상자를 그녀 쪽으로 밀어 놓으며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이미 사용해 봤습니다. 좀 더 효과가 강한 거로 찾고 있습니다.”

남자는 다른 약국에서 이미 억제제를 구입해 복용해 본 후였다.

억제제라니. 까마득한 소년 시절, 제2차 성징과 함께 찾아온 발현 초기에 보조제로 잠시 복용했던 것이 억제제에 대한 남자의 경험의 전부였다. 골든 알파인 그에게는 억제제가 필요 없었고, 억제제 따위로 발정을 다스려야 하는 짐승이 되고 싶지 않았기에 골든 알파로서 자신을 완성하려 더 독하게 노력했었으니까.

그러나 약 20년 만에 다시 찾은 억제제는 거의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초반에는 조금 약효가 있나 싶었지만, ‘그’가 자신에게 성욕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곧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시다시피 오메가의 히트는 호르몬 작용에 의해 어느 정도 규칙적인 사이클을 가지고 있어 좀 더 안정적으로 근본적인 억제가 가능하지만… 알파의 러트는 본인의 성욕이나 오메가의 페로몬에 의한 자극으로 발생하는 돌발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억제제라고는 해도 후각을 둔화시키는 정도의 작용밖에는 할 수 없어서요.”

약사는 다소 난감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남자 역시 잘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오메가의 성적 충동이 강해지면서 다량의 페로몬을 분비하는 히트는 일정한 호르몬 분비 주기에 따라 발생했지만, 알파의 발정은 그렇지 않았다. 규칙성도 주기도 없다. 성욕을 느끼면 바로 페로몬을 발산하고, 반대로 오메가의 페로몬에 노출돼도 바로 반응해 성욕을 일으킨다.

그 자신이 베타나 오메가보다 알파가 더 우월하다고 느낄 수 없었던 원인 중 하나였고, 골든 알파가 되기 위해 노력을 퍼부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상대가 주는 자극에 의해 페로몬을 개방하고 상대의 페로몬에 탐닉하는 동물성은, 미숙했던 소년 시절과 함께 완전히 막을 내렸다고만 생각했었다.

“좀 더 강도가 높은 제품이 있긴 하지만, 일시적으로 후각이 거의 기능을 못 하게 될 수 있어요. 지속적으로 복용하실 경우에는 후각 기능 자체에 근본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구요. 알고… 계시죠?”

경직된 남자의 안색을 살피며 약사가 조심스럽게 확인하듯 물었다.

“장기 복용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걸로 두 상자 부탁합니다.”

남자의 말에 그녀는 좀 전의 상자보다 더 작은 상자 두 개를 포장해 건넸다. 한 번에 두 알, 하루에 두 번까지만 복용하라는 주의사항과 함께.

“혹시… 골든 알파 아니세요?”

계산을 마친 후 카운터 앞을 돌아서려는 남자를, 그녀가 불러 세웠다. 그러고는 돌아본 남자를 향해 신중한 어조로 덧붙였다.

“골든 알파이신데 갑자기 억제제가 필요해진 거라면, 일반의약품을 복용하시는 것보다는 전문의를 만나 보시는 게 좋을 거예요.”

남자는 그녀의 제안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전문의 이상인, 해당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조차도 남자가 처한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골든 알파가 일시적으로 페로몬 조절 기능에 이상을 보이는 것. 그보다 복잡한 문제였다.

약이 든 봉투를 조수석에 던져 놓은 남자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지금 당장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저깟 캡슐 몇 알뿐이라는 사실에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연속 세 개비의 담배를 모두 태운 후에야 남자는 다시 핸들을 잡을 수 있었다.

■ ■ ■

“그러더니 또 퇴짜를 놨다니까?”

유니 누나는 양팔을 활짝 벌려 보이면서 억울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팬텀에서 새로 뽑고 있는 직원의 면접 얘기였다. 일주일 동안 인터뷰를 하러 왔던 사람들 중 형과 누나가 나름대로 추려 놓은 후보들을 그가 최종 면접에서 모두 탈락시켰다며 불만이 대단했다.

“지금이야 취업 자리 알아보는 4학년들이 몰리는 시기라 신청자가 많긴 한데, 이대로 가다가는 휴가는커녕 8월에 휴일 하루 못 쓰고 야근만 하다가 시카고 가게 생겼다니까? 아니, 처음부터 마음에 쏙 드는 사람 찾기가 쉽냐고. 우리 대표님 진짜 왜 그렇게 까다롭냐.”

뒷좌석에 나와 나란히 앉은 누나는 주한이 형이 앉아 있는 조수석을 끌어안으며 울상을 지었다.

“제가 갑자기 그만둬서….”

“네 잘못 아니니까 엉뚱한 생각은 하지 말고.”

사과의 말이 길어지기도 전에 누나는 검지를 세워 단호하게 내 입을 막았다.

유니 누나와 주한이 형, 그리고 나는 대형 마트에서 만나 함께 장을 보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지난주 일요일에 형과 모래가 떠나고, 바로 그다음 월요일부터 나는 팬텀에 출근하지 않게 됐다. 그리고 그의 집 지하로 짐을 옮겼다.

그가 말했던 플랜 A는 자신의 집 지하였다.

지하라고는 해도, 계단을 올라간 1.5층 높이가 1층이었던 만큼 절반 이상이 지면 위로 노출된 공간이었다. 창이 크고 많아서 빛도 충분했고, 통풍도 문제없었다. 지하 특유의 습함이나 쿰쿰함이 전혀 없이 쾌적했다.

이전 집주인이 당시 유학 중이던 아들이 귀국하면 지내게 하려고 원룸식으로 깨끗하게 공사를 해 두어 지내기에 불편한 점은 없을 거라던 그의 설명대로였다. 바닥이나 벽면도 깔끔했고, 주방과 욕실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그가 제시한 A와 B 중에 꼭 골라야 한다면 물을 것도 없이 내 선택은 A였다.

그것 역시도 나에게는 충분히 호화스러운 공간이었지만, 그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팬츠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에폭시 바닥 위를 서성거리며 몇 번이나 이전 집을 다시 한번 고려해 보기를 권했었다.

배낭 하나와 쇼핑백 두어 개로 끝난 조촐한 이사이긴 했지만, 오늘은 집들이 비슷한 개념으로 그가 제안한 자리였다.

“애인 고르는 것도 아닌데 무슨 그렇게 느낌 타령이냐고. 너 처음에 도와주러 왔을 땐 좀 튕기긴 했어도 못 이기는 척 마음대로 하라고 하시더니, 아… 차라리 중매를 서는 게 쉽겠어.”

누나의 정당한 푸념을 듣는 동안, 처음에 그가 나를 대했던 무심함은 차라리 우호적인 편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끝까지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귀찮은 사연까지 가진 나를 절대 직원으로 채용하지 않았을 그라는 것을, 지금은 알 수 있었다.

“어차피 얼굴 맞대고 같이 일할 사람은 권주한하고 나잖아! 월요일에 면접 잡힌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밀어붙인다.”

누나가 결의를 다지는 사이, 자동차는 그의 집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짐을 옮겨 주시겠다는 기사님을 만류한 우리는 한 사람당 두 개씩 장을 본 봉투를 트렁크에서 꺼내 들었다.

당분간 외출 시에는 기사님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움직이는 게 좋겠다는 건 그와 실장님의 의견이었다. 출근을 하지 않으니 외출할 일도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기사님은 그가 귀가할 때까지 주차장에 따로 마련된 초소에서 늘 대기하고 계셨다. 친절과 배려를 받고 있는 입장에서 내 마음이 불편한 것만 내세워 고집을 부릴 수도 없긴 했지만, 어색하고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저 기사님, 분명히 경호원도 겸하는 것 같지? 그… 너희 누나 아버지라는 분, 그렇게 무서운 분인 거야?”

스튜디오로 연결된 복도를 걸으면서, 등 뒤로 이미 문이 닫혔음에도 누나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모래와 형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나를 지금의 생활에서 낚아채 갈 수 있는 사람인가를 묻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임 선생은 ‘그렇게’ 무서운 분이 맞긴 했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원래의 나 자신에 대한 균형감을 잃게 하는 것 같아 안정감을 느끼기 어렵네 어쩌네 해도, 임 선생에 의해 마을로 끌려가 모래와 형의 위치에 대해 추궁당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해결할 능력은 없으면서 도덕적인 타령만 하다 주변에 폐를 끼치는 할리우드식 애니메이션의 조연처럼 굴고 싶지는 않았다.

“누나랑 형은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대?”

스튜디오로 이어지는 문 앞에 먼저 도착한 주한이 형이 이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아직 이동 중이에요. 캘커타라고 어제 메일 왔더라구요.”

모래, 형과는 그가 만들어 준 이메일 계정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를 통해 동부 유럽으로 진입한 두 사람은 동부 유럽권 몇 개국을 거쳐 러시아를 가로지르다 몽골과 중국을 종단해 인도에 접어들었고, 그곳에서부터 육로와 항공로, 해로를 번갈아 이용하며 발리로 접근해 나갈 계획이었다. 채 하루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그가 계획하고 준비해 준 루트였다.

“무사히 도착할 거야. 대표님 계획이잖아.”

짐 때문에 두 손이 묶인 누나가 머리를 기울여 내 관자놀이에 가볍게 부딪히며 말했고, 위로하려는 누나의 의도를 알 것 같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 좀 빨리 열어 봐. 무거워 죽겠다.”

주한이 형의 엄살 섞인 재촉에 패스워드를 눌러 도어록의 잠금을 해제했다.

주차장에서부터 연결된 복도 중간쯤에 스튜디오로 이어지는 문이 있었고, 그 문을 지나쳐 오른쪽으로 꺾으면 정원으로 나갈 수 있는 또 다른 문이 나오는 구조였다.

내가 온 뒤로 그는 정원에서부터 이어진 문을 통해 주차장을 이용하고 있었지만, 스튜디오 내부에도 1층과 연결된 계단이 있기는 했다. 그가 함께 식사를 하자고 부르면 내부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사실… 지난 일주일, 월요일에 짐을 옮긴 후 어제 금요일까지, 그와의 사이에 스킨십이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그가 밖에서 포장해 온 초밥으로, 또 한 번은 그가 만들어 준 오일 파스타로 식사를 한 뒤 얘기를 조금 나누다가… 그대로 키스를 하고 애무를 나누게 됐었다.

하지만 두 번 모두 삽입은 하지 않았다. 서로 손으로 사정시켜 준 것과 선 채로 허벅지 사이에 문지른 것이 다였다.

“와… 이게 무슨 지하야? 대학가 원룸촌 가면 옆 건물하고 다닥다닥 붙어서 2층, 3층인데도 어두컴컴한 집들이 수두룩한데! 호화판이네!”

흥분한 주한이 형은 바닥에 봉투를 내려놓고 스튜디오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가 이곳을 처음 보여줬을 때의 내 반응과는 사뭇 다른 열광적인 리액션이었다.

“스튜디오식으로 탁 트여서 그런지 더 넓어 보인다. 이쪽은 작업실로 쓰고… 저쪽은 침실. 그런가 봐?”

주한이 형이 한가운데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짐 옆에 나란히 봉투를 내려놓은 누나가 저쪽 코너 너머 슬쩍 보이는 침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주한이 형은 벌써 침대 쪽으로 달려가 매트리스의 쿠션감까지 확인하는 중이었다.

누나와 내가 서 있는 문 앞쪽의 중심 공간은 그림 작업을 위한 도구들 외에는 거의 짐이 없었다. 뒤집힌 채 창문 아래에 일렬로 놓인 캔버스를 흥미롭게 바라보며 누나가 물었다.

“아직 작품은 없어?”

“안 내키면 공개 안 해도 되고. 명색이 우리도 갤러리 직원들인데 작가 의사 존중할 줄은 알지.”

어느새 이쪽으로 되돌아온 주한이 형이 내려놓았던 봉투 앞에 쭈그리고 앉아 바나나 하나를 꺾어 껍질을 벗기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런 건 아닌데… 너무 오래 쉬어서, 아직은 손 푸는 정도라….”

그가 준비해 준 도구와 재료들이 아까울 정도로 아직은 스케치 위주로만 그리고 있었고, 이틀 전부터 유화 물감을 조금 건드려 본 게 전부였다. 하지만 작업 시간은 빠르게 늘고 있었다. 그가 출근하고 퇴근할 때까지 거의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걱정했던 것처럼 그림 그리기가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단지 손을 움직여 대상을 그려 낼 뿐, 아직은 그 안에 나를 담지 않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언제까지고 연습 삼아 소묘만 그리고 있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림을 그리겠다는 약속으로 돈을 끌어다 쓴 입장이니, 나에게는 경제적 가치를 가진 그림을 그려 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저… 요즘에 손 푼다고 정물이랑 풍경 위주로 그리고 있는데, 혹시 시간 되실 때 형이 모델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인물도 그려 보고 싶어서.”

바나나를 입 안 가득 우물거리며 빌트인으로 제작된 가구의 선반에 꽂힌 책과 화집, 전시회 팸플릿 등을 들춰 보던 형이 손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나? 백유니 아니고, 나?”

“눈매나 광대, 턱선 같은 얼굴 윤곽이… 형이 더 개성이 강해서 그리기 좋을 것 같단 생각에….”

누나가 혹시 섭섭해했을까 싶어 열심히 이유를 설명했지만, 정작 누나는 픽 웃으며 가볍게 넘겼다.

“그걸 뭘 그렇게 열심히 변명을 해. 이런 거 갖고 서운해하고 그런 사람 아니다?”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는 멋쩍음에 누나를 보며 웃는데, 위쪽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착했으면서 왜 이렇게 안 올라와? 배 안 고파?”

1층과 연결된 계단의 중간쯤에 멈춰선 그가 난간에 비스듬히 팔을 기댄 채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현이 방 구경한다구요. 와… 소속 작가가 되니까 대우가 다르네요. 여기 지하 이렇게 좋은지 몰랐는데.”

그는 계단을 내려오며 내 쪽을 힐끔 쳐다보긴 했지만, 누나의 말에 별다른 대꾸 없이 바닥에 내려놓은 봉투에 관심을 기울였다.

“뭘 또 이렇게 많이 샀어? 다 먹지도 못할 거면서.”

“어차피 올여름에 휴가도 반납하고 일해야 하는데, 이런 거로라도 대표님 벗겨 먹어야죠. 그리고, 전부 다 먹을 거거든요?”

주한이 형이 밉지 않게 실실거리며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고, 그런 형의 이마를 밀치면서도 그 역시 싫지 않은 듯 웃었다.

형은 의외로 스킨십이 자연스럽고 애교도 있는 편이었다. 그에게뿐만 아니라, 실장님이나 누나에게도 그랬고, 나에게도 어깨에 팔을 걸치거나 머리를 기댈 때가 많았다.

짐을 들고 투닥거리며 1층으로 올라가는 그와 주한이 형은 사이좋은 형제처럼 보였다. 그와 키스를 하고 섹스는 해도 저런 식으로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법은 모르는 자신의 고리타분한 성격에 대해 생각하며 그들을 뒤따랐다.

“어? 그림. 그림 왜 내렸어요?”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주한이 형이 소파 위 빈 공간을 가리키며 멈춰 섰고, 당황한 나의 눈이 무의식적으로 그를 향했다.

“이현이 그림인 거 알고 보면 어떤 느낌일지 기대하고 왔는데.”

“곧 몸값 뛸 작품이잖아. 저장고에 고이 모셔 놨지. 이제 그 그림 보고 싶으면 전시회 추진해.”

두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힐끔 나를 돌아본 그는 주방 쪽으로 앞장서면서 말을 돌렸다.

이젠 정말 괜찮다고 했지만, 그는 <소외>를 제자리로 돌려 두지 않고 있었다. <소외>와 관련해 트라우마라도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듯했지만, 그날 그렇게 놀랐던 건 그림 자체와는 관계없는, 그 그림이 연상시키는 과거의 날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그에게, 타인에게 설명할 준비가 된 것 같지가 않았다. 내면에서 적절하게 처리하지 않은 채 그저 시간이 흘러 무뎌지기만을 기다려 왔을 뿐이었으니까. 여전히 억지로 내 입을 열려고 하지 않는 그가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짐을 주방으로 옮긴 뒤 본격적인 식사 준비가 시작됐다.

유니 누나와 주한이 형이 무조건 고기를 외쳤기 때문에 오늘의 메인 메뉴는 바비큐였다. 고기 담당인 그는 밑간을 해 놓은 뒤 장비를 세팅하기 위해 정원으로 나가고, 우리 셋은 구입한 재료부터 봉투에서 꺼내 널찍한 아일랜드 조리대 위에 늘어놓았다.

부위별로 사들인 한우와 뼈가 그대로 붙은 양갈비, 수제 소시지, 대하, 감자와 고구마까지 대표적인 바비큐 재료는 전부 모여 있었다. 곁들일 채소와 후식으로 먹기 위한 과일, 아이스크림, 본인이 먹고 싶다는 이유로 주한이 형이 카트에 넣었던 치즈케이크까지. 그의 말대로 저녁 한 끼로는 도저히 다 먹지 못할 것 같은 양이었다.

바비큐 외에도 형이 골뱅이무침을, 누나가 김치찌개를 만들 계획이었다. 요리를 할 줄 모르는 나는 주로 재료를 씻고 다듬는 보조 역할이었다.

“실장님도 10분 안에 도착하신대. 스테이크 시작해도 되겠지?”

휴대폰을 확인한 주한이 형이 두 손을 마주 비비며 입맛을 다셨다. 형은 준비하는 동안에만 바나나 두 개와 복숭아, 크래커 한 팩까지 해치운 상태였지만 여전히 배가 고픈 것 같았다.

“이현아, 이거 대표님한테 갖다 드리고… 넌 밖에서 대표님 도와 드려.”

누나가 건네준 쟁반을 들고 현관을 나서니 이미 혼자서 테이블과 그릴까지 전부 세팅해 둔 그가 그릴 안에 숯을 채우고 있었다. 벤치형 의자와 일체형으로 만들어져 야외에서 사용하기 편리할 것 같은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고 그릴 쪽으로 다가갔다.

“실장님 10분 뒤에 도착하신대요.”

“굽기 시작하면 되겠네.”

부탄가스를 장착해 사용하도록 만든 토치를 점화한 그는 공기가 잘 통할 수 있도록 어슷하게 쌓아 올린 숯 더미 안으로 화구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바람 소리를 내며 숯 사이사이로 파고든 푸른 불꽃은 곧 붉은 불길이 되어 치솟았다. 한낮의 쨍한 더위는 지나갔지만, 아직 해가 남아 있는 시간이었다. 불 앞에 서 있는 그가 더울 것 같아 힐끔 올려다보는데, 시선이 마주쳤다.

“양고기 먹어 봤어요?”

“아니요.”

“음, 특유의 향이 있어서 취향을 좀 타는 고기이긴 한데… 저 녀석들 입이 워낙 고급이라 좋은 고기로 잘 골라 왔을 거예요. 한번 먹어 봐요. 입에 안 맞으면 한우도 있으니까.”

까만 숯에 불이 붙어 붉게 타들어 가는 과정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음식을 가리는 편은 아니었다.

“밑간한 상태에서 한두 시간 숙성시키면 더 맛있긴 하지만, 고기가 좋으면 이대로 구워도 맛있어요. 뭐, 권주한이야 생고기를 줘도 맛있다고 뜯어 먹겠지만.”

“주한이 형이… 대표님이 구워 주시는 스테이크 진짜 맛있다고 하던데.”

“그런 소리도 해요? 나 없는 데서는 흉만 보는 거 아니었나?”

그의 말에 피식 웃었고, 그는 적당히 불이 붙은 숯을 확인하고는 토치를 거둬들이고 그릴 안에 숯을 골고루 펼쳐 놓았다.

“어머니가 미국 출신이신데 바비큐를 좋아하셔서요. 1년 내내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바비큐를 자주 하셨죠. 자라면서는 조금씩 내가 셰프의 자리를 물려받게 되더라구요. 한국식 숯불구이도 자주 해 먹었고.”

별것 아닌 소소한 이야기였고, 누군가는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며 유난을 떤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이런 식으로 편안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 처음이라, 시선이 저절로 그를 향했다.

고기를 구울 준비를 마친 숯 위에 석쇠를 올려놓던 그가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이쪽을 쳐다봤다. 맞닿은 시선의 접촉은 조금 길게 이어졌다.

그의 눈빛이 약간 다른 빛을 띠었다. 바로 어제 거실의 소파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키스를 하기 직전에 보냈던 것 같은, 긴장감 섞인 시선이었다. 그 변화를 감지하자마자 나 역시 타이트한 밧줄에 묶인 듯 몸이 죄였다.

뒤를 한 번 돌아본 그가 장갑을 벗어 그릴의 양쪽에 날개처럼 매달린 선반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 손으로 나의 목덜미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 입술을 만졌다. 정확히는 아랫입술을 꼬집듯 강하게 쥐고 입술 안쪽의 점막과 점막이 서로 비벼지도록 문질렀다.

갑작스럽기도 했고, 생소한 스킨십의 의도를 알 수 없어 그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마찬가지로 나에게 고정된 그의 눈빛이 좀 전, 검은 숯에 불을 지피던 푸른 불꽃을 연상시켰다. 차가워 보이지만 열정이 들끓는 푸른 눈빛을 바라보며 입술의 통증을 느끼는 사이, 그의 손이 멀어졌다.

10초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찌릿한 얼얼함에 나도 모르게 입술로 손을 가져가 더듬었다.

그가 다시 장갑을 끼면서 이를 보이지 않고 소리 없이 웃었다. 음흉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감촉이… 비슷하지 않아요?”

“…….”

“서이현 씨는 아프게 해 주는 거 좋아하잖아요. 뭐, 나도 좋아하지만.”

무엇과 비슷하다는 건지, 그는 비교 대상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막연히 알 것도 같았다.

“키스하고 싶다는 눈으로 보길래. 근데 지금… 할 수가 없으니까.”

“아….”

바보 같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끌어 내렸지만, 불에 덴 듯한 뜨거움은 여전했다.

그는 좀 전의 스킨십이 키스 대신인 것처럼 말했지만, 우습게도 그 감촉 때문에 진짜 키스에 대한 갈망이 몸속을 지펴 놓았다. 이렇게 건드려 놓은 그가 조금… 원망스러워졌다.

문득 그의 목소리가 한 톤 더 은밀하게 낮아졌다.

“아니면, 그냥 해 버릴까요? 난 상관없는데.”

그가 짓궂게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자마자 테이블 위에서 그의 핸드폰이 몸을 떨었다. 내 어깨 너머로 핸드폰을 건너다보며 그가 아쉽다는 듯 콧등에 주름을 잡으며 찡그렸다.

“아… 눈치 없는 누구 씨가 주차장 열어 달라고 전화했나 보네.”

그의 예상대로 발신인은 실장님이었다. 그가 핸드폰 옆에 놓아두었던 리모컨으로 주차장 문을 열어 주며 실장님과 짧은 통화를 마치는 동안, 좀 전의 스킨십에 대한 생각을 흩트리기 위해 애써야 했다.

키스를 원하는 눈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짐작이 틀렸다고 할 수만은 없었다. 만약 그런 욕구가 그의 눈에 일일이 드러나고 있다면, 그건… 다 벗은 몸을 그에게 보이는 것보다 더 곤란했다.

“실장님 도착하셨죠? 어? 뭐야? 양고기 아직 올리지도 않았어요?”

음식을 가득 담은 쟁반을 들고 현관문을 어깨로 밀며 밖으로 나오던 주한이 형이 빈 석쇠를 보고는 실망한 얼굴로 걸음을 멈췄다.

“넌 대체 배 속에 뭐가 든 거냐? 준비하면서 이것저것 주워 먹었을 거 뻔한데, 그렇게 배고파?”

“배 속에 뭐가 안 들었으니까 이러죠. 그깟 주전부리들로 배가 차요?”

현관 앞에 선 채로 투덜거리는 형에게 다가가 쟁반을 건네받은 뒤 테이블 위에 음식을 옮겨 놓는 동안에도 두 사람의 사소한 밀고 당기기는 계속 이어졌다.

형을 뒤따라 또 다른 쟁반을 들고 나타난 누나까지 가세해 이제 막 고기를 굽기 시작한 그에게 불만을 쏟아 냈다. 어느 정도는 나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 같아, 쌈 채소가 풍성하게 올려진 바구니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불편한 마음으로 그의 기색을 살폈다.

사각형의 널찍한 팬에 올리브유를 넉넉하게 두르고 밑간을 한 양고기를 올려 둔 그는, 나의 걱정과 달리 두 사람의 불평을 건성으로 흘려듣고 있었다.

형이 가져온 쟁반을 전부 비워 내고, 이번엔 누나가 들고 있는 쟁반을 건네받으려고 다가가는데, 막 자리를 뜨려던 누나가 문득 미간을 찌푸리며 걸음을 멈췄다.

“뭐야, 대표님 요새 연애하세요?”

“왜 또 소설을 쓰는 건데.”

“원래 향수 같은 거 안 뿌리셨잖아요. 최근부터 갑자기 쓰기 시작한 데다가….”

잠시 말을 멈춘 누나는 그의 어깨 쪽으로 더 바짝 얼굴을 숙이며 코를 킁킁거렸다.

“거기다 오늘은 독할 정도로 뿌리고. 누굴 꼬시려고 이렇게 야한 향수를 막 들이부으셨을까아아….”

향수가 야한 건 또 뭐냐며 얼굴을 찌푸린 그는 자신의 팔을 들어 얇은 여름용 니트의 소매에 코와 입술을 묻었다.

“그렇게 독해?”

“원래 독한 향수잖아요. 좀 많이 뿌린 것 같긴 하지만. 혹시 감기 걸리셨어요? 촌스럽게 이런 거 조절 못 하고 그러실 분이 아닌데. 아니면 상대가 이런 게 좋대요? 숨 막힐 정도로 강렬한 거?”

씨익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치는 누나는 즐거워 보였다. 그를 놀리기 위해 일부러 더 도발하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피식 웃을 뿐 좀처럼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대로 좀 더 장난을 치며 어울리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 누나에게서 쟁반을 건네받았다. 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일부러 그쪽은 쳐다보지 않았다.

누나의 말대로 그에게 다른 상대가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런 문제로 그에게 질문을 하거나 진실을 추궁할 권리도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런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없는 곳에서 벌어질 수 있는 그의 다른 정사나 연애… 같은 것에 대해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해 왔을 뿐이었다. 그의 다른 관계는커녕 나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그러나 이런 가벼운 대화만으로도 공포스러운 상상은 쉽게 나를 장악했다.

“근데 대표님, 오더 메이드만 고집하실 줄 알았더니 기성품 향수도 쓰시긴 하네요. 두세 개 정도 믹스한 것 같긴 한데… 음, 하나는 뭔지 알겠거든요.”

누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신경을 집중하면서 자신이 추측한 브랜드와 향수의 상품명을 댔다.

“호오… 예리하시네.”

그가 눈을 크게 뜨면서 바비큐용 집게를 딱딱 소리가 나도록 맞부딪히게 했다.

누나가 맞힌 향수의 이름이 혹시 ‘그 향기’일지 궁금했다. 어쩌면 내가 ‘그 향기’라고 인지하고 있는 향은 여러 향수의 혼합이 만들어 낸 결과일지도 몰랐다.

가 본 적도 없는 향수 판매점에 들러 나에게는 거금일 게 분명한 가격을 지불하고 향수를 구입한 뒤 방 안에 숨겨 두고 몰래 향을 맡으며 그를 연상하는 자신의 음침한 모습을 상상하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와… 고기 냄새 너무 좋다!”

마침 주차장에서부터 정원으로 이어진 문을 열고 실장님이 등장했다.

“아직 먹을 수 있으려면 20분은 있어야 해요.”

퉁퉁 부은 얼굴로 그렇게 설명하며 눈치를 주듯 그를 힐끔거리는 주한이 형의 머리를 흩트린 실장님은 다음으로는 나의 뺨을 쓰다듬으며 안부를 물었다. 닷새 만에 뵙는 실장님은 토요일인 오늘도 영업 때문에 고객의 초대로 한 화장품 브랜드의 이벤트에 다녀오시는 길이었다.

“실장님 오시니까 서이현 좋아하는 것 좀 봐.”

“얘도 무뚝뚝한 것 같아도 은근히 표정에 다 드러난다니까.”

누나와 형이 나를 가리키며 놀리듯 말했다. 그냥 조금 웃은 게 다인 것 같은데 그렇게 표가 났나 싶어 손으로 더듬듯 얼굴을 쓸어 보았다. 그렇다고 표정이 손에 만져지는 것도 아닌데.

시선이 느껴져 그릴 앞에 있는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지만, 눈이 마주친 건 아주 잠시뿐이었다. 어쩌면 시선이 옮겨 가는 도중에 잠깐 나를 스친 것뿐인지도.

완성된 양고기 스테이크를 각자의 접시 위에 공평하게 나누어 준 뒤에야 마침내 그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을 수 있었다. 테이블이 4인용이라 그는 테라스에서 의자를 하나 가지고 와 사이드 쪽에 자리를 잡았다.

“어때요, 입에 맞아요?”

누나를 사이에 두고 앉은 나를 건너다보며 그가 물었다.

“네. 아주… 맛있는데요.”

“다행이네. 가리는 게 별로 없나 봐요.”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엔 나와 대각선으로 마주 앉은 주한이 형이 나 대신 나섰다.

“서이현은 일할 때 불평불만도 없잖아요. 그런 애들이 원래 밥도 불평 없이 잘 먹어요.”

“넌 불평불만 많아도 밥은 잘 먹잖아. 특이 케이스네?”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할 필요도 없이 접시에 얼굴을 박은 채 굵은 뼈대를 쥐고 양고기를 뜯던 형이 눈만 위로 치켜뜨며 그를 노려보자, 그가 항복의 의미로 양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고는 자신의 몫으로 덜어 둔 고기를 써는 대신 와인을 마셨다.

고기를 굽는 동안 입맛이 없어진 건지, 식사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고 술만 마시는 그가 신경이 쓰였지만, 이런 자리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나서서 그를 걱정하는 것은 왠지 이목을 끌 것 같아 속으로 말을 삼켰다.

“이현이, 어때? 전업 작가 생활은 할 만해?”

“아직은 그냥….”

나의 정면에 자리한 실장님의 질문에는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전업 작가라는 표현조차도 아직은 그저 낯간지럽기만 했다.

“대표님은 이현이 습작 보셨어요? 얘 부끄러워서 우리한텐 안 보여 주던데.”

“나한테는 안 부끄럽겠어? 연습 중이라면서 아무것도 안 보여 주던데?”

누나의 질문에 대답한 그가 와인잔을 입술로 가져가면서 살짝 원망이 섞인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는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물은 적은 있어도 보여 달라고 한 적은 없었다. 습작 수준의 스케치를 보고 싶어 할 줄은 몰랐는데, 혹시 부담을 줄까 봐 그랬던 건가,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양고기를 처음 먹는 나를 위해 그가 별도로 바비큐 소스를 발라 구워 준 갈비를 느리게 썰던 포크와 나이프를 잠시 내려놓고 바싹 마른 목을 와인으로 축이려는데, 주한이 형이 갑자기 의기양양한 얼굴로 살점을 깨끗이 해치운 뼈대를 접시 위에 툭 던지듯 내려놓았다.

“아… 그럼 이거, 아무래도 제가 서이현 작가 작품의 최초의 감상자가 되겠네요.”

“이현이한테 모델 제의받아서 저래요.”

형의 거드름 피우는 태도가 마음에 안 드는지 누나가 입술 한쪽을 비스듬히 끌어 올리며 말했다. 누나의 찌푸린 얼굴과 반대로 실장님의 얼굴이 밝아졌다.

“벌써 본격적인 작업 들어가는 거야? 근데 왜 첫 모델이 하필 주한이?”

“본격적인 작업은 아직 아니구요…. 이번 주에 거의 정물만 그려서 이제 인물도 그려 보려고…. 형 골격이나 얼굴형이 개성적이라, 부탁드렸어요.”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실은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작업하는지 모르지만, 보이는 그대로 베껴 내듯 테크닉을 가다듬었던 정물 스케치와는 달리, 인물을 그릴 때 나에게는 어느 정도의 스토리가 필요했다. 완전한 타인을 그릴 때는 나의 상상력이나 나의 감정이 투영되었지만, 아직은 나에 대해서는 그리고 싶지 않았다.

비교적 편하게 모델을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 누나와 형뿐인데, 그 중에 좀 더 구체적인 사연을 알고 있는 쪽이 형이라 부탁한 이유가 더 컸다.

강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리고 싶다고 느낀 대상은 그였지만, 아직은 그 감정을 그림으로 담아낼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까.

“제대로 인물을 그려 보고 싶으면 프로 모델을 구해 줄 수도 있는데.”

마시던 와인잔을 손안에서 가볍게 돌리며 그가 말했고, 주한이 형이 발끈하며 펄쩍 뛰었다.

“아, 뭐예요! 이현이가 절 그리고 싶다잖아요! 왜 방해하시나…. 혹시, 절세미남인 대표님을 두고 저를 모델로 택해서 질투하시는 건가?”

다소 유치한 형의 놀림에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절세미남인 걸 인정은 한다니 다행이네.”

“흐흥, 대표님이 절세미남일지는 몰라도 모델로 선택된 건 권주한이죠.”

등받이에 팔을 걸치며 거만한 태도로 눈을 내리뜨는 형을 쳐다보며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얼마 먹지도 않은 자기 몫의 접시를 밀어 놓으며 빈 공간에 팔꿈치를 걸치고 나를 쳐다봤다.

“말이 나와서 얘기지만, 원하는 도구나 재료나 환경이나… 모델이든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얘기해 줘요. 서이현 씨뿐만 아니라 전속 작가들에게는 지원을 아끼지 않으니까 그런 쪽으로는 부담 안 느꼈으면 합니다. 다 작품을 위해서니까.”

누나가 동의하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슈슈 작가님처럼 수입이 많은 몇몇 분들은 작업 도구나 스튜디오 같은 것들을 직접 해결하시지만, 너처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분들에게는 어느 정도 시기까지는 지원해 주거든. 재료 걱정하고 뭐 걱정하고 그러다 보면 작품이 원하는 대로 안 나오니까. 아무 갤러리나 이런 대우 해 주는 거 아니다?”

내 어깨에 팔을 걸치며 누나는 뿌듯한 얼굴로 말했지만, 슈슈 작가의 이름이 나오자 거기에 신경이 쓰여 가볍게 몸이 경직됐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그를 향했다. 속이 뻔히 보이는 시선의 이동에 뜨끔해서 얼른 고개를 돌렸지만, 정작 그는 아무런 동요도 없어 보였다.

나 역시 그와 누나가 하는 얘기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긴 했지만, 이미 필요한 것 이상이 갖춰져 있었다.

유화를 본격적으로 그리게 되면 특유의 냄새 때문에 한 공간 안에서 작업과 생활을 겸하기는 어려울 거라며, 그는 침대와 작업 공간 사이에 가벽을 세우고 문을 다는 공사까지 다음 주로 잡아 둔 상태였다.

내가 원하는 게 있다면 그건, 하루에 단 몇 시간만이라도 좋으니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언제쯤 그림으로 수익을 낼 수 있을지 불확실한 상황에서 최소한 그에게 식비라도 보태고 싶었지만, 그 얘기를 꺼냈을 때 그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이유로 딱 잘라 반대했다.

“아, 혹시 하반기 합동 전시 때 이현이 그림 걸 수 있을까요? 좀 촉박하려나?”

누나가 내 어깨에 팔을 걸치며 실장님을 향해 물었고, 실장님은 누나가 아닌 내 쪽을 보며 대답했다.

“합동 전시회니까 한 점뿐이더라도 걸 수는 있지.”

“부담은 갖지 마. 작가가 만족 못 하는 그림 억지로 걸게 하고 그러진 않으니까. 그때까지 완성된 작품이 있으면 거는 쪽으로 하자는 거지.”

누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지만, 전시회에 내 그림이 걸릴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긴장으로 목이 타는 듯했다.

“이번 합동 전시회 때는 슈슈 작가님 작품이 없어서 좀 허전할 것 같은데. 시카고 전시에서 아무래도 전부 솔드 아웃 되겠죠?”

주한이 형의 걱정이었다.

합동 전시회는 슈슈 작가의 시카고 전시 이후 일정이라, 만일 시카고에서 작품이 전부 판매될 경우, 작품을 다시 한국으로 가지고 들어오기는 어려웠다.

“슈슈 작품이야 물론 전부 판매되겠지만, 이번 기회에 다른 작가들을 밀어주는 것도 좋지. 기획을 잘 짜 봐. 전시회는 작품 자체보다 기획이 반 이상이야.”

수키킴 선생님 앞에서도 그랬듯 그는 슈슈 작품의 판매에 대해서는 여전히 자신 있는 태도를 보였다. 합동 전시회에 대해서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문제는 유니 누나였다.

“하… 근데 저 진짜 시카고 출장 잘할 수 있을까요? 슈슈 작가님, 아직도 패닉이시죠?”

내 어깨에서 팔을 거두며 한숨을 내쉰 누나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기대고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맸다.

시카고행에 실장님이 동행하지 않는 것 때문에 슈슈 작가가 불안해하는 문제로 누나가 고민이 많은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구부러진 누나의 등을 바라보다 위로의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애꿎은 와인만 마셔 댔다.

“걔도 슬슬 한 실장한테서 독립해야지. 일 있을 때마다 매번 한 실장이 따라다니면 니들한테는 언제 기회를 줘?”

“에이, 그래 놓고 슈슈 작가님이 전화해서 울먹거리면 홀랑 넘어가시는 거 아니구요?”

주한이 형이 믿지 않는다는 태도로 피식거리자, 그가 와인잔을 입술로 가져가며 대답했다.

“그래서 아예 전화 차단하고 있잖아.”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인 것처럼 말했지만, 내게는 전화를 받게 되면 지금의 입장을 고수할 자신이 없다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오… 이번엔 진짜 독하게 마음먹으셨나 보네. 독하게 먹으셔야죠. 안 그럼 제가 곤란해요. 대표님에 백유니에, 거기다 실장님까지 시카고 따라가시면… 저 혼자 서울에서 어떡하라구요.”

주한이 형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얼굴로 요란하게 어깨를 떨었다.

“실장님 가시게 되면 내가 남아야지. 사람 새로 뽑는다 해도 전부 신입들인데, 신입만 데리고 네가 어떻게 전시회 준비를 진행해.”

누나의 풀 죽은 목소리에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 없을 거니까 백유니는 시카고 전시회 준비에 전념해. 절대 그럴 일 없어.”

“말씀은 감사한데… 어째 믿음이 안 가네요. 대표님 말씀에 믿음이 안 가는 경우 거의 없는데, 슈슈 작가님 일이잖아요. 작가님이 좀… 좋게 말하면 섬세하고 다르게 말하면 예민…한 부분이 있어서… 저 좀 자신 없기도 해요.”

잠시 화제는 슈슈 작가의 심한 낯가림과 수줍음, 섬세하고 예민한 성격으로 인한 일화들로 옮겨 갔다.

누나가 처음 팬텀에 합류했을 무렵엔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았을 때라 단지 낯을 가리는 정도가 아니었던 듯했다. 어둡고 방어적인 기질이 강해 거의 대인기피증에 가까운 증세를 보였고, 때문에 지금처럼 카메라 앞에 세우거나 사람들 앞에서 인사말을 하게 하는 이벤트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는 얘기였다.

모든 인터뷰를 지면으로만 진행했을 정도였고, 게다가 누나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을 때쯤 합류한 주한이 형은 애석하게도 다시 또 누나와 동일한 절차를 밟아야 했던 것 같았다.

“사고 이전에도 그렇게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긴 했지만… 이후에 더 심해지긴 했지. 그래도 지금은 많이 좋아졌잖아. 서이현 씨하고 첫 대면 했을 때 못 봤어? 입사하고 반년 동안 대기실에 들이지도 못했던 권주한 생각해 봐. 나아지고 있다니까.”

그는 과장된 표정과 제스처로 농담을 섞어 가며 누나를 안심시키려 애썼다. 형은 입사 직후 자기를 진짜 힘들게 했던 건 슈슈가 아닌 대표님의 괴롭힘이었다고 호소했지만, 그 이야기는 묵살되었다.

“슈슈도 너를 못 믿는 게 아니야. 자기가 정신적으로 나약해서 그럴 뿐이라고 본인도 그렇게 말하던데?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만 주면 괜찮을 거야. 쿤도 같이 가잖아.”

실장님의 격려까지 이어지자 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불안이 남은 표정이었지만 나이프의 손잡이 부분을 만지작거리는 옆모습은 좀 전보다 한결 가벼워 보였다.

“저쪽 담당자하고 의견 조율도 전부 네가 하고 있는데, 너 빼고 어딜 가. 이번 이벤트 담당자는 너야. 그건 안 바뀌어. 절대.”

더 이상 재고의 여지가 없다는 듯 못을 박은 그는 양고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됐으면 슬슬 한우를 굽기 시작하겠다며 아이스박스에서 맥주를 한 캔 꺼내 다시 그릴 앞으로 돌아갔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에게 따라붙었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 버릇처럼 와인을 찾았다.

이번 시카고 출장에 그가 동행한다는 사실은 누나에게는 불안을 덜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였지만, 나에게는 그렇지가 못했다.

그가 슈슈와 함께 긴 출장 여행을 떠나는 것에 대해 나는 계속 권리가 없는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자신이 거북스럽고 불쾌했기 때문에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 그러나 부정하고 외면하려는 이성의 노력은 허망할 정도로 간단히 허물어졌다.

조금 남아 있던 잔 속의 와인을 전부 비워 내자, 형이 자리에서 일어나 와인을 따라 주었다.

“어쨌든 서이현이 이번에 큰일을 많이 겪었지! 오늘은 다 잊고 즐겁게 마시자구요! 이현이의 순조로운 작품 활동을 위해서 다 같이 건배할까요? 네?”

갑작스럽게 나에게로 주목되는 분위기가 당황스러웠지만, 형의 제안이 고맙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고기 집게를 다시 집어 든 그 역시 테이블로 돌아와 건배에 동참해 주었다.

식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술자리로 바뀌었다.

그사이 해도 완전히 저물고, 해가 저물자 아스팔트가 아닌 흙이 깔린 정원은 빠르게 온도가 내려갔다. 식은 공기는 정원수들 덕분에 기분 좋은 바람이 되었다. 등에서 땀이 촉촉하게 배어 나오는 정도의 더위가 떠돌긴 했지만, 술기운 때문인지 그마저도 불쾌하기보다 몽롱하게 붕 뜬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난 그때부터 서이현이 진짜 마음에 들었다니까요?”

취기가 오른 주한이 형은 평소보다 목소리도 액션도 두 배로 커진 상태였다. 형은 내가 처음 같이 일했던 전시회에서 인우 형에게 형 본인의 작품을 추천해 줬던 이야기를 신나게 하고 있었다.

“아, 나 그때 인우 쌤 표정 진짜 잊지 못해.”

다시 생각해도 통쾌하다는 얼굴로 형은 테이블을 두드려 댔다.

“뭐랬지? 대표님 그때 그 자리에 계셨잖아요. 이현이가 뭐랬죠?”

맥주를 한 모금 마셔 목을 축인 그가 피식 웃었다.

“솔직하게 다 보여 주는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못한 점이 그림하고 너하고 딱이다, 라고 했었지.”

“그… 그런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었어요!”

맹세코 건방진 의도를 가지고 떠든 얘기는 아니었다. 그 뒤에 스페인식 주점에서 인우 형 본인에게 설명했던 것처럼, 자신의 솔직하지 못함을 특유의 유쾌한 농담조로 명쾌할 정도로 단순하게 드러내는 면이 형다운 작품이라고 느꼈던 것뿐이었다.

그것 역시도 스스로 객관화한 자기 자신 앞에서 초라해지겠다는 각오가 필요한 과정임을, 캔버스를 다시 마주하게 된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 더욱 절감하고 있었다.

“그, 그럼 무슨 의도인데요?”

나의 말투를 복사한 주한이 형의 흉내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나 역시 지나치게 정색한 것 같은 멋쩍음에 어설프게 웃어 보였지만… 문득 당시의 상황을 그가 그토록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신경이 쓰였다.

그날 아침 그의 ‘고스트’ 자동차 앞에서 그 자신이 인우 형에게 말했듯, 나를 ‘임시 알바’로 규정짓고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그렇게까지 구체적으로 대화를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알아, 알아. 인우 쌤도 네가 비꼰 게 아니라는 거 아니까 불쾌해하지 않고 오히려 너한테 흥미 가진 거고.”

그사이 형과 자리를 바꾸어 대각선으로 나의 맞은편에 앉은 누나가 골뱅이 무침을 뒤적이며 말했다. 술기운 탓에 누나의 발음은 약간 느슨해져 있었다.

“그럼, 그럼. 내가 S여서 아는데, 인우 쌤 사실 진성 M이거든. 자기한테 그렇게 직언한 것 때문에 너한테 더 꽂혔을걸?”

아이스박스에서 마지막 맥주 캔을 건져 올리며 누나의 말에 동의하던 형이 생각났다는 듯 나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아, 인우 쌤도 너 작가 계약한 거 알고 엄청 기대하고 있던데. 통화 좀 해 봤어?”

“네. 이틀에 한 번 정도는 연락이 와서….”

“호오… 그래? 의외로 인우 쌤, 이현이한테 진심인 거 아니야? 천하의 인우 쌤이 이틀에 한 번씩 전화를 하면서 공을 들인다는 건, 이건 보통 일이 아닌데.”

누나가 젓가락 끝을 물고 눈을 빛내며 말했고, 형은 오히려 미간을 찌푸렸다.

“진심이면? 솔직히 인우 쌤이 이현이한테? 아무리 진심이어도 아… 그건 너무 양심 없지.”

“뭐야. 경험 많은 바람둥이는 경험 적은 상대를 만날 자격이 없다는 거? 어울리지도 않게 갑자기 웬 보수적인 척? 실장님은 어떠세요? 인우 쌤이 이현이한테 진심이고, 이현이도 인우 쌤 좋다면, 실장님은 반대 안 해요?”

실장님은 질문의 화살이 본인을 향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으로 테이블에 팔꿈치를 기대며 어깨를 으쓱였다.

“음, 그게… 남이 나서서 반대하고 어쩌고 할 수 있는 일인가?”

그것 보라는 듯 누나가 형을 향해 턱을 치켜들었지만, 평소 연애에 대해 상당한 자유주의를 표방하던 형은 왠지 쉽게 고집을 꺾지 않았다.

“나도 그건 알지. 남이 나서서 반대하고 어쩌고 할 일이 아니니까 본인이 양심의 검열을 거쳐 알아서 자제해야지.”

“서이현 씨는 최인우에게 관심 있어요?”

“…….”

그때껏 두 사람의 토론을 묵묵히 흘려들으며 별 관심이 없어 보였던 그의 질문에, 순간 다들 그를 주목했다.

그의 어조에서도, 나를 응시하는 표정에서도, 고압적으로 추궁하는 태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나를 더 혼란스럽게 했다.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네 사람의 얼굴만 번갈아 쳐다보다가 와인잔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건… 인우 형도 진지하게 그런 얘기한 적은 없고….”

“최인우 사정은 빼고. 서이현 씨가 최인우에게 그런 쪽으로 관심이 있는지. 그것만 대답해 봐요.”

자리의 분위기에 맞게 가벼운 웃음기까지 띤 그의 얼굴은 타인들의 연애 이야기를 흥미롭게 관조하는 사람 특유의 짓궂은 호기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나는 절대, 연기로라도 만들어 내지 못할 여유였다. 만지작거리던 와인잔을 꽉 움켜쥐면서 대답했다.

“……아니요.”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렇다는데? 본인은 아무 생각도 없는 문제에 왜 그렇게 힘을 빼?”

“아… 인우 쌤 어떡하냐. 맨날 자기는 ‘한없이 골든에 가까운 알파’라며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다 꼬실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인데. 베타한테는 그것도 소용없는 거지, 뭐.”

안타깝다는 내용으로 말하고 있었지만, 누나의 얼굴에는 재미있어하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러엄. 서이현이 순진해 보이긴 해도 닳고 닳은 기술 쓰면서 접근한다고 홀랑 넘어갈 그런 애는 아니니까.”

주한이 형 역시 만족스러운 얼굴로 내 어깨를 부둥켜안듯 힘주어 붙잡았다.

나의 관심은 다른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는데, 엉뚱한 사람과의 스캔들에 답변을 하고 있는 상황이 엉성한 코미디처럼 느껴져 숙인 고개 안에서 쓰게 웃었다.

“어? 대표님 어디 가요?”

하지만 그와 관련된 얘기만 나오면 반응하도록 설정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를 부르는 누나의 목소리에 저절로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어디 가긴요. 술 더 가져다 드리려고 합니다.”

“아, 그럼 저희는 이제 와인은 됐어요! 맥주로 부탁드릴게요!”

주한이 형의 요구에 손을 휘저어 대강 대답하며 돌아서던 그는 두 팔을 뻗은 누나의 자세에 멈춰 서야 했다.

“왜, 뭐.”

“가시는 길에 화장실까지 업어다 주세요.”

벤치 위로 올라서는 누나가 넘어질까 싶어 팔을 붙잡아 준 그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으면서도 군소리 없이 누나에게 등을 내주었다.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매달린 누나는 술기운에 붉어진 뺨으로 어린애처럼 웃었다.

전부터 느꼈지만, 그는 일할 때에는 가끔 지나치게 가차 없는 보스 같아도 사석, 특히 술자리에서는 자상한 오빠와 형 같았다.

누나와 형 역시 일과 관련해서는 사석에서의 친근함을 바탕으로 어리광 부리거나 그의 직설적인 화법에 섭섭해하는 일이 전혀 없는, 효율을 우선순위로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지만, 술에 취하면 귀여움을 많이 받고 자란 막냇동생처럼 그에게 엉기곤 했다.

거부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없이 두 사람이 애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그가 자신을 열어 두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그의 등에 매달려 현관 안으로 사라지는 누나의 뒷모습을 보면서, 몇 달 전, 바로 이 정원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을 느꼈던 경험이 떠올랐다. 그사이 그와의 관계에 많은 변화가 있었고, 열정적인 잠자리까지 함께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그들 사이의 나는 여전히 저쪽 세계의 앨리스인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난 누드 모델이야? 드디어 이 육체미를 선보일 기회가 온 건가?”

비어 버린 내 몫의 와인잔에 자신의 맥주를 따라 주며 형이 걸어온 농담에,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 ■ ■

열어 둔 현관을 통해 누나와 형의 웃음소리가 주방까지 새어 들어왔다. 안주가 될 만한 것들을 제외한 음식을 옮겨 와 그와 함께 대강 정리하고 있었던 나는 단 두 명이서 만들어 내는 떠들썩한 웃음소리에 잠시 손이 멈췄다.

“아… 쟤들은 한참 멀었어요. 아마 해 뜰 때까지 저러고 있을 거예요.”

내일 아침 가사도우미분이 설거지하기 좋도록 개수대 앞에서 키친타월로 접시의 기름기를 닦아 내던 그가 조리대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영업 후에 바로 이쪽으로 오셨던 실장님은 옷차림도 그렇고 집에 가서 편히 쉬어야 할 것 같다며 대리기사를 불러 돌아가신 뒤였지만, 누나와 형은 이제부터가 진짜라는 듯 대화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올드 퓨처’의 가을 시즌에 대한 구상부터, 시카고 전시를 준비하면서 접하게 된 미국 미술 시장의 다양성과 그 시장의 특성에 따라 운영되고 있는 저쪽 갤러리의 경영 철학에 대한 누나의 감상, 그리고 두 사람이 꿈꾸고 준비하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까지.

화제는 끝이 없었고, 술기운이 진해질수록 오히려 대화가 깊어지는 것까지 두 사람은 성향이 비슷했다.

“이제 겨우 자정인데 아침까지요?”

마지막 접시를 개수대 안에 넣어 둔 그는 이번엔 액체비누로 손의 기름기를 씻어 내기 시작했다.

“한창 할 말이 많을 나이잖아요. 자기를 설명하고 싶고, 이해받고 싶고, 불확실한 계획들에 대해서도 희망을 가지고 떠들 수 있고. 서로 싫어하는 척해도 둘이 잘 맞으니까.”

놔두면 알아서 손님방으로 가서 잘 거니까 두 사람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덧붙인 그는, 손의 물기를 털어 내며 이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개수대의 가장자리를 짚으며 몸을 기댔다.

“근데.”

“…….”

삐딱하게 기울인 시선과 화제를 전환하려는 은근한 목소리만으로도 우리 사이의 공기에 가벼운 긴장이 감돌았다.

“최인우하고 이틀에 한 번 통화를 하는지는 몰랐네요.”

부드러운 목소리였고, 젖은 손으로 앞머리를 툭 건드리면서 그는 조금 웃고 있었다.

“별다른 내용은 없고 그냥… 일상적인 얘기라….”

“일상적인 얘기 뭐요. 또 밥 얘기?”

장난치듯 그렇게 묻는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최인우한테 마음 없는 거 맞나?”

“…….”

좀 전의 술자리에서 이미 마무리됐다고 생각했던 얘기를 다시 화제에 올리는 의중에 대한 힌트를 얻어 낼 수 있을까 싶어, 반대로 나의 초조함을 들킬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혹시 그는 신경이 쓰이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게 좋을 대로 해석하기엔… 그는 꽤 초반부터 인우 형과의 관계에 대해 경고를 해 왔었다. 나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였던, 탐색과 의심의 대상인 타인으로 대했던 시기부터.

내가 그의 속을 읽어 낼 수 없어 갑갑한 만큼 최소한, 나 역시 그에게 미지의 영역이기를 바랐지만… 나보다 열 살 어린 열두 살 어린이의 속마음이 내게 얼마나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지를 떠올리자, 조금 암담해졌다.

“아직은요….”

“…….”

그것이 억울해서 무리를 해 본 도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뺨을 덥게 달구는 술기운도 있었고.

그가 개수대에 기대 있던 몸을 떼어 내면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미끼를 던진 건 이쪽인데 그의 반응을 예측할 수 없어 입술이 바싹 타들어 가는 것도 나였다.

남은 음식들을 냉장고에 정리하고 깨끗하게 비워진 조리대 앞까지 걸어온 그가, 반짝거리는 대리석 상판의 가장자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봤다.

“외출할 땐 꼭 내가 준비한 차로 움직이기로 한 거, 지켜 줄 거죠?”

“…….”

인우 형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로 화제의 방향을 꺾어 버린 그는 시선을 들었다. 나를 보는 눈이 그렇다는 대답을 갈구하듯 안타까워 보여, 그에게 눈을 맞추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의 모두가 많이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불필요한 행동으로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거면 됐다는 듯 그가 미소를 지으며 청바지의 뒷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일부러 명랑함을 가장한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 전에 잠깐 서재로 올라와 줄래요? 집들이에 빈손으로 온 저 녀석들과 달리 난 선물이 있거든.”

“아….”

“선물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사람의 표정이 아니네. 그런 얼굴 보려고 준비한 게 아닌데.”

물질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물질로 보답해야만 한다는 부담을 갖는 것은 오히려 상대의 마음에 대한 실례일 수 있다고, 지금까지 나는 그런 입장이었지만… 막상 되돌려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너무 많은 것을 받고 있는 입장이 되고 보니, 빌려 쓴 것으로 생각하고 갚아 나가야 한다는, 빚을 진 듯한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흠….”

빚쟁이를 만난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을 게 뻔한 내 얼굴을 내려다보던 그가 한숨을 쉬며 허리를 숙여 조리대에 팔꿈치를 괴었다. 나보다 낮은 곳에 그의 옆얼굴이 있었다.

“다시 또 똑같은 얘기지만, 난 서이현 씨에게 아무것도 희생하고 있지 않아요. 재정적으로 무리해 가면서 지원해 주거나 선물을 사는 것도 아니고, 저 녀석들한테도 한 실장한테도 선물은 자주 하는 편입니다. 그러니까 기쁜 얼굴로 받아 준다면 나한테는 그게 보답일 것 같은데.”

주한이 형이나 유니 누나였다면, 그의 선물에 기뻐하는 반응을 보였겠지…. 그렇다면, 그의 선물을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누나와 형을, 나는 염치없는 사람들로 여기고 있나?

그건 아닌데… 자신의 일이 되면 판단이 쉽지 않았다. 모래와 형과 셋이서 주고받았던 선물이라고 해 봤자 책이나 펜, 열쇠고리 같은 것들이 전부였으니까.

“아, 그럼 서이현 씨도 내 부탁 하나 들어줘요. 공평하게. 그럼 되겠네.”

“…….”

조리대에 기댔던 상체를 일으키며 그는 좋은 생각이라도 떠올린 표정이었다.

“이쪽으로 옮겨 온 뒤에 시작한 그림들, 좀 봤으면 하는데.”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대답을 재촉하듯 살짝 기울어졌다.

“……지금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안 될 게 뭐가 있냐는 표정으로 그는 말했다.

“갤러리에 걸리기 전까지는 작품을 절대 공개하지 않는 주의라면 어쩔 수 없지만… 어차피 권주한을 모델로 그리다 보면 그 녀석은 보게 될 수밖에 없을 거고… 그럼, 절대 보여 줄 수 없다는 주의는 아닐 것 같은데. 어때요?”

철칙이라고 정해 두고 고수하는 방식이라고 할 만한 것은 딱히 없었다. 게다가 그는 앞으로 내 그림을 관리해 줄 갤러리의 오너였으니, 작가의 작업 상황을 확인하고 싶어 하더라도 무리한 요구는 아니었다.

아니, 실은 갤러리의 오너와 아직 수입 한 푼 없는 햇병아리 소속 작가라는 입장까지 끌어올 필요도 없었다.

그가 내게 원하는 게 있다면, 친절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는 의무감 같은 이유가 아니었더라도… 무엇이든 응하고 싶었을 테니까.

청바지 앞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어깨를 추켜올린 채 대답을 기다리는 그의 얼굴을 마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고갯짓 한 번에 그는 고른 치열을 드러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모든 것이 나보다 크고, 나에겐 어른의 상징처럼 느껴질 정도로 다방면에 부족함이 없는 그가, 원하는 장난감을 선물 받은 아이처럼 순수한 기쁨이 느껴지는 얼굴로 웃는다는 것과 이 순간 그 웃음을 만든 것이 나라는 사실이, 내면에서 작은 충격을 일으켰다.

타인의 미소와 기쁨이 곧바로 나의 행복으로 이어지는 경험을 전혀 못 해 본 것은 아니지만, 모래나 형을 통해 느꼈던 따뜻한 흐뭇함과는 어딘가 성격이 달랐다.

그를 거쳐 일어나는 모든 반응에는 머리를 어지럽게 할 정도의 과열과 있는지도 몰랐던 충동과 용기를 끌어내는 열정이 있었다.

이런 얼굴을 좀 더 많이 보고 싶고, 그 원인이 나였으면 좋겠다는, 어디에서 무엇을 바탕으로 시작됐는지도 모를 바람과 그리고, 그 바람대로 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털어 내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을 것 같은, 지극히 스물두 살다운 감상적 치기를 느끼며… 특별한 대화가 오가거나 극적인 감동이 일어난 것도 아닌 의외의 순간에, 내가 그를 정말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변화가 두려웠다면, 가장 겁을 내며 조심해야 했던 것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이었다. 선택이나 합의를 거치지 않아도 자신을 바꿔 버리니까.

타인의 배척과 무관심에 답지 않은 반항심이 불쑥 치솟곤 했던, 그를 처음 만난 무렵의 내 모습이 현재에 대한 예고편이었던가 생각하자 자조적인 웃음이 새었다. 그의 시선을 피해 옅게 웃으며 괜히 팔을 쓸었다.

다시 올려다보니, 그 역시 나를 따라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내가 웃는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마주 웃어 주는 것이겠지.

“가 볼까요, 그럼.”

앞장선 그의 뒤를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이곳 지하에서, 또 정원에서, 닷새 동안 그려 왔던 스케치들이 담긴 드로잉노트 몇 권을 빌트인으로 제작된 책장에서 꺼내 그에게 건넸다. 손에서 땀이 배어났고, 목이 말랐다.

무게를 가늠하듯 손에 든 노트들을 살짝 흔들면서, 그가 눈썹을 치켜 나를 쳐다봤다.

“이게 전부 여기로 온 이후에 그린 것들?”

“네.”

“흠, 내가 출근한 뒤엔 진짜 그림만 그렸나 보네.”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앉으라는 권유도 사양하고 벽에서 떨어진 자리에 놓인 3인용 소파의 등받이에 기대선 채로 세 권의 드로잉노트를 말없이 넘겨 본 그는, 뒤집어 벽에 기대 놓은 캔버스들을 전부 확인할 때까지도 내내 말이 없었다.

채색은 아직 유화 물감으로 원하는 색을 만들 수 있는지 시험해 본 정도라고 변명하듯 얘기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는다며 손을 들어 보였을 뿐이었다.

지적이나 혹평을 하더라도 차라리 코멘트가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찌푸리지도, 그렇다고 감탄하지도 않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평온한 그의 표정과 태도로는 아무것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연습용 스케치와 습작을 보인 것만으로도 이 정도라면, 나를 이식한 그림을 그에게 보이기 위해서는 상당한 단련이 필요할 것 같았다.

드로잉노트를 다시 펼쳐 몇몇 페이지를 한 번 더 확인하면서 그가 양 입술 끝을 희미하게 끌어 올리며 웃었다.

“이건… 내가 준비한 선물이 너무 초라해지네.”

시선은 그대로 노트 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일 듯 말 듯 흐릿한 미소와 함께 혼잣말처럼 그렇게 중얼거린 그는 노트를 덮은 뒤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듯 하관을 문질렀다.

생각에 잠긴 얼굴로 바닥 어딘가를 내려다보며 잠시 같은 자세를 유지하던 끝에 그는 나에게 노트를 돌려주었다. 노트를 받아드느라 손가락이 살짝 겹쳤고, 그가 나의 약지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슬쩍 걸었다.

“그럼, 서재에서 기다릴게요.”

다이아몬드 더스트 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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