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희생이 따르는 선택
손을 꼭 잡은 형과 모래가 로비를 지나 커피숍의 입구로 들어섰다. 평소에는 잘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형의 얼굴은 경직되어 있었고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금방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면서 다가오는 모래는 평소의 그녀였다.
“좋은 자리로 잘 잡았네? 서이현.”
창가 쪽,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를 등지고 앉아 있던 나의 맞은편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모래는 여가를 보내기 위해 이곳에 오기라도 한 것처럼 창가 좌석을 잡은 행운을 이야기했다.
남산에 자리 잡은 5성급 호텔의 로비 커피숍. 이곳은 그녀가 직접 정한 약속 장소였다.
3층 높이는 되어 보이는 전면창 가득, 여전히 비가 흩뿌리는 뿌연 회색빛의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였다. 한강 너머의 도시는 빗줄기와 그것이 만들어 내는 물안개로 흐릿하게 뭉개져 있었지만, 맑은 날이면 꽤 먼 곳까지 또렷한 조망이 가능할 것 같았다.
“너희 대표님, 투잡으로 흥신소 운영 중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지? 아니면 과거에 도망 좀 다녀 봤다거나.”
주문을 받은 커피숍 직원이 자리를 떠나자, 모래가 테이블에 팔을 기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평소와 같은 그녀의 말투는 우리가 만난 이유에 대해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착각이 들게 했다.
정오쯤 전화를 걸어 왔던 그는 형과 모래가 당장 집부터 옮기는 것이 좋겠다며 임시 거처를 마련해 두었다는 얘기를 꺼냈었다. 보안이 철저한 장소이니 큰아버지와의 약속 장소도 그곳으로 하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하기도 했다. 두 사람이 마음의 준비만 됐다면 내일, 아니, 오늘 밤이라도 당장 서울을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해 뒀다는 말과 함께.
죽음 같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 나는 둔해진 머리로 그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의 일 처리가 느리고 엉성하지는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생각보다도 더 빠르고 치밀한 추진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통화를 마친 뒤 곧바로 침대에서 내려와 모래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젯밤 그렇게 사라져 버렸던 이유에서부터 계약금 얘기, 그가 준비해 준 계획에 대해서까지 모두 털어놓았다. 장장 한 시간에 걸친 긴 통화였다.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 몇 가지 질문을 통해 내 설명의 부족했던 부분을 채운 모래는 일단 지금 당장은 그를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가 의심스러운 인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로서는 그 누구도 덜컥 믿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그녀의 말에 나 역시 어느 정도는 동의했다. 나에게는 그가 믿을 만한 사람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남일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매우 주의 깊은 사람이기도 했고.
일단 그의 제안을 모두 보류한 모래와 형은 ‘발리에서 생긴 일’ 사장님 댁으로 빠르게 짐을 옮겼고, 약속 장소를 이곳으로 정했다. 나머지 일은 큰아버지를 만난 뒤에 결정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렇지는 않을 거야, 아마.”
예전에 형과 모래와 함께 만났던 흥신소의 소장 같은 옷차림으로, 엘리베이터도 없는 허름한 건물 4층에서 배우자의 외도 증거를 포착해 달라는 의뢰인을 상대하는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보며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망 계획이 워낙 치밀하셔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나 했지.”
테이블에 비스듬히 기댄 채 물을 마시며 그렇게 말하던 모래가 문득 물잔을 내려놓고 내 쪽으로 상체를 더 기울였다. 그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근데 너, 입술이 왜 그래?”
나도 모르게 흠칫 몸을 뒤로 물렸다.
“어, 새벽에… 라면을 먹고 잤더니…. 그렇게 부었어?”
반사적으로 아랫입술을 감추듯 만지작거리며 되물었다. 생각보다 침착하게 받아넘기는 스스로에게 놀랐다. 그렇게 많이 부었냐며 되묻기까지 하는 모습이 낯설었다. 나치고는 제법 노련한 대응이긴 했지만, 등 뒤에서는 식은땀이 차끈하게 배어났다.
“아랫입술이 좀 그러네. 뭐에 물린 줄 알았어. 잘 붓지도 않는 애가 웬일이래.”
모래가 관심을 물리듯 등을 뒤로 기대면서 물잔을 기울여 얼음을 하나 입에 넣었다.
모래의 등이 소파에 닿기가 무섭게 갑자기 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바람에, 입술에 쏠려 있던 나의 의식도 곧 흩어졌다. 모래와 나도 형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으드득. 모래가 입 안의 얼음을 씹어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생생했다. 그녀의 눈빛은 차분하게 식어 평소의 느슨한 여유로움을 무장시키고 있었다.
칼라가 달린 얇은 여름용 카키색 점퍼에 등산용 바지와 운동화, 챙 가장자리를 따라 허옇게 물이 빠진 낡은 야구모자. 고급 호텔의 커피숍에 나타난 큰아버지는 누가 봐도 수상한 사람처럼 보였다.
누구라도 너무나 간단히 선량한 시민에서 수상한 사람이 될 수 있겠구나 싶었다. 마을의 수협 공판장에서 큰아버지는 보호색을 뒤집어쓴 것처럼 주변에 섞여 들어가는 평범하고 흔한 어민이었지만, 이곳에서는 호텔 직원들의 의심스러운 눈길과 일부 손님들이 보내는 의아한 흘깃거림을 받는 수상한 인물이 되어 버렸다.
큰아버지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키가 훌쩍 크고 세련된 옷차림을 한 중년의 남성이 슈트 차림의 외국인 남성과 함께 진지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며 빠른 걸음으로 홀을 지나가다 큰아버지를 힐끔거렸다. 왠지 그 모습을 보고 있기가 힘들어 나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죄송해요, 이런 데로 오시라고 해서. 불편하시죠?”
“아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큰아버지가 이쪽으로 다가오기를 기다렸던 모래가 큰아버지를 정중하게 내 옆자리로 안내했다.
“아저씨가 아니라 저희 아버지를 못 믿어서요…. 혹시라도 아저씨를 미끼로 써서 저희를 데려가려는 계획을 짜고 있을지도 몰라서, 그래서 이런 곳에서 뵙자고 했어요. 그러고도 남으실 분이잖아요. 아시다시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큰아버지는 내 몫의 물잔을 들어 얼음만 남기고 단번에 비워 냈다.
형과 모래의 아이스커피가 서빙되고, 주문을 하시겠냐는 직원의 질문에 큰아버지는 ‘커피’라고만 짧게 대답했다. 꺼칠하고 두꺼운 손을 허벅지 위에서 연신 쥐어짜는 큰아버지의 옆얼굴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내가 이미 두 사람에게 전화로 간략히 설명했던 현재의 상황이 모래의 입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하듯 나열되었다. 지금 이런 상황인 것이 맞냐는 모래의 차분한 질문에 큰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고, 무거운 한숨을 내쉰 모래는 진지한 사과를 덧붙였다.
그 사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큰아버지는 한참 만에 피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희는… 이제 어쩔 생각이냐.”
“뭘요.”
울컥하며 나서려는 형의 손을 모래가 꽉 붙잡았다.
“계속, 같이 있을 거예요. 저희 스스로 더는 같이 있고 싶지 않다는 결정을 내리게 될 때까지.”
야구모자의 깊숙한 챙 안에서 말없이 두 사람을 건너다보던 큰아버지는 아주 많은 말을 내포한 것 같은, 상처를 입은 짐승 같은 깊은 신음을 흘리며 시선을 거둬들였다.
모임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인지, 네다섯 명의 우아한 중년 여성들이 즐거운 목소리로 서로 무언가에 대해 덕담을 주고받으며 우리 곁을 지나갔다. 다시 주변이 조용해지고 슈만의 피아노 3중주곡만이 낮게 흐르게 되었을 때, 큰아버지는 좀 전의 신음보다 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가 여기서… 무릎을 꿇고 빌어도, 돌아오는 건… 안 되겠냐.”
“…….”
자리에 있던 모두가 말을 잃었다.
아주 모욕적인 요구라도 들은 듯 형의 얼굴이 가장 먼저 붉으락푸르락 일그러졌다. 다음으로 눈시울이 벌겋게 끓어올랐다.
“누가 아버지 무릎 꿇는 거 보자고 이럽니까? 누굴 괴롭히고 이겨 먹으려고 이러는 것처럼 보여요? 아버지가 무릎 꿇으면, 그럼 내가 좋다고, 내가 바라던 게 이거라고, 신나서 따라나설 것 같습니까?”
형이 무엇을 속상해하는지 안다. 지금 이 분노가 큰아버지를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모래와 형은 이 상황의 관계자들을 가해자와 피해자로 구분하고 있지 않았고, 자신들의 선택이 정당하다고 판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모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고 있었으니까.
여기가 배 위였다면, 항구였다면, 할아버지 댁의 시멘트 바른 마당이었다면, 큰아버지는 그 두꺼운 손바닥으로 가차 없이 형을 내려쳤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언성을 높이는 형의 반항에도 죄인처럼 더 깊숙이 고개를 떨어뜨릴 뿐이었다.
그 모습에 형도 주먹을 말아 쥐면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모래는 그대로 박제된 듯, 분노도 슬픔도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로 테이블 위 물방울이 맺힌 잔 속에서 녹아 가는 얼음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커피’라고만 말했던 탓에 큰아버지의 커피는 따뜻하게 서빙되었다. 그러나 어떤 커피가 나왔더라도 상관은 없었을 것이다. 뜨거움이나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손과 손가락에 비해 너무나 작아 보이는 커피잔을 들어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큰아버지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는 무식한 사람이라 너희들이 말하는 선택의 자유니 자아가 어쩌니 하는 것은 모른다. 솔직히 젊은 혈기에 감정에 취해서 철모르는 소꿉놀이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사실이지. 지금이야 떨어지면 죽을 것 같고, 없으면 못 살 것 같고… 그런 니들 심정을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니다.”
큰아버지의 얘기를 듣는 동안 나 역시 무릎 위에서 내 손을 쥐어짜야 했다. 얘기를 들어 보려고도 하지 않고 호통만 치시던 예전보다 나를 더 불안하게 했다. 사람을 설득하는 데에 더 효과적인 것은 강요나 압박보다 공감이었고, 그렇지 않아도 두 사람은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으니까.
가빠지는 나의 호흡을 모른 채 큰아버지는 말을 이어 갔다.
“다만 이만큼 살아 보니… 아무리 평생을 갈 것 같은 불꽃이라도 결국은 사그라지고 마는 때가 있다는 걸 알아서 그런다. 한이 네놈도, 모래 너도… 부모를 위해서라도… 당장의 고통을 참고 마음을 접어 줄 생각은, 정말 없는 거냐?”
나는 매달리듯, 거의 튕겨 나가듯, 옆에 앉은 큰아버지의 팔뚝을 꽉 붙잡았다.
“두 사람 떼어 놓으면 어떻게 될지… 아버지 보고도 모르시겠어요?”
나답지 않은 행동이었고, 제삼자에 불과한 나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자격이었지만, 약한 모습을 보이는 부모를 앞에 두고 두 사람이 흔들리는 것은 아닐지…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검은자의 테두리가 불투명한 큰아버지의 누르스름한 눈동자가 나를 돌아봤다. 내가 그걸 왜 모르겠냐는 말을 하는 것도 같고, 모래와 형은 네 아버지와 다르다는 말을 하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나는 안다. 두 사람 곁에서 5년을 넘게 지내 왔기 때문에 큰아버지보다, 임 선생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다.
어젯밤 그의 표현을 그대로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형과 모래는 단지 서로에게 로맨틱하게 빠진 연애 관계인 것만이 아닌, 함께 있어야만 완성이 되는 세트였고, 그런 사람들을 부자연스럽게 갈라놓았을 때 발생한 비극이 아버지였으며, 그 비극이 만들어 놓은 망친 작품이 지금의 나였다. 그것이 형과 모래에게서 되풀이되도록 할 수는 없었다.
테이블 위의 한 지점을 응시하고 있던 모래가 감정을 죽인 바싹 마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저씨 말씀대로 서이한 없다고 죽진 않을 거예요.”
“…….”
나의 불안한 시선이 자연히 모래를 향했다. 큰아버지를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이 느슨해졌다.
“한이 한 사람하고 같이 있자고, 부모님과 오빠들 가슴에 못 박고 불효하고 있다는 거. 제가 왜 모르겠어요. 그 죄는 평생 안고 갈 겁니다.”
나는 어리석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이쯤에서 흔들릴 각오였다면, 애초에 그녀는 마을을 떠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 삶은 내 것이라느니,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느니…. 부모님들이 들으시기엔 천하에 그런 못된 소리가 없겠죠. 하지만 저희 역시 부모님들을 따돌리고 아프게 하는 것으로 쾌감을 느끼며 이런 선택을 하고 있는 게 아니고… 지금 부모님들이 느끼실 배신감과 염려만큼의 고통과 죄책감 속에서 지내고 있어요.”
그것을 알아 달라는 요구가 아니라는 말을 덧붙인 뒤 잠시 입을 다문 모래의 얼굴은 아주 긴 세월을 살아온 사람처럼 보였다. 나이가 많아 보인다는 개념과는 다르다. 삶의 함정 속으로 우리를 몰아넣는 온갖 잡다한 번민을 초월해 시간을 비켜 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과장된 표현처럼 들리지만, 사실 나는 지금뿐만이 아니라 종종 그녀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세상이 말하는 불효를 저지를지언정, 자신의 삶과 선택에 대해 어떤 누구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기 위해서. 선택의 자유만 자신이 취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에 따르는 책임까지도 오롯이 자신에게로 돌려야만 진짜 삶의 주인이 된다는,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외면하는 진실의 관철을 위해서… 모래와 형은 어쩌면, 임 선생이나 큰아버지, 혹은 할아버지, 또는 세상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닌 자신들의 삶을 상대로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말씀대로 모든 불이 언젠가는 사그라지겠죠. 하지만 상관없어요. 이해해 주실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한이하고 저는 처음부터 그 뜨거운 불길, 연애의 감정 하나 때문에 서로에게 끌렸던 게 아니거든요.”
감정과 자신 사이에 거리를 두고, 단지 사실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상대에게 전달하는 그녀에게서 어젯밤의 그가 겹쳐 보였다.
삶에 대한 그들의 초연한 자세를 단지 알파 고유의 능력으로 치부해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그들의 고독과 갈등, 노력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지 않았다. 유니 누나와 주한이 형은 베타였지만, 외부의 개입에 의해 원치 않는 모습으로 자신이 변형되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손에 넣는 대가로 삶이 요구하는 고통의 무게 앞에서 알파니 베타니 하는 분류는 무의미했다.
큰아버지의 팔 위에 힘없이 올려 두었던 손으로 나도 모르게 가슴 부근을 움켜쥐었다. 그런 나를 향해 잠시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낸 모래는 얼음이 녹아 처음보다 양이 늘어난 커피를 몇 모금 들이켠 뒤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아버지에게 지고 계신 빚부터 없애려구요.”
그녀는 내가 가져온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빚을 갚는다는 말에 큰아버지의 시선이 의아함으로 흔들렸다. 그 눈은 ‘어떻게?’라는 질문을 하고 있었다.
“그걸 갚고 나시면 일단 표면상으로라도 아버지가 협박할 구실은 없어지니까 우선은 그것부터 해결하시는 게 좋겠어요. 돈은, 저희가 보내 드릴게요.”
그녀는 돈의 출처에 대해서는 큰아버지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돈에 대해 어디까지 얘기할지는 나의 선택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그러고 나서도 갖가지 치졸한 방법으로 괴롭히실 거예요. 제가 사랑하는 저의 아버지지만… 그런 분이시죠….”
잠시 말을 멈춘 모래의 시선이 이번에는 창밖을 향했다. 자신의 아버지이기에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부녀지간이라는 혈연적 근거를 제외하고 나면 사랑하고 존경할 만한 실질적 근거가 너무나 빈약했던…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떠올리고 있을 그녀의 얼굴에, 처음으로 많은 감정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다시 천천히 테이블 쪽으로 시선을 옮겼을 때, 그녀의 얼굴은 좀 전처럼 감정적 허점이 없는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무감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주 쓴 즙을 입 안 가득 머금고 있는 것 같은 고통이 전해져 왔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흔들림도 없는 텅 비어 있는 듯한 표정과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정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으실 때, 아버지에게 전해 주세요. 여자 알파인 괴물 같은 딸, 지금까지 키워 주셔서… 감사하다고. 이젠 그렇게 전전긍긍하지 마시고… 그냥, 마음 편히 지내시라고.”
감정의 격양을 허락하지 않으려 그녀가 말의 속도를 늦추는 동안, 형과 나는 거의 호흡이 멎었다. 큰아버지는 자신이 들은 내용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자신이 알파라는, 아버지가 가장 숨기고 싶어 하는 약점을 쥐여 줌으로써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와 맞설 무기를 큰아버지에게 제공한 것이다. 그녀 자신에게도 오랫동안 짐이고, 족쇄고, 또한 자기 자신의 일부였을 그 무거운 비밀을.
“그렇게만 말해도… 아버지는 무슨 뜻인지 알아들으실 거예요. 뒷일은 걱정하지 마세요.”
모래가 계산을 하려고 했지만, 큰아버지는 그 자리에 앉은 이후 처음으로 고집을 꺾지 않았다. 평소에는 가지고 다니시지 않는 낡은 갈색 지갑에서 큰아버지가 우리 네 명의 음료값으로 지폐를 몇 장 꺼내고 난 뒤 그 지갑 안에는 남은 지폐가 거의 없었다.
로비를 빠져나온 후 호텔의 정문 앞에서 큰아버지는 담배를 피울 만한 곳이 없는지 물었고, 도어맨이 안내해 준 대로 우리는 건물을 우측으로 끼고 돌아 흡연 구역으로 자리를 옮겼다.
머리 위에는 호텔 정문에서부터 이어진 넓은 처마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비는 여전했다.
오래 이어진 비 때문에 온도가 낮아져서 그런지 높은 습도에도 불구하고 더위가 느껴지지 않는 날씨였다. 오히려 드러난 팔이 약간 서늘했다.
우리 세 사람은 큰아버지의 몸의 일부처럼 보이는 담배 끝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빗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니들, 중학교 때부터 서로 좋아 지냈었지.”
큰아버지의 눈은 빗줄기 속을 더듬고 있었다.
“한이가 중학교 3학년 겨울이었던가…. 모래 네가 집에서 랍스터를 쪘는데 기가 막히게 맛이 있더라며, 우리 집에서도 좀 먹어 보라고 저녁 시간쯤 서너 마리를 가져왔더라. 그 추운 한겨울에. 말로는 우리 집에서도 먹어 보라고 했지만, 한이 놈한테 먹이고 싶어 왔다는 걸 왜 몰랐겠냐. 그때, 수돗가에서 씻고 있던 내가 문을 열어 줬는데… 냄비를 들고 대문 앞에 서 있던 네 낯이 희한하게 오래 잊혀지지가 않더라.”
훅, 짧은 호흡만으로 담배를 깊이 빨아들인 큰아버지가 뭉툭한 손끝으로 노련하게 재를 털어 냈다.
“나야 무식한 데다 평생 입에 풀칠하기 바쁜 놈이라 사랑이 어쩌니 그딴 걸 따져 가며 살아오지 못했지만… 맛있는 것을 앞에 두면 먹이고 싶고, 그것을 먹이기 전에는 내 목구멍으로도 진미가 넘어가질 않는… 그게 사랑이겠지.”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낸 자체가, 혹은 자신이 이렇게나마 사랑을 정의해 본 자체가 낯간지럽고 우스운 듯 큰아버지는 어깨를 털며 피식 웃었다.
“어디로 가든… 아무에게도, 나에게도 알리지 마라. 혹시 알았다가 너희 아버지 협박에 못 이겨 대 버릴 수도 있을 테니, 그저, 아무에게도 암 말도 말고 살아.”
덤덤하게 그렇게 말한 큰아버지는 마지막 한 모금의 담배를 유난히 길게 뱉어 내며 한숨처럼 덧붙였다.
“너희 아버지도 세월 가면 언젠가 용서 안 하시겠냐. 네 일이라면 너 어릴 때부터 그렇게 끔찍하셨던 양반인데.”
모래가 울음을 터트린 것은 그때였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이었다. 아니, 모래의 눈물 자체를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특히나 이런 상황에서라면 설사 눈물이 폭풍처럼 덮쳐 오더라도 어떻게든, 오기로라도 삼켜 내, 절대 자신의 벌거벗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모래는 울었다.
돌부리 하나 없는 평지에서 불쑥 저 혼자 넘어진 아이처럼, 아무런 전초도 없이.
‘네 일이라면 그렇게 끔찍하셨던 양반인데 언젠가는 용서하시지 않겠냐’라는 그 한 문장에.
조용히 눈물만 흘리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울음을 터트렸다. 오른손으로 눈을 가린 채 입술을 깨물고 우는 모래를 형이 감싸 안았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돈밖에 모르는 악덕한 ‘임 선생’이어도 모래가 원하는 것이라면 세상이라도 앞에 가져다 놓을 아버지였다. 그런, 자신에게만큼은 한없이 약한 아버지였기 때문에 아마 그녀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더 괴로워야 했을 것이다.
그녀는 울지 않을 거라는, 눈물을 보이지 않는 것이 강함이라는, 나도 모르게 품고 있었던 편견이, 지금까지 그녀를 울지 못하는 상황 속으로 몰아넣어 온 원인 중 하나는 아니었을지….
차마 그녀의 모습을 바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발부리만 내려다보다, 자신이 괜한 말을 한 건 아닌지, 모래의 울음 앞에 어쩔 줄 몰라 하는 큰아버지를 모시고 정문 쪽으로 돌아 나왔다.
“저는 누나랑 형이랑 같이 갈게요. 조심히 내려가세요. 돈은… 금방 보내 드릴 수 있을 거예요.”
큰아버지가 한 손을 주머니에 찌른 채 다른 한 손으로 입가를 문지르며 나를 돌아봤다.
“그 얘기 말인데, 니들이 무슨 돈이 있어서 그걸 보내 준다는 거냐?”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그렇게 묻는 큰아버지의 입가 주름이 한층 더 깊게 보였다.
아직 그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먼저 받기로 한 계약금은 빚이나 마찬가지라 솔직히 그다지 떳떳하지는 않았기에 입술을 달싹이며 조금 망설이다, 한숨을 밀어내듯 대답했다.
“저, 다시 그림 그려요.”
“…….”
“예전 제 그림을 좋게 봐 주셨던 분이 좋은 조건으로 다시 그림을 그려 보라고 제안해 주셔서…. 이상하거나 위험한 돈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빚부터 갚으세요.”
매달 얼마씩이라도 나에게 되돌려 보내겠다는 큰아버지에게 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모님은 최소한의 생계를 이어 가며 그림을 그릴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시는 분들이었기에 우리 집에는 재산이라고 할 만한 여유 자금이 전혀 없었다. 그런 상태에 놓인 아버지와 나를 맡게 된 것이 가계에 큰 부담이 됐으리라는 것을 모를 나이도 아니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대단한 심경의 변화가 생기지 않는 한 앞으로도 그곳을 떠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이 빚을 갚아 드린다 해서 큰아버지가 나에게 죄스러운 기분을 느끼실 필요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죄송한 건 내 쪽이었다.
자동 포장기에서 씌웠던 비닐을 벗겨 내고 막 우산을 펼치려는 큰아버지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 괜한 반항심에 묻지 않고 싶었지만, 그러나 묻지 않을 수 없는, 혈연에 대한 이끌림에, 억울한 기분이 울컥 치솟았다.
“아버지는… 어떠세요.”
“…….”
돌아본 큰아버지는 입매를 한 번 굳힐 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의미로 힘없이 웃어 보이며 뒷목을 쓸었다.
돈의 출처를 굳이 밝혔던 것은, 그림을 다시 그리게 된 대가라는 얘기로 큰아버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내가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는 소식이 아버지 귀에 들어가게 되기를 바라는 심리도 어느 정도 작용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그 얘기를 전해 달라는 부탁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가 어떻게 생각하든 내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큰아버지에게, 아버지에게, 나 자신에게 어떻게든 증명하고 싶은 혼자만의 발악이었다.
낡은 우산을 받쳐 들고, 고급 세단들이 줄지어 들어오고 빠져나가는 고풍스러운 붉은 벽돌길 위를 걸어 나가는 큰아버지의 뒷모습을 눈으로 배웅하다 시선을 거둬들였다.
강약을 달리하며 종일 비가 내리고 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호텔을 찾고 있었다. 하긴, 넓은 차양 아래에서 차에서 내려 우산 한 번 펼칠 일 없이 곧장 실내로 이동하는 사람들에게 장맛비는 외출을 방해하는 큰 이유가 되지는 못할 것 같았다.
정문에서 살짝 비낀 위치의 기둥에 기대서서 호텔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현실 감각이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큰아버지가 평범의 기준이 되는 예전의 마을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고급스러운 의복으로 치장하고 어딘가 여유로운 자신감에 차 있는 듯 보이는 이곳의 사람들이 평범의 기준이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이곳에는 비슷한 인상의 사람들뿐이었다. 수협 공판장에서 그날 새벽 잡아 올린 학꽁치 경매를 벌이는 사람들이 서로 형제처럼 닮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큰아버지마저 떠난 지금, 컨버스 운동화에 낡은 청바지 차림인 나만이 이곳에서 이질적인 색을 띠고 있었다.
그런 생각으로 다소 불편한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우습게도 나 역시 좋은 차를 타고 이곳에 내린 사람 중 하나였다.
「어제 입고 왔던 옷은 세탁해서 건조해 뒀어요. 욕실 맞은편 선반 위에 올려 뒀으니까 입어요. 냉장고에 과일이 좀 있고, 식탁 위에 빵도 있으니까 나가기 전에 조금이라도 챙겨 먹구요.」
그 뒤, 젖어 있는 신발에 대해서까지 걱정하는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너무 미안하고 고맙다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해야 했다. 젖은 옷의 뒤처리까지 그가 신경 써줄 줄은 정말 몰랐기에 그사이 곤히 잠들어 있었던 자신이 뻔뻔하게 느껴졌었다.
그리고 그는 만일을 위해 오늘 하루는 자신이 준비한 차량으로 움직이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사양했지만, 이건 친절이 아닌 위험에 대한 대비라며 그는 단호했다. 모래의 아버지 쪽에서 어떤 계획을 숨기고 있을지 모르니 대중교통 이용은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주인 없는 집에서 어색함 속에 준비를 마치고 대문 앞으로 나가 보니, 그의 말대로 검은색 대형 세단이 빗속에 서 있었다. 나도 알고 있는 엠블럼을 단 수입 차량이었다. 미리 그의 연락을 받았는지 우산을 쓴 기사님이 차 앞에 나와 있었다.
그는 그 차로 모래와 형을 태우고 약속 장소에 가는 게 좋겠다고 했지만, 모래는 차에 태운 그대로 자기 아버지에게로 데려가려는 계략일지 모른다며 거절했었다.
같은 환경에서 함께 자란 남매처럼 그와 모래가 상황을 의심하는 방식이 너무나 유사하다는 생각에 혼자 맥없이 웃고 있는 사이, 모래와 형이 건물의 저쪽 모퉁이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나는 기둥에 기대 있던 몸을 일으켰다.
모래는 진정이 된 상태였다. 그녀는 조금 전 자신의 울음에 대해 쑥스러워하거나 민망해하는 대신, 형의 손을 잡은 채 나를 보며 평소처럼 웃었고, 나 역시 마주 웃었을 뿐이었다.
너는 모래한테 진짜 잘해야 한다고, 모래가 백배는 아깝다고. 서핑 업체 사장님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모두 장난 반 진담 반으로 형에게 그렇게 말했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나 역시 알게 모르게 조금쯤 그런 생각을 품어 왔던 것 같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서로의 손을 꽉 잡은 오늘의 두 사람을 보면서, 그건 두 사람 관계에 대한 피상적 견해일 뿐이었음을 알았다.
예술가와 지지자의 관계에 대한 어젯밤 그의 말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 관계가 예술가 쪽으로 기울어져 균형을 이루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던….
둘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교감의 깊이에 대해, 그 관계에 속하지 않은 타인은 영영 알 수가 없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겨우 그들이 남들과 함께 있을 때 보이는 모습뿐이었고, 그것만으로 두 연인 사이의 균형을 정의하려는 것은, 음식점의 간판만 보고 맛을 평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경솔한 짓이었다.
표면적으로 보자면 모래가 없으면 안 되는 건 형이었지만, 오늘 두 사람을 보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았다. 새삼스럽게.
모래와 형 두 사람 모두에게 실례되게도, 처음으로, 모래의 곁에 형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의 손을 잡지 않은 다른 팔을 내 어깨에 툭 걸치며 모래가 껄렁하게 말했다.
“너희 대표님, 믿을 만한 사람이야?”
“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돌아봤다. 삐딱하게 턱을 쳐든 그녀가 약간은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상황이 좀 이렇잖아. 서이한 이상으로 의심병이 심해졌거든. 혹시 뒤에서 우리 아빠하고 거래하고 있다거나, 그런 인물일 가능성은 없냐는 거지.”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실장님하고 홍콩에서부터 같이 일해 왔던 사이고, 실장님도 굉장히 신뢰하고 있는 분이니까…. 그리고, 그렇게까지 해서 대표님이 이득을 볼 것도 없고.”
돈 때문에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을 만큼 그는 충분히 부유했고, 나도 모르는 과거의 어떤 사건으로 나에게 복수심을 가지고 있다면 모를까, 일부러 모래나 형, 나를 곤란한 상황에 몰아넣으려 할 이유도 없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신 모래는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실장님까지 엮여 있는 관계면 안전하겠지. 내일이라도 당장 떠날 수 있다고 했나?”
“어? 어, 어….”
그리고 이번엔 내 어깨를 힘주어 주무르며 결심을 전해 왔다.
“이번에 서이현 신세 좀 지자.”
■ ■ ■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정면에 펼쳐진 풍경에 또 한 번 몸이 멈칫했다. 실장님 댁 거실에서도 매일 마주하는 한강의 야경이었지만, 그곳에서도 무방비 상태에서 시야에 들어올 때마다 매번 새롭게 감탄하게 되는 풍경이었다. 다른 장소에서 보아도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잔잔한 물결 위에 번진 도시의 불빛이 홍콩의 야경을 연상시켰다. 홍콩에 대한 기억은 연쇄적으로, 내가 얼마나 많은 변화를 겪고 감사한 기회를 거쳐 이곳에 있는지를 실감하게 했다.
수키킴 선생님을 뵈러 가기 위해 호텔 방에서 그의 전화를 기다렸던 그때도, 모래와 형을 위해 그가 준비해 준 최고급 레지던스 아파트의 펜트하우스 창가에 서 있는 지금도, 그의 호의로 만들어진 순간들이었다.
「나하고 그렇게 복잡하게 얽혀도 괜찮겠어요?」
그의 질문에 다른 일을 해서라도 빚을 갚겠다고 답했지만, 실은 두려웠다. 상대에게 약점을 잡히고, 이용당하고… 그런 삼류 영화 같은 전개가 두려운 것이 아니다.
그의 커다란 손과 넓은 품이 차갑고 딱딱한 것만이 아님을 알아 가고, 겉에서는 보이지 않던 그의 표면 안쪽을 채우고 있는 여러 번 덧칠된 그만의 특징적인 색깔들을 조금씩 알아 갈수록… 점점 더 그에게 복잡하게 얽혀 버리고 마는, 마음과 감정의 결말이 두려울 뿐.
우우웅, 우우웅. 침대 위에 내려 두었던 핸드폰에서 울리는 진동음에 뒤로 돌아 침대 앞으로 걸어갔다. 화면에 떠오른 저장명은 ‘대표님’이었다.
찌릿한 통증과 짜릿한 설렘이 양쪽에서 동시에 덤벼드는 모순적인 감정의 충돌이 벌써부터 버거웠다. 심호흡을 하듯 한숨을 내쉬며 매트리스 위에 앉아 전화를 집어 들었다.
목을 가다듬고 통화를 연결했다.
“네.”
[…….]
내가 전화를 받을 줄 몰랐던 것처럼. 맞은편에서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화를 다스리는 것 같은, 혹은 깊게 안도하는 것도 같은, 푹 꺼질 듯한 한숨이 이어졌다.
[전화, 왜 이렇게 연결이 안 됐어요?]
“아… 지금 씻고 나오느라…. 전화하셨었어요?”
[이따 부재중 통화 보고 겁먹지 마요. 내가 스토커 기질이 있는 게 아니라, 오늘 같은 날 연락을 안 받으니까 걱정돼서 그런 거니까.]
“죄송해요. 무사히 들어왔다고 말씀드려서 이젠 괜찮을 줄 알고….”
두 사람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내일 바로 떠나기를 원한다고. 호텔 앞에서 바로 그에게 연락을 취했었다. 그는 아무 문제 없다고, 바로 짐을 챙겨 자신이 준비해 둔 숙소로 이동하면 된다고 했다.
그가 보내 준 차량을 타고 보안이 철저해 안전할 거라며 마련해 준 펜트하우스에 도착한 모래와 형은, 너희 대표의 목적이 우리를 아빠에게 넘기는 게 아니라, 이렇게 잘해 주면서 자기를 믿게 한 다음 널 어디에 팔아넘기려고 하는 게 아니냐며, 이젠 나를 걱정했었다.
그가 나를 어디에 팔아넘겨서 이득을 보겠는가. 그저 과거에 아주 약간 눈에 띄게 그림을 그렸던 것이 그럴싸한 이력의 전부인 나를.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엉덩이를 붙이기도 전에 잘 들어왔다는 연락부터 했기 때문에 샤워하는 사이 통화 연결이 되지 않는 것으로 그가 걱정할 줄은 몰랐다.
[샤워하러 가면 샤워하러 간다… 뭐 그런 보고까지 하라는 것 같아서, 말하다 보니 내가 이상한 놈 같긴 하네.]
자신의 걱정이 지나쳤다고 생각하는지, 겸연쩍게 픽 웃는 소리에, 나는 그에게 보이지도 않을 텐데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그가 이 일에 쏟아 준 시간과 정성, 그리고 돈을 생각하면 그는 상황에 대해 원하는 만큼 세세하게 알 권리가 충분했다.
“아니에요. 제가 꼼꼼하게 연락하고 그런 거에 별로 익숙하지가 않아서 그런 거지, 걱정하신 건…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요….”
그는 별생각 없이 지나가듯 한 말일지도 모르는데 혼자 너무 열을 올렸나 싶어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작아지고 늘어졌다.
전화 너머에서 잠시 말이 없던 그가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나 대신 그렇게 열심히 나 변호해 줘서.]
목 깊은 안쪽에서 묵직한 금속을 진동시켜 만드는 것 같은 낮은 울림이 듣기 좋은 웃음과 목소리였다.
전화로 듣는 그의 목소리에 혈관 속의 피가 다 달아지는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한 것 같다는 낭패감에 아랫입술을 물면서 눈을 감았다.
그가 특별히 달콤한 목소리를 만들고 있는 게 아니다. 내가 그의 모든 것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형이랑 누나 사이에서 어리광 부리면서 자는 겁니까.]
장난기가 좀 더 짙어진 목소리도 좋았다. 구부린 등에 그의 넓은 가슴이 닿아 오는 것 같은 착각을 떨치려 일부러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옮겨 갔다.
[어제는 그렇게 격정적인 잠자리를 가졌던 사람이 형과 누나 사이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동생인 척하는 건, 음… 그건 너무 사기 같은데.]
그의 어조는 여전히 장난스러웠지만, 천연덕스러운 답변으로 맞받아칠 노련함은 내게 없었다. 그와의 관계에서 조금의 여유도 확보하지 못하는 미숙함이 답답해서 에어컨의 적당한 냉기로 차가워진 창문에 이마를 박았다. 이건 나이나 경험만의 문제만이 아니다. 성격의 문제가 더 컸다.
나의 이런 재미없는 반응에 이젠 익숙해졌는지, 혼자 조금 웃던 그는 자연스럽게 말머리를 돌렸다.
[몸은 좀 어땠어요, 오늘?]
“전보다… 괜찮았어요.”
그다음 화제도 나에게는 난이도가 높았지만, 이번엔 바보처럼 굴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가 처음이긴 했지만, 어쨌든 이쪽도 어엿한 성인이었다.
[흠… 다행이네요. 그래도 오늘 하루는 쉬었으면 좋았을 텐데. 불편했죠?]
“아니요, 정말… 몸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 뒤….”
[뒤?]
그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말끝을 올리며 되물었다. 눈썹을 추키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 말끔한 얼굴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이마를 떼고 앞을 바라보자, 완전히 해가 져버린 도시의 밤을 그대로 투영하는 검은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이 붉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뒤처리…를 바로 해서 그런지… 지난번보다 훨씬 괜찮았어요.”
[…….]
그의 침묵에 얼굴이 더 달아올랐다.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럽게 얘기하고 싶었지만 성공한 것 같지가 않았다.
[뒤처리라는 말을 하는 게 그렇게 힘들어요?]
그의 목소리에서 불길한 짓궂음이 느껴졌다.
[할 땐 그렇게 솔직하게 사람을….]
“저, 대표님도! 대표님도 오늘… 많이 피곤하셨죠?”
갑작스럽게 그의 말을 막으려 서두른 탓에 목소리가 삐끗했지만, 그는 음 이탈 따위로 웃거나 놀리지 않았다. 대신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든 침묵으로 숨 막히게 했다. 나를 빤히 살피는 회청색 눈동자의 저돌적이고도 진득한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말을 돌리려 애쓰는 나의 노력에 이쯤에서 물러나 주기로 했는지, 그가 침묵을 깨고 피식 웃었다.
[오후에 귀가해서 푹 잤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하루 제대로 못 잔 거 정도로는, 뭐.]
한숨도 못 잔 상태에서 나의 젖은 옷까지 생각해 줬던 그가 나는 놀랍기만 한데, 그는 오늘 하루 자신이 마련한 모든 것들이 별것 아닌 듯 얘기하고 있었다. 내가 너무 미안해하거나, 너무 고마워하지 않도록.
전면창 아래쪽의 낮은 턱에 걸터앉으며 목에 걸고 있던 수건을 끌어 내려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번 일, 정말 감사합니다…. 저 혼자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답이 나오지 않았을 거예요.”
잠시 그는 말이 없었다. 말의 뜻을 가늠해 보고 손해 보지 않으려 탐색하는, 그런 종류의 침묵이 아니었다. 시간을 비워 두고 감정이 고여 들기를 가만히 기다리는 듯한, 깨뜨리고 싶지 않은 종류의 침묵이었다.
[그럼… 입어 줄 거죠? 야한 속옷.]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튀어 버린 그의 대답에 한순간 멍해졌다가 곧 가벼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어? 왜 웃음으로 때우려고 하지? 난 진지한데.]
고맙다는 인사를 진지하게 받는 것조차 그는 이런 식으로 노련하게 사양하고 있었다. 이번 일을 해결해 준 그의 능력이 꼭 그의 재력과 커넥션 때문만은 아님을 인정해야 했다.
여기서 내가 오케이라는 식으로 대답하면, 우리 관계에 서로를 통해 욕구를 해결하는 사이라는 항목이 자연스럽게 추가되어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다, 쥐고 있던 수건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내가 그런 관계 속으로 자신을 몰아넣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원하지 않는지. 그조차도 불확실…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건 위선이었다.
기회만 된다면 내가 또 아무 망설임 없이 그와 자려고 하리라는 걸 이제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옅었던 웃음기가 가라앉은 자리에, 이번엔 그의 좀 더 진지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서이현 씨가 그림 그리게 됐다는 얘기, 한 실장에게 해야 할 것 같은데. 혹시 이번 일 관련해서 한 실장에게 어디까지 얘기해도 됩니까? 서이현 씨가 내키지 않는 부분이나 직접 얘기하고 싶은 부분이 있으면 거기에 대해선 나는 입 다물게요. 좀 서두르는 것 같긴 하지만, 이런 쪽으로 한번 정하면 빨리 서류상으로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어지는 성격이라.]
“대표님께 말씀드린 건, 그대로 전부 말씀드려도 괜찮습니다.”
[그래요. 그럼 서이현 씨가 형이랑 누나랑 송별회 하는 동안 난 앞으로 서이현 씨가 그려 내는 그림이 전부 내 거라는 계약서 열심히 작성하고 있을게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소리 없이 웃으며 말했지만, 그가 내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엷은 웃음기를 알아채리라 믿었다.
[귀찮겠지만, 자기 전에, 내일 일어나서, 메시지 하나씩만 보내 줘요.]
“네, 그럴게요.”
거기까지 이야기한 뒤에도 그는 끊자는 말을 하지 않고 다시 또 침묵했다. 나 역시 먼저 마무리하는 인사를 꺼내지 않았다. 아쉬움에 쉽사리 통화를 끝내지 못하는, 막 사귀기 시작한 연애에 서툰 연인들처럼, 싫지 않은 긴장감을 가진 침묵이 쌓이고 있었다.
그 침묵에 부드러운 종료를 먼저 고한 것은 그였다.
[마지막 밤인데 내가 너무 오래 잡고 있었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요.]
통화는 약 20분 가까이 이어졌다. 영화를 한 편 보고 난 뒤처럼 그와의 통화에는 여운이 있었다. 그것이 흩어져 버리는 것이 아까워 전화기를 쥐고 그대로 한참 앉아 있다가, 샤워하는 동안 그가 걸었다는 부재중 통화가 궁금해졌다.
어제부터 쌓였던 피로가 있어 평소보다 조금 오래 더운물을 맞으며 노곤하게 몸이 풀리는 감각을 즐기긴 했지만, 그래 봤자 샤워 시간은 고작 30분 정도였다. 그 30분 동안 그가 남긴 부재중 통화 기록은 26건이었다. 한 사람에게 내가 받아 본 가장 많은 수의 부재중 통화였다.
스토커 기질이 있는 게 아니라며 미리 변명할 만했구나 싶어 피식 웃으며 일어났다. 핸드폰을 침대 위에 던져두고 방을 나가려다 멈칫 돌아섰다. 그리고 전화기를 다시 집어 들어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그를 또다시 스토커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거실에서는 형과 모래가 먼저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세로로 긴 형태의 거실에서는 좀 전의 게스트룸에서보다 훨씬 더 탁 트인 전망을 조망할 수 있었다.
“서이현, 이 방 하루에 700만 원이래.”
소파 한쪽에 형과 나란히 붙어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모래가 나를 돌아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외쳤다. 그의 재력에 대해 잘 몰랐던 때의 나였다면 믿기 어려웠을 금액이었다. 물론 지금 역시 1박에 700만 원이라는 금액이 실체로 다가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너 진짜 원양 어선에라도 팔려 가는 거 아니야?”
그사이 이 방의 투숙 비용을 인터넷에 검색해 봤었는지, 옆자리에 앉은 나에게 모래가 핸드폰 액정을 들이밀었다.
“나 원양 어선에 팔아 봤자 얼마나 받는다고.”
“그건 그렇지. 보기보다 강단이 있긴 하지만, 서이현이 육체파는 아니지.”
모래는 금세 수긍하며 테이블 위의 새 맥주를 집어 나에게 건넸다.
병맥주의 뚜껑을 비틀며 흘깃 보니, 저쪽 일인용 소파 옆에 두 사람의 배낭이 놓여 있었다. 내일을 위해 미리 챙겨 둔 두 사람의 모든 소유물이 든 배낭은 너무나 단출했다. 해외로 거처를 옮기려는 것이 아닌 2박 3일의 가벼운 국내 여행을 떠나려는 사람들 같았다.
서로 등과 등을 맞대고 기대 있는 한 쌍의 배낭을 바라보다 외면하듯 고개를 돌리고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너희 대표님, 근데 뭐 하는 분이야? 갤러리 운영은 취미고, 사실은 재벌 3세 그런 거야?”
우리 셋이 서로 넉넉하게 틈을 두고 일렬로 앉을 수 있을 만큼 메인소파는 충분히 길고 깊었다. 형과 나 사이에 앉은 모래가 고개를 젖혀 등받이에 뒷머리를 기대며 나를 돌아봤다.
“아마… 그 비슷한 것 같아.”
홍콩에서 유니 누나와 주한이 형이 슬쩍 얘기해 줬던 그의, 혹은 그의 가족의 재력을 고려하면 재벌가 자제라고 해도 크게 틀린 이야기는 아닐 듯했다.
“그래도 취미로 갤러리 운영하는 건 아니야.”
팬텀이 그에게 단지 그럴듯한 명함 한 장의 의미는 아니었다. 명함 속 직함 하나를 위해 페로몬으로 사람들을 홀려 그림을 판다는 얘기까지 들어 가면서 화랑을 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끌어올릴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정도로 부자면, 이런 쪽에 빠삭한 것도 이해는 된다. 나도 잘은 모르지만, 그냥 동네 부자 정도의 스케일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재력이 있다고 해서 온실 속 화초처럼 물정 모르고 자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외부인들과의 정치 싸움에다 집안사람들끼리도 암투다 뭐다 주변에 믿을 사람이 없으니까. 어릴 때부터 지저분한 상황에 꽤 노출됐을지도 모르지. 딱 보니까, 실력이 보통이 아니야.”
모래는 그가 마련한 도피 계획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발리에서 생긴 일’ 사장님 댁에 들러 짐을 가지고 이쪽으로 이동하는 사이, 그는 임시로 메일 주소를 하나 생성해 자신이 준비해 둔 계획에 대해 꼼꼼한 자료를 전송해 두었다.
계획에 따르면, 형과 모래는 내일부터 15박 16일 동안 총 9개국을 거쳐 발리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경유로 잠시 거쳐 가는 국가는 제외한 숫자였다. 비행기만 이용하는 게 아니라, 중간중간 배와 버스를 이용해 국경을 넘는 구간도 포함돼 있었다.
그 정도로 복잡하게 루트를 꼬아 두면 민간인 입장에서는 아무리 유능한 흥신소를 고용하더라도 추적이 불가할 거라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나름대로 여정도 즐길 수 있도록 스케줄을 짰으니 좋은 시간 보내라는 멘트 뒤의 스마일 이모티콘과 함께.
그 계획서를 확인하고 나서 모래는 그를 완전히 신뢰하게 된 것 같았다. 반했다는 말까지 사용해, 드물게도 형이 질투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
“야, 도대체 벨라루스에 민스크가 어디냐? 난 그런 나라, 그런 도시가 있는지도 몰랐다.”
짐도 전부 챙겨 두었고 한숨 돌렸으니 이제 좀 씻겠다며 침실로 향하던 형이 이쪽을 돌아보며 큰 소리로 말했고, 누나와 나는 마주 보며 웃었다.
우리 셋 모두에게 결코 가볍지 않은 하루였다. 내일부터는 또 완전히 다른 생활이 시작될 것이다. 그 서글픈 피로함과 가슴속을 어지럽히는 막연한 두려움을 굳이 말로 옮기지 않은 채 우리는 평소처럼 이 밤을 보내려 하고 있었다.
이것이 우리의 방식이었다. 감정을 전부 헤집어 꺼내 두고 서로 확인하려 한다면… 그것이 모래와 형의 방식이었다면, 나는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너희 대표님.”
“어?”
맥주병을 내려다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대표님이라는 말에 제 발 저린 도둑처럼 과한 반응을 보였다.
“네 재능에 대해서 확신이 엄청난가 봐. 난 그쪽은 아예 모르지만, 그래도 그림 한 작품만 보고 그런 큰돈을 계약금으로 내주고 이런 일까지 도와준다는 게 흔한 얘기는 아닐 것 같은데. 서이현 그림에 그만큼 푹 빠졌다는 거겠지?”
제삼자, 그것도 그와는 안면조차 없는 모래의 입을 통해 듣는 말이었고, 연애의 대상으로서의 내가 아닌 나의 그림에 대한 얘기였지만, 그가 나의 일부분에 푹 빠졌다는 말은, 솔직히 듣기 좋았다.
서툴게나마 연애 감정으로 누군가를 좋아하고 설렘을 느끼고, 일상과는 다르게 뛰는 심장의 리듬을 상대와 교감하고…. 그런 일들을 겪어 보기도 전에 감정적인 경험이 확대되는 것이 두려워 마음을 둔화시켰고, 덕분에 무엇을 보고 듣더라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 마르고 빈약한 감정을 갖게 됐었다.
강하게 단련된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척박하게 만들어, 풍부하게 느끼고 향유할 재료 자체를 바닥낸 것에 가까웠다.
그런 말라붙은 감성에도 촉촉하게 배어드는 물기가 신기했다.
더군다나 그와의 미래를 전혀 낙관적으로 보고 있지도 않았고, 낙관적 결론을 위해 행동할 자신감조차 없었음에도, 순간순간 그를 향한 감정을 유지해 나갈 근거를 찾아내는 내 능력은 감탄스러웠다.
소파 위에 무릎을 세우고 앉은 모래가 맥주병의 라벨에 무의미한 시선을 주며 반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재능을 알아봐 주는 사람을 만나는 게, 재능 자체만큼이나 중요하다던데. 다행이지.”
우리가 떠나기 전에 네가 그런 사람을 만나게 돼서, 라는 말이 생략된 것 같은 그녀의 중얼거림이 바로 내일로 들이닥친 실감 나지 않는 우리의 이별을 상기하게 했다.
“계약 만료 전에 방을 빼게 된 거라, 다음 세입자 찾는 데 들어가는 중개 수수료 정도는 우리가 부담해야 할 것 같더라. 3천만 원에서 조금 빠진 돈이 들어올 거야. 일단 그거 먼저 너희 대표님한테 갚고, 둘 다 발리에 도착하면 일부터 잡을 거니까, 매달 조금씩 보낼게. 한국인이 운영하는 서핑 캠프에 강사 자리 알아보려고 하는데, 우린 장기 체류 예정이라 아마 우대해 줄 거야.”
몸뚱이 멀쩡한 20대 셋이서 7천만 원 정도야 금방 못 갚겠냐며, 돈 걱정에 끙끙대지 말고 그림에 집중하라고. 그렇게 덧붙인 모래는, 내가 뭘 걱정하고 있을지, 그 정도는 다 안다는 듯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가볍게 흩트렸다.
모래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던, 그저 막연하고 당황스럽기만 했던 시기부터 지금껏 곁을 지켜 준 사람이었다.
연륜인지 타고난 직관력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모래만큼이나 나를 잘 파악하고 있었던 그의 말들은 다시 짚어 봐도 여전히 신기했다.
“너희 대표님도 그러라고 우리 도와주신 거 아니겠어? 네가 걱정 없이 그림 그릴 수 있는 환경 만들어 주려고. 그게 개인적으로 네 그림의 팬이기 때문이든 갤러리 오너로서의 사업적인 직감 때문이든, 어쨌든 너한테 그만한 투자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으니까 결정한 일이겠지. 그러니까 너는 그림 생각만 해. 아, 혹시 우리 아빠하고 한패인 거 아닐까 처음에 의심했던 건 대표님한테 비밀로 해 주고.”
모래의 마지막 말에 웃어 보였지만, 그녀의 말 속에는 내가 간과할 수 없는 내용이 숨어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맥주병을 기울이고 있던 나는, 문득 모래에게 묻고 싶어졌다.
주한이 형이나 유니 누나에게 상담했다가는 누구에 대한 얘기인지 단번에 간파당하겠지만, 그와 안면조차 없는 모래라면 혹시 간파를 당하더라도 타격이 거의 없을 것 같았다. 적어도 그와 모래를 동시에 앞에 두고 안절부절못할 일은 없을 테니까.
“누나.”
병의 표면에 맺힌 물방울에 불어 흐물거리는 라벨을 손가락으로 밀어내면서 나름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만약에… 부모님이 자기 때문에 조금… 힘든 일을 겪어야 했고, 거기에 대해서 죄책감을 갖고 있다면, 아마 연애나 사랑에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일 확률이 높겠지?”
너무 직접적으로 얘기한 것 같아 금방 후회스러웠다.
“그러니까. 육체관계는 가지더라도, 그 이상으로 깊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선을 긋는다거나….”
그에게 직접 고백하는 것만큼이나 긴장이 돼서 심장이 목구멍을 틀어막는 것 같았지만, 실은 무의미한 헛발질일 뿐임을 알고 있었다. 당사자가 아닌 그녀에게 이런 질문을 해서 무엇을 확인받을 수 있겠는가.
“나도 그렇잖아. 나도… 누군가 한 명과 특별한 관계가 돼서… 그 사람과 모든 것을 나눈다는 게… 무섭거든.”
그래서 나는 모래와 형이 헤어지게 되는 것도 무서웠다. 함께 있을 때 깊은 공감을 나눴던 만큼 그것이 단절됐을 때 일어나는 파괴력은 막강했다. 나는 그 파괴력으로 존재의 중심을 강타당한 경험이 있었다. 대상을 앞에 두고 뛰어들게 만드는 것도, 피해 버리게 만드는 것도, 결국은 모두 과거의 경험이었다.
“근데 그거, 무서운데도 자꾸 끌린다는 얘기 아니야?”
“어… 어?”
“그런데도 네가 그 사람한테 자꾸 끌리니까 물어보는 거 아니냐고.”
“…….”
그렇게 묻는 모래의 얼굴은 태연했다. 그 상대에게 끌린다는 얘기를 한 것도 아닌데, 모래는 거기에 대해서는 완전히 확신한 상태로 묻고 있었다. 부정해 봤자 소용없을 것 같아, 붉어졌을 얼굴로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사람도 마찬가지로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네가 불안정한 상태로도 어쩔 수 없이 그 상대에게 관심이 가는 것처럼… 그 사람에게도 회의적인 입장을 뛰어넘고 선을 무너뜨리면서까지 원하게 되고 좇게 되는, 그런 상대가 나타날 수도 있는 거 아닐까?”
연애 감정은 논리로 쌓아 올린 탑의 꼭대기에 얹어지는 장식이 아니라고들 하니까. 그 역시 원치 않더라도 열정에 휩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그를 흔들고 무너뜨리는 대상이 내가 될 수도 있다는, 그것은 왠지 상상이 어려웠다.
“사실은 나도 무서워.”
누가 들을 것을 의식한 듯 문득 낮아진 모래의 목소리에, 잘못 들은 게 아닌지 그녀의 얼굴을 돌아봤지만, 생각에 심취해 나의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까는 고작 마음의 변덕 따위에 휘둘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듯 얘기했지만, 아저씨 말대로 마음은 변할 수도 있는 거고,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잖아.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든 스스로 선택했다는 그 자체를 후회할 일은 없지만, 그 선택이 불러올지도 모르는 고통까지 전혀 두렵지 않은 건 아니거든. 그게 서이한과의 이별로 인한 상실감이든, 가족에 대한 죄책감이든….”
맥주를 두어 모금 더 마신 모래는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그가 보내 준 자료를 프린트한 용지들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 갔다.
“결국 자신에게 무엇이 더 고통인지를 알아 가는 게 중요한 것 같아. 나에게는 내면의 욕구를 충분히 살피지 않고 선택을 남의 손에 맡긴다는 자체가 고통인 것처럼, 어떤 사람에게는 안전이 보장돼 있지 않다는 막연함이 더 고통스러울 수도 있겠지. 아무리 일반적인 지표가 있다 해도, 사람마다 행복이나 고통을 느끼는 실제적인 감각은 다르니까. 무섭지 않은 게 아니라, 어쩌면 더 무서운 것을 피하기 위한 선택일지도 몰라.”
차분하게 말을 마친 그녀가 문득 나를 돌아보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근데 그거, 혹시 토끼 씨 얘기야?”
잡아뗄 수도 없게 얼굴과 귓불에 순간적으로 불이 붙었다.
그를 만나 본 적도 없는 모래에게 이렇게 쉽게 들킬 정도라니. 유니 누나와 주한이 형에게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필사적으로 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 두 사람에게 들켰을 때 벌어질 일들에 대한 가벼운 공포로 몸이 살짝 떨렸다.
“흐음, 그렇구나…. 그런 거였구나.”
그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무엇에 대한 수긍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는 것이 두려워 자세히 물을 용기는 나지 않았다.
“아쉽다. 우리 서이현 첫사랑인데 얼굴도 못 뵙고 떠나다니.”
그 뒤로 모래는 더 파고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내 그림에 푹 빠졌을 거라는 그녀의 추측이 감미로웠던 만큼, 이 감정에 대한 첫사랑이라는 정의는 당황스럽기만 했다.
첫사랑이라는 단어가 주는 인상은 두 번째, 세 번째 사랑과는 어딘가 달랐다.
서툴지만, 그만큼 계산 없이 자신을 그대로 드러낸 채 맨몸으로 부딪치는 솔직함과 풋풋함을 연상시키는 그 단어는, 말라붙은 가지에서는 피어날 수 없는 연한 잎사귀 같아서. 자신의 어이없는 실수를 마주했을 때처럼 실소가 흘렀다.
몇 번의 잠자리와 약간의 대화만으로 혼자 들떠서 그를 사랑하게 됐다는 헛소리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그런 쉬운 개념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감정은 사랑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사랑은 여전히 나에게 가장 두려운 변화였다. 그런데도 나는 전혀 제어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 당장 아프지 않다는 미련한 이유만으로.
만약 나를 대하는 그의 눈과 말이 처음처럼 무심했다면, 당장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이 감정이 자라지 못하도록 말라붙게 했을 텐데.
그는 자기 전에 문자를 하라고 했지만, 전화를 걸고 싶었다. 목소리를 듣고 싶었고, 얼굴을 보고 싶었다. 끌어안고 싶었고, 맨살에, 그의 뜨거움에 닿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감상을 그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실제로 고백을 행동으로 옮기는 상상을 해 본다. 상상의 다음 장면에 펼쳐지는 것은,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시선을 얼버무리는 그의 곤란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