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1. 변화에 대한 갈구 (13/31)

   1. 변화에 대한 갈구

왜 이곳으로 왔는지 모르겠다.

정상적인 상태에서 결과와 뒷일을 고려해 내린 판단이 아니었다. 단 한 번 와 봤을 뿐인 이곳으로 향한 걸음은 무의식의 조종이었다.

자신을 찍어 누르려 하는 잔인한 손가락의 접근을 눈치채고 본능적으로 안전한 곳을 향해 방향을 트는 개미나 나방처럼. 정신없이 필사적으로 걷고 보니 이곳이었다.

교회 맞은편 버스 정류장에서 헤어진 지 두 시간도 되지 않았고, 그러니 그가 다른 사람들과 한창 2차를 즐기고 있을 때라는 것은 굳게 닫힌 육중한 대문 앞에 도착한 뒤에야 깨달았다.

대문 위의 벽돌 지붕 아래로 들어가 구석에 우산을 세워 놓은 뒤, 떨리는 젖은 몸을 팔로 쓸어 부둥켜안았다. 분명 여기까지 우산을 쓰고 왔음에도 머리카락을 비롯해 전신이 물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대를 쥐고 있기만 했을 뿐, 제대로 비를 가릴 생각조차 없었던 것이다.

청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이 집으로 찾아오는 일도 없었겠지만, 약속도 없이 찾아온 주제에 전화를 걸 엄두를 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젖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대표님’에게 전화를 걸었던 손가락에는 평소의 망설임이나 허울 좋은 예의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 궁지에 몰리면 인간은 자기 자신이 살기 위해 예의 따위는 생략하게 되고, 얼마든지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할 수도 있었다.

예의도, 내가 나라고 알고 있는 성격 같은 것도, 나를 이루는 견고한 형식과 내용이 아니었다.

취약하고 허술한 부분은 그뿐만이 아니다.

아무리 무던한 척을 해도 결국 외부의 개입에 안전과 평온을 위협받으며 휘청거릴 수밖에 없는 사회적 정신적 나약함에, 스스로를 독하게 조롱하며 욕을 퍼부어 주고 싶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무미건조함을 평온으로 착각했었다.

무뎌지는 것 역시 강해지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었다.

지금까지 몰랐었다.

공격적이기보다 방어적이기를 택했을 뿐이라 생각했지만, 공격 자체가 일어날 수 없는 아무것도 없는 상황 속으로 몸을 숨기고 있었을 뿐이었다. 공격이 없는데 어떻게 방어를 하겠는가.

나의 일상은 기껏해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야만 유지될 수 있는 한없이 불안정한 얇은 유리 바닥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무방비한 상태로 외부의 공격에 노출되어 그대로 휘둘리고 자국이 남았던 열여섯의 나와 달라진 게 없었다. 등 뒤에 닿은 두꺼운 철제 대문이 가진 금속성의 차가움이 뼛속까지 얼릴 듯 써늘했다.

얼마 정도가 지났는지 모르겠다. 5분 정도인 것도 같았고, 끔찍하게 긴 시간이 지난 것 같기도 했다.

도로와 면한 골목 아래 쪽에서 빗줄기를 비추는 라이트 불빛이 진입했다. 우회전이나 좌회전을 하지 않고 그대로 쭉 달려 올라온 자동차가 대문 앞에 제대로 멈춰 서기도 전에 서둘러 차에서 뛰어내리는 인기척이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미처 고개를 다 들기도 전에, 지붕 아래로 뛰어온 인영이 자신의 재킷부터 내 어깨에 둘러 주었다. 무엇을 묻거나 인사의 말을 하기도 전이었다.

얇은 여름용 재킷이 젖은 어깨를 덮고, 그가 말없이 나를 당겨 안았다.

불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의심의 여지없이 뚜렷한 존재감이 나를 붙들었다. 등 뒤의 차가움에서 나를 당겨 끌어내는 그의 가슴과 어깨의 단단함과 뜨거움이, 나와는 다른 그의 견고함을, 스스로를 단련해 온 고독한 시간의 응축을 말해 주었다.

리모컨으로 차고 문을 열어 주면서 그가 대리기사에게 주차를 부탁하는 동안, 나는 그의 팔 안에서, 그림을 그리겠다고, 도와 달라고, 여러 번 되풀이해 중얼거렸다. 오직 한 줄의 대사만을 준비해 오디션에 참가한, 재능 없이 절박함만이 가득한 무명배우처럼.

그는 몇 번이나 재킷을 고쳐 여며 주며 나를 더 강하게 안았다. 허리에 팔을 감고 등을 가로질러 어깨를 안은 손은, 내가 더는 비생산적인 자기혐오와 감상적인 자기 연민 속으로 추락하지 않도록 휘감아 팽팽히 당기는 밧줄 같았다.

나의 뒷머리를 눌러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게 하며 나지막하게 욕설을 중얼거리는 목소리만으로도 넘쳐흐를 듯 들끓고 있던 불안이 수그러드는 것을 느끼며, 질끈 눈을 감았다.

집 앞에 와 있다며 밖에 있던 사람을 불쑥 불러냈으니 궁금한 것도 많고 놀라기도 했을 텐데. 그는 그저 자신의 체온으로 내 안의 냉기를 몰아내 주기만 할 뿐,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나를 안은 자세 그대로 대리기사에게 대금을 지불한 그는 재킷을 더 꽉 여며 주면서 대문 안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를 힐끔거리는 기사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비가 퍼붓는 어두운 그의 정원은 깊은 숲 속처럼 공기와 습기가 짙게 가라앉은 냄새가 났다. 유니 누나, 주한이 형과 어울려 3월의 토끼와 모자 장수의 다과회를 연상시키는 소풍을 즐겼던 그날의 정원과는 다른 장소 같았다.

금방이라도 컴컴한 덤불 뒤에서 우비를 뒤집어쓴 괴한이 튀어나올 것 같은 을씨년스러운 정원을 지나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실외와 확연히 다른 부드러운 공기가 느껴졌다.

아차 싶은 얼굴로 미간을 구기며 그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잠깐 여기서 기다려요.”

다급하게 거실 쪽으로 사라지려 하는 그가 무엇을 염려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처음엔 수건을 가져오려는 건가 싶었지만, 낭패감이 가득한 얼굴을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다. 그림. <소외>를 치워 주려는 것이 분명했다.

현관의 복도로 올라서려는 그의 셔츠의 옆구리 부근을 붙잡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림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그때 내가 보였던 반응은,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주한 그 그림이 연상시킨 과거의 모든 사건들에 대한 것이었다.

“괜찮아요. 이제 그건… 정말 괜찮습니다.”

“…….”

온몸이 흠뻑 젖어 있음에도 목소리는 메말라 버석거렸다.

그는 멈춰 서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러울 정도로 부드러운 손길로 곧 다시 어깨를 감싸며 아이를 달래듯이 말했다.

“그럼 서재로 가요. 거기가 더 따뜻할 겁니다.”

티셔츠와 청바지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고, 젖은 양말이 깨끗한 나무 타일 위에 자국을 만들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말라며 어깨를 당겼다.

2층으로 올라간 그는 서재가 아닌 욕실로 나를 데리고 갔다. 지난번에도 써 본 적이 있는, 그의 침실에 딸린 욕실이었다.

우선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게 먼저라고, 욕실 입구에 뻣뻣하게 서서 그가 덮어 준 재킷의 자락을 움켜쥐고 있는 나를 향해 그가 말했다.

“비누칠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 따뜻한 물에 몸을 좀 담가요.”

허리를 굽혀 물의 온도를 가늠하듯 욕조를 채워 가는 물을 손끝으로 가볍게 저으며 그렇게 말한 뒤, 그가 이쪽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몸속까지 낮아진 체온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금방 돌아오지 않으니까.”

이 이상 더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지만, 걱정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거품이 이는 목욕제 대신 은은한 향의 목욕용 소금을 욕조 안에 풀어 놓은 그는 다이얼을 조절해 욕실의 조도를 낮춘 뒤,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꽉 붙잡고 있었던 재킷을 어깨에서 조심스럽게 걷어 냈다.

전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에, 그 와중에도 흠뻑 젖어 몸에 착 달라붙은 옷이 신경 쓰였다. 손으로 티셔츠의 배 부분을 당겨 몸에서 떼어 내자, 그가 피식 웃었다.

“머리까지 제대로 따뜻하게 해 줘요.”

젖은 내 머리카락을 가볍게 흩트리며 그렇게 말하고는 밖으로 나가 욕실 문을 닫았다.

어쩌다 내가 그의 집 욕실에 서 있는 건지 기억의 중간이 잘려 나간 것처럼 어리둥절했지만, 지금은 일단 그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것이 나을 듯했다. 알량한 자존심을 부려 봤자, 도움을 받지 않고는 해결할 엄두가 나지 않는 상황이었다.

젖은 옷을 어렵게 벗고 주춤거리며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얼어 있던 몸이 약간 뜨거운 정도의 온수에 잠기자 살갗이 따끔따끔 간지러웠다. 겨울에나 느낄 수 있는 감각이었다.

손바닥으로 물을 떠올려 얼굴과 머리에도 온수를 끼얹었다. 몸은 노곤하게 풀어지고 있었지만, 정신의 경직까지 녹일 수는 없었다. 다시 떠오르는 위협에 움츠러들려는 몸을 바로 세우며 고개를 젓는데, 똑똑, 짧은 노크 뒤에 문이 반 뼘쯤 열렸다.

“들어가도 됩니까.”

문은 욕조가 아닌 반대쪽의 샤워 부스 방향으로 열리게 되어 있었다. 목소리만 들릴 뿐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알몸이 신경 쓰였지만 유난을 떨며 나가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네….”

그는 갈아입을 옷과 머그 하나를 가지고 들어왔다. 문 옆쪽 벽에 매달린 선반 위에 옷을 내려놓은 뒤 이쪽으로 다가왔다. 성기를 가리기 위해 어색하게 무릎을 세워 끌어안자, 그가 머리 위에서 낮게 웃었다.

“뭘 새삼스럽게….”

“…….”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귓불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그가 건넨 머그를 받아 들었다. 데운 우유였다.

“좀 마셔요. 몸도 따뜻해지고, 진정이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우유만이 아니라 머그까지 일부러 데운 건지 몰라도 자기로 만들어진 표면이 뜨끈뜨끈했다.

머그를 감싸 쥐고 우유를 한두 모금 마신 것을 확인한 뒤에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허리에 손을 짚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는, 멋대로 집을 빠져나가 걱정을 시키다 해가 진 뒤에야 겨우 집으로 돌아온 강아지를 대하는 주인 같은 얼굴이었다.

진흙탕에 구르고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다른 개와 싸움까지 하다 왔는지 지저분해지고 상처 난 몰골에 화를 내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안쓰러운 마음에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 같은…. 굳이 비유하자면 그런 얼굴이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집 나갔던 강아지가 된 기분에 저절로 시선이 다시 아래를 향했다.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충분히 따뜻해지면 나와요. 옷은 새 거로 갈아입고.”

처음에 그에 대해 가졌던 부정적인 인상과 야박한 평가가 까마득했다. 유니 누나와 주한이 형만큼은 아니더라도, 언제부터인가 그는 나에게도 자신의 친절을 조금씩 열어 주고 있었다. 몸을 맞댄 사이라는 사적인 관계성이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지는 몰라도, 지금의 친절이 같이 잔 사이이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머그의 온기가 미지근해질 때까지 긴 목욕을 마친 뒤 몸을 닦은 젖은 타월을 쥐고 주춤주춤 욕실을 나섰다. 그는 침실의 일인용 소파에 앉아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여러모로 처음 이 방에 왔던 날과 유사한 상황에 입이 말랐다.

내 인기척에 몸을 일으킨 그가 가까이 다가와 젖은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으로 비벼 보더니 머리를 말리는 게 좋겠다고 했다. 여차하면 직접 말려 주려고 할 것 같아서 얌전히 말을 들었다.

욕실 입구의 거울 앞에 앉아 머리카락을 말리는 동안 그는 등 뒤의 벽에 기대서서 거울을 통해 나를 보고 있었다.

전부 말렸다고 생각해 드라이어를 화장대 위에 내려놓고 거울로 그를 쳐다보자, 그가 팔짱을 풀고 말없이 다가와 드라이어의 전원을 다시 켜고 손가락을 깊이 얽어 넣어 두피까지 꼼꼼히 말려 주었다. 한다고 했는데 성에 차지 않았나 보다.

드라이어를 내려놓은 그는 내 정수리 위에 오른손을 올린 채 거울 속에서 잠시 나를 응시했다. 시선을 마주하자, 손끝에 힘을 주어 머리를 한 번 꾹 누른 뒤 먼저 거울 속에서 사라졌다.

사람이 얼마나 속을 끓인 줄도 모르고, 평소처럼 밥 먹고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집 나갔던 강아지의 태연한 모습이 얄미워 기어이 한 번 꼬집어 주고야 마는, 그런 손길이었다.

그의 손이 닿았던 머리 위를 문지르며 뒤따라 거울 앞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서재로 자리를 옮겼다.

이제는 한여름이라 할 수 있는 시기였는데도, 보일러를 가동시켰는지 디디는 바닥에 약한 온기가 있었다. 그런데도 내 몸은 덥다고 느끼지 못했다. 긴장과 공포로 떨었던 시간이 얼마쯤이었는지, 지금이 새벽의 어디쯤인지도, 전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묵직한 마호가니 원목으로 책장을 짜 넣고 무게감 있는 색감과 가구들로 꾸민 그의 서재는 고풍스럽지만 권위적이지는 않았다. 단지 책을 읽고 취미로 지적 연구를 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지인들과 토론을 즐기고 사교하는 역할까지 겸하는 작은 응접실에 가까웠다.

등받이가 높고 쿠션이 푹신한 의자에 앉기를 권한 그는 작은 바처럼 꾸며진 장식장 앞으로 걸어가 물을 끓이는 포트에 전원을 올려 두고 위스키와 토닉워터를 잔에 따랐다.

엉거주춤 의자에 앉아 우우웅― 낮은 소음과 함께 돌아가고 있는 제습기를 바라보다, 내게서 등을 돌린 그의 뒷모습을 향해 용기를 끌어냈다.

“저… 죄송해요.”

그가 고개만 돌려 나를 돌아봤다.

“갑자기 연락드려서 오시게 하고…. 놀라셨죠.”

컵받침을 댄 찻잔과 온더록스 한 잔을 가지고 이쪽으로 다가온 그는 내가 한 말에 반응을 보이는 대신, 나에게는 술을 주지 않겠다고 말하며 연녹색 찻물이 은은하게 우러난 흰 찻잔을 건넸다.

“맨정신에 얘기 좀 들어야겠어요.”

약간의 장난기를 섞어 엄하게 으르듯 그렇게 덧붙이며 그는 나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사실 술의 도움을 조금 빌리고 싶었지만, 현재 나는 말썽 부린 강아지 같은 입장이었기 때문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의 온기를 손으로 감쌌다.

두어 모금 음미하듯 술을 삼킨 뒤, 손안에서 천천히 잔을 돌리며 그가 좀 더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연락한 건 놀랐지만, 연락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기로 한 건 내 뜻이니까 미안해할 거 없어요. 내키지 않았으면 돌아가라고 했을 테니까.”

내가 직접 경험하며 알아 가는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는 자신을 꽤 냉혈한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겠다는 건 반갑지만… 이렇게 귀신에게 쫓기는 사람 같은 얼굴로 찾아와서 항복하듯이 얘기하길 바란 건 아닙니다.”

그가 의자 옆 작은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비스듬히 내 어깨쯤을 향하고 있던 시선이 천천히 거슬러 올라와 내 눈을 찾았다.

“도와 달라고 했죠?”

“…….”

“뭘 어떻게 도와주면 될까요. 어떤 도움을 원하는 건지 말해 봐요.”

대문 앞에서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그림을 그리겠다고, 도와 달라고.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린 말이었지만, 스스로가 그렇게 말한 이유를 모르지는 않았다.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움찔거리기만 할 뿐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는 나를 바라보던 그가 흠,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신은 아니지만, 세속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실질적인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아마도. 그러니까, 믿고 말해 봐요.”

사실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나는 그의 능력을 믿고 있었다. 그것은 거의 애니메이션 속 영웅에 대한 어린아이의 맹신과도 같이 절대적이어서 의식한 순간 나 자신도 놀랐을 정도였다. 그가 실질적으로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없다고, 막연하게나마 그렇게 믿고 있지 않았더라면, 무의식 속에서 그 비를 뚫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허겁지겁 이곳까지 달려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망설인 것은, 그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심호흡을 하며 들이마셨던 숨을 밀어내면서, 약간의 떨림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쫓기고 있다는 거. 숨어 지내야 한다는 거.”

“…….”

그의 눈이 꿈틀거리며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그 얘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는 듯이.

“정확히는 제가 아니라 같이 살았던 형하고 누나, 그 두 사람의 상황이에요.”

그동안 함께 일하며 알게 된 바로, 홍콩에서부터 인연을 함께해 온 그와 실장님은 단순한 비즈니스 파트너 이상의, 거의 가족이나 다름없는 관계였다. 그럼에도 두 분은 타인의 비밀에 대해서만큼은 공유하지 않았다.

팬텀의 직원이 되는 과정에서, 나에게 다소 복잡한 상황이 있으니 편의를 봐달라는 부탁을 하면서도, 실장님은 그에게 그 복잡한 상황의 내용을 얘기하지 않았고, 그 역시 상세한 내막을 모른 채로는 고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소외>를 두고 내가 보였던 반응에 대해 묻지 않고 있는 것 역시 아마도 비슷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는 밝히고 싶지 않을 게 분명한 타인의 힘든 부분을 쉽게 건드리지 않는다. 얄팍한 호기심으로는 물론이고, 설사 진지한 관심이 있다 해도 그럴 것이다.

자신에 대해 그가 알아주길 바란다면, 그게 필요하다면, 스스로 입을 열어야 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녹이 슬어 버린 태엽을 억지로 힘주어 돌리듯, 목소리를 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다 끝나 버릴 수도 있다는 걸, 오늘… 알았어요.”

우산의 어두컴컴한 그늘 속에서, 망령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던 큰아버지를 확인한 순간, 지금껏 우리가 그들의, 적어도 모래 아버지의 손바닥 위에서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음을 직관적으로 알았다.

모래의 예상이 맞았다.

그들은 이미 우리의 거처쯤은 알고 있었고, 한 수 물러 주며 그저 타이밍을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큰아버지의 손을 잡아끌고 무작정 계단을 내려갔었다. 우리 집에는 사람을 시켜 뒤를 밟을 만한 돈이 없었다. 큰아버지는 모래 아버지의 전갈을 가져온 사자일 뿐일 것이 뻔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2~3분 거리에 있는 낡은 꼬치구이 주점으로 들어가 때가 낀 전등갓 탓에 더욱 희끄무레한 조명에 비춰 큰아버지의 얼굴을 자세히 확인했을 때, 우리가 떠난 뒤 지독한 시달림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다. 서로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형과 모래는 자신들이 많은 것들을 아프게 하고 희생시키며 이 선택을 감행했음을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었고, 거기에 따라올 평생 동안의 죄책감에 대해서도 각오하고 있었다. 그녀의 집에서 우리 집에 가할 압박에 대해서도 예상했지만, 두 사람의 표현에 의하면 모르는 척 ‘이기적 선택’을 감행한 것이다.

배를 인수하면서 우리 집은 마을의 다른 모든 집들처럼 임 선생 댁에 빚을 냈었다. 그 전에도 자잘하게 쌓아 온 빚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떠나고 나서 한 달 뒤쯤부터 빚에 대한 독촉이 시작됐고, 일주일 전 최후통첩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며 큰아버지는 입술을 한 번 꾹 닫았다. 입가의 깊은 주름이 더욱 선명해지도록.

한 달 안에 빚을 갚든가, 딸을 빼돌린 서이한을 잡아 와 자기 앞에 무릎을 꿇리고 사죄를 하게 하라.

그게 임 선생의 요구, 아니, 명령이라고.

분명 우산을 쓰고 왔지만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듣고 있었던 나처럼, 마찬가지로 우산을 쓰고 있었음에도 큰아버지가 눌러쓴 모자챙 끝에 고여 있던 물방울이 무겁게 툭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생맥주를 무르고 소주를 주문한 큰아버지는 연거푸 두 잔을 들이켜고 난 뒤 두껍고 거친 손으로 젖은 얼굴을 문질렀다. 못으로도 뚫을 수 없을 것 같은 그 손은 삶과 일상을 연명해야만 하는 과제 앞에 무기력했다.

아니, 할아버지나 큰아버지에게 ‘삶’이라는 개념을 짚어 볼 기회가 있기는 했을까.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뒤로 밀어내는 것에만 매달려 살아온 그들에게는, 인생에 대해 부분적이기보다 전체적이고 입체적인 인식을 필요로 하는 삶이라는 단어 자체가 사치스러운 철학이지 않았을까.

큰아버지는 삶을 원하는 방향으로 주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루하루의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찾아온 것이었다.

「빚이 있는 한, 우리 집이 그 댁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리고 빚 없이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네 큰아버지 형편이 좋지가 못하다.」

따라 놓기만 하고 섣불리 손대지 않고 있었던 세 번째 잔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중얼거리던 큰아버지에게서는, 모래와 형에 대한 원망이나 분노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동의하지 않는 일에 억지로 가담된 사람처럼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리를 찾아오기까지 모래 아버지와 벌였을 신경전과 자신의 무능력을 자책하고 비관하며 밤잠을 설치고 소주잔을 기울였을 시간들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모두가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할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하고 있었다. 그 각각의 선택들이 가져오는 관계의 어긋남과 그로 인해 깊어지는 간극은, 어떤 지혜로도 메울 수 없을 것처럼 까마득했다.

모래가 알파라는 사실을 제외하고, 그에게 상황의 대부분을 이야기했다.

심하게 차이가 나는 두 집안의 형편과 그로 인한 반대와 대립, 압력과 협박, 반항과 단절을 통한 극단적 선택. 그리고 그 선택을 용납하지 못하고 되풀이되는 압력과 협박.

내가 사랑하는 두 사람의 역사는 그토록 간단하게 축약되었다.

임모래와 서이한이라는 사람들만의 유일한 구체성이 사라지고, 철없는 어린 커플의 사랑의 도피라는 전형성만이 전달된 것은 아닐까. 몇 분 동안의 이야기로 누군가의 삶이 갖는 유일성까지 옮겨 내기엔 턱없이 부족한 내 말주변이 원망스러웠다.

모래와 형에게 몹쓸 짓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에 잠시 입을 닫았다.

흠. 그는 팔짱을 끼며, 내용을 되짚어 보는 듯한 눈으로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일단 큰아버지가 두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하고 온 겁니까. 두 사람 모르게 서이현 씨가 이 일을 해결하려고?”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라는 비난의 기색이 담긴 질문은 아니었다.

“…네.”

무슨 배짱에선지, 내일 꼭 수를 만들어 다시 연락을 드리겠다고, 두 사람 모르게 하루만 시간을 달라고 당부한 뒤 큰아버지와 헤어지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온 길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다시 마을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고 싶다는 얘기겠네요.”

그는 예상치도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놀란 표정을 짓지도 않았고, 단지 그림을 그리자고 제안한 것뿐인데 이런 구차하고 사적인 사연 따위를 왜 들어야 하는지에 대해 불만을 가진 기색도 없었다.

이 정도 사연쯤은 일상적으로 접하는 흥신소의 소장처럼 불필요한 감상이나 호기심을 배제한 채 곧장 핵심에 접근하고 있었고, 그의 그런 태도에 얼떨떨한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맞다. 핵심을 말하자면 그랬다.

모래의 아버지가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하루라도 빨리 두 사람을 안전한 곳으로 완전히 피신시키는 것. 큰아버지에게는 죄송하지만 하루의 말미를 얻어 낸 건 결국 그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다치길 바라는 건 아니에요.”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채 그저 쥐고 있기만 했던 찻잔의 식어 버린 표면을 엄지로 문지르며 그렇게 말했다.

그가 내려놓았던 잔을 들어 술을 마시면서, 곁눈질로 나를 보고 웃었다.

“왜요, 내가 누굴 다치게 해서 문제를 해결할 것 같아요?”

“…….”

슬쩍 웃는 그의 얼굴은 그렇게 할 수 없어서 못 하는 것이 아님을,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그런 방법으로도 문제에 접근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 같았다.

「무사히. 평화롭게. 안전한 생활이 됐으면 합니다. 네? 서이현 씨.」라며 실장님과의 생활에 대해 경고했던 모습이 떠오르게 하는 얼굴이었다.

“음, 그래요. 어쨌든 돈이 필요하겠네요.”

겹쳐 꼰 다리 위에서 온더록스잔을 만지작거리며 그가 나의 발치쯤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림을 그리겠다. 도와 달라. 그게 이런 의미였던 거네.”

“…….”

그림을 다시 그려 보겠다는 결심은 좀 더 이전부터 구체화 된 것이었지만, 그가 말한 의미 그대로라면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그가 알고 있는 내 그림이라고는 고작해야 수년 전에 완성한 단 한 작품이었고, 지금 내가 그림에 관해 확언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주제에 마치 자신의 능력에 어떤 가치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림을 그릴 테니 도와 달라는 부탁이 그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손해 보는 제안인지. 그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이것 말고는 나에게 패가 없었다. 이유 없이 그의 친절에만 의지해 도와 달라고 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가 술잔을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팔걸이에 양팔을 걸치고 두 손을 가볍게 깍지 꼈다.

“계약금을 선불로 지급할게요. 서이현 씨는 내가 욕심나서 설득한 상대이기도 하고, 그 정도 특별 대우야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어요.”

산뜻할 정도로 망설임 없는 대답이었다.

어느 정도의 질문과 숙고, 조건의 제시가 이어질 거라고 예상했던 나는 놀라서 그의 얼굴만 멍하니 보고 있었고, 그런 나에게 그는 일을 바로잡기 위해 얼마가 필요한지를 물었다.

근본적인 해결은 될 수 없겠지만, 어차피 지금 상황에 근본적인 해결이라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었다. 독이 오른 임 선생 탓에 큰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는 가혹한 날들이 좀 더 이어지겠지만… 두 사람을 안전한 곳으로 도피시키는 것이 먼저였다. 이 도피가 어설픈 반항으로 막을 내리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3천만 원이라는 금액을 들은 그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듯한, 혹은 아주 불쾌한 이야기를 들은 듯한 얼굴이었다.

“빚 3천만 원을 빌미로 그 집에서 서이현 씨 가족을 그렇게 괴롭힌다는 겁니까?”

“아… 그게 아니라.”

우선 해결하고 싶은 것은 모래와 형을 발리로 보내는 것임을 설명했다. 하루라도 빨리, 만약 가능하다면 앞으로 며칠 이내에 그들이 한국을 떠날 수 있도록 하고 싶다고. 이미 나 때문에 충분히 늦춰진 계획이었으니까.

천장의 조명 대신 밝혀 둔, 그와 나 사이에 놓인 스탠드 불빛이 그의 뺨 위에 길고 선명한 속눈썹의 그늘을 그리고 있었다. 잠시 술잔의 가장자리를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시선을 옮겨 나를 바라보았다.

“그럴 게 아니라 싹을 함께 제거하죠. 서이현 씨 가족의 빚을 갚아 버리면 적어도 직접적인 협박의 원인은 어느 정도 제거가 되잖습니까.”

“하지만, 그것까지는 너무 큰돈이라….”

그에게 7천만 원이나 1억이라는 돈은 큰 금액이 아닐지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 정도의 돈 때문에 사람의 일상이 고단해지고, 타인에 의해 삶이 휘둘릴 수 있다는 자체가 그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그래서 화가 나는 일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의 실제 삶이었다. 새벽부터 해 질 녘까지, 날씨가 허락하는 한 매일같이 배를 타고 손에서 비린내가 가실 날이 없는데도, 할아버지와 큰아버지는 평생 가난했다. 빚을 내서라도 배를 사지 않았더라면 상황은 더 안 좋았을 것이다. 임 선생에게 진 빚만이 전부도 아니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돈이 필요한 일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아버지와 나를 군식구로 들이게 된 것도 그 꼬리를 물고 들이닥친 불운의 하나였다.

“그쪽 집안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도록 아예 새로운 곳에서 시작할 수 있게 해 드리는 방법도 있습니다. 국내라면 3억 정도, 국외라면 5억 정도면 새 출발의 기반을 닦는 데에는 충분할 겁니다.”

그는 빚을 갚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간 이야기를 꺼냈다.

3억, 5억…. 실장님의 아파트가 못해도 15억은 할 거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실감조차 나지 않는 금액이었다.

형과 모래는 서울을 완전히 떠나고, 할아버지와 큰아버지는 모래 아버지의 영향력이 힘을 쓰지 못하는 곳에서 살아간다…. 물론 그렇게 한다면 모래 아버지의 노여움을 제외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그랬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금액은 갚을 자신이 없어요.”

“갚는 거야 천천히 갚아 나가면 되죠. 서이현 씨가 그림을 그만 그리겠다고 하기 전까지는 절대 독촉할 생각은 없으니까.”

“말씀은 정말 감사하지만… 할아버지도 큰아버지도 아마 그 마을을 떠나려고 하지 않으실 거예요.”

하늘 아래 그 마을 하나만 있는 게 아닌데, 빚을 갚고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이 문제의 해결책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렇게 능동적으로 삶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보이는 풍경의 스산함이나 몰려오는 바람의 냉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산이 일어나 자리를 옮겨 앉지 않는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처음부터 자신이 있어 온 그 자리에서 묵묵히 버텨 나가는 것으로 삶을 견뎌 내기도 했다. 맞서 싸우는 적극성이 아닌 버텨 내는 뚝심으로.

누군가에게는 미련해 보이더라도 그것이 할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사는 방식이었다.

잔 속의 술을 천천히 몇 모금 더 마시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내가 원하는 건 서이현 씨가 더 이상 신경 쓸 일 없이 그림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지는 겁니다. 다른 곳으로 가족이 옮겨 가는 건 무리더라도 최소한 빚은 해결돼야 그게 가능할 것 같은데요.”

“…….”

부정할 수 없었다.

“서이현 씨의 형과 누나, 두 사람이 닷새 이내에 추적이 불가능한 루트로 원하는 곳에 옮겨 갈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서이현 씨 가족의 빚까지 해결하죠. 1억. 딱 깔끔하네요.”

희미하게 미소까지 지어 보이며 그렇게 말한 뒤, 그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비어 버린 잔을 채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옥탑방의 보증금으로 묶인 돈이 있었다. 일단 급한 대로 모래와 형을 먼저 보내고, 그 돈을 돌려받으면 그에게 갚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건 모래와 형만을 고려한 답안이었다. 만약 집안의 빚까지 갚을 수 있다면, 동해에 남은 가족들에 대한 걱정까지 조금이라도 덜 수 있는 건 사실이었다. 임 선생이 닦달하는 것이 7천만 원이라는 돈 때문은 아니지만, 그 빚만 없으면 당장 직접적인 구실이 희미해지기는 할 것이다.

3억이나 5억처럼 절대 갚지 못할 금액처럼 막막하게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림이 풀리지 않는다면 이삿짐센터로 다시 돌아가 3~4년 절약하며 고생한다면 못 갚을 것도 없었다. 그렇게 계산하니 제안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나에게는 술을 주지 않겠다던 그가 두 개의 온더록스잔을 가지고 돌아왔다. 식어 버린 채 손에 들려 있던 찻잔을 가져간 그는 토닉워터의 비율을 높게 해 색이 옅어진 위스키를 건넸다. 그의 것은 색이 진했다.

“좋게 말하면 계약금이지만, 서이현 씨 작품을 판매해 회수해야 하는 금액이니 실질적으로는 빚이나 마찬가지인데.”

다시 내 맞은편 자리에 앉으면서 그가 느슨하게 팔걸이에 몸을 기댔다. 삐딱하게 기울어진 시선에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지만, 나는 왠지 모를 긴장감에 허리가 곧게 펴졌다.

“알고 있습니다.”

“나하고 그렇게 복잡하게 얽혀도 괜찮겠어요?”

“솔직히 그렇게 큰돈을 제가 갚을 수 있을지 무섭지만… 만약 그림으로 안 된다면 앞으로 다른 일을 해서라도 꼭 갚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나를, 그는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심한 말이라도 한 것 같은, 나의 말에 상처를 받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찰나의 순간일 뿐이었다.

시선 속에서 흐트러짐을 재빨리 추스른 그는 생각났다는 듯 사이드 테이블 위에 있던 담배를 집어 들어 불을 붙였다.

“이건 앞으로 그릴 그림에 대한 계약금인 거지, 사채업자처럼 서이현 씨에게 돈을 빌려주고 압박하자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일이 해결되고 나면 다른 건 걱정하지 말고 그림에만 제대로 몰두해요. 그림을 등한시하면 그때 서이현 씨는 채무 이행에 불성실한 게 되는 거니까.”

최대한의 신중함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연기를 길게 뱉으며 그렇게 중얼거린 그가 약간은 초조해 보이는 빠른 손길로 재떨이에 재를 털어 내며 나를 힐끔 쳐다봤다.

“하나만 물어도 될까요.”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높낮이 없는 어조로 물었다.

“형과 누나라는 그 두 사람이 서이현 씨에게 중요한 존재라는 건 알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벌벌 떨면서 나를 찾아와 도와 달라고 부탁할 만큼, 그들의 관계가 위협받는 걸 서이현 씨가 겁내는 이유가 뭐죠.”

문제 해결을 위해 필요한 정보에 대한 질문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그의 개인적 궁금증이었다. 아마 대답하지 않더라도 캐묻지는 않을 것이다. 대답을 하고 하지 않고는 전적으로 나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느리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사이에 두고, 엄밀히 말하면 나 자신에 대한 직접적 위협이 아닌 이 상황을 왜 그렇게까지 겁내는지, 의아함을 가지고 그 이유에 대해 묻고 있는 그의 회청색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마도 사랑의 무서움을 모르는 것일 거다.

서로 너무나 사랑했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사라졌을 때. 그들이 외부의 개입으로 인해 더는 함께 있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것이 가져올 수 있는 결과는 고작 감상적인 슬픔이나 술에 취해 흘려보내는 며칠의 시간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의 인간성은 파괴되고 변질되어, 더 이상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모래와 형의 그런 모습을 견뎌 낼 수 있을 정도로 지금의 나는 튼튼하지 못했다. 또 한 번 그런 경험이 반복된다면, 이번에야말로 나 역시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될지 모른다. 이번에는 그림을 그만두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손에 든 술을 크게 한 모금 삼켜 냈다. 비는 여전히 창을 두드려 대며 울부짖고 있었다. 이 밤 동안에 기어코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데려가려 하는 악귀 같았다.

“사랑하는 대상들이 무서운 건… 아마 그들의 삶이 저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일 거예요. 그들이 고통스러워지면, 그런 그들을 보는 나도 고통스러워질 테니까.”

만일 그에게 사랑이란 것이 감정의 표면 위에 잠시 일어났다 시간과 함께 흐려지는 덧없음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것이 우습게 들릴 수 있는 얘기란 것을 알면서도 솔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어머니와 아버지, 모래와 형의 얘기인 동시에, 막 시작된 그에 대한 이 감정 앞에서 망설이는 나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어쩌면 저는… 제가 고통받을 것이 두려워서 이러는 건지도 몰라요. 아니… 아마 그럴 거예요.”

어쩌면 모래나 형을 위한 일이기보다 나 자신을 위한 발버둥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를 위한 것이든, 선의이든 이기적 동기이든 상관없었다.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그들의 도피가 철없는 어린 커플의 한때의 반항으로 치부되도록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것에 대해서만큼은 확고했고, 이렇게나마 사람의 형태를 갖추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힘은 두 사람이 준 것이니 아깝지 않았다.

그는 말이 없었다. 담배를 손에 건 채 말의 뜻을 음미하듯 생각에 잠긴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에게서 특별한 애정을 원하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기로 한 것은, 그가 여러모로 분수에 맞지 않는 상대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랑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더라면, 스물둘이라는 나이를 핑계 삼아 욕심을 내 볼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무서웠다.

나와 같은 감정으로 나를 대할 수 없는 그를 보는 것도 무서웠지만, 아직은 연약하고 부드럽기만 한 이 감정이 무겁고 거대하고 단단해져 나를 장악하게 됐을 때. 그때 그 힘이 나에게 행사하게 될 영향력에 대한 무서움에 비하면, 전자의 무서움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의 나는 사랑의 파괴력이 빚은, 아니 망친, 작품이었으니까.

마침내 그가 내게서 시선을 거두어들이며 꼬고 있던 다리를 풀었다. 마지막 한 모금을 깊게 빨아들이고는 마른 재떨이 위에 담배를 비벼 껐다.

“알 것 같네요.”

그렇게 말한 그는 거기에 대해 더 얘기하지 않았다.

알 것 같다니. 예상외의 반응이었다.

■ ■ ■

강한 바람 탓에 빗방울이 창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매서웠다. 누군가 창문에 대고 전력으로 모래알을 몇 움큼씩 집어 던지는 것 같은 소리가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두꺼운 방음창을 뚫고 금방이라도 방 안으로 비가 들이칠 것 같았다.

그러나 잠이 오지 않는 이유는 스산한 빗소리나 낯선 잠자리 때문이 아니었다. 어디에 누웠어도 오늘 같은 날은 잠들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계약금을 흔쾌히 약속했지만, 이 일을 모래와 형에게 숨기는 것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조언했다. 그들이 빨리 떠나도록 설득하기 위해서라도 상황을 설명하는 편이 좋을 거라고.

급한 일이 생겨 오늘은 먼저 가 본다는, 수상쩍은 메시지만 보내 둔 상태였던 나는 그와의 대화 뒤에 다시 두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내 약속을 정했다. 아침이 밝는 대로 먼저 두 사람을 만나 상황과 계획을 설명한 뒤 함께 큰아버지를 만날 생각이었다.

나는 그가, 모든 선택을 각 개인의 몫으로만 돌리는 사람일 거라고 여겼었다. 그런 식의 조언으로 타인의 삶에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을 극도로 조심스럽게 꺼리는 사람일 거라고.

하지만 그의 조언은 의외로 진지했고, 그만큼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론에 근거해 책임감 없이 던지는 상투적 충고와는 달랐다. 자신의 경험, 지혜, 논리를 동원한 신중한 설계였고, 공포와 초조함으로 드문드문 구멍 나 있었던 내 논리의 허점을 냉정하게 채워 주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제대로 했던가. 오늘 밤만 해도 고맙다고 제대로 전해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닌데….

천장을 향하고 있던 몸을 뒤척여 모로 누우면서 포근한 이불을 어깨 끝까지 끌어 올렸다. 그가 안내해 준 1층의 손님방은 그의 침실 바로 아래에 자리하고 있었다. 맞은편에 비어 있는 또 하나의 싱글베드를 바라보며 머리 위, 같은 자리에 누워 있을 그를 상상해 보았다.

체온은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은데, 몸의 심에 아직도 한기가 남아 있는 것처럼 으슬으슬했다. 충분히 쾌적하고 포근한 이불 속에서 팔을 쓸어안았다. 그가 내어 준 실내복의 가슴팍을 끌어당겨 코를 묻어 보았다. 청결한 섬유유연제향이 어렴풋할 뿐 특유의 그의 향기를 맡을 수는 없었다.

잠들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진정되지 않고 들뛰는 심장이 무엇을 원하는지. 굳이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칠 것도 없었다.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물체의 아주 희미한 윤곽만을 구분할 수 있는 어두운 복도를 더듬거리며 지나, 벽을 짚고 계단을 올랐다. 실내화도 신지 않은 맨발로, 2층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침실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나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문은 완전히 닫히지 않은 상태였다.

노크를 하지 않고 손끝으로 가볍게 문을 밀었다.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노크할 필요가 없으리라는 강한 직감이 있었다. 노크를 하는 것이 오히려 지나치게 두드러진 행위처럼 느껴지는….

문이 넓게 열릴수록, 복도에서부터 새어 든 희미한 간접조명이 암갈색 나무 타일 위에 드리우는 빛이 점점 길어졌다. 그 빛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침대 헤드에 기대앉은 그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윗옷을 입지 않은 트레이닝팬츠 차림의 그는 다리를 길게 뻗고 발목을 서로 교차시킨 채 허벅지 위에서 양손을 느슨하게 깍지 끼고 있었다. 잠들어 있었거나 잠이 오는 사람 같지는 않았다.

내가 찾아올 것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처럼 나를 보는 그의 눈은 동요가 없었다. 마치 여기까지 온 것이 내 의지가 아닌 초자연적인 그의 부름 때문인 것처럼 느껴졌을 정도로, 그의 모습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

“…….”

이 방에 왜 왔냐는 질문도, 같이 자고 싶다는 유혹의 말도, 모두 생략되었다. 그런 말들이, 예쁘지도 않고 거추장스럽기만 한 액세서리처럼 느껴졌다.

“여기서… 자도 돼요?”

목소리는 바싹 말라 있었다.

샤워를 마친 뒤인지, 아래로 차분하게 내려온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그가 한쪽 무릎을 세워 그 위에 팔꿈치를 걸쳤다. 쓸어 넘긴 머리카락을 그대로 움켜쥔 채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고 약간 도전적인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거 설마… 잠만 자겠다는 잔인한 뜻은 아니죠?”

아니라는 뜻으로 방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섰다.

이상하게도, 거부당할 것이 두렵지 않았다. 스스로의 성적 매력에 자신감이 있는 것도 아닌데, 두 번 그와 자 봤기 때문일까. 그가 나를 받아들일 거라는, 적어도 마다하지는 않을 거라는 정도의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다가서는 나를 보며 그가 쓸어 넘겼던 머리카락을 놓았다. 나풀거리며 천천히 가라앉는 머리카락이 예뻤다.

“나야 좋은데….”

“…….”

“서이현 씨하고 잘 때, 내가 자제를 잘 못하는 것 같아서.”

괜찮다는 뜻으로 등 뒤에서 문을 닫았다.

어둠 속에서 이쪽을 향해 앉은 그는 우습게도 나를, 나의 접근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

침대 가장자리까지 걸어가자 어김없이 향이 피어올랐다. 이거다. 이 향기에 휩싸여 그와 뒤엉키고 싶은 욕구를 쫓아 이 방까지 찾아온 것이다. 섹스가 하고 싶어서,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2층까지 기어 올라온 내 꼴을 떠올리니 자조적인 웃음이 흘렀다.

좋아하는 상대가 나와 하는 섹스도 상처가 될 수 있음을 알았다면서, 지금 나는 그 좋아하는 상대와 섹스라도 하고 싶어 안달하고 있었다.

그를 원하는 감정을 없던 일로 만들어야 한다면서, 고작 하룻밤 같은 지붕 아래서 자는 것조차도 참지 못하고 스스로 그의 침실로 기어들고 있었다.

도대체 이건 누구인가. 나였지만, 지독히도 낯설었다.

내 몸을 통해 움직이고 있지만, 다른 누군가가 내 안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섬뜩하도록 타인 같았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은 모습을 보일 뿐 분명 나였다.

허리를 숙여 그의 벗은 어깨 위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를 좋아하니까, 당연히 그의 향기도 좋아할 수밖에 없겠지.

향기는, 그를 특별하게 인식한 최초의 계기이기도 했다. 모래가 그에 대해 물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다른 사람들과 그를 확연하게 구분하는 특질이 바로 이 향기였을 정도니까.

숙인 얼굴에 손을 뻗어 나의 뺨을 만지며 그가 물었다.

“알파하고 섹스하는 거, 꺼림칙하지 않습니까.”

“…….”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봤다.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뺨을 쓸던 그의 손이 깊숙이 들어와 귓바퀴를 더듬었다.

“자신이 변해 버릴 것 같다거나.”

그런 거라면, 그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귀와 뺨을 넓게 감싼 그의 커다란 손에 내 손을 겹치며 여러 번 고개를 가로저었다.

“변하고 싶어요. 변해 버리고 싶어요.”

자백이나 혹은 자책 같은 나의 중얼거림 끝에 그가 허리를 안아 내 몸을 침대 위로 끌어당겼다.

다음 순간 나는 그의 다리 사이에 엎드려 있었다. 배 위에 나를 올린 그는 허리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 뒷머리를 당겨 입술부터 머금었다. 키스는 몇 년 만의 재회처럼 달고 간절했지만, 놀랍게도 그와 잤던 건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번갈아 강하게 빨아들였다가 통증이 있을 정도로 짓씹은 뒤 길게 잡아당겨 튕기듯 놓아주는 그의 키스가 시작되자, 내가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심지어 페어 뒤처리로 갤러리 일이 바빴던 와중에도 이 키스를 얼마나 자주 떠올렸는지, 다시 경험할 수 있기를 얼마나 바랐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파티장의 테라스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아찔함에 눈을 감았던 지난번과는 달랐다. 강한 흡입과 탐욕스러운 달려듦이 가져다주는 쾌감의 상승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 몸을 통해 흥분한다는 흥분을, 지금의 나는 똑똑히 감지하고 거기에 빠르게 반응하고 있었다.

내 가슴 아래에서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하는 그의 넓고 두꺼운 가슴의 호흡에 나의 호흡을 맞추면서, 나를 둘러싸고 잠식해 오는 겹겹의 향기가… 어서 나를 완전히 삼켜 주기를. 나는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침대 헤드에 기대 세워져 있던 커다란 베개에 반쯤 비스듬히 누운 그가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댄 채 입술의 표면만이 아슬하게 스치는 거리에서 내 눈을 들여다봤다. 너무 가까워 오히려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의 거리였다.

“나도 그래요.”

그의 숨결에는 독한 위스키의 잔향이 섞여 있었다.

“나도 변해 버리고 싶거든. 완전히 다른 존재로.”

모두가 선망하는 그와 같은 사람도 그런 패배자 같은 심리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나는 아직 어렸다.

타인의 시선에 완벽하고 풍족해 보인다는 이유로 내면적 고민이 없을 리가. 그런데도 그를 보고 있으면 모든 것을, 심지어 그것이 사람의 마음일지라도 그가 원하는 방향대로 끌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나는 분명 어린애였다.

그의 손이 티셔츠 안으로 들어와 맨 허리를 쓰다듬는, 겨우 그 정도의 스킨십에도 나는 신음을 흘리며 아무것도 잡힐 것이 없는 그의 맨가슴 위를 헛되이 긁어야 했다. 신음을 터뜨린 뒤 질끈 깨문 입술을 그의 혀가 파고들었다. 물고 있던 입술을 놓친 순간, 혀끝이 입술 뒤쪽 점막을 훑으며 간지러운 촉감으로 어깨를 떨게 했다.

“서이현 씨가 변하게 해 줄래요?”

허리를 만지작거리던 손이 실내복의 밴드 아래로 파고들어, 그 자신이 내주었던 새 속옷의 얇은 천 속에서 엉덩이의 살집을 부드럽게 움켜 주물렀다.

그의 배 위에서, 가슴 위에서, 다리 사이와 향기 속에서. 나는 벌써 변하고 있었다.

“제가 어떻게….”

허리를 조여 안는 팔의 힘이 강해지며 뜨거운 혀가 불쑥 입 안을 파고들어 말을 막았다. 으으, 음, 으음…. 괴한에 의해 뒤에서 입이 틀어막힌 사람처럼 나는 목 안쪽에서 끙끙댔다.

골 사이로 중지를 미끄러뜨린 그가 애널 위를 강하게 비벼 댔다. 갑작스레 입 안을 가득 채웠던 젖은 살덩이가 침범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쑥 빠져나가고, 그가 애널 위를 비비는 손끝에 더 은근한 힘을 주며 달뜬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기로, 미치게 해 줘요.”

자신의 가슴 위에 엎드린 나를 허리의 힘으로 쳐올리면서, 그는 애널 위를 계속 문질렀다. 곧게 뻗은 긴 손가락이 골 사이를 미끄러지는 감각부터가 이미 성행위를 연상시켰다. 나를 미치게 하는 건 그였다. 사귀지도 않는 상대와 이런 짓을 하고 싶어서 제 발로 그 상대의 침실로 기어들어 온 내가… 미친 게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의 가슴 위를 긁던 손으로 목을 끌어안았다. 뒤쪽을 이용해 미치게 해 달라는 그의 요구에 대한 무의식적인 대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고개를 더 깊이 기울여 입을 맞췄다. 입술을 벌리면 향기에 흠뻑 절여진 살덩이가 안으로 깊숙이 밀고 들어왔다. 혀로 이루어지는 삽입 같았다.

조심스럽지 않은 그의 키스가 좋았다. 살금살금 유리라도 다루듯 키스한다면 조바심이 나서 죽을지도 몰랐다. 나에게 자신을 강요하듯, 목구멍을 틀어막을 것처럼 혀로 입 안을 가득 채워 눈가에 습기가 차오르게 하는 그의 방식이 좋았다.

내 안에서 마구 뒤치며 입천장과 혓바닥, 치열의 안쪽까지 훑고 쑤시고 문지르는 그의 유연한 젖은 살은, 적어도 이 순간만이라도 그가 나를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 그 갈급의 정도를 일러 주는 지표 같았으니까.

긴 두 다리가 내 다리에 얽혀 종아리를 문지르고, 허벅지와 허벅지 사이에 힘을 줘 나를 조여 왔다. 성기와 성기를 서로 문질러 노골적인 마찰을 일으키는 것에 그는 거리낌이 없었다.

신체 중 가장 살집이 풍만한 둔부를 움키고 흔드는 손길에 그의 몸 위에서 허리가 비틀렸다. 욕구에 솔직해지는 데에 시간이 더 필요했던 첫 번째나 두 번째와는 달랐다. 나 역시 빨리, 더 깊이, 이미 그를 원했다.

입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빠져나가는 혀를 따라가 그의 입술을 할짝거리자, 그가 조금 아프게 혀끝을 물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엉덩이를 흔들던 손에도 강한 힘이 실리며 쥐어뜯듯이 살덩이를 위로 끌어당겼다. 다음엔 위아래 입술을 한 번에 머금고 내 고개가 뒤로 젖혀지도록 깊숙이 밀어붙이며 조이고 흡입했다. 빨려 들어갈 것같이 얼얼하고 아찔했다.

이 선명한 통증을 원했다. 지난 일요일, 그가 마지막으로 내 입술에서 떨어져 나간 직후부터 아마 그랬을 것이다.

타액으로 미끌거리는 피부를 빨아들이는 압력이 만들어 내는 뻑, 뻑, 음란한 젖은 소리와 함께 입술을 놓아준 그가 입술과 입술의 표면을 맞대고 부드럽게 비비며 말했다.

“지난번에, 많이 부었던데.”

“괜찮아요.”

시선을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그의 목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그가 낮게 웃었다.

“누가 보면 밤새 서이현 씨가 뭘 했는지 다 알 텐데. 상관없어요?”

“…….”

위에서는 입술과 입술이 부드럽게 닿았다 떨어지며 낮고 감미로운 목소리의 속삭임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아래… 뒤에서 그의 손은 애널 주변을 둥글리고 지분거리고, 못 참겠다는 듯 때로 엉덩이를 꽉 움키며 자신의 욕구를 직설적으로 표시하고 있었다. 그런 행위 때문에 나는 재치 있거나 혹은 이런 상황에 어울리는 섹시한 대답을 생각해 낼 여유가 전혀 없었다.

“말해 봐요. 입술에 어떻게 해 줄까요. 뭐가 좋아요.”

원을 그리듯 허리를 돌려 자신의 성기의 불룩한 부피감으로 내 성기를 자극하면서 그는 묻지만, 차갑게 얼어 있었던 몸의 심이 완전히 녹아내린 나는 아래에서 피어오르는 열기를 의식하며 숨을 몰아쉬는 것밖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냥, 대표님 하시던 대로가….”

“…….”

순간 그가 미간을 찌푸리고 가늘어진 눈꺼풀 사이에서 눈동자를 빛냈다.

“다시 말해 봐요. 누가 하던 대로?”

“…대표님, 이요.”

두 성기가 완전히 밀착되도록 양 엉덩이를 꽉 움켜쥐고 아래로 내리누르며 그가 내 귀를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엉덩이를 까고 지금 자세 그대로 페니스를 찔러 넣기라도 할 것처럼 연속적으로 허리를 쳐올렸다. 그 허릿짓을 따라 숨이 덜덜 떨렸다. 갑작스럽게 치솟은 그의 흥분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침대에서 그런 식으로 날 부른 거… 처음인 거 압니까. 처음에도 지난번에도, 호칭 같은 건 생략해 버리더니.”

내가 그랬었던가.

확실히 그랬던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를 어떤 호칭으로 부른다는 게 어색하게 느껴졌으니까.

“하여간 별거로 다 꼴리게 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손끝으로 나의 속옷과 팬츠를 아래로 밀어내는 그의 손은 여유롭지 않았다.

“하시던 대로가 어떻게인데요. 말 좀 해 줘 봐요. 서이현 씨.”

야한 목적을 가진 장난기와 함께 고의적으로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부른다는 행위에서 흥분을 느낀 그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내가 누구와 엉켜 있는지, 그것을 상대로부터 한층 더 정확하게 확인받는 것으로 오감이 더욱 예민해졌다.

엉덩이 바로 아래까지 내려간 하의를 그가 이번엔 다리와 발을 이용해 능숙하게 끌어 내렸다. 허전해지는 아래와 반대로 욕구는 더 달아올랐다. 결국 굴복해, 그의 귓가에 음담을 쏟아 낸 것이 처음도 아니었다.

귓가에 덥고 축축한 숨결을 흘리는 그의 입술이 퍼뜨리는 향기에 눈을 감았다.

“…키스요.”

“어떤.”

순식간에 발목까지 하의를 끌어 내린 그가 엉덩이의 아래쪽을 쥐고 살집을 튕기듯 흔들며 물었다.

“흐읏.”

엉덩이를 흔들던 손이 다리 사이로 들어가 손바닥 전체로 밑을 문지르는 감각에 소스라치며 위로 도망치듯 그의 목에 더 매달렸다. 뺨과 뺨이 맞닿고 그의 귀가 입술 곁에 있었다. 그의 입술 또한 내 귓가에 밀착되었고, 뾰족하게 세운 혀가 귀를 파고들어 세상의 모든 소리로부터 나를 멀어지게 했다.

“깨물고, 빨고… 아프게 짜내는….”

“그런 키스가 좋아요?”

그가 뺨에 입술을 누르며 약간은 놀리듯 물었다.

매번 그의 끈질긴 요구 끝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지만… 거짓을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가 내게서 끌어내는 것은 단지 솔직함이었다. 솔직해질 때마다 사회적 예의와 규율에서 벗어난 해방감은 성욕을 더욱 뜨겁게 했다. 부정할 수 없었다.

도저히 억누를 수 없도록 굵게 치고 올라오는 불기둥 같은 흥분에 나는 허리를 들썩거렸다. 그때마다 그의 불룩한 성기에 나의 성기가 치대어졌고, 고환이 덜렁거리며 앞뒤로 흔들렸다.

“누가 봐도 밤새 키스했구나. 그런 얼굴로 나돌아 다니려고?”

“…….”

“왜 그렇게 야해요? 서이현 씨.”

일부러 한 자, 한 자 끊어 이름을 발음하는 그의 짓궂음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야하다는 게, 혹은 밝힌다는 게 딱히 나쁜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아직 성에 무덤덤했던 과거의 나에게 더 익숙한 자아는 입술과 혀를 강하게 빨리고 싶어 하는 자신을 어딘가에서 부정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모든 행위는 내가 원해서 일어나고 있는 장면이었다. 부기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평소보다 도톰하게 다물리는 입술을 느낄 때마다 그와의 행위가 떠올라 몸속이 저릿했었다. 그와의 키스 때문에 늘 내 입술이 부어 있으면 좋겠다.

내가 야하거나 섹시한 놈인지 그건 모르겠지만… 키스 때문에 항상 입술이 부어 있으면 좋겠다니, 아마도 그런 게 밝히는 거겠지.

고개를 숙인 나의 이마와 눈꺼풀에 입술을 누르며 그가 달래듯 속삭였다.

“나 봐요. 나 봐야 빨아 주지.”

아래에서는 여전히 허리를 흔들면서.

스스로 원해서 요구했으면서도, 그를 마주 보는 것이 어렵기만 했다. 거의 수치심을 느끼며 고개를 들자, 그가 아랫입술로 덤벼들었다. 입술의 중앙에서부터 쪼오옥 빨아들이는 압력은, 수치심이든 밝히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든 곧 간단히 날려 버렸다.

입술과 점막이 비벼지고 타액이 오갈 때마다 향기는 진하기를 더해 내 안에 쌓여 가고 있었다. 입술 안쪽의 나도 모르는 체액을 착즙하기라도 하듯 반복해 힘을 주어 점막을 빠는 압력은 얼얼한 통증과 두근거리는 흥분을 동반했다.

목을 안은 팔을 풀어 그의 벗은 상체를 쓰다듬으며, 허리와 엉덩이, 다리를 천천히 비틀었다. 발목에 걸쳐져 있었던 팬츠와 속옷이 완전히 벗겨져 나가고, 아래만 벗은 우스운 꼴이 되어 그의 육체의 멋진 굴곡에 몸을 비비고 있었다.

“또, 어디 빨아 줄까요.”

두 손으로 엉덩이를 움키고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원을 그리듯 둥글려 중심에서 살을 모아 비벼 대면서… 그가 끓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

그런 그의 눈을 마주 보다, 서서히 위로 기어올라 갔다. 내가 뭘 원하는지 알아챈 그가 야릇하게 웃으며, 나와는 반대 방향으로, 베개에 기대 반쯤 누워 있던 몸을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서로의 몸이 위아래로 교차되면서, 내 티셔츠 안으로 그가 머리를 집어넣었다.

“으… 으음.”

뭉쳐진 돌기를 위로 밀어 올리는 혀끝의 움직임에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까지는 유두에 대해 별생각 없이 지냈었지만, 처음 이 침대 위에서 그가 입술을 댄 순간, 성기나 입술만큼이나 성적으로 의식될 수 있는 부위가 되어 버렸다.

혀끝으로 이리저리 꺾어 대던 유두가 그의 입술 안으로 삼켜지고 뜨뜻한 입 안에서 쪼그라들도록 압박되자, 이번엔 입술을 깨무는 것으로도 참지 못하고 울음처럼 신음을 터뜨렸다.

몸속부터 근지러워지는 감각이 참을 수 없었다. 허리를 양쪽으로 흔들어, 그의 복근의 뚜렷한 윤곽 위에 성기를 긁어 댔다.

“흣, 흐윽.”

입 안에 유두를 머금고 빠른 속도로 혀를 날름거리며 긁는 움직임에 진저리치며 허리를 들썩거렸다. 그의 두 손이 훤히 드러난 엉덩이를 넓게 감쌌다가 티셔츠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허리와 옆구리를 쓸었다.

그의 어깨 위쪽으로 팔꿈치를 짚은 채 간신히 상체를 버티고 있었지만, 진해지는 애무에 점점 힘이 빠져 가고 있었다.

“하흑!”

그가 이를 세워 유두의 뿌리를 깨문 순간, 티셔츠 속 그의 얼굴 위로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를 강하게 부둥켜안은 듯한 자세에서 상체를 일으켜 보려 했지만, 허리를 안고 놔주지 않았다.

판판한 가슴 위에 입술과 뺨을 문지르며, 혀를 내밀어 진하게 피부 위에 그어 대는 그는 거칠게 흥분해 있었다.

군 생활과 이삿짐센터 일로 얻은 얄팍한 근육 외에 그저 마르기만 한 가슴의 무엇이 그를 자극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 가며, 편애 없이 긁고 핥고 빨아들이는 입술과 혀는, 조절되지 않는 더운 숨결 속에 붉은 욕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읏, 흐… 흣.”

자그마한 유두를 입술의 압력만으로 빨아들여 당길 때. 눈앞에 보이지는 않아도 뾰족하게 앞으로 솟아 있을 가슴의 부피감이 그려져 어깨가 비틀렸다.

평소의 모습에서 벗어나 다른 형태와 목적을 가지는 몸.

옷을 입고, 예의를 갖춘 대화를 하고, 타인과 사회의 시선을 의식하며 알게 모르게 스스로를 제한하는… 그런 규율과 관습에서 벗어난 상태가 되지 못한다면, 섹스라는 행위는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졌다.

먹고 말하는 데에만 쓰이는 입술로 키스를 하고, 쪼그라들어 속옷 안에 갈무리된 성기를 겉으로 꺼내 발기시키고, 그런 건 우리에게 없는 것처럼 언급조차 하지 않는 애널을 입으로 빨고 그곳을 사용해 성기에 흥분을 가하고, 아무것도 없는 가슴을 빨고 빨리며 흥분하는….

그렇게 원래의 나를 바꾸고 뒤집는 그의 모든 행위에서 해방감을 느꼈다.

가슴을 뾰족하게 당겼다 놓기를 반복하는 그의 머리를 껴안고 신음하는 사이, 예민하게 부어올랐을 유두를 진하게 핥은 그가 더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어, 어….”

고개를 숙여 불안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아래로 늘어진 티셔츠의 네크라인 사이로 보이는 그는, 아랫배를 지나 성기를 향하고 있었다.

엉덩이를 두 손으로 감싸, 반사적으로 뒤로 빼려 하는 몸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며, 그가 곧바로 귀두를 입에 물었다.

“흐으으, 흐… 흡.”

베개 위에 엎어진 상태로 다리 사이에는 그의 얼굴을 두고 있어, 몸을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그는 내 몸이 누르는 무게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귀두를 압박했다. 고개까지 꺾어 가며 아이스바를 먹듯 귀두를 돌려 빨아 대는 강한 흡입력에 나는 베개 위를 내리쳐야 했다.

키스도 나를 먹어 치울 것처럼 하는 그의 방식은 오럴섹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살살 녹일 듯이 머금어 돌리다 한순간 목구멍 너머로 삼켜 버릴 것처럼 확 당겨 조여 대는 압박감에 눈이 크게 떠지고 입이 벌어졌다. 자극에 내성이 없는 성기에 가해진 몇 번의 흡입만으로도 사정감이 치고 올라왔다. 그때마다 그는 교묘한 타이밍으로 귀두를 놓고 조임을 풀었다.

내가 몸부림치며 반응할 때마다 성기의 뿌리에 쏟아지는 그의 콧김이 뜨거워졌고, 나는 베개 위에 얼굴을 묻고 거의 흐느끼며 신음했다.

축축하게 젖은 점막이 성큼 다가서며 바짝 조여 대고, 그러다 다시 느슨해지며 멀어지는 감각은, 머릿속을 완전히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호흡 속으로 향기가 밀려들어 와 숨이 막혔다.

“허리 세워 봐요.”

그가 내 가슴팍을 위로 밀며 말했다.

불안한 시선으로 주춤주춤 상체를 일으켰다. 균형을 잡기 위해, 보통의 침대보다 좀 더 높게 제작된 침대 헤드를 붙잡았다. 쿠션을 넣은 검은색 가죽 시트로 만들어진 헤드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 울고 있었는지 안구와 눈가가 축축했다. 슬픔이나 아픔 때문에 흐른 감정적 눈물이 아닌 생리적 분비물이었지만, 오럴섹스가 주는 자극을 견디지 못해 눈물을 흘렸다는 바보 같은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아무렇게나 물기를 지워 내며 허리를 세우자, 자연스레 그의 가슴 위에 앉은 꼴이 되었다. 정확히는 그의 턱 바로 아래가 내 사타구니였다. 그를 내려다보기가 좀… 편안하지는 않은 자세였다.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구분될 정도로 윤곽이 분명했다. 천장을 향해 누운 탓에 머리카락이 젖혀져 완전히 드러난 얼굴은 지나치게 잘생겨 비현실적일 정도라, 그 얼굴 앞에 발기한 성기를 들이밀고 있는 것이 상대적으로 훨씬 속되고 천박한 짓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타액에 젖어 번들거리는 내 성기는 좀 전까지 그가 자신의 입으로 자극하던 것이었다.

“얼굴 위에 앉아 줘요.”

그가 무엇을 요구하는 건지,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건….”

당황으로 굳어지는 나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가 뒤쪽에서부터 엉덩이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애널과 고환 사이, 연하고 부드러운 피부를 손끝으로 세게 누르며 둥글렸다. 금방이라도 그곳에 새로운 구멍을 하나 더 만들어 파고들 것처럼.

“앉아서, 여기로 마구 비벼 줘요. 응?”

“흐으, 흣… 그, 그래도….”

“내가 원해. 그럼 괜찮잖아.”

타인의 사타구니에 얼굴이 깔리는 수치를 당하고 싶어 하는 그의 요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페니스의 기둥에 뺨과 콧대를 비비며 갈구하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입술 사이에서 길게 빠져나온 혀가 뜨거운 피부 위를 핥아 올렸다.

“냄새 맡고, 적시고… 여기에, 푹 파묻히고 싶어.”

어떻게 저렇게 애절한 목소리를 낼까.

약한 사람인 척, 조급하고 안달이 난 척, 달콤하고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존재처럼. 작은 목소리로, 세상에서 가장 간절하게 원하는 것을 조르듯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만으로도 솔직히, 아래가 녹아내릴 것 같았다.

욕정에 취한 눈은 여전히 내게 맞춰져 있었고, 회음을 둥글리는 손끝의 자극도 여전했다. 밑을 닦아 주기라도 하듯 손바닥 전체로 스윽 문지르는 애무에 허리가 펄쩍 뛰었다.

“숨 막힐 때까지… 여기로 뭉개 줘요. 빨리.”

재촉하며 유혹하는 육감적인 입술을 내려다보며 몇 번을 망설이다, 침대 헤드를 붙잡고 등을 숙인 엉거주춤한 자세로 천천히 허리를 낮췄다.

솔직해지자면, 그의 제안을 들은 순간 나 역시 못된 호기심을 느꼈고, 상상만으로도 이미 앞서 나가 짜릿함을 느끼고 있었다. 거절과 수락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일 뿐이었다.

그의 높은 코끝이 먼저 회음에 닿았다. 상상보다도 더 짜릿한 떨림이 전신에 소름을 일으켰다. 성기도 뭣도 아닌 곳일 뿐인데.

“…으, 흑!”

콧대가 뭉개지며 부드러운 속살에 어느 정도 파묻히자 그가 허리를 잡아 아래로 확 끌어내렸다.

그의 얼굴 위에 완전히 주저앉은 자세로 침대 헤드를 쥐어짜며 스스로 팔을 물어야 했다. 그는 코와 입을 벌리고 탐욕스럽게, 다리 사이를 깊이 들이마셨다. 수치심과 흥분이 동시에 몸속에서 날뛰었다.

팔을 문 채 내려다보면, 내 다리 사이에서 빠져나온 그의 눈이 발기한 페니스를 사이에 두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욕구를 직설적으로 전해 오는 그 푸르스름한 눈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발기한 페니스 위에 걸쳐진 티셔츠 자락마저도 이 순간의 음란함을 강조했다. 벌겋게 달구어진 페니스는 아주 작은 움직임에도 끄떡거리며 그의 이마를 스쳤다. 눈에 닿는 모든 것이 애무가 되고 전희가 되었다.

시각적 자극만으로도 이미 한계치였다. 팔을 더 세게 물면서 흐으윽, 코로 숨을 뱉어 냈다.

허리를 잡고 있던 그의 손이 바깥쪽에서부터 허벅지를 감싸 안으로 감겨들었다. 손끝으로 음모 위를 비비고, 고환을 툭툭 건드려 페니스를 진동시켰다. 전신이 바르르 떨려와 팔을 더 아프게 깨물어야 했다.

그러는 동안 넓게 내민 혀가 회음을 문질렀고, 고환과 애널 사이의 살짝 볼록하게 솟은 속살이 그의 타액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단단하게 세운 혀끝이 어느 지점을 깊숙이 꾸욱 누를 때마다 요의와도 비슷한 묵직함이 아랫배를 자극했다.

그가 보여 주는 쾌락의 세계는 끝이 없었다. 그는 나보다 더 내 신체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미칠 것 같았다.

“그만… 그만….”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우습게도 나는, 말과는 다르게 발기한 성기 아래로 그의 얼굴을 더 잘 보려고 티셔츠 자락을 말아 틀어쥐고 있었다.

그의 팔은 더 이상 나를 아래로 당기고 있지 않았는데, 나는 스스로 허리를 돌려 그의 얼굴 위에 다리 사이를 비비고 있었다. 원하는 부위에 그의 입술과 혀가 닿도록, 그의 콧대가 원하는 부위를 누르도록. 원하는 곳에 그가 비벼지도록. 온몸에 열꽃을 피우듯 그와 닿은 피부에서부터 쾌감이 번져 나갔다.

그의 얼굴 위에서 허리를 들썩거리며 뛰게 될 것 같아 겁이 났다. 지금도 충분히 파격적인 행위 중이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거기까지 치닫지 않도록 간신히, 간신히 자신을 붙잡을 수 있었다.

물고 있던 팔을 놓고 상체를 무너뜨리며 그의 얼굴 쪽으로 더 가까이 고개를 숙였다.

자신을 자제할 수 있는 것처럼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느슨해진 정신을 따라 근육마저 물러진 건지 팔을 물고 있었던 입술에서 미처 추스르지 못한 타액이 늘어졌다. 손으로 훔쳐 낼 정신도 없이 고개를 돌려 물고 있었던 팔 위, 티셔츠의 면 위에 입을 문지른 것이 다였다.

풀린 근육과 풀린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헐떡였다.

“그만… 이거, 멈춰 주… 흐으, 읏!”

멈춰 달라는 애원에 그는 오히려 고환 뒤를 공략했다. 입 안에 베어 물고 우물거리는 턱의 움직임을 따라 음경이 위아래로 들썩거렸다.

그의 반듯하고 아름다운 완성형의 얼굴 위에 가져다 댄 발기한 성기는, 가장 고결한 가치를 가장 속된 욕망으로 망가뜨리는 것 같아, 지금 자신이 이 행위를 통해 사회적 통념에 반항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거창한 착각마저 들게 했다.

남의 얼굴 위에 앉아 성기를 세우고 있는 주제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래를 흠뻑 적신 상태에서 고환이 빨리는 강한 자극까지 더해진 탓에 정신의 방향이 어긋난 탓일 거다.

아랫배가 뿌듯하게 차오를 만큼 강한 힘으로 고환을 빨아들이는 요령 좋은 애무에 귀두 끝에서 맑은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사정을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지금까지 중에 가장 많은 양의 쿠퍼액이었다.

아랫배가 찌릿하게 당기는 감각이 더는 인내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 허벅지를 감싼 그의 손을 떼어 내며 허리가 한 번 더 쿵 내려앉았다.

“그만… 나, 나올 것 같…!”

그의 손을 풀어냄과 동시에 균형을 잃고 매트리스 위에 옆으로 쓰러져 누웠다.

반으로 몸을 접듯 모로 누워 바르르 떨며 헐떡거리는 동안 그가 몸을 일으켜 앉아 내 어깨를 당겨 정면으로 눕혔다.

스스로 내 사타구니에 덧발라 댔던 타액 때문에, 올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번들거렸다. 나를 똑바로 눕히고 다리 사이로 바짝 들어앉은 그는 허리를 숙여 내 티셔츠 자락을 끌어 자신의 턱을 슥 닦아 냈다.

무감한 표정이었지만, 평소보다 힘주어 꽉 다문 입술과 팽창한 어깨와 가슴의 근육으로 그가 이 순간에, 나의 육체에, 온전히 몰입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렇게나 얼굴 아래를 훔쳐 낸 그는 상체를 더 밀착시켜 다가와 깊이 입을 맞췄다. 힘겹게 버틴 좀 전의 나를 달래고 칭찬하듯 입 안을 부드럽게 훑어 내고 혀를 머금어 적시는 키스였다.

그의 오른손은 밀착한 우리의 아랫배 사이를 파고들어 내려가 흐물흐물하게 젖은 다리 사이를 더듬었다. 스스로 다량의 체액을 분비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래는 완전히 축축했고, 전에 없이 예민한 상태였다. 그의 손끝이 크림을 찍어 내듯 누를 때마다 엉덩이 근육이 움찔거리며 수축하고 있었다.

부드럽게 떨어져 나간 뒤에도 그의 입술은 내 입술 바로 앞을 맴돌았다. 코끝과 입술 표면을 몇 번이나 스치듯 마주 비비고, 손끝으로 회음을 힘주어 누르며, 그가 말했다.

“서이현 씨 입술에서, 그리고 여기에서… 어떤 냄새가 나는지. 모르죠?”

나의 윗입술을 얕게 잘근거리면서, 그가 손바닥 전체로 회음을 감쌌다.

“흐으, 흐… 흑.”

욕조에서 나온 뒤 클렌저로 샤워를 했으니 아마도 그 향이 날 것이다. 평소보다 좋은 향기일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질문하는 그의 목소리와 어조, 가까이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은, 그런 인위적인 외부의 향이 아닌, 성적 흥분으로 내가 쏟아 낸 분비물 같은 것에 대해 얘기하듯 야릇한 뉘앙스를 띠고 있었다.

그가 문지를 때마다 그의 손바닥과 샅 사이에서 타액이 질척거리는 감각 때문에 더욱 그랬다.

“하루 종일 얼굴을 박고 있고 싶은, 그런 냄새야.”

“흐… 흐으.”

그냥 문지르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듯, 그는 삽입의 리듬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진한 애무로 물렁해진 다리 사이에 꼭 넣은 것 같은 힘이 더해지자… 이번엔 안이 욱신거렸다.

겨우 한 번 넣어 봤을 뿐인 그의 성기의 삽입을, 그의 허리의 격렬한 몰아붙임과 이성을 놓치고 날뛰는 폭주를 원한다는 사실에 한숨이 흘렀다. 미칠 노릇이었다.

변하고 싶다던 고백은 이런 의미로 했던 말은 아닌데, 이런 쪽으로 나는 놀랍도록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이런 쪽으로 이렇게 습득력이 좋았다니. 몰랐던 재능을 발견해 기뻐해야 할지….

“으으… 으….”

애널 위까지 슬금슬금 내려가 입구 주변을 손끝으로 덧그리며 쳐올리는 그의 팔의 힘에 따라 들썩거리며 시선을 피하자, 그가 내 어깨 옆으로 짚고 있던 다른 팔로 고개를 돌리게 한 뒤 눈을 마주쳐 왔다. 성욕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찌를 듯 또렷한 시선이었다.

“내 냄새도 그런가?”

“…….”

속내를 간파당한 느낌이었다. 별 대단한 얘기도 아닌데 순간 숨이 멎었다. 내가 그의 냄새에 대해 느끼는 음란한 감상을 전부 들킨 것 같았다.

“맡고 있으면 자지가 꼼지락거리고, 여기가….”

“흐읍. 흑.”

그의 손가락이 애널 안을 한 마디만큼 푹 쑤시고 들어왔다. 애무가 길었던 만큼 삽입은 저항감이 거의 없었다. 기다렸던 감각이 닥쳐오자, 전신을 딱딱하게 굳히며 그의 어깨를 틀어쥐었다.

그가 안에 넣은 손가락을 길게 쑤욱 꽂아 넣고 끝 마디를 굽혀 점막을 살살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여기가, 여기 안이 막 가려워요? 응, 그래?”

먹이를 앞에 둔 허기진 짐승처럼 숨을 몰아쉬면서, 나는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나를 마찬가지로 굶주린 눈으로 내려다보던 그가 트레이닝팬츠의 밴드를 아래로 끌어 내리고, 그 안에서 발기한 성기를 꺼냈다. 체취가 강한 곳이기 때문인지, 주변으로 겹겹이 층을 더해가던 향기가 진해지는 느낌이었다.

처음부터 그랬지만, 향기롭다거나 달콤하다거나…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향기’라고 인식하는 그런 종류의 냄새는 아니었다.

오히려 정신을 흐릿하고 불분명하게 만들어 신경을 긁는 향기였다. 불쾌하다거나 악취라는 것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신경을 긁는 것이 아니라, 무시할 수 없도록 자꾸 건드리고 자극한다.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몽롱하기도 하고, 무겁게 가라앉은 듯 나른하기도 했다. 이성은 마비시키고, 감각은 예민하게 깨워 낸다. 무방비하게 만든 뒤 한순간 뒷덜미를 확 잡아챌 것 같은 긴장감이 향 속에 감돌았다. 모순적이고 관념적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무겁고 공격적이고 지배적인 향이었다.

부족하기만 한 빛 속에서도 뚜렷하게 형체를 구분할 수 있을 만큼 그의 음경은 굵게 발기해 있었다. 음란하다는 놀림을 받더라도 부정할 수 없게, 투명한 쿠퍼액이 쏟아져 번들거리는 귀두를 내려다보며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나도 모르게 한 일이었는데, 그에게 들켜 버린 건지, 그가 내 뒷목을 감싸 가까이 끌어당기며 뺨을 맞댄 채 낮게 웃었다. 청각이 녹아내릴 것 같은 달콤한 웃음소리였다. 연하의 성적 호기심을 귀여워하는 듯한 웃음소리는 곧 달뜬 숨소리로 바뀌고, 거절하기 어려운 속삭임이 뒤를 이었다.

“내 냄새도 맡아 볼래요?”

거부하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그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내 등 뒤로 팔을 넣어 안아 일으켰다. 그리고 나를 배 위에 앉힌 채 커다란 베개에 기대며 느슨하게 몸을 눕혔다. 그의 가슴에 손을 짚고 잠시 머뭇거리다 아래로 내려가려는데, 그가 허리를 안아 당겼다.

“아니, 엉덩이 이쪽으로 하고.”

“…….”

망설여졌지만, 찰나일 뿐이었다. 진동하는 향기에 어질해진 나는 방향감각을 상실한 것처럼 휘청거리며, 그가 시키는 대로 그의 배 위에서 방향을 바꿔 앉았다.

눈앞에 아직 트레이닝팬츠에 반쯤 가려진, 그 상태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길고 굵은 음경이 끄떡거리고 있었다. 그의 성기의 단단함은 길이와 굵기만큼이나 우수했다. 발기 시에 늘 아찔한 각도를 유지하며 서 있는 그것은 단지 해면체의 확장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딱딱했다. 위에 올라타더라도 끄떡없이 받쳐 줄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단단함 때문에 강한 탄력을 가진 페니스는 밴드를 거의 들어 올리며 삐죽 솟아 있었다. 나는 허리를 숙이며 부드러운 촉감의 팬츠를 무릎 쪽으로 밀어냈다. 퍽퍽한 복근 아래로 무성한 음모가 더 넓게 드러나면서 음경이 튕겨져 나오듯 벌떡 일어섰다.

소중한 보물에 손을 대듯 그것의 뿌리를 가만히 손으로 쥐었다. 허리를 숙이느라 엉덩이가 뒤로 더 빠지면서 그의 턱이 골을 찔러 왔다.

“으. 흐윽.”

그리고 다음 순간엔 양쪽 허리가 당겨지면서 또다시 그의 얼굴 위에 앉아 있었다. 이런 걸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입으로 빠는 행위. 69.

“어차피 제대로 된 BJ(blow job)… 오럴은 못 해요. 혀랑 입술을 대 주는 것만으로도 난 만족하니까.”

그러니까 빨리, 라는 뒷말이 생략된 것 같았다.

어차피 제대로 된 오럴은 불가능하다는 그의 말은 허세나 과장이 아니었다. 이런 게 그 꽉 다물린 애널 속을 제법 과격하게 드나들었었다는 게, 그러고도 아래가 찢어지거나 파열되지 않고 얼얼하고 둔한 통증만으로 끝났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귀두까지 삼키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입 안이 가득 차서 앞뒤로 움직이며 넣었다 빼기를 반복할 여유 공간이 거의 없었다. 귀두의 갈라진 틈을 혀로 쓸다가 입술 안쪽의 점막으로 감싸 안듯 입 안으로 미끄러뜨려 머금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어설픈 애무만으로도 쿠퍼액을 쏟아 냈다. 알파, 그것도 골든 알파는 정액만이 아니라 쿠퍼액의 양도 엄청났다. 인터넷에서는 상위의 골든 알파는 쿠퍼액만으로도 임신을 시킬 수 있다는 소문이 떠돌 정도였다.

다른 골든 알파들의 사정이 어떤지는 몰라도, 그가 관계 시에 흘려 대는 쿠퍼액의 양은 보통 남자들의 사정액을 가볍게 넘어서는 수준이라, 인터넷 속 근거 없는 낭설마저도 묘하게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귀두를 가득 머금었다 밀어내기를 반복하면서, 치밀어 오르는 울음처럼 입 안에 쏟아 놓는 다량의 쿠퍼액을 음경의 기둥 아래로 흘려보내야 했다.

내 입이 그다지 큰 편이 아니기도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성인 남성이 귀두 이상을 삼키기 어려운 크기라니…. 제대로 뭔가를 해 보기도 전인데 벌써부터 아래턱이 뻐근했다.

늘 호기심을 자극했던 그의 성기를 코앞에 두고 달아오른 충만한 의욕도 현실적, 물리적 장벽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했다.

“무리할 거 없어요. 혀로 핥아 주기만 해도 좋다니까?”

손바닥을 넓게 벌려 엉덩이를 크게 쓰다듬으며 그렇게 다독이는 그를 돌아봤다. 나의 몸에 가려 그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흐으음. 하아….”

대신, 음미하듯 길게 들이켰다 내쉬는 흥분한 숨결이 타액으로 축축한 회음과 애널에 뜨겁게 들러붙었다. 저절로 움찔거리는 애널, 그의 눈앞에 적나라하게 펼쳐지고 있을 그 수축을, 머릿속에 쉽게 그려 볼 수 있었다. 부끄러워 감추고 싶었고, 흥분되어 더 활짝 내보이고 싶기도 했다.

“흐. 흐으으….”

어떤 충동을 따를지 선택을 고민할 필요도 없이 곧바로 다음 자극이 이어졌다. 그와 함께 침대 위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생각의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가 거꾸로 매달린 음경을 아래로 꺾어 귀두를 삼킨 것이다.

빌듯이 고꾸라지며 그의 음경의 뿌리에 코를 묻었다. 두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허우적거리다 그의 탄탄한 허벅지를 긁어 댔다. 참기 어려운 사정감이 귀두 끝으로 급하게 몰려들었다.

눈앞에서 그가 긴 두 다리를 요령 좋게 움직여 아래까지 완전한 알몸이 되었다. 그러고는 핥기를 요구하듯 무릎의 간격을 넓게 세우고 골반을 들어 쳐올리며 스스로 음경을 내 얼굴에 문질렀다.

커다랗게 발기한 그의 것이 뺨에 비벼지고, 입술을 스치고, 콧대를 때렸다. 눈앞에서 펄떡거리는 그의 성기가 일으키는 파장은 강력했다. 욕망이 자극되고, 입술이 벌어지고, 숨이 차오르면서… 실에 거꾸로 매달린 과자를 손을 사용하지 않고 따 먹으려 애쓰는 사람처럼, 나는 혀를 내밀어 그의 음경을 쫓아다녔다.

말할 것도 없이 꼴사나운 모습이었지만, 이 순간 나의 아래에 얼굴을 묻고 있는 그조차도 목격할 수 없는 모습이기도 했다.

교접을 연상시키는 그의 골반의 들썩임은 성적인 메시지 그 자체였다. 원하는 것이 분명한 노골적인 들썩거림을 그의 배 위에 엎드려 거꾸로 보고 있자니 더욱 비일상적 행위로 느껴져 야릇함이 배가 되었다.

그가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점점 더 큰 각도로 끄덕거리는 음경을 손으로 감아 뿌리에서부터 핥아 올렸다. 울퉁불퉁하게 혈관이 불거진 그것은 터지기 직전의 위험물 같았다.

굵기, 길이, 색상과 냄새. 어느 면으로 보든 결코 안전해 보이는 대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어차피 자신을 보호하려고 이 방에 온 것이 아니었다. 침대 위로 올라오기 직전, 그를 향해 ‘변해 버리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어린 시절, 달콤한 아이스바에 탐닉했던 이상의 몰입으로 그의 기둥을 구석구석 맛보았다. 그와 키스하며 타액을 삼킬 때 그런 것처럼, 기둥을 적시고 흘러내린 쿠퍼액도 마치 그의 향기를 응축한 에센스가 섞인 것 같았다. 그런 기분이 들 뿐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향기의 진액을 그대로 삼키는 것 같은, 이 기분만으로도 충분했다.

음경을 길게 핥고 올라가 벌어진 귀두 위에 넓게 펼친 혓바닥을 문지르면… 아주 차가운 음료를 단번에 쭉 들이켠 것처럼 머리가 띵해졌다. 숨을 쉬면 산소가 아닌 그의 향기가 폐를 채우는 듯했다.

“하으, 흐… 흐으으… 후….”

숨소리는 일정한 균형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흐트러졌다. 흐느낌과 닮은 신음을 흘리며 그의 성기에 매달려 숨을 들이마시는 나는 중독자 같았다.

귀두만을 겨우 삼킬 수 있는 나와 달리 고개를 일으켰다 젖히기를 반복하며 나의 음경을 완전히 조여 대는 그의 흡입에 맞춰 어느새 나 역시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었다. 그것이 더는 부끄러운 행위가 아닌 오히려 자연스러운 흐름처럼 느껴졌다.

무릎을 세운 그의 허벅지에 팔을 감아 단단한 근육의 윤곽을 더듬고, 다른 손으로는 음경을 아래에서 위로 반복해 밀어 올리며, 두툼한 귀두를 입술로 감쌌다. 열정적 키스를 하듯 고개를 꺾으며 입술 뒷면의 점막으로 귀두를 훑어 냈다.

덤불 속에 머리를 처박고는 완벽하게 숨었다고 착각하는 조류처럼, 그의 코앞에 성기와 애널을 전부 드러내고 있으면서도 그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이유로 나는 과감해지고 있었다.

빛의 세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용도의 아주 얇은 커튼 한 겹만 드리운 창문으로 새어 드는 부족한 빛 속에서 우리는 지극히 원초적인 자세로 서로의 음부에 탐닉했다.

그가 골반을 쳐올리는 리듬과 내가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리듬이 널이나 시소처럼 맞아 들어가, 침실 안은 매트리스를 튕겨 내며 젖은 피부를 때리는 마찰음으로 질척거렸다.

나올 것 같다며 그를 밀어낼 틈조차도 없었다. 입 안 깊숙한 곳, 목구멍 안쪽으로 귀두를 확 당기는 조임에 눈앞이 새하얘졌고, 억, 어억…거리는, 비명이 되어 나오지도 못한 소리와 함께 정액을 쏟아 냈다.

애널로 쾌감을 느꼈던 지난번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성기를 압박해 오는 따뜻하게 젖은 점막에 감싸인 채 사정하는 쾌감은 앉아 있는 상태에서도 무릎을 후들거리게 했다. 아무리 그를 떨쳐 내려 엉덩이를 흔들고 허리를 뒤쳐도, 허벅지에 팔을 감아 양 허리를 붙잡은 그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귀두를 빠는 힘을 풀지 않았다.

“하아, 흐, 흐으, 흑… 하윽!”

그의 배 위에서 고개를 흔들고 상체를 펄떡거리며 그가 빨아들이는 힘에 이끌려 마구 사정했다. 그의 목구멍 안으로 성기가 뽑혀 들어갈 것 같았다.

사정하는 족족 정액을 삼켜 내며 그는 귀두에 가해진 압박의 강도를 능숙하게 조절했다. 양의 차이가 있긴 했지만, 그의 쿠퍼액조차도 전부 삼킬 수 없었던 나와는 달랐다.

늪에 빠진 발 한쪽을 빼내려 별짓을 다 해 보는 사람처럼 버둥거리던 나는 더 이상 성기 끝에서 짜낼 것이 없어진 뒤에야 그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

나는 거의 덜덜 떨면서 본능적으로 앞으로 기어 나갔다.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천적의 날카로운 송곳니에서 탈출한 짐승처럼. 입가로 흐르는 것이 타액인지 그의 귀두를 빠는 동안 머금었던 쿠퍼액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발목까지 내려가기도 전에, 벌써 상체를 일으켜 앉은 그에 의해 몸이 휙 뒤집혔다.

“어디 가요.”

한참 만에 얼굴을 마주한 그의 눈은 반쯤 풀려 있었다. 허리를 잡아 아래로 푹 당겨 자신의 사타구니에 나의 회음을 바짝 밀착시킨 그는 다리 사이로 손을 넣어 애널 안의 상태를 점검하듯 안에서 손가락을 회전시켜 점막을 더듬었다.

“흐으으… 흐….”

갑작스러운 침입에 시트를 비틀어 쥐며 어깨를 뒤쳤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가락을 꺼내 쪽 빨았다. 그 끝에 꿀이라도 찍은 것처럼.

“지난번보다 훨씬 편안할 겁니다. 딱 좋게 녹아내렸어.”

오른팔로 이마와 관자놀이의 땀을 한 번 훔쳐 낸 그가 나의 왼 다리를 자신의 오른쪽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 종아리 안쪽에서부터 발목까지를 진하게 핥아 올리는 붉은 혀가 어둠 속에서 번들거렸다.

“다리가 예뻐요.”

허리를 돌려 사타구니에 바짝 붙은 아래를 음란하게 치대며, 그가 꽉 조인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숨결은 거칠었지만, 일부러 성적 긴장감을 주려 꾸미는 기색이 없는 목소리였다. 심지어 차분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상적 어조로 말한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지금 그가 비상식적인 궤도에 진입해 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어깨에 걸쳐진 발목에서부터 허벅지까지를 간지럽게 쓰다듬어 내려온 커다란 손이 사정 직후 예민하게 부어 있는 성기를 쓰다듬었다. 종아리에 입맞춤을 퍼붓고 있던 그가 시선만을 옮겨 손안에 쥔 나의 성기를 내려다봤다.

“하긴. 다 예쁘지.”

오른쪽 다리마저 왼쪽 다리와 나란히 겹쳐 어깨에 올린 그가, 모아진 엉덩이의 골 위에 자신의 귀두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푸른 기가 옅어진 흐린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는 그는 취한 사람 같았다. 나 역시 몽롱하게 해체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부연 머릿속에서 문득 슈슈를 떠올렸다.

예쁘다는 단어가 포용할 수 있는 범위를 확장시키더라도, 슈슈 같은 사람을 가까이 두고 지내는 그에게 내가 예뻐 보일 리는 없을 것 같았다.

“왜요, 빈말 같아요?”

오른쪽 발목을 씹으면서, 골에 문지르던 귀두를 애널의 입구에 둥글리면서, 그렇게 한 번 헤집어진 내 정신을 또 한 번 흐릿하게 망가뜨리면서… 그가 한쪽 입꼬리를 당겨 씨익 웃었다. 속마음을 간파한 듯한 질문이었다.

“아… 으, 으으….”

입구 주변을 꾹꾹 누르며 맴돌기만 하던 귀두가 구멍을 벌리듯 아래쪽을 향해 힘을 주며 밀고 들어왔다. 하나로 겹쳐져 공중에 들린 다리 때문에 밀어내며 힘을 주는 것이 불가능했다.

“믿어요. 예쁘지 않았으면….”

그가 먼 곳의 물체를 확인하려 하는 사람처럼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내려다봤다.

“깔고 앉아 달라는 그런 거… 절대 부탁 안 했어.”

그가 상체를 유연하게 뒤로 젖히자 반대로 하체가 더 바짝 밀착되었다. 꾸구국, 느리고도 분명하게 파고드는 귀두의 진입에 나의 허리도 휘어졌다.

그의 말대로 삽입의 느낌은 지난번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한 번씩 툭툭 밀리는 정도의 저항감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나 역시 제정신이 아닌 상태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의 입 안에서 쥐어짜지면서 사정하고 난 뒤의 예민한 흥분이 여전히 가늘게 흐르고 있던 육체에 삽입이 시작되면서, 나는 이번엔 긴장과 기대감으로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주목하고 있었다.

무릎을 벌리고 뒤꿈치를 세워 앉은 자세로 내 종아리를 씹으면서, 그는 귀두만 넣은 상태에서 벌써부터 허리를 들썩거렸다. 찌푸린 눈으로 무언가를 가늠하듯, 그의 시선이 흐트러져 누운 나의 상체를 훑었다.

“다리가 길고 늘씬해서… 야한 속옷이 어울릴 것 같은데.”

표정 없는 얼굴과 차분한 어조, 흐릿하게 풀린 눈빛 때문에, 마취제에 취한 사람의 횡설수설하는 헛소리처럼 들렸다.

손을 더듬어 귀두가 완전히 삼켜진 것을 확인한 그가, 두 팔로 가슴 앞에서 내 허벅지를 조여 안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준비하면, 한번 입어 줄래요?”

야한 춤을 추듯 허리를 돌리는 움직임을 따라, 뒤쪽으로 밀려 나갔던 그의 아래가 다시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다가오기를 반복했고, 그때마다 귀두가 더 깊은 곳으로 꾸물꾸물 파고들었다. 배 속으로 팔뚝이 밀고 들어오는 듯 무리하게 벌려지는 감각에 헐떡거리자, 그의 허리가 돌아가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굵고 단단한 열기가 내벽을 넓히는 감각은 분명한데, 안쪽에 마취 연고라도 바른 것처럼 통증은 둔하기만 했다. 그의 성기의 압도적인 사이즈를 고려하면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삽입이 시작되기도 전에 전신을 흐물흐물 곤죽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의 정성스러운 전희 때문일 것이다. 강한 흥분으로 아드레날린이 과다하게 분비된 탓일 수도 있겠지. 어쨌든 아픈 것이 문제지, 고통이 쾌감에 금세 전복되는 것은 별문제가 아니었다. 신기하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곧 의식 속에서 완전히 제거되었다.

“으으, 응, 으음….”

바닥에 끌리는 듯한 신음을 흘리며 안을 열고 들어오는 그를 느꼈다.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쿠퍼액은 지난번 관계 때보다 더 흥건했고, 그의 귀두는 젤 없이도 스스로 내부를 적시며 길을 트고 있었다.

맞지 않는 사이즈의 옷에 거구의 몸을 밀어 넣는 것처럼 투두둑, 뜯어지는 듯한 감각이 아래에서 느껴지긴 했지만, 그것은 다물려 있던 점막이 강제적 힘에 의해 벌려지는 저항감이었을 뿐 참지 못할 고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나의 두 다리를 어깨에 얹은 채 꽉 안아 결박한 그는 허리를 돌려 더 깊이 파고드는 데에 집중하면서 집어삼킬 듯한 눈으로 내 표정을 살폈다. 통증과 쾌감. 그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나의 미세한 표정으로 감지해 내며, 거기에 맞춰 뒤로 빠졌다 더 깊이 들어서기를 반복했다.

배 속이 단단해질수록 숨이 가쁘게 차올랐다. 그가 허벅지를 안고 있던 팔 중 하나를 풀어 달래듯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그런 그의 손에 내 손을 겹쳤다. 뭐라도 붙잡아야 할 것 같았다.

그가 사정 이후 반 정도 시든 나의 음경으로 내 손을 가져가 애무를 유도했다. 그와 손을 겹쳐 쥐고 성기를 문지르자 호흡이 조금은 안정적으로 가라앉았다.

잘하고 있다고 칭찬하듯, 그가 찌푸리고 있던 눈에서 힘을 풀고 나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우등생이야.”

“…….”

갑작스러운 발언의 이유를 곧 알 수 있었다. 어느새 애널의 입구에 그의 음모가 까슬하게 비벼지고 있었다.

“흐… 읏, 흡.”

모조리 삼켜졌다는 것을 몸으로 확인하기라도 하듯, 그가 허리를 양쪽으로 비틀어 안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그의 하체가 비틀릴 때마다 배 속을 채운 뜨거운 덩어리가 펄떡거리는 감각에 베개 위에 뒤통수를 비비며 성기를 놓쳐 버렸다.

장기를 전부 위로 밀어 올릴 것처럼, 그래서 내 목구멍을 막아 버리려는 것처럼, 그가 허벅지를 고쳐 안으며 깊숙이 넣은 상태 그대로 잘게 허리를 털어 댔다.

“흐으으으… 흐… 으으, 응.”

그가 내 몸을 흔들어 생긴 진동은 다시 그의 페니스로 되돌아가 자극을 가하고 있을 게 뻔했다. 마찰과 열, 그리고 그의 귀두에서 흘러넘치는 선액의 미끌거림으로 적당히 녹아든 내벽을 느낀 그는 이번엔 허리를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얼하고 둔한 통증과 함께 뒤로 빠진 성기가 여러 번에 나누어 얕게 치고 들어왔다. 탁, 탁, 그의 허리가 짧게 끊어 칠 때마다 묘하게 안쪽이 근질거렸다. 좀 더 격렬한 삽입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몸이 열린 것이다.

“음… 으, 흐….”

그는 내 신음의 미세한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까지도 다 감지하는 사람 같았다. 압박감을 가까스로 견뎌 내는 것에 가까웠던 신음에 쾌감의 기색이 섞이자마자 좀 전보다 강도 높은 삽입이 이어졌다.

“으읏, 응… 흑!”

과감하게 몇 마디씩 뒤로 물러섰다가 자신이 쏟아 놓은 쿠퍼액을 찐득하게 밀고 들어오는 성기는 점차 속도를 더해 갔다. 찌걱, 찌걱, 흥건하게 고인 점성이 강한 액체 위를 짓찧는 마찰음이 교접 부위에서 질척거렸다. 땀이 배어 나와 허벅지를 안은 팔이 느슨해질 때마다 그는 몇 번이나 고쳐 조여 댔다.

다리를 한껏 벌린 자세만 부끄럽다고 생각했지, 허벅지 안쪽이 밀착될 정도로 바짝 오므린 자세에서도 야릇한 감상을 느낄 줄은 몰랐다. 그의 성기는 분명 애널을 가르고 들어오고 있는데도, 꽉 다물린 허벅지 사이에서 금방이라도 큼직한 귀두가 음낭을 밀어붙이며 불쑥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에, 직접적인 마찰이 가해지고 있지 않은 허벅지의 틈마저도 애무 당하는 기분이었다.

내벽을 최대치로 팽창시키듯 밀어내며 안을 꽉 채운 그의 성기는, 굳이 그러려고 의도하지 않아도, 들고 날 때마다 여린 점막 속 민감한 부위 위를 누르고 긁어 댔고, 그때마다 아랫배가 자릿하게 당기며 사정과는 또 다른 오르가즘의 느낌이 탄산처럼 몸속에 끓어올랐다.

“흐읍!”

빠르게, 아주 느리게, 조금만 빠르게, 얕게, 깊게. 속도와 깊이를 달리해 한참이나 정성을 들여 내 안에 길을 내던 그가 한순간 자세를 바꿔 허벅지를 안은 채 무릎으로 버티고 섰다. 덩달아 나의 엉덩이도 공중에 들렸다.

무겁지도 않은지, 그 상태에서 그는 빠른 속도로 허리를 털어 대며 안을 자극했다. 쿵쿵, 두툼하고 넓적하게 벌어진 귀두는 심장까지 올라와 맥박을 찌르는 것 같았다. 가슴이 빠르게 뛰고 숨이 막히면서 절정의 느낌이 고조되었다.

“하으으, 흐… 허윽. 흑….”

그저 숨을 쉬고 있을 뿐인데도 오랫동안 교성을 지른 것처럼 목이 아팠다. 헉헉거리는 벌린 입 안이 바짝 말라 있었다.

미간과 콧등을 잔뜩 찌푸린 그가 침대 한구석에 뒹굴던 자신의 팬츠를 집어 입에 물었다. 그러고는 포효하는 짐승처럼 틀어막은 입 안에서 울부짖으며 옷감을 잡아 뜯었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통제할 수 없는 선 너머에서 침범해 오는 세력을 부자연스럽게 강제적으로 막아 내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자동차를 팔의 힘으로 들어 올리려는 사람 같았다.

직관적으로, 그가 노팅을 억제하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까지 해서 노팅을 막으려는 의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의아함도 곧 의식 밖으로 부옇게 밀려났다. 호스를 배 속에 집어넣고 강한 세기로 수도를 열어 버린 것 같은 사정이 내 안에 쏟아졌다.

“허, 허어, 헉…. 흐….”

눈을 크게 뜨고 그저 숨을 몰아쉬었다.

사정이 시작되자 그는 물고 있던 팬츠를 내버리고 다리를 더 꽉 끌어안으며 절정의 끝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가 흔드는 힘에 의해 덜덜 떨리는 신음을 흘리며 시트를 쥐어뜯던 나는 나중에는 스스로의 손등을 물었다. 과격하고 위험한 놀이기구에 올라탄 것처럼 몸이 정신없이 흔들리며 어딘가에 강하게 부딪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튕겨 나가지도, 몸이 부서지지도 않는다. 놀이기구에서는 충격이 사고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가 나의 두 다리를 자신의 왼쪽 옆구리에 붙여 내려놓았다. 하체가 뒤틀리면서 안에서 페니스가 더 꽉 눌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나, 둘 모두에게 자극적이었다.

페니스를 빼지 않은 채로 그가 옆에 누웠다. 모로 누운 그가 내 가슴을 당겨 안자, 나 역시 그와 포개어져 모로 누운 체위가 되었다. 물어뜯던 손을 끌어 내린 그가 대신 자신의 손등을 내게 물렸다.

“하으, 흑!”

물지 않으려 했지만, 체위를 바꿔 안을 문지르기 시작한 자극에 생각이 끊어지고, 푸르스름한 핏줄이 돋은 그의 단정한 손등을 이로 씹어 댔다.

밀착된 몸은 감각을 더욱 예민하게 했다. 너덜너덜해진 티셔츠 위로 가슴을 안은 그의 팔을 정신없이 문지르면서, 살짝 허리를 낮춰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는 박자를 따라 엉덩이를 내밀고 흔들었다.

그의 무릎이 다리 사이로 파고들어 내 허벅지를 들어 올렸다. 사타구니가 벌어지고, 옆으로 누운 채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린 원초적인 자세가 되어 그에게 꿰뚫리고, 비벼지고, 흔들렸다. 작정한 듯 빠르게 찔러 올리는 힘에 전립선이 사정없이 긁혔다.

“허어, 억… 헉… 큽. 흑.”

용기 안에서 끓어오르던 기포가 마침내 와르르 밖으로 넘쳐흐르는 느낌.

사정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오르가즘에 도달한 나는 가슴을 안은 그의 팔을 잡아 뜯듯 비틀어 쥐며 입을 크게 벌린 채 그저 컥컥거렸다.

나에게 물려 주었던 그의 손이 턱을 쥐고 뒤로 돌렸다. 입술이 닿기도 전에 혀부터 깊이 찔러 넣는 키스가 나를 뒤덮었다. 뒤에는 여전히 그의 페니스가 가득 차 있었고, 앞으로 사정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어딘가에 도달해 있었다. 빨라지는 맥박과 부족한 호흡을 그의 혀가 무자비하게 헤집었다.

요동치던 그의 허리가 뒤로 물러났다. 윤곽이 뚜렷하게 느껴지는 육감적인 귀두를 점막 위에 질질 끌면서 성기가 빠져나가자, 마개가 빠진 채 옆으로 쓰러진 물병처럼 애널에서 정액이 흘러나왔다.

밀어 올리며 들어차는 감각도 그랬지만… 주르륵 쏟아지며 빠져나가는 감각도 야하게 느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진저리를 치며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손으로 구멍을 틀어막고 어깨를 뒤쳤다. 앞의 사정과 뒤의 오르가즘을 차례대로 겪고 난 육체는 피부 위에 입김만 불어도 신음할 것처럼 극도로 민감한 상태였다.

울컥, 울컥, 손가락 사이로 꿀렁거리며 흘러나오는 끈끈한 액체가 그대로 만져졌다. 곧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요의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처럼 아래를 막고 끙끙거려야 했다.

“하으, 시, 싫으… 이거… 뭐가, 자꾸 나와요….”

어떻게 좀 해 달라고. 애원하며 그를 돌아보는 시야가 흐려져 있었다. 고인 눈물 탓이었다.

여전히 아래를 막고 있는 내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쳐 힘주어 문지르면서, 그가 땀과 눈물로 축축한 눈가에 꾸욱 입술을 눌렀다.

“괜찮아, 잠깐… 금방 다시 넣어 줄게.”

어깨를 밀어 나를 엎드리게 한 그가 곧바로 내 등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배를 안아 몸을 위로 당겼다. 무릎과 손을 짚고 매트리스 위에 네 발로 엎드린 꼴이 되었다.

한 손을 내 손 옆으로 짚으며 가슴으로 내 등을 뒤덮은 그가 다른 손으로 턱을 돌려 입술을 겹쳤다. 어깨에 붙은 이물질을 보려 하는 사람처럼 고개를 한껏 뒤로 돌린 채 그에게 혀와 입술을 내줘야 했다.

“으응, 음… 음.”

엉덩이골에 비벼지는 그의 성기는 여전히 뜨겁고 단단했다. 나와 같은 사족보행의 자세에서 그가 몸의 축을 틀어 한 다리를 기역 자로 세우는 것이 느껴졌다.

애널에서 흘러나와 허벅지 안쪽을 타고 흘러내린 자신의 정액을 귀두로 훑고 올라간 그는, 아직 완전하게 닫히지 않은 채 열려 있을 입구 속으로 젖은 귀두를 밀어 넣었다.

이전과 달리 한 번에 강하게 쑤시고 들어오는 그의 성기를 큰 무리 없이 받아들이는 자신을 신기해할 여유도 없었다.

찰싹, 둔부를 때리듯 착 감겨 온 끈적한 손바닥이 못 참겠다는 듯 살집을 가득 움켜쥐고 비틀었다. 체벌을 받는 아이처럼 엎드린 채 고개를 숙이고 신음하자, 흐음… 뒤에서 깊고 무거운 신음이 내려앉았다.

그가 다시 내 등 위로 가슴을 겹쳤다.

네 발로 엎드린 채 하나로 겹쳐져 성기를 넣었다 빼는 반동으로 정신없이 흔들리는 우리는 짐승 같았다. 그의 힘이 가장 직접적으로, 낭비 없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체위였다.

내부에 고인 정액 탓에, 그가 박혀 올 때마다 교접음이 유난히 질척거렸다.

“흐윽, 흑… 하으.”

아래로 늘어진 성기가 미친 듯이 펄떡거리며 흔들리고, 앞과 뒤를 동시에 자극당하는 듯한 오싹함으로 미칠 것 같았다. 매트리스 위를 짚은 손을 떼는 순간 그가 미는 힘에 무너질 것 같아 손을 뻗어 성기를 잡을 수조차 없었다.

코너로 몰려 연속적으로 공격당하기만 하는 범퍼카에 탑승한 기분이었다. 강한 충돌이 계속되고, 다른 무언가를 시도할 수 없이 계속해서 흔들리면서,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허리를 밀었다 뺐다 하며 음경의 모든 표면으로 내 안에 마찰을 일으키는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절제하지 않는 것 같았다. 허리가 너무 빨리 움직여서, 내 등을 전부 뒤덮은 그는 네 발로 전력 질주하는 짐승 같았다. 울 듯이 신음하며 그 질주에 끌려가는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나랑 하고 싶었어? 먼저 침대 위로 올라올 만큼?”

“흐, 흐으, 으….”

어깨를 누르는 그의 턱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리와 골반을 튕겨 삽입을 반복하면서 그가 한 손으로 느슨한 티셔츠 안을 파고들어 젖꼭지를 쥐어짰다.

“어떻게 그래? 어떻게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내가 어떤….”

말을 다 마치기 전에 그는 젖꼭지를 짜내던 손을 네크라인 위로 빼내 턱을 잡아 돌렸다. 곧바로 입술이 겹쳐졌다. 그가 나를 흔드는 힘 때문에 우리의 입술은 어긋나고 부딪치기를 반복해야 했고, 그 때문에 키스가, 그의 입술이 더 간절했다.

느슨하게 내리뜬 눈을 그의 입술에 고정시킨 채 덜덜 떨리는 숨소리 사이로 순순히 고백했다.

“하, 하고 싶…었어요.”

시뻘겋게 불이 붙을 것 같은 눈으로 그가 나를 쳐다봤다. 완전히 무너져 헉헉거리는 그의 호흡 속에서 향기가 흘러나오면 내가 곧바로 달려들어 그것을 탐욕스럽게 들이켰다.

“오늘만이 아니라, 계속… 그랬어요.”

끔찍하게 싫은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미간을 찌푸린 그가 입술을 집어삼켰다. 질주 끝에 포획한 먹이가 나인 것처럼, 말 그대로 입술의 살점을 씹어 삼킬 것 같은 키스였다.

침대 위에서 열에 들뜬 상태였지만, 그것은 열에 들떠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한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는 모르더라도, 나는 그것이 사실의 고백임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과감함이 더욱 놀라웠다.

점점, 섹스는 내게 해방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근본적인 자유로 귀결되는 것이 아닌 일시적 도피에 불과한 퇴폐적 해방이긴 했지만, 그와 맨살을 겹치는 동안 모든 것을 잊고 자신의 감각에만 집중하며 솔직해질 수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이보다 더 생생하게 존재를 때리고 울리는 감각을 몇 년 동안 전혀 경험하지 못했었다. 뭔가를 느끼게 되면 자신이 다칠 것만 같았으니까.

그러나 그와의 접촉에는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마주하고 만져 보고 감각하는 생생함이 있었다. 비록 모든 것이 끝난 뒤에는 자책의 쓴맛을 감내해야 하더라도, 적어도 이것은 어떤 누구도 상처 입히거나 위험하게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는 점에서 나 같은 놈에게는 거부할 수 없이 매력적이었다.

오직 나만이 행위 뒤의 씁쓸함과 허해지는 상실감을 견뎌 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원하면 말을 해요. 날 원한다고 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줄 테니까...”

짓씹던 입술을 당겼다 놓은 뒤 귓가에 코끝을 비비며, 그는 이보다 더 향기로울 수 없고, 동시에 이보다 더 잔인할 수 없는 이야기를 속삭였다.

이 행위는 그를 가지는 것도 아니었고, 아무리 여러 번 반복한다 해도 이것만으로는 어떤 의미를 이룰 수도 없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잠시나마, 그의 육체나마 소유할 수 있다면 나는 아마도 이 짓을 반복하려 하겠지.

정말이냐고 묻고 싶었다. 내가 원하면 아무 때나, 어디서든, 지금처럼 이렇게 해 줄 거냐고.

팽팽하게 당긴 허벅지가 덜덜 떨렸지만, 안을 쑤시는 그를 놓고 싶지 않아 시트를 틀어쥐고 버텨 냈다.

“흐으, 흣… 흑….”

나의 표정과 호흡, 내벽의 꿈틀거림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그의 눈빛, 거칠게 움직이길 좋아하는 육감적인 입술, 유연하면서도 힘 있는 근육의 움직임, 성기의 뜨거움과 안을 비비는 방식. 숨 막히는 짙은 향기. 그가 주는 모든 감각들이 이전의 희미한 세계에 대비되었다.

정신은 흐릿하게 번져 가는데, 반대로 모든 감각은 섬뜩하도록 선명해졌다.

그 선명함에 노출되어 자신을 무너뜨리는 것이 좋았다. 이곳에 있는 것은 그와 나 둘뿐이었다. 사생활이란 대단하다. 침대 위에서 그와 함께 어떤 쾌락에 빠지든 어떤 난잡한 행위를 즐기든, 그 한 사람이 동의하는 한 그것은 죄가 되지 않는 것이다.

자유로웠다. 그것이 방종과 타락에 대한 착각일지라도, 적어도 이 순간 나는 그렇게 느꼈다.

네 발로 엎드려 그의 성기가 흔드는 힘으로 떨면서, 고개를 돌려 난잡한 키스를 주고받는 이 자세조차도… 이젠 수치스럽기보다 자유로웠다. 하지 말라는 짓, 해서는 안 되는 짓을 과감하게 해 버리는 데에서 오는 비뚤어진 쾌감마저도 섹스의 일부였다.

“원해요….”

원하면 그냥 말하기만 하면 된다고, 그의 말대로 했다. 외설스럽게 갈라진 목소리는 또렷하지가 못했다.

“갖고 있잖아, 지금.”

밀어붙이는 속도를 줄인 그는, 대신 깊숙이, 끝까지 성기를 밀어 넣었다. 그 상태에서 조금도 뒤로 빼지 않고 요란하게 허리를 털었다.

안에서 그의 것이 펄떡거리는 느낌에 진저리를 치면서, 그게 아니라고, 나는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지난번에 해 준 거….”

“…….”

“그거 해 줘요. 노팅… 또 해 줘요.”

내가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가.

그가 머리카락을 움켜 뒤로 확 잡아챘다. 부어오른 입술을 이로 물어뜯으며 자신을 미치게 하는 나의 음란함에 대해 평소보다 강한 악센트의 빠른 영어로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나를 대하는 그의 모든 것이 거칠어졌다. 트레이닝팬츠를 잡아 뜯어 가면서, 자신을 침범하려는 세력에 맞서던 그는 이제 없었다.

그가 양 손목을 붙잡아 뒤에서 잡아채듯 끌어당겼다. 나를 일으켜 세우고는 상체를 꽉 부둥켜안았다. 가슴은 물론 두 팔까지 그에게 결박당해 꼼짝도 할 수 없는 자세였다. 상체의 모든 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힘이 강하게 조여 왔다. 그의 팔에 푸른 핏줄이 불뚝거리고, 근육의 윤곽이 더 뚜렷해졌다.

한쪽 어깨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늘어난 티셔츠의 네크라인 위로 그가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부위에 이를 박아 깨무는 힘은 장난이나 애무라기엔 통증이 강했다. 살점을 뜯어내 삼켜 버릴 것처럼, 그는 피부를 물고 고개를 흔들어 댔다.

“으으, 으… 흐읏!”

나를 꽉 안은 힘을 조금도 풀지 않은 채 허리를 뒤로 빼 귀두만을 남겨 놓고 물러났다가 팡,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찔러 넣는 힘에, 엉덩이의 살집이 부르르 떨렸다.

엉덩이에 뭉개지는 음낭이 느껴질 정도로 끝까지 파고들었다가 절반쯤 뒤로 빠지며 내벽을 끌고 나가는 그의 페니스는… 배 속만이 아니라 전신을 비비는 것 같았다. 내 안에 자신을 남김없이 퍼부어 대는, 나를 그 자신으로 변화시켜 버리려 하는 듯한 섹스였다.

거듭해 성기 끝으로 몰려왔다 후퇴하기를 반복했던 절정의 느낌이 다시 한번 몸속을 내달릴 때, 아랫배와 엉덩이 부근을 부풀리는 빵빵한 팽창감이 느껴졌다.

애널에 호스를 넣고, 입구를 봉하고, 그리고 최대치로 수도를 열어 나를 부풀린다. 쿵, 쿵, 쿵, 머리 위에서 내려치듯 맥박이 날뛰고, 온몸의 피가 평소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로 혈관 속을 핑핑 도는 느낌.

“흐아흑, 흐, 이, 이거… 이거….”

놀라운 뭔가를 목격하기라도 한 것처럼 허공을 향해 눈을 크게 뜬 채 시트 위에 정액을 뿌려 댔다. 내가 사정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는 전혀 삽입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노팅 중인 그에게는 브레이크가 없다. 생식을 위한 골든 알파의 성 능력이 최대화되는 이 순간, 그는 품에 껴안은 나를 임신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밧줄로 온몸을 촘촘히 동여매고 점차 힘을 더해 조여드는 듯했다. 온몸을 자근자근 밟는 것처럼, 살갗을 아프게 파고드는 심한 몸살과도 같은 쾌감에 피부가 아렸다.

“그래, 노팅이야…. 좋아? 이게 그렇게 좋았어?”

미워 죽겠다는 듯 내 목덜미 여기저기를 씹으며 나를 터뜨릴 것처럼 확장된 성기로 그가 안을 찧어 댔다. 목구멍을 틀어막아 숨을 부족하게 만드는 것 같은 성기는 그가 굳이 요란하게 허리를 움직이지 않아도 내장의 위치를 전부 바꿔 버릴 듯 나를 흔들었다. 그게 노팅이었다.

“베타라며. 오메가 절대 아니라며. 근데 노팅을… 왜 찾는 건데. 임신하고 싶어? 어?”

미쳤다.

협박하듯 혼내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순간적으로, 임신이 가능한 경우 우리의 관계가 달라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는 내가 있었다. 아무리 찰나에 그친 가정에 불과하다지만, 너무나 비겁하고 졸렬한, 이전의 나라면 상상도 할 수 없었을 생각의 방향이 무섭고 섬뜩했다.

“대체 왜, 그렇게 사람을….”

항복하듯 혹은 무너져 내리듯 그렇게 중얼거린 그는 내 어깨에 이마를 묻은 채 사정했다. 몸속에 펄펄 끓는 물을 엎은 듯 뜨겁고 맹렬한 사정이었다. 처음엔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처럼 뻗어 나가다, 그 뒤에는 꿀렁거리며 여러 번 계속해서 흘러나와 안을 푹 적셔 놓았다.

엄청난 양의 정액은 그가 내 안에 쏟아 놓자마자 노팅 상태인 음경과 내벽 사이의 완전히 밀착된 틈을 비집고 다리 사이로 흘러내렸다. 그렇게라도 흘러나오지 않았다면 정말로 장기가 망가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오메가였을 경우의 얘기지만, 그렇게 새어 나오더라도 임신을 시키고도 남을 양이었다.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목덜미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나를 보는 그의 눈은 지난번처럼 완전히 맛이 간 상태였다.

나를 보고 있지만 나를 보고 있지 않은 것 같은 초점이 흐려진 눈동자를 무섭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냥, 섹시했다. 이 모든 날뜀과 이성의 어긋남도 전부 나를 향한 것이라 생각하면 두 손에 움켜쥐고 싶을 정도로 욕심이 생겼다.

느른하게 풀어진 눈꺼풀 위에 입을 맞추자, 그가 즉시 살아나 거칠게 덤벼들며 입술을 낚아챘다. 동시에 나를 안은 채로 시트 위에 쓰러지며 배 위에 올라탔다.

입술, 혀, 목덜미, 귀, 가슴, 겨드랑이와 음모, 고환의 뒤쪽과 애널까지. 샅샅이 뒤지는 애무가 이어졌다. 입술과 코가 닿는 자리마다 체취를 흠뻑 들이마시는 그는, 그에 대해 내가 가지는 탐욕 이상으로 나에게 탐욕을 부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든… 오늘처럼 나한테 오면 돼. 아무것도 걱정할 거 없어.”

오늘 처음 만난 원나잇 상대들의 사랑한다는 속삭임처럼, 침대 위 열기에 휩싸여 무의미하게 쏟아 놓는 립서비스일 뿐이더라도, 그를 향한 허기진 마음에는 더없이 좋은 먹이가 되었다.

티셔츠를 밀어 올리고 예민하게 부어오른 붉은 젖꼭지에 여러 번 입을 맞추는 그의 머리를 부둥켜안으며 눈을 감았다.

노팅을 동반한 사정 후 당황해하며 관계를 멈추고 다급하게 내 안의 정액을 긁어내기에 바빴던 지난번과 달리, 그는 이후 체위를 달리해 한 번 더 내 안에 사정했다.

세 번이나 그의 정액으로 질척하게 덧발라진 안쪽은 물론, 전신에서 내 체취가 아닌 그의 냄새가 피어오르고 있을 것 같았다. 확실히 뭔가가 변해 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 ■ ■

1인용 소파 옆, 간소한 꽃이 장식된 화병과 두어 권의 책이 올려져 있던 테이블은 원목으로 제작된 소형 냉장고였다. 거기에서 생수통을 꺼내 온 그가, 성기를 가릴 기력조차 없이 축 늘어진 나의 어깨를 추슬러 일으켰다.

“물 좀 마셔 봐요.”

입술은 물론 입 안까지 바싹 말라 있었지만, 작은 생수통 하나를 들어 올릴 기력도 없었다. 지치지 않는 탄탄한 근육을 가진 말에게 묶여 한참을 끌려다닌 것처럼 완전히 탈진해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왼쪽 어깨가 그의 오른쪽 가슴에 닿아 있었다. 나를 옆으로 앉히고 어깨를 안은 그는 무릎을 세워 등 뒤를 받쳐 주었다. 스스로 몸을 지탱해 보려 매트리스 위에 손을 짚기는 했지만, 그에게 반 이상 기대지 않고는 상체를 세울 수조차 없었다.

생수통을 쥐려고 시도하는 팔과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본 그가 나 대신 물을 머금었다. 그러고는 입술을 겹쳐 물을 흘려 넣어 주었다.

처음엔 조금 놀라서 움찔 몸이 수축했다. 더운 몸에 닿아 오는 차가운 감촉이 생경하기도 했고, 그가 그렇게까지 해 주리라고는 예상을 못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조금 전까지 온갖 낯 뜨거운 체위로 얽혀 있긴 했지만, 섹스 중에 거리낄 것 없이 난잡했던 관계라도 섹스 후의 섬세한 친절에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관계는 아니었으니까.

근육이 말을 듣지 않아, 그가 흘려 넣어 준 물의 절반 정도는 삼켜지지 못하고 입가로, 목덜미로, 티셔츠에 가려진 가슴과 아랫배로 흘러내렸다. 그는 끈기 있게 여러 번에 걸쳐 충분한 물을 마시게 해 주었다.

나의 눈빛이 어느 정도 생기를 찾은 것을 확인하고서야 그는 남은 물로 자신의 갈증을 채웠다. 물병을 쥐고 있었던 시원하고 커다란 손이 땀에 젖어 이마에 들러붙은 나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지만, 그는 아니었다. 여전히 온몸의 근육들이 팽창해 당장이라도 질주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고,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아직도 열기가 일렁거렸다.

그 뜨거움이 어떤 동선을 훑어 내려갔다. 물이 흘러내린 자리였다.

나를 품에 안은 채 자신이 흘려 넣어 준 물이 흐른 길을 따라, 그가 입술과 혀를 미끄러뜨렸다. 입술이 피부 위를 스칠 때마다 나는 발작을 일으키듯 강하게 떨었다. 젖은 티셔츠 위로 젖꼭지를 빠는 느낌은 차갑고 낯설어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세 번을 사정하고 난 뒤였지만, 옆구리에 닿아 오는 그의 것은 여전히 단단하게 서 있었다. 심지어 일주일 이상을 금욕한 뒤에 흥분한 성기처럼 그의 발기는 여전히 싱싱했다.

하지만 그는 태연한 태도로 섹스가 끝났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내킬 때까지 섹스를 하지 못하는 상황 자체에 익숙한 것 같았다.

골든 알파의 지치지 않는 성욕을 만족시키려면, 골든 오메가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잘은 모르지만.

쾌락의 실과에서 흐른 과즙을 실컷 맛보았으니 나 역시 그를 만족시켜 주고 싶었지만, 성적 흥분을 유도할 에너지의 한 귀퉁이조차도 이제 내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 게 있었다면 그가 전부 먹어 치운 것 같았다.

척추에 좀 더 힘을 주면서 그의 품에서 몸을 일으켰다. 한쪽 어깨가 완전히 드러난 티셔츠의 네크라인을 추슬러 당기면서 마른 정액이 엉망으로 엉킨 성기도 함께 슬쩍 가렸다.

“티셔츠… 버려야겠어요.”

예상하지 못한, 잔뜩 쉰 목소리가 민망했다.

“흠, 그러네.”

그가 동의하며 티셔츠의 가슴쯤을 내려다봤다. 얇은 면 티셔츠는 원래 어떤 형태였는지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네크라인이 완전히 늘어나 매무새를 다듬은 상태에서도 쇄골은 물론이고 윗가슴까지 훤히 드러났다.

그가 쇄골을 쓰다듬다가 네크라인 안으로 불쑥 손을 넣어 무언가를 찾기라도 하듯 장난스럽게 안을 휘저었다. 아래에서 위로가 아닌, 목에서 옷 안으로 거꾸로 들어가 움직이는 손이 괜히 야하게 느껴져서, 손바닥을 넓게 벌려 가슴 근육을 두어 번 주무르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다 눈을 돌려 버렸다.

“만지기도 편하고, 야하고 좋은데요? 기념으로 간직하죠, 뭐.”

섹스 후에 가벼운 장난기를 섞어 분위기를 어색하지 않게 끌어가는 것마저 그는 능숙하고 자연스러웠다.

그의 농담에 힘없이 웃는데, 문득 그의 얼굴이 진지한 빛으로 굳어졌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나의 다리 사이였다. 그가 세 번이나 쏟아 놓은 다량의 정액이 앉은 상태에서도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섹스할 때도 그런 것처럼, 다리 사이를 응시하는 그의 시선은 가감 없이 노골적이었다.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기까지 했다. 태연하게 행동하고 싶어도 저절로 허벅지를 오므리게 됐다.

“빨리 뒤처리부터 할까요.”

부자연스럽게 툭 잘라 내듯 급하게 시선을 거둬들이며 그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직접 해 주려는 건가 싶어 나도 모르게 손목을 붙잡았다.

“조금만 쉬다가… 제가 천천히 할게요.”

“…….”

그의 시선이 다시 아래를 향했다. 그를 붙잡느라 티셔츠가 조금 위로 들리면서 다리 사이가 좀 전보다 더 드러나 있었다. 섹스 중엔 그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별소리를 다 지껄였지만… 머리를 마비시키는 섹스의 마법이 풀린 지금, 스스로 뭐를 싸기라도 한 것처럼 시트를 다 적신 흥건한 다리 사이가 죽을 만큼 창피했다.

“그거… 보고 있으면 내가 또 덤빌 것 같아서. 자극이 너무 세거든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 손을 부드럽게 떼어 놓고 욕실로 향하는 그의 태도에서는 별로 미련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욕실에 불이 켜지고, 욕조에 물을 받는 소리가 들리고, 그가 물에 적신 타월을 하나 가지고 돌아왔다. 여전히 발기한 상태인 성기를 앞세운 알몸으로도 그는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단지, 묵직한 무게 때문에 걸을 때마다 끄덕이는 음경이 좀 불편한지 한 번씩 크게 흔들릴 때마다 뿌리를 쥐곤 했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일 힘도 없는 주제에 그 모습에 또다시 다리 사이가 저릿거리는 스스로의 색욕에 혀를 차게 됐다. 대체 지금까지는 어떻게 그런 기계적인 자위만으로 만족하고 살아왔던 건지.

“읏, 괘, 괜찮은데….”

한쪽 다리는 아래로 늘어뜨린 채 침대 위에 올라앉은 그가 곧장 내 다리 사이로 타월을 가져갔고, 나는 두 손으로 그의 손목을 쥔 채 저항했다. 잠시 손을 멈췄던 그가 간단히 내 손을 뿌리치고 티셔츠 자락을 들어 올렸다.

“이거 다 내가 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나 시켜요. 무리하게 한 거, 잘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따뜻한 물수건으로 허벅지와 성기를 훔쳐 내는 그의 얼굴과 손길은 마치 의료 행위를 하듯 진지해 보였다. 그의 성기는 여전히 발기한 상태였는데도, 나를 만지는 표정과 손길에는 성적인 뉘앙스가 담백하게 빠져 있었다.

완벽하게 친절하고, 어색해하거나 당황해하는 부분이 조금도 없어서… 그래서 좀 전의 섹스가 그를 전혀 동요하게 만들지 못했음을, 섹스가 끝남과 동시에 나에 대한 그의 탐욕과 통제를 벗어난 날뜀도 막을 내렸음을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친절과 매너를 원망하는 것은 아니다. 변태처럼, 볼일이 다 끝난 뒤에 그가 나를 싸늘하게 대하고 밀쳐 내고 모욕하며 마음을 긁어 대기를 바라는 게 아니다.

그런데도 지극히 침착하게 매너를 다하는 그를 보는 것이 왜 이렇게 갑갑한 건지.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었다.

안에 든 것까지 제대로 빼내야 고생하지 않는다며, 그는 어색하고 민망해 죽으려고 하는 나를 거의 안다시피 부축해 욕실로 데려갔다. 욕조에는 그사이 넉넉하게 더운물이 채워져 있었다.

물속에서는 훨씬 거부감 없이 편안하게 빼낼 수 있다며, 그는 티셔츠를 벗고 욕조 안에 쪼그리고 앉도록 했다.

뒤따라 욕조 안에 발을 들이려 하는 그를 필사적으로 막아 내야 했다. 혼자 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했지만, 절망적이게도, 지금의 나에게는 쪼그리고 앉은 몸을 지탱해 낼 기력조차도 없었다. 게다가 그의 욕조는 일반적인 사이즈보다 훨씬 넓어서, 양쪽으로 욕조의 가장자리를 잡고 버틸 수조차 없었다.

여러 번 엉덩방아를 찧으며 허탕을 치는 나를 지켜보던 그가 머리 위에서 혀를 차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못 한다니까.”

첨벙. 욕조 안으로 들어서는 그를 또 한 번 밀어낼 구실이 없었다. 섹스를 한 거로 이렇게 몸의 심이 빠진 것처럼 비실댄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것 같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몸 때문에 화가 났지만, 온몸을 녹여 낼 듯 길고 끈질겼던 애무와 그 시간을 보상받으려는 듯 과격하고 격렬했던 삽입과 노팅, 세 번의 사정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인 것 같기도 했다.

“고집 그만 부려요. 엉뚱한 데에 멍까지 만들겠어.”

초조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면서, 그가 내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두 팔이 곧바로 무릎 뒤로 들어왔다. 욕조 바닥에서 엉덩이가 살짝 뜨도록 나를 들어 올린 그의 가슴과 어깨가 등에 닿았다.

그와 동등할 정도로 침착하고 능숙한 모습은 바라지도 않으니까, 적어도 모자란 놈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은데, 그마저도 지나친 바람인 건지…. 뒤에서 들쳐 올린 힘에 의해 다리가 벌려진 스스로의 한심한 모습에 질끈 눈이 감겼다.

오므리지 못하도록 나의 오른쪽 다리를 자신의 세운 무릎에 걸어 둔 그가 아래를 더듬어 왔다.

“잘 빠질 수 있게 처음에는 좀 만질게요.”

“…….”

뭐라고 말하겠는가.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부어오른 입술을 깨문 채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흐읍, 흣.”

그러나 예민하게 곤두서 있는 안을 더듬거리는 손가락에 계속해서 침묵하기란 쉽지 않았다. 섹스의 열기가 가신 후에 뒤처리를 위해 애널 안을 만지는 행위는 섹스 중의 가장 음란했던 체위보다 더, 귀와 얼굴을 달아오르게 했다.

나의 곤혹을 알아챘는지, 그가 숙인 목덜미 위에 달래듯 입을 맞춰 왔다.

“으으으….”

살살살 내벽을 긁던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입구를 벌리자, 안에서 미끌미끌한 체액이 주르륵 쏟아져 나왔다. 소름 끼치는 감각이었다. 눈을 뜨자, 아무것도 풀지 않은 욕조 안에 부옇게 번져 나가는 정액의 흐름이 또렷했다. 이 무슨….

감당되지 않는 장면에 다시 한번 입술을 깨물었다. 뒤를 돌아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그의 시선이 구멍 안에서 새어 나와 물을 흐리는 탁한 번짐에 고정되어 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들은 분명 그의 정액인데도 꼭… 내 안에서 만들어진 분비물 같아서… 다른 존재가 돼 버린 듯 자신이 낯설기만 했다. 얼굴은 물론이고 그에게 드러나 있는 목덜미까지 붉어졌을 게 분명했다.

“보지 마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채 그가 낮게 웃었다.

“왜요, 아깝게. 보기 좋기만 한데.”

그러고는 뒷덜미를 꾹 누르듯 입을 맞춘 뒤 어깨선을 따라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조금씩 반복해서 힘을 줬다 풀어요.”

이렇게 다리를 벌리고 들린 자세에서 힘까지 주라니. 그러면 꼭… 하아….

그가 나의 사타구니를 가슴까지 들어 올려 내가 보는 앞에서 애널을 핥았을 때도 지금처럼 수치스럽지는 않았던 것 같다. 화끈거리는 얼굴이 터질 듯했지만,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의 지시에 따르는 것만이 최대한 빨리 해치워 버릴 수 있는 방법이었다. 선택권이 없었다.

나를 격려하듯 피부 위에 입술을 문지르며, 그는 검지와 중지를 이용해 애널의 입구를 양쪽으로 늘렸다. 분명 배출을 도우려는 행위일 텐데. 어깨에 닿은 그의 입술이 웃고 있는 것 같아서인지, 아니면 손가락이 은근하게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키는 것 같아서인지, 생각이 자꾸만 성적인 쪽으로 흘러갔다.

“벌써 많이 나왔네. 뭐든 이렇게 금방 잘해요?”

“…….”

그의 목소리에서는 웃음기가 약하게 묻어났지만, 여유가 없는 나는 앞서와 마찬가지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먼저 노팅을 졸라 그가 간신히 틀어쥐고 있었던 이성을 놓치게 만들 정도로 과감했으면서, 침대에서 내려오자마자 숙맥이 돼 버리는 자신이 스스로도 이상하긴 했지만, 이쪽이 더 익숙한 나였다.

“힘 빼고 좀 더 앉아 있어요.”

몸을 일으켜 나를 욕조의 가장자리에 기대앉게 한 그는 맞은편의 샤워 부스로 걸어갔다. 그리고 한 공간에 타인이 있음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빠르게 샤워를 마쳤다. 적어도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내가 과도하게 의식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서른둘이라는 나이와 그가 보여 주는 능숙하고 세련된 잠자리 매너들로 봤을 때, 그는 섹스가 끝난 후 매번 어색해하며 상대의 시선에 움츠러들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새삼, 모든 방면으로 나는 아직 경험이 부족하구나 싶었다. 그의 친절이나 나를 귀엽다는 듯이 쳐다보며 웃는 모습을 대할 때, 가끔은 그것이 그 역시도 나를 조금은 특별하게 보고 있다는 증명일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나와는 달리 차분하고 여유롭기만 한 모습을 볼 때면 또 그것은 나의 착각일 뿐 그저 그의 몸에 밴 매너 같기도 했다.

열 살 연상의 내면을 손에 쥐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 연상이 라우 위쿤일 때는 더욱 그랬다.

정액이 흘러나올 때는 탁했지만, 이제 희석되어 다시 투명해진 물속을 내려다보는 사이 그가 커다란 타월로 물기를 훔치고 욕실을 나섰다.

좀 더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켜 아직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로 대강 샤워를 하고 있자니, 그가 금방 다시 욕실로 되돌아왔다. 그러고는 걸터앉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턱에 앉히고 머리를 감겨 주었다.

“눈 감아요.”

얌전히 눈을 감자, 머리 위에서 따뜻한 물줄기가 쏟아져 샴푸의 거품을 씻어 내려갔다. 그가 커다란 손을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얽어 넣어 좀 더 꼼꼼히 거품을 헹궈 냈다.

이젠 일일이 의식하고 고집부리는 것도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물줄기가 거두어지고, 덩치만 커다란 어린애가 된 것 같은 기분에 피식 웃으며 눈가를 문지르자, 앞에 서 있던 그가 부드럽게 턱을 쥐고 고개를 들게 해 얼굴에 남아 있는 거품기까지 말끔히 씻어 주었다.

우리가 늘 이랬던 것처럼, 아니면, 그는 늘 이런 식으로 섹스 후의 시간을 보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욕실로 들어올 때 그랬던 것처럼, 다리를 다친 것도 아닌데 그에게 거의 안기다시피 부축을 받으며 다시 침실로 돌아갔다.

그 사이 시트가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깨끗한 새 시트 위에는 내가 갈아입을 속옷과 파자마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아무리 나는 삽입을 받아 낸 쪽이고 그는 이쪽만큼 몸에 무리가 간 것은 아니라 해도, 누가 체력을 더 많이 소비했는지를 따지자면 말할 것도 없이 그건 내가 아니었다. 골든 알파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개인적 능력인지는 몰라도 감탄할 만한 체력이었다. 지금도 그는 지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집에 내 사이즈밖에 없어서 좀, 클 겁니다.”

“네.”

허리 아래가 묵직하고 지끈거려 서 있는 것조차도 솔직히 좀 버거웠다. 침대 위에 앉아 옷을 입는 사이, 그 역시 속옷과 트레이닝팬츠를 걸쳤다. 여름이면 상의를 입지 않고 자는 게 습관인지 여전히 윗옷을 입지 않은 그는 옆에 서서 느리게 옷을 입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체적인 둘레도 그렇지만, 앞부분이 유난히 헐렁하게 남는 속옷이 민망했다. 같은 남자로서의 자존심, 그런 건 아니다. 애초에 골든 알파 남성과 베타 남성을 ‘같은 남자’로 묶는 것에는 무리가 있기도 했다. 신체적 능력이나 두뇌의 우수함 같은 유전적 우월함에 대해서는 과학적으로 밝혀진 게 없지만, 알파의 생식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만큼은 입증된 사실이었으니까.

“서이현 씨 사이즈로도 몇 벌 사 둬야겠네요.”

“…….”

몸을 돌려 냉장고 쪽으로 걸어가면서 그가 그렇게 말했다. 놀라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지만, 그는 이미 내 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허리를 숙여 생수를 한 통 꺼내는 그의 뒷모습에 눈을 고정한 채 파자마의 단추를 채우던 손이 멈췄다.

원하면 언제든 그를 가질 수 있다고 했던 관계 중의 속삭임이 겹쳐 떠올랐다. 내 사이즈의 속옷과 옷을 갖춰 두겠다는 건, 내가 다시 그를 찾게 될 것에 대한 확신일까. 아니면 그 역시 이 관계, 섹스를 지속시킬 의향이 있다는 표현일까. 나에게는 어렵기만 했다.

냉장고 앞에 선 채로 생수 한 병을 거의 다 비워 낸 그는, 새 생수병을 꺼내 뚜껑을 비틀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어색하게 시선을 끌어 내리며 다시 단추를 채우기 시작했다.

“아빠 속옷 입은 아이 같아서 그건….”

그렇게 말하며 생수병을 나에게 건넨 그의 시선이 헐렁한 속옷 위에 머물렀다. 자신의 성기 크기를 과시하며 나를 깎아내리는, 그런 뉘앙스는 아니었다. 오히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속옷 위를 내려다보는 눈빛에는 은밀한 끈적임이 섞여 있어서 저절로 다리가 움츠러들었다.

몇 모금 물을 마신 뒤 협탁 위에 내려놓고 앉은 자세 그대로 하의를 입는 동안, 그는 담배에 불을 붙여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그와 나 사이에 흰색 자기로 만들어진 심플한 재떨이가 놓였다.

“아까는… 지나가는 말처럼 얘기했지만.”

다리 없이 통으로 제작된 침대 프레임 위에 발을 올리고, 굽힌 무릎 위에 팔꿈치를 올린 그는 담배 연기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 뭐든 문제가 생기면 오늘처럼 나한테 오면 돼요. 그건 그냥 한 소리가 아닙니다.”

잠자리에서 분위기에 취해 던지는 말이 아닐까. ―그랬던 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 같은 설명이었다.

그는 소파 쪽을 향해 앉아 있었기 때문에 침대 헤드 쪽에 앉은 나는 그의 옆모습을 편하게 볼 수 있었다. 다음 한 모금을 조금 조급하게 빨아들인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듯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다른 사람한테 기대고 부탁하고… 그런 거 별로 내켜 하지 않는 사람인 건 알지만, 지금 그 나이에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힘이 없는 건 지극히 당연한 거고… 그런 부분을 더 어른인 사람들에게 의논하고 의지한다고 해서 나약하거나 의존적인 게 아니니까….”

그가 이만큼이나 나를 잘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뭘 걱정하는지, 무엇을 망설이는지. 말한 적 없는데도 훤히 알고 있었다. 열 살이라는 나이 차는 이렇게 대단한 것이었던가.

조숙한 척했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자신이 결국 어린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 자의식 강한 사춘기 소년처럼 머쓱했지만, 그 이상으로 그의 말이 고맙기도 했다.

어쩌면 나보다 강하고 지혜로운 누군가에게서 너무나 듣고 싶었던, 다시 정상 궤도를 회복하기 위해 너무나 필요했던 말인지도 몰랐다. 의논하고 의지해도 된다고. 그렇다고 해서 피해를 주거나 스스로를 의존적으로 만드는 건 아니라고…. 혼자서는 확신할 수가 없으니 믿을 수 있는 커다란 존재감의 누군가가 그렇게 말해 주기를, 그 무엇보다 기다려 왔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무언가에 눌린 듯 가슴이 갑갑했다.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 하는데, 복잡한 여러 감정들의 일렁거림으로 입을 열기가 쉽지 않아, 말을 할 듯 말 듯 입을 벙긋거리다 결국은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벽시계 하나 걸리지 않은 방 안에는 한참 동안 그가 담배를 피우는 호흡만이 조용히 이어졌다.

“그 그림을… <소외>를 좋아했냐고 지난번에 물었었죠.”

“…….”

시트 위의 어딘가를 향해 있던 시선이 저절로 끌어 올려졌다. 눈이 커지고, 맥박이 빨라졌다. 그 질문을 그가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부모님은 나 때문에 이혼했어요.”

그리고, 내 그림을 좋아했냐는 질문이 이런 방향의 이야기로 이어질 거라고도 생각 못 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깊이 묻어 두는 사람일 거라고, 내 안에서 그는 그렇게 정의되었었지만, 과거의 일부분을 고백하려 하는 그의 목소리는 책을 낭독하듯 높낮이 없이 담담했다.

“복잡한 문제라 설명하자면 너무 길고, 남에게 자세히 말할 내용도 아니라 적당히 생략해서 얘기하자면… 관계에 아무 문제가 없는데도 나를 지키기 위해 위장 이혼을 한 거죠. 사람들 눈을 피해 계속 교류해 오시긴 했지만, 그 상황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죄책감을 갖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우리 사이에 놓인 재떨이에 툭툭 재를 털면서, 그는 담배를 쥐지 않은 다른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누구도 나 때문이라고 말한 사람은 없었지만,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됐죠. 함께 있어야만 완성이 되는 세트를 부자연스럽게 갈라놓은 원인이 나라는 걸.”

건조했던 어조가 조금 흔들리는 듯했지만, 그는 곧 평정을, 균형을 되찾았다.

“사람들은 두 분을 그저 간단히 ‘이상적인 부부’라고 표현하곤 했지만, 두 분의 유일한 자녀인 내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느끼는 건 그 이상의 무언가였어요. 다툼이 없고, 오랜 결혼 생활을 유지하면서도 여전히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연인처럼 달콤하고, 둘만의 데이트를 즐기고… 단지 그런 정도의 관계성을 넘어선….”

일반적이지 않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적절한 단어를 고르느라 애를 먹는 그의 말에 불쑥 내가 끼어들었다.

“알 것 같아요.”

윗니로 아랫입술을 긁으며 뜸을 들이던 그가 나를 돌아봤다. 그의 손가락에 걸린 담배는 어느새 짤막해져 있었다.

네가 뭘 아냐고, 어떻게 아냐고. 그는 나에게 덤벼들지 않았다. 대신 놀란 듯이 나를 보던 경직된 얼굴을 느슨하게 무너뜨리며 피식 웃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상대가 ‘나름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을 관용하는 웃음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타인의 아픔에는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자신에 대해서는 손톱 밑에 박힌 가시 같은 정도의 상처조차도 쉽게 여겨지는 것을 노여워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가 보여 준 약간은 쓸쓸한 듯 체념이 섞인 부드러운 미소는, 그가 단지 주어진 환경의 힘으로 세상 위에 군림하며 모든 것을 간단히 이루어 온 왕자님만은 아님을 짐작하게 했다.

그러나 내 쪽에서는 결코 쉽게 던진 공감의 흉내가 아니었다.

그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나의 이해가 정확히 일치하는지, 거기에 대해 완벽히 확신할 수는 없어도, 사람들이 말하는 일반적 의미의 이상적 부부, 그 이상의 관계성을 공유한 커플을 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작품 세계와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정신에 대한 찬양자이자 예술적 동지였고, 어머니는 자신과 자신의 작품에 대한 완벽한 이해자인 아버지를 문자 그대로 소울메이트로 여겼어요. 어느 한쪽으로 조금도 치우치지 않은 완벽히 균형적인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특히나 예술가와 그 지지자의 관계는 예술가 쪽에 무게가 쏠리는 불평등한 관계라고 생각하지만, 두 분은 아니었죠.”

그는 필터까지 바짝 타들어 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단순히 이성인 상대에 대한 로맨틱한 감정이나 시간이 지나면서 쌓이는 정 같은 것에 의존한 관계가 아니었어요. 의식주의 해결을 통한 기본적인 생활의 영위, 그 이상의 의미를 삶에 심어 나가기 위해… 두 분에게는 서로가 반드시 필요했고, 그런 두 분이… 나 때문에… 억지로 찢어져야 했던 겁니다.”

청자인 나에게 자신의 감정에 대한 공감을 요구하는 면이 거의 없었다. 잠시 말을 멈추고 과거의 어떤 한 지점을 회상하듯 허공을 응시하는 그는 자신의 감정을 오로지 스스로가 감당하도록 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그저 이야기로서, 하나의 정보로서 들려줄 뿐이다.

내가 이렇게 힘들었다고, 이렇게 괴로웠다고. 감정에 취해 상대를 자신의 불행에 대한 관객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추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거리 두기가 ‘일반적 의미’의 성숙함이라는 데에 동의하고, 나 역시도 자신을 허물어 내보이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인간이면서도, 가장 연약한 부분을 공개하고 끓어올라 자신의 감정을 나에게 강요하는 그를 보고 싶다는, 그런 욕심이 불쑥 치솟기도 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 그건 욕심이었다.

한참 생각에 집중하고 있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위에 놓인 담뱃갑과 라이터를 가지고 자리로 돌아왔다. 새 담배에 불을 붙인 후 능숙한 동작으로 연기를 뱉으며 입을 열었다.

“자라는 동안 여러 번 자문해야 했죠. 과연 나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서.”

대신 답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물론 나에게는 그 답에 대한 발언권이 없었다. 그가 답을 찾는 상대도 내가 아니었다.

“이상하죠. 그분들은 나를 위해 가장 소중한 관계까지 희생했는데, 왜 나는 사랑으로 충만한 인간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게 됐는지. 죄책감을 가지라고 그런 결정을 하신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두 분을 대하는 내 감정은 감사함보다는 죄송함이 더 컸고… 내가 온전히 행복하지 않으면 두 분의 프로젝트는 실패가 돼 버린다는 걸 알고 있으니 죄책감이 더 불어나는… 뭐, 그런 악순환 속에서 성장기를 보낸 겁니다.”

마지막 문장을 일부러 가벼운 어조로 처리하며 그는 담배를 한 모금 짧게 빨아들였다. 반 정도 태운 담배를 재떨이에 걸쳐 둔 채 무릎 위에 팔을 걸치고 두 손을 헐겁게 맞잡고는 두둑, 두둑, 손가락의 관절을 하나씩 소리 나게 꺾은 그가 슬쩍 내 쪽을 돌아보며 웃었다.

“그래서 그 그림을 본 순간, 의심했었어요. 뭐야, 이거? 내가 이런 걸 그린 적이 있었나?”

하지만 나는 마주 웃는 것은 물론이고 미동조차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을 이루고 있는 세포 중 하나에 대해,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궁금한 비밀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고, <소외>를 언급함으로써 그 세포가 이제 나와 연결되려 하고 있었으니까.

일반적이지 않은 이유로 그가 가져야 했던 소외감.

이상적으로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과 그 부모님이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결정한 희생. 그 울타리 안에서 ‘반드시’ 행복해야 하는 아이.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나의 이야기와 상당히 유사하다고 생각하더라도, 어떻게든 그와의 공통점을 만들고 싶은 초조함이 빚어낸 억지스러운 착각은 아닐 것 같았다.

그가 담배를 다시 손에 쥐었다.

“그만큼 공감했단 얘기예요. 내가 아버지 어머니에게, 아니면 세상을 향해 악을 쓰면서 소리치고 싶었던 말들이… 그 안에 그대로 있었으니까. 작가가 뭘 말하고 싶은 건지, 그냥 바로 알 수 있었죠.”

자기가 그림을 맞게 본 건지, 확인을 요구하듯이 그는 나를 쳐다봤지만, 내 그림에 대한 타인의 해석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거기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그렇다고 느꼈다면, 그리고 그것이 아주 강한 확신이었다면, 그에게는 그런 그림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걸로 충분한 게 아닐까. 막연히 짐작해 볼 뿐이었다.

“서로 너무나 사랑하는 훌륭한 재능을 가진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나 희생적인 사랑을 받으며 자랐으니 당연히 행복해야 한다고. 모두가 그렇게 말하는데, 왜 나는 그러지 못할까. 행복해하지 않는 내가 이상한 거냐고. 나중엔 나에게 행복을 강요하는 사람들에게 화가 나더군요.”

행복에 대한 강요. 그것도 그린 듯한, 동화책이나 할리우드식 가족 영화의 엔딩 같은 완벽한 행복에 대한 주변의 강요. 그것에 대한 갑갑함이라면 나 역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소외>를 그렸을 무렵, 친구들은 모두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만을 추구하고 있었다. 방임주의 부모를 둔 친구는 부모에게서 살뜰한 관심을 받는 친구를 부러워했고, 반대로 관심이 많은 부모를 둔 친구는 그것을 간섭이라 느끼며 자유를 부러워했다. 그런 나이였다.

내가 <소외>를 그린 것은 사람들의 생각처럼 처절한 응어리 때문이 아니다.

나는 부모님을 사랑했고, 행복했다. 자신들이 갖지 못한 것을 내가 가졌다는 지극히 상대적인 이유만으로 누군가들이 나에게 강요한 것처럼, 흠 없이 완전한 행복이 아니었을 뿐이다.

그들은 이미 감사하고 이미 행복한 나에게, 불퉁한 얼굴로 말했었다. 너는 더 감사하고, 더 행복해해야 한다고.

그와 내가 쏟아 놓은 열기가 채 식지 않아 방 안의 공기는 여전히 훈훈했지만, 나는 문득 추위를 느끼는 사람처럼 파자마를 입은 팔을 느리게 쓸어내렸다.

한 모금 연기를 더 빨아들인 그는 담배를 쥔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삐딱하게 기울인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그런데 그 그림은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죠. ―너만 이상한 거 아니야. 나도 이상해.”

누구를 흉내 내는 건지 알 수 없는 그의 연극조의 익살에 그때까지 침도 한 번 삼키지 못하고 굳어 있었던 나는 어깨에 힘을 빼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잦아드는 웃음 속에서 수키킴 선생님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소외>가 그에게는 위로였다는 이야기.

컬렉터로서 혹은 딜러로서 나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서만이 아니라… 그 자신이 내 그림에서 개인적 공감을 느꼈기 때문에 그의 거실에 <소외>가 걸릴 수 있었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나는 그의 입을 통해 분명하게 전해 듣고 있었다.

그가 지니고 살아와야 했던 소외의 적어도 일부분이 내 그림과 함께였다는 사실이… 전에는 느껴 본 적 없었던 특별한 감흥을 일으켰다. 믿어 줄지 모르겠지만, 좀 전까지 그와 나누었던 섹스보다 더 매혹적인 감정이었다.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그래서 난 서이현 씨가 다시 그림을 그렸으면 합니다. 그 작가의 차기작이 보고 싶거든요.”

“…….”

그의 눈이 나를 보며 말한다. 내가 그린 그림을 보고 싶다고.

나의 알몸을 보고 싶다고 말하더라도 이보다 더 혼이 떨릴 수는 없을 것이다.

“서이현 씨 질문은 간략했는데, 대답이 좀… 많이 길었죠?”

길게 꺼내 놓은 자신의 이야기가 뒤늦게 민망했는지, 살짝 쓰게 웃으며 그가 눈을 비볐다. 이제야 조금은 피곤한 건가 싶었다. 왜 피곤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몇 시간이나… 작지도 않은 나를 끌어안고 힘을 쏟았는데.

“저도, 한 개비 주시겠어요?”

“…….”

말없이 나를 보던 그는 침묵 끝에 별다른 반응 없이 담배를 건넸다. 담배만 주고 라이터를 주지 않아 쳐다보자, 그는 입에 물라는 듯 턱짓을 했다. 어설픈 동작으로 필터를 물었고, 그가 라이터의 불꽃을 담배 끝으로 가져다 댔다.

움찔거리며 잠시 몸을 뒤로 뺐다가, 불꽃 너머로 그의 눈을 마주 보며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 역시 불을 붙여 주는 동안 내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홍콩에서 그의 룸에 남아 피웠던 담배만큼 몸에서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기침이 나지도 않았고, 목구멍과 폐가 죄어드는 칼칼함도 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정도의 아픔은 지금의 내게 필요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내가 삼킬 수 있는 연기는 여전히 절반도 되지 않았다. 나머지 절반의 연기가 허공을 향해 느리게 번져 나갔다. 우습게도, 좀 아까 내 몸에서 흘러나와 욕조의 물을 흐리던 체액의 번짐과 닮았다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시선을 먼저 피한 것은 나였다.

“수키킴 선생님은… 대표님의 어머니, 이신 거죠?”

그가 더 이상은 그 사실을 딱히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기에 확인차 던진 질문이었다.

담배를 피우는 나를 신기한 듯 빤히 관찰하던 그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신체 일부처럼 능숙하게 담배를 다루어 연기를 빨아들였다.

“맞아요. 뭐든 부모덕이라는 질투도 싫지만, 아첨도 싫기는 마찬가지라 굳이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어머니가 한국 핏줄이라도 그는 홍콩 출신이었고, 그렇다고 가까운 가족 중 누군가가 한국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연고가 없는 서울에서 갤러리를 시작한 이유를, 앞서 그가 해 주었던 이야기들과 연관 지어 막연하게나마 알 것도 같았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나를 구성한 모든 것들이 이미 배경으로 인한 혜택인데, 이제 와서 영향력의 혜택은 사양하겠다고 해 봤자… 어린애 같은 오기일 뿐이라, 솔직히 이런 얘기 하는 것조차도 부끄럽지만.”

반쯤은 혼잣말처럼 그렇게 얘기한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필터를 물었다.

“자수성가라는 타이틀까지 쥐고 싶었던 왕자님의 얄팍한 쇼라며 수군거릴 게 뻔하니까. 그게 혹시 어느 정도 사실이더라도, 결코 전부인 것도 아닌데… 타인의 삶을 단순화시켜 평가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지겨웠으니까.”

거기까지 얘기한 그는 계획한 것보다 속내를 너무 많이 꺼내 놓았는지, 낭패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곧 입을 막듯 담배를 빨아들였다.

현재의 자신을 유지하는 궤도의 관성에 맞서 보고자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본래의 자리에서 아주 조금 비켜나고자 하는 데에도, 하다못해 습관 하나를 새로 만들거나 바꾸는 데에도, 온 힘을 다한 노력이 필요하니까. 그러니 자신을 통해 새로운 실험을 해 보고자 하는 모든 의도는 가볍게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고.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말들이 떠다니는데, 그중 어떤 것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겉치레 같은 공감으로 비치지는 않을까. 관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던 비겁한 내가 그런 말을 해 봤자 진정성이 느껴지기는 할까. 그런 두려움이 혀를 굳어 버리게 했다.

“아, 어머니 얘기, 애들은 몰라요. 한 실장은 알고 있지만.”

의외의 발언이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을 뿐, 누나와 형에게 딱히 비밀로 하려고 했던 건 아닐지도 모른다. 그는 묻지도 않은 자신의 얘기에 대해 먼저 떠벌리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입단속을 해 달라며 나에게 따로 부탁을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를 보며 멋쩍게 웃는 그의 얼굴은 비밀로 해 달라는 메시지를 전해 오고 있었다.

누나와 형에게도 밝히지 않은 이야기를 나에게 털어놓았다는, 그런 상대적 우월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림을 그리도록 설득하기 위해 수키킴이라는 결정적 패를 나에게 내보였을 때, 아마도 그는 내가 모자 관계를 알게 되리라는 것까지 각오했을 것이다.

출신과 배경을 떠나 그저 라우 위쿤이고 싶었을 그의 고민을 고려하면, 상당히 파격적인 선택으로 느껴졌다. 의외라고 느낀 건 그 때문이었다.

보이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일부를 나에게 공개하게 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나에게 붓을 쥐게 하려 했다는 것.

단지 딜러나 컬렉터로서 화가를 발굴하려는 비즈니스 마인드 때문만이 아니라, 그 자신이 오랜 시간 곁에 두고 공명하고 위로받았던 그림을 그린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리지 않는 나는 개별성을 잃고 보편성 속에 매몰된 무채색 먼지처럼 떠돌게 될 뿐임을 그는 알고 있었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나를 알아 온 사람처럼.

첫 모금을 빨아들인 뒤 손가락 사이에 걸고 있기만 했던 담배를, 홀린 듯 천천히 입술로 가져갔다.

등 뒤로 매트리스 위에 손을 짚고 느슨하게 상체를 젖히고 있던 그가 나를 바라보며 같은 타이밍에 담배를 입에 물었다. 각자 자신의 담배를 피울 뿐인데, 나를 향한 그의 눈빛이나 분위기 때문인지, 담배를 통해 그의 입술과 혀를 느끼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육체적으로 그와 교감하고 있는 듯 알싸한 달콤함에 피부가 저릿했다.

향기가 감돈다. 섹스 중이었을 때처럼 호흡을 틀어막는 것 같은 강렬함이 아닌, 은근한 나른함으로.

느린 호흡으로 길게 연기를 뱉어 낸 그가 조용히 이야기했다.

“전에 슈슈 작품 앞에서 그랬죠. 그림이 그리고 싶어진다고.”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그때의 그는, 나에게 거의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기 때문에,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까지 그 대화를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

“그려요.”

간결한 핵심이었다. 거창한 근거나 설득을 모두 걷어 내고, 그가 나에게 전하고 싶은 마지막의 알맹이는 그것이었다.

“무엇이 서이현 씨를 더는 그리지 못하게 만들었는지, 그건 모르지만… 당신 같은 사람이… 다시 걷고 뛰고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는 것뿐이니까, 죽기 살기로… 자기 언어를 되찾는 것만 생각해요.”

입맛이 없더라도 자기 자신을 위해 먹으라고 했던 지난번처럼, 죽기 살기로 그리라는 그의 말이 어떤 노래의 인상적인 한 구간처럼 마음을 사로잡았다.

알아 갈수록 그는, 자신의 사업이나 ‘팬텀’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을 위해 붓을 잡게 하려는 사람 같았다. 그의 말들이, 나를 보는 진지한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가 그림을 경제적 가치로만 보는 척한다고 했던 수키킴 선생님의 말은, 바꿔 말하자면 그가 결코 그림을 경제적 가치만으로 저울질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과 마찬가지였다.

작가들 각각의 고유성과 그들이 창작해 낸 작품 자체를, 순수한 예술적 감수성으로 대할 수밖에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마케팅 없이 작품의 가치만으로 충분하게 인정받는 것은 어렵다고, 홍보를 위해 가장 세속적인 매체들과도 서슴없이 손을 잡지만, 그것이 그림과 작가를 대하는 그의 태도의 전부는 아니었다.

지나치게 그를 감싸려는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그런 사업가적인 태도로 그림에 대한 자신의 순수한 애정을 억누르려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두 모금밖에 피우지 않았지만 벌써 길어진 재를 재떨이에 털어 내며 용기를 끌어내 그에게 물었다.

“제가 그림으로 말하는 사람이라고… 어떻게 작품 하나만으로 그렇게 확신하세요?”

나를 빤히 보던 그가 시선을 피하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여러 번 되풀이해 쓸어 올렸다. 얼굴에 떠오른 희미한 미소는 비밀을 얘기하려는 소년처럼 수줍어 보였다.

손에 쥔, 어느새 짤막하게 타들어 간 담배를 내려다보며 그가 말했다.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이 집엔 그림이 거의 걸려 있지 않아요. 하지만 <소외>만큼은 서울에 오기 전부터 계속 집에 걸어 뒀었죠. 그렇게 매일 그 그림을 쳐다보면서 함께 살아온 게 5년입니다. 그림의 주제나 구성뿐만 아니라 붓의 터치와 질감까지…. 영화로 치자면 모든 등장인물의 대사를 전부 외울 정도로, 아마 지금은 서이현 씨보다 내가 더 그 그림에 대해 잘 알고 있을걸요.”

몸의 안쪽부터 열이 올라 얼굴이 붉어지는 기분이었다.

슈슈 작가에 대한 그의 서평을 읽었을 때, 작가로서의 슈슈의 역량에 대한 높은 평가와 그 자신에게 슈슈의 작품이 끼치는 개인적 영향력에 대한 이야기들이 열렬한 고백 같다고 느꼈었지만, 이건, 이건 더….

문득 그가 고개를 기울여 나를 돌아봤고, 반대로 나는 그를 피해 시선을 떨어뜨렸다. 도피하듯 담배를 입술로 가져가 빨아들였다.

“그러니 <소외>의 작가가 그려야만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모를 수가 없죠.”

그러나 나와 나의 그림에 대해 얘기하는 그의 표정에 대한 궁금증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연기를 내쉬며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눈은 섹스 중에 보이는 그것과는 다른 열기를 띠고 있었다.

허세와 거짓, 탐색과 자기 보호를 모두 걷어 낸 진지함, 웃음으로 넘겨 버릴 수 없도록 내면을 전부 드러낸 솔직함.

“나는 그림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리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에게서 태어났거든요. 유전자? 그거 무시 못 해요.”

그는 농담을 하며 웃어 보였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마음속에서 뭔가가 죽어 버려서, 그래서 더는 그릴 수 없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느 날, 더는 그리지 않아서 내가 죽은 것일 수도 있겠다… 싶더라구요.」

죽기 살기로 그리라는 그의 말은 수키킴 선생님의 얘기와도 상통하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과연 유전자의 힘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림과 그림 아닌 것 사이에 우선순위를 정하고, 그림보다 더 중요한 것을 위해서라면 잠시 그림을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에 2년 정도 그림을 손에서 놓았을 때가 있다던 선생님의 말씀도, 녹음을 해 두고 매일 들어 온 것처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2년이라는 시간이 그를 지키기 위해 위장 이혼을 해야만 했던 과정과 연관된 것이 아니었을까 싶었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었다.

나 역시 무엇 때문에 더는 그리지 않게 되었는지 얘기하지 못하는 것처럼, 무엇이 그의 가장 약한 부분인지 물을 수 없었다.

담배를 피우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그가 손을 뻗어 입술 표면을 더듬었다. 자신과의 짙은 키스로 예민하게 부어오른 입술을.

희미한 빛 속에서 평소보다 옅어 보이는 그의 눈동자가 나의 얼굴을 꼼꼼하게 더듬어 나갔다. 가끔씩 이런 방식으로 바라볼 때가 있었다. 그에게 호감을 가진 입장에서 편안하게 마주하기는 버거운 시선이었다. 버릇이라면 고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괜한 오해를 사서 치정 싸움 같은 것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면 더욱.

“아팠습니까.”

“…….”

입술을 만지고 있었으니 입술에 대한 질문인지, 아니면 노팅이 이루어진 내부에 대한 질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전체적인 섹스에 대해서인지, 범위가 모호했다. 하지만 그중 어떤 것에 대한 질문이든 내가 되돌려 줄 답은 어차피 같았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랫입술을 살짝 뒤집듯 아래로 끌어 내리다 손을 거둬들인 후에도 그는 오랫동안 나를 응시했다. 먼 길을 떠나기 전에 기억해 두고 싶은 얼굴을 눈에 담는 의식 같았다.

눈빛과 표정은 이야기를 할 때보다 더 차분했지만, 그에게서 새어 나오는 분위기의 일렁거리는 파장은 동요를 전하고 있었다.

막연히,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나에 대해 고백하는 것으로 그에 대해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이 이득을 보는 거래처럼 느껴졌다.

누군가를 이만큼이나 알고 싶었던 적이 있던가. 그것도 상대의 가장 내밀하고 음습한 곳에 갇혀 있는, 가장 사적이고 잔인한 상처에 대해서.

나에게 동요를 들킨 것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그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쥐었다.

“아주 긴 하루였을 텐데 그만 자요. 난 사실 가 봐야 할 곳이 있어서… 조금 후에 준비하고 나가 봐야 하지만, 신경 쓰지 말고 자고 싶은 만큼 푹 자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는 이불을 덮을 수 있도록 준비해 주었다. 이제야 피로가 몰려오는지, 그러는 동안 여러 번 손목 안쪽으로 눈두덩 위를 꾹꾹 눌렀다.

아침 일찍 가 봐야 할 곳이 있는 사람과 그렇게 격렬하게 얽혀 있었다는 게 미안했지만, 이제 와서 섹스를 하자고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것도 상황에 어울리지는 않았다.

어느새 창밖은 꽤 진한 보랏빛으로 밝아 오고 있었다. 아직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한밤중에 그랬던 것보다는 한풀 꺾여 있었다.

조금도 눈을 붙일 시간이 없는 건지, 암막 커튼을 한 겹 더 쳐 주는 그를 향해 미안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그는 괜찮다는 듯 웃으며 다가와 어서 누우라고 어깨를 가볍게 누를 뿐이었다.

“핸드폰은 여기에 가져다 둘게요. 전화할 테니까 졸리더라도 잘 받아요.”

아마도 부탁한 일의 진행에 대해 얘기하기 위한 연락을 말하는 것일 텐데, 그런데도 전화를 잘 받으라는 그의 말이 연인 간의 사소한 약속처럼 들려서… 잠시나마 달콤했고, 그보다 더 겁이 났다.

연애니 사랑이니, 그런 것을 문제없이 해 나갈 수 있을 정도로 지금의 나는 상황적으로도 내면적으로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준비가 되지 않았느니 어쩌느니… 자신의 김칫국이 씁쓸하고 우스워, 이불을 입술까지 끌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문 앞에서 큰아버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부터 그토록 큰 공포심 속에 벌벌 떨었던 게 고작 몇 시간 전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가 괜찮다고 하면 모든 것이 정말 괜찮을 것 같았다.

그건 어쩌면, 실제로 일을 해결했는가 아닌가 하는 것만큼이나 대단한 능력이라고. 그런 생각을 하며 가물거리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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