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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방문객 (12/31)

   6. 방문객

페어 마지막 날까지 관람객 수가 줄어들 줄을 몰랐다. 아니, 마지막 날 가장 많은 관람객이 몰린 듯했다.

그동안에는 나까지 고객 응대를 할 필요가 거의 없었지만, 마지막 날에는 간단한 안내 정도는 도와야 했고, 판매량도 마지막 날이 가장 높았다. 작품 가격이 한두 푼이 아니다 보니, 일반 관람객 중에는 페어 내내 꼼꼼히 비교해 보고 마지막 날 마음을 정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팬텀의 페어 성적은 훌륭했다.

목표치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다른 멤버들이 워낙 진취적 성향의 사람들이라 목표를 높게 설정했을 뿐 충분히 대단한 결과였고, 이상적으로는 조금 아쉬워한 멤버들도 현실적으로는 만족하는 것 같았다.

클로징까지 대여섯 시간을 앞둔 상태에서, 총 120여 점의 작품 중, 시카고 갤러리와 전시 계약을 한 슈슈 작가의 작품을 제외하면 열 점 정도를 남기고 판매가 완료된 상태였다.

“피곤해서 그래?”

낡은 스포츠 시계를 자꾸 확인하는 나에게 누나가 슬쩍 다가와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빨리 끝났으면 해서 시간을 확인하는 거로 보인 것 같아, 멋쩍게 웃으며 뒷목을 쓸었다.

“아니요.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누나는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지만, 자세히 묻지는 않았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열 점의 작품 중 하나에 관심을 보이는 관람객이 등장해, 누나는 재빨리 프로다운 미소를 지으며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기다리던 대상은, 페어 이틀째 되던 날 우리 부스로 찾아왔던 가족 관람객이었다.

아버지는 동북아인, 어머니는 라틴계의 피가 살짝 섞인 듯한 서양인으로, 네 명의 자녀를 둔 제법 규모가 큰 가족이었다. 가장 큰 아들이 나와 비슷한 정도에, 막내는 이제 열 살 안팎으로 보였다. 자녀 간에 나이 차가 크고 개성도 제각각이었던 그들은 편안한 차림새와 달리 평론가만큼이나 진지한 얼굴로 우리 부스를 방문했었다.

작품을 살펴보는 표정들이 워낙 심각해서 처음엔 가족이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가족이 아니라면 인종과 나이를 초월한 그 독특한 조합은 설명이 되지 않았다.

「우리 거실에 새로 걸 그림을 찾고 있어요.」

작품을 둘러보는 그들의 뒤쪽에 서서 대기하고 있던 나를 돌아보며 그렇게 말한 것은 가족의 막내였다. 엄마를 닮은 곱슬머리와 불그스름한 뺨, 아빠를 닮은 까만 눈이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서툰 영어 실력이 걱정스러웠지만, 누나와 형이 모두 응대 중이라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색하게 굳은 미소일 게 분명했지만, 그래도 애써 웃어 보이며 가까이 다가갔다.

「이번 가을에 내가 열한 살이 되거든요. 기념으로 거실의 그림을 바꿀 거예요.」

「그래? 멋지네. 생일 미리 축하해.」

생일 축하한다는 말만으로도 아이는 화려한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이 그림도 후보예요.」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아이가 가리킨 것은 인우 형의 작품이었다. 이번 페어에 가지고 온 유일한 형의 작품이었다.

「지금까진 이게 일등이에요.」

인우 형의 작품은 언뜻 만화를 연상시키는 단순하고 명쾌한 형태감을 가졌지만, 색감도 어둡고 무거운 데다, 분리와 해체의 기법으로 기괴한 느낌을 주는 부분이 있어, 어린아이에게 선택받을 만한 화풍은 아니었다.

「이 그림, 어떤 면이 마음에 드는지 물어봐도 될까?」

「저도 비밀이 있거든요. 말하기 싫은데 가족들이 자꾸 캐물어서 스트레스받을 때, 그럴 때의 내 마음 같아서 뭔가 통했어요.」

아이의 명쾌한 답변에 형의 작품을 한 번 더 돌아보게 됐다. 작품 속의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만화체의 인물은 확실히 원치 않은 관심과 강요에 고통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그 고통이 별것 아닌 것처럼 희화화되어 있을 뿐.

끝까지 파고들어 고통의 맨 얼굴을 공개하는 것도 예술이겠지만, 그럴 용기가 없는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고백도 예술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인우 형의 작품을 싫어하지 않았다.

‘뭔가 통했다’는 아이의 표현대로, 나 역시 이 작품을 통해 아이와 통한 것 같아 공감의 뜻으로 웃어 보였다.

「열 살이라도 비밀은 있거든요.」

아이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 가족들을 돌아보며 힘주어 그렇게 말했고, 가족들은 그런 아이가 귀여워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크게 웃었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나도 공감되는데? 꼭 이 작품이 뽑혔으면 좋겠다.」

청소년기 이상의 아이들은 여가 시간에 대해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어, 여섯 명이나 되는 가족이 모두 같은 날 시간을 맞춰 이런 행사장을 함께 방문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가족의 공간인 거실을 장식할 그림을 함께 결정하기 위해 모두 모여 진지한 태도로 의논을 한다는 자체가 가벼운 충격이었다.

아니, 충격이라기보다는, 지금껏 고려해 본 적 없었던 미술의 영역―그림을 보는 사람들, 그림을 구입해 즐기는 사람들의 입장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화가인 적도 없었고, 구체적으로 화가를 꿈꾸기도 전에 그리기를 중단했기에, 내 그림을 다른 누군가가 소장한다는 개념을 숙고해 본 적이 없었다. 과거의 나에게 그림은 ‘내가 그린다’는 자기표현에 집중된 행위였다.

하지만 그날, 그 가족을 통해, 만약 내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팬텀의 소속 화가가 된다면, 내 그림이 타인의 소유가 될 수 있다는, 내 그림에 자신만의 의미를 재부여하고, 자신의 일상적인 공간에 내 그림을 들여 생활 속에 그것을 녹여 내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수도 있다는, 구체적인 상황과 의미를 그려 볼 수 있었다.

문득 그것이야말로 그림이 죽지 않고 살아 있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느껴졌었다.

“그 사이에 누가 계약했으면 어쩔 뻔했어.”

“안 팔렸으니까 됐잖아. 난 정말 제시간에 출발했다고.”

가족 사이에 오갈 수 있는 흔한 툴툴거림에,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다리고 있던 손님들이었다.

첫째와 둘째로 보이는 형제의 투닥거림과 함께 팬텀을 다시 찾은 가족은 결국 인우 형의 작품을 구입했고, 배달을 신청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작품을 직접 가지고 갔다.

작품을 소중하게 옆구리에 끼고 북적이는 관람객들 사이로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인우 형이 부러웠다.

어떤 작가에게는 명예나 경제적 성공이 더 우선시될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그림을 제대로 이해해 주는 사람에게 선택된다면, 대부분의 작가에게는 그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 아닐까. 그런 건방진 짐작이, 스스로 무뎌지게 만들고 방치해 두었던 우둔한 가슴의 껍질을 두드려 댔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백팩을 메고 찾아와 작품 앞에서 엉뚱한 해석을 붙여 가며 즐겁게 웃던 10대 청소년들과 산책하듯 행사장 안을 돌아보며 데이트를 즐기던 커플, 다정해 보이는 부모와 자녀, 상당한 안목과 지식으로 작품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나이 지긋한 부부까지….

미술 업계 종사자들뿐 아니라, 다양한 일반 관람객들이 자유롭게 미술을 즐기고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 자체에 페어 기간 내내 강한 인상을 받았다.

감탄과 경외의 대상으로 엄숙하게 감상되는 것이 아닌, 그런 보통 사람들의 소파 위에서, 현관에서, 침대 머리맡에서, 그들의 평범한 일상과 특별한 날을 공유하게 되는, 그렇게 해서 삶과 함께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이전의 그림이 내게 갖던 의미와는 또 다른, 새로운 시대가 열릴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이 너무 거창한 표현이라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 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림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힘이 아직 나에게 남아 있는지, 그것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삶의 일부가 되어, 단지 ‘내가 그린 그림’만으로서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그림’으로 재탄생할 수 있는 그림의 가능성에 대한 생각이 둔해진 가슴을 끌과 망치로 갈아 내고 때리는 것 같았다. 명백한 설렘이었다.

이것이 그가 계획하고 의도한 작전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골든 알파 라우 위쿤이라도, 이러이러한 가족이 우리 부스를 방문해 이러이러한 에피소드를 연출하게 될 상황까지 예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저마다의 방식으로 미술을 자유롭게 즐기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 내가 받게 될 충격과 자극을 노린 것이라면… 이번 출장에 나를 동행시킨 그의 작전의 효과를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 ■ ■

“그런 일이 있었어? 뭔가 통한다니. 그 꼬맹이 보통이 아니네. 커서 뭐가 돼도 될 인물이야.”

마시던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인우 형이 유쾌한 얼굴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우 형뿐만 아니라 모두가 처음 듣는 얘기라 그런지, 의도와 다르게 다들 식사까지 멈추고 나를 주목하고 있었다.

“형제끼리 나이 차가 많이 나서 되게 귀엽구나 싶긴 했는데. 그런 얘기가 있는지 몰랐네. 알고 보니까 더 귀엽잖아?”

그 가족의 계산을 처리했었던 유니 누나도, 어떤 가족인지 기억이 난다며 흐뭇하게 웃었다.

“유명 컬렉터나 갤러리에 판매된 게 아니라서 출세에 도움은 별로 안 되겠지만, 훈훈한 스토리긴 하네.”

그가 긴 젓가락으로 양고기를 집어 홍탕에 담가 흔들면서 그렇게 말했고, 인우 형이 곧바로 눈을 가늘게 떴다.

시선을 눈치챈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왜. 뭐가. 훈훈한 스토리 맞다고. 누가 아니래?”

“아, 네. 딜러의 입장에서 시카고 대형 갤러리와 전시 계약을 따낸 슈슈 같은 작가와 비교하면 저야 ‘별 도움도 안 되는’ 떨거지겠죠.”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괜한 비하하지 마.”

자신의 작품이 판매된 스토리를 알면 인우 형도 기뻐하지 않을까, 단순한 생각에 꺼낸 얘기였는데 분위기가 점점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조갯살을 집으려 했던 젓가락을 입에 한 번 물었다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본 뒤 조용히 내려놓았다.

“별것도 아닌 거로 왜 또 싸우고 난리야. 밥 잘 먹다가.”

내가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것을 알아챈 실장님이 중재에 나섰지만, 핑퐁 같은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지 안 하는지 네가 어떻게 아냐?”

“애초에 너하고 슈슈는 작품을 대하는 무게감 자체가 달라. 넌 거기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고, 딱 자신이 투자한 노력이나 열정만큼의 결과만 기대하지. 슈슈가 아니라 누구와 비교해서도 자기 작품을 비하할 생각도 없고, 그렇다고 더 진지하게 뛰어들 생각도 없어. 적당한 노력에 따르는 적당한 결과. 거기에 만족하고 있으면서 뭘 그래.”

또 한 점의 양고기를 홍탕 속에 저어 익히면서, 그는 여유롭게, 막힘도 없이 이야기했다.

“흠. 역시 그림 팔아서 먹고사는 놈의 눈을 속일 순 없군.”

진지하게 농담을 하는 인우 형의 반응에 그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다 익은 고기를 소스에 찍어 입에 넣었다.

두 사람은 원래 톰과 제리처럼 저런 식이니까 내버려 두고 밥이나 더 먹으라며 누나가 귀띔해 주지 않았다면, 진짜 감정이 섞인 신경전이라고 받아들였을 것 같았다. 괜한 말을 꺼냈다는 자책과 함께.

홍콩 출장 뒤에 맞은 첫 금요일이었고, 그사이 밀려 있었던 업무를 처리하느라 이제야 늦은 뒤풀이를 하는 자리였다.

먹고 싶은 곳을 예약하라는 그의 말에, 누나는 훠궈와 딤섬을 전문으로 하는 중국 음식점을 선택했다. 딤섬은 홍콩에서 먹어 봤지만, 훠궈는 처음이었다.

사골국처럼 뽀얀 버섯탕과 지옥의 불구덩이 같은 홍탕으로 반씩 나눠진 냄비가 식탁 위에 올려지자마자, 주한이 형에게 소식을 듣고 왔다며, 인우 형이 개별실의 문을 열고 불쑥 나타났었다. 그때부터 왠지 그의 기분이 저조해 보여 신경이 쓰였다.

“시카고 갈 거면 하반기엔 합동 전시회 어렵겠네?”

처음으로 젓가락을 집어 들면서 인우 형이 드디어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관심을 보인 것은 배를 채울 수 있는 고기나 해산물류가 아닌 흐물흐물해진 익힌 배추였다.

“예정대로 진행할 거야.”

이번엔 그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종이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 내며 말했다.

“어떻게? 너하고 한 실장이 자리 비울 텐데 그게 가능해?”

부글부글 끓는 탕을 따라 냄비 안을 떠도는 피시볼을 건져 올리던 인우 형의 말에, 주한이 형과 유니 누나가 젓가락질을 멈추고 동시에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아니, 베이비들, 왜 그렇게 무섭게 보냐. 니들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책임자 한 명 없이 진행하려면 아무리 우수한 니들이라도 벅찰 거 아니야. 그리고 여태까지 그런 식으로 진행한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았어? 난 그 얘기를 하는 거지.”

답지 않게 열심히 변명하는 인우 형의 모습에 슬며시 웃음이 났다.

“한 실장은 남을 거야.”

“…….”

그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선언에, 룸 안이 잠잠해졌다. 반으로 나뉜 훠궈 냄비가 끓는 소리와 개별실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낮은 볼륨의 소음뿐이었다.

모두의 의아한 시선이 이번엔 실장님을 향했지만, 정작 실장님은 즐거운 표정으로 양고기에 팽이버섯을 말고 있었다. 이미 두 분이 상의 끝에 내린 결론인 듯했다.

식사를 완전히 끝낸 건지, 물을 마시고 잔을 내려놓으며 그가 덧붙였다.

“시카고는 백유니하고 갈 거거든.”

으아아아악!

비명에 가까운 괴성과 함께 누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균형을 잃고 덜컹거려 옆자리의 내가 얼른 등받이를 붙잡았다. 젓가락을 식탁 위에 내던지다시피 한 누나는 바로 옆자리 그의 어깨를 거의 껴안듯이 감싸 흔들었다.

“진짜요? 대표님, 진짜, 진짜예요?”

나와는 두 살 차이지만, 누나는 항상 대여섯 살 연상으로 느껴질 만큼 침착하고, 빈틈이 없고, 스스로에 대해 의심이 없었다. 그런 누나가 지금 이런 요란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결코 억지스러운 오버액션이 아님을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모든 것이 시야와 안중에서 사라진 듯한 순수한 기쁨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누나의 모습은 보는 사람마저 그 기쁨에 감화되게 했다. 지금 누나가 느끼고 있을, 환희에 가까울 정도의 만족감과 흥분과 설렘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어, 진짜. 백유니가 이제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싶거든.”

누나가 흔드는 힘보다 일부러 더 과장되게 몸을 흔들면서, 그는 웃고 있었다.

“근데… 실장님 없이 저하고 둘이서 되겠어요?”

최초의 흥분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 나자 현실적인 걱정이 시작됐는지, 누나는 조심스럽게 실장님을 건너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한 실장이 제안한 거야. 이번 아트페어도 거의 네가 지휘하고 행사장 책임진 거나 다름없는데, 이제 좀 더 큰 건도 맡겨도 되지 않겠냐고.”

“…….”

누나는 말이 없어졌다.

좀 전까지 순수한 흥분으로만 가득 차 있었던 누나의 눈에 좀 더 복잡한 감정들이 섞여 들고 있었다.

기쁨, 감사, 감격.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차례대로 지나간 자리에 밀려오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커다랗고 단단한 덩어리 같은….

자신을 인정해 주고 등을 밀어 주는 사람들 속에서, 어쩌면 누나는 가족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지지와 믿음을 누구보다도 가족에게서 먼저 받고 싶지 않았을까. 막연하게나마 그렇게 짐작해 볼 뿐이었다.

“서브 아니고 메인 스태프로 가는 거라 모든 일정 류 대표하고 동행해야 할 거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배워야 해서 엄청 빡세겠지만, 백유니, 잘해 줄 거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멀찍이 떨어진 누나를 올려다보며 실장님이 말했다. 누나는 감정을 터트리는 대신 추슬러 수습하며 웃어 보였다.

“당연하죠. 이 순간만을 기다려 온 서당 개 3년 세월인데요.”

“누가 너보고 서당 개래?”

실장님이 눈을 크게 뜨면서 짐짓 화난 표정을 지어 보였고, 팔짱을 낀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럼, 절대 아니지. 진짜 서당 개는 이 상황에서도 저렇게 밥만 축내고 있잖아.”

그가 턱짓으로 주한이 형을 가리키며 농담을 던졌다. 분위기가 풀어진 듯하자 다시 젓가락을 바쁘게 놀리고 있었던 형이 서너 점의 고기를 탕 속에 담그면서 심드렁하게 말했다.

“왜요, 분수를 알고 조용히 찌그러져 있는 것도 문제예요? 전 미술판에 그만한 야망 없어요. 아시잖아요.”

그러고는 아직 분홍색이 군데군데 그대로 남아 있는 양고기를 소스에 푹 담가 맛있게 씹기 시작했다.

“좀 더 의욕을 보여 봐. 실력이 느는 만큼 인정해 줄 테니까.”

“뭐… 대표님이 제가 필요하다고 무릎 꿇고 매달리시면 생각해 볼게요.”

그의 제안은 진지한 것 같았지만, 형은 일부러 약간 건들거리며 농담으로 넘겨 버렸다.

“아… 가을 시카고. 좋겠다. 쓸쓸하고 운치 있고, 분위기 잡고 데이트하기 딱인데.”

기지개를 켜듯 테이블을 짚고 팔을 길게 뻗으면서, 인우 형이 허공을 향해 부러운 듯 중얼거렸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가실 수 있으면서 뭘 그래요. 그리고, 우린 놀러 가는 거 아니거든요?”

자리에 앉으며 누나가 핀잔했지만, 인우 형은 못 들은 척, 어깨에 턱이 묻힐 정도로 깊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특유의 장난기 묻은 웃음이 서려 있었다.

“그럼, 시카고 출장 동안… 이현 씨는 혼자겠네?”

“…….”

“이현이가 왜 혼자예요? 실장님도 계시고 나도 있는데.”

이젠 웬만큼 배를 채웠는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콜라를 마시는 주한이 형을 돌아보며 인우 형이 고개를 저었다.

“권주한은 닳고 닳은 척만 하지, 가끔 보면 맹탕이라니까.”

누가 더 연애 경험이 풍부한지, 인우 형과 주한이 형이 티격태격하는 사이에 직원이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유니폼 차림의 직원은 미리 주문해 두었던 포장 음식이 담긴 두 개의 종이가방을 비어 있던 의자 위에 내려놓았다.

누나가 계산을 부탁했고, 법인카드를 가지고 방을 나간 직원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다들 식당을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2차 갈 건데 포장은 뭐 하러 했어?”

인우 형이 종이 가방 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서이현 오늘 형아랑 누나한테 자러 가거든요. 대표님이 챙겨 주신 거예요.”

주한이 형의 대답에 다들 나를 보며 웃었다.

이럴 때는 내가 팬텀의 막내라는 실감이 났다. 귀여운 표정이나 행동으로 사람들을 웃게 하는 재주 하나 없는 무뚝뚝한 막내였지만, 유니 누나도 주한이 형도, 그리고 실장님도, 가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도 나를 귀엽게 봐 주실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 역시도 그랬다.

지금은 주한이 형의 농담이나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못 들은 척, 중요한 연락이라도 와 있는 건지 핸드폰의 액정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아직 많이 어리니까 봐달라고, 옛 동료들에게 나를 부탁하던 그를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더불어, 혹시 기분을 풀어 주려는 거냐며, 서툰 내 위로에 보여 주었던 웃음도. 그건 분명 연하를 대하는 너그러운 연상의 웃음이었다.

그러니 이런 순간에 다른 사람들과 섞여 나를 향해 귀엽다는 듯이 웃어 주지 않는다고 해서 의기소침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감정에 상응하는 반응을 그에게 기대하는 것은 좋을 것이 없었다. 꾸준히, 기대를 억누르고 희망을 포기하는 방법을 습득하는 것만이 여기서 더 심각해지지 않을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아마 그럴 것이다.

“어? 그럼 이현 씨는 2차 안 가요?”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도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던 인우 형이 눈꼬리를 한껏 끌어 내린 슬픈 표정으로 내 손목을 붙잡고 흔들었다.

“그게… 원래는 귀국하는 날 바로 보기로 했었는데, 계속 바빠서 시간이 안 났었거든요. 그래서 좀….”

“아… 맞다. 이현 씨 또 아파서 하루 늦게 귀국했었지.”

미묘한 강세를 넣어 그렇게 말하면서 인우 형은 맞은편의 그를 힐끔거렸다. 지나친 생각이겠지만, 가끔 형은 말해 주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사람 같아서 가슴을 서늘하게 할 때가 있었다.

“에이, 뭐야. 재미없게. 누구 때문에 온 건데.”

그러면서 인우 형은 붙잡고 있던 내 손목의 안쪽을 가볍게 물었다 놓으며 놔주었다.

“금요일 밤에 약속도 없이 병원에서 파일 정리나 하고 있다면서 온갖 불쌍한 척은 혼자 다 하길래 불러 드렸더니. 뭐가 어떻다구요?”

양고기 4인분은 먹고 가겠다며 식사하는 동안 빼 두었던 입술 피어스를 제자리에 끼워 넣은 주한이 형이 의자에 앉아 있는 인우 형의 어깨를 팔꿈치로 찍어 누르며 을러댔고, 인우 형은 비명을 지르며 항복을 외쳤다.

가방 속에 소지품을 챙겨 넣는 유니 누나의 어깨 너머로 그의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지만, 착각이었는지 그는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하고 있었다.

위쪽으로 비즈니스호텔이 들어선 건물의 2층에 입점해 있는 식당의 정문을 빠져나오자, 빗소리가 훨씬 가까워졌다. 여전히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주한이 형이 엘리베이터 홀의 한쪽 벽을 채우고 있는 창문 앞으로 바짝 다가가 유리창에 코를 대고 밖을 내다보았다.

홍콩에서, 며칠이나마 장마를 피할 수 있다며 좋아했던 형의 기쁨이 무색하도록 여전히 서울은 장마의 한가운데였다. 이번 주 내내 지하 수장고와 전시장의 습기를 신경 쓰게 만들었던 장맛비는 오늘 정점을 찍고 있었다.

“인우 쌤하고 실장님은 대리 부르셔야 되고… 대표님은 술 안 드셨죠? 이현이 좀 태워다 주고 오시면 안 돼요? 비가 너무 많이 오는데.”

네이비에 가까운 짙은 블루 컬러의 여름용 재킷에 팔을 꿰고 있던 그가 누나의 말에 내 쪽을 돌아봤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버스 타고 가면 돼요.”

너무 빨리, 지나치게 정색하며 사양한 것 같은 생각에 바로 입을 다물었지만, 이상하게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 같아 후회스러웠다.

“너 짐도 많잖아. 그냥 태워다 달라고 해. 잠깐 내려 주기만 하면 되는 건데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그쵸, 대표님?”

예전의 그는 나를 태워다 주라는 실장님의 말에 탐탁지 않은 반응을 보였었지만, 지금은 조금 돌아가서 내려 주는 것 정도는 흔쾌히 받아들일 것 같았다.

하지만 자동차의 실내 같은 비좁은 공간에서 그와 단둘이 되는 상황은 당분간 피하고 싶었다. 아니, 피하고 싶다기보다는 피하는 게 이로울 것 같았다.

지하 주차장에서 한참 뜸을 들이던 엘리베이터가 겨우 2층에 멈춰 섰다. 다들 엘리베이터에 오른 뒤 마지막으로 탑승한 그가 닫힘 버튼을 눌렀다. 코너에 선 내 옆, 한 걸음 떨어진 자리, 손잡이 바에 기대섰다.

엘리베이터에서의 가까운 거리가 필연적으로 홍콩 호텔에서의 엘리베이터를 떠오르게 했다. 그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발치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은 지극히 태연해 보였다.

뒤에서 내 허리를 안았던 팔의 조임과 귓가에 쏟아지던 더운 숨결의 흥분이 여전히 생생했다. 별로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흐릿해지기를 바란다면서도, 나는 하루에 몇 번이나 멍하니 그날의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과장되거나 퇴색되는 것이 겁나는 사람처럼.

“주차장 내려가서 대표님 차 타고 가, 응?”

팔꿈치로 나를 툭 치면서 누나가 소곤거렸다.

“그럼, 택시 타고 갈게요. 별로 멀지도 않은데… 괜히 데려다주지 않으셔도….”

“금요일 이 시간에 비까지 이렇게 퍼붓는데 택시가 너한테 잡혀 줄 것 같아?”

물정 모르는 얘기 하지 말라며 누나가 내 어깨를 툭 쳤다.

“타고 가죠. 별로 멀지도 않은데 내려 주고 가는 것쯤이야, 뭐.”

그때껏 말없이 누나와 나의 대화를 관망하고 있었던 그가 등 뒤의 바를 붙잡으며 나를 돌아봤다. 그의 눈빛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또 머쓱하게 먼저 시선을 피해 버렸다.

서울로 돌아온 뒤부터 나 혼자 그를 어색해하고 있는 중이었다. 원래도 그를 편안하게 느끼지는 않았었지만, 내가 그에게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알고 나니, 가벼운 술렁임을 동반한 막연한 충동 같았던 불편함은, 둔탁한 통증과 갑갑함으로 바뀌었다.

그동안 나는 그가 불편했던 것이 아니라, 그를 원했던 것이다.

관심이든 애정이든… 욕정이든.

그런데 원하는 걸 얻지 못할 것 같으니 초조했고, 그 초조함과 가슴속의 거슬림을 불편함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런 게 아닐까 싶은 예상이었다. 현재의 내가 뭘 알겠는가.

되도록 그와의 거리를 좁히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침대 위로 올라온 그를 거부하지 않았던 낯선 나는, 맥빠질 정도로 너무나 간단히 결심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단둘이 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지만, 단둘이 있고 싶었다.

그의 구두에 닿을락 말락 한 낡은 운동화의 앞코를 내려다보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마침 할 얘기도 좀 있고.”

느릿느릿한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는 내가 아닌 인우 형을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나 역시 별생각 없이 인우 형을 돌아봤다. 형은 그의 맞은편에서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웃고 있을 뿐이었다.

■ ■ ■

“장마가 아니라 태풍이 온 것 같네.”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가자마자 자동차 위로 퍼부어 대는 빗소리에, 그가 창문 밖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택시를 잡았어도 타는 동안 다 젖었겠어요.”

그의 말대로 우산을 접는 짧은 순간에 흠뻑 젖을 것 같은 비였다. 태워다 주셔서 감사하다고 다시 한번 인사했고, 그는 몇 번이나 인사받을 정도의 일은 아니라며 피식 웃었다.

“홍콩에서 보니까 영어를 어느 정도 하는 것 같던데.”

주차장을 빠져나온 뒤 첫 번째 신호에 멈춰 서면서 그가 의외의 화제를 꺼냈다. 정작 홍콩에서는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모르는 사이 그가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얼굴을 달아오르게 했다.

“아니요, 그냥… 기초적인 수준이에요. 학교에서 배웠던 정도….”

“공부를 꽤 성실히 했었나 봐요. 외국어라는 게 머리로는 알고 귀에는 들려도, 몸에 익어 있어야 입으로 나오는 건데.”

“학업에 불성실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달리… 할 게 없었거든요.”

뭔가에 덤벼들 의욕은 상실되었었지만, 처음 약 1년간은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았었다. 어쩔 줄을 몰랐던 것이다. 학교 수업이나 공부는 주어진 의무 같았고, 그것을 꼬박꼬박 해치워 나가는 것으로 하루를 이어 갔었다. 그 후에는 습관으로 자리를 잡아 버렸고.

“서이현 씨가 좀 더 제대로 영어를 공부해 보고 싶다면 선생님을 붙여 줄 수도 있어요. 백유니, 권주한이 받고 있는 수업을 같이 들어도 되고.”

“누나랑 형이 하는 수업은… 아마 못 따라갈 거예요.”

누나와 형은 직원 복지의 일환으로 매주 1회 원어민 선생님에게서 영어 과외를 받고 있었다. 이번 홍콩 출장 같은 해외 사업에 대비한 지원이었다. 유창한 영어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막힘없이 대화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부럽기도 했지만, 어차피 그건 영어 실력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와이퍼가 밀어내자마자 와르르 덤벼들어 끊임없이 물결을 만들며 흘러내리는 빗줄기에, 거리의 모든 자동차들이 느릿느릿 조심스럽게 이동하고 있었다. 그마저도 금요일 밤인 것을 감안하면 눈에 띄게 통행량이 적었다.

라디오나 음악을 켜지 않은 실내에는, 우리를 이 차 안에서 꺼내 집어삼키고 싶어 하는 것 같은 맹렬한 빗소리뿐이었다.

“아니면… 내가 가르쳐 줄까요?”

“…….”

웃음기 띤 그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의 말투가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것은 나의 감정이 투영된 잘못된 해석일까.

나처럼 서툰 놈에게 그가 주는 힌트들은 아리송하고 부족하기만 했다. 애초에 힌트도 뭣도 아닌데, 혼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일 확률도 배제할 수 없었다.

이런 순간에 ‘그래 주실래요? 대표님한테 배우는 거라면 해 보고 싶은데.’라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것이 어른스럽고 섹시한 도발인지에 대해 생각해 봤지만, 그런 자신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바람 빠지는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그건 정말 아니었다.

“농담이에요.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가르치는 거엔 영 소질이 없더라고.”

어깨를 으쓱이며 그는 이번에도 혼자 웃었다. 스스로를 책망하는 조소에 가까워 보였다. 반응 없는 목석같은 나를 두고 혼자 떠드는 자신이 한심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 집에서는 얼마나 지내다 한 실장 집으로 옮긴 거죠?”

결국 그는 다른 화제를 꺼냈다. 초록색 신호를 따라 천천히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달 정도밖에 안 돼요.”

음. 그는 이 빗속에서 위험하게 추월을 시도하려는 뒤차를 주시하며 신음 같은 소리를 냈다.

“우리 집에서 진짜 가깝긴 하던데.”

예전에는 그의 집의 위치를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실장님의 말대로 정말 가까운 거리였다.

커다란 편의점과 화덕 피자를 전문으로 하는 대형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들어선 사거리를 기준으로, 북서쪽은 모래와 형의 옥탑방이 있는 소위 달동네였다. 최근 들어 집값이 급격히 상승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리모델링을 하지 못한 좁고 낡은 집들은 여전히 헐값이었다. 반면에, 그의 집이 속한 동쪽 언덕은 재벌 총수나 한류 배우, 외국 대사들의 거주지 등으로 유명한 전통적 부촌이었다.

항구를 중심으로 부촌과 빈촌으로 나뉘었던 할아버지 마을의 구조와도 비슷했다.

실제로 해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옥탑방에서 그의 집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20분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이젠 실장님 댁에서 지내고 있으니, 다시 그의 집에 방문할 기회가 생긴다 한들, 그 코스대로 걸어갈 일은 아마 없겠지만.

“사거리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혹시 가 봤어요?”

“아니요.”

“아, 절대 가지 마요. 맛도 없고 가격만 비싸니까.”

단단히 실망을 했었는지 표정도 진지하고 말투도 단호했지만, 그래서 더 웃음이 터져 버렸다. 왠지 그는 그런 말을 진지하게 할 사람 같지 않았으니까. 그에 대해 모르는 것이 더 많은 상태에서 ‘원래의 모습’을 추측해 봤자, 이미지를 바탕으로 한 편견에 불과하겠지만.

내가 웃으니까 그도 따라서 피식 웃었다.

터널 안으로 들어서자 거짓말처럼 빗소리가 뚝 끊겼다. 좀 전의 웃음으로 긴장이 조금 풀어지고 나니, 백팩 안에 계속 가지고 다녔던 담배에 생각이 미쳤다.

주머니를 뒤져 초록색 패키지의 담배를 한 갑 건네자, 이게 뭐냐는 눈으로 그가 담배와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게… 호텔에서, 제가 한 개비 피웠었거든요.”

“…….”

그의 눈이 조금 커졌다. 어린아이의 맹랑한 장난을 목격한 것 같은 짓궂은 웃음이 그의 얼굴에 서서히 번져 나갔다. 성인이니 흡연에 대한 결정권은 나에게 있다고, 그렇게 말했으면서.

“서울 오면 한 갑 드리려고 계속 가지고 있었는데, 적당한 타이밍을 못 찾아서….”

허락을 구하지 않고 손을 댄 것에 대해 사과하자, 그는 겨우 담배 한 개비로 뭘 그러냐며, 이런 이자를 받을 수 있다면 언제든 환영이라고 농담을 했다. 좀 아까처럼 웃음기 하나 없는 진지한 얼굴로.

담배를 받아 든 그는 그것을 어딘가에 내려놓지 않고, 잠시 그대로 쥔 채 핸들 위에 올린 손안에서 이리저리 굴렸다. 단정하면서도 섣불리 접근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 날카로운 선의 옆모습은 어떤 생각에 깊이 골몰한 듯이 보였다.

그 사이 터널 구간이 끝나, 우리는 다시 빗속으로 내몰렸다.

차 밖의 성난 빗줄기보다 실내의 침묵이 더 무서웠다.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 찾아온 공백은, 홍콩에서 돌아온 뒤 팬텀에서 서로를 마주했던 지난 사흘을 떠오르게 했다.

나보다 하루 늦게 화요일에 귀국한 그는 수요일 아침에서야 정상적으로 출근을 했었다.

간혹 나에게 직접 업무 지시를 내릴 때, 그는 무감했었다.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조금이라도 더 의미심장하게 바라본다거나 필요 이상으로 나에게서 오래 눈길이 멈춘다거나, 그런 일은 없었다.

업무에 한참 집중하다 별생각 없이 자세를 바꿔 고개를 들었을 때, 간혹 눈이 마주치는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페어에서 판매된 그림들의 배송 대리 업체와 연락을 취하고, 아트페어에서 거둔 성공적인 결과에 대해 서울의 기존 고객들에게 홍보하는 팸플릿을 제작하면서, 그와 나는 각자의 자리에서 일했을 뿐이었다.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내 담배도 피우고, 또 뭘 하고 놀았습니까.”

“…….”

그래서 그가 이렇게나마 그날의 일을 입에 올릴 줄은 몰랐다. 이번에는 내 눈이 커졌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약간의 웃음기가 묻어났다.

“완탕 한 그릇도 다 못 먹고, 마사지도 안 받고, 방에서 꼼짝도 안 했다고 하던데.”

바깥 공기를 마시고 싶었지만, 창문을 살짝이라도 내리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무릎 위로 비가 들이칠 게 뻔했다.

가슴 위를 가로지른 안전벨트를 쥐어뜯듯 만지작거리다, 무슨 말을 할 듯 말 듯 입술을 뻐끔거리다, 마지막엔 짧게 한숨을 내쉬며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성적인 긴장감이 우리 사이를 팽팽하게 당기고 있을 때가 아닌 이런 일상의 순간에, 어떤 표정과 말투로 그날 일에 대해 이야기하면 좋을지 아무런 준비나 각오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어느새 그가 말했던 사거리가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내 대답을 듣기를 포기했는지 그가 다른 말을 꺼냈다.

“2차에… 같이 안 갈래요?”

사거리의 신호에서 대기하기 위해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그가 물었다.

“이틀 더 쉴 거고, 굳이 오늘 밤에 서둘러 가지 않아도 같이 보낼 시간은 충분하지 않나 싶어서. 형이랑 누나도 이번 주말에는 쉰다면서요.”

어색함도 잊고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오는 사람은 까다롭게 가리고, 가는 사람은 절대 잡지 않을 것 같은 그가, 2차에 함께 가자며, 나를 붙잡는 듯이 얘기하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희망이나 힌트를 찾아 그의 신비로운 눈동자 구석구석을 살폈다.

자동차 실내까지 묵직하게 파고든 비 냄새 사이로 얼핏 스친 그의 향기에 순간적으로 등줄기가 오싹했다. 아주 잠깐이었음에도 향기는, 그것과 동반해 향유했던 쾌감의 강렬함을 단숨에 내 안에 되살려 놓았다. 당황스러워, 나도 모르게 슬쩍 손으로 코와 입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출장 뒤풀이인데 누구 하나 빠지는 것도 좀 그렇고.”

그렇게 덧붙이는 그는, 자신의 말에 내가 부여할지 모르는 낙관적 해석을 미리 차단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살랑살랑 가까워지는 것 같았던 간지러운 느낌은, 다음 순간엔 후각을 스치고 멀어지는 옅은 향기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그의 의도나 생각을 읽어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10년이라는 나이 차 때문이거나, 그 나이 차로 인한 경험 차 때문일 수도 있겠지. 그보다 더 본질적인 개인차 때문일 수도 있었고.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디 가서 바람둥이인 척 연애 경험을 쌓고 올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오늘은 중요한 얘기를 해야 해서요.”

조심스러운 거절의 말에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응시했다.

뒤쪽에서 클랙슨 소리가 신경질적으로 짧게 울렸다. 어느새 신호가 바뀌어 있었다. 그는 북서쪽 언덕을 향해 차를 몰았다.

귀국한 뒤, 그는 그림에 대해 생각해 봤냐며 나를 보채거나 압력을 넣지 않았다. 실장님도 마찬가지였다. 패를 모두 꺼내 보였으니, 이젠 내가 충분한 시간을 갖고 스스로 결정하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배려에 의지해 너무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오늘, 형과 모래는 자신들의 결정을 얘기할 것이다. 나 역시 좀 더 분명하게 내 입장을 밝힐 예정이었다. 거기에 더해, 두 사람이 어떤 답변을 내놓든 곧바로 발리로 떠날 준비에 착수하도록 설득할 작정이었다.

정말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릴 수 있기를 원하고 있다는 욕망까지, 막연하고 희미하다는 이유만으로 부정할 수는 없었다. 막연하고 희미하더라도, 있는 것이 없는 것이 될 수는 없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일단은 시도해 볼 작정이었다.

다시 붓을 잡는다면, 형과 모래가 좀 더 쉽게 떠날 수 있을 거라는 예상도 물론 이유의 하나였지만, 내 선택이 남을 위한 희생인 척 위선적으로 굴 생각은 없었다.

누구도 아닌 자신의 욕망을 따른 결정이었고, 그것을 욕심이라 생각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자신의 욕망에 귀 기울이는 것이 곧 남의 욕망을 부정하고 짓누르는 의미가 되는 것은 아님을 직접 보여 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나약한 나도 믿음의 발판을 만들 수 있었다.

없던 용기가 그사이 솟아난 것은 아니다. 용기가 생길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뭐가 됐든, 우선 최초의 한 발을 디뎌 보자는 생각이었다. 아마… 기다려도 용기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한 발을 디디는 순간, 그것이 용기가 되는 것일 테니까.

이 동네에 어울리지 않는 웅장한 규모의 교회 건물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퍼붓는 빗속에서 그것은 중세를 배경으로 한 공포 영화 속에 등장하는 불길한 성처럼 커다랗고 어두컴컴한 몸 위로 부연 물안개를 피우고 있었다.

“그 중요한 얘기, 혹시 나도 기대해도 되는 그런 얘기인가?”

“…….”

결정을 내리기는 했지만, 형태가 완전히 뚜렷해지기 전에 입 밖으로 뱉고 싶지는 않았다.

대답 대신, 그의 얼굴에 시선을 주었다. 대답을 유보하는 지금의 내가, 망설이는 것이 아니라 신중하고 싶은 것임을 알아주길 바라면서.

계단 앞 버스 정류장 쪽으로 서서히 차를 몰아가면서, 그가 엷게 웃었다.

“쉽게 입을 여는 사람은 아니지.”

틀린 말이 아니어서, 이번엔 내가 엷게 웃었다.

“월요일에… 말씀드릴게요.”

“그래요, 그럼. 기다릴게요.”

기다린다는 그의 말은 감미로웠다. 기다림의 대상이 나 자신이 아닌 나의 대답이더라도, 그 대답도 나의 일부이기는 했다.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계단 위까지 짐이라도 들어 주겠다는 그를 겨우 설득했다. 짐이라고 해 봤자 포장된 훠궈가 든 종이 가방 두 개와 홍콩에서 사 온 쿠키나 치약 같은 자잘한 기념품 몇 가지가 든 백팩이 전부였다.

문을 열자, 내내 우리를 뒤따라왔던 폭우가 기다렸다는 듯 주변을 둘러쌌다. 금방이라도 나를 쑥 빨아들여 집어삼킬 것 같은 빗줄기였다.

떠나는 모습을 보고 움직이려고 그 자리에 멈춰 있자, 먼저 가라는 의미로 그가 짧게 클랙슨을 끊어 눌렀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 그의 차가 먼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의 고집에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젓는 그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혼자 웃으며 뒤로 돌았다.

느리고 둔해 터진 심장이 그와 정말 연애라도 하기를 바라는 건지, 그의 유일한 상대가 되기를… 그런 터무니없는 포지션을 바라는 건지.

연애는커녕 짝사랑의 경험조차도 없으니,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면 어떻게 반응하는 사람인지, 그를 어떻게 얼마나 원하고 있는 건지, 나 자신인데도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자각하기 전까지, 감정은 그저 막연한 흔들림이었다.

갈증은 자각한 이후부터 시작됐지만, 최소한, 지금 당장 그의 연인이 되지 못한다면 죽을 것 같은 절박한 조급증은 아니었다.

아직은 감정을 무효화할 수 있는 지점에 서 있다고 믿었다.

더 심각해지고 무거워져, 그의 앞에서 되돌려 받지 못할 감정을 흘리고, 비웃음이든 동정이든, 혹은 쿨함이라는 이름의 냉정함이든. 내가 가진 것과는 다른 이름의 감정들을 그에게서 발견하는 고통을 견뎌 낼 자신이 없었다.

몇 년 동안 감정의 부재 속에서 살아온 나에게 무거운 짝사랑은 주제에 맞지 않았다. 이제 막 헬스클럽에 등록한, 근력이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는 깡마른 풋내기에게 100킬로그램의 웨이트를 들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쓰나 마나 한 우산을 어깨에 걸치고, 우산을 쥔 손에 하나, 다른 손에 하나. 훠궈가 든 종이 가방을 손가락에 걸고 계단을 오르면서, 일단 오늘은 모래와 형, 그리고 그림에 대해서만 생각하기로 머릿속을 정리했다.

탁. 그가 가르쳐 줬던 대로 스위치를 끄는 것이다.

배수로가 잘 정비되어 있지 않은 돌계단에는 위쪽에서부터 흘러내린 빗물이 계곡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계단에서 계단으로 떨어지는 낙차 때문에 신발은 물론이고 종아리까지 흠뻑 젖어 버렸다.

모래와 형이 오려면 한 시간 정도가 남았으니 그동안 샤워를 하고 그가 챙겨 준 훠궈로 미리 상을 차려 놓을 생각이었다. 비 때문에 평소보다 더 가파르게 느껴지는 62개의 계단을 전부 오르고 나니, 백팩을 멘 등이 습기 찬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턱 밑의 땀을 훔쳐 내며 가장 안쪽 대문으로 향했다.

어깨에 걸친 우산이 뒤집히지 않도록 균형을 잡으면서 주머니를 뒤져 대문 열쇠를 찾았다. 대여섯 채의 집이 다닥다닥 붙어 선 좁은 골목 안에는 우산에 꽂히는 빗소리뿐이었다. 아래층 신혼부부도 오늘은 잠잠했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빗소리 때문에 뒤쪽에서 다가오는 발소리를 전혀 자각할 수 없었다.

“……이현이냐.”

“…….”

발소리는 흔적도 없었는데.

거짓말처럼 비가 뚝 그치기라도 한 듯,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또렷하게 빗속을 뚫고 귀에 꽂혔다.

뒤를 돌아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기도 전에 몸이 굳었다. 대문에 열쇠를 꽂아 둔 그대로 손이 허공에 떨어졌다.

퍼붓는 빗줄기도 별것 아니라는 듯, 파도로 배를 뒤집듯 엄습하는 바다의 질긴 비린내.

큰아버지였다.

다이아몬드 더스트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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