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소외 2 (10/31)

   4. 소외 2

톡톡 튀는 멜로디와 창법이 귀를 잡아끄는 음악이었다. 빠른 템포와 자극적인 비트의 곡은 아니었지만, 나처럼 심심한 사람마저도 운동화 안에서 발가락을 까딱거리게 되는 펑키한 리듬이 매력적이었다.

나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곡이었다. 프린스의 .

조수석에 앉은 유니 누나와 그 뒤, 내 옆자리에 앉은 주한이 형은 거의 악을 쓰듯 고함을 지르며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쪽쪽쪽쪽쪽. 키스!

제법 직설적인 내용의 가사를 목청껏 따라 부른 두 사람은 1절 말미에는 음악 속 효과음에 맞춰 허공에 대고 키스 소리를 흉내 냈다. 미리 짠 듯 들어맞는 액션에 웃음이 났다. 오랜 시간 취향을 공유하며 지내 온 사람들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호흡이었다.

룸미러를 통해 보이는 운전석의 그 역시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으면서도 웃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룸미러 안에서 그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그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어색했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넘기는 척 시선을 돌렸다.

공항을 벗어나 침사추이의 화려한 명품 거리와 지하 터널을 지나 홍콩 본섬으로 진입한 우리는 오른쪽으로는 현대적인 초고층 빌딩과 오래된 건물들이 공존하는 도시를, 왼쪽으로는 맞은편 침사추이가 건너다보이는 빅토리아 하버를 끼고 고가 위를 달리고 있었다.

수심이 깊은 호수의 빛깔을 떠오르게 하는 짙은 푸른색 차량은 카브리올레, 컨버터블, 좀 더 대중적인 용어로는 오픈카라고 불리는 차종이었다. 누가 입국장 게이트 앞에 차를 대기시켜 두고 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렌트 차량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그가 자신의 열쇠 지갑에서 직접 키를 꺼냈으니까.

대기하고 있던 차를 발견한 유니 누나와 주한이 형은 비명을 지르며 차를 향해 달려갔었다.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던 혈육이라도 만난 듯 두 사람의 반응은 요란스러웠다. 두 사람을 위해 일부러 준비한 차량인지,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대표님의 표정에 숨길 수 없는 웃음이 비쳤었다.

자신의 직원들에게는 다정한 보스였다. 나에게 적대적이었던 초반에도 그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다정한 마음과 태도 자체가 결여된, 남에게 차갑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모두에게 공평하게 열려 있는 다정함은 아니었다. 그 안에 포함되기 위해서는 시간을 들여 그에게 증명해야만 했다. 그의 다정함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을.

내가 그에게 어떤 사람으로 정의되어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처음보다는 부드러워진 태도와 나를 팬텀에 합류시키기로 한 의외의 결정. 죽을 내주고, 맨투맨을 벗어 주었던 친절. 그리고 가끔씩 나를 향하는 점성과 온도를 가진 시선들로, 적어도 이제는 전처럼 경계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그렇게 추측해 볼 뿐이었다.

자동차의 앞유리로 다가오는 홍콩의 풍경을 보는 척, 운전하는 그의 뒷모습을 흘깃거리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가 끝나 가고 있었다.

“아, 이 맛에 팬텀 다닌다니까!”

볼륨을 줄인 유니 누나는 오랜만에 찾은 노래방에서 스트레스를 해소한 사람처럼 후련한 표정으로 외쳤다.

“야… 듣는 보스 섭섭한데?”

“왜 섭섭해요? 칭찬인데. 이런 차 태워 줄 정도로 능력 있는 보스가 흔한 줄 아세요? 있어도 안 태워 줘요, 다른 보스들은.”

“음, 그 보스가 상속받은 돈으로 산 차인데 의미가 있나?”

“내가 타는 차, 내가 사는 집만 내 돈으로 번 거면 됐죠. 이건 대표님 거잖아요. 그니까 전 즐기기만 하면 그만이고, 상속된 부에 대한 고민은 대표님 몫이죠.”

그렇게 말한 유니 누나는 그를 놀리듯이 손뼉까지 치며 웃었다.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와… 가차 없다, 백유니.”

“대표님이 너무 그런 데에 결벽적인 거예요. 그냥 즐기세요. 이렇게 베이비들한테 즐거움도 줄 수 있고, 좋잖아요. 물려받은 게 많다고 장점만 있는 게 아닌데, 장점이라도 안 즐기면 손해잖아요.”

주한이 형이 운전석과 조수석의 시트 사이로 몸을 내밀면서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건 진짜 백유니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정 부담스러우시면 저한테 다 넘기시는 방법도 있구요. 대표님의 베이비잖아요.”

룸미러 안에서 그가 이번에는 표정을 구겼다.

“최인우한테 옮았나, 이것들이 왜 자꾸 베이비 타령이야. 너네가 왜 내 베이비야? 다 큰 것들이 징그럽게.”

“어차피 대표님도 애인한테는 허니, 베이비 그럴 거 아니에요. 대표님 애인들은 뭐 다 안 컸어요? 덩치 커다란 울룩불룩 근육남들일 거 아니에요. 으으….”

주한이 형은 지난번에 그의 정원에서 했던 이야기들을 아직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었다. 그가 정확히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은 탓에 근육이 울룩불룩한 남성이 정말 그의 취향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울룩불룩하지 않은 나와도 잠자리를 가지기는 했었다. 물론, 끝까지 가지는 않았고, 내 희미한 기억이 맞다면… 그가 사정에 이르기도 전에 내가 뻗어 버리긴 했지만….

“애인이면 애인이지, 애인들은 또 뭐야. 그리고, 내 베이비든 허니든 한 번 본 적이라도 있냐? 보고나 떠들어라, 제발.”

미끄러지듯 고가를 내려와 직진 신호를 받기 위해 속도를 줄이면서 그가 시트 사이로 고개를 내민 주한이 형의 뺨을 꼬집었다.

단순한 직장 내의 관계 이상으로 친밀해 보이는 팬텀 식구들이지만, 그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와 오랜 친구인 인우 형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허물없고 다정하지만, 은밀한 부분은 혼자만의 영역으로 남겨 두는 것이 그의 습성인 듯했다. 아마도 침대 위의 사정뿐만 아니라 사생활 전반에 대해 그럴 것 같았다.

쉽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그의 내면 안으로 들어가 본 누군가가 과거에 있었을지, 또 현재에 있을지. 그런 궁금증으로, 나도 모르게 룸미러로 그의 얼굴을 살폈다.

이런 부분에서 스스로가 노련하지 못한 것은 잘 안다. 반대로, 자신을 흘깃거리는 열 살 연하의 서툰 시선을 감지하는 것쯤은 그에게는 일도 아닐 것이다. 다시 또 룸미러 안에서 시선이 마주친 것 같은 느낌에 서둘러 방향을 꺾어 이국적인 거리를 내다보았다.

붓글씨를 연상시키는 필체의 한자가 뒤덮은 붉은 간판과 현란한 전광판과 네온사인이 혼재된 혼잡한 홍콩의 거리 속으로 우리는 점점 더 깊숙이 진입하고 있었다.

신호와 함께 자동차가 출발했고, 다음 신호에서는 기다릴 필요 없이 그대로 도로를 미끄러졌다.

“어? 뭐예요, 대표님. 왜 아파트 쪽으로 안 가요?”

유니 누나가 오른쪽의 언덕길을 휙 돌아보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얘기 안 했었나? 이번엔 호텔에 묵을 거라고.”

“처음 듣거든요?”

“음… 얘기한 줄 알았는데.”

그는 검지로 턱 밑을 긁으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반응으로 봐서는 일부러 얘기를 안 했을 확률이 높아 보였다.

“호텔에 묵는다 쳐도, 언제부터 그런 실무를 대표님이 처리하셨죠? 네?”

일정의 변동에 조금 당황한 것 같은 누나는 그를 향해 핸드폰을 들이대며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백유니가 너무 바빠 보이길래 호텔까지 예약하라고 하면 멱살 잡힐까 봐 내가 알아서 했지.”

그의 애교 섞인 목소리에 누나는 다시 시트에 몸을 묻으며 선글라스를 추켜올렸다.

“아무리 그래도 멱살까지는 못 잡죠. 뒤통수 뚫리게 째려보는 정도는 했겠지만.”

그가 웃으면서 팔을 뻗어 누나의 머리를 가볍게 흩트렸다.

“페어 땐 밤에라도 푹 쉬어야지. 내 아파트는 다섯 명이 전부 각방을 쓸 순 없잖아.”

“마스터룸이 운동장이잖아요. 그 방 침대에서 각자 이쪽 끝 저쪽 끝에서 자면 각방 쓰는 거나 마찬가지지. 이현이는 자리도 많이 차지 안 할 거예요. 권주한처럼 이건 이렇다, 저건 저렇다 불만도 없을 거고.”

“왜 또 가만히 있는 나를 걸고넘어져.”

주한이 형이 그렇게 투덜거렸지만, 누나는 거기에 대해 반응하지 않았다.

“음… 그래서, 서이현 씨하고 나하고 방을 같이 쓰라고?”

이번에는 그가 룸미러 안에서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나와 같은 방을 쓰게 된다면 어떨지 머릿속에서 상상이라도 해 보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왜요? 취향 아닌 남자하고는 방도 같이 못 써요?”

유니 누나가 발끈했지만, 그는 그냥 웃기만 했다. 그리고 말을 돌렸다.

“F호텔인데도 용서 안 해 줘?”

호텔의 이름을 들은 누나의 안색이 달라졌다. 주한이 형도 귀가 솔깃해졌는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돌아봤지만, 그 호텔에 대한 정보가 없는 나는 반응에 합류할 수가 없었다.

“아니, 뭐… 용서를 하고 말고 그런 게 아니라… 변경 사항이 있으면 미리 말씀을 해 달라는 거죠.”

대시보드 위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면서, 누나는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하버뷰 1인 1실인데도?”

“미리 말해 주고 아니고,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한가요?”

언제 그랬냐는 듯 바로 말을 바꾼 누나는 뒤로 돌아 주한이 형과 마주 보고는 서로 기쁨을 공유했다. 그 호텔이 두 사람을 꽤나 신나게 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도 그가 두 사람을 위해 준비한 깜짝 선물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사실 홍콩에서 대표님 돈 쓰는 거 별로 아깝지도 않아요.”

“너넨 서울에서도 내 돈 쓰는 건 안 아깝잖아.”

“부자잖아요!”

누나와 형이 동시에 외쳤다. 고개를 가로저으면서도 그는 웃고 있었다.

오래되어 보이는 커다란 베이지색 건물을 오른쪽에 두고 그가 좌측으로 핸들을 꺾었다. 곧 화려하게 꾸며진 호텔의 진입로가 나타났다. 자동차의 속도는 줄어드는데, 마음이 그보다 앞서 달려 나가는 것 같았다.

내게 홍콩의 첫인상은 열정적인 습기와 더위, 과거와 현재의 뒤섞임, 무질서가 만들어 내는 오묘한 균형, 그리고 룸미러를 통해 서로를 탐색하는 시선이었다.

■ ■ ■

팬텀에서 이번 아트페어에 전시하는 작품은 약 120여 점이었다.

빅토리아 하버와 침사추이의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호텔 룸의 화려한 뷰와 실내 장식에 감탄할 새도 없이 바로 전시장으로 향한 우리는 120여 점의 그림을 꽁꽁 싸매고 있는 에어캡 포장부터 풀기 시작했다.

전시가 끝난 뒤에는 같은 에어캡으로 작품을 다시 포장해야 하기 때문에 잡히는 대로 마구 뜯어낼 수도 없었다. 다섯 명이 다 함께 밤새도록 몇 겹으로 둘렀던 에어캡을 다시 소중하게 하나하나 풀어내는 작업은 지루할 수도 있었지만, 가벼운 흥분 때문인지 지루함은 물론이고 육체적 고단함도 느낄 수가 없었다. 포장 작업에 비하면 풀어내는 작업은 간단하기도 했다.

교류가 있었던 다른 도시 갤러리 관계자들과의 만남을 위해 그는 우리를 내려 주기만 한 뒤 바로 호텔을 떠났고, 실장님은 서울에서 팬텀의 업무를 마무리한 뒤 서너 시간 늦게 이곳에 도착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디스플레이는 우리 셋의 몫이었다.

다섯 시간 뒤에는 VIP들을 대상으로 한 프리뷰 오프닝 행사가 열릴 예정이었다. 그 전에 디스플레이를 마친 뒤 호텔로 돌아가 준비를 하고 다시 돌아와야 했다. 넉넉한 일정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이제 작업 호흡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유니 누나는 포장을 풀고, 주한이 형은 포장을 풀어낸 작품을 전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나는 양쪽을 오가면서 그때그때 부족한 손을 도왔다.

“저것들 얄미워 죽겠다, 진짜.”

누나에게 전달받은 서른두 번째 작품을 주한이 형에게 건네주는데, 형이 나의 어깨 너머로 맞은편 부스를 흘겨보며 중얼거렸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음… 그쪽 부스는 우리와 사정이 많이 달랐다.

분리해 낸 에어캡과 아직 에어캡에 포장되어 있는 작품이 부스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어수선한 우리 쪽과 달리, 맞은편 부스 직원들은 담소를 나누며 아주 여유롭게 디스플레이를 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그들이 가져온 작품은 고작해야 서른 점 정도였으니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자기네 나라에서도 충분히 제값 받고 작품 잘 팔리니까 굳이 이 먼 데까지 항공료, 운송료, 직원들 출장비용 부담하면서 바리바리 작품 싸 들고 올 필요가 없는 거지. 그리고 몇 점만 팔아도 금방 본전 회수하고도 남는 비싼 작품들 가져왔을 거고.”

유니 누나가 기술적인 손놀림으로 포장을 풀면서 말했다. 누나의 설명은 좀 더 이어졌다.

“국내 중소 규모 화랑들에 비하면 해외 아트페어에 참여할 수 있는 우리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긴 해. 앞으로 몇 년은 더 이렇게 백 몇 점씩 들고 와서 고생해야겠지만. 두고 봐라. 언젠가 나도 꼭 스무 점만 갖고 와서 후딱 그림 걸고 ‘카우키’에 국수 먹으러 나갈 거니까.”

침착한 듯 보여도 저들에게 경쟁심을 가진 것은 누나 역시 마찬가지인지 포장을 풀던 손을 멈추고 허공에 주먹을 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누나가 하겠다고 하면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았다.

“그래 봤자 쟤네는 손바닥만 한 비즈니스호텔에서 자면서 관광객들 소음에 시달려야 될걸? 공항에서 여기까지 팬텀 타고 와서 F호텔에서 1인 1실 쓰는 스태프는 이 행사장 다 뒤져도 우리밖에 없을 거다. 페로탱이니, 가고시안이니 하는 대형 갤러리들도 이렇게까진 안 해 줄 거라고. 어떻게 보면 우리가 승리자야.”

에어캡에서 갓 빠져나온 다음 작품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형이 있는 쪽으로 옮겨 갔다. 미리 준비해 온 도면에 표시된 위치에 그림을 건 주한이 형이 리스트에서 33번 작품 위에 줄을 그었다.

“아까 그 차 이름이… 팬텀이에요?”

에어캡의 테이프를 떼는 누나를 도우면서 슬쩍 물었다. 누나가 손은 멈추지 않고 눈만을 들어 나를 힐끔 쳐다보며 씩 웃었다.

“어, 재밌지? 자동차 팬텀 쪽이 먼저인지, 갤러리 팬텀 쪽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뭔가 대표님 취향인가 봐. 팬텀 모델로만 서너 대 정도 가지고 있는 것 같더라. 서울에 있는 건 고스트라고 베이비 팬텀 격인 모델인데, 베이비라기엔… 웬만한 풀사이즈 고급 대형 세단보다 덩치가 더 크지. 팬텀보다야 저렴하지만 가격도 4억 이상이니, 굳이 말하자면 자이언트 베이비쯤 되려나?”

서른네 번째 작품을 나에게 건네주면서 누나는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볼 때 대표님한테 중요한 건 그 자동차들의 가격이나 명성이 아니야. 이름이지. 팬텀, 고스트… 결국 다 귀신이잖아.”

갤러리 팬텀(Phantom).

파도의 거품처럼 곧 부서질 것 같은 그의 희고 푸른 눈과 무심하고 초연한 분위기를 떠올리면, 상당히 잘 어울리는 네이밍이기는 했다. 거기에 어떤 이유가 있을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팬텀과 고스트라는 이름을 가진 고가의 자동차들까지 사 모으며 ‘유령’이라는 의미에 집착하는 심리가 단순한 수집벽일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누나와 형도 그 내막에 대해서까지는 모르는 것을 보면, 질문을 한다 해도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돌려 버릴 것이 분명했다.

“지금까지는 홍콩에 출장 오면 대표님 아파트에서 묵었었나 봐요.”

호텔로 가는 길에서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꺼내기에 좋은 타이밍 같았다.

34번 작품에 줄을 그은 주한이 형이 입에 물고 있던 펜의 뚜껑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으며 대답했다.

“어, 그랬지. 호텔에 묵는 건 이번이 처음이야. 빅토리아 피크 아래쪽에 대표님 아파트가 있거든. 언덕에 있는 데다가 고층이라서 뷰가 죽여요. 거기서 별로 안 먼 자리에 수영장 딸린 저택도 하나 갖고 있고. 그 집은 아마 렌트 중일걸? 여기 무슨 유명한 은행에서 자기네 직원용으로 빌렸다던가 그렇던데.”

추가 설명을 요구하듯 형이 누나를 내려다보았고, 누나가 말을 이어받았다.

“외국에서 모셔 온 고급 인력들한테 회사 차원에서 지원해 주는 거주지로 쓰는 거. 월 렌트 비용이 2,000만 원인가 그런데, 그걸 회사에서 내준다니까? 대체 그 사람 한 명이 창출해 내는 이익이 얼마길래 그런 비용을 부담하면서까지 고용하는 건지. 뭐, 우리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별세계 얘기지.”

월 몇천만 원의 렌트 비용을 회사에서 지불해 주는 고급 인력의 얘기도 그렇지만, 그 집의 소유주로서 월 몇천만 원의 임대 수익을 올리고 있다는 대표님 역시도 나에게는 충분히 별세계 사람이었다. 내가 알고 있고, 내 생활의 영역 안에 있는 사람이라 오히려 더 그렇게 느껴졌다.

라우 위쿤.

이름만으로도 그의 국적이 홍콩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짐작할 수 있었다. 실장님이나 형, 누나와의 대화를 통해 그가 부모님 중 한 분이 한국인인 쿼터 혼혈이라는 것도 대강은 알고 있었다. 태어나서 자란 도시가 서울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홍콩에 그만한 재산을 보유하고 있는 정도의 부호라는 것은 처음 접하는 정보였다.

좀 전에 호텔로 가는 차 안에서 그가 했던 말에 의하면, 홍콩에서의 그의 부의 출처는 대부분 상속 같았다. 평범한 집안의 사람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대표님 건 아니고 대표님 집안 소유인 것 같긴 한데, 리펄스 베이라고 바닷가에 있는 엄청 부자 동네에도 집이 있어. 별장으로 쓰는 집인데, 작년엔 휴가 겸해서 아트페어 끝난 다음에 사흘 정도 다 같이 거기서 놀았지. 아… 진짜 좋았는데.”

주한이 형은 지나 버린 호시절을 회상하는 나이 지긋한 사람처럼 아련한 눈으로 허공을 더듬었다.

내가 실제로 알고 있던 가장 큰 부자는 모래의 아버지, 임 선생이었다. 임 선생이 1년에 벌어들인다는 몇십억도 나에게는 와닿지 않는 숫자였다. 그런 내가 그의 부의 규모를 현실적으로 느낀다는 것이 무리였다.

“이게 다 무슨 뜻이냐.”

누나가 문득 손까지 멈추고 자신에게 주의를 집중시켰다. 자문 뒤에 자답이 이어졌다.

“팬텀은 대표님한테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증명의 문제라는 거지.”

“…….”

“대표님이 가지고 있는 부동산, 그게 다가 아니야. 서울에 있는 집하고 갤러리도 대표님 거지만, 그건 큰 건수도 못 돼. 우리가 알기로 런던 사우스 켄싱턴, 뉴욕 어퍼이스트에도 맨션을 갖고 있고, 어쩌면 투자 목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들이 더 많이 있을지도 모르거든. 그러니까 먹고살려고 팬텀을 시작한 게 아니라는 거지.”

서른다섯 번째 작품을 나에게 건네준 누나는 계속 쭈그리고 있었던 자세 탓에 몸이 결리는지 잠시 일어나 가볍게 다리와 허리를 두드렸다.

“서울에선 바닥에서부터 혼자 힘으로 올라온 자수성가 골든 알파지만, 홍콩에선….”

“그냥 원래 왕자님이지, 뭐.”

누나가 적당한 표현을 찾는 동안 주한이 형이 결론을 내렸다. 누나는 그 표현이 마음에 안 드는지 잠시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보다 더 적합한 표현을 찾지는 못한 것 같았다.

“맞네, 왕자님. 난 서울에서의 대표님이 훨씬 좋지만.”

누나의 말에 주한이 형은 뭐라고 대꾸를 하지는 않았다. 대신 평소엔 잘 볼 수 없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서른다섯 번째 작품을 벽에 걸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형 역시 서울에서의 대표님을 더 좋아한다는 동조의 표현이었다.

고급 차량에 열광하고, 럭셔리 호텔에서 묵을 수 있는 기회에 기쁨을 감추지 않는, 세속적 즐거움 앞에서 누구보다 솔직한 두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의 그를 더 좋아하고 있었다.

그것이 언뜻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그들과 고작 몇 개월을 함께 보낸 입장에서 감히 말해 보자면, 그런 충돌이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분명 세속적이었지만, 어떤 면으로는 그 세속성에 가장 거칠게 도전하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모순 같지만, 부정할 수 없이 그것이 백유니와 권주한의 정체성이었다.

“와, 한국에 지금 비 엄청 오나 봐. 오늘 서울 강수량이 60밀리미터가 넘는다는데?”

다음 작품의 전달을 기다리면서 잠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형이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매우 맑은 현재 홍콩의 날씨로는 상상이 되지 않는 소식이었다.

“야, 핸드폰 들여다볼 짬 있으면 와서 하나라도 좀 벗겨.”

“농땡이 피운 게 아니라, 실장님 무사히 비행기 타실 수 있나 검색해 본 거거든?”

“말이나 못하면.”

가로, 세로의 합이 7미터가 넘는 서른여섯 번째 대형 작품의 커버를 함께 벗겨 내면서 주한이 형이 씩 웃으며 유니 누나의 어깨를 툭 쳤다.

“우리 한국 간 다음에도 계속 장마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며칠이라도 피한 게 어디냐. 그치? 여기선 어딜 가든 에어컨 빵빵하잖아.”

어느덧 두 사람은 세계 여러 도시의 부동산 이야기에서 현실로 돌아와, 이 출장으로 며칠이나마 습한 장마를 피할 수 있게 된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놀라운 균형 감각이었다.

VIP 프리뷰 행사까지는 네 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 ■ ■

(누나와 형의 표현에 의하면)‘부자 갤러리’들만큼 예산을 쏟아부을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 부스는 작품 수에 비해 그리 넓은 편은 아니었다.

자주 자리를 비워야 하는 그와 실장님을 제외하면 누나와 형 둘이서 거의 부스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너무 넓은 부스는 무리이기도 했다.

대신 위치는 제법 좋았다. 중앙에 설치된 실험적인 대형 조형물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자리였고, 맞은편 부스와의 간격도 넉넉했다.

그 복도를 실장님과 그가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 바보 같아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동선을 따라 시선이 움직이게 될 만큼 매혹적인 한 쌍이었다.

언젠가 슈슈 작가에 대해 ‘실물을 보고 엎드릴 뻔했다’고 했던 주한이 형의 과장된 표현이 떠올랐다. 그 정도의 충격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일상적인 종류의 아름다움은 아니었다. 엎드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잡아끄는 듯한 인력에 눈을 뗄 수 없었다.

VIP 프리뷰인 만큼 행사장 내에는 나에겐 낯설기만 한 소위 파티 복장을 갖춰 입은 멋진 사람들이 가득했고, 나와 형, 누나도 미리 준비해 온 깔끔한 블랙톤의 의상을 입고 평소와 달리 헤어까지 스타일링을 한 상태였지만, 두 분의 존재감에 비할 수는 없었다.

작은 어촌 마을에서 지냈던 시절의 나는 접할 일이 없었던, 상류 사회에 속한 알파들, 그 자체였다.

“실장님, 완전 멋져요! 오랜만에 알파미 제대로 뿜어 주시네요!”

나만 그런 생각을 했던 건 아니었는지, 부스 앞까지 뛰어나간 주한이 형이 실장님을 껴안으며 소란을 피웠다.

“평소엔 어떻다는 건데? 엉?”

실장님은 웃으면서 형의 뒷목을 쥐고 흔들었다. 편안한 평소 차림과 달리 칼로 벤 듯 날카로운 패턴의 블랙 투피스 슈트를 입고 있었지만, 말투와 행동은 그대로 평소의 실장님이었다.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어도 스타일리시하시지만, 드레스업의 멋짐은 또 다른 거잖아요.”

“뭐, 그렇긴 하지. 너도 맨날 티셔츠에 찢어진 청바지 입고 다니다가 가끔 슈트 빼입으면 좀 멋지긴 해.”

목을 흔들던 손으로 형의 어깨에 팔을 걸친 실장님이 우리 뒤쪽으로 완성된 디스플레이를 훑어보며 눈을 크게 떴다.

“야… 우리 애들 능력 좋은 거 봐라. 진짜 세 시간 만에 끝낼 줄은 몰랐는데. 다음 페어에는 작품 수 늘려도 되겠는데?”

“하… 팬텀을 사랑하지만, 이쯤에서 사표 내겠습니다.”

주한이 형의 진지한 너스레에 다들 웃음이 터졌다.

다섯 명 모두 각자 스케줄상의 이유로 저녁 식사 전이었다. 행사장 곳곳에 준비된 뷔페 테이블에서 미리 옮겨다 둔 음식들로 간단히 허기를 달래기 시작했다.

간단하다고 말하긴 했지만, 입장 티켓 한 장에 홍콩 달러로 4,000달러쯤인 행사다 보니 음식의 종류도 다양하고 퀄리티도 훌륭했다. 내가 보기엔 먹기가 아까울 정도로 예쁜 음식들이었다.

“페어는 처음이라 정신없죠?”

기내식으로 나왔던 치킨 요리를 조금 건드린 게 오늘 식사의 전부이니 분명 배가 고플 텐데, 흥분과 긴장 때문에 허기가 느껴지지 않는 상태였다. 앙증맞은 모양의 딤섬 하나를 두고 젓가락으로 만지작거리기만 하고 있는데, 그가 곁으로 다가오며 말을 붙였다.

밥도 못 먹고 비즈니스 스마일 남발하느라 허기져 죽는 줄 알았다고 했으면서, 그 역시 음식에는 별로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주한이 형이 가져다 놓은 견과류를 몇 알 집어 먹으며 샴페인을 마실 뿐이었다.

“조금 그렇긴 한데… 그래도 재밌어요.”

딱딱하게 각지지 않고 육체의 선을 따라 유연하게 흐르는 재질의 네이비색 슈트를 입은 그는 이런 자리에 익숙해 보였고, 그리고 어울렸다. 탄탄하고 비율 좋은 몸의 윤곽을 과감하게 드러내면서도 그의 슈트는 여전히 품위가 있고 우아했다.

부스들을 둘러보는 다양한 인종의 관람객들은 그에게서 꼭 한 번은 시선을 멈췄고, 그것은 그대로 우리 부스로 그들을 끌어들이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다.

“내일부터는 본격적인 행사 시작이라 더 정신없을 거예요. 지금하고 비교도 안 될 만큼 방문객도 많을 거고. 미리 작품 좀 둘러보고 올래요?”

26개국 약 200여 개의 갤러리가 참여한 만큼 행사장 내부의 면적은 상당했다. 그 넓은 내부가 수백 개의 부스로 쪼개어져 복잡한 미로를 이루고 있었다. 배치도가 그려진 팸플릿을 받아 두긴 했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꼭 복잡한 구조 때문만이 아니라, 외국, 낯선 도시, 언어 문제 등 모든 게 처음뿐인 환경 앞에서 조금은 주눅이 들어 있었다.

“낯설어서 그런 거면, 같이 가 줄 수도 있는데.”

망설임을 눈치챘는지, 그가 약간 삐딱하게 웃으며 말했다. 가끔씩 애니메이션의 악당처럼 웃을 때가 있는데, 지금이 그랬다. 「안 갔으면 좋겠어요? 안 가고, 침대 안으로 들어가서 같이 잤으면 좋겠어요?」 ―같이 잤을 때, 그때도 그랬고.

사양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샴페인을 마시며 나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그의 눈이 잠시 멈칫하더니, 곧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 이번에는 방금 전 자신의 장난기를 가볍게 후회하는 듯한 웃음이었다.

산책하듯 걸으면서 훑어보다가 마음이 가는 작품이 있으면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시간을 보내도 된다고.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옆으로 보조를 맞춰 걸었다.

“방은 마음에 들어요?”

동양적인 회화 작품 위주로 꾸며진, 베이징에서 온 갤러리의 부스 옆을 지나면서 그가 지나가듯 물었다.

“그런 데에 처음 가 봐서…. 너무 좋은 방이라 놀랐어요. 뷰도 멋있고. 대표님 호의가 아니었으면 이런 경험도 못 해 봤을 거구요…. 전부 감사합니다.”

“흠, 호의로 그런 거 아닌데.”

장난스러운 어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의 얼굴을 돌아봤다. 옅은 푸른색의 눈동자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흑심이 가득하거든요.”

“…….”

“서이현 씨한테 붓 잡게 하려고.”

흑심이라는 단어에, 무엇을 기대한 건지 모르겠다. 노련한 그에게 실망감을 들킬 것 같아 얼른 시선부터 끌어 내렸다. 하지만 내 시야 안에 그가 머물지 않아도, 그의 시야 안에 내가 머무는 것만으로도 들키고 싶지 않은 것들이 모조리 공개돼 버릴 것 같았다.

그게 상대적으로 그보다 많이 어린 나의 방어적인 착각일 뿐이더라도, 그의 앞에서는 어쩐지 불리해지는 것만 같은 이 느낌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배치도가 실린 팸플릿을 둥글게 말아 쥐고 다른 손의 손바닥 위를 통통 두드리던 그가 팸플릿의 방향을 바꿔 내 어깨 위를 톡 두드렸다.

“숨어 지내야 하는 서이현 씨에게는 최상의 조건인 것 같은데. 누구에게 왜 쫓기고 있는진 몰라도, 팬텀 전속 작가가 되면 내가 전력으로 지켜 줄 텐데. 나 그런 거 잘해요.”

알파벳을 읽고 쓸 줄 안다고 뻐기는 어린아이 같은 그의 어조에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가벼운 어조로 일부러 말의 무게를 덜어 내고 있었지만, 그의 말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팬텀을 운영하는 그의 방식이나 수완을 봤을 때, 결코 손 놓고 자기 것을 뺏길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쫓기고 있는 것이 나 하나로 끝나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고, 그가 나를 지킨다 하더라도 그것은… 투자 가치가 있는 소속 작가이기 때문일 뿐이었다. 혹은 아무리 좋게 표현한다 하더라도, 재능 있는(그가 나를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으니까) 작가에 대한 담당 딜러로서의 비즈니스적 조치였다.

그 이상의 무언가이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게 있다면 차라리 모래와 형의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었지, 모래의 아버지에게도 별책부록에 불과할 나의 무사함이 아니었다.

단지, ‘지켜 줄 텐데’라는 그의 말이 이면에 가지고 있는 진짜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았을 뿐이다. 위험한 화법이었다.

쫓기고 있는 상황에서 안전을 염려할 수밖에 없는 나의 심리를 자극하며 그는 팬텀의 작가가 되었을 때의 장점을 한 번 더 어필했지만, 이 자리에서 대답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결정은 출장 이후에 하는 것으로 서로가 합의했으니까.

간판 작가인 슈슈가 사진작가였고, 드물게 조각가도 소속되어 있기는 했지만, 팬텀은 기본적으로 회화에 치중된 갤러리였다. 하지만 아무리 미술계 소식에 무지하게 지내 온 나라도, 현대 미술이 설치 미술이나 조형물, 관객 참여를 유도하는 퍼포먼스 등으로 영역을 확장한 지 오래라는 정도는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었다.

덕분에 행사장의 분위기는 권위적으로 점잔을 떨기보다 상당히 입체적이고 활기가 넘쳤다. 고전적이고 어두운 작품보다는 유머와 개성이 있는 작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얼핏 둘러보기에는 그랬다.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회화가 아닌 작품에는 크게 관심이 가지 않았다.

“최근 작가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네요.”

바닥에 모로 누워 있는 여성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그린 작품 앞에서 걸음을 멈춘 나에게 그가 흥미를 담아 말을 걸어왔다. 캡션을 확인하니 2002년의 작품이었다.

집에는 화집이 많았지만, 책을 사 주면 삽화만 보고 글은 읽지 않는 아이처럼 나는 늘 작품 자체만 눈에 담았을 뿐 작가의 이름이나 작품명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어머니나 아버지도, 선생님도, 나에게 화가들의 계보나 미술사에 대해 가르치려 한 적이 없었다.

“작가들에 대해서… 잘 몰라요.”

“보니까 걸음을 멈추는 게 다 예전 작가들 작품 앞이에요. 최소한 1990년대에 왕성하게 활동했던 작가들. 지금 이 작품은 비교적 최근이긴 하지만.”

“그런가요.”

작품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림 속 여성은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는 듯 보였지만, 이상하게도 좌절이나 무기력, 잠식이 아닌 펄떡이는 심장 같은 생명력이 전해져 왔다. 그러나 희망이나 꿈 같은, 낭만적인 낙관과는 달랐다. 누군가 그녀에게 해를 끼치더라도, 설령 죽음에 이르게 하더라도, 결코 그녀의 정신을 지배할 수는 없을 거라는 경고에 가까운… 거기에서 느껴지는 것은 오히려 광적인 투쟁이었다. 극한에서도 결코 자신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피가 흐르고 살이 뜨거운 인간다움.

실제로 작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무엇에 이끌려 작품을 그렸는지는 알 수 없어도 이 순간 내가 작품을 통해 전달받는 감상은 그런 것이었다.

볼수록 마음을 끄는 작품이었다. 할 수 있다면 굳은 물감의 결 위에 손을 대고 작가의 호흡과 에너지를 막연하게나마 느껴 보고 싶을 만큼.

“어떤 작품이 마케팅이나 갤러리의 파워를 떠나 작품의 순수한 예술적 가치만으로 평가받으려면, 요즘엔 10년 가지고도 모자라죠. 서이현 씨가 지금 흥미를 보이는 작품들은 전부… 최대 100년에서 최소 20년 이상 지난 지금에도 몸값이 계속 오르고 있는 작품들이에요.”

시선이 느껴져, 그를 바라보았다. 흥미로운 대상을 탐색하는 눈으로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나를 보는 눈이 빛나고 있었다. 햇빛 아래 잘게 부서지는 파도처럼 반짝거렸다. 부정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상당히 와일드한 작품들을 선호하네요. 평소 성격은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아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닌가?”

나의 성격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낮게 끄는 듯한 목소리가 이 순간 안으로 사적인 감상을 끌어오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 턱을 문지르며 내리뜬 눈꺼풀 아래에서 지그시 누르듯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한순간에 우리 두 사람 사이 공기의 색깔을 바꿔 버렸다.

나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것인지 단지 혼잣말인지 알 수 없는 마지막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와일드한 작품을 선호하는 것 같다는 그의 관찰은 틀리지 않은 것일 수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작품들을 좋아했다. 예전부터 그랬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나의 언어와 유사하기 때문에.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이기 때문에 그랬다.

우리가 그림 앞에 오래 머물자, 갤러리의 스태프가 다가와 그림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를 원하는지를 물었다. 그가 웃는 얼굴로 정중하게 사양했고, 우리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계속 나의 템포에 맞춰 뒤따르듯 움직이던 그가 뉴욕에서 온 한 갤러리의 부스 앞에서 먼저 걸음을 멈췄다. 정확히는 그 부스의 입구 쪽에 디스플레이되어 있던 한 작품 앞이었다.

평소의 초연함을 여전히 유지한 시선이었지만, 부분적으로 어딘가가 달랐다. 객관적인 냉정함이라기보다는 싸늘한 냉소에 가까웠다.

“이 작품은 어때요?”

그렇게 물으면서 나를 돌아본 그는 금세 표정을 바꿔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허공에 노크를 하듯 작품을 가리키면서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나를 바라봤다. 명랑한 어투가 반대로 그의 비틀린 심리를 드러내는 것 같았다.

다시 한번 그림을 차분히 들여다봤다.

가로×세로 4미터는 되어 보이는 캔버스는 핏빛의 짙은 레드를 바탕으로 다양한 컬러의 복잡한 곡선들이 얽혀 있는 추상화였다. 그러나 아무리 집중해 보려 해도 일관된 에너지나 감정이 느껴지기보다는 컬러감과 분위기만을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을 뿐이었다.

강렬한 색감을 사용하고 충분히 흥미로울 수 있는 커다란 곡선들을 대량으로 배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과감해 보이지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려 하고 있었으니까.

인우 형의 그림에서 느꼈던, 자신의 솔직하지 못함에 대한 솔직한 드러냄과는 전혀 달랐다. 솔직하지 못함을 감추려 하고, 거기에 더해 여러 기술과 장치들로 가짜인 자신을 만들어 그것이 진짜인 양 내세우려 하고 있었다.

작품을 감상하는 데에 힌트가 될 수 있을까 싶어 캡션을 확인했다. 제목은 <침대 위의 연인들>이었다. 보통, 추상화보다는 인물화나 사실화에 붙일 법한 제목이었다. 다시 그림을 바라봤다. 지도를 손에 쥐었지만, 안개에 둘러싸여 길이 보이지 않는 기분이었다. 힌트를 들어도 정답이 떠오르지 않는 퀴즈 같았다.

“잘… 모르겠어요.”

“…….”

더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하는 그의 시선은 총애하는 제자가 우문에 대한 현답을 내놓아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해 주길 바라는 스승의 그것 같았다. 그가 어떤 방향의 답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기에, 솔직하게 얘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컬러감이나 구성력 같은 테크닉은 보이는데… 그게 어떤, 메시지나 감상으로 연결돼서 떠오르는 건 없어요. 제가 말로 잘 설명을 못하는데… 인사나 안부, 아니면 사무적인 대화만 주고받은 상태에서 상대에 대해 잘 알 수는 없잖아요. 그런… 느낌이에요.”

“더 솔직해도 돼요.”

이 그림에 대해 내가 더 혹독한 감상을 숨기고 있다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예의 차릴 것 없이 바닥까지 솔직하게 쏟아 내 보라며 등을 떠밀고 있었다. 눈을 반짝이며 입가에는 미소까지 띤 그를 바라보다,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형식만 있고 내용이 없는… 멋진 그릇과 상차림은 있는데 정작 맛을 보고 음미할 음식이 없는… 저에게는 그런 느낌이에요.”

타인의 작품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순전히 그림을 제대로 공부해 본 적 없는 나의 개인적인 감상일 뿐이며, 작가가 어딘가에서 이 말을 듣고 있는 게 아니라 하더라도.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낸 작품이건, 그렇지 않은 작품이건, 어쨌든 그것은 한 개인에게서 떼어져 나온 조각이었고, 찬사가 아닐 바에야 굳이 그것에 대해 말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내 기분과 달리 그는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림을 완전히 등지고 나를 마주했다. 움직임이 경쾌하기까지 했다. 입가에 미소가 흘러넘칠 듯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로 인해 보여 준 가장 풍부한 미소였다.

뭐가 그렇게나 좋은 것일까.

“이러니까 내가 꼭 서이현 씨를 점쟁이처럼 생각하는 것 같네요. 이 그림에선 뭐가 보여요, 저 그림에선 뭐가 보여요.”

그러고는 허리를 조금 숙여 나와 시선의 높이를 맞췄다.

“근데. 그 점쟁이, 진짜 용하긴 하네.”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순간적으로 그에게서 섬뜩한 서늘함이 느껴졌다. 눈 속에서 푸른빛이 강해지면서 얼음꽃이 튀는 듯했다. 그 섬뜩함이 나를 향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뒷목이 오싹했다.

내가 용하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그 그림에 대한 나의 감상에 그가 완전히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그는 그 그림에, <침대 위의 연인들>에, 아주 싸늘한 냉소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작품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도와 드릴까요?”

그와 나는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배가 나오고 머리가 살짝 벗겨지기 시작한 중키의 중년 백인 남성이 부드러운 미소로 말을 걸어왔다.

그에게는 대체로 모두가 상냥했다. 아름다운 외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판매하는 상품이 무엇이든 마음에 들면 그 자리에서 바로 구입할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을 갖췄을 것 같은 ‘고객’에게는 누구나 친절해지기 마련이었다.

“제가 직접 캐스팅한 작가라 자신 있게 추천하고 있죠. 최근 뉴욕 미술계에서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젊은 작가 중 한 사람입니다. 미스터라면 그의 이름쯤은 들어 보셨을 것 같네요. 관능적인 색감과 자신감 넘치는 표현으로 주목받고 있죠. 20대의 한국인 작가인데, 최근 동양 출신 작가들이 세계적으로 강세를 보이는 추세라 투자 가치도 높은 작가랍니다. 작풍이 미스터와 굉장히 어울릴 것 같네요. 이 작품 외에도 같은 작가의 작품이 두 점 더 있는데 둘러보시겠어요?”

언뜻 동글동글 푸근한 인상이었던 백인 남성은 자세히 보니 눈빛의 광채가 예사롭지 않았다. 여유가 느껴지는 표정과 달리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남자의 말들은 우리에게, 아니 그에게 틈을 주지 않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까지의 학습으로 익힌 나의 영어 실력으로는 남자의 말을 간신히 따라잡는 것조차도 버거웠다.

직접 캐스팅한 작가라는 설명에 남자의 목에 걸린 ID카드를 확인하니 영어권의 드라마나 영화에서 흔히 접할 법한 평범한 이름 앞에 Director라는 직함이 붙어 있었다. 단순한 스태프가 아닌 갤러리의 책임자급이었던 모양이다.

“관능적이고 자신감 넘친다….”

비스듬히 몸을 틀어 다시 반쯤 그림을 향한 그는 남자의 말을 곱씹듯 중얼거렸다. 팔짱을 낀 채 돌돌 말아 쥔 팸플릿 끝으로 자신의 볼을 톡톡 두드리면서. 그리고 다시 얼굴만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나하고 저 그림이 어울려요?”

한국어로 그렇게 물었다.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자신이 들은 말에 상당한 모욕감을 느꼈다는 인상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그의 질문에 고개를 저어 답했다.

그가 웃으면서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주무르듯 어깨를 한 번 강하게 움켰던 손이 머리로 옮겨 가 가볍게 머리카락을 흩트린 뒤 멀어졌다.

“…….”

전혀 예상하지 못한 스킨십이었다. 주한이 형이나 유니 누나와는 이런 식의 스킨십이 잦았지만, 그것이 나에게까지 옮겨 온 적은 아직 없었다.

단 한 번이긴 해도 우리는 서로 ‘침대 위의 연인들’이었던 적이 있는 사이였지만, 일상 속에서 이런 식으로 일어나는 스킨십은 우리에겐 돌발적인 사고처럼 발생한 잠자리보다 더 어색한 접촉인 것처럼 느껴졌었다. 지금까지는.

이 행사장 한가운데서 그가 격렬한 키스를 퍼붓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로 열이 올랐다. 그가 디렉터를 향해 상체를 돌린 틈을 타 팔을 들어 땀이라도 닦는 척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나 실내는 약간 서늘할 정도로 에어컨이 강하게 가동되고 있었다.

영 의심쩍은 것을 대하듯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으며 그가 다시 한번 그림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흠… 저도 동종업계 종사자라서요. 작품을 실제보다 부풀리고 포장하는 건 저도 다 써먹고 있는 장사 기술이긴 하지만, 글쎄요…. 15,000달러에 구입해 1~2년 안에 반 토막 날 게 뻔한 작품을 사들였다가는 괜히 갤러리의 안목만 의심받게 되거든요.”

그의 말의 내용은 거의 잔인한 수준이었지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 말투나 표정에서는 작품과 작가, 그리고 작가를 발굴했다는 디렉터에 대한 비아냥거림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느낀 그대로를 ‘아무런 포장 없이’ 전달했을 뿐이었다.

몇 달 사이, 이제는 나 역시 그의 화법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특히나 일과 관련해서는 돌려 말하거나 포장하는 법이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유니 누나와 주한이 형에게도 감정에 대한 고려를 배제한 채 지시를 내릴 때가 있었다.

그는 아마도 말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것을 포장해 전달하는 것은 비효율적일 뿐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그러나 물론 그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는 그 화법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보통의 세계에서는 어느 정도의 포장이 곧 예의였으니까.

디렉터 역시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기름기로 번들거리는 둥근 얼굴이 어쩔 수 없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 역시 그 말의 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홍콩 달러도 아닌 USA 달러로 15,000이라니. 내가 아무리 아마추어라도 지금 이 그림에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상냥한 미소와 함께 다가와 입 안의 혀처럼 굴었던 디렉터는 미련 없이 그림 앞을 떠나 다음 부스로 향하는 그에게는 간단한 인사조차도 하지 않았다. 그 역시도 남자의 돌변에는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를 뒤따라 서둘러 부스를 떠나면서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았다.

본의 아니게 타인의 작품을 혹평했지만, 지금의 내가 만약 붓을 들게 된다면 저런 그림을 그리게 될 것 같았다. 자기를 자연스럽게 내보이지 못하고 자신을 부정하고 꾸며 내는 그림.

두려웠다. 하지만 그것을 그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침대 위의 연인들>이 내게 남긴 찌꺼기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가 다른 어떤 그림도 아닌 저 그림 앞에서 나에게 감상을 물은 것이 우연이었을까. 그의 눈 속에 타오르던 푸르스름한 냉기가 마음에 걸렸다. <침대 위의 연인들>. 틀리게 본 것이 아니라면 작품의 작가명은 ‘SEONEW’였다. 서뉴. 20대의 한국인 작가. 잊지 않기 위해 그 이름을 곱씹듯 마음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 ■ ■

“미스터 라우.”

공중에 띄운 반투명한 조형물로 공기의 흐름을 보여 주는 실험적인 설치 작품이 전시된 홀을 가로질러 다음 부스로 막 접어들려는 찰나, 누군가 아주 명랑한 어조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보다 머리 하나 반 정도는 더 작아 보이는, 날렵하고 야무진 인상의 동양인 남성이었다. 그가 곧 비즈니스 스마일을 지으며 상대의 악수에 응했다.

“예전에 홍콩에서 같이 일했던 사람이에요. 잠깐 인사만 나누고 올 테니 이 부스 좀 둘러보고 있어요. 관심 있어 할 만한 작품이 꽤 있을 겁니다.”

다른 곳으로 움직이지 말고 꼭 이 부스에 있으라는 말을 한 번 더 강조한 뒤, 그가 과거의 동료와 함께 코너 너머로 사라졌다. 광택이 흐르는 몸에 잘 맞는 턱시도 슈트까지 근사하게 차려입은 동양인 남성은 누군가 그를 반가워할 다른 사람들의 무리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그를 데리고 가는 것 같았다.

어쨌든 이곳은 그가 태어나 자란 도시였고, 서울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 일을 하기도 했던 곳이니, 어디에서 지인을 만난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 없이 혼자 부스 안으로 들어가 그림을 둘러보기가 조금 망설여졌지만, 부스 안쪽의 한 스태프가 편안하게 둘러보라는 듯 살짝 웃으며 인사를 건네준 덕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대형 갤러리인지 부스의 크기가 상당했고, 관람객도 많은 편이었다. 덕분에 스태프들이 나에게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 차라리 다행이었다.

몇 작품을 채 둘러보기도 전에 그가 왜 내가 관심을 보일 만한 작품들이 있을 거라고 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강렬하게 또는 창백하게, 노골적으로 또는 냉정하게. 표현의 방식을 달리할 뿐, 그곳에는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이야기하는 작품들이 가득했다.

“3,500만 달러에 벌써 판매됐다니, 아쉽죠? 조금만 빨랐어도 소장할 수 있었을 텐데.”

옆을 돌아보니 모르는 얼굴이었다. 농담조로 말을 건네 온 남자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아… 페어에 참석한 갤러리의 스태프인가 봐요.”

“네.”

“어디… 서울. 갤러리… 팬텀.”

상체를 뒤로 기울여 내 목에 걸린 ID카드를 들여다본 남자는 나의 소속을 소리 내어 읽었다. 그리고 악수를 청했다. 눈높이는 나와 비슷한데, 나보다 훨씬 커다란 손이었다. 잠시 그 손을 내려다보다 머뭇거리며 맞잡았다. 피식거리는 웃음소리가 나의 당황과 어색함을 전부 내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비웃음은 아니었다.

“난 이런 사람이에요. 뉴욕에 있는 갤러리 소속인데, 홍콩 출신이라 이쪽도 잘 알죠.”

한 손에 샴페인 글라스를 든 남자는 재킷 주머니에서 어렵게 케이스를 꺼내 명함을 한 장 건넸다. 심플한 직사각형의 아트지에는 영어로 남자의 소속이 소개되어 있었다.

남자는 동양과 서양의 혼혈 같았다. 얼굴의 윤곽이나 머리카락은 동양적 느낌이 강했지만, 눈동자는 진한 푸른색이었다. 그 이질감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그를 처음 봤던 때의 충격이 떠올랐다. 이런 사람이 바로 골든 알파가 아닐까 싶었던….

밋밋하게 서 있는 나를 상대로 앞에 걸린 그림에 대해 떠드는 남자에게서는 그런 종류의 위압감이나 독특한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동양과 서양의 혼혈이라는 점과 푸른 눈이라는, 다소 범위가 넓은 공통점이 있기는 했다.

“일요일에 소호 쪽에서 우리 갤러리가 주최하는 파티가 있는데, 괜찮으면 다른 스태프들하고 같이 들러 줄래요? 그쪽이 와 주면 즐거울 것 같은데. 갤러리들끼리 교류도 하고, 운이 좋으면 사적으로 여행의 추억을 만들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고….”

목소리를 조금 낮추면서 그렇게 말하던 남자의 바로 등 뒤로 조금 소란스러운 한 무리가 스태프의 안내를 받으며 저쪽 섹션의 그림 앞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그들을 피하려 몸을 돌려 내 쪽으로 바짝 다가선 남자는 턱을 살짝 치켜들어 내리뜬 눈꺼풀 아래서 나를 묘하게 바라봤다. 비슷한 키 때문에, 고개를 잘못 돌리면 코끝이 스칠 것 같아 몸이 위축됐을 정도로 거리가 좁았다.

“알파? 베타?”

가까이에서 보니 그의 눈과는 전혀 달랐다. 그의 눈은 이렇게 광물 같은 뚜렷한 푸른색이 아니라, 좀 더 위태롭고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섬세한… 파도의 거품이나 혹은… 그래, 유령처럼….

“서이현 씨.”

뒤에서 나를 부르는 그 목소리가 고개를 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곧바로 뒤를 돌아봤다.

그가 부스의 입구에서부터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평소엔 곧 사라질 것처럼 섬세한 눈이 지금은… 격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침대 위의 연인들> 앞에서 보여 줬던 냉기와도 전혀 달랐다.

“와… 그냥 봐도 골든 알파네. 저런 거 데리고 다니는 줄 알았으면 안 건드렸지.”

고개를 저으며 혼잣말처럼 그렇게 중얼거린 남자는 만나서 반가웠다는 짧은 인사와 함께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뭡니까, 저거.”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남자와 자리를 맞바꾸듯 내 앞에 멈춰 선 그가 손에 들린 명함부터 낚아채 갔다.

“뉴욕에서 온 갤러리의 관계자인 것 같은데… 일요일에 파티가 있으니까, 다른 스태프들하고 같이 오라고….”

왜 변명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험악한 그의 표정이 설명을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명함을 살펴본 그는 좀 전의 남자가 사라진 쪽을 한 번 쳐다봤다. 그는 남자의 행적을 좇고 나는 그런 그의 눈을 좇다가, 문득 사라진 남자의 질문이 떠올랐다.

남자는 나에게 알파인지 베타인지를 물었다. 오메가는 선택지에조차 없었다.

“일요일엔 이미 다른 파티에 초대받았습니다. 그럼 이건 필요 없겠죠.”

알겠다고. 끄덕이기 위해 숙였던 고개를 들기도 전에 이미 그는 손안의 명함을 구겨 버렸다.

오직 이 남자만이 나를 오메가로 의심하고 있었다.

“수키킴과는 금요일로 일정이 잡혔어요.”

“…….”

구겨 버린 명함을 버리지 않고 재킷의 안주머니에 넣으면서 그가 빠르게 말했다.

“마지막 날 느긋하게 만날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급하게 잡은 약속이라 그날밖에는 시간을 얻어 낼 수가 없었어요.”

“아닙니다. 10분이라도… 감사해요.”

잠시 말없이 나를 내려다본 그는 이마에서부터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애들한텐 비밀로 해요. 수키킴 만나러 간다고 하면 데리고 가 달라고 난리가 날 테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엔 나를 보는 그의 눈이 조금은 차분해졌다. 나의 안전을 확인하듯 얼굴 구석구석을 시선으로 더듬은 그는 대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욕설을 낮게 뱉으며 눈길을 거두어 갔다.

이후에 본 작품들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엔 온통 수키킴 선생님을 만난다는 생각뿐이었다.

선생님을 만나게 해 주겠다는 말에 이곳에 오기로 마음을 정했지만, 그동안은 실감이 나지 않았었다. 이제야 어느 정도 현실로 느껴지는 흥분에, 바닥에서 발이 한 뼘쯤 떠 있는 기분이었다.

새삼 그가 대단해 보였다. 수키킴 선생님을 만나게 해 줄 수 있는 능력도 물론 그렇지만, 그런 번거로운 과정까지 기꺼이 감수하면서 나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려는 집념 같은 것이… 그 확고함 자체가 놀라웠다.

그는 타인인 나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건 할아버지가 형의 인생에 대해, 임 선생이 모래의 인생에 대해 가졌던 확신과는 성격이 달랐다.

그는 그 정도로 자신의 감을 신뢰하는 것일까. 내가 지금 그릴 수 있는 것은 ‘서뉴’라는 작가가 그린 것처럼 잔뜩 치장한 가짜일 뿐일 텐데도?

행사장을 한 바퀴 돌고 우리 부스로 돌아간 그는 목이 꽤 말랐는지 샴페인부터 한 잔 가득 따라 들이켰다. 그러고는 견과류를 몇 알 집어 팝콘처럼 입 안에 던져 넣은 뒤 곧바로 그 접시를 멀리 밀어 놓았다.

“아, 누가 이것 좀 치워 줘라. 이런 건 좋아하지도 않는데 앞에 있으면 자꾸 먹게 된다니까.”

“졸릴 때 집어 먹으려고 갖다 놓은 거예요. 다른 부스와 달리 누구네 부스는 세 시간 동안 뽁뽁이 푸느라 중노동을 한 뒤거든요.”

“흠, 내가 알기로 그 누구네 부스는 다른 모든 부스와 달리 F호텔에서 묵는 거로 알고 있는데.”

“제길. 할 말이 없다.”

주한이 형과 얽혀 농담을 주고받는 그는 어느새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 ■ ■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게 또 한 번 손안의 핸드폰을 내려다보다 숨을 길게 내쉬며 전화를 옆에 내려 두었다. 전화에서 조금이라도 의식을 떨어뜨리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나 전면창 앞으로 다가갔다.

반도의 서쪽 끝 침사추이에서부터 동쪽의 카오룽베이까지가 한 시야 안에 막힘없이 펼쳐져 있었다.

홍콩의 야경이라 하면, 일반적으로는 빅토리아 피크에서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는 조망이 가장 유명하고, 그다음은 고층 빌딩들이 촘촘하게 들어선 본섬을 반도 쪽에서 바라보는 구도가 인기가 많다고. 누나와 형이 그렇게 알려 줬지만, 나에게는 지금 눈앞의 풍경만으로도 충분했다.

항구와 아주 가까운 위치까지 들어선 건물들과 항만의 가장자리를 따라 불을 밝힌 조명들은 할아버지 댁의 오르막에서 바라보던 항구의 풍경과도, 옥탑방 평상에서 내려다보던 서울의 야경과도 달랐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 전혀 예정이 없었던 아주 먼 곳까지 와서, 아주 낯선 상황 속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 같았다.

이 방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서 2박을 하고 난 뒤였지만, 다른 사람의 꿈속으로 초대된 것처럼 여전히 낯설고 어색했다.

몇 달 사이, 환경이 여러 번 바뀌고, 어울리는 사람들이 달라지고, 예상치 못한 사건과 경험들이 겹치면서… 이제 나는 이 낯선 도시까지 흘러와 있었다. 그 모든 여정이 실제로 내가 지나온 나의 과거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두꺼운 유리를 사이에 두고 바라보는 홍콩의 야경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

뒤를 돌아보았다.

평소와 달리 벨소리로 설정해 둔 전화가 침대 위에서 빛을 뿜으며 단조로운 음을 찍어 내고 있었다. 심장이 진동하며 반응을 하기에, 이것이 타인의 꿈속이 아님을 알았다. 등 뒤에서부터 겨드랑이와 옆구리를 타고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몸이 보여 주는 반응만이 어쩌면 가장 생생한 현실감이었다.

적어도 이 순간은, 혹시 꿈일지라도 나의 꿈속이었다.

“…네.”

[내려와요. 정문 앞이에요.]

그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통화 내용은 그뿐이었다.

심호흡을 한 뒤 방을 나섰다.

베이지톤의 대리석으로 꾸며진 고상한 복도와 엘리베이터 홀, 근사하게 치장한 사람들이 오고 가는 웅장한 로비를 빠르게 가로지르며 반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을 쓸어내렸다.

정문 앞에 멈춰 서서 그의 모습이나 그의 차를 찾으려 좌우를 살피는데, 도어맨 중 하나가 다가와 ‘미스터 라우가 기다리고 있다’며 나를 안내했다.

호텔 입구의 앞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것은 공항에서 호텔로 올 때 탔던 것과는 다른 차였다. 훨씬 덩치가 작았지만 마찬가지로 고급 차량이었다.

도어맨이 열어 준 뒷좌석에는 그가 타고 있었다. 안쪽 자리의 그가 어서 타라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여 보였다. 엉거주춤 뒷자리에 올라타자 도어맨이 문을 닫아 주었고, 비상등을 켜고 대기 중이던 차량이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그가 직접 운전했던 ‘팬텀’과 달리, 이 차는 홍콩의 도로 상황에 맞게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었고, 낯선 중년 남성이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그 녀석들 만나면 어차피 술 마시게 될 거라. 오늘 운전해 주실 분이에요.”

“네….”

낯설어하는 내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그가 기사분을 소개해 주었다. 나는 영어로 짧게 인사했고, 온화한 인상의 기사님은 살짝 뒤를 돌아보며 묵례로 응했다.

유니 누나와 주한이 형은 홍콩의 불금을 즐기겠다며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준비를 하고 외출한 상태였다. 나는 호텔에서 좀 더 쉬다가 연락을 하겠다고 해 두었다. 선생님을 뵌 뒤에 두 사람과 합류하자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방에서 뭐 좀 먹었어요?”

기사님과 인사를 나누는 나의 쭈뼛거리는 태도가 재미있었는지, 그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는 웬 카메라 하나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의 손안에 쏙 들어갈, 그리 크지 않은 카메라였다.

그는 우리에게 호텔에 묵는 동안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룸서비스를 이용하라고 했지만, 음식을 삼킬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허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허벅지 옆으로 내려 둔 가방의 지퍼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긴장할 거 없어요. 편하게 대해 주실 겁니다.”

조금은 안심이 되는 그의 말이 고마웠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지퍼를 만지작거리는 나의 손을 한참 쳐다보았다. 긴장하지 말라며, 꽉 잡아 주기라도 할 것 같은… 그런 눈길이었다.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호텔 입구를 빠져나와 대형 쇼핑몰 앞을 지난 자동차는 좁은 오르막을 따라 소호 지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렇게 와 보고 싶었던 거리였지만, 지금은 눈에 들어오지가 않았다.

“만나면… 뭘 하고 싶어요?”

“아….”

무의미하게 창밖을 향하고 있던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얼빠진 낮은 감탄사 뒤에 내가 꺼낸 말은 야무지지 못했다.

“드릴 말씀을 미리 생각해 오는 게 좋았을까요?”

유리창에 팔꿈치를 괴고 머리를 기댄 채 이쪽을 보고 있던 그가 고개를 저으며 몸을 바로 세웠다.

“아니요, 상관없을 겁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상대를 편하게 해 주는 분이거든요. 나와는 달리. 편견이니 뭐니 해도 예술가치고는 상당히 드문 성격인 건 사실이죠.”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그와 나 사이에 가로놓인 팔걸이의 서랍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그러고는 창밖을 힐끔 살핀 뒤 다시 담배를 제자리에 넣고, 대신 카메라의 긴 스트랩을 목에 걸었다.

떠들썩한 소호의 거리에서 자동차가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뒤섞인 소호의 금요일 밤은 여러 펍(Pub)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와 벌써부터 흥이 오른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고함으로 흥청거렸다.

우리는 맞은편 건물과의 사이에 가파른 오르막을 끼고 있는, 코너에 위치한 건물 앞에 내려섰다. 1층에 작은 테라스가 딸린 카페가 입점해 있었고, 테라스의 테이블에서는 서양인과 동양인이 섞인 5인 정도의 한 그룹이 병맥주를 마시며 유쾌하게 떠들고 있었다.

“이쪽입니다.”

설마 이런 곳에서 선생님을 만나는 건가, 생각하는 사이 그가 2층으로 연결되는 계단을 향해 앞장섰다. 그는 누군가를 호출하는 대신 계단의 입구에 설치된 도어록의 잠금을 직접 해제했다. 소호의 대부분의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낡고 노후된 외관과 달리 내부는 상당히 현대적이고 미니멀했다.

밟기도 조심스러워질 만큼 흰 계단을 밟고 올라가니 흰 문이 나왔다. 그를 따라 들어선 실내는 사위가 모두 흰색이었다. 흰색 타일 바닥과 흰색 천장, 흰색 벽. 그 한가운데에 고요히 놓인 흰색 테이블과 의자.

처음 팬텀에 발을 들였던 때가 떠올랐다. 그러나 조금도 때가 타서는 안 된다며 청결과 결백을 요구하는 엄격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바로 몇 걸음 앞에서는 거리 전체가 흥청거리고 있었지만, 이 공간 안에는 한낮의 빛이 가득 고인 듯했다.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낡은 아파트의 거실을 비추던 포근하고 환한 빛을 연상시키는 그런 흰색이었다.

“여긴….”

“수키킴의 작업실이에요.”

“…….”

“잠깐 앉아서 기다려요. 곧 나오실 테니까.”

레스토랑이든 어디든, 그가 준비한 외부의 장소에서 뵐 거라고 생각했지, 나 같은 외부인의 작업실 방문을 허락하실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선생님의 작업실에 와 있다는 자각만으로도 손바닥이 축축해져 오는데, 폭탄을 툭 안겨 준 그는 덤덤하게 뒤쪽의 복도로 사라졌다.

그는 앉아 있으라고 했지만 나는 테이블 위에 가방을 내려 뒀을 뿐 그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두 사람분의 걸음 소리, 뭔가에 대해 가볍게 불평하고 변명하는 듯한 일상적인 이야기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복도 끝에서 그와 함께 선생님이 등장했다.

“어서 와요. 반가워요.”

사진으로 뵙고 예상했던 것보다 키가 크시구나…. 그런 멍청한 생각 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서, 선생님이 내 앞에 다가와 악수를 청하실 때까지 그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것이 혹시 무례하게 보이지는 않았을까, 얼른 시선을 끌어 내리며 선생님이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얇고, 야위고, 단정하고, 따뜻한 손이었다.

“아위에게 얘기 듣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한 걸음 뒤쪽에 선 그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한 선생님은 이번엔 아예 상체를 돌려 그를 돌아보았다.

“아, 한국에서는 쿤이라고 하던가?”

뭐라고 하든 크게 상관없다는 듯 그는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내 예상보다 두 분은 훨씬 친근한 관계인 것 같았다.

“홍콩에서는 이름 중 한 글자를 따서 앞에 ‘아’자를 붙여 애칭을 만들거든요.”

다시 나를 돌아본 선생님의 설명이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작은 궁금증이 풀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쿤’이라 불렀지만, VIP 행사일에 슈슈가 그를 다른 호칭으로 불렀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분명 ‘아위’라는 이름이었다.

홍콩에서 학생 시절을 함께 보낸 사이라면 홍콩식 애칭으로 그를 부른다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특별한 관계임을 과시하는… 그러니까 연인이나 그와 비슷한 사이의 애칭 같은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아트페어 일 힘들죠? 정신도 없고. 고생이 많아요.”

선생님은 격려하듯 내 팔을 가볍게 붙잡았다. 이 자리에서 늘 이런 식으로 담소를 나눴던 사이처럼 친근한 분위기였다. 경계심이나 예민함, 대가들에게서 간혹 보이는 독특한 괴팍함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참, 슈슈는 작품이 점점 좋아지던데? 여기서도 미술 잡지 중에 ‘바디 투 소울’ 전시를 다룬 기사가 있어서 잘 봤지.”

“오늘 시카고의 갤러리와 전시 계약을 했어요. 페어에 가지고 왔던 팬텀 소유의 슈슈 작품 전부 시카고로 가지고 갈 겁니다. 일단 시카고에 걸리기만 하면 판매까지 이어지는 건 시간문제죠.”

그때까지 목에 건 카메라만 만지작거리면서 대화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 있었던 그가, 테이블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며 말했다. 들뜬 어조는 아니었지만, 입가의 미약한 미소를 숨기려 하지는 않았다.

칼라가 있는 티셔츠에 청바지와 로퍼 차림이라 그런지, 오늘의 그는 평소보다 훨씬 더 캐주얼하고 어려 보였다. 슈트를 입었을 때보다 느슨해진 자세와 그의 체격에 비해 장난감 같아 보이는, 목에 건 작은 카메라도 거기에 일조하고 있었다.

“자신감이 상당하네.”

선생님은 그를 놀리듯 내 쪽을 향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작품에 동양적인 느낌이 점점 강해져서 그쪽에서는 아마 열광할 겁니다. 오프닝 행사에 잠깐 얼굴까지 비추게 하면 더 이슈가 되겠죠. 인터뷰도 몇 건 진행하면 더 좋구요.”

그의 발언은 의외였다.

그가 작품을 오직 미학적 가치로만 판단할 수 없는 딜러의 입장이라는 것도, 마케팅 면에서는 가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냉정한 사업가적 기질을 보이는 오너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슈슈만큼은 예외일 거라 생각했었으니까.

작가의 매력적인 외모나 작품 외적인 요소들로 이슈를 형성하는 방식이, 그에게는 슈슈의 명성과 작품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한 전술에 불과할 뿐, 그가 슈슈의 작품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가 슈슈의 작품을 아낀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발언은 나를 놀라게 했다.

“어이쿠, 여전히 마케팅이 공격적이시네.”

선생님은 이번에도 나를 향해 동의를 구하듯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그의 방식에 100퍼센트 찬성하지는 않는다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더 본격적인 반감을 드러내시지는 않았다.

“계속 여기 이렇게 서 있을 순 없고…. 말주변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 뭐… 좋은 얘기 해 줄 게 없는데. 괜찮으면 작업실이라도 천천히 둘러볼래요?”

박수를 치듯 두 손을 맞부딪치며 선생님은 주의를 환기했다. 생각지 못한 제안에 나도 모르게 눈으로 그를 찾았다. 그는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영광입니다.”

“영광까지야.”

내 어깨를 툭 두드리며 선생님이 웃었다.

화분이나 그림 한 점 장식되어 있지 않은 홀에 그를 남겨 두고, 선생님과 나는 좀 전에 그와 선생님이 나타났던 복도로 향했다. 긴장과 떨림으로 심장이 저릴 정도였지만, 선생님은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에게 현관문을 열어 주듯 망설임 없이 작업실을 공개했다.

작업실은 홀과 마찬가지로 온통 흰색이었지만, 그림을 그리는 공간답게 구석구석 손때와 먹의 흔적이 자연스럽게 남아 있었다.

미술의 역사나 화가들의 계보에 대해 잘 모르는 나였지만, 선생님에 대해서는 아니었다.

길었던 활동기 동안 여러 화풍을 거쳐 온 선생님은 3년 전쯤부터 오직 먹만을 사용한 정통 동양화에 몰두하고 계셨다. 덕분에 작업실에는 묵직한 먹의 향이 감돌았다.

프로 화가, 그것도 대가로 인정받는 화가에게 작업실을 공개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부모님이 공동으로 사용하던 작업실이 과거 어렸던 나에게 불러일으켰던 질투 어린 소외감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만화를 그리고, 아버지가 유화를 그리던 그 공간은, 두 분만이 공유할 수 있고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영역 같았다.

거실이나 식탁에서 부모님은 나의 부모님으로서 있어 주었고, 그분들을 아주 가깝게 느낄 수 있었지만, 두 분이 작업실로 들어서는 순간 그분들의 세계에서 내가 배제되는 듯한 감각이 어린 나를 불안하게 했었다.

그곳은 온전히 두 분만의 공간이었고, 공간 이상의 의미였다.

작가마다 작업실이 갖는 의미는 다르겠지만, 작품 속에 자기를 녹여 내는 화가들에게는 적어도 스스로를 마주하는 공간일 것이다. 사적이라고 말하기에도 부족할 정도로 은밀한, 선생님의 그런 내실에 발을 들였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특별했다.

이곳이 홍콩이라는 지리적 감각도 무의미해졌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나 떠들썩했던 거리의 소음도 완벽히 차단되고 있었다.

“별로 볼 게 없죠? 다양한 재료를 다루는 편도 아니어서, 뭐… 그냥 이렇게 작업해요.”

커피, 괜찮아요? ―그렇게 물으며 머그를 건네는 선생님에게 감사를 표하고 잔을 받아 들었다.

“아이스로 줄 걸 그랬나? 이 정도 온도에서 아이스를 마시면 체온이 내려가서 항상 따뜻하게 마시다 보니까.”

“아니에요. 잘 마시겠습니다.”

천장형 에어컨이 약하게 가동되고 있는 실내에 먹향 사이로 커피향이 섞여 들어갔다. 커피를 홀짝이며 조심스럽게 계속해서 실내를 둘러봤다.

작업을 마친 작품들은 다른 방에 보관하시는지, 방 안에 그림이라고는 현재 작업 중인 것으로 보이는 대형 산수화와 그 맞은편 벽에 걸린 인물화 한 점뿐이었다.

태산에 몸을 감아 머리를 숨겨도 용은 여전히 용이었다.

미완성임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의 산수화는 압도적이었다. 평생 그림 속에 자신의 뼛조각과 살점을 녹여 온 대가만이 과시나 허풍 없이 작품 속에 담아낼 수 있는 대범한 기백과, 동시에 천하를 품을 듯 너그러운 관용이 그대로 살아 있어,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전신에 소름이 끼쳤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현재의 내 마음을 더 잡아끄는 것은 맞은편 소파 위의 그림이었다.

색깔이 있는 먹을 이용해 수채화처럼 그린 인물화는 선과 선의 경계가 모호하게 번져 어린아이가 그린 듯 천진했다. 하지만 분명 선생님의 작품이었다.

“마음에 들어요?”

내 시선을 느꼈는지, 선생님이 뒤돌아 그림을 보며 물었다. 두 손으로 머그를 쥐고 커피의 온기를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작품은 거의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본 적이 없는 작품이에요.”

대답하는 입술이 조금 떨렸다.

소파 앞 테이블에 머그를 내려놓은 선생님이 벽에서 그림을 떼어 냈다. 8절 정도일까. 그리 크지 않은 사이즈였다.

“이 그림, 가져가요.”

“…….”

너무 놀라서 반응을 보일 수가 없었다. 선생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눈을 크게 떴다.

“아,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 그럴 순 없어요.”

뒤늦게 정신이 돌아와 머그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적극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어쩔 수 없이 머릿속에 선생님 작품의 금전적 가치가 떠올랐다. 이렇게 표현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런… 고가의 선물을 받을 수는 없었다.

선생님이 작품을 가지고 창가의 선반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이현 씨도 말로 하는 데 서툴죠?”

“…….”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날아든 질문에, 뒤따라가려던 발이 멈췄다. 선생님은 흔히들 말하는 말주변이나 사교성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를 처음 만난 사람은 알 수 없는, 나에게 가장 편안한 언어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도 그래요. 그러니까 이건 내가 이현 씨한테 주는 편지나 카드라 생각하고 받아 줘요.”

벌린 입이 그저 벙긋거리기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팔을 늘어뜨린 채 중얼거렸다.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은 지금의 나는, 더더욱 저 작품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 같았다.

선반 위에 그림을 올려 둔 선생님이 나를 향해 돌아섰다.

“그 그림.”

“…….”

“아위에게는 <소외>가 위로였어요.”

“…….”

선생님이 <소외>를 기억하고 계셨다는 사실에 한 번.

그 그림이 그에게 갖는 의미가 위로였다는 것에 또 한 번.

선생님의 짤막한 한 문장이 나를 휘청거리게 했다.

그 그림을, <소외>를 좋아했었냐고. ‘그날 밤’ 나는 그에게 물었었다.

「다 잊게 해 줄까요?」라며 침대 위로 올라온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나는 그를 거부하지 않았고, 부옇게 녹은 머릿속이 휘저어지는 듯한 쾌락 끝에, 그의 말대로 모든 것을 잊고 깊은 잠 속으로 가라앉을 수 있었다.

만약 그 깊은 휴식이 그가 나에게 주고자 했던 대답이라면, 그림을 좋아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일 뿐이다.

말을 통한 정확한 답변을 이곳에서, 선생님을 통해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아위는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보면서 자랐고, 갤러리의 오너로서도 개인 컬렉터로서도 가치 있는 작품들을 소유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그 애를 가장 크게 흔들었던 작품은 아마 <소외>일 거예요.”

등 뒤의 선반에 기대서면서 선생님은 자신을 감싸듯 팔짱을 꼈다.

“<소외>가 유명 작가의 홍콩판 소설 표지로 세상에 풀렸을 때, 그런 식으로라도 타인과 그 그림을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을 계속 못마땅해했을 만큼… 아위는 그 그림이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기를 바랐을 정도로 집착을 보였어요.”

믿기지 않는 이야기들이었다. 선생님을 뵙는다는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긴장을 버텨 내야 했던 나에겐…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이상의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나 듣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이현 씨는 자신의 감정을 세상에 호소했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듣고 반응한 거죠. 아위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아니지만, 누구보다 그림 속의 언어에 예민해요. 그래서 지금 갤러리 일을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겠죠. 가끔씩 자기는 오직 경제적 가치만을 기준으로 그림을 보는 척하지만.”

그쯤에서 선생님은 피식 웃었다. 그 느슨한 웃음이 그의 입매와 어딘가 겹쳐 보였다.

사선으로 바닥을 내려다보던 선생님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이현 씨의 그림이 적어도 한 사람에게는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작용했던 거예요. 누구도, 가족이나… 부모조차도 줄 수 없었던… 보편적이지 않은 이유로 소외를 느끼는 사람이 자신만은 아니라는… 그런 공감을 준 거죠…. ‘소외’에 대한 공감.”

‘소외’에 대한 공감.

그것은 수키킴 선생님의 심사평에서 내가 느낀 감정이었다.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부부이자, 이해심 많은 부모인 두 분 아래서 나는 반드시 완벽하게 행복한 아이여야 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 내 친구들조차도 그것이 나의 의무인 것처럼 말하곤 했었다.

내가 두 분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엇보다 소중했고, 사랑했고, 그다지 외향적인 성격이 아니었던 나에게는 그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도 두 분이 가장 친한 친구나 마찬가지였다.

행복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들이 나에게 강요한 것처럼 완벽한 행복이 아니었을 뿐이다. 완벽한 행복이라는 것이 과연 있기는 한지, 있다면 어떤 형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에게는 아버지가, 아버지에게는 어머니가 일순위였다.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서로가 반드시 필요했다. 가끔씩 나는 그저, 자식을 위해 살아가는 부모를 둔 친구들이 부러웠다. 아주 가끔씩.

두 분 사이에는 내가 도저히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유대가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두 분에게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두 분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고, 세상에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둘뿐이었다.

그런 보편적이지 않은 이유로 느끼는 소외감은 누구도 이해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림으로 그렸다.

그 그림을 통해 선생님이 아닌 누군가가 같은 감정을 공유했고… 그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그, 라우 위쿤이었다는 사실이, 문득, 모든 여정의 끝에 기다리고 있었던 최종 목적지인 것처럼 느껴졌다.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눈 뒤쪽에 뜨끈한 습기가 차올랐다. 모르겠다. 지금은 알 수 없는 이유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늘어뜨렸던 팔 끝에 힘을 주어 주먹을 말아 쥐면서 눈물을 단단히 붙잡았다.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꼭 나약함은 아니겠지만, 이 순간 감상적이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이 팔짱을 풀고 선반에서 몸을 일으켜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양손으로 내 어깨를 짚고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깊이 들여다봤다.

“거기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라 생각하고 받아 줘요.”

선생님이 그의 어머니인 것은 아닐까.

두 분 사이의 분위기로 혹시나 싶은 의혹은 있었고,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의혹은 점점 확신에 가까워져 갔었다. 가족이나 부모조차도 온전히 공감해 줄 수 없었던 그의 소외감에 대해, 가족이나 부모가 아닌 타인이 알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고독을 타인과 공유할 법한 부류가 아니었으니까.

어린 시절의 스승처럼, 내 뺨을 한 번 다정하게 감쌌다 놓은 선생님은 다시 선반 앞으로 돌아가 그림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아주 예전에… 그림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그걸 위해서라면 잠시 그림은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2년 정도 그림을 손에서 놓았을 때. 그리지 않으니까 자연히 슬럼프가 찾아왔었어요. 이건 그 슬럼프의 끝에서 그린 그림이고, 세상에 내놓을 생각도 없던 일기 같은 거예요.”

한지와도 흡사한 질감의 종이로 그림을 감싼 뒤 노끈을 두르던 선생님의 손이 잠시 느려졌다. 그리고 벽면을 따라 가로로 긴 액자처럼 홍콩의 풍경을 담아내고 있는 창문을 올려다보셨다.

“마음속에서 뭔가가 죽어 버려서, 그래서 더는 그릴 수 없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느 날, 더는 그리지 않아서 내가 죽은 것일 수도 있겠다… 싶더라구요.”

노끈을 꽉 매듭지은 선생님이 그림을 가지고 다시 내 앞에 섰다. 그리고 그림을 건네며 웃어 보였다.

“그림을 통하지 않고서는 나 자신일 수 없다는 건… 아마 그런 의미일 테니까.”

더 많은 시간을 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셨지만, 공유한 시간이 고작 30분 정도에 불과했단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 안에서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경험치는 이미 기대하고 각오했던 이상을 훨씬 뛰어넘어 흘러넘치고 있었다.

짧은 포옹과 함께 선생님과 인사를 나눈 뒤 그와 함께 계단을 내려가 다시 소란스러운 거리로 나섰을 때, 차원을 구분하는 경계라도 통과한 것처럼 몽롱했다. 감각이 경험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과호흡 뒤에 그의 침대에서 깨어났을 때와도 비슷한 상태였다.

“괜찮아요?”

그의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보다 좀 더 높은 곳에서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는 눈이 있었다. 그가 나를 걱정스럽게 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아니, 새삼스러울 게 없는 얘기였다.

그는 과호흡을 일으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의 나를 추슬러 준 사람이었다. 마침내 안정을 되찾고 그의 침실에서 나와 거실로 돌아갔을 때, 그곳에 이미 그림은 없어진 뒤였다. 발작의 원인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일부러 그림을 치워 준 것이다.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렇게… 집착할 정도로 아꼈던 그림을.

초반에 보였던 적대적인 경계심만이 그가 타인을 대하는 일관되고 고집스러운 태도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예전에 알았다. 팬텀의 멤버들이나 인우 형조차도 냉정하게 대할 때가 있었지만, 그것도 그의 전부는 아니었다.

나는 어떤 식으로 그에게 매달렸을까.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을 것처럼 괴로워하며 필사적으로 매달려 오는 상대를… 그는 어떤 식으로 달래고, 수습하고, 옷을 갈아입혀 침대에 눕혔을까.

그의 소외는 무엇일까. 어떤 소외가 그를 <소외>에 공감하도록 했을까.

선생님을 뵙고 난 뒤엔 선생님에 대한 생각뿐일 줄 알았는데, 예상 밖으로 그의 생각뿐이었다.

“에너지를 많이 소모한 모양인데… 쉬고 싶으면 호텔로 데려다줄게요. 그 녀석들한테는 내가 적당히 둘러댈 테니까.”

그의 말대로였다. 선생님과 몸싸움을 벌인 것도 아닌데, 몸속의 수분이 모두 빠진 듯 늘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왜일까. 그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탈력감은 있었지만, 차오르는 흥분도 공존했다. 호텔로 돌아가 봤자 쉽게 잠들지 못할 것은 뻔했다.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일까. 나를 보는 그의 눈에 당혹감 같은 것이 스쳤다. 내가 호텔로 돌아가지 않아서 곤란한, 호텔로 돌아갔으면 하는 당혹감은 아니었다. 내게서 빼앗은 명함을 구겨 버렸을 때처럼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고 감정을 드러내는 눈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래요, 그럼. 차에 타죠.”

그는 나를 더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한순간 자신을 허무는 듯했던 그가 황급히 시선을 거둬들이며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뒷좌석의 문을 연 채, 어서 타라며 시선으로 나를 재촉했다. 그의 어깨에서 순간적으로 피어오른 옅은 향을 쫓아 차에 올라탔다.

■ ■ ■

힘찬 필체의 금색 한자 간판을 단 현지식 음식점이었다.

그와 함께 안으로 들어서자, 오른쪽으로 좁은 복도를 따라 늘어선 테이블에서 몇몇 사람들이 늦은 끼니를 해결하고 있었다. 간판의 화려함과 달리 내부 인테리어는 소박하고 친근했다. 부담 없이 배를 채우기 좋은 홍콩의 대중적 식당이었다.

안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니 나름대로 멋을 부린 듯 비스듬히 마름모꼴로 놓인 구석 테이블에 누나와 형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얼굴이 환해졌다. 모르는 곳을 혼자 헤매고 다녔던 것도 아닌데, 어느새 낯선 도시에서 고작 몇 시간 떨어져 있다 재회한 것만으로도 반가운 얼굴들이 되어 있었다.

“어? 뭐야. 왜 둘이 같이 와요?”

복도 쪽을 향해 앉아 있었던 주한이 형이 먼저 번쩍 손을 들며 우리를 아는 체했다. 홍콩의 불금을 즐기겠다며 잔뜩 별렀던 사람들답게 두 사람 모두 평소보다 한층 더 힘이 들어간 모습이었다.

“컨디션 괜찮아졌다길래 호텔에 들러서 데리고 왔어.”

그가 등받이 없는 낡은 나무 의자에 걸터앉으며 대답했다. 정사각형의 테이블에 누나와 형이 마주 보고 앉아 있었기에, 그와 나 역시 서로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 너 소호 구경하는 거 엄청 기대했었잖아. 불금의 소호를 놓치면 안 되지.”

내 등을 툭 두드리며 씨익 웃는 형에게 마주 웃어 보였다. 소호 구경을 엄청 기대했었다는 말이 왠지 그의 앞에서 조금 쑥스러웠지만, 사실이기는 했다.

“뭐 하고 싶다고 잘 표현도 안 하는 놈이 핸드폰으로 이것저것 찾아보는 게 어찌나 귀엽던지.”

유니 누나까지 가세해 내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으며 키득거렸다. 이번에는 좀 더 그가 신경 쓰였다. 그렇게 애처럼 들떠서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별로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랬었냐는 얼굴로 나를 건너다보는 그의 시선을 모르는 척, 누나가 꼬집었던 자리를, 아프지도 않은데 괜히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우리도 뭐 좀 먹죠. 나도 아직 저녁 전인데.”

그렇게 말한 그는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사람을 불러 (당연하게도)능숙한 광둥어로 직원과 대화를 나눴다. 익숙한 식당인지 메뉴판을 보지 않고도 주문이 이루어졌다.

광둥어를 말하는 그는 조금 다른 사람 같아서 신기했다. 팬텀에서 전화로 몇 가지 언어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긴 했지만, 눈앞에서 현지인과 대화하는 모습은 그것과는 또 달랐다.

“완탕이 부드러워서 먹기 좋을 겁니다.”

갑자기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멍하니 그를 보고 있던 나는 당황해서 괜히 옆자리의 누나를 쳐다봤다.

여전히 입맛은 없었지만, 호텔에서도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얘기를 신경 써 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 저 완탕면 하나 더 시켜 주세요.”

조금 남아 있었던 국수의 마지막 한 젓가락을 집어 올리며 주한이 형이 다급하게 외쳤다.

“전 밀크티요.”

이번엔 유니 누나의 요청이었다.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본 그는 마지막으로 테이블 위에 쌓여 있는 빈 그릇들을 내려다보고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 밤낮으로 고생하시는 우리 스태프들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사 드려야죠.”

주문을 받은 직원이 빈 그릇을 가지고 테이블을 떠난 뒤 다리를 겹쳐 앉으며 자세를 고치던 그가 문득 가늘게 뜬 눈으로 누나를 쳐다봤다.

“왜. 왜 또 그렇게 불길한 웃음으로 보는 건데.”

누나는 얼마 남지 않은 밀크티에 꽂힌 빨대를 입술에 문 채 장난기 넘치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저 솔직히 홍콩은 살아도 좋겠다 싶을 만큼 좋아하지만 광둥어에 언어적 매력은 별로 못 느끼거든요?”

“…….”

“근데 대표님 광둥어 할 때 좀 섹시해요. 평소에 못 보는 모습이라 그런가.”

몇 편의 오래된 홍콩 영화가 광둥어와 홍콩에 대한 내 인상의 전부였지만, 기억에 의하면 그 영화 속 인물들은 다소 강한 억양으로 소란스러운 대화를 주고받았었다. 하지만 그의 광둥어는 차분하고 편안했다. 살짝 허스키한 낮은 목소리가 발음하는 낯선 언어를 좀 더 듣고 싶었다. 아마 그것은… 섹시함이 맞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생각하겠지.

“내용은 칭찬인데 왜 웃음이 영 불길할까.”

“새삼스럽게 대표님을 섹시하다고 생각하는 저 자신이 웃겨서요.”

빨대 끝을 잘근거리면서 누나는 계속 히죽거렸다. 누나의 섹시하다는 말에 성적 의미는 전혀 섞여 있지 않았다. 가족처럼 지내는 그에게서 어느 순간 객관적 개체로서의 매력을 발견할 때의 새삼스러움, 그것이었다. 그 역시도 그 말에 어떤 무게도 부과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쩌면 너무나 익숙한 칭찬이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던 그가 목에 걸려 있던 카메라를 들어 누나의 개구쟁이 같은 웃음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그의 정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누나는 불시에 자신을 향하는 카메라를 전혀 어색해하지 않았다.

“뭘 또 이렇게 많이 샀어?”

고개를 숙여 액정 속의 사진을 확인하던 그가 테이블 아래에서 뭔가를 발견하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올드 퓨처 신상들이죠. 이번에도 싹쓸이했습니다.”

자리에 앉을 때도 슬쩍 보이긴 했지만, 제대로 보니 화려한 꽃무늬 식탁보 아래 숨겨진 쇼핑백이 언뜻 보기에도 열 개가 넘었다. 겨우 주어진 귀한 자유 시간 동안 두 사람은 먹고 마시거나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는 대신 올드 퓨처를 위해 부지런히 움직인 모양이었다.

“하여간 대단해. 그 에너지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냐. 보약이라도 먹어?”

진심으로 놀란 그의 표정에 누나와 형은 소리 내어 웃었다.

밝은 형광등 불빛 아래의 익숙한 얼굴들과 그들의 대화, 푸짐한 음식 냄새 속에서, 몽롱했던 감각이 조금씩 현실감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오늘 우리 서이현 제대로 세팅해 주려고… 준비도 다 해 왔죠.”

밀크티 잔을 내려놓고 테이블 아래의 쇼핑백 중 하나를 뒤지던 누나가 티셔츠 하나를 끄집어냈다. 스트라이프 패턴의 니트 티셔츠였다. 잘 어울리는지, 내 얼굴 아래 티셔츠를 맞춰 보는 누나의 손을 붙잡았다.

“누나, 이거… 저, 받을 수 없어요. 못 받아요.”

“야, 누가 그냥 준대? 나중에 올드 퓨처에 업데이트되면 결제해.”

완탕면의 마지막 국물을 비워 내던 주한이 형의 말이었다.

“어, 지금 강매하는 거야. 그러니까 사양하지 마, 이현아.”

내 손을 걷어 내며 누나가 말했다. 내 마음을 더 편하게 해 주기 위해 두 사람이 일부러 하는 말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돈을 지불하고 하지 않고를 떠나, 그렇게 피곤하고 바쁜 와중에도 내 생각까지 해 줬다는 자체가 고마웠다.

“보는 순간 딱 네 거잖아. 안 살 수가 없었다니까.”

다시 한번 티를 내 가슴 앞에 가져다 대는 누나의 손을 이번에는 사양할 수가 없었다.

얇은 실로 성기게 짠 니트는 네크라인이 느슨하고 전체적으로 아래로 늘어지는 듯한 느낌의 오버사이즈였다. 주한이 형 같은 사람이라면 모를까, 내가 입기엔 너무 패셔너블한 느낌이었지만, 누나의 안목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예쁘긴 한데… 좀 덥지 않을까.”

그가 카메라를 눈높이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 렌즈가 이쪽을 향하지 않을까 싶어 슬그머니 누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딜 가든 에어컨 빵빵해서 괜찮아요. 그리고 생각보다 얇고 짜임도 느슨해서 바람 숭숭 통해요. 이거 봐요.”

누나가 매듭과 매듭 사이로 손가락을 통과시켜 보였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는 아니지만, 보려고 하면 안을 볼 수 있을 정도로는 짜임이 헐거웠다.

“음… 좀 야하지 않나?”

“…….”

나도 모르게 시선이 그를 향했고, 찰칵, 순간 셔터가 눌러졌다. 카메라에 익숙하지 않은 쑥스러움 때문인지, 그의 입에서 나온 야하다는 발언 때문인지, 순식간에 귀가 뜨거워졌다.

국수 그릇을 전부 비운 형은 이 상황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마지막 하나 남아 있던 피시볼을 입 안으로 던져 넣었고, 누나는 말없이 그를 지그시 쳐다봤다.

“이번엔 왜 또.”

“이현이 보면서 그런 생각 해요? 완전 짐승.”

억울하다는 표정의 그를 비난하면서 누나는 니트 티를 펼쳐 내 얼굴을 가렸다. 아무 의미 없는 가벼운 장난에도 너무 쉽게 열이 올라 버리는 자신의 미숙함이 원망스러웠다. 좀 더… 능숙하고 태연하게 자신과 상황을 다루고 싶었지만, 고작 입을 다물어 버리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였다.

마침 새로 주문한 음식들이 테이블 위에 차려졌고, 덕분에 자연스럽게 화제가 바뀌었다.

“대표님, 기사님 모시고 오셨죠? 밥 먹고 나가면서 차 좀 잠깐만 불러 줘요. 이거 차에다 싣고 움직여야죠.”

새로 나온 완탕면을 이로 끊어 내면서 주한이 형이 눈을 치켜 그를 올려다보았다. 서울에서의 그는 늘 직접 운전하는 것 같았지만, 홍콩에서는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차를 타는 것이 종종 있는 일인 듯했다.

“네, 알겠습니다. 권주한 님.”

나무젓가락의 뒤쪽으로 형의 이마를 톡 때린 그는 가운데에 놓인 딤섬을 하나 집어 아무렇지 않게 내 앞의 접시에 덜어 주었다. 눈과 입은 여전히 형을 향한 채로.

“12시까지는 무조건 호텔로 돌아가는 조건이야. 아직 페어 이틀 남았어.”

“에이, 당연하죠. 초짜처럼 왜 이러실까. 일단 시간 없으니까 빨리 취하기부터 해야죠. 1차는 데킬라로 달립니다.”

■ ■ ■

원숭이를 볼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한 공원 쪽에서 내려온 차량들과 센트럴의 대로에서부터 아이스 하우스 스트리트를 거쳐 올라온 차량들, 할리우드 로드를 따라 소호를 통과해 온 차량들이 만나는 교차로는 인파로 넘쳐나고 있었다.

식당을 나온 뒤 바에서 약 한 시간 동안 데킬라를 마신 우리는 2차를 즐길 만한 적당한 펍을 찾기 위해 그 인파에 섞여 소호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내가 서너 잔의 데킬라를 마시고, 나머지 세 사람이 그 두 배 정도를 마시는 사이 사람이 무섭게 늘어나 어디를 가도 우리를 위한 4인용 테이블 하나 비어 있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이국적인 풍경과 다양한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에 나는 지루한 줄도 몰랐다.

서울과는 다른 언어와 다른 양식으로 거리를 향해 내걸린 간판들과 비좁고 허름하지만 하나하나가 나름의 역사와 사연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 개성 강한 건물들, 오래전에 현대화가 진행된 탓에 지역의 번화함에 비해 턱없이 좁기만 한 도로에 늘어선 고급 차량들과 그와 대비되며 홍콩만의 풍경을 연출하는 데에 톡톡히 한몫을 하는 레트로한 각진 디자인의 붉은색 택시. 거리에 선 채로 일행들과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거나, 펍과 클럽에서 새어 나온 음악에 맞춰 길 한가운데서 리듬을 타는 사람들까지….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이 낯섦과 생동감으로 가득했다.

말이 바(Bar)일 뿐, 거의 클럽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데킬라를 서너 잔 마신 뒤라 그런지 심장이 뛰는 박자가 평소와 달랐다. 가슴이 들뜨고 이유 없이 자꾸 웃음이 나서 형이나 누나와 눈만 마주치면 실실거렸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그랬다. 심각하고 우울해 보이는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껍질을 한 겹만 벗겨 보면 일상과 삶에 대한 제각각의 고민과 무게를 안고 있겠지만, 이 시간과 공간에서만큼은 다들 문제에 대한 의식을 마비시키기로 약속한 듯했다.

사실, 사람과 소음으로 가득한 이런 화려한 거리는 나와 어울리지 않았다. 매일 이런 곳을 드나들면서 살라고 한다면 그건 영 자신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는 거주자가 아닌 관찰자였다. 낯선 문화를 잠시 맛본 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사람인 것이다.

나의 진짜 삶은 다른 장소에 따로 분리되어 있다는 이방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오히려 내가 이 공간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섞일 수 있는 정서적 근거가 되어 주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여행의 묘미, 혹은 일탈의 쾌감인지도 모르겠다.

평소의 나라면, 수키킴 선생님의 작업실에서 나온 뒤 조용히 호텔 방에 틀어박혀 대화와 감흥을 곱씹는 방식으로 충격을 처리하려 했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것을 보류해 둔 채 충동에 따르고 있었다.

그가 있는 곳에 있고 싶었다.

<소외>에 대해서 그와 이야기해 보고 싶기도 했지만, 그럴 수 없더라도 그저 그와 함께 있기를 원했다. 그리고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움직였다. 남들에게는 어떤지 몰라도 나에게는 그런 과정 자체가 이미 경로를 벗어난 일탈이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하게 되는 곳이 어디가 되든, 최소한, 선택과 이동을 두려워하던 때의 자신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처음부터 그랬다.

그와 함께 있으면 평온이 흐트러지고, 감정에 굴곡과 비틀림이 생기고, 삐죽한 모습들이 불쑥 튀어나오기도 했다. 지금은… 그런 자극에 자신을 더 노출시키고 싶었다. 이제 나는 변화를 원하고 있었고, 그는 나에게서 의외의 모습을 끌어내는 사람이었으니까.

햄버거 전문점 옆의 한 펍 앞을 세 번째로 지나가는 길,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는 한 일행과 타이밍이 맞아 우리는 드디어 테이블 하나를 차지할 수 있었다.

거리와 면한 가장 바깥쪽 좌석으로, 폴더식 도어 전체를 활짝 열어 놓은 덕에 거리의 분위기를 그대로 즐길 수 있는 자리였다. 운이 좋았다.

“뭐야, 서이현. 진짜 취했냐?”

높은 스툴에 한 번에 올라앉지 못하고 느릿느릿 꾸물대는 나를 향해 누나가 허리를 꺾어 가며 웃었다. 누나를 보다가 나까지 웃음이 터져 버렸다. 지금 우리는 모두 조금씩 이상했다. 음… 한 사람만 빼고.

“조심해요. 의자가 높아서 넘어지면 크게 다치니까. 이런 데서 술 마시다 코뼈 부러진 사람 내가 여럿 봤지.”

먼저 자리를 잡고 앉은 그가 내 왼팔을 부축하듯 힘주어 붙잡았다. 그의 팔에 어느 정도 의지해 스툴에 안착할 수 있었다.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술을 마셨는데도 그는 멀쩡했다. 누나와 형의 텐션에 적당히 맞춰 주고 있기는 했지만, 얼굴과 목소리에서 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취한 모습을 조금 보고 싶었는데, 그와 내가 함께 마시기 시작하는 이상, 먼저 취해 버린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누나와 형은 자리에 앉지도 않은 채 테이블 옆에서 다시 또 댄스 삼매경이었다. 맥주병을 하나씩 든 채 홀에서 춤을 추고 있던 사람들과 그새 어울리고 있었다. 주한이 형이 춤과 섞어 선보인 익살스러운 제스처에 주변의 외국인들이 웃음을 터뜨리며 핸드폰 카메라를 들이댔다. 좀 전의 바에서도 그랬지만, 대단한 친화력이었다.

좀처럼 앉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은 내버려 두고 알아서 술을 주문한 그는, 나에게 잘 맞을 거라며 브루클린 출신의 맥주를 추천했다.

“대표님은, 모르는 게 없는 것 같아요.”

그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눈썹을 치키며 나를 돌아봤다.

높고 비좁은 둥근 테이블에서 그와 나는 누나와 형이 가방을 던져 놓은 자리를 맞은편에 두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사실 그와 나 사이에는 틈이랄 게 거의 없었다. 무릎과 상박이 스치지 않고서는 자세를 조금 바꾸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내가 생각해도 뜬금없는 말인 것 같아 피식 웃음이 새었다.

“아니에요.”

고개를 저으며 테이블에 팔꿈치를 기댔다.

모르는 게 없는 것 같다니. 대여섯 살짜리 꼬맹이가 중학생 형을 보면서 할 법한 말이었다. 그에게 꼬맹이로 보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는데, 왜 그런 말을 했는지.

투명한 플라스틱 컵에 담긴 맥주가 금방 테이블로 서빙되었고, 맥주가 나오는 걸 본 누나와 형이 테이블로 돌아왔다. 오늘 들어 몇 번째인지 알 수 없는 건배를 또 하고, 맥주를 마셨다. 그가 골라 준 맥주는 쌉싸름함과 함께 약간의 단맛이 돌아 마시기 편하고 부드러웠다.

춤을 추느라 땀을 흘린 탓인지 누나와 형은 순식간에 잔을 거의 비워 냈다. 데킬라의 높은 도수 탓에 나 역시 어느 정도 붕 떠 있는 상태였지만, 좀 더 취하고 싶은 충동에 맥주잔을 자주 입술로 가져갔다.

“당신들, 서울에서 온 갤러리 스태프들이죠?”

테이블 앞을 지나가던 사람들 중 한 무리가 우리를 향해 반가운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아는 체를 해 왔다. 아트페어에 참가한 다른 갤러리의 스태프들인 듯했다.

거리를 등진 좌석에 앉아 있던 유니 누나와 주한이 형이 뒤를 돌아보고는, 잘 알고 지내던 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그들과 요란하게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스태프들 스타일이 독특해서 기억해요. 오프일 때도 완전 멋지네!”

“아… 칭찬은 감사하긴 한데, 우리가 아니라 우리 보스 외모 때문에 기억하는 거 아니에요?”

주한이 형이 그를 가리키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

이쪽과 저쪽에서 웃음이 쏟아졌다.

“아, 뭐였더라…. 갤러리… 고스트였나?”

그들 중 가장 유쾌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가 검지로 턱수염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팬텀이에요, 갤러리 팬텀.”

“아, 팬텀! 미안해요. 그런 비슷한 뜻이었던 건 기억했는데.”

“그 정도면 거의 맞힌 거죠.”

유니 누나가 턱수염의 남자를 격려하듯 등을 두드렸다.

경험 삼아 스무 점 정도의 작품을 가지고 처음 페어에 참석해 봤는데 운 좋게 작품이 벌써 솔드 아웃 됐다며, 약간의 자랑을 섞어 이야기하는 그들은 페어 결과에 흥분해 있는 듯했다. 각자 다른 장르의 미술을 전공한 세 친구가 암스테르담에서 공동으로 작은 갤러리를 운영 중이라는 그들은 특히나 유니 누나와 얘기가 잘 통했다.

기념사진이라도 한 장 찍자는 누군가의 제안에 그들 중 한 명의 핸드폰으로 다 같이 셀카 모드의 사진을 한 장 찍은 뒤, 그의 카메라로 한 장을 더 찍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본인이 거리로 이동하면서까지 우리 셋과 그들 일행 세 명을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 촬영 후 누나와 형이 그들과 SNS 계정을 교환하는 동안, 그는 인도와 도로 사이에 설치된 난간에 기대 이쪽을 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떠들썩한 그들의 대화를 흘려들으며, 그들의 팔과 어깨 사이로, 나는 그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저기요.”

문득 내 시야 안으로 불쑥 들어선 얼굴의 등장에 멈칫 상체를 살짝 뒤로 물렀다. 턱수염의 쾌활한 남성이 자신의 동료를 옆으로 끌어와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주근깨가 인상적인 귀여운 이미지의 남자였다. 나이는 나와 비슷한 정도?

“사실 얘가 행사장에서 그쪽 보고 첫눈에 반했었거든요. 지금도 얘가 지나가다가 그쪽 발견하고 알아본 거예요! 혹시 SNS 계정 있으면 알려 줄래요?”

주근깨의 남자는 쑥스러워하는 기색은 있었지만 자신의 동료를 말리거나 말의 내용을 부정하려 하지는 않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말을 고르는 나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지금까지 내가 속해 있었던 베타가 대부분인 세계에서는 베타끼리의 동성애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알파와 오메가의 존재에 대해서도 꺼림칙해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에, 나에게는 낯선 상황이기도 했다.

홍콩이라는 도시의 특징인지, 혹은 알파·오메가의 비율이 높은 사회의 공통된 특징인지는 모르겠지만, VIP 프리뷰에서의 남자도 지금 이 남자도 동성인 나에게 특별할 것 없는 태도로 호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 대해 어색하게 반응하는 것이 오히려 튀는 행동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 미안해요. SNS는 하지 않아서….”

핑계가 아닌 사실이었다.

“뭐, 괜찮아요. 왠지 그럴 것 같긴 했어요.”

주근깨의 남자 대신 턱수염의 남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간단히 물러났다.

떠날 때 또 한 번 요란한 하이파이브를 시도한 그들은 주근깨의 남자를 장난스럽게 앞쪽으로 밀어내며 나와 남자의 하이파이브를 유도했다. 아마도 그 남자 역시 술기운을 빌린 과장된 장난기로 그랬던 거겠지만, 평소 좋아하던 연예인과 악수라도 나눈 것처럼 기뻐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성별을 떠나 누군가가 그렇게 직접적이고 솔직하게 나에 대한 호감을 표시해 준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인우 형이 어느 정도 그렇긴 했지만, 형은 항상 장난스러웠으니까. 아마 실제로도 절반 이상은 장난일 거고.

그들이 떠나고 난 뒤 누나와 형도 한 대 피우기 위해 스툴에서 내려갔다. 실내는 금연이 기본이었지만, 홍콩 어디든 야외에서의 흡연은 거의 제재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막 한 대를 다 피운 그는 누나와 형과 어울려 새로운 한 대에 다시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들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쥐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올드 퓨처’의 포스팅에서 봤던 장면 그대로였다.

배경이 다르고, 형과 누나의 옷차림은 달랐지만, ‘Photo by Kun’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던 사진과 상황이 일치했다.

소호 거리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편안하게 순간을 즐기는 두 사람과 그런 두 사람의 순간을 역시나 자연스럽게 사진으로 포착해 내는 그.

문득 주변의 모든 소음이 멀어졌다. 그들과 나 사이에는 아무런 경계도 없었고, 처음처럼 그가 나에게 보이지 않는 유리벽을 세우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들과 나 사이 고작 몇 걸음의 거리가 스스로 반짝이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나 자신을 구분 짓는 또렷한 기준선처럼 느껴졌다.

씁쓸함에 맥주로 손을 뻗으려는 순간, 그의 렌즈가 불쑥 나를 향했다.

그리고 내가 미처 고개를 피할 틈도 없이 셔터가 눌러졌다. 그는 곧바로 액정 속에서 자신이 찍은 나를 확인했다. 희미하게 미소가 걸린 입술로 담배를 가져가는 그를 바라보다, 스툴에서 내려와 그들에게 다가갔다.

누나가 웃으면서 팔을 뻗어 내 어깨에 걸쳤다.

“서이현 씨, 인기가 아주 국제적이야.”

웃음기 섞인 누나의 말에 형도 웃었다. 하지만 그는 담배를 피우며 나를 내려다볼 뿐 웃지 않았다.

“저도… 피워 보고 싶어요.”

“…….”

세 사람 모두 담배를 피우던 호흡을 멈추고 나에게 집중했다.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기라도 한 건가 싶어서, 차례대로 세 사람의 표정을 살폈다. 가장 마지막에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고, 그는 담배를 입술로 가져가다 멈췄던 손을 다시 천천히 움직여 필터를 빨아들였다. 잿빛 불씨가 그의 입술 끝에서 빨갛게 타올랐다.

누나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씩 웃었다.

“왜 피워 보고 싶은지 물어봐도 돼?”

“전에… ‘올드 퓨처’ 사이트에서 누나가 홍콩에 대해서 포스팅한 거 봤을 때. 언젠가 홍콩에 가게 된다면 한 번쯤 나도 피워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거든요.”

팔을 쓸어내리며 말을 보탰다.

“그땐, 이렇게 빨리 홍콩에 오게 될 줄은 몰랐지만.”

누나가 내 목에 감았던 팔을 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뭐, 우리도 지금 이렇게 피우고 있으면서 너한테는 나쁜 거다 어쩌다 하는 것도 말이 안 되겠지.”

그리고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줘도 돼요?”

“왜 나한테 허락을 받아? 여기 성인 아닌 사람 있어?”

누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픽 웃었다. 그러고는 바지 뒷주머니를 뒤적였다. 나에게 담배와 라이터를 건네면서 누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 왜 이렇게 나쁜 짓 하는 기분이지? 너 스물두 살 맞지?”

누나와 형은 흡연자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나에게 흡연을 권하고 싶지 않은 기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흡연자가 될 생각이 없다는 설명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대신 그저 웃어 보였고, 누나도 마주 웃으면서 내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그러고는 음악이 바뀐 펍 안을 향해 형과 함께 뛰어들어 갔다.

좋아하는 곡이었는지 순식간에 흥분해 인파 속에 뒤섞이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 손안의 담배를 입에 물었다.

라이터에 불을 당겨 담배의 끄트머리에 대고 후웁, 빨아들이는 과정 하나하나가 내가 생각해도 어설펐다.

별 대단할 것도 없는 일이라는 듯 말했던 것과 다르게, 그는 나의 서툰 첫 흡연의 과정 하나하나를 민망할 정도로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카메라를 집었다.

“사진… 찍지 마세요.”

나를 향해 렌즈의 방향을 조정하는 그의 손목을 끌어 내리며 고개를 돌렸다.

“왜요?”

그렇게 묻는 그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묻어났다.

“찍어도 재미없잖아요.”

“내가 찍은 사진이 재미없다는 건가, 그 얘기는?”

“…….”

그의 말이 장난인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오해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그를 올려다보는 시선이 흔들렸다. 멈칫한 틈을 타 다시 렌즈가 나를 향했다. 셔터가 눌러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적어도 내가 찍은 서이현 씨는 재미있는 것 같은데, 난.”

만족한 듯 카메라를 내린 그가 난간에 기댄 내 옆으로 손을 짚었다. 내 쪽을 향해 비스듬히 선 그의 가슴과 어깨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데킬라와 맥주가 뒤섞인 취기와 처음 피워 본 담배의 어지러움을 핑계로 그에게 기대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충동대로 실행할 수 없는, 할 수 없을, 지나친 과감함이었다. 그런 생각을 했다는 자체만으로도 스스로 놀라, 유해한 연기로 그것을 없애 버리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담배를 또 한 모금 흡입했다.

익숙하지 않은 매캐한 공기가 목구멍을 바짝 죄는 듯했다. 혀가 따끔거리고, 기도와 폐를 향해 나쁜 물질을 주입하고 있다는 감각이 생생했다.

더 철없던 나이에도 흡연을 멋져 보인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이제 와서 이런 부분에 대해 뒤늦은 겉멋이 든 것도 아니다. 누나가 포스팅에서 말했듯, 조금은 방탕하게, 또는 너그럽게, 일상의 자신을 유지하던 긴장을 허물고 주변을 바라보는 그런 감각을 공유해 보고 싶었을 뿐이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누나와 형, 그리고 그가 포함된 ‘이상한 나라’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져 보고 싶었다. 결국, 닮고 싶은 배우의 영화 속 모습을 흉내 내는 것과 같은 철없는 모방 심리가 맞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실없이 웃음이 새었다.

“진짜 이상한 나라에 와 있는 것 같아요.”

핑그르르 눈앞이 도는 감각에 저절로 목소리가 나른해졌다.

눈썹 하나 일그러뜨리지 않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에게 초점을 맞췄다.

“토끼 씨.”

“토끼?”

이번에는 그의 한쪽 눈썹이 삐죽 위를 향했다. 토끼 씨.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온 말이었다. 정신을 가다듬으려 담배를 쥐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혼자 웃었다. 돌아보면, 나에게 그는 정말 ‘이상한 나라’로 안내하는 토끼 씨였다.

“죄송해요. 취했나 봐요. 자꾸 이상한 말이 나오네요.”

달아오르는 얼굴의 화끈함을 숨기려 거의 다 타들어 간 담배를 한 모금 더 빨아들였다. 그의 손이 다가와 담배를 쥔 내 손에 겹쳐지더니, 입술에 물려 있던 담배를 가져갔다. 아주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올려다보자, 나를 마주 내려다보며 내게서 가져간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아들인다. 양 뺨이 홀쭉하게 파일 정도로. 그러고는 입술의 틈 사이로 길게 연기를 흘리며 능숙하게 검지로 재를 털어 냈다.

“더 취해 보죠, 뭐. 그러려고 나온 건데.”

펍에서 내어놓은 재떨이에 꽁초를 던져 넣으면서 그렇게 말한 그를 따라 막 난간 앞을 떠나려는데, 누군가 조심스럽게 팔을 붙잡아 왔다.

“저….”

“…….”

주근깨의 남자였다. 의외의 상황에 절로 눈이 커졌다.

남자의 일행들은 보이지 않았다. 갔던 길을 서둘러 되돌아온 듯 남자의 숨은 흐트러져 있었고,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죄송한데, 혹시 메일 주소라도 교환할 수 있을까 해서요.”

수줍어하면서도 남자는 내 눈을 바라보며 웃었다.

남자의 호의에서는 순수한 에너지 같은 것이 느껴졌다. VIP 프리뷰에서 여행지에서의 추억 운운하던 남자의 끈적한 추파와는 달랐다. 누군가에게 순수한 호의를 느끼고, 그것을 이렇게 솔직하면서도 깨끗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그 호의가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과는 별개로 그냥… 참 좋아 보였다.

“사실 이번 겨울에 한국 여행을 계획 중인데, 메일 주고받다가 괜찮으면 그때 서울에서 다시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아, 아까 그 녀석이 반했다는 둥 그런 얘기한 건 잊어 주세요! 그냥, 어차피 너무 장거리고, 친구라도 됐으면 해서….”

뒷목을 연신 쓰다듬으며 얘기하는 중간중간 남자는 그를 힐끔거렸다. 이런 쪽으로 눈치가 없는 사람은 절대 아닌데, 왜인지 그는 자리를 피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이 상황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아… 남자…친구가… 그런 걸 조금 싫어해서요. 죄송합니다.”

남자의 고백은 전혀 불쾌하지 않았고, 본인의 말처럼 친구로 지내고 싶을 정도로 이력에도 흥미가 있었지만, 하지만 내 마음이 다른 곳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고백을 받는 것에도 전혀 익숙하지 않았지만, 이런 상황을 어떻게 세련되게 피할 수 있는지도 몰랐기에, 어디서 보고 들은 대로 어설픈 거짓말을 둘러댔다.

“그렇구나. 역시… 남자친구가 있으셨구나.”

씁쓸하게 웃으면서 그의 얼굴을 한 번 힐끔 쳐다보는 남자의 시선에, 그제야 아차 싶었다. 그가 ‘남자친구’라는 식으로 얘기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렇게 들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자각했다.

“그럼. 즐거운 여행 되세요. 얘기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아쉬움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돌아서는 남자의 앳된 얼굴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괜한 거짓말로 순수한 호의에 불성실하게 응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흠… 남자친구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더불어 졸지에 나의 남자친구가 돼 버린 그에게도 미안했다. 하지만 내 염려와 달리 그런 오해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그는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없는 거, 아시잖아요.”

고백과 거절의 현장을 그에게 낱낱이 공개했다는 민망함이 뒤늦게 밀려와, 자리에 앉자마자 맥주를 연거푸 들이켰다. 누나와 형은 홀 안쪽 깊은 곳까지 들어갔는지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몰랐는데.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서로 그런 얘기 한 적이 있었나?”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그는 계속 장난기가 넘쳤다.

어떻게든 화제를 돌리고 싶어, 그의 목에 걸려 있는 카메라로 손을 뻗었다.

“사진, 봐도 돼요?”

“…….”

카메라에 내 손이 닿자, 그가 몸을 굳혔다. 나답지 않은 과감한 행동이기는 했지만, 몸을 만진 것도 아니어서 이 정도로 그가 놀랄 줄은 몰랐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뒤로 물러섰겠지만, 조금 짓궂은 오기가 생겼다. 굳이 취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의 앞에서는 가끔씩 이럴 때가 있었다.

“안 돼요?”

카메라를 내 쪽으로 좀 더 끌어오면서 한 번 더 물었다.

그는 어떤 새로운 도시를 가든 카메라를 목에 걸고 거리로 나설 것 같은 타입은 아니었기 때문에 차에서 내리면서 당연하다는 듯 스트랩을 목에 걸었을 때는 상당히 의외였다. 손바닥보다 작은 이 콤팩트한 카메라 하나 때문에 그가 여행으로 들떠 있는 관광객처럼 보이기도 해서, 그게 조금… 귀여웠었다.

“음… 보여 주면 안 될 것 같은데.”

스트랩을 벗어 카메라를 왼손에 쥐고 내 손이 닿지 않도록 팔을 멀리 뻗으며, 그가 말했다.

“왜요.”

조금 불만을 담아 물었다. 카메라에 익숙하지 않은 내가 불편해하는데도 실컷 찍었으면서, 결과는 보여 주지 않겠다니. 불공평한 것 같았다.

“서이현 씨, 점쟁이잖아요. 내 사진 보면 다 읽어 낼 거 아니에요.”

“…뭘요?”

“…….”

눈이 마주쳤다.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는데, 그는 핵심을 간파당한 사람처럼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 어쩌다 보니 그에게서 카메라를 뺏으려 품으로 덤벼드는 것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고, 그는 그런 나를 저지하려 등에 팔을 둘러 뒤쪽으로 당기고 있었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눈이 내 얼굴 이곳저곳을 더듬듯 꼼꼼히 훑어 나갔다. 가끔씩 이런 식으로 볼 때가 있었다.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인지, 향수 냄새가 코밑을 간질였다.

“그때, 최인우하고 얼마나 마셨어요?”

“네? 언제….”

예상치 못한 순간에 언급된 인우 형의 이름에 막 기억을 더듬어 보려는데,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주한이 형이 업히듯 덥석 그를 끌어안았다.

“대표님, 목말라 죽겠어요! 맥주, 맥주 주세요!”

“아… 되게 방해되네.”

그는 노골적으로 귀찮은 표정을 지으며 투덜거렸지만,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태도였기 때문에 전부 장난으로 느껴졌다. 형과 누나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더 늦게까지 놀아도 되니까 너네 다른 데 좀 가서 놀아라. 클럽 안 갈래? 카드 줄게.”

“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그래도 페어 이틀 남았는데 자정엔 들어가서 자야죠. 노는 거야, 일요일 파티 때 원 없이 놀면 되니까요.”

그의 잔에 남아 있던 맥주를 쭉 들이켜면서 형이 땀으로 가득한 얼굴에 손으로 부채질을 해 댔다.

좀 전까지 그와 나 사이에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감이 거짓말인 것처럼 우리 테이블 역시 주변의 모든 테이블과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잠깐. 근데 왜 갑자기 우리를 클럽에 보내려고 그래요? 페어 끝나기 전엔 무조건 12시에는 귀가잖아요.”

누나가 가늘게 뜬 눈꺼풀 아래에서 그에게 의심쩍은 시선을 보냈다.

“우리 클럽 보내 놓고 혼자 어디 좋은 데로 빠지려고 그러죠?”

맥주를 마신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면서 이번에는 형이 펄쩍 뛰었다. 그는 표정을 구기면서, 나에게서 지켜 내기 위해 풀었던 스트랩을 다시 목에 걸었다.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질 않길래 그럴 거면 그냥 클럽 가라고 한 건데. 이게 이렇게 의심받을 일인가?”

“흠… 그럴 사람이 아닌데….”

“안 갈 거면 그만 일어나. 너네 호텔에 내려 주고 한 실장 태우러 가야 해.”

그가 왼쪽 손목의 시계를 들여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팬텀의 영업을 책임지고 있는 실장님은 오늘도 여러 갤러리들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 중이었다. 실장님을 데리러 가야 할 의무가 있으니 누나와 형이 클럽에 가더라도 그가 ‘좋은 데’로 빠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펍을 빠져나와 근처 횡단보도 앞에서 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누나와 형은 아직까지 흥이 가라앉지 않는지, 주변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들썩거리며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우리는 숙소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지만, 소호의 금요일 밤은 아직도 한창이었다.

아쉬웠다. 취기 때문에 내 감정은 평소보다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을 게 뻔했다. 감정의 일부라도 숨기기 위해서는 쳐다보지 말아야 하는데, 시선은 자꾸만 그를 찾았다.

사실은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다. 말주변이 없으니, 기회가 주어진다 한들 능숙하게 대화를 풀어 가지는 못하겠지만, 묻고 싶은 것도 많았다.

<소외>에 그를 공감하게 했던, 보편적이지 않은 이유로 느껴야 했던 그의 ‘소외’는 무엇인지. <소외>가 내 그림이라는 걸 알았을 때… 어땠는지. 실망했는지, 의외였는지. 아니면 아무리 아끼던 그림이라도 작가와 그림은 그에게 철저히 별개의 존재라, 그림 때문에 나를 다시 보게 되는 일 같은 건 전혀 없었는지.

그런… 잡다하고 하찮은 생각들.

가슴 앞에서 단단하게 팔짱을 낀 채 나를 보던 그가 한숨을 쉬며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그리고 쯧, 혀를 차며 성큼 가까이 다가와 나를 들어 올릴 듯이 강하게 팔을 붙잡았다.

“이런데도 베타라고?”

나의 대답을 요구하는 게 아닌 혼잣말 뒤에, 그는 불꽃이 튀는 눈으로 나를 똑바로 내려다봤다.

“일요일엔, 방해받지 않을 겁니다.”

그가 말하는 방해가 무엇인지는 모호했지만, 그대로 나를 뒤덮는 듯한 향기의 급습에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묘한 향이라고만 생각했던 그의 향기를, 어느새 더 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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