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제안
실장님과 둘이서 갖는 식사 자리라 생각했지만, 식당의 입구로 이어지는 2차선 도로에는 미끈한 스포츠카를 연상시키는 유려한 디자인의 흰색 SUV가 비상등을 켠 채 보도블록 쪽으로 바짝 붙어 서고 있었다. 기억이 맞다면, 지금까지 내가 봤던 그의 두 대의 차량 중 한 대도 저것과 같은 차종이었다.
발레파킹을 맡기기 위해 차에서 내려선 운전자는 역시나 그였다. 키를 받기 위해 운전석 쪽으로 서둘러 달려오던 주차 요원이 그의 신장에 놀라 자기도 모르게 위를 올려다봤다가 손님에게 실례를 범했다는 자각에 얼른 시선을 끌어 내렸다.
번화가에서 살짝 벗어난 주택가의 한적한 도로변이었지만, 강아지를 산책시키던 아주머니, 장바구니를 들고 아기띠를 앞으로 멘 외국인 남성, 주말 데이트 중으로 보이는 젊은 커플 등… 주변에 있던 모든 이들의 이목을 단번에 집중시킬 정도로 그의 존재감은 독특했다. 단지 190을 가볍게 넘길 듯한, 한국에서 보기 드문 신장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들어 봐, 나 오늘 길 가다가 진짜 잘생긴 남자 봤다니까.’ ―그를 본 사람들은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것이 확실했다. 일단 시야에 들어오면 일상적으로 흘려 볼 수 없을 정도로, 한 번쯤은 고개가 돌아가고 시선이 고정될 수밖에 없을 만큼, 그는 ‘보통’이 아니었다. 팬텀을 벗어나 외부에서 그를 보고 있으면 그 사실이 더욱 분명해졌다.
실장님이 가볍게 클랙슨을 울리자, 차의 뒤쪽을 돌아 입구로 향하던 그가 이쪽을 돌아봤다. 실장님이 손을 흔들었고, 그가 걸음의 속도를 늦추면서 미소를 보였다.
“오늘 류 대표 제대로 벗겨 먹자고.”
우리를 기다리는지, 보도블록 위에 멈춰 선 그를 내다보면서 실장님은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악당처럼 웃었다.
“대표님도 같이 드시는 거예요?”
“어? 내가 얘기 안 했나? 아… 그냥 밥 먹자고만 해서 생각 못 했겠구나. 미안.”
“아니에요, 전혀 상관없어요.”
실장님이 너무 미안한 표정을 지어서, 손까지 내저으면서 적극적으로 부정했다.
“내가 요즘 정신이 이래. 머릿속에서 생각만 해 놓고, 말로 한 줄 안다니까.”
요즘 실장님은 홍콩 아트페어에 가지고 갈 작품의 최종 리스트를 추리고, 가격과 배치를 결정하는 데에 집중하고 계셨다. 전시 진행과 관련된 사무는 유니 누나와 주한이 형이 맡고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핵심은 작품 자체이기에 중압감을 느끼실 만도 했다.
어떤 작가의, 어떤 작품이, 언제 어떻게 주목받을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전제하에, 세계 미술 시장의 트렌드에 대한 방대한 정보력을 바탕으로 한 수 앞서 동향을 예측할 수 있는 혜안까지 요구되는 작업이었다.
팬텀 사무실에서도 요즘 실장님은 대부분의 업무 시간을 대표님과 함께 회의를 하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가끔은 의견이 맞았고, 가끔은 그렇지 못했다. 두 분은 한국어로, 영어로, 광둥어와 중국어로, 많은 사람들과 통화를 했고, 가끔은 아주 반기면서 고마워했고, 가끔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미간을 짚으며 화를 냈다.
페어 날짜가 다가올수록 갤러리 내에는 긴장이 감돌았지만, 모든 팬텀 식구들이 그 긴장을 흥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 출장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는 나까지 고양되는 기분이었다.
여튼 상황이 그렇다 보니, 식사 자리가 팬텀의 전체 회식이라는 말을 잊은 것 정도는 이해가 되고도 남았다. 곁에서 조금이나마 바로바로 도와 드릴 수 있으니 그때 입주를 결정했던 게 잘한 일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요즘 바쁘셨으니까.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실장님이 바쁘신 만큼 아마 그 역시 한가하지는 않을 것이고, 부하 직원이 자신의 집 거실에서 호흡곤란을 일으켰던 일을(그리고 이후에 응급처치처럼 가졌던 잠자리를) 신경 쓰며, 자세히 파고들 여유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어떤 때는, 그날 밤 일어났던 일들이 전부 꿈 같았다. 그것도 소파 위에서 햇빛을 받으며 깜빡 잠이 들었던 잠깐 동안의 꿈. 시계를 보면 분명 시간은 5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아주 긴 시간 아주 긴 이야기의 꿈을 꾼 것 같은.
실장님과 웃으면서 인사를 나눈 그는, 나의 인사에 짧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식당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입구를 지나 건물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두 분은 아트페어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고, 조용히 그 뒤를 따르는 동안 그와의 관계가 처음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나에게도 관심을 가져 달라는, 그런 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눈빛과 태도의 조절만으로도 나를 자신의 영향력 내에서 간단히 격리시켜 놓았던 그때처럼, 그는 그동안 얄팍하게나마 쌓아 왔던 친근감을 완전히 배제한 채 나를 대하는 듯했다. 그날 밤, 나에게 죽을 내주고, 맨투맨을 벗어 주고, 평소 같지 않게 억지를 쓰며 같이 있어 달라 했던 내 요구를 기꺼이 들어주었던… 그런 친절함을 떠올리기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최초의 성 경험은 누구에게나 강렬한 기억이겠지. 나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뜨거운 입술로 귓가를 데우던 숨결의 감촉이 떠오를 때면, 나도 모르게 흠칫 손이 귀를 향하곤 했다. 나의 상대였던 그에게도 비슷한 순간이 있기는 할까, 궁금했다. 일상 속에서 문득, 그날 밤 내가 보였던 반응이 떠올라 서류를 넘기던 손이, 양치질을 하던 손이, 핸드폰을 다루던 손이 멈칫하는 그런 순간들이 있는지. 잠자리 이후 어색하게 대하는 것보다는 원래의 관계로 돌아가는 편이 훨씬 나았지만, 그저 그것이 조금 궁금했다.
처음 방문하는 곳이 아닌지, 건물의 입구까지 일부러 마중을 나온 식당의 주인과 안부를 주고받는 그의 뒷모습은 그 궁금증에 대해 ‘No’라는 답을 말하는 듯했다.
궁금증이었을 뿐, 나와 같은 후유증을 공유하고 있기를 바라거나 기대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실망할 것도 없었다.
우리가 안내받은 곳은 문 위쪽에 ‘삼천리’라는 패가 붙은 별실이었다. 오래된 가정 주택을 개조한 식당이었고, 전체적으로 구조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아 실내는 어느 가정집의 사랑방에 들어온 것처럼 소박하고 아늑했다. 2층의 우리 방에서는 아담하지만 잘 관리된 정원이 내려다보였다. 그의 정원과 대조된다는 생각이 들어 소리 없이 혼자 웃었다.
“류 대표가 너 아팠다고, 몸보신 좀 해야 한다면서 여기로 하자고 했어.”
그의 맞은편에 나와 나란히 앉은 실장님이 메뉴판을 넘기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실장님의 말을 못 듣기라도 한 것처럼, 창문을 통해 정원을 내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몸은 이제 다 나았는데…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기보다 강단이 있는지는 몰라도 많이 마른 편이에요. 권주한도 백유니도 하나같이 꼬챙이 같잖아. 다들 일부러 다이어트라도 하는 건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미간까지 찌푸려 가며 그가 진지하게 말했고, 실장님이 좌식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웃었다.
“주한이 먹는 양 알면서 그런 소리가 나와? 사흘 굶은 애처럼 먹잖아. 유니가 입이 조금 짧긴 하지만 보통 정도로는 먹는 편이고. 다들 먹어도 안 찌는 체질인 걸 어쩌겠어.”
아직도 내가 쓰러졌던 걸 염두에 두고 일부러 이런 식사 자리를 마련해 줬다는 것이 의외였지만, 그것은 나만을 위한 특별한 친절은 아닐 것이다. 주한이 형과 유니 누나를 생각하는 친절의 연장선에 내가 포함된 것이나 마찬가지겠지. 그 사실에 대해 실망하려 하는 자신을 숨기고 싶었다. 타인과 비교해 특별해지기를 원하는… 이런 건 내가 아니었다.
“주한이 형이랑 유니 누나가 늦는데… 연락 한번 해 볼까요?”
“…….”
순간적으로 방 안에 고인 서걱거리는 침묵에, 청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던 손이 어색하게 굳었다.
“걔들은 오늘 안 불렀어. 너 몸보신시키려는 거니까 마음 놓고 먹어. 권주한 있었어 봐. 넌 장어 맛도 못 봐.”
약간의 장난기를 더해 그렇게 말한 실장님은 서둘러 사람을 호출해 음식을 주문했다. 자주 들르는 곳이 맞는지, 그와 실장님은 메뉴 주문에 막힘이 없었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두 분은 일 얘기를 해야 했기 때문에, 명절에 또래의 사촌 하나 없이 어른들 틈에 끼인 초등학생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실장님은 슈슈 작가의 작품이 해외보다는 국내에서 반향이 더 크다는 점을 어필하며 이번 아트페어에서 다른 작가를 메인으로 밀어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그는 직접적으로 반대하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쉽게 수긍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사이 마늘을 곁들인 장어구이와 갈비찜이 모두 함께 먹을 수 있도록 가운데에 놓이고, 전복과 낙지가 들어간 보양탕이 각자의 앞에 하나씩 서빙되었다. 입구가 넓어 먹기 편해 보이는 두툼한 뚝배기에 담긴 보양탕은 대추와 삼이 들었는지 은은하게 한약 같은 냄새가 풍겼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꼭 다 먹어요. 음식이 아니라 약이라 생각하고.”
내 앞의 뚝배기를 가리키며 조금 엄한 어투로 그렇게 말한 그는, 정작 자기 몫에는 별로 손을 대지 않았다.
다시 두 분의 이야기가 이어졌고, 나는 식사에 집중했다. 집중하려고 했다. 하지만 누나와 형 없이 나 혼자 두 분과 식사하기는 처음이라 맛도 잘 알 수 없었다. 최고 임원들과 말단 인턴의 식사 자리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잘 먹고 있는지 감시라도 하듯 그가 이야기의 중간중간 뚝배기 안을 흘깃거렸기 때문에, 착실히 그릇을 비워 갈 수밖에 없었다.
“얘 봐라, 아무리 의젓해도 애는 애네.”
이 정도면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에 숟가락을 내려놓았는데, 실장님이 내 뚝배기 안을 가리키며 웃었다. 전복과 낙지를 열심히 건져 먹은 그릇 안에는 대추와 삼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 역시 나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
적어도 처음에 그랬던 것 같은 무심한 얼굴은 이제 아니었지만, 스스로 의식도 하지 못한 사이 새어 나온 말 그대로 ‘애 같은 행동’에 얼굴로 열이 올랐다.
「너보다 열 살 어린 상대한테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드냐?」 ―언젠가 그가 인우 형에게 했던 말이 불쑥 떠올랐다. 그 말에는, 열 살 어린 사람은 ‘그런 상대’로 보지 않는다는 뜻이 내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그에게 내가 예외였거나, 혹은… 그날 밤의 일이 철저히 응급처치에 지나지 않았다는 뜻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대추와 삼을 남긴 창피함에서 어쩌다가 여기까지 생각이 흘러온 건지. 사고에 맥락이 없었다.
빈 그릇과 덜 비운 그릇들이 모두 깨끗이 치워지고, 곧 그 자리에 간단한 다과가 차려졌다. 색이 고운 한과 몇 종류와 따뜻한 차였다. 꽃과 과일이 섞인 듯한 차는 에어컨이 가볍게 가동되고 있는 실내에서 마시기에 딱 좋은 온도였다.
“서이현 씨에 대해서… 한 실장에게 조금 의논을 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조심스러운 기색도 망설이는 기색도 찾을 수 없었다. 나의 식사가 끝나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래서 이제 지체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찻잔에서 입술을 떼면서 그를 쳐다봤다. 나를 마주 대하는 그의 눈이 앞으로 꺼낼 이야기의 무게에 대해 미리 경고하는 것 같아 입이 말랐다. 마른침을 삼켜 봤지만 소용없었다.
“그림을 다시 그리는 게 어때요?”
“…….”
손의 힘이 느슨해지면서 잔이 살짝 미끄러졌다. 놓칠 뻔한 잔을 붙들어 쥐고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나도 모르게 눈으로 실장님, 아니, 선생님을 찾았다. 선생님은 부드러운 미소로 내 손을 꽉 붙잡았다. 이 얘기가 나오리라는 것을, 아니, 오늘 이 자리 자체가 이 이야기를 위해 마련되었다는 것을, 선생님은 미리 알고 계셨던 것이다. 누나와 형을 부르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림을 다시 그리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꺼내 놓은 그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색소가 옅은 흐린 눈동자로 그저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뒷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기를.
테이블 위에서 가볍게 깍지를 끼고 있던 그가 손가락을 뻗어 손끝과 손끝을 마주 대며 삼각형을 만들었다.
손의 크기도 신장에 비례해 상당했지만, 손가락이 길고 모양이 좋아 우아하고 단정한 인상을 주는 손이었다. 살짝 두드러져 단단해 보이는 마디와 손끝까지 일정하게 유지되는 굵기, 검푸르게 불거진 손등의 핏줄이, 우아함 뒤에 존재하는 그의 공격성,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어떤 위험도 감수할 정도로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망설임이 없는 과격하고 서늘한 단호함에 대해 살짝 암시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손은 그저 손이다. 향기가 그저 향기인 것처럼. 아무것도 암시하지 않는다.
“굳이 내 의도를 미화하거나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특별할 것 없이 편안한 목소리로 그렇게 선언한 그는, 곧바로 이야기를 이어 갔다.
“팬텀에 소속 작가가 20여 명이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실제로 화랑을 유지하고 키워갈 수 있게 해 주는 건 그중 서너 명의 공이죠. 대형 갤러리들과의 경쟁에서 그나마 지금의 자리라도 지키려면 우리 같은 작은 갤러리는 참신한 신인을 계속해서 발굴해 나가야만 합니다. 기존 작가들이 계속해서 좋은 작품을 내놓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창작품은 몇 시간 앉아 있는다고 해서 일정한 결과물을 보장하는 게 아니니… 언제 슬럼프가 올지, 작품 가치가 하락할지는 모르는 거죠. 세간에 충격을 줄 수 있고 이슈를 일으킬 수 있는 신인을 꾸준히 선보이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해요. 많은 사람들이 미술을 고상한 예술이라 생각하지만… 각각의 작가는 신념에 따라 돈이나 명예를 떠나 그런 태도로 작업을 할 수도 있고, 그들이 원하는 작업 환경을 제공해 주려 하고 있지만… 우리, 딜러들은 예술가가 아니죠. 예술가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내는 것으로 직원들에게 월급을 줄 수는 없으니까.”
동의를 구하는 것처럼 한쪽 눈을 내 쪽으로 살짝 치켜뜨며 그렇게 말했지만, 동의할 틈도 반대할 틈도 주어지지 않았다.
“누가 좋은 평가를 받는 작가가 되는가, 누가 잘 팔리는 작가가 되는가. 안타깝게도 그건 순수하게 작품의 가치만으로 결정되지는 않아요. 일단 작품의 가치라는 것도 상당 부분 주관적인 해석에 의존하는 면이 많으니 모두가 수긍하는 객관적 평가라는 게 더 어렵죠.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작품의 가치까지도 마케팅과 비즈니스로 창조해 낼 수 있는 게 지금 세계 미술 시장을 움직이는 대형 갤러리들과 거대 딜러의 힘입니다. 지금의 미술 시장은 쇼 비즈니스 판과 그렇게 성격이 다를 것도 없거든요.”
그가 특별히 빠르게 얘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야기의 속도와 방향을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나는 아직도 출발점에 서 있고, 우리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는데, 그는 이미 앞서가며 나를 당기고 있는 기분이었다.
“최근 1~2년 사이 팬텀의 재정이 더 탄탄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음… 슈슈를 비롯한 간판 작가들의 활약 때문이지, 그들의 뒤를 잇거나 뛰어넘을 것으로 기대되는 신인을 발굴하지는 못하고 있어요. 문제가 큽니다. 대학별 졸업 전시회는 물론이고, 지방의 카페형 소규모 갤러리에 심지어 SNS까지… 한 실장과 둘이서 미친 사람처럼 뒤지고 다녔지만… 재미있는 작가 만나는 게 좀처럼 쉽지 않아서요.”
톡톡. 검지를 서로 맞부딪치며 쉼표를 찍듯 잠시 말을 멈춘 그가 나를 등 뒤의 벽으로 누르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길게 얘기했지만, 서이현 씨가 그런 작가가 돼 줄 거라고 기대한다는 겁니다.”
어떤 질문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끈기 있게 내 얼굴을 응시했다. 아니면 단지 반응을 살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얘기들이었다.
오래전에 그림을 그렸고, 그림이 내 언어였던 때가 있었지만, 그때도 지금 그가 얘기하는 ‘미술 시장’에서 내 그림이 가지게 될 위치를 염두에 두거나 상상해 본 적은 없었다.
원하는 만큼 충분히 나를 관찰했는지, 그는 손가락으로 만들었던 삼각형을 풀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물러났다.
“이제 같은 얘기를 한 실장이 듣기 좋게 해 줄 겁니다.”
선생님은 한숨을 쉬면서 그를 향해 고개를 저었고, 그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혹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한 결과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말에 악의는 없다. 입장의 차이일 뿐이다. 갤러리의 오너이자 그림을 판매해야 하는 딜러로서의 입장에서 설명했을 뿐, 그것이 부도덕함이나 범죄는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그가 그림을 팔지 못하면 어떤 작가는 더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쥐고 있던 내 손등을 격려하듯 가볍게 두드리며 선생님의 조심스럽고 다정한 음성이 이어졌다.
“류 대표 말이 너무 사업적인 측면에서만 얘기한 것처럼 들리겠지만, 그만큼 너한테 가능성이 있다고 느꼈다는 얘기로 받아들여 줘. 말은 저렇게 해도 맨땅에 헤딩하는 무모한 짓은 절대 안 하는 사람이거든.”
찻잔 언저리에 어색하게 놓여 있는 손을 내려다보며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의 말 그대로였다. 그는 승산이 없어 보이는 대상에 투자할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완벽해 보여도, 최상위의 골든 알파라도, 결국은 사람이다. 아무래도 그의 이번 판단은 빗나간 것 같다. 왜 나일까.
“네가 예전에 그렸던 그림, 류 대표가 소장하고 있다면서? 콘테스트에 입상했던 작품.”
“…….”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옆자리의 선생님을 돌아보았다.
그때 선생님은 이미 한국에 계시지 않았다. 수상 소식도 어머니의 친구였던 선생님의 언니에게 전해 들으셨을 것이다. 그 그림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거기까지 알고 계실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긴장이 됐다. 목구멍이 너무 말라붙어 따가웠다.
그가 선생님에게 어디까지 얘기했을까. 자기 그림이라고 자백하더니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숨도 못 쉬다가 정신을 잃어버렸는데, 거기에 대해서 뭐 좀 아는 거 없냐고, 그렇게 물었을까.
그런 궁금증 혹은 불안감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을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나치고는 과감한 행동이었지만, 팔짱을 낀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그는 어떤 힌트도 던져 주지 않았다.
“류 대표가 오랫동안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거든. 나도 아주 인상적이라 생각했었고. 네 작품인지는 몰랐지만.”
“그건… 벌써 오래전에 그린 거고… 그림 안 그린 지 5년이 넘었어요. 그리고 그거 외에 다른 그림을 보신 적도 없는데….”
겨우 정신을 주워 담아 어렵게 꺼낸 말이었는데, 맞은편에서 가벼운 코웃음이 들려왔다.
“한 작가의 역량이나 가능성을 가늠하는 데에 작품이 스무 개 이상씩 포함된 포트폴리오가 필요한 안목이라면… 아트 딜러로 먹고살 생각은 그만둬야죠.”
“…….”
“좀 재수 없게 말하긴 했지만, 한 작품만으로도 충분했다는 겁니다. 그게 열여섯 살에 그린 작품이라면 더더욱.”
앞서 했던 말의 삐딱한 냉소를 지우려는 듯 그는 좀 더 진중한 말투로 설명을 덧붙였다.
<소외>에 대한 그의 칭찬은 의외였고, 이런 쪽으로 빈말을 하거나 감상을 과장할 사람이 아니었기에 더더욱 싫은 감정이 들지는 않았지만… 과거에 그렸던 그림을 마주하는 것으로도 과호흡을 일으킬 정도인 사람이 그림을 다시 그릴 수 있을 리 없었다. 가끔씩 연습장에 낙서를 남기는 것과는 달랐다.
“5년을 쉬었어요.”
입 안에서 중얼거리듯 말했지만, 좁은 방 안에서 그 말을 듣지 못할 사람은 없었다.
선생님이 내 쪽으로 좀 더 다가앉으며 내 손을 잡지 않은 다른 손을 가볍게 등에 올렸다.
“나도 류 대표 의견에 동의해. 지난번에 너에게… 지금 그림을 안 그리고 있다고 해서 죄송할 일은 전혀 아니라고 했고, 그 말 자체는 물론 진심이었지만, 기회만 된다면, 또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다시 그렸으면 하는 것도 사실이야. 네 재능을 아니까.”
“선생님… 그렇게 생각해 주시는 건 정말, 감사하지만… 그건 다… 너무 옛날얘기예요.”
“아, 옛날. 서이현 씨 지금 몇 살이죠? 쉰? 마흔? 아니, 스물다섯은 됐던가?”
조금 인내심을 보이는가 싶었던 그는 또 한 번 까슬한 말투로 선생님의 눈총을 받았다.
그의 말이 일반론일 수는 있다. 마흔이나 쉰은커녕 아직 스물다섯도 되지 않은 나는 옛날이라는 말을 쓰기엔 이른 나이일지도 모른다. 과거의 끈에 묶여 피가 통하지 않아 썩어 버린 자신의 일부를 잘라 내고 살아가는 나를 알게 된다면, 의지가 약하다고, 너무 일찍 열정을 잃어버렸다고, 사람들은 혀를 찰지도 모른다.
실제로 내 주변에는 자신의 일부를 파괴하려 하는 과거를 끊어 내 버리고, 뭔가를 희생하면서도, 피를 흘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처럼 용기를 내길 원한다. 나 역시 현재의 빛 속에 살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각자의 속도가 있다. 지금의 내 위치에서, 나라는 인간의 속도에 맞게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던 것이지, 그들과 똑같아 보이는 흉내를 내려던 것은 아니었다.
“이현아, 류 대표하고 나는, 다시 그리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네가 거기에만 집중해서 생각해 줬으면 하는 거야.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아진 게 아니라, 그림을 그리지 않기로 결심했던 거라면 마음이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천천히 생각해도 돼.”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아진 것도, 그리지 않기로 결심했던 것도 아니었다. 처음엔 둘 다 아니었다. 그저, 그릴 수가 없어졌었다.
내 손에 겹쳐진 선생님의 손을 내려다보며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인 끝에 입을 열었다.
“아마 전… 못 그릴 거예요.”
두 분은 내 이야기를 기다려 주었다.
“너무 오래 쉬기도 했고, 그림을 놓아 버린 동안에 그림에 대한 애정이나 열정… 그런 것도 자연히 사라졌거든요. 다시 그리는 일은 아마 없을 거라고, 그냥 계속 그렇게 생각하면서 지내 와서… 그림 그리는 제 모습 자체가 상상이 안 돼요.”
선생님에게도 그에게도, 나의 현재와 현재까지 이어진 여정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그러한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형태의 설명이었다. 그 이상을 보탠다면 거짓이 되거나 자백이 이루어져야만 했고, 거짓도 자백도 지금의 나는 원하지 않았다.
“그래,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마워. 우리도 오늘 이 자리에서 바로 너에게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어.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이 자리에서 생각이 바뀌진 않겠지. 네 나름대로 그림에 대해 정리해 온 생각이 있다면 더 그럴 거야.”
붙잡은 손등을 다른 손으로 다독이던 선생님이 이번엔 두 손으로 내 손을 힘주어 붙잡았다.
“그런데 이현아, 네가 다시 그림을 그려 보면 어떻겠냐고. 류 대표가 그 얘기 꺼냈을 때… 나 사실, 류 대표한테 고맙더라.”
나를 보는 선생님의 표정에 동요가 일고 있었다.
어릴 때 이후로 선생님과 내가 계속해서 인연을 유지해 온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선생님의 눈 속에서 이지러지고 흔들리는 그것이 오랜만에 만난 옛 제자의 지독한 과거에 대한 감상적 연민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어린 시절, 선생님과 나는 비밀스러운 정원의 공유자였고, 선생님은 내가 보는 세계에 대한 완벽한 이해자였다.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자신을 긍정할 수 없었던 어렸던 나는 선생님으로 인해 내 세계를 확장해 가고 그 세계 안에서 편안할 수 있었다.
선생님이 왜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자세히 들을 필요가 없었다. 선생님이 그에게 고마웠던 만큼, 그저 선생님께 죄송스러울 뿐이었다.
더는 부정적인 발언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긍정의 표현도 쉽게 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아주 작은 반응조차 선생님에게 의도치 않은 희망을 주는 경솔함이 될까 봐, 선생님과 마주 잡은 손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랫입술을 물었다.
에어컨이 가동되는 소리뿐이었던 실내에 가느다란 빗소리가 섞여 들고 있었다. 누군가 지시라도 내린 것처럼 세 사람 모두 거의 동시에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느새 어둑해진 늦은 저녁을 배경으로, 유리창에 빗물이 빗금을 긋고 있었다.
무거워진 침묵에 균열을 일으킨 것은 그였다.
“서이현 씨, 이거 먹어 봐요.”
그는 그때까지 누구도 손대지 않고 있었던 다과 그릇을 내 쪽으로 밀어 놓았다. 그의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을 선생님도 나도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는 한입에 먹기 좋도록 작은 정사각형 모양으로 썰어 놓은 약과를 포크에 찍어 건넸다.
“먹어 봐요. 페이스트리처럼 여러 겹으로 된 한과인데, 명인이 만든 거예요. 귀한 거.”
“도대체 명인 같은 단어는 어떻게 아는 거야? 한국에서 자란 적도 없으면서.”
실장님은 나 대신 그에게서 포크를 건네받아 전해 주셨다.
“떨어져서 지내면 오히려 집착하게 되는 법이지. 원래 외국에 있으면 다들 애국자 되고 그러잖아.”
또 다른 포크에 약과를 찍어 선생님에게 건네면서 그는 눈썹을 치키며 능청스럽게 응수했다.
“국적이 한국인 것도 아니면서.”
“국적은 법률·행정상의 자격일 뿐이야. 나는 쿼터 혼혈이지만, 내 피는 절반이 한국인이라고. 아버지에게서는 반만 받았으니까.”
약과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자 겹겹이 쌓인 층 사이에 스며 있던 꿀이 배어 나와 입 안을 달게 물들였다. 미간이 모아지는 지나친 단맛이 아닌 눈꺼풀이 느슨해지는 달콤함이었다.
“어때요? 안 먹고 갔으면 후회했겠죠?”
그는 이제 그림 따위보다 약과에 대한 감상이 더 중요한 것처럼 상체를 내 쪽으로 기울이며 신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옅은 회청색의 눈동자에서도 뚜렷한 입체를 그리는 이목구비에서도 동양적 인상을 찾기 어려웠다. 검은 머리카락만이 그 자신의 말처럼 반절은 한국인인 그의 피를 묵묵히, 그러나 고집스럽게 주장하고 있는 듯했다.
‘후회했겠죠?’ 그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지금까지 본 중에 가장 진한 미소를 보였다. 턱 근육이 세로로 팽팽하게 당기면서 뺨의 옆쪽으로 보조개처럼 보이는 깊은 골이 파일 만큼.
■ ■ ■
식당 측에서 빌려준 우산을 타고 흘러내린 빗물이 발치로 떨어지며 스니커즈 위로, 청바지의 밑단으로 튀어 올랐다.
세찬 비는 아니었지만 우산을 쓰지 않고 무시할 수 있는 정도의 가랑비도 아니었는데, 외국인 남자 하나가 윈드브레이커의 후드를 뒤집어쓴 채 골든 리트리버 한 마리를 앞세워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하이. 하이. 황금빛 수염으로 턱 주변이 뒤덮인 남자가 그의 표정을 구분할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오자, 두 사람은 서로 짧게 인사를 나누었다.
“개가 멋지네요.”
그가 말했다.
“비만 오면 밖에 나가자고 야단인 놈이라 이 고생을 하고 있죠.”
남자의 대답에 그가 웃었다.
바이. 바이. 남자가 내 옆으로 스쳐 지나가면서 나에게도 웃어 보였기에 나 역시 보일 듯 말 듯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남자와 개가 지나가기 편하도록 옆으로 비켜섰다.
외부의 주차장에 가 있었던 그의 SUV가 식당 입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선생님의 차가 먼저 나왔었고, 이후에 일 관계의 다른 약속이 있었던 선생님은 그에게 나를 대신 집까지 태워다 줄 것을 부탁하고 약 3분쯤 전에 떠나신 상황이었다.
“오늘, 식사 감사했습니다.”
보도블록 쪽으로 바짝 붙어 서는 자동차의 라이트 빛을 피하기 위해 우산을 살짝 기울이면서 그에게 인사했다.
“생각도… 정리할 겸 좀 걷다가 버스 타고 들어가면 되니까, 실장님 말씀은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그럼….”
우산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의 표정까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보지 않으려 한 의도도 없지는 않았다. 토요일 저녁, 평소보다 캐주얼한 차림에 어울리는 끈이 달린 검은색 구두 앞에서 벗어나 그를 지나쳐, 좀 전에 외국인 남자가 내려온 오르막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생각도 정리할 겸 한잔하려는데.”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흉내 내는 그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우산을 든 그가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빗속에서는 모든 향이 강해진다. 비 오는 날은 평소보다 향수를 옅게 뿌려도 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다. 살짝 다가왔다가 발끝만 적시고 물러나는 파도처럼, 그의 향이 코끝에 맴돌다 후각 깊은 곳까지 들어오지 않고 사라졌다.
“같이 어울려 줄래요?”
지금까지 살아온 관성은 제안을 거절하고 뒤로 돌아 집으로 도망치라고 하는데, 달콤하게 관성을 마비시키는 새로운 자극은 향기를 흡입해 맛을 보길 원했다. 나의 어디에 이런 충동과 탐욕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혹시 있었더라도 이제는 전부 죽어 버렸을 텐데. 금방 사라질 것처럼 색이 옅었던 그의 눈동자가 유난히 파랗게 보였다.
■ ■ ■
흡연 욕구를 오래 참았던 건지, 바에 자리를 잡자마자 그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각자에게 한 권씩 주어진 세로로 긴 메뉴판의 페이지를 무성의하게 뒤적이면서 그가 말했다.
“비도 오는데 독한 술 어때요.”
처음 와 보는 장소의 어색함에 옆에 내려놓은 가방을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장소의 어색함보다는 그와 단둘이 이런 장소에 있다는 어색함이 더 컸다.
저녁을 먹었던 식당에서 차로 10분 거리의 바는 남산으로 이어지는 오르막에 위치해 있었다. 건물 자체는 높지 않았지만 남산 중턱에 있어 전망이 좋았다. 이곳 역시 그가 자주 찾는 장소인지, 나에게 자신을 매니저라 소개한 책임자가 직접 나와 반갑게 우리를 맞았다.
우리가 안내받은 좌석은 반쯤 개별실에 가까웠다. 사람이 드나들 수 있도록 가벽의 한쪽 가장자리가 개방되어 있었지만, 소파에 앉은 상태에선 홀이 보이지 않았고, 일부러 보려고 하지 않는 한 홀에서도 안쪽이 보이지 않는 구조였다.
아늑한 룸에는 좌석의 깊이가 깊숙하고 등받이가 높고 푹신한 소파가 마련되어 있었고, 소파 앞은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전면창이었다. 두세 사람이 프라이빗하게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당한 장소였다.
모래와 형이 있는 집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이었다. 창 너머 풍경도 옥탑의 평상에서 보던 것과 비슷했다. 그곳과 이곳의 공간 자체에는 예전 모래의 집과 할아버지의 집 정도의 차이가 있긴 했지만.
오징어잡이 배들을 연상시키던 서울의 야경 위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문득 분수에 안 맞게 호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새었다. 그 항구 마을에서 내가 가 본 술집이라고는 허름한 막횟집이나 조개구이집이 다였다. 그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잘 알지도 못하는 메뉴판을 뒤적이는 척 웃음이 새는 얼굴을 숨겼다.
직원을 불러 주문을 마친 그의 시선이 옆얼굴에 들러붙는 듯 느껴져 이미 주문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메뉴판을 계속 뒤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와 나는 ㄱ자로 이어진 소파가 꺾이는 코너에 앉아 있어 엄밀히 말하자면 옆자리에 앉은 것은 아니었지만, 다리가 닿지는 않을지 신경을 써야 할 정도로 거리가 가까웠다. 옆자리였다면 차라리 시선을 피하기는 쉬웠겠지만, 서로 얼굴을 보며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담배를 깊이 빨아들이는 호흡 뒤에 살짝 잠긴 듯한 음성이 이어졌다.
“어제 재밌었나 보던데.”
인우 형과 만났던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의미 없이 칵테일의 목록을 훑던 시선을 들어 그를 쳐다봤다. 예상대로 서로의 시선에서 빠져나갈 틈이 없는 거리였다.
나와 만났다는 얘기는 하더라도, 어떤 내용의 대화를 나눴는지, 인우 형이 거기까지 세세하게 떠벌릴 사람은 아니었다. 무엇을 근거로 한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형에게 그 정도 확신은 있었다. 다른 사소한 얘기라면 몰라도 내가 알파와 오메가에 대해 이러이러하게 물어보더라, 그런 얘기까지 그가 알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인 것도 아니고, 그 본인이 우스운 얘기를 했던 것도 아닌데, 그는 문득 재떨이에 담배 끝을 비비며 피식 웃었다.
“하여간 게이들이란.”
혼잣말처럼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그의 웃음에 포함되는 ‘게이들’이 누구인지 모호했다. ‘올드 퓨처’의 촬영 날 햄버거와 맥주를 먹고 마시면서 오갔던 대화들로 봤을 때 그 자신이 일단 게이, 적어도 바이였으며, 처음부터 같은 남자인 나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던 인우 형 역시 크게 다를 리 없었다. 스스로 「저, 게이거든요.」라고 했던 우발적 발언으로 인해 그에게는 나 역시 게이로 분류되고 있었다. 이것저것 가져다 짜 맞춰 생각할 필요 없이 이미… 같이 자기도 했고.
본인에 대한 자조인지, 연애 대상으로 그다지 좋은 남자는 아니라고 했던 인우 형에 대한 반복적인 평가인지, 아니면 나에 대한 비난인지. 그것을 알아내기에는 짧은 혼잣말과 미묘한 웃음이 주는 정보가 너무 빈약했다.
담배를 한 대 다 태운 그는 내 쪽으로 약간 몸을 돌리며 자세를 느슨하게 바꾸었다.
“선약이 있어서 안 된다고 거절했다가, 다시 전화해서 보자고 했다면서요.”
희미하게 부정적 뉘앙스가 느껴지는 말투였다. 인우 형이 그런 느낌으로 표현한 건지, 그가 형의 말에 새롭게 붙인 해석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화가 나거나 불쾌해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어 웃음기를 억누르고 있던 그가 입술을 놓으며 또 한 번 픽 웃었다. 아까부터 자꾸 뭐가 그렇게 혼자 재미있는지 모르겠다.
“그렇지…. 사람이 다 보기하고 같을 순 없지.”
오늘따라 혼잣말도 잦았다. 분명 나를 향해 말을 던져 놓고, 거기에 대해서는 스스로 혼잣말로 결론을 내려 버리는 식이었다. 그렇게 비뚤게 구는 그에게, 나 역시 오랜만에 반항심이 꿈틀거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그답지 않게 주변을 빙빙 돌면서 나를 툭툭 건드리기만 하는 게 갑갑했다.
차가운 금속성의 라이터를 손안에서 굴리던 그가 눈을 치켜 나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칭찬이에요. 음… 아마 칭찬일 겁니다. 스물두 살이면 그래도 성인인데, 그런 쪽으로 전혀 모른다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평소에 얌전하다고 그런 쪽으로도 꼭 덤덤한 건 아닌데 내가 편견으로 서이현 씨를 숙맥 취급했어요. 오히려 그 정도가 자연스러운 거죠.”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서 일부러 비꼬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어투의 가벼움만큼 상쾌해 보이지만은 않는 그림자 같은 것이 어른거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인우 형을 더 확실하게 유혹하기 위해 일부러 ‘기술’이라도 쓴 것처럼. 그는 얘기를 몰아가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오해는 분명 불유쾌한 것인데, 그런 찜찜함이 아예 없는 건 아닌데, 또 그게 전부인 것도 아니었다. 거기에는 몸과 마음이 살짝 들뜨는 듯한 가벼운 흥분이 있었다.
지금 그가 보이는 반응들이 혹시 질투일까.
생각을 해 놓고 보니 터무니없는 공상 같았다. 누구도 모르게 속으로 한 생각이었지만, 생각의 흔적 위를 펜으로 직직 그어 버리고 싶도록 얼굴이 화끈했다. 스스로에게 실소가 나올 만큼.
질투 쪽으로 생각이 기울다니. 나에게 이런 낙천적인 면이 있었나.
“그런 쪽이… 어느 쪽인데요.”
당황스러움에 나도 모르게 화살을 그에게 돌려, 속에서 꿈틀거리던 반항심을 덜컥 쏟아 놨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도전적인 표정을 짓거나 그런 말투를 쓰지는 않았다. 단지 질문을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예상하지 못한 급습이라도 당한 듯 눈썹을 꿈틀거리며 나를 보는 눈에 무게를 실었다.
‘그런 쪽’으로 전혀 모른다는 것도 이상하다, ‘그런 쪽’으로 덤덤하다는 건 아니다. ―그런 모호한 경계는 지워 버리고 차라리 핵심을 건드리길 바랐다.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어요.”
침묵이 오래 이어졌다. 새로운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그는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자기 내면의 밑바닥까지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저 그가 조금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인데.
한참 만에 답을 찾은 건지, 그가 메말라 보이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네요. 내가 애매하게 떠들었어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가벽의 입구 쪽에서 걸음 소리가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손님이 미리 준비하고 대화를 적절히 중단할 수 있도록 자신이 다가가고 있음을 일부러 알리려는 기척이었다.
우리를 안내해 줬던 매니저분이 직접 술을 가지고 왔다. 푸르스름한 병에 담긴 다갈색 위스키와 화려하게 세공되었지만 연약하기보다는 단단함이 느껴지는 여러 종류의 크리스털 글라스, 얼음이 든 바스켓 등이 조용히 테이블 위에 서빙되었다.
“난 스트레이트로. 이쪽은 마시기 좋게.”
그의 주문대로 각기 다른 잔에 다른 방식으로 두 잔의 술을 내놓은 매니저는 방으로 들어왔을 때와는 다르게 구름을 타고 움직이는 사람처럼 소리 없이 사라졌다.
가느다란 잔을 쥐고 만지작거리던 그가 부드럽게 잔 속의 술을 비워 낸 뒤 끊어졌던 말을 이어 갔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모든 인간에게는 의외의 모습이 있다는 거죠.”
어깨의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그가 도망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고, 거기에 실망한 자신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뭔가를 기대하는 내가 낯설었다.
그의 관심을 끌기를 원하고, 침대 위로 올라와 같이 자자고 하는 그에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자신과의 행위로 고통을 마비시켜 주겠다는 그의 말을 진심으로 믿기도 했었다. 그때, 똑같은 말을 해 준 사람이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였다면, 예를 들어 인우 형 같은, 아마도 나는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적어도 아직은.
연애는 물론 짝사랑조차도 해 본 적 없지만, 누군가에게 관심이 가고, 관심을 끌고 싶고, 몸이 닿는 것이 싫지 않은… 그런 감각의 종합이 모두 사랑은 아니었다. 그날 밤의 잠자리가 그에게 응급처치인 것처럼.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을 모를 정도로 ‘숙맥’은 아니었다.
“그날, 왜 그랬던 겁니까?”
이번에도 그의 질문에는 어떤 전조나 노크가 없었다. 문부터 열고 들어서서 내부를 둘러본다. 빙빙 돌리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더 그의 방식이었다.
그가 묻고 있는 ‘왜’의 대상이 무엇일까. 느리게 머리를 굴리다 내 몫의 술을 입술로 가져갔다. 위스키라고 해서 목을 태우는 독한 알코올 기운을 각오했지만 생각보다 부드러운 목 넘김에 각오가 무색해졌다.
“자기 그림을 보고 왜 그런 반응을 보였던 건지, 그걸 묻는 겁니다.”
그가 질문을 좀 더 구체화했다.
실장님과 함께 있었던 식당에서의 자리는 그에게 예고편, 혹은 가벼운 워밍업에 불과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이곳까지 나를 데려온 것은 어젯밤 인우 형과의 시간에 대해 떠보기 위함도, 비 오는 저녁 시간의 술친구로 삼기 위함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그날, 실제로 아무것도 묻지 않았잖아요.”
사실이었다.
“그날 꼬박 서이현 씨를 보살핀 사람인데, 그 정도 설명을 들을 자격은 있는 거 아닙니까?”
어떤 위축도 없이 똑바로 나를 응시하는 그의 눈은 금방이라도 더 직접적인 이야기들을 꺼낼 것 같았다.
‘내가 그날 서이현을 끓어오르게 한 뒤 모든 것을 소진하고 잠들 수 있게 해 주기까지 했잖아요. 기억나죠? 몸 구석구석 내가 정성껏 만지고 입 맞췄던 것. 심지어 난 사정하지도 못했는데 말이죠.’ ―그런 말들로 나를 코너로 몰아 꼼짝 못 하게 만든 뒤 입을 열려고 할 것 같았다.
“그림 때문이 아니라… 정말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서….”
“그렇군요. 그림 때문이 아니군요….”
턱 밑을 천천히 문지르면서 그가 내 말을 음미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림을 다시 그리는 데에 내적인 장애물이 있는 건 아니네요.”
“…….”
“다시 그리고 싶은지 아닌지, 그것에만 집중해서 천천히 생각해 달라고. 한 실장은 서이현 씨 결정에 따르겠다는 듯이 말했지만, 솔직히 난 아닙니다.”
빈 잔을 만지작거리면서 그는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날 밤, 아무것도 묻지 않을 테니 무리해서 변명하려 하지 말라며 앞서서 내 마음을 헤아렸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강압적인 것과는 어딘가 달랐다. 착각인지 몰라도 그의 눈빛의 가장자리에서 초조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반드시 다시 그려 줬으면 합니다.”
그려 줬으면 한다.
언뜻 희망이나 바람을 얘기하고 있는 듯했지만, 바라보는 시선에서 느껴지는 힘과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매는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다. 반드시 그리도록 만들겠다고.
기분 탓인지 조명 탓인지 몰라도, 곧 부서져 사라지지는 않을까 싶은 옅은 색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진해 보였다. 앞에 놓인 술병처럼 투명한 눈 속에 푸른 불꽃이 타는 듯했다. 검은 눈에 익숙해져 있는 나에게 그의 눈은 가끔은 무기질 같았다. 푸르스름한 눈이 담아내는 감정은 아직 나에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이국의 언어였다.
“이번 홍콩 출장에 동행하죠.”
대화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급물살을 타고 있었다. 선생님과 함께 있었을 때의 그는 가짜였다. 그는 처음부터 나를 보트에 태우고 정신없이 몰아붙일 계획이었을 것이다.
“아트페어에서 다양한 국적, 화풍, 주제 의식을 가진 작가들의 작품을 접하고 미술 시장의 에너지를 느끼고 나면 좋은 자극을 받아서 생각이 좀 달라질지도 모르죠. 마음을 정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겁니다.”
‘올드 퓨처’ 홈페이지에서 봤던 유니 누나의 포스팅이 떠올랐다. 그 글을 읽고 느꼈던 낯선 도시에 대한 궁금증. 미래에 대해 아주 오랜만에 품어 보았던 양지의 설렘들. 그의 제안에서 희미하게 그런 햇볕의 향을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내가 정말 다시 그릴 수 있을까. 과연 그 정도로까지 희망적일까. 이건 기분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표님… 말씀은 정말 감사하지만….”
“수키킴.”
“…….”
균형을 잃고 곧 바위에 부딪혀 전복될 것 같았던 보트가 정지했다. 물의 흐름이 멈추고, 앞이 들린 채로 보트가 멈추고, 사방으로 튀어 오른 물방울도 공중에서 그대로 굳었다. 사진 속에 고정된 듯 꼼짝할 수가 없었다.
“한국어 발음이 어려운 외국인들이 그렇게 부르면서 지금은 ‘수키킴’이 하나의 고유명사, 애칭처럼 굳어졌지만, 그녀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계 미국인이면서도 처음 활동할 때부터 ‘김숙희’라는 한국 이름을 사용했죠. 뭐… 외국인들에게 김숙희라는 이름을 또박또박 발음하라는 게 무리한 요구이긴 하지만.”
갤러리의 오너인 그가 국제적 화가인 ‘수키 김’, 아니 ‘수키킴’ 선생님을 알고 있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그가 <소외>를 소장하고 있었다면 그 그림이 세상에 알려진 콘테스트의 심사위원이 선생님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어쩌면 선생님에게서 직접 그림을 매입했을지도 모른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 그의 입에서 나온 제안은 결코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담뱃갑에서 새로운 한 개비를 꺼낸 그가 흰 담배를 입술에 물며 라이터의 덮개를 열었다.
“만나게 해 줄게요, 수키킴.”
그리고 내가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매력적인 패를 꺼내 놓았다.
아찔한 급류에 휩쓸려, 나를 태운 보트는 이미 거스를 수 없는 속도로 떠내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