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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독특한 향수 (4/31)

   4. 독특한 향수

하나의 전시가 끝나는 마지막 날에는 그나마 오프닝 때처럼 일이 많지 않았다. 전시회의 성격에 따라 마지막 날, 작가와 구매자들을 초대해 뒤풀이를 할 때도 있다고 하는데, 이번은 여러 작가들의 공동 전시라 시간 맞추기도 어렵고 해서, 일정이 맞는 작가들과 주요고객들만 초대해 팬텀의 대표와 선생님이 외부에서 따로 접대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고 했다.

임시 알바인 나는 아침부터 출근할 필요가 없었다. 폐관 시간에 맞춰 출근해, 유니 누나와 주한이 형을 도와 전시장을 정리했다. 지난번과는 반대로 작품을 전부 내려 지하의 저장고로 옮기면 되는 일이었다.

한 번 손을 맞춰 본 사이라 그런지, 우리는 10시가 되기도 전에 작품을 전부 창고로 옮기고 다시 제대로 포장해 두는 작업까지 마쳤다. 이제 이 작품들 중 대부분은 월요일부터 새로운 주인에게로 배달될 예정이었다. 거의 신기록에 가까울 정도로 판매율이 높아 이번 달에 두둑한 보너스가 예상된다며 흥분으로 목소리가 높아진 두 사람은 지하 창고에서 정체 모를 춤을 추기까지 했다.

작업의 속도는 빨랐지만, 그만큼 작업이 끝난 뒤에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단거리 전력 질주 후의 피로감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사무실 회의 테이블 앞에 서로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었다. 주한이 형은 한쪽 팔을 베고 테이블 위에 엎드렸고, 누나는 커피 머신에 캡슐 두 개를 넣고 커피를 진하게 내려 얼음을 넣어 들이켰다. 나 역시 약간의 피로를 느껴 팔짱을 끼고 의자에 비스듬히 기댔다.

“근데 스트라이프 진짜 좋아하나 봐.”

“네?”

누나의 말을 진짜 못 알아들어서 되물은 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타이밍에 예상하지 못한 얘기를 들은 탓에 나온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커다란 텀블러에 거의 가득했던 커피를 반 이상 마신 누나는 기운을 좀 차린 표정이었다.

“VIP 오프닝 때도, 그 전날도 스트라이프 티셔츠 입고 왔었잖아. 설마 오늘도 스트라이프를 입고 올 줄이야. 덕분에 내기에서 졌지.”

“고맙다, 이현아. 네 덕에 백유니한테 밥 얻어먹게 됐다.”

엎드린 채 고개만 이쪽을 향하고 있었던 주한이 형이 그 자세 그대로 손끝에서 브이를 만들어 보이며 씨익 웃었다.

“아… 죄송해요, 누나.”

자리에서 일어나 내 뒤쪽으로 지나가던 누나가 웃으면서 등을 툭 두드렸다.

“그럼 내가 이겼으면 권주한한테 죄송할래?”

“아….”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렇다.

“이것까지 받고 나면 나한테 더 죄송하겠네. 어쩌나….”

누나는 데스크 쪽에서 가져온 작은 쇼핑백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Old Future’라는 문구가 레터링된 검은색 작은 쇼핑백에는 검은색 리본이 장식되어 있었다.

“이게 뭐예요?”

“선물. 스트라이프 광인 것 같길래. 이거 딱 보자마자 너 생각나더라고.”

쇼핑백 안에는 블랙과 화이트의 줄무늬 티셔츠가 들어 있었다. 펼쳐 보니 네크라인이 약간 넓은 루즈한 반팔 티셔츠였다.

“따로 산 거 아니고, 우리가 운영하는 몰에서 가져온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받아.”

“아니, 부담 가져 줘. 이거 받고 부담 가져서 같이 일하자. 어?”

어느새 맞은편 자리로 옮겨온 형이 테이블 위로 팔을 뻗어 내 손을 덥석 붙잡으며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같이 일하자는 형의 애절함은 진심으로 다가와서 기쁘고 고맙기는 했지만, ‘평화와 안전’을 내게 강조하며 뒷세계의 사람처럼 「네? 서이현 씨.」라고 으르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애매하게 웃는 수밖에 없었다.

“근데… 쇼핑몰 운영하세요?”

“쇼핑몰이라고 하기엔 좀 성격이 다르지만 굳이 따지자면 그렇지. 오픈한 지 얼마 안 됐어. 이제 한 반년?”

누나는 자신의 기억이 맞는지 확인하듯 마지막 말을 하면서 주한이 형 쪽을 쳐다봤다.

“우리 취향이 이렇잖아. 국내에서 마음에 드는 옷 찾기가 쉽지 않거든.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홈페이지를 하나 열면 좋을 것 같더라고. 해외 출장 가서 틈틈이 바잉해 오는 옷들 위주라 거의 한두 점씩밖엔 없어서 이익이 막 크진 않아. 큰돈 벌려고 하는 건 아니고 그냥 우리 둘이 좋아서 하는 거.”

형은 마치 시간 날 때 집 앞에 자전거를 타러 나간다는 얘기를 하듯 가볍게 말했지만, 내가 보기엔 충분히 대단한 일 같았다. 그것으로 얼마나 성공을 거두었는지와는 무관하게, 생각을 실행으로 옮긴다는 자체가 쉽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럼 이것도 판매하셔야 되는 옷인 거 아니에요?”

“그렇더라도 비싼 건 아니니까 부담 없이 입어. 권주한도 나도 피차 부담되는 선물은 안 하는 주의거든.”

테이블에 걸터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누나가 내 머리를 가볍게 흩트렸다. 컵을 기울일 때마다 얼음이 짤랑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시원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잘 입을게요.”

스트라이프 티셔츠만 입는 데에 특별한 이유나 고집이 있는 건 아니었다. 옷을 센스 있게 고를 수 있는 안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옷차림 자체에 별 관심이 없었다.

스트라이프라면 너무 칙칙하지 않으면서도 튀지 않겠단 생각이 시작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옷장 안의 상의가 줄무늬 일색이 돼버렸을 뿐. 사실 스트라이프 티셔츠만 입는다고 하기엔 옷 자체가 그렇게 많지도 않았다. 그나마도 할아버지 댁을 떠나면서 당장 필요한 얇은 긴팔 두세 장만 챙겼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점점 더워지는 날씨에 반팔 몇 장이 필요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필요했던 것을 선물 받았으니 마침 잘됐다는 기쁨만은 아니었다.

누군가 나를 유심히 지켜보고 취향을 파악해, 내가 없는 곳에서도 나를 떠올려 주었다는 사실. 그 예상하지 못한 다정함에 잠시 마음 언저리가 가볍게 울렸다.

줄무늬 티셔츠 한 장에 나를 떠올려 준 그들의 친절한 마음이, 모래와 형으로만 이루어진 좁은 관계 외의 세계를 거부해 왔던 나의 사회적 은둔을 다정하게 꾸짖는 것 같았다.

숭고하고 희생적인 애정만이 구원은 아닐지 모른다고, 손에 쥔 티셔츠를 내려다보며 나는 그런 다소 거창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두 사람은 입은 모습을 보고 싶다며 사무실 안쪽 파티션 뒤로 나를 떠밀었다. 입고 있던 낡은 긴팔 티셔츠를 벗어 파티션 위에 걸쳐 두고 새 옷을 머리에서부터 훌훌 뒤집어썼다. 평소 내가 입던 것들보다 스타일리시한 디자인이라 어색했지만 두 사람의 반응은 뜨거웠다.

“티셔츠 하나로 분위기가 이렇게 달라져?”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던 주한이 형의 약간은 오버스러운 반응에 피식 웃음이 났다.

“이제 이 백유니 님의 안목을 인정해라.”

팔짱을 끼고 턱을 치켜들면서 누나가 뻐기듯 말했고, 의자에 앉아 있던 형은 인상을 썼다.

“백유니 님, 이현이는 그냥 까만 바지에 보세 티셔츠 입고 있을 때도 예뻤는데요.”

“원래 예뻤는데 더 예뻐졌잖아. 인정해, 이 자식아.”

“아, 언제는 내가 인정 안 했어? 인정해, 졸라 인정해. 백유니 최고.”

나를 두고 예쁘다는 단어를 남발하는 두 사람의 칭찬이, 입고 있는 티셔츠만큼이나 어색해 괜히 뒷목을 쓰다듬고 있다가, 파티션 위에 그대로 걸쳐 두고 온 티셔츠가 생각나 그것을 가지고 와 쇼핑백과 함께 가방에 넣었다.

“키가 어떻게 돼?”

누나의 질문에 군대에서의 기억을 더듬어 봤다.

“마지막으로 쟀을 때 181쯤 됐어요.”

“얼굴이 작고 팔다리가 길어서 그런가… 좀 더 큰 줄 알았어.”

누나는 테이블 맞은편에서 키를 가늠하듯 시선으로 나를 훑었다.

“딱 좋지, 뭐. 모델 할 것도 아닌데 그것보다 더 커 봐야 맞는 옷 찾기도 힘들고 별로야. 183~4로 보이는 181. 딱 좋네. 부럽다, 야.”

나보다 5~7센티미터 정도 더 커 보이는 주한이 형은 다시 또 게임을 진행 중인지 빠른 손놀림으로 액정 위를 두드리며 말했다. 내가 보기엔 형이야말로 모델 같았다. 지하 저장고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그렇게 느꼈으니까.

“비율 좋고 얼굴 되니까 블랙진에 티셔츠 하나만 바꿔 입혀도 바로 모델 같네. 이현이 너, 알파 아니냐는 소리 좀 들었겠다.”

누나는 거의 확신하듯 말했지만 기억 속을 아무리 더듬어 봐도 그런 오해를 받아 본 적은 없었다. 적어도 면전에서 나에게 그런 소리를 한 사람은 없었다.

“아니요, 전혀….”

“에이, 이현이는 알파 같다기보다는….”

액정에서 눈을 떼고, 약간 미묘하게, 힘을 실어 시선으로 지그시 누르듯 나를 보던 주한이 형이 말을 채 끝맺기 전에 사무실 문밖에서 어수선한 소음이 들려왔다.

정문은 안에서 잠가 뒀기 때문에 패스를 가진 사람밖에는 드나들 수 없었다. ‘누구지?’라는 표정으로 다들 얼굴을 마주했다.

“헬로, 베이비들!”

홀과 복도를 지나 사무실 문을 열어젖히며 뮤지컬 배우처럼 요란하게 등장한 사람은 조수석의 남자였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누나와 형은 노골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진심으로 거부하는 반응이라기보다는 편한 사이에 나올 수 있는 장난스러운 인사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 주한이와 유니가 나를 또 이렇게 반갑게 맞아 주네. 너네 맛있는 거 사 주려고 온 사람한테 반응이 그게 뭐야?”

살짝 취기가 오른 것 같은 남자의 어깨 너머로 못마땅한 표정의 팬텀 대표가 뒤따랐다.

“대표님, 인우 쌤은 왜 데리고 오셨어요?”

“내가 데리고 온 거 아니야. 이 자식이 가겠다고 우겨서 난 어쩔 수 없이 끌려온 거지.”

그는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조수석의 남자를 한쪽으로 밀어내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끌고 오긴 누가 끌고 와? 공통 화젯거리도 없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서 억지로 웃고 있느니 팬텀에 가서 고생하고 있을 베이비들 맛있는 거나 사 주겠다고 나온 건데, 네가 따라 나왔잖아.”

자신을 앞질러 걸어가는 대표의 등을 향해 큰 목소리로 불평한 그는, 거기에 대한 변명의 기회도 주지 않고 곧장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허리를 살짝 숙여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아주 희미하게 와인 냄새가 났다. 강한 정도는 아니었다.

“이현 씨, 잘 지냈어요?”

“네. 안녕하세요.”

대표는 테이블을 지나 창가 쪽 머신에서 커피를 한 잔 내리고 있었다. 허리에 한 팔을 짚고 비스듬히 선 뒷모습이 조금 지쳐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우리 맛있는 거 사 주려고 온 거라더니, 이현이 보러 온 거였네.”

주한이 형이 투덜거렸고, 조수석의 남자가 내 어깨에 팔을 걸치면서 누나와 형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누굴 보러 온 거면 어떠냐. 오늘 내가 쏜다는 건 마찬가진데.”

“그럼 가요. 10분이면 돼요.”

손목시계를 확인한 유니 누나의 깔끔한 답변이었다.

■ ■ ■

번화한 유흥가에서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간 좁은 골목에 위치한 술집은 근사한 은신처 같았다. 스페인풍의 안주 요리와 와인을 판매하는 곳으로, 실내를 채운 것은 고작해야 네다섯 테이블 정도였다.

근엄하거나 딱딱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테이블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대화하는 목소리의 높낮이, 흐르는 음악 등이 만들어 내는 분위기는 오히려 캐주얼했다.

여하튼 최근의 5~6년을 스패니시 레스토랑은커녕 프랜차이즈 피자 전문점 하나 없는 어촌에서 보내고 온 나에게는 약간 어색할 정도로 세련된 곳이기는 했다.

조수석의 남자가 이곳에 가장 익숙한 듯, 모두에게 동의를 얻어 메뉴판을 받자마자 안주로 먹을 만한 두세 가지 메뉴와 와인을 골라 주문했다.

나를 제외한 네 사람 모두 레스토랑의 오너와 안면이 있는 사이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이 사적으로도 어느 정도 친밀한 관계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적어도 단골 가게를 공유할 정도로는 가까운 사이였다.

“이현 씨라고 불러도 되죠?”

어색함에 물을 마시고 있었던 나는 급하게 잔을 내려놓으며, 맞은편의 남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현 씨도 그냥 편하게 인우 형이라고 불러 줘요.”

그의 이름이 최인우인 것은 VIP 오프닝 때 그림의 작가명을 확인했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쌤이 어떻게 이현이한테 형이에요? 삼촌 정도면 모를까. 그냥 인우 쌤이라고 합시다.”

주한이 형이 조수석의 남자를 향해 약간은 건들거리듯이 말했고, 남자는 팔짱 낀 두 팔을 테이블에 걸치며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이현 씨 담당의도 아닌데 왜 쌤이란 소릴 들어야 되냐? 싫다.”

“그럼 우린 왜 쌤을 쌤이라 부르고 있을까요? 쌤이 우리 담당의도 아닌데.”

쳇. 주한이 형의 응수에 남자는 혀를 찼다. 형의 논리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한 듯했지만 곧 새로운 방향의 불만이 이어졌다.

“쌤 소리는 병원에서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 소리 들을 때마다 20년은 늙은 기분인 거 알아? 그리고 니들, 다른 소속 작가들한테는 다 작가님이라고 하면서 나한테만 쌤이라고 하더라?”

“에이, 쌤은 대표님 때문에 평소에도 너무 자주 보잖아요. 작가님이라고 하면 거리감 느낀다구요.”

창가에 등을 기대고 완전히 옆으로 돌아앉은 주한이 형은 마르고 긴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여유 있는 얼굴로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맞아요. 친밀감의 표현이죠.”

유니 누나가 형을 거들었다. 하지만 남자는 간단히 넘어가지 않았다.

“슈슈는? 그럼 슈슈한테는 왜 작가님이라고 하냐?”

슈슈. 나도 들어 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낮고 허스키한 팬텀 대표의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게 어감이 달콤했던 그 단어를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약간의 갈증을 느껴, 물을 좀 더 마셨다.

우리 일행은 출입문에서 가장 가까운 창가 자리를 차지했는데, 다섯 명이다 보니 한 명은 복도 쪽으로 의자를 두고 앉아야 했다. 가장 안쪽에 주한이 형과 유니 누나가 앉았고, 가게에 들어선 순서대로 나는 주한이 형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어쩌면 가장 불편할 수도 있는 복도 쪽 자리는 어쩌다 보니 자연스럽게 팬텀 대표의 몫이 되었다.

테이블 모서리를 사이에 두고 바로 옆자리에 그가 있었기 때문에, 허벅지 아래를 전부 가릴 정도로 긴 테이블보 아래에서 혹시라도 다리가 엉키거나 발을 밟게 되지는 않을까, 나는 의자 아래로 발을 바짝 당겨 앉았다.

테이블 위를 오가는 다른 사람들의 대화는 듣는 둥 마는 둥 한 팔을 등받이에 걸치고 다른 손으로 빈 와인잔을 쥐고 빙빙 돌리는 그는 이 자리에 흥미가 없는 사람 같았다.

그럼 여기에 굳이 왜 왔을까. 조수석 남자의 말대로라면, 그가 함께 가기를 권유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슈슈 작가님은… 대표님하고 친분이 있는 거지, 저희하고 사적인 교류는 거의 없어요.”

유니 누나는 지금까지의 장난스럽게 상기되어 있었던 톤을 끌어 내리며 약간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대표의 기색을 살피는 것 같았다.

푸근한 인상의 오너가 와인을 내오면서 잠시 이야기가 중단되었다. 비어 있던 다섯 개의 잔에 검붉은 와인이 조금씩 채워졌다. 와인은 처음이었다.

잔이 채워지자 누군가 따로 건배를 제안한 것도 아닌데 가볍게 서로 잔을 부딪쳤다. 건배사가 따로 있지는 않았다. 처음 마셔 보는 와인은 맥주보다 향기로웠지만, 삼키고 난 뒤 입 안에 남는 여운은 생각보다 강렬했다. 마실수록 입 안에 풍미가 겹겹이 쌓여 가는 감각이 새로웠다.

문득 내가 벌써 반 정도를 비웠음을 깨닫고 잔을 내려놓았다. 대표를 제외한 세 사람은 여전히 호칭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가 결론을 내지 않으면 이 토론은 밤새도록 이어질 것 같았다.

“전 팬텀 직원도 아니고… 괜찮으시면 형이라고 부를게요.”

앞으로 딱히 부를 일이 많을 것 같지도 않았기에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다.

유니 누나와 주한이 형은 게임에 진 것 같은 표정을, 인우… 형은 격렬한 투쟁 끝에 마침내 원하는 장난감을 손에 넣은 아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럼 한번 불러 봐요. 인우 형이라고.”

테이블의 폭이 그리 넓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맞은편에서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인우 형…의 얼굴이 꽤 가까웠다. 실망시키기 어려운, 너무나 솔직하게 기대감을 드러내는 얼굴이었다.

“인우 형…은, 본업이 의사이신 거죠?”

고른 치열을 드러내며 그가 활짝 웃었다. 눈꼬리가 살짝 접히면서 눈동자가 빛나 보이는, 객관적으로 매력적인 웃음이었다.

“너 지금 되게 아저씨 같은 거 아냐? 형 소리에 뭘 그렇게 집착을 해?”

고개를 저으며 그렇게 말한 팬텀의 대표는 입 안으로 흘려 넣듯 와인을 삼켰다.

이 자리에 흥미가 없어 보이는 만큼 와인을 비워 내는 그의 속도는 우리 중에 가장 빨랐다.

혹시 내가 끼어 있어 이 자리에서 완전한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닐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곧 모른 척 지워 버렸다. 나는 그에 관해서 만큼은 제법 대담한 태도를 취할 수 있었다.

“귀엽잖아. 형, 형, 하면서 조르면 뭐든 다 들어주고 싶어진다니까.”

꿈을 꾸는 것 같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한 조수석의 남자, 인우 형은 소화기내과 전문의였다. 그리고 동시에 팬텀의 소속 작가이기도 했다.

전문의지만, 부모님이 각각 원장과 부원장으로 계신 소규모 종합병원에 소속되어 있어 매일 놀러만 다니는 날라리 의사라는 게 팬텀 대표와 유니 누나, 주한이 형이 덧붙인 설명이었다.

‘의사 화가’라는 포인트로 팬텀에서 적극적으로 마케팅한 결과, 전시장에 그림을 내걸기가 무섭게 팔려 나가는 제법 인기 작가이기도 했다.

부모님 두 분이 모두 미술품에 대한 열정적 컬렉터라 어릴 때부터 그림에는 익숙했고, 오랫동안 취미로 그려 오다 팬텀 대표의 권유로 미술 시장에 뛰어들었다. 전업 화가는 아니더라도, 돈을 받고 그림을 판다는 점에서는 이미 프로 화가였다.

그런 그에게 지난번 VIP 오프닝에서 그 자신의 작품을 추천했던 기억에,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애꿎은 와인을 들이켰고, 두 번째인가 세 번째로 잔이 비자, 인우 형이 테이블 옆의 스틸 바스켓에서 와인을 꺼내 새로 잔을 채워 주었다.

“그날은 죄송했어요. 작가님 본인인지도 모르고…. 그림에 거의 문외한이라 잘 모르고 그냥 느낀 대로 말씀드린 거였는데…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요, 전혀. 왜 불쾌하겠어요? 나쁜 소리 했던 것도 아닌데. 알몸을 그대로 보인 기분이라 조금 뜨끔하긴 했어도, 현학적인 말만 늘어놓는 평론가들보다 이현 씨 해석이 훨씬 와닿던데요? 솔직히 난 운명을 느꼈을 정도인데.”

마지막 문장을 말하면서 그가 과장되게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지 않았다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난감했을 것 같았다.

“어휴, 그놈의 운명…. 쌤은 참 운명도 많네요.”

주한이 형이 한숨을 내쉬며 더한 한마디가 분위기를 좀 더 가볍게 만들어 줘서 다행이었다.

“건방진 얘기일지 몰라도… 작가… 아니, 형 작품이 왜 인기 있는지 알 것 같아요. 솔직하고 싶어도 그러기 어려운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니까….”

특별히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말끝에 시선이 팬텀의 대표를 향했다. 그 시선의 방향이 스스로 겸연쩍어, 만지작거리고 있던 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술은 표정과 시선을 감추는 데에 꽤 좋은 방패가 되어 준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솔직히 그날 이현 씨 얘기 듣고 쿤도 나도 이현 씨가 어떤 쪽으로든 미술을 전공했을 거라 생각했었어요. 한 실장 얘기 듣고 아니란 거 알았지만.”

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대표라는 직함으로 불리는 것 같지만, 쿤이라는 이국적인 호칭으로 불리기도 하는 것을 몇 번 들어 왔었다.

하지만 오늘까지 총 세 번 팬텀에서 일을 도왔는데도, 난 아직 대표의 제대로 된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알려고 하면 간단히 알 수도 있겠지만, 선생님에게건 유니 누나나 주한이 형에게건, 그에 대해 질문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핸드폰의 검색창에 ‘갤러리 팬텀’을 검색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누가 볼 것도 아닌데.

“하여간 그날, 덕분에 진짜 행복했어요. 그림이야 보는 사람마다 각자의 방식대로, 그때그때의 감정에 따라 감상하면 되는 거지만, 그래도 그 안에 나도 모르게 녹여낸 ‘나’를 봐 주는 사람이 있으면 반갑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인우 형의 얘기는 진심 같아서, 나도 마주 미소를 지었다. 그가 말하는 반가움을 아주 막연하게나마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도 벅차오르고, 흥분되고… 그리고 운명을 느낄 수도 있겠지. 나만의 암호를 해석해 낸 단 한 사람을 발견한 듯이.

“아, 이현 씨 말이야. 너희 집 거실에 있는 그림, 그거 보고는 뭐라고 할까? 궁금하지 않냐?”

마시던 와인을 내려놓으며 인우 형이 대표의 팔을 툭 건드렸다. 인우 형의 질문에 대표의 시선이 느리게 나를 향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의 시선 앞에서는 낱낱이 해체되어 평가되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동요 없는 무심함을 띠고 있지만, 그렇기에 상대를 가장 무자비하게 파헤칠 수도 있는 그의 시선은, 나에게 어색한 불편함과 갈증을 유발하는 긴장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 같은 놈도 밟으면 꿈틀거릴 수 있다는, 지금껏 모르고 있었던 반항적 기질을 끌어내는 자극이기도 했다.

나를 응시하는 창백하고 옅은 회청색에 가까운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섬세한 감정을 호소하는 듯해서, 지금껏 그의 입에서 나왔던 서늘한 말들이 남긴 냉기를 흐려지게 했다.

그러나 그것은 눈동자의 색으로 인한 시각적 이미지일 뿐이었다.

달싹거리던 그의 입술이 어떤 답을 꺼내 놓기도 전에 테이블 위에 올려 둔 그의 핸드폰이 가볍게 진동했다.

시선을 떨어뜨려 발신자를 확인한 순간,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주 희미한 미소였지만, 대신 진심이었다.

간단한 제스처로 양해를 구한 그는 핸드폰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 쪽으로 걸어가며 통화를 연결했다.

“어, 나야…. 그래, 잘 마쳤지. 지금? 아니야, 난 최인우하고 빠져나왔어. 지금은 팬텀 애들하고 뒤풀이하는 중.”

옆모습이 겨우 보일 정도로 이쪽에서 등을 돌리고 서 있었지만, 그가 웃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팬텀에서 고객들을 대할 때처럼 기계적인 미소가 아닌, 달콤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비즈니스의 미소가 아닌 사적인 미소. ‘슈슈’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처럼.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와 봤자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시달려야 하고 너 피곤하기만 하지.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돼.”

마침 주문한 요리들이 한꺼번에 서빙되었다. 오너가 직접 각각의 요리들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지만, 테이블 위에 오가는 대화들보다 예닐곱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그의 통화에 청각이 더 기울어졌다.

“작품 수는 아무리 적어도 상관없으니까 무리하지 마. 슈슈잖아. 작품 보기도 전에 벌써 예약하겠다는 사람들이 줄 섰어.”

나 역시도 그렇듯이, 한 인간이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 동일한 태도를 고수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여러 개의 모습을 가지고 타인을 대하는 사람이었다.

선생님. 유니 누나와 주한이 형. 인우 형. 팬텀의 고객들. 나. 그 모두를 대하는 모습에 크고 작은 차이가 존재했다.

그리고 지금 열려 있는 출입문의 문틀에 어깨를 기대며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통화에 집중하는 모습은, 연인을 대할 때마저 고저가 없이 덤덤할 것 같았던 그의 인상을 완전히 바꿔 버렸다.

슈슈. 그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달콤함이 단지 단어의 어감만이 아닐 수도 있었다.

“이현 씨, 이것 좀 먹어 봐요. 살 좀 더 쪄야겠어.”

나를 부르는 인우 형의 목소리에, 와인을 마시는 척 대표의 뒷모습을 흘깃거리고 있던 시선을 거두었다.

인우 형은 이베리코 돼지의 항정살을 장시간 저온 조리했다는 요리를 내 접시에 덜어 주었다.

“쌤, 얘가 겉으로 보기에 이래도 실속 있어요. 이삿짐센터 알바한대요.”

얇게 썬 하몽을 올린 멜론 조각을 우물거리면서 누나가 말했다.

인우 형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테이블 위로 드러난 나의 상반신을 천천히 위아래로 훑었다.

사실 이삿짐 알바는 누구든 할 수 있었다. 실제로 기사님들의 체격도 평범했다. 덩치가 큰 분들보다 오히려 보통 체격에 움직임이 날렵한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알고 있었어? 이현 씨 이삿짐센터 알바한다는 거.”

통화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는 대표를 올려다보며 인우 형이 말했다.

그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을 뿐 별다른 대답 없이 자리에 앉아 다시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 인우 형 역시 그에게서 어떤 동조나 반응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지, 곧 시선과 관심을 나에게로 되돌렸다.

“아무리 봐도 예술가 타입인데 말이야…. 이삿짐센터 알바라니. 어떻게 된 게 점입가경이네, 이현 씨는.”

점입가경이라는 부정적 어휘를 호감의 표현으로 사용하면서, 인우 형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그러고 보니까 이현 씨, 오늘은 분위기가 좀 다른데…. 지난번엔 엄마, 아빠 손잡고 갤러리 나온 착한 모범생 같더니, 오늘은 살짝 퇴폐미가 얹어졌어.”

처음 들어 보는 어색한 유의 칭찬에 고개를 숙여 나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입고 있던 티셔츠 자락을 당겼다 놓았다.

“누나랑 형이 티셔츠를 선물해 주셔서요.”

“아, 올드 퓨처?”

그의 입에서 곧장 ‘올드 퓨처’라는 단어가 나왔다. 유니 누나가 건네줬던 쇼핑백에 레터링되어 있던 문구였다. 그게 아마 누나와 형이 운영하는 홈페이지의 타이틀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까 이현 씨, 올드 퓨처 옷이 잘 어울릴 것 같네. 얘네처럼 너무 노골적인 것보다 좋은데요? 음… 상상의 여지를 남겨 둔다고나 할까?”

“그게 무슨 뜻일까요, 쌤?”

유니 누나가 인우 형의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협박하듯 포크를 들이밀었다.

“솔직히 너넨 분위기부터 그냥 대놓고 펑크잖아. 의외성이 없어.”

“와… 쌤 진짜 너무하시네요. 아무리 이현이가 마음에 들었다고 해도 그렇지. 그리고 제가 처음 왔을 땐 이렇게 들이대지 않았던 것 같은데, 참 섭섭하네요.”

주한이 형도 인우 형을 몰아가는 데에 합세했다.

누나와 형의 얘기로 미루어 보자면, 인우 형이 동성의 상대에게 이런 식으로 호감을 표시하는 게 처음은 아닌 듯했다. 그 호감이 진심이든 반 장난이든.

하지만 아직까지는 내가 위협이나 거부를 느낄 만한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이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자동차에서 전화번호를 물어보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 경계의 대상으로 분류하기는 애매했다.

자신이 말하는 모든 것에서 무게를 지워 버리는 특유의 장난스러운 말투와 표정도, 나에 대한 호감의 표현을 가볍게 치부해 버릴 수 있는 이유가 되어 주었다.

지금도 인우 형은 과장되게 진지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주한이 형을 향해 손바닥을 내보였다.

“내가 좀 미적 기준이 높아서. 미안.”

“그날 이현이한테 그렇게 당하고도 이러시는 거 보니까 대단하긴 하네요. 나 같으면 피해 다닐 텐데.”

당하고만 있을 주한이 형이 아니었다. 형은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와인을 마시면서, VIP 오프닝 때 내가 인우 형의 그림을 두고 ‘솔직함’ 운운했던 사건을 다시금 언급했다.

“피해 다니는 게 아니라, 그것 때문에 쌤은 오히려 이현이한테 더 흥미 생겼을걸?”

유니 누나의 말에 인우 형은 애매하게 웃었다. 애매하게 웃으면서 입술에 닿은 와인잔 너머로 내게 시선을 보내왔다. 웃음기가 묻어나는 시선은 은밀한 신호가 담겨 있다고 하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저 술자리의 유쾌한 태도라고 하면 또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가 나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을 하지 않는 이상, 그 시선의 의미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해 볼 생각은 없었다.

와인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인우 형이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이현 씨는 알파죠?”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이 확실한 사실인데 지나가듯 한번 물어본다는 그런 어조였다. 그렇게 묻는 인우 형이 너무나 확신에 차 있어 대답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소요됐다.

“…아닌데요.”

내 대답에 인우 형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고, 팬텀의 대표는 즐거워했다.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웃은 대표는 지금까지 본 중에 가장 유쾌해 보이는 얼굴로 와인을 마셨다.

그리고 그것 보라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아닐 거라고 했잖아.”

둘이서 내 얘기를 했었던 건가? 미술 전공인지 아닌지에 이어서, 내가 알파인지 아닌지를?

“이상하네…. 아무리 호르몬을 억제하고 있어도 내가 오메가를 몰라볼 리는 없는데…. 그러면 이현 씨, 혹시 뭐 골든 오메가보다 한 수 위의 다이아몬드 오메가 그런 건가? 마음만 먹으면 아무도 오메가라는 걸 눈치챌 수 없는?”

“다이아몬드 오메가라는 게 어딨어요?”라며 유니 누나가 피식거리자, “농담과 진담도 구분 못 하냐.”며 인우 형이 발끈했다.

알파가 아닌 나는 오메가가 분명하다는 전제로 이야기하는 인우 형의 확신을 정정해 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저… 오메가도… 아닌데요.”

“…….”

이번에는 알파가 아니라고 했을 때보다 더 경직된 표정이었다. 심지어 여유로운 승자의 미소를 지은 채 무게 중심을 뒤로 실어 의자의 앞발을 까딱거리고 있던 대표마저 움직임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인우 형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그럼, 베타?”

“네….”

인우 형과 대표는 서로 마주 봤다. 그리고 다음 순간 고개를 돌려 나를 향한 대표의 눈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명체를 보듯 의심과 경계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것이 지구상에 존재할 리 없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확실합니까?”

오히려 내가 되묻고 싶었다. 어떤 근거로 그렇게 강하게 나를 오메가라 확신했던 건지를.

중학교 때 진행한 검사 결과도 베타였고, 그 이후 히트사이클로 의심되는 발정기가 찾아오거나, 오메가의 페로몬에 자극받아 러트를 일으킨 적도 없었다.

재검사의 필요성을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나는 분명한 베타였다. 이 세상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물이나 공기, 혹은 먼지에 비유되는 세상의 아주 흔한 존재. 그중 하나.

베타인 유니 누나와 주한이 형은 별다른 확인 절차 없이도 자연스럽게 나를 베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대표와 인우 형은 알파였다. 인우 형은 나를 알파라 생각했고, 골든 알파인 대표는 나를 오메가라 확신했다.

그리고 지금 큰 낭패라도 당한 얼굴로 와인을 마시는 그의 옆모습은 내가 오메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여전히 인정하지 못하는 듯했다.

“근데 난 둘째치고 네가 틀렸다니. 어떻게 된 거냐, 골든 알파? 어? 감 떨어졌냐? 페로몬도 좀 순환이 돼야 제 기능을 하는 거 아니야? 그니까 페로몬 방출도 좀 하고, 오메가 페로몬도 좀 쐬고 그래. 아니면, 아예 베타 되려고 그러냐?”

팔꿈치로 쿡쿡 찌르면서 놀리는 인우 형을 향해 그는 한쪽 입술을 비틀어 불만을 그대로 드러냈다.

“페로몬 없이도 상대가 부족했던 적은 없다만.”

“흠… 네가 페로몬의 도움을 받았는지 아닌지, 그거야 네 상대가 돼 본 놈들만 아는 거지.”

“무분별하게 흘리고 다니는 다른 알파 새끼들하고 똑같이 취급하지 마.”

그는 진심으로 불쾌하다는 듯 눈꺼풀에 힘을 줬다.

골든 알파들은 페로몬의 개방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던 주한이 형의 설명이 떠올랐다.

“너 그거 일종의 결벽이다? 페로몬 컨트롤을 너무 하다 보니까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거잖아. 이건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진 정도가 아니야. 라우 위쿤이 누구야? 유전자 분석 결과보다 더 정확한 오메가 감별사 아니야? 아… 골든 알파 체면이 말이 아니네.”

별것도 아닌 일로 오버하지 말라며, 그는 인우 형의 입을 막으려 들었지만, 내가 본 중에 가장 동요를 숨기지 못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베타라는 사실이, 오메가가 아니라는 사실이, 자신이 베타를 오메가로 착각했다는 사실이, 어째서 그에게 그렇게까지 충격이 되는 것일까.

단지, 인우 형의 말처럼 지금껏 유전자 분석 결과보다 더 정확하게 오메가를 가려내 왔던 자신의 경력에 흠이 생겨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를 당황하게 하려면, 게이라는 얼토당토않은 거짓 선언보다 내가 베타라는 분명한 사실을 공개하는 것이 효과적이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선생님 댁으로 입주하는 것을 탐탁지 못하게 여겼던 것도 나를 오메가로 오해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금 그가 미간을 구기고 빠른 속도로 와인을 비워 내는 원인은 나였다.

열심히 마셔 댄 와인 탓인지, 파도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몸이 일렁거리는 기분이었다. 진정되지 않는 열기를 감추기 위해서는 다시 또 와인이 필요했다.

“아, 죄송합니다.”

계속 조심하고 있었던 경계가 흐트러지면서 테이블 아래에서 누군가의 다리를 건드렸고, 나는 곧바로 의자 아래로 발을 당기며 팬텀의 대표에게 사과했다.

여전히 사나운 표정을 한 그의 얼굴이 나를 돌아봤고, 뒤이어 인우 형이 맞은편에서 테이블 끝을 톡톡 두드렸다.

“이현 씨, 그거… 내 발이었는데.”

지긋한 시선으로 나를 보면서 인우 형은 와인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그리고 나와 대표를 번갈아 가며 눈에 담았다. 아주 천천히.

“죄송합니다.”

발을 밟은 것에 대한 사과인지, 사과의 대상을 착각한 것에 대한 사과인지 모를 사과를 인우 형에게 또 한 번 건넸다.

내가 누구를 신경 쓰고 있었는지, 좀 전의 반응만으로도 인우 형은 그것을 알아챘을 것 같아서 목이 탔다. 와인을 더 마시는 수밖에 없었다.

술자리는 새벽 2시 이후까지 이어졌다. 다섯 명이서 예닐곱 병의 와인을 비웠고, 내가 마신 것만 한 병이 조금 넘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취기가 올랐고, 인우 형과 유니 누나, 주한이 형은 평소보다 더 과하게 들떠 있었다.

“대표니이이이임, 싸랑해요.”

“난 안 해. 왜 이리 앵겨? 좀 꺼져.”

와락 끌어안으며 입술을 내미는 주한이 형의 얼굴을 밀어내면서도 팬텀의 대표는 웃고 있었다. 얼굴이 붉어지거나 말이 많아지거나, 그런 식으로 취기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기분 좋게 풀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처음 마셔 보는 와인에 알딸딸해진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몽롱하게 몸이 떠오르며 초점이 흐려지는 기분에 발끝을 내려다보며 느리게 눈을 깜빡이고 있다, 손목을 붙잡고 가볍게 흔드는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이현 씨, 집이 어디예요? 데려다줄게요.”

인우 형이었다.

“노노, 쌤은 우리나 데려다줘요. 이현이는 대표님이 데려다줄 거니까.”

“음… 왜 그 반대는 안 되는 걸까?”

검지를 세워 가로로 흔드는 유니 누나를 향해 인우 형은 턱을 쓸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장난스러운 표정에 피식 웃음이 났다.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시면 금방 그 답을 아실 겁니다. 자, 가죠. 대리기사님 오셨네!”

에너지 드링크라도 마신 것처럼 기운이 넘쳐 보이는 주한이 형이 인우 형의 손목을 낚아채 도로변에 세워 둔 차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대표님, 이현이 잘 부탁드려요!”

그들이 요란하게 손을 흔들며 인우 형의 차를 타고 사라지자, 좀 전까지 떠들썩했던 거리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그제야 주변 대부분의 가게들이 이미 문을 닫았고, 거리에는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없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인우 형과 마찬가지로 대리기사를 호출해 둔 대표가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한 실장 집으로 데려다주면 되죠?”

“별로… 안 취해서 택시 타고 갈 수 있어요.”

그는 말없이 나를 내려다봤다. 팬츠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고개를 살짝 삐딱하게 기울인 채 응시하는 시선이 버거워서, 반대로 나의 시선은 아래를 향했다.

걷어 올린 셔츠 소매 아래로 드러난 단단한 손목과 자연스럽게 주름진 고운 색감의 팬츠와 질 좋은 가죽 로퍼가 내려다보였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한 것은 아니었다. 상체를 앞뒤로 흔들다 잠시 균형을 놓쳐, 순간적으로 휘청거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스스로 취한 정도를 가늠하지 못할 정도의 상태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빠르게 다가와 휘청거리는 나의 팔을 붙잡은 손이 옅은 한숨과 함께 그대로 나를 당겼다.

“가죠.”

대리기사님에게 운전석을 내주고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집으로 가는 길에는 별다른 얘기도 없었다. 담배를 피워도 될지 양해를 구하고 답한 정도가 대화의 전부였다.

술을 좀 깨려고 열어 놓은 창문으로 불어오는 미풍이 기분 좋았다. 이리저리 날리면서 얼굴을 스치는 머리카락이 간지러워서 피식거리며 웃자, 그가 나를 돌아봤고, 그런 그를 보면서도 나는 계속 웃었다. 그냥 웃음이 났다. 그런 자신이 실없어서 또 웃음이 났다. 아마 그는 좀 어이가 없었겠지.

아파트 입구에서 나를 내려 주지 않고 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나 싶었는데, 나를 따라 차에서 내린 그는 기사님을 돌려보냈다.

“잠깐 올라가도 되죠?”

“…….”

“한 실장 집에서 가져가야 할 것도 좀 있고.”

그렇다는데, 안 된다고 막아설 이유가 없었다. 내가 살고 있긴 했지만 내 집이 아니기도 했고.

느슨하게 풀어지려는 정신을 붙잡기 위해 엘리베이터에서는 가방끈을 꽉 붙잡았다.

나보다 앞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는 마치 자기 집처럼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손님용 슬리퍼를 신고 곧장 주방으로 가서 콧노래를 낮게 흥얼거리며 이온 음료를 꺼내 마셨다.

식탁 앞에 멍하니 서 있는 내 쪽을 향해 자신이 마시던 음료의 병을 흔들면서 마시겠냐는 듯 눈썹을 치켜 보였다. 병째로 입을 대고 마시고 있었는데도. 그런 개인위생에 까다로울 것 같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이온 음료보다는 시원한 물을 좀 마시고 싶어서 정수기에서 물을 한 잔 가득 받았다. 그가 이온 음료를 앞에 놓고 식탁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나 역시 내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하는 대신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야 했다.

“한 실장은 아마 오늘 좀 많이 마시고 들어올 겁니다. 오늘 모인 사람들 중에 마음 맞는 무리가 있거든요. 아침에 잘 케어 좀 해 줘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선생님도 흡연자였고, 거실의 커피 테이블과 식탁 위에는 항상 재떨이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는 담배를 피워도 될지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일어나 주방의 창문을 열었다.

“서이현 씨는 키가 어떻게 돼요?”

자리로 돌아오는 나를 응시하던 그가 재를 털면서 물었다. 오늘따라 키를 묻는 사람이 많았다.

“181 정도요.”

“생각보다 크네.”

유니 누나나 주한이 형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얘기였다. 하지만 자기가 먼저 꺼낸 화제임에도 그는 크게 관심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식탁을 놓은 세로로 긴 식당 공간은 거실과 주방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나보다 앞서 집으로 들어온 그가 식탁 위의 조명에만 불을 켜두었기 때문에, 넓은 실내의 빛은 식탁 위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식사를 하기 위한 용도보다는 가까운 사람들과 술, 대화를 즐기기 위해 꾸민 것 같은 공간으로, 선생님은 식당의 조명으로 은은하고 아늑한 주황빛이 도는 전구를 선택했다.

서둘러 벌떡 일어나면 머리를 부딪칠 수도 있을 것 같은, 길게 늘어뜨린 조명 탓에, 그의 얼굴에는 깊은 음영이 드리워졌다. 조금은 초조하게 보이는 움직임으로 담배를 빨아들이던 그가 비스듬하게 나를 쳐다봤다.

“예전에 그렸다는 그림, 좀 볼 수 있나?”

“…….”

키가 몇이냐고 물어 놓고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던 것과는 달리, 그림에 대한 질문은 진심이었다. 나에게 무심하다 못해 적대적이었던 그가, 하필 나에 대해 궁금해한 것이 그림이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요…. 가지고 있는 게 없어서….”

“사진으로 찍어 놓고 그런 것도 없어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러 번 가로저으면서 앞에 놓인 물잔을 꽉 쥐었다.

그가 담배를 피우는 호흡 사이로, 우우웅 우우웅, 핸드폰의 진동음이 희미하게 파고들었다. 식탁 위에 올려 둔 그의 것은 얌전했다. 그가 재를 털면서 턱짓을 했다.

“받아요. 괜찮으니까.”

발신자는 인우 형이었다.

유니 누나와 주한이 형을 데려다주고 자기는 이제 막 집에 도착했다며, 잘 들어갔는지를 물었다. 오늘 즐거웠다는 형에게 감사히 잘 먹었다는 인사를 다시 한번 전한 뒤 전화를 끊었다. 1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다.

“그사이에 서로 연락하는 사이로까지 발전한 건가?”

바짝 타들어 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면서 그가 말했다. 빈정거리는 느낌은 없었다.

“아니요…. 별로, 그렇게는…. 오늘 아까 전화번호를 교환해서….”

“게이라더니, 서이현 씨도 최인우한테 아예 관심이 없는 건 아닌가 봐요?”

게이라고 했던 선언이 거짓이었으니, 적어도 검증되지 않은 충동적 발언이었으니, 거기에 대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온 음료의 병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뚜껑을 열어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연애 경험 별로 없죠?”

“…….”

그림 이야기를 더 이상 꺼내지 않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연애 이야기도 별로 편한 주제는 아니었다.

다리를 꼬고 늘어지듯 등받이에 기대 느슨하게 앉은 그는 음료의 병으로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리면서 나를 건너봤다. 지금까지 관찰한 바로는 그는 별로 자세가 바른 편은 아니었다.

“최인우가 친구로서는 나쁘지 않은 놈이지만, 남자로서도 좋은 놈이라고는 못 해요.”

내가 나쁜 놈에게 당할까 봐 걱정할 정도로 그가 나에게 호감이 있긴 했었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검은 눈에 익숙한 나에게는 아직도 신기하기만 한 그의 눈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뚜렷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내가 사태의 심각함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거라 받아들였는지, 그는 식탁 앞으로 상체를 기울이면서 좀 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서이현 씨 같은 초짜가 감당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니란 겁니다. 보아하니 서로 천천히 알아 가고 교감하고… 그런 걸 중요시할 것 같은데, 그런 연애하고는 거리가 멀어요.”

“대표님은요?”

“…….”

사람을 앞에 앉혀 놓고 얘기하고 있었으면서, 마치 내가 자신의 말에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다는 듯 그는 눈을 찌푸렸다.

술의 힘인지, 그에게만큼은 어느 정도 심술을 부릴 수 있는 내 나름의 ‘꿈틀거림’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나는 스스로 생각해도 과감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럼 대표님은 남자로서 좋은 놈이에요?”

그는 테이블 위로 시선을 떨어뜨리며 웃었다. 그리고 새로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첫 모금의 연기를 길게 뱉으며 말했다.

“좋은 남자라는 게… 있기는 한가요? 본 적이 없어서.”

나쁜 남자에게 호되게 당한 적이라도 있다는 듯한 뉘앙스였다. 혹은 자기 자신을 천하의 나쁜 놈으로 규정짓고 있거나.

그러나 자세한 이유를 물어볼 수는 없었다. 바로 다음 순간, 자조적인 웃음은 이미 그의 얼굴에서 지워져 있었다.

“팬텀에서 일하다 최인우를 만난 거니까, 책임감 비슷한 걸 느껴서 하는 말입니다. 그 자식이 하는 말들 일일이 진심으로 받아들이진 마요. 뭐… 그래도 서이현 씨가 끌린다면 그것까진 뭐라고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런 의미에서 하는 얘기라면, 그의 말대로 책임감 ‘비슷한 것’일 뿐이었다. 적극적으로 뜯어말릴 생각까지는 없지만, 혹시라도 일이 복잡하게 꼬였을 때 나 때문에 벌어진 비극이라는 찜찜함을 덜고 싶어 미리 쳐 두는 얄팍한 보호막.

거기에 대해서는 얘기할 만큼 얘기했다는 듯, 그는 담배를 쥔 왼손의 손등으로 이마 위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밀어 올리며 화제를 바꾸었다.

“팬텀에 정식으로 출근해 줬으면 합니다. 요즘 소속 작가도 늘어나고 전시 횟수나 규모도 증가해서 안 그래도 스태프들이 많이 힘들어하고 있었어요. 직원을 늘려야 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내가 좀… 사람에 까다로워서 애들 힘들게 했죠. 서이현 씨가 와서 일해 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그 얘기 하려고 올라온 거였어요. 자세한 건 한 실장 통해서 전달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만 마치면 당장이라도 자리를 털고 일어날 것처럼 빠른 어조로 그렇게 말한 그는, 얘기가 끝난 뒤에도 계속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두뇌의 회전이 느렸다.

그가 나를 직원으로 채용하고 싶어 할 줄은 몰랐으니까. 아니, 무의식의 깊은 곳 어딘가에서는 결국 이렇게 될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던 것도 같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내부와 외부의 온도 차 탓에 컵 표면에 맺힌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지워 내면서 그에게 물었다.

“왜 갑자기 생각이 바뀌신 건지… 여쭤 봐도 될까요.”

“서이현 씨 일하는 태도나 결과를 보고 결정한 거지, 별로 생각이 바뀐 게 아닙니다. 한 실장이나 스태프들이 서이현 씨를 원하기도 하고.”

“오메가가 아닌 걸 알아서가… 아니라요?”

평소보다 회전이 느린 두뇌는 방향 감각마저 고장 난 것 같았다. 별 망설임도 없이 떠오르는 대로 툭툭, 그런 질문을 쏟아 놓을 수 있었다. 평소에 필요 이상으로 말을 고르는 편인 것을 생각하면 나로서는 상당히 과감한 질문이었다.

오메가가 아니니까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별로 없다고 생각해서, 갑자기 이런 제안을 하는 건가? 그럼 애초에 그렇게 정확하게 오메가를 구분해 낼 수 있다는 그의 감별력이 왜 나에 대해서는 오작동을 일으킨 거지?

입장에 따라 맹랑하게 들릴 수도 있는 나의 질문에 잠시 말이 없었던 그는, 두세 모금 연거푸 빠른 속도로 담배를 흡입했다.

“그 얘기 말인데, 정말 오메가가 아닙니까?”

머리 위에서 집중적으로 빛을 드리우는 조명과 그의 손가락에 걸린 담배 때문인지, 형사에게 취조라도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네, 중학교 때 검사에서도, 입대 전 신체검사에서도 100퍼센트 확실한 베타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럼 뭐지?”

그럼 뭐냐니. 자문하듯 중얼거리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나에게 고정시킨 그는 내가 베타라는 사실을, 아니, 정확히는 오메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직도 납득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베타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진짜 베타입니까? 골든 오메가가 아니거나, 집안에 돈 좀 있는 게 아니면, 솔직히 남성 오메가로 살기에 유리한 세상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괜히 베타인 척하는 거라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열어 둔 주방 창문 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을 따라 퍼지는 담배 연기 속에 그의 향수인 듯한 낯선 향이 섞여 있었다.

담배 끝의 불씨가 필터에 닿을 듯 바짝 타들어 간 것도 인지하지 못했는지, 그는 담배를 끌 생각도 하지 않고 나를 응시했다. 사실은 오메가라고, 내가 거짓 자백이라도 하길 바라는 사람 같았다.

회청색 눈동자가 가늘게 뜬 눈꺼풀 아래서 나의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을 천천히 번갈아 응시했다.

술기운 탓에 몸이 자꾸 늘어졌다. 아니, 늘어지는 것과는 좀 달랐다. 전신의 관절이 느슨해진 것처럼 흐물흐물한 기분은 사실이었지만, 그 상태로 공중에 떠올라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당장 눕고 싶을 정도로 나른한 것도 같고, 술을 더 꺼내 마시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고양되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지금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긴 하구나.

물을 마셔 정신을 좀 가다듬은 뒤, 아랫입술을 한 번 물었다 놓으며 입을 열었다. 이 문제에 대해 이제는 그가 포기해 줬으면 했다.

“아니요, 베타 맞습니다. 오메가였더라도… 말씀하신 것 같은 이유로 그걸 감추지도 않았을 거구요.”

후에도 그는 한동안 나에게 고정시킨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파도 위를 떠다니듯 몸이 들뜨는 감각에 점점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마침내 그가 담배를 비벼 끄고 매캐한 연기가 사라지자, 향수의 영향력이 더욱 강해졌다. 술집에서, 자동차 뒷자리에서, 그렇게 가까이 있는 동안에 알아채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로 강렬한 향이었다.

향기롭다, 혹은 불쾌하다.

그런 단순한 기호로 나누기 어려운, 복잡한 수식 같은 향이었다.

길을 가다 누군가에게서 이런 향을 맡는다면, 그 향의 독특함 때문에라도 한 번 더 뒤를 돌아보게 될 것 같은. 묘하게 신경을 건드리며 잡아끄는 향.

“하… 내가 무슨….”

자조하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는 그렇게 말했다. 무엇에 대해 자신을 탓하는지 알 수 없었다. 창문을 통해 불어온 바람에 흩어진 것인지, 코밑을 감돌던 그의 향기가 멀어졌다.

담배를 비벼 끄고, 반 정도 마신 이온 음료를 가지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식으로 일하는 문제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면 한 실장에게 상담하라고, 알고 있겠지만 충실히 도와줄 거라고. 비즈니스적인 대사를 마지막으로 그는 현관문 너머로 사라졌다.

취기 때문인지 성욕이 강하게 일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성욕을 느끼는 게 자연스러운 나이였지만, 나에게는 지극히 드문 일이었다.

샤워를 하다 말고 물줄기 아래에서 성기를 어루만졌다. 단순히 마찰과 압박에 의해 발기시킨 뒤 사정에 도달하는 평소의 기계적인 자위가 아니었다.

전신의 살갗이 저릿하도록 몰아치는 성적 쾌감 속에서 후들거리는 다리를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지듯 타일벽에 몸을 기대야 했다. 처음 느껴 보는 강도의 욕구, 성격과 경험을 모두 뛰어넘어 자신을 삼켜 버리는 욕망의 거센 상승에 두려움마저 느꼈다.

흐트러진 신음을 흘리며, 한 번의 사정 뒤에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성기를 붙잡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자신이 낯설었다.

지나친 음주는 건강에도 좋지 않지만, 돌발적인 성욕에 노출될 수 있는 위험이 컸다.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한 행위였음에도, 기진맥진한 상태로 침대에 쓰러졌을 때, 후련함보다 갈증이 더 컸다. 시트를 비틀어 쥐었다 가볍게 내려치며, 몇 년 만에 소리 내어 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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