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분리 (3/31)

   3. 분리

권주한. 당시 22세.

일류까지는 아니어도 꽤 쳐주는 미대의 서양화과에 적을 두고 있었지만, 뒤늦게 ‘섹스 피스톨즈’에 빠져 학교생활도 등한시하고 기타에 매달린 끝에 언더그라운드 펑크 밴드에 합류, 집을 나와 밴드의 연습실에서 먹고 자는 생활 중이었다.

집을 나온 이유는, 공부에 관심 없었던 주한을 어떻게든 서울 4년제 대학에 보내겠다고 일찌감치 중학생 때부터 노선을 변경해 유명 입시 미술학원에 등록하고, 실력 있는 강사를 수소문해 레슨을 받게 한 끝에 목표를 달성한 그의 부모가, 아들의 밴드 활동을 반대해서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기타 두 대를 때려 부수고 어머니가 용돈을 끊어 버리는 등, 밴드 활동에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껏 나름대로 고생 모르고 자란 도련님이었던 주한이 연습실 소파 신세를 지게 된 결정적 원인은 아니었다.

기타를 치든 뭘 하든 대학 졸업장만 따 주면 부모님은 그럭저럭 만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아들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한 부모라도 그 아들이 변태 호모짓을 하고 다니는 것만큼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입시 미술학원 시절 1년쯤 사귀었던 강사가 몇 년째 주한을 스토킹하고 있었고(중간에 군복무 기간 동안에도), 다시 만나자는 제안을 계속 거절당하자 상대는 주한의 삶을 파괴하는 것으로 보복했다.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 두었던 스토킹의 결과물들을 주한의 부모에게 보낸 것이다.

그것은 주한의 입장에서 보자면 스토킹의 증거물이었지만, 주한의 부모 입장에서는 아들이 호모, 그것도 보통 사람은 수용하기 힘든 변태적 섹스 취향을 가진 호모라는 증거물이었다.

사귀던 시절 함께 찍었던 사진은 물론이고, 클럽에서 하룻밤 상대와 끈적한 스킨십을 나누는 사진, 심지어 사귀던 시절 메시지로 주고받았던 지극히 사적인 더티토크를 캡처한 내용까지 포함돼 있었다.

「당신의 아들은 자기 나이의 두 배에 가까운 중년 남자의 항문에 삽입한 채 음란한 말로 희롱해 울리기를 좋아하는 변태 호모입니다. 나는 당신 아들 때문에 인생을 망친 사람입니다. 더는 추가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가정에서 지도에 힘써 주십시오.」

―라는 메모와 함께.

주한이 30대 후반의 무기력하고 소심한 남자들을 좋아하고, 잠자리에서 그들의 성적 수치심을 건드려 태어나 처음 맛보는 상식의 선을 넘은 쾌락에 어쩔 줄 몰라 엉엉 우는 모습에서 흥분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기는 했지만, 누가 누구의 인생을 망쳤다는 건가?

해소할 길 없이 억누르고만 살아왔던 변태 성욕을 충족시켜 줌으로 그에게 해방과 구원을 내려 준 사람이 바로 주한 아니었던가?

그 플레이에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달아올랐던 사람에게서만큼은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형식적으로는 주한의 발로 집을 걸어 나왔지만, 실제로는 의절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욕실까지 달려갈 여유도 없이 소파에 앉은 그대로 속을 게워 냈고, 기타는 두 번이나 때려 부쉈어도 그동안 손찌검 한 번 한 적 없었던 아버지는 이성을 잃고 무차별적으로 주한을 구타했다.

서로 같은 성적 기호를 가진 사람들끼리 합의하에 나눈 성관계가 무슨 잘못이냐며, 아무리 부모라도 자식의 성생활에 대해서까지 왈가왈부할 권리는 없는 거라며, 마지막에는 주한도 악을 써 봤었지만, 사실 주한은 부모의 충격을 이해했다.

자식이 이성 연인과 나눈 섹스 사진과 더티토크를 보게 됐더라도 충격일 텐데, 연상의 동성에게 성기를 빨리는 사진을 보게 됐으니 부모로서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나 아직도 엄마, 아빠가 알던 엄마, 아빠 아들 권주한이라고 말해도, 주한을 보는 부모의 시선에는 경멸과 분노가 가득했다. 같은 집에 있는 것 자체가 지옥이었다. 그들이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르고 상황을 다시 볼 수 있을 때까지라도 서로 거리를 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하루 세 탕의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었지만, 전부 급하게 구한 일자리라 노동의 강도에 비해 시급은 시원치 않았다.

누군가 이사하면서 버리려고 내놓았던 것을 주워 온, 쿠션이 군데군데 터진 소파 위에서 매일 불편한 잠을 청하면서 주한은 생각했다.

그래, 그 나이에 어디 가서 ‘우리 아저씨는 왜 이렇게 야해요? 그 나이 먹도록 오줌도 못 가리는 거예요?’ 따위의 말을 해 주면서 요도에 면봉을 넣어 주는 젊은 놈을 다시 찾기가 쉽지 않겠지. 그래서 욕구는 욕구대로 쌓이고, 화가 많이 났겠지.

―라고 이해해 줄 거라 생각했다면 권주한을 잘못 봤다.

그동안 주한은 스토킹을 피해 번호를 몇 번이나 바꿔 왔었다. 마지막으로 번호를 바꿨을 때 그 스토커는, 새 핸드폰 개통 축하한다며 자신의 자위 동영상을 메신저로 보내왔었다. 그때도 주한은 메시지를 삭제하고 아이디를 차단했을 뿐이었다.

밴드의 라이브 공연에도 매번 찾아왔고, 집 앞에서 기다리다 무릎 꿇고 다시 만나 달라며 질질 짠 일도 수차례였다. 사랑해서가 아니다. 처음부터 서로가 즐겼을 뿐이었고, 그쪽은 주한만큼 자신을 충족시켜 주는 파트너를 찾을 수 없었던 것에 불과했다.

저러다 말겠지. 조금 귀찮은 극성팬 정도로 생각하고 내버려 뒀던 게 실수였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에 일을 크게 키워 봤자 얼마나 큰일을 저지르겠나 싶었지만, 주한의 계산 착오였다.

소심한 인간은 절대 타인의 삶에 이런 방식으로 칼을 휘두르지 않는다. 그 인간은 그냥 음침하고 비겁한 개새끼였다. 혼자 음침한 건 용서해도 비겁한 것만큼은 봐줄 수가 없었다.

약 한 달 동안 연습실 천장의 곰팡이 얼룩을 노려보면서 주한은 어떻게 복수해야 분이 풀릴지, 밤마다 생각했다.

그래, 다른 건 다 필요 없다. 분이 풀려야 했다. 자기 안의 분노가 깨끗이 연소될 때까지 그 격정을 그 자식에게 퍼부어 대야만 밤에 잠이 올 것 같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한때 유복한 가정의 도련님이었던 주한은 평생 전과자 꼬리를 달고 사는 것까지도 각오했다. 그것이야말로 펑크의 정신이었다.

첫 월급이 통장에 들어왔던 날, 주한은 단골 빈티지숍으로 찾아갔다.

국내엔 많지 않은 펑크풍의 아이템들을 판매하는 매장이었다. 점찍어 놨었던 콤배트 부츠를 드디어 찾아올 수 있었다. 주한은 그 부츠를 신고 복수를 감행할 작정이었다.

“형, 그런 게 어딨어요? 제가 사기로 한 거였잖아요!”

“미안…. 근데 너도 알다시피 우리도 그렇게 여유 자금 넉넉하게 두고 장사하는 데는 아니잖냐. 넌 찜해 놓고 한 달 동안 오지도 않지, 사고 싶다는 사람 나타났을 때 팔지 않으면 또 언제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날지 모르는데…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좀 이해해라.”

월급만 들어오면 꼭 구입할 테니 절대 다른 사람에게 팔지 말라고 당부해 뒀던 부츠가 바로 5분 전에 팔렸다는 말에 주한은 좌절했다. 복수에 브레이크가 걸리는 것 같아 초조하기까지 했다.

“내가 진짜 그거 생각만 하면서 컵라면에 삼각김밥으로 한 달을 버텼는데!”

“다른 이쁜 부츠 많이 들어왔어. 꼭 그거 아니어도 되잖아.”

“그게 저한테는 그냥 신발이 아니라구요! 형, 그거 사 간 사람 연락처 혹시 몰라요?”

“어… 그게….”

사장은 듬성듬성한 턱수염을 검지로 긁으면서 눈동자를 굴렸다. 주한은 카운터를 타고 넘어갈 듯 상체를 들이밀었다.

“뭐예요, 알아요? 알면 좀 알려 줘요! 내가 웃돈 얹어서라도… 아니, 빌어서라도 좀 찾아오게요!”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톡톡 어깨를 두드렸다. 간지럽히듯 다정한, 장난을 치듯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웃돈, 얼마나 줄 건데요?”

“…….”

돌아보니 왜소한 체격의 여자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칼같이 자른 새까만 단발머리에 한겨울에 실내에서 착용하고 있는 선글라스가 인상적이었다. 키는 그리 큰 편이 아니었지만 신고 있는 레이스업 부츠의 굽 때문에 주한의 코끝쯤에 그녀의 입술이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썹과 볼을 관통한 피어스부터 타탄체크의 코트까지, 그녀는 펑크 그 자체였다.

스타일 죽이네. 그 상황에서도 주한은 감탄했다.

“그쪽이… 산 거예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발에 맞지도 않겠네! 그거 나한테 넘깁시다, 예?”

“신발을 꼭 신으려고 사나? 왜 이래, 초짜처럼.”

덤벼드는 주한을 향해 상대는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누나, 형님. 제발 팔아 주십시오. 제가 지금 그 신발 손에 넣을 생각만 하면서 극한의 한 달을 견딘 사람입니다. 지금 저에게 그 신발은 단순한 신발이 아니에요. 결심에 대한 상징 같은 거란 말입니다.”

주한의 간절함이 어느 정도로 진실한지 가늠해 보듯, 선글라스 너머에서 찬찬히 자신을 뜯어보는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왜? 무슨 일 있어요?”

“제가 어떤 개썅노무 새끼 때문에 지금 인생 시궁창 됐거든요. 그 부츠를 손에 넣으면 그 새끼한테 복수하러 가기로 저 자신과 약속했단 말입니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코끝으로 끌어 내리고 주한을 쳐다봤다. 짙은 스모키 메이크업을 한 커다란 눈매가 유난히 또렷했다.

“난 미학을 공부해서 유학도 가고 유럽에서 큐레이터가 되고 싶은데, 엄마 아빠는 사범대 가서 선생님이 되래요. 입으라는 옷 입고, 가라는 학원 가고, 정해 준 친구들하고 노는 말 잘 듣는 내 동생처럼. 근데 내가 몰래 XX대 미학과에 원서를 내고 붙었거든요. 엄마 아빠는 사범대가 아니면 등록금을 못 내주겠다네? 개고생하면서 붙어 놓은 대학도 못 가고, 집 나와서 1.5평 고시원 신세죠. 그래도 좋아하는 일에 경력이라도 쌓고 싶어서 들어간 갤러리에서는 하루 15시간 이상씩 일해도 열정 페이밖에 못 받아. 그 돈 받고라도 일하겠다는 애들이 줄을 서서 그나마도 언제 잘릴지 모르는 상태.”

갑작스럽게 줄줄 쏟아져 나오는 자기 고백의 의도를 알 수 없어서 이번에는 주한이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이거 불행 배틀이라도 하자는 건가? 이기면 부츠 양보해 주는 거?

“어때요? 나보다 더 인생 조졌어?”

그녀의 질문을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주한은 즉답했다.

“아웃팅.”

“…….”

그녀는 잠시 말없이 주한을 응시했다. 그리고 팔짱을 끼면서 다음 질문을 꺼내 놓았다.

“……대상은?”

“부모님.”

“……가해자는?”

“예전 애인. 고딩 때 사귀었던 미술학원 강사. 당시 37세. 현재 41세.”

그녀는 이번엔 온 얼굴 근육을 이용해 인상을 구겼다.

“취향이 왜 그래?”

“나도 알아, 내 취향 구린 거. 근데 그 취향을 부모한테 까발린 새끼.”

“개썅노무 새끼 맞네.”

“그치? 내가 이걸 신고 이번엔 그 새끼를 시궁창에 처박아 주러 갈 거거든. 그 새끼가 두 번 다시는 똥구멍으로 똥 못 싸게 해 줄 거야. 그대로 경찰서에 끌려가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거든 내가. 그러니까 양보해 주라.”

“가자.”

선글라스를 다시 제대로 고쳐 쓴 그녀가 주한을 지나쳐 입구 쪽을 향했다.

“어딜? 신발 안 줘? 개썅노무 새끼 맞다며?”

그녀를 뒤따라가면서 주한이 소리쳤다. 그녀가 출입문을 열자 겨울의 찬 공기가 기다렸다는 듯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게 복수가 되겠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사회적 매장에는 사회적 매장으로 갚아 줘야지.”

■ ■ ■

홍대에 위치하고 있다 해서 무조건 장사가 잘되는 건 아닌지, 토요일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바 안에는 두세 테이블밖에 손님이 없었다. 그나마 출입문에서 가장 가까운 테이블은 주인의 지인들인 것 같았다.

인테리어가 세련되지는 않았어도 편안하고 개성 있는 분위기였다. 적당한 볼륨의 음악도 선곡이 좋았고, 술값도 저렴했다. 그런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사진 찍기 좋은 장소가 아니라는 이유로 손님이 별로 없는 곳이라는 게 주한이 형과 유니 누나의 설명이었다.

팬텀의 새 전시회 VIP 오프닝을 도왔던 게 벌써 2주 전.

별세계에 잠시 다녀온 것처럼 며칠 동안은 발이 붕 뜬 것 같았지만, 이삿짐센터 일과 선생님 댁 도우미 일을 병행하며 바쁘게 보내는 사이 현실감은 제자리를 찾았다.

골든 알파, 한 점에 천만 원을 호가하는 그림들, 먹기도 아까운 예쁜 핑거푸드를 곁들인 샴페인 파티…. 그런 세계가 어딘가에는 실재한다는 감각마저 희미해져 갔다.

선생님을 통해 유니 누나에게 연락을 받은 건 수요일이었다. 토요일에 주한이 형과 함께 맥주나 한잔하자는 누나의 연락이 의외이면서도 반가웠었다.

이삿짐 알바 후 집에 들러 샤워를 하고 서둘러 약속 장소로 향하는 동안 이마에 촉촉하게 땀이 밸 정도로 어느새 날씨는 충분히 따뜻해져 초여름을 향해 가는 듯했다.

외부에서 만난 누나와 형은 훨씬 친근했고, 유니 씨, 주한 씨라는 호칭 대신 금세 유니 누나와 주한이 형이 되었다.

녹인 체다치즈를 얹은 감자튀김과 생맥주를 앞에 두고, 주한이 형은 3년 전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기억을 더듬는 중이었다.

바에서 기르고 있는 두 마리의 고양이 중 한 마리가 주한이 형 옆자리의 빈 의자 위로 뛰어 올라왔다. 털이 긴 페르시아 종이었는데 사람을 아주 잘 따랐다. 고양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형은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 길로 근처 카페에 가서 그 자식하고의 과거부터 현재까지 자세히 털어놨지. 그것만 해도 두 시간쯤 걸렸나? 백유니 질문 수준이 하도 꼼꼼하고 침착해서 내가 지금 그 새끼 고소 먹이려고 변호사 찾아온 거 같더라고.”

두 사람이 워낙 스타일도 비슷하고 오랜 사이처럼 편안해 보였기 때문에 팬텀에서 함께 일하기 전부터 알던 사이가 아닐까 생각했었지만, 전혀 아니었다.

그 후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몇 개의 복수 시나리오를 만든 뒤, 신중한 고려 끝에 그중 하나를 선택해 실행에 옮겼다. 스토커가 주한이 형의 부모에게 보냈던 자료들이 그대로 고스란히 그가 일하고 있었던 학원의 원장에게로 배달된 것이다.

“오후 느지막이 원장이 출근하면, 그날 치 우편물 전달하면서 학원 상황 보고하는 게 그 새끼 고정 업무 중 하나였거든. 우리 부모님한테 보냈던 지가 날 스토킹한 자료들. 자기 손으로 그대로 지 상사한테 갖다 바친 꼴이 된 거지. 자기보다 스무 살 가까이 어린 놈한테 다 잘못했으니까 제발 예전처럼 침대 위에서 자기를 개처럼 다뤄 달라고 비는 메신저 캡처를 보면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상사 앞에서 점잖은 척 수강생 증가율이 어쩌고 떠들고 있었을 거 생각하면….”

형은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안고 있던 고양이의 뺨에 자기 뺨을 비볐다.

남자끼리 손잡는 것에도 면역이 없을 지극히 보통의 중년 남자인 원장이 그 추한 내용의 우편물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는 굳이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자기 발등 자기가 찍은 거지. 그게 우리 집에 오면 내 아웃팅 되는 거고, 그 새끼 집으로 가면 그 새끼 아웃팅이 되는 자료인 거잖아. 우린 집보다 회사를 택한 거고. 남을 난도질한 칼끝이 그대로 자기를 찌르는 자해 도구가 될 수도 있다는 거. 백유니 덕분에 내가 아주 확실하게 배웠지.”

“그 새끼한테도 느끼는 바가 많은 월요일 아침이었을 거야.”

테이블에 팔꿈치를 기댄 채 맥주를 마시며 유니 누나가 말했다.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한 새끼는 피눈물을 뽑아 줘야 돼.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노가다가 얼마나 필요하든, 거기에 내 인생이 통째로 갈려 들어가더라도… 나 엿 먹인 새끼는 절대 그냥은 안 넘어간다는 게 내 신조.”

약간은 무섭게 들릴 수 있는 말을 하면서 주한이 형은 고양이의 코끝에 자기 코를 가볍게 비볐다. “그치이이, 쿠숑아아….”라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그 후 스토커는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 예상이 가기도 했다. 40대의 직장인이 사내에서 그런 방식으로 아웃팅이 됐다면 후에 일어날 일들은 뻔했다. 가족들이야 충격을 받고 절연을 할지언정 남들에게는 쉬쉬하겠지만, 사회는 그렇지 않을 테니까.

“혹시 그 새끼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형의 예상은 틀렸다.

복수와 원망의 대상이 분명한 사건이 얼마나 명료하게 마무리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깨끗한 결말이었다고 생각해요.”

“생긴 거하고 다르게 냉정하시네.”

그렇게 말하면서 형은 씨익 웃었다. 장난기 넘치는 짓궂은 악당 같은 미소에서 팬텀의 대표가 문득 겹쳐 보였다.

우리는 모두 새로운 맥주를 한 잔씩 더 주문했다. 두 사람은 세 잔째 맥주였고, 나는 두 잔째였다.

“그게 백유니와 나의 시작이지. 얘 아니었으면 난 그 새끼 찾아가서 성질대로 퍼붓고 진짜 전과자 됐을지도 몰라. 그때 우리 부모님은 합의금 같은 건 절대 안 내줬을 테니까. 뭐, 지금도 별로 상황은 안 달라졌지만.”

새 맥주의 거품을 입술에 묻힌 주한이 형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백유니 말이야, 알고 보니까 갤러리에서 뺑이치고 있다던 건 다 옛날얘기였고, 그때 이미 팬텀에서 빵빵한 연봉 받으면서 잘나가고 있었더라고. 일손이 딸려서 빡세게 일하고 있긴 했지만, 1.5평 고시원은 벌써 예전에 탈출했었더라니까.”

“그때 팬텀이 쑥쑥 자랄 때라 일손이 급하지만 않았어도 네가 팬텀 면접을 보게 하진 않았을 텐데. 하, 타이밍이란….”

억울하다는 듯한 주한이 형의 고발 뒤에는 유니 누나의 장난스러운 푸념이 이어졌다.

그사이 다른 테이블들이 자리를 뜨고, 바 안에는 입구 쪽 주인의 지인들과 우리만 남아 있었다. 그들은 무슨 내기라도 하고 있었는지, 순간 우와아 하는 함성과 아쉬운 탄성이 함께 터져 나왔다. 고양이가 그 소리에 놀랐는지 귀를 앞뒤로 쫑긋거리며 형의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고양이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형의 마른 손을 내려다보며 맥주를 두어 모금 마셨다. 서울로 올라온 뒤 일과 끝에 마시는 맥주 한 캔의 위로와 보상을 알게 됐지만, 오늘의 맥주에는 그것과는 또 다른 맛이 있었다.

다시 이야기의 시작점으로 돌아가, 복수극을 듣는 내내 궁금했던 한 가지를 물어보았다.

“부츠는 어떻게 됐어요?”

“부츠? 아… 그 부츠.”

씨익 웃은 형은 오른쪽 다리를 테이블보다 더 높이 번쩍 들어 보였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랐는지 고양이가 후다닥 의자에서 뛰어 내려가 바의 안쪽으로 사라졌다.

“내가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은 아니거든.”

유니 누나가 건배를 제의하며 말했다.

식어 버린 감자튀김 위에서 세 개의 유리잔이 부딪혔다. 무엇에 대한 것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뭔가를 자축하는 건배 같았다.

“그래서 말인데 이현아, 너 팬텀에서 정식으로 일해 보지 않을래?”

“네?”

과거의 질척한 잔상을 떨쳐 버리려는 듯 맥주의 절반 이상을 들이켠 형이 듣기만 해도 시원한 의성어와 함께 잔을 내려놓으며 갑작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옆자리에서 유니 누나의 한숨이 들려왔다.

“‘그래서 말인데’만 붙이면 다냐? 자기가 얘기 꺼낼 테니까 맡기라고 하더니 내 이럴 줄 알았지.”

“왜? 자연스럽지 않았어? 내가 너 만나서 팬텀에서 일하게 된 경위 설명이잖아. 그 뒤에 너도 여기서 일해 보지 않겠냐고 권하는 게 부자연스럽냐?”

“말을 말자.”

형은 눈썹을 치켜 올리고 반대로 입꼬리를 끌어 내리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고, 대신 누나가 특유의 빠르면서도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팬텀이 일은 빡세도 업계에서 거의 최상급 대우거든. 사실 대부분 갤러리들은 팬텀보다 근무 환경이 더 열악해. 우리와 비슷한 규모의 갤러리에 직원이 한 명뿐인 곳이 허다할 정도야. 우린 화랑이 커가면서 그때마다 직원도 늘려 주긴 했는데, 이번에 또 한 번 새 직원이 필요한 때인 것 같아. 우린 네가 같이 해 줬으면 하는 거고.”

“일단… 제안해 주신 건 너무 감사해요. 좋게 봐 주신 것 같아서. 그런데 전 경력자도 아니어서 도움이 될지….”

선생님을 통해 두 사람이 나를 사적으로 만나고 싶어 한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의외인 동시에 반갑기도 했다. 하지만 갤러리라는 전문적 공간에서 내가 직원으로서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될지 스스로 의심이 되기도 했다.

“근데 사실, 실장님이… 입주 도우미로 일해 보지 않겠냐고 제안하셔서요.”

“아예 입주로?”

“네, 아직 결정해서 말씀드리진 않았는데 아무래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선생님에게서 입주 제안을 받은 것도 수요일이었다.

유니 누나와 주한이 형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전하신 뒤, 선생님은 차로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시면서 입주를 제안하셨었다. 아마도 내 상황을 배려하셔서 하신 제안일 것이다. 선생님도 그것을 굳이 부정하지는 않으셨다. 결국 모래와 형에게 신세를 질 것인가, 선생님에게 신세를 질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였다.

“그럼 더 잘됐네! 실장님 댁으로 들어가면 팬텀 일 하면서도 도우미 일 하기에 좋잖아!”

“야, 팬텀에서 일하게 되면 이현이도 매일 출퇴근하고 야근도 하게 될 텐데, 입주 도우미 일까지 어떻게 소화하냐? 집안일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알아?”

“나도 세탁기 돌리고 음식물 쓰레기 때맞춰서 내놓는 자취생이거든? 백유니… 진짜 속 보인다.”

누나의 타박에도 주한이 형은 웬일인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뒤로 딴 뜻이 있는 음흉한 미소이긴 했지만.

“뭐가.”

“이현이가 실장님 댁에 들어가서 산다니까 질투해서 그러는 거잖아, 너.”

잠시 말없이 맞은편의 형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누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그냥 감방에 들어가게 놔뒀어야 했던 건데.”

팬텀에서 정식으로 일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은 솔직히 가슴에 동요를 일으켰다. 이삿짐센터 일도, 선생님 댁의 도우미 일도 적성에 맞고 마음이 편하긴 했지만, 거기에 어떤 설렘이 있지는 않았다. 그것들은 나를 더욱 내 안의 깊은 곳으로 기어들어 가게 하는 일들이었고, 그렇기에 거기서 편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팬텀에는… 불안이 있었다.

해변의 촉촉한 모래를 파고들어 가 웅크리고 있는 나를 끌어내, 일렁거리는 파도 위에 세워 놓는 것 같은 예측 불가한 기습적 자극이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지금의 내가 뭔가를 선택해야 할 시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도피마저 감행한 서로 사랑하는 한 커플과 미닫이문을 사이에 두고 잠들면서, 머릿속을 비우기 좋다는 이유로 육체노동에 자신을 내맡기면서, 계속 그렇게 지낼 수는 없었다.

“사람 하나 더 들인다고 바로 일이 주는 것도 아니거든. 누가 들어오느냐에 따라 오히려 일이 더 늘 수도 있고, 서로 성격 안 맞으면 스트레스고…. 그래서 사람 구하는 거 계속 미루고 있었는데 너하고는 즐겁게 일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하는 얘기야. 한번 생각이나 해 봐. 괜찮을 것 같으면 우리한테 얘기해도 되고, 실장님한테 말씀드려도 되고.”

그들의 제안에 대해서는 순수하게 기뻤다. 붓은 멀리한 지 오래였지만, 대신 그림에 둘러싸여 일할 수 있다면 그것도 훌륭한 대체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솔직하게 기뻐하면서 내밀어진 손을 덥석 잡을 수 없는 다른 이유가 또 있었다.

“대표님은… 제가 합류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시지 않을까요?.”

「마음에 들고 안 들고가 뭐가 있어? 잠시 도와주고 갈 사람인데.」 ―그의 무심함이 아직 무게감을 갖고 내 안에 남아 있었다.

“그건 진짜 신경 쓰지 마. 그 양반도 나름대로 인생에 굴곡이 있어서 사람을 쉽게 쉽게 못 믿어서 그렇지, 알고 보면 너한테 우호적인 거라니까. 골든 알파라 그런지 자기 직감을 엄청 신뢰하거든. 싫은 놈이었으면 아예 팬텀에 들이지도 않았어. 그리고 네가 싫었으면 실장님한테 너에 대해서 왜 캐물었겠냐?”

“…….”

나의 경직된 눈매와 입매가 불쾌감 때문이라 생각했는지, 형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정정했다.

“아, 캐물은 것까진 아니고… 혹시 네가 미술 전공을 했는지, 뭐 그런 것 좀 묻는 것 같더라고. 네가 그날 인우 쌤한테 작품에 대해서 얘기했던 거 우리 사이에서 한동안 화제였거든. 기분 나빠하진 마. 내가 옆에서 듣고 있었는데 절대 악의를 갖고 뒤를 캐려는 그런 질문은 아니었어.”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파도가 발밑을 밀어 올리듯 가슴속에서 일렁임이 있었지만, 불쾌감은 아니었다.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데에 서툴렀지만, 기분 나쁜 게 아니라고 열심히 설명했다. 두 사람에게 나의 진심이 전달되기를 바라면서.

“팬텀에서 일 안 하더라도 이렇게 가끔 얼굴 보고 지내자. 백유니가 아주 드물게 널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으니까.”

“잘생긴 남자라 네 마음에 든 거겠지.”

“대표님 볼 때마다 너 영입하자고 노래 부른 건 자기면서, 저렇게 츤데레라니까. 네가 적응해라, 이현아.”

그날 나는 처음으로 세 잔의 맥주를 마셨다. 가볍지 않은 과거에 대해 듣고 나니 이전보다 두 사람이 더 가깝고 편하게 느껴지기도 한 데다, 진정되지 않는 모호한 들썩거림이 평소보다 더 빠르게 잔을 기울이도록 재촉한 이유도 있었다.

집으로 이어진 계단에서는 두 번이나 쉬어야 했다. 계단에 앉아 내려다보는 서울의 야경에서는 더 이상 항구에서 바라보는 오징어잡이 배가 연상되지 않았다.

■ ■ ■

아몬드 시리얼, 1리터 우유 한 팩, 플레인 요거트 한 세트, 그리고 마지막으로 크랜베리 주스를 바구니에 넣고 계산대를 향하는데 참외가 벌써 나와 있었다.

한겨울에도 수박을 먹을 수 있고, 한여름에도 귤을 먹을 수 있긴 했지만, 초록색 부직포가 깔린 가판대 위의 참외는 조금 이르게 출하되긴 했어도 엄연한 제철 과일이었다.

한 알을 골라 코밑에 대어 보니 향기가 제법 달콤하다. 껍질을 깎아 먹기 좋게 잘라서 냉장고에 넣어 두면 꺼내 드시기 편하겠지.

선생님 댁 가사 업무에 장보기는 포함돼 있지 않았지만, 이런 것들이라도 사 두지 않으면 식생활이 더욱 엉망이 될 걸 알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주스와 우유, 과일, 시리얼과 빵 따위를 구입해 채워 두고 있었다. 요리를 할 줄 안다면 간단하게라도 만들어 드리고 싶었지만, 할 줄 아는 건 라면과 달걀 프라이 정도였다.

요즘은 배달음식이 워낙 잘 돼 있어 장보기는 안 해도 된다고 하시지만, 사다 놓은 정성을 봐서라도 꼬박꼬박 드시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안 그래도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 일에 급여도 후하게 주시는데, 이런 것으로라도 좀 더 도움이 되어 드리고 싶었다.

계산대 맞은편 베이커리에서 샌드위치와 빵을 몇 개 더 구입한 뒤 밖으로 나오니 햇살이 강렬했다. 손차양을 만들어 잠시 햇빛에 적응한 뒤 걸음을 옮겼다.

선생님 댁은 한강 전망의 고급 아파트였지만, 두 동으로만 이루어진 작은 단지라 상가가 따로 없었다. 바로 옆의 대단지 아파트에 상가가 있긴 했지만 작은 슈퍼마켓뿐이라, 도보 10분 거리의 대형마트에서 장을 본 뒤 걸어서 출근하곤 했다.

“서이현!”

횡단보도를 건너 아파트까지 쭉 이어지는 골목으로 막 들어서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반사적으로 소리 나는 곳을 돌아보니 흰색의 미끈한 SUV 조수석에서 선생님이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나 역시 반가움에 웃으면서 차 옆으로 다가가는데, 선생님의 어깨 너머로 운전석에 앉은 팬텀의 대표가 눈에 들어왔다.

그에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가슴이 움찔했다.

“장 보는 거 안 해도 된다니까, 무겁게.”

“얼마 안 돼요.”

“타. 같이 올라가자.”

머뭇거리는 사이 다른 차 한 대가 골목으로 진입하려 하고 있었다. 사양하며 예의를 차릴 일도 아닌 것 같아 뒷좌석에 올라탔다. 문을 닫자마자 자동차는 아파트가 자리한 한강변을 향해 골목을 미끄러졌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접촉사고가 있었거든. 센터에 맡겼는데, 일주일쯤 걸린다고 하더라고. 덕분에 류 대표 차로 퇴근하는 중이지, 뭐.”

“사… 사고요?”

격양된 내 목소리에 선생님은 뒤를 돌아보면서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아, 응. 그냥 작은 접촉사고고 난 멀쩡해.”

“사고에 작은 게 어디 있고 큰 게 어디 있어? 이번엔 한 실장 잘못이 아닌 건 알지만, 벌써 몇 번째 사고야? 몇 달에 한 번씩 사고 났다는 전화 받아야 하는 사람 입장 좀 생각해 봐.”

오늘은 이삿짐센터 알바 일정을 잡지 않아 평소보다 이르게 이쪽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선생님의 퇴근이 빠른 이유가 궁금했는데, 아무리 다친 데가 없다지만 사고가 났었다니…. 이번만큼은 팬텀 대표의 발언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떨리는 손을 감추고 진정시키기 위해 장바구니로 사용 중인 에코백을 무릎 위로 끌어 올려 꽉 끌어안았다.

“네네, 죄송합니다. 걱정 끼친 건 백번 미안해.”

“운전 스타일이 너무 공격적이라고 내가 매번 말하잖아.”

“류 대표, 열 받는 한 실장 얘긴 그만하고 슈슈 얘기로 돌아가자. 응?”

선생님은 빨리 화제를 전환하려 했지만, 그는 꽤 진지하게 화가 난 것 같았다. 들어 본 적 없는 감정적인 목소리였다.

“잔소리 듣는 게 싫으면 운전 스타일 좀 바꿔. 습관을 못 바꾸겠으면 기사라도 붙여 줄 테니까.”

“대표도 직접 운전하고 다니는데 나보고 기사 딸린 차를 타라고? 남들이 뭐라고 하겠어?”

“남들이 뭐라고 하건 무슨 상관이야. 한 실장한테 일 생기고 나면 그 자식들이 대신 팬텀 책임져 주기라도 해?”

“이현아, 류 대표 지금 하는 말 들었지? 이런 게 츤데레 맞지?”

선생님이 뒷좌석의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딱히 정말 동의를 구하려는 질문은 아니었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는 거면 그냥 그렇다고 해. 괜히 팬텀 핑계 대지 말고.”

분위기를 전환해 보려 선생님은 계속해서 가벼운 농담조로 얘기했고, 아파트의 지하 주차장 입구를 향해 부드럽게 핸들을 꺾으면서, 그는 평소보다 한 톤 높았던 목소리를 다시 낮게 끌어 내렸다.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 제발 좀 조심해.”

금방이라도 날려 사라질 것 같은 한숨 섞인 목소리였다. 그의 걱정이 단순한 잔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선생님은 이번엔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미소를 짓고 있다는 건 비스듬히 보이는 옆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조수석의 남자를 대하던 심드렁하고 껄렁한 태도, 파티에 참석했던 고객들을 대하던 비즈니스적인 친절함. 그리고 외부인인 나에게 보여 줬던 적대감.

내가 아는 그의 모습은 그게 전부였었다. 팬텀의 스태프들에게는 장난기 있고 다정한 보스라고 생각했지만, 초조한 목소리로 누군가를, 약간은 과보호로 보일 정도로 걱정하기도 하는 사람일 줄은 몰랐었다.

하지만, 그렇다. 그의 몸속에 그의 눈동자와 같은 파란색 피가 흐르는 게 아닌 이상, 누구에게도 필요 이상의 애정을 쏟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라도 소중한 상대에 대해서는 초연할 수 없게 되는 거니까. 그게 당연한 거니까.

지하 주차장에 내리자 공기가 갑갑했다. 아무도 그것에 대해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았지만, 대표에게 인사할 타이밍을 놓친 것이 신경 쓰였다.

운전석에서 내려 차의 앞쪽으로 걸어 나오는 그와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 “안녕하세요.”라고 작은 목소리로 인사했고, 그는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주한이 형의 표현처럼 나에 대해 ‘캐물었던’ 사람이라고 하기엔 그 창백한 푸른색 눈은 여전히 나에게 아무런 흥미도 없어 보였다.

그에게 있어 나는 팬텀에선 잠시 도와주고 떠날 임시 알바였고, 지금은 선생님 댁의 가사도우미였다. 특별히 다정한 성격에 사교적인 사람이 아닌 이상, 그 정도의 인물에게 노력을 기울여 가며 살가운 말을 붙이고 미소를 전할 필요는 없겠지.

예의를 위한 친절, 사교를 빙자한 질문 세례야말로 내가 불편해하는 것이었으니 그의 무관심에 기분이 상할 이유가 없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두 사람은 주방의 식탁 앞에서 일 얘기를 하기 시작했고, 나는 나대로 내 일에 착수했다.

편하게 얘기하실 수 있도록 네 개의 방과 두 개의 욕실부터 청소에 들어갔다.

가끔 방을 들락거릴 때마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려온 대화의 조각들로 짐작해 보자면, 팬텀의 전속 작가 중 한 명의 개인전이 계획되어 있었고, 오늘 그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해 진행 상황을 살펴본 대표는 전시회 일정을 최대한 앞당기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선생님의 와일드한 운전 습관을 걱정할 때와는 다른 방향의 흥분이 그의 목소리에서 묻어났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작가의 이름이 ‘슈슈’인 것 같았는데, 가시에 긁힌 듯 살짝 허스키한 그의 낮은 목소리가 ‘슈슈’라는 달콤한 어감의 단어를 발음할 때마다 낯선 질감이 느껴졌다. 특정 파트에서 탁 튀는 레코드판 같기도 했고, 그가 커다란 몸을 숙여 푸들 강아지를 끌어안고 키스를 퍼붓는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안 어울린다는 얘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듣기 싫고 보기 싫은, 눈살이 찌푸려지는 부조화가 아니라, 굳이 말하자면 낯설고 새로워 흥미를 일으키는 쪽이었다.

슈슈. 그런 이름의 작가는 어떤 그림을 그릴까. 물론 본명은 아니겠지만, 궁금해졌다.

“정말 입주하게 할 생각이야?”

거실 쪽 욕실을 청소하고 있을 때, 욕조를 문지르는 솔질을 잠시 멈춘 순간에 타일벽 너머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음절 한 음절 또렷하게 들리는 것까지는 아니어도 대화의 내용을 대강 유추할 수 있을 정도의 볼륨이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닌데 그렇게 될 것 같아. 설득하느라 애먹었어.”

“말이 입주 도우미지 생판 남하고 한집에 사는 거라고.”

“생판 남이라니, 예전에 내가 가르쳤던 애라니까.”

“아, 10년 전에?”

“지금 꼭 그런 식으로 얘기해야 돼? 그만했으면 하는데.”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남자를 집에 들여서 같이 살겠다는 거야? 멀쩡해 보이는 놈도 언제 돌변할지 모른다고.”

“그럼 류 대표부터 쫓아내야 되겠네. 류 대표도 남자잖아.”

“내가 그놈하고 같아? 한 실장한테?”

나와 같지 않으면, 그럼 그는 선생님에게 무엇이라는 말일까?

소중한 사람이 가족이 아닌 이성과 한집에 살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이해한다. 그건 어쩌면 자연스럽고 타당한 염려였다. 하지만 그 걱정의 원인 제공자가 된 입장으로서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대화인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걱정해 주는 건 알지만 나도 다 생각이 있거든? 이런 얘기 이현이 귀에 들리는 것도 싫으니까 진짜 나 화내는 거 보기 싫으면 그만하자.”

그는 일단은 거기에서 멈췄다. 화제는 다시 슈슈라는 작가에게로 돌아갔다. 대표는 어떻게든 하루라도 빨리 전시회를 열고 싶어 하고, 선생님은 일정이 너무 빡빡하다며 쉽게 동의하지 못하고… 그런 대화들이 이어졌다.

세제의 거품을 씻어 내기 위해 샤워기의 레버를 돌렸기 때문에, 이후의 대화 내용은 알 수 없었다.

선생님은 거실 쪽 욕실은 거의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특별히 오래 청소할 것도 없었지만, 왠지 밖으로 나가는 게 불편해져서 평소보다 좀 더 시간을 끌었다. 덕분에 욕실이 반짝반짝했다.

거실과 주방, 식당의 청소까지 마치고 소파에 놓아두었던 가방을 집어 들려는데, 식탁 쪽에서도 회의가 마무리됐는지 선생님이 의자를 뒤로 밀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현아, 다음 주 토요일에 이삿짐센터 스케줄 아직 안 잡혔으면 팬텀 일 좀 도와줄 수 있을까?”

“다음 주 토요일은 아직 비어 있긴 해요.”

“지난번에 오프닝 도와줬던 전시회가 그날이 마감이거든. 근데 다음 전시 일정이 확 당겨지게 돼서…. 저쪽에 우리 대표님이 빨리 오픈하고 싶어 못 기다리시겠단다.”

아무래도 ‘슈슈’의 전시를 서두르고 싶다는 그의 고집이 승리한 것 같았다.

“전 괜찮은데….”

식탁 의자에 느슨하게 등을 기대고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그를 쳐다봤다. 나도 모르게 한 일이었다.

내 시선의 방향을 눈치챈 선생님은 그를 한 번 돌아보고 내 어깨에 양손을 올렸다.

“왜 류 대표 눈치를 봐? 내가 너한테 부탁한 건데.”

선생님의 어깨 너머에서 그가 마시던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요, 팬텀의 실세는 한 실장님이시죠. 나 가 볼게.”

옆자리에 걸쳐 놓았던 여름용 재킷을 집어 든 그는 말아 올린 셔츠 소매 아래의 손목시계를 한 번 확인한 뒤 선 채로 급하게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쿤, 가는 길에 이현이 좀 데려다줘.”

“아, 아니요. 괜찮아요.”

그가 잠시 나를 쳐다봤다가 다시 선생님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그렇다는데?”

“가는 길이야. 좀 데려다줘.”

말없이 잠시 나를 내려다본 그가 현관 쪽으로 몸을 틀었다.

“가죠.”

“정말 괜찮습니다. 버스도 있구요.”

“한 실장이 그랬으면 하잖아요. 그렇게 하죠, 그냥.”

자기도 좋아서 태워 주겠다고 나서는 게 아니니 그만 실랑이하고 빨리 해치워 버리자는 투였다.

“말만 저래. 신경 쓰지 말고 그냥 타고 가.”

어깨를 두어 번 주무르며 그렇게 소곤거리는 선생님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선생님은 그에 대한 나의 불편함을 실제보다 더 축소해서 느끼고 계신 것 같았다. 먼저 구두를 신은 그는 내가 컨버스의 끈을 묶는 동안 현관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그는 집이 어디냐고 물었고, 동네 이름과 함께 집으로 이어진 가파른 계단 맞은편 랜드마크 같은 큰 교회의 이름을 대자 그는 어디인지 알 것 같다는 식으로, 음, 하고 반응했다.

“예전에 한 실장한테 그림을 배웠다고 하던데.”

그 뒤, 차에 올라타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갈 때쯤 던진 첫마디였다.

“네, 아주 어릴 때요.”

“아주 어릴 때라면?”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1년 정도였습니다.”

큰 도로로 들어서기 위해 우회전할 타이밍을 기다리면서 그는 담배를 피워도 될지 양해를 구했다. 고개를 끄덕이자 팔걸이 뒤쪽에 대강 던져두었던 재킷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사이 뒤쪽에 다른 차가 한 대 더 따라붙어 짧게 클랙슨을 울렸다. 담배를 입술에 문 채 핸들을 틀어 도로로 들어선 그는 차량에 장착된 전동형 시가라이터 대신 자신의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반쯤 열어 둔 창문으로 연기의 대부분이 빠져나갔다.

“전공을 한 건 아니라고 들었는데, 지금은 그리지 않습니까?”

“네, 지금은….”

그가 선생님에게 나에 대해 물었다는 건 주한이 형에게 들어 미리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선생님이 모든 것을 이야기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선생님은 타인의 과거에 대해 어느 선 이상을 쉽게 발설할 분이 아니기도 했고, 현재의 나도 숨어 지내고 있는 처지에 가까웠으니까.

그가 지금 나에게 예의를 위한 질문을 하고 있는 건가? 세 번째 만남에서야 갑자기? 이 밀폐된 실내에서의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그런 수고로움을 자처할 사람은 아닐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에 무의미한 시선을 주고 있을 즈음, 들이마신 담배 연기를 내뱉는 호흡과 함께 그가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한 실장이 입주로 일해 달라고 제안했죠?”

이게 본론이었다.

“솔직하게 말할게요.”

“…….”

“어릴 때 교류가 있었다고 해도 잠깐뿐이고 계속 각자의 삶을 살다가 재회했으니 지금은 타인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런 사람을 집에 들여서 같이 지낸다는 게… 내 입장에선 걱정이 돼서요.”

중간에 잠시 말을 끊었다고 해서, 그가 이 말을 듣는 나의 감정을 고려해 머뭇거렸다든가 그런 것은 아니다. 담배를 빨아들이느라 생긴 공백이었을 뿐이다.

“한 실장이 그쪽을 워낙 마음에 들어 하고 신뢰해서 내 말이 먹히지 않을 것 같아, 그쪽한테 직접 부탁하는 겁니다.”

선생님 댁에서 우리 집까지는 대중교통으로는 약간 시간이 걸렸지만, 승용차로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퇴근 시간의 러시아워를 살짝 넘긴 도로는 아직 복잡했고, 전쟁기념관 쪽으로 직진을 하기 위해 자동차는 신호 대기에 들어섰다.

그는 핸들의 상단을 두 손으로 잡고 거기에 기대듯 상체를 약간 숙이면서 내 쪽을 돌아봤다. 피하지 않고 시선을 마주했다. 왼손에 들린 담배가 가는 머리카락에 닿을 것 같았다.

“무사히. 평화롭게. 안전한 생활이 됐으면 합니다. 네? 서이현 씨.”

오물은 물론 흙먼지조차도 손에 묻혀 본 적이 없을 것 같은, 우아하고 고상한 세계 속 골든 알파의 상징 같았던 그가, 한순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협박과 뒷공작도 서슴지 않는 지하세계의 사람처럼 보였다. 우리에게 대포폰을 개통해 주고 방을 소개해 줬던 흥신소의 소장보다 더 그럴싸했다.

첫날에도 느꼈지만, 자기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그 영역 밖에 있는 사람의 기분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 기분은 물론이고, 이런 무례한 언행들로 인해 내가 자기를 싫어하게 되거나 경멸하게 되거나…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싫어하게 되더라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초록색의 신호와 함께 차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남산 터널로 들어가기 전 골목으로 빠져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올라가는 동안, 나는 굳이 감추려 하지 않고 그의 옆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는 시선이었지만, 그는 전혀 불편해하지도, 신경 쓰지도 않았다.

뭐라고 대답하란 말인가?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께는 아무 짓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애초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던 것에 대해 그런 약속을 한다는 자체가 이상했다. 그런 약속 자체가, 내가 선생님에게 위험한 놈이었을 수도 있다는 인정 같아서 하고 싶지 않았다.

나의 나이에 이어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게 의외였다. 그 이름을 이런 식으로 듣게 될 줄은 더 몰랐고.

태연히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그의 옆모습을 보던 시선을 거두어들였을 때쯤 그의 전화가 울렸다. 약한 진동으로 웅웅 울리는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귀찮다는 듯 혀를 차며 통화를 연결했다.

“어… 그래, 들렀었어…. 아니, 지금은 아니고… 운전 중이야.”

내가 알고 있는 그의 인간관계는 극히 작은 부분이겠지만, 불성실한 태도를 봐서는 조수석의 남자나 그와 비슷한 관계인 사람의 전화일 것 같았다.

상대가 무슨 말을 했는지 그는 잠시 멈칫하며 이쪽을 힐끔 쳐다봤다.

“없어, 아무도. 늦지 않게 도착할 거니까 끊어.”

「알바야.」

「내가 그놈하고 같아?」

「없어, 아무도.」

나를 가리켰던 그의 말들이 무슨 시리즈처럼 머릿속에서 서로 연결되었다. 역시나 통화를 마친 뒤에도, 엄연히 존재하는 사람을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것에 대한 설명이나 양해 따위는 없었다.

이 동네에 어울리지 않는 번듯한 규모의 교회가 이제 바로 저 앞이었다.

“저기 세워 주시면 돼요. 계단 앞에.”

차가 속도를 줄이기 시작할 때쯤 안전벨트를 풀었다. 버스정류장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그가 차를 세웠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나한테?”

“주한이 형한테도 진짜 이러셨어요?”

미간이 찌푸려지면서 눈썹이 서로 가까워졌다.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맞은 놈은 잊지 못해도 때린 놈은 쉽게 잊는 건지도. 당신 차를 긁어 놓고 도망가 버릴까, 형은 그런 생각까지 했었다는데.

그렇게 했다가는 어디까지라도 쫓아와 복수할 것 같았다는 형의 말을 지금은 아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암흑의 보스 같은 모습을 한 그에게 협박에 가까운 경고를 받아 봤으니까.

“선생… 실장님 일은 걱정하지 마세요.”

왼팔을 핸들에 걸치고 상체를 이쪽으로 돌린 그는 길을 가다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에게 붙잡혀 헛소리를 듣는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저, 게이거든요.”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게이고 뭐고, 연애 한 번 못 해 봤고, 누굴 좋아해 본 적도 없으면서.

하지만 이번엔 눈썹만이 아니라 그 아래의 눈동자까지 꿈틀거리는 그의 표정을 본 순간, 내가 정답을 말했음을 알았다. 나는 그저 당황하는 그를 보고 싶었던 거다.

“그럼,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가방을 챙겨 차에서 내려섰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가방끈을 더욱 꽉 쥐고 참았다.

상처를 줄 수 없다면, 충격이라도 주고 싶었다. 그는 다이아몬드만큼 단단한 바위고, 내가 던지는 충격이 겨우 날계란 정도일 뿐이라 하더라도.

■ ■ ■

“뭐 그리는 거야?”

빨강, 파랑, 검정. 세 개의 컬러가 한 자루에 함께 들어 있는 경제적인 볼펜으로 모래가 찢어 준 노트 위에 이런저런 선을 끄적이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모래가 웃으면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냥. 손이 심심해서.”

파도 같기도 하고 불길 같기도 하고 소용돌이 같기도 한 배경은 내가 봐도 어지러웠다.

“마셔. 유학 기념으로 내가 사는 거.”

‘발리에서 생긴 일’의 시그니처인 인심 후한 커다란 컵에 담긴 프루츠 펀치를 내 쪽으로 밀어 놓은 모래는 옆자리로 와서 나와 나란히 앉았다. 컵은 그대로 테이블 위에 둔 채 고개를 숙여 빨대로 음료를 마시면서 눈으로는 모래를 올려다봤다. 유학이라니?

“동네에서, 나 지금 유학 간 거로 돼 있대. 정확히는 유학 준비하러 서울에 가 있는 거로.”

차가운 음료를 갑자기 양껏 들이마시자 미간과 코가 찡해지는 느낌에 눈이 찌푸려졌다.

우리가 떠난 뒤 상황이 어떻게 돼 가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지난주쯤 흥신소에 의뢰를 한다고 들었는데, 오늘 아마 연락이 왔나 보다.

“나랑 형은?”

“일이 웃기게 된 게, 서이한이랑 나랑 둘이 사라진 게 아니라 너까지 셋이 사라져서 어른들은 그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나 봐. 난 유학 준비로 서울 가 있는 거로, 너랑 서이한은 좋은 자리가 생겨서 급하게 영덕으로 돈 벌러 간 거로. 그렇게 돼 있는 상황이야, 지금. 우리 집에서 일부러 떼어 놓으려고 그렇게 했다는 식으로.”

그렇게 갖다 붙이는 것도 가능하구나. 하긴, 우리가 도망치기 전부터 ‘임 선생’은 금방이라도 일을 칠 것처럼 긴장감을 조성하고 다녔으니까. 실제로 일은 모래가 먼저 저질러 버렸지만.

“그래 봤자 그걸 누가 믿겠어? 그게 사실이더라도 자기들 마음대로 소설 하나 써내서 퍼뜨리고 다니면서 그게 숨겨진 진실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아무도 안 믿는 거 뻔히 알면서도 얄팍한 체면이 그렇게 중요한 건지….”

중얼거리듯 마지막 말을 흘리며 모래는 벤치의 등받이에 느슨하게 등을 기댔다.

“찾으려고 하면 바로 한강에라도 뛰어들 것처럼… 내가 편지에 그렇게 난리를 쳐 놓고 와서 지금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계시는 거겠지만… 절대 이대로 단념하시진 않을 거야.”

빨대를 쓰지 않고 컵의 가장자리에 입술을 대고 복숭아 펀치를 서너 모금 시원하게 들이켠 모래는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며 한마디 더 보탰다.

”그 전에 최대한 빨리 떠야지.”

내가 모래를 만난 건 그녀가 고3 때였는데, 대학 진학을 두고 부모와 갈등을 겪고 있는 중이었다. 부모님은 근처 삼류 대학이라도 좋으니 대학만 가 달라는 입장이었고,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 상태라 갈등을 겪고 있다고 하기엔 좀 그랬지만.

형에게 듣기로 그녀는 중학교 1, 2학년 때까지는 성적이 아주 좋았었다고 한다. 하지만 부모가 자신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그녀는 훗날 자유를 확보하기 쉽도록 비행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일부러 성적을 망치고, 문제아가 되기를 자처했다. 귀가 시간이 늦어졌고, 부모의 눈에 불량하고 기괴하기만 한 B급 영화의 포스터들로 방을 장식했고, 옷차림이 껄렁해졌다. 수업을 빠지고 서핑을 하러 가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뭐든지 평균 이상으로 해내는 미래가 기대되는 자랑스러운 딸에서, 그저 큰 말썽 없이 지내 주기만 해도 다행인 골칫거리 막내로 변화해 왔다.

그녀의 부모님은 그것이 알파 판정을 받은 것에 대한 혼란에서 야기된 사춘기의 반항심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그녀의 선택이었다.

「난 내가 함께 있고 싶은 사람과 내가 있고 싶은 곳에 있을 거야. 결국엔 그렇게 내 마음대로 살 거면서 공부 잘하는 모범생으로 부모님한테 헛된 희망만 심어 주는 건… 서로 못 할 짓인 것 같아. 지금부터 조금씩 알아 가시는 게 더 낫겠지. 내가 당신들께서 원하는 대로 살아 줄 생각이 없다는 걸.」

모래는 그렇게 말했었지만, 그녀가 스물네 살이 될 때까지도 그녀의 부모님은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녀가 무엇을 원하고, 어떤 형태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인지, 그들은 부정하고 있었다. 너는 아직 어려서 인생을 위한 장기적으로 옳은 선택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모래는 일류 대학이나 소위 말하는 높은 연봉의 ‘좋은 직장’에는 관심이 없었다. 연간 몇십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아버지의 여러 사업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생각도 없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평화로움. 좋아하는 것들에 둘러싸여 건강한 웃음과 함께,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채워 가는 소박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하루하루.

파도와 따뜻한 날씨와 서이한. 맥주 한 병과 서핑 보드. 좋아하는 책의 문고본 한 권. 그녀가 원하는 건 그게 다였다. 행복하기 위해 그 이상의 더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니 그녀는 능력자였다.

“아저씨도 평소처럼 지내고 계신대.”

“응… 고마워.”

내 볼펜 끝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모래가 미소와 함께 팔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가볍게 흩트렸다. 그리고 그 손을 그대로 아래로 떨어뜨려 내 어깨를 감싸고 다른 쪽 어깨에 관자놀이를 기댔다.

우리는 가게의 앞쪽을 향해 나란히 앉아 있었고, 폴딩식으로 만들어진 전면창을 활짝 열어 놓은 덕에 카페 곳곳을 장식한 식물들의 초록 잎사귀 사이로 거리가 내다보였다. 우쿨렐레가 멜로디를 연주하는 느긋한 이국의 음악이 흐르고, 골목과 면한 가장 앞쪽 테이블에서는 내 또래로 보이는 서너 명의 일행이 쉼 없이 웃고 있었다. 평화로웠다.

형과 모래가 남국의 어느 섬에서 카페를 연다면 아마 이런 느낌이겠지.

지나가는 사람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세련되거나 트렌디하지는 않아도 주인의 취향과 삶이 그대로 녹아 있고, 억지스러운 곳이 하나도 없는, 한가한 시간엔 언제든 보드를 가지고 바로 앞의 바다로 뛰어들 수 있는.

형과 모래의 도피의 최종 목적지는 서울이 아니었다. 여기서는 언제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버릴 수 있었다. 모래의 독한 편지와 실력 좋다는 흥신소의 소장 덕분에 얼마간 시간을 벌고 있기는 했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따뜻한 날씨와 파도가 있는 곳으로 두 사람은 곧 떠나야 했다. 그건 그들의 오랜 꿈이었다. 훨씬 더 어렸을 때부터 오직 서로에게만 속해 있었고, 서로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것을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느꼈던 두 사람의. 이번 도피는 그 꿈으로 가는 과정의 한 코스일 뿐이었다.

그리고 아마 그것이, 선생님 댁으로의 입주를 결심하게 된 중요한 계기였을 것이다.

내가 길을 정하지 못하고 있으면, 아마 두 사람은 모든 준비가 다 끝난 뒤에도 쉽게 떠나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아마 어쩌면 그런 나에게 다시 또 함께 떠나기를 제안할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다.

여기까지는 함께 왔지만, 비슷한 방식으로 계속해서 그들 삶의 별책부록처럼, 내 여정의 선택을 그들에게 미룰 수는 없었다. 혹시 함께 떠나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외에 달리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택한 대안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만큼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 비 오는 새벽, 나를 잡지 않는 아버지를 뒤에 두고 형과 함께 대문을 나설 때부터 다짐하고 각오했던 한 가지였다.

추잡한 방법으로 아웃팅을 당하고 가족에게 절연당하다시피 한 주한이 형(자신의 가장 사적이고 은밀한 모습들을 부모에게 그대로 보이게 된 심정이 어떤 것일지 상상조차도 어려웠다),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고생 끝에 어렵게 꿈으로 가는 한 발을 디딜 수 있었던 순간 다른 사람도 아닌 부모로 인해 그것이 좌절되었던 유니 누나, 그리고 나와 가장 친밀한 존재인 모래와 형 역시 아무런 죄도 없는 선택에 대한 대가를 가혹하게 치러 내고 있었다.

자의와는 무관하게, 이유 없는 삶의 심술에 놀아나 희롱당하고 내던져지며 상처 입은 존재가 나만은 아니었다.

손가락을 까딱이는 움직임만으로 원하는 것을 곁으로 끌어올 수 있을 것 같은 팬텀의 대표마저도 ‘사탄’이니, ‘몸으로 그림을 파는 남창’이니 하는 모욕을 감수해 내며 지금의 자리까지 팬텀을 끌어왔을 테니까.

어느 날 갑자기 삶에 끼어든 공격.

그것을 극복하든, 그것에 발목을 잡혀 가라앉든, 혹은 열한 번째 손가락이나 옆구리의 커다란 혹 같은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든. 이제는 나 역시 태도를 정해야 할 때였다.

내가 아는 한, 모래와 형, 유니 누나와 주한이 형은 공격에 맞서려는 사람들이었다. 각자 대응의 방향과 색깔은 조금씩 달랐지만, 그들의 얼굴에서 호된 태클이 남긴 음침한 부상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는 서로 유사했다.

하지만 팬텀의 대표가 가진 질감은 그들의 것과 달랐다.

주한이 형이 지나가듯 슬쩍 던진 말에서, 그가 미끈한 외모만큼 찬란한 영광만을 지나온 왕자님이 아니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쩌면 삶의 공격을 뛰어넘은 사람이 아닌, 자신의 일부로 안고 살아가는 사람인 것일까. 좀비의 공격을 받고 자기 역시 좀비가 되듯이?

그는 예민한 경계심으로 나를 대하곤 했지만, 또 어떤 때는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누구에게도 해를 입힐 수 없는 하찮은 존재인 것처럼 없는 사람 취급을 하기도 했다.

그가 배려 없는 시선과 말들로 나를 건드릴 때마다 가슴속에 일어나던 흔들림은, 반항심이라 하기엔 모서리의 날카로움이 덜했고, 단순한 섭섭함이라 하기엔 그렇게 연약하지 않았다.

애초에 원래가 나는, 누가 나에게 욕을 하고 화를 내면 옆으로 돌아가는 타입의 인간이었다. 지금껏 내가 나를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일까.

“누나, 내가 특이한 걸 좋아했었나?”

혹시 내가 오해하고 있었던, 놓치고 있었던 나의 일면을 타인이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종이 위를 더 빽빽하게 채워 나가면서 모래에게 물었다.

“좀 그런 편이지?”

“내가?”

의외의 대답에 반사적으로 되묻자 모래가 내 어깨에서 머리를 떼고 얼굴을 들여다봤다.

“너 짱구 캐릭터 중에서 맹구 제일 좋아하잖아. 그런 사람 별로 없을걸? 그리고 티셔츠. 맨날 스트라이프만 입지? 여름엔 반팔, 겨울엔 긴팔일 뿐이지 전부 스트라이프잖아. 너 은근 특이해. 그림 그리는 애들 중에 특이한 애들이 많기도 하지.”

“그림 안 그린 지가 언젠데….”

“아… 지금은 그림 그리고 있는 게 아니고 글씨 쓰는 거세요, 그럼?”

정확한 지적에 멋쩍어져서 입술을 꾹 다문 채 웃으며 시선을 피해 버렸다. 이건 그냥 낙서잖아….

“그럼… 괴롭힘당하는 거 좋아하는, 그런 스타일인가 내가?”

“어디 가서 무슨 소리를 들었길래 이래? 마조히스트 얘기하는 거야?”

“뭐? 누가 너한테 그딴 소릴 가르쳐?”

주방에서 나시고랭 접시를 가지고 나오던 형이 마조히스트라는 단어에 인상을 구겼다.

내일이 선생님 댁으로 입주하는 날이니 송별회라도 하자며 모래와 형은 나를 ‘발리에서 생긴 일’로 불렀다. 직장을 그만두는 것도 아니고 전학을 가는 것도 아닌데 송별회씩이나 한다는 게 어색했지만,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척해도 이번 이별이 섭섭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형은 당장이라도 나에게 마조히스트 같은 유해한 단어를 알려 준 놈을 찾아가 멱살잡이라도 할 것처럼 눈에 힘을 줬다.

“그딴 소리 좀 가르치면 어때. 엄연한 성인인데. 마음 맞는 상대하고 이불 속에서 뭘 하든 지극히 사적인 영역의 자유인 거지.”

모래의 항변이었다.

모래와 형이 나를 얼마나 세상과 단절된 희귀종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몰라도, 딱히 누가 따로 가르쳐 주지 않아도 여기저기에서 주워들은 귀동냥만으로 사디스트나 마조히스트 정도는 알고 있을 나이였다.

형이 건네주는 수저를 받아 들면서 모래를 재촉했다.

“그래서, 누나… 내가 그래?”

형한테는 어차피 객관적인 대답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음, 즐긴다기보다는 오히려 괴롭혀도 신경 안 쓰는 편인 것 같은데? 반응이 없으니까 괴롭히는 보람이 별로 없는 타입이지.”

모래의 생각에 나도 동의했다. 지금까지는 내가 그런, 약간은 둔할 정도로 무덤덤한 인간이라 여기며 살아왔었다. 적어도 그런 식으로 변질된 인간이라고.

하지만 최근의 내 반응은 나조차도 낯설었다.

「저, 게이거든요.」

얼마 전까지의 나에게서는 기대하기 힘든 발칙한 발언은 거의 도발에 가까웠다.

“왜? 누가 널 괴롭히는데 막 짜릿짜릿해?”

테이블에 팔꿈치를 괸 모래가 막 한술 뜨려는 내 쪽으로 상체를 가까이 기울이며 물었다. 얼굴에 장난기와 호기심이 가득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누가 바늘로 손톱 밑을 콕 찌른 것처럼 따끔할 때는 있었지만, 짜릿함과는 좀 달랐다. 속도를 줄이지 않고 과속방지턱을 넘을 때처럼 몸 전체가 울렁, 떠오르는 것 같은 느낌과 비슷하기도 했다. 그의 손을 가져와 바늘 끝으로 나도 그의 손톱 밑을 콕 찔러 주고 싶은, 그런 유치한 심술이 일기도 했다.

나를 대하는 그의 태도가 일관되지 않은 것처럼, 나 역시 내 반응의 이유를 한 방향으로 추리기 어려웠다.

밀려오는 허기에 더 이상 뭔가를 생각할 기력이 없었다. 나는 허겁지겁 밥을 먹기 시작했고, 모래와 형은 옆자리에서 오늘치의 전표를 정리했다.

‘발리에서 생긴 일’을 운영해 일정 금액이 모이기만 하면 진짜 발리로 떠나 여행과 서핑을 즐기다 온다는 사장님은 지난주부터 발리로 떠나고 없었기 때문에, 그동안은 모래와 형이 이곳의 사장 대리였다.

내가 접시를 거의 다 비워 갈 때쯤 형이 좀 아까보다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서 살게 되더라도 놀러 와. 여기도 오고, 집에도 오고.”

“당연하지. 귀찮을 정도로 와서 떠들 거야. 여기 아니면 내 얘기 털어놓을 데도 없잖아.”

“웃기네. 그럴 정도로 말이 많지도 않은 놈이.”

형이 피식거리며 가볍게 핀잔했고, 그것에 대한 동의로 나 역시 마주 웃었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의무적으로 와야 돼. 알았어? 문자도 매일 하나씩은 꼭 보내고.”

이번엔 모래의 협박이었다. 모래 자신이 아니라, 내가 외로워할 것을 염려한 요구임을 알고 있었다. 크게 고개를 끄덕이자 모래가 웃어 줬다.

그날 우리는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고, 집에 가서는 맥주를 더 마셨다. 서울에 와서 처음 부려 보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작은 사치였다. 알딸딸함을 넘어 취할 때까지 마셔 본 것도 처음이었다.

술에 취하면 내가 굉장히 고분고분해지고 웃음이 많아진다는 걸, 다음 날 모래와 형이 얘기해 줘서 처음 알았다. 모래의 뺨에다 뽀뽀까지 했었다며, 형은 드물게 모래의 애인으로서의 권리를 내세워 무릎으로 내 엉덩이를 걷어찼다.

이사랄 것도 없긴 했지만, 그래도 거처를 옮기는 날이라 이삿짐센터 알바도 비워 뒀었다. 다 같이 아침을 먹고, 백팩 하나에 짐을 전부 챙기고, 모래와 형과 함께 집을 나와 버스정류장에서 헤어졌다. 나는 선생님 댁으로 가기 위해 남쪽으로, 모래와 형은 ‘발리에서 생긴 일’로 출근하기 위해 서쪽으로 향했다.

옥탑방도, ‘발리에서 생긴 일’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만나러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그래도 이제는 마음을 먹고 만나러 가야 하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버스에 올라 멀어지는 거리 풍경을 바라보는데, 형과 모래와 떨어져 나 혼자서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이상했다. 이사를 간다기보다는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아주 긴 여행을.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