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골든 Golden
탈출은 내 예상보다 더 꼼꼼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모든 일이 우리가 직접적으로 아는 사람들을 피해 진행됐다.
서울까지 이동한 차량은 서핑 업체 형이 아는 사람에게 공수한 폐차 직전의 1톤 트럭이었다. 서울에 도착해 미리 약속한 장소에 우리가 차를 세워 두면 고속버스로 뒤따라온 차의 주인이 회수해 가도록 얘기가 되어 있었다.
그 후에는 군대에서 형의 사수였던 선배가 흥신소를 소개해 줬다. 여관에서 묵은 것은 처음 이틀뿐, 그 사무소를 통해 방도 바로 계약했다.
자기 쪽에서 먼저 연락하기 전에 찾으려 한다면, 그때는 더 강경한 반항, 예를 들면 자해까지도 불사할 수 있다는 암시가 담긴 편지를 남겨 두고 왔다지만, 그렇더라도 모래의 집에서 행적을 수소문할 확률은 무시할 수 없었다. 아니, 매우 높았다.
거기에 대비하려면 이쪽도 흥신소라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최대한 꼬리를 지우며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형의 사수의 고향 선배라는 흥신소 소장은 잘은 몰라도 얼핏 보기에는 그런 쪽 일을 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외모의 이미지로만 놓고 보자면, 서핑 업체 사장님 쪽이 훨씬 더 ‘흥신소 소장’처럼 보였다.
「통장에 있는 돈은 건드리지도 마세요. 그 돈은 저희가 그대로 인수하겠습니다. 저희야 뭐… 몇 번 세탁해서 꺼내면 되니까. 예금 액수만큼 현금 내드릴 테니까 무조건 현금만 사용하세요. 신용카드야 따로 말씀 안 드려도 사용 안 하시겠죠? 요즘은 일반인들도 영화 같은 걸 하도 봐서 그 정도 상식은 다 있더라구요.」
영화 몇 편 보고 와서 전문가인 척하며 배 놔라 감 놔라 하는 고객들 때문에 요즘 들어 일하기가 팍팍하다는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소장은 금고에서 형과 모래가 모아 놓은 예금만큼의 현금을 꺼내 왔었다.
형이 고등학교 졸업 후부터 입대 전까지 1년 정도를 안 쓰고 안 입고 모은 돈에 모래가 어릴 때부터 주변 어른들에게 받은 용돈을 모아 놓은 저축은 꽤 큰돈이었다.
「왜? 실물로 보니까 적은 거 같아요? 기분 나게 만 원짜리로 계산해서 드릴까?」
계속 긴장한 상태로 뻣뻣하게 앉아 있었던 우리를 향해 소장은 피식 웃어 보였다. 아무리 회사원처럼 말쑥한 정장을 입고 머리를 깔끔하게 정돈하고 있어도, 그럴 때는 역시 뒷세계의 일을 하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농담입니다, 농담. 5만 원짜리가 보관이 편해서 더 나아요.」
하지만 서랍 깊숙한 곳이나 장판 뒷면에 숨길 것도 없이 그 돈은 고스란히 방을 구하는 데에 들어갔다.
우리에게는 큰돈이었지만, 그 돈으로 서울에서 구할 수 있는 전셋집은 반지하나 옥탑 정도였다.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다는 점에서 반지하와 옥탑은 비등비등했지만, 그래도 해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옥탑이 더 낫다는 데에 우리는 의견을 모았다.
지하철역에서도 멀고, 버스정류장을 이용하려면 도중에 제법 가파른 계단까지 통과해야 했지만, 여기라면 최소 1~2년은 발각되지 않고 지낼 수 있을 거라는 소장님의 말에 우리는 안심했다.
이 탈출이 싱거운 반항으로 끝나 버리지 않을 거라는 보장.
지금 당장은 그거면 충분했다.
여윳돈이 없었기 때문에, 넓지 않은 방 한 칸짜리 옥탑을 채운 살림이라곤 옷을 넣어 둔 조립식 박스와 이불, 정말 꼭 필요한 주방 가재도구 몇 개, 그게 끝이었다. 덕분에 방이 넓어 보이는 효과가 있어 좋다는 게 모래의 감상이었다.
그렇게 이사를 마친 게 벌써 약 3주 전이었다.
치밀한 준비가 효과를 본 건지 아직까지는 별다른 위협의 낌새 없이 일상이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이사를 마치고 한 주가 다 지나기 전에 나는 이삿짐센터 알바를 하기 시작했고, 모래와 형, 두 사람은 미리부터 일자리가 정해져 있었다.
‘발리에서 생긴 일’.
임대료가 비싼 번화가 대신 주택가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그 카페는 이름 그대로 자유롭고 느긋한 남국의 바닷가를 떠올리게 하는 곳이었다. 우리에게 흥신소를 소개해 줬던 형의 사수가 카페의 사장님이었고, 형은 요리 보조, 모래는 홀 담당이었다.
저녁 장사까지 마치고 나면 사장님은 그날 남은 식재료를 나눠 줬고, 그럼 형이 연습 삼아 집에서 카페의 메뉴를 요리해 줬다.
이사 왔을 때부터 옥상 가장자리에 놓여 있었던 평상에 앉아 형이 만든 요리와 함께 맥주 한 캔씩 마시며 그날 있었던 일들에 대해 떠드는 것이 요즘 우리의 일과 중 하나였다.
우리는 젊다는 말로도 모자랄 만큼 아직 어렸고, 하루가 멀다고 전쟁처럼 싸워 대는 아래층 신혼부부의 소음이나 한여름이 되면 찜통처럼 돼 버릴 게 확실한 열악한 옥탑방 같은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꼬박 62개의 계단을 올라야 하는 과정은 험난해도, 이곳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야경은 그렇게 싸늘하거나 거만하지 않았다. 바다 멀리 떠 있는 오징어잡이 배들의 불빛 같기도 했고,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뭔가에서 해방된 듯한 자유로움과 막연한 걱정, 가슴의 괜한 들뜸과 쫓기는 듯한 불안. 그런 것들이 내 안에서 서로 휘감겨 조용히 흔들리는 날들이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누구였는데?”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한 내 이야기에 모래가 흥미를 드러내며 물었다.
“엄마 친구분의 동생인데… 어렸을 때 잠깐 내 그림 선생님 해 주셨었어.”
부모님과 연관된 사람이라는 말에 두 사람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곧 사라졌다.
“근데 그렇게 다시 만난 거야? 신기하다. 라디오 같은 데 사연으로 보내면 상품권 정도는 타겠어.”
자기 몫의 접시에 남은 마지막 한 입의 나시고랭을 스푼에 모아 담으면서 모래가 말했다. 분위기를 띄워 보려는 모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형의 표정은 아직도 살짝 경직되어 있었다.
“우리 집 일은 이모한테 들어서 알고 계시더라고.”
“…그래?”
그제야 형은 얼굴을 풀고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계속 홍콩에서 일하시다가 4년 전쯤 한국에 들어오셨대. 지금은 개인 갤러리에서 일하시고.”
“갤러리? 너한테 그림 가르쳐 주시다가 지금은 갤러리에서 일하시는 거면, 쭉 미술계에 몸담고 계셨었나 보다?”
마지막 한 입의 나시고랭을 야무지게 씹던 모래는 입 안의 음식물을 삼킨 뒤 말했다.
“그런가 봐. 지금 전시회 일정이 연달아 세 개 정도 잡혀 있어서 집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으시대. 이사하러 가서 보니까 집이 진짜 엉망이긴 하더라.”
내용물이 3분의 1쯤 남은 맥주 캔을 손안에서 가볍게 빙빙 돌리면서 대답했다. 오늘은 평소보다 맥주를 조금 더 마셨다. 그래서 그런지 바람이 쾌적한데도 볼에서 약간의 열기가 느껴졌다.
“할 거야?”
내가 선생님의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하는 듯한 모래의 질문이었다.
“아직 잘 모르겠어.”
“그분 얼굴 보는 게 힘들면 굳이 할 필요 없어.”
이건 괜히 과거의 상처를 들쑤시는 꼴이 될까 봐 걱정하는 형의 말.
하지만 선생님의 얼굴을 본다고 해서 힘들다거나 그런 건 없었다. 오히려 선생님을 알아보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솔직한 감정은 반가움이었다. 선생님의 얼굴이 괴로운 기억과 연결되지는 않았다.
“서이현이 정리정돈은 거의 신이잖아. 그분이 네 상황 알고 일부러 신경 써 주느라 그런 것도 아니고, 마침 필요해서 사람 찾던 중에 네가 적격이라 제안한 건데, 폐 끼치는 거 아닐까 걱정하는 거면 그런 걱정은 하지 마. 그게 그분한테 더 실례다.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해.”
식사를 완전히 마친 모래는 그렇게 말한 뒤 아껴 두었던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어, 그래야지.”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내 마음이 어디를 향하는지, 그 행적을 집어내기란 쉽지 않았다.
“모래도 나도 일하고 있고, 당분간 돈은 그렇게 급한 거 아니니까 편하게 생각해서 결정해.”
“응.”
형은 모래보다는 조금 조심스러운 입장인 것 같았다. 상처에 대해 사람들이 반응하고 대처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니까….
다음 날은 7시까지 광진구로 가야 했다. 내일을 위해 그만 자리를 접을 시간이었다. 아래층 신혼부부가 고성을 지르며 싸우기 전에 얼른 깊은 잠에 들어야 했다.
웬만한 성인 남성이 힘을 줘서 몇 번 세게 흔들면 떨어져 나갈 것 같은(실제로 그렇게 될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렇게 보이는) 부실한 현관문을 열면, 두 사람 정도가 나란히 누워 잘 수 있을 정도의 협소한 부엌 공간이 나오고, 양쪽으로 열 수 있는 미닫이문 너머가 방이었다.
귀농해서 지금은 전라도 어디에 살고 있다는 집주인을 대신해 우리에게 이 방을 보여 줬던 흥신소 소장은 ‘나름 분리형 원룸’이라며 강조했었다.
모래와 형은 문 너머에, 나는 부엌에. 우리는 그렇게 나누어 요를 깔았다.
방에 자리가 없는 것도 아닌데 굳이 왜 부엌에서 자겠다는 거냐고, 자기들을 쓰레기로 만들려는 거냐며 두 사람은 강경하게 반대했었지만, 그냥 그 정도는 내가 지켜 주고 싶었다.
아무리 내 앞에서 연인 행세를 하지 않는 그들이라도 마냥 친구처럼 편안하기만 한 모습이 그들 관계의 전부이지 않음을 내가 알았다.
“이현아, 그냥 방에서 같이 자자. 누나 쿨하다?”
열린 미닫이문의 틀에 기대서서 부엌에 이부자리 펴는 나를 물끄러미 보던 모래가 오늘도 같은 대사를 던졌다.
나는 보송보송한 새 요 위에 앉아 베개를 끌어안고, 일부러 조금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누나.”
“응?”
“나도 쿨해. 그냥 여기서 잘게.”
모래가 픽 웃었다. 그다음엔 애정이 담긴 눈으로 따뜻하게 웃었다. 그리고 잘 자라는 인사와 함께 문 너머로 사라졌다.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생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따뜻한 계절이니 그렇다 쳐도 가을이 오기만 해도 부실한 현관문으로 냉기가 스며들 것이다. 두 사람이 계속 나에게 미안해하며 마음 쓰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들의 탈출이 단지 꼭 사랑의 도피만이 아닌, 자기답게 살아가기 위한 일종의 투쟁임을 알긴 하지만, 그래도 어렵게 손에 넣은 자유,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잡고도 여전히 스킨십조차 자유롭게 나누지 못하는 건 내가 싫었다.
여기까지는 그들이 제안하는 대로 따라왔지만, 앞으로의 내 생활에 대해서는 스스로 대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깍지 낀 손을 머리 뒤에 대고 천장을 향해 누우니, 초콜릿처럼 사각형으로 조각조각 나누어진 틀마다 불투명한 유리가 끼워진 미닫이문 너머에서 형과 모래가 조용조용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용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의 질문에 어떻게 할지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지만, 이런 일 저런 일 가릴 때가 아니라는 걸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우선은 뭐라도 해야 했다.
자려고 누워도, 눈을 감아도, 파도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우리가, 내가, 멀리까지 와 있음을 실감했다.
■ ■ ■
매일 혼자 그림을 그리다, 초등학교 4학년쯤 미술학원에 다녀 보고 싶어졌다. 부모님은 바로 학원에 등록해 주셨다. 그런데 막상 다녀 보니 별로 재미가 없었다.
내가 그리고 싶은 대상들을 원하는 대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었던 건데, 손바닥에 물감을 묻혀 스케치북에 찍으며 놀게 하거나 물통에 담긴 물과 붓을 가지고 아이들끼리 장난치다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일주일 만에 이제 안 가고 싶다고 선언했다. 부모님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럼 안 가도 된다고 하셨다. 물론 이미 지불한 한 달 치의 수업료 중 남은 3주분을 되돌려 받을 수는 없었다. 넉넉하지 않았던 우리 집 형편에 부모님 입장에서 그게 얼마나 너그러운 조치였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었다.
그리고 집으로 와서 나와 그림을 그려 주는 선생님이 생겼다.
내가 보는 세상을 도화지로 옮길 수 있는 방법뿐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눈으로 세계를 보는 방법을 알려 준 분이기도 했다.
선생님과의 수업은 흥미진진한 모험 같았다.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시시한 주변 환경들이 크리스마스에 주고받는 입체 카드처럼 생동감 있게 바뀌었다.
나무 한 그루가 아닌 흙 밖으로 튀어나온 뒤틀린 나무의 뿌리를 그렸고, 집 한 채가 아닌 집의 벽에 드리워진 옆집의 그림자를 그렸다. 세계는 그리고 싶은 것투성이였고, 오늘 봤던 것들도 내일이면 새로워져 있었다.
선생님과는 그렇게 1년 정도 그림을 그렸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아마 대학을 졸업하시고 홍콩으로 떠나시면서 수업을 그만두셨던 게 아닌가 싶었다. 그게 벌써 10년 전 일들이었다.
형과 모래는 혹시라도 선생님을 볼 때마다 내가 과거를 건드리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 같았지만, 선생님을 볼 때 내가 떠올리는 과거는 더 먼 과거였다. 세계가 모험과 신비로 가득했던.
“아, 배에 뭐 좀 들어가고 나니까 살겠다.”
직사각형의 도시락 속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열두 개의 초밥을 깨끗이 비운 선생님은 나무젓가락을 내려놓으면서 의자 등받이에 느슨하게 등을 기댔다.
“일이 자꾸 터져서 3시쯤 김밥 한 줄 먹고 여태 굶었거든.”
처음 먹어 보는 식감의 초밥을 입 안 가득 넣고 우물거리는 나를 향해 선생님은 민망한 듯 웃어 보이며 설명했다.
“넌 천천히 먹어. 파는 음식밖에 못 줘서 미안하네.”
“아니에요. 저 이렇게 맛있는 초밥 처음 먹어 봤어요.”
선생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이 집을 드나든 게 오늘로 다섯 번째였다. 구두를 짝짝이로 신고 나가도 모를 정도로 바쁘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는지, 오늘에서야 나는 선생님의 얼굴을 처음 마주할 수 있었다.
지금도 완전히 퇴근을 하신 게 아니었다. 집에 들러 가지고 가야 할 자료가 있어 그 김에 저녁도 해결하신 거라, 식사 후에는 다시 갤러리에 나가 보셔야 했다. 벌써 11시가 다 돼 가는 시간인데.
“대학 진학은… 안 한 거야?”
생수 뚜껑을 비틀어 따면서 선생님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네.”
“그림은? 계속 그리고?”
“아뇨….”
처음 선생님의 얼굴을 알아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반가움이었지만, 바로 그 뒤를 이은 것은 그림을 그리지 않고 있다는 죄송함이었다.
선생님에게서 배웠던 건 테크닉보다도 그림을 그릴 때의 ‘시선’ 자체였다. 새로운 세계가 열린 듯했던 그 시절의 흥분과 순수한 몰입이, 그 감각이 아직 내 몸에 희미하게 남아 있었던 만큼 죄송한 마음도 컸다. 저절로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죄송해요.”
“이현아, 그러지 마. 죄송할 게 뭐 있어? 너 요즘 어떻게 지내나 싶어서 물어본 거야. 나도 붓 놓은 지 꽤 됐는데, 뭐.”
정말로 별 의미 없다는 듯 가벼운 어투로 그렇게 말한 선생님은 생수통을 기울여 물을 마셨다.
“아깝네요. 저 선생님 그림 좋아했었는데.”
“나도 네 그림 좋아했었어.”
이번에는 나를 보면서 조금 짓궂게 웃으셨다. 멋쩍음에 나도 따라 웃었다.
“살다 보면 그렇잖아. 상황도 달라지고, 상황에 따라서 사람도 달라지고. 내 경우엔 억지로 그만둔 것도 아니야. 그땐 다 지겨워서 그냥 새로운 상황에 나를 던져 버리고 싶더라. 하나부터 열까지 다 새로운 곳 있잖아. 갤러리에서 일해 보니까 적성에도 맞고 보람도 있어서 그대로 정착한 거지. 지금은 아주 만족해. 다른 예체능 계열도 마찬가지지만, 그림도 정말 재능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나 예술가로 인정받지, 나머지는 예술의 언저리에서 뼈 빠지게 노만 젓거나, 예술 한다는 겉멋으로 기분이나 내고 다니거나… 뭐 그렇게 되기 쉽잖아? 내가 계속 그려 봤자 개인 돈으로 전시회 열고 지인들이 구입해 주는 정도의 작가였을 거야. 후회 없어.”
선생님의 말은 뒷맛이 가벼웠다. 진심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후회와 미련이 없다고, 그렇게 깔끔하게 정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 두 개 정도 남긴 초밥에 무의미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지금 있는 갤러리가 한창 크는 중이거든. 처음 몇 년은 기반 만든다고 고생만 하고 실적은 없고… 그래서 심리적으로 좀 힘들었는데, 이제 좀 막 돌아가기 시작하니까 몸은 힘들어도 재밌어 죽겠다. 여기도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하는 건 똑같아. 앞으로 전시회 일정 세 개가 더 남아 있어서 다음 달 말까지는 계속 이런 식으로 바쁠 거야. 너 만나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집에 들어와서도 스트레스였을 거야.”
상상만 해도 끔찍한지 선생님은 세련되게 커트된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었다.
“별로 하는 것도 없는데요.”
“집에 왔을 때 싹 정리돼 있는 상태.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상태. 그거면 아주아주 충분해.”
요리와 세탁은 할 필요가 없었다. 요리는 할 줄도 몰랐고. 내 일은 정리정돈과 청소가 전부였다. 넓은 집인 데다 크고 작은 장식품과 그림이 많은 만큼 시간이 어느 정도 소요되기는 했지만 힘들고 복잡한 일은 전혀 없었다. 이런 정도의 수고로움으로 선생님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고 있다면 다행이었다.
“지금 추진 중인 전시회들만 끝나면 느긋하게 얘기도 좀 나누자. 거기도 가 보고 싶더라. 발리에서 생긴 일?”
혹시라도 누군가가 선생님을 통해 우리를 찾으려 할 경우를 대비해, 선생님에게도 우리들의 상황을 대강 설명해 둔 상태였다.
“네, 다음에 꼭 같이 가요. 재밌어요.”
내가 남긴 두 개의 초밥을 하나씩 나누어 먹고 우리는 식탁 앞에서 일어섰다.
“갤러리 들어가는 길에 데려다줄게. 같이 타고 가자.”
“아니에요. 저 이거 정리하고 갈 테니까 들어가 보세요. 버스 타고 가면 돼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선생님은 식탁 너머로 내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같이 정리하고 내 차 타고 가. 버스 시간도 아슬아슬한데.”
뭐라 거절하기도 전에, 이번엔 식탁 위에 올려 두었던 선생님의 두 개의 핸드폰 중 하나가 요란하게 울어 댔다.
“미안, 시끄럽지? 혹시 중요한 전화 놓칠까 봐 벨을 크게 해 놓거든. 잠시만.”
선생님이 살짝 등을 돌리고 서서 통화를 연결하는 동안, 나는 서둘러 식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회용 용기들이라 치우는 것도 간단했다.
“어. 왜. 윤 작가가? …하… 그 아저씬 왜 맨날 그런 쓸데없는 거에 집착한대냐. 유니야, 네가 좀… 아니다, 너 지금 디스플레이하고 있겠구나. 알았어, 윤 작가하고는 내가 통화해 볼 테니까 넌 그냥 이후부터 전화 무시하고 디스플레이에 집중해…. 응, 내가 책임질게.”
그림을 그만두기 전에도 미술계의 생리나 화랑이 돌아가는 구조 같은 것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선생님의 생활 패턴을 보자면 결코 만만한 곳은 아닌 듯했다.
얼핏 듣기에도 갤러리에 또 다른 문제가 터진 듯했다. 그나마 식사를 마치신 후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도시락 용기를 물에 헹궜다.
“이현아, 어쩌지? 사무실에 일이 생겨서 좀 서둘러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은데. 내가 먼저 데려다준다고 해 놓고 미안하네. 대신 택시 타고 가. 응?”
“아니에요. 정리도 다 끝났고, 지금 가면 버스 탈 수 있어요.”
싱크대 앞에서 씻어 낸 용기의 물기를 털면서 고개를 돌려 선생님 쪽을 쳐다봤다. 습관인 듯, 한쪽 손을 허리에 짚고 다른 손으로 눈썹을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잘근거리고 있던 선생님의 시선이 순간 방향을 바꿔 나를 향했다. 희미한 기대감이 비치는 얼굴이었다.
“너, 내일 이삿짐센터 일 없다고 했지?”
물기를 턴 용기를 손에 들고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이 성큼성큼 다가와 물에 젖은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이현아, 나 좀 살려 줘라. 아니, 우리 애들 좀 살려 줘라.”
■ ■ ■
갤러리 팬텀(Phantom).
다소 거창한 이름의 갤러리는 한옥마을 뒤쪽, 북악산으로 이어진 오르막 중턱에 위치하고 있었다. 부지가 아주 넓은 편은 아니었지만, 주변의 아기자기한 다른 건물들에 비하면 꽤 규모가 있는 2층 건물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선생님에게 대강의 상황을 전해 듣긴 했고, 나에게 맡겨질 일들은 특별한 노하우가 필요 없는 단순한 작업들이라 전혀 걱정할 것 없다고 하시긴 했지만, 서늘한 이미지를 풍기는 육중한 정문을 열고 들어가는 선생님의 뒤를 따르면서도, 과연 외부인에 문외한인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직원들이 지시하는 대로만 해 주면 돼. 내가 너 10년을 못 봤지만 우리 집 관리하는 실력만 봐도 답 나와. 초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단순 노동들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응?”
출입구 바로 앞, 천장이 높은 아담한 홀을 지나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면서 선생님은 내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폭이 넓고 거의 흰색에 가까운 상앗빛 자재로 만들어진 우아한 계단이었다. 밟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만큼.
“실장님! 윤 작가님 지금….”
“윤 작가는 내가 지금부터 처리할게. 여기. 내가 데려온 선물.”
“…….”
선생님은 나를 앞에 세우고 뒤에서 내 양어깨를 짚으며 앞으로 한 걸음 정도를 밀어냈다. 갑작스럽게 가까운 거리에서 나와 마주하게 된 상대방은 말없이 나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사태 파악이 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나 역시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2층으로 들어서자마자 가벽으로 나누어진 여러 개의 공간이 나타났고, 작은 미로처럼 서로 다른 방향으로 꺾어진 코너 너머로 언뜻언뜻 벽에 걸린 작품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병적일 정도로 화이트톤 일색의 공간이었다. 그림이 걸린 가벽은 그렇다 쳐도 바닥마저 계단과 같은 옅은 상앗빛이었다. 가벽 위로 공간을 두고 높이 띄워진 구조적인 천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하얀 공간 안에서, 내 눈앞에 서 있는 사람만이 온통 까만색이었다.
일부러 더욱 검게 보이도록 염색한 것 같은 새까만 단발머리에, 어깨를 부풀린 블라우스, 그리고 블라우스와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트레이닝팬츠, 신고 있는 슬리퍼, 과장된 프레임의 뿔테 안경까지. 모든 게 검은색이었다.
자연스러운 자세에서 상대의 정수리가 내려다보였다. 아담한 키에 작은 체구였지만, 전해지는 이미지만큼은 강렬했다. 렌즈 너머로 나를 보는 눈동자마저 테두리가 깨끗한 검은색이었다. 적대적이거나 호의적인 필터가 없는, 있는 그대로의 시선이 나의 정체에 대해 묻고 있었다.
“이사한 집 봐주고 있는 친구인데, 전에 내가 말했던. 오늘만 좀 갤러리 도와 달라고 부탁했어. 뭐든지 다 잘하니까 도움이 될 거야.”
그녀의 무언의 질문에 대한 선생님의 답이었다. 그녀가 나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한 사람이라도 더 있는 게 낫긴 하겠죠. 실장님은 윤 작가님 좀 빨리 어떻게 해 주세요. 제 전화 지금 터지겠어요.”
“알았어, 지금 바로 가서 해결할게. 주한이는 어디 갔어?”
“C구역 작품 가지러 내려갔어요.”
그것으로 끝이었다. 까만 단발머리의 그녀는 좀 전까지 작업을 하고 있었던 장소로 돌아갔고, 선생님은 윤 작가라는 분과의 트러블을 해결하기 위해 서둘러 갤러리를 떠났다. 아마도 선생님은 나의 사회성을 과신하고 계신 것 같았다.
임시로 설치해 둔 것 같은 작업대에서 가위질을 하던 그녀가 내 쪽을 힐끔 쳐다보며 빠르게 말했다.
“만나자마자 죄송한데 지금 좀 바빠서 바로 부탁부터 드릴게요. 지하실로 가서 작품 옮기는 것 좀 도와주시겠어요? 저기 문 열고 계단으로 내려가시면 창고에서 낑낑거리고 있는 장작개비 하나 있을 거예요. 걔한테 물어보시고 도와주심 돼요.”
낯설다고 쭈뼛거리고 있을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알려 준 대로 ‘STAFF ONLY’라는 안내판이 붙은 흰색 문을 열고 들어갔다. 좁은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지하에 바로 창고가 나왔다.
보안 장치가 설치된 두꺼운 강철문이 활짝 열려 있어서, 그녀가 일러 준 사람을 찾기 위해 헤맬 필요도 없었다.
위층과 마찬가지로 온통 흰색으로 점철된 넓은 공간에서, 그녀와 마찬가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을 두른 남자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나와 비슷하거나 나보다 좀 더 큰 키에, 마른 몸과 유난히 긴 팔다리를 가진 남자가 내게서 등을 돌린 채 정리된 그림들 사이를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펑크록 밴드들이 신을 법한, 끈이 달린 묵직한 워커가 인상적이었다.
“저….”
“으악! 씨발, 깜짝이야!”
계단을 내려오면서 충분히 인기척을 냈다고 생각했는데, 작업에 몰두하고 있어 미처 듣지 못했는지, 조심스럽게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헛발질을 하기까지 했다.
뒤를 돌아본 남자는 차림새만큼이나 개성 있는 얼굴이었다. 잘생겼다, 못생겼다 그런 구분이 어려운, 독특한 분위기를 주는 마스크였다. 눈을 찌를 듯한 길이에 완벽하게 일자로 다듬어진 앞머리가 개성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한 번 보고 나면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위층에서 만났던 그녀도 얼굴에만 두세 개의 피어스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쪽은 액세서리의 개수가 더 많았다. 드러난 양쪽 귀에는 스프링 노트처럼 다양한 크기의 링귀걸이들이 빼곡하게 매달려 있었고, 눈썹과 코, 입술에도 피어스가 장식되어 있었다. 아랫입술의 중앙을 관통하는 링 형태의 피어스와 눈썹의 피어스를 연결하는 얇은 체인이 시선을 끌었다.
위층의 그녀도 눈앞의 이 사람도,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갤러리의 직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상당히 유사했다.
사방이 모두 새하얀 공간 안에서, 두 사람은 사인펜으로 테두리를 그리기라도 한 것처럼 선명한 존재감을 뿜고 있었다.
작업을 멈추고 파일을 든 손을 양 허리에 짚은 채 나를 보고 있던 남자의 표정이 조금 험악해졌다. 나의 자기소개를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선생… 한 실장님이 보내셔서 왔는데요. 위에 계시던 직원분이 지하실 내려가서 도와 드리라고.”
“아… 그래요? 난 또… 여기 지하에 귀신 나온다고 우리 대표님이 맨날 그래가지구요.”
좀 전에 너무 놀랐던 게 겸연쩍었는지, 남자는 입술의 피어스를 만지작거리면서 그렇게 말했다.
“위층으로 올려야 하는 그림들 골라내는 중이거든요. 제가 리스트에 있는 그림 찾으면 그쪽이 여기로 옮겨 주세요.”
입구 쪽에 따로 모여 있는 그림들을 손으로 가리킨 남자는 안쪽 공간으로 앞장섰다.
남자가 리스트를 확인하고 그림이 있는 구역을 파악한다. A-1,2,3… B-1,2,3… 이런 식으로 구역이 체계적으로 잘 분리되어 있어 그림을 찾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시간과 노동력 싸움이었다.
남자가 그림을 찾으면, 내가 그림을 입구로 옮긴다. 그동안에 남자는 다음 그림을 찾아 둔다. 그런 식이었다.
“근데, 한 실장님하고는 어떤 사이예요? 이 야밤에 어디 알바 사이트 같은 데서 사람 구해 오시진 않았을 거고.”
작업을 하는 동안 잡담이 전혀 없었는데, 옮겨 놓은 그림을 다시 한번 체크하면서 그가 처음으로 나에게 사적인 질문을 던졌다.
“새로 이사하신 집, 가사도우미예요. 오늘 갤러리가 바쁘다고 도와 달라고 하셔서요.”
“아, 이번에 새로 고용하셨다던 가사도우미….”
내 얼굴을 한 번 더 빤히 보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어린 분인지는 몰랐는데. 이름이 뭐예요? 하룻밤 일할 거라도 서로 이름은 알아야죠. 난 권주한이에요.”
“서이현입니다.”
그는 그림 앞에 무릎을 꿇은 채로, 나는 그림이 쓰러지지 않도록 캔버스의 귀퉁이를 붙잡은 채로, 한참이나 뒤늦은 악수를 나눴다.
“하루 같이 일하고 말 사이인데, 그냥 서로 주한 씨, 이현 씨 하죠.”
그의 제안에 동의하는 뜻으로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이제 그림들을 위층으로 옮겨야 했다. 총 스물네 점의 작품이었고, 120호 이상은 되어 보이는 대형 작품도 섞여 있었다. 내일부터 전시되고 또 판매해야 할 작품이자 상품들이었다. 소중히 다루기 위해 아주 작은 크기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함께 운반하기로 했다.
“나도 나지만, 그쪽도 못지않게 비실비실해 보이는데…. 얘네들이 꽤 무겁거든요. 절대 떨어뜨리면 안 되니까 긴장해 주세요. 꼭. 떨어뜨렸다가는 우리 대표님이 그쪽, 이현 씨 살려 두지 않을 거예요.”
첫 번째 작품을 옮기기 위해 우리는 캔버스 양쪽에 위치를 잡았다. 대표라는 사람에게서 혹시라도 받게 될지 모를 꾸지람이라도 상상하는지, 주한 씨는 나를 향해 가볍게 경고하면서도 자신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주한 씨가 앞서 계단을 오르고 내가 조심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 전시장은 2층이라 지하에서부터 이어진 계단의 수가 적지 않았다. 1층에서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참에서 주한 씨는 잠시 멈추자는 신호를 보내 왔다.
“뭐… 운동해요? 보기보다 힘이… 괘, 괜찮네.”
“이삿짐센터 알바를 해서요.”
시선이 다시금 나를 살폈다. 고된 육체노동의 흔적이라도 찾는 듯이.
우리 둘은 겉보기로는 체격에 큰 차이가 없었지만, 무거운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은 요즘 내가 거의 매일 하는 일이었다. 요령이 붙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무거우시면 다음엔 제가 위에서 들까요? 뒤로 걸어야 해서 더 힘드신 것 같은데.”
“아뇨. 무겁긴요. 오늘 앞에… 벌써 서른 점 정도를 옮겨서 그렇지 원래는… 이러지 않거든요. 다시 가죠.”
주한 씨는 아직 불규칙한 호흡을 가다듬으며, 관절이 유난히 두드러져 날카로워 보이는 마르고 긴 팔로 그림을 다시 들어 올렸다.
그리고 2층에 도착해 그림을 조심스레 내려놓자마자 바닥에 드러누웠다.
“아악, 더는 못 해! 오늘 나 혼자 서른 점 옮겼다고! 다리 후달려!”
그가 고함을 지르며 누운 채로 바닥을 내리쳤지만, 단발머리의 그녀는 그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우리가 방금 옮겨 놓은 그림의 포장을 시원하게 벗겨 내기 시작했다.
층층이 쌓인 오래된 장서를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표현한 작품이었다. 단면의 질감으로 볼 때 물감만으로 작업한 것 같지는 않았다.
“저쪽. 1번이라고 적혀 있는 종이 있죠? 그 벽에 걸어야 하거든요. 같이 들죠.”
그녀는 체구가 그리 큰 편이 아니었지만, 이곳의 돌아가는 사정을 모두 훤히 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 캔버스의 크기를 보고 자신이 들 수 있는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정도의 일로 실수할 일은 없어 보였다.
역시나 그녀와 둘이서 세로 높이가 내 키와 비슷한 작품을 들어 올리는 데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반장님 말대로 이런 건 어느 정도까지는 힘이 아니라 요령의 문제이긴 했다.
“백유니… 역시 괴력…. B구역은 또 언제 혼자 다 걸었어? 그냥 놔두라니까.”
여전히 천장을 향해 누운 주한 씨는 고개만 돌려 그림 거는 우리를 지켜봤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도착했을 때 그녀가 작업을 하고 있었던 옆 구역의 어수선함이 깨끗이 정리돼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했어. 나머지는 이따 둘이 해 줘. 난 이제 B구역 작품들 캡션 맞춰야 해.”
“오케이.”
이제 더는 못 한다고 선포했던 주한 씨는 충전이 어느 정도 됐는지 벌떡 일어나 임시 작업대 위의 이온 음료 하나를 집어 뚜껑을 비틀었다. 별로 목이 마르지는 않았지만, 나에게도 한 병을 권하기에 두어 모금 마셨다.
“근데 너, 이현 씨하고 인사는 했냐? 안 했지? 또 싸가지 없게 막 보자마자 이거 하세요, 저거 하세요, 그랬지?”
“일하러 만난 사이에 일하자고 한 것도 문제냐?”
작품의 제목, 사용한 재료, 제작 연도 등의 정보가 적힌 캡션을 자신만의 순서대로 작업대 위에 늘어놓던 그녀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잠시 손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내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살짝 미안해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백유니예요.”
“서이현입니다.”
이것은 연필이고, 저것은 책상입니다.
처음 영어를 배울 때 예시문으로 자주 등장하곤 했던 문장처럼 밋밋한 우리의 인사를 지켜보던 주한 씨가 맞은편에서 어깨까지 들썩거리며 킥킥댔다.
“낯가리는 사람들끼리 그러고 있으니까 볼 만하다. 서로 유니 씨, 이현 씨 해. 나하고도 그러기로 했어.”
나를 두고 낯가림이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았다. 누가 봐도 붙임성이 있어 보이진 않을 거다. 그 정도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주한 씨의 평가는 의외였다.
이렇게 누군가가 힘주어 또박또박 써 놓은 고딕체의 글씨 같은 인상을 가진 그녀도 나처럼 사람들 틈에서 혼자만 겉돌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을까?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닥쳐. 난 마음만 먹으면 사교의 신으로 변신할 수 있으니까.”
“그렇긴 하지. 그게 그냥 신이 아니라 머신(Machine)이어서 그렇지. 너 세일즈할 때 완전 영혼 없잖아.”
유니 씨는 캡션을 향해 시선을 떨어뜨리고 있기도 했고, 두 사람은 이야기를 하느라 눈치채지 못했지만, 계단을 향해 서 있었던 나는 새로운 인기척을 모를 수가 없었다.
가볍게 날리는 듯 가느다란 머리카락부터 보이기 시작해 뚜렷하고 깊숙한 이목구비의 얼굴이 드러났고, 세련된 슈트를 차려입은 남자가 금세 2층 로비로 올라섰다. 굉장히… 굉장히 크고 화려한 남자였다.
“세일즈에 영혼 실어서 뭐 하게? 영혼은 작가들이 작품에 싣는 거고.”
유니 씨는 마지막 캡션을 제자리에 놓으며 신랄하게 말했다. 커다란 남자는 그사이 우리가 모여 있는 작업대 바로 앞까지 와 있었다.
“옳은 말씀.”
웃음기 띤 얼굴로 남자가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대표님!”
남자를 그렇게 부른 유니 씨의 얼굴과 목소리에 반가움이 가득했다.
아, 저 사람이 주한 씨가 말하던 갤러리 대표구나. 지하 수장고에 귀신이 나온다고 해서 주한 씨를 겁먹게 했던.
키가 아주 컸다. 체격도 훌륭했지만, 미끈한 체형이라 위압적일 정도로 큰 키와 넓은 어깨에도 불구하고 전혀 둔해 보이지 않았다. 얼핏 외국인인가 싶었던 이국적인 얼굴에는 가까이에서 보니 동양적인 느낌이 살짝 섞여 있었다.
“아, 진짜 왜 이제 오셨어요?”
“알잖아, 그 두 사람. 예약 핑계로 놔주질 않더라고.”
아주 커다랗고, 아주 잘생긴 남자였다. 혼혈이 아니라면 말이 안 될 만큼 이국적인 생김새 탓에 화려하고 특별한 느낌이 있었다. 그것이 남자를 주변과 구별 짓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를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이 바라보는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사람이란 이런 거구나 싶은….
태어나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사람이 아마 골든 알파가 아닐까?
“그래서, 예약은 따내셨어요?”
유니 씨는 예약을 못 땄다는 답변이 돌아오면 당장 남자의 멱살이라도 잡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세 점 땄지. 여기 예약 목록이니까 솔드 아웃 카드 붙여 주세요.”
남자에게서 목록을 건네받은 유니 씨는 그 작품들의 판매수익이 곧장 자기에게 돌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기뻐하면서, 각종 영수증과 자료들로 원래의 두께보다 두 배 정도는 늘어난 것 같은 수첩에 남자에게서 건네받은 메모지를 추가로 끼워 넣었다.
“저희 둘이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아직 C구역 그림도 다 못 옮겼어요. 윤 작가님은 팸플릿 순서 마음에 안 든다고 난리 치시구요.”
“그래그래, 들었어. 고생이 많아. 윤 작가는 한 실장이 맡아 줄 테니까 우린 여기 해치우자고. 음… 세 시간 안에 끝내자.”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 남자의 시선이 문득 나를 향했다. 중요한 얘기는 모두 끝났고, 아까부터 여기에 있던 외부인의 정체가 뭔지 이젠 그걸 좀 알아야겠다는 듯한 시선이었다.
처음 접하는 신기한 종족의 등장에 힐끔힐끔 그를 훔쳐보고 있었던 나의 시선은 반대로 그의 목덜미 언저리로 내려갔다.
“좀 전에 실장님이 데려오셨어요. 오늘만 도와 달라고. 이현 씨, 우리 대표님이세요.”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지 않은데도 견디기 힘든 시선이었다. 자신의 시선을 내가 어떻게 느낄지 전혀 고려하지 않는. 원하는 만큼 원하는 각도에서 실컷 탐색하는 시선이 전신을 갑갑하게 죄어 왔다.
“안녕하세요. 서이현입니다.”
위축되어 나오지 않으려 하는 목소리를 억지로 끌어내 인사했다.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었지만, 새로운 관계 앞에 곤란함을 느끼는 편이었지, 위축되는 것과는 달랐다. 하지만 지금은 움츠러들고 있었다.
남자가 알파라는 가정하에, 이 낯선 수축이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알파의 페로몬 때문인지, 그가 쌓아 올려 온 경험과 자신감에 바탕을 둔 인간으로서의 존재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베타가 알파나 오메가의 페로몬을 감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가 아직 그 어촌 마을에 있었다면, 이 정도로 뛰어난 외모와 위압감을 가진 사람이라도 곧장 상대를 알파로 추측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주한 씨에게 받았던 이온 음료 생각이 간절했다. 손안에 쥐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열어 마실 수는 없었다.
“한 실장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죠?”
손아귀에 쥐고 천천히 힘을 주어 조르는 것 같았던 시선 끝에 던져진 질문이었다.
주한 씨나 유니 씨에게 주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무심하고 경직된 목소리였다. 심지어 감추려 하지 않는 약간의 적대감까지 느껴졌다.
“실장님 댁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고 있습니다.”
시선 끝에 겨우 걸린 남자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아마도 내가 밝힌 소속이 못마땅한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 질문은 거기까지였다.
나에게서 시선을 돌린 남자는 재킷을 벗어 간이 작업대 앞 의자에 걸쳐 놓았다. 셔츠의 소매를 걷는 동안, 유니 씨에게서 현재까지의 진행 상황을 간략히 보고받았다. 남자와 주한 씨가 작품의 운반을 맡고, 나는 2층에서 유니 씨를 돕는 것으로 담당이 바뀌었다.
남자가 주한 씨와 함께 계단으로 사라지고 나자, 수축됐던 분위기가 이완되면서 산소가 충분하게 공급되는 느낌이었다. 어깨의 높이가 낮아지는 것을 자각하고 근육마저 경직되어 있었음을 깨달았다.
이온 음료의 절반을 들이켜고 나자, 유니 씨가 나를 향해 두꺼운 양면테이프를 내밀었다.
“낯가리는 사람끼리 잘해 볼까요?”
작업은 순조로웠다. B구역의 작품 옆에 캡션을 전부 달고, 지하실에서 옮겨 오는 족족 C구역에 작품을 걸었다. 그런 식으로 D구역까지 디스플레이를 마치고 나자, 관람실 바닥에는 온갖 다양한 쓰레기들이 뒹굴고 있었다. 그들이 내일 내빈들을 맞이하기 위해 다른 준비를 하는 동안 내가 뒷정리를 맡았다.
1, 2층이 모두 그럴싸한 모습을 갖췄을 때쯤 선생님이 야식을 가지고 돌아오셨다. 곧 해가 떠오를 시간이라 야식이라기보다는 이른 아침 식사에 가까웠지만.
1층 안쪽의 사무실, 커다란 테이블에 샌드위치와 커피를 놓고 모두 모였다. 어떤 샌드위치를 누가 먹을 것인지를 두고 다들 떠들썩했다.
이 갤러리 안에서 유일한 나의 지인인 선생님이 함께한 자리임에도, 좀 전보다 더 편안한 감각이 없었다. 아마도 다른 사람의 몇 배에 달하는 존재감을 가지고 말하고 움직이면서, 나를 이 공간에서 배척하는 남자 때문일 것이다.
그런 사람이 실재했다. 누군가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말을 걸지 않는 것만으로, 그 남자는 나에게… 마치 내가 유리벽 안에 갇혀 혼자 격리되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할 수 있었다.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버석거리는 불편한 거리감을 계속해서 나에게 전달해 오고 있었다.
“실장님, 이현 씨 일 잘해요. 권주한 처음 왔을 때하고 비교하면 경력자라고 해도 믿겠어요.”
빈말을 절대 하지 않을 것 같은 유니 씨의 칭찬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백유니, 넌 뭐 올챙이 시절 없었냐?”
“어, 난 처음부터 개구리였어. 맞죠, 대표님?”
“음, 유니는 올챙이 시절 같은 거 없었지. 그래서 내가 훔쳐 왔잖아.”
아보카도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면서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직원들에게는 자상한 보스였다.
다섯 시간에 가까운 노동으로 인해 남자의 모습은 처음 2층 홀에 나타났을 때보다 상당히 흐트러져 있었다. 유난히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카락은 처음처럼 고정되어 있지 못하고 계속 흘러내렸다. 셔츠와 팬츠는 주름투성이였고, 눈두덩이와 뺨에는 피로의 흔적이 역력했다.
그렇다고 해서 초라해 보이지는 않았다. 조금 피곤해 보일 뿐. 그래서 조금 예민해 보이고, 조금 사나워 보일 뿐.
“고마워, 이현아. 너 아니었으면 우리 여기서 밤새고 근처 호텔에서 씻고 바로 오프닝 했을지도 몰라. 너 못 만났으면 나 여러 가지로 어쩔 뻔했니.”
옆자리의 선생님이 내 어깨에 관자놀이를 기대고 우는 시늉을 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맞은편에서 보내오는 남자의 시선이 따가웠다.
“피곤하지? 샌드위치는 가져가서 집에서 먹을래?”
정신적 긴장감 때문인지 취침 시간을 한참 넘겼음에도 졸리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육체적 피로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선생님의 제안을 거절하기엔 너무 지쳐 있었다.
가방 속에 샌드위치를 챙겨 넣고 막 인사를 하려는데, 나와 코너를 사이에 두고 테이블의 상석에 앉아 있던 유니 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현 씨! 내일 행사 때 한 번만 더 와 줄 수 있을까요?”
방금 떠오른 생각을 곧장 말로 뱉은 것이었는지 유니 씨는 스스로 말해 놓고도 놀란 것처럼 보였다.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내려 둔 그녀의 까만 눈동자는 밤샘 노동 뒤에도 또렷하기만 했다.
“왜? 지금까지도 이 멤버로 잘해 왔었잖아.”
그녀는 단발머리가 휙 날리도록 단호하게 고개를 돌려 남자를 쳐다봤다. 내 쪽에서는 그녀의 뺨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 그를 강렬하게 노려보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도 죽자 사자 버틴 거거든요? 그리고 대표님, 지금 현재 이 스케줄은 상당히 비인간적이라 생각합니다만?”
“…….”
남자는 할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다물고 어깨를 으쓱였다. 남자를 제외한 모두의 기대 어린 시선이 나를 향했다. 가방의 어깨끈을 메다 말고 멈춰 섰던 나는 뭐라 대답하지 못한 채 세 사람의 얼굴을 차례대로 쳐다봤다.
남자의 옆자리에 앉은 주한 씨는 검지 하나를 세우고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간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선생님은 엷은 미소로 나를 보고 있었다.
“너 피곤하거나 다른 일정 있으면 편하게 거절해도 돼. 혹시, 호옥시라도 괜찮으면….”
“손님들 응대해야 하는 것만 아니면… 도울게요. 그런 건 잘 못해서….”
왜 오케이를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선생님의 얼굴에서 과거에 대한 향수를 느꼈을 수도 있고, 오랜만에 그림에 둘러싸여 그림과 연관된 작업을 도왔다는 흥분이 무의식중에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간단한 작업이나마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필요로 해 주는 존재가 되었다는, 지극히 스물두 살다운 단순한 뿌듯함 때문일지도.
하지만 자신을 속일 수 없도록 분명한 이유가 하나 있었다.
어떤 결정을 내리건 관계없다는 표정으로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남자를 본 순간, 반발심 비슷한 것이 일었다. 그렇게 강력한 화력은 아니었지만, 그런 건 없었다고 딱 잡아뗄 수 있을 정도로 희미한 감정도 아니었다.
직원들이 원하고 결정한 일이라면 어쩔 수 없다는 그런 무심한 표정과 분위기로, 내가 다음 날 스케줄을 전달받는 동안, 남자는 샌드위치를 먹고 커피를 마셨다.
사무실을 나올 때, 그는 자리에 앉은 그대로 다른 사람들의 어깨 너머에서 고개를 살짝 까딱였을 뿐이었다. 내가 인사를 되돌려 주기도 전에 시선은 이미 거두어져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에 올라타 문을 닫자,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현실이 몰려왔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도, 그 노래를 흥얼거리는 앞자리의 기사님도, 창밖의 풍경도,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위해 에너지를 요구해 왔다.
이대로 택시를 돌려 되돌아가 보면 ‘갤러리 팬텀’ 같은 것은 사라져 버리고 없을 것 같았다.
■ ■ ■
VIP 오프닝의 시작은 오후 3시였다.
생각보다 늦은 오픈 시간에 대해 유니 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갤러리 주고객들이 거의 패션계나 연예계 쪽 거물들이거든요. 아침에 오픈해 봤자 아무도 안 와요. 대부분 정오쯤 하루가 시작되는 사람들이라.”
납득이 가는 설명이었다. 지금 가장 인기 많은 연예인이 누구인지도 잘 모르고, 패션잡지는 뒤적여 본 적도 없는, 트렌드나 센스와 거리가 먼 나였지만, 그쪽 종사자들의 불규칙한 생활에 대해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의 상식은 있었다.
하지만 갤러리의 주고객이 패션계나 연예계 인사들이라는 데에는 약간 의아했다.
패션계와 연예계는 서로 밀접한 분야겠지만, 순수 미술 작품을 다루는 화랑과 그 두 분야의 연관성은 그리 깊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어촌 마을에서 은둔하듯 지내 온 사이, 한 화랑의 주고객이 패션·연예계 인사들로 채워질 정도로 미술품 소비자의 계층이 다양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유니 씨와 주한 씨 역시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동양화 작품을 앞에 두고 선이 가지는 힘과 탄력이나 여백이 부여하는 상상력에 대해 관람객에게 안내하는 갤러리의 직원보다는, 모델이나 디자이너라고 하는 쪽이 더 설득력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VIP 고객들을 응대하는 날이니 오늘은 여느 큐레이터들처럼 단정한 차림을 하지 않을까, 혼자 예상해 보기도 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피어스도 액세서리도 더 늘어났고, 룩에 어울리는 메이크업까지 더해져, 오히려 어제보다 더 힘을 준 모습이었다.
인쇄소에서 막 도착한 팸플릿을 사무실로 전부 옮겨 놓은 뒤 본전시에 사용할 몫과 오늘 배부할 몫을 분리하면서, 어제부터 조금 궁금했던 부분에 대해 질문했다.
“팬텀은 옷차림이 자유로운가 봐요.”
본전시용으로 분리해 둔 팸플릿 더미를 창가 선반 위에 올려놓고 돌아오던 주한 씨가 그런 질문이 나올 것쯤은 미리 예상했다는 듯 피식 웃었다.
“우리 갤러리요?”
고개를 끄덕이자 설명이 이어졌다.
“우리 갤러리가 좀 영업방침이 독특해요. 연예계나 패션계 쪽 사람들이 주고객이잖아요. 그 사람들한테 먹히려면 직원들도 어느 정도 스타일이 있어야 한다는 게 대표님 방침이라, 개성 있는 차림은 오히려 환영이에요.”
“그게 아니었으면 권주한은 면접에서 떨어졌을걸요?”
케이터링 업체의 진행 상황을 살피고 막 사무실로 돌아온 유니 씨가 우리가 작업 중인 테이블을 지나쳐 가며 말했다.
“싫다는 사람 면접 보라고 끌고 왔던 게 누군데?”
주한 씨는 뒤를 돌아보며 억울한 듯 발끈했지만, 유니 씨에게서 어떤 반응을 끌어내지는 못했다. 오전에 내가 도착했을 때부터 거의 쉼 없이 울려 댔던 유니 씨의 전화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주한 씨는 금세 다시 이쪽으로 돌아서서 팸플릿을 비닐봉투에 넣는 작업을 이어 갔다. 포기가 빨랐다.
“우리야 완전 좋죠. 출근용 자아, 퇴근 후 자아, 따로 분리하지 않아도 되고, 의상비까지 꼬박꼬박 지원되고.”
패션·연예계 인사들이 주고객이라 옷차림에 제약이 없다는 것은 이해가 됐지만, 어떻게 해서 화랑의 주고객들이 패션·연예계 인사들로 채워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했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시원한 답을 듣지 못하면 밤에 잠이 안 올 것 같은 그 정도의 궁금증은 아니었기에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알죠? 연예계에는 알파나 오메가들 많은 거. 아마 오늘 눈요기는 실컷 할 거예요.”
요즘 인기 있는 연예인이라고 해 봐야 내가 이름과 얼굴을 매치시킬 수 있는 사람은 한두 명 정도였다. 하지만 이름을 알아 뒀다가 모래와 형에게 얘기해 주면 우리의 맥주 시간에 안줏거리 정도로는 활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한 씨는 오늘 파티에서 보게 될 연예인이나 알파·오메가들에 대해 기대하라고 했지만, 내 생각엔 어제의 그 남자, 팬텀의 대표 이상으로 ‘알파적인’ 혹은 ‘알파스러운’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었다.
설사 그가 알파가 아닌, 하물며 베타라 하더라도 그는 나 같은 보통 사람이 보기에는 골든 알파의 형상 그 자체였다.
단순히 거의 외국인에 가까운 이목구비에 동양적 느낌이 살짝 가미된 혼혈 특유의 신비로움 때문만이 아니다(그는 혼혈 중에서도 서양의 느낌이 훨씬 강하게 남아 있는 쪽이었다. 혼혈인지 아닌지에 대해 아직 확실히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그 이목구비와 눈동자가 순수 동양인이라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했다).
그에게서 풍기는 독특하고 독보적인 분위기와 존재감은 논리가 아닌 감각이라서, 그림으로 그려 보라면 그릴 수 있을지 몰라도 말로 설명해 보라고 하면 그건 어려웠다.
더 대단하다. 더 위대하다. ―그런 개념과는 다르다. 인종이 다르다는 느낌도 아니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외국인을 눈앞에서 보더라도 그건 결국, 같은 사람인데 참 다르구나, 라는 느낌일 것이다.
눈앞의 이건 대체 뭘까? ―그가 이끌어 내는 것은 그러한 종류의 가벼운 충격이었다.
윗입술이 살짝 들린 육감적인 입술을 떼면, 음악처럼 들리는 낯설고 아름다운 외계어로 말할 것 같았다.
성격은 별로 원만해 보이지 않았지만, 새로운 존재에 대해 자연히 갖게 되는 호기심, 어쩔 수 없이 한 번 더 향하게 되는 시선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가 정말 ‘더욱’ 특별한 골든 알파인지, 아니면 그 정도 존재감은 알파들 사이에서는 흔한 것인지. 주한 씨 말대로 오늘 파티에서 다양한 알파들을 보고 나면 어느 정도 가려지겠지.
봉투에 전부 넣은 팸플릿을 2층 전시장의 임시 데스크로 옮겨 두고 사무실로 돌아오니, 그 사이 선생님이 도착해 유니 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웃으면서 가까이 다가가자, 선생님도 마주 웃으면서 앞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셨다.
“대표님은?”
선생님이 유니 씨에게 물었다.
“인우 쌤하고 점심 하시고 이쪽으로 바로 같이 오신대요.”
“그럼 대강 다 준비된 거네. 하… 죽음의 일정이라 이거 진짜 가능하긴 한 건가 싶었는데, 어떻게 되긴 되는구나. 심지어 평소보다 여유로워! 사람 하나 더 늘어난 건데 확 다르다, 응?”
선생님은 내 어깨에 팔을 걸치며, 유니 씨와 주한 씨에게 내가 이번 일정 진행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동의를 요구했다. 두 사람은 그런 질문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갤러리에 인원 보충이 절실함을 강력히 토로했다.
이제 위층의 케이터링 준비만 끝나면 3시 오픈엔 문제가 없었다. 우리는 오프닝이 시작되기 전 마지막으로 여유로운 시간을 갖기 위해 선생님 사 오신 커피를 한 잔씩 앞에 두고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유니하고 주한이는 번갈아 가면서 고객들 응대를 해야 해. 그림에 대해 궁금해하는 고객이 있는데, 대표님과 내가 둘 다 상황이 안 될 때가 있거든. 바쁠 때는 유니하고 주한이가 둘 다 데스크를 비워야 할 때도 있을지 모르고. 이현이는 데스크에서 팸플릿만 잘 배부해 주면 돼.”
요령이 없을 뿐, 부끄럼을 타는 성격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정도라면 어떻게든 해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웃으면서 친절하게… 그렇게 못 해도 괜찮을까요?”
“괜찮아, 괜찮아. 이현이는 무표정한 얼굴이 매력이라 고객들이 더 좋아할 거야. 그런 걱정은….”
내 무미건조한 얼굴이 매력이라는, 동의하기 어려운 얘기로 나를 격려하던 선생님의 말끝이 점차 흐려지다 완전히 멈추었다. 그리고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기가 가시고, 마지막에는 쓴 음료를 마신 것처럼 완전히 찡그린 얼굴이 되었다.
“내가 미쳤구나…. 그러면 그렇지. 이번엔 순조롭다 했어.”
우리 세 사람은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중얼거리는 선생님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무슈아> 편집장이 이번에 출판한 책, 화장실에 두고 왔나 봐! 읽은 티는 내야 하니까 아침까지도 붙잡고 있었거든. 나 왜 이러냐 진짜.”
선생님이 자책을 마치기가 무섭게 유니 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택시 타고 내려가서 사 올게요. 왕복으로 30분이면 돼요.”
“책 없으면 안 돼, 유니야. 아무리 입으로 잘 읽었다고 해도 실물이 없으면 안 돼…. 그걸로 삐쳐서 최소 몇 개월은 끌고 갈 사람이잖아.”
선생님이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거의 외치듯 그렇게 말할 때쯤 이미 유니 씨는 사무실 안쪽 자신의 책상에서 지갑을 챙겨 나오고 있었다.
짧은 순간 잠시 망설였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니 씨의 팔을 가볍게 붙잡았다.
“제가 다녀올게요.”
잠시 머뭇거리는 유니 씨를 한 번 보고 창가 기둥에 매달린 벽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3시가 얼마 남지 않았다.
“유니 씨 없으면 업무 마비인데, 제가 자리 비운다고 큰일 날 리는 없잖아요. 제가 다녀올게요.”
“…그럼, 부탁할게요.”
어제 갤러리에 도착했을 때 통성명도 하기 전에 업무지시부터 내리던 모습과는 또 다른 면이었다. 임시로 도와주러 온 나에게 예정에 없던 일을 부탁하는 것이 내키지 않는지,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니 씨에게 할 수 있는 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 둘을 묶어 낯가림 심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던 주한 씨의 말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책 정보는 핸드폰으로 받기로 하고, 서둘러 사무실을 나가는 등 뒤로 유니 씨의 가벼운 잔소리와 유니 씨에게 용서를 구하는(?) 선생님의 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유니 씨의 설명대로 택시로 10분 거리에 대형 서점이 있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나도 몇 번인가 친구들과 어울려 참고서 구입을 핑계로 놀러 온 적이 있는 서점이었다. 그 사이 대대적인 리모델링이 있었는지 내부는 내 기억과 상당히 달라진 모습이었지만, 그 환골탈태 급의 변화에 감탄할 새가 없었다.
어렵지 않게 책을 찾아 구입했지만, 휴일 오후 시간대의 도심 한가운데라 그런지 돌아가는 택시를 잡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책의 필자분이 도착하려면 아직 여유가 있으니 이 정도 시간이면 충분하다는 유니 씨의 메시지를 받고서야 한숨 돌리며 좌석에 등을 기댈 수 있었다.
갤러리로 돌아가는 길은 내려가던 길보다 좀 더 막혔다. 근처에 세련된 카페와 레스토랑이 밀집돼 있어, 휴일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로 좁은 도로와 골목이 북적거렸다.
종이봉투에서 책을 꺼내 급하게 살펴보는 사이사이 어디쯤 왔는지 창밖을 확인하는 마음이 아무래도 조금은 조급했다.
목적지까지 10미터 남짓 남았을 즈음.
팬텀 앞 주차장으로 진입하는 견고한 실루엣의 커다란 자동차가 눈에 띄었다. 쉽게 볼 수 없는, 아주 커다란 자동차였다. 하지만 압도적인 크기와 다소 권위적인 직선형의 디자인에도 불구하고 둔해 보이는 느낌 없이 우아했다. 굳이 차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대단한 고급 차량임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도로 위를 달리는 수입 세단은 흔했지만, 웬만한 SUV들보다 더 거대한 골격 때문인지, 의전 차량을 연상시키는 일반 세단과 구별되는 외형 때문인지, 보는 사람을 압도시키는 데가 있었다.
섣부른 판단일지 몰라도, 차주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팬텀까지는 거리가 조금 남아 있었지만, 한옥 스타일의 아담한 카페 앞에서 택시를 세웠다.
네다섯 대 정도를 세울 수 있도록 마련된 정문 앞의 작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운전석에서 막 내려서는 사람은, 예상대로 팬텀의 대표였다.
깃이 양쪽으로 넓게 벌어져 길고 단단한 목의 뿌리를 드러내는 셔츠와 얇은 소재의 슈트 차림으로 차에서 내린 그의 머리카락이 옅은 웨이브를 그리며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자신의 눈 색깔보다 좀 더 짙은(지금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지만), 코발트가 살짝 섞인 하늘색 슈트를 입은 남자는 어제보다 좀 더 화려해 보였지만, 어제보다 편안해 보이기도 했다. 언젠가 봤던 영화 속, 주말을 맞아 교외로 피크닉을 나간 이탈리아 남자들을 연상하게 하는 차림이었다. 슈트 차림이지만 딱딱해 보이지 않고, 편안하지만 캐주얼은 아닌.
“날씨가 지나치게 좋아. 이런 날 창문 하나 없는 갤러리에 틀어박혀서 사교용 미소나 짓고 있어야 한다니…. 너 진짜 비싼 밥 사라.”
“나만 좋자고 하는 짓이냐? 엄살 부리지 마.”
조수석에서 다른 한 남자가 내려서면서 그를 향해 투덜거렸고, 그는 단호하게 반응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짙은 선글라스를 쓴 조수석의 남자도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았지만, 그쪽은 분명한 한국인이었다.
모르는 척 조용히 먼저 갤러리로 들어가야 할지, 두 사람이 먼저 들어가기를 기다려야 할지 입구에서 고민하는 사이, 그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짧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못 보던 얼굴인데, 누구? 새 애인?”
팬텀의 대표보다 조수석의 남자가 더 나를 반기는 얼굴로 노골적인 흥미를 드러냈다. 그 엉뚱한 질문에 그는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애인이 있었어야 새 애인이지.”
“왜, 침대 위에 있는 순간만큼은 상대가 누구든 달콤한 애인이 되어 주는 라우 위쿤 아니었어?”
놀리는 듯한 남자의 추궁에 그는 흐흥, 코웃음을 쳤다. 코웃음이긴 했지만 실제로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 같은 웃음이었다.
“누가 그렇게 떠들고 다녔나 봐? 내가 달콤했다고.”
오늘만 임시로 채용했다는 발레파킹 전담 기사에게 키를 넘겨준 그는 선글라스를 벗어 재킷의 위쪽 주머니에 꽂아 넣으며 덧붙였다.
“그럼 그 새낀 나하고 잤던 거 아니야.”
입술 끝에 웃음이 아직 남아 있었다. 동기가 순수해 보이지 않는 웃음이었다. 상대의 무례함 앞에 불쾌해하기보다 약점을 잡았다는 생각에 오히려 즐거워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지을 법한 웃음.
그들과 나 사이에는 열 걸음 정도의 거리가 있었다. 나를 두고 자기들끼리 떠드는 그들을 두고 먼저 들어가도 될지를 가늠해 봤지만, 어쨌든 그는 내가 일하러 온 곳의 오너였다.
“그래서, 아무튼 애인 아니라는 거지?”
앞범퍼를 돌아 이쪽으로 온 그의 어깨를 가볍게 주무르면서, 조수석의 남자가 선글라스를 벗어 다리 끝을 입가에 물고 나를 쳐다보며 한 번 더 확인하듯 물었다.
이 남자 역시 보통 사람에 비해 상당히 비율이 좋고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외계인이 아닐까 싶은 정도의 독특한 이질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적어도 이쪽은 나와 같은 사람이었다. 좀 더 좋은 외적 조건을 가진, 좀 더 세련된 사람.
“이제 어느 정도 취향 파악이 될 때도 되지 않았나?”
이 대화가 소모적이라는 듯 한숨을 섞어 얘기한 대표는 팬츠 주머니에 양손을 찌르며 한마디 덧붙였다.
“알바야.”
드디어 그는 조수석의 남자가 처음부터 궁금해한 나의 정체에 대해 답을 꺼내 놓았다. 알바야.
선글라스가 반드시 필요할 정도로 햇살이 사방에 흘러넘치는 5월의 오후였다. 그들이 해를 등지고 있었기에 그들을 향해 선 나는 눈을 가늘게 떠야만 했다.
“그으래?”
조수석의 남자는 곧바로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세요. 초면에 눈앞에서 대화가 좀 그랬죠? 팬텀에서 아르바이트 쓴다는 얘긴 못 들었는데, 저도 여기서 알바 할까 봐요.”
“안녕하세요. 임시로 오늘만 잠깐 도와 드리는 거예요.”
어정쩡하게 악수를 나누는 사이, 대표는 정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 등에 가볍게 손을 올려 정문 쪽으로 리드하듯 걸으면서, 조수석의 남자는 내가 손에 든 종이봉투에 관심을 보였다.
“에이, 아쉽다. 그거 뭐예요? 안 무거워요? 들어 줄게요.”
“그냥 책 한 권인데요.”
내가 무슨 농담을 한 것도 아닌데, 남자는 고개까지 뒤로 젖혀 가며 웃었다.
대표와 불과 대여섯 걸음 차이로 갤러리 안에 들어서니 이미 오프닝이 시작되어 있었다. 1, 2층 전체에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위층에서 떠들썩한 흥분이 느껴졌다.
이따 또 보자는 인사와 함께 조수석의 남자는 대표를 뒤따라 상아색 계단으로 서둘러 사라졌다.
질 좋은 슈트를 차려입은 체격 조건이 훌륭한 두 남자가 대리석 계단을 오르는 뒷모습은 시각적으로 그림이 되긴 했지만, 한쪽은 너무 난해했고, 한쪽은 너무 간단했다. 그들의 본질이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 이미지가 그랬다.
그리고 둘 다 나와는 무관한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사무실에 책을 두고 서둘러 2층으로 올라가 보니, 참석 의사를 표시했다는 50여 명의 VIP 고객 중 절반 이상이 이미 도착해 있는 것 같았다. 미리 들은 대로, 얼핏 보기에도 상당히 화려한 사람들이었다.
방금 전 도착한 대표와 조수석 남자를 중심으로 다소 요란한 인사치레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각각 작은 무리의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는 선생님과 유니 씨의 모습도 보였다.
주한 씨가 임시 데스크를 지키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요?”
“사무실에 실장님 가방 안에 넣어 뒀어요.”
주한 씨는 잠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그런 뒤, 팔꿈치로 나를 툭 치며 웃었다.
“이 사람, 보기보다 치밀하네.”
칭찬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잠깐 고민하다 그냥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아직은 본격적인 식으로 들어가기 전이었다. 사람들은 그림을 감상하기보다는 아는 얼굴을 발견하고 서로 안부를 전하기에 바빠 보였다. 대표의 주변이 가장 분위기가 활기찼다.
“우리가 초대한 VIP는 50명 정도인데, 그 VIP들이 두세 명 정도는 데리고 올 수 있거든요. 새로운 고객이 될 수 있으니까. 아직 3시 반도 안 됐는데 참석자가… 서른 명이 넘었으니까 오늘은 꽤 출발이 좋네요.”
참석자 리스트가 적힌 파일을 훑어본 주한 씨의 진단이었다.
계단 바로 앞의 홀에는 1층 로비를 내려다볼 수 있는 난간을 뒤로하고 긴 뷔페 테이블이 늘어섰다. 바닥까지 늘어뜨린 테이블보 위에는 간단한 핑거푸드나 디저트들이 꽃장식과 함께 보기 좋게 차려졌다. 제복을 입은 케이터링 업체의 직원들이 화려하게 차려입은 고객들 사이를 오가며 음식을 나르고, 샴페인 잔을 채워 주고 있었다.
파티는 딱딱하기보다는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로, 주한 씨와 내가 담당하고 있는 임시 데스크 위에도 우리를 위한 음료와 간단한 다과 몇 가지가 세팅되어 있었다.
나는 우선 낯선 라벨의 물병을 집어 갈증을 해소했다.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이 우리 갤러리 매출의 70퍼센트 이상을 책임지고 있는 고객들인데, 이 사람들이 진짜 그림에 안목이 있고, 바쁜 일정 중에 잠깐 짬을 내서 차 한 잔 마시면서 그림 감상하는 게 하루의 낙이라 여기 오는 건 아니에요.”
한입 크기로 먹기 좋게 만들어진 샌드위치를 오물거리며, 주한 씨가 상체를 좀 더 내 쪽으로 기울였다.
“저기 챙 넓은 모자 쓴 사람 보이죠? 지금 막 도착한.”
주한 씨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서, 수행원으로 보이는 두 사람과 함께 2층 계단으로 올라서는 남자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저 사람이 이현 씨가 사 온 책, 그 책 쓴 잡지 편집장이에요.”
40대 중후반쯤으로 보이는 남자는 키가 작은 편으로 살집 있는 흰 얼굴에 표정이 풍부했다. 대표와 제법 가까운 사이인지 두 사람은 프랑스식으로 볼 키스를 나누며 인사했다.
“쿤, 오프닝 축하해. 왜 이리 바쁜 거야? 얼굴을 볼 수가 없어.”
섭섭해하는 남자를 안쪽 전시장으로 안내하면서 대표는 부드럽게 웃었다. 굉장한 미남이니 물론 미소도 근사했지만, 찍어 낸 듯 기계적인 미소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 자리도 상황도, 그에게는 일일 테니 그렇게 비난할 부분은 아니었다.
“<무슈아>라고 패션잡지인데, 대기업 자회사고, 발행하는 잡지만 열 개가 넘는 파워 있는 회사에서 나오는 잡지예요. 저 사람이 그냥 단순 편집장이 아니라 그 그룹하고 친인척 관계거든요. 따지자면 사돈에 팔촌 그 정도이긴 한데, 그래도 무시는 못 하죠.”
주한 씨는 가늘고 긴 잔에 담긴 샴페인을 흘려 넣어 입 안의 샌드위치를 삼켰다.
서로 인사를 주고받고 새로운 사람들을 소개받느라 바쁜 고객들 덕에 임시 데스크는 아주 한산했다. 팸플릿 하나 받으러 오는 사람이 없었다.
“우린 미술 잡지보다는 패션, 리빙, 럭셔리 잡지 같은 데에 주력하거든요. 솔직히 지금 한국 내에도 갤러리는 포화 상태거든요. 자격증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돈 있으면 낼 수 있는 게 갤러리라, 크고 작은 거 다 하면 그 수가 어마어마해요. 당연히 몇 년 못 버티고 문 닫는 곳도 수두룩하고. 겉으로야 그림 걸어 놓고 작가의 독특한 화풍이 어쩌니 작품의 메시지가 어쩌니 떠드는 게 일이라 고상해 보이지만, 여기도 경쟁이 엄청 치열하거든요. 집에 돈 좀 있겠다, 폼 나게 갤러리 오너 명함 하나 파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다간 죽기 살기로 덤비는 사람들한테 금방 밀려나요. 이미 자리 잡은 대형 화랑들 파워도 절대 무시 못 하는 건 당연하고. 시장이 작으니까 끼어들 틈이 없어요.”
거기까지 말을 마치고 목이 막히는지 가슴을 두드려 대는 주한 씨에게 내 몫의 샴페인을 양보했다. 고맙다는 눈짓과 함께 단숨에 잔을 비운 주한 씨는 이번에는 쿠키를 하나 집어 베어 물었다.
오늘은 입술의 피어스와 귀의 피어스가 체인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마시거나 먹는 데에 불편할 것 같았지만, 이미 몸의 일부로 받아들인 듯 정작 주한 씨 본인은 아주 편안해 보였다.
“그래서 우리 대표님은 지금까지 그림 사는 데 돈을 안 쓰던 사람들을 고객으로 끌어들이기로 한 거죠.”
거기까지 얘기를 듣고 나니, 갤러리의 주고객이 패션·연예계 종사자들로 구성된 이유를 대강 알 것도 같았다.
“이쪽이 거의 사교를 기반으로 한 시장이라 단순히 그때그때 자기가 마음에 드는 그림이 있는 화랑에 가서 구입하는 그런 개념이 아니거든요. 기존에 거래하고 있는 갤러리가 이미 있는 고객들을 끌어오는 건 엄청 힘드니까, 쩐은 있는데 그걸로 그림은 별로 사 본 적 없는 사람들을 공략한 거예요.”
주한 씨는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아, 돈을 뜻하는 제스처를 만들어 보였다.
“결과는 뭐 보시다시피 대박이죠. 삼청동에 이런 건물로 이전도 했구요.”
별것 아니라는 듯, 혹은 자랑스럽다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여 보인 주한 씨는 먹고 있던 쿠키의 남은 조각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주한 씨가 말한 ‘집에 돈 좀 있겠다, 폼 나게 갤러리 오너 명함 하나 파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갤러리 중 하나가 팬텀이지 않을까 싶었었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일단 팬텀의 대표는 자수성가를 목표로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충분히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을 것 같은 인상을 풍겼고, 지금 고객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더라도 절박함에서 배어 나오는 어쩔 수 없는 비즈니스적 비굴함 같은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예의 바르고 친절한 서비스 스마일이 내내 얼굴에 감돌고 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오히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 그에게 더 강한 호의를 보이고 있었고, 상대적으로 그와 친분이 약해 보이는 사람들은 그에게 좀 더 다가갈 수 있는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 둔한 내 눈에도 보일 정도로 그런 분위기는 굉장히 뚜렷했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나에게 보였던 그의 모난 태도는 둘째치고, 겉으로 보이는 인상만 가지고 막연히 추측했던, ‘부모의 돈으로 모든 것을 쉽게 손에 넣은 도련님’이라는 이미지에 대해 마음속으로 그에게 사과했다.
부모나 집안의 재력을 기반으로 뭔가를 시작한다는 것이 특별히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쌓아 올린 성과와는 가치의 정도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가 팬텀을 완전히 바닥에서부터 여기까지 끌어올렸는지, 혹은 어느 정도 집안의 원조가 있었는지. 거기까지는 알 수 없어도, 막대한 자본과 물려받은 인맥만으로 간단히 쌓아 올린 모래성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였다.
내가 데스크로 들어오고 나서 처음으로, 누군가가 팸플릿을 받아 갔다.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커다란 선글라스를 쓴 여자였다. 가만히 보니 선글라스가 큰 게 아니라 얼굴이 작은 거였다. 내가 잘 모를 뿐, 어쩌면 배우나 가수일지도 몰랐다.
팸플릿을 받아 든 여자가 누군가 아는 얼굴이라도 만났는지 반가운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안쪽의 전시장으로 사라지자, 주한 씨가 요즘 인기 있는 배우라며 이름을 알려 줬지만, 역시 나는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여하튼, 대표님 그런 운영 방식 때문에 미술계에서는 완전히 이단아니 문제아니… 뭐 거의 사탄 취급이에요. 파란 눈의 골든 알파가 페로몬으로 사람들 홀려 그림 팔아 대면서 미술의 품위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고. 어떤 평론가는 심지어 몸으로 그림 파는 남창이라는 개소리까지 지껄였다니까요?”
좀 전의 이야기를 다시 이어 가기 시작한 주한 씨는, 그런 소리를 떠든 평론가의 멱살이라도 잡을 것처럼 허공으로 주먹을 치켜들었다. 다시 생각해도 분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야기의 주인공인 팬텀의 대표는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그림처럼 웃고 있었다.
이곳은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갤러리였지만,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림보다 그 남자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트위드 투피스를 차려입은 한 중년의 여성이 그의 팔에 가볍게 팔짱을 끼는 것으로 은근하게 친분을 과시했고, 실제로 사람들의 눈에 시기가 섞인 부러움이 스쳤다. 담임 선생님의 눈길을 한 번이라도 더 받고 싶어 애를 썼던 초등학교 시절이 얼핏 떠올랐을 정도로, 그들의 감정 표현은 직설적이었다.
팬텀의 대표는 자신을 중심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욕망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는 듯, 능숙하고 유쾌하게 호감을 끌어내는 태도로 분위기를 조율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 욕망들의 강도와 방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얽힘 자체를 조율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페로몬으로 사람들을 홀려 그림을 파는 파란 눈의 골든 알파’라는 평을 뒤늦게 지적해 보자면, 그의 눈은 단순한 파란색이 아니었다. 햇볕에 그을린 것 같기도 하고, 너무 많이 울어 색소가 옅어진 것 같기도 한, 페일 블루(Pale blue)에 가까웠다..
보석을 연상시킬 만큼 분명한 색감을 갖고 있지만 그만큼 생명력은 느껴지지 않는 짙은 파랑이 아닌, 좀 더 섬세하고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래가 보드 위에서 타고 일어서는 파도의 거품 같았다. 깨져서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그건 사실 오만할 정도로 강인해 보이는 그의 인상과는 상당히 상반되는 느낌의 컬러였다.
“근데, 우리 대표님은 페로몬 개방을 안 하거든요. 사생활에선 어떤지 몰라도 평소엔 전혀. 골든 오메가인 사람들도 거의 감지를 못 할 정도로 컨트롤 능력이 만렙이에요. 아, 혹시 알아요? 골든 알파… 그런 거?”
“잘은 몰라요.”
“관심 없나?”
무수한 베타 인구 중 알파나 오메가 얘기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때로는 제2의 성별을 가진 그들에 대한 호기심으로, 때로는 대체로 화려한 외모와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고 알려진 그들에 대한 동경심으로. 그리고 혹은 별난 것을 향한 단순하고 가벼운 흥미로.
나 역시 그가 속된 말로 조금은 ‘재수 없는’ 성격이라 생각하면서도, 그 독특한 존재감을 이유로 혹시 골든 알파가 아닐까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기에, 관심이 없진 않다고 대답했다.
그렇다. 역시 그는 골든 알파였다. 싱거울 정도로 예상과 맞아떨어지는 결과였다. 골든 알파의 마스코트로 활동해도 좋을 만큼 그의 외형은 크고 강하고 아름다웠으니까.
하지만 페로몬을 전혀 개방하지 않는다니. 거기서부터는 사전 지식이 없는 이야기였다.
“알파, 오메가가 결국 생식 능력 얘기라… 뭐, 이런 데서 자세히 떠들 내용은 아니고. 하여간 대표님은 자의와 관계없이 페로몬이 방출돼 버리고 또 타인의 페로몬에 대책 없이 반응해 버리는 그런 레벨이 아니라는 거죠. 알파, 오메가에 대해서 본능에 지배돼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짐승이라고 차별하는 베타들이 많지만, 골든 알파 정도 되면 페로몬에 러트 조절까지 돼 버리니까 그런 거로 깔 명분도 없어요. 그런데도 까는 거예요. 눈 감고 귀 막고. 그래 봤자 결국은 페로몬 장사네 어쩌네 계속 떠드는 거 보면, 나 참… 진짜 누가 누구한테 품위 운운인지.”
내 주변에 알파라고는 모래가 유일했지만, 그녀는 알파로서의 자신에 대해 자세히 떠드는 타입이 아니었다. 나 역시 알파·오메가에 대해 서칭을 해 볼 정도의 관심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골든 알파가 어쨌느니 팬텀의 대표가 어쨌느니 하는 정보들이야 이 업계에서는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일 테니, 주한 씨가 하는 얘기들이라고 해 봐야 거의 외부인이나 마찬가지인 임시 알바가 알게 되더라도 무관한 수준의 시간 때우기용 화제일 게 뻔했다. 그런데도 그중 절반 이상은 내가 잘 모르고 있던 정보들이었다.
“대단하잖아요. 골든 알파라는 게 그냥 타고나기만 하는 게 아니라 본인 훈련으로 완성되는 게 50퍼센트 이상을 차지한다는데. 결국 본능을 다루는 훈련을 사춘기 때부터 꾸준히 해 와서 저런 레벨까지 갔다는 거니까. 모든 게 다 쉽다는 듯이 여유롭게 웃고 있지만… 보통 독한 게 아닌 거죠.”
그렇게 말한 주한 씨는 샴페인을 마시면서, 기울인 잔 너머로 시선을 대표에게 고정시켰다.
주한 씨의 시선을 따라간 곳에서, 남자는 여전히 그룹의 중심으로서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능숙하고, 그리고 달콤하게.
지금 이 파티가 열리고 있는 곳의 오너이자 호스트답게 그의 미소는 모두에게 공평했지만, 그것에 내성이 없는 사람을 착각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보통의 미소와는 다른 온도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나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과 딴판으로, 어디에든 공평하게 내리쬐는 햇빛처럼 참석자 한 명, 한 명을 다정하게 응대하는 저 남자가,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자기 자신을 몰아붙이며 고독한 내적 훈련을 거듭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바로 곁에서 주한 씨가 또 하나의 쿠키를 깨무는 소리가 들렸다.
“근데 난 그런 거 좋아하거든요.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 좆나 독해지는 거. 겉으로는 여유로워 보이지만, 수면 아래서는 탐욕하는 걸 얻기 위해 이 악물고 죽어라 발을 저어 대는 거.”
바삭바삭, 야무지게 쿠키를 씹으면서 주한 씨는 씨익 웃었다.
정말 그랬을까.
수면 아래에서는 이를 악물고 죽어라 발을 저어 대는, 그런 절박한 발악이 그에게도 있었을까.
날 때부터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었을 것 같은, 골든 알파다운 여유가 넘치는 지금의 모습으로는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지금도 비스듬하게 짝다리를 짚고 서서 한 손에는 샴페인 잔을 든 채 웃고 있는 그는, 조금 부풀려 말하자면, 타고난 지배자 같았으니까.
수면 아래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는 그를 상상해 보려 했지만, 엉뚱하게도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은 유원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리배에서 페달을 구르는 그의 모습이었다. 그것도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장면이었지만, 오히려 그쪽이 더 상상이 쉬웠다.
방향을 잃은 나의 상상은, 높은 통굽의 플랫폼 샌들을 신고 거의 휘청거리다시피 데스크로 다가온 유니 씨의 등장으로 잠시 중단되었다.
“여기. 두 점 솔드 아웃이요.”
그녀는 몹시 지쳐 보이는 얼굴로, 데스크 위에 작은 수첩을 던져 놓았다. 주한 씨가 반색하며 수첩을 주워 들었다.
“벌써? 역시 능력자야. 교대할까?”
“어. 입가에 경련 나겠어.”
“오케이.”
벤치에 앉아 자신에게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린 후보 선수처럼 의욕에 가득 찬 주한 씨가 유니 씨 대신 전시장으로 나섰다.
아마도 유니 씨가 입가에 경련이 나도록 고객들을 응대한 끝에 작품 두 점 판매에 성공한 것 같았다. 어제 캡션 작업을 그녀와 함께했기 때문에 이곳에 걸린 작품들의 대강의 가격은 나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한 시간도 채 지나기 전에 그런 고가의 작품을 두 점이나 판매했다니, 주한 씨 말대로 그녀는 능력자였다.
“음료수라도 좀 갖다줄까요?”
대답할 기운도 없는지, 데스크 뒤의 의자에 앉아 다리를 두드리면서 유니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스도 있고, 종류가 많던데.”
“술. 술 좀 갖다줘요.”
“샴페인 괜찮아요?”
“글라스 말고 물잔에 가득.”
그녀가 일러 준 대로 가장 큰 잔에 샴페인을 가득 따라 데스크로 돌아오는데, 데스크에서 열대여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고객을 응대하던 선생님이 이쪽을 향해 약간 목소리를 높였다. 전시장 전체가 떠들썩했기 때문에 특별히 거슬리는 톤은 아니었다.
“유니 씨, 사무실에서 편집장님 책 좀 가져다줄 수 있을까? 내 가방 안에 있을 거예요.”
거의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유니 씨를 저지하며 잔을 넘겨주었다.
“제가 가지고 올게요. 어디에 있는지 제가 알잖아요.”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 좀 전에 내가 넣어 두었던 자리에서 다시 책을 꺼냈다. 선생님에게 책을 전해 드리고 데스크로 돌아오는데, 친구의 것을 베낀 숙제를 선생님 앞에 내보이는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큰 사기를 치려는 것도 아닌데, 괜히 떨려서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기도 힘들었다.
“한 실장, 밑줄까지 그어 가면서 봐 준 거야? 역시 대단해. 한 끗이 달라. 잘 보이겠다고 책 사서 사인받는 사람이야 많지. 근데 내가 모르나? 사기만 하고 내용은 읽어 보지도 않은 사람이 대부분이야. 근데 우리 한 실장은 사람을 그런 식으로 대하질 않아. 성의가 있어. 이러니 내가 팬텀에 와서 지갑을 안 열 수가 없다니까?”
다행히 ‘선생님’은 ‘베낀 숙제’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심지어 그 숙제를 칭찬해 주기까지 했다.
포도 주스라도 되는 것처럼 샴페인의 절반을 시원하게 들이켠 유니 씨가, 좀 아까 주한 씨가 그랬던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올려다봤다.
“그 사이에 밑줄까지 쳐 뒀어요?”
속삭이며 묻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시원한 미소가 되돌아왔다.
원래부터 구입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아니면 고조된 기분으로 내린 즉흥적 결정인지는 몰라도, 파워 있는 잡지의 편집장이라는 그분은 최근에 승진한 딸의 사무실에 걸어 둘 만한 그림을 추천해 달라며 적극적인 구입 의사를 보이기까지 했다.
“별것 아닌데, 그 정도 일로 저렇게 기뻐한다는 게 웃기죠? 근데 여기가 그래요. 파는 건 그림이어도 어떤 때는 그냥 결국 사람 마음을 다루는 일 같다니까요. 좋게 표현하면 영업이 중요한 직종이고,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비위 맞추는 게 일이에요. 가끔 회의감이 살짝 들 정도로.”
추천작을 확인하기 위해 선생님과 함께 다른 섹션으로 이동하는 편집장의 뒷모습을 쳐다보면서 유니 씨가 씁쓰름하게 웃었다.
그 웃음의 좀 더 자세한 이유를 묻기도 전에 그녀는 다시 전시장으로 불려 나가야 했다. 사교의 시간이 지나고, 본격적으로 오늘의 주인공인 그림들을 홍보할 시간이었다.
혼자 남은 데스크에서 놀고 있는 손이 민망해, 우리가 마신 빈 잔을 치우기도 하고, 남은 팸플릿을 괜히 다시 정리해 보기도 하는데, 문득 데스크 위로 그늘이 드리워졌다.
“팸플릿 하나 받을 수 있나?”
고개를 들어 보니 조수석의 남자가 웃고 있었다.
미소 자체만 보자면 산뜻한데, 이상하게도 보는 사람에게 반발심을 갖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특유의 가벼운 어투와 건들거리는 듯한 태도 때문이겠지.
팸플릿을 하나 집어 건넸지만, 그는 팸플릿 자체에는 정작 별 관심도 없어 보였다.
“최근에 32층으로 이사를 해서요. 정원 있는 단독주택에서 살다가 고층 빌딩으로 옮기니까 갇혀 있는 것 같고 영 삭막한데, 그쪽이 그림 하나 추천해 줄래요? 이름이….”
이름이 적힌 명찰이라도 찾는 것처럼 남자는 내 가슴 언저리를 이리저리 살폈다.
“서이현입니다.”
웃음기 가득한 눈으로 나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이름까지 취향이네.”
그래서 난감하다는 듯한 뉘앙스의 혼잣말이었다.
정문 앞에서 봤을 때부터 뭐랄까…. 꼬시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지만 반 이상 장난처럼 보이기도 했고, 직접적으로 뭘 어쩌자는 제안을 받은 것도 아니어서, 특별히 반응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내 반응을 기대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남자는 혼자 떠들고 혼자 재미있어하고 있었다.
“이현 씨가 한 점 추천해 줬으면 하는데. 뭐가 좋을까요? 좀 릴렉스할 수 있을 만한 거.”
“전 오늘 잠깐 도와 드리러 온 알바라서요….”
“괜찮으니까 하나 추천해 봐요. 그냥 참고만 할 거니까.”
대표와 유니 씨는 이미 고객 응대 중이었다. 다른 섹션에서 응대 중인지 선생님과 주한 씨의 모습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내가 임시 알바임을 알고도 추천을 부탁한 상황이니, 원하는 대로 해 준다 해서 문제가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어디에 두실 생각이세요?”
“음… 이현 씨가 추천해 주는 거면 침실에 걸고 싶은데….”
‘침실’이라는 단어에 의미심장한 강세를 두면서, 남자는 웃었다. TV 드라마 속 전형적인 바람둥이처럼 웃는 가벼운 얼굴을 쳐다보다가 데스크 뒤에서 돌아 나왔다.
전시장 내에는 대략 50점 정도의 작품이 걸려 있었다.
이번 전시는 갤러리에 소속되어 있는 작가 중 예닐곱 명의 공동 전시로, 적게는 두 점에서부터 많게는 열 점 이상을 전시한 작가도 있었다. 어제 새벽 내내 준비를 도왔으니 그 그림들의 이미지와 대강의 위치 정도는 머릿속에 정리되어 있었다.
망설임 없이 앞장서서 걸어간 나는 가로, 세로 각각 53센티미터 크기의 정사각형 캔버스에 그려진 작품 앞에 멈춰 섰다.
입체파식의 기괴한 해석에 만화풍의 유쾌하고 발랄한 화풍. 반대로 어둡고 무거운 색감을 가진 그림이었다.
“이거요? 이 그림?”
왜 이 그림을 추천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남자는 거듭 되물었다. 나는 크게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잠시 그림과 나를 번갈아 쳐다본 남자는 뒤로 돌아 누군가를 찾듯이 두리번거리더니, 팝아트풍의 대형 작품 앞에서 서너 사람과 대화 중인 대표를 불렀다.
“쿤, 너 이쪽으로 좀 와 봐.”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한 대표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 역시 아주 큰 키는 아니어도 결코 작은 키도 아니었다. 그런 나의 코끝쯤에 조수석 남자의 입술이 있었고, 다시 조수석 남자의 코끝쯤에 대표의 입술이 있었다. 190을 가볍게 넘길 신장이었다.
가까이 다가온 그는 또다시 모든 게 귀찮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긴, 만인의 연인 같은 달콤한 미소 같은 건 조수석의 남자와 내 앞에서는 불필요한 옵션일 것이다.
삐딱하게 서서 팬츠 주머니에 한쪽 손을 찌른 그는, 본론을 빨리 꺼내라는 표정으로 조수석의 남자를 재촉했다.
“침실에 걸 만한 그림 좀 추천해 달라고 했더니, 내 작품을 추천해 주잖아. 어떻게 생각하냐, 이거?”
대표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고작 이틀뿐인 관계였지만, 그 이틀을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나에게 머문 시선이었다. 무심하지도, 적대적이지도 않은 최초의 시선이기도 했다.
자신이 이끄는 무리에게 위협이 될 만한 존재가 아닌지,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낯선 동물의 행적을 지켜보는 우두머리 사자 같은 그런 시선이 아닌, 나라는 한 개인을 그대로 응시하는 눈.
내 눈을 통해 나에 대한 정보를 전달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꼼꼼히 살피던 그의 시선이 나를 비켜 가자, 그제야 내가 추천한 그림이, 그 그림을 추천받은 조수석 남자의 작품이었다는 우연에 대한 놀라움이 다가왔다.
“이 그림이 나하고 어떻게 어울릴 것 같은데요?”
“그림의 작가분이시라는 건… 몰랐어요.”
“몰랐겠죠. 그거 갖고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왜 이 그림을 나한테 추천한 건지 궁금해서 그래요.”
조수석의 남자는 이 상황이 아주 즐거운 것 같았다.
“솔직하게 말해 줄래요? 제발.”
제발이라는 말까지 붙일 정도로 솔직한 감상에 굶주린 건가. 기도하듯 양손을 모으고 내 입술을 쳐다보는 조수석 남자의 등 뒤로, 작품을 한 번 더 눈에 담았다.
혼자 빠져서 혼자 그려 보기만 했지, 그림에 대한 다른 사람의 평이 궁금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수상 경험과 그때의 감상평이 내게 주었던 감정을 떠올려 보면,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의 기분을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솔직하게 다 보여 주는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한 점이….”
“그런 점이?”
“왠지 비슷해서요.”
“나랑 이 그림이랑?”
“네.”
“솔직하지 못한가? 나랑 이 그림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면서 질문을 퍼붓는 남자 때문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그거랑은 좀 다른데… 솔직하고 싶지만 솔직할 수 없는… 그런 상태 같은 거요. 그런 상태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는 점에서 보자면 그것도 또 일종의 솔직함이라고 할 수 있는….”
내 부연 설명에 조수석 남자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고, 반대로 대표는 소리 내어 웃었다. 아주 짧은 웃음이었지만, 엄연한 웃음이었다.
“죄송해요. 제가 말을 잘 못해서…. 그리고 개인적인 감상일 뿐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잠시 당황하는 것 같았던 조수석의 남자는 다음 순간 곧 허리를 숙여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내 얼굴을 더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이미 예의 가벼운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오늘 끝나고 뭐 해요? 6시에 끝난다고 하던데.”
갑작스러운 대화의 전환을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뒷정리…해야죠.”
내 대답에 남자는 처음으로 과장되게 실실거리는 웃음을 치우고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대표의 팔을 툭 치며 동의를 구했다.
“이거 철벽 맞지?”
대표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내 얼굴에서 찾으려는 것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들여다봤다.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마주하고 있는 것은 아주 아름다운 색이었다. 사람의 눈이라는 것을 잠시 잊고, 오직 그 색의 살아 있는 아름다움에 빠져 처음엔 왼쪽 눈을, 그 다음엔 오른쪽 눈을 하나씩 천천히 감상했다.
다음 순간, 남자의 초점이 나의 시선에서 미련 없이 이탈해 나갔다.
“철벽이고 뭐고, 너보다 열 살 어린 상대한테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드냐?”
혀를 차며 그렇게 말한 대표는, 그대로 등을 돌려 자신이 있던 원래의 장소로 돌아갔다.
서울에서 가장 맛있는 만둣국을 내는 집을 알고 있다며, 꼭 오늘이 아니어도 좋으니까 시간을 내 달라는 조수석 남자의 말을 흘려들으며 생각했다. 내가 대표에게 나이를 얘기한 적이 있었던가.
■ ■ ■
“편집장 책, 진짜 밑줄까지 쳐 가면서 읽었어?”
주한 씨와 나는 파티에서 남은 샴페인 대여섯 병을 사무실의 커다란 회의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대표는 그중 한 병을 오픈해 잔에 따르면서 선생님에게 물었다. 짓궂게 웃는 얼굴로.
“그럴 시간이나 있었어, 요즘? 그 책 나온 지 2주도 안 됐는데 우리 그 2주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생각해 봐.”
대표가 건넨 잔을 받아 입술을 축인 선생님은 내내 서 있느라 피곤해졌을 다리를 테이블 위에 걸치며 대답했다.
“그럼 뭔데.”
“뭐니, 이현아?”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다는 듯, 선생님은 나에게 답변을 요구했다.
“너무 새 책처럼 보이면 안 될 것 같아서요…. 택시에서 손때 좀 묻히고 밑줄 긋고… 몇 군데 귀퉁이 접어 두고… 그렇게 했어요.”
굳이 따지자면 지시를 받은 내용은 책을 사 오라는 것까지였다. 하지만 선생님이 실제로 책을 읽고 계셨다는 얘기를 하기도 했었고, 누가 봐도 겉치레로 사인을 받기 위해 방금 구입해 온 책을 내밀기가 민망할 것 같아서 한 일이었다. 그것이 새삼 화제가 되자 시키지도 않은 괜한 일을 한 건가 싶어 긴장이 됐다.
파티를 무사히 마치고, 나쁘지 않은 판매율을 자축하듯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잠시 서걱거리며 얼어붙었다. 그 냉기의 근원지는 물론 대표였다. 어제도 느꼈듯 그는 시선의 각도나 표정만으로 분위기를 주도할 수 있는 재주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의 기분을 살피고 맞출 수밖에 없는, 그것은 꼭 오너라는 지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기 책을 함부로 다뤘다고 불쾌해할 수도 있었던 거잖아. 밑줄 치고 페이지 접어 놓고… 그런 거 싫어하는 사람도 많지 않나?”
혼잣말처럼. 대표는 샴페인을 마시며 중얼거렸다.
“실제로 읽었다는 표시가 나야 한다는 생각밖에 못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현아, 네가 뭐가 죄송해? 쿤, 왜 그래? 너무 멀리 간다?”
선생님이 탁 소리가 나도록 샴페인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뭐라고 한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반대쪽 생각은 안 해 봤는지 물어봤을 뿐이야.”
어깨를 으쓱인 그는 샴페인을 마시는 척 선생님의 시선을 피했다.
어제 같은 싸늘한 적대감까지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삐딱한 태도는 그대로였다. 선생님은 약간 화가 난 것 같았다. 드문 일이었다.
“류 대표 결과주의자고, 실적주의자잖아. 이현이 덕분에 편집장 기분 좋아져서 매출 올렸으니까 상여금을 주면 줘야지, 왜 그렇게 시비조야? 내가 데려온 앤데 마음에 안 들어?”
그의 눈이 천천히 나를 향했다. 선생님과 대표가 사적으로 어떤 관계고, 어느 정도로 친밀한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선생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다는 것쯤은 나도 느낄 수 있었다. 적어도 선생님에게는 귀찮다는 듯한 표정이나 악당 같은 웃음은 짓지 않았다. 공장에서 만들어 낸 사탕 같은, 유해한 달콤함으로 무장한 기계적인 미소도.
“마음에 들고 안 들고가 뭐가 있어? 잠시 도와주고 갈 사람인데. 내가 낯선 사람하고 일하는 거 불편해하는 거 알잖아. 상여금은 한 실장이 주라고 하면 줄게.”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어휴… 좀 달라졌나 했더니 그대로야.”
고개를 저으며 남은 샴페인을 마저 마시고 잔을 비운 선생님은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뒤에 대표와 선생님은 VIP 중에서도 더 중요한 VVIP들과의 뒤풀이가 있었다.
“스물다섯 이후로 사람은 안 변한대.”라며, 장난스러운 말투로 애교를 부리듯 선생님의 어깨를 가볍게 주무른 대표는 지갑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유니 씨에게 건넸다.
“오늘 수고했어. 뒷정리 마치면 실컷 놀아.”
남은 팸플릿을 정리하고 있던 유니 씨는 얼른 달려가 낚아채듯 카드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눈을 빛내며 물었다.
“법카? 대표님 개카?”
그가 유니 씨의 이마를 툭 밀치며 인상을 썼다.
“너넨 왜 이렇게 그거에 집착하냐? 내 돈 쓰는 게 그렇게 좋냐?”
“네, 애정이 느껴지니까요.”
“애정 같은 건 개카에도 없으니까 헛소리하지 말고.”
케이터링과 관련된 집기들, 남은 음식들은 업체에서 전부 정리해 회수한 뒤였고, 내외부만 조금 정리하면 오늘 일은 끝이었다. 2층 전시장으로 올라가 뒷정리를 시작하려는데 주한 씨가 미안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우리 대표님이… 좀 당황스럽죠?”
“너무 신경 쓰지 마요. 이현 씨한테만 저러는 게 아니라, 처음 보는 사람한테는 그냥 원래 저런 식이에요.”
유니 씨도 한마디 보탰다.
괜찮다는 의미로 웃어 보이면서 옆으로 세워 놓은 임시 테이블의 다리를 접었다.
“나 처음 여기 왔을 땐 더 심했어요. 진짜 빡쳐서 못으로 차 다 긁어 버리고 잠수 타 버릴까 생각까지 했을 정도니까. 진짜. 심각하게.”
지금 주한 씨를 대하는 그의 태도를 생각하면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주한 씨의 표정을 봤을 때, 나를 위로하기 위해 꾸며 낸 얘기 같지는 않았다.
“근데 그랬다가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날 찾아내서 값을 치르게 할 사람이라… 못으로 차 긁는 건 포기했죠. 날 찾아내서 발가벗긴 다음에 내 몸을 못으로 다 긁어 버릴 것 같았거든.”
대표에게서 실제로 그런 협박이라도 받은 것처럼 주한 씨는 얼굴을 구기고 요란하게 어깨를 떨었다.
“글쎄다…. 네가 대표님한테 같지도 않게 들이댔던 게 큰 원인이라는 생각은 안 하냐?”
전시장 안쪽에서 오늘 판매된 작품들에 ‘솔드 아웃’ 스티커를 부착하던 유니 씨의 말이었다.
“야, 들이대긴 누가 들이… 페, 페로몬 때문이야! 골든 알파 페로몬을 내가 어떻게 거부하냐고!”
“뭐래. 대표님이 네 앞에서 페로몬을 왜 개방해? 그리고 너 베타잖아.”
골든 알파인 대표의 뛰어난 페로몬 조절 능력에 대해 나에게 실컷 늘어놓은 뒤라 그런지, 주한 씨는 자기변명의 궁색함이 민망한 듯 나를 힐끔거렸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대표님은 원래 성격이 더러운 거지 이현 씨를 특별히 미워하는 게 아니라는 거지. 그게 포인트라고. 대표님이 시비조인 건 상대를 싫어해서가 아니잖아. 좋아하게 되기 전에는 모든 사람을 다 그렇게 대하는 거니까.”
이게 과연 위안이 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가 ‘나만을 특별히’ 괴롭히고 있는 게 아닌 것만은 사실인 것 같았다.
다리를 모두 접어 넣은 테이블을 나와 함께 양쪽에서 들어 올려 난간 쪽으로 옮겨 놓으면서 주한 씨는 덧붙였다.
“그리고 대표님 정도면 마음만 먹으면 베타한테도 페로몬 쏴서 먹일 수 있을걸?”
유니 씨가 섹션을 나누는 가벽에 기대어 선 채 미간을 찡그렸다.
“페로몬이 무슨 히어로 캐릭터 필살기냐? 쏴서 먹이게?”
“마음먹고 쓰려고 하면 필살기도 될 수 있는 게 사실이지, 뭐. 야, 그리고 페로몬보다 강한 게 뭔지 아냐?”
그렇게 말하면서 주한 씨는 유니 씨와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우리 둘 다 답이 없었다. 주한 씨는 턱을 약간 쳐들고 다소 거만해 보이는 태도를 취했다.
“취향이야, 취향. 페로몬 위에 취향 있다고. 처음엔 골든 알파 페로몬에 살짝 맛이 갔었지만, 제정신 돌아오고 나니까 내 취향 아니더라. 내 취향은 말이야….”
30대 후반에 얼굴선이 살짝 무너지기 시작한, 청년과 중년의 경계에서 무기력함에 빠진 남자, 라는 주한 씨의 취향에 대한 열띤 강론이 이어졌다.
지금까지 그들의 대화로 짐작해 보자면, 아마도 주한 씨의 연애 대상은 남자인 것 같았다. 그리고 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닌 내 앞에서도 자신의 그런 성향을 특별히 숨기려 하지 않는 것 같았고. 나 역시 그것을 이유로 내 안에서 그를 특별한 선 너머로 밀어낼 마음은 없었다.
이미 수십 번 들어 왔던 얘기인지 유니 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들어 주고 있을 필요 없다는 듯 내 손목을 붙잡고 계단을 내려갔다.
생각해 보면, 이제 두 번 봤을 뿐인 상대를 미워하고 말고 할 이유가 없었다. 선생님의 말처럼, 주한 씨와 유니 씨의 말처럼, 낯선 사람을 대하는 그 남자의 일관된 태도일 뿐이었다.
궁금해졌다. 그에게 ‘특별히’ 미움받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좀 아까 전시회장을 찾아왔던 사람들 중에는 아마 미움을 받는 쪽으로라도 좋으니, 그에게 ‘특별’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