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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02 (14/14)

외전 02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다. 급한 일이 생기면 연락 없이 집을 비우기도 했으니 이번에도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여전히 내 뒤를 캐는 주제에 정작 내 상태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 비틀린 관심이 서럽고 원망스러워서 일부러 내 쪽에서도 찾지 않았다. 선을 지키겠다 약속한 나로서는 큰 반항이었으나, 결정적으로 남자가 사라진 다음 날 예고한 대로 맞선이 잡혀서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 자리에는 나가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나가지 못했다. 홧김에 다른 남자와 시간을 보내 그를 자극하고 싶었지만, 몸살이 나는 바람에 침대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가 식은땀을 흘리며 앓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간호를 해 주셨다. 도중에 남자에게 연락하는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지 않았다. 다만 지난번에 불렀던 그 의사를 보내 주었는데 이번엔 내 쪽에서 거부했다. 얼핏 이 몸살이 가짜로 품은 아이가 떨어져 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사흘을 앓은 후에 멈췄던 생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다시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내 몸이 아주 달갑지만은 않았다. 이렇게 멀쩡해질 거면서 왜 그런 혼란을 준 건지 원망마저 들었다.

차라리 바보 같더라도 내 간절함 같은 거 평생 모르고 살았으면 속은 편했을 텐데.

몸이 회복되었으니 그다음은 흔들렸던 마음이 자리를 잡을 차례였다. 그러나 내가 아프다는 걸 알면서도 연락 한 통 없고, 코빼기도 비치지 않은 남자를 향한 원망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남자는 절대로 잡히지 않는다. 나만 놓아 버리면 끝날 인연이다. 텅 빈 집에 발을 들일 때마다 그것을 실감했고, 서러웠다.

똑같은 몸살인데 저번에는 밤낮없이 곁을 지켜 주었던 사람이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 괴리에 담긴 남자의 의도를 모를 수가 없었다.

남자가 사라진 지 열흘째 되는 새벽. 나는 인내의 한계를 느끼곤 결국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단축 번호를 누르는 손이 내 눈으로 봐도 형편없이 떨렸다.

꾸욱, 손가락에 겨우 힘을 주고 전화를 걸자 발신음은 오래 흐르지 않았다.

[여보세요.]

여태 아무 소식 없던 남자가 아주 태연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전화를 했으면 말을 해야지.]

“…….”

[애기야.]

“…….”

[끊을까?]

정말,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디예요?”

[집 앞.]

“…….”

[들어가?]

어이가 없어서 숨이 탁, 터졌다.

“여기 그쪽 집이잖아요. 왜 그걸 나한테 물어요.”

[그래서. 들어가, 말아.]

“…….”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잠옷 차림 그대로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자 대문에 기대어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주변으로 또 하얀 연기가 흩어지고 있었다.

곧장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을 주먹으로 때리자 그가 천천히 나를 돌아봤다. 당연히 담배를 피우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가 물고 있는 건 하얀 사탕 막대기였다. 인상이 마구 찌푸려졌다.

“그쪽은 진짜…… 진짜 나쁜 새끼야.”

“알아.”

“알긴 뭘 알아요? 당신이 뭘 알아? 나처럼 당해 본 적도 없으면서, 뭘 알아!”

퉤, 그가 막대기를 뱉어 냈다. 내내 이로 씹어 댔는지 끝부분이 너덜거렸다.

“내가 그날 왜 산부인과 갔는지 알죠?”

“생리 불순이라며.”

“모르는 척하지 마요.”

내가 산부인과에 간 걸 아는 그가 진료 기록을 확인하지 않았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남자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고, 뻔뻔하게 바로 다음 날 맞선을 잡은 거다. 그리고 나 혼자 두고 도망쳤다.

남자가 내 옆에 있어 주지 않은 그 열흘 동안, 나를 가장 비참하게 만든 건 그거였다.

내가 상상 임신을 했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남자도 눈치챈 거다. 그래서 부담스러웠거나, 질렸거나 아니면 내가 불쌍했겠지. 미안했을 수도 있다. 이유야 어찌 됐든, 그 상황에 담긴 내 안달을 알고 남자가 도망갔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나를 떠나보낼 좋은 구실이 생겼다고 생각했겠지. 이 일로 자신에게 완전히 정이 떨어지길 바라고 그렇게 비겁하게 굴었으리라. 남자는 평생 내가 떠나는 날을 준비하는 사람이니까.

“상상 임신이라잖아요. 웃기죠.”

“…….”

“내가 그런 걸 겪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나도 몰랐어. 내가 오죽하면 그런…… 하.”

“…….”

“더 웃긴 게 뭔지 알아요?”

끼익, 대문이 열렸다. 그는 안으로 들어오는 대신 여전히 바깥에 서서 제 코트를 벗어 내 몸에 덮어 주었다. 그러곤 나를 보지 않은 채 느릿느릿 단추만 채웠다.

“나 솔직히 기대했어요.”

남자의 손이 아랫배 쪽에서 멈췄다.

“그쪽 아이 가지면, 그러면 진짜로…… 우리가 부부 같은 거 될 수 있을까 봐…….”

“…….”

“나도 모르게 바라고 있었나 봐.”

“…….”

“내가 미쳤지. 내가 먼저 연락하기 전에는 죽어도 안 돌아오는 사람인데, 별걸 바랐어. 내가.”

“그래. 별걸 바랐네.”

그가 조용히 대꾸하며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얼굴은 평소와 똑같았다. 일단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바라지 않겠다며.”

“…….”

“그새 잊었어?”

“하…….”

나쁜 새끼. 지금은 그딴 소리를 할 게 아니라 변명을 해야 하는 타이밍이다.

그동안 연락 없이 집을 비운 것은 일이 바빠서였고, 내 가짜 임신에 대해서 알고도 언급하지 않은 것은 병원에서 이미 충격을 받았을 나에게 같은 일을 되새기고 싶지 않아서 침묵을 유지한 거라고, 그렇게라도 둘러대야 했다.

사랑에 확신을 주지 않아서 그런 일까지 겪게 만들어 미안하다는 사과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런 걸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지도 않겠지. 나는 그저 남자가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거짓으로라도 상황을 무마하려고 한다면, 그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눈감아 줄 수 있을 만큼 그를 사랑할 뿐이었다. 하나, 남자는 나의 맹목을 이용하는 대신 또 나를 떠날 생각만 했다.

하긴, 어쩌겠는가. 다른 연인들처럼 상처 주고, 상처받고, 다투고, 사과하고, 화해하는 평범한 사랑싸움은 우리에게 과분하기 짝이 없는데. 남자가 남자인 이상.

거칠게 남자의 코트를 벗어 내렸다. 땅에 떨어진 것을 그도 나도 개의치 않았다. 나는 오히려 그 위를 발로 짓밟았다.

“기억해요. 어떻게 잊어, 그걸. 내 자존심 다 내던지고 매달린 순간인데.”

“그래. 잊지 마.”

“그럼 그것도 기억해요?”

“뭘?”

“내 사랑이 닳아 없어지기 전까지 그쪽이 먼저 떠나는 일 없다고 한 거.”

“기억하지.”

그가 픽 웃으며 나를 빤히 응시했다.

“닳았어?”

나는 대답 대신 그를 노려보았다.

“그때까지 그쪽 마음껏 이용하라고 한 것도 기억하죠?”

“그래. 기억해.”

“…….”

“어쩌고 싶은 거야.”

남자의 주머니에서 차 키를 빼앗았다. 버튼을 누르자 담벼락 아래 주차된 차에 불이 들어왔다.

“이번엔 그쪽 차례예요.”

“무슨 차례.”

“당신이 나 찾아와.”

“…….”

“그러기 전까지 나 그쪽 안 봐요.”

남자가 나를 위아래로 천천히 훑었다. 그 집요한 시선에 담긴 감정이 뭔지 모를 수가 없었다. 무언의 집착으로 나를 옭아매는 주제에, 그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이야? 네가 나 떠나는 날?”

“아니요.”

“그럼?”

“내가 당신 이용해 먹는 거.”

남자를 똑바로 마주했다.

“나 잡아. 그게 그쪽 쓸모니까.”

“애기야, 말장난 그만하고 갈 거면 그냥 가.”

“말장난 아니고 진심이에요.”

추워서인지, 겁이 나서인지. 나답지 않게 반항을 하면서도 몸이 덜덜 떨렸다. 남자가 떨어진 코트를 주워 지저분한 부분을 털고 다시 내 몸에 덮어 주었다.

“사랑해요.”

“…….”

남자의 미간이 구겨졌다.

“뭐 하자는 거야?”

“난 절대 그쪽 안 떠나. 내 사랑은 하나도 안 닳았어. 당신이 그렇게 나쁜 놈인데도.”

“…….”

“그러니까 우리 사이가 이대로 끝난다면, 그건 내가 놓아서가 아니에요.”

“…….”

“당신이 쓸모 있게 굴지 않아서지.”

“진서을.”

“잡으러 와요. 아니면 이대로 당신 역할 못 하고 나 놓치든가. 난 분명히 말했어요.”

남자의 표정에 균열이 일었다. 나도 잘 아는 감정이었다. 내가 그의 비틀린 사랑 방식에 놀아나며 느꼈던 그 혼돈.

그는 나를 밀어내는 주제에 관계를 끝낼 권한을 내게 주는 것으로 여지를 남겼다. 그 덕에 남자는 내 감정이 닳기 전까지 내 옆에 있을 자격이 있었고, 나는 닳지 않은 감정으로 그의 옆에 있을 수 있었다.

비상식적인 우리 관계에서는 의지할 수 있는 것이 그 작은 여지뿐이었다. 나는 그것만 붙들고 하루하루 아슬하게 줄타기를 해 왔다.

이번엔 내가 그에게 여지를 남겼다. 내 사랑은 아직 건재하니까 당신은 나에게 이용당할 자격이 있다고, 잡으러 와도 된다고, 그건 우리의 약속에 어긋난 짓이 아니라고. 나 혼자 하던 줄타기에 남자를 끌어 들인 셈이다.

차 문을 열며 잠깐 뒤를 돌아봤다. 그는 여전히 같은 곳에 서 있었다.

“사랑해요.”

재차 던지는 여지에 남자의 눈이 찌푸려졌다.

“갈 거면 그냥 가.”

글쎄, 내가 왜 그래야 할까. 당신도 나를 그냥 사랑하지 않는데.

차에 올라타려다 방향을 틀어 남자에게 달려가 안겼다. 못 박힌 듯 멈춰 서서, 혼란스러운 얼굴로, 차갑게 나를 보내는 남자의 입술에 짧은 입맞춤을 남겼다.

“기다릴게요.”

“…….”

지금 이 순간을 이별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뭐라고 부르든 그게 뭐가 중요할까. 중요한 건, 언제나 잡혀 주지 않는 남자를 처음으로 내가 먼저 놓았다는 거다.

차가운 입김이 허공에 흩어졌다. 나는 차를 출발시키며 사이드 미러에 담긴 남자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도 같은 자리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남자가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이어졌다.

* * *

나는 내 명의로 된 집에 들어갔다. 대부분 남자의 집에서 지냈지만, 가끔 남자와 여기서 시간을 보낼 때도 있었다. 새로운 장소에서 섹스를 하면 내가 유달리 흥분한다며 놀리던 목소리가 생생했다.

내가 이 집에 머무르는 걸 알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종종 찾아오려고 했으나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상관하지 않지만, 굳이 나까지 끼어서 가족 놀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가족은 여전히 아버지뿐이니까.

“당연히 아버지는 누군지 모르고, 출생 신고도 귀찮다는 이유로 안 했어.”

시시때때로 남자가 떠올랐다. 가족은커녕 제대로 된 이름 하나 없이 세상에 붕 뜬 채 혼자 살아왔을 남자가.

그런 삶은 어떤 것일까. 어머니가 아버지와 나를 떠났을 때 느꼈던 감정과는 다른 종류일 것이다.

있던 게 사라지는 것과 원래 없는 것. 둘 중 뭐가 더 괴로운 건지는 선뜻 짐작되지 않았다.

함께 살며 옆에서 지켜본 남자는 없는 삶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사소한 모든 것들에 그랬다. 깊게 잠들지 않는 것, 먹는 것에 관심이 없는 것, 조르고 졸라서 백화점에 함께 가 내가 옷을 골라 줘야 그나마 몇 가지를 사는 것처럼, 그는 작은 의식주조차 스스로 소유하지 않고 흘러가듯 살았다. 그저 잠이 오면 잠깐 눈을 감고, 허기가 지면 대충 해결하는 식인 남자의 일상생활에는 그의 취향도, 취미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구태여 신분을 만들지 않고 세상에 없는 사람으로 사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익숙해서일지 모른다. 한 번도 세상에 뿌리내린 적이 없으니 그것을 바라는 마음이 열매를 맺을 수 없지 않았을까?

그런 식으로 여태껏 무엇도 소유하지 않으며 살아온 그가 뭔가를 잃어 본 적은 있을까?

아니. 남자는 상실을 모른다. 아무것도 없는 삶에 익숙해서 가질 생각조차 하지 않고, 가진 게 없어서 잃을 게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런 남자에게 유일한 예외는 나였다. 가지지 않으려 노력하나 온몸으로 소유하는 삐뚤어진 욕심은 나에게만 작용하는 모순이었다.

가끔 퇴근하는 나를 기다리던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조용히 거실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책이나 서류 따위를 보고 있다가 내가 도착하면 모든 걸 미련 없이 내려놓는 것이 못내 좋았다. 마치 기다림이 전부인 사람 같아서. 내가 남자의 목적인 것 같아서.

나는 그런 사람을 두고 온 거다.

지금은 뭘 하고 있을까. 또 담배를 물고 있겠지. 어쩌면 이민후와 술을 마시고 있을 수도 있고, 어디서 싸움박질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세한 건 몰라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떠났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남자가 상실을 경험하리라는 거였다. 남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실감을 주지 않으려고 애쓰는데, 나는 그에게 몸소 가르쳐 주고 있다니. 역시 우리는 이상한 관계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되레 속이 후련했다. 적어도 나는 선을 넘지 않았으니까. 우리의 약속을 어기지도 않았다. 나는 그를 이용할 자격이 있었고, 그 자격을 부여한 건 남자였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투정을 부리는 중이었다. 내가 얼마나 서운했고, 상처받았는지 남자에게 알려 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동안 남자가 나를 밀어낼까 봐 지레 겁이나 혼자 끙끙 앓던 것을 ‘여지’라는 좋은 빌미를 찾아내 처음으로 수면 위에 띄운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될까?

“오늘은 날이 덜 춥던데 나가서 먹는 거 어때?”

“좋아요.”

팀장님의 제안에 구내식당으로 가는 대신 1층으로 향했다. 그녀의 말대로 오늘은 한겨울 치고는 날이 퍽 포근한 편이었다. 동료들과 업무 이야기를 나누며 나란히 횡단보도로 향하는 그때, 반대편에 서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

지난번과 똑같은 곳에 가만히 서 있는 그를 바라보다 말을 거는 동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으니까.

횡단보도를 건너고 남자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서도 나는 그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집요하게 쏟아지는 눈빛은 피부에 와 닿았다.

“서을 씨, 아는 사람이야? 자꾸 쳐다보는데?”

“글쎄요.”

미련 없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동료들이 남자의 외모에 감탄하는 것도 적당히 흘려들었다. 여전히 등 뒤는 따가웠다.

무심코 든 생각인데, 어쩌면 남자는 매일 점심시간마다 여기 서 있지 않았을까. 내 바람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 * *

그렇게 한 달을 훌쩍 넘겼다.

고집스럽게 찾아오지 않는 남자가 미우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정말로 그가 매일 점심시간마다 그곳에 서 있다는 걸 알게 되어서였다.

다음 날에도 같은 곳에 있는 걸 보고 확신한 나는 그 뒤로 점심시간에 건물 밖을 나가지 않았다. 대신 도로가 내다보이는 창문에서 혼자 남자를 바라봤다.

그는 늘 달고 사는 담배도 피우지 않은 채 같은 자리에서 정문만 한 시간 동안 응시하다가 자리를 뜨는 것을 반복했다.

정말 미련하고 답답하고 짜증 나는 사람이지만, 애틋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당장 달려가서 품에 안기고 싶은 걸 꾹 참아 내야 했다.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은 줄다리기다. 나 혼자 남자의 선 위를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맞잡고 팽팽하게 당기는 줄다리기.

이러다 영영 끊어지면 어쩌나,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그건 남자도 마찬가지일 테니 그럴 일은 없으리라 본다. 나는 남자의 사랑을, 남자는 나의 사랑을 인지하고 있는 한 이 줄은 끊어지지 않는다. 끊어질 만하면 여지를 되새기고, 또 되새기고, 그렇게 중간중간 힘을 풀며 이어 나갈 테니까.

야근을 끝내고 12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내일은 주말이니 늦잠을 자리라 마음먹고 도어 록을 해제했다. 도어 록 비밀번호는 남자의 집과 같다. 내 생일.

“아…….”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새까만 구두에 반쯤 감겨 있던 눈이 번쩍 떠졌다. 혹시 헛것을 보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눈을 비볐지만 그대로였다. 나보다 한참 큰 남성용 구두. 최근에 함께 백화점에 가서 산 것이다.

잠깐 굳어 있던 나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 조용히 신발을 벗은 후 거실로 향했다.

쿵, 쿵, 걸음마다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

“…….”

탁, 형광등을 켜자 거실 창가에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바깥이 아니라 나를 보는 거였다. 어둠이 내린 창문에는 우리가 선명하게 비쳤으니까.

내가 온 걸 알면서도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고, 나는 창문 대신 남자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한 겹 씌우고 나를 보았고, 나는 그의 뒤만 좇았다.

아마 우리 관계는 계속 이렇게 흘러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보였다.

어쨌거나 그가 나를 찾아왔으니까.

“…….”

“…….”

무거운 정적이 거실을 가득 메웠다.

잠깐 그 자리에 서 있던 나는 평소처럼 움직였다. 드레스룸에 가방과 옷을 정리하고, 샤워를 하고, 간단한 팩을 하고,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남자는 여전히 같은 곳에 서 있었다.

머리를 완전히 다 말리고 나서는 침실로 향했다. 협탁에 놓인 조명은 굳이 끄지 않은 채 침대에 몸을 눕혔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 그가 여기 없는 것처럼 행동하며 눈을 감으려는 찰나, 바깥에서 기척이 들렸다.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나는 조용히 침을 삼켰다.

“…….”

남자가 내 방에 들어왔다. 나는 그에게서 등을 돌린 채였다. 발소리는 멎지 않았고 기어이 침대까지 가까워진 기척이 느껴졌다. 그런데도 여전히 남자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그가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동시에 팔이 붙잡혀 몸이 거칠게 돌아가고, 눈이 마주쳤다.

어두운 방을 유일하게 밝히는 낮은 조도의 조명 빛에 탁한 눈동자가 일렁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뚫어져라 나를 응시하던 남자가 불시에 고개를 내렸다. 막을 틈도 없이 입술이 집어 삼켜졌다.

“으읍!”

나는 재빨리 고개를 옆으로 틀어 남자의 키스를 피했다. 팔을 붙잡고 있는 손도 밀어내자, 그가 머리맡을 짚으며 아예 내 위에 올라탔다. 양 손목이 내리눌리고, 묵직한 무게감이 나를 짓눌렀다.

“왜 피해?”

낮게 갈라진 음성에 미처 느끼지 못했던 술 냄새가 배어 있었다. 입술을 꾹 다문 채 눈을 치켜뜨자 그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하기 싫어요.”

코가 스치는 거리에서 남자가 뚝 멈췄다. 술 냄새가 더 진해졌다.

아무리 독한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 그를 이겨 보겠다고 밤새도록 남자의 속도에 맞춰 잔을 비웠던 어느 날이 떠올랐다.

잔뜩 취해 그에게 휘둘려 온갖 수치스러운 자세로 섹스를 한 내가 다음 날 창피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면 그는 재차 지난밤을 언급하며 짓궂게 놀리면서도, 마지막엔 꼭 예뻤다고 달래 주었다. 그럼 나는 또 마음이 한없이 풀어져 그가 핥아 줄 때마다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우리의 관계는 이상할지라도, 그 안에 담긴 순간들까지 다 그렇지는 않았다. 우리도 가끔은 서로 좋아 죽는 평범한 사랑을 했다.

비정상 속에 드문드문 숨어 있는 정상적인 순간들은 내 버팀목이기도 했고, 내가 이렇게 남자에게 도박을 걸 수 있는 배짱마저 만들어 주었다. 믿는 구석이 아주 없진 않다는 말이다.

“애기야, 입 벌려.”

긴 혀가 내 입술 위를 가로질렀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 핥던 그가 그 틈으로 혀를 밀어 넣으려고 하기에 다시 고개를 돌려 피했다.

“안 한다고 했어요.”

“왜?”

“하기 싫으니까.”

“그러니까 왜.”

“…….”

“오라며.”

“…….”

“쓸모 있게 굴었는데, 이러면 오빠 서운해.”

“…….”

“하던 대로 하자. 이런 거 좋아하잖아.”

다리 사이로 남자의 허벅지가 파고들었다. 민감한 곳을 눌러 오는 단단한 감촉에 하마터면 신음이 터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고 고개를 저었다. 움찔, 남자의 미간이 좁아졌다.

“오래서 왔고, 너 좋아하는 거 하자는데 왜 이래?”

“잡으라고 했잖아요.”

“…….”

“나 아직 안 잡혔어요.”

하아, 무거운 한숨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독한 술 냄새에 나까지 취할 것 같았다.

“투정이 기네.”

“더 할 말 없으면 나가요. 피곤해요.”

“그래. 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내 위에서 내려가지 않는다. 양손도 여전히 결박된 채였다.

무언의 대치가 이어졌다. 나는 구태여 남자에게서 손을 빼지 않은 채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남자가 고개를 살짝 꺾었다.

“바라는 게 뭐야. 제대로 말해.”

“말했잖아요. 잡으라고.”

“적당히 해. 차라리 속 시원히 버리고 가든가.”

“보고 싶었어요.”

“…….”

그의 얼굴에 짜증이 번졌다.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

“사랑해요.”

“야.”

“더 할 말은 없는데, 계속 이렇게 붙잡고 있을 거예요?”

“…….”

“아파요.”

그제야 손목을 움켜쥔 손아귀가 풀렸다. 남자의 가슴팍을 밀어내자 그가 얼굴을 구기며 옆으로 밀려났다. 나는 다시 그에게서 등을 돌린 채 몸을 웅크렸다.

“뭘 어쩌라는 거야.”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남자가 몰라서 묻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를 찾아온 것이 남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다. 정말로 나를 보내고 싶고, 관계를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으면 남자는 내가 남긴 여지 따위는 무시하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어야 한다.

그는 비단 점심시간뿐만 아니라 한 달 동안 내 주변을 맴돌았을 것이고, 내내 저울질을 했을 거다.

내 곁에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성과 나를 향한 사랑.

전자와 후자, 둘 중 뭐가 더 나를 위한 건지 알면서도 선택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얼마나 비난했을지도 안다.

그리고 차마 나를 놓치지 못해, 이렇게 곤란한 얼굴을 하고 다시 내게 돌아올 만큼 스스로에게 이기적인 선택을 했다. 내가 처음으로 그를 놓은 것처럼 남자도 처음으로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한 것이다.

“…….”

“…….”

침묵만 감도는 방 안에서, 남자가 머리를 쓸어 넘기고, 마른세수를 하고, 고요한 한숨을 뱉고, 다시 나를 바라보는 그 일련의 과정이 소리와 공기의 흐름으로 전해졌다. 어떤 얼굴과 눈으로 보고 있을지도 느껴졌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남자가 천천히 내 옆에 몸을 눕혔다.

“내 어머니도.”

낮은 음성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처음부터 그렇게 살았던 건 아니야.”

“…….”

“적어도 너만 할 땐 그 사람도 평범하게 살았어. 양아치 새끼 때문에 인생 잘못 꼬여서 시궁창까지 갔고, 거기서 나 낳았어.”

남자의 어머니. 오래전 한 번 본 노인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녀를 벌레처럼 내려다보던 남자의 표정도.

“갑자기 그 말을 하는 이유가 뭔데요?”

“밑바닥에서 태어난 놈은 밑바닥 인생 밖에 못 살아.”

“…….”

잠깐 말을 멈춘 남자가 내 쪽으로 돌아누웠다. 긴 팔이 허리를 감아 와 밀어내려고 하는 찰나, 그가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었다.

“그런 새끼 애를 왜 기대해.”

나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켰다.

“너까지 처박히면 어쩌려고 그딴 걸 바라.”

나와 반대로 남자는 긴 한숨을 뱉었다.

“서을아.”

“…….”

“난 네가 임신이 아니라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어.”

“…….”

“하마터면 내 좆 묶어 준 한 박사 대가리 딸 뻔했잖아.”

덤덤한 목소리였으나 듣고 있는 내 심정은 그렇지 못했다.

남자의 이 자기 비관적인 사고는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걸까, 아니면 나를 만나서 이렇게 된 걸까. 남자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지만, 그가 스스로를 초라하게 여기는 가장 큰 원인이 나라는 것만은 알았다. 가끔 내가 남자의 옆에서 비참해지듯이.

나는 확답을 주지 않는 남자로 인해 미래를 불안해하고, 남자는 내 옆에서 매번 자신의 과거를 자조한다.

서로가 서로를 갉아먹음에도 불구하고 떠나지 못하는 우리가 하고 있는 게 사랑이 아니면 도대체 뭘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의 행복이 전부인 것처럼 곁에 있는 게 연애가 아니고 뭐야.

내가 바라는 건 대단한 게 아니었다. 남들처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가정을 꾸리고 사는 단란함도 아니다.

그냥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가끔 다투기도 하고,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고, 그냥 그렇게 둘이 지지고 볶는 거. 결국 서로밖에 없는 거. 오늘도 내일도 늘 함께하는 거. 그냥 보통의 그런 거.

“고작 임신 하나로 밑바닥이니 뭐니 비약하지 마요.”

“내가 그런 인간들을 한두 번 봤을까.”

“…….”

“욕심은 끝이 없어.”

“내가…… 임신 말고 더한 걸 바랄까 봐 겁이라도 났어요?”

남자가 피식 웃었다.

“오빠가 어디까지 바랄 줄 알고 그런 말을 해.”

“…….”

“알잖아. 주제도 모르는 인간인 거.”

기어이 참지 못하고 눈물이 맺혔다. 우는 걸 감추려고 숨을 삼켜 봤지만 모르는 게 없는 남자는 긴 손가락으로 내 눈가를 훔쳐 냈다. 이내 눈물을 닦아 준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옷 안으로 파고들었다.

커다란 손바닥이 아랫배를 덮었다. 움찔, 몸을 웅크리자 그가 나를 더 가까이 안았다.

“네 말이 맞아.”

“…….”

“그딴 건 네가 겪을 일이 아니었어.”

느리게 쓰다듬는 손을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흐느낌만 참았다.

“나만 아니었으면 평생을 모르고 살 수 있었을 텐데.”

“…….”

“그걸 겪었네. 네가.”

“…….”

“나 때문에.”

울먹이며 돌아보자, 지그시 눈을 내리깐 남자와 마주쳤다.

그는 아주 많이 복잡해 보였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하고, 금방이라도 떠날 것 같았으며, 또 집요했다.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지 짐작이 되었다. 그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나는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나에 대해서 모르는 거 없다고 했죠.”

“그래.”

“그럼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알 거야.”

“…….”

“그쪽이 하고 싶은 말 말고, 내가 듣고 싶은 말. 그거 해요.”

“…….”

“그쪽 나한테 이용당하는 중이니까. 하고 싶은 대로 굴 자격 없어요. 시키는 대로 해요.”

그가 조용히 웃으며 내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단단하게 내 몸을 옭아매는 팔이 새삼스러워 눈가가 다시금 젖어 들었다.

“모르는 게 없는 줄 알았는데.”

“…….”

“이렇게 나올 줄 누가 알았겠어.”

남자의 입술이 귀에 닿았다. 귓바퀴와 귓불을 핥을 때마다 질척이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목을 움츠리며 피하려는 찰나, 그가 아주 낮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깊은 곳에서 겨우 끌어올린 그의 진심에 참지 못하고 왈칵, 울음이 쏟아져 내렸다.

“흐윽…….”

그간 쌓여 있던 서러움이 한 번에 터져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우는 나를 남자가 제 쪽으로 돌려 안았다. 머리부터 등까지 천천히 쓸어 주는 손길에도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진짜…… 너무해…….”

“…….”

“어떻게, 흑…… 어떻게 다 알고도 나를, 혼자 둘 수가 있어요. 어떻게.”

“…….”

“내가 얼마나 속상하고, 비참했을지 알면서, 다른 남자 만나라고 보내고, 죽어도 연락은 안 하고…….”

“…….”

“비겁하게 도망이나 가고…….”

“그러게. 나쁜 새끼네.”

“남 이야기 하듯 굴지 마요……!”

울화가 터져 내리치는 주먹을 남자는 잠자코 맞고 있기만 했다. 간간이 번진 눈물을 닦아 주는 손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눈물을 쏟아 냈다.

“이것도 그래……. 이게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이에요? 한 달이나 사람 속 태울 일이야?”

“…….”

“그렇게 못되게 굴어 놓고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용서받을 거라고 기대하지 마요. 난 아직 그쪽 미우니까.”

“알아.”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에요.”

“…….”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미워하고, 원망해도 그쪽은 내 옆에 있어야 돼요. 내 옆에서 미움도 받고, 원망도 받고 다 받아야 돼.”

“…….”

“내 사랑이 닳지 않았으니까.”

남자를 붙잡는 것만이 목적이었던 그땐, 그가 그어 놓은 선만 지키면 우리 관계가 평탄하고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사랑이라는 건 행복한 감정이니까. 아니, 그렇게 믿었으니까.

그러나 인생은 새옹지마고, 사랑 역시 인생의 한 요소로서 행복과 불행이 어떻게 찾아올지 모른다.

사실 몰랐던 건 아니다. 남자의 옆에 있으려고 스스로에게 강요한 행복 뒤에는 분명 그렇지 않은 순간도 있었다.

아주 가끔, 내가 버리기 전까지 평생 곁에 있겠다던 남자가 약속 따윈 잊고 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고, 오직 나하고만 섹스하겠다고 했지만 나 없는 곳에서 다른 여자와 몸을 섞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도 느꼈으며, 사실은 내 생각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상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 생각이 나를 지치게 만들까 봐 억지로 좋은 감정만 끌어 모았다. 나는 행복하기만 한 것처럼, 그게 전부인 것처럼. 그러나 불특정하게 느껴 온 불행은 조금씩 쌓여서 기어이 나를 흔들었고, 나는 속수무책으로 휘둘렸다.

남자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다. 우리 관계의 끝을 쥐고 있는 건 나이기에 내가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는 끝이다. 그래서 그는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나의 변화에 신경을 곤두세웠으리라. 남자의 감시에는 나의 안전뿐만 아니라 그의 이기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 내가 사람을 붙이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했음에도 자기 마음대로 했겠지.

그런 내가 먼저 떠나겠다 선언했을 때 남자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오롯이 알지는 못해도 짐작은 했다.

“나 없으니까…… 어땠어요?”

울먹이며 묻는 말에 남자가 눈가를 핥아 왔다.

“몸이 달지.”

“이 상황에도 진짜…….”

원망스럽게 팔을 때리자, 그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흐린 시야에 어둠이 내려앉은 남자의 얼굴이 가득 찼다. 눈물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아 닦으려는데 남자가 내 손을 잡아 내렸다.

“어땠냐고?”

“…….”

“그러게. 어땠을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남자의 품에 얼굴을 비벼 눈물을 닦아 내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표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무언가 무너져 내린 얼굴. 조금 놀라 입을 열기도 전에 그가 내 손으로 제 눈을 가렸다.

“좆 됐지, 뭐.”

“……네?”

되묻는 순간 그가 다시 내 입술을 집어 삼켰다.

“읏! 자, 잠깐……!”

다급히 붙잡았지만 이미 주도권을 빼앗긴 입술은 남자의 몫이었다. 그는 진득하게 내 입 안을 핥기도 하고, 혀뿌리를 뽑을 것처럼 빨아들이기도 하고, 입술을 잘근대기도 하면서 한 달여간 나누지 못했던 키스의 한을 풀듯 집착적으로 달라붙었다.

나는 그가 헤집는 대로 유린당하느라 고개가 한껏 들린 채 더듬더듬 코트 자락만 붙잡았다.

“으응…….”

혀가 엉겨 붙으니 습관처럼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없는 동안 몸이 달았다던 남자의 말에 속상했으면서, 그게 우스워질 만큼 나 역시 오랜만에 맛보는 그의 혀에 반응했다.

참지 못하고 남자의 코트를 옆으로 젖혀 냈지만, 그가 꼼짝도 하지 않고 나를 붙들고 있어서 옷이 쉽게 벗겨지지 않았다. 손톱을 세워 팔을 긁으며 끙끙대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피했다. 그러나 곧장 그가 따라붙어 다시 입 안을 빼앗겨야 했다.

“아…… 잠, 잠깐…….”

공격적으로 퍼붓는 키스에 버둥대느라 몸이 옆으로 밀려났다. 어느새 남자는 내 위에 올라타 있었다.

간신히 얼굴을 붙잡았지만, 애초에 남자의 힘은 내가 이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까 떨어져 나간 것도 내가 진심으로 거부하는 걸 알고 물러나 준 것에 불과했다. 지금은 남자도 내가 이 키스에 반응하는 걸 알아차려서인지 아랑곳하지 않고 혀를 빨아 댔다.

“나 아직…… 용서 안 했어요…….”

겨우겨우 말을 잇자, 그제야 그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탁한 눈동자가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언제 혼란스러웠냐는 듯 태연한 얼굴이었다. 중요한 걸 놓친 것 같아 속이 타들어 가는 내 심정 따위는 관심도 없는지 남자가 코트를 벗어 바닥에 집어 던졌다.

“그래서 용서 빌려고 하잖아.”

“…….”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거로.”

그가 한 손으로 넥타이를 잡아 풀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최선을 다해 볼게.”

“누가 용서를 그렇게 빌어요. 그리고 내가 묻는 말에 대답…….”

사륵, 남자가 풀어낸 넥타이 끝이 내 얼굴을 스쳤다. 눈을 찡그리며 치워 내려는 찰나, 그가 돌연 넥타이로 제 눈을 가렸다.

“뭐 하는 거예요?”

대답 없이 매듭까지 묶은 남자가 다시 내 위로 자리했다. 다짜고짜 본인의 시야를 막는 것에 어이가 없어서 끌어내리려고 했지만, 그가 보지도 않고 내 손을 잡아 누르는 게 더 빨랐다. 그러곤 얼굴 곳곳을 핥아 댔다.

“아, 잠깐…… 눈 왜 가려요……?”

“내 마음이야.”

“싫어, 풀어요.”

섹스를 할 때마다 쉴 새 없이 나를 훑어 내리는 남자의 눈빛을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데. 아무리 아닌 척해도 결국은 숨기지 못하는 애정 어린 눈빛에 내가 얼마나 위안을 받아 왔는데. 그걸 가려 버리면 나는 어디서 확인을 받으라고.

눈가와 볼을 핥던 혀가 턱과 목을 타고 내려가더니 잠옷 위로 가슴을 짓눌렀다. 남자가 이 집에 있을 때부터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해 속옷은 입지 않았다. 남자도 알고 있었는지 실크 위로 느긋하게 혀를 놀릴 뿐이었다.

“읏, 아…… 눈, 그거 풀어요, 흣!”

“눈이 멀어도 섹스하는 데는 지장이 없겠어.”

“아응!”

“어디에 뭐가 있는지 다 알겠네.”

잡힌 팔을 빼내려고 버둥대도 남자는 꿋꿋이 나를 내리누른 채 양쪽 유두를 전부 세우고 나서야 단추를 입에 물었다.

“손 놔요……!”

“기다려.”

툭툭, 혀로 능숙하게 단추를 풀어 대는 게 참 대단도 하다.

별걸 다 잘하는 남자를 노려보는데, 넥타이를 두르고도 용케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다시 입술을 핥아 왔다. 잠시 가벼운 키스를 하고 떨어져 나간 남자가 반쯤 열린 잠옷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맨 살결에 뜨거운 숨결이 흩어졌다. 가쁘게 숨을 고르느라 들썩이는 가슴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이내 그가 혀를 길게 빼고 그림을 그리듯 가슴 위를 핥았다. 두툼한 살덩이를 꾸욱 눌러 가며 유두까지 올라가 그 위를 가볍게 툭툭, 튕길 때마다 필연적으로 신음이 터졌다.

“아아…… 읏!”

혓바닥에 놀아나던 유두가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갔을 땐 나도 팔을 빼겠다는 의지를 잃고 남자에게 붙잡힌 채 끙끙 앓아야 했다. 츄읍, 츕. 야릇한 소리를 내며 빨아들일 때마다 허리가 같이 들썩거렸다.

“용서했나 봐?”

“하으, 아…… 아직…….”

“그래. 더 노력해 볼게.”

양손이 머리 위에서 남자의 손 하나에 얽매였다. 미약하게 몸을 비틀었지만, 그는 재차 유두를 핥으며 반대쪽 손을 아래로 밀어 넣었다. 팬티 역시 입지 않아 남자의 손이 곧장 맨살에 닿았다.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가 허리를 뻣뻣하게 세우자, 남자가 잠옷 바지를 벗겨 내고 질척한 음부를 손가락으로 훑어 올렸다.

“아응……!”

몇 번이고 만져진 몸인데도 매번 전율이 흘렀다. 이쯤 되면 나도 흥분을 숨길 수가 없어 다리 사이를 파고든 남자의 손바닥에 아래를 문질러 댔다. 애액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질구와 갈라진 음순, 부푼 음핵이 남자의 손바닥에 이리저리 짓눌렸다. 허리를 휘저을 때마다 남자의 입가에 걸린 웃음이 진해졌다.

“그러지 않아도 여긴 누구보다 잘 알아.”

“흣, 시끄러워요.”

“자, 넣어 봐.”

그가 중지를 세우는 게 느껴졌다. 손가락 끝이 일부러 질구가 아닌 음핵을 지그시 눌렀다. 나는 나를 보지 않는 남자를 노려보며 허리를 좀 더 밀어 올렸다. 손가락이 음핵부터 갈라진 틈을 타고 내려가 질구에 닿았다. 거기서 허리를 밀어 내리자 단단하게 세워진 손가락이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끝까지 넣었다.

“아응!”

이미 그의 성기로 쾌락을 느끼는 법을 아는 몸은 손가락 하나로는 부족했다. 남자도 그걸 아는지 약지까지 함께 밀어 넣으며 느리게 안을 쑤시기 시작했다.

푸욱, 푹, 질척대는 소리와 함께 그가 안을 자극할 때마다 양다리가 벌어졌다가 붙으며 안절부절못했다.

“아…… 부족해…….”

길고 굵직한 기둥이 안을 틈 없이 채워 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남자의 눈을 가리고 있는 저 넥타이도 당장 치워 내고 싶었다. 요동치는 허리를 어쩌지 못한 채 이리저리 비틀다 팔을 잡아당겼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눈 보여 줘요, 으읏, 나 봐요…….”

“싫어.”

“왜…….”

기껏 나를 찾아오기까지 했으면서 남자는 여전히 단호했다.

“내가 이용하는 중이잖아, 흐윽……! 내 말대로 해요.”

“좋은 무기 생겼다, 그렇지?”

“아읏!”

“오빠 여기까지 오는 데도 많이 힘들었어. 좀 봐줘.”

“그거랑 이게 무슨…….”

안을 채우고 있던 손가락이 빠져나가더니 지익, 지퍼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바지 틈으로 튀어나온 성기를 느리게 훑어 올리며 내 다리 사이에 자리했다.

“넣지 마요. 넥타이 풀기 전에는 안 할, 아아……!”

그가 내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성기를 밀어 넣었다. 나를 이렇게 속상하게 해 놓고, 울려 놓고,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와 섹스로 퉁치려고 하다니. 정말 너무 밉다. 하지만 아무리 발로 밀어내도 기어이 뿌리 끝까지 파고드는 것에 다리가 속절없이 벌어졌다.

“하윽! 읏……!”

남자는 잠깐의 틈도 주지 않고 움직였다. 내가 아무 말도 할 수 없게끔 푹푹, 안을 찧어 댈 때마다 그의 목을 타고 떨어진 넥타이 끝이 함께 흔들렸다. 얼굴이 가까워질 때마다 흘러내린 넥타이가 내 눈 위에 아른댔다.

신음하며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불현듯 든 생각에 고개를 들어 넥타이를 이로 물었다. 턱에 힘을 주고 아래로 당겨 내자 매듭이 풀리는 대신 넥타이가 조금 내려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

“…….”

쯧, 남자가 짧게 혀를 차며 내 몸을 뒤로 확 뒤집었다. 침대에 내리누르고 양 손등을 붙잡아 틈 없이 몸을 겹쳐 오는 바람에 납작하게 깔린 채 다시 아래가 꿰뚫려야 했다.

“으응! 아, 왜…… 왜 이러는 건데요…….”

온몸이 그에게 깔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젓다가 뒤를 돌아보려고 하자 그가 목덜미를 혀로 길게 핥았다.

“가만히 있어.”

“왜요……!”

“기분 좋은 거 실컷 해야지.”

다시 서러운 울음이 터졌다. 한동안 열리지 않았던 길이 재차 거칠게 쑤셔지니 버겁기도 하고, 상실을 겪고 나서도 내가 휘두르는 데 한계가 있는 남자를 향한 갈망이 차올랐다. 계속 이런 식이면 안 된다. 또 이렇게 어물쩍 넘어가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아아……!”

그가 움직일 때마다 침대가 함께 삐걱대고 이불이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급하게 고개를 저으며 내 손을 덮고 있는 남자의 손등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눈물 젖은 볼을 문지르고, 눈두덩을 비비고, 이로 깨물고, 핥아 댈 때마다 나를 짓누르는 무게감은 더 강해졌다.

“흐응!”

기어이 절정이 찾아와 나는 새된 비명을 내지르며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가장 깊은 곳에 사정을 한 남자의 성기는 그 상태에서 다시 부피를 키웠다.

쉽사리 빠져나갈 것 같지 않은 분위기라 훌쩍이며 돌아보려는 찰나 그가 나를 품에 안은 채 몸을 옆으로 눕혔다. 여전히 얼굴은 볼 수 없게끔 뒤에서 옭아맨 자세였다.

“읏, 그만, 흐윽…… 이런 식이면, 아아, 나 안 할 거야……!”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허리를 쳐올렸다. 그가 아무리 귀를 핥고, 깨물고, 목덜미와 머리카락에 입을 맞춰 줘도 마음은 충족되지 않았다. 나는 다급히 몸을 휘감고 있는 팔을 붙잡았다. 헐벗은 나와 달리 남자의 몸을 뒤덮고 있는 수트를 손안에 구겼다.

“키스할래, 키스해 주세요.”

“나중에.”

“흐윽…….”

무심한 대꾸에 서러운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가 움직이는 대로 이리저리 휘둘렸다.

기어이 또 나를 보지 않은 채 사정을 한 남자가 내 몸을 꽉 끌어안고 뭉근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또 안이 가득 메워졌다. 두 번이나 사정을 했으면서 곧장 발기한 성기가 여전히 안을 차지해 막연히 배 안이 부푸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남자가 다시 허리를 움직이려는 것 같아 흐느끼며 그를 돌아봤다.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있던 그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내 얼굴을 잡아 돌렸다.

“내가…… 싫어졌어요?”

“그러기엔 너무 발정 난 것 같지 않아?”

“그럼 왜 나 안 봐요?”

“…….”

“이렇게 얼굴도 안 보고 하는 거, 흑, 싫어…….”

그제야 남자가 무자비하게 안을 헤집던 걸 멈추고 깊은 한숨을 뱉었다. 흐느끼느라 연신 들썩이는 가슴팍을 커다란 손바닥이 느리게 두드렸다.

“최선을 다해서 기분 좋게 해 주는데 왜 울어.”

“…….”

“쑤셔 주는 거 좋아하잖아.”

나는 남자의 팔을 때리며 불시에 고개를 돌렸다. 다시 눈이 마주치자 안을 채우고 있던 성기가 조금 더 부푸는 게 느껴졌다.

“나 좋으라고 하는 거 맞아요?”

“무슨 뜻이야?”

“나를…… 그쪽 성욕 푸는 도구로 쓰는 건 아니고요?”

“뭐?”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더니 성기를 빼냈다. 그제야 안을 채우고 있던 정액이 다리 사이로 흘러내렸다.

“도구?”

“지금 하는 짓이 그렇잖아요. 내 얼굴은 보지도 않고, 그쪽 마음대로 엎어 두고 박기만 하고.”

“…….”

“몸이 달았다더니 그래서 나를 도구처럼 막…….”

“그래, 관둬.”

남자가 무섭게 내 말을 잘라 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옷감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단추 하나만 겨우 연결된 잠옷 상의를 추스르지도 않은 채 더듬더듬 매트리스를 짚고 일어났다. 그러곤 남자의 얼굴에 애매하게 걸려 있는 넥타이를 벗겨 냈다.

“그럼 왜 이런 짓 해요?”

“…….”

신경질적으로 넥타이를 바닥에 집어 던지자 남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여전히 나를 보지 않는 게 답답해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타 얼굴을 붙잡았다. 그제야 남자가 짧은 한숨과 함께 나를 돌아봤다.

“나 보고 싶었잖아요.”

남자의 눈매가 미묘하게 굳었다. 찰나의 변화지만 아까부터 짐작하던 게 있어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남자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며 내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밀어 넣었다. 그가 나를 떼어 놓기 전에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바짝 올라붙은 성기가 음부에서 아랫배까지 자리했다.

“더 할 거 아니면 떨어지자.”

“나 없는 동안 많이 보고 싶었죠?”

“…….”

“그동안 못되게 군 거 후회도 했을 거야.”

“…….”

“그런데 왜 나 안 봐요? 왜…… 안 보여 줘.”

더듬더듬 남자의 눈가를 매만졌다.

“그쪽이 나를 어떤 눈으로 보는지 알아요?”

“…….”

“예뻐 죽는 거 다 티 나.”

“나겠지.”

그가 내 손을 치워 내며 태연히 대꾸했다.

“보고 있으면 나도 감당이 안 되는데.”

“…….”

“그러니까 좀 안 보게 해 줘.”

“…….”

“오빠도 숨 쉴 구멍 하나는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싫어요.”

눈물로 젖은 얼굴을 남자의 가슴팍에 묻었다.

“어차피 다 아는데 눈 가리고, 내 얼굴 안 볼 거 뭐 있어. 피차 다 아는데.”

“그런데 도구 소리를 했네.”

“그 정도 헛소리는 해야 멈출 거 같아서요.”

“…….”

“아닌 거 알아요. 그쪽이 나를 그런 취급 안 하는 거 누가 몰라.”

고개를 들자, 한 방 먹었다는 듯 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얼굴이 있었다.

“너는 왜…….”

그가 잠깐 말을 멈췄다. 뭔가 복잡한 듯 눈을 찌푸리고 입을 다물어 버리는 바람에 나는 또 애가 타야 했다. 하여튼 뭐든 쉽게 주는 법이 없다. 남자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눈만 들어 빤히 바라보자 아랫배에 눌려 있는 성기가 꿈틀댔다.

“나는 아이 필요 없어요.”

“…….”

“살면서 한 번도 임신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임신은 무슨, 섹스도 하고 싶었던 적 없어요. 그쪽 만나기 전엔.”

“…….”

“알잖아요. 내가 이런 거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그쪽밖에 없는 거.”

남자는 미동 없이 앉아서 그저 나를 받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단단한 몸에 온 무게를 실어 기댔다.

“혹시 그거 신경 쓰고 있는 거면 그러지 말라고 하는 말이에요.”

“…….”

“나는 이대로도 좋아요. 그쪽이랑 평생 단둘이 살아도 행복해.”

“그게 아니니 그랬겠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움찔, 고개를 들자 그가 내 머리를 제 품에 묻어 또 나를 보지 않으려 들었다.

“진짜예요. 그쪽만 내 옆에 있으면…….”

“오랜만에 죽이고 싶은 놈이 생겼는데.”

“…….”

“그게 나면 어떻게 해야 될까.”

“……네?”

당황해 남자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지그시 내리누르는 힘을 이길 수 없었다.

“그런데도 여길 왔네, 내가.”

“…….”

“그런 걸 겪게 하고도 왔어.”

“…….”

“나 진짜 개새끼다, 안 그래?”

“난…… 그쪽 옆에 있겠다고 다짐했을 때부터 평범한 연애 같은 건 할 생각 없었어요. 결혼도, 아이도 바란 적 없…….”

“그래서 개새끼라는 거야.”

“…….”

“왜 네가 나처럼 살아야 할까.”

혼잣말하듯 끝이 떨어지는 음성에 내 심장도 덜컥 내려앉았다. 쿵쿵쿵쿵, 기댄 가슴팍에선 남자의 심장이 거칠게 울려 대고 있었다.

“애기야, 미안한데.”

설마.

여기까지 왔는데, 나를 또 밀어내려는 건 아니겠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남자가 처음으로 나를 잡으러 왔는데, 이게 마지막이라면 나는 정말…….

“그래도 버리기 전까진 오빠 혼자 두지 마.”

쿵, 순간 심장이 너무 크게 울려서 귀가 먹먹했다. 내 심장 박동인지 남자의 것인지 명확히 구분이 되진 않지만, 둘 다 별반 다를 건 없었다.

나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다 더듬더듬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남자는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아예 손바닥으로 내 눈을 가려 버리는 바람에 애끓는 탄식이 뱉어졌다.

“나 원래 나쁜 새끼잖아. 평생을 그렇게 살았는데 어쩌겠어.”

“…….”

“마음 같아서는 나를 죽이고 싶었는데.”

“…….”

“그럼 네가 많이 울겠지. 그래서 참다 보니까.”

“…….”

“여기네.”

“…….”

“그냥 개새끼 할게. 내가.”

분명 여느 때와 다름없이 덤덤한 음성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횡설수설하는 것처럼 들렸다.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절대 취하지 않는 사람인데……. 나는 남자의 손안에서 눈을 깜빡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

“그냥…… 알아듣기 쉽게 말해요.”

“뭘.”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다고, 미안해 죽겠다고 하면 되잖아요.”

“…….”

“그걸 뭐 그렇게 돌려서 말…….”

말이 끝까지 맺어지지 못했다. 남자가 혀를 밀어 넣은 탓이었다. 길고 두툼한 혓바닥이 정신없이 입 안을 헤집어 댔다.

“흐응…….”

키스를 하는 틈을 타 눈을 가린 남자의 손을 떼어 내고 싶었지만, 그는 그렇게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숨 쉬는 게 벅찰 만큼 거칠고 난잡하게 키스를 쏟아붓던 남자가 한 손으로 내 엉덩이를 들어 올리고 아래를 맞췄다. 굵은 기둥이 계속 새어 나오는 정액과 애액으로 눅진한 아래를 손쉽게 파고들었다.

“아응……!”

눈을 가리고 입을 틀어막은 채 아래까지 가득 채우니 벅차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죽을 만큼 내가 보고 싶었다는 고백을 들었으니 더더욱. 비록 완벽한 문장은 듣지 못했지만, 이 정도만 해도 큰 발전이었다.

그가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몸이 위로 솟았다가 아래로 내리꽂히며 쾌락이 퍼져 나갔다. 내 눈을 덮은 남자의 손을 붙든 채 끙끙대자, 그가 낮은 욕설을 뱉으며 내 몸을 꽉 끌어안았다. 조금의 틈도 없이 단단한 팔 안에 몸이 갇히고, 그 상태로 연신 아래가 쑤셔졌다.

“아, 빠…… 빨라요, 흣! 조금만 천천히……!”

내가 애원하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는 안을 찧어 대기만 했다. 아무래도 내 앞에서 속내를 까 보인 걸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 덕에 우리 미래의 희망을 봤다. 언젠간 남자가 내 앞에서 완벽히 솔직해지는 날이 올 거라는 확신이 들었고, 그건 곧 안심이 되었다.

헐떡이며 눈을 가리고 있는 남자의 손을 붙잡았다. 꿈쩍도 하지 않고 연이어 안을 쑤셔 대는 것에 내벽이 한껏 조여들며 남자를 옥죄었다. 그리고 그가 사정하는 그 찰나의 순간, 잠깐 신경이 다른 곳으로 향한 틈을 타 손을 치워 냈다.

“흐읏…….”

“…….”

구겨진 남자의 얼굴은 쾌락 때문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그와 지그시 눈을 맞춘 채로 남자의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한 번만…… 한 번만 더 비겁하게 도망쳐 봐.”

“…….”

“그땐 진짜 가만히 안 둘 거예요. 땅을 치고 후회하게 만들 거야.”

쾌락의 여운인지, 아니면 남자를 향한 비대한 갈망 때문인지 몸이 잘게 떨렸다. 바들바들 떠는 나를 그가 말없이 응시했다.

“그러니까 그쪽도 나 혼자 두지 마요.”

“…….”

“내 옆에서 그쪽이 초라해진다면, 그냥 초라해져요. 나까지 밑바닥에 처박힐까 봐 두려우면, 두려워해요. 내 사랑이 닳을까 봐 걱정되면 걱정해요. 불안해해. 전부 다 내 옆에서.”

“…….”

“내 옆에 있을 때마다 마음에 짐이 쌓여도 그건 당신 몫이니까 받아들여요. 그쪽이 마음고생하든지 말든지, 이제 난 몰라요. 그냥 나만 안 비참하면 돼.”

정말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내가 말을 하면서도 참 못됐구나 싶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은 편했다. 자신을 내 곁에 두지 못하는 남자의 사랑 방식을 받아들이겠다고 했을 때보다 훨씬 더.

“나 때문에 그쪽 자존심이 깎이면 깎여요, 그냥. 그렇게 해서라도 내 옆에 있어요.”

“…….”

“관심 없는 남자들이랑 선보는 것도 지겨워. 다 집어치워요.”

“…….”

“그쪽만 나쁜 놈인 줄 알아요? 나도 개새끼 할 수 있어.”

“…….”

“더 이상 나 상처 주지 마요. 내 행복을 위해서 당신이 좀 희생해. 정말 나한테 미안하면.”

지금까지 살아온 남자의 인생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궁금하지만 억지로 캐낼 생각도 없다. 어찌 됐든 나에게 중요한 건 남자의 과거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하는 이 순간과 내일이니까.

우리가 내일도 함께 있을 수 있는 방법이 뭘까. 나는 남자와 떨어져 있는 내내 고민했다.

남자가 자신을 보잘것없이 여기는 건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남자가 인생을 살아가고,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그 고유한 습성을 뜯어고칠 생각 역시 없었다.

나는 지금껏 그런 식으로 살아온 오늘의 남자를 사랑하고 있으므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남자의 옆에 남으려면 그 모든 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만 참으면, 나만 속상하면, 나만 애가 타면 관계가 유지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불안은 쌓이면 균열을 일으킨다. 균열이 반복되면 파멸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럼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반대, 불안을 견디지 않는 것. 나의 행복을 위해 그의 자존심이 무너지더라도 아랑곳하지 않는, 남자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 행복을 가장 우선시하는 이기적인 태도밖에 없었다.

내 이기심은 남자의 사랑에 면죄부를 준다. 이건, 내가 마지막으로 던지는 여지였다.

나는 기꺼이 당신을 위해 못돼질 테니, 당신은 내 옆에서 마음 편하게 개새끼가 되라고.

“그 대신 나도 그쪽 혼자 두지 않을게요.”

“…….”

“계속 옆에 있어 줄 테니까, 그러겠다고 약속해. 이 나쁜 놈아.”

“…….”

남자는 나를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세상이 멈춘 듯 고요했다. 그 무거운 침묵 속에서 우리는 내내 눈을 맞추고 있었다.

한참동안 말이 없던 그는 내 안에서 나가지 않은 채로, 그러니까 내 안에 갇혀서 온전히 내 것이 된 채로, 조용히 대답했다.

“그래.”

결국 이것을 평범한 연인의 대화로 치환하면, 영원한 사랑을 속삭이는 것과 다름없다.

그것을 남자도 아는지 표정이 미묘했다. 낯설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불편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거부감을 느끼는 것도 같고, 죄책감도 어렴풋이 보였다. 그러나 가장 명확하게 떠오르는 것은 역시…….

“너는 왜 갈수록 예쁠까.”

남자가 마지막까지 맺혀 있던 내 눈물을 엄지로 닦아 주었다.

“사랑을 많이 받아서 그런가 봐요.”

“어떤 새끼가 오빠 허락도 없이 그런 걸 줬어?”

“있어요. 대호라고.”

남자는 제 눈을 가리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 정확하게는, 내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사람이 나 되게 사랑해요.”

“…….”

“나 없으면 못 사나 봐.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대요.”

“그래?”

“근데 나도 그 사람 사랑해요. 그러니까 죽이지 마요.”

“저런. 잘못 걸렸네, 애기야.”

그가 눈을 찌푸리며 웃었다.

“어쩌다 그런 새끼랑 엮였어.”

키스를 하기 위해 다가오는 남자는 완벽한 패배자의 얼굴이었다.

“나 아직 용서, 흣, 안 했는데…….”

“그래서 지금 빨아 줄 생각이야. 다리 벌리고 누워.”

“이런 거 말고, 으응…… 그냥 말로, 아, 대화, 대화 더 해요. 아직 할 말 많…….”

“오빠는 이쪽이 더 능숙하잖아.”

“아으응……!”

“그것 봐.”

다시금 행복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인생은 새옹지마라 살아가며 또 숱한 고비를 겪어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당장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다. 맞닥뜨려야 한다면 그래야지, 별수 없다.

다만, 두렵지 않은 것은 앞으로의 모든 희로애락을 남자와 함께 겪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그러겠다고 했으니까. 내 옆에서 불안, 걱정, 초라함까지 전부 감내하겠다고 대답했으니까.

그러니 일단 지금은 이 행복에 잠겨도 되지 않을까.

남자와 함께.

아주아주 깊이.

기왕이면 영원하길 바라며.

어쨌거나, 사랑하니 말이다.

<3권 외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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