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01 (13/14)

외전 01

─사람이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내 옆에 잠들어 있는 남자를 보고 있으면 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밤새 몸을 섞은 뒤 지쳐 나가떨어지는 건 대부분 내 쪽이라, 잠든 그를 구경할 기회는 흔치 않다. 오늘은 드물게 먼저 눈이 떠져 아침 햇살에 의지해 남자를 마음껏 바라보는 중이었다.

이불을 끌어안은 채 남자의 옆에 바짝 붙어 잠든 얼굴을 눈에 담았다. 눈을 가지런히 감고 조용히 숨만 뱉는 그는 아주 평온해 보였다. 이토록 무해한 모습이라니. 지난밤 진득하게 내 몸을 탐했던 남자와 다른 사람 같았다.

물론 나는 흥분한 남자의 얼굴을 좋아하지만, 희소성 있는 온화한 얼굴도 좋았다. 뭐, 어떤 모습이든 다 좋겠지만.

“얼굴 닳겠다.”

한창 감상을 하던 와중에 들리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몸이 움찔 떨렸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남자가 입매를 살짝 비틀었다. 아쉽지만 그는 평소에도 얕은 잠을 자기 때문에 내가 감상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잘 잤어요?”

나는 남자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몸을 좀 더 밀착했다. 그러자 단단한 팔뚝이 머리 밑을 파고들었다.

“올라와.”

“네?”

“하고 싶어서 꼬시고 있던 거 아니었어?”

“꼬시긴 뭘 꼬셔요.”

어이없다는 내 반응에 그제야 남자가 천천히 눈을 떴다.

탁한 눈동자가 지그시 나를 내려다보았다. 잠기운이 살짝 남아 있는 나른한 얼굴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자, 그가 고개를 틀어 내 엄지를 아프지 않게 물었다. 남자의 혀가 느릿느릿 움직여 손가락을 핥을 때마다 저절로 얼굴에 열이 몰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혼자 넘어갔네.”

“꼬시는 건 자기면서…….”

“내가 네 자기는 아니지.”

얄미운 남자의 입에서 손가락을 빼내고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새 단단해져 있는 기둥을 가볍게 훑자 그가 피식 웃으며 내 정수리에 입술을 묻었다.

“그래서? 그냥 둘 거야?”

“……한 번만 해. 자기야.”

일부러 덧붙이는 호칭에 남자의 표정이 더 노골적인 욕망을 띠었다. 사실, 피차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남자가 내 시선만으로 발기하는 것처럼, 나는 그를 눈에 담고만 있어도 아래가 젖어 드니까.

이불을 옆으로 치워 내고 남자의 성기 위에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탁한 눈동자가 나를 천천히 훑어 내렸다. 특히 유두를 집요하게 바라보기에 망설이다 손을 잡아끌자, 그가 가슴을 크게 움켜쥐었다.

“아…… 아파요. 살살…….”

“힘 별로 안 줬는데.”

“그래도…….”

“밤새 빨지도 못하게 하더니 너무하네.”

평소보다 가슴이 예민한 건 사실이었다. 어제도 남자가 혀를 가져다 댈 때마다 미묘하게 아릿해서 못 건드리게 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섹스 내내 가슴 대신 엉덩이를 주물러 댄 남자 때문에 아직도 살덩이가 얼얼했다.

“생리할 때 다 되어서 그런가 봐요.”

“안 그랬잖아.”

“그건 그렇지만…… 체질이 바뀌었나 보죠. 원래 그래요. 생리통 없던 사람이 갑자기 생기기도 하고. 살살 만져요. 응?”

“생각해 보고.”

남자는 내키지 않는 얼굴을 하고서도 순순히 손에 힘을 풀었다. 아프지 않게 어루만지는 그에게 가슴을 내맡기고 허리를 살짝 비틀자, 축축한 음부 사이에 단단한 기둥이 짓눌렸다.

허리를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은밀한 부위가 미끈하게 비벼지며, 옅은 자극이 천천히 몸 안으로 퍼져 나갔다. 남자는 내가 하는 것을 지켜보며 느리게 유방을 쓰다듬었다.

“빨고 싶은데.”

“흣, 다음에, 응…….”

“좋은 건 혼자 다 하네.”

그가 점점 빨라지는 내 허리를 보고 픽 웃었다. 나는 못 들은 척하며 골반을 좀 더 당겨 앉아 볼록해진 음핵을 뭉근하게 문질렀다.

“좋아요…… 아, 좋아.”

남자가 몸 안에 꽉 들어차는 것이 무엇보다 좋지만, 가끔은 이런 전희도 황홀하다. 움직일 때마다 가슴이 출렁이고 유두는 좀 더 바짝 솟아올랐다. 그 모습을 관람하는 남자의 시선이 야릇해 온몸에 전율이 끼쳤다.

“읏, 이제 넣을게요.”

“더 즐기지 왜.”

“넣을래. 하고 싶어요.”

몸을 살짝 일으키고 남자의 성기를 세웠다. 귀두와 질구를 맞추는 동안에도 아래에서 연신 액이 흘러내렸다.

“아…….”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내내 안을 쑤셔 댔던 건데 쉽사리 들어가지 않았다. 아무리 몸을 오래 섞었어도 이 크기는 익숙해질 만한 게 아닌 데다가 아래가 너무 젖기도 했고, 내내 괴롭혀진 탓에 몸에 힘이 없기도 했다.

몇 번을 미끄러지며 넣는 데 실패하자 저절로 울상이 지어졌다. 그런 나를 남자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즐거운 얼굴로 구경만 했다.

“보지만 말고 좀…….”

“언제까지 오빠가 다 해 줄 수는 없잖아. 잘 좀 해 봐.”

“…….”

나는 원망스레 그를 쏘아보다 다시 아래를 맞췄다. 그러나 밤새 남자에게 잡혀 강제로 결박당했던 손이 제힘을 발휘하지 못해 또 실패했다.

“그쪽이 힘 다 빼 놔서 그런 거잖아요.”

“그래서?”

“책임져요.”

남자가 상체를 세워 침대 헤드에 기댔다.

“책임을 섹스로 지라니. 야해라.”

“그쪽이…….”

“엉덩이 들어.”

남자가 명령으로 내 말을 일축했다. 나는 입을 삐죽이면서도 내심 기대하며 순순히 따랐다.

그의 어깨를 붙잡고 몸을 지탱한 채 밉지 않게 눈을 흘기자, 남자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꺾었다. 내 입술을 지그시 내려다보는데 원하는 게 아주 선명했다. 흥, 가벼운 콧방귀를 끼며 모르는 척하는 찰나, 불시에 기둥이 안을 파고들었다.

“아아……!”

남자를 내 몸으로 소유할 수 있는 이 행위는 언제나 나를 벅차게 만든다. 이대로 온전히 내 것이 되면 좋을 텐데. 사라지지 않은 욕심은 여전히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지만, 티 내지 않는 법을 익혔다.

가쁜 숨을 뱉으며 남자를 바라보자 그가 얼굴 곳곳에 가벼운 입맞춤을 내렸다.

그래. 이거면 충분하다. 이 정도만 해도 행복해. 정말로.

나는 완전히 주저앉아 가장 깊은 곳까지 그를 품었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

“하으…….”

“오빠 기다리고 있잖아.”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고 입술을 맞붙였다. 동시에 혀가 얽혀 들며 그가 허리를 세게 쳐올렸다. 푸욱, 살이 섞이는 소리와 침이 뒤엉키는 소리가 질척거렸다.

“우으, 읏! 아…… 조금만, 천천히 해요…….”

몸이 사정없이 위로 솟았다가 내리박힐 때마다 안쪽이 죄다 자극되었다. 아무리 천천히 해 달라고 애원해도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오히려 혀를 더 진득하게 놀려 댈 뿐이었다.

안 먹힐 줄은 알지만 이렇게라도 말리지 않으면 어디까지 폭주할지 몰라서 나는 매번 섹스를 할 때마다 매달리는 입장이었다. 남자도 이러는 걸 꽤 좋아하는 것 같고.

“으응, 아!”

감당하기 벅차 키스도 포기하고 그의 목을 끌어안은 채 새된 신음을 뱉었다. 점차 차오르는 쾌락에 허리가 멋대로 펄떡이며 남자의 것을 더 깊이 받으려 애썼다. 그도 눈치챘는지 내 귓가에 낮은 웃음을 흘렸다.

“너무, 깊어……!”

“그래?”

“아아……!”

불시에 그가 내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전율하던 아래가 단숨에 허전해졌다. 망연한 기분에 멍하니 숨을 헐떡이다 고개를 들자 남자가 나를 도로 침대에 눕히고 올라탔다. 애매한 쾌락에 달아오른 아래가 연신 뻐끔대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왜, 왜 빼요. 왜…….”

“너무 깊다니까 다칠까 봐.”

“하…….”

어처구니가 없다. 뱃가죽이 뚫리면 어떡하나 싶게 쑤셔 박을 때는 언제고.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아하니 또 나를 놀려 먹으려는 게 분명했다. 4년간의 평화로운 동거 생활로 알게 된 건, 남자가 기분이 좋을 때 꽤 짓궂어진다는 점이었다. 밀어내며 애태우는 것과는 다르고, 순수하게 나를 놀리며 즐거워하는 것이다.

남자와 순수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지만, 한편으로는 어울린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도 그는 꽤 유치한 면이 있었다. 시답지 않은 장난을 걸어오고, 날카로운 내 반응을 즐기고, 귀찮게 굴고.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지 않을 것 같은 남자는, 여전히 그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장난 그만하고 빨리 넣어 줘요.”

“갈수록 밝히네.”

정작 나는 이렇게 만들어 놓고.

“그래서 싫어요?”

“누가 그래.”

그가 가볍게 맞받아치며 성기를 살짝 밀어 넣었다. 삽입되는 감각이 못 견디게 황홀했다. 그러나 여전히 나를 놀려 먹고 싶은 모양인지, 남자가 귀두만 넣은 채 얕게 깔짝댔다.

“아…… 뭐 하는 거야. 진짜!”

짜증을 내며 고개를 들자, 그가 낮게 웃으며 연신 놀리듯 허리를 살짝만 움직였다. 진짜 짜증 난다. 얄미워 죽겠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왜 귀여워 보이는지 모르겠다. 콩깍지가 쓰여도 제대로 쓰였지. 저 무서운 남자가 귀엽다니. 정말 사랑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빨리요…….”

“글쎄.”

“아읏…… 너무해.”

애타는 것과는 별개로 마음이 말랑해져 투정 부리듯 남자의 가슴팍을 가볍게 때렸다. 그의 시선이 간지러운 손길에 닿았다. 손톱으로 남자의 유두를 살짝 긁으며 애원하듯 올려다보자, 그가 설핏 눈썹을 찌푸렸다.

“애교 부리는 거야?”

“으응…….”

“똑똑하네.”

“읏!”

불시에 아래가 거칠게 꿰뚫렸다. 깊은 곳까지 파고든 성기가 끝까지 빠져나갔다가 다시 거세게 안을 채우며 푹푹, 쑤셔 대기 시작했다. 그가 허리 짓을 할 때마다 몸이 위로 치받치며 잠깐 멈췄던 쾌락이 다시금 치솟았다. 나는 연신 남자의 가슴팍을 손으로 긁었다.

“흣! 아윽, 아아……!”

남자의 짓궂음을 알아차렸다는 건, 그럴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깨달았다는 말이다.

그는 간지럽게 구는 것에 약했다. 내가 솔직하게 욕망할 때도 정신없이 달려들지만, 그의 말을 빌려 소위 애교라는 걸 부리면 조금 더 반응이 빨랐다.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런 쪽의 감정을 낯설어하는 것 같았다. 지금도 그는 가슴을 짚은 내 손을 그냥 두지 않고 붙잡아 길게 핥아 올렸다. 적당히 하라는 듯이.

“아아……!”

쉴 새 없이 박혀 드는 아래를 감당하지 못하고 기어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나는 부러 내 머리 옆으로 뻗은 남자의 팔에 뽀뽀를 퍼부었다. 입술이 자잘하게 닿을 때마다 그의 팔뚝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하으, 조, 좋아, 읏……!”

한껏 안을 조이며 남자가 사정하는 것까지 모조리 받고 나서야 몸이 축 늘어졌다.

“아…….”

그러나 전부 쏟아 내고도 다시금 발기한 기둥이 질척한 안을 느리게 휘저었다.

“그만…… 한 번만 하기로 했잖아요.”

“난 대답한 적 없는데.”

“밤새 괴롭혔으면 됐지, 아침부터 지치게 할 거예요?”

“못할 건 뭐야.”

“흐읏, 안아 줘요. 나 힘들어…….”

“…….”

팔을 뻗어 목에 두르자 남자가 짧게 혀를 차며 순순히 성기를 빼냈다. 주룩, 정액과 애액이 뒤섞여 흐르는 게 느껴졌다. 그 감촉에 허리를 움찔대며 허벅지를 딱 붙이자, 남자가 옆에 누워 나를 제 품으로 이끌었다.

“왜 자꾸 귀엽게 굴지.”

“나 아무것도 안 했어요.”

“하던데.”

“그냥 그쪽 눈에 내가 귀여운가 봐요. 가만히 있어도.”

뻔뻔한 대답에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발기한 성기를 아랫배에 지그시 눌렀다. 아직도 부족한지 빤히 내려다보는 눈빛을 모르는 척하고 남자의 가슴팍에 이마를 비볐다.

“오늘도 일 나가야 해요?”

“글쎄.”

“주말인데, 같이 있으면 안 돼요? 이틀이나 나 혼자 뒀잖아요.”

“힘들다며. 감당할 수 있겠어?”

바람 빠지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머릿속에 그 생각밖에 없나 봐.”

“새삼스럽긴.”

“감당할 수 있다고 하면 있을 거예요?”

고개를 들자 남자는 알 듯 말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장난스레 그를 힐난하며 뜨거운 살결에 몸을 좀 더 묻었다.

“데이트하고 싶어요. 같이 영화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산책도 하고.”

“…….”

“참, 오랜만에 쇼핑도 해요, 우리. 그쪽도 겨울 옷 사고, 내 것도 사고. 그쪽 건 내가 골라 줄 테니까 내 건 그쪽이 골라 줘요.”

“그런 건 애인이랑 해.”

이제 이런 발언쯤은 가볍게 흘려들을 정도는 되었다.

“나 애인 없으니까 자기가 시간 좀 때워 줘요.”

“곧 진 사장 쪽에 몇 명 넘길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 좋은 소식 올 거야.”

하여튼 한 마디도 안 진다. 다시 가슴팍을 툭, 때리며 남자의 턱에 입술을 붙였다.

“전부 걷어찰 건데.”

“알아서 해.”

“씻고 올게요. 나가요.”

“안 돼.”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남자가 이마에 입을 맞췄다. 역시 바쁜 건가 싶어 아쉬워하는 찰나 그가 속삭였다.

“씻겨 주는 건 오빠 몫이지.”

“…….”

“그 전에 이건 어떡할까?”

그가 제 아래쪽으로 턱짓을 했다. 나도 모르게 비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몰라. 알아서 해요.”

“무책임하네.”

웃는 나를 빤히 바라보던 남자가 내 다리 한쪽을 들어 올렸다. 데이트에 응해 줬다고 또 쉽게 녹아내린 나는 못 이긴 척 아래로 파고드는 성기를 받아들였다.

“흐으응…….”

“이렇게 좋아할 거면서.”

남자가 피식 웃으며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춰 댔다. 진득하게 허리를 쳐올리며 연신 내 얼굴을 훑어 내리는 눈빛에는 늘 그렇듯 숨기지 못하는 감정이 가득 들어 있었다.

“으응…… 좋아요. 사랑해.”

기다렸다는 듯이 이어지는 키스에도.

* * *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을 쭉 돌이켜 보면 나 역시 불행과 행복이 막무가내로 찾아왔으니 정말이지 옛말은 틀린 게 하나 없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을 꼽으라면 남자를 만난 것이고, 남자의 존재 역시 나에게 불행과 행복을 번갈아 선사했다. 지금은 단연 행복의 사이클을 타는 중이었고. 말만 밉게 하지, 결국 주말 동안 내가 하자는 대로 다 해 준 남자 덕에 며칠째 풍족한 심정이었다.

특히 영화를 보는 내내 팝콘을 먹여 달라고 했더니 아예 내 쪽으로 틀어 앉아 느릿느릿 팝콘을 물려 주던 모습이 시시때때로 떠올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도중에 장난을 친다고 입술에 닿은 남자의 손가락을 빨았다가 끌려 나가 차에서 옷이 모조리 벗겨졌지만. 뭐, 애초에 영화는 핑계였고 남자와 간지럽게 놀고 싶었던 것뿐이니 목적은 다한 셈이었다.

그러고 보면 날이 갈수록 남자가 욕정을 참지 못하고 달려드는 일이 잦다. 물론 남자는 원래 욕구에 충실한 사람이지만, 단순히 몸이 달아서라기보다는 억누른 감정을 표출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었다. 이를테면 유달리 키스에 집착한다거나. 특히 작년쯤부터는 그가 집에 오는 날이면 꼼짝없이 붙잡혀 밤을 꼴딱 새워야 하는 일이 허다했다.

그 괴물 같은 체력을 감당하는 건 벅차지만, 당연히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섹스가 남자의 마음을 대변하는 걸 아는 이상 나도 함께 불이 붙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생각해도 들뜨는 기분이라, 점심을 먹기 위해 가벼운 발걸음으로 구내식당에 들어섰다. 식당 안에 음식 냄새가 가득했다. 오늘 메뉴가 뭐였…….

“우욱……!”

돌연 치솟는 구토감에 당황해 입을 틀어막았다. 갑자기 뭐지?

“서을 씨, 왜 그래. 괜찮아?”

급한 대로 동료들에게는 눈으로 곤란함을 내비치고 얼른 화장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식당에서 멀어질수록 메스꺼움이 가라앉는 것도 같았다. 세면대 앞에 서서 속을 진정시키며 거울을 바라보니 언제 행복했냐는 듯 찌푸린 얼굴이 있었다.

아무래도 구역질은 나에게 안 좋은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터라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트라우마에서 벗어난 지는 오래되었지만, 가끔 이렇게 구토감을 느끼면 과거에 경험한 불쾌함이 되살아나곤 한다.

내내 기분 좋았는데, 이게 뭐야.

입을 헹궈 내며 아침에 먹은 것들을 더듬었지만, 내 속을 뒤틀리게 할 만한 건 딱히 특정되지 않았다. 일주일에 세 번씩 방문해 집안일을 해 주는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의 음식은 늘 입에 잘 맞았고, 오늘 아침에도 기분 좋게 먹고 나왔다. 딱히 과식한 것도 아니고, 전부 신선한 재료이니 탈이 난 건 아닌 것 같은데.

“…….”

그러다 무심코 남자가 생각났다.

내가 잠든 사이에 나가는 바람에 오늘은 얼굴을 못 보기도 했고, 속이 불편하니 컨디션도 안 좋은 것 같아 투정 부리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핸드폰을 꺼냈다. 원래 아플 땐 사랑하는 사람에게 의지하고 싶은 법이니까. 그러나 차마 남자의 단축 번호를 누르지 못하고 멈췄다.

괜히 걱정시킬 필요 있을까?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환절기에 감기 몸살을 한번 크게 앓은 적이 있었다.

굳이 따지면 원인은 남자였다. 일교차가 커 낮에는 창문을 열어 두고 저녁에는 닫는 시기였는데, 낮부터 새벽까지 사람을 발가벗겨 놓고 종일 괴롭히니 버틸 턱이 있나. 서늘한 공기에 꼼짝없이 노출되어 감기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거기까진 나도 좋다고 즐겼으니까 그러려니 했지만, 내가 열이 끓자 남자가 곧장 집에 의사를 부른 건 생각 밖의 일이었다. 남자의 밑에서 일하는 의사라고 들었는데 신분이 없어서 병원에 가지 못하는 그의 무수한 흉터를 치료해 준 사람인 듯했다. 그냥 해열제나 먹고 집에서 쉴 생각이었는데 굳이 부하를 침실까지 불러서 링거니 뭐니, 팔에 줄줄이 주사를 놓게 하는 남자의 행동에 나는 아픈 와중에도 얼떨떨했다.

남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태연했지만, 열이 내려갈 때까지 담배 한 대 피우지 않고 내 옆에 붙어 있었던 걸 보면 속으로 얼마나 걱정을 했을지는 짐작되었다.

그날 이후 춥다는 핑계로 파고들면 남자는 군말 없이 제 품을 내어 주었다. 한여름에도 같은 이유를 대는 내 뻔뻔함에는 어이없다는 반응을 내보였지만 굳이 나를 떨어트리진 않았다.

“으음…….”

역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다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나를 소중하게 여길 때마다 행복하긴 하나, 그 수단이 걱정일 필요는 없다. 그러지 않아도 나는 남자의 사랑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으니까 굳이 그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애써 가라앉은 기분을 되살리려고 볼을 크게 부풀려 얼굴 근육을 풀었다. 안 좋은 기억은 잊자. 남자가 있는 한 나에게 과거의 지저분한 일 같은 게 또 생길 리 없다. 그가 언제나 뒤에서 나를 지켜 주고 있으니까. 나는 손목시계를 매만지며 마음을 가다듬고 밖으로 나왔다.

입맛이 사라져 식당으로 되돌아가는 대신 건물 1층에 있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텁텁한 속을 시원하게 해 줄 탄산음료와 혹시 모르니 소화제도 사서 바람이나 쐴 겸 바깥으로 나왔다.

나서자마자 코끝을 시리게 만드는 차가운 공기와 아직 녹지 않은 눈은 한겨울을 실감케 했다.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찬 음료를 홀짝이며 걷는데 일순 느껴지는 기시감에 고개가 옆으로 확 돌아갔다.

“어?”

남자다.

잘못 본 줄 알았다. 그러나 멍하니 눈두덩을 비비다 다시 봤을 때도 길 건너편에 남자가 서 있었다. 군데군데 눈이 쌓인 가로수 아래, 새까만 코트와 수트 차림으로 담배를 물고 있는 남자가.

놀란 나를 보며 그가 연기를 내뿜었다. 나도 덩달아 긴 숨을 뱉었다. 남자와 비슷하게 하얀 입김이 주변으로 흩어졌다.

순간 설명하기 힘든 감정에 마음이 벅차올라 절반이나 남은 음료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횡단보도로 달려갔다. 남자는 그 자리에 서서 눈으로 나를 좇을 뿐이었다. 왠지 모르게 초조해져 가쁜 숨을 내뱉다 불이 바뀌자마자 냉큼 발을 옮겼다.

점심시간이라 횡단보도를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그 틈을 헤치고 곧장 남자에게 달려가 와락 안겨 들었다. 주변에서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남자 역시 다른 데는 관심을 두지 않고 그저 나를 받아 줄 뿐이었다.

“왜 여기 있어요?”

“지나가는 길이야.”

“그냥 서 있었잖아요.”

“그런가.”

“나 보러 왔어요?”

그가 대답 대신 담배를 퉤, 뱉어 내고 발로 비벼 껐다. 나는 남자의 코트 안으로 파고들며 중얼거렸다.

“길에 꽁초 버리면 안 돼요.”

“네, 네.”

따뜻한 체온과 익숙한 체취에 얼굴을 묻고 있으니 가라앉았던 기분이 단숨에 완치되었다. 조금 더 달라붙자 그제야 남자가 내 머리를 한차례 쓸어내렸다.

“추운데 왜 나와 있어. 점심 먹을 시간 아닌가.”

“운명인가 봐요.”

“웬 동문서답이지.”

“그쪽이 여기 있는 줄 알고 밥 먹기 싫었나 봐요. 그래서 밖에 나왔나 봐. 추운데도. 본능적으로 그러고 싶었나 봐요.”

그가 가벼운 콧소리를 내며 내 얼굴을 들어 올리곤, 시린 코끝을 엄지로 살짝 쓸어 주었다.

“운명은 무슨.”

“말이라도 맞장구 좀 쳐 주면 어디 덧나요?”

“됐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시간 돼요?”

“되니 여기 있겠지.”

생각지도 못했다. 평일에 남자와 점심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을 줄이야.

정말 나를 보러 왔구나.

눈에 띄게 얼굴이 밝아지자 그가 대뜸 고개를 기울이고 다가왔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하마터면 여기가 사람 많은 대로변인 것도 잊고 키스를 받을 뻔했다. 얼른 떨어져 나가자 남자가 쯧 혀를 차며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밖이에요. 사람들 있는데 뭐 하는 거예요.”

“그러게.”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제 발밑의 꽁초를 줍는 남자의 동작은 느긋했다.

커다란 몸을 접었다가 세우는 그를 하염없이 바라보는데 새삼스레 가슴이 쿵쿵 뛰어 댔다. 남자가 좋은 거야 하루 이틀인가 싶지만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이벤트가 생기니 들뜰 수밖에 없었다.

쓰레기통에 꽁초를 던져 넣은 남자가 코트 주머니에 손을 꽂고 나를 돌아봤다.

“뭐 먹고 싶어.”

“으음.”

자연스레 그에게 팔짱을 끼며 고민했다. 남자의 등장으로 메스꺼움이 사라지니 허기가 느껴졌다.

점심시간엔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게 좋을 텐데, 날이 추우니까 따뜻한 걸 먹자고 할까? 남자는 딱히 먹을 것에 관심이 없어서 좋아하는 게 명확하지 않아 대체로 이런 경우 내 입맛에 맞추곤 한다.

연신 머리를 굴리는데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잠깐 아리송한 기분이 들었다.

“어…… 초밥 먹고 싶어요.”

내 입으로 말하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아 의문이 가득 담겼다. 남자도 느꼈는지 나를 돌아보는 얼굴이 묘했다.

“회 싫어하지 않나.”

“그렇긴 한데…….”

“…….”

“갑자기 먹고 싶어요. 음…… 갈까요?”

“그러든가.”

왜 난데없이 초밥이 먹고 싶은 거지?

아버지를 닮아 어릴 때부터 회는 입에 대지 않았다. 반대로 회를 좋아하는 어머니가 종종 혼자 먹을 때 아버지와 나는 옆에서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앉아 있곤 했었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하긴, 입맛은 변하는 거니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남자의 팔을 좀 더 끌어안았다.

“사람들 있는데 이래도 돼?”

그가 내 쪽으로 턱짓을 하며 장난스레 말했다. 키스를 거부한 것에 대한 약간의 앙갚음인 듯했다.

대답 대신 그의 팔뚝에 볼을 문지르자, 역시나 그 간지러운 행동에 남자의 얼굴에 이채가 스쳤다.

“애기야, 떨어져.”

“싫어요.”

“사람들 있으면 혀 못 빨 것 같지.”

“…….”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상식적인 사람이었어?”

나는 그의 음험한 속삭임에 마지못해 팔을 풀어냈다.

“팔짱 좀 꼈다고 혼자 흥분하고 난리야.”

“팔짱은. 눈만 마주쳐도 발정하는데.”

“…….”

“점심을 꼭 먹어야 할까?”

“먹어야죠…….”

고작 3, 40분 남은 점심시간 안에 남자의 욕정을 받아 낼 자신이 없어 얼른 대답했다. 어색하게 웃으며 불쌍한 척도 조금 했다.

“배고파요.”

그가 피식 웃으며 내 손을 잡아당겼다. 귀여워서 봐준다, 하는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행복을 느끼며 나는 순순히 남자를 쫓아갔다.

* * *

프라이빗 룸에서 한차례 혀가 빨리고 나서야 준비된 초밥을 먹을 수 있었다.

남자는 얼굴이 발갛게 익은 채 젓가락을 놀리는 나를 맞은편에서 가만히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어릴 때 한번 먹었다가 질색했던 생새우 초밥을 입에 물고 꼬리를 툭 따며 남자에게 시선을 던졌다.

“왜 안 먹어요?”

“먹어.”

“계속 나만 보고 있잖아요.”

그는 대꾸 없이 테이블에 턱을 괼 뿐이었다.

내 앞의 초밥은 절반이 비어 있지만, 남자의 몫은 그대로였다. 새우에 이어서 연어 초밥을 집어 먹는데 이상하리만치 입에 감겼다. 원래 이렇게 맛있는 거였나. 얼떨떨하게 우물거렸다.

“이상해요. 왜 이렇게 맛있지? 원래 비려서 싫어했거든요.”

“많이 먹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 안을 가득 채웠다.

그렇게 접시를 다 비우고 나서야 따뜻한 차로 입 안을 헹궈 냈다. 더 웃기는 건 배는 부른데 그대로 남아 있는 남자의 몫을 보니 묘하게 입맛이 당긴다는 것이었다.

힐끔대는 내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그가 군말 없이 연어 초밥을 집어 내 쪽으로 팔을 뻗었다. 나는 익숙하게 입을 벌리고 받아먹었다.

“우리 같은 회사 다니면 재밌을 거 같지 않아요?”

뜬금없는 내 말에 차를 마시던 남자가 눈을 들었다.

“이렇게 점심시간마다 같이 밥 먹고, 출퇴근도 같이하고, 회사에서도 계속 마주치고.”

“탕비실에서 섹스도 하고.”

“……왜 풋풋한 상상을 지저분하게 만들어요.”

“쓸데없는 생각이니까. 아, 해.”

다시 다가오는 젓가락을 향해 입을 벌렸다. 입을 삐죽이며 우물대자 젓가락 끝이 내 입술 위를 살짝 눌렀다.

“그만 꼬시고.”

“내가 뭐요.”

“더 먹을래?”

“먹고 싶긴 한데…… 배불러요. 그만 먹을래요.”

“그래. 그럼 일어나자.”

좀 더 같이 있고 싶지만, 시간을 확인해 보니 점심시간이 5분밖에 남지 않아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먼저 옷을 입은 남자가 내 코트를 펼쳤다. 입혀 주려는 것 같아 양팔 사이로 쏙 들어가자 그가 입꼬리를 비틀며 어깨 위로 코트를 덮어 주었다. 팔을 넣으려는 찰나 몸이 앞으로 훅 딸려 갔다.

“당분간 집에 못 가.”

“…….”

“알고 있으라고.”

남자는 절대로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속속들이 말해 주는 법이 없었다. 다만 이런 식으로 부재를 먼저 알려 주곤 했는데, 그게 그 딴에는 기다리지 말라는 배려인 건 알지만 오히려 나에게는 고문이었다. 남자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아는 이상 나는 그가 집을 비울 때마다 안전, 더 크게는 생사까지 걱정하며 불안에 떨어야 하니까.

조금 전까지 행복했던 기분이 단숨에 뒤바뀌었다. 새옹지마. 그것을 다시금 실감하며 남자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가지 마요. 나랑 같이 있어요.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왜.”

“…….”

그러나 나는 지켜야 할 선이 있다. 남자가 나를 떠나지 않게, 나는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 많은 걸 바라면 안 된다.

“……다치지 마요.”

가까스로 그 말만 뱉어 내고 고개를 숙이는 찰나, 남자가 입을 맞춰 왔다.

“그래.”

맞닿은 입술 사이로 그가 낮게 속삭였고, 나는 얌전히 입을 벌렸다.

* * *

「서을아, 아빠 보러 한번 안 오니?」

혼자 덩그러니 침대에 앉아 있다가 알림음에 얼른 핸드폰을 꺼냈더니 보이는 건 아버지의 메시지뿐이었다. 나는 긴 한숨을 뱉으며 나중에 가겠다는 답장을 보내곤 다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남자가 집을 비운 지 일주일이 넘었다. 보통 이렇게 사전에 말을 할 때면 적어도 일주일, 길면 한 달까지 소식이 없는 건 알지만 어째 나는 매번 연락을 기다리는 처지였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언젠가 아버지에게 넌지시 전해 듣기로는 TG 건설이 해외로 사업을 확장할 거라고 했다. 그래서 더 바빠지는 모양이다 싶어 이해는 하지만, 과연 그 사업 확장이 단순히 서류만 오가는 것일까 생각하면 눈앞이 아찔했다.

그래도 이제 회사가 자리 잡은 지 오래됐으니까 위험한 일은 그만하지 않을까? 정권도 유지 중이고…….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려고 노력해도 남자의 몸에 난 여러 흉터가 떠오르면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몸을 웅크리고 침대 위에 누웠다. 남자의 자리는 비워 둔 채 그 옆에 누워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 올렸다.

우리는 꽤 오래 한집에서 살긴 했으나, 정작 둘이 함께 보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래도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으니 이게 어딘가 싶다가도, 이럴 거면 뭐 하러 같이 살아, 하는 불만이 삐죽 튀어나왔다.

아, 나 왜 이러지.

분명히 남자의 방식을 받아들이겠다 다짐했고, 꽤 잘 지켜 오고 있었다. 서운한 마음도 이제는 제법 잘 조절할 수 있게 되었고. 근데 왜 새삼스레 불만이 튀어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남자의 베개를 품에 끌어안고 끄응, 앓는 소리를 뱉다가 다시 핸드폰 화면을 켰다. 남자와 주고받은 메시지 창을 여니 내가 보낸 것들만 화면에 가득했다.

그는 답장을 보낼 바엔 전화를 거는 편이라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막상 이렇게 보면 기분이 오묘해진다.

「뭐 해요?」

「오늘도 늦어요?」

「어디예요? 나 야근하는데 데리러 올 수 있어요?」

「이거 먹고 싶어요.」

「지나가다 그쪽 생각나서 샀어요. 언제 와요?」

「보고 싶어요.」

나 혼자 안달 내는 게 훤히 보이네.

생각해 보면 메시지를 보내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남자에게 전화가 걸려 와 글자 대신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았고, 가끔 보고 싶어서 데리러 와 달라는 핑계를 대면 남자는 머지않아 회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먹고 싶다는 건 꼭 사 오고, 본인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부하를 시켜서라도 보내 주었다.

그걸 다 알면서도 당장 눈에 보이는 내 짝사랑에 왠지 기분이 가라앉았다. 남자가 내 앞에 있다면 온몸으로 쏟아지는 그 애정 어린 눈빛에 금방 또 마음이 풀릴 텐데 없어서 이런 거겠지? 늘 한 겹 덮어 둔 남자의 사랑은 내 눈으로 확인해야 성에 차니까.

나는 한숨을 쉬며 핸드폰으로 날짜를 확인했다. 자정이 넘어 요일이 막 넘어간 참이었다. 오늘은 오겠…….

“……어?”

순간 놀라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내내 남자를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날짜가 당황스러웠다.

“왜…….”

생리 예정일이 한참 지나 있었다. 매달 정해진 날짜에 규칙적으로 하던 것이 벌써 일주일이나 지난 후였다. 원래대로라면 남자가 회사에 찾아왔던 그 즈음 했어야 맞다.

나는 의아하게 눈을 깜빡이다 침대에서 벗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변기에 앉아서 속옷을 내려 봤지만, 전혀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뭐지?

다시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일순 머릿속에 스치는 게 있었다.

“어…… 초밥 먹고 싶어요.”

“회 싫어하지 않나.”

“그렇긴 한데……. 갑자기 먹고 싶어요.”

온몸의 솜털이 비죽 솟아올랐다.

“설마.”

그래, 설마.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불안함에 나도 모르게 아랫배를 손으로 감쌌다.

“설마…….”

그는 진작 피임 수술을 받았다고 했고, 처음 몸을 섞은 게 6년 전이다. 그동안 한 번도 이런 적이 없는데 설마, 갑자기.

“우욱……!”

그것도 딱 한 번에 불과했다. 그 뒤로는 별다른 구토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냥 그날만 잠깐 그랬던 건데…….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하면서도 자꾸 머릿속에 다른 가능성이 파고들었다.

“아…….”

나는 다급히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일단 급한 대로 겉옷을 챙겨 입고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전원주택 단지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전부 남자의 조직원들이기 때문에 주변을 살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남자가 바쁜 만큼 그의 부하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라 불이 켜진 건물은 없었다. 대문 앞에도 차 한 대 없이 조용했다.

작년 봄쯤, 남자에게 사람을 붙이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가 나에게 사람을 붙여 감시하는 것이 내 안전을 위해서라는 건 알지만, 점점 남자의 부하들과 안면을 트게 되니 아무래도 사생활을 보이는 게 불편한 부분이 있었다. 어차피 시계가 있으니 실시간으로 위치 파악은 할 수 있지 않느냐고 설득하자, 남자는 진득하게 내 몸을 탐하고 나서야 알겠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 뒤로는 그런 대로 자유로워진 편이었다. 괜히 이 시간에 내 위치가 편의점으로 잡히면 나중에라도 남자가 물어볼 것 같아서 시계도 빼 놓고 왔다.

나는 혹시라도 아는 얼굴을 마주칠까 봐 초조하게 주변을 살피며 얼른 걸음을 옮겼다.

편의점으로 들어가니 안면 있는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웃으며 인사를 건네 왔다. 곧장 임신 테스트기를 집었다. 하나만 살까 하다가 혹시 몰라 세 개를 들고 계산대에 내려놓으며 아르바이트생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그…… 혹시 누가 저 뭐 샀냐고 물으면 과자 샀다고 해 주세요.”

만약을 대비해 조심스레 부탁하자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던 아르바이트생이 이내 임신 테스트기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재차 부탁하고 테스트기를 코트 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설마. 아니겠지. 이제 와서 왜? 지금까지 피임 잘만 되다가. 갑자기 왜?

연신 마음을 가다듬으며 집에 돌아오자마자 화장실에서 테스트기 하나를 뜯었다.

“…….”

그리고 두 개, 세 개. 구매한 것을 전부 사용했다.

“어떡해…….”

총 세 개의 임신 테스트기 중 하나가 두 줄이었다.

* * *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밤새 내린 결론은 일단 병원에서 정확한 진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눈을 뜨자마자 회사에 연차부터 내고 나갈 준비를 하던 때였다.

삑삑삑삑─.

도어 록을 해제하는 소리에 코트를 입으려다 동작이 뚝 멎었다.

곧장 현관으로 향하자 신발을 벗고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떠나던 날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조금 피곤해 보일 뿐 다친 데는 없어 보였다. 그건 다행이었으나, 내내 나를 혼란스럽게 한 그 두 줄 때문에 여전히 심장은 불안하게 뛰어 댔다.

“잘 있었어?”

남자가 선선히 인사를 건네며 다가왔다. 그에게 묻어 있는 찬 바람이 내 쪽으로도 훅 끼쳤다. 내가 멍하니 서 있기만 하자 뭔가 이상했는지 고개를 살짝 기울이던 그가 문득 미묘한 얼굴을 했다.

“뭘까, 이건.”

“흑…….”

다짜고짜 울기 시작하는 나를 그는 한 뼘 떨어진 곳에서 지켜봤다.

눈물을 닦아 주지도 않고, 안아 주지도 않는 남자의 앞에서 나는 밤새 혼자 느꼈던 복잡한 심경을 겨우 토해 냈다.

“왜…… 이제 와요…….”

“그렇게 됐어. 아침은?”

당연히 끼니를 챙길 정신은 없었다. 고개를 저으며 손을 뻗자 그제야 그가 나를 안아 주었다. 차갑지만 포근한 모순적인 온기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남자에게 말을 해야 할까? 정관 수술을 했으니 테스트기 오류일 확률이 높지만, 정말 만에 하나, 드물게 임신이 됐을지도 모른다. 밤새 인터넷을 뒤져 보니 전혀 없는 일은 아니었다.

남자의 아이. 임신. 아무리 생각을 해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단어들이었다. 한 번도 상상한 적 없기 때문인지 그저 허상으로만 여겨졌다.

사실 임신이 아닐 확률이 훨씬 크고, 차라리 그러면 다행이다. 문제는 아주아주 드물게, 정말로 임신이 됐을 경우였다. 밤새도록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 건 그 가정이었다. 남자의 아이를 가진 게 맞는다면, 남자가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어떻게 나올지가 명백하니까.

“사랑은 좀 멀쩡한 놈이랑 해.”

자기 자신조차 내 곁에 두려 하지 않는 남자가 제 아이를 그냥 품게 놔둘까? 그럴 리가 없다. 분명히 지우라고 하겠지. 그럼 나는 또 선을 넘지 않기 위해 그가 시키는 대로 할 거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시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남자를 좀 더 끌어안았다.

“오늘따라 이상하네.”

세 개의 임신 테스트기 중 양성은 하나뿐이었으나, 이상하리만치 그것만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나머지 두 개는 아니라고 했음에도 자꾸 맞는 쪽이 신경 쓰이고, 그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은…….

“보고 싶어서…….”

혹여, 임신이 우리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바보 같은 욕심이 생겨서였다.

“보고 싶었어요. 걱정 많이 했단 말이야.”

“그래 보여.”

“있잖아요…….”

고개를 들자 남자의 엄지가 젖은 눈가를 가볍게 훑고 지나갔다.

“그…….”

“말해.”

“그러니까…….”

머뭇대는 나를 그가 집요하게 내려다보았다.

─내가 당신 아이를 가지면 어떨 것 같아요?

하지만 나는 차마 그 말을 뱉어 내지 못하고 남자의 넥타이를 잡아끌었다.

“키스해 주세요.”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게 뜸들일 일인가.”

“…….”

“입 벌려.”

입술을 벌리자 곧장 그의 혀가 안을 파고들었다.

* * *

“……뭐라고요?”

충격받은 얼굴로 의사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나이 또래의 의사가 안경을 고쳐 쓰며 재차 같은 말을 했다.

“가임신입니다.”

“…….”

“다른 말로 상상 임신이라고 하죠.”

“…….”

“양성 반응이 나왔다던 테스트기는 불량인 것 같고, 말씀하신 증세는 호르몬 영향을 받아서 그럴 거예요.”

“아…….”

내내 불안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웃기게도 그랬다. 안심이 되는 게 아니라, 비참하게 부서지는 기분이었다.

상상 임신.

입덧을 하고, 생전 먹지 않았던 회가 당기고, 생리를 건너뛴 것이 정말 상상만으로 가능하다는 건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의사가 조작하는 초음파 화면에 뜬 내 배 속이 텅 비어 있는 걸 보고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상상 임신은 보통 심리적 문제인 경우가 많아요. 아직 미혼이라고 하셨는데, 지금 만나는 분과의 관계에서 아이를 갖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럴 수도 있고, 혹은 임신에 대한 거부감이 심해서 반작용으로 나타나는 일도 있어요.”

“…….”

“그 외 여러 경우가 있는데 혹시 상담을 받아 보고 싶으시면 우리 병원 정신과로 연결을…….”

“아…… 아니요. 괜찮아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요.”

나는 화면에서 시선을 떼며 간신히 대답했다.

“돌아가셔서 마음 편안하게 먹고, 시간이 지나도 월경을 하지 않으면 다시 오세요. 약 처방도 같이 해 드릴 테니까 받아 가시고요.”

“네. 감, 감사합니다.”

애써 표정 관리를 하고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왠지 오한이 느껴졌다. 덜덜 떨리는 다리로 걸음을 내딛는 찰나, 일순 아랫배가 뭔가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

“윽……!”

“괜찮으세요?”

지나가던 간호사가 재빨리 나를 부축해 주었다. 나는 괜찮다며 억지로 웃어 보이곤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욱신대는 아랫배를 움켜쥐고 한참을 도망치듯 걷다 보니 어느새 복도 끝이었다.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다 그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더 걸어갈 힘이 없었다.

“상상 임신은 보통 심리적 문제인 경우가 많아요. 아직 미혼이라고 하셨는데, 지금 만나는 분과의 관계에서 아이를 갖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럴 수도 있고, 혹은 임신에 대한 거부감이 심해서 반작용으로 나타나는 일도 있어요.”

의사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심리적인 문제. 아이를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

글쎄, 나는 살면서 한 번도 임신에 대해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성행위 자체에 혐오감을 느꼈고, 남자와 처음 섹스를 했을 때부터 정관 수술을 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단 한 번도 염두에 둔 적이 없었다.

당장 남자도 오롯이 소유하지 못한 내가 그의 아이를 원할 여유가 있을 리도 만무하고, 염두에 둔 적이 없으니 원하지 않을 필요도 없었다.

그런 내가 왜…… 임신한 사람처럼 굴었을까. 왜? 심지어 임신을 했을 때 남자의 반응을 훤히 추측하면서. 왜?

“윽…….”

다시금 느껴지는 통증에 몸을 웅크렸다. 이것도 거짓 통증이라고 생각하니 일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문득 텅 빈 손목에 시선이 닿았다. 내 위치가 병원으로 잡히면 분명 남자에게 보고가 들어갈 것 같아, 굳이 아침에 회사에 들러 시계를 벗어 두고 왔다. 연차를 냈는데 왜 출근했냐는 팀원들에게 두고 간 게 있다고 둘러댔던 것이 떠올라 가슴이 답답해졌다.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남자가 임신한 걸 알게 될까 봐 아주 전전긍긍…….

아, 짜증 나.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남자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면서도, 지금은 내 비참함이 더 컸다.

아무래도 짐작이 되어서였다.

잡히지 않는 남자를 잡고 싶은 마음, 그것을 내색하면 도망갈까 봐 꾹꾹 억눌렀던 인내가 아주 우습고 비참한 방법으로 내 몸을 이렇게 만든 게 아닐까, 싶어서.

“하…….”

어젯밤, 혼란에 빠져 있으면서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정말로 임신을 한 게 맞는다면, 남자의 아이를 가진 거라면, 그도 마지못해 고집을 꺾고 나를 받아 주지 않을까?

설마 자기 아이까지 가진 사람을 그렇게 차갑게 내치겠어? 남자가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내 몸을 고생시키면서까지 아이를 지우라고 하겠어?

그럴 바엔 나에게 져 주지 않을까. 내 손등을 태워 먹으며 남자를 잡았던 그때처럼. 남자가 유일하게 집착하는 나, 내 몸뚱어리를 이용하면 넘어오지 않을까? 지금이라도 온전한 내 것이 되어 주지 않을까?

“…….”

무심코, 그동안 남자의 옆에서 행복을 느낀 것이 진실한 내 감정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무의식중에 스스로에게 행복을 강요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만하면 행복하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바라지 말자.

그렇게 스스로를 억누르고 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남자를 향한 갈망이 내부에서 터진 거라면, 그래서 몸이 이렇게 반응한 거라면, 남자의 방식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러지 못한 거라면…….

그럼 나는 지금까지 남자의 옆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거지?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랑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를 향한 마음이 흔들린 것이 아니다. 남자와 내가 약속한 우리의 방식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나 스스로를 향한 질책이었다. 남자에게는 바라지 않겠다 그렇게 단언해 놓고 가짜로 그의 아이를 품을 만큼 사실은 아주 많이 불안해하며 애를 끓이고 있었다는 게 바보 같고, 우습게 느껴졌다.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에 잠시 눈을 감았다. 허공에 애매하게 떠 있던 손으로는 아랫배를 덮었다. 마치 이 안에 남자를 가질 구실이 들어 있는 것처럼. 그러나 없는 걸 알아 서러움이 밀려왔다.

“나 같은 새끼랑 얽혀서 인생 꼬이는 건 여기까지만 해.”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남자의 말이 맞았다.

나는 기어이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남자에게 몸과 마음이 전부 얽매여 안달을 내다 못해 이렇게까지, 한심하게.

* * *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늦은 저녁이었다. 남자는 여느 때처럼 거실 소파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종종 야근이나 회식 때문에 퇴근 시간이 늦어지면 그는 나를 데리러 오거나 기다리거나, 둘 중 하나를 했다. 데리러 오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나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좋아서 일부러 부르지 않을 때도 있었다.

사실은 내가 기다리는 날이 훨씬 많은데도 불구하고,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으면 그게 그렇게 좋았다.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은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아니까. 남자도 그 시간 동안 같은 심정이었겠지, 내가 보고 싶었겠지 싶어서.

그러나 지금은 허공에 흩어지는 연기와 함께 사라질 것 같은 저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자를 향한 절대적인 애정이 사라져서는 아니다. 단지 내가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임신한 것도 아닌데 생리가 멈추고, 입덧을 할 만큼 호르몬이 이상하게 작용한 탓이기도 할 테고.

이성적으로는 내 상태를 이해하지만, 감정은 멋대로 날뛰었다. 그래서 평소처럼 남자에게 달려가지 못했다.

“늦었네.”

“…….”

“어디 다녀와?”

탁, 남자의 손안에 우리의 라이터가 들려 있었다. 나도 모르게 미간이 구겨졌다. 대답하지 않고 담배 냄새로 빼곡한 거실을 가로질러 드레스 룸으로 향하자, 뒤따라 붙는 시선이 느껴졌다.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왔을 때도 남자는 같은 곳에 앉아 있었다. 여전히 나를 집요하게 좇는 시선으로.

“애기야.”

“…….”

“산부인과는 왜 갔어?”

“…….”

까득,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알아요?”

“시계는 회사에 벗어 두고.”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요.”

“시계만 널 쫓진 않으니까.”

“……사람 안 붙이기로 했잖아요.”

“오빠 원래 거짓말 잘 하잖아.”

“하…….”

강한 허탈감이 밀려들었다. 남자가 내 부탁을 들어준 뒤로는 감시 대신 그날 있었던 일들을 소소한 대화로 나누었다. 가만히 들어 주는 그의 옆에서 내 하루를 나의 시선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 위주로 이야기하며 진짜 교류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순간들이 얼마나 좋았는데…… 나만의 생각이었구나.

“그럼 알면서 왜 떠보듯이 물어요? 처음부터 병원 왜 갔냐고 물었으면 됐잖아요.”

“그래서 지금 묻잖아. 왜 갔어?”

“간 건 알고, 왜 갔는지는 몰라요?”

“대답은 언제 들을 수 있는 거야?”

울컥, 감정이 치밀어 올랐지만 억눌렀다. 호르몬 때문일 거다. 남자는 원래 저런 사람이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늘 저렇게 무심하고 제멋대로니까.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그냥. 생리 불순이라서요.”

“놀랐겠네. 임신이라도 한 줄 알고.”

그가 피식 웃으며 재떨이 옆에 라이터를 내려놓았다. 담배를 물고 소파에 느긋하게 등을 기대는 남자는 종일 너덜너덜했던 내 심정과 달리 평온해 보이기만 했다.

“별일 아니었어요. 그냥 스트레스 때문이래요.”

“그래.”

“……저 씻을게요. 피곤해서.”

“그 전에.”

그가 몸을 돌리려는 나를 멈춰 세웠다.

걱정과 기대가 뒤엉켜 심장이 낮게 일렁였다. 오늘 나에게 있었던 이 비참한 사실을 모르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알고 나를 안아 줬으면 싶었다. 거짓 임신을 할 만큼 내가 자신에게 애가 달아 있다는 걸 알고 달래 주고, 확신을 줬으면 했다.

“이번에 소개받을 놈은 제대로 좀 만나 봐.”

그러나 상대는 남자다.

“매번 밥도 안 먹고 자리 박차고 나오니, 너를 거절하는 정신 나간 새끼들이 있더라고.”

“…….”

“협조 잘 하더니 요즘 왜 그래?”

“…….”

“오빠 노력이 다 헛수고가 되잖아.”

나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말없이 서서 노려보는 나를 남자는 묵묵히 응시할 뿐이었다. 점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얼른 몸을 돌렸다. 굳이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는지 남자는 더 이상 나를 붙잡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욕실로 발을 내디딜 때마다 심장이 쿵쿵, 내려앉았다. 분명히 남자와 한집에 있는데 나만 세상에 혼자 남은 기분이었다.

“흐윽…….”

욕실 문을 닫자마자 다시금 울음이 터졌다. 울음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입술을 짓이겨 물고 옷을 벗다가 거울에 비친 나를 보는데, 무심코 평소보다 색이 짙어진 유두를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가슴도 조금 커진 것 같다. 내 증상을 알기 전에는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것들이었다.

이렇게 보니까 진짜 우습다. 아주 갖은 임산부 노릇은 다 하려고 드네.

연신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며 텅 빈 욕조에 앉았다. 물을 틀 생각도 못 하고 조용히 흐느끼며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남자가 들어와서 달래 줬으면 했으나, 그는 끝까지 오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만에 씻고 나갔을 때 남자는 정말 연기처럼 사라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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