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년 만의 귀국이었다.
공항에 발을 딛자마자 내가 갈 곳은 정해져 있었다. 아버지에게 잘 도착했다는 연락을 할 틈도 없이 택시를 타고 곧장 성원시로 향했다.
“급한 일 있으세요?”
연신 발을 동동 구르는 내게 택시 기사가 물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무릎을 내리눌렀다.
급한 일이라면 있다.
당장 남자가 보고 싶었다.
무려 2년이다. 가까스로 그를 붙잡아 연애 아닌 연애를 즐긴 지 넉 달 만에 나는 유학을 떠나야 했고, 그때부터 꼬박 2년을 보지 못했다. 가끔 통화는 했지만, 핑계인지 정말인지 그가 바쁘다며 연락을 잘 받아 주지 않아서 나만 혼자 머나먼 미국 땅에서 애가 타야 했다.
오늘도 봐. 귀국하는 날인 거 뻔히 알면서 데리러 오지도 않았잖아.
그래도 가슴이 부풀었다. 2년 동안 그는 얼마나 더 멋있어졌을까. 말은 안 해도 내가 보고 싶었겠지. 이 이상한 짝사랑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남자가 선물한 시계를 들여다보며 그를 그리워했다. 가끔 너무 보고 싶으면 못된 마음이 샘솟아 어디 바닷가에라도 집어 던져 내가 물에 빠진 줄 알고 쫓아오게 만들어 볼까, 생각도 했지만, 신분이 없는 그가 여권이 있을 리 만무하니 참았다. 걱정하게 만들고 싶은데 또 걱정시키기 싫은 모순 속에서 몇 번이나 갈등했는지 모른다.
“도착했습니다.”
2년 만에 와 본 성원시는 많은 게 바뀌어 있었다. 대부분의 부지에 오피스텔과 아파트가 들어섰고, 아버지와 TG건설이 함께 진행한 아파트 단지도 한창 분양 중이라고 들었다.
낯설게 느껴지는 주변을 둘러보다 전원주택 단지로 발을 들였다.
새삼, 이 건물들에 내 손길이 닿았다고 생각하니 신기해 여기저기 구경을 하며 단지의 가장 가운데 집으로 향했다. 여섯 채의 전원주택 중에 가장 넓은 부지가 사용되었고, 내부 설계에도 신경을 많이 쓴 건물이다.
내 말대로 남자는 이 집으로 이사를 했고, 유학을 하러 가기 전에 딱 한 번 이곳에서 그와 섹스를 했었다. 그가 삽입한 채 나를 안고 다녀서 집 안 곳곳에 체액이 떨어졌던 기억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덩달아 몸도 달아올랐다.
침을 꿀꺽 삼키며 초인종을 눌렀다. 지금쯤 남자는 내 위치를 보고받았을 테니 집에 있든 회사에 있든 머지않아 만나게 될 거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캐리어 손잡이를 꼭 쥐는데 인터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새로운 관리인인가?
남자의 집에서 일을 했던 어머니는 그가 이사하면서 일을 관두게 되었고, 내가 유학을 간 뒤로는 아버지와 함께 지내고 있다. 미국에 있는 내게 아버지가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했을 때 나는 아무래도 좋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더 이상 아버지를 미련하다 비난할 자격이 없었다. 누구보다 이상한 사랑을 하고 있는 건 나니까.
“저…….”
[아, 오빠 손님? 잠깐만요.]
“…….”
덜컥, 대문이 열렸다. 본능적으로 촉이 세워졌다. 애교 섞인 가느다란 목소리. 자연스러운 호칭. 대문을 미는 손이 옅게 떨렸다.
아주 예상하지 않은 건 아니다. 내가 한국에 없었던 2년 동안 남자가 독수공방했을 리가 없다. 나를 떠나지 않겠다고 했지, 다른 여자를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도 아니니까.
사실 그래서 애가 탔던 것도 있었다. 전화를 받지 않는 그 순간에 다른 누군가와 몸을 섞고 있을 것 같아서.
그동안 바뀐 게 없나, 마당을 둘러볼 여유는 없었다. 캐리어를 대충 아무렇게나 놓아두곤 돌계단을 올라 현관을 두드리자 곧바로 문이 열렸다.
“어서 와요.”
역시나 반쯤 헐벗은 슬립 차림의 낯선 여자가 나를 반겼다. 예쁘게 미소를 지으며 제집처럼 들어오라 손짓을 하는데 어이가 없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여자가 나를 안내하듯 복도를 앞서 걸었다. 겨우 그 뒤를 따랐다.
괜찮아. 남자는 절대 나를 먼저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짧게 숨을 뱉었다.
“오빠, 손님 왔어.”
여자가 오른쪽으로 꺾어 거실에 대고 말했다.
남자도 다 벗고 있을까. 조금 전까지 저 여자의 몸에 들어갔던 성기를 바짝 세우고 있겠지. 직접 봤을 때 충격받지 않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며 거실로 들어섰다.
“이야, 오랜만이네요.”
“…….”
맥없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거실 소파에 가운만 입고 드러누워 있는 건 남자가 아닌 이민후였다. 이민후가 내게 손을 흔들며 그새 제게 쪼르르 다가간 여자에게 말했다.
“손님 왔으니까 자리 옮기자. 옷 입어.”
“알았어.”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옷을 주워 입는 여자를 보다,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대며 벽을 짚었다.
이민후가 가운 앞을 여미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유학 생활은 힘들지 않았어요?”
“……이 대표님이 왜 여기 있어요.”
“어제 대호랑 밤새 술 마시다 여기서 잤어요.”
“남의 집에서 왜…….”
왜 여자를 불러 노냐고 타박하려다 힐끔 여자를 봤다. 사람을 면전에 두고 할 말은 아닌 것 같아 입을 꾹 다물고 노려보자 이민후가 어깨를 으쓱였다.
“따지고 보면 내 명의로 된 집인데, 너무하시네.”
“…….”
“대호 만나러 온 거죠? 그 자식은 지금 2층에 있어요. 아마 잘 거예요. 어제 좀 많이 마셨거든.”
이민후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가운 앞섶을 다짜고짜 열었다. 졸지에 드러나는 알몸에 깜짝 놀라 몸을 확 돌렸다.
“뭐, 뭐예요?”
“서을 씨 왔으니까 자리 피해 주려고. 옷 입어야죠.”
끼리끼리 논다더니. 남자나 이민후나 수치심 따위는 어디 개나 준 모양이다.
한숨을 푹 내쉬는 찰나, 위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자 막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
방금 씻은 건지 젖은 머리카락에 편안한 옷차림, 어딘가 나른해 보이는 표정을 마주한 순간 잠깐 현실을 잊은 것처럼 머리가 멍해졌다.
2년 만에 보는 남자다. 그동안 기억으로만 남아 있던 남자가 비로소 실체가 되었다. 꿈을 꾸는 사람처럼 몽롱한 정신으로 바라보는데, 문득 남자가 눈을 찌푸렸다.
“왜 애기 앞에서 옷을 벗고 있어?”
“야, 넌 서을 씨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애기, 애기 거리냐. 이상 성벽은 알고 보면 너 아니야?”
“애기야, 이 대표 좆 봤어?”
넋이 나가서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나는 내 뒤를 노려보는 남자에게 다짜고짜 달려가 와락 안겼다.
“보고 싶었어요.”
막 씻어서인지 남자의 몸에서 담배 냄새와 체취가 같이 묻어났다. 이게 그리워서 미국에서도 일부러 담배를 사서 불을 붙여 봤는데 도무지 충족이 되지 않았다. 역시 진짜는 다르다. 남자의 품에 얼굴을 묻고 마구 비볐다.
“나 안 보고 싶었어요? 응? 난 매일 보고 싶었는데.”
“그래 보이네.”
“절절하다, 절절해. 가자.”
이민후가 혀를 차며 여자와 함께 나가려다 문득 나를 불렀다.
“서을 씨, 그거 알아요?”
“…….”
“저 자식 반년 전에 밀항해서 뉴욕 다녀온 거.”
밀항?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자 남자가 인상을 쓰며 혀를 찼다.
“이 대표는 갈수록 입이 더 싸지네.”
“재밌잖아. 그럼 우린 간다.”
이민후와 여자가 곧장 집을 나섰다.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잠깐 정적이 일었다. 나는 여전히 남자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채 그를 바라봤다.
“왔었어요?”
“됐고, 이 대표 좆 봤는지나 말해 봐.”
“……못 봤어요. 내가 그걸 왜 봐.”
“그럼 됐어.”
“그보다, 정말 뉴욕 왔었냐고요. 언제? 나 때문에? 나 보러 왔어요? 그런데 왜 연락 안 했어요.”
“애기야.”
남자가 나지막이 나를 불렀다. 무심코 아랫배에 느껴지는 두툼한 부피감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옷 벗어.”
“오자마자 무슨…….”
방금 열다섯 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한테 옷을 벗으라니. 정말이지 배려도 없고, 무드도 없다. 그럼에도 금방 다리 사이가 젖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밉지 않게 흘기며 슬그머니 떨어져 나갔다.
“그럼 씻고 올게요.”
“상황 파악이 안 돼?”
그가 다짜고짜 나를 들어 올렸다. 남자의 단단한 팔이 엉덩이를 받치고, 두 다리가 허리에 걸렸다.
끄응, 앓는 소리를 뱉는 입술이 단숨에 그에게 집어삼켜졌다. 너무 오랜만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나는 홀린 듯 그의 목을 끌어안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조금의 틈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
한껏 벌어진 입 안으로 그의 혀가 밀려 들어왔다. 온몸의 신경이 남자의 움직임에 맞춰 전율했다. 2년의 공백은 모든 걸 새롭게 만드는 힘이 있나 보다. 마치 그와 첫 키스를 하는 양 몸이 주책없이 달떴다.
“으응…….”
좀 더 밀착하고 싶어서 목을 꽈악 끌어안자 그가 걸음을 옮겨 나를 소파 위에 눕혔다. 그러곤 곧장 성기를 꺼냈다. 오랜만에 마주한 그것 역시 보는 것만으로도 나를 젖게 했다.
“지금은 만져 주고 빨아 줄 여유 없어.”
그가 거칠게 내 바지를 벗겨 냈다. 제대로 다 벗기지도 않고 대충 무릎까지만 끌어내린 그가 다짜고짜 음부에 성기를 비벼 댔다.
아무리 젖었다고는 해도 전희 없이 쑤시는 건 겁이 나서 남자의 손을 붙잡았지만, 정말로 여유가 없는지 그의 동공이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정신없이 달려들다니, 이렇게 마음이 놓일 수 없다.
“자, 잠깐만요.”
“가만히 있어.”
“잠깐이면 돼.”
간신히 남자를 진정시키고 바지와 팬티를 벗었다. 그러곤 아래로 손을 내렸다. 질구에서 새어 나오는 애액을 손가락에 묻혀 음부 주변을 문지르자 남자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거기서 뭘 배워 온 거야.”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손끝으로 음핵을 둥글렸다. 쾌락에 눈을 떠 버린 채 2년을 독수공방한 내가 성욕을 푸는 방법이 따로 있을 리 없다. 예전엔 그렇게 거부감이 들었던 자위가 잠깐이나마 남자의 몸을 그리워하는 걸 잊게 만들어 주었다.
질구로 손가락을 살짝 밀어 넣었다. 꽤 자주 했더니 손가락 하나 정도는 금방 삼켜 낸다. 물론 남자의 성기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가늘지만 이렇게라도 풀어 주지 않으면 벅찰 것 같았다.
남자는 내가 손가락으로 안을 쑤시는 걸 묘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처 이것까진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조금 얼이 빠진 것 같기도 했다. 그답지 않게.
“이런 건 누가 가르쳐 줬어?”
“흐읏…….”
누구긴 누구야. 내 안에 가장 먼저 손가락을 넣은 건 당신인데. 아래에서 찌걱대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나는 손가락을 빼내고 그의 옷을 잡아당겼다.
“이제 넣어요. 빨리…….”
남자는 한 방 먹었다는 얼굴로 나를 훑어보더니 이내 내 다리를 넓게 벌리고 자리를 잡았다. 귀두가 음부를 위아래로 쓸자 삽입을 기대하는 엉덩이가 마구 흔들렸다. 이내 그가 질구에 귀두를 가져다 댔다. 뭉툭한 선단이 좁은 구멍을 쿡쿡 찔렀다.
아무래도 오랜만이라 남자의 것이 쉽게 들어가진 않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그가 허리를 세게 찧었다. 좁은 질을 가로지르고 남자가 한순간에 가득 찼다.
“아흑…….”
역시나 오랜만이라 그런지 아팠다. 입이 떡 벌어지며 침이 줄줄 새는 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오르는 충만감은 강렬했다. 드디어, 남자가 들어왔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머릿속이 펑펑 터지는 것 같았다.
그 역시 좁은 내벽에 낮은 신음을 뱉었다. 숨을 고를 틈을 주려는지 잠깐 멈춘 채 나를 내려다본 그가 물었다.
“그 프랑스 놈이 무슨 말 했어.”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나는 떨리는 다리를 그의 허리에 감았다.
남자가 대뜸 내 허벅지 안쪽을 손으로 당겨 확인했다. 유학 생활하는 동안 건드리지 않았음에도 워낙 오래전부터 뜯어 댄 탓에 흉터는 남아 있었다.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차며 허리를 뒤로 뺐다. 굵은 기둥이 천천히 내벽을 쓸며 빠져나갔다.
“너한테 꽃 준 새끼 있잖아.”
선단까지 빠져나간 것에 다시 질벽이 좁아지려는 찰나, 그가 뿌리까지 성기를 박았다.
“흣, 응……. 아응, 아……!”
“그 새끼가 무슨 말을 해서 그렇게 예쁘게 웃었냐고.”
오랜만에 안이 치받히는 바람에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나는 질끈 눈을 감은 채 남자의 팔만 붙잡고 하염없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가죽 소파에 엉덩이가 마찰하며 쩍쩍대는 소리를 만들어 내고, 아래에선 젖은 성기가 치대져서 연신 찌걱대는 민망한 소리가 났다.
기둥이 쉬지 않고 안을 쑤셔 댄 탓에 몸이 금방 달아올랐다. 기어이 다리를 허공에 허우적대며 절정에 다다랐을 때 남자가 나를 그대로 품에 끌어안고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그러곤 계속해서 허리를 쳐올렸다.
“아……. 자, 잠깐, 으응!”
절정을 느끼자마자 지속되는 삽입에 머리가 텅 비는 것 같았다. 방광이 자극된 건지 희미한 요의가 느껴졌다. 뭔가 심상치 않은 기분에 다급히 남자의 목을 끌어안고 무릎으로 소파를 디뎠지만 그가 멋대로 내 허리를 잡아 눌렀다.
다시 안쪽 깊은 곳까지 성기가 박혀 들었다. 그 상태로 그가 내 허리를 원을 그리듯 돌렸다.
“잠깐, 만요. 나, 나, 그만…….”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정말로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 급격하게 거세진 요의에 고개를 마구 저었다.
“잠깐, 화장실……. 읏, 화장실 가고 싶…….”
그가 혀로 내 입술을 막았다. 입 안을 빨아들이며 허리를 푹푹 쳐올렸다. 한껏 벌어진 아래가 이상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정말, 안 된다. 이런 모습까지는 보이기 싫은데.
남자의 어깨를 주먹으로 퍽퍽 때리며 벗어나려고 버둥댔지만, 도저히 그의 품 안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흐윽……!”
어느 순간 남자가 성기를 확 빼내고, 허리가 멋대로 펄떡댔다.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아래에서 물줄기가 쏟아졌다.
“아…….”
단순히 젖은 게 아니다.
내가, 내가…….
허리가 잘게 진동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남자의 옷이 흠뻑 젖었고, 소파에는 둥글게 물이 고이기까지 했다.
“이…… 이게, 이게…….”
창피한 걸 넘어서 수치스러웠다. 아무리 남자가 내 몸의 구석구석을 알고 있다고 해도, 이렇게 지저분한 모습까지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지키고 싶은 게 있기 마련이다.
어쩔 줄 몰라 남자의 옷자락만 붙잡고 덜덜 떨며 우는데 문득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좋았어?”
“…….”
“오줌까지 쌀 정…….”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남자가 입고 있는 회색 바지가 선명하게 젖어 있었다. 그가 재밌다는 얼굴로 우는 나를 빤히 바라봤다. 어떻게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일단은 도망가는 걸 택했다.
“어디 가.”
화장실로 냅다 뛰어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다리가 축축해서 내려다보니 투명한 액체가 종아리를 타고 떨어지고 있었다. 정말 마음 같아서는 혀를 콱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왜 도망가. 부끄러워서 그래?”
“…….”
“귀여운데 왜.”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이게 뭐지. 정말로 내가 오줌을 싼 건가.
남자 앞에서 짐승처럼 엉덩이를 흔들면서 그렇게…….
그와 그렇게 여러 번 몸을 섞었는데도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
“흑…….”
“애태우지 말고 문 열어.”
“시, 싫어요.”
“그럼 부순다.”
그가 문고리를 잡아 흔들었다. 그렇게 쉽게 문이 부서질까 싶으면서도, 남자의 힘을 생각하면 아주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라 급히 주변을 살폈다. 일단 숨을 곳은 욕조뿐이었다.
그 안에 몸을 웅크리고 앉는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그가 부서진 손잡이를 바닥에 집어 던지곤 안쪽으로 들어왔다. 도저히 남자를 마주 볼 수가 없어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그 먼 미국까지 가서 본 게 꽃 받고 예쁘게 웃는 모습이었는데, 그거에 대한 해명은 언제 할래?”
“……나 보러 거기까지 왔던 거예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남자가 피식 웃으며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럼 내가 왜 가.”
보고 싶었다는 말을 참 밉게도 한다.
나는 머리 위에 놓인 남자의 손을 밀어내며 무릎에 더 깊이 얼굴을 묻었다. 그렇게 보고 싶었는데 기껏 보여 준 모습이 이런 거라니, 더 자괴감이 들었다.
“난 할 때마다 네 앞에서 싸는데, 뭘 그거 가지고 이래.”
“그거랑…… 이건 다르잖아요…….”
“비슷해. 대충.”
몸을 좀 더 웅크리는데, 문득 머리 위로 미지근한 물이 쏟아졌다. 그제야 놀라서 고개를 들자 남자가 샤워기를 손에 들고 있었다.
“뭐 하는 거예요.”
“오빠랑 같이 씻을까?”
“……싫어. 나가요. 혼자 씻을 거야.”
“덕분에 나도 이렇게 됐는데?”
그가 내 흔적으로 젖은 옷을 가리키며 태연하게 말했다. 저절로 울상이 지어졌다. 원망스럽게 팔을 밀어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어이 옷을 다 벗은 채 욕조 안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에 보는 나신을 감상하지도 못하고 울먹이는데 그가 멋대로 내 티셔츠를 들어 올렸다.
“하지 마……!”
내 반항 따위는 우습다는 듯 남자가 브래지어까지 쉽게 벗겨 내고 옷가지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졸지에 알몸이 된 나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 그를 노려보았다. 정말 배려심이라곤 약에 쓸래도 없다.
지금 내가 얼마나 창피할지 알면서 꼭 이래야 해? 이런 남자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내가 참 바보 같다.
욕조에 물이 조금씩 차기 시작했다. 따뜻한 온도에도 쉽사리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여전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남자의 성기가 조금 전 상황을 자꾸 떠올리게 만든 탓이었다.
“이리 와.”
아래를 힐끔대는 걸 다르게 해석한 건지 그가 유혹하듯 팔을 뻗었다. 나름대로 저항한답시고 고개를 저었지만, 남자의 손에 끌려가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의 다리 사이에 앉아 가슴팍에 등을 기대게 되었다. 엉덩이에 단단한 기둥이 자꾸 스쳤다.
“애기야.”
“이 대표 말 못 들었어요? 왜 자꾸 그렇게 불러요.”
“습관이야.”
남자가 나를 끌어안고 정수리에 턱을 가져다 댔다.
“잘 다녀왔어?”
난데없는 다정한 음성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사르르 풀어졌다. 정말 나는 이 남자에게만은 한없이 쉬웠다. 경직된 몸에 힘을 풀고 좀 더 기대자 남자의 손이 내 어깨를 살살 쓸었다.
“별말 안 했어요. 그냥…… 꽃이 예쁘다고 했어요.”
뒤늦은 답변에 남자가 낮은 콧소리를 냈다.
“꽃이 예뻐서 그렇게 예쁘게 웃었어?”
“뭐래…….”
“아닌 거 같던데.”
사실은 저녁을 먹자는 데이트 신청이었다. 남자도 다 알고 묻는 것 같지만, 모르는 척했다.
“근데 프랑스 사람인 건 어떻게 알았어요? 걔 혼혈인데.”
“물어봤지.”
“누구한테요?”
“본인한테.”
당황해서 돌아봤지만 그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한 번만 더 말 걸면 죽여 버린다고도 했고.”
“…….”
“한국어로 말해서 알아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알아들었어요.”
어쩐지 그 뒤로 마주칠 때마다 피하더라니. 거절당한 게 민망해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남자의 흉흉한 기세를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왜 그냥 보기만 했어요. 기껏 보러 와 놓고.”
그가 천천히 손을 내려 어느새 허리까지 차오른 물을 손바닥으로 퍼서 가슴 위로 흘려보냈다. 은근슬쩍 유두를 건드리는 것을 알았지만 그냥 놔두었다.
내 허락을 읽은 건지 그가 부드럽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묵직한 살덩어리를 한가득 쥐고 아프지 않게 주무르며 유두를 살살 긁어 댔다.
“너무 예뻐서.”
“흣…….”
“내가 가면 망칠 거 같아서 그냥 뒀지.”
또 그런다.
나는 가슴을 움켜쥔 그의 손등 위로 내 손을 덮고 고개를 돌렸다.
“나 지금은 안 예뻐요?”
그가 가늠하듯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예뻐.”
“근데 왜 그래요.”
“…….”
“나 그쪽 앞에 있어도 충분히 예쁜데.”
아까 그런 모습만 안 보였으면 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을 텐데. 마음속으로만 아쉬워하며 남자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그의 손 위로 주물러 달라는 듯 움직이자 그가 다시 가슴을 만지기 시작했다. 반대쪽 손은 배를 타고 내려가 음모에 닿았다. 한창 달아올라 있던 아래가 남자의 손길에 움찔거렸다. 그가 더 아래로 손을 내렸다. 부푼 음핵이 손끝에 스쳤다. 허리가 휘어지며 남자의 손에 가슴을 더 들이미는 모양새가 되었다.
“응……!”
한 손으로는 유두를, 다른 한 손으로는 음핵을 지그시 누를 때마다 몸이 비틀리며 욕조 안의 물이 출렁였다. 등 뒤로 짓눌리는 남자의 성기도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그것을 넣으려는 것처럼 엉덩이를 들썩이자 남자가 내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진정해. 여기서도 싸려고?”
“…….”
찰싹, 남자의 손등을 때렸다. 그가 낮은 웃음을 흘리며 음핵을 느리게 문질렀다.
“실컷 박아 줄 테니까 걱정 마.”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의 손길에 온몸을 내맡겼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진 사장한테 선 자리 소개해 줬다고 했는데.”
2년 만에 재회하고, 진득하게 섹스까지 하고 나서 남자가 단번에 내 속을 뒤집어 놓았다. 황홀한 섹스로 한없이 행복하게 만들어 놨다가 바로 화가 나게 만들다니. 정말 사람 기분을 들쑥날쑥하게 하는 데는 탁월한 재능이 있다.
“누구 선 자리요.”
“누구긴 누구야. 너지.”
그가 무심하게 말하며 내게 가운을 입혀 주었다. 익숙하게 여성용 나이트가운을 꺼내 왔을 땐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다른 여자가 입었던 건가 싶어 날카롭게 살피니 다행히 태그도 떼지 않은 새거였다.
그러나 그는 내가 안심하기가 무섭게 선이라는 더한 폭탄을 던졌다. 남자가 내 것과 똑같은 디자인과 색상의 남성용 가운을 대충 걸치고 앞도 잠그지 않은 채 휘적휘적 걸어 방문을 열었다.
“밥 먹자. 나와.”
하던 이야기를 도중에 끊어 먹고 뻔뻔하게 나가 버리는 그를 노려보다 침대 밑으로 발을 디뎠다. 반나절 내내 다리를 벌리고 있었더니 골반이 다 뻐근하지만 일단 참고 남자를 뒤쫓았다.
“왜 내 선 자리를 그쪽이 알아봐요.”
“진 사장이 자꾸 이 대표를 눈독 들이더라고.”
그가 기다란 아일랜드 식탁으로 눈짓했다. 내가 잠깐 잠이 든 틈을 타서 음식을 만든 건지 꽤 그럴듯한 한 상이 차려져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요리 실력에 조금 놀라긴 했으나 감탄보다는 그를 타박하는 게 먼저였다.
“아빠가 이 대표를 왜요? 그럴 리가 없어요.”
그러고 보니 2년 전에 시계를 받은 뒤로 종종 이민후의 이야기를 꺼냈었다. 하지만 그건 이 대표를 눈독 들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경계하는 쪽에 가까웠는데.
“애기네 엄마가 이민후를 좋게 본 모양이야. 우리 집에 있을 때 종종 마주친 적이 있거든.”
“아빠 진짜…….”
“너 진 사장 닮았나 봐.”
그가 맞은편에 앉아 턱을 괴었다.
“뭐가요.”
“좋아하면 사족을 못 쓰는 거.”
“…….”
“두 사람 같이 사는 거 같던데, 괜찮아?”
그가 물잔을 밀어 주며 물었다. 칼칼한 목을 축이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나랑 상관없어요. 같이 안 살면 그만이야.”
“그럼 어디서 살게.”
“…….”
힐끔 눈을 들어 그를 봤다. 남자가 내 속을 읽은 듯 혀를 차며 고개를 기울였다.
“누구 마음대로.”
“방 많잖아요. 하나쯤은 괜찮지 않나.”
“뻔뻔해졌네.”
“안 돼요……? 나 갈 데 없는데.”
“불쌍한 척까지.”
아니, 잠깐만.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무심코 흘려 넘긴 이야기를 다시 떠올렸다.
“그래서, 그쪽이 아빠한테 내 선 자리를 알아봐 줬다는 거예요?”
다시 눈에 힘을 주자 남자가 픽 웃었다.
“정확하게는 이 대표 통해서.”
“아무튼!”
“특별히 엄선한 놈이야. 잘해 봐.”
“…….”
“그리고 이 집에 방이 아무리 많아도 너한테 따로 내줄 방은 없어.”
상처받기도 전에 그가 내 볼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내 방에서 잔다면 몰라도.”
“짜증 나.”
쏘아붙이곤 수저를 들었다. 억울한 마음에 밥을 한가득 퍼서 입 안에 밀어 넣었다.
선 자리를 직접 잡아? 그래 놓고 한 방을 써?
정말 얄미워 죽겠다. 애꿎은 밥만 우물거리는데 남자가 자꾸 볼을 찔러 왔다. 손을 치워도 자꾸 달라붙는 게 짜증 나서 눈을 치켜뜨자 그가 볼록해진 볼을 만지작거렸다.
“아, 왜요!”
“귀여워서.”
“…….”
“이걸 안 보고 어떻게 살았지.”
그가 고백이나 다름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미련 없이 손을 거둬 갔다.
“이번 주 중으로 너한테 연락 갈 거야. 시간은 알아서 잡고.”
“그쪽 진짜 못된 거 알죠.”
“못되기만 했을까.”
태연하게 대꾸하며 빈 잔에 물을 채워 준다.
“꼭꼭 씹어 먹어.”
“……손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요.”
그가 순순히 내 수저를 가져가더니 소시지를 집어 먹여 주었다.
어이가 없다. 선을 보라는 터무니없는 말을 해 놓고 손수 밥까지 먹여 주는 남자나, 그걸 좋다고 받아먹는 나나.
“계란말이도 먹을래요.”
정말 끼리끼리다.
남자의 말대로 주말이 되자마자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왔다.
[서을아, 선 한번 봐 볼래?]
“…….”
[싫으면 거절해도 돼. 아빠도 너 결혼하는 거 싫어.]
“알았어.”
[뭐?]
내 승낙에 아버지가 되레 놀란 목소리를 냈다. 아마 내가 거절할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보나마나 아버지와 다시 살림을 합쳤답시고 내게 엄마 노릇을 하려는 어머니에게 설득당해 꺼낸 말이리라.
어머니는 부쩍 내게 간섭이 심해졌다. 두 사람이 함께 살든 말든 내가 별 신경을 쓰지 않으니 자신을 용서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귀찮아서 그냥 내버려 뒀다.
언제까지고 과거에 얽매여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솔직히 말하면 더 이상 관심이 가지 않았다. 예전에는 어머니에게 받은 상처가 나를 괴롭게 했지만, 지금은 남자에게 휘둘리기도 바빴다.
[진짜 만나 볼 거야?]
“만나 볼게. 그게 뭐 별거라고.”
[……그럴래?]
“연락처 줘. 내가 따로 연락할게.”
[그래. 알았다.]
아버지가 섭섭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고작 내가 선을 보는 걸로 섭섭해할 거면, 아버지는 어머니와 다시 만나면 안 됐다. 당신도 당신 사랑이 먼저였으면서, 나는 계속 아버지의 그늘 속에 있기를 바란 건가.
삐뚤어진 마음을 애써 숨기곤 안부를 물었다.
“회사는 별일 없어?”
[그럼. 넌 요즘 어디서 지내니. 송파 집은 비어 있는 것 같던데.]
“친구 집에 왔어.”
적당히 둘러댔다.
사실 지낼 데가 없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아버지는 한참 전부터 내가 살 집을 준비해 두었고, 나는 언제든지 몸만 가면 되었다. 물론 남자도 그걸 모를 리가 없지만, 나는 그를 속였고 그는 속아 주는 척을 했다.
[시간 될 때 아빠랑 같이 저녁 먹자.]
“응. 연락할게.”
[그래. 우리 딸. 쉬어. 사랑해.]
“나도.”
휑한 거실을 둘러보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당장 월요일부터는 면접이 잡혀 있다. 곧바로 일을 시작할 생각이기 때문에 남은 여유는 고작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전부였다. 이렇게 중요한 시간에 남자는 눈을 떴을 때부터 나가고 없었다. 일분일초라도 더 붙어 있어도 모자라는데 말이다.
괜히 입을 삐죽이며 소파에 길게 몸을 눕히는데, 아버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낯선 핸드폰 번호와 유태주라는 이름이었다. 선을 볼 사람인가 보다. 남자가 특별히 엄선했다던.
“짜증 나…….”
그럼 뭐 달라질 줄 알아? 나를 도대체 뭐로 보는 거야.
질질 끌고 싶지 않아 무작정 유태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유태주입니다.]
“안녕하세요. 전 진서을이라고 하는데요. 우완건설 진성호 사장님 딸이요.”
[아……. 네. 이야기 들었습니다. 이렇게 연락하실 줄은 몰랐네요. 제가 먼저 연락해야 했는데.]
꽤나 젠틀한 말투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본론부터 꺼냈다.
“언제쯤 만나실 수 있나요?”
[시원시원하시네요. 오늘 저녁 괜찮으세요?]
“뭐…….”
어차피 남자도 없겠다, 이런 건 빨리 해치우는 게 나으니 알겠다고 대답했다.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전화를 끊자마자 곧장 몸을 일으켰다. 지금부터 준비하면 충분할 것 같다.
캐리어에서 적당한 옷을 꺼내 입고 머리도 깔끔하게 정리했다. 아무리 내키지 않는 선이라도 아버지 얼굴이 있으니 너무 신경을 안 쓸 수는 없었다. 화장까지 끝내고 남자가 준 손목시계로 마무리를 했다.
틈틈이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남자에게선 전혀 연락이 없었다. 괜히 핸드폰을 남자인 것처럼 흘겨보며 거실을 가로지르는데, 도어 록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 다녀와요.”
문을 열고 들어서던 남자가 잠깐 눈썹을 들었다. 나를 천천히 위아래로 훑은 그가 여상히 물었다.
“유태주?”
“네.”
“그래. 다녀와.”
“…….”
당연히 잡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선뜻 보내 주니 속이 꼬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남자를 스쳐 지나가려다 참지 못하고 걸음을 멈췄다. 네모난 문틀에 남자와 마주 보고 섰다. 손만 뻗으면 안길 수 있는 거리인데도 저 태연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애가 탔다.
“유태주 뭐 하는 사람이에요?”
“초등학교 선생.”
“잘생겼어요?”
“봐 줄 만해. 네 눈에 찰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고개를 살짝 숙여 왔다.
“나 같은 놈 잘 없거든.”
“재수 없어.”
자연스럽게 고개를 꺾어 오는 그의 가슴팍을 밀었다. 키스를 거부하자 그는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차면서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 누구 좋으라고 키스를 해. 그럴 기분 아니다. 콧방귀를 뀌며 문을 빠져나왔다.
거친 걸음으로 돌계단을 하나씩 내려가며 씩씩대다 마당 한가운데에서 고개를 돌리니 남자가 여전히 현관 앞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몸을 비스듬히 기울인 채 팔짱을 낀 모양새가 아주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늦을지도 몰라요.”
“…….”
“누구 덕에 속궁합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우쳤는데, 그건 그쪽도 못 알아봤을 거 아니야.”
남자의 고개가 좀 더 기울었다.
“그건 내가 알아볼게요.”
“…….”
“나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요.”
표정 변화는 없지만 집요해진 눈빛은 모를 수가 없었다. 나는 보란 듯이 고개를 돌리곤 마당을 가로질렀다.
그러나 대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후회했다.
괜한 소릴 했나.
심술이 나서 못되게 굴긴 했는데, 뒤늦게 그가 상처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가 어떤 심정으로 나를 보내려는지 알면서 너무 감정적으로 굴었다. 자책하며 한숨을 푹 뱉었다.
특별히 엄선했다더니, 유태주는 과연 괜찮은 사람이었다.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도 있고, 성실하고, 검소하고, 건실하며, 선한, 그야말로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남자가 단순히 봐 줄 만하다고 말했던 외모도 준수했다.
그러나 전혀 즐겁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유태주와 대화를 나누는 매 순간 당장 남자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렇게 다른 남자랑 허비할 시간에 1초라도 더 그와 함께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음악 좋아하시면, 다음 주에 연주회 함께 보러 가실래요?”
빨대로 커피를 젓는데, 문득 유태주가 다음 만남을 제안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빨대를 입에 물었다.
연주회라.
자연히 고채원이 떠올랐다. 물론 그녀는 지금 한창 유럽 투어 중이니 한국엔 없겠지만, 영 내키지는 않았다. 연주회가 내키지 않는 건지 다음 만남이 내키지 않는 건지는 애매했다.
“연주회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그러시구나. 그럼 뭐 좋아하세요?”
“그냥…….”
남자 말고는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어떻게 갈수록 더 병이 깊어지는 거지. 남자는 감정도 소모품이라 쓰면 쓸수록 닳을 거라고 했는데, 내 사랑은 아직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사실 제대로 쓰지도 못했는데 닳을 게 뭐가 있을까.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데, 나 혼자만 안달 내니 닳기는커녕 더 쌓여만 가지. 혹시 이게 남자의 전략인가. 일부러 줄 듯 말 듯 애태워서 내가 끝까지 자신에게 질리지 못하게 만들 셈인가.
혼자 별의별 생각을 하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을 때, 유태주 뒤로 익숙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나만큼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그가 살짝 손을 흔들었다.
“영화는 괜찮으세요?”
유태주가 친절한 얼굴로 물었다. 그제야 나는 그의 뒤쪽에서 시선을 거두고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귀국했다는 말은 들었어. 잘 다녀왔어?”
유태주와 헤어지자마자 도로 카페로 돌아오니 같은 자리에 앉아 있던 권지운이 선뜻 나를 반겨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연락하려고 했어요. 선배는 잘 지냈어요? 학교 나가고 있다면서요. 할 만해요? 사무소랑 병행하는 거 힘들지 않아요?”
“하나씩 물어.”
아무래도 2년 만에 보는 거라 반가움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는 내가 떠나기 직전까지도 친절했고, 유학 도중에도 종종 먼저 연락을 주곤 했다. 부담스럽게 하는 연락이 아니라 유학 생활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알려 주는 식이었다.
어디의 버거가 맛있다는 사소한 정보부터, 자신의 인맥을 소개해 주기도 했다. 그 덕에 나 역시 평소 좋아하던 건축사 밑에서 잠깐 일하는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선배는 그대로네요.”
“여전히 잘생겼어?”
“아, 다들 왜 이래.”
장난스레 투덜대자 권지운도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아직 그 사람 만나?”
자연스럽게 물어 오는 것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상하다는 듯 빈 커피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그런데 방금 만난 사람은 뭐야?”
“뭐…… 설명하자면 긴데, 선본 거예요.”
“아직 만난다며?”
“좀 복잡해요.”
권지운이 아리송한 얼굴을 했다. 그런 반응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일일이 설명하기에는 얽힌 게 너무 많다. 적당히 웃음으로 때우자 굳이 더 캐묻지 않는 상냥함도 여전했다.
“선배는 만나는 사람 있어요?”
“지금은 없어.”
“그 전엔 있었구나?”
“그럼. 언제까지고 너만 쫓아다닐 수는 없잖아.”
“……이야기가 왜 그리로 튀어요.”
헛기침을 하며 몸을 뒤로 물리자 그가 피식 웃었다. 다 지난 일이라 편하게 생각했는데 다짜고짜 이러면 아무래도 어색해진다.
“여전히 귀엽다, 너.”
“저 갈게요. 다음에 봐요.”
“장난이야. 가지 마.”
“…….”
“선보러 나온 거면 다른 약속은 없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맥주 한잔할까?”
밉지 않게 그를 흘겨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2년간 쌓인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시간이 금방 흘러갔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다 보니 이런저런 고민을 쉽게 털어놓을 수 있었고, 그는 적절한 조언을 해 주었다. 미국에서 만난 권지운의 친구와 있었던 소소한 에피소드에는 그 역시 흥미를 보였다.
그래. 솔직히 말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눴다.
“늦었네. 데려다줄게. 가자.”
“네?”
그래서 권지운이 몸을 일으킬 때 11시가 넘은 걸 보고 조금 당황했다. 늦는다는 말을 미리 해 두긴 했으나, 그건 남자를 자극하려고 헛소리를 한 거였는데 정말 이 시간까지 밖에 있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남자에게 권지운과 마주친 것마저 전해졌을 거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괜찮아요. 혼자 갈게요.”
이 시간까지 권지운과 같이 있었던 거로도 모자라 데려다주기까지 하는 건 남자에게 못할 짓이다.
아무리 그가 내게 선 자리를 권유하고, 언제든 다른 이에게 떠나라고 했다지만 그건 본인에게 자신이 없어서 밀어내는 것일 뿐이지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알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는 상처가 얼마나 아픈지 누구보다 잘 아는 내가 그에게 상처 주고 싶을 리가 없다. 아까 못되게 군 게 신경 쓰여 심장이 따끔했다.
권지운과 다음을 기약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렇게나 차를 세워 두곤 초인종을 누르자 금방 문이 열렸다. 나는 잰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질러 곧장 현관 도어 록 번호를 눌렀다.
“저 왔어요.”
“잘 놀다 왔어?”
구두를 대충 벗고 거실로 들어서자 남자가 소파에 앉아 담배를 물고 있었다.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있지만 누가 봐도 나를 기다린 모양새였다. 거실 테이블에 책 한 권이 거꾸로 펼쳐져 있고, 그 옆에 놓인 재떨이에는 타들어 간 꽁초가 수북했다.
괜히 눈치가 보여 어설프게 웃으며 남자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이야기 들어서 알겠지만, 선배랑 우연히 만난 거예요.”
“알아.”
“유태주는 괜찮은 사람이긴 하지만, 별로 재미없었어요. 다음 주에 영화 보기로 했는데…… 가기 싫어.”
“싫으면 가지 마.”
“정말요?”
기대하는 눈으로 바라보자 남자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다음엔 재미있는 놈으로 골라 줄게.”
덤덤하게 말하며 끊임없이 내 얼굴을 훑어본다.
뭘 알고 싶은 걸까. 나는 그에게 전부 말해 줄 용의가 있는데, 그는 물어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신 아까 하지 못한 키스를 하려는 듯 고개를 기울여 왔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어느새 이 독한 담배 냄새에도 익숙해졌다. 혀를 빠는 남자의 목을 끌어안고 허벅지 위로 올라가 앉으니 그가 허리를 단단히 감쌌다. 평소보다 집요한 입맞춤이었다. 이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나를 잡고 싶은 것처럼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나를 옭아맸다.
“으응…….”
나는 기꺼이 남자의 혀에 구속된 채로 몸을 비볐다.
이러는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떠나. 이렇게 애정 가득한 키스를 하는데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만나.
아래로 손을 내려 남자의 바지를 슬그머니 내렸다. 드로어즈까지 당기자 기다렸다는 듯이 성기가 튀어 올랐다. 굵은 기둥을 양손으로 움켜쥐니 그제야 그가 혀를 풀어 주었다.
소파 아래로 내려가 그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내 나를 기다리느라 애가 탔을 그에게 뭐라도 해 주고 싶어 성기를 입에 물었다.
“후웁, 읍.”
입 안을 그로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목구멍까지 넣었다가 빼며 손으로는 연신 기둥을 훑었다.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흔들렸다. 목이 간지러워 넘기려는데, 나보다 남자가 더 빨랐다.
내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그러쥐는 손길에 힐끔 눈을 들자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혀로 선단을 핥으며 살짝 웃었다. 일부러 야살스럽게 구는 속내를 눈치챈 듯 남자가 피식 웃었다.
“더 깊게 넣어야지.”
순순히 남자의 것을 더 물었다. 턱이 빠듯하게 벌어져 조금 버겁지만 여러 번 빨아 본 덕에 이젠 꽤 능숙해졌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연신 입술을 오물대며 표면을 자극하고 목구멍으로 귀두를 살짝살짝 조였다. 사정을 재촉하기 위해 양손으로 기둥을 꾹꾹 주무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입 안에 고인 침을 쭉 빨아 당겨 꿀꺽 삼키고, 사탕처럼 남자의 것을 핥았다.
남자가 대뜸 내 목덜미를 주물렀다. 그 신호를 알아차리고 성기를 뱉어 내자 그가 내 손 위로 제 손바닥을 덮었다.
“아…….”
내 얼굴 바로 앞에서 내 손으로 자위를 하는 남자의 모습은 언제 봐도 야하다. 언젠가 내가 더 이상은 못 한다고 자꾸 파고드는 남자의 성기를 밀어냈을 때 처음 보여 준 모습이었는데, 나를 빤히 바라보며 자위하는 그에게 되레 내가 몸이 달아 매달렸던 기억이 있다.
빠르게 마찰하는 손바닥이 화끈거렸다. 음부도 연신 액을 흘려보내고, 삽입을 바라듯 그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허리가 들썩였다. 그에게 양손이 붙잡힌 채 어쩔 줄 몰라 하는데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자위를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한테 해요…….”
손으로만 느끼는 건 아쉽다. 이 단단하고 울퉁불퉁한 기둥이 내 안을 쓸어 줬으면 좋겠다. 끙끙대며 혀를 내어 귀두를 핥았다.
그럼에도 그는 기어코 자위로 사정을 했다. 막을 새도 없이 분출된 정액이 얼굴 위로 마구 튀었다. 질끈 눈을 감고 달뜬 숨만 뱉어 내니 이내 남자가 내 얼굴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이제 내게 쑤셔 줄 차례다. 곧바로 다시 부푼 성기에서 손을 떼고 바지를 벗으려고 하는데 대뜸 그가 내 손을 저지했다.
“왜…… 왜요?”
말없이 제 티를 벗어 내 손목을 결박하기 시작하는 남자를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뭘 하려는 거지. 숱한 섹스 중에도 손이 묶였던 적은 없어 절반은 당황스러웠고, 절반은 기대가 되었다. 혼자서는 손을 풀지 못하게 완전히 고정한 그가 대뜸 나를 들어 올려 소파에 앉혔다. 그러곤 내 앞에 섰다. 코앞에 바짝 세워진 남자의 성기가 있었다.
“뭐 하려고요?”
그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다시 제 것을 손으로 쥐었다. 느리게 움직이는 손바닥 사이로 귀두가 나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내 옷은 벗길 생각도 안 하고 지그시 내려다본 채로 자위만 하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자위만 하는 건 아니겠지.
애가 타 연신 몸을 꼬며 남자에게로 상체를 세웠지만, 그가 내 어깨를 잡아 누르는 바람에 도로 소파에 몸을 묻어야 했다. 남자의 몸이 내 쪽으로 기울었다. 금방이라도 입을 맞출 것처럼 다가왔지만 입맞춤 대신 연신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기만 했다.
그 와중에도 수음은 계속되었다. 호흡이 짧아지고 가슴이 연신 크게 부풀었다 가라앉기를 반복하며 흥분한 티를 내도 그는 선뜻 뭘 해 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왜 이러는지는 대충 예상이 되었다. 아무래도 그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오늘 일이 거슬렸고, 그래서 나를 애태울 모양이었다. 언제든지 떠나도 좋다고 한 사람치고는 상당히 치졸한 짓이었다.
이럴 거면 왜 나를 밀어내냐고 원망이라도 하고 싶은데, 입술 사이로는 달뜬 숨만 새어 나왔다. 금방이라도 다시 정액을 뿜을 것처럼 달아오른 남자의 성기가 눈앞에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묶인 손을 뻗어도 금방 저지되었다.
“흐으……. 제발요.”
그가 또 한 번 내 얼굴 위로 사정을 했다. 이번엔 목을 타고 흘러내리기까지 했다. 남색 슈트 위로 하얀 정액이 지저분하게 묻었지만, 옷을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두 번이나 사정을 했으면 이제 그만하고 내 안에 쏟아 줄 차례인데도 남자가 다시 손을 움직인 탓이었다.
흥분으로 달아오른 눈가가 축축해지는 게 느껴졌다. 입술 옆으로 흘러내리는 정액을 혀로 핥으며 어떻게든 그가 달려들게끔 굴어 봐도 남자는 나를 앉혀 두고 자위하는 데만 열중했다.
“속궁합 어쩌고 한 거…… 그냥 해 본 말이에요. 진심 아닌 거 알잖아요…….”
결국 내 입으로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진짜로 유태주와 잔 것도 아닌데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 사이의 패배자는 언제나 나다.
퍽퍽, 손과 성기가 마찰하는 소리가 빨라질수록 속이 더 타들어 갔다.
“나랑 해……. 응? 나랑 해요.”
그제야 남자가 손을 멈췄다. 기대하는 찰나, 뭉툭한 귀두가 볼을 지그시 눌렀다. 얼떨떨하게 눈을 들자 그가 내 얼굴 위로 성기를 이리저리 문지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가 움직이는 대로 혀를 내어 쫓았지만, 쉽사리 닿지 않았다. 도망가듯 얼굴 곳곳을 툭툭 건드리는 것에 도저히 못 참고 묶인 손으로 기둥을 붙잡았다. 이번엔 그도 내버려 두었다. 아래가 아니라면 입이라도 그로 가득 채우고 싶다.
비릿한 정액 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입에 물었다. 기다렸던 만큼 성급히 혀를 놀리는데 문득 그가 허리를 쳐올렸다.
“우웁!”
동시에 입 안에 기둥이 푹 박혀 들었다.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올려다보자 남자가 내 머리 위를 가볍게 잡고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친 동작은 아니었다. 그러나 입으로 할 때는 늘 내가 하는 걸 그냥 지켜보던 그가 다짜고짜 박아 대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의 허벅지만 붙잡았다.
푹푹, 그의 성기가 입 안을 유린했다.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침이 연신 입술 사이로 흘렀다.
“후읍……. 읏, 웁…….”
숨쉬기가 버거워 연신 고개를 저어도 남자는 기어이 내 입 안에 사정하고 나서야 성기를 빼 주었다.
침과 함께 정액이 같이 흘러내렸다. 조금은 삼킨 것도 같았다. 멍하니 벌어진 입술을 다물지도 못하고 가쁜 숨을 몰아 내쉬는데, 남자가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이제야 할 마음이 생긴 모양이었다. 나는 울먹이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너무해요…….”
“끝나고 나면 고맙다고 할걸.”
그가 알아듣기 힘든 말을 하며 셔츠와 브래지어를 벗겼다. 묶인 손은 그대로라 옷이 완전히 벗겨지진 못하고 팔에 걸쳐져 있었다. 불편해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지만, 그쪽으론 관심도 두지 않고 바지와 팬티까지 모조리 벗겨 낸 남자가 잠깐 감상하듯 나를 내려다보았다.
“애기야, 오늘 많이 울 거 같은데 괜찮겠어?”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그는 못된 말을 한 벌로 내 몸을 짓이길 생각이었다. 뻔뻔하게 거친 섹스를 예고하는 남자나, 그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나나 피차일반이다.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남자가 내 몸을 뒤집어 눕히고 올라탔다. 소파 위에 납작하게 누운 채로 묶인 팔이 그에게 붙잡혀 위로 뻗어졌다.
팔에 걸려 있던 옷이 함께 딸려 올라가 머리 위를 덮었다. 어두운 공간에 혼자만 갇힌 것 같아 간신히 옷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밀어내지 말라고 묶은 거야. 내 몸에 손대면 혼나.”
“응…….”
손대지 말라니. 마음껏 끌어안고 싶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순종적으로 손을 뻗은 채 가만히 있자 그가 잘했다는 듯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척추를 타고 내려간 손이 엉덩이를 가볍게 쥐었다.
커다란 손으로 느리게 주무르는 손길에 나른해지려는 찰나, 남자의 손바닥이 돌연 엉덩이를 내리쳤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그가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화끈거리는 피부를 문질렀다.
그에게 맞는 건 처음이라 아픔보다 충격이 더 컸다.
“왜, 왜…… 때려요?”
“아팠어?”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엉덩이 위로 입술을 내렸다. 보나마나 붉게 달아올랐을 살 위를 부드럽게 핥으며 달래 주었다.
“미안, 미안.”
“……안 미안하잖아요.”
“맞아.”
“때리는 건 하지 마요……. 무서워.”
그가 웃음을 흘렸다. 귀여워서 봐준다, 얼핏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도 같았다. 맞은 부위의 고통은 그에게 한참 빨리고 나서야 가라앉았다.
남자가 내 골반을 가볍게 들어 올리고 더 아래로 고개를 묻었다. 연신 액을 뿜어 대던 질구에 비로소 그의 혀가 닿았다. 좀 더 빨기 쉽게 엉덩이를 치켜들자 잘했다는 듯 때린 곳을 쓰다듬었다.
이럴 거면 왜 때린 거야. 혹시 원래 그런 취향인데 여태껏 참은 건가.
여간 혼란스러운 게 아니었다. 당장 엉덩이 한 대만 맞아도 심장이 철렁하는데 그것까진 맞출 자신이 없었다.
“응……. 읏, 아으…….”
남자가 들썩이는 허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하고 혀를 질구로 밀어 넣었다. 부드러운 혀도 좋지만, 더 단단한 걸 원했다. 허리를 못 움직이게 하니 몸 전체가 위아래로 움직이며 그의 혀를 더 깊게 받기 위해 안달 냈다.
연신 소파 가죽 위로 얼굴을 문지르며 낑낑대는 내가 발정 난 짐승처럼 느껴졌지만, 오래 참았으니 어쩔 수 없었다. 남자가 저렇게 느긋하게 혀를 굴릴 수 있는 건 이미 세 번이나 사정한 자의 여유다.
“그만, 그만 빨아요.”
그는 내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혀를 밀어 넣었다가 빼기만 했다. 나를 애태우려는 수작이 뻔히 보였다. 나는 알고도 그에게 휘둘리며 연신 안타까운 신음만 뱉었다. 밤새도록 울려도 좋으니까 더 거칠게 괴롭혀 줬으면 좋겠다. 나를 마구마구 짓누르고 배 안이 가득할 정도로 사정해 줬으면 좋겠다.
휘어진 허리가 저릿할 때쯤 남자가 나를 도로 내려놓았다. 다시 엎드린 채 가쁜 숨을 내쉬는데 그가 올라타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굵은 기둥은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대신 엉덩이 골을 문질렀다.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며 엉덩이를 주무르는 남자 때문에 탄식이 새어 나왔다.
“제발요…….”
“얌전히 있어.”
그가 몸을 비트는 내 등을 지그시 눌렀다. 그 와중에도 엉덩이에 묵직한 무게감이 닿았다.
넣고 싶은 건 본인도 마찬가지면서 왜 이렇게까지…….
그러다 문득 스치는 생각에 입술을 깨물었다.
거칠게 다루려는 게 아니라 이런 식으로 나를 괴롭힐 생각인가. 설마, 내내 이러진 않겠지.
불안함에 허리를 들썩이며 몸을 돌렸다. 낑낑대며 마주 보고 눕는 나를 남자는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그의 앞에서 무릎을 접어 음부를 내보였다.
“이제 그만하고……. 응?”
“…….”
남자의 눈이 젖은 구멍에 닿았다. 금방이라도 쑤실 것처럼 입맛을 다시면서도 선뜻 움직이지 않아 조금 더 허리를 들어 보였다. 그는 욕구에 충실하다. 내 앞에서 숱하게 자제력을 잃고 달려들었던 것들을 떠올리며 어떻게든 애태우는 짓을 멈추려고 했는데, 남자가 내 다리를 붙잡았다.
그가 내 허벅지를 딱 붙여 오른쪽 어깨에 걸치고 성기를 밀어 넣었다. 내 안이 아니라, 허벅지 사이로. 절로 울상이 지어졌다.
남자의 성기가 허벅지 사이로 튀어나왔다가 나가기를 반복하며 마찰을 일으켰다. 몸은 섹스를 하는 것처럼 흔들리는데 정작 내게 오는 자극은 화끈거리는 허벅지가 전부였다.
순 자기 좋은 짓만 하는 남자를 원망스럽게 노려보며 밀어내려고 손을 뻗었다가, 제 몸에 손대지 말라고 했던 말이 떠올라 어설프게 팔을 허공에 들었다. 그런 나를 비웃듯 남자의 허리 짓은 더 빨라졌다.
“흐…….”
차라리 음부에 비벼 주기라도 하면 모를까, 그는 애매하게 닿지 않는 곳에서 내 몸으로 자위하듯 혼자만 즐겼다. 가끔 달래듯 유두를 스치듯 건드리는 건 오히려 나를 더 애끓게 하는 짓에 불과했다.
“내가…… 그렇게, 잘못한 건, 아니잖아요. 자기가 멋대로 선 잡았으면서…….”
“누가 뭐래?”
“선배도 우연히 만난 거라고 했는데, 왜 자꾸 심술부려요.”
“심술?”
“질투하는 거잖아.”
남자가 실소했다.
“똑똑하네.”
“…….”
솔직히 질투한다는 걸 순순히 인정할 줄은 몰랐다. 눈을 크게 뜨자 남자가 성기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 남자의 골반과 내 엉덩이가 틈 없이 맞닿았다.
“진짜 질투해요?”
“글쎄.”
“언제든지 떠나라고 했으면서……. 나, 가지 마요? 계속 같이 있을까?”
묘하게 들뜨는 기분에 서둘러 묻자 그가 낮게 웃으며 다리를 쓸어내렸다.
“가지 말라곤 안 했어.”
“…….”
“언제든 떠나도 좋다는 건 평생 유효해.”
도로 풀이 죽었다. 기대하지 말자, 바라지 말자, 수도 없이 되뇌었음에도 욕심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남자가 내 다리를 넓게 벌리고 이번엔 음핵 위로 성기 기둥을 문질러 댔다. 비로소 내게도 자극이 왔지만, 아직 부족했다. 몸도 마음도 나는 아직 그를 원한다.
“떠나는 마당에 나까지 신경 쓸 필요가 뭐 있어. 너만 좋으면 그만이지.”
“으읏…….”
“내가 질투에 눈 돌아 날뛰든 말든 때가 되면 버리고 가.”
같이 허리를 움직여 자극을 더했다.
“그 말…… 어떻게 들리는 줄, 알아요……?”
남자의 몸을 만지고 싶어 연신 손을 쥐었다가 폈다. 이렇게 밀착하고 있는데도 멀게만 느껴지는 건 그가 자꾸 빙빙 돌려 말하기 때문이다.
“내가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도, 그쪽은 아닐 거라는 걸로 들려요.”
또한, 잡히지 않는 것처럼 굴어도 결국 내 손에 있음을 실감하는 건 그가 사랑한다는 말을 제외한 모든 것으로 사랑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남들처럼 달콤하게 영원을 약속하지 않아도 결국 시사하는 것은 같다.
손을 아래로 뻗자 그가 쯧, 혀를 찼다.
“손대지 말라니까.”
“내 몸은 상관없잖아요.”
남자의 몸이 아닌 내 다리 사이로 손을 가져갔다. 남자의 눈동자가 천천히 내 움직임을 좇더니, 음순을 벌리는 것을 보고 기가 막힌다는 듯 내 얼굴로 향했다.
“사랑해요.”
“…….”
“내가 사랑하는 건 그쪽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질투 그만하고, 이리 와. 응?”
달래듯 말하자 남자의 눈썹이 찌푸려진다.
“귀엽게 군다.”
“그러니까 더 귀여워해 달라고요.”
“…….”
“엉덩이…… 한 번 정도는 더 때려도 봐줄게요.”
남자가 낮게 웃더니 음부 위로 길게 누운 성기를 세웠다. 쿡쿡 눌러 대는 선단을 빨리 삼키고 싶어 구멍이 연신 움찔댔다.
엉덩이를 좀 더 들어 질구에 귀두를 맞췄다. 아직도 해 줄 생각이 없는지 가만히 있는 남자를 대신해 허리를 밀어 내리자 천천히 성기가 파고들었다. 허리를 꿈틀대며 제 것을 스스로 넣는 광경을 남자는 관람하듯 내려다보았다.
“흐응……. 읏, 아…….”
절반쯤 들어왔을까, 잠깐 숨을 고르고 남자의 허리에 다리를 감아 내 쪽으로 당겼다. 단단한 몸이 내 위를 덮듯 올라탔다.
묶인 팔 사이로 남자의 머리를 넣어 빠져나가지 못하게 옭아매곤 입을 맞추자 그가 자연스레 혀를 섞어 오며 천천히 성기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 비로소 가득 찬 압박감에 뜨거운 숨이 뱉어졌다.
그러나 남자의 심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흣……. 움직여요…….”
“혼자 잘 넣던데 계속해 보지 그래.”
움직일 공간도 없이 위에서 짓누르고 있으면서 뻔뻔하게 말한다.
본능적으로 허리가 움직여도 소파와 남자 사이에 틈 없이 갇혀 전혀 쑤셔지지 않았다. 고작 이리저리 흔들며 안에서 휘젓는 게 전부였다. 이것보다는 세게 안을 찧어 주기를 바라 남자의 입술을 빨며 애원했지만 그럴수록 몸을 누르는 무게감만 묵직해졌다.
결국 그가 미리 경고한 대로 울음이 터졌다.
“맨날 나만 애타…….”
“알고 시작했잖아.”
할 말이 없었다. 그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옆에 있겠다 선언한 게 나였으니까.
흐느끼며 노려보자 그가 코에 입을 맞추더니 얼굴 곳곳을 핥기 시작했다. 허리를 찔끔찔끔 비틀어 어떻게든 내가 원하는 부위를 찌르려고 움직였지만 그럴 때마다 남자가 미묘하게 방향을 틀었다. 정말 나쁜 놈이 따로 없다.
안을 가득 채운 남자의 성기를 내벽이 세게 조였다. 덩달아 몸도 움츠러들었다. 이러니 느낌이 좀 오는 것 같아 연신 아래를 조였다 풀며 그를 압박하니 눈가를 핥던 남자가 피식 웃었다.
“갈수록 늘어.”
“흑…….”
“어디 가서 이러지 마. 나도 모르게 그 새끼 죽여 버릴 거 같다.”
“진짜 못됐어…….”
“사람 죽이는 거 쉽다니까.”
그게 아니라 뻔뻔하게 내보이는 소유욕이 못됐다는 말이다. 소유하려고 하진 않으면서 욕심은 내는, 남자의 이기적인 방식을 원망하며 몸을 한껏 조였다.
“흐으응…….”
역시 부족하다. 올 듯 말 듯한 쾌락에 오히려 눈물이 더 새어 나왔다.
“움직여요. 응?”
“그럴까.”
“응……. 해 줘, 해 줘요…….”
“예쁘게 부탁해야지.”
참다못해 울먹이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하고 있잖아!”
그가 못 참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얼굴 곳곳에 입술을 붙였다.
“그래. 예뻐 죽겠네.”
“그럼 이제……. 아……!”
말을 끝맺기도 전에 성기가 끝까지 빠져나갔다가 다시 안으로 푹 박혀 들었다.
비명 같은 신음을 내지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렇게 해 달라 졸랐는데, 단번에 절정을 느껴 버린 것이다. 내내 애가 타서인지 온몸이 전율할 정도로 강한 쾌락이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바들대는 내 팔을 남자가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곤 절정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 허리 짓을 했다.
“아, 흑……! 읏……!”
몸은 그에게 짓눌렸고, 팔은 머리 위로 고정되었다. 도망갈 곳이라곤 없는 와중에 지난번과 같은 불편한 요의가 느껴졌다. 찾아보니 여성 사정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것 같았는데, 그게 뭐든 남자의 앞에서 배출을 하는 건 창피한 거라 고개가 마구 저어졌다.
“흑, 나 또, 또 쌀 거 같……. 응……!”
부탁은 했지만, 그가 멈춰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로 남자가 허리 짓을 뚝 멈췄다. 내내 못살게 군 게 미안해서인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남자에게 붙잡힌 손을 빼내려는데 불현듯 그의 얼굴에 짓궂은 기색이 스쳤다.
“앗……!”
불안하게 올려다보는 순간 그가 멋대로 내 몸을 들어 올렸다. 힘이 어찌나 센지 허공에서 몸이 빙글 돌아갔다.
남자의 가슴팍에 등을 댄 채로 팔에 양다리를 걸친 모양새였다. 그러니까 맞은편에서 보면 벌어진 내 다리 사이로 남자의 성기가 박혀 있는 게 훤히 보이는 음란한 자세였다. 아무도 없는데도 수치스러웠다.
“뭐, 뭐 하는 거예요.”
그가 대뜸 걸음을 옮겼다. 움직일 때마다 안을 채우고 있던 성기가 미세하게 들어왔다 나가며 요의를 재촉했다. 안겨서 박힌 적은 많았지만, 유난히 당황스러운 건 그의 걸음이 향하는 방향 때문이었다.
남자가 화장실 문을 발로 걷어찼다.
“왜…….”
“쌀 거 같다며.”
“…….”
그가 변기 앞에 섰다. 그 뒤로 붙어 있는 거울에 우리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커다란 몸에 매달려 양손이 묶이고, 아래가 꿰뚫려 있는 모습은 상상보다 훨씬 더 음란했다.
거울 너머로 남자가 눈을 마주치며 귀를 핥았다. 너무 창피해 질끈 눈이 감겼다.
“변기에 싸야지.”
“흑, 잠깐……. 잠깐만요. 아, 응!”
그가 보란 듯이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하자 몸이 함께 튀어 올랐다 떨어지며 더 깊이 삽입되었다.
“하윽……! 싫어. 이러지 마요……!”
금방이라도 쌀 것처럼 아래가 부푸는 게 느껴졌다. 한 번으로도 충분히 창피한 짓을 또, 그것도 나를 일부러 부끄럽게 만들려는 남자의 앞에서 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참아 보려고 몸에 힘을 주고 고개를 저었지만, 그럴수록 남자는 더 집요하게 아래를 찔러 왔다.
“눈 떠.”
“싫어……!”
“서을아, 눈 떠야지.”
상냥한 척 속삭이는 가증스러운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이 떠졌다.
약아 빠졌어.
조금만 잘해 주면 홀라당 넘어가는 나를 그는 너무 잘 안다. 남자가 잘했다는 듯 볼에 입을 맞췄다.
“네가 싸는 건 네 눈으로 봐야지.”
“싫어요. 하지 마, 응……!”
“곧 싸겠다. 잘 봐.”
“하윽!”
남자가 뭔가를 느꼈는지 허리를 더 빠르게 쳐올리기 시작했다. 머리가 새하얘져 굵은 기둥이 내 안으로 사라졌다가 나오는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다, 무심코 몸을 한껏 움츠렸다.
거울 너머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래에서 맑은 물이 뿜어져 나왔다. 그 와중에도 남자가 멈춰 주지 않아 액이 거울 위로 마구 뿌려지며 우리의 모습을 적셨다.
“하으…… 읏…….”
“시원해?”
몇 차례 더 싸고 나서야 겨우 숨을 몰아 내쉬자 남자가 놀리듯 속삭였다.
거울에 비친 남자의 얼굴 위로 내가 싼 흔적이 방울져 내렸다. 너무 창피해서 당장이라도 숨고 싶은데, 그에게 붙잡혀 있어서 그러지도 못하고 팔로 얼굴을 가린 채 엉엉 소리 내 울었다. 이 와중에도 남자는 내 안에 사정하며 잘게 허리 짓을 해 댔다.
“엉망이 됐네. 너도 싸고 나도 싸고.”
그가 자세히 보라는 듯 거울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래도 내가 울기만 하자 기어코 한쪽 팔로 내 몸을 든 채로 얼굴을 잡아 돌렸다.
거울 속의 나는 온 피부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얼굴을 구기고 울고 있었다. 차마 아래는 보지 못하고 남자만 노려보자 손수 고개를 내려 주기까지 한다. 마음 같아선 손가락을 깨물고 싶은데 힘을 이기지 못하고 강제로 남자의 말대로 엉망이 된 음부를 볼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남자의 것을 삼키고 있는 질구 주변으로 하얀 포말이 일었다. 차마 오래 보지는 못하고 질끈 눈을 감았다.
“너무해…….”
“왜. 예쁘잖아.”
그가 다시 발기한 성기를 느리게 움직이며 가볍게 웃었다.
“계속 봐야지.”
“그만 괴롭혀요…….”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남자가 다시 양팔로 내 다리를 잡아 넓게 벌렸다.
“너 가는 거 네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여기서 안 나갈 거야.”
“제발, 그만 좀…….”
“계속해도 난 상관없고.”
“으읏!”
본인 말대로 하기 전까지는 봐주지 않을 걸 알아서 마지못해 눈을 떠야 했다.
다리가 벌어져 허벅지 안쪽의 흉터가 훤히 보였다. 그 사이로 부푼 음핵과 벌어진 구멍이 있고, 그가 움직일 때마다 가슴이 출렁거렸다. 반쯤 눈이 풀려 있고 입술이 벌어진, 쾌락에 젖은 얼굴까지.
박혀 들 때마다 음부가 조여들고 나갈 때마다 붉은 내벽이 쓸려 나와 그를 붙잡았다. 그에 맞춰 아랫배가 부풀었다 가라앉으며 삽입을 여실히 드러냈다. 내가 이런 모습으로 그와 섹스를 하는 줄은 몰랐다.
“응……. 으읏.”
“예쁘지?”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예쁘긴커녕 너무 음란해서 눈 뜨고 못 봐 줄 지경이었다. 차라리 빨리 쑤시면 모를까, 일부러 느리게 허리를 움직여 대니 이 시간이 길어질 것 같아 나도 허리를 같이 움직였다. 남자에게 매달려 허리를 흔드는 내가 거울 속에 적나라하게 비쳤다.
“하으…… 읏, 아……!”
“혼자 보기 아깝네.”
“읏!”
“근데 나 말고 다른 데 보여 주면 혼나.”
“결혼하면, 읏……. 결혼하게 되면, 보여 줄 수밖에 없는데…….”
그러니까 쓸데없이 선 자리 같은 건 그만 알아보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남자가 귀를 깨물며 허리를 푹 찍어 올렸다.
“안 돼.”
“아아……!”
“결혼은 딴 놈이랑 해도 섹스는 오빠랑 해야지.”
거울을 통해 마주친 남자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아으…… 읏!”
불현듯 절정이 찾아온 건 단순히 육체적인 쾌락 때문만이 아니었다. 남자의 못된 소유욕에 정신까지 쥐어짜인 기분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허리를 마구 펄떡였다. 어깨가 이리저리 비틀리며 어떻게든 쾌감을 버텨 내려 애썼다.
“그쪽이랑만 할게요, 흐……. 이런 거, 다른 사람이랑 안 해…….”
당신도 오직 나와 이런 짓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사랑해 달라고 조르지 않기로 했으니까. 또 나를 밀어낼지 모르니까.
“억울해?”
“아니요…….”
“그래? 다행이네. 억울하다고 하면 나도 너랑만 섹스할까 했는데.”
그래서 남자가 먼저 입을 뗐을 때, 내가 너무 간절히 바라서 헛소리를 들은 줄 알았다.
“응……?”
“금방 떠나겠는데?”
“아…… 아니야.”
급히 남자를 돌아봤다. 남자가 웃음을 흘리며 목을 핥았다.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 불편한 팔로 남자의 목을 감았다.
“그렇게 말해도 돼요……?”
“…….”
“나랑만 하자고 졸라도 돼? 그래도 나 안 밀어낼 거예요? 안 떠나?”
그가 얼굴 곳곳에 짧은 입맞춤을 했다. 그에 말이 뚝뚝 끊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답해요.”
“싫어.”
“으읏…….”
남자의 성기가 다시 단단해졌다. 몸을 한껏 조이며 애타게 바라보자 그가 허리를 느리게 움직였다.
“응……. 읏, 나 말할 거야…….”
“해 봐.”
허락이 떨어졌다. 그러나 동시에 허리 짓이 거칠어졌다. 말을 할 틈도 없이 신음이 앞 다투어 튀어나왔다. 나는 헐떡이며 남자의 입술을 빨았다.
“흣, 잠깐, 잠깐만요.”
“뭐 해. 할 말 있다며.”
“아흑! 으응, 흣.”
그가 움직이는 대로 휘둘리느라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울상을 짓자 문득 남자가 허리를 멈추고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잘게 떨리는 걸 보니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놀리는 게 분명하지만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나는 허리를 비틀어 그를 좀 더 끌어안았다.
“이제 나랑만 해요. 응?”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얼굴에 웃음기가 맺혀 있었다.
“응……. 나랑만, 흣…….”
푸욱, 그가 안을 깊게 찔렀다.
“그럴까?”
“아……!”
“그러지, 뭐.”
가볍게 던지는 말에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정말 바보 같은 거 아는데, 그 말에 모든 걸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섹스는 남자가 솔직하게 드러내는 유일한 욕망이다.
그걸 나랑만 하겠다는 거다.
나랑만. 오직 나하고만.
“아, 읏……!”
“좀 예뻐야지.”
“흐윽, 아, 응…….”
그건 곧, 나만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는 거다.
“나도 사랑해요.”
“…….”
그가 피식 웃으며 혀를 섞어 왔다. 대답 없는 대답이었다. 나는 남자의 혀를 느끼며 황홀경에 젖었다.
아마 우리는 지금처럼 이상한 방식으로 계속 사랑할 것이다.
그는 언제든 나를 보낼 준비를 하는 주제에 나를 소유하려 할 것이고, 나는 남자가 그어 놓은 선 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겠지.
그래도 상관없다. 본질은 변하지 않으니까.
나는 그를 사랑한다. 나를 사랑해서 사랑하지 않는 척하는 남자를 사랑해 마지않는다.
중요한 건 그거다.
나의 본질.
당신의 본질.
우리의 본질.
사랑.
“으응……. 대호야, 사랑해.”
“까분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남자.
대호.
<2권 외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