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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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기계처럼 살았다. 정확하게는 나사 빠진 기계.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대부분을 멍하니 있었다.

그사이에 고채원은 미안하다는 메시지 하나만 남기고 미국으로 떠났다. 나는 당연히 답장하지 않았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공허해 밤마다 울면서 남자를 생각했다. 남자의 옆에 있든, 혼자 있든 내 하루는 모조리 그에게 허비되는 중이었다. 이럴 거면 그냥 그와 함께 있고 싶다. 남자의 곁이라면 삶을 낭비해도 상관없는데, 왜 그는 그걸 거부하는 걸까.

“너 유학 준비하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이 대표가 선물이라고 주더라.”

“…….”

저녁을 깨작거리는데, 아버지가 내게 작은 상자를 건넸다.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린 건, 이 대표라는 말 때문이었다.

상자를 받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간신히 뚜껑을 여니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건 보석이 알알이 박힌 손목시계였다.

“뭐야, 이게?”

아버지가 미심쩍은 얼굴로 시계를 꺼내 간 순간 동공이 확장되었다. 시계 아래에 작은 쪽지가 하나 들어 있었다.

“이렇게 비싼 걸 이 대표가 왜 너에게 주니?”

“…….”

“혹시 둘이 뭐 있는 거 아니지?”

쪽지는 발견하지 못한 건지 못마땅하게 시계를 이리저리 둘러보는 아버지에게 손을 뻗었다.

“줘, 내 거야.”

“이 대표 너한테 관심 있어?”

“……그런 거 아니야.”

“이 대표가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고 해도 아빠는 반대야. 우리 딸 못 줘.”

“그런 거 아니라고…….”

“아니면 됐고.”

아버지가 다시 시계를 건네주었다.

들키지 않게 재빨리 뚜껑을 닫고 곧장 방으로 들어와 쪽지부터 꺼냈다. 이민후의 선물일 리가 없다. 떨리는 손으로 겨우 쪽지를 펼쳤다.

「어디서든 차고 다녀.」

“하…….”

단숨에 얼굴이 구겨졌다.

간신히 하루하루 버티고 있었다. 이제 조금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자는 너무도 가볍게 나를 들쑤셨다.

신경질적으로 종이와 상자를 집어 던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 시계가 이리저리 굴러갔다.

그렇게 차갑게 내보낸 주제에 이런 걸 보내는 저의가 뭐야. 누가 이딴 거 달래?

내가 바라는 건 남자지, 비싼 선물 따위가 아니다. 이럴 시간에 차라리 얼굴 한 번 보는 게 나에게는 더 큰 위로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으려는 그때였다.

쾅쾅쾅!

바깥에서 누군가 거칠게 문을 두드렸다. 깜짝 놀라 방에서 나가자 거실에 앉아 있던 아버지 역시 놀란 눈을 하고서 몸을 일으켰다.

쾅쾅쾅!

“누구시죠?”

다소 위협적인 소리에 아버지가 경계하며 인터폰을 켰다. 덩달아 그 옆으로 다가간 나는 화면이 켜지며 나타난 얼굴에 놀라서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진서을 씨 안에 계십니까?]

“누구신데 이 시간에 우리 딸을 찾죠?”

[확인할 게 있습니다. 잠깐만 문 여시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빠, 잠깐만.”

인상을 찌푸리는 아버지의 손을 붙잡았다.

“아는 사람이야. 잠깐 나갔다 올게.”

“위험한 거 아니야? 인상이 안 좋아 보이는데.”

“아니야.”

아버지를 연신 안심시키곤 현관 밖으로 나왔다. 마당을 가로지르고 대문을 열자 문 앞에 서 있던 남자의 부하가 그제야 나를 발견하곤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세요.”

“확인했으니 됐습니다.”

“뭘 확인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들어가서 쉬세요.”

“이봐요.”

다짜고짜 찾아와서 뭘 확인한다는 건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인상을 찌푸리며 앞을 막아서자 목덜미를 긁적이던 부하가 문득 내 양쪽 손을 번갈아 보았다.

“아, 시계 아직 못 받으셨습니까?”

“…….”

“난 또, 쓰러진 줄 알고.”

“그게 무슨…….”

어디서든 차고 다녀. 남자의 쪽지가 떠올랐다. 보자마자 시계를 집어 던졌고, 곧바로 남자의 부하가 나를 찾아왔다. 분명 관계가 있다.

“받았어요, 시계. 설마 도청기라도 설치해 둔 거예요?”

“예? 아니요.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알고 왔는데요.”

“…….”

난감한 얼굴로 시선을 피하던 부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간단한 위치 추적 기능입니다.”

“하…….”

“갑자기 추락하거나 이동 반경이 달라지면 신호가 오게 되어 있을 뿐입니다. 사생활에 방해되지 않게 신경 쓰겠습니다. 미국으로 가신다고 들었는데 거긴 여기보다 더 위험…….”

“미국까지 따라오겠다고요?”

“…….”

날카로운 시선에 부하가 입을 다물고 몸을 돌렸다. 나는 굳이 그를 붙잡지 않았다. 저 사람은 남자가 시키는 대로 움직일 뿐이다. 내게 있을 위험을 걱정하는 건 남자다.

실소가 터졌다.

버렸다며. 그만하자며. 불장난이라며.

미련에 빠져 허우적대는 건 나뿐만이 아닌데, 함께 있을 수가 없다니. 어처구니없는 아이러니였다.

그새 부하는 사라졌고, 늦은 밤 골목엔 어둠이 내려 있었다. 잠깐 멍하니 어둠을 바라보던 나는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서을아, 그 사람은 누구…….”

“아빠,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이 시간에 어디를 가. 너무 늦었어. 일이 있으면 날 밝거든 가.”

만류하는 아버지를 지나쳐 나왔다. 아버지의 말은 웬만하면 듣는 편이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곧장 차에 올라타 시계를 왼쪽 손목에 걸었다. 추락하거나 이동 반경이 달라지면 신호가 간다고 했다. 신호를 받은 부하는 남자에게 보고할 것이다. 그럼 지금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도 알겠지.

남자의 차에서 어렴풋이 봤던 내비게이션 화면을 떠올리며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영전시」, 「성운산」, 「8번 국도」.

무작정 차를 몰았다.

도로는 한산했다. 누구도 나를 쫓아오는 것 같지 않았지만, 분명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으리라. 보란 듯이 속도를 높였다. 아마 이게 진짜 마지막일 거다.

마지막으로 잡을 거야. 진짜 마지막 기회야.

내가 아니라 남자를 향한 경고였다.

성운산으로 들어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사방이 캄캄해졌다. 어두운 산길을 따라 빙글빙글 차가 돌아갔다. 정확한 위치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꽤 깊은 곳까지 들어갔었다.

한참을 산을 타고 올라가다 옆으로 빠지는 길을 발견하고 망설임 없이 핸들을 꺾었다. 아니나 다를까, 낯익은 마을이 나왔다. 아무 곳에나 차를 세워 두고 무작정 밖으로 뛰쳐나왔다.

낡은 기와집. 병든 친모가 죽어 가는 병상. 남자의 가장 순수한 시절이자 불행한 과거를 담고 있는 공간에서 나는 그가 버린 라이터를 찾기 위해 마당을 뒤졌다. 이미 한 달이나 지났지만 구태여 마당을 치울 사람도 없어 보이니 분명 그대로 있으리라.

“아…….”

내 예상이 맞았다. 그가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 라이터는 지저분한 수도 구석에 놓여 있었고, 그 위로 모래가 덮여 있었다. 대충 모래를 털어 내고 라이터를 들었다.

탁, 뚜껑을 열고 불을 피우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불꽃이 솟았다. 불을 피운 채 남자의 집을 돌아보는 찰나였다. 끼이익, 타이어가 바닥과 마찰하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다시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뭐 하자는 거야.”

예상대로 남자가 대문을 걷어차며 들어왔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얼굴은 여느 때보다 더 차가웠다. 아마 오밤중에 내가 이곳으로 향한 걸 알고 화가 났겠지. 나는 대답 대신 라이터를 켰다.

그가 미간을 구기며 내 쪽으로 다가와 라이터를 빼앗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사람 죽이는 게 쉽다면서 왜 어머니는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살려 뒀어요?”

남자의 손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그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꺾었다.

“잘 지내더니 갑자기 왜 이래.”

잘 지냈다고? 내가? 웃기지 마. 내 일거수일투족을 다 지켜봤으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아무리 개새끼라도 부모님은 죽일 수 없었나 봐요. 그쪽을 이렇게 살게 만든 사람인데.”

“좋을 대로 생각하고, 이리 와. 가자.”

“내가 죽여 줄까요?”

라이터를 쥔 손이 떨렸다. 그에 맞춰 불꽃도 흔들렸다.

“떳떳하게 세상에 드러나지도 못하고, 사랑도 못 하게 만든 사람 내가 죽여 줄게.”

“진서을.”

“여기도 다 불태워 줄게요. 고성하 집처럼. 새까맣게 잿더미로 만들고, 과거 같은 거 다 잊고 나랑 같이 있어요.”

“…….”

“그쪽도 나를 위해 그 큰 집을 태워 먹었는데, 나라고 못 할 거 뭐 있어요.”

가만히 나를 응시하던 남자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곤 쓰러져 가는 집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그래. 해 봐.”

“…….”

“사람도 죽이고, 불도 지르고 다 해 봐. 뒤처리는 오빠가 해 줄 테니까 걱정 말고.”

진짜로 내가 그의 친모를 죽이고 불을 질러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다.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어서 친모를 손수 죽이지 않은 게 아니다. 이미 죽어 가고 있는 사람을 방치하는 것 역시 살인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냉정한 남자가 유일하게 미련을 가지고 있는 건 하나다.

라이터를 내 쪽으로 당겼다. 내가 뭘 하려는 건지 눈치챈 듯 남자의 표정이 미세하게 틀어졌다.

나는 라이터 불 위로 내 손등을 가져다 댔다.

“이게 마지막이야.”

“…….”

“이번에도 안 잡히면 나 진짜 관둘 거예요.”

뜨겁다.

고통이 느껴졌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온몸에 화상 입고 평생 그쪽 저주하면서 살 거야.”

“…….”

“그러니까 제발…… 잡혀요.”

“나를 협박하려면 좀 더 제대로 해.”

“…….”

“몸에 휘발유 정도는 뒤집어쓰고 라이터를 켜야 오빠가 쫄지.”

남자가 나를 비웃었다. 하지만 만들어 낸 반응인 건 모를 수 없었다. 남자의 눈은 줄곧 내 손등에 고정되어 있었다. 내가 다치는 걸 눈 뜨고 보기 싫은 듯 눈썹을 찌푸리고.

“읏…….”

나도 모르게 손등을 뒤로 뺄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살갗이 타들어 가는 건 상상 이상으로 끔찍했다. 내 신음에 남자의 눈이 기민하게 움직였다.

“불장난 적당히 하고 내려놔.”

“싫어요…….”

“구질구질하게 왜 이래.”

“이딴 거 보내는 그쪽은 안 구질구질하고?”

손목시계를 가리켰다. 그가 한숨을 뱉으며 내게 손을 뻗었다.

“라이터 내놔.”

“내 옆에 있겠다고 하면 줄게요.”

“이게 진짜.”

남자가 순식간에 라이터를 낚아챘다. 피할 틈도 없었다. 동시에 그가 화상 입은 손등을 붙잡았다.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무 쉽게 나를 제 품으로 끌어당긴 남자가 못마땅한 얼굴로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아파할 거면서 무모한 척은.”

“보고 싶었어요.”

기다렸다는 듯 남자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고작 나 하나 저지하지 못할 남자가 아니란 건 진작 알고 있었다. 이까짓 협박으로 다시 내게 올 사람이라면 그렇게 떠나지도 않았을 거다.

다만, 나는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남자의 품이 그리웠다. 그의 목소리가 매일 아른거렸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 표정, 말투, 손길. 뭐 하나 애틋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얼굴 좀 보여 주지……. 그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내내 참았던 눈물을 쏟아 냈다.

오랜만에 안긴 남자의 품은 여전히 넓고 단단했으며, 따뜻했다. 그가 깊은 한숨을 뱉으며 내 머리를 감쌌다. 손등을 조금 태워 먹은 것치고는 꽤 괜찮은 성과였다.

“알았어요. 내가 졌어요.”

“…….”

“더 이상 안 매달릴게. 사랑해 달라고 조르지도 않을게요.”

“…….”

“유학도 가고, 현실에 적응해서 열심히 살다가 그쪽 말대로 권지운 같은 사람이랑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할게요.”

남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끊임없이 나를 밀어내는 주제에 상처받는 그가 밉고, 안타깝고, 또 사랑스럽다.

“대신 그때까지만 나랑 있어요.”

“…….”

“그냥 지금까지 하던 것처럼 섹스하고 싶으면 섹스하고, 나 옆에서 지켜 주고……. 그렇게 있어요.”

“…….”

“그 정도는 괜찮잖아. 그냥 딱 그 정도만……. 네?”

떳떳하지 못한 자신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내 옆에 두지 못하는 남자의 방식을 받아들이겠다는 말이다.

그깟 사랑 따위 이름만 떼 버리면 그만이다.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내 옆에 있는 게 힘들다면 가타부타 껍질 같은 건 집어치우고 그냥 내 옆에 있으면 된다.

남자의 이름이 사창가 가게 따위라고 해서 그의 본질이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남자는 남자일 뿐이고, 마음은 마음일 뿐이다. 뭐라고 이름 붙이든, 변하지 않는 진짜는 분명 존재한다.

남자가 천천히 팔에서 힘을 풀었다. 나는 그의 가슴팍에 연신 얼굴을 문질렀다. 이것마저 거절하진 않을 거다.

왜냐하면 남자는…….

“고개 들어.”

“…….”

“키스할 거야.”

어쨌든 나를 사랑하니까.

알고 보니 그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남자의 친모는 2주 전에 숨이 끊어졌고, 그가 손수 산에 묻었다고 한다. 그래서 태연하게 내게 불을 질러 보라 권한 모양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알고 싶은 게 많지만 그에게 어린 시절 이야기를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을 게 뻔하고, 구태여 보챘다가 또 그가 도망가 버릴까 봐 조마조마했다.

우리는 곧장 별장의 까만 방으로 돌아와 쉬지 않고 섹스를 했다.

늘 여유롭게 내 몸을 탐했던 남자는 이 순간만큼은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사람처럼 달려들었고, 나는 잠시라도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아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밤새도록 이어진 섹스 후에는 잠깐 아무 말 없이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는 여전히 내 옆에 있겠다 선택한 것을 후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볼을 끊임없이 쓰다듬는 손길에 여전히 망설임이 묻어났지만 나는 모르는 척 남자의 잡생각을 없애기 위해 그의 아래로 내려가 성기를 입에 물었다.

“흐으……. 너무 커…….”

입을 한껏 벌리고 힘겹게 빨다가 고개를 들자 남자가 환장하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손만 스쳐도 덜덜 떨던 애는 어디로 갔어.”

당신이 이렇게 만들었다는 말은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내 옆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남자에겐 그가 나를 망가트렸다는 뉘앙스는 그리 달갑지 않을 것 같았다. 대신 귀두에 두어 번 입을 맞추고 몸을 일으켜 그에게 올라탔다.

“내가 해 볼래요.”

남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침대 헤드에 기댔다. 그의 어깨 뒤로 길게 간 금이 보였다. 단단하게 세워진 성기를 붙잡고 그 위에 천천히 앉았다. 이미 한참 박혔던 구멍은 쉽게 남자의 것을 삼켰다.

“흐응…….”

천천히 몸을 아래로 내릴 때마다 남자가 가득 찼다. 그가 오롯이 내 안에 들어와 있다는 건 몇 번이나 느껴도 황홀한 순간이었다. 남자의 어깨를 손으로 짚은 채 완전히 몸을 내리고 잠깐 그 압박감을 느꼈다.

“아……. 좋아.”

“…….”

그는 작은 움직임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았다. 내 얼굴 근육이 움직이는 것, 어깨가 떨리는 것, 허리가 움직이는 것, 뭐 하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응……!”

천천히 몸을 위아래로 들썩였다. 서툰 허리 짓에도 남자의 울퉁불퉁한 성기가 내벽을 긁어 대는 통에 버티기가 힘들었다.

쿵쿵,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다 참지 못하고 남자의 입술을 빨았다. 그가 순순히 입을 벌려 주었다. 혀를 밀어 넣고 그가 내게 키스를 하던 것처럼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아래위 전부 신경을 쓰려니 정신이 없었다.

나를 그렇게 몰아붙이면서도 능숙하게 키스를 하던 남자가 새삼 경험이 많구나 싶었다. 질투가 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애써 평정을 유지했다.

대신 좀 더 열심히 혀를 움직였다. 이제 나 말고 누구와 입을 맞춰도 만족하지 못하게, 나를 마구 새겨 넣고 싶었다. 그러려면 연습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지만.

“으응……. 읏…….”

안쪽 깊은 곳에 귀두를 닿게 하며 연신 남자의 혀를 빨았다. 눈이 저절로 감기고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가 내 허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못내 좋아서 어리광부리듯 남자의 입 안에 끙끙대는 소리를 흘려보내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나를 리드하기 시작했다.

“흐읏……!”

푹, 아래가 깊이 박히고 혀가 뽑힐 것처럼 그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결국 또 나는 그에게 매달려야 했다.

“읏……. 내가, 아응, 내가 할래, 흣……!”

“이걸 그냥 보고 있으라고.”

“아…… 아아…….”

“차라리 나를 죽이지 그래?”

몸이 한껏 수축하며 절정을 맞기 직전 남자가 내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쑤욱, 빠져나간 성기가 허공에 정액을 뿌려 댔다. 못 채운 쾌락에 애가 타 엉덩이가 남자의 손 위에서 멋대로 이리저리 흔들렸다.

“나 아직 못 갔는데…….”

“그래 보여.”

“너무해…….”

남자가 재밌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괜한 심술이다. 어차피 해 줄 거면서. 헐떡이며 그의 목을 깨물었다. 아파하는 기색도 없이 엉덩이를 주무르던 남자의 성기는 다시 단단해져 있었다. 빨리 그것이 나를 가득 채워줬으면 좋겠다.

“나 좀…… 해 줘요, 네?”

“더 귀엽게 부탁해 봐.”

“으으응…….”

원망스럽게 남자의 어깨를 때리는데 문득 그가 내 손을 잡았다. 화상을 입은 손등은 별장에 오자마자 그가 치료해 주어 붕대가 감겨 있었다.

“한 번만 더 이런 짓 하면 진짜 혼나.”

“…….”

“일주일 내내 섹스만 하는 수가 있어.”

힐끔 남자의 얼굴을 보자 그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했다.

“왜 기대하는 얼굴이지?”

역시나 쉽게 나를 파악한 그가 혀를 찼다. 이렇게 나를 애태우는 와중에 그런 말을 하면 당연히 기대할 수밖에…….

“너랑 한다는 말 아닌데.”

“…….”

한순간에 기분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구겨지는 내 얼굴 위로 남자의 입술이 붙었다. 솔직히 울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어설픈 질투로 또 그를 놓치느니 혼자 속상해하고 마는 게 낫다.

다른 생각하지 말자. 남자만 생각해. 지금 그와 함께 있으니까 그걸로 만족해. 나만 사랑해 달라고 조르지 마. 나만 욕심을 버리면 남자는 떠나지 않는다.

“표정이 왜 그래.”

“내가 뭘요…….”

애써 울먹임을 삼켰다. 쪽쪽,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춘 남자가 가벼운 콧소리를 내며 나를 제 성기 위에 앉혔다. 푸욱, 원하던 것이 박혀 들었는데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내가 선택한 거니까.

나는 복잡한 심경으로 남자의 품에 안겼다.

“감정도 소모품이야.”

“아읏.”

“언젠간 닳을 날이 오겠지.”

남자가 낮게 중얼거리며 열에 달뜬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럼 망설이지 말고 떠나.”

“후으…….”

“알았지?”

나는 그의 손바닥에 얼굴을 문질렀다. 퍽퍽, 맨살이 마찰하는 소리가 진득했다. 가쁘게 숨을 몰아 내쉬는 내게 입을 맞춘 남자가 이마를 맞댄 채 속삭였다.

“대신 그때까진 오빠 마음껏 이용해도 돼.”

“…….”

“꽤 쓸 만하잖아.”

그가 가볍게 웃으며 허리를 쳐올렸다.

나더러 헤프게 굴지 말라더니 제 몸을 마음껏 이용하라는 남자의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속상하다. 그가 왜 그때 내게 화를 냈는지 알 것 같았다. 내겐 누구보다 특별한 사람인데, 아무리 본인이라도 그를 함부로 대하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 아읏……!”

비로소 절정이 찾아왔다. 허리를 앞뒤로 쉴 새 없이 펄떡대며 남자의 성기를 조이다 힘없이 그에게 기댔다. 맞닿은 가슴에서 요란한 심장 박동이 들렸다.

그는 내게 역할을 부여했다. 사랑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마음껏 그를 이용하다, 멀쩡한 사람을 찾으면 훌쩍 떠나 버리는 역할. 속이 상하는 와중에도 이게 최선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남자와 나는 가느다란 줄 위에 서 있다.

선만 지킨다면 그가 먼저 나를 밀어내는 일은 없을 거다.

“그 말은…… 내 감정이 닳아 없어지기 전까지는 절대로 먼저 떠나지 않겠다는 거죠.”

“맞아.”

“약속 지켜요.”

“그래.”

“응……. 그거면 됐어.”

내 사랑의 정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내게 발목을 잡힌 거나 다름없었다.

남자의 성기가 다시 부풀었다. 나는 그를 한가득 품은 채 눈을 감았다.

당신은 영원히 나를 떠나지 못해.

“사랑해요.”

“…….”

사랑한다는 말을 해 달라고 하는 대신 남자의 귀를 깨물었다. 아프지 않게 이로 귓불을 잘근대며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그는 영원히 내 곁에 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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