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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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이민후가 나를 불러낸 곳은 성원 신도시의 미개발 구역이었다.

그가 보내 준 차는 처음 보는 남자가 운전하고 있었는데, 굳이 따지면 남자보다는 이민후 쪽의 사람인 듯했다. 같은 조직이라도 라인이라는 것은 존재할 테니까.

“일주일 만인가요.”

차가 멈춰 서자 뒷좌석 문이 열리며 이민후가 올라탔다. 운전석에 있던 남자는 자리를 피했다.

공사를 하다 멈춘 건지 곳곳에 흙더미와 중장비가 방치되어 있는 반면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음침한 곳에서 이민후와 단둘이 차에 있으려니 겁이 났지만, 그가 남자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하며 애써 긴장을 감추었다.

“걱정 말아요. 서을 씨한테 손대면 나 진짜 저세상 가거든.”

“…….”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이 떨리는 걸 그새 봤는지 이민후가 안심시켰다. 나는 주먹을 꽉 쥔 채 그를 돌아봤다.

“여민당 이야기하셨죠. 고성하가 죽은 것과 관련이 있는 일이에요?”

“그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죠. 서을 씨 미성년자일 때 고성하가 손댄 거 맞아요?”

“…….”

이민후가 다짜고짜 끔찍한 기억을 들춰냈다. 손이 더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으세요? 알고 있잖아요.”

“혹시 증거 같은 건 없죠?”

“……무슨 증거요?”

“고성하가 서을 씨를…….”

“없어요.”

10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끔찍한 기억이지만 당연히 증거 따위가 있을 리 만무하다. 교묘한 고성하는 언제나 남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 내 몸을 탐했으니 당사자인 나 말고는 누구도 그 속내를 알지 못했다.

딱 한 번, 그가 내 티셔츠를 가지고 가서 역겨운 짓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남자 역시 끝내 몰랐으리라. 당시에는 견딜 수 없이 수치스러웠는데, 지금 생각하니 다행이다 싶었다. 남자가 아니었다면 나는 꼼짝없이 고성하에게 농락당했겠지.

“사진…… 있잖아요.”

“아아, 그 사진? 그건 기껏해야 이불 덮고 자는 거잖아요. 뭐, 신체를 집중해서 찍은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애기같이 자고 있는데, 사실 성벽을 증명하기엔 부족하지.”

“…….”

“정택운도 그걸로는 이상 성벽으로 몰아가기 부족하다고 얼마나 귀찮게 했다고요. 적당히 언론사랑 이야기해서 미성년자인 거에 초점을 맞추긴 했지만.”

“…….”

“고성하처럼 치밀한 놈이 그런 사사로운 증거 따위를 남기겠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제 사진을 찍은 거예요?”

이민후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남자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사진에 대한 것만큼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내 사진을 찍고, 그걸 넘겼을까. 나를 위해 사람을 죽인 것과 괴리가 너무 컸다. 이유가 있다면 알고 싶었다. 어떤 의도였는지, 왜 그래야만 했는지 남자를 이해하고 싶었다.

“여민당 쪽에서 움직이고 있어요. 정권 교체 카드로 여당의 정당성과 도덕성을 들먹이려고 하는데 그 메인 키워드가 고성하의 자살이에요. 정확하게는 자살로 조작된 타살.”

이민후는 사진에 대한 대답 대신 본론을 꺼냈다. 일단 잠자코 듣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론이 고성하를 자살이라고 굳게 믿게 만든 이상 성벽부터 뒤집어야겠죠. 고성하가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발정하는 변태가 아니라고 정정하려고 할 겁니다.”

“…….”

“그렇게 되면 먼저 의혹을 받는 건 당시 경쟁자이자, 고성하의 죽음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정택운이겠죠. 절대적인 지지를 받던 고성하가 살아 있는 한 정택운이 대통령이 될 리는 만무했으니까.”

“그럼 채원 언니가 갑자기 나타난 게…….”

이민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6개월 전쯤, 고채원이 회사를 찾아왔어요.”

“…….”

“여민당이 고채원에게 이야기를 흘렸을 거예요. 고성하는 자살이 아닐 거다. 이상 성벽도 조작되었을지 모른다. 딸인 넌 뭐 아는 거 없냐. 네 아버지는 정택운에게 살해당한 거나 마찬가지다. 정택운과 손을 잡은 기업체 하나가 있는데 아무래도 여기가 좀 수상하다. 뭐 그런 식으로요.”

TG건설이 부흥하기 시작한 건 고성하가 죽고 정택운 정권이 들어설 때부터이니 가장 먼저 의심 대상에 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TG건설의 대표는 저고, 저는 고성하 집안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으니까 고채원도 처음엔 반신반의했을 겁니다. 그런데 대호와 마주친 거죠.”

“…….”

“곧장 상황 파악을 하더군요. 정택운과 짜고 제 아버지를 배신한 거냐고, 얼마나 울던지. 보고 있는 내가 다 안타까웠어요.”

잠깐 남자의 집으로 들어가던 고채원이 떠올랐지만 애써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제야 제 아버지 성벽에도 의심이 갔는지, 고채원이 서을 씨 이야기를 꺼냈어요.”

“제 이야기요?”

“정말 제 아버지가 서을 씨를 성추행한 게 맞냐, 그것도 짜고 친 거 아니냐, 뭐 그런 식.”

“…….”

“그런데 대호가 대답해 줄 리가 없죠. 그 자식은 서을 씨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요. 그런다고 보호가 아닌데 말이야.”

“……그래서요?”

“그러고 나서 한동안 안 보이는 것 같더니, 대뜸 대호가 편지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고채원이 서을 씨에게 편지를 보낸다고. 뭔가 있는 것 같으니 처리해야겠다고. 그런데 고채원 뒤에 여민당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거죠.”

이민후가 문득 나를 가리켰다.

“서을 씨 회사 건물 CCTV 그거 조작한 것도 그놈들 짓이에요. 서을 씨가 경찰에 신고할 게 뻔하니 책잡히기 싫어서 보안팀 사람 하나 매수해서 화면 조작한 거 같아요. 고채원이 의심받으면 곤란하니까.”

“하…….”

“어쨌든 여민당도 있으니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어서 선상 파티를 열었어요. 서을 씨가 참석한다는 거 알면 고채원도 따라붙을 거고, 애초에 초대받은 사람이 아니면 배에 오를 수 없어서 여민당과 고채원을 떼어 놓을 수 있을 테니까.”

굳이 배까지 빌려서 요란하게 축하할 만한 생일 따위가 아니었다며 이민후가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구했는지 고채원이 언론사에만 넘긴 사진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서을 씨 애기같이 자고 있는 그 사진.”

“…….”

“고성하가 아닌 대호의 방에서 찍힌 사진을 보고 확신했을 거예요. 대호가 제 아버지를 죽이기 위해서 계략을 꾸몄구나. 아버지는 결백하구나. 서을 씨는 이용당했구나.”

실제로도 고채원은 고성하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아마 그쪽은 고성하의 오명을 벗겨 내기 위해 서을 씨가 필요할 거예요. 사진은 증거고, 당사자인 서을 씨 입으로 성추행 당한 적 없다고 밝혀 주면 무엇보다 깔끔하죠.”

“난…….”

“조만간 서을 씨에게 접촉해 올 겁니다. 고채원을 통해서든, 아니면 험한 방법을 써서든.”

“험한 방법이요……?”

“예를 들면 납치를 한다거나.”

“…….”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든 서을 씨를 확보해서 협박 같은 협상을 요구할 거예요. 고성하의 결백을 증명해 주는 대신 돈을 준다든가, 아니면 서을 씨의 회사를 이용할 수도 있고, 우완건설을 건드릴 수도 있죠.”

덜컥 겁이 났다. 입술을 깨물고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는데 문득 남자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오빠가 늘 지켜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그래서 내게 사람을 붙였구나. 내가 언제 어디서 갑자기 위험해질지 모르니까 나를 보호하려고.

하나부터 열까지 남자의 마음은 하나를 가리키는데 왜 그는 나를 밀어내는 걸까. 밀어내고 뒤에서 지켜 주는 것보단 곁에 있어 주기를 더 바라는 걸 정말 모르는 거야?

“고성하를 죽인 건 그 사람이에요. 고채원도 알아요. 그걸로 고소를 당하거나 하면…….”

이민후가 피식 웃었다.

“서을 씨 모르는구나.”

“뭘요?”

“대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인 거.”

“……네?”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이민후가 정말 몰랐냐는 듯 내 얼굴을 빤히 훑어보았다.

“고성하가 왜 그 자식을 제 집에까지 들여서 부려먹었겠어요. 깔끔하거든. 대호는 신분이 없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정확하게 말하면 출생 신고가 되지 않아서 서류상 존재하지 않는 놈이에요. 그러니 무슨 짓을 해도 법망은 싹 다 피해 가지.”

“왜, 왜요? 왜 출생 신고가…….”

“그건 나중에 따로 물어봐요. 재수 없는 놈이긴 해도 나름 20년 지기인데 그런 건 내 입으로 말하기 좀 그러네.”

존재하지 않는 사람…….

“알아. 오빠가 사람을 죽였대도 경찰이 못 잡아가는 거. 그러니 속 편하게 불을 질렀겠지! 그래도 말할 거야!”

고채원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래서 못 잡아간다는 거였다. 그래서 이민후처럼 공식 석상에 오르지 않고 뒤에서 움직였던 거였어. 세상에 없는 사람이라서.

그래서…….

“신분 확실하고, 부모 멀쩡하고, 집안 부유하고, 죄지은 것도 없어. 특히 여자관계가 깔끔해. 연애 몇 번이 전부고, 지금은 너 말고 주변에 따로 만나는 여자 없어.”

그래서 당신은 자꾸 나를 밀어냈어.

“저쪽도 그걸 아니까 죽인 놈은 손도 못 대죠.”

“…….”

“대호가 한 짓이라는 확실한 물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뭐, 있다한들 처벌은 못하고, 오히려 신분도 없는 깡패 새끼를 집에 들여서 뭔 짓거리 했냐는 역풍을 맞을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괜히 서을 씨만 물고 늘어지는 거예요.”

남자의 존재는 고성하의 더러운 이면을 증명한다. 그나마 그들이 남자에게는 손을 뻗치지 못한다는 건 다행이었다.

“그러니 대호가 지금 얼마나 날 서 있겠어요. 차라리 자기를 건드리면 모를까, 서을 씨가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요.”

“…….”

“지난번에 고채원이 대호를 찾아갔을 거예요.”

이민후가 줄곧 내 마음속에 남아 있던 이야기를 꺼냈다.

남자의 집으로 들어간 고채원. 옷차림이 바뀐 남자. 그는 뭔가 알고 있는 건가 싶어 돌아봤다.

“협상을 시도한 것 같은데 자세히는 이야기해 주지 않더라고요.”

“……협상이요?”

“모르긴 몰라도 서을 씨를 건드리지 않는 조건으로 일정한 대가를 줬을 거예요.”

일정한 대가. 고채원에게 몸을 대 준다고 말했던 10년 전의 남자가 떠올랐다. 이번에도 잤을까.

“고채원부터 구워삶고 상황을 정리할 것 같은데, 그전에 나도 손을 써야겠어요.”

“…….”

“고성하의 성벽을 증명할 수 있는 완벽한 증거가 있으면 좋지만, 그건 불가능하고…….”

이민후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불쾌하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저쪽에서 계속 건드리면 대호는 본인이 가지고 있는 고성하 비리 자료를 터트릴 거예요. 그런데 그건 우리에게도 리스크가 너무 커요. 고성하 비리에는 대호도 관련이 되어 있고, 대호가 휘말리면 조직도 흔들리거든. 난 그 꼴은 보기 싫어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말려도 통 들어 처먹질 않아요.”

“…….”

“그래서 다른 방법을 생각 중이죠.”

이민후의 시선이 내 얼굴에 닿았다.

“그러고 보니 서을 씨에게 사과할 게 하나 더 있네.”

이민후가 어깨를 으쓱였다.

“서을 씨 사진을 고성하 자살에 이용하자고 한 거, 나였어요.”

“……네?”

놀란 내 반응에도 그는 태연했다.

“그때도 대호는 고성하 비리 가지고 자살로 위장하려고 했었는데, 조직 내에서 반발이 심했어요.”

“…….”

“모두가 뜯어말렸죠. 물론 나도. 그런 식으로 얽혀 있는 다른 높으신 분들 눈도 신경 써야 되거든. 비리를 터트리면 누가 우리랑 일을 하겠어요? 고작 어린애 하나 때문에 그걸 다 잃을 수는 없죠.”

이해하죠? 그렇게 말하듯 이민후가 눈을 가볍게 찡그렸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당연히 남자의 계획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고작 나 하나 때문에 모두의 반발을 사면서까지…….

“숨겨 준다고, 죽여 주겠다고, 나를 위하는 것처럼 굴어 놓고, 내 치부를 이용해서 성공하니까 좋아요?”

그것도 모르고 나는 남자를 그렇게 원망하며 살아왔다.

“대신 오랜 친구를 위해 조건 하나를 내걸었죠.”

“…….”

“우완건설에 투자할 수 있게 임원들을 설득하겠다고.”

“뭐라고요?”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대호가 가지고 있는 서을 씨 사진으로 언론사랑 딜을 하는 대신 조직에서 서을 씨 아버지에게 거액의 투자를 하기로 했죠. 물론 표면적으론 멀쩡한 사업가를 내세웠지만. 우리 쪽 놈이에요.”

“잠깐만요. 그게 무슨…….”

“어차피 기사가 나도 일반인 사진이 노출될 일은 없고, 서을 씨야 본인 이야기인 거 알겠지만 잠깐 괴롭고 나면 금방 잊을 거다, 대신 망한 집안 일어나면 대학 가서 공부도 하고 좋지 않냐. 그렇게 설득했죠.”

“…….”

“그 자식도 우완건설에 투자하려고 움직이고 있었는데, 꽤 골머리 썩였을 거예요. 본인이 나서지는 못하고, 지금이야 우리 좆대로 해도 아무도 말 못 하지만 그땐 여기저기 물고 늘어지는 인간들이 많아서 명분 없이는 조직을 움직이기도 힘들었어요.”

“…….”

“대호 혼자 하는 것보단 나까지 합세해서 우완건설을 두둔하면 아무래도 진행이 쉬워지죠. 결국 대호도 받아들였어요.”

“하…….”

목구멍이 메말랐다. 간신히 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 회사가…… 좋아진 게 그 사람 때문이라고요……?”

“안 그럼 파산 직전에 내세울 것도 없는 작은 회사에 누가, 뭘 믿고 투자를 하겠어요. 설마 순진하게 고성하가 진짜 제대로 된 투자자를 소개해 줬다고 믿는 건 아니죠?”

“…….”

“처음부터 고성하는 그쪽 아버지 이용할 생각이었어요. 싼값에 사서 불법 하도급 계약으로 굴려 제 주머니 채울 작정이었지. 그러고 보면 고성하가 죽어서 가장 이득을 본 건 정택운이 아니라 진 사장일지도 모르겠네.”

도대체…… 당신은 내 인생에 어디까지 들어와 있는 거야.

“난 내 친구를 위해서 노력 많이 했어요. 다른 놈 같았으면 그냥 없애 버렸을지도 몰라요. 대호니까, 그 자식이 그렇게 좋아 죽는 애기를 위해서 나도 나름대로 신경 썼죠. 안 그렇게 생겨서 은근히 감정이 앞서는 놈이더라고요. 홀리니까 아주 사리 분별을 못 하던데.”

“그럼 내 사진을 일부러 찍은 게 아니에요?”

이민후가 피식 웃었다.

“일부러 찍었죠. 툭하면 보려고.”

“…….”

“그 자식이 생긴 건 멀쩡한데 변태거든.”

유용하게 써먹을 사진을 확보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음침하게 혼자 사진 들여다보다 나한테 들키는 바람에 이렇게까지 된 거라면 이해가 쉬우려나.”

문득 이민후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내가 서을 씨 뒤에 붙여 둔 놈한테 빌린 시간은 고작 한 시간이에요. 딱 한 시간만 눈감아 줄 테니까 이 일 좀 어떻게 빨리 처리해 달라네요. 대호 발 뻗고 잘 수 있게. 나도 마찬가지예요. 상황은 이렇게 됐지만, 우리 꽤 친하거든요.”

“…….”

“20분 남았네요.”

이민후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요.”

나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나랑 같이 역공해 볼래요?”

남자는 정말로 고채원과 잤을까.

이민후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도 그게 나를 가장 괴롭게 했다. 당장 누군가에게 납치당할 수도 있다는 것보다, 정말로 남자와 고채원이 다시 몸을 섞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두려웠다.

차라리 내가 고채원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 줬다면 그날 그녀가 남자의 집에 들어가지 않았을까? 뒤늦은 후회도 했다.

10년 만에 재회한 고채원과의 섹스는 어땠을까. 컨테이너에서 흘러나오던 간드러진 교성을 나도 기억하는데, 매일 몸을 섞은 남자가 잊었을 리 없다. 그때보다 더 능숙하게 서로의 몸을 탐하면서 두 사람은 어떤 감정을 주고받았을까.

아버지의 원수이지만 한때 사랑했던 남자. 자신을 개처럼 부려먹었던 주인의 딸. 애증으로 뒤덮인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위험하고 자극적이며, 또 서로를 끌리게 할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다.

나를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고채원은 남자에게 또 다른 자극일 것이다.

그걸 그가 거부할까? 거부할 이유가 있을까?

남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법으로도 그를 잡을 수 없는데 고작 사랑 따위가 무슨 소용이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도 남자의 존재를 손에 쥐지 못했는데 내가 뭐라고, 그의 보호 없이는 제대로 살아가지도 못하는 민폐투성이인 나 따위가 뭐라고 그를 갖고 싶어 욕심을 냈나.

“…….”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내 손가락은 어느새 외워 버린 고채원의 핸드폰 번호를 입력하고 있었다. 혼자 땅굴을 파 봐야 자괴감만 더할 뿐이다. 차라리 직접 부딪치는 편이 더 빠른 해결 방안이 될 것이다.

망설임 끝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수신음은 짧았다.

[……여보세요?]

잔뜩 갈라져 쇳소리가 섞인 고채원의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다. 내가 전화를 건 것을 알고 있을 텐데도 고채원은 가만히 있었고,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

나 역시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다가 가까스로 숨을 뱉어 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

“언니는 나한테 부탁할 거 있다며.”

묵묵히 있던 고채원이 입을 연 건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래. 만나.]

고채원과 만나기로 한 당일, 나는 권지운에게 양해를 구하고 예정보다 이른 시간에 퇴근을 했다. 그리고 사무소 건물의 정문이 아닌 비상계단을 통해 빠져나와 택시를 불렀다. 어디에 있을지 모를 남자의 부하를 따돌리기 위해서였다.

내가 고채원과 만나는 게 남자의 귀에 들어가면 그는 정말로 내게 질릴지도 모른다. 나조차 두 사람의 관계에 집착하는 스스로가 이상하게 느껴지는데 그는 어떨까.

그래도 나는 알아야겠다. 정말 두 사람이 여전히 과거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건지.

고채원은 성당의 산책로에서 나를 기다리겠다고 했다. 택시에 올라타며 성당 주소를 읊고 복잡한 심경으로 시트에 몸을 묻었다.

고성하의 장례식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성당에 가지 않았다. 당연히 아버지는 집 안에 있는 모든 종교 물품을 버렸다. 십자가만 보면 내가 겪었을 수모가 떠오른다며 분노하는 아버지의 옆에서 나는 남자에게 배신당한 충격으로 멍하게 있을 뿐이었다.

“이 시간에도 미사를 하나요?”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는데, 문득 택시 기사인 중년 여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고성하의 영향 때문에 중년 남자에겐 거부감이 있기 때문에 일부러 여자 기사가 운행하는 택시를 불렀다.

어머니와 비슷한 또래의 기사가 백미러를 통해 눈을 마주쳐 왔다. 물론 이 나이 대의 여자 역시 불편한 건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무섭지는 않았다.

“그런 건 아니고요.”

내가 머쓱하게 웃으며 얼버무리자 그녀도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이거 마셔요.”

“네?”

잠깐 신호가 멈춘 틈에 기사가 대뜸 조수석 서랍에서 영양 드링크를 하나 꺼내 내 쪽으로 내밀었다.

“아……. 전 괜찮아요.”

“우리 딸 또래라 반가워서 그래요.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그거 마시고 기운 내요. 힘이 없어 보이네.”

“감사합니다.”

대충 가방에 넣으려는데 다시금 백미러로 눈이 마주쳤다. 상냥하게 미소를 짓는 그녀의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어 마지못해 뚜껑을 열고 적당히 두세 모금만 마셨다. 영양 드링크 특유의 상큼한 향이 입 안에 감돌았다. 정말로 기운이 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미지근한 유리병을 양손으로 쥐고 물끄러미 내려다보는데 어머니가 떠올랐다.

고채원을 만난 뒤엔 어머니를 찾아가 봐야겠다. 정말 우연의 일치로 남자의 집에서 일하게 된 건지, 아니면 또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지 알고 싶었다. 남자에 대한 건 뭐든 다.

“도착했어요.”

“감사합니다.”

택시에서 내려 고풍스러운 고딕 양식 건물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예전과 조금도 바뀐 게 없었다. 그동안 우연으로라도 근처에 올 일이 몇 번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늘 이 건물을 외면했었다. 이렇게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은 10년 만이었다.

평일 오후라 그런지 성당은 한산했다.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어쩌면 이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산책로로 걸음을 옮겼다. 산책로에서 고성하와 아버지가 만난 것을 시작으로 여기까지 왔다. 오늘이야말로 지긋지긋하게 내 발목을 잡는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천천히 나무 계단을 밟았다. 역시나 바뀐 것이 없는 풍경이었다. 마치 이곳만 시간이 멈춘 것처럼 예전 그대로였다. 길가에는 나무가 늘어서 그늘을 제공하고, 새들이 지저귀고, 이름 모를 꽃들이 선물처럼 피어 있었다. 타들어 가는 내 속과 달리 너무도 평온한 광경이었다.

물끄러미 땅에 핀 꽃을 내려다보다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을 때, 유일하게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바랜 성모 마리아상과 그 앞에 서 있는 고채원이 보였다.

늘 그렇듯 하늘하늘 예쁜 모습이었다. 때마침 부는 바람결에 고채원의 긴 머리카락과 원피스 밑단이 가볍게 살랑댔다.

“…….”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잠깐 성모 마리아 앞에서 고요히 서 있었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까.

“언니.”

“서을아.”

우리 둘 다 동시에 입을 열었다.

휘이이, 바람이 한차례 더 불었다. 이번엔 내 머리카락도 공중으로 흩어졌다. 떨리는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데, 문득 고채원이 양손을 기도하듯 그러모아 그 위에 이마를 댔다.

“미안해, 서을아.”

울먹이는 목소리에 왠지 선수를 빼앗겼단 생각을 하는 찰나, 공기가 매캐해졌다.

“흐읍……!”

순간 입이 틀어막혔다. 손수건을 든 커다란 손이 뒤에서 뻗어 나와 내 코와 입을 막았다. 너무 놀라 숨을 훅 들이마시며 눈을 크게 뜨자 고채원이 무릎을 굽히고 주저앉았다.

“미안해…….”

서서히 의식이 옅어져 간다. 시야도 흐릿해졌다.

고채원의 실루엣이 흐트러짐과 동시에 세상이 한 바퀴 돌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커다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푹신하고 포근한 감촉에 잠깐 납치를 당했다는 것도 잊을 뻔했다. 멍하니 이불을 쥐고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켜 보니 낯선 방이었다.

방은 온통 새까맸다. 커튼, 벽지, 바닥의 대리석, 유일한 가구인 침대 프레임과 침구까지 전부 검은색이고 조명은 채도가 낮아 어딘가 음험한 분위기였다.

여긴 어딜까.

내 예상대로라면 고채원의 뒤에 있을 여민당에서 우리의 약속을 빌미로 나를 납치했을 것이다. 기절하기 직전 내게 미안하다며 울먹이던 고채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계획대로 되고 있어 다행이지만, 겁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나는 조금 불안한 얼굴로 방 안을 살폈다.

“나랑 같이 역공해 볼래요?”

“뭘 해요?”

“이러다 국헌당도 우리 내치기 전에 빨리 일 끝내야죠. 가장 쉬운 방법은 서을 씨가 도와주는 거예요.”

“제가 뭘…….”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셔츠 단추를 세 개 풀었다.

브래지어 컵 안에 숨겨 둔 손가락만 한 녹음기는 다행히 그대로였다. 납치 현장에서 깨어나면 내 소지품은 없을 거라던 이민후의 말대로 가방은 오간 데 없었다. 미리 녹음기를 따로 숨겨 두길 잘했다. 녹음 버튼을 누르고 다시 속옷 안으로 밀어 넣은 뒤 셔츠 단추를 잠갔다.

그리 오래 시간을 끌진 않을 거라고 했다. 되도록 빨리 나를 설득해서 원하는 증언을 확보할 거라고 했으니 내가 깨어난 걸 알면 곧장 들이닥칠지도 모른다.

“아시겠지만, 대호에겐 말하면 안 됩니다.”

“…….”

“슬쩍 제안했다가 죽을 뻔했어요.”

이민후는 내게 호랑이 굴에 직접 들어가기를 권했다.

나를 납치해서 증언을 확보하려는 여민당을 역공해 그들이 정권 교체를 위해 고성하의 죽음을 조작하고 나를 협박해 거짓 증언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게 현장을 녹음해 오라는 부탁을 했다. 녹음 파일은 더 이상 나와 TG건설을 건드리지 못하게 만들 협박용이라고 했다.

사실관계만 따지면 고성하는 억울한 죽임을 당한 것이 맞지만, 그런 건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적어도 나는 남자 혼자 나를 지키겠다고 뒤에서 움직이는 걸 더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이미 그는 내 모든 걸 지켜 주었다. 나의 수치, 자존심, 아버지.

이제 그만해. 그럴 시간에 차라리 나를 사랑해 줘. 당신에 대해서 더 알려 줘. 왜 신분이 없는 건지, 어떤 삶을 살아온 건지, 지금 이대로도 괜찮은 건지, 정말 나를 계속 밀어내기만 할 건지.

남자의 과거와 현재, 미래. 나는 그 모든 걸 알고 싶었다.

천천히 방 안을 살폈다.

커튼을 살짝 열었지만, 창문 유리엔 나만 비쳤다. 겁이 나서 차마 열지는 못하고 주변을 얼쩡거리다 다시 침대로 돌아와 앉는 그때였다.

덜컥, 누군가 문고리를 잡는 소리가 들렸다.

당황한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갔다. 어쩔 줄 몰라 하다 일단 침대 반대쪽으로 넘어가 몸을 웅크렸다. 이민후는 그들이 내 신상에 해를 끼치지는 않을 거라고 했지만, 그래도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끼이익. 천천히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어깨가 옅게 떨려 왔다.

괜찮아. 겁먹지 마. 저들의 목적은 내 증언이다. 그러니 나를 섣불리 건드릴 수 없어. 지금 나는 누구보다 그들에게 필요한 사람이다.

누군가 방 안에 들어와 문을 닫았다. 천천히 침대로 다가오는 발소리에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독이는데 돌연 느껴지는 기시감에 떨림이 멎었다.

이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든 순간, 입을 틀어막았다.

담배 냄새. 새까만 인영.

“배짱 좋게 따돌릴 땐 언제고 왜 겁먹었어, 애기야?”

남자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순간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왜…….”

왜 남자가 여기 있는 거지. 나를 납치한 게 남자인가. 왜? 어째서?

“어떻게…….”

고채원과 내가 만난다는 걸 알고 있었어? 어떻게?

남자의 집에서 울면서 나오던 고채원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왜…… 그쪽이 여기 있어요?”

이번엔 다시 여민당과 손을 잡은 걸까. 그래서 나를 납치하는 데 가담했나.

아닐 거라고 끊임없이 되뇌면서도 불안했다. 나는 남자를 사랑하지만, 도무지 믿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조명을 가리고 선 남자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또 나를 배신한 거예요? 그래서 채원 언니랑…….”

이건 이민후도 예상 못 했을 거다. 처절한 기분이었다.

남자가 재밌다는 듯 낮게 웃었다. 상황에 맞지 않는 그 웃음이 무엇보다 나를 절망스럽게 했다. 어쩌면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믿었던 것마저, 사실은 놀아난 것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강렬하게 일었다.

이 모든 게 사실은 나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고채원을 사랑해서 만들어 놓은 판이라면? 나를 또 이용하려고 접근한 거라면?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에게 빠져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고 있었다면?

아니야. 그렇다고 하기에는 남자의 사랑을 충분히 보았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거야. 믿어. 믿어야 해.

“이 대표가 시켰어?”

“…….”

“손수 납치당하라던?”

그가 내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자 남자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최대한 그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뒤로 더 물러났지만, 등에 벽이 닿았다. 서늘하고 딱딱한 감촉. 이제 보니 벽지가 아니라 시멘트 위에 검은 페인트를 칠해 둔 모양이었다.

“그래서 겁도 없이 끌려왔어?”

“거기서 대답해요. 그쪽 진짜 개새끼야?”

“몰랐는데 대담한 구석이 있네. 이 대표나, 애기나.”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요……!”

남자가 더 다가왔다. 어느새 그와 나 사이의 거리는 고작 한 뼘이 전부였다. 밀어내려고 손을 뻗는 순간, 그에게 양손이 붙잡혔다.

“읏!”

남자가 커다란 손으로 내 양 손목을 한 번에 그러쥐고 머리 위로 눌러 결박했다.

“뭐 하는 거예요! 이거 놔!”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팔을 빼내려고 버둥댄다고 소용이 있을 리가 없다. 남자의 힘은 겪을 만큼 겪었다. 그가 휘두르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며 섹스를 했던 게 떠올라 무심코 구토감이 치밀었다.

아니야. 아닐 거야. 그건 진심이었어. 그가 내게 느끼는 욕정만큼은 명확했고, 본인은 인정하지 않더라도 나를 향한 사랑이 기반이 된 욕구였다.

아무리 그가 감정 없이도 섹스를 할 수 있는 개새끼라도, 나에겐 아니야. 그는 나를 사랑해. 난 희롱당한 게 아니야. 그냥 사랑을 한 거지. 그러니까 역해지면 안 된다.

“손 놔요!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눈물로 흐려진 시야를 닦아내자 남자의 무던한 표정이 들어왔다.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온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아니, 아주 평온하진 않을지도 모르겠다. 미묘하게 굳어 있는 눈매에서 읽기 힘든 감정이 보였다. 하지만 그의 감정을 파헤쳐 볼 여유 따윈 없었다. 강한 힘에 눌린 손목이 고통을 호소했다.

“넌 뭐가 이렇게 다 쉬워?”

“뭐…… 라고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쉬워 보이나 봐요. 그쪽이 봐도 내가 좀 그래 보여요?”

“아니, 귀여운데.”

그렇게 말했으면서. 그렇게 당신을 믿게 했으면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남자에게 배신당했던 열아홉 살 때보다 지금이 더 괴로웠다. 아마 마음의 깊이가 달라졌기 때문이리라.

“쉽게 믿고, 사랑하는 것도 모자라서 배신도 쉽게 당하네.”

“…….”

“비결이 뭐야. 오빠도 가르쳐 줘.”

그가 조롱조로 말하며 오른손으로 내 셔츠 앞섶을 움켜쥐었다. 그러곤 순식간에 힘을 줘 뜯어냈다.

“뭐 하는……!”

“어디서 이런 걸 배워 왔어.”

망설임 없이 브래지어 안으로 손을 밀어 넣은 남자가 녹음기를 꺼냈다. 녹음 중인 것을 알리는 빨간 불이 깜빡대고 있었다. 남자가 그것을 바닥에 던지곤 구두 굽으로 으스러트렸다.

“여기 넣어 두라는 것도 이 대표가 시켰어?”

“이거 놔요!”

“서을아.”

좀처럼 내 이름을 불러 주지 않는 남자라, 그의 목소리로 듣는 이름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 대표도 네 몸을 봤냐고 묻잖아.”

“…….”

짙게 가라앉은 남자의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대답해.”

읽기 힘든 미묘한 감정. 그것은 화였다.

왜? 왜 당신이 화를 내는 건데? 지금 누구보다 속이 타들어 가는 건 나인데, 당신이 뭐라고.

“무슨 상관인데요. 나 안 사랑한다며.”

“…….”

“본인 섹스는 간섭받기 싫다면서요. 그런데 그런 걸 왜 묻…….”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남자가 내 턱을 치켜들고 다짜고짜 혀를 섞어 왔기 때문이었다. 혀를 뽑아낼 것처럼 강하게 빨아들이고 떨어져 나간 그가 움직이지 못하게 내 얼굴을 고정한 채로 다시 물었다.

“왜 묻냐고?”

“흐…….”

“나 말고 너한테 발정하는 새끼들은 다 죽여 버릴 거니까.”

알아듣기 힘든 대답이었다.

아니, 만약 납치되자마자 마주친 게 남자가 아니라면 그 말에 설렜을지도 모르겠다. 명백한 독점욕은 분명 사랑을 증명하니까.

그러나 그가 나를 또 가지고 노는 것일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나는 도저히 기뻐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뭔가 다른 의중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부터 들었다. 남자를 믿고 싶은데, 왜 이렇게 불안할까.

“나한테 발정하는 남자가 한둘이었을 거 같아요?”

“…….”

“방금 그쪽도 말했잖아. 나 쉽다고.”

다시 눈물이 뚝뚝 흘렀다.

“쉬워 보이니까 다들 그랬겠지. 고성하만 있었겠어?”

“…….”

“그쪽은 모르겠지만 매일 이상한 사진 보내는 스토커 새끼도 있었고, 엄마랑 바람피운 그 아저씨도……!”

가까스로 호흡을 골랐다.

“다 나한테 발정했어요.”

“…….”

“근데 적어도 그 사람들은 그쪽처럼 날 강간하진 않았어.”

“강간?”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반문했다.

“억지로 덮쳤잖아요. 그게 강간이지……!”

“그래, 뭐.”

“…….”

“어쩌겠어. 개새끼인데.”

구토를 하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흐느끼는데 문득 손목을 결박한 남자의 손에 힘이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손을 빼냈다. 아릿한 손목을 뒤로하고 뜯어진 셔츠부터 움켜쥐는데 문득 남자가 벽을 짚고 허리를 숙여 왔다. 내 귓가에 고개를 내린 그에게선 여전히 담배 냄새가 났다.

“내가 정말 몰랐을 거라고 생각해?”

“비켜!”

“너한테 발정하는 새끼들은 전부 내 손에 죽었어.”

그가 마치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속삭였다. 귓가에 와 닿는 숨결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정확하게는 그가 한 말 때문에.

“뭐라고요……?”

간신히 고개를 들자 얼굴 바로 옆에 와 있는 남자의 볼이 내 볼과 스쳤다.

“그게 무슨 말…….”

“이제 이 대표 차례인가.”

“주태강. 몇 달 전에 사고로 죽었대.”

설마.

“그쪽이…… 죽였다고?”

“묻잖아, 애기야. 이 대표도 보내면 돼?”

사고로 죽은 주태강. 남자의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어머니. 갑자기 자퇴한 스토커. 그리고 이민후가 보낸 사내.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남자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귀를 핥았다. 귓바퀴에 혀를 굴리다 귓불을 아프지 않게 깨무는 그의 얼굴을 겨우 밀어냈다.

“어떻…… 어떻게 알고, 어떻게…….”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더듬대는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가 다시 혀를 내밀어 내 눈가를 핥았다.

주태강이 내 몸을 만진 건 어렸을 때 일이고, 스토킹은 10년의 공백 동안 벌어진 일이다. 대답 없이 얼굴 곳곳을 핥는 남자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고개를 옆으로 틀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목으로 혀를 내렸다.

“하지 마요. 어떻게 알았냐고 묻잖아……!”

“그게 중요해?”

“읏…….”

“하나 있는 친구도 죽이고 싶어졌는데.”

남자가 셔츠를 쥐고 있는 내 손을 잡아 내리곤 쇄골 위에 얼굴을 묻었다. 이로 잘근잘근 씹어 대는 감각은 기묘했다. 마치 그에게 먹히고 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뭐야……. 뭐가 진짜야.”

“…….”

“왜 자꾸, 흐읍, 나를 가지고 놀아요……!”

“…….”

“이런 식으로 섹스하고, 또 나 몰라라 할 거면서. 다른 여자랑 잘 거면서……. 나 밀어낼 거면서, 왜 자꾸!”

얼굴 근육이 멋대로 일그러졌다.

“왜 나를 사랑하는 사람처럼 굴어요!”

남자가 하던 짓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게. 자제가 안 되네.”

자조하듯 중얼거린 그가 나를 번쩍 들어 침대에 집어 던진 건 한순간이었다.

갑자기 시야가 뒤집히며 흐린 조명만 달린 천장이 보였다. 놀라서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남자가 내 위를 타고 올라왔다.

“무슨 짓이야!”

발버둥 치는 나를 가볍게 제압한 남자가 문득 입꼬리를 비틀었다. 나를 비웃는다기보다는, 자조의 연장선인 것 같았다. 미묘하게 내가 아닌 허공을 보고 있었다.

“차라리…… 그쪽 말대로 지운 선배를 사랑할 걸 그랬어.”

남자의 눈동자가 내 쪽으로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 말을 뱉은 건 지극히 충동적이었다.

만약 그가 나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이 말에 상처를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당신을 향한 불신이 이만큼 키워졌다는 것을 드러내며 내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그러지 그랬어.”

그는 태연하게 시인하면서도 타오르는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전자와 후자 둘 다를 충족하거나, 혹은 둘 다 충족하지 않는 반응이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복잡해진 나를 뚫어져라 보던 남자가 천천히 얼굴을 내렸다. 코끝이 맞닿았다. 벗어나려고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그런데 날 사랑해서 어떡해.”

남자의 혀가 내 입술 위를 핥았다.

“왜 자꾸 욕심나게 만들어.”

“…….”

“곤란하게.”

맞닿은 입술 틈으로 혀가 파고들었다. 고개를 옆으로 틀어도 집요하게 따라붙는 것에 속수무책으로 입이 벌어지며 그에게 혀를 빼앗겼다.

그는 나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가지고 노는 것처럼 너무 쉽게 내 입 안을 정복했다. 아니면 내가 여전히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진심으로 저항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질척한 입맞춤에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아주 잠깐 스치듯, 그가 정말 개새끼라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숨 막히게 입을 맞춰 준다면 그런 것쯤…….

아, 나는 정말 멍청해질 대로 멍청해졌다.

“흐응……!”

점막 하나하나를 훑듯 혀끝으로 간질이는 것에 몸이 이리저리 비틀렸다. 나름대로 저항을 했으나, 확연히 낮아진 강도를 남자도 느꼈는지 맞닿은 입술이 웃었다.

내가 얼마나 쉬워 보일까. 그렇게 놀아나고도 혀가 빨릴 때마다 신음하니 얼마나 천박해 보일까. 다시 울음이 터졌다. 정말 절망스러운 건 그가 입술을 떼니 아쉽다는 감정이 앞서는 것이었다.

얼굴 바로 위에서 남자가 우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흐느끼기만 했다. 그가 내 얼굴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

“나랑 있으면 울기만 하는 거 같네.”

남자의 손을 세게 밀어냈다.

“……그쪽을 사랑하니까.”

“…….”

“그러니까 이렇게 휘둘리고, 농락당하는 와중에도…….”

팔로 눈가를 가렸다.

“자꾸 기대하게 되잖아.”

내가 이상한 게 아니다. 이상한 건 남자다.

“내가 쉽게 구는 건…… 그쪽밖에 없어요.”

매사에 의뭉스레 구는 그가 나쁜 거다. 그를 사랑해서 쉽게 구는 내가 나쁜 게 아니라.

“이 대표한테 다 들었어요.”

“…….”

“그쪽이 나를 위해서 뭘 했는지 다 들었단 말이야. 그런데도 모르겠어. 불안해. 믿기지가 않아.”

“…….”

“나는 그쪽 말곤 그 누구랑도 이런 짓 하기 싫은데, 당신은 아니잖아…….”

“…….”

“언제든 다른 여자랑 몸을 섞을 수 있고, 입을 맞출 수 있고, 나를 떠날 수 있는 것처럼 굴잖아.”

“…….”

“이건 너무 불공평해요. 왜 나만…… 나만 이렇게 바보같이 구는데…….”

팔이 거두어졌다. 남자가 내 손을 잡아 내렸기 때문이었다.

“왜 나는 그쪽 같은 남자를 사랑하는 거야.”

그는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린 채 울고 있는 나를 기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정말 말 그대로 기묘했다.

“나도 진짜 미친놈이지.”

그런 표정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왜 이 와중에도 귀여워 보일까.”

분명 같은 남자인데, 가면을 벗은 것처럼 모든 게 다르게 보였다.

그러니까 나를 꼭…….

“그래서 이민후랑 잤다는 거야?”

“…….”

“얼른 대답해. 오빠 지금 화 많이 났어.”

“……내가 먼저 물었잖아요.”

남자가 내 속내를 읽은 듯 피식 웃었다. 더없이 사랑스럽다는 얼굴로.

“안 잤어. 됐어?”

나는 혼란에 빠진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고채원과 자지 않았다는 대답을 정말 믿어도 될까. 지금 저 표정을 내가 믿어도 되는 걸까.

남자가 내 얼굴을 다시 닦으며 물었다.

“이민후 죽여, 살려.”

“…….”

다정한 손길은 나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의 속을 파헤치기 위해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지만, 보이는 건 눈앞의 상대를 향한 애정뿐이었다. 그게 나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사…… 살려 줘요.”

그가 눈썹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재킷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풀어 줘.”

“…….”

“거짓말이면 혼나.”

간단히 전화를 끊고 경고하는 모습으로 이민후가 진작에 남자의 손에 붙잡혀 있었다는 걸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도대체 그는 어디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 이민후와 내가 작당하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나.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남자가 핸드폰을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여민당이랑 손잡고, 이 대표 배신한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타당한 추론이었다. 남자가 내 물음에 또 교묘하게 대답을 피해 갈 것 같아 그의 팔을 움켜쥐었다. 제대로 대답하라는 의미였다.

“아니.”

“정말 아니에요?”

경계하듯 바라보자 남자가 소리 없이 웃으며 혀를 찼다.

“안 믿을 거면 왜 물어?”

“그쪽이 못 미덥게 구니까 못 믿는 거잖아요.”

“그래. 틀린 말은 아니네.”

힐끔 바닥에 나뒹구는 핸드폰으로 시선을 던지자 남자가 내 턱을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이 대표랑 만난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어떻게 알았어요?”

“미안한데, 난 너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어. 나를 따돌리고 만났다고 생각했나 본데, 내가 바보가 아니고서야 너에게서 눈을 뗄까.”

“…….”

이민후의 생각보다 남자는 훨씬 치밀했다. 이민후를 믿지 않아서가 아니다.

“이 대표 다른 생각하는 건 진작 알고 있었고, 거기에 네가 무모하게 가담하니 내가 화가 안 나고 배겨?”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나를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기에 녹음기까지 넣어 오는 발칙한 짓까지.”

“잠, 잠깐……!”

남자가 단숨에 브래지어를 위로 끌어 올렸다. 유두를 스치고 간 와이어가 가슴 윗부분을 지그시 눌렀다. 이미 그에게 여러 번 몸을 보였음에도 당황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붙잡히지 않은 왼손으로 어설프게 가렸지만 비웃음만 당했다.

“그, 그럼 채원 언니는 왜…… 그쪽 집에 간 건데요.”

“이 대표가 너 부추길 거 뻔하니까.”

“…….”

“협박했는데.”

그가 내 손을 치워 내곤 엄지와 검지로 유두를 꼬집었다.

“응……!”

움찔, 허리를 비틀며 남자의 손을 붙잡았지만, 역시나 소용은 없었다.

“곧 네가 연락을 할 거고, 그걸 나한테 말하지 않으면 성벽 따위는 우습게 보일 만큼 더러운 아버지의 실체를 보게 될 거라고.”

“흐읏!”

“아, 한 번만 더 널 건드리면 죽여 버린다고도 했나.”

유두를 비틀며 태연하게 말한다. 아프지 않게 비트는데도 머릿속이 아찔했다. 남자에 대한 오해가 풀려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남자는 고채원과 자지 않았다. 아직도 온전히 믿기진 않으나, 믿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복잡한 얼굴로 남자의 손등을 할퀴었다.

“빨아 달라고?”

손으로 비틀어 대는 것보단 혀가 낫겠다는 생각을 한 걸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 그가 당황한 내 얼굴을 보며 낮게 웃었다. 아니라고 부정도 못 하고 시선만 피하는 사이 천천히 얼굴이 가까워졌다.

입술이 닿기 직전, 서둘러 그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그러니까…… 나를 배신한 게 아니라는 말인 거죠.”

입이 틀어막힌 남자가 기가 막힌다는 듯 눈을 들었다. 당장 손을 치우라는 눈빛이었지만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나는 그가 잠깐 힘을 푼 틈을 타 붙잡혀 있는 반대쪽 손도 빼내 그의 얼굴을 더 밀어냈다.

“나 배신한 거 아니고 보호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지금도 여기 데려온 거예요?”

“겸사겸사.”

“이제 어떻게 할 건데요? 여민당이 계속 고성하 이야기를 들쑤시기라도…….”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그가 냉정하게 내 말을 잘라 냈다.

“누가 너한테 그딴 거 걱정하래?”

“그럼 그쪽 혼자 나 지키겠다고 고생하는 걸 알고도 모른 척하라는 말이에요?”

“그래. 모른 척해.”

“…….”

“내가 뭘 하든, 모른 척 좀 해. 일일이 알려고 하지 말고.”

그가 나를 걱정하는 것만큼 나 역시 그를 걱정하고 있는데, 그걸 몰라주는 것 같아서 서운한 마음에 울먹이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왜 말을 그런 식으로 해요. 난 그쪽 돕고 싶어서…….”

“그래서 납치당할 생각을 했어?”

남자의 목소리가 무섭게 가라앉았다.

“내가 널 지키려고 안달 난 걸 알면서도, 그딴 생각을 해?”

“…….”

“그게 날 돕는 거야?”

“난…….”

“고채원에게 네 연락을 받았다고 전해 들었을 때 내가 어떤 기분이었을 거 같아?”

남자가 거칠게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솔직히 말하면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여민당이 내 신상을 해치지 않을 거라고 들었기 때문에 현장만 녹음해 오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

“왜 널 지키는 걸 방해해.”

“…….”

“그럼 난 뭘 하라고.”

남자가 그걸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를 한없이 걱정했다. 하고 있다. 할 것이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상체를 세웠다.

“스무 살 때, 아빠가 투자를 받게 되어서 형편이 좋아졌어요.”

“…….”

“덕분에 대학 등록금도 걱정 없었고, 하고 싶은 거 많이 했어.”

탁한 눈동자가 내 얼굴 위를 천천히 훑었다.

“먹고 싶은 거, 입고 싶은 거 아빠 돈으로 다 샀고, 여행도 많이 갔어요. 아빠가 나한테는 돈을 안 아꼈거든.”

“그래. 좋았겠네.”

남자는 뜬금없는 내 말에도 덤덤했다. 아니, 덤덤한 척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챘으리라.

나는 지금 당신 덕분에 풍족한 20대를 누렸다고 말하고 있는 거다. 당신을 미워했던 그 10년의 세월이 사실은 당신이 만들어 준 일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내 심정이 어땠겠어.

“그쪽은 날 사랑해.”

“…….”

“그렇죠?”

남자의 얼굴에 언뜻 동요가 스쳤지만, 이내 사라졌다.

“고채원한테 알아듣게 말했으니까 이제 널 건드리는 일은 없을 거야.”

“말 돌리지 마요.”

“여민당도 마찬가지고.”

“날…….”

“매번 불편한 데서 섹스했으니까 마지막은 제대로 해 볼까?”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평소처럼 장난기를 띠었다. 다분히 만들어 낸 음성인데도 심장이 철렁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다른 것보다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귀에 걸렸기 때문이다.

느긋하게 넥타이를 풀어낸 남자가 핸드폰과 마찬가지로 넥타이를 던지고 재킷을 벗어 냈다. 불안한 기운이 감지되었다.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며 다가오는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고압적인 분위기 때문이 아니었다.

더듬더듬 매트리스를 짚고 상체를 세우기가 무섭게 그가 셔츠를 벗어 던지며 내 어깨를 누르고 올라탔다.

남자의 오른쪽 어깨를 덮은 문신은 처음 봤던 그대로였다. 자세히 보니 어깨부터 팔뚝까지 거대한 호랑이가 그려져 있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눈앞에서 문신에 뒤덮인 팔을 보니 무섭기도 했다.

내 눈이 그리로 향한 걸 알았는지 남자가 피식 웃으며 멋대로 내 옷까지 벗겨 냈다.

“자, 잠깐만요. 아직 대답 제대로 안 했잖아요……!”

남자와 나, 둘 다 상체만 휑했다. 뚫어져라 바라보는 욕정 어린 눈길에 저절로 몸이 달아올랐지만, 그가 말한 마지막이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야 했다.

아니, 반박해야 했다. 또 나를 밀어낼 생각이라면 그러지 못하도록.

“왜 마지막이라는 거예요.”

“이러다가 좆 될 거 같아서.”

느긋하게 대꾸하며 물 흐르듯이 바지 버클을 풀어내는 남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가 너무 손쉽게 옷을 벗기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진심으로 벗어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다리 사이가 조만간 찾아올 자극을 기대하며 착실히 젖어 가고 있었다.

바지를 벗겨 낸 남자가 팬티 봉제선을 따라 천천히 검지를 움직였다. 그의 손이 닿는 곳마다 신경이 움찔댔다. 최소한의 오기로 몸을 이리저리 비틀자 남자가 커다란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렇게 흔들지 않아도 빨아 줄 테니까 진정해.”

“내가 언제……!”

얼굴이 화악 달아오를 만큼 뻔뻔한 누명이었다. 남자의 손등을 내리치고 급히 몸을 일으켰다. 침대 헤드로 몸을 물려 손에 잡히는 베개를 품에 끌어안았다.

나에게 맞은 손등을 잠깐 내려다보던 남자가 쯧, 혀를 차며 고개를 들었다.

“애태울 줄도 아네.”

“애태우는 건 그쪽이잖아요.”

커다란 침대만큼 거대한 몸이 천천히 손을 짚으며 기어오는 모양새가 흡사 짐승 같았다. 꿀꺽, 침이 저절로 넘어갔다.

“대답 안 하면 안 할 거야.”

나는 베개를 좀 더 세게 끌어안았다.

“왜 마지막이라는 거예요. 나 사랑하면서……. 이런 거 나 말고 누구랑 하려고.”

“안 사랑한다니까.”

“내 사진 왜 몰래 찍었어요?”

“…….”

“잠든 나 보면서 무슨 생각했어. 내 사진 볼 때마다 무슨 생각했어요.”

남자가 짐짓 짜증스레 눈썹을 구기고 핸드폰을 노려보았다.

나는 그의 얼굴을 내 쪽으로 돌렸다. 잠시라도 그의 시선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어렴풋이 난감한 빛을 띠고 있는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왜 마지막이라는 거예요.”

남자가 깊은 한숨을 뱉었다.

어느새 나는 남자의 양팔에 갇힌 채였다. 침대 헤드를 쥔 남자의 손등을 타고 힘줄이 돋아나 있었다.

“그래, 관두자.”

“…….”

“섹스야 꼭 너랑 할 필요는 없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솔직히 상처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남자의 진심을 아는 이상, 나도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입 안 여린 살을 깨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곤 곧장 손을 남자의 아래로 뻗었다. 팽팽해진 앞섶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자 남자의 미간이 단숨에 좁아졌다.

“나 말고 다른 여자랑 하지 마요.”

“내가 왜?”

“만약에 하면 나도 가만히 안 있을 거야.”

“가만히 안 있으면.”

“혹시 알아요? 홧김에 나 좋다는 지운 선배랑 뒹굴지.”

“…….”

순간 무언가 쪼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움찔, 어깨를 떨며 고개를 돌리자 남자가 잡고 있는 헤드에 금이 가 있었다.

그것 봐. 당신도 못 참으면서.

선명한 남자의 반응에 힘입어 조금 더 도발을 강행했다.

“아, 선배보단 이 대표랑 자는 게 더 싫겠네.”

“…….”

“그쪽이 다른 여자랑 섹스했던 그 자리에서 난 이 대표 조…… 좆 빨 거예요.”

내 입으로 더러운 말을 하는 건 처음이라 조금 어색했지만, 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는 걸 보면 꽤 효과는 있어 보였다.

남자의 성기에서 손을 떼고 다시 베개를 움켜쥐려는데, 얼굴 양옆으로 뻗어 있던 남자의 팔이 거둬졌다. 이제 내 말을 알아듣고 인정하려나 보다 싶은 찰나 버클을 푸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단단하게 세워진 성기를 꺼냈다. 성기를 이렇게 바로 앞에서 보는 건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아랫배를 치고 올라간 굵은 기둥에 힘줄이 도드라져 울퉁불퉁했다. 굵기나 모양, 뭐 하나 흉포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그 전에 내 좆부터 빨아 봐.”

“……네?”

“이 대표는 서툴게 구는 걸 싫어하거든. 연습해.”

“…….”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아차린 건 몸을 일으킨 남자의 성기가 볼을 건드렸을 때였다. 귀두를 적신 액이 볼을 축축하게 만들었다. 뜨겁고 축축한 살덩어리가 얼굴에 닿는 것은 지나치게 생경한 감각이었다.

“입 벌려.”

“시, 싫어요.”

강한 거부감이 밀려들었다. 급히 고개를 저으며 피했지만, 그가 내 얼굴을 도로 붙잡더니 곳곳에 제 성기를 문질러 댔다. 눈, 코, 볼, 귀, 턱 할 것 없이 남자의 성기가 스쳤다. 얼굴을 희롱당하는 기분이었다.

그가 귀두로 입술 위를 지그시 눌렀다. 벌리라는 듯 위아래로 움직이며 입술 사이를 금방이라도 파고들 것처럼 굴었다. 견딜 수 없는 수치심이 밀려들어 울먹이며 눈을 들자 여전히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이럴 거면서 왜 그딴 소릴 해.”

“…….”

어떻게 이렇게 조금도 져 주지 않는 걸까. 그까짓 게 뭐라고. 사랑을 인정하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나를 이렇게 치욕스럽게 만드는 걸까. 나를 사랑하면서. 어떻게 이래.

원망스럽게 그를 노려보다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흡.”

먼저 입을 벌리라고 한 주제에 내가 기어코 귀두 끝을 물자 남자가 낮게 욕설을 뱉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성기에 입을 맞춘 것처럼 짧은 마찰음이 울렸다. 나는 다시 손을 뻗어 기둥을 그러쥐고 입술을 가져다 댔다.

“야.”

남자가 나를 낯설게 불렀다. 정말로 화가 난 것 같은 뉘앙스였지만, 못 들은 척 입을 벌리고 성기를 삼켰다. 기껏해야 귀두를 겨우 넣었을 뿐인데도 입 안이 가득 찼다.

“우웁, 읏.”

오기로 넣긴 했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어설프게 물고만 있는데, 벌어진 입술 사이로 침이 흐를 것처럼 타고 내려가 급히 빨아들였다. 츄웁, 침과 남자의 액이 섞여 유난히 질척한 소리가 들렸다. 맛도 기묘했다.

조금 더 넣어 보려고 입술을 오물대는데 순간 몸이 번쩍 들렸다. 남자가 겨드랑이 안으로 손을 넣고 들어 올린 탓이었다. 자연히 성기를 뱉어 내고 기침을 하는 나를 그가 도로 침대에 눕혔다.

“흐으…… 읍…….”

남자가 우는 내 입가를 손가락으로 훔쳤다. 잠깐이지만 빠듯하게 벌어진 턱이 아릿했다.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턱을 마사지하듯 문질러 주는 손길이 지나치게 섬세했다.

겨우 눈가를 문질러 닦자 딱 한 번 본 적 있는 표정을 한 남자가 미간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졌다는 얼굴.

“다른 새끼 좆 입에 물기만 해. 그 새끼가 죽는 건 당연하고, 너도 가만히 안 둬.”

“……나도 죽일 거예요?”

“내가 미쳤어?”

남자가 혀를 찼다.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을 살게 해야지.”

“…….”

“내 옆에서. 평생.”

“그럼 이 대표 거 빠, 빨래요.”

“…….”

“그래서 그쪽 옆에 평생 붙어 있을래.”

남자가 골치 아프다는 듯 한숨을 뱉었다.

억지인 건 안다. 논리 없는 주장인 것도 안다. 하지만 어떻게든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사랑한다고 말해 주면 안 돼요?”

“…….”

“내가 그렇게 어려운 거 바라는 거 아니잖아요…….”

문신으로 덮인 남자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쪽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라서 그래요? 신분이 불명확해서?”

“……이 대표가 그렇게 입이 싼 놈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그렇게 됐을까.”

남자가 화를 억누르듯 이를 악물었다.

“난 상관없어요. 그런 거 아무렇지도 않아. 그쪽이 깡패든, 신분이 없든, 다 상관없어요.”

“…….”

“날 사랑해 주기만 하면 돼.”

“…….”

“뒤에서만 지켜 주지 말고 옆에 있어요.”

만약에 남자와 내가 평범하게 마주친 인연이었다면 어땠을까? 평범한 남자도 나를 위해 선뜻 사람을 죽이고, 저택을 불태웠을까?

혹은 내가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면?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지도 않고, 고성하도 나를 더럽게 보지 않는 그저 해맑은 열아홉 살짜리였다면 남자와 얽힐 일이 있었을까?

내가 과연 그를 사랑했을까? 그는 나를 사랑했을까?

아니, 우리가 여기까지 온 건 그가 그이고, 내가 나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만 인정해.”

우리는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날 사랑하죠.”

나는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한 걸음 물러나 주기로 했다.

“사랑하면 키스해요.”

“…….”

완전히 졌다는 얼굴로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던 남자가 입을 맞춰 왔다. 나는 환희에 젖어 그를 끌어안았다.

드디어 인정했다.

따라갈 수 없는 남자의 혀에 서툴게나마 나도 움직임을 보탰다. 서로의 감정을 인정하고 나누는 키스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혼자 확신하는 것과 상대의 인정을 받는 게 이렇게 다른 거였구나.

가슴이 벅차올라서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전에 없이 거친 입맞춤에 헐떡이며 남자의 손을 가슴 위로 끌어왔다. 그는 순순히 손을 움직여 살덩어리를 주무르면서도 연신 내 혀를 빨았다.

“응, 으흣…….”

검지가 연신 유두를 튕겨 대며 야릇한 자극을 퍼트렸다.

이걸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나는 좀 더 몸을 맡긴 채 다리를 벌려 그의 허리에 감았다. 몸이 틈 없이 밀착되며, 밖으로 나와 있는 남자의 성기가 팬티 위를 지그시 눌렀다.

허리가 저절로 움직이며 스스로 자극을 찾아갔다. 잔뜩 젖은 천 위로 마찰하는 기둥 역시 황홀했으나 그것보다는 온전히 그가 내 안으로 들어차기를 바랐다.

나는 끙끙대며 남자의 어깨를 긁었다. 그제야 그가 입 안에서 혀를 빼내고 내 입술 주변을 핥았다.

“팬티 벗겨 주세요…….”

남자가 실소하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신기한 걸 보듯 내 얼굴을 훑어보는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아주 나를 가지고 놀아.”

누가 할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애초에 내 마음을 쥐락펴락한 건 그였고, 나에게 섹스의 쾌락을 알려 준 것도 그다. 내가 지금 이렇게 안달 내는 건 다 남자 때문이다. 누가 봐도 놀아나는 건 나라는 말이다.

억울하지만 뭐라고 말도 못 하고 달뜬 숨만 뱉으며 그를 애타게 올려다보았다.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밑을 빨아 줄 거라고 기대했는데, 정작 혀가 닿은 곳은 유두 위였다. 아쉬움에 끙, 앓는 소리를 뱉었지만 차마 밀어내진 못하고 축축한 혀를 받았다.

“아응……!”

유두를 핥던 혀끝이 파인 곳을 지그시 눌렀다. 구멍을 맞추듯 파고드는 것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아랫배가 저절로 조여들고 허리가 한껏 들렸다. 처음 그에게 가슴을 빨렸을 때보다 자극이 조금 더 커진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그 상태로 천천히 유두를 돌리는데 그럴 때마다 미묘하게 몸 안에 전기가 튀듯 야릇한 자극이 퍼졌다. 남자의 머리를 살짝 밀었지만, 그는 반대쪽으로 옮겨 갈 뿐 쉽게 입을 떼지 않았다. 반대쪽에도 같은 자극이 이어졌다. 유두를 지그시 누르고 흔들어 댄다.

“아, 읏…….”

어깨가 둥글게 말리고 몸이 한껏 꼬였다. 아예 센 자극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몸서리쳐지는 것은 견디기 힘들었다.

안절부절못하다 남자의 귀를 잡아당기자 그제야 그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다리 사이는 남자와 맞비벼지는 중이었다. 은근슬쩍 허리를 움직이자 남자가 한쪽 눈을 살짝 일그러트리며 내 골반을 지그시 눌렀다.

“그만 보채.”

“흐…….”

그나마 이어지던 자극이 멈추니까 애가 타서 미칠 지경이었다. 끙끙거리며 버둥대는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한 남자가 다짜고짜 내 다리를 벌리더니 사타구니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하얀 실크 팬티가 젖을 대로 젖어 음부에 밀착해 모양을 훤히 드러내고 있을 게 뻔했다.

“너 이 팬티 버려야겠다.”

“…….”

“언제 이렇게 혼자 적셨어.”

본인도 내내 성기를 곧추세우고 있으면서 놀리듯 속삭이는 남자의 어깨를 살짝 때렸다. 내가 창피해하든 말든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젖은 천만 바라봤다.

그렇게 보지만 말고 뭐라도 해 달라고 말하려는 찰나 그가 고개를 숙였다.

“아…….”

팬티를 벗길 줄 알았는데 그 위에 그대로 혀가 닿았다. 축축한 실크 위로 물컹한 혀가 길게 가르고 올라갔다.

“벗을, 흐읏, 벗을래. 벗겨, 으응, 주세요.”

“싫어.”

그가 단호하게 말하며 팬티 위로 음부를 빨기 시작했다. 얇은 막에 가로막힌 자극에 안달이 났다. 미끄럽게 위아래로 두어 번 쓸던 혀가 튀어나온 음핵에 닿았다. 그러나 그마저도 부족했다.

“흐읏, 응, 아…….”

흡입하듯 빨아들이기도 하고, 혀를 단단하게 세워 쿡쿡 쑤시기도 하지만, 전부 위에서 살짝살짝 건드리는 게 전부였다. 질구 안으로 남자의 혀가 파고들었던 감각을 기억하는 몸은 도저히 만족을 못 하고 펄떡댔다.

스스로 팬티를 벗으려고 손을 내렸지만 곧바로 남자에게 붙잡혔다. 그는 마치 심술을 부리는 듯 내게 미약한 자극만 주었다. 내가 그를 도발하기 위해 성기를 물었던 것처럼.

“흣……. 으응, 싫어. 벗을래요.”

허공으로 뜬 다리를 남자의 어깨 위로 올렸다. 연신 그 위로 종아리를 문지르며 애원했지만, 그는 쉽사리 들어주지 않고 애꿎은 팬티만 빨아 댔다. 정말 너무한다.

발로 어깨를 밀자, 그가 순순히 상체를 세우곤 혀로 제 입가를 핥았다.

“그만할까?”

“…….”

나는 그를 노려보며 곧장 다리 사이로 내려갔다. 일부러 애태우는 건 나도 할 수 있다.

아까보다 더 축축한 귀두를 혀로 핥은 뒤 고개를 들자 남자가 재밌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도발할 때와는 달리 지금은 내가 하는 걸 그냥 둘 것 같은 분위기라 입을 크게 벌리고 귀두를 머금었다. 방법은 잘 모르지만, 남자가 나를 빨아 댄 것과 비슷하게 하면 되지 않을까.

혀로 몇 번 핥다가 뾰족하게 세워 귀두 끝을 쿡 찔렀다. 갈라진 틈을 쿡쿡 쑤셔 대다 다시 사탕처럼 입 전체를 이용해 쭉쭉 빨아들였다.

“이것 봐. 잘하잖아.”

남자의 손이 뒤통수와 목덜미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쪽, 소리가 나게 귀두를 입에서 빼내고 혀로 기둥을 핥아 올렸다. 우둘투둘한 힘줄이 혀를 자극했다. 남자의 허벅지에 탄탄하게 힘이 들어갔다.

몇 번 더 핥다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자 가만히 내려다보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넣고 싶어?”

그가 선심 쓰듯 물었다. 본인도 흥분한 건 마찬가지면서 태연한 척하는 게 얄미웠지만,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안달 나게 하려고 빤 건데, 오히려 내가 더 흥분했다. 입 안에 다 들어가지도 않고, 양손으로도 잡히지 않는 이 크고 굵은 성기가 안을 쑤셔 댈 때 얼마나 황홀한지 알고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무릎으로 딛고 일어나.”

순순히 남자의 허벅지 위에 다리를 벌린 채 양 무릎을 디뎠다.

그가 잘했다는 듯 내 이마에 입을 맞추더니 다리 사이로 손을 가져다 댔다. 느리게 문지르던 손가락이 팬티를 옆으로 젖히고 들어오는 건 한순간이었다.

“응…….”

완전히 벗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맨살에 남자가 닿았다는 것만으로도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질구 위를 깔짝거리던 손가락이 천천히 안으로 파고들었다. 허리와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중심을 잃을 뻔해 다급히 남자의 어깨를 붙잡았다.

“넘어지면 관둘 거야.”

“왜요…….”

뜬금없는 조건에 조그맣게 반발하자 그가 낮게 웃었다.

“하나만 해, 하나만. 야하든가 귀엽든가.”

중지가 끝까지 안으로 들어왔다. 넘어지지 말라니까 일단은 남자를 붙잡고 버텨는 보는데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저 손으로 안을 푹푹 쑤셔 대면 금방 자지러지며 뒤로 누워 버릴지도 모른다. 힘을 준 허벅지가 바들바들 떨렸다.

“이러니까 정신을 못 차리겠잖아.”

“하으…….”

중지가 느리게 빠져나갔다가 다시 파고들었다. 그에 맞춰 내 허리도 잘게 흔들렸다. 조금이라도 남자의 손가락을 쉽게 받기 위해 그가 움직이는 대로 허리를 뒤로 뺐다가 당기며 흔들었다.

그러다 문득 내가 그의 손가락에 대고 스스로 움직이는 것 같아서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남자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아래쪽을 바라보다 눈을 치켜들었다.

부끄러움을 견딜 수가 없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넘어지지 말라고 했지, 안지 말라고는 안 했으니까. 역시나 그는 별말 없이 손가락을 움직여 댔다.

“후으…… 읏, 응…….”

손가락 하나가 더 들어왔다. 빠듯해지는 기분에 그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며 허리를 뒤로 쭉 빼냈다. 다리 사이가 좀 더 벌어졌다. 푸욱, 손가락 두 개가 안쪽 깊은 곳을 찔렀다. 내가 느끼는 지점을 정확히 자극하는 것에 내벽이 한껏 조여들며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런 걸 어떻게 견뎌.

“누워서 하면 안 돼요……?”

“안 돼.”

“왜…….”

“매달리는 게 귀여워서.”

“…….”

진심인가 싶어 고개를 들었는데, 남자가 정말로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쿵쿵, 심장이 거세게 뛰는 동시에 구멍이 확 좁혀졌다. 남자가 흥미로운 듯 콧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안으로 푹 박아 넣었다.

“귀여워해 주는 게 좋아?”

“흐읏……! 그런, 게 아니라……!”

연신 손가락이 세차게 박혔다. 예의 그 부위만 집중적으로 쑤셔 대는 통에 기어이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듯 누워 버렸다. 절정의 직전에 넘어지는 바람에 애매하게 화끈거리는 질구가 빠져나간 손가락을 아쉬워했다.

이불을 움켜쥐고 가쁜 숨만 뱉다가 남자를 올려다보자 그가 가늠하듯 나를 훑어보았다.

“진짜 안 할 거 아니죠……?”

설마 여기까지 와서 그만두진 않겠지. 금방이라도 안을 가르고 들어올 것처럼 성기가 빳빳하게 서 있는데 말이다.

남자가 짧게 혀를 차며 단숨에 팬티를 벗겨 냈다. 드디어 해방된 아래에선 연신 액이 흘렀다. 그가 제 옷도 모조리 벗어 내고 내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당연히 아니지.”

그제야 나는 안심하고 남자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그러고 보니 완전히 알몸이 된 채로 끌어안는 건 처음이다. 새삼스럽게 남자의 몸을 훑었다. 타의로 그의 몸을 본 적은 있지만 내가 원해서 보는 것 역시 처음이다.

다시 본 남자의 몸은 완벽한 비율의 조각상처럼 균형이 잡혀 있었다. 문신 때문에 미처 보지 못한 흉터도 여러 곳에 보였다. 험한 일을 하는 사람이니 이 정도 상처를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막상 보니 마음이 아팠다.

어쩌다 다친 걸까. 아무래도 섹스 후엔 남자에 대해 더 많은 걸 물어봐야겠다.

“무슨 생각해.”

남자가 제 성기를 훑어 올리며 물었다.

“그쪽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싶다는 생각이요.”

“알아서 좋을 거 없는데.”

“그쪽은 나에 대해서 뭐든 다 안다면서요.”

“그래서 나 봐. 이 꼴이잖아.”

귀두가 질구에 맞춰졌다. 무슨 꼴이냐고 묻기도 전에 안으로 파고드는 압박감에 숨이 턱 막혔다. 몇 번을 해도 익숙해지진 않을 것 같다. 천천히 질벽을 가르고 파고드는 묵직한 성기에 간신히 숨만 뱉어 내며 남자를 붙잡았다.

“주제도 모르고 좇질이나 해 대는 게 뭐가 좋다고.”

그가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숨도 제대로 못 쉬는데 남자의 말에 대꾸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완전히 안에 들어찬 성기의 부피대로 질벽이 꿈틀대며 공간을 확보했다. 간신히 적응했다 싶은 순간, 그가 가차 없이 성기를 빼내고 곧장 푹 차올렸다.

“아흣……!”

남자의 섹스는 거칠기 짝이 없지만, 거부감이 들지 않는 건 아마 쉴 새 없이 얼굴을 매만지는 손길이라든가 얼굴 위에 내려앉는 입술 때문이리라. 퍽퍽, 조금의 틈도 내주지 않는 허리 짓에 몸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침대 프레임이 덩달아 삐걱댔다.

“아윽……! 흐아, 처, 천천히……. 아아……!”

그는 정말 정신없이 나를 몰아붙였다. 그만큼 쾌락이 치솟는 속도도 달랐다.

점점 열기가 차오르며 절정을 맞이하려는 순간, 그가 돌연 움직임을 뚝 멈췄다. 몸 안에 가득 들어온 채로 자극을 멈춰 버리자 머리가 새하얘졌다.

가쁜 숨을 몰아 내쉬며 겨우 눈을 뜨니 남자는 우리가 결합한 부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나마나 구멍이 훤히 벌어져 굵은 성기를 삼키고 있는 음란한 모습일 거다.

창피함에 손을 뻗어 눈을 가리려고 했지만 도로 붙잡히다 못해 그가 나를 들어 올려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봐.”

“뭘요……?”

“너한테 먹힌 거.”

그가 손수 내 볼을 잡아 아래를 보게 했다. 음모 아래로 남자의 성기가 내 안에 집어삼켜져 있다. 차마 계속 보기 민망해 고개를 피했지만, 남자가 음부를 손으로 잡아 벌리곤 결합한 부위를 더 잘 보이게 만들었다.

“왜, 왜 이래요. 변태같이…….”

“뭘 이 정도 가지고 변태래. 오빠가 얼마나 참아 주고 있는데.”

“…….”

“진짜 변태 짓 해 줄까?”

다급히 고개를 젓자 그가 웃으며 내 볼에 입을 맞췄다.

“그러니까 봐. 우리 섹스하는 거.”

“왜 자꾸…… 보라고 해요…….”

“왜긴.”

다시 남자의 손에 의해 강제로 결합 부위를 보게 되었다. 그가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남자의 성기가 조금씩 보였다가 사라지고, 동시에 안이 확 조여들었다. 시각적인 자극과 육체적 자극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건 생각보다 더 민망하고 또…… 흥분되었다.

“네가 이렇게 밝히니까.”

“흐읏…….”

넋을 놓고 삽입되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굵은 게 내 안을 쑤시고 있다는 게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정말 짐승 같은 행위다. 이런 거로 흥분해 날뛰는 나 역시 짐승이겠지. 귀두가 안쪽 깊은 곳을 꾸욱 누르며 문질러 댔다.

“하윽, 응, 아……!”

몸을 바들바들 떨며 절정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나는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음부 주변 근육들이 한 번에 수축하며 남자를 한없이 조였다. 동시에 성기가 밖으로 툭 튀어나오더니 일순 정액을 뿜어냈다. 내 몸은 물론이고 얼굴까지 정액이 튀었다.

사정하는 광경을 보는 건 처음이라 조금 당황했지만, 손수 얼굴을 닦아 주는 남자의 손길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눈을 들었다.

“엎드려.”

그가 당연한 듯 이어 명령했다.

몇 번이나 몸을 섞었는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다. 종국에는 제발 그만하자고 울면서 도망갔지만, 그럼에도 다시 그의 품 안에 갇혀야 했다. 목이 다 쉴 때까지 신음하고 울다가 기절하듯 잠든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간신히 눈을 뜬 나는 다리 사이의 이물감에 잠깐 몸을 떨었다.

이게 뭐지…….

몽롱한 정신으로 의아해하다가 무심코 든 생각에 고개를 아래로 내리니 아니나 다를까, 남자의 성기가 여전히 안을 채우고 있었다.

“아…….”

남자는 자고 있었다. 지그시 감은 눈매를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감상할 틈도 없었다. 들어와 있는 성기가 돌연 부피를 키운 탓이었다. 내부가 질척거려 아프진 않았으나 일단은 빼야겠다는 생각에 허리를 슬그머니 뒤로 물렸다. 그러나 워낙 그의 성기가 긴 탓에 완전히 빠져나오지 않았다.

“흡……!”

오히려 그가 다짜고짜 나를 끌어안는 바람에 다시 몸 안으로 깊이 삽입되어 갈라진 신음이 터져 나왔다.

혹시 잠에서 깬 건가 싶어 눈치를 살폈지만, 그는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잘 때 안는 버릇이 있는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니 남자와 한 침대에 있는 것도 처음이다.

생소하고 간지러운 기분도 잠시,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흥분감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와 한창 몸을 섞을 땐 그만하라고 밀어냈으면서, 지금은 다시 거칠게 박아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또 한참 붙잡혀 있을까 봐 지레 겁이 났다. 지금은 정말, 몸을 일으킬 힘도 없었다.

“흐으…… 읏…….”

어떻게든 남자의 품 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꿈틀대는데, 그럴수록 안쪽만 자극이 되었다. 본능적으로 허리가 돌아가며 내가 느끼는 부위로 남자의 귀두를 가져다 대기까지 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멈춰야 하는데. 쉴 새 없이 생각하면서도 허리가 잘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응……. 흐응, 읏.”

“…….”

“아흐, 응.”

그때였다. 돌연 머리 위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너무 당황해 움직임이 뚝 멎었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들자 남자가 재밌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언제…….”

“언제 깼냐고?”

그가 태연히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애초에 잔 적이 없는데.”

“…….”

순식간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럼 내가 계속 허리를 움직이던 것도…….

견딜 수 없는 창피함에 손바닥에 얼굴을 묻는데, 남자가 나를 멋대로 들어 올려 제 위에 얹었다. 여전히 아래는 삽입된 채였다.

“감질나게 굴지 말고, 제대로 해 봐.”

“싫어요. 내려갈래.”

“안 돼.”

“왜, 왜 안 자고 있었는데요…….”

“이것저것 하느라.”

움찔, 질구가 조여들었다.

“뭐 했는데요……?”

“방금 네가 한 거랑 비슷한 짓.”

퍽, 아프지 않게 남자의 가슴팍을 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느긋하게 깍지 낀 손을 뒤통수에 받치기까지 했다.

“움직여 봐.”

“싫어요.”

“그럼 내려가. 손 놔줬잖아.”

“…….”

내가 흥분한 걸 알고 일부러 놀리는 거다. 그걸 알면서도 창피하고 억울한 마음에 원망스럽게 바라보자 그가 허리를 툭 쳐올렸다. 동시에 몸이 튀어 오르며 성기가 푹 박혔다. 도저히 버티고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남자의 몸 위로 쓰러지듯 엎드렸다.

“나 힘들어요. 너무 많이 했잖아…….”

“그래? 그럼 그만할까?”

금방이라도 빠져나갈 듯 성기가 움직였다. 질벽이 확 조여들며 남자를 붙잡았다.

끙끙대며 남자의 가슴팍에 이마를 비비다 마지못해 허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그에게 휘둘리기만 해서 직접 움직이려니 여간 어색한 게 아니었다. 어설프게 엉덩이를 뒤로 뺀 바람에 남자의 성기가 툭, 하고 튕겨 나갔다.

정말 잠든 내게 계속 박아 댄 건지 빠져나간 아래가 허전하다 못해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짐승이 따로 없다. 물론 아래를 다시 채우고 싶은 나도 마찬가지고.

겨우 손을 내려 남자의 성기를 붙잡아 질구에 맞췄다. 꿈틀대며 허리를 내리자 남자가 안으로 조금씩 파고들었다.

“후으…….”

간신히 성기를 뿌리 끝까지 삼킨 뒤에 남자의 가슴 위에 입을 맞췄다. 쪽쪽,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근육이 잘게 움직였다. 쇄골과 목을 타고 올라가 입술 위를 핥자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혀를 차며 허리를 움직였다.

“작작 해.”

“아응……. 읏, 흑!”

“진짜 사랑하고 싶어지니까.”

이미 사랑하면서. 인정했으면서.

연신 신음하며 남자의 입술을 핥다가 혀를 밀어 넣었다. 순순히 키스를 받아 주는 남자 덕분에 더할 나위 없는 충족감이 온몸을 감쌌다.

“사랑해요…….”

또 한 번의 절정 끝에 남자의 품 안에 오롯이 기댔다. 그는 가쁜 숨을 내뱉는 내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대답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드러운 손길이 곧 대답이다. 지그시 나를 응시하는 저 눈동자가 사랑이다.

“으응…….”

잠에서 깨자마자 곧바로 이어진 섹스는 노곤함을 동반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잠들기보다 조금 더 그를 보고 싶어서 가까스로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졸리면 자.”

“지금 몇 시예요?”

“글쎄.”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

“계속 이렇게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사랑에 빠진 사람은 현실 감각이 사라지고 사고방식이 멍청해진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현실을 잊고 싶은 거다. 나를 둘러싼 무수한 현실을 지워 내고 행복만 선사하는 감정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싶어지는 것이다.

지금 남자와 단둘이 이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영원히 함께 있고 싶은 나처럼.

“여긴 어디예요?”

“내 별장.”

“진짜 성공했나 보네.”

조금 더 몸을 밀착했다. 자신의 위에 턱하니 올라가 있는데도 남자는 전혀 무거운 기색 없이 연신 내 등을 쓸어내렸다.

“이 별장도 이 대표 이름으로 되어 있어요?”

“그래.”

남자가 이민후를 회사 대표로 세워 뒀으니 집 명의 역시 그를 내세웠다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나 때문에 이 대표랑 사이 멀어지면 이런 거 다 잃는 거예요?”

“그럴 사이 아니야.”

“죽일 거랬으면서…….”

“그래. 차라리 죽이면 죽였지 서로 배신할 사이는 아니야.”

“…….”

아무래도 깡패들 세계에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의리 같은 게 있는 모양이다.

“만약에 이 대표가 배신해도 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남자가 낮게 웃었다. 그에 우리 둘의 몸이 동시에 진동했다.

그는 농담처럼 흘려듣는 것 같았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일단은 지금이라도 주민등록증을 발급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 불가능하면 신분이 필요한 일이 생길 때마다 내가 대신 나서 줄 각오도 되어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신분 같은 거 돈으로 살 수 있지 않아요? 왜 계속 없는 사람으로 살아요?”

“몰라도 돼.”

탄탄한 남자의 가슴팍을 손끝으로 긁으며 입을 삐죽이자, 그가 또 한 번 웃었다. 그러나 대답해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마지못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쪽도 성원으로 이사 가요?”

“그렇겠지.”

“그럼 가장 가운데에 있는 집으로 가요.”

“왜?”

“선배랑 난 이 대표가 가운데 집에 살 줄 알고 제일 신경 써서 설계했거든.”

“…….”

문득 그가 제 몸 위에서 놀고 있는 내 손을 잡아 멈추게 했다.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들자 별말은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하게 남자를 바라보는데 무심코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지레짐작일 수도 있지만, 아까 그가 금을 내 버린 침대 헤드를 생각하면 가능성이 있었다.

“질투해요?”

“내가?”

내 손등을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가고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반문한다. 여전히 그는 행동과 표정과 말을 다르게 했다.

“이 대표 집을 신경 써서 만들었다고 질투하는 거예요?”

“확대 해석 하지 마.”

“아니면 선배랑 같이 일하는 게 질투 나요?”

그가 헛웃음을 지으며 내 머리를 멋대로 흐트러트렸다.

“좋을 대로 생각해.”

“그럼 선배랑 내 사이 질투하는 걸로 생각해야지.”

“그러든가.”

“영화관에서도 그래서 콜라 부은 거죠?”

남자가 대답 대신 나를 확 돌려 눕혔다. 순식간에 우위를 점한 그가 여전히 굶주린 짐승처럼 제 입술을 핥았다.

“말 많은 거 보니까 더 해도 되겠네.”

“네? 힘든데……. 그냥 이야기하면 안 돼요?”

“종알대는 게 예뻐서 그냥 두기 싫어졌어.”

나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나 예뻐요?”

한 번 더 듣고 싶은 마음에 은근슬쩍 묻자 남자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내렸다.

“예뻐.”

“…….”

“그러니까 딱 세 번만 더 하고 오빠랑 어디 좀 가자.”

“……세 번이요?”

몸 위로 그림자가 졌다. 이미 몇 번이나 했는지 세지도 못하겠는데 세 번이나 더 하자니. 아연해져서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 그렇게까진…….”

그러나 남자는 내 거절을 가볍게 입 안으로 집어삼켰다.

세 번만 하겠다더니 남자는 기어이 나를 다시 기절시켰다.

가까스로 일어나자마자 보이는 남자의 등을 여러 차례 때리고 나서야 비로소 침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손수 옷을 입혀 주는 남자의 손길에 마음을 조금 풀고 까만 방을 나서니 우리가 2층짜리 단독 주택의 2층 끝방에 있었던 걸 알 수 있었다.

별장이라면서 딱히 가구는 없는 걸 보니 자주 오지는 않는 듯했다.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을 때 그가 내게 새 옷과 속옷, 신발, 샤워 용품이 담긴 쇼핑백을 건네주었다.

“씻고 와.”

“나 혼자요?”

“더 할 수 있겠어?”

당연하다는 듯 내 몸을 위아래로 훑는 그를 밉지 않게 흘겼다. 섹스하지 않고 씻겨 주기만 할 생각은 아예 없는 건가. 이렇게 날 못살게 굴었으면 미안해서라도 씻겨 주겠다.

그래도 진짜 더 이상은 아래에 뭘 넣는 건 못 할 것 같아 관두고 혼자 욕실로 들어섰다.

따뜻한 물로 깨끗하게 씻고, 쇼핑백을 열어 보니 의외로 단순한 디자인의 속옷이 들어 있었다. 하는 짓을 보면 속옷 취향도 엄청 야할 것 같은데 의외였다.

아무런 무늬가 없는 하얀 브래지어와 팬티를 차례로 입고, 내가 평소에 입는 것과 비슷한 스타일의 셔츠와 바지도 껴입었다. 신발까지 전부 사이즈가 잘 맞는다.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더니.

“이리 와.”

밖으로 나오자 남자도 그새 다른 욕실에서 씻었는지 새로운 슈트 차림이었다. 어쩐지 씻고 나오자마자 마주치니 꼭 신혼부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낯선 별장은 신혼집 같고.

혼자 멋대로 상상하며 얼굴을 붉히고 서 있자 남자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뭐 해?”

“우리 이러니까 꼭 부부 같아요.”

그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물기 젖은 볼을 손으로 닦아 주었다.

“쓸데없는 상상은 그쯤 해 두고 가자.”

“말 진짜 밉게 해.”

물론 서류상 그와 부부가 되는 건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 엇비슷한 건 가능하지 않나. 꼭 결혼해야만 같이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까부터 자꾸 어디 가자는 건데요.”

기왕이면 그와 단둘이 이 별장에 오래 머무르고 싶어 볼멘소리가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내 손을 잡아 이끌었다. 이 와중에도 그와 손을 잡은 게 좋다면 나도 정말 중증이다.

마지못해 따라가다 남자의 손을 흔들었다.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파요. 그쪽이 너무 많이 해서.”

빙 돌려 말하는 속내를 쉽게 파악한 그가 순순히 나를 안아 들었다. 그 틈에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별장을 빠져나가니 바깥은 온통 캄캄했다. 어슴푸레한 하늘의 색감을 보니 새벽인 것 같았다.

“토요일 새벽이에요?”

“일요일.”

“…….”

찰싹, 남자의 어깨를 때렸다. 그럼 하루가 넘도록 섹스를 했다는 말이야?

“어쩐지 너무 힘들었어.”

“너도 좋아서 매달려 놓곤 왜 때려.”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남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재밌다는 듯 올라가는 그의 입꼬리가 손바닥 위로 느껴졌다.

그가 나를 손수 조수석에 내려 주곤 운전석으로 올라탔다. 그렇게 오래 괴롭혀 놓고 기어이 끌고 가는 곳이 어디인지 두고 봐야겠다.

입을 삐죽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남자의 별장은 휑한 산 중턱에 있었다.

“여긴 어디예요? 서울은 아닌 거 같은데.”

“영전시.”

“영전시요?”

근교까지 와 있는 줄은 몰랐다. 놀란 얼굴로 안전벨트를 매 주는 남자를 바라보니 그가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져 나갔다. 내가 영전시에 있다는 것보다, 예고 없는 입맞춤이 더 놀라웠다.

벨트를 움켜쥐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내 반응이 흥미로운지 남자의 짙은 동공이 천천히 굴러갔다.

“솔직하고, 순진해 빠졌어. 이러니 애기지.”

“나랑 지금까지 저기서 하다 온 짓은 잊었어요? 그렇게 막…… 그래 놓고, 애기라고 하면 그쪽 진짜 변태예요.”

더 이상 애 취급하지 말라는 의미로 한 말인데 남자는 귓등으로도 안 듣는 것 같았다. 느긋하게 운전석으로 돌아가 시동을 켜는 남자를 밉지 않게 흘겨보았다.

시동이 켜지며 화면에 떠오른 시간은 새벽 4시 35분이었다. 정말 다시 봐도 놀라운 시간이다. 지금까지 그와 몸을 섞었다는 게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별장 안에서는 정말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는데 말이다.

“우리 어디 가요? 나 배고파요. 맛있는 거 먹어요. 아, 이 시간에도 문을 연 식당이 있나…….”

종알거리는 게 예쁘다고 했던 남자의 말을 떠올리며 일부러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다. 별 의미 없이 표지판을 가리키며 방향을 묻기도 했고, 어떤 음식을 좋아하냐고 묻기도 했고, 배고프다며 어리광도 피우고, 핸들을 쥔 남자의 손을 끌어와 만지작대기도 했다.

남자는 귀찮은 기색 하나 없이 내가 제멋대로 구는 걸 내버려 두었다. 가끔은 대답을 해 주기도 했고, 내 손을 세게 쥐기도 하고, 오가는 차 한 대 없는 도로에 멈춰 못 참겠다는 듯 입을 맞추기도 했다.

“조용히 가자. 카섹스 또 하고 싶은 거 아니면.”

“궁금한 게 있어요.”

“또?”

“정말 그쪽이 주태강을…… 그렇게 했어요?”

남자가 잠깐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알았어요? 어릴 때라 나도 가끔 잊고 살던 일인데.”

“주태강이 사채 쓴 거 우리 조직이야.”

“……네?”

“갚으라는 돈은 안 갚고 헛소리만 해 대서 그냥 죽였어.”

“무슨 헛소리요……?”

“그건 몰라도 돼.”

주태강이 쓴 사채. 남자의 조직. 헛소리. 도무지 추측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남자가 그를 죽인 이유를 알고 있기에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나 말고 너한테 발정하는 새끼들은 다 죽여 버릴 거니까.”

주태강이 나를 더럽게 입에 올렸구나. 그걸 들은 남자가 어렸을 때 내가 당한 일을 알게 되었고, 세상에서 없애 버린 것이리라.

“예전에…… 왜 초콜릿에 예민하게 구냐고 물었던 적 있죠.”

“말 안 해도 돼. 대충 알겠으니까. 죽기 전에 그 입에 초콜릿이나 처박아 줄걸. 아쉽네.”

“…….”

“그런 새끼 또 있으면 없애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뭐, 이젠 그럴 일 없겠지만.”

무서운 말을 대수롭지 않게 하는 남자나, 그걸 듣고도 무섭다는 생각보다는 든든함을 느끼는 나나 둘 다 제정신이 아니다.

스토커에 대해서도 물어보려다 그냥 관두었다. 주태강과 피차 다르지 않을 걸 예감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도 꽤나 떠들썩했던 사건이니 남자의 귀에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았으리라.

“엄마는 왜 집에 들였어요.”

“네 어머니니까.”

“…….”

“왜? 죽여 줘?”

내 어머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녀를 살려 두었다는 것 같았다. 고개를 젓자 그가 내 볼을 가볍게 쓸고 핸들을 꺾었다.

자동차는 별장이 있던 곳에서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내비게이션을 힐끔 보다 남자에게로 몸을 완전히 틀었다.

“그동안 뭐 하고 살았어요.”

“열심히 일해서 돈 벌었지. 애기 팔아넘긴 대가로.”

“…….”

일부러 밉게 말하는 남자의 팔뚝을 주먹으로 툭 쳤다. 그가 조용히 웃었다.

“진작에 내 앞에 좀 나타나지.”

내 예상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는 늘 나를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 집과 불과 10분 거리에 있는 남자의 집이 떠올랐다.

조금만 더 빨리 와 주지. 하루라도 더 빨리 오해를 풀지.

“고채원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아마 네 앞에 다시 나타나는 일은 없었을 거야.”

남자가 낮게 응수했다.

“그쪽에서 하도 설쳐서 내 눈앞에 두는 게 속 편하겠다 싶었던 거지.”

“…….”

“지금도 후회하고 있어.”

“왜요……?”

후회라는 말이 조금 불안하게 들렸다. 지금까지 다정하게 굴었던 것과 달리 묘하게 차가워진 말투와 굳은 표정도 이상했다. 아무리 사랑을 확인해도 남자는 나를 늘 불안하게 만든다.

“혹시 채원 언니한테 해코지할 건 아니죠?”

괜히 말을 돌리자 남자가 나를 잠깐 돌아봤다.

“원해?”

설마 고채원도 죽일 생각인 건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젓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갑자기 나를 찾아와 과거를 들쑤신 것은 원망스럽지만, 이제 더 얽히고 싶지 않았다. 괴로운 과거 따윈 더 이상 내게 중요하지 않다. 나는 이제 남자와 사랑만 하고 싶다. 그의 그늘 아래에서 안전하게, 행복하게. 남자가 누군가를 죽이는 것을 더 보고 싶지도 않고.

그때 남자가 차를 멈춰 세웠다.

길 한가운데가 아니었다. 새벽인 데다 산이라 사방이 어두워서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주변에 둥근 형태의 기와지붕이 여러 개 보였다. 산골 마을인 것 같았다.

남자가 차를 세운 곳은 다 쓰러져 가는 낡은 기와집 대문 앞이었다.

“내려.”

“……여기가 어딘데요?”

왠지 께름칙한 분위기였다. 폐가나 다름없는 집을 힐끔대자 남자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 그러곤 내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 주었다.

“현실로 돌아가야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갑자기 무슨…….”

“보여 줄 게 있어.”

그가 문을 활짝 열고 고갯짓을 했다. 겁은 났지만 일단 차에서 내렸다. 누구보다 나를 보호하는 데 가장 열심인 남자가 내게 해를 끼치진 않을 거다. 나는 남자의 팔을 끌어안고 몸을 한껏 밀착했다. 멀찍이서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여기가 어딘데요…….”

“내가 태어난 곳.”

“네?”

깜짝 놀라서 목소리가 크게 나왔다. 입을 합, 틀어막고 고개를 들자 남자가 툭 차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대문을 열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에 황폐한 마당이 보였다. 먼지와 모래로 뒤덮인 수돗가는 사용한 흔적이 전혀 없었고, 곳곳에 썩은 나뭇가지와 이파리가 뒹굴고 있었다.

얼떨떨한 와중에도 열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남자가 태어난 곳이다. 그에 대해서라면 뭐든 알고 싶으니 작은 것 하나 놓치기 싫었다.

그 사이 남자는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마루로 올라갔다. 그래도 되냐는 눈으로 바라보자 내 머리 위에 손바닥을 턱하니 올리며 피식 웃었다. 상관없다는 뜻이려니 하고 나도 그를 따랐다.

끼익, 끽, 뒤틀린 나무 바닥이 음산한 소리를 냈다. 사방이 고요해서 그런지 유난히 시끄러워 최대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뗐다.

남자가 향한 곳은 마루의 오른쪽에 있는 문 앞이었다. 그 앞에서 그가 잠깐 나를 돌아봤다.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바라보는 눈빛 역시 주변 공기만큼 고요했다.

왜 저렇게 보는 걸까?

나는 남자의 심중을 이해하기 위해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갈등하고 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문을 여는 것을 망설이고 있다. 왜? 방 안에 있는 것을 내게 보여 주는 게 겁이 나서? 그 안에 뭐가 있기에.

“그냥 가요, 우리.”

남자에 대해선 전부 알고 싶지만, 내 앞에서 저런 표정을 짓게 만드는 거라면 몰라도 되지 않을까. 저렇게 후회하고, 절망하게 만드는 거라면.

“나…… 나 안 볼래.”

좀 더 솔직해지자면, 본능적으로 불안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남자가 저 문을 여는 순간, 정말 마지막이 될까 봐.

뒷걸음질을 치자 바닥이 요란하게 울려 댔다. 남자가 그런 내 손을 잡아당겼다. 단숨에 그의 품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는 고개를 젓는 내 얼굴을 감싸 쥐고 입을 맞추었다. 느리고 진득하게.

어떠한 미련이 남아 있는 사람처럼 끈질기게 혀를 옭아매던 남자가 발로 문을 걷어차는 소리가 들렸다. 질끈 눈을 감고 남자의 목을 끌어안았지만, 떨어져 나가는 그를 붙잡을 수는 없었다.

“가요. 네? 별장으로 돌아가요, 우리.”

남자의 뒤로 펼쳐진 방 안을 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애타게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코를 찌르는 고약한 냄새는 모르는 척하기 힘들었다. 인상을 찌푸리며 코와 입을 틀어막자 남자가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갔다.

허공만 바라본 채 덜덜 떨던 나는 무심코 그 안에서 남자가 아닌 누군가가 움직이는 기척을 느끼곤 깜짝 놀라 그대로 굳어 버렸다.

“으으…… 으…….”

잔뜩 갈라진 신음.

권지운과 봤던 좀비 영화에서나 들을 법한 괴기한 소리였다.

그때 탁, 하는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라이터가 켜지며 실루엣으로만 보이던 방 안이 조금 환해졌다. 금색 라이터를 든 남자는 방 한가운데에 서서 무심하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자의 발밑에서 끔찍한 신음은 계속해서 나고 있었다. 내 시선도 천천히 그를 따라 내려갔다.

“…….”

라이터 불빛만으로는 정확하게 보이지 않았으나, 해골처럼 비쩍 마른 노인이 몸을 뒤틀며 신음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도무지 상황 파악을 할 수가 없어서 입만 틀어막은 채 남자와 노인을 번갈아 보았다. 노인이 남자 쪽으로 몸을 가져다 대자 그는 마치 더러운 벌레라도 본 것처럼 혀를 차며 발을 뒤로 물렸다.

“친모야.”

“……네?”

그 말에 나는 더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스치듯 봐도 건강 상태가 매우 안 좋아 보이는 노인이 그의 친모라는 것도 충격이었지만, 제 어머니를 벌레처럼 대하는 남자의 태도가 당황스러웠다.

남자가 나를 돌아보더니 피식 웃었다.

“여기저기 몸 팔고 다니다 이 지경이 됐지.”

“그게 무슨…….”

“이해하기 쉽게 말해 줄까?”

남자가 자신을 가리켰다.

“창부 아들.”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당연히 아버지는 누군지 모르고, 출생 신고도 귀찮다는 이유로 안 했어.”

출생 신고가 되지 않았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남자에게 사정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혼자서 별의별 상상도 다 해 봤다. 그중에 비슷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직접 들으니 당황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병든 친모를 보여 주면서 이야기를 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당연히 이름 따위 짓지 않았으니 다들 나를 이 사람이 일하는 가게 이름으로 불렀어. 그게 싫어서 몇 번 난동을 부렸더니 가게에 들락거리던 깡패 새끼 하나가 나를 조직에 데려갔는데, 흘러가는 대로 살다 보니 여기야.”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단 몇 줄로 끝냈다.

절망스러웠다.

“굳이 너를 여기 데려와서 이 꼴을 보여 준 이유가 뭐겠어.”

남자의 과거가 충격적이어서가 아니다.

“멀쩡한 놈 만나.”

저렇게 자존심 상한 얼굴로 제 치부를 다 보여 주면서까지 진심으로 나를 밀어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권지운 같은 놈을 만나야 떳떳하게 살지.”

“그렇게…… 말하지 마요.”

“권지운이 정 성에 안 차면 다른 놈 찾아봐. 뒷조사는 오빠가 해 줄게.”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으…….”

목소리가 커지자 노인이 고통스러운 소리를 냈다. 그가 혀를 차며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친모에게 일말의 감정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정말로 나를 밀어내기 위한 수단으로만 이용하기 위해 찾아온 거다.

무심하게 방을 나온 그가 도로 문을 닫았다.

“가자. 데려다줄게.”

태연하게 내미는 남자의 손을 거칠게 쳐 냈다.

“뭐 하자는 거예요.”

“내가 어렵게 말했어?”

“그러는 내 말은 어려웠어요? 상관없다고 했잖아.”

그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때렸다. 퍽퍽, 원망을 한가득 담았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다고 분명히 말했잖아!”

남자는 미동도 없이 서서 내 주먹질을 받기만 했다.

“사랑해 주기만 하면 된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이래요! 왜 또 나를 밀어내!”

“왜냐고?”

그가 피식 웃었다.

“사랑하니까.”

그러곤 처음으로 그 말을 했다. 결코 마냥 기뻐할 수 없는 이 상황에.

내가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인데, 그걸 하필 지금 하는 이유는 뻔했다.

“주제도 모르고 널 사랑해.”

남자가 나를 스쳐 갔다. 허름한 마당을 가로지르는 그의 뒷모습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아, 다급히 뛰어가 남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쉴 새 없이 구르며 내 얼굴을 살피는 눈동자는 남자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사랑은 그런 놈한테 물어야지.”

본인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 그럼 됐어요. 난 그걸로 충분…….”

남자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익숙하게 라이터를 켜 불을 붙인 그가 마당 구석으로 라이터를 집어 던졌다. 한때는 내 손에 들어와 있었던 그것을 버렸다. 더 이상 미련 따윈 없다는 듯이.

“밑바닥 이만큼 보여 줬으면 이제 그만해.”

“…….”

“오빠 자존심 많이 상했어.”

나는 원망스럽게 그를 바라보다 다급히 라이터가 버려진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찾기 위해 애썼다. 버려진 건 라이터인데, 꼭 내가 그런 기분이 들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나뒹구는 쓰레기 따위를 손으로 파헤치는데 돌연 몸이 번쩍 들렸다. 남자가 나를 제 품에 안아 올린 것이다.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는 내 얼굴을 본 그가 긴 한숨을 뱉었다. 하얀 담배 연기가 함께 뿜어져 나왔다. 남자는 기침하는 나를 안고 마당을 빠져나갔다.

“내려……! 내려요!”

“늦었어. 가자.”

“저걸 왜 버려……. 왜……!”

“오래됐으니까.”

그가 나를 조수석에 앉히곤 손으로 문 위를 짚었다.

“오래된 건 버려야지.”

나는 울면서 남자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나…… 나는 버리지 마요…….”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널 버리는 게 아니라 날 버리는 건데.”

“…….”

“이러다 정말 평생 골방에서 단둘이 있고 싶어질 거 같거든.”

난 그래도 상관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나도 그랬다고, 그러니까 우리 그러자고 말하고 싶었는데, 남자가 내 말을 막으려는 듯 입을 맞춰 와 강제로 목소리가 삼켜졌다.

남자의 혀를 받으며 어렴풋이 예감했다.

정말로 이게 우리의 마지막 키스가 될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예감.

남자는 차 안에서 목 놓아 우는 나를 기어이 집에 들여보냈다.

그 단호한 태도에 더욱 절망했다.

모든 게 거짓말 같았다. 남자와 방 안에서 보낸 시간이 백일몽처럼 느껴졌고,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건 내가 만들어 낸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차라리 이민후의 일에 가담하지 말걸. 그랬으면 남자가 치부를 보이면서까지 나를 밀어내진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 없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나 모든 일은 벌어진 후였고, 나는 버림받았다. 남자는 내게서 자신을 버린 거라는 궤변을 늘어놓았지만, 아니다. 버려진 건 나고, 나를 버린 건 남자다. 그것만은 명확했다.

나는 당연히 갑작스러운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남자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는 만나 주지 않았다. TG건설 입구에서부터 직원들이 나를 막았다. 그런데도 물러나지 않자 조직원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나를 쫓아내다시피 내몰았다. 이민후에게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결국 포기하고 향한 곳은 남자의 집이었다.

[……서을이?]

무작정 초인종을 누르자 인터폰 너머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있다는 걸 잊을 만큼 나는 필사적이었다.

머지않아 대문이 열리며 어머니가 나왔다.

“엄마 보러 온 거니?”

어딘가 감격마저 깃든 목소리였다. 그 황당한 소리에 반응할 정신 따위 없었다. 나는 무작정 그녀를 지나쳐 대문으로 발을 들였다.

“잠깐만……! 사장님이 집엔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어머니가 내 팔을 붙잡았다. 거칠게 뿌리치자 난감한 얼굴로 내 앞을 가로막기까지 했다.

“정말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어. 나가서 이야기하자. 응?”

“엄마랑 할 이야기 있어서 온 거 아니야.”

차가운 대꾸에 어머니가 조금 당황한 얼굴을 했다.

“내가 엄마랑 무슨 할 말이 있겠어? 이 집 주인이랑 만나야 해. 이거 놔.”

“……우리 사장님을 알아?”

“놓으라고!”

“서을아.”

“제발 나 좀, 방해하지 마!”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엄마 때문에 내 인생 충분히 괴로웠거든? 이제야 좀 괜찮아졌어.”

“서을아…….”

“그런데 왜 또 방해해! 왜!”

애꿎은 화풀이인 걸 알면서도 봇물처럼 터진 감정을 막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엄마가 날 위해서 한 게 뭐가 있어. 내 눈앞에서 바람피운 거밖에 더 있어?”

“…….”

“그런 주제에 왜 또 내 앞을 막아! 왜!”

“…….”

“양심이 있으면 비켜……!”

문득 그녀나 나나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와 나는 자신의 사랑이 무엇보다 중요해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실소하며 걸음을 옮기려는데 순간 심장이 쿵, 떨어졌다.

마당 중앙에 만들어진 인공 연못과 분수대. 너무도 익숙한 그것을 멍청하게 바라보며 다가갔다. 여러 마리의 잉어가 연못 안을 헤엄치고 있었다. 기어이 다다른 곳은 분수대에 예전과 똑같이 놓여 있는 성수대 앞이었다. 갈무리되지 못한 감정이 가쁜 호흡으로 뱉어졌다.

“사장님은 늘 여기 서서 담배를 피우셔…….”

고여 있는 투명한 물을 내려다보는데 맞은편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하얀 대리석 분수대 뒤로 어머니가 보였다. 양심이 아주 없진 않은지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남자의 환영을.

여유롭게 헤엄치는 잉어를 구경하는 남자와 기도를 하는 척 그를 훔쳐보는 나.

나만 그때를 떠올리는 게 아니었다.

얼굴이 구겨졌다.

끼익─. 그때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장님…….”

어머니가 당황한 목소리로 쫓아가도 나는 남자가 있었던 그 자리만 바라봤다.

“손님이 왔네.”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는데……. 죄송해요.”

“들어가 계세요.”

“예.”

어머니가 마당을 가로지르며 나를 돌아봤지만, 그쪽으론 눈길을 보내지 않았다.

저벅저벅, 다가오는 발소리에 심장이 조여졌다 풀어졌다. 어느새 환영이 사라지고 진짜 남자가 연못 앞에 나타났다. 거짓말처럼 시간이 되돌아간 것 같았다.

“나가.”

남자가 내게 건넨 첫마디는 그거였다. 낮게 가라앉은 차가운 말투에도 나는 못 박힌 듯 서서 그를 바라봤다.

“이러면서 어떻게…….”

“나가라는 말 안 들려?”

“이러면서 어떻게 나를 버려요. 어떻게 날…….”

흐릿해지는 눈가를 손등으로 닦아 냈다.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던 남자가 이내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는 라이터는 싸구려 일회용이었다.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라이터…… 내가 가지고 있었던 거 알았죠.”

“…….”

“일부러 내 방에 두고 간 거죠.”

고성하가 더럽힌 옷을 태우며 느꼈던 희열, 내 몸을 더듬는 손을 유일하게 떼어 놓을 수 있었던 불꽃. 그것 역시 남자가 준 것이었다. 저택에 발을 들인 그 순간부터 모든 게 다 그에게 얽매여 있었다.

울컥,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버리지 마요…….”

남자가 뱉은 연기가 구름처럼 허공에 흩어졌다. 순식간에 사라진 연기처럼 그도 없어질까 봐 겁이 났다.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사랑하는데 왜 버려요. 어떻게 버려……!”

기어이 울음이 터졌다.

“사랑하면 같이 있어야지, 가지 말라고 붙잡아야지, 그쪽이 아무리 스스로를 보잘것없게 여기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달라고 애원해야지!”

“…….”

“어떻게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날 버려요! 어떻게……!”

“…….”

“애초에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마음이었어요?”

“그런가 보지.”

“웃기지 마. 그럼 이건 다 뭔데.”

성수대를 가리켰다.

“이걸 볼 때마다 내 생각한 주제에, 거짓말 집어치워요.”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속이 타들어 갔다. 분명히 그의 마음이 전부 보이는데도 잡히지 않았다. 남자가 천천히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내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는 때였다.

“쓸데없는 짓은 여기까지 하고, 유학 준비나 다시 해.”

남자가 헤엄치는 잉어를 내려다보며 연못 안으로 손을 넣어 휘저었다.

“나 같은 놈한테 정신 팔려서 네 인생 허비하지 말라는 소리야.”

“…….”

“불장난은 장난으로 끝내야지. 현실을 봐, 애기야.”

“내 마음이…… 장난 같아요?”

“사랑은 좀 멀쩡한 놈이랑 해.”

그는 나를 보지 않은 채 말했다.

“내가 사랑하는 건 그쪽이에요.”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어.”

“제발…….”

“어떻게 버릴 수 있냐고?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데.”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널 욕심내는 게 가당키나 해?”

남자의 과거가 어떻든, 나는 그를 사랑할 수 있지만 그는 아니었다.

그것은 정도의 차이일까, 아니면 방식의 차이일까.

차라리 전자였으면 했다. 남자가 나를 사랑하는 정도가 얕아서, 고작 그 정도에 불과해서 욕심낼 마음이 없는 거였다면, 차라리 나는 받아들이기 쉬웠을지도 모른다.

“난 못 하겠는데.”

그러나 얕지 않다. 남자의 눈빛, 표정, 말투, 목소리 모든 게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서 더 가슴이 미어졌다.

“더는 찾아오지 마.”

남자의 사랑은 나를 밀어내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깊이 사랑할수록 그는 더더욱 나를 밀어낼 것이다.

“사랑해요.”

“…….”

내 사랑은 답을 받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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