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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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미친 듯이 일만 했다. 권지운이 시키기도 전에 먼저 나서서 업체 미팅을 나가고, 의뢰인들을 만나고, 늦은 시간까지 설계 공부를 했다.

그러나 잠깐의 여유조차 용납하지 않고 나를 몰아붙였음에도 남자는 그 어떤 작은 틈도 비집고 들어와 나를 괴롭혔다. 이를테면 성원 전원주택 단지의 착공식이 잡혔다는 소식이라든가, 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는 이민후와의 비즈니스 이야기 같은 것들에 전부 남자가 묻어 있었다.

“쉬어 가면서 해.”

늦은 시간까지 우리 사무소에는 불이 꺼지지 않았다. 당장 나흘 뒤에 잡힌 착공식에서 남자와 마주칠 생각에 착잡해 권지운의 말에 미처 대답하지 못했다.

아마 계약 때도 같이 있었던 남자는 착공식 역시 참석할 거다. 말이 이민후의 사택이지 사실은 남자의 집을 짓는 거나 다름없다. 당사자가 빠질 리 없지. 물론 나 역시 빠질 생각은 없었다. 남자 때문에 두 달 가까이 매진한 일을 애매하게 끝맺을 이유는 없으니까.

“서을아.”

뒤늦게 고개를 들자 권지운이 맞은편 책상에 턱을 괴고 있었다.

“그 사람 때문에 불편한 거면 넌 안 가도 돼.”

움찔, 날 선 신경이 그를 향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제가 왜 그래야 하는데요?”

날카로운 반응에 권지운이 아차 하는 얼굴을 했다.

“선배가 무슨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저 그 사람 불편할 이유 없어요.”

“미안해. 내가 실수했어.”

그의 잘못은 아니다. 파티 날, 난간에서 울고 있는 나를 가장 먼저 발견한 게 권지운이었으니까. 남자와 관련되어 있다는 걸 눈치챘을 텐데도 그는 이유를 묻지 않고 나를 달래 주었다.

그땐 배려가 고마웠는데, 뜬금없는 언급에서 남자와 내 관계를 의식하는 게 여실히 드러나 불쾌하기까지 했다. 관찰당하는 기분이었다.

관찰…….

문득 고채원의 밀회를 관찰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뿌린 만큼 거둔다는 건가. 그렇다면 할 말이 없다. 나는 애써 표정을 풀고 권지운에게 웃어 보였다.

“미안해요, 선배. 제가 예민했어요. 피곤해서 그런가 봐요.”

“요즘 너무 무리하는 거 같더라. 이제 그만하고 퇴근하자.”

뻔히 둘러대는 걸 알면서도 받아 주는 권지운의 다정한 성품이 고마우면서도 못내 미안했다. 덤덤하게 짐을 챙기는 그를 흘끔대다 넌지시 말을 걸었다.

“혹시 오늘 시간 되면 간단하게 맥주 한잔할 수 있어요?”

백팩을 메려던 그가 짐짓 놀란 얼굴을 했다. 내가 먼저 그에게 약속을 청하는 일이 거의 없으니 그럴 만한 반응이었다. 딱딱한 분위기도 풀고, 할 이야기도 있었다.

그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

사무소 근처에 있는 펍에 마주 보고 앉아 술을 주문할 때까지 이렇다 할 대화는 주고받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내 우리 앞에 맥주잔이 하나씩 놓이고 나서야 가볍게 잔을 부딪혔다.

“할 말이 있어요.”

나는 잠깐 망설이다 본론을 꺼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귀에 익은 팝송을 따라 흥얼거리던 권지운이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학…… 가려고 해요.”

“…….”

“막상 일해 보니까 아직 부족한 게 많더라고요.”

권지운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아주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닌 듯했다. 처음 내게 같이 일하자고 제안했을 때, 언제든 다시 공부하고 싶다면 가도 좋다고 말했었고, 최근 다시 공부를 시작한 내게 이것저것 알려 주기도 했으니까.

“선배랑 일하는 거 즐겁고, 배울 것도 많은데 좀 더 공부해 보고 싶어요.”

“언제쯤?”

“당장은 아니고, 내년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아빠한테는 아직 말씀 안 드렸는데, 설득해야죠.”

“그럼 내가 첫 번째네?”

그가 옅게 웃으며 맥주를 마셨다.

둘이 하던 일을 혼자 할 수는 없으니 사람을 구해야 할 거다. 번거롭게 만들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맥주잔을 양손으로 쥔 채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는데 잔을 끝까지 비워 낸 권지운이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테이블에 양팔을 걸쳤다.

“난 또 당장 그만둔다는 줄 알고 긴장했네. 아직 반년 가까이 남았잖아. 한참 멀었는데 왜 벌써 떠날 것처럼 굴어.”

다행히 기분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 대단하다. 나라면 그러지 못할 텐데.

“너 이럴 때마다 되게 귀여운 거 알아?”

“네?”

“가만히 있으면 까칠해 보이는데, 눈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면 딴 사람 같아.”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사실 그래서 반했어.”

권지운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예전에 나한테 과제 물으러 왔을 때였는데……. 뭐였는지는 까먹었다. 너밖에 기억이 안 나서.”

“…….”

“평소에는 나한테 말 걸지 마세요, 이렇게 써 붙이고 다니는 애가 눈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면서 이것저것 묻는데 그게 너무 귀여운 거야.”

“무슨…….”

“이해가 안 가면 눈 살짝 찌푸리고 입술 삐죽거리다가 이해되면 눈 반짝거리고.”

“…….”

“그래서 얜 뭐지? 왜 이렇게 귀엽지? 싶었어.”

“그만해요…….”

영 듣기 민망해 고개가 절로 떨어졌다.

“그때부터 지켜보게 되고, 자꾸 생각나고, 뭐 그러다 보니까 좋아졌어.”

“…….”

“특별할 거 없지?”

권지운이 주문 벨을 눌러 맥주를 한 잔 더 주문했다. 그 틈에 나는 맥주를 홀짝이며 어색함을 숨겼다.

“다들 비슷해. 그냥 일상 속에서 이게 뭘까, 싶으면 그때부터 시작이야. 예전에 만난 사람들도 그랬고.”

“…….”

“좋아하는 게 뭐 별거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어서 물끄러미 바라보다, 방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쩌고 했던 말이 떠올라 시선을 피했다. 권지운이 내 속내를 알아차린 듯 웃어서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니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그가 하는 말에 움직이던 손가락이 멈췄다.

“뭘…… 요?”

“뭐긴. 내 마음.”

“…….”

잠깐 입을 다물었다. 권지운은 덤덤히 나를 마주볼 뿐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게, 되게 특별한 거 같아 보여도 사실 별거 없어. 처음에나 그렇지 시간이 지나면 휘둘리지도 않아.”

그가 무엇을 염두에 두고 말한 건지 모를 수가 없었다. 내 사랑을 달래 주려고 자신의 사랑을 가볍게 취급하는 것에서 되레 묵직하게 그의 마음이 전해졌다.

“선배는…… 좋은 사람이야.”

표정이 구겨졌다. 나도 느껴지는 걸 맞은편에 있는 권지운이 모를 리가 없었다.

권지운은 분명 좋은 사람, 좋은 남자인데 왜 나는 자꾸…….

“그 덕에 너랑 잤으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지만.”

남자의 목소리만 떠오를까.

“선배를 좋아하면 좋겠어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늦었어.”

기어이 눈가가 젖어 들었다.

뭘까, 하는 순간이 사랑의 시작이라는 권지운의 말이 맞다. 오래전 남자와 처음 마주친 그 순간부터 나는 그가 궁금했다. 남자가 나를 이용하려고 머리를 굴렸던 그 순간에 나는 시작된 것이다.

그러니 늦었다.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손쓸 수 없을 만큼 늦었어.

권지운이 내 눈가를 엄지로 부드럽게 쓸었다.

“더 늦기 전에 눈물 정도는 닦아 주고 싶어서.”

변명하듯 덧붙이는 그의 손을 밀어내지 못했다.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이 얼마나 괴로운 건지 이미 알아 버린 내게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내가 잠자코 있자 커다란 손바닥이 볼을 감싸 왔다.

“울지 마, 서을아. 괜찮아질 거야.”

권지운이 왜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냈는지 짐작이 되었다. 남자에게 상처받은 내가 도피하듯 떠날 생각을 했다는 걸 눈치챘으리라.

다른 방법이 없었다. 10년이 지났는데도 이러고 있는데, 정말로 남자를 잊으려면 20년쯤은 흘러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시간은 소용이 없다. 그러니 차선책은 물리적인 거리였다. 무식한 방법이지만, 뭐라도 동원해야 했다. 남자의 흔적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곳이라면 덜 괴로울까 싶어서.

“나 좋아하지 마요, 선배. 난 그럴 자격이 없어요.”

“너 울게 하는 사람도 자격은 없는 거 같은데.”

“…….”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니까. 마음이 가는 걸 어쩌겠어.”

얼핏 남자의 모습이 보였던 것도 같은데, 권지운의 손가락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며 환영을 지워 주었다.

착공식 당일,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섰다. 준비라고 해 봐야 남자와 마주쳐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연습이 전부였지만.

경직된 얼굴을 가볍게 두드리며 권지운의 차 조수석에 올라탔다. 행사가 끝나면 다시 사무소로 복귀해야 하기에 굳이 차 두 대를 끌고 갈 이유는 없었다.

도심을 벗어나 성원으로 빠지는 도로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권지운이 이것저것 말을 걸어왔다. 나는 그에게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심란한 마음을 다스렸다.

이민후의 개인적인 의뢰이기 때문에 규모가 큰 행사는 아니라고 했다. 이민후를 비롯해 사택에 거주할 직원 몇 명, 공사를 진행할 TG건설 인부 등이 참석해 간단한 고사를 지낸다고 들었다.

내비게이션이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렸다. 나는 초조하게 허벅지를 붙였다.

괜찮을 거야. 여차하면 권지운의 뒤에 숨으면 된다. 그가 내 사정을 대충 알고 있으니 이럴 땐 다행이었다.

안전벨트를 붙든 채 연신 허벅지를 붙였다 떼는 사이, 자동차가 매끄럽게 전원주택 부지 앞에 멈춰 섰다.

“도착했어.”

“…….”

공사가 시작되지 않아 휑한 부지에 하얀 컨테이너가 놓여 있었다. 고성하의 뒷마당에 있던 것과 똑같은 색상과 모양의 컨테이너가 마치 나를 놀리듯 덩그러니 자리해 있었다. 설계를 하면서 권지운과 종종 현장에 왔지만, 그땐 분명 휑하니 비어 있었는데.

일부러 이런 거면 정말 나쁜 새끼다. 속이 뒤틀려 입술을 짓이겨 무는데, 먼저 차에서 내린 권지운이 조수석으로 넘어와 문을 열어 주었다.

“다들 온 모양이네.”

그의 말마따나 컨테이너 주변으로 차 여러 대가 세워져 있었다. 그중에는 남자의 세단도 있었다. 권지운을 따라 컨테이너로 향하면서 새까맣게 선팅 된 창문을 남자인 양 노려보았다.

“오셨어요?”

휠체어에서는 벗어난 건지 목발을 짚고 있는 이민후가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의 주변으로 이민후의 비서, 처음 보는 직원들, 공사장 인부, 몇 번 본 적 있는 업체 사람들이 서 있었다. 나도 모르게 내부를 훑었다. 남자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아직 오지 않은 건가? 차는 뭐지?

“오실 분들은 다 오셨으니까 이제 준비해.”

이민후가 비서에게 지시를 내렸다. 비서와 직원들이 준비한 고사상을 컨테이너 밖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당연히 남자와 마주칠 거라고 생각해 긴장하고 있었는데, 막상 없으니 허탈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다 돕고 있는 권지운을 따라가려는데 이민후가 나를 막아섰다.

“설마 음식 나를 생각은 아니죠?”

“다들 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요.”

“가만히 계세요. 그게 도와주는 거니까.”

“…….”

묘하게 기분 나쁜 말투였다. 눈을 찌푸리고 바라보니 말투만큼이나 표정도 곱지 못했다. 평소 매너 있던 그의 태도와 확연히 달랐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맡긴 일 끝났으니 잘해 줄 필요 없다는 건가. 아니면…… 남자와 관련이 있나.

아니야. 지금 내가 예민해서 그렇게 느끼는 거겠지. 컨테이너를 본 순간부터 날 선 신경을 의식하며 이민후의 목발로 시선을 내렸다.

“가벼운 사고라더니 생각보다 크게 다치셨나 봐요.”

“그러게요. 걱정되세요?”

“뭐…… 어쨌든 저희 의뢰인이시니까.”

“그거 알아요?”

이민후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며 내 쪽으로 고개를 숙여 왔다.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피하려는 찰나, 그가 속삭였다.

“사실 대호에게 맞았어요.”

“……네?”

갑자기 튀어나오는 남자의 이름에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왜인지 궁금하지 않아요?”

이민후가 떠보듯이 물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간신히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두 분 일을…… 제가 궁금해해야 돼요?”

“기왕이면 모르는 걸 추천해 드려요.”

먼저 내게 남자에게 맞았다는 말을 꺼낸 주제에 그가 뻔뻔스럽게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에 나는 남자가 이민후의 다리를 이 지경으로 만든 이유가 비단 두 사람만의 일 때문이 아니라, 내가 끼어 있어서일지도 모른다는 직감을 했다. 그리고 이민후는 내가 그걸 알아차렸는지 가늠하고 있었다. 일부러 남자를 언급한 것이다.

아득, 이를 깨물었다.

“대표님은 제가 바보 같아 보이나 봐요.”

이민후가 흥미로운 콧소리를 냈다.

“그런데 안 궁금해요. 깡패 새끼 주먹질하는 이유가 왜 궁금하겠어요.”

거칠게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이러니 그 자식이 정신을 못 차리지.”

이민후가 이상한 소리를 했다. 음식을 나르다 막 안으로 들어오려던 권지운이 딱딱하게 굳은 내 표정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등 뒤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르는 척했다.

적어도 내 상식선에선, 이민후가 나 때문에 남자에게 맞을 일 따위는 없다. 만약 상식 밖의 일이라 해도 내가 알 바 아니다. 더 이상 남자를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큰 프로젝트를 하나 끝낸 기념으로 권지운과 나는 각각 여름휴가를 보내기로 했다. 고작 이틀뿐인 휴가지만 오랜만에 늦은 시간까지 푹 자고 일어났더니 기분이 썩 괜찮았다.

아버지는 TG건설과 진행하는 아파트 단지 공사 때문에 며칠째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많이 바쁜지 전화 대신에 메시지만 주고받았는데, 어제저녁에 여름휴가라고 보낸 것에 아직 답이 없는 걸 보면 확인하지 못한 것 같았다.

때가 되면 보겠지 싶어서 그러려니 하며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했다.

솔직히 썩 달가운 휴가는 아니다. 할 일이 사라지니 빈 공간에 잡념이 들어차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일단은 어떻게든 이 불쾌함을 털어내야겠다 싶어 이불을 걷었다. 청소라도 하자.

일주일에 두 번씩 가사도우미 아주머니가 방문하시기 때문에 지저분한 곳은 없지만, 깨끗해지는 것보다 뭐라도 하는 게 목적이었다.

마당으로 나가 먼지를 털어 내고, 커다란 대야에 세제를 풀었다. 햇살이 좋아서 이불 빨래를 하기엔 최적이었다. 최대한 머릿속을 비우기 위해 부단히 몸을 움직였다.

아버지 침실의 이불까지 끌어와서 발로 밟아 가며 빨래를 끝내고 볕이 잘 드는 곳에 널어 두고 나서야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와 청소기를 들었다. 둘이 사는 집이라 넓지 않은 단독 주택이지만 내 방과 아버지 방, 서재, 거실, 부엌 구석구석을 쏘다니느라 꽤 시간이 걸렸다.

장식품 곳곳의 먼지를 털어 내고, 화장실 청소까지 하고 나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딱히 배가 고프지 않아 간단하게 요기만 할 생각으로 냉장고 문을 열었다. 세척된 방울토마토가 접시에 담겨 있었다. 아마 도우미 아주머니가 준비해 둔 것 같았다.

식탁에 앉아 토마토 몇 개를 집어 먹으며 깨끗한 집 안을 둘러보았다.

“…….”

이젠 뭘 해야 하지.

남은 토마토 두 개를 한 번에 밀어 넣고 우물대는데, 도어 록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다. 퇴근을 하기엔 이른 시간이니 일하다 잠깐 들른 모양이었다.

마침 할 게 없었는데 다행이다 싶어 아버지를 맞기 위해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천천히 열리는 문 앞에서 반갑게 웃으려는 찰나였다.

“……서을아.”

순간적으로 사고가 정지했다.

“네가 왜 이 시간에…….”

나는 웃다 만 그대로 굳은 채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어머니를 바라봤다.

어머니의 얼굴이 당혹감에 물들었다. 하지만 나만 할까.

“지, 지금 회사에 있을 시간 아니니……?”

“왜…….”

“…….”

“엄마가 왜…….”

어머니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급히 몸을 뒤로 물렸다.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다. 익숙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내가 있는 걸 알고 당황한다. 문득 입 안에 감도는 토마토 향이 느껴졌다.

“서을아. 네 엄마, 많이 후회하고 있어. 지금은 남의 집 가사도우미로 일하면서 하루하루 먹고살아…….”

설마…….

“엄마 우리 집에서 일해?”

“…….”

“아빠가 그러라고 했어?”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입을 틀어막았다.

원래 일하던 가사도우미 아주머니는 나도 알고 있다. 분명히 지난달까지는 다른 분이었다. 만약 어머니를 그냥 집에 들였다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지만, 이번 달 내내 바빠서 미처 집을 신경 쓰지 못했다.

그 틈을 타서 아버지가 가사도우미라는 명분으로 어머니를 집에 들인 모양이었다. 내가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겠지. 실제로도 그랬고.

“그런 거 아니야, 서을아. 엄마가, 아빠한테 너무 미안해서, 뭐라도 해 주고 싶어서 집안일이라도…….”

“하…….”

“엄마 많이 미운 거 알아. 엄마가 다 잘못했어.”

기가 막혔다. 나는 우는 어머니를 차갑게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어. 가.”

“서을아. 우리 딸, 엄마가 많이 보고 싶었어.”

“거짓말하지 마.”

그녀를 외면하고 몸을 돌렸다. 쿵쿵, 거칠게 걸음을 옮기자 뒤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가슴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렇게 갑자기 마주치는 게 어디 있어.

아무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나타나서 보고 싶었네, 미안하네, 그런 말로 해결될 거라면 내가 이 긴 시간을 트라우마로 고생하지도 않았다.

“서을아……!”

“나가라고!”

“…….”

“아빠랑 다시 만나는 것까지는 나도 신경 안 써. 그런데 내 엄마 노릇까지 다시 할 생각은 하지 마.”

말을 하면서도 목구멍이 콱 조여들어 기침이 터졌다.

“나가기 싫으면 내가 나갈게.”

입을 틀어막고 걸음을 돌리자 어머니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내 팔을 붙잡으려는 듯 뻗었지만 차마 닿지 못한 손이 허공에 떨구어졌다.

“엄마가, 엄마가 미안해. 이제 안 올게. 미안해, 서을아. 여기 있어. 응?”

“…….”

“미안해.”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는 어머니의 모습에 미간이 구겨졌다.

오랜만에 마주친 얼굴이 내 기억과 너무 달랐다. 사랑에 빠져 행복하게 웃었던 사람이 지금은 양 볼이 홀쭉해져 있었다.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근심 가득한 얼굴. 세월이 만들어 낸 주름. 구부정한 자세.

“옷은 또 왜 그래……!”

어머니가 입고 있는 티셔츠 곳곳에 난 구멍을 보는 순간 가슴속에 불길이 확 번지는 것 같았다. 결국 나도 울음이 터져 버렸다.

“아빠가 빚 갚아 줬다며, 근데 옷이 왜 그래!”

“이건…….”

“빚은 갚아 주고 옷은 안 사 줬어? 사달라고 하지, 왜! 왜 그러고 살아!”

“…….”

“그렇게 우리 버리고 갔으면, 좀 잘 살기라도 하든가!”

내내 버티고 있던 것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사실은 계속 울고 싶었는데, 어머니의 모습이 트리거가 되어 나를 폭주시킨 것이다. 힘들게 사는 어머니가 안타까워서라기보다, 그렇게 이성을 잃을 만큼 지독했던 사랑의 말로를 두 눈으로 목도했기 때문이었다.

이기적인 내 생각을 전혀 모르는 어머니는 덩달아 울며 나를 끌어안았다.

“엄마가 잘못했어…….”

“왜…… 왜 그랬어.”

“미안해, 서을아.”

“왜…….”

어머니의 품에 안긴 채 어린애처럼 소리 내 울었다. 만약 그녀가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면, 차라리 지금보다는 기분이 나았을 것 같다.

한순간 불타오른 사랑은 시커먼 재만 남기고 사라진다. 그 전보다 더 보잘것없는 일상만 남는다. 홀로 구멍 난 옷을 입고 살아가는 어머니의 모습처럼.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은 남자가 보고 싶은 한심한 나처럼.

사랑은 정말 부질없는 감정이다.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는 아버지가 해 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와 이혼하자마자 주태강과 재혼을 해서 한동안은 꽤 행복하게 살았다고 했다.

그러나 주태강이 연이어 사업에 실패하면서 불행이 시작되었다. 경제 사정이 어려워져 여기저기서 대출을 받다 사채까지 써 빚이 한없이 불어나는 바람에 고생한 것도 모자라서, 돌연 주태강이 교통사고로 죽은 것이다.

상속 포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채업자들은 매일같이 어머니를 협박했고, 어떻게든 빚을 갚기 위해 일자리를 구하다 꽤 괜찮은 부잣집의 가사도우미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했다.

“그 집에서 네 아빠와 우연히 마주쳤어.”

“우연히?”

“네 아빠가 손님으로 왔더라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

왜 하필 마주쳐도 그렇게 마주친 거야. 그러니 아버지가 빚을 다 갚아 주었겠지.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도 무심하게 지나칠 만큼 냉정하지 못하다.

나는 소리 없는 한숨을 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데려다줄게. 같이 가.”

“혼자 가도 되는데…….”

“됐으니까 가.”

한바탕 울었고,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앙금이 쉽게 풀릴 리가 없다. 아마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처럼 어머니를 바라보는 일은 평생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나 역시 그녀를 혼자 돌려보낼 만큼 냉정하지 못했다. 아버지를 닮아서일 수도 있으나, 무엇보다 자신의 의지대로 사랑을 조절할 수 없다는 걸 몸소 배운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젊은 날의 그녀 역시 그랬으리라.

“이제 우리 집 오지 마.”

“…….”

“정 아빠한테 미안하면 내년에 와. 그땐 아빠 혼자 집에 있을 테니까.”

오랜 설득 끝에 유학 허락을 받았지만, 아무래도 아버지를 혼자 두고 가는 게 못내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혹시 어디 가는 거야?”

“그거까진 알 거 없잖아.”

“……그래.”

조수석에 올라타는 어머니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정면만 응시하며 시동을 켰다.

“위치가 어디야.”

불러 주는 대로 내비게이션에 입력을 했다. 차로 10분이면 가는 거리다. 이렇게 가까운 데 어머니가 살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착잡한 심정으로 핸들을 꺾었다.

음악도 틀지 않아 차 안엔 적막만 감돌았다. 묵묵히 운전을 하다 목적지 동네로 들어서면서 문득 생각나 물었다.

“그런데 엄마 일한다는 집 주인, 뭐 하는 사람이야. 아빠가 손님으로 갔다면 이쪽 일 하는 사람인가.”

창밖을 바라보던 어머니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그때였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내비게이션 음성이 순간 아득하게 멀게 들렸다. 멈춘 대문 앞에 떡하니 놓여 있는 검은 세단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TG건설. 이번에 네 아빠와 무슨 계약 맺었다던데.”

“…….”

“사장님 이름이 뭐랬더라.”

“……이민후?”

어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이 대표님도 자주 오시기는 하는데, 우리 사장님은 아니야. 내가 사장님 이름을 부를 일이 없으니 자꾸 까먹네. 두 글자였는데.”

하, 헛웃음이 뱉어졌다.

“대호…….”

“그래, 맞아. 너도 사장님 아는구나?”

“…….”

“정작 네 아빠가 오셨을 땐 사장님 말고 이 대표님만 있었지만. 종종 사장님 댁에서 미팅을 하곤 하거든.”

왜, 또 당신이 여기 있어. 왜 어머니 옆에.

심장이 불쾌하게 뛰기 시작했다. 도대체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나…… 잠깐 갈 데가 있어.”

“아, 그래. 엄마 내릴게. 고마워. 화 풀리면 언제든지 연락 줘, 서을아.”

“……들어가세요.”

어머니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핸들을 꺾었다.

“이러니 그 자식이 정신을 못 차리지.”

이민후가 말하는 것이 남자라는 것은 듣자마자 알았다. 다만 정신을 못 차린다는 말은 이해하지 못했다.

단순하게 들으면 남자도 나처럼 힘들어한다는 것 같았지만, 그럴 이유가 없지 않나. 끝까지 그를 믿고 싶었던 내게 차가운 말을 한 건 남자였는데, 나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릴 리가 없으니까. 만약 그렇다면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잖아.

어머니가 남자의 집에서 일을 하는 건 순전히 우연일 수도 있다. 어머니가 그를 알 리는 없으니 우연히 그 집에서 일하게 되었을 수 있다.

하지만 남자도 몰랐을까.

“뒷조사했다는 말이야.”

내 뒷조사를 한 사람이 내 어머니가 누구인지 정말 몰랐을까.

물론 그의 말마따나 알고도 귀찮아서 그냥 어머니를 들였을 수도 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게 맞을 텐데 본능이 그 논리를 거부했다. 어딘가 께름칙하다.

“이렇게 당하고도 아직 모르네.”

“이러니 그 자식이 정신을 못 차리지.”

도대체 당신은 어느 쪽이야.

거칠게 차를 몰아 도착한 곳은 TG건설 본사였다. 약속 없이 무작정 찾아왔으니 대표실이 비어 있다 한들 기다릴 생각이었다.

“아, 또 오셨네요.”

로비 직원이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더니 아무 의심 없이 대표실로 보냈다. 이민후가 있다는 설명과 함께.

내가 올 줄 알았던 건가. 아니면 내가 이민후의 비즈니스 상대이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만나서 물어볼 수만 있으면 된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초조한 눈으로 바뀌는 층수를 노려보다 문이 열리자마자 튀어 나갔다. 비서 역시 별다른 말 없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상에 앉아 서류를 넘기던 이민후가 고개를 들었다. 대표실엔 그밖에 없었다. 대충 예상했다. 남자의 세단은 집 앞에 세워져 있었으니 집에 있으리라.

“어서 와요, 서을 씨.”

이민후가 전혀 놀라지 않은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올 줄 알고 계셨나 봐요.”

“대호 밑에서 일하는 애들은 내 밑에 있기도 해서. 대호랑 나, 동업하잖아요. 애들한테 들었어요. 서을 씨 여기 오는 중이라고. 어머니는 잘 모셔다드렸어요?”

“……그걸 어떻게 아시죠?”

“아, 그 자식이 서을 씨 뒤에 사람 붙인 거 말 안 했나.”

“…….”

“오빠가 늘 지켜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장난처럼 하는 말이라 진짜 사람을 붙였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뒷조사만 했을 거라고 생각했지.

앉으라는 듯 소파로 손짓하는 이민후를 무시하고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 사람이 이 대표님 그렇게 만든 이유가 뭐예요.”

이민후가 제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아닌 척하더니 역시 궁금했나 봐요.”

“이 대표님이 맞은 이유가 저랑 무슨 관련이 있는 건데요.”

“뭐, 이건 내가 맞을 짓 했지.”

“…….”

“내가 서을 씨한테 양아치 새끼 보냈거든요.”

“……뭐라고요?”

놀라는 내게 그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서을 씨가 생각하는 그놈 맞아요. 대호가 한강에 담가 버린 놈.”

“왜…… 왜 이 대표님이…….”

“나도 같이 한강에 던져질 뻔했는데, 그간 쌓인 정을 봐서 이 정도로 넘어갔죠. 대호랑 나 20년이거든요.”

“왜 절…….”

이민후가 서류를 내려놓았다.

“거슬리기도 하고, 겸사겸사 시험도 해 볼 겸.”

이민후의 눈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나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거슬린다는 말은 뭐고, 시험은 또 무슨 소리야.

그가 하는 말이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직도 정신 나간 개새끼처럼 제 주인을 물 정도인지, 아니면 적당히 놀다 버려도 되는 수준인지. 시간이 꽤 많이 흘렀잖아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사람 마음이 어떻게 변했을지는 아무도 모르죠.”

쯧,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찬 이민후가 깁스한 다리로 책상을 툭툭 찼다.

“보다시피 동업자 다리를 분지를 만큼 바뀐 게 하나도 없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알아듣게 설명해요.”

“눈치 빠른 줄 알았는데, 내 말이 어렵나요?”

“…….”

어금니를 콱 깨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그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싶어서 나를 강, 강간하라고 했다는 거예요?”

“워낙 제 속내를 말하지 않는 놈이라 어쩔 수 없었어요. 이렇게라도 해야지.”

“하…….”

“거친 방법을 쓴 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그래도 별짓 못 한 거로 아는데.”

이민후가 내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단정하다고 생각했던 그의 인상이 단숨에 삼류 양아치로 변질되었다. 남자의 20년 지기 동업자. 단순히 TG건설을 공유하는 것을 넘어서, 남자와 뿌리를 함께하는 존재. 그도 남자와 다를 게 없는 깡패 새끼라는 말이다.

이민후가 명패를 가리켰다.

“이거 그냥 얻은 거 아니에요. 알죠? 우리 같은 놈들이 무슨 힘으로 여기까지 왔겠어요.”

“정치인 등에 빨대 꽂아서 성공했겠죠.”

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본 없는 놈들이라 하루하루 위태로운 판국에 이 자식이 웬 어린애 하나 때문에 자꾸 일을 키우더라고요.”

“…….”

“말하자면 긴데, 거기까지 가면 진짜 한강 물 먹을 것 같으니까 차치하고. 결론은 이거예요.”

책상 위를 가볍게 두드리던 이민후의 손가락이 나를 향했다.

“대호 녀석의 유일한 약점.”

“…….”

“그 무심한 새끼가 유일하게 집착하는…….”

그가 잠깐 단어를 생각하듯 입 안으로 혀를 굴렸다.

“애기?”

“…….”

“애기라기엔 꽤 섹시하지만, 아무튼.”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이민후의 말이 머릿속에 제대로 입력되지 않았다.

그때, 쾅! 하고 대표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움찔, 놀라서 돌아보자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새 눈물이 맺혔는지 시야가 흐릿해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책상 앞까지 다가온 남자가 단숨에 이민후의 뒤통수를 눌러 책상에 얼굴을 세게 처박았다.

“자꾸 이렇게 개인플레이 하면 섭섭해, 이 대표.”

“애들한테 들어서 알겠지만, 서을 씨가 직접 찾아온 거야. 온 사람을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잖아.”

남자의 손등에 힘줄이 돋아났다.

“애 놀란 거 안 보여?”

“너 때문에 놀란 거겠지.”

이민후가 남자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고개를 들었다. 이마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오해하지 마. 네 의사 충분히 반영해서 나도 서을 씨 같이 보호하겠다는 의미로 말해 준 거니까.”

“보호……? 뭘, 보호해요?”

눈가를 닦아내고 가까스로 입을 열었지만, 남자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커다란 등이 시야에 가득 찼다.

“숨겨 봤자 모르고 당하기밖에 더해? 알고 있어야 예방을 하지.”

“왜 자꾸 선을 넘어.”

“선은 네가 먼저 넘었잖아. 기억 안 나? 너 때문에 우리 좆 될 뻔한 거. 이번에도 그렇게 둘 거 같아?”

“민후야, 입 다물어.”

“넌 여민당이 그렇게 만만해 보이냐?”

갑자기 튀어나오는 단어에 나도 모르게 남자의 옷자락을 잡았다. 여민당이라면 한때 고성하가 속했던, 현 야당이다.

내가 붙잡은 걸 알아차렸는지 남자가 나를 돌아봤다. 무심하게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내 표정을 살피듯 천천히 굴러갔다.

“이 대표 혼자 있었으면 지금쯤 저세상 갔을 텐데, 아쉽네.”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귀엽게 굴지 마. 그간의 정도 잊고 죽여 버리고 싶으니까.”

그가 험악하게 말하며 나를 품에 안아 들었다. 걸음을 옮기는 남자의 어깨 너머로 이민후가 그것 보라는 듯 남자의 뒤통수와 나를 번갈아 가리켰다.

“대통령도 못 믿어. 여차하면 꼬리 자르고 우리만 골로 보낼 수도 있어. 정치하는 놈들 한두 번 겪냐. 그럴 일 없게…….”

“입 다물고, 나중에 이야기해.”

쾅, 그가 문을 걷어차자 비서가 잔뜩 겁먹은 얼굴로 문을 열었다.

혼이 나간 채 간신히 눈을 들었다. 남자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는 내 앞에서 대부분 웃기만 했었다.

남자는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엘리베이터에 들어갔다. 내려가는 층수만 응시하는 그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떨리는 손으로 남자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 대표가 한 말…….”

그제야 고개가 돌아오려는 찰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다시 정면으로 돌아간 남자의 눈앞에 세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번처럼 부하에게 운전을 맡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차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수석에 나를 앉힌 남자가 운전석에 올라타더니 잠깐 한숨을 뱉었다. 뭔가를 참아 내는 것 같았다.

“…….”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양손만 맞잡은 채로 굳어 있는 내게 남자가 대뜸 상체를 기울여 왔다. 갑자기 가까워진 거리에도 피할 생각을 못 했다. 지금 나는 어딘가 나사 하나가 풀린 것 같았다.

남자의 얼굴이 코앞에서 멈추더니 이내 안전벨트가 대각선으로 몸을 가로질렀다.

“뭘 그렇게 봐? 키스라도 해 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장난스럽게 말하며 몸을 물리는 남자의 넥타이를 움켜쥔 건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가 애매한 위치에서 멈춰 나를 내려다보았다.

“얘 봐라.”

“…….”

“한번 맛들이니까 정신을 못 차리네.”

그가 기꺼이 해 주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여 왔다. 그러나 입술이 닿기 전에 내 입이 먼저 열렸다.

“엄마가…… 왜 그쪽 집에 있어요.”

그래. 일단 이것부터.

“아, 애기네 엄마야? 그 파렴치한?”

“모르는 척하지 마요.”

“글쎄, 관리인은 밑에 애들이 알아서 채용하는 거라.”

“혹시…….”

말을 제대로 잇기도 전에 남자가 입을 맞춰 왔다.

“물어, 볼 게 많, 잠깐…….”

밀어내도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입술을 가져다 댔다. 뚝뚝 말을 멈추는 내가 재밌는지 입꼬리를 올리기도 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마치 연인 사이에서나 주고받을 법한 장난스러운 입맞춤이었다.

배 안이 배배 꼬이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에 간신히 고개를 숙여 피했다.

“아직 혀는 빨지도 못했어.”

남자의 고개가 나를 쫓아왔다.

내 혼을 빼놓으려는 작정이라면 잘못된 선택이다. 오히려 그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이민후가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더 선명해졌다.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내가…… 그쪽 약점이에요?”

남자의 미간이 꿈틀댔다.

“이 대표가 날 그쪽 약점이라고 말했어요.”

“헛소리야. 흘려들어.”

“일을 키웠다고 했어. 그거…… 고성하 이야기 맞죠.”

“일을 왜 이렇게 크게 벌인 거야.”

“애초에 방해되지 않게 제거하라고 한 건 그쪽 아닌가. 난 죽여 달라는 건 줄 알았는데.”

“왜 순진하게 굴어? 이렇게 되면 누구보다 먼저 의심받는 게 우린 거 몰라? 벌써 말 나오고 있다고.”

고성하의 장례식 날, 산책로에서 남자가 핸드폰을 넘겼을 때가 떠올랐다. 당시에는 흘려들었던 대화가 이민후가 한 말과 합쳐지며 막연한 확신을 낳았다.

고성하를 죽이는 것은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돌발 행동은…….

“죽이고 싶지 않아? 나라면 그럴 거 같은데.”

“정말로 나 때문에…… 고성하를 죽인 거예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을 때 남자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보지 못했다. 그가 다짜고짜 혀를 섞어 왔기 때문이었다.

“잠…….”

그는 마치 대답을 회피하려는 듯 내 혀를 세차게 옭아맸다.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칠수록 집요하게 고개를 내리눌렀다. 탁, 안전벨트가 풀리더니 돌연 몸이 뒤로 젖혀졌다. 남자가 시트를 눕힌 탓이었다. 완전히 누워 버린 내 위로 거대한 몸체가 드리웠다.

“우읍, 흣……!”

무게를 온전히 내게로 쏟은 남자를 밀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깨를 때리고, 꼬집고, 가슴팍을 밀어도 남자는 꼼짝하지 않고 입 안 더 깊은 곳까지 침투했다. 배가 비비 꼬이는 것은 단순한 구토감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한번 맛본 그것을 몸이 멋대로 떠올리고 있었다.

순간 시트를 짚고 있던 남자의 손이 올라와 가슴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읏……!”

서둘러 손을 붙잡았다. 두 손으로 잡아도 부족한 커다란 손은 내 저항을 가볍게 무시하고 거칠게 움직였다. 묵직한 살덩어리를 쥐어 비트는 바람에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졌다.

눈을 질끈 감고 그의 손등으로 손톱을 박아 넣다가, 무릎을 차올렸다. 단단한 남자의 사타구니를 정확히 조준한 행동이었다.

그제야 남자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온 힘을 다해 찼는데도 전혀 아파하는 기색이 없었다. 간신히 숨을 몰아 내쉬며 노려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그렇게만 해.”

“하, 하아…….”

여전히 가슴 위에 놓인 남자의 손을 밀어냈다. 손톱을 깊게 찔러 넣어 피가 맺혔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는 남자와 간신히 눈을 마주쳤다.

“묻는 말에 대답해요.”

“이상하게 애기랑 있으면 이런 데서 발정이 나네. 배, 자동차.”

“나 때문에 고성하를 죽인 거냐고 물었어요.”

“이런 데서 떡 치는 취미는 없는데.”

짝!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남자의 뺨을 내리쳤다.

남자는 동요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그를 흔들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남자는 언제나 내 머리 위에 있는 것처럼 굴었으니까.

그러니 지금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지.

“혹시 날…… 사랑해요?”

내 입으로 말하고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 숨이 턱하니 삼켜졌다. 호흡을 멈추자 순간 모든 소리가 사라진 것처럼 조용해졌다. 그 말은, 그 역시 고요하다는 것이었다.

숨 막히는 정적이었다.

남자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읽을 수가 없어서 가슴이 답답했다. 어쩌면 숨을 쉬지 않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잠자코 있던 남자가 대뜸 내 입 안으로 엄지를 밀어 넣었다.

“숨 쉬어.”

그 말에 숨이 탁, 하고 뱉어졌다.

남자의 엄지가 혀를 지그시 눌렀다. 입 안을 유린하는 엄지가 점막 곳곳을 야릇하게 훑었다. 마치 손가락에게 키스를 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고인 침이 흐를까 봐 꿀꺽 삼키자 입 안이 좁아지며 그의 엄지를 조였다.

“빠는 것도 잘하겠네. 해 볼래?”

그가 엄지를 빼내 젖은 마디를 제 혀로 핥았다.

나는 애타게 남자의 셔츠를 움켜쥐었다.

“날 사랑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들을 죽이고…… 이 대표도 저 지경으로 만든 거야?”

“넌 대체 날 뭐로 보는 거야.”

“대답해요.”

“아직도 내가 그렇게 착해 보여?”

남자가 내 손을 떼어 냈다.

“안 사랑해.”

단호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전혀 믿기지 않았다.

“내가 왜 널 사랑해?”

“…….”

“어설픈 착각 그만두고 좆이나 빨아 봐.”

또다. 또 행동과 표정과 말이 전부 다르다. 더러운 말을 하는 주제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나를 가늠하듯 바라본다. 내가 자신의 말에 속아 넘어갔는지 살피듯이.

이내 내가 믿지 않는 걸 알아차렸는지 그가 설핏 눈가를 찌푸렸다.

“애기야.”

“…….”

“열심히 뒤 캐 보니까 권지운 멀쩡한 놈이더라.”

“…….”

“신분 확실하고, 부모 멀쩡하고, 집안 부유하고, 죄지은 것도 없어. 특히 여자관계가 깔끔해. 연애 몇 번이 전부고, 지금은 너 말고 주변에 따로 만나는 여자 없어.”

“……그래서요?”

마치 주선을 하듯 권지운의 장점을 늘어놓는 남자를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사랑은 그런 놈한테 물어야지.”

“…….”

“정신 차려.”

떨리는 손으로 다시 그의 셔츠를 잡았다.

“정말 나를…….”

그러나 거기까지.

“아기자기한 건 권지운이랑 해.”

냉정한 대꾸에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만약 내가 또 한번 나를 사랑하냐고 물으면 곧바로 멀어질 것처럼 남자가 천천히 상체를 세웠다. 셔츠가 점점 손아귀를 벗어났다.

“안 돼…….”

설명할 수 없는 조급함에 양손을 뻗어 그의 옷깃을 붙잡고 고개를 들었다. 순식간에 거리가 가까워지며 입술이 맞닿자, 그 사이로 남자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똑똑하네.”

남자의 뜨거운 혀가 위, 아랫입술을 차례로 핥았다.

“그래. 이 정도는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어.”

“…….”

“입 벌려.”

꽈악, 손에 힘을 주고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가 파고들었다.

이 정도. 조금도 마음을 나누지 않고 몸만 섞는 이 정도.

남자의 손이 티셔츠를 점점 끌어 올렸다. 느릿느릿 배와 허리를 문지르는 뜨거운 손길은 분명한 욕정이 담겨 있음에도 이상하게 불쾌하지 않았다.

“고성하는 네가 원하지 않았고, 나는 네가 원하잖아.”

그의 전부 말이 맞다. 고성하와 사내 그리고 까마득한 기억 속의 주태강까지. 그들의 손은 구역질을 할 만큼 끔찍했으나, 남자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 배에서도 그를 끝까지 밀어내지 못했다. 남자의 품에 안기는 게 괴로웠지만, 괴롭지 않았다. 역하지만, 역하지 않았다.

내가 그를 원하기 때문에.

어느새 티셔츠는 가슴 위까지 올라가 있었다. 남자가 혀 대신 티셔츠 밑단을 내 입에 물렸다.

“흡…….”

천을 입에 문 채 올려다보자 그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브래지어 호크를 풀었다. 압박을 벗어난 살덩어리가 제멋대로 흐트러지며 남자의 눈앞에 여실히 드러났다.

“제대로 보니까 더 예쁘네.”

그가 가벼운 감상을 뱉으며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뜨거운 숨결이 살 위에 뿌려졌다가, 이내 축축한 혀가 유두를 튕기듯 핥아 올렸다.

“읏!”

남자가 내 가슴을 빨기 시작했다. 단단하게 세워진 유두가 그의 혀에 사정없이 짓눌렸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가슴과 아랫배에 따로 연결된 신경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혀를 움직일 때마다 배 안이 조여들었다. 아래를 건드리는 것과 달리 미약한 자극이라 오히려 더 견디기 힘들었다.

“그만…… 이상해.”

티셔츠를 뱉어 내고 울먹이자 유두를 입에 머금은 채로 남자가 눈을 치켜떴다. 마주친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흥분한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더듬더듬 손을 들어 얼굴을 붙잡자 혀를 떼어 내고 좀 더 높아진 시선에서 나를 내려다본다.

“한강에서 다시 꺼내서 눈을 파 버릴까.”

심드렁한 말투였지만 눈매는 사나웠다. 남자가 무엇을 떠올리는지 쉽게 짐작이 되었다. 사내에게 깔려 눕혀졌던 그날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내 모습이 그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았다.

나 역시 내 위로 드리운 그림자에 잠깐 그때를 떠올렸으나, 느끼는 감정은 달랐다. 공포와 역겨움은커녕 되레 남자의 밑에 깔려 있는 것이 이상하리만치 안전하게 느껴졌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하다못해 그와 처음으로 몸을 섞었을 때도 나는 육체적인 쾌락과는 별개로 구역질을 감내해야 했는데 말이다.

이건 상대가 당신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당신의 진심을 봤기 때문일까.

둘 다인가.

멍하니 남자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자, 그의 미간이 더 깊게 파였다. 손가락으로 더듬더듬 남자의 미간을 만지며 가만히 눈을 마주쳤다.

“화났어요……?”

그가 한숨 쉬듯 웃으며 다시 가슴을 빨기 시작했다. 한쪽은 입술이, 다른 한쪽은 손이 쉴 새 없이 농락했다.

다리 사이로 애액이 흐르고, 첫 침입을 기억하는 질구가 움찔거렸다. 배 안이 파도 치듯 울렁였다. 이게 구토감인지, 성감인지, 설렘인지 명확하게 구분이 되지 않았다. 아마 세 가지 모두가 뒤섞여 요동치는 것이리라.

울렁대는 속과 함께 몸도 연신 들썩였다.

“흐으, 응…….”

“섹스가 더럽다고 한 게 누구였는지 모르겠네.”

남자가 내 다리를 접어 올렸다. 허공으로 들린 다리가 그의 양어깨 위로 떨어졌다. 허리가 둥글게 말리며 남자의 가슴팍에 허벅지 뒤쪽이 닿았다.

갑자기 몸이 접혀 당황했지만, 그보다는 내 속을 들끓게 하는 이걸 진정시키는 게 먼저였다. 그가 시키지 않아도 손수 티셔츠를 입에 물기 위해 양손으로 쥐었다. 구역질이 올라오면 참기 위해서였다.

그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웃었다.

“왜 갑자기 딴사람이 됐어.”

내가 반항하지 않는 게 흥미롭다는 얼굴이었다. 나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는 것처럼 굴면서, 왜 이런 건 간과할까.

“그쪽이 나를…….”

사랑하는 것 같아서. 그 사실을 깨달았다는 게 나에게 얼마나 큰 사건인지, 그것까진 왜 생각하지 못해?

그가 또 멀어질까 봐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지만, 남자는 알아들은 눈치였다.

“하.”

짧게 실소한 남자가 거친 손길로 바지와 팬티를 한 번에 잡아 벗겨 냈다. 몸이 말려 있어 허벅지 뒤 애매한 곳까지만 벗겨졌다.

예고 없이 손가락이 질구를 파고들었다. 이미 애액이 흐를 만큼 젖어 있어 아프지는 않았지만 조금 놀라 급히 옷을 물었다.

“으응……. 응, 읏…….”

푹, 손가락이 들어올 때마다 허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양다리가 번쩍 들려 버티기 힘든 와중에 자꾸만 애가 탔다. 남자의 손가락이 끝까지 밀려들어도 아프다기보다 더 크고 긴 것을 원하기까지 했다.

그런 내 속을 또 쉽게 읽어 냈는지 손가락 두 개가 한꺼번에 들어왔다. 한 개보다 빠듯하지만 역시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찌걱찌걱, 그의 손가락에 액이 뒤섞이며 야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여전히 배 안에선 거친 파도가 치고 있었다.

“우웁, 흐, 으으응……!”

손가락 두 개가 완전히 삼켜진 상태에서 그가 엄지로 음핵을 건드렸다. 저절로 눈이 감기고 고개가 세차게 저어졌다. 연신 질구에서 액이 터져 나왔다.

돌연 남자의 손이 멈췄다.

“흐…….”

겨우 눈을 뜨자 지그시 내려다보는 잿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안 사랑해.”

남자가 내 입에서 옷을 거칠게 빼냈다.

“알겠다고 대답하면 더 쑤셔 줄게.”

그가 이상한 제안을 해 왔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에 수긍하면 쾌감을 선사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제안.

나는 조그맣게 항변했다.

“나를 위해서…… 고성하를 죽였으면서.”

손가락을 물고 있는 구멍이 움찔댔다. 가만히 들어차 있는 것보다 반복해서 쑤셔 가며 자극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엉덩이를 움직여 손가락을 빼내려고 했지만, 그는 쉽게 내 안에서 나가지 않았다. 질벽이 연신 손가락을 조였다.

“난 너 안 사랑해.”

“아, 아…….”

쑤욱, 한순간에 남자가 손가락을 뺐다. 벌어진 구멍이 뻐끔대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순식간에 공허해진 몸은 차라리 그가 가득 채워 주고 있는 게 훨씬 나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내 양 무릎 뒤를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허리가 더 말리며 어설프게 벗겨진 바지 아래 젖은 음부가 그에게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너무 창피해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과 그럼에도 그가 다시 쾌감을 선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동시에 피어올랐다.

“많이 나았네.”

그가 허벅지 안쪽을 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그를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이렇게 나 걱정하면서…….”

“내 친절은 천성이야.”

“제발…….”

양다리를 버둥대며 앓아도 남자는 정말 아무것도 해 주지 않을 것처럼 요지부동이었다. 저렇게 욕정이 들끓는 얼굴을 하고도 단호한 모습이 서러웠다.

왜 자꾸 부정하는 걸까.

“왜 화난 거 같지?”

“이거 놔요.”

“이러면 곤란한데.”

“놓으라니…….”

“애기, 질투해?”

사실은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도대체 왜?

당신만 인정하면 우리는 서로…….

“아, 아앙. 흐응! 대, 대호 오빠. 응……! 좋아, 아!”

옛날 일을 생각해서일까, 남자에게 안달을 내던 20대의 고채원까지 차례로 떠올랐다. 욱신, 심장이 쥐어짜이는 것 같았다.

“흐…….”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고채원이 그때 어떤 기분이었을지 완벽히 이해가 되었다. 남자는 쉽게 잡혀 주지 않는다. 그녀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안달을 낸 이유도 지금의 나와 피차 마찬가지였으리라.

“왜 울어? 그렇게 애가 타?”

고개를 저었다. 애가 타서 서러운 게 아니다.

나는 지금 고채원과 똑같이 굴고 있다. 그걸 뒤집어 생각하면, 남자가 나를 사랑하면서도 인정하지 않고 애태우는 것처럼 그 당시에도 고채원에게 진심이었지만 안달 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남자는 그때 고채원을 사랑한 거였다. 그녀도 지금 나와 마찬가지로 남자의 진심을 엿봤고, 그럼에도 남자가 잡히지 않아 더 안달을 냈겠지. 이 사실을 깨닫자 견딜 수 없이 서러워졌다.

“……채원 언니 많이 좋아했어요?”

눈꼬리를 타고 뚝뚝 흘러내리는 눈물이 뜨거웠다. 눈물이 쉬지 않고 샘솟아 남자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건 명백한 질투였다. 그것도 지금은 원수나 다름없는 10년 전의 고채원과 남자의 사이를 질투하고 있었다.

“갑자기 고채원이 왜 튀어나와?”

남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심장이 뒤틀리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이미 앞뒤 분간을 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남자의 사랑이 얼마나 특별한 건지 몸소 알게 되니 나 말고 다른 누군가에게도 쏟아졌을 그 사랑마저 아까웠다.

“안 박아 준다고 이런 식으로 시위하는 거야?”

“회사에서 섹스했던 그 여자는…… 섹스만 하는 사이예요?”

“…….”

“아직 만나요? 최근에도 했어?”

“얘 봐라.”

“다른 사람도 많았죠.”

그가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쪽이 전부 처음인데…….”

“…….”

“나만…….”

“알았어, 박아 줄게.”

그가 내 말을 가로채며 몸을 움직였다. 버클을 풀려는 듯 아래로 내려가던 손이 돌연 내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흐느끼며 바라본 남자는 생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만 울어.”

완전히 당했다는 그런 얼굴. 상처받아 우는 건 난데 왜 그가 진 것 같은 얼굴을 하는지 모르겠다.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여유를 잃지 않았던 사람답지 않았다.

그러나 그 표정은 금방 사라졌다.

“다리 벌려.”

태연하게 버클을 풀어낸 그가 내 바지와 팬티를 완전히 벗겨 내고 명령하듯 말했다. 나는 여전히 울음을 그치지 못한 채 어깨만 들썩였다.

“내가 묻는 말에 하나도 대답 안 했잖아요.”

“자꾸 귀엽게 굴어.”

“채원 언…… 흣!”

그가 다짜고짜 내 다리를 벌리고 성기를 밀어 넣었다. 갑작스러운 침입에 다급히 숨을 들이마시며 반사적으로 남자의 어깨를 밀었다. 거대한 압박감과 빠듯한 고통. 남자와 내 몸이 순식간에 하나로 엮였다.

“아……. 너, 너무 커.”

깊이 파고들었던 성기가 끝까지 빠져나갔다가 다시 쿵, 안으로 찧어졌다. 그는 내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반복해서 안을 쑤셔 댔다.

“하윽, 아, 천천…… 히, 읏…….”

남자는 쉬지 않고 나를 몰아붙였다. 다분히 의도적인 허리 짓이었다. 내가 다른 소리를 하지 못하게 일부러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푹푹 쑤셔 대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머리맡을 짚고 있는 그의 팔에다 얼굴을 문질렀지만, 그런다고 순순히 속도를 낮출 사람이 아니었다. 되레 내 다리를 들어 다시 자신의 어깨에 걸치게 만들더니 더 깊이 성기를 밀어 넣었다.

“으응……!”

다리를 버둥대며 남자의 어깨를 발로 밀었지만, 곧장 붙잡혔다. 하얀 양말로 감싸인 발을 한 손으로 움켜쥔 그가 내 다리를 모아 붙이곤 움직이지 못하게 붙들었다. 다리 사이가 붙으며 구멍이 더 좁아졌다.

그가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차체가 함께 흔들려서 멀미를 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

그제야 나는 우리의 섹스가 이루어지는 장소가 그의 세단이고, TG 건물의 지하 주차장이라는 것을 떠올리고 당황했다. 지난번 배에서처럼 그에게 홀려 상식을 잊었다. 다급히 눈앞에서 흔들리는 남자의 넥타이를 붙잡았다.

“누가…… 흐읍, 누가, 아, 오면…… 어떡, 해요.”

“그게 이제야 걱정돼?”

남자가 한 마디씩 말할 때마다 성기가 푹푹 박혀 들었다.

다행히 창밖에 사람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언제 누가 올지 모른다. 그리고 주차되어 있는 차들에 블랙박스가 있을 텐데, 이렇게 흔들리는 차를 보면 누구나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 거다.

블랙박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남자의 차 안을 살폈다.

정말 다행히도 남자의 차에는 블랙박스가 없었다. 그래도 바깥에 있는 차들이 신경 쓰여 음부가 훅 조여들었다.

“저…… 저 사람들이 알게 되면…….”

“괜찮아. 카섹스 한두 번 하는 거 아니거든. 신경 안 쓸 거야.”

남자가 무심히 말했다. 그가 움직이는 대로 흔들리느라 정신이 없어 말뜻을 한 박자 늦게 이해했다. 얼굴이 단번에 구겨졌다.

퍽, 주먹으로 남자의 어깨를 때렸다.

이런 데서 한 적 없다고 했으면서. 잠깐이나마 그걸 믿은 내가 바보다.

“다른 여자랑, 흑, 섹스한…… 이야기, 하지 마요.”

남자가 성기를 빼내고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액으로 축축하게 젖은 기둥이 배 위로 바짝 세워져 있었다.

“네가 먼저 했잖아.”

“흐…….”

“이리 와.”

상처받은 내 얼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나를 품에 안아 들더니 위치를 바꾸었다. 내가 시트에 앉은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탄 자세였다. 대표실에서도 그 여자랑 이런 자세로 섹스를 했었지. 미친 듯이 허리를 돌리던 뒷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질구에 귀두를 맞춘 그가 망설임 없이 내 허리를 잡아 내렸다. 벌어진 허벅지를 달달 떨며 간신히 그의 위에 앉은 나는 어렴풋이 떠오르는 여자의 허리 움직임을 따라 엉덩이를 돌렸다.

“가만히 있어. 네가 뭘 안다고 나서.”

그러나 곧장 남자의 손에 붙잡혔다. 노골적으로 나를 무시하는 언행이었다.

그 여자는 그렇게 마음껏 움직이게 놔뒀으면서.

이상한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 울상을 짓는데, 문득 그가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쪽, 간지러운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간 입술이 부드러웠다.

“그만 칭얼대.”

“내가 뭘…….”

“왜 자꾸 귀엽게 굴어.”

쪽, 쪽, 그의 입술이 얼굴 곳곳을 스치고 지나갔다.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숙였지만 꽤나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언제 서러웠냐는 듯 심장이 간지러워졌다.

그러니까, 이런 행동들.

“더, 더…….”

옷깃을 쥐고 애원하자 그가 혀를 차며 목덜미를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살결을 물고 빨며 동시에 양손으로 가슴과 허리를 어루만지면서 허리를 쳐올린다.

“아……!”

반동으로 몸이 튀어 올랐다가 그의 위에 푹 내려앉았다. 지금까지 한 삽입 중에 가장 깊게 느껴졌다. 명치까지 쑤셔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나는 남자의 입술에 얼굴을 온전히 내맡긴 채 그를 놓치지 않으려고 온몸에 힘을 주었다. 질벽이 굵은 기둥을 내보내지 않겠다는 듯 세게 오므라들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가장 깊은 곳에 그가 들어와 있었다.

“후.”

남자가 미간을 구겼다.

안이 조여들면서 동시에 쾌감도 짙어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나를 전율하게 했던 곳에 남자의 귀두를 지그시 문질렀다.

“아응!”

남자도 자극을 받았는지, 배 안에 들어찬 성기가 꿈틀댔다. 그가 내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은 기묘한 감각이었다. 적어도 몸을 섞을 때만큼은 온전히 내 것이 된 것 같았다.

“아…… 아, 어떡해. 읏……!”

몸 안으로 남자가 쏟아 낸 흔적이 가득 퍼지는 게 느껴졌다.

곧장 단단해지는 굵은 기둥이 내벽을 다시 짓눌렀다. 왈칵 울음이 터졌다.

“좋아서 질질 싸 놓고 왜 또 울어.”

이래서 고채원이 매일 밤 남자의 컨테이너로 갔구나. 섹스하는 순간만큼은 오롯이 그를 가질 수 있으니까.

너무너무 질투가 나지만, 지난 일은 돌릴 수 없으니 적어도 앞으론 나만 알고 싶었다. 남자를 가질 수 있는 이 순간은 나만 갖고 싶었다.

“나 말고 다른 여자랑 이런 거 하지 마요.”

쾌락의 여운으로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안을 가득 채운 남자의 성기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묵직한 압박감과 충만감. 적어도 그가 아직 내 안에 있다는 안도감.

“하지 마. 응? 안 했으면 좋겠어요.”

남자가 나를 이용했다고 생각했을 때도 나는 그를 온전히 싫어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내가 오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주 작은 희망이 내 판단력을 흐렸고, 내가 그 희망에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그때도 그랬는데, 사실은 나를 이용한 것조차 아니라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열심히 억누르고 있던 내 마음을 터트린 건 남자다. 그가 의도했든 아니든 나는 그의 진심을 엿봤고, 기다렸다는 듯이 번져가는 불길을 막을 재간이 없었다.

“나…… 사실 그동안 그쪽 많이 보고 싶었어요.”

“…….”

“많이 미웠는데 그만큼 많이 보고…….”

내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남자가 나를 품에 끌어당겼다. 뒤통수를 지그시 누르는 손바닥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내가.”

그가 다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애액과 정액으로 찬 내부가 질척거렸다.

“괜히 네 인생에 끼어든 것 같네.”

철렁, 심장이 내려앉았다.

내가 고개를 들지 못하게 양팔로 세게 끌어안은 채로 그는 연신 안을 휘저었다.

“흐으, 잠깐…….”

“나 같은 새끼랑 얽혀서 인생 꼬이는 건 여기까지만 해.”

“그건……!”

“애초에 그쪽이랑 얽히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쪽을 만난 뒤로 내 인생이 꼬였어.”

그건 내가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때 한 말이다.

그가 진심으로 나를 덮치려 한 사내와 고성하에게 분노했다는 것을 몰랐을 때였다. 오히려 남자가 없었다면 내 인생이 더 나락으로 빠졌을 거라는 걸 지금은 알고 있다.

“권지운 같은 놈, 보기 드물어.”

나는 남자의 품에 대고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권지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살인도 서슴지 않을 만큼 나를 위하는 사람은 권지운이 아니라 남자다.

“정 원하면 유학 가기 전까지 몸 정돈 대 줄게.”

내게 사람을 붙였다고 했으니 유학에 대해서 안다는 건 놀랍지 않았으나 스스럼없이 몸을 대 주겠다는 말에 심장이 욱신댔다. 내가 원하는 건 그의 몸만이 아닌데, 그걸 알면서도 몸만 주겠다는 말이 얄궂었다.

“혹시 유학 가는 거 때문에 날 밀어내는 거예요?”

그렇다면 얼마든지 철회할 생각이 있었다. 애초에 남자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강행한 것이고, 그의 진심을 알았으니 이젠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남자는 바람 빠지듯 웃었다.

“고작 그 정도 이유로 널 밀어내는 새끼 있으면 언제든지 데려와, 혼내 줄 테니까.”

“…….”

“권지운이 그랬어?”

푸욱, 성기가 내벽을 깊이 찔렀다. 두 번째 절정은 처음보다 빨리 찾아왔다. 허리를 들썩이며 그의 품에서 몸을 뒤틀었다. 남자 역시 또 한 번 파정했다. 배를 가득 채울 만큼 정액을 두 번이나 쏟아붓고도 다시 성기가 부풀어 올랐다.

더는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내가 밀어내면 한없이 밀려날 것 같아서.

“나야말로 대 줄게요, 몸.”

“…….”

“그러니까 내 몸 받고…… 마음 줘.”

“…….”

“기브 앤 테이크, 그거 오랜만에 해요, 나랑.”

남자가 대뜸 내 몸을 들어 올렸다.

묵직한 성기가 내벽을 쓸며 빠져나갔다. 꽤 오래 안을 채우고 있던 것이 빠져나가니 구멍이 쉽게 닫히지 않고 뻐끔대는 게 느껴졌다. 다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정액의 느낌이 이상해서 버둥대다 그의 목을 끌어안으려고 손을 뻗었는데, 남자가 저지했다.

“헤프게 굴지 마.”

그가 냉랭하게 말했다.

“네가 창부야? 몸 가지고 장사하게?”

“뭐라고요……?”

그는 충격받은 내 얼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수건으로 다리 사이를 닦아 냈다.

“그쪽도 그렇게 말했잖아요. 몸 대 준다고.”

“오빠가 한다고 다 따라 하면 안 되지.”

아이를 어르듯 말하지만, 어딘가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었다.

먼저 나를 유혹해 손을 댄 건 남자였다. 사랑은 인정하지 않지만 내게 욕정하는 것은 숨기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이거라도 잡아야 했다.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이건 거절이 아니지. 본인이 먼저 몸을 대 주겠다고 했으니, 누가 대 주든 결론은 우리가 몸을 섞는다는 건데.

옷까지 다시 입혀 준 남자가 운전석으로 넘어가 담배를 꺼내 손가락에 끼웠다. 예의 그 라이터가 그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그러나 라이터를 손에서 굴리기만 하지, 불을 붙이진 않았다.

“말을 왜 그런 식으로 해요?”

나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간신히 세워 그를 돌아봤다.

“사랑한다는 말 안 해 줄 거면, 말이라도 예쁘게 해요.”

“안 사랑한다니까.”

그는 끝까지 부정하며 핸들에 양팔을 걸쳤다.

그가 내 몸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듯한 발언에 화를 냈다는 건 알고 있다.

나를 속상하게 하는 건,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주제에 밀어내기 위해 일부러 못되게 말한 점이었다. 온 얼굴에 키스를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그렇게 말한다고 내가 물러날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쪽이 먼저 덮쳤잖아요. 그것도 배 안에서.”

“그래서?”

“날 헤프게 취급한 건 그쪽이면서 왜 이제 와서 착한 척이에요?”

“…….”

탓하려고 꺼낸 말은 아니다. 반응을 보기 위해서지.

남자의 손가락에 걸린 담배가 시소처럼 흔들렸다.

“그래서 후회 중인 거 안 보여?”

불편한 행동, 무심한 표정, 퉁명스러운 말. 각기 다른 반응들은 결국 하나의 마음을 전제한다. 그제야 나는 힘 빠진 손을 겨우 들어 남자의 팔을 주먹으로 툭 쳤다.

“기브 앤 테이크 해요.”

“안 해.”

“몸이 싫으면 마음 줄게.”

“필요 없다니까.”

“왜 자꾸 거짓말해요.”

그가 피식 웃으며 담배를 부러트렸다.

“진심을 왜곡하지 마.”

“짜증 나…….”

이상하게 그가 밉고, 애타고, 속상한 와중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문득 그리운 기분마저 들었다. 오래전, 그와 의미 없이 투덕대던 기억이 떠올랐다. 남자도 같은 생각을 하는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괜히 그의 팔을 한 번 더 때리고 눈을 감았다. 몸도 머리도 노곤했다.

남자를 사랑하는 것을 인정하고, 그의 마음을 깨달았지만 변한 건 없었다.

그날 나를 집 앞까지 데려다준 남자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잘 가라는 인사만 남기고 떠났고, 저녁에는 퇴근한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다음 날은 앓아누웠다.

갑작스러운 몸살에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내가 걱정스러웠는지 쉽게 출근을 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간신히 보내고, 반나절은 그냥 기절해 있었다.

갑자기 탈이 난 이유로 짚이는 구석은 있었다. 오랫동안 굳게 믿어 왔던 남자에 대한 오해가 풀리며 온 신경의 긴장이 풀어졌기 때문이리라. 나에게는 세상이 뒤집히는 것과 다름없었으니 오히려 이 정도로 넘어간다면 다행이었다.

휴가가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남자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핸드폰을 든 나는 내가 그의 전화번호 하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금 허무해졌다.

그는 내 모든 걸 알고 있을 텐데, 나는 고작 연락처 하나 몰라서 전화도 못 하다니. 불공평하다. 당장 찾아가 물어보고 싶었지만, TG건설을 가기에는 이민후가, 그의 집에 가기에는 어머니가 마음에 걸렸다.

“뭐 해?”

권지운과 나란히 퇴근하며 건물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그가 의아한 듯 물었다. 남자가 나에게 사람을 붙였다는 말이 떠올라서 혹시라도 그의 부하를 마주치면 그를 통해 물어볼 작정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대꾸하면서도 연신 눈동자를 굴렸지만 수상해 보이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하긴 이렇게 쉽게 발견될 거라면 진작 알아차렸겠지.

“유학 준비는 잘 하고 있어?”

권지운이 가방을 고쳐 메며 물었다.

사실 유학은 잠깐 보류하는 중이었다. 멀리 떠났다가 남자를 놓칠까 봐 불안하지만, 완전히 철회하기에는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비록 남자 때문에 도피성으로 추진한 유학이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다. 그걸 다시 남자 때문에 관둬 버리면 사랑에 빠진 전형적인 한심한 사람이지 않은가.

언제나 그런 사람들을 비웃으며 살아왔는데 내가 그 꼴이라는 게 영 자존심이 상했다. 그 고채원도 남자에게 홀딱 빠져 있는 와중에도 착실히 유학길에 올랐는데 나라고 못 할 거 있나 싶은 오기도 있었고.

그런 이야기를 권지운에게 전부 할 수는 없어서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줄 거 있으면 말해. 뉴욕으로 간댔나?”

“네. 선배도 그쪽으로 갔었죠.”

내가 알기로 권지운은 뉴욕에서 꽤 유명한 건축가 밑에서 잠깐 공부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선배는 왜 갑자기 사무소를 열었어요?”

권지운이 나를 돌아봤다.

“유학도 다녀왔고, 대학원 과정까지 마친 거면 교수 하려고 했던 거 아니에요? 사실 그래서 선배가 갑자기 아틀리에 열었을 때 동기들이 다 의아해했거든요.”

“같이 하는 분들도 많아.”

“그건 그렇죠. 그런데 선배는 좀…… 교수랑 잘 어울려요.”

“지적이라는 칭찬이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교 때를 생각하면 교수가 퍽 잘 어울렸다. 스토커에게 시달린 직후 남자에 대한 두려움이 극에 달해 있었던 대학 시절에 권지운에게만큼은 날을 세우지 않았던 건 그가 좋은 선배이자 조교였기 때문이기도 했고.

“내일 봐요, 선배.”

각각 주차해 둔 차로 향했다. 차에 올라타 문을 닫으려는데, 운전석을 열던 권지운이 자동차 너머로 나를 바라봤다. 반쯤 열린 문 사이로 그가 말했다.

“교수야 나중에 해도 되고, 일도 해 보고 싶었고, 또 겸사겸사 하고 싶은 게 또 있었거든.”

“뭔데요?”

“너랑 친해지는 거.”

“…….”

“연애도 하면 좋을 텐데 그건 실패했지만.”

권지운이 차 위로 양팔을 기댔다.

“웃으니까 보기 좋긴 한데, 믿을 만한 사람이야?”

“…….”

나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가 눈치가 빨라서이기도 하지만, 내가 너무 감추지 못했기에 알아차리는 건 쉬웠을 거다. 미안한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좋은 사람 같진 않아. 질투 같은 게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틀린 말은 아니다. 남자는 깡패고, 사람을 죽였고, 사생활이 문란하고,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절대 해 주지 않는다.

“꼭 내가 아니더라도, 네가 좋은 사람이랑 만났으면 좋겠어. 상처받지 않게.”

“…….”

“그 사람은 널 많이 울릴 거 같다.”

“권지운 같은 놈, 보기 드물어.”

이 정도면 나도 미친 게 분명하다. 나를 걱정해 주는 권지운의 말에서 남자의 마음이 느껴지는 걸 보면.

그것 봐. 당신도 나를 사랑한다니까.

“고마워요, 선배.”

“…….”

“그리고…… 미안해요.”

“뭐가?”

“그냥…….”

나는 권지운의 마음을 이용했다.

나를 사무소로 불렀을 때 내가 먼저 거절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고, 남자가 권지운을 신경 쓰는 걸 알고 일부러 그를 이용해 남자를 자극하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그의 마음을 받아주지도 못한다.

내가 아무 말 못 하고 가방끈만 만지작거리자 속내를 읽었는지 권지운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들어가. 난 제대로 실연당한 기념으로 술이나 마시러 가야겠다.”

농담처럼 하는 말이라 나도 웃을 수 있었다.

곧장 집으로 가려던 마음을 바꾸어 남자를 찾아가기로 했다. 회사보다는 집 앞에서 기다리는 게 마주칠 확률이 더 높을 테니 그리로 향했다. 어머니는…… 마주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일단은 그가 보고 싶었다.

아직 퇴근을 하지 않은 건지 세단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도착하자마자 내가 온 걸 알 수 있게 담벼락 옆에 떡하니 차를 세워 두곤 시동을 껐다. 시트에 편안하게 몸을 기대 남자가 오기만을 기다리는데 자꾸 허벅지가 붙었다 떨어졌다.

오늘도 그와 섹스를 하게 될까? 다른 건 다 모른 척해도 성욕은 감추지 않는 남자가 또 달려들 생각을 하니 심장이 거세게 뛰며 몸이 달아올랐다.

정말 미친 게 확실하다. 손부채질로 뜨거워진 얼굴을 식히며 창문 밖을 살피는 그때였다.

“어?”

골목 아래쪽에서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쳤다. 남자일까 싶어 핸들을 쥐고 몸을 바짝 세우는데, 아쉽게도 까만 세단이 아니라 택시였다.

허탈하게 몸을 다시 물리려는 찰나, 택시가 남자의 집 앞에서 멈췄다.

뭐지?

의아하게 바라보다 순간 눈을 크게 떴다.

택시에서 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고채원이었다.

대문 앞에서 망설이던 그녀가 이내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곤 곧장 열리는 대문 안으로 사라졌다.

“왜…….”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고채원이 왜 남자의 집에…….

인간은 정말 간사하다. 분명 남자에 대한 오해가 깡그리 씻겨 나갔고, 그의 마음을 확신한다고 생각했는데, 고채원을 보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불안이 싹트기 시작했다. 핸들을 쥔 손이 잘게 떨렸다.

고채원을 사랑하냐는 내 물음에 남자는 대답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한 적이 없다.

어머니에게 배신을 당하고 15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미련을 버리지 못한 아버지가 떠올랐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사랑을 지금은 받아들이지는 못할지언정 이해는 한다. 나 역시 남자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는 와중에도 10년 동안 그를 놓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만약 미련이 사랑의 속성이라면, 비단 나와 아버지뿐만 아니라 고채원과 남자에게도 적용되리라.

“아니야…….”

제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다. 그걸 알고도 고채원이 남자에게 미련을 가질까? 그녀의 입장에선 아버지를 죽이고 모함하고, 가정을 엉망으로 만든 사람인데, 그런 남자에게 증오가 아닌 다른 감정이 있을 수가 있나.

남자는 분명 나를 사랑한다. 만약 고채원에게 미련이 있다 해도 지금은 나를 사랑하니까 상관없다.

고채원을 집에 들인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여민당이 어쩌고 했던 이민후의 말을 떠올렸다. 내가 모르는 일이 그들에게 벌어지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왜 하필 집이야.

매일 밤 남자의 컨테이너로 숨어들던 고채원이 떠올라 입술을 세게 물었다. 천천히 심호흡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집에 간다고 다 섹스를 하는 건 아니야.

핸들 위로 이마를 기대려는 찰나, 정면에서 헤드라이트 불빛이 쏟아졌다. 움찔, 어깨를 떨며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이는 것은 남자의 세단이었다.

조금 전 택시가 멈췄던 곳에 세단이 서고 운전석에서 낯익은 남자의 부하가 나와 뒷좌석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남자가 내렸다.

부하가 그에게 뭔가를 이야기하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고, 곧장 남자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 차지만, 내가 안에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부하의 어깨를 두드린 그가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당연히 내게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남자는 곧장 대문으로 향했다.

불안이 또 한 뼘 자라났다.

가지 마. 들어가지 마.

“…….”

고채원이 왔고, 내가 그걸 봤다는 걸 알잖아. 내가 여기 있는 거 알잖아. 적어도 내게 그녀를 부른 이유라도 말해 주고 가.

간절히 바랐지만, 이내 그는 대문 안으로 사라졌다. 상대가 신이든, 남자든 내 기도는 들어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오랜만에 허벅지 안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그가 상처를 걱정한 뒤로는 좀처럼 손을 대지 않았는데 다시금 가학적인 충동이 일었다. 더 엉망으로 만들어서 남자의 걱정을 유발하고 싶은 못된 마음이 치솟았다.

이럴 줄 알았는데. 남자의 마음을 바라면 힘들어질 줄 알았는데. 망가질 줄 알았는데. 침식될 줄 알았는데. 안달이 날 줄 알았는데. 이 꼴이 날 줄 알았는데.

왜 기어이 사랑 따위를 해 버려서는…….

고채원이 나온 건 두 시간이 지난 후였다. 과거에 그녀가 컨테이너에서 머무른 시간도 두 시간이었다.

그제야 나는 허벅지에서 손을 떼어 냈다. 내내 쥐어뜯었더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따위 것에 신경 쓸 틈도 없이 눈동자를 재빠르게 움직였다. 고채원에게서 섹스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연이어 도착한 택시에 곧장 올라타는 바람에 보지 못했다. 흔적은 찾지 못했지만 스쳐 지나가는 택시 안에서 울고 있는 고채원의 모습은 보았다.

진짜 울고 싶은 건 난데, 왜 언니가 울어.

비틀린 마음으로 택시 꽁무니가 사라질 때까지 노려보다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을 땐 남자가 대문 앞에 서 있었다.

“하…….”

섹스의 흔적은 그에게 있었다. 들어갈 때 입고 있던 슈트 차림이 아닌 홈웨어 차림이었다. 까만 티셔츠에 회색 면바지를 입고 여유롭게 담배를 무는 남자의 발에 구두 대신 슬리퍼가 신겨 있었다.

순간 참지 못하고 클랙슨을 세게 내리쳤다. 갑작스러운 굉음에도 그는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을 뿐더러, 이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다시 남자가 들어가기 전에 차 문을 벌컥 열었다.

“어떻게……!”

장시간 괴롭힌 허벅지의 고통도 무시하고 무작정 달려가 남자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때렸다.

“어떻게 사람이 그래요!”

그는 태연자약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속에서 열이 화악 끓었다. 그가 물고 있는 담배를 빼앗아 바닥에 집어 던졌다.

“언니랑 잤어요?”

“…….”

“대답해요. 잤냐고!”

쏟아지는 주먹질에도 그는 반응이 없었다.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버티고 서 있는 다리가 힘없이 떨렸다.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아 남자의 옷자락을 세게 붙잡았다.

“아니죠……?”

“…….”

“다른 여자랑 하지 말라고 했잖아……. 아니잖아요. 그렇죠?”

“내가 그러겠다고 대답을 했었나.”

비틀, 냉정한 대답에 무릎 한쪽이 굽어지며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렸다. 남자의 가슴팍에 이마를 기댄 채 고개를 저었다.

“아니잖아. 나 사랑하잖아요. 어떻게 날 두고…….”

“안 사랑한다니까.”

“제발!”

애원하듯 고개를 들자마자 심장이 철렁했다. 나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빛이 더없이 차가웠다. 성가시다는 듯 한숨을 뱉기도 했다.

남자가 나를 귀찮아한다. 어떻게 나를…….

“애기야, 자꾸 이러면 질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여기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들어가서 한판 하고 갈래? 아, 엄마 있어서 좀 그런가. 뭐 어때, 파렴치한 건 그쪽이 먼저였는데.”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요.”

“대 주겠다며, 몸. 그새 생각이 바뀌었어?”

그새 바뀐 건 내가 아니라 남자다. 고작 며칠 만에 그는 다른 사람처럼 굴고 있다.

이러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다. 나는 아직도 내 얼굴에 와 닿았던 그의 간지러운 입맞춤을 기억한다. 그게 거짓말일 리는 없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요.”

“귀찮아서.”

“…….”

“섹스까지 간섭받는 건 처음이라 기분이 별로네.”

“……정말로 채원 언니랑 잤어요?”

남자가 한숨을 뱉었다. 짜증이 역력히 묻어나 눈앞이 아찔해졌다.

내가 많은 걸 바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타인과 몸을 섞는 건 누구나 싫어할 수밖에 없다. 질투 역시 사랑의 속성이다.

이런 당연한 것을 내가 바랄 수 없는 거야? 당신도 나를 사랑하는데.

“그쪽은 내가 다른 남자랑 자도 상관없어요?”

짙은 눈동자가 나를 뚫어 버릴 듯 직시했다.

“그런 김에 허리 돌리는 기술도 좀 배워 오지 그래?”

더러운 말을 지껄이면서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너무 큰 괴리감에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한 박자 늦게 이해하고 나도 모르게 그의 옷을 놓쳤다. 툭, 허공으로 떨어지는 손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떨렸다.

“웬만하면 우리 쪽엔 얼씬대지 마.”

아직 희미한 불빛이 남아 있는 담배꽁초를 남자가 짓밟았다.

“우리가…… 누구예요?”

“그건 네가 알아서 생각하고. 잘 가, 애기야.”

“……사랑해요.”

문을 열려던 그가 잠깐 멈췄다.

“나 그쪽 사랑해요.”

나는 남자의 등에 대고 애타게 고백했다.

“그래서…… 질투 나서 그런 거야. 귀찮게 하려고 한 게 아니라, 나 말고 다른 여자랑 있는 거 질투 나서…….”

“그래서?”

남자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난 안 사랑한다니까.”

“가지 마요.”

그러나 가차 없이 문이 닫혔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견딜 수 없는 절망감에 휩싸여 울음이 터졌을 때, 다시 문이 열렸다. 남자이길 기대하며 고개를 들었지만, 문 앞에 서 있는 건 남자의 부하였다.

“곧 손님이 오시기로 해서,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

“죄송하지만 돌아가 주시…….”

그가 말을 끝맺기 전에 몸을 일으켰다. 거칠게 걸음을 옮기다 한순간에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괜찮으십니까?”

다가오는 부하를 무시하고 곧장 차에 올라탔다. 온몸이 떨려서 시동을 거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겨우 시동을 걸고 눈가를 세차게 문질렀다.

일부러 저러는 거야. 일부러 나를 떼어 놓으려고 차갑게 구는 거다. 그가 진짜 나쁜 놈이라면 자신에게 푹 빠져 있는 내게 다정한 척하며 마음껏 농락하는 게 더 쉬웠을 거다. 그러나 그는 못된 말로 내가 자신에게서 정을 떼게끔 굴었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거다. 그리고 그건 방금 저 집에 들어갔다 나온 고채원과 관련이 있으리라.

그녀에게 미련이 남아서든, 아니면 그녀가 나를 찾는 이유 때문이든.

“오해하지 마. 네 의사 충분히 반영해서 나도 서을 씨 같이 보호하겠다는 의미로 말해 준 거니까.”

여민당을 언급했던 이민후가 떠올랐다. 여민당과 고채원. 연결고리는 분명 있다. 나는 급히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분명히 지갑 어딘가에 넣어 뒀는데…….

거칠게 지갑을 헤집다 이민후의 명함을 발견하고 꺼내 들었다.

[어쩐 일이세요, 서을 씨.]

뜬금없는 전화에도 이민후는 마치 내가 전화를 할 줄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여유로웠다. 가타부타 인사 따위는 사치다. 본론부터.

“내가 모르는 게 있죠?”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모른 척하지 마세요. 대표실에서 나 들으라고 힌트 던졌잖아요.”

핸드폰 너머로 그가 작게 웃었다.

[그러고 나가서 통 소식이 없어서 실망했는데, 이제라도 연락 주니 반갑네요. 그러지 말고 우리 만날까요?]

사실 지금 바로 TG건설로 찾아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숨겨 봤자 모르고 당하기밖에 더해? 알고 있어야 예방을 하지.”

분명 둘만 아는 뭔가가 있는데, 남자는 내가 그걸 모르길 바랐다. 이민후는 그 반대고. 그러니 이민후를 찾아가면 남자가 또 가로막을지도 모른다. 남자가 붙여 둔 사람이 지금도 내 뒤에 있을 테니 말이다.

[당장은 대호 눈도 있으니 제가 적당히 시간을 잡아 보죠.]

이민후가 내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걱정 마요. 그놈들 내 사람이기도 하니까.]

“……연락 주세요.”

[최대한 빨리 연락드리죠.]

전화가 끊어지고, 가쁘게 숨을 몰아 내쉬다 창문 너머 남자의 집을 노려보았다.

뭐가 당신을 그렇게 도망치게 만드는 건진 모르겠지만, 나는 예전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아니다.

남자를 오해하는 건 지난 10년으로도 충분하다. 이제는 오해가 아닌 이해를 할 때다. 그가 갑자기 나를 차갑게 내치는 이유를 알아야 이해를 할 수 있다. 그래야 그를 잡을 명분이 생긴다.

다만, 그 이유가 부디 고채원에 대한 미련만은 아니기를 바랐다.

내 옹졸한 사랑은 남자의 다른 사랑만큼은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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