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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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건물 보안팀은 CCTV 화면이 바뀐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다.

대신 권지운의 항의로 CCTV는 즉각 교체되었고 경비원 한 명이 입구에 배치되었다. 사실 악질적인 스토커도 아니고 편지를 보낸 사람이 고채원인 걸 아는 입장으로서는 괜히 나 때문에 유난을 떠는 것 같아 민망했다.

“괜히 이 건물로 들어왔어. CCTV 화면이 제대로 안 돌아갈 줄은 생각도 못 했네.”

배달시킨 샌드위치 포장을 뜯으며 권지운이 투덜댔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선배.”

권지운이 샌드위치를 든 채로 나를 돌아봤다. 멋쩍게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고마우면 데이트하자.”

“이야기가 또 왜 그리로 튀어요.”

“왜냐면…….”

그가 말꼬리를 늘이며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내 앞에 뭔가를 내려놓았다. 음악 연주회 표였다.

“표가 생겼거든. 그것도 하필 두 장. 난 같이 갈 사람 따로 없고.”

“선배가 산 게 아니고요?”

“적당히 넘어가.”

너털웃음을 짓는 권지운을 밉지 않게 흘겨보다 표를 집어 들었다. 그러다 표에 적힌 악단의 이름을 보곤 잠깐 멈칫했다.

「파리 필하모닉」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곧장 핸드폰을 꺼내 인터넷 검색창을 열었다.

파리 필하모닉. 익숙한 이름이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고채원(33. 플루티스트. 파리 필하모닉 소속)」

역시 고채원이 소속된 악단이다. 6개월 전부터 국내 각지를 돌아다니며 투어를 하는 중이라는 기사가 있었다. 특히 죽은 고성하의 딸이 속해 있기 때문인지 꽤 기삿거리가 많았다.

편지가 올 때부터 한국에 있을 거라고 지레짐작하긴 했으나 정말로 그녀가 코앞에 있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마주칠지도 모른다.

“클래식 안 좋아하면 다른 거 볼까?”

표정이 굳은 내게 권지운이 은근슬쩍 물었다. 나는 애써 고채원을 머릿속에서 지우며 그에게 표를 밀었다.

“네. 전 음악은 그다지…….”

“그 말 무르기 없기야.”

“네?”

“데이트는 한다는 거잖아.”

“아니, 잠깐만요.”

뒤늦게 반박하려고 했지만 이미 권지운은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핸드폰을 만지작대는 중이었다.

“선배.”

“자.”

그가 씨익 웃으며 화면을 보여 주었다. 「예매 완료」라는 문구가 떡하니 떠 있는 영화 예매 창이었다.

“오늘 퇴근하고 영화 보자.”

“이러는 게 어디 있어요.”

“간단하게 생각해, 간단하게. 사내 복지, 뭐 그런 거. 공짜 영화도 보고 얼마나 좋아.”

“데이트라면서요.”

“나한텐 데이트지만 너는 사회생활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뭐래…….”

투덜대며 샌드위치를 크게 물었다.

권지운이 바쁜 와중에도 나를 위해 이것저것 신경 써 준 것도 맞고, 그에게 고마운 것도 맞고, 영화 한 편 보는 정도야 별거 아니긴 하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정작 그는 담백해 보이는데 혼자 아득바득 피하는 것도 좀 유난인 것 같고. 저래 보여도 지킬 건 지키는 사람이니까 영화 정도야…….

샌드위치를 우물대며 흘겨보자 그가 웃으며 내게 휴지를 건넸다.

“입술에 묻었어.”

“무슨 영화 예매했어요? 전 로맨스는 싫어요.”

“야, 진작 말하지.”

권지운이 급히 핸드폰을 들었다. 휴지로 입술을 닦으며 영화를 다시 예매하는 권지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정말 얼굴 때문에 날 좋아하는 건가.

그의 말마따나 대학에 들어간 뒤로 제법 많은 남자가 호감을 표해 왔다.

그러나 상종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이 죄다 내 몸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었다. 가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주제에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놈이 있는가 하면 대놓고 나랑 자고 싶다고 들이대는 놈들도 있었다.

하지만 권지운은 달랐다. 나는 그의 시선이 내 몸에 머무르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고백을 받지 않았다면 아마 나를 좋아하는 것도 몰랐을 거다. 뒤늦게 생각해 보니 툭하면 커피를 사 줬던 게 호감 표현이었나 싶다.

“어쩌냐. 남은 건 좀비 영화뿐인데.”

“좋아요.”

“이게 좋다고? 나랑 취향이 잘 맞네. 알았어. 이걸로 할게.”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만약에 내가 남들처럼 평범한 환경에서 자랐다면, 눈앞에서 어머니의 외도를 목도하거나 시시때때로 내 몸이 만져지는 더러운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남자에게 배신을 당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평범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아마 권지운과 평범하게 연애를 했을지도 모른다고.

“영화 보는 김에 저녁도 같이 먹어도 돼?”

“저녁은 집에 가서 아빠랑 먹을래요.”

하지만 나는 권지운의 진심이 아직도 의심스럽다.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다는 경계를 늘 품고 있다.

“나 너무 원망 말고.”

이것 역시 당신 탓이 가장 크다.

진심으로 믿었던 사람에게 당한 배신은 불신을 낳았다.

나는 누구도 믿을 수가 없다. 그게 내 첫사랑의 말로다.

Rrrr─. Rrrr─.

내 거절로 공기가 조금 어색해졌는데 타이밍 좋게 핸드폰이 울렸다. 확인하지 않아도 아버지인 걸 알았다.

권지운이 조용히 있겠다는 듯 의자를 뒤로 살짝 물렸고, 나는 받을지 말지 망설이다 핸드폰을 들었다. 이만하면 꽤 오래 시위를 했으니 받아도 될 것 같고, 권지운과 서먹해진 분위기를 환기할 겸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서을아, 점심 먹었니?]

“먹고 있어.”

[아빠가 미안해.]

“……나중에 이야기해.”

[그래. 알았어. 오늘 일찍 들어오니?]

“조금 늦을 거야. 저녁은…… 같이 먹어요.”

[알았다.]

전화가 끊어지고, 핸드폰을 내려놓자 조용히 샌드위치를 씹던 권지운이 가볍게 웃으며 노트북을 끌어왔다.

“일하자, 일. 착공일 얼마 안 남았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려 주는 그에게 마음속으로 고마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영화관은 꽤 오랜만이었다. 작년에 건축 관련 영화가 있대서 아버지와 함께 온 뒤로는 처음이라 특유의 어두컴컴한 조명과 고소한 팝콘 냄새 같은 게 퍽 반갑게 느껴졌다.

권지운이 간식거리를 사 오겠다며 간 사이 나는 비어 있는 의자에 앉았다.

금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관람객이 꽤 많았다. 특히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가장 많았는데 남들의 눈에는 권지운과 나도 그렇게 보일 거라고 생각하니 조금 불편해졌다.

괜히 따라왔나 싶어 미간이 구겨지는 찰나, 사람들 사이로 얼핏 아는 얼굴이 스쳐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너무 잠깐이라 누군지 인지는 하지 못하고 기시감이 드는 정도였다. 회사 근처에 있는 영화관이니 오가며 마주친 사람들이 꽤 되겠지 싶어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서을아, 이제 들어가면 된대.”

권지운이 맞은편에서 콜라 두 개와 커다란 팝콘 통을 들고 오며 말했다.

그에게 다가가 팝콘을 대신 들어 주곤 슬그머니 거리를 띄웠다. 붙어 있으면 진짜 연인 같으니까. 그런 내 속내를 읽었는지 권지운이 장난스럽게 한숨을 푹푹 뱉었다.

“내가 어디 가서 막 부끄러워할 만한 사람은 아닌데.”

“그런 거 아니에요.”

“근데 나 영화 보다가 무서우면 손잡을지도 몰라.”

“그럼 저 바로 갈 거예요.”

농담처럼 던지는 말이라 나도 가볍게 대꾸했다. 권지운이 웃으며 제 넥타이를 가리켰다.

“이걸로 손이라도 묶어 줄래? 나 의외로 무서운 거 못 봐.”

“거짓말하지 마요. 선배 공포 영화 마니아인 거 동기 중에 모르는 애들이 없는데요.”

“무슨 또 마니아까지.”

쓸데없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영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앞장선 권지운을 따라 좌석에 앉아 간단히 소지품을 정리하다가 무심코 고개를 든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남자가 느긋하게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등장에 깜짝 놀라 하마터면 팝콘을 쏟을 뻔했다.

간신히 팝콘 통을 품에 끌어안는데,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놀란 기색도 없이 나와 내 옆에 있는 권지운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웃으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안녕, 애기야.

굳어 있는 나를 스쳐 지나간 남자가 앉은 곳은 내 바로 뒷자리였다. 권지운은 업체에서 메일이 왔다며 핸드폰을 확인하느라 남자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설마 아까 본 것 같은 사람이 남자였나. 입 안 여린 살을 깨물었다.

남자를 보는 순간부터 모든 신경이 그리로 쏠려 영화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바로 뒤에 그가 있다. 영화를 보러 온 걸까.

혼자? 아니면 내가 있는 걸 알았나.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그는 거듭 내게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우리가 다시 얽히게 된 것도 나 때문이 아니라 권지운 때문이라는데 내가 여기 있다고 영화관을 찾았을 리는 없다.

꼴에 취미 생활이라는 건가.

하긴 사람을 죽이는 게 밥 먹는 것보다 쉬워 보이는 그의 취미가 좀비 영화라면 말이 된다.

“안 무서워?”

사람이 물어뜯기는 장면이 화면에 한가득 찼음에도 영화를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으니 권지운이 내 쪽으로 몸을 숙여 조그맣게 속삭였다. 갑자기 거리가 가까워져 옆으로 피하려다 뒤에 있는 남자를 의식해 가만히 버텼다.

이상한 오기였다.

권지운과 내 사이를 묻는 남자와 그의 부하. 의도는 파악되지 않지만, 언제나 모든 걸 아는 것처럼 구는 남자가 유일하게 내게 궁금해하는 권지운과의 관계.

아마 남자에게는 흥밋거리에 불과하겠지만, 어떤 방향이든 그를 자극할 수만 있다면 족했다. 나는 무엇보다 그 덤덤한 낯짝이 참을 수 없이 거슬렸다.

“선배가 더 무서워하는 거 같은데요.”

나 역시 권지운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가 웃으며 오른손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무섭다고 하면 잡아 줄 거야?”

소리 없이 웃으며 밀어내려고 손을 드는 찰나였다.

툭, 등 뒤에서 남자가 의자를 찼다. 괴기한 영화 사운드에 묻혀 권지운은 알아채지 못한 것 같지만 당사자인 나는 모를 수가 없는 노골적인 발길질이었다. 툭툭, 다시 한번 그가 의자를 찼다.

나는 입 안으로 혀를 굴리며 보란 듯이 의자에 몸을 더 깊이 묻었다. 그러곤 권지운의 손바닥 위에 내 손을 얹었다.

피식, 뒤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명백히 나를 향한 비웃음이었다. 권지운이 조금 놀란 얼굴로 나를 돌아보는 순간이었다.

촤악, 머리 위로 차가운 액체가 쏟아졌다.

“앗……!”

권지운이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놀란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유의 시원하고 단 냄새. 쏟아지는 콜라를 맞은 건 내가 아니라 권지운이었다. 바로 뒤에서 남자가 빈 콜라 컵을 반대로 기울이고 있었다.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진 영화관 내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제야 남자를 발견한 권지운이 황당한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다짜고짜 콜라를 부어 버릴 줄은 몰랐던 터라 당황한 나는 서둘러 권지운의 손을 잡아끌었다.

“선배. 일단 나가요.”

주변 사람들에게 연신 사과를 하며 급히 영화관을 빠져나왔다. 머리부터 셔츠까지 쫄딱 젖어 버린 권지운이 기가 막힌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방금 그거 이 대표 심부름꾼이라던 사람 맞지.”

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놈. 부으려면 차라리 나한테 붓지, 왜 죄 없는 권지운한테 이래. 아니, 애초에 왜 붓는데?

권지운이 젖은 머리를 넘기며 한숨을 뱉을 때, 다시 영화관 문이 열리며 남자가 나왔다. 그는 조금 전 사태로 비어 있는 컵을 쓰레기통에 가볍게 던져 넣고 뻔뻔한 낯짝으로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내가 무서운 걸 잘 못 봐서 놀라는 바람에 콜라를 쏟았네요.”

지나가던 개도 안 믿을 핑계였다. 권지운 역시 어이없다는 얼굴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안 속네.”

“뭐라고요?”

“선배.”

발끈하는 권지운의 팔을 붙잡았다. 누가 봐도 남자가 잘못한 상황이지만 그가 깡패인 걸 아는 나로서는 권지운을 말리는 게 최선이었다. 쉽게 사람을 죽이는 그가 권지운에게도 해코지를 할까 봐 지레 겁이 났다. 권지운에게 참으라며 고개를 젓는데, 문득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내가 붙잡고 있는 권지운의 팔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불에 덴 것처럼 손을 떼어 냈다. 왜 죄를 지은 기분이 드는지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냥 가요. 상종할 가치도…….”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식사나 같이할까?”

남자가 내 말을 가로막으며 헛소리를 했다. 권지운과 나는 동시에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남자가 근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분히 만들어 낸 것 같은 가식적인 미소였다.

“사과도 할 겸 제가 대접하죠.”

그러곤 대답도 듣지 않고 내 뒤쪽으로 손짓을 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지난번 나를 태워 줬던 남자의 부하가 쇼핑백 하나를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남자가 아닌 권지운에게 쇼핑백을 내밀었다. 권지운이 뭐냐는 듯 부하와 쇼핑백, 남자를 번갈아 보자 남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꼴로 식사를 하러 갈 수는 없잖아요.”

“처음부터 이러실 작정이었나 봅니다.”

“마침 제 친구가 근처에 있어서 얼른 옷 한 벌 사 오라 부탁했죠.”

“친구요.”

아무리 좋게 봐도 남자의 비서쯤 되어 보이는 부하를 위아래로 훑은 권지운이 나를 돌아봤다. 어떻게 하고 싶냐는 의사가 담긴 눈빛이었다. 이 와중에도 남자가 내 지인이라고 나를 배려하는 그에게 미안함이 앞섰다. 순 제멋대로 구는 남자와 비교가 되어도 한참 된다.

나는 일단 부하가 들고 있는 쇼핑백을 대신 받아 권지운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일단 옷 갈아입어요. 여름이라도 그렇게 다니면 감기 걸려요.”

얼른 갈아입으라며 등을 밀자 권지운이 마지못해 화장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화장실에 완전히 들어가자마자 나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는 양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내내 나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뭐 하자는 거예요.”

“뭐가?”

“지운 선배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쪽으로 콜라를 부어요. 제정신이에요?”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사이라더니.”

가벼운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기울이는 눈매에 얼핏 짜증이 묻어나는 것 같더니, 이내 그가 부하에게 가 보라며 손짓을 했다.

“애기야, 이번엔 솔직하게 대답해 봐. 권지운이랑 무슨 사이야?”

“하, 진짜 말이 안 통하네.”

“권지운한테도 흑심 있어?”

권지운한테‘도’. 다른 것보다 그 말이 귀에 날카롭게 꽂혔다.

“내가 다른 사람한테도 그렇다는 거로 들리네요.”

“맞는다는 건가.”

“맞든 아니든, 그쪽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왜 자꾸 그딴 걸 물어요?”

“왜긴. 걱정되니까. 권지운도 개새끼면 어떡해.”

걱정?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내뱉는 남자를 비웃어 주었다.

“그쪽만 할까.”

“애기가 정 좋다면 권지운 뒷조사 한번 해 볼까? 사람 하나 붙이면 금방이야.”

“누가 깡패 새끼 아니랄까 봐, 뒷조사가 쉬운가 보네요.”

“그럼.”

“혹시 내 뒷조사도 했어요?”

이번엔 남자가 나를 비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인다.

내가 왜? 나 너한테 관심 없어. 그런 말을 하겠지.

“그러니 내가 여기 있겠지?”

“뭐라고요?”

“뒷조사했다는 말이야.”

내 예상을 뒤엎고 그가 느긋하게 시인했다.

“이걸 말해 주는 이유가 뭘까.”

시야에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권지운이 걸렸지만, 내 동공은 남자에게 고정된 채였다.

“오빠가 늘 지켜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

“잘 기억해 둬, 애기야.”

그가 설핏 웃었다.

“사과는 옷으로 대신하고 식사는 다음에 하죠.”

할 말을 잃은 사이 권지운이 다가와 남자에게 말했다. 막무가내로 우리를 끌고 갈 것처럼 굴었던 남자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내게 가 보라며 손짓까지 했다.

대놓고 내 뒷조사를 했고, 앞으로도 할 거라는 말을 한 주제에 당당하기 그지없다. 되레 나를 위해 주는 것처럼 포장하기까지 하다니.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반면, 스멀스멀 피어나는 같잖은 의문이 있었다.

나를 걱정한다는 말이 정말 그의 진심일까? 굳이 나를 뒤쫓아 영화관을 찾고, 권지운과 내가 붙어 있으니 방해하듯 의자를 걷어차고, 손을 잡으려 하자 콜라를 부어 버린 것에 남자의 진심이 담겨 있을까. 아주 조금이라도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

아니, 그렇다 해도.

권지운을 따라 걸음을 옮기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손을 흔든다. 내가 아무것도 몰랐을 때처럼. 환영처럼 남자의 주변으로 인공 연못이 펼쳐졌다.

여유롭게 헤엄치는 잉어를 구경하는 남자와 기도를 하는 척 그를 훔쳐보는 나. 어쩌면 내 인생에 마지막으로 순수했을 때. 적어도 그때의 난 남자를 못마땅해할지언정 언제 다시 나를 배신할지 몰라 전전긍긍하지는 않았다.

그게 가장 화가 난다. 내 순수를 망쳤다는 것이. 그는 나를 배신했고, 내가 다시는 누구도 믿지 못하게 만들었다. 내 순수는 남자가 훼손했다.

다리 사이가 축축했다. 마치 그날의 저택에서 나를 지켜 주듯 굴었던 것처럼, 나를 걱정한다는 그 말 한마디에 없는 남자의 진심을 쥐어짜 내 헛된 욕망을 느낀 탓이었다.

그는 내게 손 하나 대지 않고 나를 젖게 만들었다.

나는 가까스로 남자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이 이상 눈을 마주치고 있다간 정말 모든 게 망가져 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고채원의 편지가 뚝 끊겼다. 아마 CCTV를 고쳤고, 경비원이 투입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막연히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오빠가 늘 지켜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남자의 뒷조사와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

내 생각이 맞는다면, 남자는 10년 전의 진상이 드러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고채원과 내가 만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을 거다. 지은 죄가 있는 사람은 늘 후환을 염두에 두니까.

고성하의 죽음이 자살이라는 증거와 동기까지 모조리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대선 전만 되면 암암리에 음모론이 떠돌았다. 10년 전 고성하가 죽을 때도 그랬고 5년 전도, 내년 대선을 앞둔 지금도 그랬다.

그 음모론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현 정권이었다. 정권 교체를 노린 대통령 후보 살인. 뻔하다면 뻔한 소재지만, 그게 진실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선상 파티?”

아버지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영화를 보고 돌아온 뒤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어색한 공기는 감돌았다. 아버지가 어머니 이야기를 꺼내지 않겠다는 약속만 했지, 만나지 않겠다고 말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못마땅하지만,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기로 했다. 내 부모님이라고 해도 남녀 사이에 끼면 피곤해진다는 생각에는 변함없었다. 나만 빼 주면 된다.

“TG건설에서 파티를 연다고 해. 명분은 이 대표 생일이지만, 업계 사람들은 물론이고 여당 인사들도 참여한다고 하니까 꽤 유용한 자리가 될 거다.”

아버지가 고성하 쪽 사람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어 사태가 그렇게 되고 꽤 고생을 했다. 더군다나 정권이 바뀌며 아버지를 견제하는 이들도 족족 생겼다.

혹여 나를 고성하 집에 맡겼던 적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질까 봐 아버지는 유독 조심했다. 다른 것보다 그의 핸드폰에 있던 여고생이 나라는 걸 숨겨 주기 위해서였다. 어른들의 세상에 내가 또 이용당하게 둘 수는 없다고 했다. 다행히 고성하의 집안에서는 충분히 불명예스럽게 죽은 그를 더 이상 망가트릴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최선을 다해 그 일을 묻어 주었다.

TG건설과 국헌당 간에 인연이 깊은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런 TG건설과 아버지가 손을 잡았다는 것은 곧 TG건설이 아버지의 디딤돌이나 다름없다는 말이다.

아무래도 아버지는 이번 컨소시엄을 빌미로 또 정권에 붙을 모양이었다. 그래서 고성하를 연상케 하는 TG건설의 제안도 마다하지 않았을 거다. 이번 파티 역시 아버지에게 중요하리라.

나는 말없이 홍차만 마셨다.

아버지가 누구보다 열심히 회사를 키우는 이유를 알고 있다.

“이번엔 그럴 일 없어. 그때처럼 고성하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무능력한 아빠 아니야.”

“…….”

“내가 힘을 키워야 우리 딸이 안전하지. 이번에는 이 대표와도 손을 잡았으니 별일 없을 거야. 이 대표 뒤에 대통령 있는 거 알지?”

“……이민후 대표 말고 다른 사람은 만난 적 없어?”

내 물음에 아버지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다른 사람 누구?”

“아빠가 그랬잖아. 이 대표는 얼굴마담이고 실세는 따로 있다고.”

“아아, 그거?”

아버지가 이내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헛소문인 거 같아. 이 대표가 오른팔처럼 끼고 다니는 놈이 있다고는 하는데 본 적도 없고, 중요한 자리엔 나오지도 않더라.”

헛소문이 아니다. 남자는 분명 10년 전 일로 성공했음을 내 앞에서 시인했다. TG건설의 실세는 남자고, 그는 이민후 뒤에서 우리 아버지와 손을 잡았다. 이것 역시 뒷조사의 일부일까.

하지만 고성하의 죽음과 아무 관련 없는 아버지는 왜? 단순히 내 아버지이기 때문에? 아니면 내가 아버지에게 진상을 털어놓았을까 봐? 감시하려고?

“너도 시간 되면 함께 가자.”

“나?”

“그래. 업계 사람들 많이 참석하니 얼굴도장 찍어 두면 좋지. 마침 이 대표도 온대고.”

“내가 뭐 하러 거기에 가.”

“파트너 동반인데 아빤 따로 같이 갈 사람이 없잖니.”

“엄마랑 가면 되잖아.”

퉁명스레 하는 말에 아버지가 뜨끔한 얼굴을 했다. 보아하니 이미 어머니에게 말을 꺼냈다가 거절당한 모양이었다. 나는 한숨을 푹 뱉으며 잔을 내려놓았다.

“시간 되면.”

“고마워, 우리 딸.”

“들어갈게. 피곤해.”

“그래. 푹 쉬어.”

다정하게 웃어 주는 아버지를 밉지 않게 흘기며 방으로 들어왔다.

하여튼 거짓말을 못한다니까. 엄마를 만났어도 좀 숨기면 안 돼? 왜 나한테 다 들키는 건데. 괜히 신경 쓰이게.

방문을 잠그고 침대로 곧장 엎어졌다. 하나가 해결되면 또 다른 게 나를 들쑤신다. 무의식중에 허벅지를 맞대 비비다 손을 가져가는데 문득 책상에 올려 둔 핸드폰이 짧게 진동하며 화면이 켜졌다.

어두운 방 안이 핸드폰 액정 빛으로 어슴푸레해졌다. 메시지인 모양이다. 권지운이나 가끔 연락을 주고받는 동기들이리라. 귀찮아서 그냥 두려는데 반복해 진동이 울렸다.

결국 귀찮음을 무릅쓰고 몸을 일으켜 책상으로 다가갈 때까지도 메시지는 연이어 왔다. 의아하게 핸드폰을 집어 들어 보니, 발신인이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다.

모르는 번호지만 어딘가 기시감이 들었다. 께름칙해 잠금 화면을 해제하는 손가락이 더뎌졌다.

“…….”

「서을아.」

「나 채원 언니야.」

그제야 어디서 본 번호인지 떠올랐다. 고채원의 편지.

「한 번만 만나 줘.」

「부탁이야. 제발.」

무시하려고 했다.

「대호 오빠가 아버지를 죽인 거 알고 있어?」

그 이름이 나오지만 않았다면.

「아버지는 자살한 게 아니야.」

“…….”

쿵,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손에서 핸드폰이 미끄러져 책상 위로 요란하게 굴렀다. 심장이 불안하게 쾅쾅 뛰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메시지가 왔다.

「네게 부탁할 게 있어.」

참지 못하고 핸드폰 전원을 꺼 버렸다.

“어떻게…….”

고채원이 어떻게 알았을까.

전 국민적인 이슈여서 경찰에서도 철저하게 수사했다. 현장의 모든 것이 정확하게 자살을 가리킨다고 했다. 거기에 치명적인 성벽도 밝혀졌기에 표면적으로는 확실했다. 다만 고성하의 추종자들이 그를 두둔하고 나서며 음모론을 퍼트려 의혹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고채원도 그 음모론을 접하고 뭔가 이상하다고 여긴 걸까.

그런데 그녀는 정확하게 남자를 짚어 냈다. 당시 경찰은 고성하의 뒤에 남자가 있다는 걸 몰랐기에 그를 특정하지 못했지만, 고채원은 아니다. 그녀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을 수도 있다. 당시에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을지언정 화재 이후로 홀연히 자취를 감춘 남자가 이상할 만도 했으리라.

그래서 뭔가를 찾아낸 건가. 혹시 남자가 고성하를 죽였다는 결정적인 증거 같은 것을…….

“아…….”

진상을 알았다면 고성하가 내게 한 짓 역시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가담했다는 것도.

무서워.

오래전 성모 마리아상을 앞에 두고 그랬던 것처럼 몸을 웅크렸다.

내 핸드폰 번호와 사무소 위치까지 아는 고채원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몰라 하루하루 마음을 졸였다. 다짜고짜 나타나 사실을 말하라며 화를 낼 것 같아 너무 무서웠다. 하지만 경찰에 신고할 수가 없다. 아버지에게 말을 할 수도 없다.

유일하게 이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는 것은 남자뿐이지만 그를 찾아가고 싶진 않았다. 고채원이 아버지를 죽인 남자가 아닌 나를 찾는다는 게 아무래도 이상하다. 왜 당사자가 아닌 내게 접근하는 걸까.

남자와는 진작 만난 건가. 아니면 아직 만나지 못했나. 일부러 나에게 먼저 연락을 한 걸까? 그렇다면 왜?

잠깐 생각했다. 만약 남자가 고채원이 진실을 알고 있다는 걸 눈치채면 어떻게 될까.

나를 한 번 배신한 전력이 있는 그가 또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최악의 경우, 제 죄를 내게 뒤집어씌우고 또 혼자 떠나 버릴 거다. 아직 그러지 않는 걸 보면 모르는 건가? 내 생각이 맞는다면 고채원도 예전처럼 남자가 사라져 버릴까 봐 섣불리 그에게 접근하지 않고 날 먼저 찾는 거겠지.

“정말 같이 가 줄 줄은 몰랐는데. 고마워, 우리 딸.”

TG건설이 주최하는 이민후의 생일 파티에 나도 참석하기로 했다. 다른 것보다 혼자 있는 게 무서워서였다. 아마 고채원은 우리 집 주소까지 알고 있을 거다. 혹여 아버지가 집을 비운 사이 그녀가 찾아올까 봐 선상 파티에 따라나서기로 했다.

초대받은 사람만 참석할 수 있는 파티라고 했으니 적어도 배를 타고 있는 동안에는 고채원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거다. 혹시 몰라 배에 함께 오르는 악단도 미리 알아봤는데 그녀와 관련 없는 국내 교향악단이었다. 지은 죄가 있는 남자가 굳이 고채원을 초대했을 리도 없고.

남자와 마주칠지도 모르지만, 무시하면 그뿐이다. 파티 내내 아버지 옆에서 떨어지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드레스 코드에 맞춰 옷을 입었다.

실루엣과 맨살이 드러나지 않는 펑퍼짐한 검은 슈트 차림이었다. 그런 날 보곤 심란한 얼굴을 하는 아버지에게 적당히 웃어 주며 권지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는 강박적인 내 옷차림의 이유를 알기에 늘 안타까워한다.

“선배, 저예요. 어디세요?”

[가는 중이야. 넌?]

“저도 곧 출발해요.”

[그래. 아, 긴장된다.]

“선배 생일 파티도 아닌데 긴장할 게 뭐 있어요.”

[그게 아니라 너희 아버지 뵙잖아.]

“그런데요?”

[잘 보여야지.]

“됐고. 이따 배에서 봐요.”

성원 전원주택 건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어 가는 중이었다. 설계도면은 거의 완성되었고 시공사와 인테리어 업체를 비롯한 여러 하청 업체와의 계약도 끝났다. 특히 중요한 시공을 TG건설에서 맡기로 해서 사실상 설계만 끝나면 우리의 일은 거의 마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철야를 강행하는 권지운을 두고 퇴근하기가 미안해 미리 파티 이야기를 꺼냈는데, 알고 보니 그도 초대를 받았었다. 나와 함께 가고 싶지만, 거절당할 게 뻔해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던 권지운은 내가 간다니 냉큼 파티에 참석하겠다고 했다.

혼자 사무소를 비우는 것보다는 마음이 가볍지만, 또 남자와 셋이 마주칠까 봐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머리가 복잡해 터질 것 같다.

“권지운이냐?”

전화를 끊자마자 아버지가 물었다. 여전히 내가 남자와 단둘이 일을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대충 웃으며 아버지의 넥타이를 대신 묶어 주었다.

“그놈은 좀 멀쩡한가 보지? 네가 여태껏 잘 다니는 걸 보면.”

“좋은 사람이야.”

“혹시 그놈이랑 딴짓하는 건 아니고?”

“그런 거 아니야. 나 남자한테 관심 없는 거 알잖아.”

“그래. 사내놈들은 믿을 게 못 돼. 연애니 결혼이니 그런 거 생각 말고 넌 일만 열심히 해.”

그러는 아버지는 왜 아직도 어머니를 놓지 못해?

묻고 싶었지만 괜히 분위기만 망가트릴게 뻔해 참았다.

“이미 그러고 있어.”

“장하다, 우리 딸.”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아버지의 손길에 나는 복잡한 심경을 애써 숨겼다.

고채원이 소속된 악단의 국내 투어 일정은 다음 달까지다. 내달 말일 뉴욕으로 출국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적어도 여름이 가기 전에는 고채원이 한국을 떠난다는 말이다.

조금만 버티면 된다. 그러면 고채원도, 남자도 없었던 일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절반은 믿었고 절반은 기도했다.

10년 동안 성당에 발 한 번 들이지 않은 내 기도를 하느님이 들어줄 것 같지는 않지만.

이민후가 소유한 유람선은 오늘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한강을 순환 운행한다.

그래 봐야 일개 건설 회사 대표의 생일 파티인데 과연 대통령을 등에 업은 회사라 그런지 범상치 않은 인물들이 많았다. 아버지의 옆에 딱 붙어서 뉴스에서 자주 본 재벌과 정치인들을 힐끔대다 막 홀로 들어서는 권지운을 발견하곤 손을 흔들었다.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아는 얼굴을 발견하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가 내 쪽으로 냉큼 다가왔다. 파티라고 차려입은 모습이 상당히 근사했다. 늘 이마를 덮고 있던 앞머리도 깔끔하게 넘겼고, 가까이 오니 향수 냄새도 났다.

“선배, 이렇게 보니까 그럴듯하네요.”

“그래? 반하겠어?”

“아빠, 나랑 같이 일하는 권지운 선배.”

권지운의 너스레를 가볍게 무시하며 아버지를 불렀다.

친한 타 회사 사장과 대화를 나누던 아버지가 고개를 돌리더니 엄한 얼굴로 권지운을 훑어보았다. 노골적으로 전신을 훑어 대는 것에도 권지운은 아무렇지 않은 듯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백이면 백, 사람들이 호감을 느낄 만한 미소였다. 특히 어른들은 더.

대학원을 다니며 조교 생활을 하던 그가 졸업과 함께 사무소를 개업한다고 했을 때 교수님들이 얼마나 붙잡았는지는 우리 과에 전설처럼 도는 이야기였다. 똑똑하고, 성격 좋고, 예의 바른 젊은 청년을 밉게 볼 어른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우리 딸 잘 부탁하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소수 중 하나인 모양이다. 악수도 청하지 않고 딱딱하게 건네는 인사에 되레 내가 민망해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혼자 일하는 조그마한 사무소에 서을이 같은 인재가 와 줘서 얼마나 고마운데요.”

“말은 이쁘게 하는구먼.”

아버지가 코웃음을 치며 다시 지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권지운과 나는 아버지와 조금 떨어진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파티 당사자는 아직 배에 오르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온갖 음식과 술을 나르느라 홀이 시끌벅적했다. 한쪽에서는 피아노와 첼로, 비올라, 바이올린 연주가들이 사중주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매일 전화하실 때부터 알아는 봤지만, 아버님이 널 많이 아끼시는 모양이다. 나 아직 너랑 아무 사이도 아닌데 벌써 경계하시면 나중에 어떡하냐.”

“나중에 뭐요.”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이 파티를 계기로 우리 사이가 바뀔지 누가 알아.”

“이러려고 왔어요?”

권지운이 웃으며 테이블에서 샴페인 두 잔을 가져와 내게 하나를 건넸다. 나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흘겨보다 건네받은 잔을 가볍게 맞부딪쳤다.

“근데 이 대표 돈 많은가 봐. 생일 파티 한번 크게 하네. 무슨 선상 파티까지.”

“사실 TG건설이 재벌은 아니잖아요. 생긴 지 10년밖에 안 된 건설 회사일 뿐인데, 좀 특이하긴 하죠?”

“그러게. 가뜩이나 국헌당이랑 뭐 있다고 말 많은데 조용히 넘어가지, 요란하게 구네. 국헌당 의원만 몇이냐.”

“쉬쉬하는 것보다 대놓고 드러내는 게 더 당당해 보이니까 그럴까요.”

“글쎄다.”

권지운이 어깨를 으쓱이며 샴페인을 마셨다.

아버지가 우리 쪽을 힐끔 보더니 이내 별말 없이 시선을 돌렸다. 권지운이 아주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핑거푸드를 몇 개 주워 먹는데 갑자기 입구 쪽이 소란스럽더니 이민후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조금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내 옆에 있던 권지운뿐만 아니라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그랬다.

“이 대표 왜 저래? 들은 거 있어?”

“아니요. 미팅할 때만 해도 멀쩡했는데.”

하얀 슈트를 차려입고 휠체어에 탄 이민후가 주변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며 안쪽으로 들어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그는 양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얼떨떨하게 그 모습을 훑다가 문득 그 뒤로 시선이 넘어갔다.

“…….”

이민후의 휠체어를 밀며 들어오는 남자는 딱 맞게 떨어지는 짙은 회색 슈트 차림이었다. 특유의 탁한 머리색과 한 몸인 듯 어우러진 모습은 절로 주변인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권지운마저 혀를 찰 정도였다.

“누가 보면 저 사람이 주인공인 줄 알겠네. 멀쩡하게 생겨선 왜…….”

나를 돌아보는 권지운의 시선을 알아차렸음에도 나는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물려 있던 입술이 서서히 벌어지고 동공이 느슨해지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정말 껍데기 하나는 완벽하다.

넋을 놓고 있는데 묵묵히 휠체어를 끌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느리게 굴러가는 남자의 눈동자가 내 전신을 훑었다. 비웃을까. 아니면 또 입 모양으로 애기니 뭐니 헛소리를 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입술이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지 가늠하며 긴장된 침을 삼켰다.

“…….”

그러나 이내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휠체어의 방향을 바꿔 가장자리부터 이민후가 손님들과 인사를 할 수 있게 이끈다.

그러니까…… 날 무시했다.

“하…….”

신경질적인 한숨이 뱉어졌다.

허탈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으며 자존심이 상했다.

나를 무시했다. 남자가 나를 모르는 척했다. 이런 적이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어 봐도 떠오르는 게 없다.

그래. 남자가 굳이 이 많은 사람들 틈에서 나에게 알은체할 이유는 없다. 그것도 파티의 주인공이 휠체어를 타고 와서 모두의 관심이 쏠린 상황인데, 이런 소란 중에 우리가 언제부터 그렇게 친밀했다고 구태여 반가워하겠어. 설령 알은체를 했더라도 내가 무시했을 거다.

그런데도 짜증이 솟구쳤다.

“서을아.”

“…….”

“진서을.”

멍하게 있다가 권지운의 목소리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나는 그가 내 손등을 손바닥으로 받치고 있는 걸 뒤늦게 발견했다. 정신을 다른 데 놓고 있느라 샴페인잔이 기우는 것도 몰랐다. 권지운 덕에 쏟지 않을 수 있었다.

“아……. 고마워요, 선배.”

권지운이 어깨를 으쓱이며 내 잔을 지나가는 서버에게 넘겨주었다.

간신히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었음에도 모든 신경이 그리로 쏠려 있었다. 세포 하나하나가 남자의 움직임을 좇으며 곧 그가 가까워진다는 경고를 했다. 심장이 불쾌하게 뛰었다.

홀에 있는 손님 한 명 한 명과 인사를 주고받던 이민후의 방향이 아버지에게로 향했다. 남자의 인영이 시야에 걸리자 나도 모르게 권지운의 뒤로 숨었다.

“자꾸 이러면 궁금해지는데.”

내가 남자를 의식하는 걸 눈치챘는지 권지운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다른 남자를 신경 쓰는 건 분명 무례할 수 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무시를 당했다. 그 오래전 창밖에서도 내게 인사를 건넸던 남자가 나를 외면했다는 게 못내 충격이었다. 그리고 내가 충격을 받았다는 게 너무 자존심 상했다.

남자를 향한 내 감정이 어떤 종류인지는 알고 있지만, 알고 있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다. 나는 여전히 내 감정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아, 진 사장님 따님이 서을 씨군요. 이런 인연도 있네요.”

“저도 서을이에게 이야기 들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 대표님.”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남자와 내 관계도 아는 이민후가 내가 아버지의 딸이라는 걸 몰랐을 리 없다. 가식적인 인사를 나누던 이민후가 문득 내 쪽을 돌아봤다. 어색하게 묵례를 했지만, 그는 별 반응 없이 아버지와 대화를 이어 갔다.

조금 멋쩍어지는 찰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

남자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계속 나를 보고 있었던 것처럼 직시했다. 무시할 땐 언제고 왜 또 저렇게 보는 건가 싶어 미간을 구기는데 때마침 이민후와 아버지의 대화가 마무리되었다. 남자가 이민후를 우리 쪽으로 끌었다.

“권 대표님, 서을 씨,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축하드립니다, 이 대표님.”

“다리는 왜……. 괜찮으세요?”

“가벼운 접촉사고가 나서요. 별일 아닙니다.”

시야에 걸리는 남자를 무시하며 이민후와 인사를 주고받았다.

권지운이 공사 이야기를 꺼내면서 두 사람은 가벼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옆에서 적당히 웃으며 대화를 듣는 척했지만 사실 나는 전혀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서을 씨는 아버님과 함께 오셨나요, 아니면 권지운 씨?”

돌연 이민후가 내게 말을 걸었다. 남자를 신경 쓰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던 터라 한 박자 늦게 반응하며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이 대표가 그건 왜 궁금할까.”

내내 조용히 있던 남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민후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또 오지랖 부렸나 보네. 흘려들어요, 서을 씨.”

또?

“자, 이 대표. 아직 맞을 손님이 산더미야.”

남자가 멋대로 휠체어를 끌었다. 점점 멀어지는 두 사람을 미심쩍게 바라보는데 문득 시야가 가려졌다. 권지운이 내 앞을 가로막은 탓이었다.

“야경 보러 갈래?”

“아니요. 저는 아빠랑 같이 있을게요.”

“아버님 지금 바쁘신 거 같은데. 혼자 있으면 심심하잖아. 가자.”

그의 말대로 아버지는 인맥 쌓기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문득 고성하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던 예전 모습이 겹쳐 보였다. 없는 종교까지 만들 만큼 고성하에게 공을 들였었다. 만약에 고성하가 죽지 않았다면 아버지의 사업은 지금보다 더 번창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당신보다 어려 보이는 이들에게까지 깍듯하게 구는 아버지를 보고 있자니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그래요. 가요, 선배.”

아버지와 같이 있으면 기분이 더 착잡해질 것 같아 순순히 그를 따라나섰다.

홀을 가로지르다 잠깐 고개를 돌렸다. 술과 음식을 즐기는 많은 사람 틈에서 단번에 남자가 보였다. 지루한 듯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던 남자의 눈동자가 내게로 와서 멈췄다. 마치 나를 찾았던 것처럼.

“…….”

그러나 여전히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잠깐 그를 바라보다 이내 몸을 돌려 홀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바람이 꽤 강했다. 배는 이제 막 출발하고 있었다. 앞서간 권지운이 에스코트하듯 내 쪽으로 손을 뻗었지만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지나쳤다.

“이런 건 작업이 아니라 매너라고 배웠는데.”

“야경 예쁘네요.”

한강 너머로 펼쳐진 야경을 보며 말을 돌리자 그가 피식 웃으며 내 옆에 나란히 섰다. 사실 야경에는 큰 감흥이 없었다. 불 켜진 건물 따위야 퇴근하면서도 항상 보는 것이고, 강은 그냥 새까말 뿐이었다.

“일은 할 만해?”

난간에 팔을 걸친 채 멍하니 불이 들어와 있는 창문 수를 세고 있는데 권지운이 물었다. 나는 팔 위에 턱을 기댄 채로 고개를 돌렸다. 깔끔하게 넘긴 권지운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살짝 흐트러졌다.

“신기하다. 너랑 내가 지금 이렇게 같이 있는 거.”

권지운은 특유의 상냥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기본적으로 모두에게 보이는 친절 위에 나에게만 더해지는 호감 어린 눈빛, 그것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면서도 선을 지키는 담백함. 고백을 할 때도 딱 저런 얼굴이었다.

나는 그게 참 신기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모두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감정 하나 조절하지 못해 허우적대다 잠식되는 이들을 얼마나 한심하게 여겼던가.

그러나 권지운은 분명 나를 좋아하고 있음에도 멍청해 보이지 않았다. 되레 현명하게 다가갈 때와 물러날 때를 구분할 줄 알았고, 제 감정을 강요하지 않았으며, 갖지 못해 안달 내지도 않았다.

“나한테 와 줘서 고마워.”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요. 선배한테 간 게 아니라 선배 회사에 간 건데.”

“나도 그 말 한 건데.”

그러나 나는 그것이 더 부담스러웠다. 차라리 막무가내로 들이댄다면 피할 명분이라도 있을 텐데, 피하면 유난스럽고 가만히 있으면 불편한, 애매한 위치였다.

솔직히 말하면 어떤 면에서는 권지운이 스토커보다 더 불편하다. 스토커는 모두가 입을 모아 나쁜 놈이라고 비난하지만 권지운은 그 반대다. 오직 나만 아는 불편함. 그것이 나로 하여금 그를 더 밀어내는 요소가 된다는 걸 권지운은 모를 거다.

왜냐하면 보통의 연애는 이렇게 발전하니까. 누군가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는 어색함은 곧 그를 다르게 의식하게 만드는 양분이 되고, 뚜렷한 이름이 없는 감정은 양분을 먹고 사랑으로 자란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특별하게 여기게 되는 것이 권지운에겐 익숙할지 모르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시작부터 잘못되었다.

사실 나는 내가 남자에게 특별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장난처럼 던지는 호칭, 농담, 우는 나를 위해 스스럼없이 내어 준 공간, 그리고 구원.

그 모든 것들이 양분이 되어 사랑을 키워 냈으나 애초에 특별하다는 전제부터가 잘못된 것이었다. 오히려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쉽게 쓰고 내다 버렸겠지.

“선배는 좋은 사람이에요.”

그러니 버림받아 잔뜩 모난 나 같은 애 말고 더 좋은 사람이 어울릴 거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권지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게 안 짚어 줘도 아직 거기까지인 거 알아.”

“…….”

그가 부드럽게 내 거절을 막았다.

내가 마지못해 입을 다물자 적막이 흘렀다. 그나마 시끄러운 내부 소음과 음악소리, 바람소리, 뱃소리 같은 것들이 공기 중에 섞여 어색한 분위기를 채워 주었다.

나는 강을, 권지운은 나를 눈에 담으며 막연히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을 때,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곧장 고개를 돌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막연한 기대를 했던 것 같다.

그래, 당신이 정말 날 모른 척할 리가 없지, 같은 거.

“실례합니다. 대표님께서 승선하신 손님들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다가온 건 상자 두 개를 든 유니폼 차림의 서버였다. 혼자 생각하고 혼자 창피해진 나는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그녀가 내미는 상자를 받았다. 권지운도 마찬가지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편히 즐기십시오.”

서버가 자리를 뜨고, 허탈한 심정으로 제법 무게가 나가는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머그잔이네.”

권지운이 상자 안에서 컵 하나를 꺼냈다. 손잡이와 밑바닥에 금칠이 되어 있고 하얀 표면에 알 수 없는 문양이 그려진, 그럴싸한 컵이었다. 나 역시 상자를 열어 보았다. 같은 컵이겠지만 참담한 심정을 다스리려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과연 권지운의 것과 똑같은 컵이 들어 있었다.

감흥 없이 그것을 집어 드는 순간, 나도 모르게 상자를 손에서 놓쳤다.

쨍그랑─.

상자와 함께 떨어진 컵이 깨지는 소리가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괜찮아?”

권지운이 서둘러 내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나는 놀란 채 굳어 있을 뿐이었다.

방금 내가 본 게 대체…….

“다치진 않았지?”

상자와 컵을 주우려는 듯 무릎을 굽히고 앉는 권지운을 서둘러 막았다. 다행히 떨어지면서 상자가 뒤집혀 안에 들어 있던 게 드러나진 않았다. 나는 상자로 향하는 권지운의 손을 다급히 붙잡았다.

“제가, 제가 할게요.”

“내가 할게. 들어가 있어.”

“아니요. 괜찮아요.”

도우려는 권지운과 막는 나. 잠깐의 실랑이가 이어졌다. 그가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볼까 봐 초조한 심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권지운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그때였다.

저벅저벅. 또 발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쪽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선배. 제가 치울게요. 네?”

“그러다 손 다치면 어쩌려고.”

저벅저벅.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

머리 위로 지는 그림자.

그리고 익숙한 담배 냄새.

“무슨 문제 있습니까?”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남자가 맞음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대신 권지운이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린 틈을 타 그의 손을 재빨리 밀어냈다.

“저런. 사람을 부르지.”

무시할 땐 언제고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엎어진 상자 바닥을 손바닥으로 덮은 채 고개도 들지 않고 대꾸했다.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끄고 가세요.”

“그래, 그럼.”

“…….”

남자가 곧장 나를 스쳐 지나갔다. 바람을 가로지르며 멀어지는 남자에게서 풍겨 나온 담배 냄새가 코끝을 찔러 댔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권지운을 올려다보았다.

“선배, 먼저 들어가요. 전 이거 치우고 갈게요.”

“…….”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좀…….”

가만히 내 눈을 바라보던 권지운이 나지막이 한숨을 뱉었다.

“난 가끔 내가 눈치가 너무 빨라서 속상하다니까.”

권지운 뒤로 몸을 돌린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나도 좀 그렇게 봐 주지.”

지나쳐 간 주제에 왜 다시 나를 돌아볼까. 그 생각을 하느라 권지운이 하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물끄러미 와 닿는 시선에 속이 꼬였다.

“알았어. 먼저 들어가 있을게. 천천히 와.”

언젠간 나도 권지운처럼 성숙하게 감정을 다스릴 수 있을까. 남자의 앞에서도 태연하게 굴 수 있을까. 사랑이 내게 트라우마가 되지 않는 순간이 올까.

어느새 남자도 권지운도 사라진 선미에는 나뿐이었다. 그제야 나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들었다. 조각난 컵 위로 사진 한 장이 떨어져 있었다.

“…….”

침대 위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잠들어 있는 열아홉의 내가 담긴 사진이었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짧은 머리카락과 앳된 얼굴 때문이 아니다. 열아홉이라고 정확하게 특정할 수 있는 건, 내 몸을 덮고 있는 까만 이불 때문이었다. 이 이불은 분명…….

“적당히 둘러대고 여기 숨어 있어.”

남자의 컨테이너.

“이게 왜…….”

이 사진은 대체 뭐고, 왜 상자에 들어 있는 건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이 남자라는 것은 확실했다. 내가 그 컨테이너에서 머물렀다는 걸 아는 사람은 남자와 고채원뿐인데, 고채원은 나중에 알았으니 사진을 찍었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남자가 내게 이 사진을 보낸 건가. 왜?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할 수 없는 사진을 불안하게 살피며 뒤로 뒤집는 순간 익숙한 필체를 발견했다.

「지하로 와 줘. 기다리고 있을게.」

고채원.

고채원이다. 편지와 똑같은 글씨체를 단번에 알아봤다.

당혹감에 손이 떨렸다.

지금 고채원이 이 배에 있다. 왜? 어떻게? 선상 파티에는 초대한 사람만 참석할 수 있고, 신분 확인 절차도 거쳤는데…….

“…….”

그러나 남자가 고채원을 초대했다면.

심장이 지끈, 조였다 풀어졌다.

고채원은 남자가 제 아버지를 죽였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경찰도 찾아내지 못한 증거를 그녀가 발견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만약 그녀가 스스로 알아낸 것이 아니라, 남자가 직접 이야기해 준 거라면 몰라도.

무심하게 나를 외면하던 남자의 표정이 눈앞에 그려졌다.

갑자기 바뀐 태도가 이것과 관련이 있나.

내내 마음에 품고 있던 가설이 다시 떠올랐다. 어쩌면 남자도 고채원을 사랑했을지 모른다는.

사랑했다면 자신 때문에 아버지를 잃은 고채원에게 죄책감을 느꼈을 테고, 이내 자신이 죽였음을 실토했을 것이다. 내 이야기도 했겠지. 아니, 어쩌면 나 때문에 죽였다고 또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채원은 믿을 수가 없었으리라.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제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사건의 관계자인 내게 사실 확인을 하기 위해 계속해서 편지를 보냈다면, 얼추 앞뒤가 맞는 것 같다.

내가 편지를 무시하니까 기어이 배에 올라타 이런 사진까지 보내며 10년 전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래. 남자가 찍었을 이 사진을 고채원이 어떻게 가지고 있겠어. 남자에게 고채원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보였던 무관심한 태도에 속았다. 그에게 그렇게 당해 놓고도 또 믿었다.

이를 악물고 주머니에 손을 밀어 넣자, 권지운이 준 라이터가 손에 잡혔다. 가지고 다니길 잘했다.

사진을 태워 버릴 심산으로 라이터를 켰지만, 바람이 세서 불이 자꾸만 꺼졌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신경질적으로 라이터를 집어 던진 나는 사진을 손안에 구긴 채 몸을 일으켰다.

고채원이 이 사진으로 나를 자극하려 했다면 분명 성공했다.

하나 과정이 어찌 되었든 고성하를 죽인 건 남자다. 잘못은 엄연히 그에게 있다. 나는…… 나는 피해자일 뿐이다. 고성하의 손에 농락당하며 아무것도 하지 못한 불쌍한 열아홉 살짜리였을 뿐이다.

내게 손을 댄 고성하와 손을 뻗은 남자. 잘못은 그 둘에게 있다.

그런데 왜 자꾸 나를 건드려.

만약 내 가설이 모두 들어맞는다면, 사방이 강이라 도망칠 틈 없는 배 위로 고채원과 나를 끌어들인 남자의 목적은 무엇일까. 뻔하다. 내게 책임을 전가할 생각이겠지.

내가 반박하면 나도 저 한강 물에 집어 던질 생각이었나.

그래서 갑자기 내 인생에 나타나기 시작한 건가.

고채원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내가 죽음을 사주했다고 했을까.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근거도, 맥락도 없이 모든 게 내게 불리하게 느껴졌다.

내부 복도로 발을 들여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찾아 헤맸다. 지나가는 사람과 부딪혔지만, 사과를 할 정신도 없었다. 쾅쾅쾅, 날뛰는 감정만큼 발소리도 거칠었다.

기어코 찾아낸 계단 앞에는 「관계자 외 출입 금지」 팻말이 놓여 있었다. 그것을 비웃으며 계단 아래로 발을 들였다. 나는 자그마치 10년을 고성하의 죽음과 두 사람의 사랑에 얽매인 관계자다.

바로 위 홀에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발소리와 희미한 음악소리가 진동하듯 울렸으나 완전히 지하로 들어서자 엔진소리가 더 커서 다른 것들은 전부 묻혔다.

지하는 곳곳에 작은 전등만 켜져 있어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귀를 틀어막고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이 어딘가에 고채원이 있다.

그 사람이 고성하를 죽인 게 맞아.

내 핑계를 댔을지언정 나 때문은 아니야.

그 사람은 정택운과 손을 잡았어. 몰랐지?

애초에 그가 먼저 배신을 한 거야. 내 잘못이 아니야.

그러니까 더는 내게 연락하지 마.

내 인생에 나타나지 마.

끔찍한 열아홉의 기억은 이제 그만 잊고 싶어.

“……그래……!”

그때였다. 어딘가에서 가느다란 음성이 들려왔다. 시끄러운 엔진소리와 귀를 틀어막은 손바닥을 뚫고 들어올 만큼 가늘고 높은 목소리였다.

아주 오랜만이지만 단번에 그것이 고채원의 목소리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나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시간이 지난 그녀의 목소리가 제 어머니와 흡사한 톤이었기 때문이다. 고성하가 유독 거슬려하던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 또한 그건 남자와 섹스를 할 때와 비슷했다.

나는 천천히 손을 내리고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어쩐지 아무도 나를 잡지 않는다 싶었어……!”

“…….”

“일부러 나를 배에 태운 거야?”

혼자 있는 게 아니다. 나를 지하로 불렀으면서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어렵지 않게 그 상대를 유추할 수 있었다.

“알고 탄 거 아닌가.”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마주친 사이의 대화가 아니었다. 역시, 내 예상대로 두 사람은 이미 만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곧장 그들 앞에 달려가 더는 나를 엮지 말라고 화를 내고 싶었지만, 우선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어딘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사랑하는 연인 같은 분위기는 풍기지 않았다.

특히 고채원에게서.

남자에게 푹 빠져 있던 고채원을 똑똑히 기억하는 나로서는 그녀가 남자를 이런 말투와 감정으로 대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뭐가 궁금해서 배를 탔을까.”

“몰라서 물어?”

“그런 거 같아?”

“…….”

“채원아, 내가 널 왜 여기 태워 줬다고 생각해?”

위이잉, 간헐적으로 엔진소리가 커졌다. 나는 최대한 그들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 사진…… 오빠가 찍은 거지?”

“아아, 사진.”

“오빠 방이잖아.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남자가 나긋하게 물었다.

“아버지는 그런…… 그런 사람이 아니야. 우리 아버지야. 내가 알아. 오빠가 불 지른 거 숨기려고 서을이 사진 이용한 거야. 오빠가 서을이 사진 찍어서 언론사에 넘긴 거잖아! 내 말이 맞잖아.”

나는 떨리는 손을 펼쳐 구겨진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이 사진이었어.

언론에 제보된 고성하의 핸드폰에 담긴 사진의 정체를 이제야 알았다.

상상도 못 했다.

고성하는 언제나 나를 훔쳐봤고, 그러니 몰래 내 사진을 찍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그걸 발견하고 넘겼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를 도촬한 건 고성하가 아니라 남자였다.

그래서 나를 자신의 방에 숨겨 주었나. 유용하게 써먹을 사진을 확보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당신은 정말 내가 우스웠나 보다. 처음부터 나를 그렇게 이용하려고 했던 거야? 컨테이너에서 처음 마주친 그 순간부터 미성년자인 나를 이용하면 고성하에게 손쉽게 오명을 씌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내 주변을 얼쩡거렸어?

마침 고성하가 정말 나를 희롱하고 있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겠다. 고성하에게 희롱당한 나는 그 자체로 완벽한 알리바이니까.

정말로 그는 단 한순간도 내 앞에서 진심이었던 적이 없었던 거다.

모든 순간이 고성하를 죽이기 위한 계단이었을 뿐이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허벅지 사이가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허벅지로 손을 내렸다.

“그래서 이렇게 편지를 보냈구나.”

“그걸 왜 오빠가…….”

찌익,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난 또. 진서을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경고한 지 반년도 되지 않았는데 자꾸 얼쩡거려서 채원이가 미쳤나 했지.”

고개가 훅 들렸다.

반년? 경고? 그게 무슨…….

위이잉─. 머릿속에 혼돈이 일었다.

“오빠가 죽였잖아!”

“그러니까. 죽인 건 난데 왜 애먼 애를 괴롭혀.”

“누가 괴롭혔다는 거야……! 오빠가 아버지를 그렇게…… 그렇게 만든 거면, 더러운 누명 같은 거라도 없애 주려고, 난…….”

고채원이 울기 시작했다.

“오빠, 도대체 서을이랑 무슨 사이야.”

“아무 사이도 아닌데.”

바지 위로 안쪽 살을 쥐어뜯으며 기둥에 몸을 기댔다. 어디에 의지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다.

“난 오빠가 서을이한테 마음이 있는 줄 알았어.”

욱신, 손톱이 옷감 너머의 살을 찔렀다.

“오빠가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는 건 그 애가 처음이었으니까. 나한테는 그렇게 무관심하던 오빠가 서을이에게 방을 내줬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데.”

“…….”

“그때 오빠 나한테 뭐라고 그랬어. 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고…….”

“옛날이야기는 이제 재미없어.”

“그래. 옛날이야기야!”

고채원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찢어졌다. 푸욱, 그 반동으로 손톱이 더 파고들었다.

“오빠가 이럴 작정으로 서을이에게 다가간 거라면, 내가 그 애를 미워하면 안 됐어!”

“…….”

“난 그것도 모르고 질투하고, 화내고…….”

아무리 쥐어뜯어도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뭐라도 없을까. 나를 더 아프게 할 수 있는 것. 날뛰는 감정을 억누를 수 있는 것.

눈을 이리저리 굴렸지만 지금 상황에 마땅한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서을이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서을이도 알아야지. 오빠가 자기를 어떻게 이용했는지. 그리고 사실을 밝혀야지!”

“그런다고 달라질 건 없어.”

“알아. 오빠가 사람을 죽였대도 경찰이 못 잡아가는 거. 그러니 속 편하게 불을 질렀겠지! 그래도 말할 거야!”

사람을 죽여도 못 잡아간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찰나, 고채원이 쿵, 발을 굴렀다.

“서을이 여기로 불렀어.”

“…….”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어쩌면 벌써 와서 우리 이야기 다 듣고 있을지도 몰라.”

움찔, 놀라서 몸을 세우는데 남자가 한숨을 뱉었다.

“채원아.”

격양된 고채원의 목소리와 달리 평온하기 짝이 없는 음성이었다.

울부짖는 고채원과 살을 쥐어뜯는 나 그리고 여유로운 남자. 죄는 남자가 지었는데 왜 괴로운 건 우리일까. 모든 게 앞뒤가 맞지 않았다.

“죽고 싶어?”

“……뭐?”

그 말에 당황한 건 고채원뿐만이 아니었다.

나 역시 손을 멈추고 기둥 너머를 돌아봤다. 고채원과 남자의 옆모습이 보였다. 남자가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타이트한 슈트가 그에 맞춰 이리저리 구겨졌다. 묘하게 고요한 공기의 흐름이 불안하다.

“죽여 줄까?”

설마…….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허벅지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져야 했다.

넘어지는 소리에 두 사람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채원이 나를 발견하곤 눈을 크게 떴다. 이 와중에도 여전히 예쁘구나. 천사 같은 고채원의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마치 악마 같았다. 나와 고채원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든 악마.

나는 더듬더듬 바닥을 짚어 몸을 일으켰다.

“애기야, 들었어?”

남자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고채원이 서둘러 달려와 나를 부축했다.

“서을아, 언니가 다 이야기해 줄게. 내가 다 말해 줄 테니까 제발 우리 아버지 누명 좀…….”

“입 다물어.”

남자의 발밑에 찢어진 고채원의 편지가 있었다. 가방에 넣어 두었던 그 편지. 그걸 남자가 가지고 있었다. 언제 몰래 빼돌린 거지.

“옛정을 생각해서 참아 줬는데, 이런 식이면 너 하나 없애는 거 일도 아니야, 채원아.”

“…….”

“네 말대로 널 죽인다 한들, 아무도 날 못 잡아가는데 내가 뭘 무서워하겠어.”

“오빠……!”

“애기야, 어떻게 생각해?”

남자가 내 쪽으로 화살을 돌렸다.

“자꾸 옛날이야기 들먹이는데 그냥 죽여 버릴까?”

“하…….”

실소가 터졌다.

“누가 보면 또 날 위하는 줄 알겠네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볼품없이 떨리고 있었고, 눈가는 흐릿했다.

남자에 대한 배신감은 충분히 느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와 얽히면 얽힐수록 나는 계속 버려진다.

“언니한테 해 줄 말 없어. 그러니까 그만 찾아와.”

내 팔을 부축한 고채원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녀가 덜덜 떨며 나를 돌아봤다.

“서을아, 제발…….”

“제발 나 좀 내버려 둬!”

“…….”

고채원은 다 알고 있지만 단 하나는 모른다. 고성하는 정말로 나를 희롱했다. 나는 아직도 그의 손이 몸을 더듬었던 끔찍한 감각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 고성하의 오명을 벗겨 줄 수 없다.

거칠게 고채원을 밀어내고 절뚝대며 그녀와 남자 사이를 가로막았다.

“이번엔 고성하 딸을 없애 달라는 사주라도 받은 모양이죠?”

“아직은 아니야.”

“언니 건드리지 마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죄라면 죄겠지만, 그녀도 나와 마찬가지로 남자와 고성하가 만들어 낸 지옥 같은 현실에 내던져졌을 뿐이다. 그다지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남자에게 휘둘리는 그녀에게 동질감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냥 두면 계속 귀찮게 할 거 같은데.”

“만약에 해코지하면 신고할 거예요.”

남자가 피식 웃었다.

“무서워라. 알았어. 감옥 안 가려면 조심해야겠네.”

놀리듯 대답한 남자가 대뜸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의 뒤에서 부하가 튀어나왔다. 남자가 우리 쪽을 가리켰다.

“데려가.”

“네.”

성큼성큼 다가온 부하가 내 쪽으로 향하는 듯하더니 이내 스쳐 갔다. 그러곤 내 뒤에 있는 고채원의 팔을 붙들었다.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다급히 남자를 돌아봤다.

“언니 건드리지 말라고……!”

“하선할 때까지 눈에 안 보이게 해.”

“읍……!”

“알겠습니다.”

“이봐요!”

고채원은 반항할 틈도 없이 부하에게 입을 틀어막힌 채 끌려갔다. 지난번에 나를 덮치려 했던 사내를 한강에 빠트렸다는 게 떠올라 눈앞이 캄캄해졌다.

“멈춰요!”

서둘러 그 뒤를 쫓으려는데 남자가 내 팔을 잡아 세우는 게 먼저였다.

“걱정 마, 안 죽여.”

“놔요! 채원 언니 어디로 데려가는 거예요!”

내가 그의 말을 믿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불신 어린 눈으로 노려보며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남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권지운은 어쩌고 여기까지 쫓아왔어.”

“놓으라고!”

“걷는 건 왜 그래? 다쳤어?”

남자가 비틀거리는 다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신경 끄고 이거 놔요. 언니 어디로 데려간 건지나 말해.”

“적당한 객실에 처박아 둘 거야. 됐지?”

그래도 불안함은 가시지 않았다. 남자의 손을 세차게 밀어내는 순간, 그가 팔로 내 허리를 감아 세웠다.

훅, 몸이 그에게로 딸려 갔다. 남자의 몸과 내 몸이 맞닿았다. 졸지에 품 안에 갇힌 나는 코를 찌르는 담배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가슴팍을 밀었다.

“뭐 하는 거예요!”

그가 반대쪽 손으로 내 얼굴을 잡아 고정시켰다. 그러곤 가늠하듯 뜯어보기 시작했다. 이목구비 하나하나에 남자의 눈길이 머물렀다. 머무른 자리마다 화상을 입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권지운이랑 사이좋게 놀다가 절뚝대니까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네.”

“무슨…….”

“섣불리 굴지 마. 아직 알아보는 중이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다만 남자의 미묘한 표정 변화는 모를 수가 없었다. 나를 한 겹 한 겹 벗겨 내는 집요한 시선은 피해도 끝까지 따라붙었다.

떨군 시선 끝에 구겨진 채 바닥을 나뒹구는 사진이 들어왔다. 아무것도 모르고 잠든 나를 훔쳐보고, 사진을 찍으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니, 생각만 했을까. 잠든 내 몸을 만지며 자위하던 고성하가 떠올랐다. 역겨움에 입 안 여린 살을 깨물었다.

남자는 내 앞에서 늘 거짓이었다. 내가 유일하게 의지했던, 한 번도 나를 더럽게 보지 않았던 그 모습조차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연막이었다면…….

“그쪽도 날…… 만지고 싶었어요?”

허리를 옭아맨 남자의 팔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그런데도 나는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올려다볼 뿐이었다.

“나를 만지고 싶었냐고 묻잖아요.”

그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런데.”

“…….”

“왜? 허락해 주게?”

커다란 손바닥이 허리를 움켜쥐었다. 순간 온몸의 털이 삐죽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움찔, 몸을 움츠리자 되레 그의 품에 안기는 꼴이 되어 급히 밀어냈다.

남자가 입꼬리를 비틀며 나를 놓아주었다.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는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그에게서 벗어났음에도 여전히 갇힌 기분이 들었다.

“흥분했구나.”

남자가 쉽게 내 속을 파고들었다. 당혹감에 눈가가 젖어 들었다.

불쾌하게 메슥거리는 속과 달리 요동치는 심장과 축축한 다리 사이.

말도 안 된다.

“오빠한테 만져지는 상상했어?”

나는 부정하지 못하고 입 안 여린 살을 깨물었다.

잠든 내 몸을 만지며 커다란 성기를 훑는 남자를 나도 모르게 상상했다.

그리고 그것에 흥분했다.

미쳤어. 제정신이야? 희롱당하는 상상으로 발정하다니.

겪은 게 그런 것뿐이라 싸구려 같은 생각밖에 하지 못하는 건가. 결국 나도 이런 인간이 되어 버린 건가. 나 스스로가 끔찍하게 느껴졌다. 이상 성벽은 비단 고성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기대하는 얼굴로 보면 보답하고 싶어지는데.”

“나, 난…… 난 그런 사람 아니야.”

헛구역질이 튀어나와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나, 윽……. 그렇게 더러운 사람 아니에요.”

잠자코 나를 지켜보던 남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누가 더럽대?”

“…….”

“매력적인 이성 앞에서 발정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야.”

남자가 눈짓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그를 따라 시선을 내린 나는 성기 모양대로 도드라진 슈트 윤곽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가 태연히 그 위를 쓸며 웃음을 흘렸다. 마치 나를 꼬시기라도 하는 것처럼 야한 미소였다.

이런 식으로 여자들을 홀려 난잡하게 놀았나 보지?

머리로는 그를 신랄하게 평가하면서도 아래는 젖어 갔다. 주룩, 흐르는 물리적인 감촉에 소름이 돋았다.

“반응을 보아하니 권지운이랑은 아직인 거 같고.”

“선배가 갑자기 왜……!”

“이런 식이면 나중에 꽤 애먹겠는데, 도와줄까?”

“뭐라고요?”

그의 손은 여전히 성기 위에 머물러 있었다.

“애기 상상대로 해 줄까 묻는 거야.”

“고성하처럼 나를 만지겠다는 말이에요?”

“고성하랑은 다르지.”

“다르긴 뭐가 달라.”

“고성하는 네가 원하지 않았고, 나는 네가 원하잖아.”

그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원한 적 없어요.”

“그래? 아쉽네.”

남자가 다리 사이에서 손을 떼며 혀를 찼다. 그러곤 뒤로 물러났다.

“착각한 거면 사과할게. 미안해, 애기야.”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오히려 그는 내 거짓말을 간파한 얼굴로 떠보듯이 굴었다.

내 속은 전부 꿰뚫어 보면서 제 속은 보여 주지 않는다. 하지만 보여 주지 않는다고 보이지 않을 리 없다. 존재감이 드러나는 사타구니와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헛구역질이 올라왔지만 애써 눌러 삼켰다. 이 이상 남자에게 휘둘린다면 나는 정말 한심하고 멍청한 족속이 될지도 모른다.

“그쪽이 나를 원하는 건 아니고?”

쏘아붙이듯 한 말에 남자가 한쪽 눈썹을 들었다.

“처음부터 나한테 발정한 거 모를 줄 알아요?”

“애기야, 옷 젖었다. 어제도 그랬을까.”

성수에 젖은 옷을 가리키며 던졌던 은근한 욕망을 사실은 알고 있었다. 물론 그 뒤로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아 남자를 믿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믿었던 모습들이 전부 거짓이었다면 가장 처음 보여 준 모습이 진짜였으리라.

서슬 퍼런 내 시선을 잠자코 받고 있던 남자가 이내 바람 빠지듯 웃었다.

“그래서?”

“내 핑계 대지 말라고.”

“저런.”

그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그렇게 해 줄 때 고맙게 여기지.”

훅, 한순간에 담배 냄새가 코 바로 앞까지 끼쳤다. 눈 깜짝할 사이 다가온 남자가 순식간에 나를 벽으로 밀어붙인 탓이었다.

차갑고 단단한 금속에 등이 부딪혔다. 아파할 틈도 없었다.

“으읍!”

신음과 함께 벌어진 입 안으로 남자의 혀가 파고들었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욕정 어린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 내고 있었고, 오기로 그를 도발했으니까.

하지만 막연히 상상만 했을 뿐이다. 막상 진짜로 입술이 집어삼켜지니 강한 거부감이 밀려들었다.

“흣……!”

다급히 어깨를 밀어냈지만, 그럴수록 남자의 혀는 더 깊은 곳까지 침투했다. 고개를 완전히 옆으로 꺾은 채 조금의 틈도 내어 주지 않고 입술이 맞물렸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 보는 타인의 입술은 뜨겁고 독한 담배 맛이었다. 강제로 턱이 벌어지며 침이 고여 들었다.

연신 남자의 어깨를 내리쳤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인 침을 모조리 빨며 마치 내 입 안을 제 것인 양 배회했다.

금방이라도 구토를 할 것처럼 속이 뒤틀리는 동시에 몸이 달아올랐다.

거대한 거부감과 막대한 욕망. 상반되는 두 감정이 나를 하늘과 땅으로 번갈아 가며 집어 던졌다.

“흐으, 웁…….”

숨을 쉴 수조차 없게 맞물린 입술 사이로 간신히 숨을 뱉어 냈지만, 남자는 그것조차 거슬린다는 듯 내 턱을 들어 올렸다. 내 목이 빠듯하게 꺾이고, 그는 고개를 더 눌러 내렸다.

이러다 목구멍까지 혀가 파고드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마저 드는 그때, 다리 사이를 벌리며 파고드는 게 있었다. 남자의 허벅지였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하, 하지…… 흣.”

슈트를 엉망으로 구기며 거부를 해도 단단한 허벅지는 기어코 다리 사이를 온전히 차지했다. 발기한 성기가 자리한 오른쪽 허벅지였다. 그 말은, 옷감을 사이에 두고 남자와 내 성기가 맞닿았다는 말이었다.

단단하고 굵은 기둥이 다리 사이의 가장 깊은 곳을 지그시 눌렀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며 왈칵 울음이 터졌다. 모를 리 없음에도 남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되레 다리를 움직여 음부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사타구니가 묵직하게 눌리는 감각. 오래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위를 했을 때와 동일했다. 아니, 그보다 더 큰 자극이었다. 그에게 혀를 빨리며 그의 성기로 짓눌리고 있으니까.

구역질이 밀려 올라와 미간을 구기는 그때, 남자가 입술을 뗐다.

“숨 쉬어.”

“흑, 흐읍.”

“천천히 숨 들이마시고 뱉어.”

울렁거리는 배를 압박할 만큼 깊이 침잠한 목소리였다.

나도 모르게 그가 시키는 대로 숨을 골랐다.

“흐…….”

덜덜 떨며 숨을 들이마셨다가 다시 뱉어 내자 구토감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렇지.”

그가 칭찬하듯 코를 비볐다.

겨우 숨을 고르고 나서 시선을 들자 색이 바랜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밀어내려고 팔에 힘을 주자 남자가 혀를 내어 내 볼을 핥았다.

“하…… 하지 마요…….”

눈물을 모조리 핥아 내려는 듯 혀를 놀리는 그를 피하고자 고개를 숙였지만, 다시 고스란히 턱이 붙잡혔다.

남자가 다리를 앞뒤로 느리게 움직이며 젖은 음부를 쓸었다. 버둥대는 내 움직임 따위는 그에게 조금도 방해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흐읏, 하지, 하지 마……. 비켜요!”

“정말 하지 마?”

그가 선심 쓰듯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면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처럼.

그러나 나는 그가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걸 알고 있다. 역시나 그는 내 양손을 벽에 눌러 완전히 가두었다.

더 기가 막힌 건, 이 상황이 끔찍하게 싫은데도 불구하고 착실히 몸이 달아오른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한편으로는 그가 이대로 나를 두고 가 버릴까 봐 애가 타기도 했다. 스스로가 역겨워 미칠 지경이었다.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술만 깨물자 돌연 남자가 다리를 빼냈다.

“아…….”

갑자기 비어 버린 다리 사이가 허전해 나도 모르게 안타까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얼굴 근육이 이상하게 움직였다. 아마 울상을 지은 것 같다.

그런 나를 보며 남자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얘 봐라.”

“…….”

수치스러워 죽고 싶었다.

휘둘리기 싫어서 도발한 건데, 어느새 몸까지 휘둘리고 있었다. 질구에서 흘러내린 액이 팬티를 완전히 적셔 천이 피부에 밀착되었다. 불편하고 불쾌한 감촉에 나도 모르게 허리를 비틀자 남자의 시선이 기민하게 내 움직임을 좇았다.

나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허벅지를 붙이고 몸을 움츠렸다.

“손 놔요…….”

울먹이며 하는 말에 남자가 순순히 한 손을 놓아주었다. 다른 손도 놓기를 기다리는데, 기대를 저버린 그는 자유로워진 손을 내 바지 위로 가져갔다.

서둘러 남자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나 내 저항은 의미 없었다. 손쉽게 버클을 풀고 바지 안으로 들어온 남자의 손이 축축하게 젖은 팬티 위에 닿았다.

“안 돼……!”

“그래? 안 돼?”

그가 가볍게 반문하며 느리게 천을 쓸었다.

“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씻을 때를 제외하곤 내 손조차 제대로 닿아 본 적 없는 곳이다. 그런 은밀한 부위를 남자가 만지고 있다. 그것도 흥건하게 젖어 있는 것을.

미끄럽게 문질러지는 감촉에 온몸이 터질 듯 달아올랐다. 너무 거대한 감각이라 메스꺼운 것도 잊고 혼란에 빠진 내 입술을 남자가 느긋하게 빨았다. 나는 어쩌지도 못하고 남자의 팔만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시, 싫……. 흐읏, 흑.”

“쉬이, 숨 쉬고.”

“흐으…… 읍.”

다시금 입술이 삼켜졌다. 벌어진 입 안으로 들어온 혀가 마치 나를 진정시키려는 것처럼 부드럽게 움직였다. 하지만 온 신경이 요동치는 나에게는 그것조차 자극적이었다.

움찔, 질구가 조여들었다. 남자도 눈치챘는지 닿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는 게 느껴졌다. 더는 안 된다. 지금이라도 그를 밀어내려고 손을 내리는 순간, 팬티가 옆으로 젖혀졌다.

“흡……!”

무엇에도 가려지지 않은 음부에 남자의 손이 닿았다. 천 위로 만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충격이었다. 남자의 손이 익숙하게 음모를 헤집고 갈라진 틈을 쓸었다.

“잠, 잠깐.”

틈을 파고든 중지가 흥분으로 부푼 음핵 위를 지그시 눌렀다. 눈이 질끈 감겼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는 남자의 팔을 손톱으로 긁으며 애타게 고개를 저었다.

“그만해요……. 그만, 아응!”

그가 음핵을 천천히 둥글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눌러서 압박하는 것과 직접 문지르는 것이 이렇게 다를 줄은 몰랐다.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몸이 튀고, 고개가 사정없이 저어졌다. 멈췄던 눈물도 다시 터져 울음과 신음이 엉망으로 섞였다.

그러나 그는 물러나지 않고 손가락을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설마 하는 생각에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그가 나를 품에 당겨 안았다. 벽에서 떨어져 아예 남자의 품 안에 갇혀 버렸다.

“뭐 하는…….”

음핵에서 내려간 남자의 손가락이 질구 주변을 꾹꾹 눌렀다. 그가 뭘 하려는 건지 깨닫고 다급히 허리를 돌렸지만, 그건 오히려 그가 손을 넣기 쉽게 벌려 주는 꼴이었다.

남자의 굵은 손가락이 지체 없이 안으로 파고들었다. 한 번도 뭐가 들어온 적 없는 몸 안으로의 첫 침입이었다. 아래가 빠듯하게 벌어지는 것 같은 뻐근함이 느껴졌다. 못 견딜 만큼은 아니지만 아팠다.

“빼…… 빼요. 손 그만, 흐으…….”

남자는 기어이 손가락을 끝까지 밀어 넣었다. 길고 굵은 손가락 모양대로 질벽이 꿈틀거리며 벌어졌다. 다시금 속이 메스꺼워지기 시작했다.

남자의 눈길이 내 얼굴 위로 굴러가는 게 느껴졌다. 눈물범벅에, 이상한 표정을 짓고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내가 보지 않아도 훤하다. 얼마나 추할까. 그러나 지금은 안에 들어온 이것부터 어떻게 하는 게 먼저였다.

“빼 주세요. 흑, 아……. 이, 이상해.”

남자가 이마에 입을 맞췄다. 쪽쪽대는 간지러운 소리와 함께 남자의 손가락이 천천히 빠져나갔다. 조금 안도하며 시선을 들자 눈두덩 위에도 입술이 내려앉았다.

나는 볼품없이 떨며 그에게 매달렸다.

“이제 그……. 아……!”

하나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다시 손가락이 안을 푹 쑤시고 들어왔다. 동시에 뒤꿈치가 들리며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렸다. 남자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나도 모르게 목을 끌어안자, 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빼라고 했…… 잖아, 으읏, 빼……!”

“내가 왜?”

“흐으…….”

“그러게 봐줄 때 얌전히 있지 그랬어. 내 마음대로 하면 이렇게 울 거면서.”

삽입된 손가락이 마디를 굽혔다. 좁은 내부가 그에 맞춰 벌어졌다.

내가 뭘 어떻게 하기도 전에 남자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가 들어오기를 반복하며 구멍의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남자의 손가락이 누르는 대로 몸 안이 흐물흐물해지는 것 같았다.

“아흑!”

나는 서서 어설프게 다리를 벌린 채로 그에게 매달려 고개를 저었다. 머리카락이 남자의 가슴팍에 마구 비벼졌다.

“애교도 부릴 줄 알고.”

“그만. 읏, 아흐…….”

“권지운이 보면 환장하겠네.”

어딘가 빈정거리듯 읊조리던 남자가 다짜고짜 내 바지와 팬티를 벗겼다. 서늘한 공기가 젖은 사타구니를 스치고 지나갔다.

말도 안 돼.

아무도 없는 지하실이라고 해도, 배 안이다. 바로 위에서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있다. 심지어 아버지도. 그 바로 아래에서 하반신이 벗겨지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 정말…… 그만, 그만해요.”

“넌 대체 날 뭐로 보는 거야.”

남자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거칠게 입을 맞추는 동시에 손가락이 쑤욱 빠져나갔다. 벌어진 구멍이 움찔대며 허전해했다. 내 몸인데 내 의지와 다르게 움직이는 기묘한 감각이었다.

어떻게든 다시 옷을 입으려고 아래로 손을 뻗었지만, 남자가 그냥 둘 리 없었다. 그가 돌연 내 오른쪽 무릎 뒤로 손바닥을 밀어 넣더니 번쩍 들어 올렸다. 중심을 잃을 뻔했지만, 그가 허리를 고정하고 있어 넘어지지는 않았다.

“뭐야, 이건.”

입술을 떼어 낸 그가 허벅지 안쪽의 상처를 발견하곤 잠깐 눈썹을 들었다.

“이런 취향이야?”

“하아, 하…….”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채 간신히 숨만 뱉어 내다 뒤늦게 다리를 내리려고 했지만, 남자가 흥미로운 콧소리를 내며 무릎을 굽히고 앉는 게 먼저였다.

남자의 눈높이와 음부의 위치가 비슷했다. 그에게 아래를 훤히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남자에게.

다급히 손을 내려 남자의 눈을 가리자 그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너도 내 좆 봤잖아.”

“그건…… 그건 전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가 벗고 있었을 뿐이다.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인데도 남자는 대수롭지 않은 듯 손을 치워 내고 내 몸을 뒤로 기울게 만들었다.

쿵, 다시 벽에 등이 닿았다. 오른쪽 다리는 여전히 그의 손에 잡혀 있었다. 비스듬히 몸이 기대진 채 그의 눈앞에 발가벗은 아래가 모조리 드러났다.

“이래서 절었구나. 손으로 낸 상처인데, 이거. 누구야?”

남자가 허벅지 안쪽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물었다. 하지만 나는 패닉 상태가 되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건 이성적인 상황이 아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어쩌다가…….

“애기 주변에 내가 모르는 개새끼가 또 있나?”

남자의 목소리가 유독 낮게 가라앉았다. 대답 없는 나를 빤히 올려다보던 그가 천천히 입술을 벌리며 혀를 내었다.

“아…….”

붉은 혀가 상처 위를 길게 핥았다.

“얼마 안 된 상처도 있고.”

“하지 마요…….”

“오래된 것도 있고.”

허벅지 살이 바들바들 떨렸다.

“대답하면 빨아 줄게.”

“뭐……?”

“빨아 달라고 난리인데, 지금.”

음부를 가볍게 훑어 축축해진 검지를 남자가 혀로 핥았다. 눈가가 뜨거워질 만큼 야한 광경이었다.

“다리 누가 이랬어?”

다정한 척 묻는다.

마치 나를 걱정하는 것처럼. 내 상처를 두고 못 보는 사람처럼.

거짓말이다.

그가 나를 얼마나 속여 먹었는지는 이제 알 만큼 안다.

그러니 저 가식에 속지 말아야 한다.

“예, 옛날부터…….”

남자를 믿지 마.

이성이 분명한 경고를 내렸음에도 입이 멋대로 열렸다.

“버릇이에요.”

“어쩌다?”

“몰라. 그냥, 짜증 나면…… 그래요. 아프면, 다른 생각 안 할 수 있으니까…….”

빤히 나를 올려다보던 남자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이내 내 다리를 더 들어 사타구니를 벌리게 만들었다. 음부의 틈이 벌어지는 게 느껴졌다.

“대답 잘했으니까 빨아 줘야지.”

“아……!”

흥건한 곳에 물컹한 남자의 혀가 닿았다.

순간 나도 모르게 주저앉을 뻔했다. 용케 알아차렸는지 남자가 나를 붙든 채 길게 혀를 빼 틈을 훑어 내렸다.

다리 사이에 남자의 머리가 들어가 있는 광경은 충격 그 이상이었다. 혀끝을 뾰족하게 세운 그가 음핵 위를 간지럽히듯 긁었다. 잔뜩 부풀어 튀어나온 살점이 그에게 휘둘리며 짙은 쾌락을 뿌렸다.

“아응, 으…… 흑.”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고, 허리가 이리저리 돌아갔다. 그럴 때마다 남자의 코가 음모에 비벼졌다. 머리로는 멈춰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반복되는 쾌락에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아, 응!”

음핵을 건드리던 남자의 혀가 질구를 파고들었다. 단단한 손가락과 달리 물컹한 혀는 이질감보다 성감을 고조시켰다.

부드럽게 혀를 삽입했다가 빼내던 남자가 일순 고개를 떼어 내고 몸을 일으켰다. 내 다리도 놓아주었다. 갑자기 멈춰진 자극에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

벽에 기댄 채 주저앉으려는 그때 지익, 지퍼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내가 경악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가 굵은 성기를 꺼냈다. 빳빳하게 세워진 채 끝이 젖어 있었다.

“여, 여기서 어떻게……. 안 돼요.”

그가 버둥대는 나를 벽에 가두고 몸을 밀착해 왔다. 축축한 선단이 옷 위로 마구 문질러졌다.

“미안한데 안 되는 건 너야.”

그가 다시 내 오른다리를 들어 올렸다. 내가 흘린 애액과 남자의 타액이 섞여 질척한 음부 위로 성기가 스쳤다.

“알잖아, 오빠 개새끼인 거.”

“안 돼, 아……!”

두꺼운 귀두가 망설임 없이 질구를 파고들었다. 손가락과 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묵직한 것이 내 몸을 꿰뚫으려고 하고 있다. 진심으로 무서워졌다.

남자의 섹스를 상상할 때마다 무엇보다 나를 흥분시킨 건 그와 몸을 섞으며 황홀해하는 고채원의 신음이었다. 얼마나 좋으면 그런 소리를 내는 걸까. 정말로 그런 게 들어오면 좋을까. 막연한 상상을 했다.

그래서 이렇게 가학적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렇게 몸이 절반으로 뚝 갈리는 것 같은 고통일 줄은 몰랐다. 다시 울음이 터졌다. 이번엔 순전히 물리적인 통증 때문이었다.

“아파…….”

“천천히 숨 쉬어.”

남자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팔뚝만 한 거대한 기둥이 몸을 부수려고 하고 있다. 본능적으로 엉덩이를 뒤로 뺐지만, 벽에 가로막혀 그마저도 무용지물이었다. 결국 남자가 밀려들어 올 때마다 나는 입을 벌린 채 울어야 했다.

더 이상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마저 들었을 때, 남자가 볼에 입을 맞추었다.

“반도 안 들어갔어. 힘 빼.”

“아…… 흑…….”

절망적인 소리였다.

온몸이 낯선 침입을 거부했다. 경직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달달 떨기만 하자 그가 답답했는지 한숨을 뱉더니 그나마 땅에 붙어 있던 왼쪽 다리도 번쩍 들어 올렸다.

한순간에 몸이 허공에 붕 떠 버렸다. 너무 놀라서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양팔을 버둥대다 다급히 남자의 어깨 위로 둘렀을 때, 몸이 아래로 푹, 떨어지며 남자의 성기가 배 안을 가득 채웠다.

“아아……!”

양다리가 남자의 허리에 걸리고, 팔은 그의 목에 둘러졌다. 나는 마치 새끼 짐승처럼 남자의 몸에 매달렸다. 온몸에 그가 닿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심지어는 가장 깊은 곳까지 전부. 다리 사이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이게 뭐가 좋다는 거야. 고채원은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 행위에 홀렸던 거야.

처음 느끼는 고통과 허공에 떠 있다는 불안감에 정신을 못 차리고 떨고 있을 때, 남자가 허리를 쳐올렸다.

“아흑……!”

더 깊은 곳까지 침투한 성기가 반동으로 쑥 빠져나갔다 다시 푹, 안을 쑤셨다. 너무 아파서 눈앞이 캄캄했다. 조금이라도 성기를 빼기 위해 팔에 힘을 주어 몸을 들었다. 남자의 입술이 목을 스쳤다.

“못 해. 못 하겠어요. 나 그만……. 흑, 아읏…….”

“편하게 즐겨 봐.”

혼란에 빠진 나와 달리 그는 태연했다. 경험의 차이가 여실히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나에게는 세상이 뒤집히는 것 같은 이 충격적인 일이 그에게는 일상처럼 평온할 뿐이었다. 뒤늦게 후회했다. 남자를 도발하지 말아야 했는데. 섹스가 끝나면 큰 허탈감에 빠질 것을 예감했다.

남자가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푹, 푹, 기둥이 젖은 구멍을 쑤셔 댈 때마다 액이 뭉뚱그려지는 진득한 소리가 들렸다.

“아, 아, 흑!”

몸이 위아래로 들썩이며 남자의 것을 더 깊게 받았다. 내 팔 힘으로는 버티는 데 한계가 있어 결국 남자의 팔에만 의지한 채 사정없이 그에게 박혀야 했다.

“흐, 읏……. 아응!”

그러다 돌연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자의 귀두가 안쪽 어딘가를 쑤시는 순간이었다. 고통 섞인 신음이 확연히 변질된 음색을 띠었다.

벌어진 입술 새로 침을 흘리는데 남자가 목을 진동시키며 웃었다. 그러곤 뭐라고 중얼거린 거 같았는데 정신이 없어서 듣지 못했다. 다만 곧장 남자의 성기가 예의 같은 곳을 쑤셔 대는 탓에, 나는 그가 달라진 내 반응을 눈치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 잠…… 잠깐, 읏, 아, 하으…… 응……!”

“귀엽게도 우네.”

“이상해, 흑, 그만……. 아.”

“잘 느껴 봐. 너 지금 되게 좋아하고 있으니까.”

좋아한다고? 내가?

본능적인 거부감에 허리가 비틀렸다.

하지만 역효과였다. 오히려 안에 들어찬 남자의 것을 직접 그 부위로 가져다 대는 짓이었으니까. 고통에 잊고 있던 구토감이 치밀어 올랐다. 급히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막은 손바닥 틈으로 신음이 연신 흘러나왔다.

“내 옷에 토해도 돼.”

“흐읍, 웁, 읏.”

구토감과 쾌락이 번갈아 가며 나를 괴롭혀 댔다. 여차하면 정말로 그에게 쏟아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찰나, 남자의 허리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윽! 읏, 아, 처, 천천…… 으응!”

지금까지는 본인 나름대로 봐준 건지, 돌연 고삐 풀린 말처럼 안을 치받는 것에 나는 반쯤 넋이 나간 채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좁은 질구가 남자의 굵기에 맞춰 한껏 열렸다. 그 안에서 찌걱대며 액이 흘러나와 더 빠른 삽입을 도왔다.

“아으……!”

할딱이며 버둥대던 나는 한순간 벼락처럼 내리치는 쾌락에 비명 같은 신음을 뱉으며 남자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허리가 사정없이 펄떡대고, 질벽이 세게 조여들었다. 구멍은 연신 벌름대며 액을 쏟아 내고 있었다.

“아, 아아…….”

자아가 산산이 조각나는 기분이었다.

쾌락이란 이런 건가. 섹스에 미친 어른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 이래서…… 이런 걸 놓지 못해서 다들 그렇게…….

그때, 여전히 안을 가득 채운 남자의 성기가 점점 더 커지는 듯하더니 이내 안쪽에 액체를 쏟아부었다.

“아…… 안 돼.”

안에 사정했다.

뒤늦게 피임을 떠올리고 급히 고개를 들자 남자가 곧바로 키스를 해 왔다. 능숙하게 입 안을 훑으면서도 삽입된 성기는 끝까지 정액을 배출하고 다시 부풀어 올랐다. 원래 단단하던 것을 삽입하는 것과 달리 들어와 있는 상태에서 딱딱해지는 것은 상이한 충만감을 불러일으켰다.

내 혀를 못살게 구는 남자에게서 간신히 고개를 떼어 냈다.

“표정이 왜 그래? 임신이라도 할까 봐?”

그가 울먹이는 나를 비웃으며 성기를 빼냈다.

다시 안으로 박혀 들어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하고 있는데, 남자는 나를 바닥에 내려 주더니 무릎을 굽히고 앉아 나뒹구는 팬티와 바지를 끌어올 뿐이었다.

다리 사이에서 뭔가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움찔하며 몸을 떠는데, 남자가 슈트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내 다리 사이를 훑었다. 새까만 손수건에 하얀 정액이 묻어났다. 순간 머릿속까지 뜨거워졌다.

“야해라.”

어쩔 줄 몰라 하는 나와 달리 그는 여유로워 보였다. 여전히 성기가 바지를 뚫고 나와 있는데도 말이다.

“걱정 마. 임신할 일 없으니까.”

멋대로 내 다리 사이를 닦아 낸 그가 손수 팬티를 입혀 주며 말했다.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아 간신히 벽에 기댄 채로 남자의 머리를 밀어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지까지 끌어 올려 버클을 잠가 주었다.

그렇게 내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고 나서야 남자가 성기를 도로 집어넣었다.

“진작에 묶어 놨거든.”

“…….”

“그러니까 안심해.”

그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몸을 섞었던 사람답지 않게 담백한 태도였다.

예상했던 허탈함이 나를 뒤덮었다.

남자에겐 이게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여기저기 좆질하려고 작정했나 봐요.”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덜덜 떨며 비꼬는 말에 그는 조금도 타격을 받지 않았다. 다시금 속이 뒤틀렸다.

“짐승만도 못한 새끼.”

“알면서 왜 덤볐어.”

안쓰럽다는 듯 혀를 차기까지 한다.

“오빠가 네 핑계 대면서 얼마나 참아 줬는데.”

머리카락을 만지작대던 손이 천천히 내려와 볼에 닿았다. 눈물로 젖은 얼굴 위를 엄지로 훑으며 닦아 주듯 구는 손길이 부드러워서 기분이 이상해졌다. 볼을 쓰다듬고, 코를 매만지고, 눈가를 훑고 마지막엔 입술에 닿았다.

남자가 입술을 응시하며 손가락을 지그시 눌렀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 가며 만지는 그의 표정은 어딘가 고요했다.

나랑 하고 싶었고 결국 한 사람답지 않은 침잠.

“채원 언니가…….”

그의 손가락이 닿은 채로 입을 열었다.

엄지 끝에 혀가 스쳤다. 그는 손을 물리지 않았고, 나는 밀어내지 않았다.

“나 찾는 거 진작 알고 있었죠.”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다면 편지가 오기 훨씬 이전부터 고채원은 고성하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았고, 아버지의 오명을 벗기기 위해 나를 찾은 거였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몰랐다.

내가 그녀를 인지한 것은 편지를 처음 받은 날이었고, 난 그 편지를 고스란히 남자에게 보여 주었다. 남자는 내가 가져온 편지를 몰래 빼돌렸고, 고채원을 이 배에 태웠다. 사방이 강이라 도망갈 수 없는 이 배에.

나와 고채원을 만나게 하기 위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난 또. 진서을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경고한 지 반년도 되지 않았는데 자꾸 얼쩡거려서 채원이가 미쳤나 했지.”

고채원에게 경고하기 위해서?

“그동안 언니 막아 준 거예요?”

“…….”

“편지가 안 오기 시작한 것도 그쪽 짓이에요?”

남자가 대답 없이 눈을 들었다. 나를 직시하는 눈빛은 도무지 읽기 어려웠다.

“고성하가 나한테 한 짓…… 왜 언니한테 말하지 않았어요?”

“…….”

“내 핑계 댈 수 있었잖아요. 나 이용해서 여기까지 왔잖아. 그런데 왜 언니한테는 말하지 않았어요.”

정말 바보 같은 거 아는데, 이 와중에도 또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와 몸을 섞었기 때문일까. 남자가 마음 없이 섹스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불현듯 의미 부여를 했다. 그만큼 이건 나에게 평범한 경험이 아니었다. 내게 그렇게나 흥분하고, 애틋한 표정으로 얼굴을 매만진 것에 어떠한 의미가 있다면…….

더군다나 당연히 남자가 고채원에게 그날 일을 말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의 아버지를 철석같이 믿고 있지 않았나.

남자는 말하지 않았다.

그날의 진실 중에 자신이 고성하를 죽였다는 것만 말했다. 왜?

“혹시 나를…….”

수치로부터 지켜 주기 위해서였냐고 묻고 싶었는데, 남자가 자신의 입술로 내 입을 막았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가 밀려들어 왔다. 진득하게 입 안을 훑는 남자에게 나도 모르게 순순히 혀를 내주었다.

심장이 쿵쿵, 요동쳤다.

나는 간절히 기도하는 심정으로 볼을 감싼 남자의 손등에 손을 덮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당하고도 아직 모르네.”

남자가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 떨어져 나갔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쓸데없는 의미 부여하지 마.”

“…….”

“별 이유 없어. 귀찮아서 그랬어, 귀찮아서.”

“…….”

“다 지난 일 자꾸 들먹이는 게 귀찮아서 오늘 고채원 처리하려고 했는데, 애기 얼굴 봐서 참아 준 거야.”

행동과 표정과 말이 전부 다르다. 부드럽게 입을 맞춘 주제에 태연한 얼굴을 하고 못된 말을 내뱉는다. 뭐가 진짜인지 모르겠다.

그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 덕에 너랑 잤으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지만.”

순간 심장이 서늘해졌다.

“뭐라고요……?”

“다음엔 제대로 된 데서 덤벼. 이것저것 신경 쓰느라 아직 못 한 게 많아.”

충격받은 내 얼굴을 보고도 그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마지막 기대마저도 산산이 부서졌다.

내가, 난…… 뭘 기대한 거지. 나와의 섹스를 장사라고 말하는 남자에게 도대체 무슨 진심을 기대한 거야.

잠깐 홀렸었다. 내게 입을 맞추는 그가 너무 다정하게 느껴져서, 마치 소중한 걸 만지는 것처럼 내 얼굴을 쓰다듬어서, 그가 언제 사람이 올지 모르는 지하실에서 내 옷을 벗기고 성기를 쑤셔 넣었다는 것도 잊었다.

금방이라도 구토를 할 것 같아 명치를 움켜쥐고 뒷걸음질을 쳤다.

“다음…… 같은 거 없어.”

목소리도, 몸도 형편없이 떨렸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요.”

남자는 거친 섹스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길 뿐 별말 없었다.

힘이 풀린 다리로 간신히 걸음을 떼었다. 처음 열린 몸이 고통을 호소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울지 마. 상처받지 마.

그가 나와 자고 싶었던 것처럼 나 역시 그에게 욕정을 느꼈으니 억울해할 거 없다.

그래. 나도 마찬가지잖아. 그의 몸을 생각하며 흥분했고, 섹스를 상상했다.

그러니까 울지 마. 실연당한 사람처럼 괴로워하지 마.

어쩌면 내내 남자를 잊지 못했던 이유가 단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미지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남자와 몸을 섞었고 미지에 발을 들였다. 이제 그를 털어 낼 때다.

“애기야.”

뒤돌아보지 않았다. 스스로를 세뇌했지만, 기어코 눈물이 터졌기 때문이었다. 이런 나를 본다면 그는 또 내 속을 꿰뚫어 볼 것이다. 내가 또 다른 걸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조심해서 가.”

들키는 순간 나는 정말 비참해지겠지.

“우욱……!”

지하실에서 올라오자마자 난간을 붙잡고 강물 위로 속을 게워 냈다.

어느새 배는 다시 선착장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아무리 여름이라 해도 차가운 강바람 때문인지 밖에 나와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주저앉아 마음껏 울 수 있었다.

“아, 안 돼.”

마음까지는 안 돼. 거기까진 안 돼.

더 이상 그와 얽히면 안 된다. 그럼 나는 정말로 망가질지도 모른다.

10년이다. 자그마치 10년을 남자에게 얽매여 살아왔다. 만약 지금 내가 남자의 마음마저 원하게 된다면, 나는 앞으로 또 얼마나 긴 시간을 그에게 휘둘리게 될까.

마음까지 바라면 안 된다. 그럼 나는 사랑에 빠진 여느 멍청한 사람들과 같아진다. 사랑 따위에 침식되고 싶지 않다. 안달 내고 싶지 않다.

그러나 거부할수록 얼굴 곳곳에 닿았던 그의 입술과 손길이 쉴 새 없이 되새겨졌다. 그것들을 더 느끼고 싶었다. 아주 잠깐 전부 거짓이라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할 만큼 황홀한 남자의 모든 것.

그것들이 내 것이 된다면…….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질끈 눈을 감았다. 그의 흔적이 가득한 다리 사이가 충분히 고통스러웠기에 굳이 허벅지를 쥐어뜯을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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