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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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원 신도시요?”

놀란 얼굴로 되묻자 권지운이 펜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원주택 단지를 만들고 싶대. 건물은 여섯 채 정도. 그중 하나는 의뢰인이 직접 거주할 모양이고.”

“뭐…… 거절할 이유가 있나요. 무조건 해야죠, 선배.”

“재밌는 게 뭔 줄 알아?”

권지운이 내게 계약서 서류가 담긴 봉투를 건네주었다.

“의뢰인이 이민후야.”

“네?”

“이민후 몰라?”

의아한 얼굴로 권지운을 바라보다 봉투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생각보다 규모가 큰 건이었다. 3,000평짜리 부지에 전원주택 여섯 채.

재벌인가, 생각하기가 무섭게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설마 그…… 이민후요?”

“그래.”

“TG건설 이민후?”

권지운이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 설마요. 이민후가 왜 우리한테 설계 의뢰를 해요? TG건설에서 뭐가 아쉬워서.”

나도 모르게 받아치고는 아차 싶어 덧붙였다.

“선배가 능력 없다는 말 아닌 거 알죠? 그냥, 그만큼 이상하다는 거예요. TG건설에 딸린 건축사만 몇인데…….”

TG건설은 이쪽 종사자라면 모를 수 없는 건설사였다. 만들어진 지는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그간 별 성과가 없다가 최근 10년 동안 가장 큰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번 성원 신도시 개발의 부지 조성 공사도 여기서 맡았다고 들었다.

이민후는 그 TG건설의 대표다. 30대 중반의 젊은 사업가.

얼굴은 본 적 없지만, 아버지도 몇 번 이야기한 적 있었다.

“사택으로 쓸 모양이야. 어제 너 퇴근하고 찾아와서 이야기는 끝냈어. 이 대표 성격 급하더라. 곧장 진행하자던데. 네가 가서 계약하고 와. 도장만 찍으면 돼.”

“선배는 같이 안 가요?”

“바빠서. 혼자 다녀와.”

그가 바쁜 건 누구보다 잘 알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권지운과 단둘이 일하는 건축 아틀리에는 규모는 작지만, 그의 포트폴리오 덕에 심심치 않게 의뢰가 들어왔다. 이제 막 일을 시작한 나보다 권지운이 주도하는 것도 당연했다.

나보다 여섯 살 많은 권지운은 같은 대학 동문이고, 내가 학교에 다니던 시절 조교이기도 했다. 인연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대학 때부터 여러 공모전에서 입상하며 이름을 알렸던 권지운은 조교 때도 학생들 사이에서 스타나 다름없었다.

권지운이 아틀리에를 열었다는 말에 동기들이 앞 다투어 함께 일하고 싶어 했는데, 그가 부른 건 나였다. 유학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실무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와서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의외였다.

“이번 일 끝나면 데이트하자.”

“……지겹지도 않아요?”

“많이 차이다 보니 내성이 생겨서 아무렇지도 않아.”

“다행이네. 거절할게요.”

“그래. 3시까지 서초동 TG건설 본사로 가. 거기서 만나기로 했어.”

나라면 나를 찬 사람이랑 매일 얼굴 보며 일하고 싶지 않을 텐데, 권지운은 여러모로 대단한 구석이 있었다. 덕분에 나는 남들이 원하는 일자리를 꿰차긴 했으나, 이럴 때마다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Rrrr─. Rrrr─.

곧장 출발하면 시간이 얼추 맞겠다 싶어 차에 올라타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아버지였다. 그러고 보니 벌써 점심시간인가. 소리 없는 한숨을 뱉으며 전화를 받았다.

“응. 아빠.”

[딸, 점심은 먹었어?]

“조금 전에 먹었어. 아빠는?”

[이제 먹으러 가려고.]

매일 점심시간마다 아버지에게 전화가 오는 것은 우리 부녀간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10년 전 고성하의 성벽이 밝혀지며, 내가 그에게 희롱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 아버지는 나를 강박적으로 걱정하기 시작했다. 특히, 대학 시절 잠깐 스토커에게 시달린 적이 있는데 그 후로는 더 심해졌다. 그때부터 조금이라도 늦거나 술자리에 참석이라도 하면 틈이 날 때마다 전화를 걸어왔고, 일을 시작한 이후론 점심시간이 고정 통화 시간이었다.

권지운이 회사에 불렀다는 말을 했을 땐 남자와 단둘이 일하지 말라며 곧장 반대부터 했으나 내가 유학을 보류하겠다고 하자 마지못해 허락했다. 당신 옆을 떠나는 것보다는 차라리 두고 보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으리라.

[어디 가니? 차 소리가 들리네.]

“응. 계약 건이 있어서. 참, 아빠. TG건설 이민후 대표 알지?”

[뭐…….]

아버지가 잠깐 말끝을 흐렸다. 껄끄러워하는 것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성원 신도시 개발은 고성하가 죽은 이듬해 대통령으로 당선된 야당 대표 정택운이 추진한 사업이었고, 그를 도맡아 하는 것이 TG건설이었다. 2대째 대통령을 배출한 국헌당과 TG건설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다는 건 알음알음으로 다들 인지하는 분위기였다.

즉, 아버지가 고성하를 통해 얻어 내고자 했던 것들을 TG건설이 전부 얻은 셈이다.

아버지는 아직도 술만 마시면 고성하를 욕한다. 물론 나를 희롱한 것이 아버지의 분노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계획이 어그러진 것 역시 한몫했다.

[갑자기 이 대표는 왜?]

“이번 의뢰인이 이 대표야. 성원에 전원주택 단지를 만들 거래. 이 대표 어떤 사람이야?”

[이 대표, 사람이야 좋지. 아빠도 몇 번 본 적 있는데 예의 바르고 괜찮아.]

“그래?”

[다만…….]

아버지가 잠깐 말을 멈췄다.

[바지사장이라는 말이 있어.]

“바지사장?”

[이민후는 얼굴마담이고 실세는 따로 있다는 말도 있고. 잘은 모르겠는데 소문이 그래. TG건설 키운 게 현 정권이니까 아주 틀린 말도 아니지.]

“아…….”

[혼자 가니? 장소는 어디야?]

“TG건설 본사. 혼자 가는 중이야.”

[그래. 회사에서 만나는 거면 안심이지. 잘 다녀와.]

“응. 이따 집에서 봐.”

바지사장이라.

다소 찜찜한 설명을 뒤로하고 시동을 켰다. 하필 고성하를 떠올리게 하는 TG건설인 게 마음에 걸리지만, 일은 일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10년의 세월이면 잊히기 마련이다. 고 의원의 죽음에도 무뎌진 지 오래다.

그가 죽고 나서 투자가 엎어져 잠깐 방황하던 아버지는 무사히 다른 투자자를 찾아 사업을 일으켜 세웠고,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지금 원하던 일을 하고 있다. 이만하면 됐다.

“안녕, 애기야.”

무심코 떠오르는 오래전 기억도 이젠 많이 옅어졌다. 나는 연기처럼 사라지는 목소리를 되새기지 않으려고 애쓰며 운전대를 붙잡았다.

처음 와 보는 TG건설 본사는 9층짜리 건물이었다. 잘 꾸며 놓은 로비를 둘러보다 안내 데스크로 향하자 직원이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다.

“약속하고 오셨습니까.”

“네. 이민후 대표님과 뵙기로 했는데요.”

“아아, 9층으로 가세요.”

착각인가. 친절한 미소가 미묘하게 변한 것 같은데.

들어가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이 불쾌했지만 이유를 알 수 없어 일단 참았다. 시선은 엘리베이터에 타 9층 버튼을 누를 때까지 달라붙었다.

왜 저렇게 보는 거지.

여자였기에 기분 나쁜 정도로 넘어갔지, 남자였으면 곧장 성희롱으로 신고했을 거다. 인상을 구기고 옷매무새를 정리하다, 지금이 한여름인 걸 깨닫고 어깨를 으쓱였다. 어쩌면 옷차림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열아홉 이후로 나는 강박적으로 살갗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여름에도 긴팔에 긴바지를 고수했고, 치마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폭염 주의보가 내린 한여름에 답답하게 입은 게 이상해 보였다면 그러려니 넘어갈 만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복도로 들어서니 커다란 문이 보였다. 그 앞에 비서 한 명이 앉아 있다가 나를 발견하곤 들어가 보라는 듯 건성으로 손짓을 했다. 대표의 손님을 대하는 것 같지 않았다.

어째 이 회사 직원들은 다들 불친절한 것 같다. 이민후에게 이야기를 듣지 못한 건가 인상을 찌푸리며 노크를 하려는데 비서가 한숨을 뱉었다.

“그냥 들어가시면 돼요.”

정말 뭐지?

“안녕하세요. 권지운 건축사 사무소에서 온…….”

“아응!”

마지못해 노크 없이 문을 여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오빠, 한 명 더 불렀어? 아……!”

정면으로 보이는 책상에 남녀가 알몸으로 뒤엉켜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남자는 의자에 앉아 있었고 여자는 그 위에 올라타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자의 등이 움직일 때마다 꿈틀댔다.

멍청하게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다 반사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토기에 입을 틀어막는 순간, 여자가 교성을 뱉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하……. 으응, 너무 좋아. 쟤 내보내고 나랑 한 번 더 하면 안 돼?”

여자가 남자의 머리를 제 가슴에 끌어안고 애교를 부렸다.

“아, 아앙. 흐응! 대, 대호 오빠. 응……! 좋아, 아!”

빌어먹을 기억이 떠올라 굳어 있는데, 부드러운 굴곡을 그리는 엉덩이를 남자의 커다란 손이 움켜쥐었다. 여자가 아쉬운 신음을 내며 몸을 일으켰다.

내 쪽에서 보이는 건 그게 전부였다. 그래서 몰랐다.

“안 돼.”

남자가 입을 열기 전까진.

“손님을 돌려보낼 수는 없지.”

순간 입을 막은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다음에 또 불러 줘, 응?”

“글쎄.”

“너무해.”

애교스럽게 투덜대며 옷을 주워 입은 여자가 나를 돌아보고 예쁘게 웃었다. 눈꼬리와 입꼬리가 곡선을 그리며 위로 올라간 얼굴에서 색기가 뚝뚝 흘렀다.

불러 줘. 그 말에서 두 사람이 평범한 연인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오빠 취향 알겠네.”

여자가 가볍게 옆으로 비켜섬과 동시에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나른하게 의자에 기대 있던 남자의 눈썹이 가볍게 들렸다.

“안녕?”

10년 만에 보는 남자는 마치 어제도 본 사람인 양 내게 인사를 해 왔다. 여전히 어깨에는 새까만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 알몸을 드러내고도 태연하게 담배를 꺼내 무는 남자를 바라보다 그의 손에 들린 익숙한 라이터를 발견한 순간 참지 못하고 바닥에 토사물을 뱉어 냈다.

“미친! 뭐 하는 짓이야!”

여자가 질색하며 코를 틀어막고 밖으로 나갔다.

바닥에 주저앉아 속을 게워 내는 동안 내 쪽으로 다가오는 남자의 기척이 느껴졌다. 당장 피하고 싶은데 몸이 굳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내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독한 담배 연기를 뚫고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빳빳하게 세워진 굵은 성기였다. 다시금 토기가 치밀었다.

“괜찮아?”

그가 여상히 내 등을 토닥였다. 토사물을 더러워하는 기색도 없었고, 알몸을 수치스러워하지도 않았다. 그뿐 아니라 갑작스러운 내 등장에 놀라지도, 반가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태연할 뿐이었다.

그 태도에 배알이 뒤틀렸다. 10년이나 지났는데도 남자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요동치는 심장도 개 같고, 여전히 아랫도리 더럽게 놀리고 사는 그의 모습을 다시 본 것도 엿 같았지만, 무엇보다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는 그가 좆 같았다.

“당신 뭐야.”

거칠게 남자의 손을 쳐 냈다.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손을 거둬 가더니 이번엔 내 턱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엄지로 입 주변을 훑어 냈다.

“오랜만이네, 애기야.”

“그쪽이 왜 여기 있어요.”

“잘 지냈어?”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시간이 아무리 흘렀어도 나는 그가 내게 한 짓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고 의원을 죽이려고 나를 팔아치운 개새끼. 내 치부를 만천하에 공개한 나쁜 새끼.

“왜 여기 있냐고 물었어.”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애기는 어쩌다 또 여기까지 왔어.”

“…….”

핏발 선 눈으로 그를 노려보다 무심코 주변을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 남자가 앉아 있던 의자 뒤쪽 벽에 커다랗게 TG건설 로고가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앞 책상에 놓인 명패.

「TG건설 대표 이민후」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그쪽이 이민후예요?”

10년이면 이름을 바꾸고도 남는다. 남자는 대답 대신 나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탁, 소리 나게 그의 팔을 밀어냈다. 그러곤 곧장 뺨을 내리쳤다. 사나운 손짓에도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한 손으로 허리를 짚은 그가 담배를 든 손을 내 머리 위로 얹었다.

“안 본 사이에 많이 까칠해졌네.”

“개새끼.”

“욕도 다 할 줄 알고.”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몸을 돌렸다. 저벅저벅, 헐벗은 몸뚱어리에 유일하게 멀쩡히 붙어 있는 것은 구두가 전부였다. 구두 굽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그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옷가지를 하나씩 꿰입기 시작했다. 속옷과 바지를 입고 와이셔츠까지 걸친 그가 단추를 하나씩 잠그며 핸드폰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들어와.”

간단하게 통화를 종료한 남자가 손목에 시계를 채워 넣으며 나를 돌아봤다.

“권지운이 올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나타나서 놀랐네.”

전혀 놀라지 않은 말투였다.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노려보는 내게 그가 가벼운 미소를 던지며 소파를 가리켰다.

“앉아. 다리 아프겠다.”

“뭐 하자는 거예요.”

“계약하러 온 거 아니야?”

“내가 왜 그쪽이랑 계약을 해요.”

“누가 나랑 하재?”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표실 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리자 문 앞에 서 있는 건 남자의 또래로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단정한 슈트 차림에 신뢰감 가는 인상의 낯선 남자가 바닥의 토사물을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내 방에서 뭘 한 거냐.”

“이 대표가 어제 술을 좀 먹였어야지. 나도 사람이야.”

남자가 태연하게 대꾸하며 옷걸이에 걸린 슈트 재킷을 가져와 토사물 위에 덮었다. 그러곤 내게 눈썹을 들어 보였다. 뭘 대단히 감싸 주는 것처럼 구는데 어이가 없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이민후는 지금 막 들어온 저 사람인 것 같았다.

대표의 방에서 여자를 불러 섹스를 하고도 태연한 남자와 그걸 다 아는 것 같은 이민후. 꽤나 친밀해 보이는 두 사람은 무슨 관계인 걸까.

“안녕하세요. 권지운 건축사 사무소 진서을입니다. 성원 전원주택 단지 의뢰 건 계약하러 왔습니다.”

“아아, 권지운.”

이민후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묘한 얼굴로 남자를 바라봤다. 무슨 의미가 담긴 표정인지는 읽히지 않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까칠하던 태도를 누그러트린 이민후가 내게 명함을 건넸다. 하얀 바탕에 그의 이름과 연락처, 회사 주소 따위가 적힌 평범한 명함이었다. 나 역시 이민후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그가 대충 명함을 훑어보곤 소파를 가리켰다.

“편히 앉으세요.”

이민후의 말에 소파에 가서 앉은 건 내가 아니라 남자였다. 어이없어하는 내게 이민후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신경 쓰지 말고 앉으세요. 마실 거 뭐 드릴까요.”

“아무거나 괜찮아요.”

적당히 대답하며 남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남자는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내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그 시선을 무시하고 비서에게 음료를 부탁하는 이민후만 바라봤다.

“애기야.”

“…….”

“권지운이랑 무슨 사이야?”

“이야기는 다 됐다고 들었어요. 계약서에 도장만 찍어 오면 된다던데 맞나요?”

대놓고 무시하자 남자가 재밌다는 듯이 낮게 소리 내 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남자의 옆에 앉는 이민후에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혹시 수정하고 싶은 사항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어련히 알아서 잘했을까.”

“완공 기간은 넉넉하게 잡아서 반년 정도 예상하고 있긴 한데, 원하시면 더 줄여 볼게요.”

“알아서 해. 급할 거 없으니.”

남자가 자꾸 이민후를 대신해서 대답했다. 내가 참지 못하고 노려보자 그새 새 담배를 물고 빙글댔다.

“권지운이랑 무슨 사이냐니까.”

“그걸 왜 묻는데요?”

그가 예의 그 금색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냥. 궁금해서.”

“네. 그럼 계속 궁금해하세요.”

서류를 넘기던 이민후가 흥미로운 듯 콧소리를 냈다. 후우, 남자의 입술 사이에서 뿌연 연기가 흩어졌다.

“뭘 그렇게 열심히 봐. 알아서 잘했겠지. 얼른 도장 찍어 줘. 애기 기다린다.”

이민후가 어깨를 으쓱이며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러다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민후는 남자와 내 사이를 묻지 않는 걸까. 우리의 태도는 초면인 상대에게 보일 만한 것들이 아닌데 말이다.

미심쩍게 두 사람을 번갈아 보는데 문득 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민후는 얼굴마담이고 실세는 따로 있다는 말도 있고. 잘은 모르겠는데 소문이 그래. TG건설 키운 게 현 정권이니까 아주 틀린 말도 아니지.”

“…….”

그제야 남자가 왜 여기 있는지 얼추 짜 맞춰지기 시작했다.

고 의원이 죽고 타살 의혹이 불거졌을 때 가장 먼저 의심을 받은 것은 경쟁자인 정택운이었다. 그가 고 의원을 끌어내리고 차기 대통령이 되기 위해 뒷공작을 펼쳤을 거라는 음모론이 꽤 신빙성 있게 돌았다.

그러나 고 의원의 성벽이 밝혀지며 그 소문은 가라앉았다. 그저 그의 더러운 성적 취향을 다들 비난할 뿐이었다.

추측건대 그날 남자가 핸드폰을 넘긴 상대는 정택운의 사람이었을 거다. 그렇게 새 주인을 찾은 남자는 정택운의 수하 아래서 TG건설을 이만큼 키워 냈으리라. 그저 그런 깡패가 아니었나 보다.

“새로운 주인 찾는다더니 제대로 찾았나 보네요.”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내게 향했다. 둘 다 내 말을 알아들은 얼굴이었다. 특히 남자와 나를 번갈아 보는 이민후의 시선에 내 예상이 맞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민후는 남자와 내 관계를 안다. 정확히 말하면 TG건설을 키워 낸 남자의 밑거름으로 사용된 10년 전 일을 알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정택운으로부터 2대째 이어지고 있는 현 정권과 직접 손을 잡은 남자가 TG건설의 실세일 확률이 높다. 이번 의뢰 건 역시 이민후가 아닌 남자가 주관했을 거라는 말이다.

“왜 하필 우리 사무소예요?”

“…….”

“나 있는 거 알았죠.”

“난 이쯤에서 빠질게.”

귀찮은 일에 끼고 싶지 않은 듯 이민후가 자리를 피했다.

계약의 당사자인 이민후의 도장을 받았으니 목적은 달성한 셈이지만, 그의 뒤에 남자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넘어갈 만큼 나는 덤덤하지 못했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10년 전의 일은 모조리 희석되어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남자를 다시 본 그 순간부터 나는 다시 열아홉 살로 돌아가 있었다.

“나 있는 거 알고 일부러 우리한테 의뢰한 거예요?”

“오래전에도 이야기한 것 같은데.”

그가 또 한 번 연기를 내뿜었다.

“너한테 그렇게 관심 없다니까.”

“…….”

“권지운 정도 되는 커리어라면 모를까.”

까득, 이를 악물었다.

“이 대표가 권지운한테 관심이 많아. 설계가 취향이라나 뭐라나. 그런 건 내가 알 바 아니고, 마침 새집을 짓고 싶은데 쓸 만한 사람이라기에 진행한 거야.”

“…….”

“오해하지 마, 애기야.”

남자가 하는 말 하나하나가 가슴에 박혔다.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억누르며 주먹을 세게 쥐었다. 허벅지를 뜯고 싶었다. 만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단숨에 나를 화나게 하는 남자의 능력은 정말 탁월했다.

“고성하 핸드폰에 있던 불법 촬영 사진…….”

기사가 난 직후, 내가 고성하에게 강간당했다고 오해하는 아버지에게 강간이 아니라 추행이었음을 털어놓은 뒤로는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그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고채원과 아주머니가 나를 찾아온 적도 있지만 두 사람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 숨었고, 그렇게 늘 꼭꼭 숨겨 왔다. 그만큼 그건 내게 너무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하나 남자의 앞에서 그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것은 그가 처음부터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주 작은…… 희망의 끈을 붙잡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나였어요?”

남자의 눈동자가 천천히 내게 향했다.

여전히 잘생겼다. 아니, 10년의 세월이 쌓였기 때문일까, 잘생긴 걸 넘어서서 눈만 마주쳐도 사람을 홀리게 만드는 묘한 분위기가 풍겼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빛에 섹스 후의 여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면 넋을 놓았을지도 모르겠다.

“장례식 날, 산책로에서…… 그쪽이 고성하 핸드폰 넘긴 거 알아요.”

“…….”

“그 안에 있던 사진 정말 나였어요? 나인 거 알고도 넘긴 거예요?”

그가 피식 웃었다.

“누가 들으면 내가 널 사창가에 넘기기라도 한 줄 알겠네.”

“뭐가 달라요.”

“뭐가 같은데?”

감정이 날뛰는 나와 달리 남자는 평온했다. 뻔뻔스럽기 그지없는 그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알고 넘긴 거죠.”

“뭐, 그런 건 보통 미리 확인을 하지.”

“…….”

결국 알고 내 사진을 넘겼다는 말이다. 이미 확신하고 있었지만, 아주 작은 희망의 끈마저 뚝 끊어졌다.

구겨지는 내 얼굴을 마주한 남자가 가볍게 혀를 찼다.

“고성하 죽여 준 대가라고 생각해.”

“뭐라고요?”

“오빠도 살아날 구멍은 있어야 하잖아.”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요?”

“그런가.”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아요?”

“그래, 그래. 미안해.”

어린아이 대하듯 웃음기 섞인 목소리였다.

울컥, 화를 참지 못한 눈가가 뜨거워졌다. 하지만 눈물을 보이는 건 자존심이 용납을 못 했다. 주먹을 세게 쥐고 억지로 감정을 억눌렀다.

“숨겨 준다고 했잖아요.”

“…….”

“숨겨 준다고, 죽여 주겠다고, 나를 위하는 것처럼 굴어 놓고, 내 치부를 이용해서 성공하니까 좋아요?”

“뒤끝 있긴.”

남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재떨이에 담배를 털었다.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잘 기억도 안 나는데.”

1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아주 많은 시간 남자를 생각했다.

대부분은 원망했고, 그럴 만한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 이해해 보려고도 했고, 혹시 아닐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도 가졌으며, 그러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원망하기를 무수히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남자에 대한 기억은 여러 차례 뒤덮여 선명해졌고, 선명해질수록 그를 생각하는 시간은 길어졌다.

그래. 무뎌졌다는 건 사실 자기 암시에 불과했다.

그는 내게서 조금도 잊히지 않았다.

“나 많이 보고 싶었나 봐?”

남자는 전부 다 아는 사람 같았다. 내 속내를 다 꿰뚫고 있어서 저렇게 느긋한 걸까.

억울해. 왜 나만 이런 기분이어야 해. 왜.

무엇보다 억울한 것은 내가 남자의 말을 부정하지 못한다는 거였다. 다 지난 일을 어제 일처럼 꺼내서 따지고 드는 와중에도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긴 세월 동안 어디서 뭘 하고 지냈기에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을까. 솔직히 지나가다 한 번은 마주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자는 10년 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이럴 거면…….”

어쩌면 그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깡패니까, 죽이는 게 쉽다고 했으니까 죽는 것도 쉽겠지. 그래서 이렇게 보이지 않나 보다, 하며 운 날도 많았다.

하지만 남자는 멀쩡히 살아 있었고, 고성하의 개새끼 노릇을 하던 예전보다 훨씬 성공해 있었다. 숱하게 흘렸던 눈물이 아까울 만큼.

“나한테 왜 잘해 줬어요.”

결국 참지 못하고 울먹이는 목소리가 나왔다. 남자의 시선이 천천히 내 얼굴 위를 굴러갔다. 그가 관찰하듯 내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뜯어볼 때마다 심장이 쿵쿵대고, 얼굴이 젖어 들었다.

“이럴 거면 왜 나한테…….”

“…….”

“왜 그렇게…….”

금세 차오른 눈물이 허벅지 위로 툭, 떨어졌다. 손등으로 눈가를 가렸지만 이미 터진 눈물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입술을 꾹 다물고 눈물을 닦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였다.

훅, 담배 냄새가 끼쳤다. 나보다 먼저 일어난 남자의 몸이 내 쪽으로 기운 탓이었다. 갑자기 드리운 그림자에 고개를 들자 한 손으로 내 뒤 소파 등받이를 짚은 남자의 커다란 몸이 차양처럼 나를 뒤덮고 있었다.

“이러면 곤란해. 내가 나쁜 놈 같잖아.”

“…….”

“맞긴 하지만.”

농담처럼 중얼거리는 남자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러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뭐에 고정이라도 된 것처럼 미동 없이 버티고 서서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정말로 애기가 집 지어 주는 날이 올 줄은 몰랐네.”

그가 새삼스럽다는 듯 중얼거리며 손가락으로 내 눈가를 훔쳤다. 갑자기 닿은 남자의 손길에 움찔하며 재빨리 고개를 털어 냈다.

“그 애기 소리 집어치워요. 이제 그런 말 들을 나이 아니야.”

“그래 보여.”

순간 남자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언제 이렇게 컸어.”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위화감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모를 수 없는 눈빛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 내가 느낀 게 맞는지 가늠하기 위해 떨리는 눈동자로 그를 담았을 때, 그가 내 턱을 들어 올렸다.

“애기라고 불러 줄 때 감사히 여겨.”

“…….”

“알잖아, 오빠 개새끼인 거.”

짝, 또 한 번 남자의 뺨을 내리쳤다. 때린 건 난데 아픈 것도 나였다.

화끈거리는 손바닥과 쿡쿡 쑤시는 심장. 괴로운 건 나뿐이었다.

오래전 고 의원의 더러운 눈빛에서 나를 숨겨 주었던 남자가 이제는 나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다.

허공에 떠 있는 손이 덜덜 떨렸다. 남자가 내 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내 몸을 일으켰다. 어둠이 걷히고 시야가 환해졌다.

“조심해서 들어가, 애기야.”

남자가 개새끼라는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알고 있는데도 충격이었다.

그가 나를 이용했다는 것을 확인 사살 당했기 때문인지, 희롱을 당했기 때문인지, 그 주체가 남자이기 때문인지는 명확하게 정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아무리 개새끼라도 애기한테 발정하진 않아.”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는 더 이상 예전의 그 남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악몽을 꾸었다.

뜨거운 불구덩이 속에서 고성하가 살려 달라고 외치고, 나는 그것을 영화처럼 관람하고 있었다.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죽어 가는 고성하를 구경하는 나를 마리오네트처럼 조종하고 있는 건 남자였다.

나는 남자의 손길에 맞춰 울고 웃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마지막엔 불 속으로 던져졌다.

나를 버린 남자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손을 털고 떠났다.

“너 무슨 일 있지?”

늦은 시간까지 권지운과 설계도면을 작성하는 중이었다.

“요즘 표정이 안 좋아 보여.”

남자와 만난 뒤로 며칠째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특히 어젯밤에는 불구덩이에 던져지는 악몽을 꿔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밤새 허벅지만 뜯어 댔다.

퀭한 얼굴을 들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권지운이 혀를 차며 내 컵에 커피포트를 기울였다.

“감사합니다.”

“성원 저택 건 끝날 때까지는 계속 바쁠 텐데 괜찮겠어?”

따뜻한 원두커피를 입 안에 머금었다. 평소에는 향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유독 쓰게 느껴졌다.

“일 때문에 힘든 거 아니에요.”

찜찜한 입 안으로 혀를 굴리며 어색하게 웃자 권지운이 팔짱을 끼고 몸을 기울여 왔다.

“일이 아니면, 사적인 거야? 그렇게 말하니까 궁금하네.”

“사생활 존중해 준다고 하셔서 입사했는데요.”

“계약서 도장 찍으려면 무슨 말을 못 해. 너도 알잖아. 나 너 좋아하는 거.”

“…….”

틈만 나면 관심을 표현하는 건 권지운의 버릇 같은 거지만 지금은 웃으며 받아 줄 기분이 아니었다.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자 그가 웃으며 사과를 건넸다.

“미안. 내가 선 넘었다.”

“……선배는 내가 왜 좋아요?”

머그잔을 양손에 쥐었다. 그와 알게 된 지 꽤 오래되었음에도 이런 질문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권지운도 의외였는지 작은 콧소리를 냈다.

“예뻐서. 내가 말 안 했나?”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보았다.

“그게 다예요?”

“응?”

정말 그 이유가 전부라면 권지운의 마음은 너무나 얄팍하다. 나보다 더 예쁜 사람이 있다면 단번에 마음이 그리로 옮겨 가겠지. 그 정도 마음으로 들이대는 거라면 내게 바라는 건 뻔했다.

“혹시 선배도 나랑 자고 싶어요?”

“와, 갑자기 단계가 이렇게 훅 뛰어도 되는 거야? 왜 그러냐, 너.”

“만약에 그런 거면 관두라고요. 난 그럴 생각 없으니까.”

“왜? 나 말고 너랑 자고 싶은 사람 있대?”

권지운이 가볍게 정곡을 찔러 왔다. 어떻게 알았지.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자 그가 웃으며 턱을 괬다.

“뭘 그렇게 당황해. 너 학부 때 인기 많았잖아.”

“…….”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거 보면 꽤 신경 쓰이는 일이 있는 것 같은데.”

괜한 이야기를 꺼낸 것 같다. 쓸데없이 눈치가 빠른 권지운을 난감하게 바라보다 괜히 커피를 홀짝이는데, 재미가 들렸는지 그가 본격적으로 잡담을 할 태세를 갖췄다.

“안 그래도 궁금했어. 넌 왜 연애 안 해?”

“됐으니까, 일이나 해요.”

“너 좋아하는 애들 중에 제법 괜찮은 애들도 있었단 말이지. 나 포함해서.”

“선배는 나이가 너무 많은데요.”

“아, 연상은 별로야?”

그가 장난스럽게 상처받은 척을 했다.

화제를 돌리기 위해 다시 도면으로 손을 뻗는데, 권지운이 덥석 내 손을 붙잡았다. 본인 딴에는 일하지 말고 이야기나 더 하자는 의미였겠지만, 갑자기 잡힌 탓에 화들짝 놀라 손을 빼냈다. 권지운도 조금 당황한 얼굴을 했다.

“미안해. 다른 의도는 없었어.”

“아니에요, 전 그냥…….”

“있는 거 같던데.”

그때, 어색해진 공기를 가르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우당탕, 의자가 제멋대로 넘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고개를 돌리니 쇼핑백을 든 남자가 사무실 문 앞에 서 있었다. 권지운 역시 갑작스러운 남자의 등장에 놀란 듯 표정을 굳히고 몸을 일으켰다.

“누구시죠?”

“늦은 시간까지 고생이 많네요.”

남자가 능청스럽게 대꾸하며 안으로 발을 들였다.

“무슨 일이에요. 왜 왔어요.”

“반겨 주니 좋네.”

“됐고, 무슨 일이냐고요.”

“심부름 왔지.”

“서을아, 아는 사람이야?”

의아한 듯 나를 돌아보는 권지운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온 신경이 남자에게 쏠려 있는 탓에 차마 설명할 여유가 없었다.

남자가 오른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왼손으로 옮기곤 권지운에게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이민후 대표 심부름꾼입니다.”

웃기고 있네. 어떤 심부름꾼이 대표 방에서 섹스를 해.

내가 눈을 치켜뜨며 남자의 앞을 가로막자 그가 오른손을 허공에 두어 번 털며 거둬 갔다.

아니, 거두는 줄 알았는데 돌연 내 쪽으로 뻗어 와 어깨 위에서 탁, 하고 뭔가를 쳐 냈다. 돌아보니 권지운이 손을 어정쩡하게 든 채로 미간을 구기고 있었다.

“뭡니까?”

“파리가 있네.”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남자를 올려다보자 그가 나와 눈을 마주친 채로 권지운에게 쇼핑백을 건넸다. 받으라는 듯 가볍게 흔들며 입꼬리를 올리는데, 나를 보고 있어서인지 꼭 날 비웃는 것 같았다.

무심코 악몽이 떠올랐다. 남자의 손에 농락당하다 가차 없이 버려진 인형.

“받아요. 이 대표 선물. 일하다 힘들면 하나씩 챙겨 먹으라던데.”

마지못해 받아 든 권지운이 쇼핑백을 부스럭댔다.

나는 남자만 노려보았다. 그도 나만 바라보았다.

“볼일 끝났으면 나가요.”

“그러려고 했는데, 막상 보니 아쉽네.”

남자가 태평히 대꾸하며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드디어 그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중이었다.

양손을 슈트 주머니에 찔러 넣고 느긋하게 내 일터를 구경하던 남자가 일순 휘파람을 불었다.

“애기는 이런 데서 일하는구나.”

스스럼없는 호칭에 권지운이 탁, 소리 나게 쇼핑백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서을아, 어떻게 아는 사이야?”

나는 대답 대신 남자에게서 등을 돌렸다. 권지운이 눈동자를 굴리며 설명을 요구했지만 모른 척하고 의자를 바로 세워 앉았다.

“선배, 하던 일 계속해요. 그쪽은 가 보시고요.”

“그럴까.”

“배웅은 안 할게요. 그럴 사이 아니니까.”

남자가 피식 웃더니, 권지운에게 고개를 까딱하며 대충 인사를 건네곤 미련 없이 나갔다. 그 뒷모습을 노려보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신경질적인 한숨을 뱉었다.

권지운이 미심쩍은 얼굴로 문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저 사람 뭐야?”

“…….”

“잘 아는 사이인 거 같던데.”

남자와 내 관계에 관해서 설명하려면 너무 많은 트라우마를 거쳐야 한다. 물론 설명할 생각도, 이유도 없지만.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그나마 권지운이 선을 지키는 상식적인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그는 자세한 걸 묻는 대신 맞은편에 앉으며 내 쪽으로 쇼핑백을 밀었다.

“이 대표 좀 이상하다.”

“왜요?”

권지운이 쇼핑백을 거꾸로 뒤집었다. 우수수 쏟아지는 막대 사탕에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왜 이런 걸 보냈지?”

“…….”

“초콜릿 주면 욕먹을 거 같아서 사탕으로 샀어. 이것도 싫어?”

나도 모르게 사탕을 뒤적였다. 온갖 맛이 다 있는 와중에 초콜릿 맛만 없다.

이, 미친놈.

나는 도로 사탕을 쇼핑백에 담아 들고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서을아, 왜 그래?”

등 뒤로 권지운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울화가 치밀어 다른 생각을 할 정신이 없었다. 거칠게 건물 밖으로 나가자 마치 내가 나올 줄 알았던 것처럼 남자가 까만 세단에 기대어 있었다.

달칵,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라이터를 열었다.

“권지운이랑 무슨 사이야?”

나는 대답 대신 남자에게 쇼핑백을 던졌다. 사탕이 아스팔트 위에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뭐 하자는 거예요.”

“저런. 이 대표가 서운해하겠네.”

“웃기지 마. 그쪽 짓인 거 모를 거라고 생각해요? 무슨 생각으로 이걸 가져와요.”

“당 떨어지면 먹으라고.”

“야!”

남자는 연신 라이터 뚜껑을 달칵댔다. 그 소리가 듣기 거슬렸다. 자연스레 강박적으로 라이터를 손에 굴렸던 예전이 떠올랐다.

10년이나 지났고, 성공한 주제에 왜 저깟 라이터는 그대로일까. 얼핏 봐도 군데군데 도금이 벗겨진 라이터가 허공으로 가볍게 튀어 올랐다가 다시 남자의 손바닥에 떨어졌다.

“권지운이랑 무슨 사이야?”

그는 같은 말만 할 줄 아는 로봇처럼 재차 권지운과 내 사이를 물었다.

“그게 왜 궁금한데요.”

“그러게. 궁금하네.”

“됐으니까 이딴 거 다시는 가지고 오지 마요. 아니,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가요. 당장.”

“대답해 주면 갈게.”

남자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사방으로 흩어진 막대 사탕을 하나하나 주워 쇼핑백에 담는 동작이 느긋했다. 정말로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가지 않을 기세였다.

도대체 왜 이러는지 속을 알 수가 없다. 예전에도 그랬다. 항상 그는 뭐든 다 아는 것처럼 굴었고, 나는 그 속을 몰라 휘둘리기만 했다. 나를 이용해서 고성하를 죽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그가 건네는 사탕에 큰 위로를 받았었다.

남자가 내 발밑에 떨어진 사탕을 주우려고 손을 뻗을 때 곧장 그걸 발로 밟았다. 남자의 시선이 천천히 내게로 올라왔다.

“그래서, 권지운이랑 무슨 사이라고?”

“고용인과 피고용인. 보면 몰라요?”

“그렇게 단순해 보이진 않던데.”

“대체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건데요.”

“솔직한 대답.”

솔직한 답을 바란다면 해 줄 말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그쪽이랑 나 같은 사이예요.”

“그게 뭘까.”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사이.”

딱딱한 로퍼 밑창으로 사탕을 깨트렸다. 남자가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단숨에 시선이 역전되었다.

“애기는 어느 쪽?”

망설임 없이 남자 쪽으로 턱짓을 했다.

“잘했어. 후자면 속상할 뻔했잖아.”

“이제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요.”

그가 다시 내 품에 쇼핑백을 안겼다.

“약속대로 대답 들었으니까 갈게.”

“이건 가지고……!”

“그런데 이상하네.”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 운전석으로 넘어간 남자가 문을 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네가 나라면, 권지운은 너라는 소린데.”

“…….”

“권지운은 너한테 흑심 있어 보이던데 말이야.”

“…….”

“그것도 같을까.”

그 말을 끝으로 남자가 차에 올라탔다. 자동차가 천천히 움직여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 나는 쇼핑백을 품에 안은 채 멍청하게 서 있었다.

“서을아, 왜 그래?”

남자의 차가 완전히 사라지고, 권지운이 나를 데리러 나오고 나서야 그 의미를 깨달았다.

“무슨 일인데?”

나를 좋아하는 권지운과 그 마음을 이용해 일자리를 얻은 나.

그를 좋아하는 나와 날 이용해 새 주인을 얻은 남자.

나는 건물 입구 쓰레기통에 곧장 사탕을 쏟아부었다.

남자는 정말 뭐든 알고 있었다.

남자에 대한 감정을 깨달은 것은 재수를 할 때였다.

19년 인생에 가장 큰 사건을 경험한 직후라 당연히 그해 수능에선 형편없는 점수를 받았다. 적당한 대학에는 갈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내 목표는 한국대였기에 아버지에게 재수를 하고 싶다고 말했고, 당시 나를 혼자 두고 갔다는 것을 늘 미안해하던 아버지는 내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들어주었다.

수능을 다시 준비하는 건 쉽지 않았다.

다만 의외로 고성하의 죽음은 빨리 잊었다. 온갖 미디어에서 그의 자살을 떠들어 대고, 성벽을 비난해서인지 죄책감이 덜어지는 것도 같았고, 무엇보다 시도 때도 없이 남자가 떠올라서 다른 생각을 할 정신이 없었다.

내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 담백한 눈빛, 예상치 못한 친절 같은 것들이 그를 향한 배신감보다 더 자주, 오래 나를 괴롭혔다. 거기까진 참을 만했다. 어떻게든 이 악물고 책을 들여다보면 진도가 나갔으니까.

하나 고채원과 뒹구는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질 때면 하던 걸 전부 내치고 허벅지를 쥐어뜯어야 했다. 간드러진 교성, 컨테이너를 울리던 진동 그리고 남자의 알몸이 눈앞에 아른거릴 때마다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고, 그건 곧 구토로 연결되었다.

그 과정을 몇 차례 겪다 보니 종국에는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어쩌면 남자도 고채원을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마음 없이 몸을 섞는 쓰레기들이 많다는 건 알고 있다. 당연히 남자도 그런 부류일 거라고 생각했다. 매사에 가볍고, 장난스럽고, 태연한 남자의 성격과 잘생긴 외모, 깡패라는 신분으로 말미암아 천성이 천박하리라 단정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은 그 역시 고채원에게 진심이었을 수도 있다. 고채원 같은 여자와 살을 섞으며 단 한 번도 심장이 뛰지 않을 수가 있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쉴 새 없이 사랑을 속삭이던 어머니의 외도 장면에 남자와 고채원이 덧씌워졌다. 남자가 특유의 웃음기 머금은 낮은 목소리로 사랑한다 속삭이고, 고채원이 예쁘게 눈을 접어 가며 미소 짓는 모습을 상상할 때마다 가슴속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끓었다.

형용할 수 없는 짜증이 치솟아 나도 모르게 입술을 짓이겨 물고 허벅지를 꼬집어 댔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손톱에 피가 맺힐 때까지 힘을 주었음에도 고통보다 열기가 더 강렬했다.

점점 더 안쪽 연한 살로 파고들던 손이 속옷에 닿았을 때, 나는 내 몸을 참을 수 없게 만드는 열기의 원천이 다리 사이라는 걸 깨닫고 또 한 번 속을 게워 내야 했다. 남자와 고채원의 섹스를 떠올리며 흥분한 것이다.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너무 큰일을 겪어서 미친 게 아니라면 이럴 수 없었다. 언제나 섹스는 더럽다고 생각했으면서, 그 역겨운 행위 때문에 가정이 파탄 난 걸 알고 있으면서, 끔찍한 짓을 당할 뻔했으면서 그로 인해 다리 사이를 적시다니. 나까지 짐승이 된 것 같았다.

축축해진 팬티를 외면하고 나를 뒤덮은 더러운 감정을 지우려고 애썼다. 볼펜을 쥐고 쉴 새 없이 문제집을 넘기며 다른 생각을 하려고 했지만 난생처음 인지한 성욕은 바람을 탄 것처럼 순식간에 온몸을 지배했다.

나도 모르는 새 허벅지가 딱 붙고 몸이 배배 꼬였다. 다리 사이가 간지러웠다. 순간적으로 팬티 안에 손을 집어넣고 긁고 싶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몸을 이리저리 비트는 순간, 깔고 앉은 방석 가장자리가 안으로 말리며 은밀한 부위를 눌렀을 때,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아…….”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나도 모르게 뱉은 소리가 소름 끼쳐서 또다시 구토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허리는 의지와 달리 이리저리 움직였다.

뒤늦게 내가 방석으로 다리 사이를 자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급히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거울 속에는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내가 서 있었다. 참지 못하고 신물을 뱉어 냈다.

그게 내 첫 자위였다.

불행히도 그 뒤로 그런 일은 종종 있었다. 의식의 흐름처럼 남자를 생각하다, 남자와 고채원의 섹스를 떠올리며 흥분했다.

그러나 자위는 하지 않았다. 흥분하는 나 자신이 너무 역겨워서 그것만은 할 수 없었다. 푹 젖은 팬티를 손으로 빨며 열기를 가라앉히면서도 끊임없이 자책했다.

“싸구려로 보고 있잖아. 고작 열아홉 살짜리가 아빠뻘 되는 인간한테 다리나 벌린다고, 한심하다고 생각하잖아. 밤마다 고채원 훔쳐보면서 야한 상상하는 발랑 까진 애라고 생각하잖아!”

언젠가 남자에게 했던 말이 사실은 내 본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러려고 그렇게 고채원의 밀회를 훔쳐보았나. 나는 정말 싸구려인가. 혼란스러웠다.

성욕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남들처럼 받아들이기에는 나를 괴롭게 하는 과거가 존재한다. 그것들을 잊고 내 욕구를 받아들이는 것은 나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권지운은 너한테 흑심 있어 보이던데 말이야.”

다시금 떠오르는 남자의 마지막 말에 신경질적으로 침대 위에 엎어졌다.

아버지는 일이 생겨 늦는다고 하셨다. 다행이었다. 아버지가 집에 있었다면 이 화를 눌러 삼켜야 했을 거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악을 썼다.

나 자신에게도 상기시키고 싶지 않아 외면했던 욕정을 당사자가 너무 간단히 짚어 냈다.

“개새끼.”

눈앞에 남자의 알몸이 그려졌다. 태어나서 처음 본 성기와 조각한 것처럼 짜여 있던 근육질의 몸. 체액으로 젖은 곳들까지 모조리.

입 안 여린 살을 깨물어 토기를 삼켰다. 나에게 성욕은 흥분과 거부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한동안 괜찮았다. 한창 호르몬이 날뛰는 스무 살 때야 남자를 떠올릴 때마다 팬티가 젖었지만, 그것도 차츰 덜해졌다. 적어도 최근 몇 년간은 이런 식의 반응을 한 적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남자와 다시 만난 그 순간 하필이면 그의 섹스 장면을 목격했고, 그 여파는 상당했다.

그날, 남자와 섹스를 했던 그 여자는 누구일까. 고채원과 상이한 이미지였으나, 그녀 역시 미인이었다. 불렀다고 하는 걸 보면 아무리 좋게 봐줘도 섹스 파트너 이상은 아닌 것 같은데, 혹시 예전처럼 몸을 대 주고 있는 건가.

한 기업의 실세가 몸을 대 준다면 진짜 대통령 딸쯤 될지도 모르겠다.

남자의 위에서 유연하게 흔들리던 여자의 등. 가는 허리를 움켜쥔 남자의 손. 어떤 기분인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는, 자지러지던 교성.

질끈 눈을 감았다. 은밀한 부위에서 뭔가가 흘러내렸다. 젖은 팬티가 맨살에 밀착되는 감촉이 끔찍했다. 나는 그 감각을 무시한 채 이불 안으로 들어가 몸을 둥글게 말았다.

차라리 자자. 이딴 거에 휩쓸리느니 불구덩이에 던져지는 악몽이 낫다.

어느 쪽이든 남자가 얽혀 있다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쿵쿵, 다리 사이의 혈관이 날뛰는 것은 그 무엇보다 엿 같았다.

다행히 악몽을 꾸지는 않았다.

“……TG건설이랑?”

다만 눈을 뜨자마자 접한 소식이 또 남자와 관련되어 있어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래. 이 대표가 먼저 제안했어.”

성원 신도시에 들어설 7,000세대짜리 대형 아파트 단지 건설에 TG건설과 아버지의 회사인 우완건설이 컨소시엄을 맺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어쩐지 요 며칠 유독 바빠 보이더라니. 아버지의 회사를 생각하면 분명 희소식이지만 선뜻 기뻐할 수는 없었다.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인 듯 내 눈치를 살폈다. 내가 조금이라도 고성하를 떠올릴 만한 일이라면 꺼리는 아버지를 알고 있었기에 억지로 웃었다.

“좋은 기회네. 다들 성원 들어가겠다고 난리던데.”

미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갑자기 내 일상에 남자가 끼어들고 있다. 밖에서도, 안에서도. 욱신대는 허벅지 위를 손바닥으로 쓸며 생각했다.

왜 하필 우완건설일까.

그동안 아버지가 열심히 일으켜 세우긴 했으나, 아직은 특별히 눈에 띄는 성과가 있는 회사는 아니다. 최근에야 도급 순위 끝자락에 간신히 들어 조금씩 발주 건을 늘려 가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너무 큰 물고기를 잡았다. 혹시 남자와 내 관계가 관련이 있는 걸까.

나에게 일말의 미안함이라도 있어서 아버지 회사를 도와주는 건…….

잠깐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이미 남자 앞에서 같은 착각으로 쪽을 팔아 봤으니 그쪽으로는 생각을 관뒀다. 제 성공을 위해 어린 나를 이용한 남자다. 이번 건 역시 뭔가 득 볼 게 있으니 우완건설을 택했겠지. 가뜩이나 머릿속이 포화 상태인데 더는 생각 거리를 늘리고 싶지 않았다.

“서을아.”

회사 이야기를 갈무리한 아버지가 문득 나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남자의 잔상을 지우려고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다 컵을 내려놓았다.

“왜?”

“그…….”

뜸 들이는 모양새가 어딘가 이상했다. 묘한 불안감을 감지하고 눈을 가늘게 뜨자 아버지가 헛기침하며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혹시…… 엄마 보고 싶지 않니?”

뚝, 동작이 멈췄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엄마랑 떨어져 지낸 지 오래됐으니까 보고 싶지 않을까 해서…….”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여태 어머니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는데 갑자기 이런다는 건, 분명 우연이 아니다.

“……아빠, 설마 엄마랑 연락해?”

“너 많이 보고 싶어 해.”

눈도 못 마주치고 난감해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내 말이 들어맞은 모양이었다.

“예전부터 너 보고 싶다고 종종 연락 왔었어. 한창 공부할 때라 방해될까 봐 말하지 않았는데, 이젠 너도 어느 정도 안정 찾았으니까 같이 저녁이라도…….”

“아빠, 정말 미쳤어?”

“정 싫으면 억지로 만나라고는 안 해. 하지만 너도 엄마가 보고 싶을 거 같아서.”

“내가 왜 엄마를 보고 싶어 해. 엄마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잊었어?”

아버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내 앞에서……!”

다른 남자와 섹스를 했어. 어머니의 외도가 그에게 얼마나 큰 아픔인지 알아 뒷말을 삼켰다.

그건 아버지의 상처이기도 하지만, 내 상처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속인 어머니와 아저씨. 그들 모두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점을 이용해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굴었다. 마음껏 바람을 피우고, 내 몸을 만지고, 날 팔아넘기고.

습관처럼 남자가 떠올랐다.

그래. 당신도 마찬가지야.

“내 앞에서 엄마 이야기 꺼내지 마.”

“주태강. 몇 달 전에 사고로 죽었대.”

“…….”

“남의 가정 파탄 낸 벌을 받은 거지.”

아버지가 씁쓸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내가 죽어라, 죽어라, 저주를 해서 그렇게 됐나 싶기도 하고.”

“그만해. 그 사람들 이야기 듣기 싫어.”

“주태강 죽고, 네 엄마 혼자 힘들게 살았어.”

실소가 터졌다.

“그걸 아빠가 어떻게 알아.”

“주태강 그 인간 살아생전 돈 한 푼 제대로 벌어 온 적 없고 빚만 져선 네 엄마가 고스란히 갚아야 했어. 어찌나 지독한 놈들한테 돈을 빌렸는지 피할 방법도 없어서…….”

“……빚 갚아 줬어?”

“서을아. 네 엄마, 많이 후회하고 있어. 지금은 남의 집 가사도우미로 일하면서 하루하루 먹고살아…….”

호구냐고 소리를 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여전히 그가 어머니를 잊지 못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직도 아버지 침실 장롱 속에는 두 분의 결혼사진이 들어 있고, 가끔 술을 많이 마신 날에는 침실에서 어머니의 이름과 함께 흐느낌이 새어 나올 때도 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떠난 지 15년이다. 강산이 바뀌고도 남는 그 긴 시간 동안 왜 잊지 못하는 걸까. 대체 얼마나 사랑하면 그럴 수 있나. 심지어 자신을 배신하고 떠난 사람인데.

백번 양보해 돈은 그렇다 치자. 어차피 아버지가 번 돈이고, 그걸 어떻게 사용하든 내게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는 없다. 차라리 그뿐이면 다행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표정을 보아하니…….

“엄마랑 다시 만나고 싶구나.”

“…….”

“아니, 벌써 만나는 중인가.”

더 이상 아버지와 한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 몸을 일으켰다.

“가 볼게. 바빠서 점심시간에 전화 못 받을 수도 있어. 메시지 보낼게.”

“서을아.”

아버지의 부름을 뒤로하고 현관문을 세게 닫고 나왔다.

아침부터 태양 빛이 뜨겁다. 그러고 보니 오늘도 폭염 주의보랬나.

손등까지 뒤덮는 까만 셔츠를 내려다보며 신경질적으로 한숨을 뱉었다.

덥다. 더워 미치겠다. 속에서 열이 부글부글 끓었다.

핸드폰 화면에 익숙한 번호를 띄워 놓고 한참을 노려보았다. 저장은 하지 않았지만, 머릿속에서 절대 잊히지 않는 핸드폰 번호.

“뭔데 그렇게 봐?”

“……왔어요?”

인테리어 업체와 오전 미팅을 한다던 권지운이 생각보다 빨리 복귀했다.

나는 핸드폰을 엎으며 그가 내미는 커피를 받았다. 적당히 감사 인사를 하면서도 신경은 핸드폰으로 쏠렸다.

남의 집 가사도우미를 하고 있다는 아버지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좋다고 나갔으면, 좀 행복하게 살든가. 그게 뭐야. 사랑하는 사람은 죽고, 염치없이 아버지 돈이나 받고, 자기는 고생하고.

“무슨 일인지 묻고 싶은데, 그러면 안 될 거 같은 분위기네.”

권지운이 책상 위에 걸터앉으며 내게 뭔가를 건넸다. 커피를 내려놓고 받아 보니 다름 아닌 편지였다.

“이게 뭐예요?”

“글쎄. 네 이름으로 왔던데. 우편함에 있어서 가져왔어.”

하얀 편지 봉투에는 받는 이에 내 이름만 있을 뿐 다른 건 아무것도 적힌 게 없었다. 우표도 붙어 있지 않았고, 보낸 주소도 없었다.

나는 의아하게 이리저리 돌려 보다 봉투를 뜯었다.

“뭔지 되게 궁금한데 사생활 보호해 줄게.”

장난스레 말하며 제자리로 돌아가는 권지운에게 옅게 웃어 보인 뒤, 봉투 안에 들어 있는 종이를 꺼내 펼쳤다.

「서을아, 나 채원 언니야.」

서두에 적힌 이름을 발견한 순간 나도 모르게 그것을 손에서 놓쳤다.

“왜 그래?”

“…….”

고채원이 왜. 어떻게?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고……. 아니, 왜 내게 편지를 보낸 거지?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와는 일절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딱 한 번 고성하가 죽은 뒤로 아주머니와 함께 나를 찾아왔을 때 만남을 거절하며 아버지를 통해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아 달라는 의사를 전달했고, 그 뒤로는 본 적이 없었다.

10년 동안 연락 없이 지내다가 갑자기 이런 편지로 나타났다는 건…… 뭔가 이상해도 한참 이상하다. 내가 알기로 고채원은 해외 생활을 하고 있다. 프랑스의 유명한 악단에 들어간 걸로 아는데, 한국에 들어온 건가. 그런데 왜 나에게.

“뭔데 그래. 내가 볼까?”

“아, 아니요. 별거 아니에요…….”

떨리는 손으로 겨우 종이를 주웠다.

무슨 일이지? 왜? 도대체 왜?

긴장으로 메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조심스럽게 편지를 읽었다.

내용은 아주 짧았다.

「서을아, 나 채원 언니야. 이런 식으로 갑자기 연락해서 미안해. 한 번만 만나 줘. 부탁이야.」

그리고 적혀 있는 핸드폰 번호. 내가 아는 고채원의 예전 번호가 아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갑자기 왜 만나 달라는 거며, 그걸 왜 편지로 이야기하는 걸까. 무엇보다 사무소 주소를 알고 있으면서 찾아오지 않고 편지만 꽂아 두고 간 게 가장 찜찜했다.

문득 머릿속에 성당에서 새하얗게 질려 쓰러지던 고채원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그때와 관련된 건 아니겠지. 그래. 이제 와서 무슨.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데. 이미 다 끝난 일로 고채원과 내가 주고받을 이야기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아닐 거야.

“아…….”

하지만 그 일이 아니고서야 그녀가 나를 찾을 일이 있을까.

“서을아, 괜찮아? 이상한 편지야? 뭔데. 스토커?”

종이를 쥐고 떨고 있는 내가 이상한지 기어이 권지운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너 대학 때 쫓아다니던 놈, 설마 아직도 괴롭히는 거야?”

그가 편지를 가져가려는 듯 손을 뻗었다. 나는 급히 종이를 손안에 구겼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게 언제 적 일인데……. 그 선배는 자퇴한 뒤로 본 적 없어요.”

“아니면 다행이고. 사실 그 편지 찜찜해서 전해 줘도 될지 고민했거든.”

대학 시절 질 나쁜 선배의 눈에 띄어 몇 달 동안 스토킹을 당했었는데, 권지운도 알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가 조교로 있을 때라 학교에 돌던 소문을 들은 모양이다. 경찰에 신고를 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툭하면 이상한 메시지나 사진을 보내던 스토커는 갑자기 자퇴를 한 뒤로 보지 못했다.

권지운의 세심한 걱정에 고마워할 겨를도 없었다. 심장이 불안정하게 조여들어 주먹을 세게 쥐었다. 종이 구겨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뭐 때문에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을 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더는 고성하의 집안과 얽히고 싶지 않다. 그럴 이유도…….

“죽여 줄까?”

욱신, 묻어 두었던 죄책감이 다시 튀어 나올 것 같아 급히 권지운을 돌아봤다.

“선배, 담배 피우죠?”

“갑자기 무슨 소리야?”

“불 있어요?”

“너도 피웠던가?”

“아니요. 태워 버리게.”

권지운이 의아한 얼굴로 주머니를 뒤져 라이터를 꺼냈다. 남자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브랜드의 라이터였다. 도금이 벗겨진 남자의 것과 달리 권지운의 것은 깨끗한 은색이었다.

라이터를 받아 들고 익숙하게 뚜껑을 열어 종이를 태우자 권지운이 흥미로운 콧소리를 냈다.

“만지는 게 익숙하네.”

“예전에 비슷한 거 쓰던 사람이 있었어요.”

“그래?”

당신은 알까. 당신이 성공하려고 벌인 일 때문에 죄 없는 고채원은 아버지를 잃었고, 나는 그녀의 편지에 끔찍한 과거를 되새기는 중이라는 걸.

이따위 편지를 받게 만든 남자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던 권지운이 내 쪽을 힐끔 돌아봤다.

“그거 가져도 돼.”

“……네?”

“얼마 전에 새로 선물 들어온 거 있거든. 오늘같이 태우고 싶은 거 있으면 쓰라고.”

“…….”

나는 타들어 가는 고채원의 편지를 내려다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마지막은 아닐 거라는 어렴풋한 예감이 들었다.

내 예상이 맞았다. 고채원의 편지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내가 무시할 거라는 걸 알았는지 매일같이 사무소 우편함에 내 이름만 적힌 편지 봉투가 꽂혀 있었다. 내용은 전부 똑같았다.

결국, 편지가 보름 넘게 이어지자 참다못한 권지운이 대신 건물 보안팀을 찾아 CCTV를 확인했으나, CCTV는 고장 나 있었다.

“보안팀에서 그걸 몰랐다는 게 말이 돼요? 24시간 녹화되는 거 아니에요?”

“미리 녹화된 화면이 틀어져 있었대.”

“그게 무슨 말이에요?”

“보안팀도 몰랐던 모양이야. 우편함 쪽 CCTV 모니터에 송출되던 영상이 지난달 녹화 영상이었대.”

“…….”

“편지 보낸 사람 누군지 알지? 누구냐. 당장 신고하자.”

권지운이 편지를 달라는 듯 손을 뻗었다.

나는 오늘 아침에도 도착한 고채원의 편지를 쥔 채 불안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신고하고 싶다. 하지만 긁어 부스럼일까 봐 겁이 났다.

고채원은 내가 고성하에게 희롱당한 여고생인 걸 알고 있다. 만약 그녀가 나를 찾는 이유가 아버지 때문이라면, 섣불리 신고했다가 다시 그 일이 들춰질지도 모른다.

“신고할 만한 사람은 아니에요.”

“그럼 매일같이 편지가 오고, 넌 그걸 매번 태우는 이유가 뭔데.”

“그건…….”

“이것도 선 넘는 건가.”

권지운이 한숨을 뱉었다.

밤낮없이 설계 도면을 만들고, 업체와 미팅하느라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랄 텐데 나를 위해 직접 보안팀까지 찾아 준 권지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모든 걸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이 편지는 내 가장 끔찍한 기억과 맞닿아 있으니까.

“내가 널 좋아하는 건 맞는데. 안 좋아해도 이런 상황이면 누구나 걱정해.”

“……미안해요, 선배. 그런데 정말 스토커 같은 거 아니에요.”

“알았으니까 그렇게 보지 마라.”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눈치를 보다 의아한 얼굴을 하자 그가 피식 웃으며 책상 위에 놓여 있던 USB를 내게 건넸다.

“귀여워서 마음 풀리잖아. 그거 가지고 이 대표 좀 만나고 와. 중간 과정 확인하고 싶다네.”

“TG건설이요?”

USB를 손에 꽉 쥐었다. 필연적으로 남자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중간 과정을 확인하고 싶은 게 정말 이민후의 생각일까. 또 나를 놀려먹기 위해서 이민후 뒤에서 불러내는 건 아닐까.

신경이 날카롭게 섰다. 얼굴 근육이 딱딱해지는 게 느껴져 눈썹뼈를 손끝으로 꾹꾹 누르는데, 핸드폰이 진동했다.

“아버지신가 보네.”

권지운이 시계를 확인하더니 익숙하다는 듯 말했다. 과연 아버지의 전화였다.

푸욱, 날카로운 송곳이 미간을 관통하는 것 같은 신경질이 치밀어 올랐다. 전화를 받지 않고 종료시켜 버리자 권지운이 의아한 듯 나와 핸드폰을 번갈아 보았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꺼낸 날 뒤로 아버지와의 대화를 피하는 중이었다.

어머니에 고채원, 거기다 남자까지. 사방에 나를 괴롭히는 것들뿐이다.

남자가 내 인생에 다시 나타난 순간부터 모든 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대표실에서 추잡하게 섹스하는 그를 목도한 뒤로 고채원과 어머니까지 내 인생에 다시 등장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래. 다 당신 탓이야.

익숙하게 그 책임의 화살이 남자에게로 돌아갔다.

“다녀올게요.”

“그래. CCTV는 어떻게 된 건지 내가 알아볼게.”

“고마워요, 선배.”

나는 이렇게 괴로운데 혼자 보란 듯이 잘 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배 안이 배배 꼬여 들었다. 남자는 지금도 누군가와 난잡하게 몸을 섞고 있을지 모르는데, 왜 나만.

TG건설 안내 데스크 직원이 내 얼굴을 알아본 듯 눈썹을 살짝 들었다.

이제 생각해 보니 왜 처음 방문했을 때 나를 이상하게 훑어봤는지 알겠다. 나 역시 남자와 몸을 섞기 위해 왔다고 생각했겠지. 오죽 회사에서 더럽게 놀았으면 그런 오해를 했을까 싶어 직원을 탓할 생각은 없었지만, 내가 그 대상이 되는 건 싫어서 명함을 내밀었다.

“권지운 건축사 사무소 진서을이라고 합니다. 이민후 대표님과 미팅 약속을 잡았는데요.”

그제야 직원은 내가 남자와 자려고 온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는지 아차 하는 얼굴을 했다. 이내 한심하다는 눈초리를 거두곤 친절하게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어가셔도 됩니다.”

고개를 끄덕이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반응을 보아하니 지금은 여자를 부르진 않은 모양이다.

남자가 혼자 있을지, 이민후와 같이 있을지 가늠하며 9층 대표실로 향하자 비서가 1층에서 연락을 받았다며 먼저 인사를 해 왔다. 거들떠보지도 않던 첫 방문 때와는 확연히 다른 대접이었다.

정말 제대로 오해받았었네. 헛웃음을 지으며 대표실 문을 연 나는 소파에 앉아 있는 이민후를 발견하곤 잠깐 걸음을 멈췄다.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나도 모르게 대표실 안을 둘러보았다. 이민후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이민후가 있을 걸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남자가 없을 줄은 몰랐는데…….

태블릿 PC로 뭔가를 보고 있던 이민후가 비서에게 커피를 부탁한 뒤 앉으라는 듯 손짓을 했다.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요.”

주어 없이 던지는 설명이 뭘 의미하는지 모를 수 없다. 못마땅하게 바라보자 이민후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별말 없이 이민후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민후와 나는 서로 아는 것들을 모르는 척하며 일 이야기만 주고받았다.

대화가 마무리되어 갈 때쯤 이민후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잠깐 통화하고 오겠습니다.”

“아,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아니요.”

몸을 일으키며 슈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던 이민후가 고개를 저었다.

“올 때까지 잡아 두라고 해서요.”

“네?”

“긴히 할 말이 있다던데.”

또 주어가 없다.

“저는 할 말 없…….”

“네. 이민후입니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민후가 전화를 받으며 대표실을 나갔다. 황당해하던 나는 뒤늦게 가방을 챙겨 들고 몸을 일으켰다.

미친놈. 잡아 두긴 누굴 잡아 둬. 자기가 뭔데. 뭔데 날 잡아 둬.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노려보며 거칠게 발걸음을 옮겼다. 있으라면 내가 그냥 있을 줄 알아?

“…….”

손잡이로 손을 뻗다 잠깐 동작을 멈췄다. 고채원의 편지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오늘 아침에 받은 편지는 여전히 가방 속에 들어 있다. 아침부터 CCTV니 뭐니 정신이 없어 태우지 못했다.

아득, 어금니를 깨물고 도로 소파에 앉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남자에게 따져야겠다. 당신이 벌인 일 때문에 지금 내가 얼마나 곤란한 상황에 부닥쳤는지 알려야겠다. 그가 나를 살인에 끼워 넣었듯, 나도 혼자만 당하고 있을 수는 없다. 물론 그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은 지난 일을 들먹인다고 해서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겠지만.

탁탁탁, 로퍼로 바닥을 두드리며 짜증을 삭이는 때였다.

돌연 대표실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등지고 있다가 깜짝 놀라서 돌아봤는데, 문 앞에 서 있는 건 남자가 아니었다.

“뭐야, 형님은 어디 가고 너만 있어.”

처음 보는 낯선 사내가 불량한 걸음걸이로 들어왔다. 얼핏 문이 닫히는 찰나 난감한 얼굴을 한 비서와 눈이 마주쳤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누구세요?”

“그러는 넌 누구세요.”

사내는 짐승 가죽 같은 요란한 무늬의 셔츠를 잔뜩 풀어헤친 채였다. 목에 두른 두꺼운 금목걸이. 목을 타고 올라오는 알 수 없는 무늬의 문신. 볼에 길게 파인 칼자국. 섬뜩한 눈초리. 한눈에 봐도 삼류 깡패 같은 모양새였다.

살면서 내가 본 깡패는 남자가 전부였는데 이렇게 보니 그가 얼마나 평범하게 다녔는지 알 것 같았다. 특히 요즘은 마주칠 때마다 멀쩡한 슈트 차림이어서 깡패였다는 것도 잠깐 잊었다.

사내가 휘파람을 불며 내 쪽으로 다가와 소파 등받이에 팔을 걸쳤다. 그 탓에 그의 얼굴이 어깨 바로 위로 떨어져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켜 피했다.

“아, 역시 우리 형님 취향 한번 대쪽 같네.”

“무…… 무슨, 허락받고 들어온 거예요? 저 지금 이 대표님과 미팅 중이에요. 나가 주세요.”

“형님 오기 전에 나랑 한판 뜰까?”

“……뭐라고요?”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정확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기보단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편이 맞겠다. 속이 울렁거리고 손이 떨리는 걸 보니 몸은 벌써 위험을 감지했다.

“괜찮아. 우리끼리는 원래 다 그래. 형님도 이해해 주실 거야.”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전 여기 일하러 온…….”

“그러니까 그 일 지금 나랑 하자니까?”

돌연 사내가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탁, 소리 나게 그 손을 쳐 내고 가방을 품에 안았다. 아무래도 빨리 여기서 나가야 할 것 같다.

소파를 빙 둘러 피해 가려고 했지만, 앞을 가로막는 그의 행동이 더 빨랐다. 그가 한 손으로 내 어깨를 붙잡더니 강하게 소파로 밀었다. 반항할 틈이 없었다.

“뭐 하는 거예요!”

“웬 내숭.”

순식간에 소파를 넘어온 사내가 다리 위를 깔고 앉았다. 버둥거리는 내 손을 가볍게 제압해 머리 위로 누른 그가 입맛을 다시며 목까지 채워 놓은 단추를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나, 난 몸 팔러 온 거 아니야……!”

“가만히 있어!”

“손대지…….”

말이 뚝 멎었다. 사내가 셔츠 단추를 한 번에 뜯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단추가 이리저리 튕겨 나가며 앞섶이 풀어 헤쳐졌다. 그가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와 씨, 꽁꽁 싸매고 있어서 반신반의했는데, 이거 완전 물건이네.”

사내의 손이 망설임 없이 브래지어 위를 움켜쥐었다. 커다랗고 두꺼운 성인 남자의 손바닥에 묵직한 살덩어리가 짓눌렸다.

“하아……. 하, 나이도 어린 년이 가슴 하나는 타고났어.”

끔찍한 기억이 순식간에 온몸을 잠식했다. 반항하던 것도 잊고 입을 틀어막는 그때였다.

“재미 좋아 보이네.”

쾅, 문이 세게 여닫혔다. 그에 사내가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아, 형님, 오셨습니까. 오시기 전에 제가 맛만 보려고 했습니다.”

저벅저벅, 소파 등받이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남자다. 그가 왔다.

나는 내내 그를 원망하던 것도 잊고 안도했다. 그때처럼 남자가 나를 도와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일까. 그제야 굳어 있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셔츠 앞을 쥐는데, 문득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시선을 들자 허리를 숙이고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의 탁한 눈동자가 천천히 나를 훑더니 이내 사내에게로 향했다.

“그래서, 맛은 어때?”

뭐라고?

“아직 뭐 한 건 없는데, 제가 먼저 먹어도 됩니까?”

비열하게 웃는 사내를 잠자코 바라보던 남자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런 동요도 없는 평온한 표정이었다. 심지어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입꼬리를 비틀기도 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내가 잠깐 잊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성공을 위해 내 사진을 팔아넘긴 개새끼라는 걸.

“그럴래?”

허락과 같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내가 내 쪽으로 몸을 숙여 왔다.

나는 순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 개새끼야……!”

동시에 사내의 고개가 허공에서 멈췄다.

내가 밀어낸 건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떠느라 몸에 조금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사내가 스스로 멈춘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코앞에 있는 얼굴이 당혹감에 물들었다.

“혀, 형님. 갑자기 왜 이러시는…….”

간신히 시선을 들어 올리자 남자가 사내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있었다.

“나 불렀어, 애기야?”

나쁜 새끼. 개새끼. 미친 새끼. 피도 눈물도 없는 새끼. 더러운 걸레 새끼.

나를…… 나를 이딴 식으로 취급해?

“나 부른 거 아니야?”

“…….”

“아니면 갈까?”

그가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뭔가를 가늠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러다 정말 나를 여기 던져두고 가 버리면 어쩌지.

그를 노려보면서도 겁에 질려 입술을 짓이겨 물었다.

그가 되묻듯 눈썹을 들썩였다. 나는 결국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죽여 줄까?”

“형님……?”

사내가 당황한 얼굴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남자의 손에 속수무책으로 붙잡힌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나를 손쉽게 깔아 눕힌 사내가 남자에게 힘도 못 쓰는 걸 보니 기분이 더러웠지만, 지금 내가 당장 붙잡을 거라곤 남자뿐이었다.

이번에도 또.

─죽여 줄까.

그 말에 담긴, 남자와 나만 아는 비밀. 일부러 그 말을 꺼낸 거라면 정말 치사하다. 그건 내 치부이고, 약점이고, 죄책감이고, 분노다.

“나쁜 새끼.”

“그래. 대답 잘 들었어.”

그리고 유일하게 나를 지켜 준 방어막.

“아악!”

남자가 사내를 바닥으로 던진 뒤 슈트 재킷을 벗어 내 몸 위에 덮었다. 그러곤 문에 대고 말했다.

“데려가.”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리며 검은 슈트를 입은 남자 하나가 들어왔다.

“형님! 자, 잘못했……!”

사내는 곧장 그에게 끌려 나갔다.

쿵, 다시 문이 닫히고, 언제 그랬냐는 듯 대표실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짙은 담배 냄새가 배어 있는 남자의 슈트 안에서 흐느끼는데 돌연 옷이 확 걷혔다.

“흑…….”

고개를 들자마자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내 얼굴을 느릿하게 살피던 남자의 시선이 목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발견한 순간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켜 그의 뺨을 내리쳤다.

“개새끼.”

“…….”

“당신이 어떻게 그렇게 날…… 날 그따위로…….”

나를 제 소유물인 양 사내에게 던져 주던 모습이 뇌리에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흐트러진 셔츠를 움켜쥐고 노려보는 나를 남자는 동요 없이 내려다볼 뿐이었다.

“진작 이러지 그랬어. 난 이렇게 잘 때리면서 왜 저런 놈들은 그냥 둬?”

저런 놈들.

사내만 말하는 게 아니다. 고성하를 떠올리는 건 나뿐만이 아닌 듯 남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무는 남자와 달리 나는 엉망이었다. 옷도, 머리도, 몸도, 마음도. 모든 게 최악이었다.

쉽게 울음이 멈추질 않아 연신 흐느끼며 남자를 노려봤다. 그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옷 입어, 애기야.”

“이게 다…… 그쪽 때문이야.”

후우, 그의 얼굴 위로 연기가 휩싸였다가 사라졌다.

“방금 저 사람이 뭐라고 한 줄 알아요? 그쪽 오기 전에 자기랑 하재. 당신들끼리는 원래 그런다고.”

“그랬어?”

“아직도 깡패 짓 해요?”

“아마도.”

몸을 조금 더 웅크렸다. 허벅지가 욱신거렸다. 상처가 아파서가 아니다. 오히려 상처를 내 주기를 원하고 있다. 괴로울 때마다 뜯어 댔으니 신경에도 습관이 생긴 것이리라.

─괴롭지? 빨리 뜯어. 상처 입혀. 피를 내.

마치 그렇게 말하듯 허벅지 안쪽이 씰룩댔다.

“다 당신 때문이야.”

“그래, 미안해.”

말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속이 뒤틀렸다. 저 태연한 얼굴에 금을 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애초에 그쪽이랑 얽히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쪽을 만난 뒤로 내 인생이 꼬였어.”

“…….”

“나만 그래? 채원 언니도 그쪽 때문에 제대로 꼬였잖아. 그쪽 같은 개새끼랑 얽히는 바람에 아버지도 잃고.”

어쩌면 고채원을 진짜 좋아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꺼낸 이름이었다.

조금이라도 동요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미동 없이 앉아서 나를 구경하고 있었고, 그 모습에 나는 화가 나면서도 이상한 안도감을 느껴야 했다.

고채원은 정말 그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 걸까.

“그거 알아요? 요즘 언니가 나한테 편지 보내는 거.”

툭, 재떨이에 담배를 털던 남자의 동작이 멎었다. 그가 천천히 눈을 치켜들었다.

“편지?”

“매일 만나 달라는 편지를 보내요.”

“왜?”

“몰라서 물어요?”

날카로운 반응에 남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만났어?”

“내가 미쳤어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를 마저 털었다. 미처 재떨이에 온전하게 떨어지지 못한 재가 테이블을 더럽혔다.

“옛날 일 때문일 게 뻔한데 내가 왜 만나.”

“그래.”

“그쪽 덕분에 고성하가 나한테 한 짓 다 알고 있을 테니까 그거 때문이겠죠. 진짜 우리 아버지가 너한테 그런 짓을 했냐, 뭐 그딴 거.”

“그런가.”

“언니한텐 좋은 아버지였으니까 못 믿을 만도 해. 이제 와서 이러는 건 이상하지만.”

“그나저나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남자가 심드렁하게 내 쪽으로 턱짓을 했다.

“몸은 왜 자꾸 꼬아 대. 오빠 꼬셔?”

“뭐라고요?”

인상을 찌푸리고 남자가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내리자 허벅지가 딱 붙어서 이리저리 비벼지고 있었다.

깜짝 놀라서 다리 사이를 띄웠다. 허벅지가 자꾸 욱신거려서 나도 모르게 움찔댄 모양이었다.

“내 생각도 좀 해 줄래? 눈을 어디 둬야 할지 모르겠네.”

그가 장난스럽게 혀를 찼다. 난봉꾼 주제에 순진한 척 구는 꼴이 재수 없었다.

“난 그쪽이 섹스하는 거 두 번이나 봤어요.”

“내 좆도 두 번 봤겠네.”

“…….”

징그러운 남자의 물건이 떠올라 기분이 역해졌다. 헛구역질을 하며 입을 틀어막자, 남자가 가벼운 콧소리를 냈다.

“남자로서 자존심 상하는 반응인데, 그거. 그렇게 볼품없진 않았을 텐데.”

“더러운 이야기 그만해요.”

“섹스라는 말은 네가 먼저 꺼냈잖아.”

“그건 그쪽이……!”

내 몸을 지저분하게 훑지 않았냐고 반박하려다 관두었다.

남자가 몸을 일으키더니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책상 뒤쪽에 있는 옷장으로 향한 그가 그 안에서 옷 하나를 꺼내 내 쪽으로 던졌다. 여성용 블라우스였다.

“입어. 나름대로 가리고 있는 거 같긴 한데, 다 보이거든.”

“이런 일이 종종 있나 봐요?”

사무실에서 섹스 하려고 온갖 준비를 다 해 두는구나.

나는 대답 없는 남자를 노려보다 몸을 돌렸다. 남자의 앞에서 셔츠를 벗고 갈아입을 생각은 없기에 그냥 입고 있는 옷 위에 블라우스를 끼워 넣었다.

“난 애기처럼 훔쳐보는 취미는 없는데 별걱정을 다 하네.”

“…….”

대충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그를 노려보았다.

“애초에 당신이 날 여기 붙잡아 두지만 않았어도 이럴 일 없었어.”

“그래서 깊은 책임감을 느끼고 처리했잖아.”

“처리?”

비웃음이 나왔다.

“먹으라고 던져 줬던 주제에 뻔뻔하게 굴지 마요. 어차피 한통속이면서……!”

“걱정 마. 꼭 죽여 줄게.”

“…….”

“한강에 던져 줄까?”

“뭐라고요?”

정말 죽인다는 것 같아 놀라자 그새 손안에서 라이터를 굴리고 있던 남자가 피식 웃어 보였다.

“잠깐만 눈을 떼면 벌레가 붙으니 오빠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애기야.”

“……내 핑계 대지 마요.”

잠깐은 동요했지만, 얼른 이성을 되찾았다.

사내를 죽인다는 게 거짓말일 수도 있고, 만약 죽인다 한들 나 때문일 리가 없었다. 나를 위해 고성하를 죽이는 것처럼 굴었지만 사실은 뒷배가 있었던 것처럼 사내 역시 죽여야 하는 다른 이유가 있었을 거다.

“그 사람 원래 죽이려고 했던 거잖아요.”

“그렇게 생각해?”

“회삿돈이나 기밀을 빼돌렸다거나, 또 정치인이 개입되어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고 보니 내년이 대선이네요. 그쪽이 고성하 죽인 것도 대선 전해였지, 아마?”

“그랬나.”

“왜요? 이번에도 야당에서 접근했어요? 국헌당이 계속 정권 잡고 있으니까 이번엔 여민당에서 사주했겠네. 다시 정권 바꿔 보자고.”

“네 눈엔 아까 그놈이 그렇게 가치 있어 보였어?”

남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좋을 대로 생각하고. 옷 다 입었으면 일어나. 데려다줄 테니까. 차 안 가지고 온 거 같던데.”

“필요 없어요.”

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헝클어진 머리도 손으로 대충 빗어 내렸다.

남자를 세차게 노려보곤 걸음을 떼려는데 비틀, 무릎이 접혀 다시 주저앉았다. 괜찮은 척했지만 사실은 계속 떨고 있었다. 일어나야 하는데 도저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게 데려다준다니까.”

남자가 낮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필요 없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그가 다가와 내 몸을 들어 올리는 게 더 빨랐다.

졸지에 남자의 품에 안겨 눈높이가 같아졌다. 그만큼 가까워진 남자의 눈동자가 나를 고스란히 담았다. 탁한 눈동자에 당황한 내 얼굴이 비쳤다.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는 꼴이었다.

“내려요! 필요 없으니까 내리라고!”

내 말을 가볍게 무시한 그가 대표실 문을 열었다.

비서가 재빠르게 몸을 일으켜서 그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제야 나는 버둥대는 걸 멈추고 남자를 노려보았다. 타인 앞에서 소란을 피워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았다.

남자가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내려요. 혼자 갈 수 있으니까.”

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서야 이를 악물었다. 그는 내 말을 무시하고 지하 2층 버튼을 눌렀다. 지하 2층은 주차장이다.

“사무소로 가는 거야? 아니면 집?”

“…….”

“둘 다 아니면 우리 집으로 갈까?”

이 인간이 진짜. 참다못해 주먹으로 어깨를 내리쳤다. 어찌나 몸이 단단한지 때린 내 주먹이 더 아플 지경이었다.

“어디로 가.”

“…….”

“대답해야지, 애기야.”

자존심을 세우느라 도착할 때까지 무언의 대치가 이어졌다.

“귀엽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까만 세단이 남자를 기다리듯 서 있었다. 운전석이 열리며 내리는 사람은 아까 사내를 끌고 간 남자였다.

“사무소 위치 알지?”

“네.”

“곱게 모셔다드려.”

“알겠습니다.”

부하가 뒷좌석 문을 열어 주자 남자가 나를 시트에 앉혔다. 데려다준다기에 당연히 그가 직접 태워 주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따라 타는 대신에 손수 문을 닫아 주기까지 했다.

부하가 운전석에 올라타 내 자리 창문을 멋대로 열자 남자의 손이 들어와 내 머리 위를 턱하니 덮었다.

“조심해서 가.”

“…….”

“쟤는 너한테 손댈 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돌연 그가 얼굴을 기울여 왔다. 내가 재빨리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면 코가 스쳤을지도 모를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고자거든.”

“왜 멀쩡한 사람을 고자로 만드십니까, 형님.”

“들렸어?”

“들으라고 하신 말씀인 거 같은데요.”

“조심하란 뜻이야.”

“걱정 마십시오. 그럴 일 없습니다.”

대화를 주고받으면서도 남자의 시선은 내게 머물러 있었다.

“퇴근 언제 해?”

“무슨 상관인데요.”

“너무 늦게까지 일하지 마.”

“그러니까 무슨 상관이냐고요.”

“그러게, 무슨 상관일까.”

그가 홀연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곤 출발하라는 듯 바퀴를 발로 찼다. 그 신호에 맞춰 부하가 시동을 걸었고, 이내 천천히 차가 미끄러지며 남자와 거리를 벌렸다.

보란 듯이 손을 흔드는 남자를 노려보다 모르는 척 정면을 돌아봤다.

“저기요. 창문 좀 닫아 주세요.”

“예.”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인상을 찌푸리다 문득 생각나 운전석을 돌아봤다.

“아까 그 사람…….”

“걱정 마세요. 이제 진서을 씨 앞에 나타날 일 없을 겁니다.”

“…….”

차마 정말 죽인 거냐고 물을 용기는 나지 않았다.

신경 쓰지 말자.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내 몸을 더듬어 댄 놈이 죽든 말든, 안타까워할 만큼 착하지 않다.

나는 스스로를 세뇌하며 가방을 열었다. 권지운에게 복귀한다는 연락이라도 미리 넣을 생각으로 핸드폰을 찾는데, 문득 위화감이 들었다.

“어?”

없다. 고채원의 편지가 없다. 아침에 가방에 넣어 뒀는데, 아무리 안을 뒤져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착각했나? 사무소에 두고 온건가?

지이잉.

기억을 더듬는데 때마침 핸드폰이 진동했다. 권지운이었다.

“네. 선배.”

[어디야? 끝났어?]

“네. 지금 가는 중이에요.”

[차 두고 갔던데, 뭐 타고 와? 내가 데리러 갈까?]

“아…….”

운전석을 잠깐 힐끔했다.

“그…… 차 얻어 타고 가는 중이에요.”

[누구? 이 대표?]

“뭐…….”

이래저래 설명하면 복잡하니 대충 그런 거로 하고 넘어갔다. 적당히 대화를 마무리하고 전화를 끊는데, 문득 백미러로 부하와 눈이 마주쳤다.

“왜요?”

나도 모르게 경계하는 목소리를 내자 그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죄송합니다. 다른 의도가 있어서 본 건 아니고요.”

“…….”

“혹시 권지운이랑 연애하세요?”

“네?”

“두 분이 진지하게 만나는 사이인가요?”

“그걸 왜 묻는데요?”

그가 대답 대신 멋쩍게 웃으며 핸들을 돌렸다. 무심코 권지운과 내 사이를 캐묻던 남자가 떠올랐다.

“그 사람이 물어보라고 시키던가요?”

“그건 아닙니다.”

“근데 왜 물으시는데요.”

다시 한번 백미러로 눈이 마주쳤다.

“말씀하기 싫으면 안 하셔도 됩니다.”

“그래요.”

입을 꾹 다물고 창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도 더 캐물을 생각은 없는지 이내 조용히 운전만 했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다. 누군가 까만 펜으로 머릿속을 마구잡이로 칠해 놓은 것 같았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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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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