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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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고채원은 예정보다 하루 빨리 출국했다.

의외였다. 비록 나와 말다툼이 있긴 했지만, 하루라도 더 남자와 몸을 섞을 줄 알았는데 혼자 새벽 미사를 다녀오더니 아침에 곧장 떠났다.

고 의원과 아주머니는 공항까지 그녀를 배웅했고, 나는 대문 앞에서 작별 인사를 했다. 나와 그런 대화를 주고받았다는 게 못내 창피한 건지 그녀는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면서도 주위를 살폈다. 남자를 찾는 것 같았지만, 그는 배웅 따위 나오지 않았다.

정말 나쁜 새끼다. 도대체 남자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에 대한 오해는 제대로 풀린 게 맞을까.

“…….”

체념한 얼굴로 떠나던 고채원이 자꾸 떠올라 괜히 싱숭생숭했다. 난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죄를 지은 기분이지?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며 피어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다 뚜껑을 닫고, 다시 불을 피우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며 고채원을 향한 알 수 없는 미안함을 털어 내곤 몸을 일으켰다. 나도 개학 준비나 해야겠다.

옷장에서 교복을 꺼냈다. 방학할 때 깨끗하게 세탁을 해 둬서 이 여사님께 다림질만 부탁하면 될 것 같았다. 거울 앞에 서서 교복을 몸에 가져다 대는데 문득 미묘하게 작아 보여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공부만 한다고 앉아 있었더니 살이 찐 건가.

불만스럽게 거울을 보다 혹시나 해 입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교복 단추가 빡빡하게 잠겼다.

“짜증 나…….”

나도 고채원처럼 하늘하늘한 체형이었으면 이럴 일도 없을 텐데. 살집이 팔뚝과 가슴, 엉덩이에 죄다 몰려 쓸데없이 부해 보이는 게 영 마뜩잖았다.

그러고 보면 머리카락도 참 더디게 긴다. 허리까지 오는 고채원의 생머리를 떠올리며 못마땅하게 머리카락을 만지작댔다. 나름대로 기른다고 용을 쓴 건데도 내 머리는 쇄골 부근까지밖에 오지 않았다. 이게 다 1학년 때 단발을 한 탓이다.

오늘따라 유난히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입을 삐죽이다, 언젠가 고채원이 선물해 준 원피스가 생각나 옷걸이에서 빼 왔다.

부드럽게 떨어지는 하늘색의 시폰 원피스. 너무 명확하게 비교가 될 것 같아 차마 입어 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한숨을 뱉으며 옷장에 도로 던져 넣는 순간 가슴 쪽 단추가 탁, 하고 풀어졌다.

가지가지 하네.

흡, 숨을 들이마시며 단추를 다시 잠그고 몸을 이리저리 돌려 보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대호 오빠.”

장난기 섞인 목소리에 움찔 놀라 급히 주변을 살폈다. 하필 이러고 있을 때 오다니. 옷을 다시 갈아입어야 하나 싶어 엉거주춤하는 찰나 그가 다시 노크를 했다.

“잠깐이면 돼.”

마지못해 잠가 둔 방문을 열었다. 천천히 문이 열리자 편안한 차림의 남자가 문틀에 비스듬히 기대 있었다. 그가 위아래로 나를 훑었다.

“이렇게 보니까 진짜 애기네.”

“……내일 개학이라서 준비 중이에요. 무슨 일인데요.”

“두고 간 게 있어서.”

그가 손바닥을 펼쳤다. 커다란 손바닥 안에 가득 차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막대 사탕이었다.

“아, 이것도.”

남자가 바지 뒷주머니에서 뭔가를 쓱 뽑아 내밀었다. 인상이 팍 찌푸려졌다. 내 서랍에 있던, 고채원이 가지고 갔던 그 초콜릿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 따질 것이 있었다.

“잠깐 저 좀 봐요.”

문을 조금 더 열며 들어오라고 고갯짓을 하자 그가 재밌다는 얼굴로 순순히 발을 들였다.

“무섭게 왜 그래?”

“왜 그랬어요?”

“뭐가?”

“채원 언니한테 내가 그쪽 방에 있었다고 다 말했다면서요. 어제 언니가 나 찾아와서…… 하, 얼마나 난감했는지 알아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거예요.”

“이거 들고 와서 우리가 무슨 사이냐고 묻더라고.”

그가 초콜릿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래서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했어야죠.”

“안 했겠어?”

“…….”

“그래도 안 믿고 자꾸 귀찮게 해서 며칠 내 방에서 재워 줬다고 했지, 뭐.”

“그걸 그렇게 말하면 오해하잖아요!”

“무슨 오해?”

“몰라서 물어요? 한 방에서 지냈다는데 무슨 오해를 하겠어.”

“설마 내가 너랑?”

그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소리 내 웃었다.

“이 집안사람들은 대체 사고방식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왜 다 애기한테 난리지?”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정말 왜 나를 자꾸 그렇게 더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걸까. 정작 진짜 아랫도리 가볍게 구는 남자는 나를 어린애로만 보는데.

“내가 좀 그래 보이나 보죠.”

남자가 멋대로 서랍 안에 사탕을 넣어 두곤 책상에 걸터앉아 나를 바라봤다.

“뭐가?”

“내가 쉬워 보이나 봐요.”

줄곧 외면하던 사실을 처음으로 입 밖에 내 보았다.

이쯤 되면 정말 내가 문제인가 싶었다. 남들 눈에 내가 천박해 보이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 틈만 나면 내 몸을 훔쳐보고 만지겠지.

짐작건대 지켜 주고 싶은 청순한 분위기를 타고난 고채원은 일생에 이런 일들이 한 번도 없었을 거다. 나에게만 이런 일들이 생기는 것은, 역시 내가 문제여서이리라. 입술을 꾹 깨물고 주먹을 쥐었다.

“그쪽이 봐도 내가 좀 그래 보여요?”

“아니, 귀여운데.”

“장난치지 말고요.”

남자가 팔짱을 끼고 헛웃음을 지었다.

“진심이야.”

“…….”

그가 하는 말은 하나같이 가벼워서 영 믿음이 가지 않는다. 나는 문제집을 넘기는 남자를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언니 갈 때 왜 안 왔어요? 찾는 거 같던데. 그래도 배웅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요.”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정말 언니한테 조금도 마음이 없어요?”

남자가 잠깐 내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네가 알아서 뭐 하게.”

나도 모르게 입 안 여린 살을 깨물었다. 뭐 그렇게 대단한 비밀이라고 저래.

“애기 공부 잘하나 봐. 다 동그라미네.”

“…….”

“커서 뭐가 되고 싶은데?”

“알아서 뭐 하게요.”

똑같이 되받아치자 그가 작게 소리 내 웃었다.

“말하기 싫으면 말고.”

애초에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는지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잠깐 노려보다 입을 열었다. 그와 똑같이 구는 스스로가 유치하게 느껴져 약간의 차별을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건축사 할 거예요.”

“아아, 네 아버지가 건설회사 한댔지.”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문제집에서 시선을 거둬 나를 돌아봤다.

“나중에 내 집도 지어 줘.”

“……돈만 주면 못 할 건 없죠.”

말을 덧붙였다.

“기브 앤 테이크니까.”

“그래. 그거 좋지.”

그가 피식 웃으며 내 쪽으로 다가와 머리 위로 손바닥을 턱하니 올렸다. 정수리를 두드리는 손길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간다.”

남자가 미련 없이 방을 나가고, 다시 옷을 갈아입으려던 나는 아까처럼 가슴 쪽 단추가 풀려 있는 것을 뒤늦게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남자의 시선이 내 가슴에 닿은 적이 없다는 것을 떠올리곤 안심했다.

하지만 이상한 실망감도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설마 그가 내 가슴을 보지 않았다는 것에 실망한 것은 아니리라 굳게 믿을 뿐이었다.

그거야말로 정말 천박하기 짝이 없는 사고방식이니까.

개학 날 아침, 교복 안에 하얀 티를 받쳐 입었다. 좀 덥긴 해도 가슴이 벌어지는 불상사보다는 나았다. 옷을 한 겹 더 입은 바람에 훨씬 타이트해진 교복을 늘려 보려고 손으로 죽죽 당기다 가방을 메고 1층으로 내려갔다.

거실 소파엔 신문을 보고 있는 고 의원과 차를 마시고 있는 아주머니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먼저 나를 발견한 아주머니가 웃으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잘 잤어?”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침 먹고 가야지.”

“아……. 늦어서 그냥 가야 할 거 같아요.”

“아유, 안 돼. 잠깐만 있어 봐.”

아주머니가 부엌으로 향했다. 차마 먼저 걸음을 뗄 수 없어 머뭇대는데, 문득 고 의원의 시선이 느껴졌다.

“좋은 아침이구나.”

“네…….”

상냥한 척 인사를 건네는 고 의원의 눈길이 내 교복 위를 굴러갔다. 게슴츠레하게 뜬 눈빛에 명백히 지저분한 의도가 담겨 있었다. 최대한 이 인간과 마주치는 시간을 줄이고 싶어 늦게 나온 건데.

특히 단추가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가슴을 빤히 들여다보는 것에 몸을 움츠리는 찰나, 아주머니가 부엌에서 나왔다. 고 의원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신문을 넘겼다.

“이거라도 가지고 가. 빈속에 가면 안 좋아.”

하얀 종이로 감싼 토스트였다. 따뜻한 토스트를 받아 드는 와중에도 고 의원의 끈덕진 시선이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대문 앞에 나가면 차 있을 거야. 타고 가면서 먹어.”

“잘 먹겠습니다.”

아주머니는 자기 남편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면 이렇게 내게 상냥하게 웃어 줄 수 있을까. 역한 기분을 애써 감추며 급하게 현관으로 향했다.

신발을 대충 꿰어 신고 쫓기듯 밖으로 나가 마당을 가로지르다 무심코 컨테이너 쪽을 돌아봤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개학까지 한 마당에 언제까지고 잡생각에 빠져 있을 수는 없다. 남자에게 정신을 못 차리던 고채원도 파리로 돌아갔으니 나도 이제 내 앞가림에 치중할 때다.

정신 차리자. 스스로를 다그치며 걸음을 옮겼다.

내 다짐을 하느님이 듣기라도 한 건지, 한동안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남자와 마찬가지로 고 의원도 보이지 않아 비교적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더군다나 개학을 함과 동시에 반 전체가 수험 분위기로 무거워져서 덩달아 휩쓸린 나는 다른 생각할 틈 없이 공부만 할 수 있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늦은 시간까지 남아서 공부를 하고, 차를 타고 집에 들어와 씻은 뒤 문을 잠그고 자는 것이 개학 후 일주일간의 일과였다. 일요일은 어김없이 아주머니와 성당에 나가야 했지만.

“다녀왔습니다.”

“왔어요?”

12시가 다 되어서야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 여사님이 나를 반겨 주었다. 요즘 하교가 늦은 나를 위해 늘 기다려 주는 그녀에게 미안해서 머쓱하게 웃었다.

“간식 준비해 줄까요?”

“아니에요. 저 신경 쓰지 마시고 쉬세요.”

하품을 하며 2층 계단을 올랐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찬물로 샤워를 해 잠을 깨우곤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단어 하나라도 더 보고 잘 생각이었다.

습관처럼 서랍을 열었다. 어느새 양이 절반으로 준 막대 사탕 더미를 헤집어 아무거나 골라잡았다. 껍질을 까서 입 안에 밀어 넣으니 달달하고 상큼한 오렌지 향이 번졌다.

사탕을 물 때면 으레 그렇듯 남자가 떠올랐다. 그 사람은 요즘 뭘 하고 다니는 걸까. 일주일이나 흘렀는데 지나가듯 마주친 적도 없었다.

혹시 고채원이 없어서 남자도 집에 붙어 있지 않는 건 아닐까?

섹스할 사람이 없으니까.

“…….”

아득, 어금니로 사탕을 깨물었다. 날카로운 파편이 된 사탕 조각을 입 안으로 굴리며 책장을 거칠게 넘겼다.

짜증 난다.

다른 것보다 남자를 신경 쓰지 않으리라 다짐해 놓고 오히려 더 생각하는 나 자신이 가장 꼴사나웠다.

가슴이 갑갑해 이리저리 몸을 비틀다가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나는 책상에 엎드려 있었고, 사방이 캄캄했다.

내가 불을 껐던가?

몽롱한 정신으로 끙, 앓는 소리를 내는데 순간 무언가가 가슴을 크게 주물렀다. 묵직한 살덩이가 사정없이 쥐어 짜이는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흐읍……!”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상체를 들어 올리는 순간 입이 틀어막혔다.

어둠에 적응하지 못한 시야가 온통 새까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와중에 누군가 뒤에서 한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고 다른 손으론 가슴을 주무르고 있었다. 급히 몸을 비틀었지만, 옭아매듯 끌어안은 탓에 꿈쩍도 할 수가 없었다.

“쉬이…….”

그때 귓가에 흥분한 늙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성하…… 이 개새끼.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입이 틀어막혀 간신히 숨소리만 뱉을 수 있었다. 뻣뻣하게 굳은 몸을 고 의원의 커다란 손이 멋대로 더듬어 댔다.

“서을아, 얌전히 있어야지.”

고 의원이 조용히 속삭였다. 귓불에 축축한 것이 닿았다. 그게 뭔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때, 미약하게 버둥대는 내 티셔츠 안으로 고 의원의 손이 파고들었다.

안 돼……!

뭔가 이상하다. 지금까지 그는 눈빛과 손길로 수도 없이 나를 희롱했지만 내가 잠들었을 때거나, 내가 눈치채지 못할 거라는 전제하에 그런 짓을 해 왔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잠에서 깨어난 걸 알면서도 노골적으로 만져 댔다.

뒤늦게 독한 술 냄새가 인지되었다.

미친 새끼. 진짜 제정신이 아니야.

위험해.

“하아……. 하, 나이도 어린 년이 가슴 하나는 타고났어.”

눈가가 뜨거워졌다. 형용할 수 없는 공포였다.

도망가야 된다. 도망가야 돼. 이러다가 정말…….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에 책상 위에 놓인 사탕 막대가 들어왔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책상으로 뻗었다. 고 의원은 가슴을 만지는 데 혼이 나간 사람처럼 미친 듯이 살덩어리를 주물러 대고 있느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간신히 책상 위에 손이 닿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만져 달라고 그렇게 입고 다닌 거지? 응?”

“…….”

“단추가 터질 것처럼 부풀어서는……. 후우…….”

손끝이 간신히 막대에 닿았다. 그러나 고 의원에게 휘둘리다 나도 모르게 그것을 툭, 쳐 버렸다. 책상 끝까지 굴러가는 막대를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라보는데 문득 고 의원의 손이 아래로 향하는 게 느껴졌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성인 남자의 힘을 이겨 낼 수가 없었다.

제발…… 누가 도와줘.

무의식적으로 남자를 떠올렸다.

저번과 같은 우연이 제발 이번에도 와 주길 간절히 바랐지만 며칠째 보이지 않는 남자에게는 불가능하겠지.

기어코 고 의원의 손이 바지 고무줄에 닿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허리를 이리저리 비트는데, 순간 탁, 의자에 뭔가 딱딱한 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혼돈에 빠진 머릿속에 라이터가 떠올랐다. 급히 주머니로 손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다른 생각할 틈 없이 무작정 라이터를 켰다.

“악!”

불길이 닿은 곳이 고 의원의 손등이었는지 그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떨어져 나갔다. 간신히 그의 손에서 벗어난 나는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읏……!”

하지만 도로 붙잡혔다. 그 과정에 라이터가 어딘가로 날아갔다.

“네 아버지를 봐서라도 가만히 있어야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고 의원은 내 팔을 낚아채고 몸을 한껏 밀착시켰다. 그러곤 아랫배에 제 앞섶을 문질러 댔다. 딱딱한 기둥이 옷감 위로 지그시 눌렸다. 소름 끼치는 감촉이었다.

토할 거 같아. 죽어 버려.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그가 다시 내 입을 틀어막았다. 참지 못하고 위액을 뱉어 내며 손가락을 세게 깨물자 그가 욕설과 함께 나를 거칠게 밀었다.

“이게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나는 바닥에 엎어진 채로 무작정 도망갔다. 비틀비틀 다가오는 그를 피할 수만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마구 도망치다 보니 등이 벽에 닿았다. 절망적인 심정으로 울음을 터트리려는 찰나, 머리 위로 달빛이 내렸다. 다른 생각 따윈 할 틈이 없었다. 무작정 몸을 일으켜 창문틀로 올라갔다.

“서을아, 위험해. 이리 와.”

아니. 위험한 건 당신이야.

고 의원을 노려보며 창문 밖으로 몸을 기울이는 순간이었다.

“그런다고 피할 수 있을까.”

익숙한 목소리였다. 낮고 음험하지만 옅은 장난기가 배어 있는 목소리.

눈물로 흐릿한 시야를 손등으로 닦아 내자 방문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달빛이 남자의 몸 위로 쏟아졌다. 왜 그가 여기 있는 걸까. 어떻게…….

“누구냐, 대호냐?”

술에 취한 고 의원은 남자가 왜 여기 있는지 의문을 품기보다, 적재적소에 등장했다고 생각하는지 징그럽게 웃으며 나를 가리켰다.

“저년 잡아 와. 당장.”

고 의원의 개새끼가 주인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나는 불안한 얼굴로 창문틀을 움켜쥐었다. 비록 그가 나를 숨겨 주었다고 한들, 고 의원의 명령에 움직이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고채원에게도 전부 사실대로 말해 나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았나.

다시 뛰어내리려는 찰나, 남자가 허리를 숙여 무언가를 주워 들었다.

“여기 있었네.”

이제야 주인을 찾아간 금색 라이터가 남자의 손안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그가 탁, 소리를 내며 라이터를 켰다. 둥근 불빛 너머로 남자의 얼굴이 일렁였다.

“죽여 줄까?”

남자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물었다.

전에도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뭐라고 했더라. 아마 농담으로 치부하고 넘겼던 것 같다.

남자와 눈을 마주치다 고개를 돌려 창문 아래를 내려다봤다.

여기서 뛰어내린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

그의 말대로 고작 2층에서 떨어진다고 죽지는 않을 거다. 실속 없이 다치기만 한들, 고 의원의 손길을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다. 저 개새끼는 언제든 나를 강간할 수 있다.

천천히 눈동자를 굴렸다.

마당 한가운데에 분수대와 그 앞에 놓인 성수대가 보였다.

초점 없는 눈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남자가 장난스러운 태도로 성호경을 그었다.

“그래. 대답 잘 들었어.”

순서와 방향이 죄다 엉터리였다.

“죽여 줄게, 애기야.”

다음 날, 저택이 불에 타올랐다.

그때 나는 3교시 수학 수업을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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