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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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식사 자리에서 미묘하게 달라진 고채원의 태도를 알 수 있었다.

자기 딴에는 평소처럼 대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불쑥불쑥 와 닿는 시선에 관찰하는 기색이 담겨 있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걸 눈치챈 건 나뿐인 것 같았다. 아마 고채원 본인도 모르는 것 같다.

이유는 뻔했다.

내가 해명을 했다 한들, 남자와 가깝게 붙어 있는 모습을 목격한 이상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으리라.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있는 모습을 보면 질투가 나는 건 당연하다.

그녀를 이해하지만, 그래도 억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인간과 나는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이인데. 오히려 나는 고채원을 말리고 싶었다. 깡패라며. 그걸 알면서도 뭐가 좋아서 그렇게 안달복달하는 거야.

고채원은 머지않아 대통령의 딸이 될 사람이다. 그 남자는 생긴 것만 멀쩡하지 하는 짓도 가벼운 데다 깡패라는데, 대체 뭐가 아쉬워서 저러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차라리 두 사람의 관계가 반대였다면 그러려니 했을 거다. 고채원이 얼굴 잘생기고 몸 좋은 아버지의 개새끼를 마음대로 이용해 먹을 만큼 영악했다면, 나도 이렇게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을 느끼진 않았을 테지.

고 의원을 경계하면서 고채원의 눈치까지 살피느라 여러모로 피곤한 식사 자리였다.

“생각해 봤는데, 우리끼리 여행 가는 거 서을이에게 너무 미안한 거 같아요.”

고개를 들자 스치듯 눈이 마주친 그녀가 획 고개를 돌려 제 부모님을 돌아봤다.

머쓱한 기분으로 물컵을 드니 안이 비어 있었다. 불편할 때마다 홀짝댔더니 그새 다 마셨나 보다. 이 여사님께 물을 더 달라고 말하려는데 고 의원이 제 컵을 내 앞에 놓아 주었다.

“아저씨 입 안 댔어. 마시렴.”

“아…….”

받고 싶지 않았지만, 아주머니와 고채원이 맞은편에 있어서 차마 내색하지 못하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똑같은 컵에 똑같은 물인데도 더럽게 느껴지는 건, 고 의원의 시선이 내 입술에 닿아 있기 때문이었다.

간신히 컵에 입술을 대고 한 모금 마시자 그가 조용히 숨을 뱉었다. 나만 들은 것 같았다. 어떤 더러운 상상을 하고 있는지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가뜩이나 가족들이랑 떨어져서 지내느라 외로울 텐데…….”

고채원이 다시 화제를 돌렸다. 나는 입 안으로 혀를 굴리며 조용히 컵을 내려놓았다.

“그 이야기는 끝난 거 아니니.”

“그래, 서을이는 수능 때문에 여행 못 간다고 했잖아.”

고 의원과 아주머니가 차례로 말하자, 고채원이 조그맣게 항변했다.

“아버지는 저녁 늦게나 들어오시고, 비울 때도 많으신데, 그럼 이 큰 집에 서을이 혼자 있잖아요.”

“집 안에는 여사님들 계시고, 밖엔 대호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니.”

카랑카랑한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식탁을 가득 채우자 고채원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하필 그 이름을 말하다니. 한숨을 삼키려는데 고채원이 불쑥 나를 돌아봤다. 움찔, 무릎이 딱 붙었다.

“서을아, 여행 같이 가자.”

다정하게 권유하는 것 같지만 기저에는 옅은 강요가 깔려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여행을 가 있는 동안 남자와 내가 가까워질까 봐 초조한 것 같았다.

고채원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안색도 좋지 않았다. 어제 일로 잠을 설쳤는지, 붉게 충혈된 눈동자나 까칠해진 피부에서 피로가 묻어났다.

정말 그 남자에게 제대로 홀렸구나.

“일주일 정도 공부 안 한다고 크게 달라지지 않아. 너 원래 공부 잘한다며.”

“…….”

“우리 집 온 뒤로 매일 공부만 했잖아. 바람도 좀 쐬어야지. 응?”

“채원아, 그만. 서을이 곤란하겠다.”

고 의원이 말을 가로막아도 고채원은 굴하지 않았다.

“같이 가자. 서을아.”

“……미안해, 언니.”

“…….”

“나한텐 수능이 정말 중요해서……. 다음에 같이 가자.”

조심스러운 거절에 고채원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되도록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아 순종적인 웃음을 보였지만 썩 효과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식탁에 불편한 정적이 감돌았다. 그 정적을 깬 건 아주머니였다.

“서을이 요즘 공부 잘하고 있니? 혼자 하기 힘들면 말해. 과외 선생님 알아봐 줄게.”

“말씀 감사합니다. 그런데 괜찮아요. 과외 몇 번 받아 봤는데, 혼자 하는 게 편하더라고요.”

아주머니에게 적당히 웃어 주며 고채원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속상한 얼굴로 식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 남자와 있었던 일을 전부 이야기해 오해를 풀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걸리는 게 너무 많았다. 특히 내가 남자와 고채원의 관계를 안다는 거나, 고 의원이 내게 한 짓을 남자가 안다는 건 죽었다 깨어나도 말할 수 없었다.

치욕보다는 불편이 낫다. 그러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고, 그 탓에 오해를 풀 수가 없었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고 의원이 내 앞에 놓여 있는 물컵을 가져갔다.

내게 마시라고 줄 때는 언제고 도로 가지고 가서 능청스럽게 입을 대는데, 나는 그가 내 입술이 닿은 부분으로 물을 마시고 있을 거라는 것에 수능 성적을 걸 수도 있었다.

정말 다 싫다. 다시금 나를 여기 두고 간 아버지가 원망스러워졌다.

“그럼…… 우리도 다음에 갈까요?”

조용히 있던 고채원이 아주머니께 말했다.

“얘! 준비 다 해 뒀는데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

“그렇게 가고 싶어 하더니 갑자기 왜 이래?”

“……죄송해요. 그냥 해 본 말이에요.”

부부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고, 고채원은 밥을 절반이나 남긴 채 수저를 내려놓았다.

“점심 약속 있어서 나갈 준비해야겠어요.”

기운 없이 나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그녀는 늘 내게 친절했는데…….

남몰래 주머니 속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

고채원과 부부가 모두 집을 비워 저택은 조용했다. 나는 여사님들의 휴식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용히 마당으로 나왔다.

때마침 분수대 위에 조그맣게 무지개가 떠 있었다. 하얀 대리석 조각과 어우러진 광경이 꼭 그림 같아서 잠깐 걸음을 멈췄지만, 이내 목적지인 마당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고채원과 남자의 관계를 알게 된 이후로 컨테이너에 가는 건 처음이라 묘하게 긴장이 되었다. 아무도 없는 걸 알면서 괜히 주변을 살피다가, 문득 고채원과 비슷하게 군다는 걸 깨닫고 실소했다. 아무래도 그 남자와 얽히면 누구든 떳떳할 수 없는 모양이다.

캄캄한 밤과 달리 태양 아래 드러난 뒷마당은 꽤 고즈넉했다. 대리석 바닥 대신 잔디가 깔려 있고, 네모반듯한 하얀 컨테이너 옆에는 커다란 소나무도 한 그루 서 있었다.

나는 담벼락에 기대어져 있는 장대 빗자루와 잔디 깎는 기계를 힐끔대며 조심스럽게 컨테이너 문 앞에 섰다.

“…….”

고채원이 빨리 마음을 풀고 예전처럼 친절하게 대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오긴 했는데, 조금 망설여졌다. 본디 남녀 간의 일은 둘이 알아서 해결하게 두는 게 맞는데…….

당연히 내가 끼어 있지만 않았다면 나도 모르는 척했을 거다.

근데 이게 다 그 남자가 이상한 오지랖을 부린 탓이잖아. 괜히 나까지 휘말려서 고래 싸움에 등 터진 새우가 됐는데, 찾아올 자격은 충분하지. 끊임없이 자기 합리화를 하며 내 딴에는 패기 있게 손을 뻗었다.

똑똑─.

그러나 노크 소리는 소심했다.

슬쩍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너무 작게 두드렸나 싶어 조금 더 힘을 주어 노크를 했다. 그러곤 문틈으로 귀를 가져다 대는데, 돌연 등 뒤로 그늘이 졌다.

그리고…… 담배 냄새?

“왜? 거기 누구 있어?”

“아악!”

갑자기 나타난 남자가 기겁하는 나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내 옆에서 나와 같은 자세로 문에 귀를 댄 그의 입에는 또 담배가 물려 있었다.

“여기서 뭐 해.”

놀라서 벌렁대는 가슴을 붙잡고 그를 노려보았다. 무슨 사람이 이렇게 기척이 없어.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나 보러 왔어?”

“그럼 채원 언니 보러 왔겠어요?”

“그럴 수도 있지.”

그가 빙긋 웃으며 컨테이너로 턱짓을 했다.

“네?”

후다닥 옆으로 떨어졌다. 설마 고채원이 안에 있는 건가? 아까 분명 약속 있다고 나갔는데. 어색하지만 잘 다녀오라고 현관까지 배웅도 했었다.

혹시 남자에게 가기 위해 둘러댄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눈앞이 아찔해졌다. 이 남자를 멀리하라고 했는데 또 같이 있는 모습을 보이면 오해가 더 쌓일 거다.

“다, 다음에 올게요.”

우물대며 뒷걸음질을 치는데 문득 남자가 낮게 소리 내 웃었다. 입술 사이에 걸린 담배가 웃을 때마다 위아래로 흔들렸다.

나는 잠깐 붉은 불을 바라보다 눈치를 채고 눈을 치켜떴다.

“언니 없죠?”

“응.”

“왜 거짓말해요!”

“있다고 한 적 없는데.”

“하…….”

“귀엽긴.”

남자가 엄지와 검지로 불을 비벼 끄곤 꽁초를 바닥에 뱉었다. 그걸 그렇게 잔디에 버리면 어떡하냐고 한마디 하려다가 관뒀다. 중요한 건 꽁초 따위가 아니니까.

“단도직입적으로 용건만 말할게요.”

“네, 그러세요.”

“어제 일로 언니가 기분이 안 좋아요.”

남자가 계속하라는 듯 눈썹을 들었다.

“괜히 저까지 얽히는 바람에 언니 보기도 껄끄럽고…… 여러모로 신경 쓰여요.”

“…….”

“언니 내일모레 여행 가는 거 아시죠. 기분 좋게 다녀올 수 있게 좀 풀어 주세요.”

“내가 왜?”

“따지고 보면 그쪽 때문에 제가 얽힌 거잖아요. 멋대로 따라오질 않나, 시키지도 않았는데 막 안지를 않나.”

“내 친절에 너무 야박하게 구는 거 아니야?”

“누가 친절해 달래요?”

“천성이야.”

나는 콧방귀를 뀌며 그를 흘겨봤다.

웃기고 있네. 깡패 주제에 친절은 무슨.

고 의원의 뒤를 봐준다는 게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뉘앙스로 봐선 지저분한 뒤처리를 해 준다는 것 같았다.

청렴결백한 이미지로 여론 반응이 좋은 고 의원이라 해도 실상이 깨끗하진 않을 거다. 당장 내게 하는 짓거리만 봐도 그렇고. 여타 더러운 문제가 생기면 몰래 뒤에서 정리해 주는 사람이라 이거지.

“가뜩이나 고 의원 때문에 엿 같은데, 언니까지 데면데면하게 구니까 불편해 죽겠어요. 다 그쪽 때문이니까 책임져요.”

“어떻게 책임져 줄까?”

“언니한테 상냥하게 대해 줘요.”

“상냥하게 어떻게.”

어떻게는 뭐가 어떻게야. 그냥 잘해 주라는 거지. 자꾸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남자를 답답하게 바라보는데 문득 그가 컨테이너 문을 열었다. 자연히 시선이 안으로 향했다.

“아.”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창고인 줄 알았던 컨테이너 내부는 의외로 평범한 원룸 구조였다.

그땐 남자가 문 앞을 가로막고 서 있어서 보이지 않았는데, 문을 열자마자 곧장 커다란 냉장고가 보였다. 그 오른쪽으로는 작은 주방이, 왼쪽으로는 침대가 놓여 있는 게 전부였지만 생활의 흔적이 여실히 보였다.

“여기서 살아요?”

그가 대답 대신 안으로 발을 들였다. 신발을 신은 채로 성큼성큼 들어가더니 대뜸 냉장고 문을 열어 뭔가를 꺼내 도로 내 쪽으로 돌아왔다.

“공손하게 손 내밀어 봐.”

뭘 하려는 건가 싶어 경계 어린 얼굴을 하자 그가 피식 웃으며 멋대로 내 손에 뭔가를 쥐여 주었다.

차갑고 딱딱한 감촉. 손바닥만 한 초콜릿이었다.

“상냥하지?”

“…….”

“왜? 까까 싫어?”

“아, 자꾸 왜 그래요!”

초콜릿을 집어 던질 태세로 손을 들어 올리자 남자가 재밌어하며 내 손을 도로 내렸다.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애 취급하는 남자도 재수 없고, 특히 하고많은 것들 중에 하필 초콜릿을 이용했다는 데 더없이 짜증이 솟구쳤다.

“서을아, 까까 먹고 있어.”

내 손에 초콜릿을 쥐여 주곤 상냥하게 웃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리고…….

“왜 또 화를 내.”

“애 취급 작작 해요. 나 내년이면 성인이에요.”

“알았어, 알았어.”

“이상하게 부르지 말고, 부를 거면 이름으로 부르라고요.”

“알았어, 서을아.”

“…….”

쓸데없이 목소리가 좋아서 살짝 당황했다. 남자의 입에서 처음 흘러나온 내 이름이 마치 다른 사람의 것 같았다.

주춤한 사이 내 손에서 초콜릿을 가져간 남자가 포장지를 뜯어 멋대로 내 입에 물렸다. 그대로 톡, 소리 나게 초콜릿을 꺾어 조각낸 남자가 내게 그것을 다시 쥐여 주었다.

입 안으로 달달한 향이 퍼졌다. 특유의 단맛에 재빠르게 불쾌함이 피어올라 퉤, 잔디 바닥에 반쯤 녹은 초콜릿을 뱉어 냈다. 남자가 버린 담배꽁초 옆에 떨어졌다.

“아깝게.”

“됐고. 아무튼 채원 언니한테 좀 잘해 줘요. 솔직히 그쪽도 알잖아요.”

“뭘.”

태연하게 되묻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충분히 알아들은 얼굴이었다. 역시 남자도 고채원이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다.

“…….”

내가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자 잠자코 있던 그가 가벼운 한숨을 뱉었다.

“고씨 부녀도 모자라서 서을이 개새끼도 해야 한다니, 내 팔자야.”

“누가 제 개새끼 하래요? 난 그냥…….”

“나 되게 비싼데, 뭐 해 줄래?”

“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

“뭐래.”

퉁명스레 대꾸하다 문득 얇은 검은색 이불이 반듯하게 깔린 침대로 시선이 닿았다.

아, 저기서…….

멍해지려는 찰나, 남자가 쓰읍, 하는 소리로 주의를 당겼다.

“미성년자 상상 불가야.”

“……제가 뭘요.”

다 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는 남자를 피해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만 생각하자. 혀로 입 안을 훑었다. 아직 남아 있는 초콜릿 맛을 빨리 없애기 위해서였다.

“그, 그래서 뭐 해 주면 되는데요?”

불쑥,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무릎을 굽히고 앉은 탓이었다. 지난번 연못에서처럼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네가 뭘 해 줄 수 있을까.”

내게 묻는다기보다는 혼자 고민하는 뉘앙스였다.

“참고로 저 돈 없어요. 아빠 회사 망해서 여기 얹혀살고 있는 건 아시죠?”

“고채원한테 들었어.”

“돈 없는 학생한테 꼭 뭘 받아 내야겠어요?”

“돈이 능사는 아니지.”

“…….”

순간 눈앞의 이 인간이 마음 없이 고채원과 몸을 섞는 짐승이라는 것이 상기되었다. 설마 하는 눈으로 침대와 남자를 번갈아 보다 슬그머니 거리를 벌리자, 그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꺾었다.

“얘 봐라.”

“…….”

“내가 아무리 개새끼라도 애기한테 발정하진 않아.”

“그걸 어떻게 믿어요.”

“네가 여기서 홀딱 벗는다고 내가 눈 하나 깜짝할 거 같아?”

“…….”

그래, 뭐. 딱 봐도 남자는 인기가 많을 것 같다. 저 얼굴에 저 키에, 거기다 깡패라고 했으니 얼마나 방탕하게 살았겠어. 아마 한평생 여자가 없었던 적이 없을 거다. 그 잘난 고채원마저 안달을 내지 않나. 외모 말고 무슨 매력이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 같은 어린애가 닳고 닳은 남자의 눈에 찰 리가 없다.

그러고 보니 틈만 나면 나를 파헤쳐 보는 고 의원과 남자의 눈빛은 사뭇 달랐다. 남자는 나를 놀려 먹긴 해도, 지저분한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담백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유독 그의 앞에서는 말이 잘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안심되는 반면, 마음 한쪽에선 짜증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미묘하게 기분이 더러워졌다. 왜지?

“혹시 알아요? 그쪽도 변태 같은 취향일지.”

“공부나 하러 가, 애기야.”

내 트집을 가볍게 무시한 남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몸을 일으켰다.

“참고로 고성하는 당분간 안 들어올 거야.”

고성하의 개새끼는 스케줄도 외우고 있나 보다. 고 의원이 집에 오지 않는다는 건 꽤 마음에 드는 소식이지만, 미묘한 짜증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쪽 때문에 생긴 일은 그쪽이 책임져요.”

“네, 주인님.”

“짜증 나.”

배웅하는 것처럼 손을 흔드는 남자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다 고개를 획 돌렸다.

됐고, 일단 고채원이 빨리 마음을 풀길 바랄 뿐이었다.

“서을아, 우리 다녀올게.”

“필요한 거 있으면 이 여사님께 이야기하렴. 잘해 주실 거야. 아유, 서을이 혼자 두고 가려니 마음이 안 좋네.”

새벽에 나간 고 의원을 제외한 저택 사람들 모두가 모녀의 여행을 배웅하는 중이었다. 고채원이 애교스럽게 아주머니를 향해 눈을 흘겼다.

“그러게 서을이도 같이 가면 좋겠다니까.”

고채원은 하루 만에 기분을 완전히 회복했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 생기 넘치는 눈동자, 연신 웃고 있는 입매 같은 걸 보니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물론 그게 여행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아는 사람은 나뿐인 듯했다.

“오빠, 나 이것도 좀 부탁해.”

아니. 나뿐만은 아니지.

내가 나오기 전부터 모녀의 짐을 차에 싣고 있던 남자를 돌아봤다. 고채원이 하늘하늘한 원피스 자락을 휘날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가볍게 몸을 흔들며 방긋대는 고채원은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으나, 남자는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래도 좋다고 주변을 알짱거리는 걸 보니 남자가 제대로 기분을 풀어 준 모양이었다. 뭘 어떻게 잘해 주면 저렇게 달라질까.

심드렁한 얼굴로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 문득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가볍게 눈썹을 들썩이며 알은체를 해 왔으나 나는 무시하고 아주머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재밌게 놀다 오세요.”

“그래, 선물 사 올게.”

운전기사가 먼저 차에 오르고, 남자가 뒷좌석 문을 열며 고채원에게 타라는 듯 가볍게 고갯짓을 했다.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 와중에 문틀을 붙잡고 있는 남자의 손을 스치듯 잡은 것도 남자와 나만 알아차렸으리라. 왜인지 고채원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눈에 잘 들어와서 자꾸 보게 됐다.

차 문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와중에 고채원이 말을 걸었는지 남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떨어졌다. 커다란 몸을 차양처럼 기울여 내려다보는 모습이 쓸데없이 근사했다.

문득 남자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

들리지 않는 대화에 온 신경이 쏠려 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눈동자를 굴려 날 위아래로 훑어보는 남자의 입가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걸려 있었다. 그가 고채원에게 뭐라고 말했는데, 목소리는 작지만 입모양이 보여 알아볼 수 있었다.

─애를 데리고 내가 뭘 하겠어.

자연히 눈살이 찌푸려졌다.

미루어 짐작건대, 고채원이 자기가 없는 사이에 나와 남자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는 것을 걱정했고 남자는 웃어넘긴 것 같았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고채원도 어이가 없지만, 나를 비웃는 남자가 더 거슬렸다.

“다녀올게.”

습관처럼 주머니에 손을 넣어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는데 아주머니가 자동차로 향했다. 남자가 에스코트하듯 문을 활짝 열어 주자 웃으며 차에 올라탄 아주머니가 내게 손 인사를 건넸다.

남자의 시선이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나는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아주머니에게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남자가 문을 닫자 자동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언덕을 내려가는 자동차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이 관리인들은 다시 대문 안으로 들어갔고, 어느새 대문 앞에 남은 건 남자와 나뿐이었다.

“주인님도 들어가시죠.”

“…….”

놀리듯 던지는 말을 무시하고 고개를 획 돌렸다.

열려 있는 대문 안으로 발을 들이는데 이상하게 남자가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뒤를 확인할 뻔했지만 꿋꿋이 정면만 바라보았다.

들어오든지 말든지, 나랑 무슨 상관이야.

다들 들어가고 혼자 남아 고요한 마당을 잠깐 둘러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고 의원 가족이 전부 집을 비웠구나. 지금 이 저택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전부 외부인이다. 나는 주인 없는 건물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 방향을 틀어 분수대로 향했다.

아니, 향하려는데 무심코 뒷마당에서 나타나는 남자를 발견하고 눈을 찌푸렸다.

“어떻게 거기서 와요?”

성큼성큼 걸어온 남자가 나를 앞질러 연못으로 향했다.

“어디로 들어온 거예요?”

“비밀의 문.”

남자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장난스레 대답했다.

“대문 말고 다른 문이 있어요? 아니면 담 넘은 거예요?”

“비밀이라서 말해 줄 수가 없는데.”

“뭐야…….”

어이없다는 눈으로 흘겨보자 그가 저번처럼 제 몸을 손으로 더듬더니 나를 돌아봤다.

“불 있어?”

대답할 가치도 없다.

주머니에서 달그락대는 라이터의 존재를 숨긴 채 걸음을 마저 옮겼다. 남자의 목적지도 연못이라면 방으로 돌아가는 편이 나을 텐데, 묘한 오기로 성수대에 다가갔다. 나도 처음부터 여기 오려고 했는데 피하면 지는 것 같으니까.

성수대 앞에 서서 힐끔 눈을 들어 보니, 남자는 처음 분수대에서 마주쳤을 때와 같은 위치에서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잉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금색 라이터를 대신해 어디서 났는지 모를 일회용 라이터로 불을 붙이다 내 시선이 느껴졌는지 고개를 들려고 하기에 재빨리 성수를 손가락에 찍고 성호경을 그었다. 왠지 죄를 지은 것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뭐 빌어.”

나는 못 들은 척 양손을 모아 쥐고 눈을 감았다. 남자의 시선을 의식하며 떠오르는 대로 기도를 했다.

모녀가 집을 비운 일주일 동안 고 의원이 집에 안 들어오게 해 주세요, 하느님. 요즘 고 의원 꽤 바빠 보이던데 더 바쁘게 해 주세요. 그래서 확 과로사로…….

“내가 맞혀 볼까?”

그때 남자의 목소리가 침투했다.

“하느님, 고성하가 눈에 안 보이게 해 주세요.”

“…….”

“맞지?”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떠 보니 남자가 물 안으로 손을 살짝 넣고 있었다. 역시나 잉어들이 도망가지 않는다. 물살이 일지 않게 손을 움직여서 그런가. 다음에 나도 저렇게 해 봐야겠다.

“그렇다면요?”

고성하가 내게 어떤 흑심을 품고 있는지 그도 알고 있으니 부정할 이유는 없었다. 또한 내가 고 의원을 경계한다는 것을 남자가 제 주인에게 일러바칠 것 같지도 않았다. 남자가 내 비밀을 알고 있듯, 나 역시 그의 비밀을 알기 때문이다.

걸리는 게 있는 사람은 선뜻 나서지 못한다. 만약 그가 고 의원에게 내 이야기를 한다면 나 역시 저 남자가 당신이 끔찍하게 아끼는 딸과 밤마다 섹스하는 사이라는 것을 말할 심산이었다. 남자도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겠지.

“이참에 종교를 바꿔 보는 게 어때.”

그가 후우, 연기를 내뿜으며 물에 젖은 손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오빠 믿어 볼래?”

“뭐라는 거야.”

“죽여 줄까?”

“뭐라고요?”

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묻자 그가 태연히 다시 입을 열었다.

“고성하 말이야. 죽여 줄까?”

“장난 받아 줄 기분 아니에요.”

“나 사람 잘 죽여.”

뜬금없는 남자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내가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하자 그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귀엽긴. 아무튼 생각 있으면 말해.”

“뭘요? 고성하 죽이는 거요?”

“응.”

“미쳤어요? 무슨 그런 살벌한 농담을 해요. 그것도 고성하 개새끼라는 사람이.”

“개새끼도 가끔 주인을 물어.”

그가 손가락을 튕겨 재를 털어 냈다.

“주인이라고 거슬리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뭘까.”

어째 대화가 빙빙 돌기만 한다. 관두자 싶어 발길을 돌리려는 찰나, 남자가 다시 말했다.

“애기 말대로 고채원 기분 좋게 여행 보냈으니까, 이제 내 차례지?”

“정말 기브 앤 테이크 확실하시네.”

샐쭉해진 내 얼굴을 마주 본 남자가 미소를 짓는 순간, 나는 잠깐 멍해졌다.

남자의 뒤로 새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고, 그가 뱉어내는 연기가 구름처럼 허공으로 흩어졌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순간적으로 넋을 놓게 만드는 그림 같은 장면이었다.

“놀아 줘.”

흐릿해진 초점을 간신히 그에게 맞췄다.

“너도 지내 봐서 알겠지만, 여기 되게 심심하거든.”

“…….”

“객식구끼리 놀자.”

“……공부해야 되는데요.”

머리는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고 명령을 내렸지만, 입이 멋대로 여지를 남겼다. 이러면 마치 그와 놀고 싶은데 공부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것처럼 들리잖아.

왠지 손바닥이 축축해지는 것 같아 손을 바지 위에 문질렀다.

“그래? 공부하느라 바빠?”

“당연하죠. 한가한 수험생이 어디 있어요.”

“1분도 시간이 안 나려나.”

“……고작 1분 놀자고요?”

“아니. 그건 너무 아쉽지.”

“뭐래.”

남자의 얼굴에 흥미가 떠올랐다. 고채원과 섹스하던 도중에도 권태로워 보였던 남자답지 않았다.

나랑 시답지 않은 대화나 주고받는 게 재밌는 건가. 이상해. 왜 저러는 거야.

“바빠도 놀아 줄 거지?”

“뭐…… 약속은 약속이니까.”

놀자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처럼 아옹다옹하는 정도라면 어려울 건 없어 보였다. 어차피 나도 공부하는 시간 외에는 딱히 할 게 없으니 적당히 시간이나 때운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착해라.”

“애 취급하지 마요.”

아이를 어르듯 던지는 말에 날카롭게 받아치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진짜 얄밉다. 남자는 흘겨보는 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또 한 번 입술 사이로 구름을 뱉어 냈다.

“컨테이너는 항상 열려 있어.”

“그래서요?”

“심심하면 언제든 놀러 와.”

“당분간은 언니 없으니까 못 볼 꼴은 안 보겠네요.”

일부러 위아래로 훑어보자 그가 재밌다는 듯 고개를 살짝 뒤로 기울였다.

“흥.”

나는 들으라는 식으로 콧방귀를 뀌고 자리를 떴다.

빠른 걸음으로 현관 앞까지 당도하고 나서야 슬쩍 고개를 돌려 보니 남자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몇 초간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후우.”

잠깐 심호흡으로 숨을 골랐다.

아까부터 호흡이 짧아져 가슴이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다.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뱉으니 조금 진정되는 것도 같았다.

“죽여 줄까?”

시도 때도 없이 남자가 머릿속에 침투하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간신히 집중력을 발휘해 영어 단어를 암기하던 나는 다시금 떠오르는 남자의 얼굴과 목소리에 신경질적으로 펜을 내려놓았다. 데구루루, 볼펜이 문제집 위를 굴렀다.

나흘째 저택에는 객식구들만 머무는 중이었다. 당분간 고 의원이 집에 오지 않을 거라던 남자의 말대로였다. 그 점은 다행이었으나, 그러면 뭐 해.

“객식구끼리 놀자.”

고 의원 대신 남자가 자꾸 내 신경을 건드리는데.

한숨을 뱉으며 책상 끝에 세워 둔 탁상시계를 확인하니, 익숙한 시간이었다. 고채원이 매일 남자를 찾아가던 그 시간.

매일 같은 시간에 밀회를 엿본 탓인지 이제 그 시간에는 다른 일이 통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아주 파블로프의 개가 따로 없다.

근데 그렇게 따지면 나보단 밀회의 당사자인 남자가 더 허전하지 않을까?

며칠 건드리지 않았더니 상처가 많이 가라앉은 허벅지 안쪽을 손으로 쓱쓱 문지르다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지난번에 남자가 억지로 내 입에 물렸던 한 조각이 빈 초콜릿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버리려고 했는데, 선뜻 손이 가지 않아 서랍에 넣어 둔 지 며칠째였다.

“약속은 약속이니까.”

괜히 혼자 합리화하며 1층으로 내려가자 이 여사님이 막 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발견하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필요한 거 있어요?”

“아니에요. 잠깐 잠 좀 깨우려고요. 들어가서 쉬세요.”

피곤한 척 눈가를 문지르며 둘러대는데, 문득 고채원도 매일 이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머쓱해진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얼른 밖으로 나왔다.

내일 비가 온다더니, 습기를 머금어 그런지 유난히 공기가 눅눅하다. 못마땅하게 팔뚝을 문지르며 마당을 가로질렀다.

이리저리 둘러보니 마당은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했다. 건물 창문도 확인했지만 전부 꼭꼭 닫혀 있었다. 마지막으로 내 방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어둡긴 하지만 누가 서 있다면 충분히 보일 거리라 다음부터는 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건물 뒤쪽으로 향했다.

컨테이너 앞에 도착하니 벽면에 조그맣게 난 창문으로 불빛이 보였다.

오늘은 있나 보다.

언제나 열려 있다더니, 정작 남자는 한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두어 번 산책을 핑계 삼아 마당을 배회하며 컨테이너에 와 보기도 했는데 매번 아무도 없었다. 그럴 때마다 설명할 수 없는 허탈함을 느끼곤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는지 모른다.

누가 보면 내가 기다리는 줄 알 거 아니야. 정작 놀아 달라고 말한 건 남자인데 말이다. 왜 주객전도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남자가 안에 있다면 이참에 한번 놀아 주고 기브 앤 테이크를 끝내는 것도 좋은 생각이다 싶었다.

똑똑, 노크를 했다. 혹시나 저번처럼 뒤에서 나타날까 봐 재빠르게 뒤를 살폈지만, 이번에는 문이 열렸다.

“왔어?”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레 말을 거는 남자를 의아하게 올려다보았다.

“얼굴이 왜 그래요? 싸웠어요?”

어디서 한바탕하고 온 모양인지 얼굴 곳곳에 긁히고 멍든 상처가 가득했다.

남자는 다짜고짜 삿대질을 하는 내 건방진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안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들어와.”

어쩐지 그동안 안 보인다 했다. 깡패라는 걸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막상 다친 꼴을 보니 좀 무서웠다.

설마하니 내게 해코지를 하진 않겠지…….

경계하는 눈으로 상처를 훑어보자 그가 피식 웃었다.

“별걱정을 다 하네. 때릴 데도 없는 게.”

너무 티 나게 경계했나.

“쫄지 말고 들어와, 애기야. 신발은 신고.”

컨테이너 안은 의외로 아늑했다.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어서 공기도 쾌적하고, 하얀 전구가 내부를 환히 밝혔다. 고채원과 남자의 밀회가 이루어지는 장소이니 막연히 음침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 밖이었다.

남자가 이리저리 둘러보는 내게 뭔가를 건넸다. 지난번에 막무가내로 쥐여 준 것과 같은 초콜릿이었다.

“저 초콜릿 싫어해요. 저번에 준 것도 아직 서랍에 그대로 있거든요? 필요 없어요.”

“버렸을 줄 알았는데,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어?”

“누가 소중하게……!”

“이것도 소중하게 간직해.”

비약에도 정도가 있지. 어이가 없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여전히 내 앞에 들이밀어진 남자의 손을 탁, 쳐 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짜증 나. 괜히 왔어.”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리는데, 그새 남자가 내 앞으로 훌쩍 따라붙었다.

“알았어, 알았어. 뭘 또 삐지고 그래.”

“꺼져요.”

“나랑 놀아 주려고 온 거 아니야? 벌써 가면 섭섭하지.”

그가 내 머리 위에 초콜릿을 올렸다. 네모난 초콜릿이 좌우로 흔들리다가 중심을 잃고 눈앞으로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손이 나가는 바람에 얼떨결에 차갑고 딱딱한 초콜릿을 받아야 했다.

지난번에도 그렇고, 남자는 초콜릿을 얼려 먹는 걸 좋아하는 모양……. 아니, 그게 무슨 상관이야.

“가지고 가서 간직하든지, 버리든지 마음대로 해.”

“깡패라면서 안 어울리게 초콜릿을 좋아해요?”

“안 좋아해.”

“그런데 왜 가지고 있어요? 먹으려고 사 둔 거 아니에요?”

“고채원이 사 둔 거야.”

“…….”

뚝, 나도 모르게 초콜릿을 부러뜨렸다. 포장지가 찢어지며 날카로운 단면이 튀어나왔다. 남자의 눈동자가 잠깐 초콜릿으로 향했다가 천천히 올라와 다시 내 얼굴에 닿았다. 그러곤 흥미로운 듯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가슴속에서 열이 들끓기 시작했다. 명확한 이유를 특정할 수 없는 화였다.

숨을 훅, 들이마시자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다시 뱉어 냄과 동시에 남자의 가슴팍에 초콜릿을 집어 던졌다. 두 조각난 초콜릿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얼굴 근육이 이상하게 구겨지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그쪽도 안 먹는 걸 왜 나한테 떠넘겨요. 내가 쓰레기통으로 보여요?”

날카로운 목소리에 남자가 조그맣게 콧소리를 냈다.

“저번에도 궁금했는데, 왜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할까.”

“그쪽이 잔반 처리하듯 나한테…….”

“초콜릿이 싫은 거야, 내가 싫은 거야, 아니면 고채원이 준 거라서 싫은 거야?”

남자의 손가락이 하나씩 접혔다. 나도 모르게 입이 다물렸다. 그가 나도 정의 내리지 못한 짜증의 원인을 전부 정확하게 짚어 냈기 때문이었다.

“이해가 안 가네.”

아무 말도 못 하고 움찔대는 나를 관찰하듯 바라보던 남자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건 그렇다 치고. 어떻게 날 싫어할 수가 있지.”

“…….”

“다 좋아하던데.”

그가 장난스럽게 자신을 가리켰다.

황당함에 실소가 터졌다. 그에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신경줄도 탁, 풀렸다. 한껏 들려 있던 어깨가 제자리를 찾아가고 달아오른 얼굴이 차츰 식어 갔다.

“전 안 좋아해요.”

“그렇구나.”

“내가 왜 그쪽 같은…….”

잠깐 단어를 골랐다.

“날라리를 좋아해요.”

날라리라는 단어가 조금 촌스러운 것 같긴 하지만, 싸움박질이나 하고 섹스에 정신 나간 남자를 칭하기에는 적절했으리라고 본다.

“다행히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혀 있네.”

재밌다는 듯 웃던 남자가 허리를 숙여 땅에 흩어진 초콜릿을 주웠다. 커다란 몸을 접었다가 다시 일으켜 세우던 남자가 나와 눈높이가 비슷해졌을 때쯤 눈을 치켜떴다. 허리를 반쯤 숙인 그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취향 유지 잘 해. 까딱하면 큰일 나.”

남자에게 홀려 정신을 못 차리는 고채원을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날 뭘로 보고. 그쪽 별로거든요?”

“설마.”

“그리고 내가 언니처럼 순진한 줄 알아요?”

“순진해? 뭘 모르네.”

그가 몸을 마저 일으켰다.

“고채원이 얼마나 똑똑한데, 순진하대.”

“…….”

“걘 그래 보여도 챙길 건 챙겨.”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휘어지는 입술에 피딱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저 지경이 되도록 싸운 이유는 또 뭘까. 내가 멀뚱히 바라보기만 하자 남자가 피식 웃었다.

“귀엽다, 너.”

“……뭐라는 거야.”

헛기침을 뱉으며 딴청을 피우는 사이 남자는 진짜 쓰레기가 된 초콜릿을 멀찍이 던졌다. 냉장고 옆에 있던 쓰레기통으로 두 조각이 깔끔하게 골인했다.

“아깝네, 저게 마지막이었는데.”

“그러게 왜 나한테 떠넘겨요.”

조금 전보다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들썩이던 기분이 잔잔해져 상황을 냉정하게 돌아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내가 예민했다. 남자는 초콜릿에 얽힌 내 사정을 모르고, 고채원이 준 초콜릿이라 해도 딴에는 친절을 베푼 건데 나 혼자 씩씩댄 건 맞으니까. 하지만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모르는 척 시선을 굴렸다.

“어?”

그러다 무심코 침대 바로 옆 벽에 나 있는 문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컨테이너 입구 맞은편인데, 저쪽은 담벼락 방향이다. 그런데 왜 문이 있지? 의아한 내 눈빛에 남자가 덩달아 고개를 돌렸다.

“뭔지 궁금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따라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휘적휘적 걸어간 남자가 망설임 없이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끼익, 무게감 있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나는 놀란 눈으로 남자와 문을 번갈아 보았다.

“뭐예요, 이거?”

“비밀의 문.”

문득 대문이 아닌 곳으로 집을 드나들던 그를 떠올리며 문 밖을 바라봤다. 과연 보이는 바깥 풍경은 저택 뒤쪽 골목이었다.

“왜 이런 문이 있어요?”

“직업 특성상 새벽에 드나들 일이 많거든.”

“아아.”

대충 알아들었다. 아마 고 의원은 뒷일을 봐주는 깡패의 존재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꺼려 따로 드나들 문을 만들어 둔 모양이었다.

근데 깡패가 무슨 직업이야.

마음속으로 비웃으며 슬그머니 밖으로 발을 디뎠다. 나가서 보니 문 바깥쪽에는 붉은 벽돌이 담벼락인 것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래서 무거워 보였구나.

내가 닫아 보라는 듯 손짓을 하자 그가 순순히 문을 닫았다. 이렇게 보니 감쪽같네. 신기해하며 벽돌을 만지작거리다 가장 튀어 나온 걸 잡아당기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문이 확 열렸다.

“아……!”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가려는 몸을 남자가 잽싸게 잡아챘다. 커다란 손바닥이 등에 닿는 게 느껴졌다. 한 손으론 문을, 다른 손으론 나를 감싼 남자에게선 놀란 기색이 전혀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매번 태연할 수 있을까. 얼굴을 올려다보느라 거의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꼴이라는 걸 눈치채는 데 한 박자 늦었다. 내가 후다닥 도망치듯 품에서 벗어나자 남자가 소리 없이 웃었다.

“이제 그만 놀자.”

“네?”

“오른쪽으로 가면 대문 나올 거야.”

“네? 저기요.”

“잘 자, 애기야.”

그대로 문이 닫혔다.

다시 문을 열려고 벽돌을 잡았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마 남자가 문을 잠근 것 같았다. 졸지에 담벼락 밖으로 내쫓겼다.

아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이 미친놈이. 이렇게 쫓아내는 게 어디 있어.

“문 열어요.”

늦은 시간이라 골목에서 큰 소리를 낼 수는 없어 최대한 고개를 가까이 대고 말했으나 감감무소식이었다.

“장난해요? 열라고.”

벽돌 위를 주먹으로, 발로 두드렸지만 쿵쿵대는 진동만 들릴 뿐이었다.

한참을 씩씩대다 마지못해 대문으로 향했다.

“후…….”

여사님들 쉬고 계실 텐데, 이 시간에 초인종을 누르려니 여간 미안한 게 아니었다. 속으로 쉴 새 없이 남자를 욕하며 초인종으로 손을 뻗는 찰나였다.

툭,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대문이 천천히 열렸다.

“뭐 하자는 거예요.”

뻔뻔한 얼굴로 대문을 여는 남자를 노려보자 그가 낮게 소리 내며 웃었다. 웃음소리가 공기를 진동시키며 귀를 파고들었다.

진짜 어이가 없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몸 안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이게 재밌어요?”

“재밌네.”

“진짜 유치하다. 나이를 어디로 먹은 거야.”

툭, 남자의 팔뚝을 주먹으로 때리곤 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히 대문을 닫은 남자가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제 들어가서 자.”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요.”

“다음에 또 놀러 와.”

“그럼 그쪽은 뭐 해 줄 건데요.”

“아, 이번엔 내 차례인가.”

“기브 앤 테이크니까.”

남자의 입꼬리가 더 짙은 호선을 그렸다.

“그래. 그럼 뭘 해 줄까?”

“그쪽이 뭘 해 줄 수 있을지 생각해 볼게요.”

남자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 인사를 주고받을 만큼 살가운 사이는 아니니 잘 자라는 말은 생략하고 몸을 돌렸다.

“잘 자, 애기야.”

그런 날 비웃듯 등 뒤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놈의 애기…….”

무심코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혹여 그가 들었을까 싶어 입을 가리고 걸음을 더 빨리했다.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땐 묘하게 개운했다.

창문을 반쯤 열어 두고 눅눅한 공기를 방 안으로 들였다. 아깐 싫더니 지금은 썩 나쁘지 않았다. 괜히 코를 킁킁대 밤공기 냄새를 맡는데, 돌연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투둑, 툭, 여리게 시작하더니 점점 커진다. 나는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침대에 누웠다. 베개에 머리를 대고 얇은 이불을 끌어 올리다 문득 캐노피에 시선이 닿았다.

처음 봤을 때는 요란한 레이스 천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매일 봐서 그런지 이젠 익숙해졌다. 이 방을 남자가 직접 꾸몄다는 것은 아직도 믿기지 않지만.

아, 혹시 고채원과 함께 꾸몄나?

“…….”

고채원의 오지랖이라면 내 방을 꾸미는 데 선뜻 나설 법도 하다. 남자도 직접 하는 것보다는 그녀가 지시하는 대로 가구를 배치하는 쪽이 더 어울리고.

“뭐야…….”

한숨을 뱉으며 몸을 모로 눕혔다. 조금 전까진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는데 다시 신경질이 났다.

빗소리도 거슬리는데 그냥 창문 닫을까.

잠깐 고민하다 다시 일어나는 건 귀찮아서 관뒀다. 그냥 잠이나 자자.

나는 몸을 고치처럼 둥글게 말고 이불을 품에 끌어안았다.

“서을아, 까까 먹고 있어.”

손에 초콜릿이 쥐어졌다. 말똥말똥한 눈으로 고개를 들자 보이는 것은 어머니가 아니었다. 나는 초콜릿을 건네는 아저씨를 올려다보며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내게 초콜릿을 주는 건 늘 어머니였는데.

그러나 달콤한 초콜릿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냉큼 그것을 받았고, 내가 서툴게 포장지를 까서 입에 무는 것을 보며 아저씨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서을이는 참 예뻐. 엄마 닮아서 그런가.”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볼을 감쌌다. 말랑한 살결을 주물러 대는 아저씨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는 것 같았으나, 나는 입 안 가득한 단맛에 취해 얌전히 볼을 내주고만 있었다.

한참 동안 볼을 만지던 아저씨가 이내 천천히 손을 떼었다. 그러곤 곧장 화장실에 들어갔고 한참 있다가 나왔다.

그 뒤로도 종종 비슷한 일이 있었다. 어머니가 잠깐 자리를 비울 때면 아저씨는 내게 초콜릿을 준 뒤, 볼과 손, 발 같은 곳들을 만지작댔다.

그 손길이 꺼림칙해지기 시작한 건 아저씨의 손이 점점 몸 쪽으로 파고들기 시작할 때부터였다. 발을 만지던 손이 발목을 그러쥐고, 발목에서 종아리로, 그리고 무릎을 주물럭대는 것에 점점 기분이 나빠졌고 그의 손을 피하기 시작했다.

불행 중 다행히 그는 내가 피한 뒤로는 건들지 않았지만, 시간이 흘러 그것이 성희롱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한참 속을 게워 내야 했다. 아저씨와 섹스를 하기 위해 내게 초콜릿을 쥐여 준 어머니와 내 몸을 만지기 위해 초콜릿을 쥐여 준 아저씨. 그 두 사람이 끔찍했다.

“서을아, 까까 먹고 있어.”

불쾌한 기억에 인상을 쓰는데 아저씨가 또 나를 불렀다. 다시 고개를 드니 나는 또 초콜릿을 내민 아저씨의 앞에 있었다.

그제야 이 엿 같은 회상이 꿈인 걸 알아차렸다. 다시금 반복되는 더러운 손길. 꿈속의 나는 무감하게 초콜릿만 우물대고 있었다. 그 한심한 꼴을 보고 있으려니 속에서 천불이 났다.

뭐 하는 거야, 멍청아. 뿌리쳐. 뿌리치고 부모님께 말씀드려. 저 아저씨가 너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모조리 말하란 말이야.

그러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소리를 지르기 위해 입을 크게 벌렸을 때였다.

“하아…….”

무심코 소름 끼치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나는 순식간에 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만, 잠에서 깬 나에게 벌어진 상황은 꿈보다 더 끔찍했다.

“후우, 젠장.”

커다랗고 두꺼운 손이 종아리를 위아래로 쓰다듬고 있었다. 나는 벽을 보고 누워 있었고, 등 뒤로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분명히 덮고 잤던 이불은 걷어져 있었고, 반바지 밑단이 위로 올라가 허벅지를 전부 드러내고 있었다.

바깥에선 빗줄기가 사납게 쏟아지고 있었다. 비 냄새가 난다. 손이 다리를 쓸어내릴 때마다 비에 젖은 듯 축축한 소매가 스쳤다.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이 끈적한 손길, 독한 스킨 냄새.

“하…….”

고 의원이다.

분명히 매일 방문을 잠그는데 언제 따고 들어온 거지.

그때 손이 떨어져 나가더니 바지 버클을 푸는 소리가 들렸다.

말도 안 돼. 일어나야 돼. 일어나서 무슨 짓이냐고 화를 내야 해. 여기서 나가야 해. 일어나, 진서을. 제발 일어나.

머릿속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몸은 가위에 눌린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가 돌처럼 굳어 있는 사이 등 뒤에서 탁탁, 살갗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큿.”

그리고 억누르는 듯한 신음까지.

그가 내 등 뒤에서 자위를 시작한 것이다. 마찰 소리와 함께 매트리스가 미세하게 출렁였다. 헛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아서 다급히 이를 악물었다.

이 와중에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간보다는 수십 배 나았다. 제발 더 이상 건드리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고 의원의 손이 허벅지에 닿았다.

허벅지 사이를 벌리듯 손에 힘을 주던 그가 엄지로 허벅지 안쪽의 상처를 지그시 눌렀다. 느릿느릿 상처를 쓸어내리는 것에서 의문이 느껴졌다. 나는 그의 손가락이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까 봐 울기 직전의 심정으로 기도했다.

하느님, 제발요. 제발 나 좀…….

지이잉. 지이잉.

그때, 진동 소리가 들렸다. 고 의원의 핸드폰인 것 같았다. 내 허벅지를 만지며 자위를 하던 그가 짜증스러운 한숨과 함께 손을 거두었다.

“뭐야.”

침대에서 내려간 고 의원이 작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하……. 알았어. 대호 넌 지금 어디냐.”

그의 손에서 벗어나 안심하고 있던 찰나, 익숙한 이름이 귀에 들어왔다.

고 의원이 다시 지퍼를 올리는 듯 부스럭대다 이내 방에서 빠져나갔다.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최면에서 깨어나듯 경직된 몸에서 힘이 탁 풀렸다.

굳어 있던 몸이 사정없이 떨렸다. 왈칵 눈물도 터져 나왔다.

“흐으…….”

더듬더듬 손을 아래로 내려 말려 올라간 바지를 내렸다. 고 의원의 손이 닿은 부위마다 마비가 된 것처럼 감각이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이불을 주워 들고 몸을 둘둘 말았다.

너무 무서워. 다시 오면 어떡하지. 이번엔 강간하면 어떡해.

몸을 한껏 웅크리고 겁에 질려 있는데, 탁, 뭔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흑……!”

깜짝 놀라서 몸을 크게 떨며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문이었다. 멍하니 바라보는데 다시 한번 탁, 뭔가가 창문을 때렸다. 비와 함께 우박이라도 내리는 걸까.

꼼짝도 못 하고 숨죽이는 찰나 이번엔 뭔가가 창을 통해 방 안으로 훅 들어와 바닥에 떨어졌다.

“…….”

이불로 눈물을 닦아 내고 돌아보자 익숙한 게 떨어져 있었다.

일회용 라이터.

저게 왜…….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무심코 든 생각에 떨리는 다리를 침대 아래로 내렸다. 비틀, 힘이 풀려 서툰 걸음으로 간신히 창가로 향했다. 순식간에 얼굴 근육이 일그러졌다.

연못가에 남자가 까만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늦은 새벽이라 마당의 조명을 모두 꺼 둔 데다가 비까지 내려 어두컴컴했지만, 그가 물고 있는 담뱃불 덕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

그가 손짓을 했다. 나오라는 뜻인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히 나갔다가 고 의원과 마주치면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

하지만 남자는 재차 손짓을 했고, 그런데도 내가 꼼짝없이 서 있기만 하자 대문을 가리켰다.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방문으로 향했다. 문틈에 귀를 대고 숨을 죽였지만 들리는 건 창밖의 빗소리가 전부였다.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창문으로 향했다. 그가 또 한 번 손짓을 했다.

새까만 인영을 내려다보다 나도 모르게 다급히 등을 돌려 뛰었다. 방문을 열고 복도를 지나 2층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집 안은 고요했다.

곧장 현관문을 열자 분수대 앞에 그대로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우산을 쓸 여유는 당연히 없었고, 신발조차 신지 않은 채 맨발로 뛰쳐나갔다. 마당에 고인 물웅덩이가 크게 찰박이며 다리를 적셨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흐윽…….”

도망치듯 달려가 뛰어든 곳은 남자의 품이었다. 갑자기 안겨도 남자는 흔들림 없었다.

“고…… 고성하는요?”

“나갔어.”

머리 위로 우산이 드리워 비를 막아 주었다.

“오늘 안 들어올 거야. 오빠가 사고 하나 쳤거든.”

나는 덜덜 떨며 남자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눅진한 비 냄새에도 가려지지 않는 진한 담배 냄새. 이게 이렇게 반가운 순간이 올 줄은 몰랐다.

“나…… 숨겨 줘요……. 놀아 줄 테니까 나 좀…….”

“그러자.”

그가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고 의원이나 아저씨와는 전혀 다른 담백한 손길에 그제야 안심하고 소리 내 울었다.

컨테이너에 들어간 나는 비에 젖은 채 덜덜 떨며 구석에 서 있었다.

옷장을 뒤지던 남자가 옷을 하나 찾아 던져 주었다. 당연히 그의 옷일 줄 알았는데 막상 받고 보니 셔츠형 원피스였다.

“아, 고채원 거야. 벗어 두고 간 거.”

“…….”

마뜩잖았으나 거절할 상황이 아니라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막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려던 남자가 나를 돌아봤다. 남자의 어깨 위에 수건 하나가 걸쳐져 있었다. 천천히 위아래로 훑어 내리는 시선이 마지막에 머무른 곳은 내가 들고 있는 젖은 옷이었다.

“세탁해 줄까?”

“……버릴래요.”

그 인간의 손이 닿은 옷을 다시 입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 거기 던져 둬, 버려 줄게.”

“…….”

“고성하는 내일 밤이나 되어야 올 거야.”

“혹시…… 나 때문에 사고 친 거예요……?”

시키는 대로 옷을 던진 뒤 내내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그가 도로 담배를 집어넣고 내 쪽으로 휘적휘적 걸어왔다.

아직도 몸이 떨렸다. 비를 맞아 추워서인지, 희롱당한 충격이 가시지 않아서인지 분간이 안 된다. 그는 덜덜 떠는 내 머리 위로 수건을 덮어 대충 휘저어 댔다. 젖은 머리를 말려 주는 것 같은데 의외로 손길이 부드러웠다.

반항 없이 얌전히 있자 뭔가 이상했는지 남자가 수건을 살짝 들었다.

“물어볼 필요도 없겠네.”

그가 울고 있는 나를 보고 혀를 찼다.

“나 도와주려고…… 전화 건 거예요?”

“내가 신도 아니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알아.”

“…….”

“우연이야, 우연.”

그가 수건 끝으로 내 눈가를 벅벅 문질러 닦았다. 거친 표면에 피부가 쓰라렸지만 뿌리칠 생각도 못 했다.

이내 남자가 한 손으로 내 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애기야, 우유 데워 줄까?”

고개를 저었지만, 그는 멋대로 나를 두곤 냉장고로 향했다. 우유를 꺼내서 컵에 따라 전자레인지에 돌리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코를 훌쩍였다.

“채원 언니도 잠 안 오면 우유 데워 먹는다던데.”

“그렇대?”

남자가 무심하게 대꾸하며 컵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손바닥 안에 따뜻한 기운이 가득 찼다. 뽀얀 우유를 가만히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들자 남자가 내 머리에 놓여 있는 수건을 대충 바닥에 던지곤 침대를 가리켰다.

“저기서 자.”

“……여기서 자라고요?”

“숨겨 달라며.”

“그건…….”

사실 그건 겁에 질려 나오는 대로 뱉었던 말이었다.

언제든 고 의원은 다시 돌아올 거고 내가 방에 없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다. 아버지에게 연락하거나 경찰에 신고할지도 모른다. 굳이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혹여 사람들이 내가 당한 짓을 알게 될까 봐 겁도 나고.

나만 참으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나갈 것이다.

“적당히 둘러대고 여기 숨어 있어.”

남자가 내 등을 가볍게 밀었다. 얼떨결에 밀려나며 도달한 곳은 침대 앞이었다. 얇은 까만색 이불이 깔린 침대를 멀뚱히 바라보다 걸터앉자 그가 잘했다는 듯 머리를 토닥였다.

굳이 그 손을 밀어내지 않고 컵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미지근한 우유가 입술을 적시고 이내 긴장으로 메마른 입 안을 데워 주었다. 꿀꺽,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맛은 고소했다.

한 모금을 마시고 고개를 들자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남자가 엄지로 내 입 주변을 훑었다. 당황해 고개를 뒤로 뺐다.

“아, 나도 모르게.”

그의 손이 닿았던 곳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이상한 의도는 없어 보여 불쾌하진 않았으나, 괜히 신경이 쓰였다.

“뭐라고 둘러대요?”

“친구 집에서 지낸다고 하면 되지, 뭐.”

그는 의외로 간단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친구 집에서 며칠 지낸다고 둘러대면 집을 비워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거다.

왜 그런 생각을 못 했나 잠깐 되짚어 보니, 남자가 공간을 내주기 전엔 내게 딱히 머무를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며칠씩이나 신세를 지려면 사정을 설명해야 할 텐데,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고성하 같은 거물급 정치인과 인연이 있다는 것도 딱히 티 내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에게 당한 짓거리는 더더욱 감추고 싶었다.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남자라면 모를까.

“내가 여기서 자면 그쪽은 어디서 자게요.”

“안 자고 애기 지켜 줘야지.”

우유를 다시 마시려다 말고 동작을 멈췄다.

“왜…… 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양손으로 컵을 꽉 쥐었다.

“놀아 주는 대가로 숨겨 주기로 했잖아. 제대로 숨겨 주려면 옆에서 지켜 줘야지.”

“아…….”

뭘 기대한 거지. 이상한 실망감에 심장이 불쾌하게 뛰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져 모르는 척 우유만 홀짝이는데, 남자가 대뜸 내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가 손바닥을 펴 내가 들고 있는 컵 아래를 받치듯 가져다 댔다.

“고성하 죽여 줄까?”

그러곤 또 예의 터무니없는 말을 꺼냈다.

“자꾸 왜 그래요.”

떨떠름하게 남자의 손에 컵을 내려놓았다. 그가 한 손으로 컵 밑바닥을 그러쥔 채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죽이고 싶지 않아? 나라면 그럴 거 같은데.”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어서 오히려 내가 더 황당할 따름이었다.

물론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끔찍하지만, 그건 분노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살인으로 직결되는 사람은 세상에 많지 않으니까. 나 역시 그러하고.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그냥 나를 떠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되레 내가 묻고 싶었다.

“왜 그런 말을 해요?”

“뭐가.”

“꼭 나를 위해서라면…….”

머뭇대는 나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나를 위해서라면 사람을 죽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들려서 이상해요. 우리가 그럴 만한 사이도 아닌데.”

“쉽게 생각해.”

남자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너는 고성하를 죽이고 싶을 거고, 나는 사람 죽이는 게 쉽고.”

“그게 이유가 돼요?”

“애기는 그 정도만 알면 충분해.”

알아듣기 힘든 말을 하는 그를 흘겨보다 힘없이 한숨을 뱉었다. 자다 깬 새벽인 데다가 한바탕 울었고, 따뜻한 우유 때문에 몸이 노곤해져 쉬고 싶었다. 그런 나를 알아차린 듯 남자가 침대를 톡톡 쳤다.

“누워.”

나는 잠깐 망설이다 일단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을 덮었다. 성인 남성과 좁은 방에 단둘이 있는 상황, 심지어 그 옆에서 자려고 누웠는데도 이상하게 아무런 걱정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시야에 걸리는 인영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지켜 준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일까. 내가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 올리고 힐끔 고개를 들자 그는 습관처럼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지금 피우게요? 냄새나는데…….”

도움을 받은 주제에 뻔뻔하게 구는 나에게 남자는 타박 대신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알았어. 주인님 자는 데 방해하면 안 되지.”

“그…… 담배 너무 자주 피우면 몸에 안 좋아요. 그쪽 자유지만…….”

“네, 네.”

그가 담뱃갑을 주머니에 넣으며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남자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누웠다. 그러곤 누군가 최면이라도 건 것처럼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남자의 말대로 개학 전까지 친구 집에서 지내겠다고 말하고 짐을 싸서 나왔다.

고 의원이 없는 틈에 나오려고 여사님들의 배웅도 마다하고 부랴부랴 대문을 나서자마자 향한 곳은 남자의 컨테이너로 연결되는 담벼락이었다. 저번처럼 가장 튀어나온 벽돌을 힘주어 잡아당기자 제약 없이 문이 열렸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남자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머리맡에 우유 한 잔이 따라져 있었는데 미지근한 온도로 봐서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비어 있는 컨테이너 내부를 둘러보다 안으로 들어가 가방을 풀었다. 책을 모조리 챙겨 오느라 짧은 거리인데도 무거워서 혼났다.

책상이 따로 없으니 일단 바닥에 앉아 문제집을 쭉 쌓아 두고 어젯밤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침대에 기대앉았다. 무릎을 세워 다리 위에 책을 올리고 어떻게든 공부를 해 보려고 했지만, 자꾸 어제 일이 떠올라 마음이 불안정했다.

“후우…….”

정신 차리자. 손바닥으로 뺨을 때리며 집중을 하려고 하는 순간 바깥에서 쿵, 하고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담벼락이 아닌 마당 쪽이었다. 혹여 고 의원일까 봐 몸을 움츠리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문을 타고 들려왔다.

“애기야, 들어간다.”

늘 듣기 싫었던 호칭이었는데 지금은 반갑기까지 했다. 나도 모르게 안심하는 사이 문이 열리더니 남자가 한쪽 팔에 커다란 나무판 같은 것을 들고 들어왔다. 반갑다고 한들 반기며 맞이하기에는 머쓱한 부분이 없지 않아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하자 그가 먼저 아침 인사를 건넸다.

“잘 잤어?”

“네, 뭐. 그런데 그건 뭐예요?”

“애기 책상.”

“…….”

과연 그가 들고 온 것은 커다란 좌식 책상이었다. 두껍고 큰 나무가 무겁지도 않은지 한 손으로 번쩍 들어 다리를 세운 그가 내 앞에 책상을 놓아 주었다. 이런 것까지 신경 써 줄 줄은 몰랐던 터라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얼떨떨하게 눈을 굴리는 나를 대신해서 그가 바닥에 쌓아 둔 책을 책상 위에 올려 주었다. 그러곤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작은 탄성을 뱉더니 주머니를 뒤적여 조그마한 막대 사탕을 우르르 쏟아 냈다.

“초콜릿 주면 욕먹을 거 같아서 사탕으로 샀어. 이것도 싫어?”

레몬 맛, 딸기 맛, 콜라 맛 등등이 있지만, 그 와중에 초콜릿 맛은 없다.

나는 오묘한 심정으로 그것들을 내려다보았다.

“왜 이렇게 잘해 줘요?”

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묻자 그가 맞은편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왠지 눈을 마주치기 껄끄러워서 여전히 사탕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을 기다리는데, 남자가 사탕 하나를 집어 껍질을 까 제 입 안에 쏙 집어넣었다. 딸기 맛이었다.

남자와 딸기 맛 사탕이라. 고개를 들어 보니 그의 볼 한쪽이 볼록해져 있었다. 무섭게 생긴 주제에 어울리지 않게 귀여워 보여 바람 빠지는 웃음이 나왔다. 그가 입 안에서 사탕을 굴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담배 냄새 싫다고 해서 일단 참아는 보는데, 오래갈 거 같진 않다.”

볼 때마다 담배를 물고 있었던 남자가 나를 위해서 그 대신 사탕을 문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세게 쥐었다. 왜 자꾸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거야.

“왜 잘해 주냐고요.”

“내 친절은 천성이라니까?”

“……채원 언니한테도 그래요?”

그가 막대를 담배처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우고 사탕을 빼냈다.

“아마도?”

“어떻게요?”

고채원은 모든 걸 가졌다. 부모님과도 사이가 좋고, 부와 명예를 가졌고, 플루티스트로서도 꽤 인정받는다고 들었으며, 외적인 건 말하기도 입 아프다.

그에 반해 나는 이혼 가정에, 아버지는 사업이 망했고, 당장 수능 말고는 해결책이 없는 평범한 수험생일 뿐이다. 외모도 고채원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고.

이런 나에게도 꽤 친절한 남자가 그녀에게는 얼마나 잘해 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제삼자의 눈엔 무심해 보이지만, 고채원이 그렇게 좋아 죽는 것을 보면 단둘이 있을 때 어지간히 다정한 모양이라고 추측만 할 뿐이었다.

“말해 주기 싫은데.”

남자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마치 둘만의 비밀이라는 듯한 태도였다.

쿵, 심장이 한 번 비틀리는 것 같았다. 캐물을 자격이 없는 나는 입 안 여린 살을 물어 철렁한 심정을 다스려야 했다.

중심을 잃은 듯 흔들리는 초점을 간신히 책 위로 고정하고 더듬더듬 볼펜을 쥐었다.

“싫으면 말아요.”

덤덤한 척하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살짝 튀었다.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고 애먼 영어 지문 위로 펜을 죽죽 그어 대는데, 남자가 대뜸 내 머리 위로 손바닥을 올렸다.

“열심히 해. 오빤 일하러 간다.”

“…….”

“배고프면 있는 거 꺼내서 알아서 먹어.”

가든지 말든지. 마음속으로만 꿍얼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웅은 하지 않았고, 남자도 별생각 없는 듯 곧장 담벼락 문으로 나가 버렸다.

다시금 컨테이너 안에 혼자 남은 나는 조금 허탈한 심정으로 책상에 잔뜩 쌓여 있는 사탕만 노려보았다.

한참 공부를 하다 허기가 져서 마음대로 라면을 끓여 먹고 사탕까지 까서 입에 물었다. 나는 이틀 만에 남자의 공간에 완전히 적응했다.

컨테이너에 머무르면서 알게 된 건 생각보다 그가 바쁘다는 점이었다. 첫날 사탕을 한가득 부어 주고 간 뒤로는 좀처럼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해가 질 때가 다 되었는데 남자는 오늘도 들어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지켜 준다더니, 무책임한 인간.

딸기 맛 사탕을 입 안에서 굴리며 혀를 찼다.

내일은 고채원과 아주머니가 돌아오는 날이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다시 저택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다. 개학이 이틀밖에 안 남기도 했고, 언제까지 여기 숨어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고 의원이 또 새벽에 내 방에 들어올 거 같아서 무섭지만, 그가 되도록 바쁘길 바라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왜 이렇게 무력할까.

뭔가 다른 방법이 없을까.

“죽여 줄까?”

비현실적인 상상은 현실 도피를 도와준다. 늘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고 의원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상상을 하니 미묘한 쾌감이 번졌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살인이 장난도 아니고, 무서운 생각은 이쯤 해 두자.

사탕을 왼쪽 볼에서 오른쪽 볼로 넘길 때였다. 똑똑, 누군가 컨테이너 정문을 두드렸다.

남자인가?

하지만 그라면 곧장 애기야, 하고 불렀을 텐데 잠잠했다.

혹여 관리인들일까 봐 숨을 죽이는데, 다시 한번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오빠, 대호 오빠. 나야.”

고채원?

급히 핸드폰으로 날짜를 확인했다.

아직 토요일인데…….

분명 일요일에 돌아와서 성당에 들렀다가, 짐 정리를 하고 월요일 오전에 프랑스로 떠날 예정이라고 들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루 빨리 귀국한 모양이었다.

고채원이 손잡이를 돌렸다. 다행히 잠가 두어서 문이 열리지는 않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나는 연신 손톱을 깨물었다.

Rrrr─. Rrrr─.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동시에 달그락거리던 손잡이도 멈췄다. 얇은 컨테이너 벽면은 방음이 잘 되지 않는다. 나만 해도 문 앞에서 고채원의 신음을 다 들었으니, 그녀도 벨소리를 들었으리라.

전화를 건 사람은 고 의원이었다. 급하게 핸드폰을 꺼 버리고 서둘러 가방에 책을 쓸어 담았다.

“오빠, 안에 있지?”

고채원의 목소리가 커졌다. 나는 최대한 숨을 죽여 담벼락 쪽 문을 열었다.

“누구랑 있어? 응?”

날카로운 음성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와 문을 닫는데, 가방에서 책이 우르르 쏟아졌다. 급하게 나오느라 가방을 제대로 닫지 않은 탓이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왜 죄인처럼 숨게 되는 걸까. 한숨을 푹 내쉬며 책을 주워 드는데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여기서 뭐 해?”

그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은 남자였다.

쫓기듯 나온 내 심정을 전혀 모르는 그는 여느 때처럼 여유로워 보였다.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사탕을 물고 있는 꼴을 보니 왠지 약이 올라 흘겨보며 책을 가방에 담았다.

“채원 언니 돌아왔어요.”

“알아.”

그가 주머니에서 진동하는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에 「고채원」이라는 이름 석 자가 떡하니 떠 있었다.

“그쪽 찾고 있어요. 들어가 봐요.”

“넌 어디 가려고.”

“제 방으로 돌아가야죠.”

“괜찮겠어?”

대충 고개만 주억거리곤 그를 스쳐 지나갔다. 아니, 그러려고 했는데 남자가 가방을 낚아채는 바람에 강제로 걸음을 멈춰야 했다.

“뭐예요.”

“무거워 보여서. 들어 줄게.”

“됐어요. 그 꼴을 또 언니가 보면 무슨 오해를 받으려고.”

“또 풀어 주면 되지.”

“섹스로요?”

노골적인 언사에 그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나는 남자의 팔을 뿌리치곤 가방을 고쳐 멨다.

“집에 오자마자 그쪽 찾는 거 보면 어지간히 몸이 단 모양인데 가서 풀어 줘요.”

“얘 봐라.”

“그딴 게 뭐가 좋다고 이 난리들인지 모르겠네.”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타닥타닥, 내가 들어도 발소리가 신경질적이었다.

그런데 일순 몸이 가벼워졌다. 묵직한 가방이 허공에 번쩍 들린 탓이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그새 뒤따라온 남자가 가방을 내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리고 있었다.

“고성하 지금 집에 왔어.”

그가 사탕을 퉤, 바닥에 뱉어 냈다.

“내 방에 있어. 고채원은 데리고 나가서 뒹굴면 되니까.”

가슴이 쿡쿡 쑤셨다. 심장이 뾰족해진 것 같았다.

“참 친절도 하시네요.”

비아냥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끌고 가다시피 하는 그를 거칠게 밀어냈다. 하지만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애꿎은 나만 뒤로 밀려났다.

그가 묘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왜 화난 거 같지?”

“이거 놔요.”

“이러면 곤란한데.”

“놓으라니…….”

“애기, 질투해?”

“…….”

한순간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입만 뻐끔대는 나를 그가 가늠하듯 위아래로 훑었다. 나는 간신히 쥐어짜듯 목소리를 냈다.

“누…… 누가 질투를, 왜…….”

“…….”

“그런 게 아니라 난…….”

“뭘 또 이렇게 당황해.”

정작 그는 대수롭지 않아 보였으나 나는 충격이었다.

질투라니. 내가 왜? 그런 건…… 애정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감정 아닌가. 나는 고채원과 남자, 모두에게 애정이 없다. 고채원은 내게 친절한 언니지만 미묘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상대였고, 남자는.

남자는…… 뭘까.

어느 정도 남자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진 건 사실이었다. 첫인상은 최악이었지만, 힘든 순간에 도움의 손을 내민 사람이니 당연했다. 머쓱해서 티를 내진 않았으나 고마운 마음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래. 딱 그 정도.

“더, 더러워서 그런 거거든요?”

혼란에 빠져 더듬대며 하는 말에 남자는 느긋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옛날부터 나는 섹스 같은 거 더럽다고 생각했어요.”

“그래?”

“그런…… 그런 짐승 같은 짓, 더럽잖아요. 이상한 소리 내고, 제정신 아닌 사람처럼 막…….”

“누가 섹스하는 거 본 적 있나 보네.”

“…….”

“누구야? 애기 앞에서 그렇게 파렴치하게 군 게?”

굳이 대답을 듣겠다는 뉘앙스는 아니었다. 대답하지 않으면 그냥 넘어갈 것 같은 분위기였으나, 나도 모르게 홀린 듯 입을 열었다.

“엄마요.”

남자가 흐응, 하고 콧소리를 냈다.

“엄마가 아빠 말고 다른 아저씨랑 잤어요. 내가 있는 집에서.”

“정말 제정신이 아니네.”

“그래요. 그래서 난 섹스가 더러워요. 그쪽도 더럽고, 언니도 더럽고, 고 의원…….”

악몽 같은 그날 새벽이 떠올라 질끈 눈을 감았다.

“그 인간도 다 더러워.”

“알았어.”

그가 내 가방을 놓아주었다. 묵직한 무게감이 양어깨를 짓눌렀다.

“월요일이 개학이지?”

뜬금없는 말이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가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는 내 등을 살짝 밀었다.

“방문 잘 잠그고 자.”

집에 들어가니 고 의원과 아주머니가 소파에 앉아 있었고, 여사님들은 모녀가 사 온 선물을 나눠 갖고 있었다. 퍽 쾌활한 분위기였다.

고채원은 남자와 만나는 중인지 보이지 않았다. 조용히 다가가자 아주머니가 나를 발견하곤 손짓을 했다.

“서을이 왔어? 친구 집 갔었다며.”

“네. 잘 다녀오셨어요?”

“그럼. 서을이 선물도 있어. 채원이랑 같이 고심해서 골랐는데……. 얘는 왜 이렇게 안 내려오는지 모르겠네.”

아주머니가 2층을 올려다보았다.

컨테이너에 있는 게 아닌가?

덩달아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내리는데 문득 고 의원과 눈이 마주쳤다. 고 의원의 눈이 천천히 나를 훑어 내리다 허벅지에 닿았다. 상처를 떠올리고 있겠지. 속이 미식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뻣뻣하게 굳은 채 내게 포장된 선물을 건네는 아주머니를 향해 걸어갔다.

“다음부터는 아저씨에게 먼저 말해 주렴.”

맞은편 소파에 앉는 내게 고 의원이 말했다. 자신의 허락을 받지 않고 멋대로 나간 것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네…….”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 의원의 눈빛이 닿을 때마다 무서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애써 꾹 참아 냈다.

“오르골이야. 너무 이쁘지.”

“감사합니다.”

선물은 축음기 모양의 오르골이었다. 적당히 감사 인사를 하며 작동시켜 보니 흘러나오는 노래는 다름 아닌 <사랑의 인사>였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쓸 뻔했으나 다행히 표정 관리를 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걸 굳이 틀어 볼 일은 없을 것 같다.

쿵쿵쿵. 그때 계단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계단을 내려온 건 다름 아닌 고채원이었다. 늘 사뿐사뿐 움직이는 그녀에게서 저렇게 거친 발소리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화난 사람처럼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채원아, 무슨 일이니?”

허공을 배회하던 고채원의 눈길이 머문 곳은 다름 아닌 나였다.

“…….”

그녀는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 오르골을 들고 있는 나를 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그러곤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계단을 마저 내려왔다.

“잠깐 밖에 다녀올게요.”

“피곤할 텐데 쉬지 않고. 아까부터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니?”

“금방 와요.”

그녀가 서둘러 거실을 가로질렀다. 멍하니 고채원의 뒤를 눈으로 좇던 나는 그녀의 바지 뒷주머니에 꽂혀 있는 익숙한 초콜릿을 발견하고 순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저거, 설마.

“저 이제 올라가 볼게요.”

“그래, 가서 쉬어.”

급하게 방으로 올라와 곧장 서랍을 열었다.

“하…….”

텅 비어 있었다. 역시 고채원이 가지고 간 초콜릿은 내 서랍에 있던 그것이다. 내 방을 뒤진 것이다.

도대체 왜?

내가 아는 고채원은 허락 없이 남의 방을 뒤질 만큼 몰상식한 사람이 아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 의문스레 주위를 둘러보는데, 책상 위에 낯선 만년필이 놓여 있었다.

그제야 대충 상황 파악을 할 수 있었다. 선물을 몰래 두고 가려다가 초콜릿을 발견한 것이다. 본인이 남자에게 준 초콜릿을 고채원이 알아보지 못했을 리 없다.

남자와 내가 함께 있는 모습만으로도 눈물을 내보였던 그녀가 초콜릿이 내 서랍에 들어 있는 걸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훤했다.

“또 풀어 주면 되지.”

잠깐 걱정했지만 이내 관두었다. 남자가 알아서 하겠지. 본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고채원과 뒹굴거라고.

만년필을 서랍에 던져 넣고 쾅, 닫았다.

그러게 왜 남의 방을 뒤져.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 멋대로 내 방에 침입한 고채원과 달라고 한 적 없는 초콜릿을 쥐여 준 남자가 잘못한 거지.

둘이 알아서 해결하든지 말든지, 내가 알 바 아니다.

쾅쾅쾅! 쾅쾅!

남자의 말대로 방문을 잠가 두고 공부를 하던 도중이었다. 갑자기 문을 세게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펜을 떨어트렸다.

설마 고 의원일까. 하지만 그 인간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요란한 노크였다. 그 음침한 인간이라면 쥐도 새도 모르게 들어와서 나를 더듬지, 저렇게 온 집안 식구들을 깨울 것처럼 굴지는 않을 거다.

따로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지금 이 저택 안에서 내게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유일한 사람.

“무슨 일이야, 언니.”

“…….”

예상대로 문 앞에 고채원이 서 있었다. 어딘가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결 좋은 머리가 헝클어졌고, 홈웨어도 구깃구깃했다. 보나 마나 남자와 한바탕 뒹굴다 온 거겠지.

원래 그녀라면 들어가도 되냐고 의견을 물었을 텐데 지금은 무작정 밀고 들어왔다. 그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가만히 있다가 질투 대상이 된 나로서는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얹혀사는 신세를 생각해 꾹 참았다.

“무슨 일 있어?”

방문을 닫고 돌아보자 고채원은 내 책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뒷모습이지만 초콜릿이 들어 있던 첫 번째 서랍을 보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말없이 고요하게 숨을 내뱉던 고채원이 불시에 나를 돌아봤다. 눈가가 붉고 짓물러 있었다. 많이 울었나 보다. 섹스하면서 운 건지, 질투심에 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양쪽 다 썩 유쾌하진 않았다.

“친구 집 가 있었다며.”

“응.”

“정말 친구 집 갔던 게 맞아?”

“……무슨 소리야?”

나도 모르게 말투가 뾰족해졌다. 고채원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긴 머리카락이 찰랑대며 부드러운 물결을 만들어 냈다.

“정말 그동안 친구 집에 있었던 거냐고 묻는 거야.”

“그럼 내가 어디 갔겠어. 딱히 갈 데도 없는데. 언니도 알잖아, 우리 아빠는 미국 갔고, 엄마랑은 연락 안 한 지 오래된 거.”

“…….”

잠깐 내게 동정심을 느꼈는지 고채원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으나, 금방 다시 차가워졌다.

“서을아, 언니 다 알고 왔어.”

“뭘?”

“너 대호 오빠 방에 있었지.”

“…….”

“오빠 방에 없던 책상이 있더라. 너 거기서 지냈잖아.”

“무슨 소리야, 난 모르는…….”

“오빠한테 들었어.”

“…….”

까득, 이를 악물었다.

그래. 고성하의 개새끼를 믿은 내가 바보지.

주인 딸과 나, 개새끼에게 우선순위는 뻔하다. 그래도 숨겨 준다고 했잖아. 지켜 주겠다고 했잖아. 나쁜 새끼.

“맞아.”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시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대답에 고채원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왜 언니가 그런 표정을 지어. 내가 왜 거기 갈 수밖에 없었는지 죽었다가 깨어나도 모를 거면서.

“공부가 너무 안 돼서 마당에서 바람 쐬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자기 방에서 공부해도 된다고 했어.”

“…….”

“며칠 일하러 나간다고 비워 둔대서 잠깐 신세 졌어.”

“그동안 대호 오빠는 안 왔고?”

“응. 한 번도 안 왔어.”

그건 사실이었다. 비 오는 날 새벽에 곁을 지켜 준 뒤로는 계속 볼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고채원은 딱히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이건 남자에게 미친 고채원의 탓도 있지만, 남자의 잘못이 더 크다.

애초에 꼬신다고 쉽게 몸을 대 주는 남자를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자신과도 쉽게 몸을 섞은 남자니 그 옆에 어떤 여자가 있든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으리라. 고채원이 나와 남자가 잤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남자의 행실로 보아 당연했다.

마음 같아서는 고 의원의 개 같은 짓거리를 다 털어놓고 싶었지만 그런다고 고채원이 나를 이해할 것 같진 않았다.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니까. 고채원은 내 말을 믿어 주지 않을 거다. 오히려 나를 천박하다 나무라겠지. 지금 남자와 내 사이를 의심하는 것처럼.

“그런데 언니는 그 사람 일에 왜 이렇게 민감해?”

도무지 그녀가 내 결백을 믿는 것 같지 않아 방향을 틀었다. 내 말에 고채원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야, 난 네가 걱정돼서…….”

“그 사람이랑 사귀어?”

“…….”

그녀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질투를 해 놓고 내가 알아차리니 당황하는 꼴이라니. 도대체 나를 얼마나 바보로 본 걸까.

“그 사람 깡패라며.”

“…….”

“아저씨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했잖아. 왜 그런 사람이랑…….”

“그런 거 아니야……!”

한심하다는 뉘앙스를 섞어 말하자 고채원이 더듬대며 반박을 해 왔다.

“사귀긴 누가…… 누가 사귀어! 그런 거 아니야.”

“하지만 언니, 지금 남자친구가 바람나서 화난 사람 같아. 내가 꼭 내연녀가 된 것 같고.”

“무슨……!”

정곡을 찔린 고채원의 얼굴이 당혹감에 일그러졌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나는 조금 더 불쌍한 척을 했다.

“난 그 사람이랑 이상하게 얽힌 거 하나도 없어. 정말이야.”

“…….”

“그러니까 나 그렇게 무섭게 보지 말아 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언니가 그러니까 나 좀 무서워.”

“난…….”

“언니가 잘해 준 덕분에 아빠가 없어도 외롭지 않았는데…….”

“서을아.”

고채원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내게 다가왔다. 아직 서먹한 건 남아 있는지 선뜻 손을 뻗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바로 앞에 온 그녀의 표정에는 질투보다 안타까움이 더 크게 서려 있었다.

“미안해, 서을아. 언니가 예민했어.”

이 의미 없는 감정싸움의 승자는 나였다.

“아니야. 오해할 수도 있지. 나도 미안해. 앞으로 조심할게.”

“대호 오빠랑 나, 그런 사이 아니야.”

“그렇지? 그 사람이랑 언니는 전혀 안 어울려. 그 사람 얼굴은 봐줄 만하지만 언니랑 수준 차이 많이 나잖아.”

“당연하지. 내가 왜 그런…… 깡패랑 만나겠어.”

문득 고채원이 순진하지 않다고 했던 남자의 말이 떠올랐다.

실속을 챙길 줄 안다는 게 이런 거였나. 남자가 그녀의 마음을 다 알고도 모르는 척 몸만 섞는다면, 그녀는 남자를 좋아해서 몸을 섞어도 결코 진지한 관계까지는 발전할 생각이 없었다. 은연중에 남자와 자신의 수준 차이를 의식하기 때문이리라.

나는 그녀가 조금 우스웠다. 남자가 그렇게 좋아서 안달을 내는 주제에 정작 그와의 관계를 끊임없이 부정하다니. 결국 고채원의 감정 수준도 남자가 그녀를 가지고 노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불쌍하게 여길 필요가 없었다.

고작 그 정도 감정으로 대단한 사랑인 것처럼 나를 질투하다니, 사랑이란 정말 한심한 감정이다. 그 얄팍함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들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애기, 질투해?”

그걸 알고도 사랑에 빠질 만큼 나는 바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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