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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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고채원과 아주머니의 여행은 닷새 뒤로 정해졌다. 장소는 러시아.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곧장 프랑스로 돌아갈 계획이라는 고채원은 집을 떠나는 게 못내 아쉬웠는지 남은 시간을 남자와 알차게 보내는 중이었다.

늦은 밤, 퍽 만족스럽게 문제집을 풀어내고 잠깐 쉴 겸 창가로 향하니 때마침 고채원이 마당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어쩜 저렇게 늘 같은 시간에 움직일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인데.

며칠 전 여사님 두 분이 고채원의 행적에 대해 의문스럽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 들었다. 무슨 짓을 하는지까지는 모르는 것 같지만, 매일 같은 시간에 밖으로 나가는 고채원에게 뭔가 비밀이 있을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하는 눈치였다.

매일 같은 시간에 현관을 나서면 집안 관리인 중 누군가는 이상하게 여길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건가. 이게 다 사랑이라는 감정 때문에 멍청해진 탓이리라.

하루쯤은 건너뛰지, 그것도 못 참나. 그럼 생리할 땐 안 가려나.

나 참, 이러다 고채원의 생리 주기까지 알 판이다.

혀를 차며 미지근한 밤공기를 들이켰다. 초승달만 달랑 떠 있는 새카만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는데,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

시선을 내리자마자 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나흘 만에 보는 고 의원이었다.

요즘 많이 바쁜지 좀처럼 집에 들어오지 않아 마음 편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오늘은 왔네.

못마땅하게 내려다보다 창문을 닫으려는 찰나, 곧장 현관으로 향할 줄 알았던 고 의원이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을 발견하고 잠깐 멈췄다.

“어?”

고의원은 마당 왼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컨테이너가 있는 그 방향으로.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엔도르핀이 도는 듯 심장이 쿵쾅거리기도 했다. 내 일도 아닌데 고채원이 아버지에게 밀회 현장을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개가 창밖으로 쭉 내밀어졌다.

고 의원은 정확히 고채원이 사라진 곳으로 들어갔다.

와, 생각보다 빨리 들키겠는데. 그러게 꼬리가 길면 잡힌다니까.

고채원을 안타깝게 여기며 혀를 차는 찰나, 문득 이질감이 들었다.

뭐지? 방금 뭔가가 시야에 걸린 것 같았는데…….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는 동시에 구름이 걷히며 달빛이 마당을 비추었다. 순간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사람을 발견하고 나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 미친놈이다.

남자가 연못가에 양반다리를 하고 한쪽 무릎에 팔을 지탱한 채 턱을 괸 자세로 앉아 있었다.

내가 더 놀란 건 그가 나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거지? 아니,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던 거야.

남자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명백히 내게 보내는 신호였다.

나는 입 안 여린 살을 깨물었다.

고채원의 움직임을 좇느라 미처 다른 곳은 살피지 못했다. 은밀하고 음침한 취미를 남자에게 들킨 것이다. 이 정도면 관음증 환자 취급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라는 걸 알기에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잠이 안 와서 마당 둘러보고 있었어요.”

“가서 이 여사에게 우유라도 데워 달라고 하지 그랬니.”

“아버지는 내가 아직도 어린앤 줄 아세요?”

“내 눈엔 늘 어린애 같지.”

그때 아래쪽에서 다정한 아버지와 애교 많은 딸의 전형적인 대화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타이밍 좋게 남자가 컨테이너에 없었기 때문에 고채원은 밀회를 들키지 않았다. 운도 좋다.

고 의원의 가방을 대신 들고 사근사근 웃는 고채원과 그런 딸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고 의원의 모습에 불쑥 울화가 치밀었다.

고채원이 아버지 몰래 주위를 살폈다. 남자를 찾는 것 같았는데, 그녀와 남자 사이에 커다란 분수대가 자리하고 있는 탓에 발견하지 못했다.

아쉬운 얼굴로 아버지에게 팔짱을 끼는 고채원을 바라보다 다시 남자를 돌아보니 그가 대뜸 내게 손을 흔들었다. 지난번과 비슷한 태도로 가볍게.

그러곤 뭐라고 말하듯 입을 벙긋거렸는데, 거리가 멀고 어두운 와중에도 알아봤다.

─안녕, 애기야.

사정없이 찌푸려지는 내 표정을 알아본 듯 그가 고개를 털며 소리 없이 웃었다. 그때 부녀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쿵,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긴 팔을 위로 뻗어 기지개를 켜면서도 내게서 눈길을 거두지 않던 그가 다시금 입을 뻐끔댔다. 이번에도 알아볼 수 있었다.

─애기야, 잘 자.

저 인간이 진짜.

못 박힌 듯 창가에 서 있던 나는 간신히 손을 들어 커튼을 세차게 닫았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훔쳐보던 걸 들킨 데다가 괜한 농락까지 당해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쪽팔렸다.

거칠게 화장실에 들어가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어 냈지만 열기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날 얼마나 비웃고 있을까. 밤마다 섹스하러 가는 고채원을 훔쳐보며 음흉한 상상을 한다고 생각할 거다. 애기라고 농락하는 것에는 나이도 어린 게 발랑 까졌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겠지.

씩씩대며 얼굴에 연방 물을 끼얹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서을아, 공부하니?”

고 의원이었다.

이 시간에 왜 찾아온 거지.

나는 급히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불안한 마음으로 망설이다 연이은 노크 소리에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었다.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 같아서 와 봤다. 오랜만이지?”

“……안녕하세요, 아저씨.”

고채원은 그새 방에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경계 어린 눈으로 고 의원을 올려다보는데 문득 그의 시선이 가슴 위로 떨어졌다.

또 시작이다. 입 안 여린 살을 깨물었다.

그런데 이번엔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손이 다가왔다. 그의 손바닥이 왼쪽 쇄골과 가슴 사이를 지그시 눌렀다. 차가운 감촉에 흠칫 몸을 떨며 고개를 숙이자 젖어 있는 티셔츠가 보였다. 세수할 때 흐른 모양이었다.

“여름이라지만 이러다 감기 걸려.”

목소리는 상냥했지만 젖은 천 위를 문지르는 손길은 끈적했다. 두툼한 손이 아슬아슬하게 유방 위를 배회했다. 나는 뒷걸음질을 쳐 그의 손길에서 벗어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몸이 석고상처럼 굳고 목구멍이 꽉 막혔다.

내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 고 의원도 발을 들였다.

왜 따라 들어오는 거야.

불안함에 손이 떨렸다.

말하자. 미친놈한테 그랬던 것처럼 이러지 말라고, 성희롱이라고, 경찰에 신고할 거라고 말하자.

“…….”

그러나 머리가 쉴 새 없이 명령을 내렸음에도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쿵, 방문이 닫혔다. 그 소리에 놀라서 고개를 들자 고 의원이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

“그 옷은 세탁해야겠구나.”

“아, 전…….”

“아저씨 주렴. 이 여사에게 가져다줄 테니까.”

“제가, 제가 드릴게요.”

“어차피 내려가는 길인데 뭐. 괜히 시간 빼앗길 필요 있니.”

고 의원이 문 앞을 가로막고 섰다. 옷을 달라는 말은, 여기서 옷을 벗으라는 뜻이었다. 수치심에 입 안이 바싹 말랐다.

말해. 진서을. 싫다고 말해.

“아저씨 뒤돌아 있을게.”

그가 선심 쓴다는 듯 등을 보이고 섰다.

“얼른.”

옷을 벗어 주기 전에는 절대 움직이지 않겠다는 듯 고압적인 태도에 입술을 세게 물고 옷장으로 향했다.

다른 티셔츠를 꺼내 드는데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고 의원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상냥한 척 웃으며 도로 등을 보였다.

빨리 갈아입고 줘 버릴 생각으로 티셔츠 밑단을 들어 올렸다.

“하아…….”

옷감 스치는 소리에 고 의원이 나지막이 한숨을 뱉었다.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아, 토할 거 같아.

급히 옷을 벗고 새 티셔츠를 꿰입었다. 옷자락을 끝까지 내리자마자 고 의원이 돌아서더니,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내 손에 들린 젖은 옷을 가져갔다.

“아저씨가 전해 줄게.”

고 의원의 손안에서 옷감이 구겨졌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빨리 나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이윽고 고 의원이 방을 나갔다. 쿵, 문이 닫히자마자 쓰러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후으, 우욱.”

가쁜 숨이 토해지기를 여러 번, 그대로 바닥에 토사물을 뱉어 냈다.

“서을아, 대부님 말씀 잘 들어야 한다. 대부님이 아버지를 얼마나 많이 도와주셨는지 알지? 이번 투자 건도 대부님이 연결해 주신 거야. 대부님 아니었으면 우리 그대로 길바닥에 나앉을 뻔했어. 고마운 분이니까 아버지 올 때까지 말 잘 듣고 얌전히 있으렴.”

아버지의 목소리가 어지럽게 머릿속을 흐트러뜨렸다. 지저분한 바닥을 치울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주저앉아 애꿎은 살가죽만 쥐어뜯었다.

아버지가 밉다. 아무것도 모르고 기어이 나를 저 변태의 집에 밀어 넣은 아버지가 원망스럽다.

“흐윽…….”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리 돌아오기를 바랐다.

어머니를 향한 분노로 가끔 미쳐 날뛰는 아버지지만, 그래도 그 그늘에 있을 때가 가장 안전했다.

적어도 아버지의 술잔은 내게 날아오지 않았다. 집 안을 엉망으로 뒤집어 놓아도 내 방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고등학생인 내게 욕정하는 쓰레기 같은 고 의원이 제 딸에게만큼은 다정한 아버지인 것처럼, 내 아버지도 나만은 사랑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기어가듯 책상으로 향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전화를 걸자 국제 전화로 넘어간다는 안내 음성과 함께 통화 연결음이 이어졌다.

[국제 전화는 돈도 많이 드는데 뭐 하러 전화했어.]

전화를 받자마자 아버지가 말했다. 핸드폰 요금을 고 의원이 내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해는 하지만 서러웠다.

“아빠 목소리 듣고 싶어서…….”

[미안해, 우리 딸. 대부님께 더는 폐 끼칠 수 없잖아.]

아빠. 아저씨가 나를 어떻게 보는지 알아? 나 여기 있기 싫어. 차라리 혼자 살면 안 돼? 아니면 학교 관두고 아빠 따라가면 안 돼?

[나중에 연락할게. 공부 열심히 하고, 대부님 말씀 잘 듣고. 알았지?]

“……응.”

하고 싶은 말은 삼켜졌다. 나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착하다고 칭찬하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맺혀 있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아버지가 원망스럽다. 하지만 나는 그를 사랑한다. 그래서 괴롭다.

왜 인간은 사랑 따위를 해서, 이다지도 고통스러울까. 그냥 아버지를 미워할 수만 있으면 좋겠는데 왜 사랑까지 해서 미운 감정마저 미안해해야 하는 걸까.

[아빠는 우리 서을이밖에 없어. 서을이 위해서라도 일어날 거야.]

“…….”

[사랑해, 우리 딸. 넌 아빠 버리면 안 돼.]

“응…….”

울먹이는 목소리를 억누르고 대답했다.

작은 건설 회사 사장인 아버지는 직원이었던 어머니와 불같은 사랑에 빠졌다. 태어나서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처음 보았다고 틈만 나면 닭살 돋는 말을 하며 내 앞에서도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어린 나에겐 그 모습이 당연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옆에, 어머니는 아버지의 옆에 있는 게 나에게는 절대적인 진리였다.

그래서 태어나 처음으로 어머니의 옆에 다른 아저씨가 있는 모습을 봤을 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성적으로 무지했던 초등학생의 눈에는 두 사람이 알몸으로 뒤엉켜 있는 모습보다, 아버지의 자리에 다른 아저씨가 있다는 게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광경을 나는 고스란히 아버지에게 이야기했다.

“엄마랑 태강 아저씨 뽀뽀했어.”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 자세한 상황은 알지 못한다. 다만 그런데도 두 사람은 계속 함께했다. 나중에야 아버지가 어머니의 외도를 용서해 주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껍데기뿐인 평화가 지속되던 어느 날, 어머니는 어린 나를 붙잡고 말했다.

“서을아. 엄마는…… 아저씨를 사랑해.”

그러니까 이젠 그 아저씨를 보거든 아버지에게 말하지 말라며 내 손에 초콜릿을 쥐여 주었다.

그건 일종의 뇌물이었다. 초콜릿이라면 사족을 못 썼던 어린 나는 입 안을 달달한 향으로 가득 채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초콜릿도 초콜릿이지만, 아버지만큼 어머니 역시 소중한 가족이었기에 간절한 부탁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사랑이라는 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가 원하는 걸 들어주고 싶었다. 그녀는 아저씨와 함께 있을 때 가장 기뻐 보였으므로.

그렇게 어머니는 아버지의 용서를 받고도 외도를 멈추지 못했다.

바쁜 아버지가 집을 비울 때면 종종 집에서 어머니와 뒹굴었던 아저씨와 마주치곤 했다. 그럴 때면 아저씨는 내게 예쁜 신발이나 옷 같은 것을 선물했고, 나는 그것들이 꽤 마음에 들었다. 바빠서 집에 자주 들어오지 않는 아버지보다 아저씨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는 예전에 아버지가 그러했듯 어머니를 품에 안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입을 맞췄다. 그럼 나는 소파 아래에 앉아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비로소 사랑한다는 게 어떤 건지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가 사랑한다고 말할 때와 아저씨가 사랑한다고 말할 때, 어머니의 표정이 달랐다. 전자는 옅은 미소만 지을 뿐이었지만 후자는 얼굴을 붉히며 어딘가 느슨해진 동공으로 쉴 새 없이 아저씨의 얼굴을 바라보며 함께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솔직히 말하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그 모습이 보기 껄끄러워 내 방으로 들어가면 머지않아 바깥에서 헉헉대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게 되어 있다.

4년 동안 아버지 몰래 지속한 외도는 결국 발각되었고, 분노하는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싶다며 이혼을 요구했다. 그리고 내 양육권을 달라고 주장했다.

“나를 버린 거로도 모자라서, 서을이까지 데려가겠다고? 제정신이야? 양심도 없이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해!”

나는 아버지의 곁에 남겠다고 했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며 어머니가 자신의 사랑을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이용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부터 결심한 것이었다. 사랑에 정신이 나간 나머지 내가 있는 집에서 마음껏 사랑을 나눈 어머니가 짐승처럼 보이기 시작한 것도 비슷한 시기였다.

그렇게 어머니는 떠났다. 내가 열네 살이 되던 해였다.

그 뒤로는 아버지와 둘이 살았다. 아버지는 종종 발작하듯 분노해 집 안 물건을 부숴 댔는데, 그런 모습이 무섭다기보다는 안타깝고, 또 이해가 갔다. 나 역시 모든 걸 파괴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으니까.

그럴 때면 나는 내 몸을 쥐어뜯었다. 아버지처럼 물건을 부쉈다가는 집 안에 남아나는 게 없을 것 같아 선택한 차선책이었다.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허벅지를 할퀴고 꼬집고 때리며 망가진 일상을 향한 분노를 삭였다. 그러다 보니 버릇이 되어 어느 순간부터는 조금만 화가 나도 무작정 손톱을 세우게 되었다.

문제는 사랑에 정신 나간 게 어머니만이 아니라는 거였다. 그건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견디지 못하고 방황했고, 회사는 순조롭게 망해 갔다.

가세는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부터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더니 고3이 되던 무렵, 파산 직전에 이르렀다. 그제야 아버지는 정신을 차렸고, 고 의원의 도움을 받아 해외 투자자를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나만 남겨 두고.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밤새 쥐어뜯은 허벅지가 쓰라리다. 바지를 살짝 내려 보니 허벅지에 피딱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옷도 엉망이었다.

화장실에서 핏자국부터 씻어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바람에 중심을 잃고 몸이 앞으로 크게 휘청였다.

“앗……!”

허공을 배회하던 손이 닿은 곳은 침대 캐노피였다. 커튼처럼 드리운 레이스 천을 붙잡았지만 이미 무게 중심은 앞으로 쏠린 뒤였다.

투두둑, 천장에 매달려 있던 천이 떨어지며 나는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천이 머리 위를 덮었다.

“진짜 가지가지 하네.”

실소하며 간신히 밖으로 빠져나와 난감한 얼굴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천장에 고정해 둔 봉에서 빠진 것 같은데 내 키로는 다시 걸 수가 없는 높이였다.

어쩔 수 없지. 한숨을 푹 내쉬며 일단 옷을 갈아입었다.

“여사님, 침대 캐노피가 빠졌어요.”

곧장 이 여사님을 찾아가 상황 설명을 했다.

“오늘 중으로 고치라고 일러둘게요. 다친 데는 없어요?”

“네.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하곤 계단을 내려갔다. 허벅지 때문에 걸음이 온전하진 못하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공부를 하던 도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여사님이 오후에 사람을 보내겠다고 했던 걸 떠올리고 의심 없이 문을 열었다. 어차피 고 의원은 집에 없으니까 딱히 경계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없었는데.

“뭐예요?”

생각지도 못한 등장인물에 눈이 찌푸려졌다.

“안녕?”

사다리와 공구 상자를 든 남자가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나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눈앞에 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키가 어찌나 큰지 가까이에서 마주하니까 고개가 한없이 올라갔다. 그에게서 짙은 담배 냄새가 풍겼다.

“애기 침대 고장 났다며. 고쳐 주러 왔지.”

“그러니까 왜 그쪽이…….”

“달아 준 것도 나니까 수리도 내가 해 줘야지.”

다짜고짜 방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남자를 흘겨보다 복도를 살폈다. 이 남자가 여기 있는 걸 알면 고채원이 쪼르르 달려올 것 같은데 잠잠한 걸 보니 그새 외출을 한 모양이었다.

“친구 만나러 갔어.”

남자가 내 속을 읽은 것처럼 고채원의 방이 있는 방향으로 손가락질을 했다.

“저도 알아요.”

혼자 뜨끔해서 괜히 아는 척 중얼거리며, 방문을 조금 열어 두었다. 저 미친놈과 문을 닫고 한 방에 있으면 안 된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그가 피식 웃으며 침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쩌다가 빠졌어. 애기는 잠버릇이 과격한 편인가.”

“그놈의 애기 소리 좀 집어치워요.”

혹여 바깥에 말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사다리를 설치할 뿐이었다. 그냥 봉에서 빠진 거니까 끼우기만 하면 되겠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애기야, 저것 좀 줘.”

사다리에 올라탄 남자가 캐노피 천을 가리켰다.

“얼른, 애기야.”

애기 소리하지 말랬더니 일부러 더 그렇게 부르는 게 분명하다. 못마땅하게 노려보다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차라리 빨리 끝내고 내보내는 게 낫겠다.

남자를 볼 때마다 그의 알몸과 고채원의 신음이 자꾸 떠올라서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더 최악인 건 어머니의 외도 장면까지 연이어 떠오른다는 거였다.

대충 캐노피를 들어 눈도 마주치지 않고 위로 뻗었다. 그런데 도통 잡지 않아 고개를 들자 그가 빙글대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하는 거예요. 잡아요.”

“더 뻗어야지.”

“장난해요? 닿잖아요.”

쏘아붙이자 그제야 남자가 천을 받았다. 혹여 스칠까 후다닥 손을 떼어 내고 뒤로 물러났다.

받았으면 곧장 걸고 좀 나갔으면 좋겠는데 그는 느긋하게 방 안을 둘러보기까지 했다.

“방은 마음에 들어?”

“무슨 상관인데요.”

“누가 오나 했더니, 애긴 줄 알았으면 더 신경 써서 꾸며 줄걸. 인형 같은 것도 사고.”

설마 이 요란한 방을 저 미친놈이 꾸민 건가. 남자의 서늘한 외모와 분홍색으로 가득한 닭살 돋는 방을 번갈아 보며 인상을 썼다. 생긴 거랑 너무 다른데. 변태인가.

질색하는 내 반응을 즐기듯 그가 소리 내 웃었다.

“공부하는 중이었어?”

“빨리 고치고 나가기나 해요.”

“고채원이 네 이야기 몇 번 하더라. 열아홉 살 서을이. 동생 생긴 거 같아서 좋다던데. 너 귀엽대.”

어쩌라는 거야. 둘이 한 이야기는 둘만 알고 있으면 될 걸 왜 굳이 나에게 전하는지 모르겠다. 자기 애인이 이렇게 다정하다고 자랑하는 건가.

“얼른 고치기나 하시죠?”

내가 팔짱을 끼고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자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손쉽게 캐노피 천을 봉에 건 뒤 사다리에서 뛰어내렸다. 순식간에 원상 복구된 캐노피를 간단히 정리해 준 남자가 사다리에 한쪽 팔을 걸치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애기야.”

“제 이름 안다면서요. 왜 자꾸…….”

“고성하한테 몸 대 줘?”

“……뭐라고요?”

남자가 놀란 나를 가늠하듯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침에 쓰레기통에서 재밌는 걸 주웠거든. 볼래?”

허리를 숙인 남자가 바닥에 내려놓은 공구 상자를 열었다.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그, 그게 왜…….”

공구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건 지난밤 고 의원이 가지고 간 내 티셔츠였다. 당황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가 그것을 집어 드는 순간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는 냄새다. 어머니와 아저씨가 짐승 같은 소리를 내고 난 다음이면 집 안에 진동하던 그 냄새. 고 의원이 내 티셔츠를 가지고 무슨 짓을 했는지 보지 않아도 충분히 상상이 가는 개 같은 흔적.

단숨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 집에 남자라곤 나랑 고성하뿐인데. 내 건 아니고.”

“…….”

“이 티셔츠는 어제 고채원 훔쳐볼 때 애기가 입고 있던 거잖아?”

“그……!”

“이걸 보고 있으니 상상의 나래가 막 펼쳐지더라고.”

혹시라도 대화가 밖으로 새어 나갈까 봐 무작정 방문부터 닫았다.

달칵, 잠금 장치를 걸어 잠그자 남자가 티셔츠를 도로 공구 상자에 넣었다.

“그래. 대답 잘 들었어.”

“아니야……!”

사다리를 정리하던 남자가 나를 돌아봤다.

“그런, 그런 거 아니에요. 나 그런 더러운 짓…… 한 적 없어. 안 해요.”

“그래?”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물론 그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겠지만 내게는 아니었다. 아버지뻘 남자와 지저분하게 노는 발칙한 애 취급 따위는 받고 싶지 않았다. 더러운 시선을 감내하는 거로도 모자라서 그런 취급을 받을 이유는 없다.

“아니라고! 나, 난……. 우욱.”

역한 냄새가 코끝에서 사라지지 않는 바람에 구역질이 밀려들어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더군다나 물끄러미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에 그날 밤 컨테이너에서의 일까지 떠올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무작정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남자가 뒤따라오는 게 느껴졌지만 나가라는 말을 할 겨를도 없이 변기를 붙잡고 구토를 했다.

“뭘까. 이건.”

신물까지 게워 내고 겨우 변기 물을 내리는데, 남자가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손등으로 입을 훔치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구토 때문인지, 충격 때문인지, 아니면 허벅지가 아직 아물지 않았기 때문인지 몸이 휘청거렸다.

남자는 화장실 입구에 서서 팔짱을 낀 채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는 그쪽은…….”

나는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채원 언니한테 몸 대 주는 거예요?”

그가 낮게 웃었다.

“그런데?”

내 쪽에서도 공격하려고 던진 말인데 너무 간단하게 시인해 나도 모르게 얼빠진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몸을 대 준다고? 사귀는 게 아니라?

멍하게 눈을 깜빡이자 그가 흐응, 하고 콧소리를 냈다.

“아아, 고채원이랑 내가 애틋한 사이인 줄 알았구나. 그래서 매일 훔쳐봤어? 언니 오빠 연애하는 거 궁금해서?”

“…….”

“기대를 저버려서 어쩌지. 그런 닭살 돋는 사이 아닌데.”

하지만 내가 보고 들은 고채원의 반응은 달랐다.

그녀는 분명히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굴었다. 나도 아는 걸 나보다 나이도 많고 연애 경험도 많아 보이는 이 남자가 그걸 모를 리가 없는데.

나사 풀린 고채원과 확연히 다른 권태로운 얼굴을 의뭉스레 들여다보다 문득 깨달았다.

아, 설마.

고채원 지금 이 남자한테 놀아나고 있는 거야?

“왜 그런 짓을 해요?”

다짜고짜 따지듯 묻는 말에 남자는 표정 변화 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난 고성하 개새끼거든.”

“…….”

“짖으라면 짖는 편이야.”

“…….”

“뭐, 심심하기도 하고.”

무슨 말인지는 금방 알아들었다.

고채원이 남자를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그는 제 주인 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거절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남자라는 족속은 마음이 없어도 충분히 섹스를 할 수 있는 짐승에 불과하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거다. 고 의원도 마찬가지다. 그가 내게 욕정하는 것은 나를 사랑해서가 아니다. 그저 어린 여자아이의 몸에 발정하는 변태이기 때문이지.

결국 짐승들에게 놀아나고 있는 고채원과 나만 불쌍한 처지였다.

“……내 방에서 나가요.”

조금 전보다 남자가 더 싫어졌다.

차라리 그도 고채원을 사랑하는 거였으면 주제도 모른다고 우습게 여기고 말았을 텐데,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쉽게 몸을 대 준다는 게 심히 역겨웠다.

대체 어른들은 그깟 섹스가 뭐라고 자아를 버려 가며 발정하는 걸까.

어린 내가 있는 집에서 몸을 섞은 어머니와 아저씨, 제 딸보다 어린 나를 두고 흥분하는 고 의원, 밤마다 남자와 밀회를 즐기는 고채원, 짖으란다고 짖는 남자.

하나같이 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문을 막고 서 있는 남자를 밀어내고 화장실에서 빠져나왔다. 당장 나가라는 뜻으로 방문을 열어젖히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개새끼라서 싫구나?”

“네. 더러워요. 그러니까 당장 나가요.”

“알았어, 갈게.”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듯 뻗어 오는 남자의 손을 쳐 냈다. 그가 재밌다는 얼굴로 사다리와 공구 상자를 들었다.

느긋하게 걸음을 옮겨 방문을 나서던 남자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돌아보며 공구 상자를 흔들었다.

“이건 어떡할까?”

나는 핏발 선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쾅, 소리 나게 문을 닫았다.

문밖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흘렀다.

다음 날 아침, 고 의원이 더럽혔던 티셔츠가 깨끗하게 세탁된 채 방문에 걸려 있었다.

“이……!”

나는 터져 나오려는 욕설을 간신히 삼키고, 그것을 방으로 가지고 들어와 문을 걸어 잠갔다. 그러곤 곧장 가위로 찢어 버렸다.

“미친 새끼.”

왜. 그냥 버리면 될 걸. 왜. 굳이 나한테 다시 돌려주는 저의가 뭐야.

산산조각이 난 천 쪼가리를 보고도 속이 풀리지 않아 씩씩대며 쓰레기통을 끌어 왔다.

그때 툭, 쓰레기통 안에서 뭔가가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내가 버리는 건 기껏해야 지우개 가루나 포스트잇 따위가 전부라 이런 소리가 날 수 없다.

“뭐야?”

신경질적으로 뚜껑을 열자마자 보이는 건 뜬금없는 금색 라이터였다.

미간을 구기고 그것을 집어 들었다. 당연히 내 물건이 아니다.

이건 뭔데 내 방 쓰레기통에 들어 있는 거지?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중, 늘 담배를 물고 있던 남자가 떠올랐다. 마뜩잖게 라이터를 이리저리 돌려 보던 나는 바닥 면에 음각으로 새겨진 남자의 이름을 발견하고 쯧, 혀를 찼다.

「대호」

어제 내 방에 들어왔을 때 남자가 버리고 간 모양이다.

가지가지 하네. 이걸 왜 내 방에 버려?

다시 쓰레기통에 던지려다 무심코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천 쪼가리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뚜껑을 열어 라이터를 켜 보았다. 활활, 기세 좋게 불꽃이 피어올랐다.

“…….”

멀쩡한 걸 왜 버리고 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생각이 스쳤다.

천을 모아 쓰레기통에 담았다. 그러곤 공책 한 장을 찢어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타오르는 종이를 쓰레기통 안에 던져 넣자 천이 오그라들며 같이 타기 시작했다.

붉은 불길을 보고 있자니 묘한 쾌감이 일었다. 허벅지를 쥐어뜯을 때와 비슷한 카타르시스. 그것에 사로잡혀 불꽃이 스스로 사그라들 때까지 한참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섬유의 형태를 띠지 않는 새까만 흔적 위로 라이터를 던지려다 손을 거두었다.

어차피 버린 거라면, 이건 내가 가지자. 혹시 모르잖아. 오늘처럼 사용할 일이 또 있을지.

주머니에 라이터를 집어넣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방 안에 감도는 탄내를 날려 버리기 위해서였다. 이른 아침의 맑은 공기가 방 안으로 침투해 매캐한 냄새를 정화해 주었다.

그런대로 개운했다.

라이터가 손에 들어온 뒤로 또 다른 버릇이 생겼다.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니며 심기가 불편할 때마다 뚜껑을 달칵거리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이었다.

공부하다가도 문제가 잘 풀리지 않아 답답하면 손바닥에 굴리며 뚜껑을 열었다가 젖히고, 식사 자리에서도 나도 모르게 주머니 안으로 손이 가곤 했다.

여행을 사흘 앞두고 고채원은 요즘 준비를 하느라 바빠 보였다. 일주일짜리 러시아 여행에 뭐가 그렇게 준비할 게 많은지 매일같이 그녀의 방으로 새로운 물건들이 배달되었다.

오늘도 또 고채원의 택배가 왔는지 여사님이 그녀의 방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이터 뚜껑을 여닫으며 수학 문제를 풀고 있는데, 바깥에서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니 누군가 내 방문을 살짝 두드렸다. 탁, 라이터 뚜껑을 세게 닫았다.

“서을아, 언니 잠깐 들어가도 돼?”

문밖에서 고채원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방해하지 않겠답시고 좀처럼 이쪽으로는 발길 한번 주지 않더니, 무슨 일일까. 그런 배려보단 방에서 연주나 그만하는 편이 나를 도와주는 길이지만.

나는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고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야?”

“잠깐이면 돼.”

하늘색 민소매 시폰 원피스를 입은 고채원이 생긋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언뜻언뜻 속이 비치지만 야하기보다는 청순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신기할 정도로 낮과 밤이 다르다. 그때 내가 들었던 목소리에는 색이 가득 묻어 있었는데 말이다. 고채원이 가볍게 몸을 흔들자 옷감이 부드럽게 물결쳤다.

“언니 옷 사면서 서을이 것도 같이 샀어.”

그녀가 내게 내민 것은 지금 본인이 입고 있는 것과 같은 원피스였다. 나는 얼떨떨하게 고채원과 옷을 번갈아 보았다.

“나 동생이 있으면 같이 옷 나눠 입고 싶었거든. 그렇지만 너한테 입던 걸 줄 수는 없으니까 같은 거로 샀어.”

“아…….”

“마음에 안 들어? 괜히 똑같은 거로 샀나…….”

커다란 눈에 걱정이 맺혔다. 우물쭈물하며 자신의 원피스를 만지작대는 모습이 지나치게 사랑스러웠다.

남자의 심정이 대충 이해된다. 이런 여자가 저 좋다고 다가오면 거절할 수 없는 게 당연하지. 같은 여자인 나조차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으니 말이다.

“아니야. 마음에 들어. 고마워, 언니. 잘 입을게.”

“정말? 수능 끝나고, 언니 한국 오면 이거 입고 같이 놀러 가자.”

“응. 그러자.”

해맑게 웃는 고채원에게 덩달아 웃어 주었다.

하지만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미안하지만, 이 집을 나간 뒤엔 그녀를 만나지 않을 거다. 아무리 고채원이 착하고 좋은 언니라고 해도, 그 빌어먹을 고 의원의 딸인 이상 인연을 이어 가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고채원이 준 원피스를 품에 안았다. 그녀의 다정함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크게 달갑지 않았다. 마치 고 의원이 저지르는 잘못을 그녀가 대신 회개하는 것처럼 느껴져 배알이 뒤틀렸다.

“그런데 언니, 어깨는 왜 그래?”

“응?”

내 손길을 따라 왼쪽 어깨를 내려다본 고채원이 동그랗게 남은 붉은 자국을 보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아…… 이게…….”

사실 이렇게 당황할 줄 모르고 괜히 심술을 부린 건데, 이제 보니 대범한 게 아니라 자국이 있는 걸 몰라서 내놓고 다닌 모양이었다. 손목에 난 자국은 제 눈에도 보여서 반창고를 붙였는데 목이나 어깨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나 보다.

마음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어쩔 줄 몰라 하는 고채원을 달래 주기 위해 순진한 목소리를 냈다.

“모기 물렸나 보다. 창문 잘 닫고 자. 요즘 모기 많아.”

“으, 응…… 그래야겠네. 고마워, 서을아.”

그녀가 눈에 띄게 안심하며 미소를 지었다.

공부 열심히 하라며 내 어깨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곤 하늘하늘한 걸음으로 방을 나가는 고채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짧은 한숨을 뱉었다.

받은 옷을 옷장에 넣어 두고 책상에 앉았지만,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아 다시 몸을 일으켰다.

잠깐 바람이나 쐬어야겠다.

“어디 가요?”

방문을 열고 나가자 이 여사님이 과일 접시를 들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양손에 접시 두 개를 들고 있는 걸 보니 각각 고채원과 내 몫인 것 같았다.

“볼펜을 다 써서요. 사 오려고요.”

“곧 장보러 갈 건데, 가는 김에 사다 줄게요. 어떤 거예요?”

“아니에요. 산책도 할 겸 다녀올게요.”

더 붙잡을까 싶어 적당히 둘러대고 얼른 밖으로 나갔다.

억지로 성당에 끌려갈 때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시간을 방 안에서 보내고, 그나마 나간다 해도 마당에서 산책하는 게 전부였기에 오랜만에 마주한 대문 밖 풍경이 새삼스러웠다. 담벼락을 따라 걸음을 옮기다 보니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도 같았다.

“안녕, 애기야.”

“…….”

맞은편에서 터덜터덜 걸어오는 남자와 마주치기 전까지는.

“공부 안 하고 어디 놀러 가.”

남자가 장난기 섞인 얼굴로 내 앞에 멈춰 섰다. 나는 모르는 척 몸을 옆으로 움직여 그를 지나쳤다. 하지만 따라오는 발소리에 다시 걸음을 뚝 멈췄다.

“후…….”

짜증 섞인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돌리자 남자가 뻔뻔한 얼굴로 눈썹을 들어 올렸다. 가슴팍에 영어 로고가 박힌 박스 티와 청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신은 차림을 보니 꼭 평범한 20대 같았다. 저 모습만 보면 아무도 그가 고채원에게 몸을 대 주는 고 의원네 개새끼인 걸 모를 거다.

“왜 따라와요?”

“심심해서.”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

“너도 심심해 보여서. 동행해 줄게.”

“필요 없어요. 가던 길이나 가세요. 채원 언니 불러서 뒹굴든가.”

“애기가 못 하는 말이 없네.”

남자가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얼른 가자는 듯 고갯짓을 했다.

그 모습을 잠시 노려보다 일부러 보폭을 크게 해서 앞서 나갔다.

“바빠? 천천히 가.”

“따라오지 마요.”

“그러다 넘어진다.”

거의 뛰다시피 걷는 나와 달리 그는 여유롭게 발을 놀렸다. 쓸데없이 다리만 길어서는.

씩씩대며 차이가 나도 한참 나는 남자와 내 다리를 내려다보다 포기하고 속도를 늦췄다. 힘들어서 못해 먹겠다. 잠깐 빠르게 걸었다고 숨이 차올라서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뭘 했다고 힘들어해.”

“아, 귀찮아.”

혼잣말처럼 내뱉었지만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는 내 건방진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말 계속 따라붙을 작정인가?

미리 알아 둔 문구점은 동네를 완전히 빠져나가면 나오는 사거리에 있다. 이 여사님 말로는 걸어서 20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

“그만 따라와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무느라 내 말을 못 들었는지 남자가 무심하게 나를 돌아봤다.

“불 있어?”

“……있겠어요?”

“농담이야.”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주머니를 뒤적이다 담배를 바닥에 뱉었다. 솔직히 뜨끔했다. 주머니에 남자의 이름이 새겨진 라이터가 있기 때문이었다.

라이터가 없어서 불을 못 붙이는 걸 보니 왠지 그걸 버린 게 아니라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돌려줘야 맞는데, 내가 남자의 라이터를 가지고 있는 걸 알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 모르는 척 말을 돌렸다.

“그쪽은 대체 뭐 하는 사람이에요?”

“말했잖아. 고성하 개새끼라고.”

“그러니까 그게 뭔데요. 경호원?”

“그쪽으론 전문 인력을 쓰지.”

그가 하품을 하며 양손으로 자신의 뒷머리를 받쳤다. 시종일관 느긋한 태도가 재수 없다.

“아무리 오빠가 멋있어도 너무 궁금해하지 마.”

“누가 멋있대요?”

어이없어하는 나를 향해 그가 즐거운 웃음을 흘렸다.

“왜 자꾸 저한테 장난쳐요?”

“재밌잖아.”

“저는 재미없어요.”

“그래? 그럼 좀 더 노력해 볼게. 같이 즐거워야지.”

“됐다고요. 그쪽이랑 하하 호호 할 생각 없거든요?”

“티셔츠는 어쨌어?”

“…….”

그가 일순 화제를 불쾌한 쪽으로 돌렸다. 얼굴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반응하지 말자. 무시해. 모르는 척해.

그러나 나는 이미 남자의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그래. 솔직히 말하면 그를 보자마자 묻고 싶었다.

“그거 왜 다시 돌려줬어요?”

“네 옷이니까.”

“그냥 버리면 될 걸, 왜 보란 듯이 문 앞에 걸어 뒀냐고요.”

목소리가 잘게 떨리는 나와 달리 남자의 얼굴은 여상했다.

“말했잖아. 네 옷이니까. 남의 물건을 마음대로 버릴 수 있나.”

“나 엿 먹이려고 그런 건 아니고요?”

남자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내가 왜 널 엿 먹여?”

“내가 몸 대 준다고 생각하죠? 근데 아니라고 하니까 우습게 여긴 거죠? 그래서 보란 듯이……. 어쩌면 그 인간이 볼지도 모르는데, 그걸 문에 걸어 둔 거잖아요.”

“몸 대 주는 거 아니라며.”

“네. 아니에요.”

“그런데 내가 왜.”

“안 믿잖아요.”

“믿어.”

“웃기고 있네. 그쪽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모를 줄 알아요?”

남자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 태평한 태도에 순간 욱하는 감정이 치솟았다.

“싸구려로 보고 있잖아. 고작 열아홉 살짜리가 아빠뻘 되는 인간한테 다리나 벌린다고, 한심하다고 생각하잖아. 밤마다 고채원 훔쳐보면서 야한 상상하는 발랑 까진 애라고 생각하잖아!”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하다 싶을 만큼 목소리가 격양되었다. 덜덜 떨리는 손을 세게 쥐었다. 남자의 앞에서 라이터를 꺼낼 수도, 허벅지를 쥐어뜯을 수도 없으니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이야.”

문득 그가 감탄사를 뱉었다.

“상상력이 풍부하네. 애기라 그런가.”

내 발악을 우습게 여기는 대답이었다. 남자가 씩씩대는 내 머리 위로 손바닥을 얹었다. 커다란 손바닥이 머리통 전체를 뒤덮었다. 진정하라는 듯 가볍게 토닥이는 남자의 손을 밀어내려는 찰나,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한데, 나 너한테 그렇게까지 관심 있진 않아.”

손이 뚝 멎었다.

“굳이 어떤 애인지 알고 싶은 만큼은 아니라서 생각 안 해 봤어.”

“…….”

“고성하랑 별일 없댔으니까 그런가 보다 했고, 고채원 훔쳐보는 건 네 자유 아닌가. 내가 알 바 아니지.”

“…….”

“뭐, 아직은 그래.”

남자가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그거 알아? 생각보다 남들은 너한테 관심 없어.”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아, 애기 쪽팔리겠다.”

그 말대로였다. 진짜 쪽팔려 죽을 것 같았다. 아니, 그걸 넘어서서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 분한 마음에 입술을 앙다물고 노려보자 빙글빙글 웃던 남자가 문득 혀를 찼다.

“울어?”

기다렸다는 듯이 눈물이 왈칵 터졌다.

“내가 울 만큼 나쁜 말을 했나.”

그에게 우는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단순히 그 말 때문이 아니다.

남자가 얄밉기도 하고, 쪽팔리기도 하고, 혼자 날을 세운 스스로가 우습기도 하고, 고 의원이 증오스럽고, 고채원이 부럽고, 아버지가 보고 싶고, 외롭고, 무서운…….

고 의원의 집에 온 뒤로 나를 둘러싼 모든 게 뒤섞인,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이었다.

“우는 걸 보니까 마음이 좋지 않네. 미안, 미안. 앞으론 애기한테 관심 좀 가져 볼게.”

“필요 없어. 꺼져요. 나도 그쪽 싫어.”

“난 싫다고 하진 않았는데.”

“꺼지라고.”

하지만 그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무작정 눈앞의 남자만 원망했다. 그게 가장 쉽고 간단하니까.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흐느끼며 노려보았다.

“따라오지 마요.”

등을 돌리고 무작정 걸었다. 서러운 울음이 연방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아주 최악은 아닌지, 남자는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다만, 시선은 여전히 느껴졌다.

동네를 완전히 벗어나고서야 남자의 시야에서 해방될 수 있었고, 나는 곧장 보이는 벤치에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노을이 내려앉을 즈음 고채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을아, 어디야? 늦었는데 왜 아직 안 와. 걱정되게.]

“미안해, 언니. 우연히 친구 만나서 이야기하느라……. 지금 가는 중이야.”

[얼른 와. 아버지랑 어머니도 걱정하고 계셔.]

“응. 갈게.”

결국 목적이었던 볼펜은 사지 못한 채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래 울어서 눈가가 짓무른 듯 쓰라렸다. 이대로 들어가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 뭐라고 둘러대지. 공부하는 게 힘들었다고 할까. 손가락으로 눈두덩을 문지르며 한 발 떼는 순간이었다.

“이제 갈까?”

깜짝 놀라서 몸이 옆으로 휘청였다. 바로 옆 벤치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가 등받이에 양팔을 걸친 채 다리를 꼬고 앉아서 느긋하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그를 멍청하게 바라봤다.

“너 되게 잘 운다. 꼬박 두 시간을 울었어.”

“…….”

“귀여운 얼굴이 퉁퉁 부었네.”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던 남자가 의문 담긴 내 표정에 설명을 덧붙였다.

“말했잖아. 관심 주겠다고. 그래서 옆에 있어 봤어.”

계속 보고 있었다는 건가.

한마디 하려다 관두고 지나쳤다. 그의 말대로 내내 울었더니 말씨름할 힘도 없고, 무엇보다 여전히 쪽팔렸다.

남자가 쫓아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터덜터덜, 내 걸음에 맞춰 느리게 끌리는 슬리퍼 소리를 무시하고 앞만 보고 걸었다.

고 의원의 집은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언제 올라가나 싶어 한숨을 푹 뱉는 찰나, 남자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업어 줄까?”

“…….”

“이러다 쓰러지겠는데.”

무슨 상관이야. 무시하고 천천히 오르막을 오르는데 등 뒤로 남자의 웃음소리가 흘렀다.

“애기야.”

“…….”

“오빠 힘 세.”

“…….”

“금방 집 앞에 내려 줄게. 이리 와.”

“아, 됐다고요.”

도저히 못 참고 쏘아붙였다.

“왜 자꾸 귀찮게 해요?”

“귀엽긴.”

진짜 말이 안 통한다.

“그놈의 애기 소리도 그만해요. 내 이름 안다면서요. 왜 자꾸 변태같이 불러요.”

“진짜 변태는 내가 아니라 고성하 아닌가. 난 아직 한 게 없는데.”

“…….”

왜 자꾸 잊을 만하면 그 이야기를 상기시키는 걸까. 내가 수치스러워할 건 전혀 생각하지 않는 건가.

하긴, 내게 관심이 없다고 했으니 그런 세심한 배려까지 기대하면 안 되겠지.

“주인님이 변태 새끼라니. 개새끼 입장이 곤란하게 됐어.”

문득 남자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까지 수준 떨어지잖아.”

“별로 수준 높아 보이지도 않는데.”

들으라는 식으로 중얼거리자 그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기울여 나를 내려다보았다. 모른 척 앞만 보고 걷는데 남자가 내 옆에 나란히 따라붙었다. 일부러 빨리 걸어도 여유롭게 따라오고, 느리게 걸어도 발걸음을 맞추니 성질이 나지 않곤 배길 수가 없었다.

“고성하 개새끼는 뭐 하는 사람이에요.”

“…….”

“참고로 그쪽이 멋있어서 궁금한 게 아니라, 하는 짓을 보면 짐작이 안 가서 묻는 거예요.”

“뒤끝 있네.”

잘게 웃던 남자가 눈 깜짝할 사이에 나를 어깨에 들쳐 멨다. 문신이 새겨져 있었던 오른쪽 어깨였다. 갑자기 시야가 뒤집혀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뭐 하는 거예요! 내려요!”

“고성하의 개새끼는 말이야.”

“야!”

“시키면 뭐든 해.”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물으려는 순간.

“오빠……. 서을이?”

등 뒤로 가느다란 고채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움찔, 내 몸에 힘이 들어가든 말든 남자는 상관없다는 듯 걸음을 옮기더니 원하는 장소에 도달하고 나서야 나를 내려 주었다.

두 발로 땅을 딛고 고개를 돌리자 대문 앞에 서 있던 고채원이 눈을 크게 뜨고 나와 남자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여전히 하늘하늘한, 예쁜 원피스 차림이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그녀의 눈동자가 남자와 나를 번갈아 담더니 이내 붉어지기 시작했다.

“둘이…… 뭐야?”

“뭐가.”

“왜 같이 와?”

“만났어.”

애처롭게 떨리는 고채원의 목소리와 달리 남자는 태연했다. 역시나 한눈으로 봐도 감정 차이가 확연히 드러났다.

고채원의 눈길이 나를 향했다. 뭔가를 상상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생각하는 그런 게 절대 아니라고, 우연히 마주쳤을 뿐이라고 말하려던 때였다.

“들어가, 애기야.”

나는 미쳤냐는 눈으로 그를 돌아봤다. 고채원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알면서 왜 하필 지금 그딴 식으로 부르는 거야.

친하지도 않으면서 난데없이 친한 척하는 그를 책망하듯 노려보자, 남자가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도로 왔던 길을 돌아가는 그에게 어디 가냐고 물을 정신도 없었다.

“오빠……! 잠깐만!”

곧장 그를 뒤쫓아 가는 고채원에게 밀쳐진 탓이었다. 일부러 민 건 아니고 급하게 쫓아가느라 부딪친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고채원은 그만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나는 담벼락을 짚고 서서 길 아래로 내려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고채원이 따라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발걸음을 늦춰 주지 않는 남자의 커다란 등과, 원피스 자락을 흩날리며 손을 뻗는 고채원의 작은 몸을 번갈아 보며 한숨을 뱉었다.

불쌍한 고채원. 왜 하필 저런 남자한테 빠진 걸까.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면 얼마나 상처받을지, 눈에 훤히 보였다. 부디 그녀가 하루빨리 정신을 차리길 기도하며 나는 반쯤 열려 있는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돌아가는 대신 노을빛이 스며들어 붉게 물든 마당을 가로질러 연못으로 향했다. 연못가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물 안으로 손을 넣어 미지근한 물을 휘저으니 근처에 있던 잉어들이 전부 도망갔다. 저번에 남자가 손을 넣었을 땐 도망가지 않더니. 섭섭한 마음마저 들었다.

“너희도 내가 우습냐.”

쯧, 혀를 차는데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채원이었다. 끝끝내 남자를 잡지 못한 건지 어두운 얼굴로 마당에 들어서던 그녀가 나를 발견하곤 급히 다가왔다.

“서을아, 언니랑 이야기 좀 해.”

고채원의 가쁜 숨소리에서 격양된 감정이 묻어났다. 나는 물에서 손을 거두고 몸을 일으켰다.

가까이에서 보니 그녀는 울먹이고 있었다. 붉게 물든 눈과 코, 새하얗게 질린 얼굴. 예쁜 사람은 울어도 예쁘구나. 문득 지금 내 얼굴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얼마나 비교될까.

“아까 왜 그렇게…… 왔어?”

“…….”

“대호 오빠 품에 안겨서 왔잖아. 언니가 궁금해서…… 궁금해서 그래. 두 사람 어떻게 알아? 만난 적 있어? 집에서도?”

고채원의 말이 빨라졌다. 호흡도 짧다. 초조해 보이는 모습에 덩달아 내 입술도 메말랐다. 나는 물에 젖은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 방 캐노피 고쳐 주러 왔을 때 한 번 봤어.”

사실은 늦은 밤 그녀를 몰래 쫓아갔다가 남자의 알몸까지 보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방금은 오는 길에 우연히 만났는데, 내가 절뚝이는 거 보고 부축해 주신 거야. 넘어져서 다리가 좀…… 아팠거든.”

“그래……?”

고채원의 눈이 재빠르게 내 다리를 훑었다. 안타깝게도 무릎은 멀쩡했다. 눈을 찌푸리는 그녀에게 오른쪽 반바지 밑단을 들어 슬쩍 보여 주었다. 피멍이 든 허벅지를 본 고채원이 놀란 얼굴을 했다.

“친구랑 카페에서 이야기하다가 넘어지면서 의자에 부딪혔어.”

“……어떡해. 괜찮아?”

솔직히 안 믿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세히 보면 넘어져서 생긴 상처가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 수 있으니까.

하지만 노을을 등져 상처가 또렷이 드러나지 않을뿐더러, 고채원이 흥분한 상태라 넘어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마 내 말을 믿고 싶은 그녀의 심정도 한몫했을 테고.

“언니는 너 걱정돼서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네가 그렇게 오니까, 놀라서…….”

“응. 미안해.”

“그, 그 사람이랑은 웬만하면 얽히지 마.”

고채원이 애써 표정을 풀며 말했다.

“무서운 사람이니까 얽혀서 좋을 거 없어. 넌 아직 어리니까…….”

“뭐 하는 사람인데?”

“…….”

망설이던 그녀가 내게로 한 걸음 다가와 조그맣게 속삭였다.

“아버지 뒤에서 일하는 깡패야.”

놀라서 눈을 크게 뜨자 그녀가 비밀이라는 듯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그러니까 마주치면 피해 다녀. 알았지?”

“…….”

“응? 알았지, 서을아?”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고채원이 경직되어 있던 얼굴 근육을 풀었다.

“먼저 들어가. 난 잠깐 바람 좀 쐬고 들어갈게.”

“응…….”

나는 본의 아니게 알게 된 남자의 실체에 반쯤 넋이 나간 채로 대답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 근처 선반을 정리하고 있던 이 여사님이 깜짝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서을 양, 얼굴이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잠깐 잊고 있던 내 몰골이 떠올랐다.

울어서 엉망이 되어 있을 얼굴을 손등으로 가리며 어색하게 웃는데 문득 고채원이 내 얼굴을 보고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상냥한 그녀라면 분명히 걱정할 거라고 생각해서 변명거리도 생각해 뒀는데 쓸 겨를도 없었다.

“그거 알아? 생각보다 남들은 너한테 관심 없어.”

남자의 말이 귓가에 스쳤다. 아, 진짜 쪽팔린다.

“저녁 준비됐어요. 의원님과 사모님은 식사하고 계세요. 서을 양도 얼른 가서 식사해요. 배고프겠다.”

“전 입맛이 없어서 올라갈게요. 감사합니다.”

이 기분에 고 의원의 면상까지 보고 싶지 않아 거절했다. 이 여사님이 내 눈두덩을 살피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안쓰러워하는 기색이었다. 아버지 사업이 망해 졸지에 남의 집에 얹혀사는 내 신세가 설득력 있었나 보다.

거실을 가로지르고 2층 계단을 오르며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차가운 금속 라이터를 움켜쥐고 뚜껑을 탁, 탁, 소리 내 닫았다. 불현듯 옷을 활활 태우던 불꽃이 눈앞을 스쳤다. 뭔가를 태우고 싶다는 위험한 충동이 치솟아 급히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문을 닫자마자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타닥, 엄지를 굴려 라이터를 켜자 붉고 푸른 불꽃이 아른거렸다. 나도 모르게 태울 것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미쳤어, 진서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탁, 신경질적으로 라이터 뚜껑을 닫고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대신 허벅지로 손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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