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어머니는 떠났고, 아버지는 망했다.
그리고 나는…… 거의 버려지는 중이다.
“서을아, 아빠 금방 올 거야.”
아버지가 나를 버렸다는 말은 아니다.
모든 걸 잃고 좌절하는 아버지를 목도하던 날, 어쩌면 그도 나를 떠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지레 겁을 먹었으나 아버지는 결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이 순간, 차라리 버림받아 보육 시설 같은 데 맡겨지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걱정하지 말게, 진 사장. 우리가 어떤 사이인가. 자네 딸은 내가 책임지고 돌보겠네.”
이렇게 고 의원 앞에 놓이게 될 줄 알았다면 말이다.
“감사합니다, 대부님.”
국회의원 고성하. 그는 내년에 있을 대선의 유력한 후보로 손꼽히는 정치인이다.
중소 건설회사 사장인 아버지와 그의 인연은 종교가 맺어 주었다.
아버지는 인맥을 넓히겠다는 일념 하나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고 의원과 같은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고, 몇 년간 신앙생활을 지속하더니 기어이 그를 자신의 대부로 만들어 냈다.
아버지와 함께 성당을 다녔던 나 역시 고 의원과 자주 마주칠 수밖에 없었는데, 그는 매번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용돈 따위를 쥐여 주곤 했다.
5년 넘게 매주 꼬박꼬박 성당을 나가긴 했으나, 단언컨대 아버지는 신실한 신자는 아니었다. 나는 아버지가 성당이 아닌 곳에서 기도를 하거나 하느님을 찾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거실 벽면에 십자가가 걸려 있긴 했지만, 그건 가끔 오는 손님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지,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대신 그 위에 먼지가 쌓이지 않게 내게 관리를 맡겼는데, 그건 십자가를 소중히 여겨서가 아니라 그저 아버지가 깔끔한 성격이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나는 매일 십자가를 손에 쥐어야 했다. 그런 김에 기도를 하기도 했지만, 딱히 효과는 없었다.
“서을이는 요즘 성당에 잘 나오지 않는다며. 공부도 중요하지만, 아저씨랑은 주에 한 번은 가도록 하자.”
사실 나도 아버지 손에 이끌려 갔을 뿐이지 그다지 신실하진 못했다. 최근에는 수능을 핑계 삼아 주말 미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 기도는 들어주지 않는 걸까?
“제가 한동안 신경을 못 써서 그렇습니다. 서을이도 늘 성당에 가고 싶어 했어요. 대부님 댁에 가선 성당 꼬박꼬박 나가야 해, 서을아. 알았지?”
“……응.”
고 의원에게 책잡히고 싶지 않은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라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얌전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고 의원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을이는 갈수록 더 예뻐지는구나.”
“감사합니다.”
“대학은 어디를 목표로 두고 있니.”
“한국대 건축학과요. 나중에 아버지랑 같이 일하고 싶어요.”
내 대답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아버지의 회사인 우완건설은 최근 부도 위기를 맞았고, 그게 지금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니까.
고 의원이 착잡한 얼굴로 사케를 마시는 아버지의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진 사장, 부러워. 딸이 아주 든든하네.”
“우리 서을이야 늘 똘똘하죠. 제가 못나서 그렇지.”
“그런 소리 말게. 고비는 늘 있는 법이야. 그걸 이겨 내기 위해 가는 거 아닌가.”
나는 테이블에 놓인 이름 모를 생선 회만 바라보았다. 나도 아버지도 회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건 철저히 고 의원의 입맛에 맞춘 식사 자리였다.
대충 샐러드 따위나 깨작대며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는데, 무심코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흠…….”
또 내 가슴 언저리를 훔쳐보고 있던 고 의원이 아무 일 없었던 양 헛기침을 하며 술잔을 들었다. 나는 입 안 여린 살을 깨물 뿐이었다. 일부러 노출이 없는 검은 블라우스를 입었는데도 여전하다. 망할 인간. 눈알을 파 버리고 싶다.
아무것도 모르고 허허 웃으며 술이나 마시는 아버지와 고 의원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하지만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니 나도 모르게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나까지 당신을 원망한다는 걸 알면 아버지는 정말 무너질지도 모른다.
“되도록 빨리 우리 집으로 보내게. 그래야 서을이도 새 환경에 금방 적응하지.”
고 의원의 주름진 얼굴이 징그럽게 구겨졌다. 항간에선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는 그의 웃는 얼굴을 호남형이라고 칭했지만, 내 눈에는 괴물 같을 뿐이었다.
입맛이 뚝 떨어져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지금이라도 말해야 할까. 고 의원이 나를 볼 때마다 어떤 상상을 하는지 알고 있다고. 그래서 그의 집에 가고 싶지 않다고. 무슨 짓을 당할지 몰라서 무섭다고.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부님.”
하지만 구세주라도 만난 것 같은 아버지의 표정에 도저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하느님을 만나도 저런 얼굴일 수는 없을 거다.
허벅지 위에 올려 둔 손이 옅게 떨렸다. 주먹을 쥐어도 떨림은 멎지 않았다.
나는 고 의원의 시선에 발가벗겨진 채 입 안 여린 살을 깨물었다.
눈앞이 막막했다.
캐리어와 함께 새까만 철문 앞에 멈춰 섰다.
천천히 고개를 드니 문 위에 걸려 있는 풍경이 보였다. 바람 한 점 없는 한여름이라 굳은 듯 멈춰 있는 풍경 옆으로는 CCTV도 달려 있었다.
햇살이 등에 내리쬐었다. 목덜미에 송골송골 맺혀 드는 땀이 느껴졌으나 섣불리 초인종을 누르지는 못했다.
들어가고 싶지 않다. 차라리 도망가서 혼자 살까. 해 본 적은 없지만 고등학생이라도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아빠가 돌아올 때까지 어떻게든 버틸 수 있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지만, 이내 멈춰야 했다.
“아빠 올 때까지 말 잘 듣고 얌전히 있어.”
아버지의 목소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 싫다, 정말.
딩동─.
고민 끝에 초인종을 눌렀다.
이 집에는 고 의원과 그의 아내, 그리고 나보다 네 살 많은 외동딸이 함께 산다.
설마 제 딸과 아내가 있는 집에서 개 같은 짓거리를 하지는 않겠지. 그렇게 사랑하는 하느님이 보고 계신데 죄를 짓지는 않겠지. 그런 실낱같은 믿음을 가져 본다.
[누구세요?]
인터폰 너머로 중년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 의원의 아내는 아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것보다 훨씬 더 높고 카랑카랑했다. 성당에서 마주칠 때마다 그런 목소리로 크게 인사하는 아내를 남몰래 창피해하는 고 의원을 몇 번 본 적 있어 기억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진서을이라고 합니다.”
[어머, 들어오세요.]
집안의 관리인인 것 같은 여자가 내 이야기를 들었다는 뉘앙스로 말하며 금방 문을 열어 주었다.
철컥, 소리를 내며 대문이 무겁게 열렸다.
안으로 발을 들이는 내 마음은 그것보다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고 의원의 집은 마당이 아주 넓었다. 특히 눈에 띄는 건 마당 중앙에 놓인 인공 연못과 분수대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안에는 내 팔뚝보다 훨씬 큰 잉어들이 가득했다.
느긋하게 수영하는 잉어를 힐끔 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세요. 의원님께 이야기 들었어요.”
예상대로 나를 맞이하는 건 관리인 아주머니였다. 그녀는 자신을 이 여사라고 부르면 된다고 말하며, 2층에 있는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서을 양이 쓸 방이에요. 의원님이 신경 많이 쓰라고 일러 두셔서 이 방 꾸미는 데만 며칠이 걸렸지 뭐예요. 마음에 들어요?”
확실히 신경 쓴 티는 많이 났다. 특히 분홍색 레이스 천으로 된 캐노피 침대가 아주 가관이었다.
누굴 어린애로 보나.
못마땅하게 둘러보다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잠깐 머무는 건데 내 취향 따위가 뭐가 중요할까. 공부할 책상과 잠잘 침대만 있으면 충분하다. 다행히 둘 다 아주 크고 편해 보여 그것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그럼 짐 두고 쉬어요. 배고프면 식사 준비할까요?”
“아니에요. 먹고 왔어요.”
사실 어제저녁부터 굶었지만, 입맛이 없어서 거절했다.
부드럽게 문을 닫고 나가는 이 여사님을 바라보다 문고리부터 확인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잠금 장치는 멀쩡했다. 곧장 문을 걸어 잠갔다.
어찌 됐든 당분간 지내야 하는 방이니 어디에 뭐가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 할 것 같아 둘러보기 시작했다.
책상에는 수능 대비 문제집과 필기구가 가득했고, 옷장에는 유행하는 옷이 여럿 걸려 있었다. 전부 새거였다.
오른쪽으로는 화장실이 따로 있었는데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다. 웬만하면 방 안에만 있을 수 있겠다.
방 구경은 그걸로 끝내고 짐을 풀었다. 한 달 뒤면 개학이니 그때 입을 교복을 꺼내 옷장에 걸어 두고 잠옷, 속옷 같은 것도 서랍 안에 잘 숨겨 두었다.
그리고 곧장 책상 앞에 앉았다.
대한민국 수험생은 갑자기 들이닥친 불행에 괴로워할 여유 따위 없다. 특히 나처럼 하루빨리 여기서 벗어나야 하는 사람은 더더욱.
길어도 수능까지다.
수능만 치면 여기서 나가는 거야. 괜히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가 수능을 망치면 더 최악의 상황이 될지 모르니까 그때까지만 버티자.
굳게 다짐하며 펜을 쥐었다.
고 의원 집에서 처음 갖는 저녁 식사 자리는 천주교 신자들답게 성호경을 긋는 것으로 시작했다.
나도 대충 기도하는 척을 하며 고 의원의 가족들을 둘러보았다. 상석에 앉은 고 의원의 왼쪽으로 그의 아내와 둘의 딸인 고채원이 나란히 앉았고, 나는 고채원의 맞은편에 앉았다.
“서을아, 불편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하렴. 아저씨에게 해도 되고, 아저씨가 불편하면 채원이나 집사람에게 해도 돼.”
기도가 끝나고 수저를 들며 고 의원이 말했다. 그에 고채원이 예쁘게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래. 서을아. 부담 갖지 마. 언니랑 몇 번 본 적 있는데, 기억하지?”
고채원과는 어릴 때 성당에서 몇 번 본 게 전부였다.
플루트를 전공한 그녀가 프랑스로 유학을 간 뒤로는 한동안 보지 못했는데, 이번에 여름 방학을 맞아 한국에 왔다고 미리 전해 들었다.
어릴 때도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성인이 된 고채원은 대단한 미인이었다.
새하얀 피부와 가늘고 긴 머리카락, 특히 웃을 때 휘어지는 눈매에 수많은 남자가 휘둘렸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고 의원은 하나밖에 없는 딸을 워낙 아껴서 언론 노출을 일절 하지 않기로 유명한데 그 점은 칭찬할 만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저런 외모, 집안, 성품을 가진 고채원의 인생이 얼마나 피곤해졌을지 눈에 훤했다. 온갖 잔챙이들이 달라붙어 콩고물 떨어지기를 바랐겠지.
남자도 아닌데 홀린 듯 바라보다 무심코 고채원의 목으로 시선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어?
나는 잠깐 눈을 의심했다.
고채원의 새하얀 목에 이질적인 붉은 자국이 나 있었다. 긴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어서 여태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꽤 선명했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청순한 고채원의 얼굴과 그것을 번갈아 보았다.
아무리 봐도 저건 키스 마크…….
“서을아, 입맛이 없니?”
고 의원의 아내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톤이 높아서 유독 날카로운 목소리에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고 의원의 눈매가 살짝 찡그려졌다.
“아니에요. 맛있어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채원의 키스 마크에서 시선을 거두며 대답했다. 예의 바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주머니가 하하 호호 웃으며 내 쪽으로 반찬을 더 밀어 주었다.
하지만 선뜻 손이 가지는 않았다. 입맛이 뚝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저녁 먹고 같이 영화 볼래? 언니 방에 DVD 많아.”
고채원이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넘기며 물었다. 그 탓에 다시 시선이 키스 마크로 향했다.
그래. 스물세 살이면 남자랑 섹스를 할 수도 있지. 그게 뭐 별건가. 저렇게 예쁜데 당연히 남자친구가 있을 거다.
“…….”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왜 저렇게 칠칠치 못하게 붉은 자국을 떡하니 드러내고 있는 거야. 섹스한 거 티 내고 싶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그걸 넘어서서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얘는. 서을이 수험생이잖아. 공부하느라 바빠. 영화는 엄마랑 봐.”
“그런가……. 수험생이라도 가끔은 쉬면 좋을 텐데.”
“다음에 같이 봐요, 언니.”
“편하게 반말해도 돼. 네 살 차이인데 존댓말은.”
내내 나를 훑어보는 고 의원의 지저분한 시선과 아주머니의 커다란 목소리, 그리고 고채원의 키스 마크가 번갈아 가며 신경을 건드려 댄 탓에 나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화장실에서 속을 게워 내야 했다.
먹은 음식을 모조리 토해 내고 입을 헹궜다.
거울 속에 잔뜩 예민해진 내 얼굴이 보였다. 눈매가 딱딱하게 굳어 있고 눈썹이 잔뜩 올라가 있었다.
입술을 짓이겨 물었다. 나조차 조절할 수 없는 신경질이 치밀어 거울 속 나를 노려보다 바지 안으로 오른손을 밀어 넣었다. 그러곤 곧장 허벅지 안쪽 살을 손톱으로 꼬집었다.
여린 살갗이 사정없이 비틀리며 고통을 유발했지만 아프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배배 꼬인 속이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살을 뜯어낼 것처럼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늘어난 살가죽 위로 날카로운 것을 쑤셔 넣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다. 그나마 다행히 아직 욕구를 누를 정도의 이성은 남아 있었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 내쉬며 손을 뺐다.
“하…….”
손톱 끝에 핏자국이 묻어났다. 고개를 숙여 보니 회색 트레이닝 바지의 허벅지 안쪽에 붉은 자국이 묻어 있었다.
누가 보면 생리한 줄 알겠네.
실소하며 바지를 벗고 평소처럼 뜨거운 물로 피가 묻은 부위를 닦아 냈다.
물에 젖은 바지는 수건걸이에 대충 걸어 두고 욕조 손잡이에 오른쪽 다리를 올렸다. 허벅지에 난 상처를 자세히 보기 위해서였다.
방금 뜯어낸 부위에는 피가 맺혀 있고 주변은 오래된 흉터로 얼룩덜룩했다. 신경질이 날 때마다 쥐어뜯은 결과다.
물끄러미 상처를 바라보다 대충 휴지로 닦아 내고 다시 바지를 입었다. 허벅지가 축축하지만 상관없었다. 더운 여름 날씨에 이 정도는 금방 마르니까.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다시 한번 방문이 잠겨 있는지 확인하고 커튼을 젖혔다. 답답한 마음을 환기시키고 싶었다.
옆으로 밀리는 커다란 창문을 활짝 열어 보니 벌써 바깥은 어둑어둑했다.
창틀에 기대 마당의 전구 개수를 의미 없이 세며 미지근한 공기를 들이켰다. 미세한 풀냄새에 마음이 진정되는 것도 같았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이제 공부를 해야겠다 싶어 창문을 닫으려다, 문득 마당을 가로지르는 인영을 발견하고 손을 멈췄다.
하늘하늘한 홈웨어 원피스 차림에 하나로 올려 묶은 긴 머리카락.
고채원이다.
눈길이 간 건 다른 것보다 불안한 듯 주위를 살피는 이상한 행동 때문이었다.
아무도 없는 마당을 자꾸 힐끔대던 고채원이 일순 고개를 들었다.
“아.”
나도 모르게 몸을 확 아래로 숙였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냥, 숨어야 할 것 같았다. 고채원이 뭔가를 숨기듯 굴기 때문이었을까.
잠깐 숨어 있다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자 마당 왼편으로 빠르게 걸어가는 고채원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디 가는 거지? 그쪽에 뭐가 있나?
그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마당의 전구 빛이 닿지 않는 곳까지 들어간 고채원의 모습은 이내 건물 모퉁이에 가려져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
그날, 고채원이 돌아온 건 두 시간이 지난 뒤였다.
어딘가 수줍은 기색으로 돌아오는 그녀의 모습에 위화감을 느꼈던 건 갈 때는 묶었던 머리카락이 저녁 식사 자리 때처럼 풀려 있어서였다.
그 뒤로도 고채원은 매일 밤 같은 시간에 마당을 가로질러 사라졌고, 두 시간 뒤에 다시 나타났다.
같은 행각을 세 번이나 목격한 다음 날, 나는 아침 식사 자리에 나온 고채원의 손목에 반창고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쳤어?”
고 의원은 아침 일찍 나갔고, 아주머니는 식사를 거른다고 하셔서 고채원과 나, 둘이서 식사를 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먼저 입을 열 수 있었다. 고 의원이 있을 때면 나는 늘 개 같은 시선을 감내하느라 입도 벙긋하지 못한다.
내 물음에 고채원이 가볍게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
“별거 아니야.”
“어쩌다가 다쳤는데?”
내 기억대로라면 어제저녁 식사 때까지만 해도 분명히 반창고가 없었다.
어젯밤에도 그녀는 마당 구석으로 사라졌고, 오늘 아침에 반창고를 붙이고 왔다. 매일 밤 그녀가 향하는 곳에서 다쳤을 거라는 미묘한 확신이 들면서 단순한 호기심이 일었다.
“그냐앙…….”
고채원이 볼을 붉히며 말꼬리를 늘였다.
왜 저런 반응인가 싶어 의아한 얼굴을 하자 그녀가 수줍게 웃으며 절반쯤 비워 낸 내 컵에 우유를 따라 주었다.
“우리 집에서 지내는 거 불편하지는 않아?”
불편한 건 한두 개가 아니다.
거기엔 고채원의 행각도 한몫했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째 그녀의 행동에 의문을 품고 창가를 얼쩡대느라 시간을 꽤 빼앗긴 참이었다.
어찌 됐든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그나마 고 의원이 바쁜 탓에 자주 집에 들어오지 않아 숨통은 트였다.
“언니도 졸업하면 한국에 돌아올까 봐.”
“왜?”
오래전에 고채원의 가족과 우리 가족이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파리의 한 오케스트라에 입단하는 게 꿈이라고 말했던 그녀가 기억나 되물었다. 그걸 위해 유학 간 거 아닌가. 왜 갑자기 생각이 바뀐 거지?
이 여사님이 아침 식사로 준비해 준 치아바타 샌드위치를 양손으로 쥔 채 대답을 기다리며 고채원을 바라본 순간, 나는 불현듯 뭔가를 깨달았다.
그녀는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진 것 같은 느슨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저런 표정을 짓는 여자를 전에도 한 번 본 적이 있다.
문득 키스 마크가 사라진 고채원의 목에 시선이 닿았다.
“달라졌거든.”
“뭐가?”
“예전에는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연주하는 게 꿈이었는데, 요즘은 아니야. 바뀌었어.”
“…….”
“행복의 기준이 달라졌다고 해야 하나. 내 꿈도 중요하지만…… 아무튼 그런 게 있어.”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얼굴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고채원이 귀엽다는 듯 코를 찡그리며 웃었다.
“서을이는 친구들에 비해 순진한 편이지?”
기가 막혔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면, 순진하게 구는 건 오히려 고채원이다.
“나중에 언니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는 날이 올 거야.”
그녀는 명백히 사랑에 빠진 얼굴로 헛소리를 지껄였다.
“서을아. 엄마는…… 아저씨를 사랑해.”
여기에도 있구나. 허황된 감정에 빠져 나사가 풀린 한심한 족속이.
나는 행복한 상상에 빠진 듯 눈을 빛내는 고채원을 마음속으로 비웃으며 샌드위치를 크게 베어 물었다.
그날 밤, 도저히 참지 못하고 방을 나섰다.
머리로는 신경 쓰지 말자고 수없이 되뇌었지만 내 눈으로 확인을 하고야 말리라는 이상한 욕구가 샘솟았다. 도대체 고채원이 밤마다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
대체 뭘 하기에 낮에는 종일 환상에 젖어 있다가, 밤에는 은밀하게 나다니는 걸까.
고채원이 먼저 사라진 뒤, 나는 이 여사님에게 바람을 쐬겠다는 핑계를 대곤 마당으로 나왔다. 그러곤 매일 밤 고채원이 그러하듯 주변을 힐끔대며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사라지는 곳은 마당의 왼쪽이었다. 내 방에서 보이는 건 거기까지였다.
조심스럽게 마당 왼쪽으로 향하니 건물 뒤편으로 하얀 컨테이너 한 채가 놓여 있었다.
창고인가?
주위를 살펴보니 컨테이너 말고 딱히 특별해 보이는 건 없었다. 상주 관리인들은 1층에 있는 방에서 머무른다고 했으니 관리인 숙소는 아닐 테고.
대리석 바닥이 끊긴 잔디 위에 고채원의 발자국이 얼핏 남아 있었다.
왜 매일 이곳으로 온 걸까? 나는 발자국을 힐끔대며 인기척을 숨기고 컨테이너로 다가가려고 했다.
쿵─.
그때, 뭔가가 부딪치는 뭉툭한 소리가 들렸다. 움찔하며 걸음을 멈췄다.
쿵쿵.
같은 소리가 또 들렸다. 귀를 기울였다.
쿵쿵쿵쿵.
이내 일정한 박자로 지속적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덩달아 내 심장도 같이 뛰어 댔다. 본능적인 예감이었다.
이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과 고채원의 비밀을 알고 싶은 호기심이 충돌했다.
나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망설이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 발, 두 발. 컨테이너에 가까워질수록 쿵쿵대는 소리가 더 선명해졌다.
주먹을 쥔 양손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고, 이마에는 땀이 맺혔다. 어쩐지 매일 잡아 뜯었던 허벅지도 새삼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컨테이너 건물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굳게 닫혀 있는 문에 슬쩍 손을 가져다 댔다. 쿵쿵, 딱딱한 뭔가가 벽면을 두드리는 듯 진동했다.
“아……!”
일순, 닫힌 문틈으로 미세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여자다.
나는 어떠한 확신을 갖고 문틈에 귀를 가져다 댔다. 쿵쿵대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고, 그에 맞춰 신음이 높아졌다. 모든 신경이 컨테이너 안으로 향했다.
“아, 아앙. 흐응! 대, 대호 오빠. 응……! 좋아, 아!”
이어 들리는 목소리에 질끈 눈이 감겼다.
고채원이다.
제 어머니와 달리 조금 낮은 톤의 차분한 목소리가 잔뜩 흥분해 어머니의 그것과 비슷한 날카로움을 만들어 냈다.
쿵쾅쿵쾅.
심장이 세차게 뛰어 대고, 명치에서 역한 구토감이 치밀어 올랐다.
“이렇게 좋은 걸 왜 이제 알았을까, 흐읏……!”
돌아가자. 돌아가야 해.
“아, 태강 씨……! 아, 아아……!”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에 입 안으로 욕설이 터졌다.
왼손으론 여전히 벽면을 짚은 채 오른손으로 허벅지 안쪽을 세게 움켜쥐었다. 꽈악, 손톱을 세워 누르자 상처가 터지며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아플수록 구토감이 가라앉았다.
“왜…… 왜 빼?”
그때였다. 돌연 흔들리던 컨테이너가 멈추더니 안쪽에서 고채원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허벅지에서 손을 떼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귀를 기울이려는 찰나, 벌컥 문이 열렸다. 그 반동으로 몸이 뒤로 훅 넘어가 잔디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어야 했다.
영문을 모른 채 얼떨떨하게 고개를 든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
“…….”
문보다 더 키가 큰 남자가 몸을 살짝 구부린 채 넘어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경악한 얼굴로 입을 틀어막았다. 낯선 남자의 등장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낯선 남자가 알몸이기 때문이었다.
멍청하게 깜빡이는 시야에 남자의 오른쪽 어깨가 들어왔다. 어두워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문신으로 덮여 있는 듯 새까맸다.
“난 또, 누가 있나 했더니.”
“……아무도 없는 거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채원이 물었다. 혹여 이 밤의 밀회가 들통날까 봐 잔뜩 겁먹었다가 안심한 목소리였다.
나는 넋이 빠진 채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컨테이너가 흔들릴 만큼 섹스를 했던 사람답지 않게 권태로움이 가득한 표정. 나신을 훤히 드러내고도 아무렇지 않게 나를 빤히 내려다보는 새까만 눈매.
어딘가 어둡다.
단순히 주위가 어둡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분위기가 그러했다. 왠지 공기가 매캐하게 느껴졌다. 목구멍이 따끔거려 기침을 할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나도 모르게 그를 훑어보다, 다리 사이에 눈길이 닿을 뻔해 질끈 눈을 감았다.
“갑자기 문을 열면 어떡해, 오빠. 놀랐잖아.”
남자 쪽을 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들키면 곤란해지는 건 고채원뿐만이 아니다. 남의 섹스나 훔쳐 듣고 있던 관음증 환자가 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일단 자리부터 피하고 보자는 생각에 뒷걸음질을 치는데 피식, 하고 바람 빠지듯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애기네.”
남자의 눈이 위아래로 나를 훑어 내렸다.
“내가 무슨 애기야…….”
남자의 말에 대답은 고채원이 했다. 수줍은 듯 아양을 부리는 목소리였다.
“이렇게 겁이 많은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그야 오지 않으면 오빠가 안 해 주니까…….”
이번에도 고채원이 대답했다.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에 심장이 불쾌하게 뛰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그걸 어떻게 해석했는지 그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자꾸 시야에 걸리는 남자의 알몸을 못 본 척하며 급히 몸을 돌렸다.
“귀엽네.”
도망가는 등 뒤로 낮은 목소리가 흘렀다. 역시나 제게 한 말인 줄 알고 까르르 웃으며 빨리 오라고 애교를 부리는 고채원의 목소리까지, 쌍으로 가관이었다.
간신히 그곳에서 벗어난 나는 가쁜 숨을 몰아 내쉬며 도망치듯 곧장 방으로 올라갔다.
“우욱……!”
메슥거림을 참지 못하고 화장실 변기에 얼굴을 박았다.
“애기네.”
구역질을 하는 내내 남자의 눈빛과 목소리가 온몸을 지배한 것처럼 맴돌았다.
그 남자는 뭘까. 누구이기에 고채원과 매일 그런 짓을 하고 있었던 걸까.
늘 이 집에 있는 걸까.
고채원의 정식 애인이라면 진작에 나도 소개를 받았을 텐데 따로 들은 건 없고, 그렇게 몰래몰래 찾아간 걸 보면 아마 숨겨 둔 애인이리라.
아직 소개받지 않은 이 집안의 관리인 중 한 명인 걸까.
고채원은 대체 어떤 연애를 하고 있는 거지.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알몸으로 내 앞에 선 주제에 수치심이라곤 조금도 느끼지 않는 듯하던 그 태연한 표정을 생각하면 미친놈인 건 확실했다.
고 의원 가족들에게 이끌려 오랜만에 찾은 성당엔 여전히 특유의 안온한 분위기가 흘렀다.
나는 성당 내부보다는 그 뒤로 난 산책로를 좋아했는데, 공간 자체보다는 아버지와 나란히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이 좋았다.
“미사 전에 잠깐 걷는 게 어때. 이맘때 길이 참 예뻐.”
물론 아버지의 목적은 나와 산책하는 게 다가 아니었다. 고 의원이 종종 성당 산책로를 걸으며 사색을 한다는 이야기를 주워들었기 때문이었지. 그 가상한 노력 덕에 산책로에서 고 의원과 안면을 터 여기까지 온 거다.
고 의원이 먼저 산책로로 진입하고 그의 비서가 그 뒤를 따랐다. 아주머니와 고채원도 나란히 걸었고 나는 가장 뒤에 서 있었다. 가능한 한 고 의원과 멀리 떨어져 있고 싶었다.
나무로 된 계단을 하나씩 밟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길을 따라 늘어선 나무 위로 쨍쨍한 햇살이 쏟아져 이파리가 반짝거렸다. 곳곳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나고, 이름을 알 수 없는 꽃들이 여기저기 자유롭게 피어 있었다.
“서을이는 꽃을 좋아하는가 보구나.”
잠깐 계단 옆에 핀 꽃에 시선을 빼앗긴 사이 고 의원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움찔, 어깨를 떨며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고채원과 아주머니는 훌쩍 앞서가 있었고, 고 의원의 비서도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주춤거리자 고 의원이 팔을 뻗어 어깨를 감쌌다.
“아버지 많이 보고 싶지?”
그가 상냥한 목소리로 물어 오며 몸을 밀착했다. 너무 놀라 숨 쉬는 것도 잊었다. 느릿느릿 어깨를 주무르던 손이 아래로 내려와 팔뚝을 쥘 때까지도 나는 아무 말 못 했다.
“아저씨 집에서 지내면서 힘든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지금은 아저씨가 서을이 아버지나 다름없으니까.”
“…….”
“알았지?”
팔뚝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벗어나야 해. 밀어내. 싫다고 말해.
아무리 머리가 명령을 내려도 몸은 뻣뻣하게 굳은 채였다.
구토감이 밀려왔다. 허벅지를 쥐어뜯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바보처럼 고 의원의 품에 안긴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고 의원이 내게서 손을 뗀 건 앞서가던 고채원과 아주머니의 모습이 보일 때였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나와 거리를 벌리는 그의 등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죽여 버리고 싶어.
온몸에 오물이 묻은 것처럼 기분이 역했다.
“서을아, 얼른 와.”
아무것도 모르는 고채원이 내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를 보자마자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지난밤이 떠올랐다.
“아, 아앙. 흐응! 대, 대호 오빠. 응……! 좋아, 아!”
아. 아.
색스러운 신음이 환청처럼 울려 댔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구토감을 애써 억누르며 간신히 그녀에게 똑같이 손을 들어 보였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몸을 씻었다. 특히 팔뚝은 살가죽이 붉어질 때까지 문질렀다.
강박증에 걸린 사람처럼 미친 듯이 몸을 씻어 내고 나왔을 땐 온 집 안에 고채원의 플루트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부드러운 음색의 곡은 귀에 익숙한 것이었다.
<사랑의 인사>.
고 의원 때문에 한껏 예민해진 귀에 유난히 그 소리가 거슬리게 들렸다.
곧장 창문을 닫았지만, 가느다란 플루트 소리는 미세하게 문틈을 파고들어 신경을 건드려 댔다. 신세 지는 처지에 연주를 관두라고 할 수도 없으니, 귀를 틀어막고 침대 위에 엎어져 연주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하…….”
그러나 곡이 끝나자마자 고채원은 다시 같은 걸 처음부터 연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방을 나왔다.
복도로 나오니 음악 소리는 더 크게 들렸다. 복도 가장 끝에 있는 고채원의 방을 노려보다 거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배고프면 뭐라도 준비해 줄까요?”
하얀 장갑을 끼고 거실 가장자리에 놓여 있는 성모 마리아 조각상을 닦던 이 여사님의 물음에 나는 애써 표정을 폈다.
“아니에요. 잠깐 바람 쐬려고 나왔어요.”
“그래요. 오늘 햇살이 참 좋아요. 마당에 분수도 틀어 뒀으니까 구경해 보세요.”
“분수요?”
여기 온 뒤로 늘 공부 핑계를 대며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에 분수대가 작동하는 건 본 적이 없었다.
방구석에서 플루트 소리를 듣는 것보다는 낫겠지 싶었는데, 마당에 나가니 더 크게 들렸다.
2층을 올려다보니 고채원은 아예 창문을 훤히 열어 놓고 연주를 하고 있었다. 연습실이 따로 있다고 들었는데 왜 집에서 저러는지 모르겠다. 평소에는 안 그러더니.
객관적으로 햇살 좋은 여름 날씨와 플루트 소리는 잘 어울리긴 하나, 자꾸 심사가 뒤틀렸다. 나는 쯧, 혀를 차며 분수대로 향했다.
역시 사랑에 빠진 인간은 제정신이 아니야.
사랑에 빠진 게 고채원의 잘못은 아니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싫다.
사랑에 눈이 멀면 현실 감각이 사라지고 사고방식이 멍청해진다. 적어도 내가 본 사람들은 다 그랬다.
분수는 중앙에 놓인 하얀 대리석 장미 조각을 둥글게 감싸며 삼단으로 물이 떨어지는 구조였다.
연못 주변을 걷다가 분수대에 다가갈 수 있게 만들어 놓은 대리석 다리를 발견했다. 건너가 보니 분수대 앞에는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작은 스테인드글라스와 성수대가 놓여 있었다.
물끄러미 성수대를 들여다보다가 손가락에 성수를 찍고 성호경을 그었다.
기도라면 오전에 성당에서 지겹게 했고, 딱히 빌 만한 게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의례적으로 그리했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다니며 종교에 익숙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언젠간 기도를 들어주지 않을까 하는 무의식이 몸을 멋대로 움직이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양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우선 저 빌어먹을 연주 좀 안 들리게 해 주세요.
물론 내 기도는 한 번도 닿은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고 의원의 속내를 알아차리고 나를 보호해 주기를 바랄 때도, 우리 가족이 다시 행복했던 때로 돌아가길 바랄 때도 하느님은 단 한 번도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으니까.
역시나 고채원은 일곱 번째 <사랑의 인사>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한숨을 푹 내쉬며 눈을 뜨는 그때였다.
“뭐 빌었어?”
분수대 맞은편에서 불쑥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그대로 굳었다. 낯설지 않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의아하게 주변을 살피는데 분수대 너머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고개를 옆으로 쭉 빼자 예상한 인물이 연못 건너편에서 담배를 물고 앉아 있었다. 고채원이 간드러지게 매달렸던 대호라는 남자였다.
아아, 설마 이 남자 들으라고 저렇게 연주를 해 대는 건가.
잠깐 고채원의 방을 올려다보았다. 나부끼는 커튼 뒤로 그녀의 인영이 스치듯 보였다. 가지가지 한다, 정말.
“응? 뭐 빌었냐니까.”
남자는 내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연못 안으로 손을 담가 잉어들의 헤엄을 방해하고 있었다. 잉어를 따라 하듯 입을 뻐끔거릴 때마다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
“……누구세요?”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했다. 그제야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벌건 대낮에도 음험한 분위기는 그대로였다. 다만 밝은 빛 아래 온전하게 드러난 남자의 얼굴이 지나치게 잘생겨서 고채원이 왜 저렇게 나사 빠진 것처럼 구는지는 조금 이해가 가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관찰했다.
짧은 잿빛 머리카락 아래로, 깎아 놓은 조각보다 더 선명한 얼굴선이 떨어졌다.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색이 흐린 검은 눈동자, 도드라진 콧대, 강한 턱선에서 남성성이 지나치게 뿜어져 나왔다.
특히 저 눈빛. 담배 연기처럼 매캐한 눈빛이 남자를 위험한 사람으로 보이게 만드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지 않을까 싶다.
전체적으로 하얗고 야리야리한 외양의 고채원과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둘이 나란히 서 있으면 선남선녀의 표본으로 써도 충분하겠다.
“애기야, 옷 젖었다.”
그가 턱짓을 했다. 따라 고개를 숙이니 성수가 묻어 양어깨에 조그만 물 자국이 나 있었다.
“어제도 그랬을까.”
내 시선을 가만히 받던 남자가 연못 안에 재를 떨어 내며 여상히 중얼거렸다.
설마 하는 생각이 스쳤다. 당황한 날 보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는걸 보니 내 생각이 맞는 모양이었다. 지난밤 섹스를 목격한 내 몸의 변화를 말하는 거다.
알몸으로 뻔뻔하게 서 있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다짜고짜 성희롱이라니. 역시 미친놈이다.
“저 미성년자거든요.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신기하게 고 의원 앞에서는 하고 싶어도 나오지 않았던 말이 툭 뱉어졌다. 나도 말하고 조금 놀랐으나 내색하진 않았다.
“저런.”
남자가 낮게 웃으며 연못을 휘저었다.
“진짜 애기였네. 미안해. 취소할게.”
마치 아이를 어르듯 상냥한 어투였으나, 장난기가 물씬 묻어나 기분만 더러워졌다.
“그쪽은 몇 살인데 절 애기 취급해요?”
“너보단 많지.”
“아, 그러니까 몇 살이냐고.”
그가 재밌다는 얼굴을 했다.
“화났어? 미안, 미안. 이름을 모르니 별수 있나.”
“…….”
“그런 김에 묻는데 이름이 뭐야? 내 이름은 알지? 어제 들었을 거 아니야.”
대답 대신 몸을 돌렸다. 방으로 돌아가야겠다.
어떻게 된 게 이 집에는 멀쩡한 사람이 하나도 없냐. 혀를 차며 다리를 건너 연못을 빠져나왔다.
현관문을 열기 전에 고개를 돌려 보니 남자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물을 이리저리 튕겨 대던 그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쳤다.
그는 태평하게 나를 향해 젖은 손을 흔들었다.
“뭐야…….”
나는 그를 노려보다 문을 쾅 닫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집 안에는 <사랑의 인사>가 울려 펴지고 있었다.
고채원은 매일 밤 빼놓지 않고 남자를 만나러 갔다. 그 탓에 날이 갈수록 얼굴이 홀쭉해졌다.
“채원이 요즘 왜 이렇게 자꾸 살이 빠지니?”
아침 식사를 하던 고 의원이 물었다. 고 의원의 아내도 걱정스러운 눈빛을 외동딸에게 보냈다.
그 이유를 아는 나만이 고채원의 목을 힐끔 보았다.
가장 최근에 생긴 것 같은 붉은 자국을 가리지 않는 저 대담함이 새삼 감탄스러웠다. 그걸 눈치채지 못하는 부부 역시 놀랍고. 아마 제 사랑스러운 딸이 밤마다 음란한 짓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하겠지.
“조만간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스트레스 받아 그런가 봐요.”
“유학 생활 많이 힘들면 졸업하고 집에 들어와.”
“정말이에요, 아버지?”
“그래, 채원아. 엄마도 너 객지 생활 하는 거 별로야. 연주야 한국에서 해도 되지 않니.”
부모님에게 원하는 말을 들은 고채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잘됐네. 그 남자랑 살림 차릴 수 있겠네.
나는 조용히 국을 떠먹으며 조소했다.
“참, 이제 여행 준비할까요?”
아주머니가 고 의원에게 물었다.
“여행이요?”
내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고채원이 선하게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방학마다 가족 여행 가거든. 이번엔 서을이도 같이 가자.”
“그래. 오랜만에 바람 쐰다고 생각하고 같이 가, 서을아. 공부도 중요하지만, 가끔 기분 전환도 해야지.”
나는 두 여자를 번갈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가족이 아닌 나를 기꺼이 여행에 끼워 주는 따뜻한 마음씨를 탓하고 싶지는 않지만, 전혀 내키지 않았다.
다행히 내겐 좋은 핑곗거리가 있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아무래도 수능이 부담되어서요.”
“일주일 정도면 되는데 그것도 어려워?”
고채원이 아쉬워하며 재차 물었다. 그녀는 한국에서 수능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수험생의 고충은 전혀 모른다.
대한민국 수험생이 일주일 동안 해외여행을 간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다. 특히 나처럼 한국대를 지원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가뜩이나 요즘 고채원의 밀회에 정신이 나가 있었던 터라 공부량이 줄어 스스로를 향한 죄책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내가 난감한 얼굴로 수저를 물고만 있자 잠자코 있던 고 의원이 입을 열었다.
“서을이 수능 끝나면 그때 다 같이 가는 거로 하고, 이번엔 두 사람만 다녀와.”
“아버지도 안 가시게요?”
“이번엔 도저히 시간이 날 것 같지 않구나.”
“아이참, 그럼 너무 아쉬운데. 어쩔 수 없죠. 그럼 이번엔 어머니랑 둘이 다녀올게요.”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지.”
오랜만에 딸과 단둘이 여행을 간다며 한껏 톤이 올라간 아주머니와 아쉬운 눈길로 나를 보며 같이 가자는 듯 귀엽게 코를 찡그리는 고채원의 맞은편에서 나는 남몰래 손을 떨었다.
고 의원이 집에 남을 줄은 몰랐다.
두 여자가 일주일 동안 집을 비운다는 것은 고 의원과 내가 이 커다란 집에서 단둘이 지내야 한다는 말이었다.
차라리 여행을 간다고 할 걸 그랬나. 초조하게 허벅지를 손톱으로 긁었다.
“사람 몇 붙여 줄 테니까 편하게 여행하고 와.”
그 말에 고채원이 눈을 빛냈다.
“그럼 대호 오빠랑 같이 갈까요?”
잠깐 손이 멈췄다.
“덩치도 크고, 같이 다니면 안전할 거 같은데…….”
말끝을 흐리는 고채원의 허리가 가볍게 비틀렸다. 몸에 밴 애교였다.
어머니와 함께 가는 여행에 밀회 상대를 끼워 넣으려고 하다니. 역시 대범하다. 어머니가 잠든 틈을 타서 밤새 섹스하려는 작정인가.
문득 고채원이 짐승으로 보였다. 뭐, 굳이 따지자면 예쁜 꽃사슴이지만.
“얘는. 대호가 비행기를 어떻게 타니.”
“아, 참…….”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마저 먹자.”
고 의원이 대화를 일축했다.
“그게 누구예요?”
왠지 지금이 그 미친놈의 정체를 알 수 있는 기회 같아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수저를 놀리던 고 의원이 못마땅한 얼굴로 자신의 딸을 바라봤다. 괜한 소리를 했다며 책망하는 눈빛이었다.
“서을이는 아직 못 봤구나.”
하지만 친구에게 애인이라도 소개하는 듯 웃으며 상체를 당겨 앉는 걸 보니 고채원은 아버지의 심경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내 밑에서 일하는 녀석이다. 딱히 마주칠 일은 없을 거야.”
고 의원이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고채원은 조금 아쉬운 듯 입을 삐죽이긴 했으나, 굳이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아버지의 부하 직원과 눈이 맞은 주인집 딸이라……. 밀회의 이유가 있었다.
고채원도 꽤나 어려운 사랑에 빠졌구나.
고 의원이 차기 대통령이라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이었다. 머지않아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그가 소중하게 키운 외동딸을 고작 자신의 밑에서 일하는 남자에게 넘겨주진 않을 거다. 아마 고채원도 그걸 알기에 대놓고 드러내지 못한 것이리라.
문득 어머니가 떠올랐다. 사람은 어려운 것에 매력을 느끼는 걸까?
어쨌든 미친놈의 정체는 대충 파악이 되었다.
고 의원 밑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채원이 언급했던 대로 덩치가 크고 인상이 강렬하니 경호원이 아닐까 추측하며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