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딜러 줍는 힐러-128화 (128/130)

128화

[귓속말] 카젤: 꿈 깨ㅋ 퍼클은 우리 꺼임

[귓속말] 벌꿀오소리: ???? ^^ㅗㅗㅗㅗ

[귓속말] 벌꿀오소리: 리프도 이제 한물갈 때가 됐지

[귓속말] 카젤: ????? ㅁㅊ?

[귓속말] 벌꿀오소리: 노장은 물러설 때가 됐다! 우리가 새로운 바람이 되어 주게써!

[귓속말] 카젤: 헛소리 ㄴ

[귓속말] 벌꿀오소리: 결과만이 말해줄 뿐! ^0^

벌꿀오소리의 ‘새로운 바람’이라는 말에 일순 긴장감이 확 치고 올라왔다. 같은 선상에 있는 별똥이 정말 먼저 퍼클을 달성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여기서 이렇게 주저앉아 있을 순 없었다. 적어도 침울해 있는 팀원들에게 경쟁심이라는 극약처방을 내려야 했다.

주하는 이어지는 벌꿀오소리의 귓속말을 사뿐히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요. 별똥도 30% 넘겼대요.”

—뭐얏?!

—별똥도?

그러자 조용했던 보이스 채팅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퍼클을 빼앗길 수 없다는 의지 하나로 팀원들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안 되는 건 없어! 들이대다 보면 결국 적응하게 되니까.

—맞다, 맞아. 많이 트라이하고 적응하는 게 답이야.

—우선순위만 확실하게 정해 놓고 각자 개인플레이만 잘하면 될 것 같은데, 어때? 선율아.

지구침략의 질문에 선율이 픽 웃으며 말했다. 조금 전과 달리 구겨진 얼굴은 평소대로 돌아와 있었다.

“어, 맞아. 지금 대충 공략법 생각해 놨으니까 알려 줄게.”

—역시, 우리 대장님이다.

—빨리 알려 주세요. 현기증 날 것 같단 말이에요.

찡찡대는 개인주의를 필두로 팀원들의 텐션이 확 오른 게 느껴졌다. 이런 분위기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주하는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눈매를 단단히 굳혔다.

도전자와 방어전을 준비하는 챔피언의 입장은 이렇게나 다르다.

도전자일 때는 몰랐는데, 챔피언이 되어 보니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잘해야 본전을 찾는 거고, 못하면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런 압박을 받으며 리프는 지금껏 레이드를 하고 있던 것이다. 주하는 새삼스럽게 팀원들의 대단함이 와 닿았다. 그리고 저 또한 이런 압박감 속에서 퍼클을 달성했을 때의 희열을 느껴 보고 싶었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더 약을 쳐 보기로 했다.

“벌꿀이가 우리보고 노장이라며 자신들이 새바람이 되어 주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 벌꿀이 고것이 그랬다고?

—허? 허어?

—노……장?

—노장이라뇨? 노장?! 우리는 현역입니다!

—와…… 자진신고 때와는 다른 빡침이 올라오는데?

예상대로 팀원들의 전투력이 MAX를 찍었다. 키보드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누군가가 벌꿀오소리에게 귓속말을 날리는 것 같았다. 없는 말을 지어내진 않았으니 주하는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조금 기다리니 역시나 벌꿀오소리에게 귓속말이 들어왔다.

[귓속말] 벌꿀오소리: 얔ㅋㅋㅋㅋ 리프에서 귓말 테러하기 있냐!!!;;;;

[귓속말] 카젤: 네? 전 모르는 일입니다만?

[귓속말] 벌꿀오소리: 막내들이 G랄해 대는데???

[귓속말] 카젤: ㅋㅋㅋㅋㅋㅋ

[귓속말] 벌꿀오소리: ㅋㅋㅋㅋㅋㅋㅋ 아오씨!

[귓속말] 카젤: 뿌리는 대로 거두는 법

[귓속말] 벌꿀오소리: 두고보잨ㅋㅋㅋㅋㅋ

개인주의와 일시불에게 징하게도 당했나 보다. 두고 보자는 사람 중에 무서운 사람은 없지만, 벌꿀오소리는 조금 경계해야 함이 옮았다.

제대로 된 경쟁 상대에게 리프가 아직 건재하다는 걸 알리는 것. 그게 지금 주하의 목표였다.

“힐부터 정할게. 처음 파티 힐은 내가 하고, 탱커랑 정배 힐은 스노우가 해. 그리고 수정이 나왔을 땐 스노우가 파티 힐 보고 내가 수정 힐 할 거야. 정령사가 시전 속도는 더 빨라서 금방 끝낼 수 있을 거야.”

—오케이.

선율의 설명과 함께 트라이가 시작되었다.

퍼클이라는 트로피를 움켜쥐기 위해선 모두가 집중해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가장 높은 집중력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메인 탱커는 조금 더 튼튼한 모기로 바꿀 거야. 지금은 어그로보다 얼마나 잘 버티냐가 관건이니까. 초반에만 딜러들이 어그로 관리하면서 치면 돼. 외계인 형은 딜 위주로 세팅하고 모기는 메인탱 준비해.”

—알았어.

—응.

탱커들은 선율의 지시대로 도핑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나씩 변경점과 공략법을 알려 줄 때마다 팀원들은 누구 하나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선율이 설명할 때마다 타당한 이유를 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굳건한 믿음이 뒷받침돼 있기 때문이다.

4년간 레이드 1위를 유지한 공대의 대장인 멜로디.

그의 말을 따르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주하도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보스 레이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곧 정배 나온다. 집중해 스노우.”

—하씨…… 미치겠네.

—눈 누나, 파이팅!

아스모덴의 30% 광폭화를 본 후 일곱 시간이 지났다. 지금껏 리프가 가장 오랫동안 버틴 건 15%까지였다.

그동안 실패하는 방법도 다양했는데, 번갈아 가면서 한 명씩 실수하거나, 딜이 모자라서 수정이 터지거나, 힐이 부족해서 딜러를 죽이거나, 마나번에 당해 스킬을 쓸 수 없게 되는 등. 볼 수 있는 모든 유형을 한 번씩은 경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정신 지배를 당한 딜러가 아군을 죽였을 때였다. 거기서 살리지 못하면 그 뒤는 와르르 무너지는 것이다.

“아……! 저 정배당했어요.”

—하! 하필 카젤이라고?

현재 리프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딜러의 스펙이 높으면 높을수록 힐러가 팀원을 살리기 힘들어진다. 그렇다고 정신 지배 때문에 딜러들이 도핑을 안 하면 전투 시간이 길어진다. 거기다 타임 어택에 걸릴 수도 있고.

딜러들의 공격력은 이대로 유지하되, 공격받는 팀원들이 죽지 않도록 힐러가 힘써야 했다.

—아, 제발. 걸리려면 월차가 걸려 줘.

—……나도 내가 걸렸으면 좋겠어.

그나마 나은 건 월차연차휴가가 정신 지배를 당했을 땐데, 무작위로 걸리는 터라 아쉬울 뿐이었다.

“스노우, 바나나 힐.”

—어, 어! 하고 있어!

“곧 마귀 디버프 들어온다. 본인 거 확인하고 바로 움직여.”

—넵.

—딜러들은 수정 극딜하면서 해. 한 번이라도 스킬 욱여넣어!

—눈 누나, 12시에서 창 날아가요!

—아오, 씨! 진짜!

보이스 채팅창은 여느 때보다 정신이 없었다. 누군가 기믹을 하나 놓치면 알려 주기도 했고, 부족한 딜량과 힐량을 채우라며 채찍질하기도 했다. 열 쌍의 눈과 손은 한계치까지 집중력을 끌어 올렸다.

—아, 카젤이 정배 걸릴 때마다 피가 바짝바짝 마른다.

“……저도 그래요.”

카젤에게 맞고 있는 바나나의 피가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주하는 Snow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도와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괜히 미안했다.

—나도 아이템 강화를 좀 더 해야겠어. 이대로는 우리 딜러들 못 따라가서 민폐캐 될 것 같아.

—또다시 스펙업 붐이 온 것인가.

—방어구 옵션도 다른 걸로 다시 뽑을 거야!

—짤랑짤랑 소리가 들리네요.

—퍼클 하려면 이 정도쯤이야!

강화 수치가 낮은 것도 아니고 옵션도 상급으로 잘 뽑았음에도 Snow는 자신의 부족함을 탓했다.

—아이템 좋은 딜러가 정신 지배 걸렸다고 한탄하는 것도 이제는 지겨워. 내가 잘 살리면 되는 거잖아! 그럼 만사 오케이 아니야?

—우리 눈이…… 폭주했네.

—대장아, 이번 트라이 끝나면 잠깐 시간 좀 줘.

“아이템 다시 정비하게?”

—어. 강화는 재료가 없어서 못 하지만, 옵션은 좀 바꿔야겠어. 생각해 보니 크리티컬보다는 가속 위주로 올리는 게 나을 것 같아. 무빙이 많으니까 아무래도 시전이 빠른 게 좋겠지.

“그래, 그럼.”

선율도 차라리 그게 낫다고 판단했는지 흔쾌히 수락했다. 동시에 전멸 사인을 내렸다.

부활한 리프는 전원 마을로 향했다. 그런데 Snow뿐만 아니라 팀원들도 방어구 옵션을 다시 돌리기 시작했다.

—나도 애매한 부분들 바꿔 봐야겠어.

—나나 누나도요? 저도 다시 돌릴 건데.

—당연하지. 상위 옵션에 안주할 게 아니라 최상위 옵션에 도전해야 진정한 리프 아니겠냐.

Snow의 열혈 모드에 팀원들도 제대로 자극받았다. 힐러가 저렇게까지 나오는데 딜러가 뒤처질 순 없었다. 정신 지배 때문에 스펙업을 포기하는 건 말도 안 된다. 그건 그야말로 온전히 힐러에게 믿고 맡겨야 하는 부분이었으니.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돼서 부지런히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조용히 지켜보던 주하는 자신의 캐릭터 장비 창을 열었다.

“…….”

그곳엔 최상위 옵션으로 세팅되어 있는 아이템들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오롯이 제 욕심이었지만, 역시나 잘한 선택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돈은 좀 깨져도 투자할 가치는 충분했다.

“눈 누나, 두루마리 남은 것 좀 드릴까요?”

—어? 너 남아?

“네, 좀 남아요.”

—그럼 빌려줘, 나중에 갚을게.

“괜찮아요. 저야 또 모으면 돼서.”

—후…… 그럼 나중에 누나가 술 산다.

“좋죠, 맛집 알아 둘게요.”

—누나! 저도 갈래요!

—만날 때 말해. 나도 간다.

—누나가 쏜다면 나도 가야지.

이런 기회를 놓칠 이들이 아니었다. 이때다 싶어 팀원들이 모두 달라붙자 Snow가 헛웃음을 뱉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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