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강해서 죄송하다는 저 담담한 사과! 역시 멋있다, 우리 카젤이!
—나도……! 나도! 강해서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싶어!
—그럴 날이 올까?
—언젠가 오겠지. 한…… 두 달 뒤?
틈새시장을 노린 월차연차휴가의 강력한 바람은 팀원들의 놀림에 더럽혀졌다. 끙끙대는 그를 위로하는 건 듀오인 리미티드뿐이었다.
—형, 그냥 포기하는 게 빨라요.
물론, 위로 같지 않은 위로였지만 말이다.
—……다들 두고 보자.
그간 두고 보자는 말만 여러 번 들은 팀원들은 그저 어깨만 으쓱였다.
정신 지배가 끝나고 잠깐 한숨을 돌리던 리프는 곧바로 이어지는 다음 기믹에 다시금 바짝 긴장했다. 아스모덴이 창을 들어 올리며 포효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하늘에서부터 독이 발린 창이 비처럼 쏟아졌다. 그와 동시에 화면 중앙에 반전을 알리는 화살표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뭐야, 이거?
—어? 어어? 어라? 움직임이 이상한데?
—헐? 오른쪽으로 눌렀는데 왜 왼쪽으로 가지?
—이거 움직임 반전이잖아!
—으악! 어색해!
하늘에서 떨어지는 독창을 피하려 움직이던 팀원들은 경악했다. 갑작스러운 이동 반전에 손가락이 주춤한 것이다. 별것 아닌, 단순 회피 기믹도 익숙하지 않은 조작엔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기어코 잘못 이동한 일시불과 여름n모기가 독창에 한 대 맞았다. 그러자 뭘 할 여유도 없이 그대로 죽어 버렸다.
—아니! 한 방이라고?
—무조건 피하라는 거네.
탄식을 흘리던 그때, 또다시 반전 화살표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이번엔 원래의 조작으로 돌아왔다. 그 상태로 독창을 피하고 있자, 또다시 반전되었다. 그렇게 몇 차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자 적응하지 못한 팀원들이 한둘씩 바닥에 누웠다.
기믹이 끝나고 남아 있는 건, 멜로디와 카젤, 리미티드와 지구침략뿐이었다.
“잘, 한다. 잘해.”
선율이 어이없어하며 지적하자 죽어 있는 팀원들은 변명하기 시작했다.
—아니이, 너무 제멋대로 바뀌잖아.
—타이밍이 안 좋았어요!
“살아 있는 사람들은 운이 좋았고?”
—…….
—…….
그 말에 죽은 이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선율을 제외한 생존자들이 그나마 얌전한 부류였으니 망정이지, 개인주의나 바나나가 살아 있었다면 선율에게 힘을 실어 주며 옆에서 약 올렸을 게 뻔했다. 그건 본인들도 인정하는 바였다.
어쨌든 살아 있는 사람들끼리 다음 패턴을 보기 위해 계속 진행을 이어 갔다.
—중앙에 포탈 하나 나왔어요!
조금 시간이 지나자 개인주의가 외친 것처럼 맵 정중앙에 검은 포탈이 나타났다. 지구침략이 탱킹하고 있던 아스모덴은 다시 의자로 돌아가 무적기를 두르고 있었다. 외부에서는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포탈은 주하가 들어가 봐.”
선율이 지시하자마자 주하는 곧장 포탈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옆에 있던 선율이 고개를 살짝 빼서 주하의 화면을 확인했다.
“내부에 검은 수정 하나 있다. 깨야 할 것 같은데.”
포탈 안에는 커다란 검은색 수정이 회전하고 있었다. 주하가 공격하자 수정의 피가 조금씩 닳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피 통이 높다고 생각하며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팀원들의 놀란 음성이 들렸다.
—뭐야, 저건!
—오잉? 포탈 옆에도 수정이 하나 생겼네요?
“밖에?”
선율이 주하의 화면에서 시선을 떼고 자신의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외부에는 팀원들이 말한 것처럼 못 보던 하얀 수정이 있었다. 내부의 검은색 수정과는 달리 하얀 수정은 피가 간당간당하게 남아 있었다.
—이거 안 쳐지는데요.
—어? 생명바가 녹색이네?
보통 공격할 수 있는 대상은 붉은색이나 노란색 생명바고, 아군은 파란색이나 녹색으로 표시된다. 새로 나타난 수정이 녹색 바에 피가 조금 남아 있다는 건 어쩌면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눈을 가늘게 뜬 선율이 곧장 수정을 클릭했다. 그러곤 아군에게 하듯 힐을 시전했다. 캐스팅이 되는 걸 확인하자 그는 확신했다. 하얀 수정의 피를 채워야 한다는 것을. 그것을 본 Snow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토해 냈다.
—이젠 하다 하다…… 오브젝트에도 힐을 해야 하네.
—그래도 여기까지는 기믹이 그렇게 어렵진 않은 거 같은데?
—확실히 마지막 보스라기엔 패턴이 쉽네요.
—차라리 네 번째 보스가 더 어려웠던 듯욤!
확실히 초반은 크게 어려울 게 없었다. 생각보다 무난하다고 해야 하나. 한두 번만 하면 금방 적응할 정도의 난도였다. 분명 개발자들이 호락호락하게 넘어가게 두진 않았을 텐데…….
선율이 눈을 가늘게 뜨곤 화면을 응시했다. 왜인지 불길함이 엄습했다.
살아 있던 리미티드도 포탈에 들어가 주하와 함께 검은 수정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내부에서는 공격을, 외부에서 힐을 하며 시간이 조금 지났을 때, 수정 위에서 시계 모양 아이콘이 나타났다. 그 안에 있던 초침이 12시부터 째깍거리며 움직이는 걸 보니 타임 어택 기믹인 것 같았다.
초침이 끝나자마자 역시나 수정은 폭발했고, 살아 있던 이들은 모두 바닥에 쓰러졌다.
리프는 다시 정비에 들어갔다. 오늘만 하더라도 영혼으로 뛴 횟수가 50번이 넘어가고, 도핑도 그만큼 사용했다. 이제는 거의 자동이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전투에 돌입하기 전에 바나나가 파이팅 넘치게 외쳤다.
—오케이, 다시 가 보자고!
그러자 선율의 음산한 목소리가 따라왔다.
“수정 패턴 전에 죽는 사람 생기면…….”
—안 죽어, 안 죽어. 뇌에 빡! 힘주고 하면 되잖아.
“지금까지 집중 안 했어?”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이었군. 어쨌든, 나 갈굴 시간에 진행하는 게 더 이득이지 않을까?
“집중해라, 신서영.”
—그 어느 때보다도 빡집중 중이시다.
고작 이동 키가 반전됐다고 우왕좌왕하다 죽은 이가 할 말은 아니었다. 같은 구간에서 죽은 이들만 바나나를 응원할 뿐이었다.
다시 시작된 전투에선 선율의 우려와 달리 팀원들은 수정 패턴까지 깔끔하게 클리어했다. 타임 어택을 조금은 여유 있게 볼 정도라 분위기는 좋았다.
내부 수정이 파괴되고, 외부 수정의 피도 다 채우고 나니 의자에 앉아 있던 아스모덴이 다시 달려 나왔다. 어그로가 리셋됐는지 힐러들에게 달려가는 걸 지구침략이 도발로 자신을 보게 했다. 아직은 무난한 진행이었다.
어김없이 일반 패턴이 이어지고 드디어 아스모덴의 피가 50%가 됐을 때였다.
갑자기 주변에서 하얀 뭔가가 몽글몽글 떠오르더니 열 마리의 유령들이 나타났다. 놈들은 움직이지 않고 유저 전원에게 쇠사슬을 걸고는 그대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보스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한 개인주의가 빽 소리쳤다.
—으앗! 끌려가기 싫어! 딜 로스 난단 말이야!
바동거리며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자 다행히도 끌려가지 않을 수 있었다. 팀원들도 끌려가지 않게 열심히 이동했다.
하지만 유령을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주하는 자신과 연결된 유령을 잡으려 스킬을 시전했다. 그러나 스킬을 날리지 못하고 부랴부랴 몸을 피해야 했다. 어디선가 창이 빠른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어디서 창이 날아오는데?”
—외곽에 있는 창이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거 같아. 조심해.
—끌려가는 와중에 창도 피하고 유령도 잡아야 된다고?
팀원들은 사방에서 날아오는 창을 피하며 유령에게서 멀어지려 열심히 달렸다. 와중에 딜러들은 자신과 연결된 유령을 잡기 위해 스킬을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이 창을 피하면서 누가 봐도 꿍꿍이 가득한 몸짓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은근슬쩍 유령에게 다가가고 있달까? 주하의 시야에 그 모습이 들어왔다.
“개주 너 뭐 해?”
—아…… 제 유령도 잡아 보려고요.
“원거리 딜러들이 잡아 줄 테니까 보스만 쳐.”
—에이, 그래도요. 잘하면 거리 될 거 같은데.
딱 봐도 유령과 닿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건만, 개인주의는 호기심을 보였다. 주하의 눈이 가느다랗게 변했다.
“너 지금 유령에 닿아 보고 싶어서 그러지?”
—사실은…… 어떻게 될지 궁금하지 말입니다?!
—야! 당장 이리 안 와?
—개주 너, 왜 쓸데없이 시간 빼려고 그래? 설마 별똥 길드에서 사주받았냐!
—으헉! 무슨 그런 무서운 소리를!
월차연차휴가의 한 방에 개인주의가 후다닥 달려와 보스에게 달라붙었다.
—너 이 자식, 우리가 지켜본다.
—아니에요! 진짜 궁금해서 그런 거라니까?!
—나중에 퍼클하고 해 보든가! 지금 왜 궁금해해!
—으흐흑 죄송합니다아…….
형, 누나들에게 혼나는 개인주의를 보며 주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패턴이 어렵지 않아서 요리조리 생각이 튀는 것 같다. 정신 바짝 차리고 감시해야 할 판이다.
원거리 딜러들은 차근차근 팀원들의 유령까지 모두 잡았다. 피 통도 생각보다 그렇게 높지 않았고, 외곽에서 날아오는 창도 위치만 잘 확인하면 미리 피할 수 있었다.
유령이 사라진 뒤에는 창을 피하는 게 더 쉬워졌다. 딜러들은 가볍게 이동하며 아스모덴을 계속해서 공격했다.
드디어 보스 피가 40%로 떨어졌다.
—아니, 진짜…… 뭐 이렇게 쉽지?
—이거 막넴 맞죠?
—……뭔가 이상한데. 난 왜 찝찝하지?
리프는 고난 없이 순항하는 공략에 계속 이상함을 느꼈다. 난도로 따지면 영웅 던전 보스 정도의 느낌? 유저들을 괴롭히기로 유명한 라나탈의 레이드가 절대 이럴 일이 없는데 말이다. 그것도 랭킹 순위를 확정 짓는 마지막 보스에서.
다들 고민하면서도 공격은 착실하게 이어 갔다. 그러자 이번에도 새로운 기믹이 나타났다.
아스모덴 좌우에서 두 마리의 마귀가 나온 것이다. 놈들은 각각 하나의 커다란 눈을 가지고 있었는데, 왼쪽에 있는 녀석은 검은 눈을, 오른쪽에 있는 녀석은 파란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좌우에서 커다란 눈만 깜박거리는 녀석들은 타깃이 되지 않았다.
어떤 공격이 나올지 긴장한 채 주시하고 있는데, 갑자기 화면이 번쩍하더니 일곱 명이 눈 깜짝할 새에 죽어 버리고 말았다.
팀원들은 당황했다.
—엥?
—뭐야?
—나 왜 죽어?
죽은 이들 중에는 멜로디도 포함되어 있었다. 선율은 아직 살아 있는 주하의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주하야, 어떻게 살았어?”
“어, 글쎄? 딱히 한 게 없어……. 그런데 방금 디버프가 하나 생긴 건 봤거든?”
“디버프? 무슨 디버프? 난 없었는데.”
“진짜? 아까 검은색 디버프 하나 있었는데. 사라지기 직전에 본 거라 설명은 못 읽었어. 마귀 아직 그대로 있으니까 다시 확인해 볼게.”
주하는 눈을 깜박거리는 마귀를 지켜보았다. 잠시 후, 앞서 말했듯이 디버프가 생겼다. 그런데 이번엔 한 개가 아니라 두 개였다. 검은색과 파란색의 디버프가. 주하는 재빠르게 마우스를 올려 설명을 읽었다.
<디버프: 반대로>
<디버프: 반대로>
둘 다 자세한 설명은 되어 있지 않고, 그저 ‘반대로’만 적혀 있었다. 뭐야, 이게 대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