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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러 줍는 힐러-121화 (121/130)

121화

벌떡! 대답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난 주하는 다급히 방으로 내달렸다. 그제야 몸을 일으킨 선율은 급할 필요가 없다는 듯 느긋하게 걸음을 뗐다. 방에 들어와 문을 잠갔음에도 주하는 불안함에 심장이 펄떡펄떡 뛰었다.

뭔가…… 뭔가, 당장이라도 다시 침대로 내던져질 것만 같았다.

“왜 그래, 주하야? 문 좀 열어 볼래?”

이런 상황에서 열겠냐고! 주하는 문에 등을 기대며 바닥에 주르륵 주저앉았다. 열기가 올라오는 목덜미를 두 손으로 움켜쥐며 고개를 푹 숙였다.

주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며 목덜미를 마구 문질렀다.

‘미치겠네…….’

“주하야.”

선율의 목소리는 점점 더 달콤해져 갔다. 밤새 들었던 ‘그’ 목소리와 똑같아서 주하는 움찔 떨었다. 기분 좋았던 감각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문 뒤에서 들리는 선율의 웃음소리, 또 계속해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주하는 결국 얼굴을 감싸며 중얼거렸다.

“……큰일 났다.”

제 마음과 달리 반응하는 신체가 너무나 야속했다. 제발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이렇게까지 몰려 놓고도 그가 밉지 않은 저도 문제일 테지.

주하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전혀 가늠되지 않았다. 저도 선율 형처럼 뻔뻔해져야 하는데 대체 언제 그렇게 될는지 모르겠다. 너무 먼 미래처럼 느껴졌다.

여전히 저를 부르는 선율의 목소리를 들으며 주하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욱신거림을 참는 것도 고역이었다.

오늘은 왠지, 쉬고 싶은 하루다.

옅은 숨이 조용히 흘러나왔다.

***

드디어 3.2 패치가 진행되었다.

여덟 시간의 긴 정기 점검이 끝나고 서버가 오픈되자마자 주하와 선율은 게임에 접속했다.

<길드원 멜로디 님이 접속했습니다.>

<길드원 카젤 님이 접속했습니다.>

[길드] 개인주의: 아싸! 내가 1빠!

[길드] 일시불: 아나...

[길드] 개인주의: 대장님! 카젤 형! 어서 오세용 >.ㅇ

[길드] 카젤: ㅎㅇㅎㅇ

[길드] 멜로디: ㅇㅇ

그 후로 길드원들이 주르륵 접속했다. 대학생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프리랜서, 아니면 개인사업자였으므로 접속은 자유로웠다. 물론 주하는 운이 좋게 휴강이었고, 막내들은 쿨하게 수업을 제쳤다. 곧 중간고사라는 건 그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듯 보였다.

[길드] 바나나: 다들 오늘 패치 내용 봄?

[길드] 개인주의: ㅇㅇ!! 전설 무기 제작 나왔쥬!

이번 3.2 패치에서 메인급 업데이트는 신규 레이드와 전설 무기 제작이었다. 이번에도 레이드는 저녁 7시에 오픈하기 때문에 현재는 막혀 있었고, 그 이외 다들 콘텐츠는 모두 적용된 상태였다.

[길드] 바나나: 전설 무기 나온 거 이번이 두 번째지?

[길드] 월차연차휴가: ㅇㅇ

[길드] 리미티드: 시즌 1 때 나오고 그 후로 안 나왔죠

[길드] 지구침략: 이번에도 쉽게 줄 생각은 없는 거 같던데ㅋ

[길드] 여름n모기: 운도 있어야 하고 노가다도 해야 하고 거기다 레이드에서 주워야 하는 재료도 있다 함;;;

[길드] 바나나: 지엠이 헬 난이도급이라며 자신하던뎈ㅋㅋㅋ

[길드] Snow: ㅋㅋㅋ 공지에다 아무나 못 만들 거라며 놀리는 거 실화냐궄ㅋㅋㅋ

[길드] 카젤: 그래도 일단 도전은 해 봐야죠ㅋㅋ

[길드] 바나나: 당연하지!!

[길드] 월차연차휴가: 오랜만의 전설템이니까 무조건 만들어야대ㅋㅋ

썩은물들은 당연하게도 전설 아이템 제작에 뛰어들었다.

첫 퀘스트는 대도시에서 받을 수 있었다. 이어지는 연퀘는 도시를 돌아다니며 NPC와 대화하는 것이었다.

대도시를 누비며 NPC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다들 한결같이 ‘별의 힘’을 언급했다. 전설에는 역시 ‘신’이나 ‘별의 힘’ 정도는 들어가 줘야 하는가 보다. 유일무이하고 완전함을 강조하기 위해선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돌다 보니 종착지는 무기 제작 NPC였다. 그는 전설 무기와 연관 있는 유일한 대장장이를 알려 줄 테니 무언가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

그것은 죄악의 탑, 100층 이상부터 나온다는 운석 조각이었다.

[길드] 개인주의: ㅇㅂㅇ 와...... 처음부터 하드한데여?

[길드] 바나나: 요즘 악탑 100층까지 올라가는 등급이 어디까지지?

[길드] 일시불: 플래가 평균 120층이고 골드 상위권이 100층 왔다 갔다 할걸여?

[길드] 여름n모기: 웬만한 고인물 아니면 거의 못 만들겠네;;

죄악의 탑 100층 이상 갈 수 있는 건 최소 50팀. 2인과 5인으로 계산하면 대략 400명이 채 되지 않는 인원이었다. 그들에게만 전설 무기를 제작할 기회가 주어진다. ‘기회’만.

[길드] 지구침략: 문제는 횟수 차감이랑 드롭률인데......

[길드] Snow: 악탑에 무조건 오래, 많이 올라가는 사람이 유리하자나;; 이제 적당히 등수만 맞추는 건 무리일 듯ㅠㅠ

[길드] 개인주의: ;;; 이로써 또 하나의 노가다가 나타나쓔ㅠㅠ

[길드] 월차연차휴가: 힘들면 전설 무기를 포기하면 되지^^

[길드] 개인주의: ^ㅁ^?

[길드] 일시불: ^ㅅ^!

[길드] 바나나: 헛소리 ㄴ

[길드] 리미티드: 딜러가 전설 무기 포기하는 건 딜러임을 포기하는 거 아닌가요?

[길드] 개인주의: ㅁㅈㅁㅈ!

[길드] 여름n모기: 그럼 탱커는 포기해도 대나? ^^;

[길드] 일시불: 탱커가 전설 무기 포기하는 건 탱커임을 포기하는 거 아닌가여?

[길드] Snow: ......

[길드] 개인주의: 힐러가 전설 무기 포기하는 건 힐러임을 포기하는 겁니다!!

[길드] Snow: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길드] 개인주의: 힛 :9

결국 어떤 역할이든 전설 무기를 제작해야 한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그것도 레이드에 진심이고, 만들 가능성이 큰 이들이 포기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제아무리 라흐니스 최상급 무기가 있다 한들 전설 무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으니 말이다.

[길드] 일시불: 궁수 전설 무기 옵션 봤는데... 정말 황홀하더라... 꼭 만들어야쥐

[길드] 개인주의: 암살자 것두 멋있어! 옵션도 그렇지만 특히 룩이 아주 그냐아아앙!! +ㅁ+

[길드] 여름n모기: 어? 옵션 나왔어?

[길드] 바나나: ㅇㅇ 홈페이지 아이템 사전 업뎃함

[길드] 지구침략: <링크: 주소> 여기

전설 무기는 기본 옵션도 그렇지만, 발동 옵션이 사기급이었다. 헬 난이도에 걸맞은 충분한 보상이라 할 만했다. 거기다 룩도 크고 화려해서 게이머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길드] 월차연차휴가: 개인적으로 이번에 보석술사 무기가 잴 이쁜듯;;

[길드] 카젤: 다이아몬드 광산 주인다운 포스죠ㅋㅋ

[길드] 일시불: ㅋㅋㅋㅋㅋㅋ 보석으로 반짝반짝반짝!

[길드] 바나나: 무기에서 떨어지는 보석 가루만 주워도 갑부 될 삘ㅋㅋㅋㅋㅋㅋ 최소 2캐럿이다

[길드] Snow: ㅋㅋㅋㅋㅋㅋ

클래스 콘셉트가 보석이다 보니 보석술사의 무기는 대체로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그중에도 이번 전설 무기는 역대급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주하는 전설 무기를 든 카젤을 상상하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길드] 멜로디: 일단 토벌전부터 끝낼 거니까 라흐니스 던전 앞으로 모여

[길드] 개인주의: ㅇㅅㅇ/ 옙

[길드] 멜로디: 지금 무기 없는 사람이 누구지?

[길드] 월차연차휴가: 저요...... ㅠㅠㅠ 대체 왜 안나옴??? 미칠 것 같아ㅠㅠㅠㅠㅠ

[길드] 바나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Snow: ㅋㅋㅋㅋ 혼자만 무기 없어?

[길드] 월차연차휴가: ㅇㅇ;;;

[길드] 일시불: 이거슨 저주인가ㅋㅋ

[길드] 월차연차휴가: 아오!!

[길드] 카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팀원 중 월차연차휴가만이 유일하게 무기가 없었다. 서버에서도 몇 자루 나오지 않아서 늦었다고 보기 어려웠지만, 하필이면 팀원들의 무기가 모두 잘 나온 탓에 비교가 되는 건 당연했다. 조금 있으면 레이드가 열리는데, 혼자만 무기가 없으니 몹시 초조해하고 있었다.

[길드] 월차연차휴가: 제발!! 이번엔 제발!!!!ㅠㅠㅠㅠㅠ

[길드] 여름n모기: 애절하다 애절해;

[길드] 바나나: ㅋㅋㅋㅋㅋ

[길드] 리미티드: 빨리 잡죠

토벌전은 이미 공략이 끝난 상태라 이제는 아이템 파밍을 위한 던전으로 전락했다. 세 개의 토벌전을 모두 돈다고 해도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스펙업을 위한 숙제와 다를 바 없었다.

그렇게 팀원들은 서버가 열리자마자 토벌전으로 향했다.

잠시 후, 손쉽게 토벌전은 끝냈지만 월차연차휴가의 간절한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액세서리류를 드롭하는 보스부터 애매한 옵션이 나와서 꽝이더니, 라흐니스에서도 마법사 지팡이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월차연차휴가는 좌절했다.

[길드] 월차연차휴가: 하........

[길드] 바나나: 레이드 시작 전엔 나올 줄 알았더니 ㅉㅉ

[길드] 월차연차휴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길드] 리미티드: 너무 간절히 바라서 그랬을지도?

[길드] Snow: ㅋㅋㅋㅋ 원래 애타면 잘 안 나오는 법이지

[길드] 카젤: 마음을 비우셨어야 했닼ㅋㅋㅋ

[길드] 월차연차휴가: 후...... 그래도 나 아직 안 죽어따... 다들 뒤통수 조심해....

[길드] 개인주의: ㅇㅅㅇ???? 네에? 잘 못 들 었 습 니 다 ?

[길드] 일시불: 지난 시즌 무기를 찬,,, 딜러가,,, 무슨 자신감일,,,까여,,,

[길드] 리미티드: 형... 그냥 맘 편하게 잔디만 깔아줘요 ^^

[길드] 월차연차휴가: %^*&[email protected]#%!&*!!!!!!

월차연차휴가는 그렇게 팀원들에게 놀림을 당했다. 이곳은 언제나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 있는 리프 길드였으므로. 하지만 우울해하는 건 잠시였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오늘은 더더욱 바쁜 날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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