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4년 동안 총 세 번 모였다는 걸 보면 뻔했다. 물론 단체 모임은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만나는 이들은 꽤 됐다. 실친들도 있고,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끼리 가끔 겜방에서 만나기도 한다고 했으니까.
그럼에도 이곳은 친목을 위시한 따돌림은 없었다. 서로의 게임 취향을 존중하고, 선을 지킬 줄 안다. 이래서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난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노래방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노는 방식도 다 똑같은 거 같아. 그렇게 내일 없이 노는 게 가능할 줄이야.”
“오늘 좀 많이 흥분하긴 했어.”
“그래? 리듬 게임 때문에 그런가? 근데…… 설마 춤을 연습해 올 줄은 몰랐어. 걔들답다고 해야 할지. 거기다 단체로 춤까지 추고…….”
아찔한 상황을 떠올리던 주하는 고개를 잘게 저었다. 그나마 추고 싶은 사람들끼리만 춰서 다행이지 저한테도 같이 하자고 했으면 도망갔을지도 모른다. 이런 쪽으로는 면역이 없어서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다. 오죽하면 ‘오늘부터 아이돌’ 콘텐츠엔 그 후로 일절 손도 대지 않았을까.
그래도 보는 입장에서 재미있기는 했다. 처음엔 절 놀리려는 의도였지만, 나중엔 자기들끼리 신나서 더 열심히 춤을 췄으니까 말이다. 짐작하건대 내일 다들 근육통을 호소할 것이다. 그들도 운동이랑은 담쌓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안 봐도 훤했다.
“다들 만나 보니까 어때?”
끙끙거릴 길드원들을 생각하며 속으로 웃고 있는데, 선율 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까지 재미있게 논 걸 다 봤으면서 새삼스럽게. 아무래도 처음 만나는 자리라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자진신고에서 친목질에 당한 전적이 있으니 걱정도 될 테고.
“게임이랑 너무 똑같아서 전혀 어색하지 않던데. 난 내가 길드 초창기 멤버인 줄 알았잖아.”
과장을 조금 보태서 말했더니 형이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다행이네. 재미있었어?”
“당연하지.”
“나랑 노는 것보다 더?”
“……그걸 왜 비교해.”
주하는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선율의 손을 잡았다. 사람이 없는 한적한 거리는 이런 용기를 내게 만든다.
장난처럼 던진 질문처럼 보이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오늘 온종일 형은 저만 지켜봤기 때문이다. 가끔은 애달프게, 가끔은 불만스럽게 시선을 보내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당연히 형이랑 노는 게 더 재미있지.”
“그런 것치곤 너무 즐거워하던데.”
“그야, 형이랑 있으면…….”
주하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돌렸다.
즐거운 것도 있지만, 그보단 새롭게 느끼는 감정들이 더 많았다. 이렇게 손을 잡거나 안겨 있거나 키스할 때마다 점점 욕심이 커졌다. 부끄럽고 그래서 때론 도망치고 싶지만, 내심 더욱더 가까이 닿고 싶었다.
이보다 더 가까워지면 어떤 느낌일까, 어떤 기분일까. 자꾸만 상상하게 된다. 스스로 꽤 담백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봐도 그렇진 않은 것 같다.
궁금하고 알고 싶은 건 많지만, 이상하게도 꼭 마지막에 제동이 걸린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아는 길이라고 하더라도,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 두려울 수밖에 없는 것처럼.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가야 할 길. 그렇다면 조금씩, 천천히, 한 걸음씩 내디뎌야 하지 않을까?
저 또한 좋아하는 사람과 닿고 싶은 남자였으니.
“있으면?”
생각을 정리하는 짧은 시간마저도 기다릴 수 없는지 선율 형이 대답을 재촉했다. 힐끔 쳐다보자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다.
“있으면…….”
말을 길게 늘이며 어떻게 이어 갈지 고민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주하는 잡고 있던 손을 풀며 앞으로 뛰어나갔다.
“형, 저기 대리 기사님 오신 거 같은데?”
다급히 붙잡으려는 손짓은 일부러 외면했다. 제게 빠르게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며 뒤를 돌아보자 무겁게 가라앉은 눈빛과 마주쳤다. 주하는 잠시 고민하다가 눈을 접어 웃으며 말했다.
“우리도 집에 가자. 슬슬 졸려.”
“강주하.”
“오늘은 그냥…… 형 집에서 잘래, 괜찮지?”
“…….”
예상치 못한 주하의 말에 선율은 우뚝 멈춰 섰다. 매번 칼같이 집으로 돌아가던 그가 오늘은 여지를 보인다. 설마…… 취한 건 아니겠지? 의심스럽게, 그렇지만 열기를 숨길 수 없는 눈빛으로 주하를 쳐다보았다.
몇 걸음 떨어져 있던 주하는 그 뜨거운 시선에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했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마. 잠만 잘 거야.”
“나랑, 잔다고?”
“잠! 잠만 잔다고!”
“그래, 나랑 잔다고.”
선율이 묘한 말로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그 모습을 본 주하는 덜컥 겁이 났다. 제가 상상했던 것과 현실은 왠지 다를 것 같아서. 안 되겠다, 오늘은 일단 후퇴해야겠다. 역시 급할 필요는 없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성큼성큼 걸어오는 선율에게 손목이 붙들려 버렸다.
“가자, 집에.”
그대로 앞으로 걸어가는 선율에게 주하는 여지없이 끌려갔다. 무어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다급해 보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입술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용기를 내서 한 발 내디뎠는데 그대로 한입에 삼켜진 것 같았다. 천천히 다가가려 했던 게 무색하게 어떤 열감이 제게도 옮겨붙은 듯하다. 분명 단순하게 형 집에서 자는 것부터 시작하려 했는데 단숨에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래도 괜찮을까? 아직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크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어쩌면…… 그래, 어쩌면. 생각이 많은 게 꼭 좋은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란 건 알고 있지 않았던가. 그도 원하고 있고, 저 또한 닿고 싶으니.
붙잡힌 손목에서부터 팔 전체로 올라오는 찌릿함을 느끼며 주하는 눈가를 문질렀다. 그걸로도 얼굴에 몰린 열이 내려가지 않아 입가를 가려 버렸다.
빨라진 걸음에 맞춰 반쯤 뛰듯이 걸었다. 무섭게 뛰어 대는 심장 탓에 숨을 쉬는 게 조금은 벅찼다.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기분을 느끼며 주하는 선율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은 서늘했지만, 몸은 아직도 뜨거웠다.
‘……더워.’
버티기 힘들 정도의 더위였다.
***
무슨 정신으로 형의 집까지 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현관문이 열리고 그 안으로 떠밀린 채였다.
허리는 언제 끌어안았는지 이미 빈틈도 없이 안겨 있었다.
“읍, 흐읏.”
뒷덜미를 붙잡아 끌어당기는 힘에 맞닿은 입술이 뭉개졌다. 저절로 입이 벌어지니 키스는 점점 더 농밀해졌고, 몸도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이런 키스는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해 왔던 키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전에 하던 건 장난이었을까 싶을 정도로 결이 달랐다. 전에는 다정한 느낌이 들었다면 지금은 잡아먹히는 것 같았다.
주하는 따라갈 수 없는 속도에 숨을 헐떡였다.
“읏, ……흐.”
선율의 어깨를 붙잡은 손은 그를 밀어내려는 건지 끌어안으려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너른 어깨에서 방황하기만 했다. 그 혼란 속에서도 맞붙은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머릿속까지 푹 젖을 정도로 자극적인 키스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고막을 두드려 대는 건, 미친 듯이 뛰어 대는 심장 박동과 습한 마찰음이었다.
산소가 모자라 정신이 아득해질 무렵 입술이 떨어졌다. 다급히 공기를 들이마시며 흉곽을 부풀리고 있는데, 선율이 주하의 빗장뼈 위, 움푹 들어간 곳에 입술을 묻었다. 그동안 참았던 것을 보상받으려는 건지, 그는 좀처럼 주하를 가만두려 하지 않았다.
“아, 형…….”
“왜.”
살갗을 통해 울리는 그 음성에 주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긋하고 다정했던 선율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하게 드러나 있었다.
“좀, 윽…… 천, 천히. 흐으.”
그래서 거절의 말은 할 수 없었다. 다만 조금만 천천히 해 주면 저도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대로 휩쓸리다간 정신을 놓을지도 모르겠다.
주하는 뒤늦게 선율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제발 따라갈 수 있게 봐달라는 애원을 담아서. 하지만 생각보다 놀랐는지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을 선율이 모를 리가 없었다.
“…….”
그는 잔뜩 긴장한 주하를 꽉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이렇게 놀라게 할 의도는 없었는데. 주하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하겠다고 다짐해 놓고 용기 내서 먼저 다가온 그에게 달려들다니. 차라리 주하가 술에 취했다면 자제할 수 있었겠지만, 맨정신으로 한 말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선율은 크게 한숨을 쉬고선 주하를 껴안은 채로 번쩍 들었다. 엉덩이를 받치고 추켜올리자 깜짝 놀란 몸이 와락 안겨들었다.
“혀, 형?”
방황하는 두 다리를 자신의 허리에 감고, 걸음을 옮기자 주하가 그제야 슬그머니 상체를 뗐다. 서 있을 때는 볼 수 없는, 입술 아래 작은 점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선율은 그 점에 입을 맞추며 다정하게 말했다.
“내가 너무 급했지, 미안.”
“…….”
“천천히, 하나씩 할 테니까 긴장하지 마. 네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릴게.”
어느새 방으로 들어온 선율은 주하를 침대 위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한쪽 무릎을 굽혀 주하의 앞에 앉은 그는 현관에서 채 벗지 못한 주하의 신발을 하나씩 벗겼다. 신발을 신고 방까지 왔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주하가 움찔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선율이 그런 주하의 허벅지를 지그시 눌렀다.
벗긴 신발을 바닥에 가지런히 내려놓은 선율은 주하의 무릎을 움켜쥐며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기분 좋은 것만 하자.”
“기분…… 좋은 거?”
“응, 네가 좋아할 만한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