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개인주의와 일시불은 어찌나 준비를 철저하게 했는지 캐릭터가 추는 춤 그대로를 칼군무로 보여 주었다. 나중엔 바나나와 Snow가 노래를 부르고 막내들은 춤만 열심히 추는 기행을 선보였다.
주하는 차마 이 광경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려 보려 했지만, 월차연차휴가와 여름n모기, 그리고 리미티드까지 합세해서 쪼아 대는 탓에 시선을 돌리지도 못했다. 선율에게 도와 달라고 헬프를 보냈지만, 그는 오히려 흥미로워하며 막내들을 지켜보았다. 주하에게는 답도 안 보이는 구렁텅이였다.
“잘 춘다! 준비 열심히 해 왔네!”
“멋지다! 우리 막내들!”
“아이돌 해도 되겠는걸?”
길드원들과 벌꿀오소리는 잘한다며 손뼉을 치며 웃었다. 그에 화답하듯 개인주의와 일시불은 손 키스를 열심히 날리기 시작했다.
주하만이 민망함에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디론가 훌쩍 사라지고 싶었다.
드디어 길고 길었던 한 곡이 끝났다. 3분 40초가 이렇게 길었던 적은 리듬 게임을 했던 그 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안도의 숨을 내쉰 것도 잠시, 한 곡으로 끝날 줄 알았던 놀림이 다음 곡에서도 여지없이 이어졌다.
개인주의와 일시불이 두 번째 곡에서 무려 ‘오늘부터 아이돌!’을 처음 오픈했을 때 췄던 춤을 그대로 재현했기 때문이다. 노래는 달라도 박자는 맞았는지, 골반을 흔들고 몸을 쓸어내리는 동작이 너무나 잘 맞았다.
“이 녀석들! 대단한데?”
“눈물겨운 준비성이다…….”
“내가 이래서 막내들을 예뻐할 수밖에 없지!”
“어휴, 이쁜 것들!”
“누나들도 와서 춰요!”
결국 바나나와 Snow도 합류해서 같이 춤을 춰 대기 시작했다. 그다지 어려운 춤도 아니었고, 반복 동작이 많아 따라 하는 건 쉬웠다. 그러다 보니 사람이 한두 명씩 계속 늘어났다. 나중엔 벌꿀오소리도 끼어들어 신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주하는 제가 지금 보고 있는 광경이 꿈이길 바랐다. 현실에서도 이렇게 놀 수 있는 사람들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하아…….”
“쟤네 원래 이렇게 놀았어. 피할 수 없으니까 그냥 즐기는 게 나아. 보는 재미는 있잖아.”
선율은 다리를 꼰 채 느긋하게 구경하며 조언했다. 주하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익숙해질 수 없을 것 같은데.”
“괜찮아,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야.”
선율은 슬쩍 주하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웃었다. 리프 길드에 온 이상 넘어야 할 산이었다. 같이 춤을 추는 건 보지 못하겠지만, 주하도 곧 적응할 터였다. 나중엔 점수를 매기는 심사위원이 될지도 모르지.
그날을 떠올리며 선율은 떨떠름해하는 주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나마 위로가 됐는지 이후에는 주하도 뛰어노는 비글들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노래방은 아직 두 시간이 남아 있었다.
***
말했던 대로 1차부터 3차까지 결제는 모두 선율이 했다. 바나나와 Snow가 야심 차게 준비했지만, 아쉽게도 선율의 카드에 흠집이 나는 일은 없었다.
선율이 ‘예상했던 것보다 덜 나왔네’라며 안타까워하자 두 사람은 땅을 치며 후회했다. 작디작은 흠조차 내지 못했다니. 다음엔 기필코 ‘악’ 소리 나게 해 주겠다며 선전포고를 하자 선율은 열심히 하라고 응원까지 해 주었다. 바나나는 결국 씩씩거리며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열심히 노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더니 모임이 끝날 때쯤엔 새벽 3시였다.
“자, 그럼 이만 해산!”
“들어가 보겠습니다!”
“재밌었어요.”
“다음에 봬요!”
다들 노래방에서 나오자마자 깔끔하게 인사를 나눴다. 여전히 흥분으로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밤샐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 쿨한 모습에 주하는 의외의 시선을 보냈다.
“더 놀자고 할 줄 알았는데 안 그러네?”
“아쉬운 게 있어야 다음이 더 기대되잖아.”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리미티드의 설명에 주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묘한 신경전도, 사소한 말다툼도 없는 유쾌한 모임. 신나게 놀고, 술도 기분 좋을 정도로만 마시고, 약간의 아쉬움을 남긴 채 헤어지는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무척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너도 조심히 들어가고, 다음에 보자.”
리미티드 역시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게임에서는 조용해서 잘 몰랐는데, 이렇게 실제로 만나고 보니, 재미있는 구석이 있는 녀석이었다. 제가 불편할까 봐 비밀까지 털어놨으면서, 끝까지 놀려 대는 게 리프답다고 해야 하나. 괜히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래, 들어가.”
그렇게 녀석과 인사를 하고 있는데, 월차 형이 다가왔다.
“해민아, 가자.”
“해민이요?”
“아, 리밋이 본명이야.”
주점과 노래방 모두 룸이었던 까닭에 다들 아이디로 부르는 걸 거리끼지 않았다. 그래서 딱히 본명을 오픈하지 않았는데, 리미티드의 이름은 해민이란다. 월차 형은 태……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역시 한꺼번에 이름을 외우는 건 쉽지 않았다.
“지금 택시 왔는데, 우리 같은 방향이거든. 오늘 재미있었어, 먼저 간다? 대장님도 안녕!”
“네, 형. 조심히 들어가세요.”
“들어가.”
두 사람은 가볍게 손을 흔들곤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다른 이들도 인사하고 보냈더니 마지막으로 남은 건 바나나와 지구침략, 그리고 벌꿀오소리였다.
“그럼 애들도 다 보냈으니까 우리도 이만 간다. 벌꿀이 집은 어디야? 데려다줄게.”
바나나의 질문에 벌꿀오소리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언니. 택시 타고 가면 돼요.”
“아까 같은 방향으로 가는 애들 없었어?”
“전 사바나에 살잖아요. 당연히 방향이 같을 수 없죠.”
“뭐?”
벌꿀오소리의 장난에 바나나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러더니 지갑을 꺼내 5만 원권 한 장을 그녀에게 쥐여 주며 말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 도착하면 연락하고.”
“감사합니다.”
벌꿀오소리는 씨익 웃으며 현찰을 받았다. 바나나와 지구침략과 인사를 나눈 그녀는 고개를 휙 돌려 선율에게 말했다.
“맛있게 잘 먹고, 재밌게 놀다 갑니다. 멜로디 님.”
“뭐.”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관심 없다는 투로 말하는 선율을 주하가 팔꿈치로 툭 건드렸다. 제대로 인사하라고 무언의 압박을 보냈지만, 선율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기만 했다.
오늘로써 바나나가 말한 평소의 선율이 어떤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그는 모임 내내 저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달리했다. 같은 사람인가 의심이 들 정도로. 그래서 그런지 괜히 눈치가 보였다.
“뭘 눈치 봐? 저분 저러는 거 새삼스럽지도 않은데.”
벌꿀오소리는 잘 알고 있는지 대수롭지 않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제는 판단할 여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주하는 벌꿀오소리의 단단한 정신력에 찬사를 보내곤 지친 음성으로 말했다.
“새삼……스럽지 않지. 그래…….”
“넌 모르겠지만, 사사게에 글 올리는 걸로 우리가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 알아?”
“싸웠다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주하는 놀란 눈으로 선율과 벌꿀오소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실제로 싸웠다는 게 아니고, 누가 더 제대로 엿을 먹일 수 있는지에 관해 토론을 했다는 것에 가깝지.”
선율이 덧붙인 설명이 더 가관이었다. 참 별걸로 아웅다웅했다 싶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벌꿀오소리는 당당하게 가슴을 쫙 펴며 말했다.
“어차피 내용은 똑같으니까 결국 승패를 가른 건 누가 더 자극적으로 쓰느냐였지!”
“…….”
“사사게는 너무 진지 빨면 재미없잖아. 약 올리기도 쉽지 않고.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말발로 밀리는 사람은 아니다 이 말이야.”
“……그렇긴 하지.”
“어쨌든 글 쓰고 검수도 받고 그러면서 대화를 좀 했는데, 그때 깨달았어. 저 사람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효율충이라는 걸.”
주하는 씁쓸하게 웃었다. 저게 그나마 나은 표현이라는 걸 여기 있는 모두 지나치리만큼 잘 알고 있었다. 벌꿀오소리는 그런 주하의 마음을 이해하곤 피식 웃었다.
“너랑 잘 놀면 됐지, 뭐.”
“……그래.”
“아무튼, 오늘 진짜 오랜만에 재밌게 논 것 같아. 다음에 또 와도 되지? 이런 모임이면 백 번도 더 올 수 있어.”
“비행깃값은 괜찮고?”
“사바나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고.”
장난을 그대로 받아치는 벌꿀오소리의 센스에 주하도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예상치 못한 만남이었지만, 이렇게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역시 자진신고에 들어갔던 게 마냥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좋은 사람을 알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택시 왔네. 그럼 다들 들어가세요. 먼저 갑니다.”
언제 예약을 해 놨는지 택시 한 대가 앞에 멈춰 섰다. 벌꿀오소리는 본인 성격처럼 뒤끝 없이 인사를 건네곤 냉큼 택시에 올라탔다.
“잘 가.”
“조심히 들어가.”
“바이.”
벌꿀오소리를 태운 택시는 뻥 뚫린 새벽길을 시원하게 달려갔다.
사람들을 다 보내고 나서야 대리 기사가 도착했다. 벌꿀오소리가 가는 걸 같이 지켜보던 지구침략과 바나나도 주하와 선율에게 인사를 건넸다.
“우리도 이만 갈게. 나중에 보자.”
“우리 미남 카젤이 잘 모셔다 놔라, 주선율.”
“알아서 할 테니까, 가라. 형, 들어가.”
선율은 어서 가라며 손을 휙휙 내저었다. 여전한 모습에 바나나는 쯧, 하고 혀를 찼지만, 그 옆에서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주하를 보고 마음에 평온을 얻었다.
“다음에 봬요.”
“그래, 들어가.”
바나나는 두 손을 마구 흔들며 사라졌다. 두 사람을 태운 차는 금세 골목길로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드디어 둘만 남게 되자 주하는 조용한 새벽 밤거리를 응시했다. 그러다 바람 빠진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정신없네.”
“만날 때마다 이래. 그래서 자주 안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