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지역 업적은 80% 달성 시 올스탯 10이 증가하고, 100% 달성 시 올 능력치 10이 증가한다. 영구적으로 오르는 터라 레이드 퍼클을 노리는 유저라면 지역별로 업적 100% 달성은 필수 사항이었다.
“그러다 나랑 주하는 선클37)하고 너희는 눕클38)하면 참 재미있겠네.”
개인주의와 월차연차휴가는 선율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조용히 찌그러졌다. 퍼클을 못 하는 것도 문제지만, 눕클도 자존심에 금이 가는 일이었다. 기믹 실패로 죽든, 스탯이 모자라서 죽든 결국 다 본인 실수로 죽는 것이니까 말이다.
“……업적 채우겠습니다. 어흐흑.”
“놀리려다가 오히려 당했네.”
지구침략의 깔끔한 정리에 팀원들은 자숙의 시간을 가졌다. 주하만이 만족스럽게 웃을 뿐이었다.
“아, 몰라! 일단 오늘은 마셔!”
“나도 마실 거야아아!”
“달리자아아!”
“오늘 대장 카드에 적어도 흠집은 내고 말 테다!!”
암울한 미래는 미래고, 당장은 즐겨야 함이 옳았다. 바나나와 개인주의, 일시불과 월차연차휴가는 서로 크로스를 외치며 목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지구침략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끔은 쟤네 보면 피를 나눈 형제처럼 보여.”
“저 정도면 형제 맞죠.”
술잔을 기울이던 리미티드도 동의했다. 그러다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린 그는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주하를 발견했다. 리미티드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궁금한 게 많은 얼굴이네.”
주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리미티드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
“……리밋아, 너.”
“어.”
불안함은 사라졌다고 해도 궁금증은 여전했다. 주하는 리미티드에게 소곤거리며 물었다.
“혹시 뭐…… 알고 있는 거야?”
그러자 리미티드의 눈이 길게 휘었다. 눈동자가 다 가려질 만큼 눈웃음을 친 그는 가까이 다가온 주하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다 알고 있는 거 맞고, 축하하는 것도 맞고, 떠들어 댈 생각은 없고, 싫어하는 것도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
“사실 나도 좋아하는 사람 있거든.”
“어? 진짜?”
“응, 태인 형. 아…… 월차 형 말이야.”
주하가 깜짝 놀라 쳐다보자 리미티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성애자라 꿈도 못 꾸지만 말이야.”
뭔가 굉장한 걸 알게 된 기분에 주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리미티드가 월차 형을 좋아했다니.
“네 비밀을 알게 됐으니까 나도 내 비밀 하나 알려 주는 거야.”
“……괜찮아?”
“괜찮지 않을 게 뭐 있겠어. 그냥…… 평소랑 똑같아.”
리미티드는 주하에게 기울였던 몸을 세우곤 슬쩍 웃었다. 턱을 괸 채 느긋한 표정을 짓던 그는 누군가에게 갑작스럽게 끌려갔다. 리미티드의 어깨를 끌어안고 짓궂은 표정을 짓는 이는 월차연차휴가였다.
“둘이 무슨 작당을 하는 거야? 나도 끼워 줘.”
“……형, 술 냄새 나요.”
“술 마셨으니까 나지. 너도 날걸?”
“형만큼은 아닐걸요.”
“어차피 나중엔 다 똑같아질 테니까 괜찮아.”
리미티드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는 월차의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에게 안겨 있던 리미티드는 그저 긴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반쯤 포기한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던 주하는 어색하게 웃었다. 리미티드가 얼마나 심란할지 조금은 이해가 돼서 안타까웠다.
“내 듀오는 언제쯤 살갑게 말하려나.”
“형이 정신 차리면요.”
“나야 언제나 제정신이지!”
“그만 놔줘요……. 허리 아픈데.”
어정쩡하게 월차연차휴가에게 안겨 있던 리미티드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그에게서 벗어났다. 얼핏 봐서는 귀찮아하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귀 끝이 살짝 붉어져 있는 게 보였다. 너도 고생이구나. 대놓고 꼬시는 것도 그렇지만, 이렇게 자각 없는 플러팅도 문제였다. 주하는 월차연차휴가를 향해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돌려 선율을 보았다.
무슨 일이냐는 듯 눈썹을 까닥거린 그는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길드에 문제아들이 많네.”
“응? 갑자기?”
“있어, 그런 게.”
아무래도 리밋이랑은 많은 게 통할 것 같았다. 의외의 수확에 주하는 미소 지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너무 많이 마시지 마. 또 필름 끊기면 안 되니까.”
“아…… 형. 인제 그 말 그만하면 안 될까.”
“취했다 싶으면 보쌈해 갈 테니까 정신 꽉 잡아. 안 그럼 당혹스러운 아침을 맞이할 수도 있으니까.”
“……뭐? 무슨 소리야?”
“왜, 그런 거 있잖아. 술에 취하고 다음 날 일어났는데 격렬한 밤을 보낸…….”
주하는 다급히 선율의 입을 틀어막고는 눈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만하라며 조용히 소곤거리자 선율이 눈을 가득 휘며 주하의 손바닥에 몰래 입을 맞췄다.
깜짝 놀라 손을 떼자 선율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묘한 분위기를 흘려 대는 선율의 모습에 주하는 할 말을 잃고 입만 벙긋거렸다. 탁자 아래로 숨긴 손이 욱신거릴 정도로 화끈거렸다.
“또 무슨 헛소리를 했길래 주하가 네 입을 막냐?”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뚱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바나나였다. 주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신경 꺼.”
“넌 심술 좀 그만 부리고, 예뻐할 거면 확실하게 예뻐해.”
“지금도 충분히 예뻐하고 있는데?”
“그런데 애가 저렇게 놀라냐?”
대화하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바나나가 가리킨 주하를 바라보았다. 크게 뜬 눈과 붉어진 얼굴이 꽤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다들 의아해하며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닫혀 있는 문 너머에서 누군가가 노크했다.
똑, 똑.
더 올 사람이 없을 텐데 누구지? 주하에게 쏠렸던 시선이 단번에 문으로 향했다. 누군가 네, 하고 대답하자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어떤 인영이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오, 여기가 리프 길드 정……??”
들어온 이는 처음 보는 여자였다. 하늘하늘한 원피스에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 살짝 처진 눈꼬리에 가늘디가는 선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청순함은 이런 것이다, 라고 보여 주는 모습에 사람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많은 시선을 받은 여자는 익숙하다는 듯 씨익 웃고는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구경 다 하셨으면, 벌꿀오소리 이제 난입합니다?”
갑작스러운 폭탄 발언에 사람들은 경악하다 못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벌꿀 님이라고?”
“헐? 벌꿀 님이 여길 어떻게?”
“에엥???”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녀가 이곳에 나타난 것도, 게임에서와 실제 모습이 이렇게 다를 거라는 것도.
“그만 좀 쳐다봐요. 내 얼굴 닳겠네.”
벌꿀오소리는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와 주변을 쭉 훑어보았다. 그러다 바나나와 눈을 마주치곤 엄지를 치켜들었다.
“나나 언니, 저 왔어요.”
“응, 어서 와.”
바나나는 손을 흔들며 혼자만 태연하게 반겼다. 벌꿀오소리를 부른 건, 누가 봐도 그녀였다.
대체 언제 친해졌는지 신기할 뿐이다. 주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어 버렸다.
“그런데, 카젤 님은 어딨어요?”
벌꿀오소리의 질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주하에게 몰려들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주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사바나에서 오시느라 힘들었겠네요.”
“초원지대를 열심히 달려서 왔죠.”
주고받는 장난스러운 대화에 주변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벌꿀오소리의 진정한 모습은 지금부터였다.
“그런데 리프 정모 하면 한다고 말을 해 줘야죠. 전우에 대한 예우가 너무 없는 거 아님? 내가 그렇게 열심히 스샷이랑 영상도 찍고 멜로디한테 핀잔 들어가며 온종일 글만 썼는데! 거기다 막판엔 같이 자진신고 녀석들 잡지 않았나? 이 정도면 보통 한 번쯤은 나오라고 권유할 텐데? 길드 정모라고 아주 칼같이 선 긋는 거 아님?”
필터 없이 쏟아내는 벌꿀오소리의 저격에 주하는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정말 잘못한 것만 같았다. 당연히 초대했어야 했는데 물어보지 않았다니.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쪼그라든 기분이었다.
“나나 언니가 말 안 해 줬으면 모임 끝나고 알았을 거 아니에요.”
“……그게.”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은데. 듣고 싶은 것도 많고!”
자진신고와 리프의 싸움이었다고 해도 벌꿀오소리 또한 사건의 중심에 있는 당사자였다. 별똥 길드와 달리 리프는 직접적으로 자진신고와 싸웠으니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을 것이다. 거기다 같은 적을 둔 전우로서 하고 싶은 말도 많을 테고.
“카젤 님, 은근히 무심한 거 알아요?”
“……죄송합니다.”
“내가 진짜 두고두고 기억하고 있을 거야.”
“맞아, 맞아. 카젤 형이 너무했네요!”
“그러게, 벌꿀 님도 불렀어야지.”
주하는 벌꿀오소리의 기세에 밀리고, 길드원들에게 당하며 저도 모르게 몸이 뒤로 빠졌다. 사방이 온통 적이라니. 빙글거리며 웃고 있는 길드원들이 얄미울 지경이었다. 그때, 단단하게 받쳐 주는 온기가 느껴졌다. 어깨를 감싸는 커다란 손에 고개를 돌리자 선율이 보였다. 주하는 그제야 다행히도 제 편이 있다는 걸 느꼈다.
안도의 한숨을 쉰 주하는 어색하게 웃으며 벌꿀오소리에게 말했다.
“일단…… 이리 와서 앉아요.”
“늦었지만, 정식으로 초대받았으니 마음껏 먹겠습니다?”
주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벌꿀오소리는 그제야 씨익 웃었다. 반쯤은 장난이라는 걸 알아도 역시나 벌꿀오소리는 벌꿀오소리였다. 도무지 이길 수가 없다.
주하는 바나나 옆에 앉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작게 저었다. 선율도 이 상황이 재미있는지 그저 웃고만 말았다.
한바탕 폭풍이 몰아치고서야 드디어 평화가 찾아왔다.
딜러 줍는 힐러(연재)
전자책 발행일 2022년 7월 8일
지은이 유체이탈
펴낸곳 (주)다산북스
주소 경기도 파주시 회동길 490 4층
ISBN 979-11-306-9208-1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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