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지금까지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사과받는 건 생각도 안 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사라지는 것 또한 예상하지 못했다. 사실이 밝혀지고 나서야 나가떨어질 줄 알았는데 말이다. 여름n모기와 개인주의도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자기들은 결백하다 외쳐 놓고 말이지.”
“저도 궁금해요. 답이 안 보여서 걍 토낀 건가?”
썼던 글이랑 댓글을 모두 지우고 사라진 천상검과 자진신고는 패배자, 거짓말쟁이로 낙인이 찍혔다. 그러니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줄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도망친 시점에서 이미 의혹을 남겼기 때문이다.
“질러 놓고 불안했나 보지. 걸리면 그냥 생매장이잖아.”
“그걸 왜 처음부터 생각하지 못했냐는 거죠. 어차피 시간 지나면 다 밝혀질 일이었는데.”
“이미 걸린 거 아니었을까? 그래서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잠적했을 수도 있지.”
“생각이란 걸 하는 녀석들이었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나오지도 않았겠지. 다들 잘 모르나 본데…… 요즘에 이상한 애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월차연차휴가의 냉소적인 대답에 다들 피식 웃고 말았다. 주하도 공감하는 바였다. 멀리 가지 않고 막공만 가도 그런 애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이었다.
“근데 이제 와서 물어보지만…… 카젤이 너 자진신고에 있을 때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
주하는 월차연차휴가의 질문에 과거를 떠올렸다. 분명 처음부터 그리 정다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블렉체리가 들어오고 나서 사이가 더욱더 멀어지는 것은 느꼈다. 어차피 저와 성향이 맞는 사람들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레이드는 그와 별개라고 생각했다.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사람 사이의 친분보다는 실력과 노력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지금에 와서야 그런 구도가 이상했다는 걸 알았지만, 당시에는 까맣게 몰랐다. 레이드도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했는데, 너무 눈치가 없었던 거지.
주하는 씁쓸하게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래 자진신고에 들어간 초반부터 서로 데면데면했어요. 그러다 레이드 진행하면서 거리는 더 벌어진 거 같아요.”
“왜?”
“들어 보니까 제가 공략에 너무 참견해서 짜증 났다고 하더라고요. 엄연히 공대장이 있는데 제가 다 해 먹으려고 한다고.”
“……그건 무슨 헛소리야?”
“그러게? 공략이 나와 있는 것도 아니고, 다 같이 처음 하는 건데 무슨 참견?? 누구든 먼저 공략법을 알아내야 빨리 잡지.”
바나나와 월차연차휴가는 어이없어하며 반박했다. 주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알아냈으면 공대장한테 귓속말로 말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던데요. 사실 레이드 팀마다 분위기도 다르고 규칙도 다르니까 그럴 수는 있죠. 근데 그 당시에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나중에 저 쫓아낼 때 뒤늦게서야 그러더라고요.”
“와 씨……. 그걸 가만히 뒀어?”
“어이없어서 멍하니 있다가 순식간에 강퇴당했는데요, 뭐.”
“허, 참 나.”
“아무튼 자진신고에서는 처음부터 그런 분위기였어요. 레이드만 같이 한다, 같은 느낌? 길드 들어와도 인사 잘 안 해 주고, 대답도 어쩌다 한번 하고. 저한테 뭐 물어볼 때나 대화했지 거의 말도 안 했거든요.”
“……너도 친해질 생각이 없었어?”
바나나가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주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딱히…… 친해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더라고요. 지난 시즌 레이드 때 살금이가 먼저 리프한테 도발했잖아요. 그때 저랑 벌꿀 님이랑 너무 어이가 없어서 아무런 말도 못 했어요. 선을 너무 많이 넘은 거 같아서.”
“아, 그때……. 진짜 우리도 엄청 열 받았었지.”
당시에 리프 사람들이 화났다는 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싸울 때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지켜봤으니까 말이다.
개인주의와 일시불은 사냥개처럼 달려들었고, 다른 길드원들도 이에 질세라 저격 글을 올렸다. 이번에 자진신고와 싸울 때랑은 결이 조금 다른 느낌이었지만, 그때도 꽤 분노했던 것 같다. 다시 생각해 봐도 길드전을 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다.
“레이드 시작 전에는 친해지려고 노력했는데, 그날 이후 저도 딱 선이 그어지더라고요. 적당히 지내면서 레이드만 하면 되지, 하고. 레이드 퍼클은 정말 하고 싶어서 나름 욕심부린 거예요.”
“……처음부터 그런 분위기였으니까 이상하다고 못 느꼈고만.”
“사실 눈치 없었던 것도 맞죠. 바보같이 천상검을 믿은 것도 있고.”
“그건 그래.”
바나나를 비롯한 길드원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하는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 올리며 불만스레 그들을 훑었다. 다들 시선이 마주쳐도 당당하게 ‘네가 말한 거잖아’라며 은근슬쩍 웃기만 했다.
“……솔직히 그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는 것도 있어요. 보통 레이드 팀 인원을 조정할 때는 서로 논의하고 결정하잖아요. 저는 너무 갑작스럽게 강퇴당한 거라 준비할 틈도 없었죠.”
제 바보스러움이 너무 부각되는 것 같아, 주하는 핑곗거리를 찾아 좀 더 설명을 이어 갔다. 다행히도 먹혔는지 다들 미간을 찡그리며 호응했다.
“맞아, 누가 그렇게 제멋대로 구냐. 그건 기본 예의가 안 되어 있는 거지. 살다 살다 그런 놈들은 처음 본다.”
“형, 갑자기 길드 사라지고 접종했을 때 얼마나 놀랐다고요.”
“그래, 노리던 녀석이 접는 줄 알고 얼마나 식겁했다고.”
“근데 우리 대장님이 어떻게 설득했어요? 나 진짜 너무 궁금했는데! 그때는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까 봐 묻지도 못했어요!”
일시불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받으며 주하는 선율에게 고개를 돌렸다. 길드원들이 무슨 말을 하든 주하만 바라보던 선율은 심드렁한 낯을 지우고 미소를 그렸다.
“……그건.”
그날 일을 말해야 할까 고민하는 주하를 대신해 선율이 입을 열었다. 느긋한 음성이었다.
“같이 게임 하자고, 퍼클이 어떤 느낌인지 알려 준다고 꼬셨지.”
“와……! 역시 우리 대장님!!”
개인주의의 감탄에 주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맞다. 저런 말도 했었지.
그날의 기억엔 제가 아프지 않길 바랐고, 그러면서도 본인에게 오길 원했다던 선율 형의 모순된 모습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고백과 다를 바 없었다. 그때는 왜 몰랐던 건지, 정말 눈치가 더럽게도 없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 기분이었다.
“역시 카젤이도 주선율처럼 썩은물이었어.”
“대장님 텐션 따라갈 때부터 알아봤어. 절대 흔하지 않거든.”
“다 같은 썩은물끼리 상중하 나누지 마시죠.”
주하는 깨끗한 척하는 바나나와 월차연차휴가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접속 시간은 팀원들 모두 비슷비슷한데 어디서 한 발 빼려는 건지. 자진신고를 잡는 와중에도 던전과 필드, 평판작도 꾸준히 한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카젤이 네가 모르나 본데, 썩은물에도 등급이 있어요.”
월차연차휴가는 주하의 말에 손가락을 좌우로 까닥거리며 설명했다.
“다 같은 시간을 사용한다 해도 어떻게 활용하냐에 따라 다르거든? 그중에서 우리 대장님은 정말 탑 클래스야.”
“뭐가요?”
“효율이 정말 남다르셔. 같은 시간을 투자하는데 대장님만 저 앞에 있는 거야. 그래서 우리도 한번 똑같이 해 봤거든? 와…… 그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무슨 기계인 줄. 같이 사냥하고 같이 이동하는데 쫓아갈 수가 없어.”
주하는 선율의 게임 스타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투자한 시간만큼 최대치를 뽑아내야 하는 건 당연하지 않나? 더구나 라나탈은 노가다가 중요한 게임이다. 1초라도 허투루 쓸 수는 없었다.
동선도 당연히 따져 봐야 하고, 어떻게 하면 최대 효율을 낼 수 있는지 고민해야 했다. 사냥할 때, 채집할 때, 업적 포인트를 올릴 때, 던전이나 죄악의 탑을 진행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게임을 하는 모든 시간은 내가 강해지기 위해 투자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다들 그렇게 하지 않아요?”
“어이쿠, 보통은 그렇게 못 한답니다. 카젤 님.”
주하가 여전히 의아해하자 월차연차휴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래서 썩은물에도 등급이 있다니까.
“너 지금 업적 포인트 얼마나 했냐?”
“울부짖는 평원은 100%고 샤하스모르 지역은 80%? 나머지는 50% 조금 넘었을걸요?”
“헐…….”
“미쳤다.”
주하가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자 개인주의가 슬쩍 끼어들었다.
“형, 저희 지금 100% 채운 거 하나도 없어요. 아니 80%도 없어요. 50%만 겨우 넘긴 정도인걸요.”
“자진신고 잡는다고 너무 열중해서 그런 거 아냐?”
“형이랑 대장님 킬수 보면 그렇지도 않아요. 저희랑 비슷해요.”
“…….”
주하는 왠지 모르게 입을 다물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 같은 폐인들인 줄 알았는데, 정말로 등급이 나누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도 자신과 선율 형은 아무도 따라오지 못하는 최상급 폐인, 썩은물 중의 썩은물, 답도 없는 겜창으로.
게임에 진심이고 스스로 하드 유저라는 자각은 있지만, 뭔가 기분이 묘했다.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랄까.
그런데 그때, 형이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그건 너희가 게임을 제대로 못 하는 거지. 우리는 효율이 높을 뿐이야. 같은 시간을 사용하는데 왜 똑같이 못 할까? 난 그게 더 이해가 안 가는데.”
“…….”
“…….”
제대로 한 방 먹은 팀원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주하는 그제야 속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이상한 프레임 씌우지 말고 너희나 더 열심히 해. 여태 업적 100%도 못 하는 게 말이 돼? 다음 주까지 지역 하나는 무조건 100% 채워.”
“으악! 대장님! 그건 너무 빡센데요?”
“다음 패치 얼마 안 남았는데 그럼 언제 하려고? 퍼클 안 할 거야? 딜 1% 모자라서, 피 100 모자라서 못 잡으면 억울하지 않겠어?”
“큭, 그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