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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러 줍는 힐러-111화 (111/130)

111화

나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형이 입술을 뻐끔거렸다. 열렸다 닫히길 반복하는 입술을 쳐다보고 있노라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입술을 내민 채 뽀뽀해 달라고 조르는 모습이 이렇게까지 귀여울 줄이야.

결국 주하는 먼저 다가가 입을 맞췄다. 가볍게 입술을 찍어 누르자 쪽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선율의 올라가는 입꼬리를 느끼며 주하도 미소를 그렸다. 그런데 갑자기 허리 안쪽으로 뜨거운 손이 침범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맨살을 쓸어올리는 손길에 주하는 펄쩍 뛰었다.

“형!”

“어른이면 어른답게 스킨십을 해야지.”

“아니! 난, 아직……!”

“주하야, 그거 알아?”

다리 위를 벗어나려는 주하를 꽉 끌어안은 선율은 그의 어깨에 턱을 기대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요즘엔 몸의 상성이 맞는지 확인부터 하고 사귄대. 그렇게 보면 우리는 좀 늦은 감이 있는 것 같지?”

“뭐? 무슨 헛소리를…….”

“그러니까 너도 이제 적응하는 게 좋지 않을까? 나도 내 거 마음대로 만지고 싶어.”

“아, 형!”

“아니면, 바로 침대로 갈까?”

침대?! 주하는 기겁하며 선율을 꽉 붙들었다. 좋다는 감정을 자각하고 키스하는 것까지는 상상해 봤지만, 그 이상은 아직 생각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는 게, 첫 연애에다가 그 상대가 남자니까!!

“형! 처, 천천히! 지금은 안 돼!”

“왜?”

“나, 나. 아무것도 모르고. 또 마음의 준비도 아직은…….”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겠지만, 당장은 무리였다. 다른 이들이 어떻게 사귄다고 한들 그거랑 우리 연애랑은 전혀 상관없지 않던가.

“공략이랑 똑같아. 아무리 설명 여러 번 들어 봤자 직접 경험하는 것만 못하다고. 오히려 정보만 많으면 더 무섭기만 할걸?”

“무, 섭다고?”

“아……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 같은 거랄까.”

주하는 짧게나마 선율이 아차 하는 모습을 보았다. 금세 평정을 되찾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의구심을 키웠다. 주하의 눈이 가느스름하게 변했다.

“공략은 게임이고, 우리는 연애니까 서로 동의해야지 않아?”

“……기분 좋게 해 줄게.”

“지금은 아니야, 나중에.”

“주하야아.”

“안 돼. 이건 졸라도 절대 안 돼.”

내가 굳이 남의 속도에 맞추어 연애할 이유는 없었다. 적어도 제가 준비됐을 때, 서로가 원할 때 해야 하는 게 옳았다. 고지식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선율 형이 막무가내로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랄까. 말은 저렇게 해도 지켜야 할 선이 어디인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다.

“……꼬실 수 있었는데.”

“머리 쓰지 마. 자꾸 그러면 아예 안 한다?”

“…….”

전과 달리 축 처진 채로 기대 오는 선율을, 주하는 가볍게 끌어안았다. 저 또한 이렇게 강하게 나갔지만, 언제까지 이럴 수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저만 하더라도 사귀기 전에 키스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좋아하는 사람과 닿고 싶은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자세한 정보를 알아봐야겠다.

‘솔직히 조금, 궁금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고민을 하면서 선율의 머리를 쓰다듬던 주하는 목덜미에 닿는 숨결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뒤늦게 그의 얼굴을 밀어내자 아쉬워하는 낯과 마주쳤다.

하여튼 방심할 수 없다니까.

주하는 또다시 달라붙으려는 선율에게서 벗어나고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숙취 해소 음료를 마신 게 이제야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슬슬 게임 하러 가자.”

“……게임 하기 싫은 날이 올 줄이야.”

“안 가면 나 혼자 해?”

“아뇨, 주인님이 가시는데 힐 노예 따위가 어떻게…….”

“술 취해서 한 말 중에 그게 가장 잘한 거 같아.”

“…….”

주하는 할 말을 잃은 선율을 보며 씨익 웃었다. 드디어 그동안 쌓여 있던 딜 노예의 한을 풀었다.

게임에서 힐러가 황족이라고 하지만, 그건 파티를 구할 때뿐이었다. 던전에 들어가면 가장 갈리는 건 황족으로 떠받들어졌던 그들이다. 누군가 싼 똥을 치우면서 파티를 안정적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힐러들은 본인들을 힐 노예라 칭하며 서러워했다. 모실 때만 극진하지, 실제 플레이로 들어가면 한계를 시험당한다면서 말이다.

선율 형은 힐러이긴 하지만, 공대장이기도 하고 또 팀원들이 알아서 잘하니까 상대적으로 여유롭게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가끔은 막공에 끌고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상위 0.001%의 서민 체험이라. 은근히 끌리네?’

막공이 어떤 곳인지, 형에게 제대로 알려 주고 싶었다. 언젠가는 꼭 데려가야겠다며 주하는 굳게 다짐했다.

어쨌든 그건 나중의 일이고, 당장은 PC방으로 가야 했다.

“일단 나 집에 들러서 씻고 옷 좀 갈아입을게.”

“집엔 왜?”

주하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핸드폰을 챙기다가 멈칫했다. 슬쩍 고개를 들자 의아해하는 선율 형이 보였다.

“PC방 안 가?”

“이제 안 갈 건데.”

“……왜?”

자리에서 일어난 선율은 주하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향했다. 닫혀 있는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그는 주하가 방 안을 볼 수 있도록 몸을 틀었다. 그러자 방의 전경이 한눈에 보였다.

“어?”

“이제 여기서 하면 돼.”

막 세팅을 마친 듯한 신형 컴퓨터 두 대가 화려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분명 PC방 가서 게임 하는 게 익숙하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집에서는 안 한다고…….

주하의 생각을 읽었는지 선율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저번에 PC방은 싫다며. 집에서 하는 게 좋다고 그래서 미리 준비해 뒀어. 너랑 같이하려고.”

“……이걸?”

“응.”

어쩌면 선율 형은 이렇게 될 거란 걸 확신하고 있었나 보다. 커플로 맞춘 전자기기들을 보고 있자니 조금은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제가 했던 고민이 부질없어 보여서.

멍하니 컴퓨터 방을 보고 있는데, 형이 저를 끌고는 욕실 앞까지 데려다 놓았다. 왜 그러냐고 눈빛으로 묻자 그가 말했다.

“옷 줄 테니까 씻고 나오면 돼.”

“…….”

“자, 자.”

굳어 있는 등을 떠밀어 욕실로 밀어 넣은 선율은 문손잡이를 잡은 채 상큼하게 말했다.

“칫솔은 오른쪽에 있는 거 쓰면 되고, 타월은 욕실 장에서 꺼내면 돼. 그럼, 천천히 하고 나와.”

즐거워하는 낯이 욕실 문 너머로 사라졌다. 탁, 문이 닫히고 나서도 주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 문만 쳐다보던 그는 바람 빠진 웃음을 뱉어냈다.

“하…….”

완전히 말린 것 같았다. 왠지 오늘 처음 온 선율 형의 집이, 앞으로는 익숙해질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내 집보다 이곳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게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예감이.

주하는 선율이 미리 준비해 둔 두 개의 칫솔을 보며 얼굴을 길게 쓸어내렸다. 의도한 바가 너무 명확해서 오히려 반항할 의지를 잃어버렸다.

역시 선율 형은 저로선 이길 수 없는 남자였다.

한숨만 깊어져 갔다.

***

자진신고가 길드를 바꾸고 일주일이 지났다.

녀석들이 필드에 나오는 족족 리프가 신나게 잡았더니 놈들은 거의 게임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던전으로만은 한계가 있고, 평판 작업 또한 불가능하다 보니 대부분의 일반 유저들은 모두 떨어져 나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천상검과 그 무리도 보이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 그들을 볼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사게에서 핫하던 천상검의 글이 사라져 버렸다. 벌꿀오소리가 올린 글에 단 댓글도 삭제되었고, 다른 흔적들도 남아 있는 건 없었다.

급기야 일주일이 지났을 때는 천상검과 그 무리의 캐릭터 정보도 삭제되고 없었다. 그렇다 보니 그들을 두둔하던 유저들이 제대로 화가 나 버렸다.

거짓말을 들키기라도 한 사람처럼 사라졌기 때문이다. 본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렇게 도망치진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 녀석들을 자신들이 믿고 있었다니. 당연히 놀아났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화가 난 이들은 아직도 남아 있는 벌꿀오소리의 글에 천상검이 올렸던 댓글을 스샷으로 남겨 놓았다. 그 댓글 아래에는 천상검과 자진신고를 향한 욕설이 주르륵 이어졌다. 다시 돌아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도 있었고, 조롱하는 글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사라지고 없는 대상에게 향한 관심은 빠르게 식을 수밖에 없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사사게는 다른 사건, 사고로 이야기꽃을 피웠고, 드디어 리프는 평화를 만끽하게 되었다.

[길드] 개인주의: 음... 자진신고 애들이 없으니까 허전하넹 ㅇㅅㅇ

[길드] 일시불: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살살 잡았을 텐데... ㅠ

[길드] 바나나: 그럴 시간이 어디써! 밀린 평판이나 올려ㅋㅋㅋㅋㅋ

[길드] 개인주의: 지금 열씨미 하고 이따구요... 그래도 외로워...ㅠ

[길드] Snow: 누가 보면 애인 기다리는 줄 알겠어ㅋ

[길드] 개인주의: ㅠㅠㅠㅠㅠ... 살그미... 보고십다

[길드] 월차연차휴가: ㅉㅉㅉㅉㅉ 그 녀석만 쫓아다니더니 미운 정이라도 들었냐?

[길드] 개인주의: 사실... 살그미 죽이면 반응이 찰져서 좋았거든여.... 휴.....

[길드] 바나나: ㅋㅋㅋㅋㅋㅋㅋㅋ 위험한 거에 눈 뜬 거 아냐?

[길드] 개인주의: (゚Д゚?) 롸? 위험한 거라녀?

[길드] 지구침략: 나나야......

[길드] 바나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리프 길드원들이 아슬아슬한 수위를 넘나들며 장난치고 있을 때였다. 카젤과 멜로디가 동시에 접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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