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딜러 줍는 힐러-110화 (110/130)

110화

두 사람의 관계는 크게 변했지만, 주하의 숙취는 여전했다. 가볍게 점심을 먹고도 잔상처럼 남아 있는 두통에 주하는 이마를 짚으며 거실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다.

“……생각보다 숙취가 심하네.”

“그렇겠지. 다 섞어 먹었으니까. 이것 좀 마셔.”

선율은 주하에게 숙취 해소 음료를 먹이곤 자신의 허벅지에 주하의 머리를 올려 두었다. 그 후 결 좋은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타박하는 음성과 다르게 손길은 다정하기만 했다.

“소주만 마신 게 아니야?”

“거기 있는 술 종류별로 다 먹었을걸. 맥주도 먹고 과일주도 먹고 막걸리도 먹고. 나중엔 신서영이 바에 가자고 난리를 쳤어. 넌 좋다고 고개 끄덕이고.”

주하는 미간을 찡그리며 생각했다. 신, 서영이 누구더라? 바나나 누나거나 눈 누나일 텐데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흐릿하니 너무나 답답했다.

“……누나들 이름이, 뭐였지?”

끙끙거리며 두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려 노력하는 주하를 보며 선율은 작게 혀를 찼다.

“너 앞으로 나 없는 데서 술 마시지 마. 술 마시면 필름 끊기는 애인이라니……. 벌써부터 걱정이다, 진짜.”

“…….”

주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곤 선율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엄한 표정을 지으며 알겠냐고 묻고 있었다. 분명 혼나고 있는데 혼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보단 아무렇지 않게 애인이라 칭하면서 걱정하는 모습에 심장이 간질거렸다.

“대답 안 해?”

“……형.”

주하는 몸을 돌려 선율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늘씬하지만 탄탄한 근육이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이러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가 선율 형의 애인이라니.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꿈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만약 꿈이라면 깨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왜?”

조금은 가라앉은 목소리에 주하는 선율의 배에 얼굴을 묻었다.

“형은, 언제부터였어?”

궁금하다. 형은 언제부터 나를 좋아했는지.

자신은 가랑비에 옷 젖는 것처럼, 형과 함께하면서 조금씩 스며들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신경 쓰였고 눈을 뗄 수 없었으며, 그런 제가 이상해서 경계하다 보니 오히려 제대로 빠져 버렸다.

1과 0으로 이루어진 네트워크상의 게임이라고 해도 그곳 또한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슬픔과 기쁨, 고난과 즐거움을 나눌 수 있고, 함께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그런 세계. 얼굴만 모른다 뿐이지 일상의 대부분을 같이 하는 곳이었다.

물론 형과는 게임 이상으로 많은 것을 함께하긴 했지만 말이다. 눈을 뜨고 감는 그 시간마저도 언제나 선율 형이 있었다.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주하는 대답이 없는 선율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혹시 당혹스러워하는 건 아닐까 했지만, 다행히 그는 다정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얼굴로 올라오는 열기를 느끼며 조용히 시선을 맞추자 그가 조심스럽게 볼을 쓰다듬는다.

“글쎄, 딱 집어서 언제라고 말은 못 하겠는데.”

“……그래?”

“그래도 너보단 내가 먼저였을걸.”

저도 왠지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형을 보며 자신이 오해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으니까 말이다.

“솔직히 처음엔 능력 좋은 사람이 팀원으로 왔으면 좋겠다, 정도의 관심이었어. 성격 좋고 착하다고 하니까 팀원들이랑도 문제없을 것 같았고. 그런데 실제로 만나 보니까, 내가 생각했던 카젤이 아니더라?”

그간 어떤 이미지였길래 그러지? 성격 좋고 착하다는 소문이 어디서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피곤함을 느끼기 싫어하는 것뿐이다.

“어떻게 생각했길래?”

“음, 사람들한테 잘 휘둘리는 줏대 없는 사람? 거기에 착하기만 하다면 재미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와……, 막말한다.”

“그럴 줄 알았다는 거지, 실제론 아니라니까. 오해하면 안 돼.”

“아무튼, 그래서?”

“그런데 악탑을 같이 돌다 보니까 생각했던 거랑 다른 거야. 눈썰미 있고 실력 좋은 건 인정, 그런데 황금 게이트 안 나온다고 그 정도로 집착할 줄은 몰랐어. 여기서부터 뭔가 어긋난 거지. 상상 속에 있던 사람은 이런 성격이 아니었거든.”

주하는 검은 게이트만 열던 그때를 떠올리며 미간을 찡그렸다. 너무 억울하고 믿기지 않아서 반쯤 정신이 나가 있던 날이었다. 그때 선율 형이 은근히 놀리기도 했었지. 다시 생각해도 죄악의 탑은 최악이었다.

“거기다 공략도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게 의외였어. 뭔가 수동적인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그래서 1차 확인은 끝났으니까, 2차로 던전에서도 지켜보자 했지. 이때 자진신고 녀석들이 너 빼고 던전 가는 걸 발견해서 바로 물어본 거야. 타이밍이 좋았어.”

“그날 테스트한 거구나.”

“2인이랑 파티는 또 다르니까.”

여기까지는 게이머 입장에서 충분히 이해 가는 내용이었다. 기본적인 확인 절차는 꼭 필요할 테니까 말이다.

“그다음엔?”

“그다음엔…… 파티하고 나서였나? 막내들이랑 너랑 대화하는 거 보니까 범상치 않은 거야. 웬만해선 그 녀석들한테 다들 동화되거든. 아니면 적응을 아예 못 하거나. 그런데 완전히 가지고 놀더라? 거기다 나까지 저격하고.”

“…….”

“근데 또 착하고 순한 구석이 보여서 도무지 카젤이란 사람을 정의 내릴 수가 없는 거야. 대체 뭐 하는 사람인가 싶다가도 나도 모르게 웃고 있더라. 그때가 처음이었어, 누군가랑 함께하고 싶어진 게.”

주하는 말없이 선율을 응시했다. 저를 만나고 일어났던 일을 하나씩 설명하는 그는 왠지 즐거워 보였다.

“PC방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 기억하지?”

주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선율은 그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을 이었다.

“그 이후로 게임에서 널 볼 때마다 계속 생각나더라. 웃으면 어떤 얼굴을 할까, 친해지면 어떤 목소리로 날 부를까, 나중에 내가 멜로디라는 걸 알게 됐을 땐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어느 순간 게임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계속 생각하고 있더라. 잠에서 깨어났을 때도, 운동하고 있을 때도, 잠들기 전에도.”

선율은 조금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주하를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너를 떠올리면서 대화했던 내용을 곱씹고 있는데 우연히 거울을 봤어.”

“…….”

“내 표정을 보니까 빼도 박도 못하고 인정하게 되더라. 나도 내가 이렇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인 줄 몰랐거든.”

커다란 손이 조심스럽게 주하를 들어 올려 끌어안았다. 차마 선율의 허벅지에 앉을 순 없어서 주하는 소파에 두 무릎을 꿇은 채로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가슴팍에 기대 오는 선율의 얼굴을 보며 주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치대셨습니까?”

“꼬시려고 엄청나게 노력했지.”

그렇게 티를 냈으니 아무리 둔한 저라고 해도 눈치챈 것일 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제가 관심이 없었다면 분명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일방적으로 신호를 보낸다고 해도 상대방이 반응 없으면 흐지부지될 테니까.

주하는 선율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어 버렸다. 이제야 이렇게 대화하고 알게 되었지만, 모를 땐 어찌나 불안하던지. 고백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해도 마냥 즐겁거나 설레진 않았다. 그게 조금은 아쉬워서 조금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확실하게 꼬셨어야지.”

“……거기서 더 어떻게?”

“먼저 고백한다든가?”

“도망의 귀재 강주하 씨께 고백했다가 놀라서 사라지면 누가 보상해 주나?”

“음.”

“이러다 네가 날 피하려는 모습만 봐도 PTSD 오겠어. 그만 좀 도망가, 이제. 우리 주하, 애인 버리고 가는 그런 나쁜 남자 아니지?”

“그을쎄에.”

“자꾸 그러면 도망가지 못하게 다리를 확…… 읍.”

“자자, 진정하시고요.”

주하는 선율이 더 말을 잇지 못하게 그의 뒤통수를 꾹 눌렀다. 잘못된 방향을 바로잡아 주는 것 또한 애인의 의무였다.

“형이 먼저 좋아했다고 해도, 고백은 내가 먼저 했어. 알지? 도망갈 생각이었으면 고백도 안 했을 거란 거.”

“……내가 만나자고 졸라도 싫다고 했으면서.”

짐짓 불만이라는 듯 가슴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주하는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그대로 선율의 정수리에 입술을 꾹 찍어 눌렀다. 이런 모습마저 귀여워 보이다니. 콩깍지가 제대로 씐 것 같다.

“그때는 좀 혼란스러울 때였어.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한 관계가 아닌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피하려고 했잖아. 내가 괜히 만나자고 그랬겠어? 네가 흔들리는 게 보이는데 계속 도망가려고만 하니까 안 되겠다 싶어서 그랬지. 확실하게 꼬시려고 했는데 철벽에 밀려서…….”

“예, 예. 제가 다 잘못했네요.”

다시 얼굴을 꽉 끌어안자 이번엔 마주 안아 왔다. 그런데 어찌나 세게 껴안는지 숨쉬기가 힘들었다.

주하는 힘 좀 풀라며 선율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자 선율이 기어코 주하의 허리를 끌어 내리고는 자기 다리 위에 앉혔다. 원하는 걸 이루어 놓고도 선율의 얼굴엔 퉁명스러움이 가득했다.

“표정이 왜 그래?”

“……왠지 유치해진 기분이야.”

“형 원래 유치했어.”

“내가 언제?”

“약한 척했을 때부터?”

“그건 유치한 게 아니라 뻔뻔한 거지.”

“……잘 알고 있네?”

주하는 얄미운 선율의 볼을 두 손으로 꽉 눌렀다. 얼굴이 눌리고 입술이 살짝 튀어나왔음에도 그의 미모는 바래지 않았다.

주하는 문득 자신에게 얼빠 기질이 있었는지 속으로 따져 보았다. 얼굴만 봐도 마음이 사르르 풀리는 게 맞는 건가 싶어서. 다른 이들에게는 안 그랬던 걸 보면 아무래도 선율 형만 예외인 듯싶다. 정신 꽉 붙잡지 않으면 뭐든 다 오케이 할 것만 같으니까 조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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