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주하는 뒤늦게 깜짝 놀라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핑 도는 어지러움에 다시 쓰러지려 하자 단단한 팔이 어깨를 감싸며 지탱해 주었다.
“마음껏 마시라고 했더니 그렇게까지 퍼부을 줄이야.”
“……형?”
“숙취가 심한가 보네?”
“아, 으, 머리 아파.”
“이것 좀 마셔.”
침대에 걸터앉은 선율은 주하의 입에 컵을 대 주며 조금씩 기울여 주었다. 입 안으로 들어오는 차갑고 달짝지근한 꿀물이 반가웠다. 한 잔을 모두 비운 주하는 선율에게 기대며 물었다.
“지금…… 몇 시야?”
“오전 11시.”
늦은 오후까지 쓰러져 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멍하니 있던 주하는 조금 정신이 들자 눈동자를 굴렸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짙은 남색 벽지와 활짝 열려 있는 암막 커튼이었다. 그 뒤에는 커다란 창문에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고 침대 옆에는 작은 사이드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전체적으로 취침만을 위한 공간처럼 보였다.
주하는 쾌적하고 시원한 공기를 느끼며 제가 기대고 있는 남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깨를 감쌌던 손은 언제 허리로 이동했는지 단단하게 붙잡고 있었다. 몸이 너무 무거워서 놀랄 힘도 없었다.
그렇게 얌전히 기댄 채로 주하가 물었다.
“여기, 형…… 집이야?”
“아니, 힐 노예 집인데.”
“무슨…… 소리야?”
주하의 반응에 무언가 깨달았는지 선율의 낯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받치고 있던 허리를 꽉 끌어안은 그가 주하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물었다.
“설마, 기억 안 나?”
“…….”
주하는 입을 달싹거리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한참 그렇게 침묵하자 선율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마지막 기억이 어디야?”
“……그게.”
주하는 머뭇거렸다. 아무래도 제가 제대로 사고 하나 친 거 같은데,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대체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기억나는 대로 말해 봐, 빨리.”
“그, 누나들이랑 만난…… 거?”
“만난 다음은?”
“술 마신…… 거?”
그다음은 암전이다. 빛이 들지 않을 정도로 새카맣다. 누군가 가위로 그때부터 깨어날 때까지 싹둑 자른 것인 양.
“……미안, 하나도 기억이 안 나.”
“…….”
“혹시…… 내가 무슨 짓 했어?”
주하는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선율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잔뜩 토라진 어린아이처럼 불만스럽게 노려보는 선율을 보며 주하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 말랑말랑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선율의 눈이 가느스름하게 변했다.
“태평한 생각이나 하고 있고. 강주하, 완전 나쁜 남자였네.”
“아니…… 기억이 안 나니까. 무슨 일인데? 말해 줘.”
“듣고 싶어?”
“좀, 불안하긴 한데.”
그래도 알아야지 않을까?
주하는 욱신거리는 머리를 손끝으로 꾹꾹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피하고 싶어도 언젠간 제 발목을 붙잡을 것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지금 당장 현실을 마주하는 게 나았다.
선율은 반 포기 상태의 주하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주하가 누워 있는 침대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주하는 뭐 하는 거냐며 눈으로 물었지만, 선율은 뻔뻔함을 장착한 후 지난밤 있었던 일을 꺼내기 시작했다.
“네가 내 욕 엄청 했어.”
“…….”
“힐 노예 주제에 딜러님 부려 먹는다고.”
“……내가?”
“네, 주인님.”
주하는 얼떨떨해하며 선율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쪽 팔로 턱을 괸 채 반쯤 누워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손을 뻗어 제 어깨를 밀더니 완전히 눕혀 버렸다. 멍하니 바라보자 그가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사람을 이리 들었다, 저리 들었다. 아주 마음대로 쥐고 흔든다면서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하던데. 맨날 엉뚱한 말만 해서 이젠 내가 무슨 말만 하면 걱정이 든다고.”
“…….”
“거기다 내 인성을 숨기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냐면서 엄청나게 토로하더라.”
기어코 일을 저질렀구나. 주하는 선율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쪽팔리다 못해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아서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고백한다고 해 놓고 앞에서 욕이나 했다고?
그동안의 일이 마냥 아름답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싫었던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런 의뭉스러운 행동들 때문에 선율 형을 더 생각하게 되었다.
왜 저렇게 나올까, 왜 나한테 이러지? 이런 사소한 의문들이 겹겹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짓궂은 장난을 쳐도 기저엔 다정함이 깔려 있었고, 다른 이들보다 제게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저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후의 일은 죄다 잘라 놓고 욕만 열심히 늘어놓았다니. 세상에 이런 일이, 맙소사. 제 행동이 이다지도 경악스러울 수 없었다.
“더 있는데 다 들어야지, 주하야.”
“……또 있다고?”
거기다 또 다른 짓도 했단다. 양파도 아니고 까도 까도 계속 나오는 제 흑역사에 주하는 침음을 삼켰다.
“이건 얼굴 보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아니, 그냥…… 이대로 말해 줘.”
“그래?”
정말, 차마. 차마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선율이 입을 열자마자 주하는 쪽팔림도 잊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내 얼굴을 양손으로 딱 붙잡고, ‘그 얼굴로 생글생글 웃지 마’라고 했어. 이상하다고.”
“뭐?”
부릅뜬 눈이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빠르게 깜박였다. 이놈의 입이 미쳤나? 주하는 제가 한 일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예쁘다고 한 게 아니라 이상하다고 웃지 말라고 했다니. 정신이 나간 게 아니라면 절대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이 얼굴을, 이 미모를, 어떻게 이상하다고 깎아내릴 수가 있는 거지?
“내가 진짜, 그랬다고?”
“애들도 들었으니까 나중에 물어봐. 엄청나게 좋아하던데. 주하 네가 한 건 할 줄 알았다면서.”
“아, 말도 안 돼.”
뻣뻣하게 세웠던 고개에 힘이 쭉 빠졌다. 베개에 털썩 쓰러지자 선율 형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이상하게 웃었어?”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잠깐, 미쳤나 봐.”
형도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일평생 그런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없을 테니까.
“많이 취한 거 같아서 너 데리고 먼저 나왔어.”
“……죄송합니다.”
“근데 차에서는 자는 거 같더니 집에 와서 침대에 눕히니까 눈을 번쩍 뜨더라?”
“설마, 또 있어?”
주하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선율을 간절하게 쳐다보았다. 제발 잊어 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서. 그러나 선율은 절대 그럴 일 없다는 듯 단호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그러고선 나한테 뭐 했는지 알아?”
“뭘…… 했는데?”
뭐가 더 나올지 알 수 없어서 불안해하며 올려다보고 있는데, 선율 형이 제 머리를 한번 쓸어 넘기더니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점점 가까워져 오는 얼굴에 불안감도 잊고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웃으면 기분이 이상하다면서.”
“…….”
“다른 사람한테는 웃지 말고, 너한테만 웃으라고 하더라. ……그러더니.”
천천히 내려온 얼굴이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다가왔다.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상태로 멈춘 그는 눈을 내리깔았다. 검은 눈동자가 입술에서부터 느릿하게 올라와 코와 콧대를 지나 결국 흔들리는 눈동자와 마주했다.
선율은 보란 듯이 눈을 휘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키스하던데.”
그와 동시에 주하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지그시 눌렀다. 놀라 굳어 있는 주하와 끊임없이 시선을 마주하며, 그는 더 깊숙이 입술을 묻었다.
알싸한 알코올 향과 달짝지근한 꿀맛이 감질나게 느껴졌다. 입술 위를 배회하던 선율은 조심스럽게 주하의 목덜미를 한 손으로 받치며 고개를 틀었다. 그대로 집어삼키듯 베어 물었다.
빈틈없이 맞물린 입술과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얽혔다.
주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에 눈을 질끈 감았다. 술에 취해서 제가 먼저 키스했다니. 기억나지 않는 게 너무나 아쉬웠다. 그때도 지금의 키스와 같은 느낌이었겠지? 달려들었던 저를, 형은 어떻게 받아 주었을까. 너무나 궁금하고 알고 싶지만, 심장이 너무 아플 정도로 뛰어대서 정신이 없었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저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키스가 이어지는 동안 모든 신경이 입술에 몰린 듯한 착각이 들었다. 다른 감각들은 모두 죽고, 오롯이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만 몇 배로 예민해진 것 같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부드러운 감촉과 격정적으로 몰아치는 힘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조금은 다급한 듯, 아직도 부족하다는 듯. 깊게 닿으려 하는 그를 느끼고 있자면 혼자만의 감정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은 용기가 생겼다.
주하는 조심스럽게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자 집요하게 저를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어찌나 짙게 일렁이는지 그 시선에 온몸이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심장 박동이 더욱더 거칠게 반응했다. 저도 모르게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자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이 반으로 접히며 부드러워진다. 잘했다고 칭찬하듯이.
그제야 주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선율도 자신과 같은 감정을 가졌다는 것을. 일방통행이 아닌, 서로가 서로에게 향하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되자 안도감과 동시에 묘한 희열이 느껴졌다. 이런 게 행복인가 싶어 웃음이 입에 걸렸다.
“뭐가 그렇게 좋아.”
주하가 웃는 터라 깊게 닿았던 입술이 떨어졌다. 선율은 아쉬움에 주하의 입술에 계속해서 입을 맞추며 물었다. 붙었다 떨어지는 귀여운 마찰음이 이어졌다.
“음, 그러게. 왜 좋을까.”
“나한테 키스 받아서?”
확신하는 그 말에 주하는 헛웃음을 토해냈다.
“아니.”
단호하게 대답하자 선율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작게 이어지던 입맞춤도 멎었다. 그런 단순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
“날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그와의 첫 키스는 기억나지도 않고, 여전히 술 냄새를 풍기는,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같은 마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주하는 여전히 목을 끌어안고 있는 팔에 힘을 줘 끌어당겼다. 다시 입술이 가볍게 맞닿았다. 불만스러워하던 눈동자는 어느새 몽글몽글한 애정으로 가득 차 저를 보고 있었다.
“맞지?”
이번엔 주하가 확신했다. 그러자 선율은 눈을 휘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당연한걸.”
그와 함께 다시금 서로의 숨결이 얽혔다. 조금 더 깊어지는 키스와 함께, 시간은 하염없이 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