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서로 술잔을 주고받으며 대화하다 보니 어느새 몸이 공중에 붕 떠 있는 기분이었다. 괜히 웃게 되고 마음이 들뜨는 게 느껴졌다.
‘얼마나 먹었지?’
테이블 위를 보니 소주가 다섯 병이 올라와 있었다. 한 병 이상 마셔 본 적 없었는데, 저도 생각보다 술이 그리 약하진 않았나 보다.
주하는 얼굴을 옆으로 튼 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알코올 향이 훅 끼쳤다. 그게 불쾌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즐거웠다.
“……혀엉.”
“응, 왜?”
“나 취해, 보여?”
“음…… 꽤?”
주하가 의아해하며 쳐다보자 선율은 웃음을 흘렸다.
“너 눈동자도 풀려 있고, 발음도 늘어지는데 모르겠어?”
“아닌데, 나 맨정신……인데?”
“그러시구나. 그럼 그렇다고 하자.”
“진짠데.”
“그래, 너 아직 안 취했어.”
“안, 믿는 거 같잖……아.”
불만스레 투덜대자 선율 형이 물 잔을 건넸다. 시원한 물을 한 모금 마시자 속이 화한 게 느껴졌다.
“배부르다고 안주는 하나도 안 먹고 술만 들이켠 강주하 군?”
“으음?”
“속은 괜찮으십니까?”
주하는 위가 있는 부분을 몇 번 꾹 눌러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배부른 것 말고는 쓰리거나 아프지는 않았다. 정신도 멀쩡하고 말도 제대로 하는 것 같은데 왜 취했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혹시 선율 형이 취한 거 아니야? 의심스럽게 쳐다보자 작게 한숨을 내뱉는 모습이 보였다.
매번 저만 한숨이 깊었는데, 선율 형이 그러고 있는 걸 보니 뭔가 색다른 기분이었다. 주하는 눈을 길게 휘며 몸을 바짝 앞으로 기댔다.
“형이 한숨 쉬는 거 처음, 본다. 이젠 내 마음을…… 좀 알려나?”
“……뭐가?”
“한숨, 그거 내 전문이거든.”
“한숨이 왜 네 전문이야?”
“그야…… 형이랑 만나고 나서부터 늘었……으니까?”
매번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사람을 당혹스럽게 하니 한숨이 늘지 않고 배겨? 이러다가 온종일 하게 될지도 모른다며 걱정하던 때도 있었다.
“나 때문에 늘었어? 왜?”
“왜냐니, 당연히…….”
주하는 순간 저를 피곤하게 했던 일, 그리고 두근거리게 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다시 생각해도 의뭉스러운 행동에 이리저리 끌려다닌 기억뿐이라 억울하고 또 억울했다. 지금이라도 하나하나 다 지적하고 왜 그랬냐며 따지고 싶었다.
이때다 싶어 막 설명하려고 하는데, 순간 어디서 많이 들었던 익숙한 음성과 함께 누군가가 다가왔다.
“어라? 이게 누구야. 주선율을 이런 데서 다 보네?”
주하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테이블 옆에 선 여성 두 명이 보였다.
“같이 술 마시는 사람은 누구야? 처음 보는데?”
“어? 설마! 카젤, 아니, 주하 아니야?”
“어라? 정말?”
반가워하는 두 사람을 보며 주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그대로 중얼거렸다.
“나나 누나랑…… 눈 누나?”
“와, 맞네! 주선율이 왜 안 하던 짓 하나 했더니 주하랑 술 마시려고 그랬고만! 치사한 새끼!”
“주하야, 안녕? 우리 합석해도 되지?”
질문은 그저 절차일 뿐이었다. 바나나와 Snow는 날름 자리에 앉으며 소주잔과 술을 더 시키고 있었다. 그 뻔뻔한 모습에 선율은 미간을 찡그렸다.
“허락도 안 했는데 왜 앉아? 다른 데로 가.”
“어, 너한테 안 물어봤고 주하한테 물어봤지요. 그치, 주하야?”
옆에 앉은 바나나가 고개를 돌리며 묻자 주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반대편에 앉아 있던 선율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서영, 나랑 자리 바꿔.”
“왜? 난 주하 옆이 좋은데!”
“부담스러워하잖아. 빨리.”
“쳇.”
입술을 삐죽 내민 바나나, 신서영은 어색하게 웃고 있는 주하를 보곤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자리를 바꾸자마자 술과 잔이 추가되었고, 대부분 비어 있던 그릇도 사라졌다. 신서영은 한두 번 온 것 같지 않은 포스로 새 안주를 주문하곤 주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보다.”
“……네?”
“너를 보니까 그런 거 같아. 응, 아마 확실할 거야.”
“나나 누나?”
“서영 누나라고 해. 밖에서 아이디로 불리면 좀 쪽팔려.”
본인 어깨를 감싸 안으며 몸을 부르르 떤 신서영은 옆에 앉은 Snow의 이름도 알려 주었다.
“얜 아름이야, 권아름.”
“나도 눈 누나라고 부르면 안 돼. 현실에서 일코는 필수인 거 알지?”
“아…… 네.”
머리가 살짝 멍했지만, 주하는 속으로 바나나와 Snow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저도 밖에서 카젤이라고 불리면 왠지 부끄러울 것 같았다.
“너넨 여기 왜 왔어? 자진신고 잡는다더니.”
선율이 짜증을 숨기지 않으며 물었지만, 신서영은 익숙한지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 걔들. 금방 꼬리 접고 나가더라고. 그래서 우리도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하려고 왔지.”
“근성도 없는 것들이야. 다섯 번밖에 못 죽였는데.”
아쉬워하는 두 사람을 보며 주하는 눈을 느리게 깜박이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까 메시지로 봐서는 막내 둘도 자리에 없었을 테고, 리미티드도 술 마시러 간다고 했으니 미접속이었을 것이다. 월차 형도 후배들 만나러 나갔을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우리 쪽 조합은 좋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싸움에서 이긴 거지?
“어떻게 잡았어요? 딜러는…… 나나, 아니, 서영 누나만 있지 않았어요?”
“월차도 있었어. 걘 이미 늦어서 안 나간다고 하더라고. 거기다 벌꿀 님도 재밌겠다며 합류해서 싹 쓸어 버렸어.”
“벌꿀 님 너무 좋아. 일반 창으로 걔들 멘탈 부수는 거 보는데. 와……, 감탄밖에 안 나오더라니까?”
“벌꿀 님이랑은 자주 놀아야겠어. 완전 내 취향이야.”
벌꿀오소리는 알까 모르겠다. 두 명의 팬을 확보했다는 것을. 그뿐만 아니라 막내들도 벌꿀오소리와 친해지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슨생님을 영접해야 한다나 뭐라나.
주하는 벌꿀오소리를 좋아하는 팀원들을 보니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저와 친한 사람들이 서로 마음에 들어 하는 게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쉽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와, 우리 주하 웃는 것도 예쁘네.”
“신서영, 남의 애인한테 우리라는 말 붙이는 매너는 어디서 배웠어?”
“……미친놈이. 실제로 만나면서도 그 콘셉트 유지하냐?”
“너랑은 상관없지.”
“왜 없어! 내 지분도 있다며!”
“원래 소개해 준 사람은 눈치껏 물러나는 거야.”
“불쌍한 주하…… 누나가 미안하다.”
뒤늦게 사과를 건넨 신서영은 주하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얼마나 어이가 없고, 당황했으면 양쪽 볼과 귀까지 붉어졌을까. 반응하는 속도가 느린 걸 보니 술도 꽤 마신 것 같은데.
“그런데 넌 대체 술을 얼마나 먹였길래 애가 이래?”
신서영은 선율을 저격했지만, 대답은 주하에게서 돌아왔다.
“……네? 저, 별로 안 취했는데요.”
“원래 취한 사람은 안 취했다고 해.”
“정말……인데.”
주하는 정신이 말짱한데 자꾸 취한 사람 취급당하니 억울했다. 표정에 그게 드러나니 쳐다보고 있던 세 사람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술 먹으면 솔직해지는 타입인가?”
“아무래도 그래 보이지?”
“평소 모습을 봤어야 했는데 아쉽군.”
신서영은 권아름과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곧바로 입으로 가져가려는데, 어느새 주하가 잔을 들어 올린 게 아닌가.
“굳이 같이 안 마셔도 돼.”
“……그래도요. 처음 만났는데, 그러면 안…… 되죠.”
“어이고, 우리 주하. 25강 깡패인 줄 알았는데 선비 중의 선비였네. 누구한테 술을 배웠길래 이렇게 구식인가?”
“어…… 아버지요.”
“아니, 완전 훌륭한 예절이잖아! 역시 술은 어른한테 배워야지! 암!”
다급히 말을 바꾼 신서영은 주하가 들어 올린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저를 미련하게 보는 선율의 눈빛이 이번만큼은 비수가 되어 돌아왔다. 제길, 구식이라고는 하지 말걸. 하여튼 이놈의 입이 문제였다.
“자자, 우리 앞으로 자주 보자. 주하야.”
신서영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분위기를 바꾸는 데는 술만 한 게 없었다.
첫 잔 이후로 빈 술병은 빠르게 늘어갔다. 주하를 만났다는 반가움에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딱 봐도 취해 보이는데 취하지 않았다며 투덜대는 것도 그렇고,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나른하게 웃는 모습도 그렇고. 평소 카젤의 이미지를 생각해 보면 의외의 모습이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술자리는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나중에 가선 신서영과 권아름도 잔뜩 취해 주하를 데리고 가겠다는 선율을 붙잡기도 했다.
주하에게, 또 선율에게도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시야가 밝아지자마자 천장이 빙글빙글 돌고 속이 울렁거렸다.
주하는 다시 눈을 감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런데 술 냄새에 위장이 반응하는 게 느껴졌다. 다급히 입을 다물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제 분명 술 마시다가 누나들을 만난 거 같은데…….’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을 붙잡으려 뇌에 힘을 줘 보지만, 이상하게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통성명도 했는데 이름이 가물가물하고, 얼굴도 흐릿한 잔상으로만 남아 있었다.
무슨 대화를 했는지, 뭘 먹고 무슨 짓을 했는지 정말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이런 게 필름이 끊긴다는 건가? 엄청난 숙취를 동반하며 기억이 삭제되었다.
‘내가 또 이렇게 마시나 봐라.’
어떻게 마신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여전히 두통과 메스꺼움을 느끼며 끙끙 앓고 있을 때였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고급 원단이 몸을 감싸고 있었고, 그와 반대로 익숙한 향기가 폐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주하는 바스락거리는 무언가를 손에 쥔 채 다시 천천히 눈을 떴다. 어지러움이 동반했지만, 왠지 지금은 눈을 떠야 할 것 같았다.
“…….”
흐릿한 시야 너머 하얗게 쏟아지는 햇빛이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커다란 그림자는…….
“주사의 달인, 강주하 선생님?”
주선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