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나 방금 도착했어.
“집이야?”
—아니, 지하 주차장.
“……운전 중에는 통화하지 말자니까 시동 끄자마자 전화하는구나.”
—운전 중에는 안 했잖아. 그리고 주하야? 말 잘 들었을 땐 칭찬을 해 줘야 다음에도 잘 듣지 않을까? 괜히 삐뚤어지고 싶네?
“아니, 잘했다고. 칭찬하는 거였어.”
—그럼 다정하게 말해 줘.
“난 언제나 형한테 다정하게 말하는데?”
—……그게 다정한 거라고?
선율이 떨떠름해하며 묻자 주하는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잘했어. 운전할 때는 위험하니까 조심해.”
이제야 살살 달래며 말하자 선율 형은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러더니 얕은 한숨을 내쉬곤 중얼거렸다.
—못 이기겠다, 정말.
그건 저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한 번씩 주고받았다는 것에 주하는 만족하기로 했다.
그렇게 통화를 이어 가다 잠이 들 때쯤 되어서야 선율이 잘 자라며 인사했다. 이제는 주하도 밤 인사를 건넬 줄 알았다. 예전과 달리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면,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주하도 선율에게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어두운 새벽, 환하게 빛을 내던 핸드폰이 꺼지자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조용하고 조금은 선선한 밤이었다.
***
이른 아침, 해가 겨우 푸른빛을 내며 떠오르는 시간.
주하는 선율과 만나 수영장으로 향했다. 건물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까지 올라갈 때까지만 해도 주하는 수영을 배운다는 것만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탈의실에 들어가 로커룸 앞에 서자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
“가볍게 샤워하고 수영복 입으면 돼.”
선율 형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두 팔을 교차해 티셔츠를 끌어 올리고 있었다. 또르르 굴러간 눈동자가 볼록 튀어나온 치골과 복근에 닿았다가 다급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주하는 속으로 자신에게 각종 욕을 퍼부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걸 생각하지 못하고 칠렐레팔렐레하며 여기까지 따라왔단 말인가. 수영을 배우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전과 후가 가장 큰 고비였다.
제 감정을 인정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맨몸으로 형과 마주 봐야 한다니.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서 당장은 불가능했다. 더 문제는 아주 잠깐 봤을 뿐인데 탄탄한 근육으로 짜인 상체가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뿐이랴, 시선이 점점 아래로 향하는 게 아무래도 상상력이 도를 넘어서려는 것 같았다.
주하는 로커룸 문을 닫고 잽싸게 화장실로 향하며 선율에게 외쳤다.
“형! 나 화장실 다녀올 테니까 먼저 들어가 있어!”
“뭐?”
황당해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주하는 필사적이었다.
그렇게 비어 있는 화장실 칸에 숨어 들어간 주하는 문을 잠그자마자 벽에 이마를 박았다. 쿵, 소리가 나며 칸막이가 작게 흔들렸다.
“……미치겠네.”
분명 친구들이랑 사우나도 가 봤고, 단체 샤워실에서도 잘만 씻고 나왔었다. 과거엔 그랬다. 그러나 선율 형한테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그냥, 나도 모르게 신경이 쓰였다. 똑같은 남자의 몸이지만, 한 사람에게만 예민해진다. 그의 몸을 보는 것도, 그리고 제 몸을 보이는 것도.
상체까지는 어찌어찌 오케이. 하지만 하체는 안 된다. 고작 수영복 하나 때문에 이러는 자신도 어이가 없지만. 어쩌랴, 그 대상이 좋아하는 사람인데.
주하는 화장실 칸에서 한참 서 있다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나왔다. 샤워장과 탈의실을 확인하니 선율은 이미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제 말을 들어줘서 다행이었다.
부랴부랴 씻고 수영복을 착용했더니 그나마 안도감이 몰려왔다. 주하는 몇 번 심호흡하곤 문을 열었다. 거대한 돔 형태의 천장과 넓은 수영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엄청난 크기라 저도 모르게 감탄하고 있는데, 옆에서 그림자가 드리웠다.
“화장실은 잘 다녀왔어?”
갑작스럽게 나타난 선율에 주하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고개를 들자 형이 팔짱을 낀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마 매번 화장실로 도망가려는 건 아니지?”
“어…… 어?”
“첫날이니까 오늘은 봐주지만, 앞으로는 안 돼. 부끄러워도 익숙해져야지, 언제까지 숨어서 다니려고?”
주하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자 선율이 주하의 손목을 잡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부끄러운 것도 처음뿐이야. 몸 보이는 거에 너무 신경 쓰지 마.”
그 때문은 아니지만, 차마 정정해 줄 용기가 없었다. 주하는 선율에게 끌려가면서도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옷 입었을 때보다 더 넓어 보이는 건 착각인가?
속으로 엄지를 치켜세우곤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움푹 파인 척추 선을 따라 쭉 내려가자 검은색 수영복이 보였다. 더 아래로 내려가 전신을 훑자 순수한 감탄이 흘러나왔다.
탄탄하고 매끈한 근육이 걸을 때마다 움직이는 게 보이는데, 그게 굉장히 멋있었다. 감정이 앞설 때는 몰랐지만, 이렇게 보니 닮고 싶은 체형이었다. 왠지 선율 형의 몸매가 제 워너비가 될 것 같았다.
“형, 운동 얼마나 했어?”
궁금증을 참지 못해 물어보자 선율 형이 뒤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저와 어깨를 나란히 하더니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말한다.
“수영은 어렸을 때부터 했어.”
“학생 때?”
“아니, 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어렸을 땐 이것저것 많이 했는데, 수영이 가장 재미있더라고. 그 후로는 스포츠 쪽은 다 배웠어.”
“……역시 다이아 수저.”
“반박은 못 하겠다.”
선율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주하는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몸이 가능했던 건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해 왔기 때문이다. 하루 이틀 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니 자신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기로 했다.
“이쪽 레인은 내 전용이니까 여기서 하면 돼. ”
“전용도 있어?”
“지금부터 두 시간 동안은. 이 시간엔 강습만 있어서 여기까지 안 써.”
잘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하니 대충 이해하기로 했다.
주하는 선율을 따라 가볍게 준비운동을 하고 드디어 물속으로 들어갔다. 처음엔 차가웠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니 금방 적응되었다.
“그럼 천천히 해 볼까?”
주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에 들어오니 생각보다 괜찮은 느낌이었다. 수영과는 접점이 없어서 그동안은 몰랐는데, 의외로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주하는 선율을 따라 천천히 물속을 걷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처음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정말 기초적인 것부터 했더니 물이랑 금방 친해진 것도 같고, 숨 쉬는 것도 편했다. 형이 수영 강사 자격증이 있다는 게 사실 같았다.
한 시간은 그렇게 배우고 남은 시간은 선율 형이 수영하는 걸 구경했다. 시원하게 물살을 가르며 뻗어 나가는 유려한 몸이 멋있었다. 보기만 해도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몇 번 수영하던 형이 의자에 앉아 있는 저를 손짓하며 불렀다.
“왜?”
“여기 앉아 봐.”
풀 사이드에 걸쳐 앉으라는 말에 그대로 따르자 선율 형이 갑자기 두 다리를 껴안으며 얼굴을 기댔다. 깜짝 놀라 쳐다보자 시선이 마주쳤다.
“바닥은 딱딱해서 싫어.”
“……내가 쿠션이야?”
“쿠션보다 비싼 몸이시지.”
선율 형은 만족스러워하는 얼굴로 웃었다. 누구랑 닿는 거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하더니. 그런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그는 제게 잘도 치대고 있었다. 괜히 열이 오르는 것 같아 형의 얼굴과 제 다리 사이에 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손에 닿은 얼굴이 고양이처럼 쓱 문지른다.
“맨날 혼자 했는데, 같이 있으니까 좋다.”
“……혼자가 편했던 건 아니고?”
“전에는 그랬지. 요즘엔 너랑 계속 붙어 있었더니 없는 게 허전하고 이상해. 계속 같이 있고 싶어.”
이런 행동과 말들이 자꾸만 주하를 흔들었다. 정말 그저 예뻐하는 동생에게 하는 친밀감의 표현일까? 이미 머릿속에선 아니라고, 저와 같을지도 모른다며 조금씩 기대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제 맘도 모른 채 이러는 게 괘씸해서 그의 양 볼을 잡고 쭉 늘렸다. 그러자 놀란 눈동자가 올려다본다.
“아파.”
“아프라고 하는 거야.”
“심술쟁이.”
“형보단 덜하니까 괜찮아.”
주하가 부드러운 볼살을 두어 번 꾹꾹 누르고 손을 떼자 선율이 자신의 볼을 문질렀다. 그러더니 씨익 웃고는 주하의 허리를 감싸고 아래로 끌어 내렸다.
첨벙! 시원한 소리와 함께 물속으로 들어왔다. 대충 높이를 알고 있던 터라 놀라진 않았지만, 허리에 둘린 팔이 신경 쓰였다. 게다가 등허리를 받친 커다란 손이 본인 쪽으로 당기고 있어서 속절없이 끌려가야 했다. 조금은 긴장한 채로 고개를 든 주하는 웃고 있는 선율과 시선이 마주쳤다.
“조금 더 배워 볼래?”
“……형 수영 몇 번 안 했잖아.”
“혼자 하니까 재미없어. 같이 하자.”
선율은 살짝 뒤로 물러나 주하의 두 손을 붙잡았다. 쭉 뻗은 긴 팔에 잠시 시선이 머물렀지만, 이내 다시 주하와 눈을 마주쳤다.
“몸에 힘 빼고 천천히 물 위로 떠올라 봐.”
“이렇게?”
“그 상태서 얼굴은 내리고, 그래. 아까 했던 호흡법 연습해 보자.”
주하는 물속에 얼굴을 넣다 빼며 숨 쉬는 연습을 했다. 그동안 선율이 뒤로 슬슬 움직이고 있던지 주하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다리도 움직이고.”
초급반 수영 강습처럼 주하는 차근차근 배우며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멀지 않은 레인에 있던 다른 초급반 회원들도 수영을 배우고 있었는데, 그들은 주하와 다르게 모두 킥판을 붙잡고 있었다.
선율은 제 손을 꼭 붙잡는 온기를 단단하게 움켜쥐며 주하 몰래 미소를 지었다.
오늘만큼 수영이 좋은 운동임을 느낀 적이 없었다. 전에도 좋았지만, 앞으로도 더 좋아질 것 같았다. 주하도 재미있어하는 것 같으니 조금씩 취미를 공유할 수 있도록 꼬셔 봐야겠다.
다음 계획까지 미리 짜 두며 선율은 주하의 뒷모습을 조용히 감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