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어찌 보면 저 때문에 길드가 해체된 거였다. 수면 위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적어도 당사자들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너한테 작업 걸던 사람은?”
“친구가 스토커로 신고한다고 으름장 놔서 완전히 떨어졌어. 듣기로는 서버 이전했다고 하던데.”
“그러게 왜 남의 사진이랑 연락처를 마음대로 올려.”
“친구도 반성 많이 했어. 미안했는지 한 달 동안 점심이랑 저녁 밥값 걔가 다 내더라. 그리고 게임 접고 공부하다가 자주 만나던 후배랑 연애 시작하던데.”
주하는 그제야 픽 웃었다. 친구 때문에 곤란하긴 했지만, 나중엔 본인이 나서서 수습도 해 주고 미안하다며 골드랑 재료까지 다 넘긴 다음 게임을 접었다. 녀석은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다.
“너도 참 게임 하면서 별일 다 겪었네.”
“……좋은 경험은 아니지.”
“나랑 있으면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안심해.”
“대신 형이 괴롭히고?”
“예뻐하고 있다니까 안 믿네…….”
선율이 짐짓 억울한 낯을 하며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휙휙 바꾸는 표정을 실시간으로 보며 주하는 혀를 찼다.
“가식적인 표정으로 잘도 믿으라고 한다.”
“……이건 진짜 억울한데? 어떻게 해야 믿을 거야?”
“이미 신뢰도가 0입니다.”
두 번 예뻐했다간 평생 딜 노예나 하게 생겼다. 그런 거 말고 현실에서나 좀……. 좀?
“…….”
생각을 이어 가던 주하는 불현듯 떠오른 선율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그는 현실과 게임에서는 조금 달랐다. 실제로 만났을 때 오히려 심술이 없다고 해야 할까? 잘 챙겨 주고 배려해 준다.
‘정말 친한 동생처럼 대하는 건가?’
물론 그렇다고 완전 다른 사람처럼 굴진 않지만.
그래도 이게 평소 모습일 수도 있었다.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의 선율 형이 어떤지 저는 잘 알지 못하니까 말이다.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길드 사람들 정도일까? 같이 만나 보면 반응을 볼 수 있을 텐데…….
주하는 선율을 빤히 응시했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쳐다볼까.”
“……형.”
“응?”
“길드 사람들이랑은 자주 만나?”
“현실에서 만나는 거?”
“어. 저번에 보니까 다들 만나는 거 같던데.”
“자주는 아니고 세 번 정도 봤어. 바나나랑 모기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고.”
“어? 나나 누나랑 모기 형이랑 친구였어?”
예상치 못한 수확이다. 친구가 바로 옆에 있었을 줄이야. 주하가 눈을 반짝이자 선율이 의미심장한 낯으로 물었다.
“왜 이렇게 좋아하지?”
“……좋아하긴, 누가. 신기해서 그렇지.”
“신기해?”
“형한테도 친구가 있구나, 하는 그런?”
주하는 뒤늦게 수습하며 부러 짓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속내를 숨기기 위한 위장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선율이 흐무러지게 웃는 게 아닌가. 지금껏 보지 못한, 완전히 무장 해제되어 말랑말랑하게 느껴지는 표정으로.
그것은 마치 단 한 사람에게만 보여 주는 유일한 애정 같았다.
주하는 갑작스러운 선율의 변화에 불현듯 속에서 어떤 충동이 일었다. 손을 뻗어 얼굴을 붙잡고 그대로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 놀라서 크게 뜬 눈동자를 마주 보고 엉거주춤하게 숙인 고개 뒤로 손을 받쳐 제게로 더 당기고 싶었다. 맞닿은 입술은 분명 부드럽다 못해 뭉개질 정도로 감미로울 것이다. 오랫동안,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닿고 싶었다.
주하는 저도 모르게 꿀꺽, 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흔들리는 새카만 눈동자 속에서 선율이 다정하게 웃었다.
“원하는 대로 해도 돼.”
“…….”
“애들한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물어봐도 되고.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걸 해도 되고.”
선율 형은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그리고 뭐든 다 받아 주겠다는 듯이 굴었다. 움찔거리는 손을 겨우 움켜쥐고 주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대고 있었다.
갑자기 그런 얼굴로 저런 말을 하는 건 반칙 아닌가. 내가 뭘 할 줄 알고.
그런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더는 이 감정이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물러서려 했지만, 그것은 의미 없는 발악일 뿐이었다.
선율 형이 좋아.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어.
가끔은 짓궂고 심술 부리지만, 언제나 저를 있는 그대로 봐 주는 사람이었다. 뭘 하든 지지해 주고, 믿어 주고, 도와주는 사람에게 호감이 생기지 않을 리가 없었다. 거기다 제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하던 모습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처음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거든? 자진신고가 널 놔주면 내가 데려갈 수 있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들은 이야기가 거짓말이길 바라고 있더라. 그게 사실이면 네가 상처받을 테니까. 데리고는 오고 싶은데, 주하 네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기 싫고. 사실이길 바라면서도 사실이 아니길 바랐어. 그동안 내가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는지 알겠어?”
자신의 이득보다 제 아픔을 우선으로 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게임에서 만났지만, 카젤이 아닌 강주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 주지 않았던가.
결국 제가 인정하지 않으려던 것뿐이었지, 이미 마음은 기울어져 있었다.
주하는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당혹스러웠던 감정을 가라앉히고 선율을 응시했다. 주변에서 시끄럽게 흘러나오는 게임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묘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서 조용히 흘렀다.
“…….”
“…….”
그러다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선율을 향해 주하가 먼저 눈이 접힐 만큼 환하게 웃었다. 눈가가 움찔거릴 정도로 반응하는 선율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주하가 말했다.
“허락했으니까 뒤에서 욕해도 뭐라 하지 마.”
“…….”
“집에 가면 나나 누나랑 놀아야지.”
주하는 그 어느 때보다 상쾌해 보였다.
선율은 나붓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 주하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손을 뻗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단정한 옆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아무래도 PC방 에어컨이 고장 난 것 같다.
더위가 전혀 가라앉지 않는 걸 보면.
선율은 눈을 길게 휘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어 버렸다. 조금씩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한여름의 열기는 아직도 건재했다.
***
[귓속말] 카젤: 나나 누나
[귓속말] 바나나: ㅇㅇ?
주하는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라나탈에 접속해 바나나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짧게라도 선율에 관해서 알아야 할 게 있었기 때문이다.
[귓속말] 카젤: 선율 형이랑 실친이라면서요?
[귓속말] 바나나: 걔가 그래?
[귓속말] 카젤: ㅇㅇ;
[귓속말] 바나나: 웬일이짘ㅋㅋㅋ 보통 웬수라고 소개하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대?
[귓속말] 카젤: ㅋㅋㅋㅋ
[귓속말] 바나나: 근데 왜?
[귓속말] 카젤: 그게... 선율 형 평소에는 어떤가 해서요
[귓속말] 바나나: 응? 둘이 만났다며? 보면 알지 않아? 그 자식 누굴 만나든 한결같은 놈인데
[귓속말] 카젤: 한결같아요?
[귓속말] 바나나: ㅇㅇ 한결같이 싸가지 없지
주하는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귓속말] 카젤: 싸가지가 없다는 게 어떤...?
[귓속말] 바나나: 보이는 그대로야
[귓속말] 바나나: 옆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신경도 안 쓰고
[귓속말] 바나나: 말 걸면 대충 대답하거나 무시할 때도 있고
[귓속말] 바나나: 살짝 닿기만 해도 인상 쓰면서 노려보고
[귓속말] 바나나: 웃는 건 손에 꼽을 정도고
[귓속말] 바나나: 와... 이렇게 쓰고 보니까 ㄹㅇ 개노답이네;? 부모님 아니었으면 저런 놈이랑 친구 안 했다ㅡㅡ
바나나 누나가 말하는 선율 형은 제가 본 선율 형과는 완전 달랐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시선이 마주쳤고, 항상 미소 지어 보였다. 스킨십을 싫어한다는 말과 다르게 손을 뻗는 건 물론이고, 제가 건드렸을 때도 인상 한번 쓴 적 없는 사람이었다. 제가 아는 그 선율 형에 관한 이야기가 맞는지 의아하기만 했다.
주하는 바나나가 쓴 글을 다시 한번 읽어 보았다. 그러나 몇 번을 봐도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귓속말] 카젤: 원래 자주 안 웃어요?
[귓속말] 바나나: 예전엔 한 달에 한 번 웃었다고 치면, 요즘엔 하루에 한 번? 너 오고 나서부터 그런 거 같아. 하긴 많이 챙기긴 하더라ㅋㅋ 이건 그나마 좀 낫네ㅋㅋ
[귓속말] 카젤: ...그래요?
[귓속말] 바나나: ㅇㅇ
[귓속말] 카젤: 그럼 닿는 것도 싫어하고?
[귓속말] 바나나: 그건 진짜.... 후
[귓속말] 바나나: ...언제였지? 예전에 신입생 하나가 넘어지면서 그 자식을 붙잡은 적이 있는데 단번에 손을 쳐 내더라? 멍하니 쳐다보니까 남이랑 닿는 거 불쾌하니까 조심하라면서 경고했어. 그 정도로 싫어해ㅋㅋ
[귓속말] 카젤: ......
[귓속말] 바나나: 그나마 길드 애들은 선 잘 지키니까 나름 이뻐하긴 해. 그래도 애들이 어려워하긴 하지만ㅋㅋㅋ 괜히 대장님이라고 부르겠냐
[귓속말] 카젤: 그럼 잘 웃고 스킨십 잘하는 선율 형은 상상이 안 가겠네요?
[귓속말] 바나나: 그건 누군데? 도플갱어? 실존하는 사람임?
[귓속말] 카젤: ㅋㅋ;;;
주하는 어색하게 웃고는 바나나에게 고맙다며 인사했다. 그러곤 이만 자러 간다며 길드에 인사하고 침대에 털썩 누웠다.
바나나가 이야기해 주는 다른 모습의 선율. 저야말로 누구 이야기를 하는 거냐며 묻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그 말이 진짜였으면 좋겠기에. 왠지 저만 특별하게 대하는 것 같아서 괜히 설레었다.
그나마 귀여워한다는 길드원들도 선율 형을 어려워한다고 하니 어쩌면 조금 기대해 봐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때마침 선율 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저 먼저 데려다주고 이제야 집에 도착한 듯싶었다. 목을 한번 가다듬고 전화를 받자 익숙한 음성이 흘러나왔다.